선한목자와 거짓목자의 차이



11절 보십시요.  “나는 선한 목자라.”
이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은 양의 문도 되시고, 양을 돌보는 목자가 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양들의 주인이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의 양 떼를 잘 돌보라는 목자의 사명을 받은 목자이십니다. 목자의 사명을 감당하신 부활의 주님은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장이십니다. 목자장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양떼를 돌보라는 목자의 사명과 직분을 위임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냐?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 그렇다면 내 양을 치라”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 선한목자 예수님, 목자장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목동이요, 작은 목자입니다. 예수님의 양떼를 돌보고 지키라는 사명을 부여 받은 목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목자와 거짓목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말씀을 볼 때 여덟(8) 가지입니다.

1.  첫째, 2절입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돕습니다. 그런 사람이 좋은 목자입니다.
반대로 거짓목자, 나쁜 목자는 양들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인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인기를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양떼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자기를 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양들을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2. 둘째, 1절 입니다. “양의 우리”는 “양들이 편히 쉬는 곳”으로서 “하나님의 목장”이면서도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선한 목자는 자기가 돌보는 양떼를 언제나 자기가 소속된 교회로 인도합니다. 자기가 감당하는 목장의 양들이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고, 교회에 대한 소속감을 가지도록 돕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쁜 목자는 교회보다는 자기 목장을 더 강조하고, 교회와는 별개로 자기가 감당하는 목장에 철옹성을 쌓는 것입니다.

저기 어느 여자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목장의 식구들을 데리고 나가버렸습니다. 나가서 따로 교회를 차렸습니다. 이런 분은 아주 나쁜 목자, 거짓목자에 속합니다. 그런 분은 교회의 양 떼를 훔치는 절도요, 강도인 것입니다. 나가고 싶으면 혼자 나가야지, 하나님의 양떼들을 데리고 나가선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목자가 아니라 절도며 강도인 것입니다.

3. 셋째, 11절에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양떼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 희생하셨습니다. 목숨을 내주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목자의 직분과 교회 리더의 직분이란 높임 받고, 섬김 받고, 군림하는 위치가 아닙니다. 오히려 양들을 위해 섬기며, 봉사하며, 양들을 위해 희생하는 위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고, 양들을 위해 희생할 수 있고 헌신 할수 있어야 합니다. 이 희생과 버림과 헌신이 있어야만 양들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거짓목자는 절대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않습니다. 조금도 양들을 위해 희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양들을 잡아먹고, 이용하려 듭니다. 자신만의 유익을 챙깁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목장과 양들을 이용합니다. 유사시엔 도망갈 궁리를 합니다. 별로 유익이 없으면 언제든지 목장을 내동이 칩니다. 위기시엔 양들이 어찌되든 말든 내 팽개치고 자기 갈 길로 갑니다. 그래서 12절에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양들을 위해 희생해 보았을까요? 목숨을 내놓아 보았을까요? 네. 그렇게 했습니다.
어느 자매가 저에게 전화하기를 “목사님이 재정보증을 서 주어야만 제 아들이 감옥에 가질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순간적으로 고민했습니다. 그 자매의 변호사는 저에게 신중히 생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집을 담보해야 하는 것이기에 잘못 하다간 뺐길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찌할 것인가?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 놓으셨고 희생했는데 난 뭔가?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는 주님의 음성이 저의 마음을 때렸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셨는데… 그래서 주님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보증을 서 주었습니다.

그러면 양들을 위해 희생을 해야하고 맨날 손해만 보는 나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17절 입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생각해주시는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증거로 양들을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은 하늘보좌 위에 높이 올리우심 받았고, 세상 만민의 주가 되셨습니다.
여러분이 양들을 위해 손해를 보고, 피해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희생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이 아닐지라도 반드시 여러분의 후손들에게라도 주실 것입니다. 저는 그 걸 체험했습니다.

4. 넷째, 선한 목자와 거짓 목자의 차이는 10절입니다.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니.”
선한목자는 양들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자유롭고, 은혜스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 잘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거짓 목자는 그 반대입니다. 양들을 구속하고, 구박하고, 이용하고, 억압합니다. 은혜스런 삶을 살지 못하도록 괴롭힙니다.

5. 다섯째, 12절을 보십시요.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선한 목자는 자기 목장에 속한 양만 돌봅니다. 자기 교회에 속한 양만 돌봅니다. 다른 교회에 속한 양은 절대로 손대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짓목자는 다른 교회에 속한 양을 데려다가 칩니다. 다니고 있는 교회가 분명할 때는 절대로 데려와선 안됩니다. 소속이 있음을 알면서도 데려다가 양을 삼으면 그것은 절도요, 강도입니다.
참된 목자는 다른 교회에 잘 있는 양을 절대로 꼬시지 않습니다. 꼬셔 데려가면 그것은 절도요, 강도입니다. “우리 교회로 오라고 하여 꼬득여 데려가는 것”, 이것 때문에 오늘날 교회 목사들 사이가 많이 파손되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교회가 하나로 되는데 장애를 겪고 있습니다. 내 양을 데려갔기에 거기서 오는 불신과 미움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6. 여섯째, 3절 입니다.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14-15절을 보십시요.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중동 지방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은 양과 친하다고 합니다. 양들에게 각자의 이름을 붙여줄 정도입니다. 양들 하나 하나의 특징을 모두 파악하고 있습니다. 양들의 장점과 단점도 다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양들이 어디가 아픈지도 알고, 아프면 치료해줍니다. 이동할 때 그들의 이름을 불러 모이게 합니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선 우리의 이름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우리 각자의 이름을 당신의 손바닥에 새겨 놓고 계십니다. 우리가 울 때 함께 우시고, 우리의 모든 사정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양들과 친해야 합니다. 1:1 인격적인 관계성을 가지며 친밀해야 합니다. 양들의 아픔과 생각까지도 모두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양들이 울면 함께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양들의 형편과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양들과의 대화이며,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대화가 없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 양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수요예배, 성경공부시간, 기도회 시간에 반드시 참여할 수 있길 바랍니다. 일주일에 딱^ 한번 주일예배만 참석하고 가면, 저는 절대로 여러분의 형편과 시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과 친할수도 없고, 여러분의 기도제목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최소한 주중에 갖는 성경공부시간에 참여한다면, 성경공부를 하면서 서로간의 대화를 나누기에 친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일예배만 참석하고, 성경공부시간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저를 나쁜 목자로 만들고, 거짓목자로 만들고, 삯군 목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공부 시간은 성경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여러분을 알고 여러분이 저를 알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 누누이 성경공부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딱 한번 주일예배에 저를 보고만 간다면 저는 여러분을 절대로 모릅니다.

이렇게 볼 때, 숫자 많은 교회에 다니며, 주일날 교회에 나가 하나님의 눈도장이나 찍고, 담임목사와 일대일 관계성이 전혀 없다면, 그런 교회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는 교회생활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바람직한 목자와 양의 관계가 아닌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숫자 적은 우리 교회가 아주 좋은 것입니다.

7. 일곱째, 요한복음 21장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양을 먹이라, 양을 치라” 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돌보면서도, 양을 칠 줄 아는 것입니다. 양을 친다는 것은 양이 양을 낳게 하여 목장을 번성케 하는 것입니다. 목장에 양들이 많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양들이 양을 낳지 못하면 전도하여 양을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나쁜 목자는 그 반대입니다. 안일무사하고, 양을 돌보려고 하지도 않고, 양을 키우지도 않고, 양들을 전도도 안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장이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도 않고, 내버려둡니다. 그렇다면 그런 목자는 아주 나쁜 목자인 것입니다.

8. 여덟째, 추가로 히 13: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각 구역의 목장의 목자들은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고, 교회의 질서를 존중히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목자인 목사에게 순종합니다. 나쁜 목자는 그 반대입니다. 목사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고, 목사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유익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한번은 000 도시에 있는 어느 교회의 집사를 초빙하여 간증집회를 가지려 했습니다. 오시라고 했더니 그 집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 목사님의 승락이 있어야 합니다. 저의 교회 목사님이 허락하시기 전에는 제가 “Yes , No” 가부를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목사님께서 직접 저희 교회 목사님께 허락을 받으십시요. 저희 교회 목사님의 승낙이 있어야만 제가 움직일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 집사님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담임목사의 승락을 받기도 전에 아마 Yes 했을 것입니다. “상관 없어요 목사님이 허락 말든 전 갈 수 있어요.” 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 집사님의 말에 감탄했습니다. 그토록 교회의 권위와 질서를 지키는 집사님이라면, 진짜 선한 목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도 그 집사님 처럼 그러할 수 있길 바랍니다. 담임목사의 허락이 없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무슨 일을 결정하기 전에 담임목사의 의견을 먼저 묻고 결정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담임목사가 가라 하면 가고. 가지 말라고 하면 안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진짜 교회생활이고, 교회 간에 반드시 지켜야 할 질서요, 목시와 성도간에 지켜야 할 예의요, 의무인 것입니다.

( 이 글은 저의 교회의 형편에 맞게 쓴 것 입니다. 졸작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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