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1. 웨스트민스터 총회

 

(1) 회의의 중요성

 

이 회의는 16세기의 영국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 회의는 회의가 만들어 내 놓은 결정들의 범위나 능력에서 보든지 또는 후대에 끼친 영향면에서 보든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회의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최대 약점은 국교개념을 가지고 교리, 예배, 권징을 통일화시켜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준수하도록 한 점이다.

 

그러나 이는 그 시대가 지닌 약점이었다. 영국에서 종교의 자유사상이 뿌리를 내린 것은 많은 실패와 박해를 거친 이후부터이었다.

 

 

(2) 총회소집

 

1642 10 15일에 신학자 회의를 소집시키려 했으나 무산되고 말았다. 1643 71일 웨스트민스트 사원에서 신학자를 중심으로 하여 소집된 총회에는 151명이 참석했다. 30명은 평신도 사정관이었다. 나머지 121명은 각 지역서 선출된 성직자들이었고 대부분 장로교 소속이었다.

 

(3) 대표들의 구성

 

대표들은 회의의 주동역할을 하면서 장로교 사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교회정치와 권징 면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장로 정치가 채택되었다. 가장 빈번하게 열띤 토론이 벌어진것은 교리나 예배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교회정치에 관한 것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대표들은 네 분파로 나누어 정리해 볼수 있다.

 

감독교회파

 

의회는 4명의 고위 성직자, 즉 제임스, 웃서, 브라유리그, 프라디욱스와 5명의 신학박사, 즉, 파트리 박사, 함몬드, 홀스워즈, 세더슨, 몰리를 대표로 선출했다. 그들은, 절대다수가 청교들이라는 점, 대표들이 목사들에 의하여 선출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평신도들이 섞이지 않았다는 점을 공격했다.

 

장로교회파

 

절대 다수의 수자로 총회를 주도해나간 것은 장로교회파였다. 장로교회 정치의 2대원리는 목회자들의 지위를 모두 동등하게 여기는 것과 목사와 평신도로 혼성된 당회에 의한 교회의 자립행정에 기초를 두고 있다.

 

독립교회파

 

장로교회파에서는 이들을 '불만에 가득한 다섯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주동 인물은 토마스 궁원 박사와 필립 나이 목사였다. 이들은 숫자에서 적었지만 영향력이 크고 학문이 깊었으며 성격이 준엄했다.

 

에라스티안파

 

에라스티안파는 교회의 권징에 대해서 국가가 최종 통치권을 행사할 것과 교회를 국가의 한 부속 기관으로 만들 것을 주장했다.

 

 

(4) 주요인물

 

월리암 트위스 박사. - 학식과 사색이 깊은 타락전 예정론 학파의 고위 칼빈주의자로 인정을 받았다.

 

토마스 풀러 - 그의 평이한 설교는 매우 훌륭했고 그의 강한 논변은 다른 사람들을 능가했으며 매우 경건한 삶을 영위했다.

 

찰스 헐 - 그는 온건주의 칼빈주의자였는데 토마스 플러는 그를 평하길, 그는 매우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요, 학자요, 신사이었기 때문에 자기의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과도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할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요한 화이트 - 의견이 분분하여 다툼이 생기려 할 때 농담으로 분위기를 화해시키는데 크게 공헌한사람이다.

 

알로우스미스 - 소요리문답의 주요 작성자여서 빼놓을수 없다.

 

에드문드 카라이 - 대중적인 설교자였고 장로교회파의 지도자였다.

 

요셈 카알리일, 토마스 콩만, 토마스 궁원 박사, 요수아 호일 박사, 죤라이프푸트,스테반 마샬, 필립나이, 허버트 필머,에드워드 레이놀드스, 프렌시스 루스경, 라자루스사만, 요한셀든, 리챠드 신스, 토마스 영

 

 

(5) 총회의 개회

 

1643 7 1일 토요일 웨스트민스터 대교회에서 상하 양 의원들과 많은 회중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회되었다. 모든 대표들은 다음과 같은 서약을 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분명하게 서약하고 맹세하노니 나는 내가 대표로 참석한 이 총회에서 교리적인 문제에 관한 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일치되는 교리만을 주장하겠으나, 권징에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가장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교회의 평화와 유익에 도움이 된다고 믿어지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6) 예루살렘 회관에서의 총회

 

9월말 혹독한 추위가 밀려오자 총회는 웨스트민스터의 부감독 관할 지역에 있는"예루살렘 회관"으로 그 장소를 옮겼다.

 

 

(7) 헌신을 위한 집회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신학적인 논의를 할 때마다 준비 집회를 먼저 가졌고 정기적으로 또는 필요시마다 의회와 공통으로 당시의 청교도적 경건의 특색을 지닌 집회를 가졌다.

 

우리는 청교도 성직자들이 헌신을 위한 집회에서 보여주었던 열심과 인내를 볼 때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3세기까지의 초대교회 역시 카타콤의 어둠속을 지날 때 이방의 마술과 이방의 아름다움을 혐오했었다. 그들은 주님께서 비하하셨을 때의 모습을 강조하였다. 이점에서는 청교도보다 터툴리안이 더 심했다.

 

 

(8) 회의 기간과 폐회

 

1643 7 1일부터 1649 222일까지 약 5 6개월에 걸쳐 1163회 이상의 정규 모임을 가졌다. 1652 325일 마지막으로 해산될 때까지 매주 목요일에 모임을 가졌고, 마지막 모임때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소집하여 장기 의회의 해산과 함께 끝을 맺었다.

 

 

 

2.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

 

 

(1) 39개 신조의 개정

 

10주간 동안을 39개조 신조의 개정작업에 착수했다. 39개 신조 중에서 15개 조항이 개정되거나 성경적 증거들이 보충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영향을 받아가며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이 제정되어 solemn, league,covenont파의 공인을 받았다.

 

(2) 신조의 제정

 

최초로 위원회가 소집된 것은 16448 20일이었다. 164612 4일의 제 752차 회의에서 신앙고백서가 완성되었다. 최초로 인쇄된 것은 1646 12월 또는 1647 1월이었다. 2판은 1647 5월 교회의 권위를 부여받은 내용이 첨가되어 출판되었다.

 

(3) 의회의 역할

 

하원은 '겸손한 충고'의 권고의 글을 1647 5 19일에 시작하여 1648 3 22일에 끝을 맺었다.

 

 

(4) 스코트랜드 총회의 역할

 

이 고백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가장 잘 어울리며 우리 교회의 공인된 교리, 예배, 권징, 정치와 전혀 위배됨이 없다'고 선포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1649 2 7일에 이를 승인했다.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분석

 

 

(1) 시상적 배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화란에서 알마니안주의와 날카로운 대립을 거친 이후의 칼빈주의체계를 성숙한 학문적 형식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그 제정 시기도 고 교회의 감독제도가 시행되던 때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영국 청교도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아일랜드 장로교회의 신조와 매우 흡사하다.

 

 

(2) 의견의 일치

 

그들의 의견일치의 배후에는 세 나라 (영국,스코트랜드, 아일랜드)의 교리적 일치를 추구하려는 기대감도 작용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창조에서 최후심판에 이르는 기독교 신앙의 모든 주요 내용을 33개 장으로 나누어 자연스럽게 취급하고 있다.

 

 

 

(3) 성경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교회의 전통을 성경과 똑같은 신앙의 규범으로 높이는 로마교회사상이나 자연인이 이성의 충족성을 가르치는 합리주의와 맞서서 맨 먼저 성경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바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4) 신론과 기독론

 

모든 정통교회들은 제2장의 '삼위일체에 대하여'와 제 18장의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하여'를 니케아 회의의 삼위일체론과 칼케톤 회의의 기독론에 대한 최고의 해설이라고 본다.

 

 

 

(5) 예정론

 

칼빈주의 예정론은 제한 속죄와 일정한 관계가 있다. 문제는 주로 논리적인 통일성에 있다. 제한 속죄는 속죄의 효과 즉 그 실제 적용범위를 말한것이다. 속죄의 절대적 충족성과 무한한 가치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6) 인간론

 

6장부터 제 9장까지는 보편화된 복음적인 개혁교회의 인간론을 새로운 언약론의 형식으로 나타내고 있다. 언약론에서는 언약을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구분하다.

 

 

 

(7) 구원론

 

10장부터 제 18장까지 복음적인 신앙고백서들 중에서 칭의, 양자됨, 성화 구원적 신앙, 선행, 구원의 확신에 관한 내용을 가장 세련되게 설명하고있다.

 

 

 

(8) 교회론

 

25장과 제 26장의 교회론 부분에서는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에 대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구분방식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선언되었다.

 

 

 

(9) 성례관

 

성례의 일반론특히 제27-29장은 세례와 성찬을 다루는데 있어서 칼빈주의적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 사상은 대륙이나 영국 또는 스코트랜드에 있는 모든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이 가르치는 것과 똑같다.

 

 

 

(10) 주일관

 

21장의 "예배와 안식일"에 관한 내용은 청교도의 주일관이 최초로 신조에 삽입된 것이었다. 1595년 니콜라스 보운드에 의해 체계화시켰다.

 

 

 

4.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

 

 

 

(1) 준비 작업과 채택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신앙고백서와 함께 두 개의 요리문답서도 제정했다. 1647년 가을에 심사와 승인을 받기위해 의회로 보내졌다. 에딘버러 총회는 1648 7 20일 대요리문답을, 7 28일에는 소요리 문답을 각각 승인하면서 두 요리문답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며 공인된 교리, 예배, 권징, 교회정치에 위배된 것이 전혀 없다'고 선언했다.

 

 

 

(2) 일반적 특징

 

두 요리문답은 모두 종래 요리문답의 전통을 탈피했다. 소요리문답에는 '사도들이 제정한 것도 아니요 정경처럼 여길 것도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의 요약이란 점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고 있고 초대교회 때부터 수집되어 왔다는 점에서'라는 말이 첨부되어 있다.

 

 

 

(3) 대요리 문답

 

1647년 한해 동안 내내 총회의 큰 관심거리로 등장하여 문답형식으로 토론되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주석과 보충적인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그러나 십계명에서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과 금하신 것의 종류에만 과도한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의 구체적인 설명을 간과해버린 약점을 지니고 있다.

 

(4) 소요리 문답

 

소요리 문답 작성 위원회는 소집책임도 역시 터크니 박사가 맡고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은 가장 최근까지 전해 내려오는 프로테스탄트의 전형적인 세 요리문답서들 중 하나이다. 소요리문답은 사도신경의 역사적인 순서를 논리적인 구조로 바꾸었다

 

이 소요리문답은 장로교회, 회중교회,침례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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