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새 언약적 순종 (여전히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 마이클 호튼

 

 

여전히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복음을 죄 용서로 축소시킬 때, 우리는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것들의 '높이와 깊이'를 잃어 버린다. 우리는 한편으로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부과되어 있는 요구와 다른 한편 성화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는 자유를 주는 좋은 소식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칭의와 죄 용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이것은 처음 행동과 관계있다고 가정한다. 사람들은 은혜로 구원받는다. 그러나 그 다음 기독교인의 삶은 행위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복을 받기도 하고, 받지 못하기도 하는 문제가 되어 버린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서 이와 비슷한 것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우리가 율법의 제3용도(기독교인의 행동을 위한 가이드로서의 율법)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시점에, 이 문제는 쉽게 반율법주의(우리는 율법에 대한 모든 의무로부터 자유하다는 신념)와 율법주의(율법을 영생을 얻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신념)의 형태로 나타난다. 어떤 기독교인도 기독교인의 삶이 전적으로 어떤 규범도 없이 살아야만 한다고 실제로 믿지는 않는다. 사실 내가 십계명은 신약 시대 신자에게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가르치는 그룹에서 양육받았지만, 일련의 비성경적인 문화적 금기사항이 그 빈자리를 채우고 말았다. 우리는 식사시간에 포도주를 마시는 기독교인은 아마 비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러한 규범들이 사실 십계명이 도덕법을 받아들이는 교회에서 하는 것보다 더욱 '율법적으로' 기능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 모두 기독교인들이 개인과 공동체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어떤 기준을 요구한다는 것을 동의한다면, 이 질문은 이런 규범이 우리에게서 비롯되어야 하는지 혹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 된다. 나는 결혼한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아내가 실제로 좋아하지 않는 선물을 아내를 위해 사는 버릇을 충분히 고치지 못했다. 대신 나는 종종 아내가 가져야 한다고 또는 아내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아내에게 사 줄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반응을 받지 못했을 때, 내 반응은 종종 이렇게 될 것이다. "어때, 만일 당신이 크리스마스나 당신 생일 때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내게 분명히 말했다면, 나는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을 표현하는 데 있어 결코 자발적이면서 창조적이지는 못했을 거야." 물론 어떤 정해진 날에 자발적이면서도 창의적인 방식으로 내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을 표현할 때, 아내의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의 표시다. 자발적이고 창의적으로 하고자하는 욕구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를 고집스럽게 자기마음대로 결정을 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는 우리의 자부심이 실제로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내 아내는 나처럼 죄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더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도덕적 성품을 나타내시는 율법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에 위배되는 어떤 것을 우리에게 명령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명령은 변덕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변하는 본성에 뿌리박은 뜻에서 나온다.

 

만일 이런 논의가 사실이라면 - 즉 하나님은 자신의 율법을 주셨고,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이 불변하는 성품의 표현이며, 신약은 도덕적인 율법을 철회하거나 축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더 확장시키고 심화시킨다는 것 -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도덕법에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순종해야 하는 의무보다 우리의 의무가 더 작지 않다. 이 도덕법은 모세 신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의식법과 시민법과 쉽게 구별될 수 있으며, 여전히 신구약 성도 모두에게 구속력이 있다. 심지어 인류가 창조될 때 양심에 도덕법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도덕법은 모든 인류에게도 구속력이 있다.

 

이 율법의 세 번째 용도를 변호해 왔는데, 이 세 번째 용도에 있어서조차 율법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요컨대, 때로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할 수는 없지만,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우리는 칭의에 있어서는 율법과 복음을 조심스럽게 구별하지만 기독교인의 삶을 다룰 때는 이 둘을 혼동한다. 마치 이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천국 가는 여행길에 율법으로부터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칭의에 있어서처럼 성화에 있어서도 불가능하다. 율법의 여러 가지 용도에 있어 기본적인 기능은 변하지 않는다. 즉 율법은 명령한다. 이것이 율법이 하는 일이다. 율법(하나님의 명령으로 간주되는)은 결코 이 이상을 하지 않는다. 십계명이거나 바울의 성령의 열매에 대한 가르침이거나 간에 이러한 도덕적 지침은 인도하고, 우리의 은혜로운 아버지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알려 줄 수 있지만 결코 우리 마음을 움직이거나 우리 행동에 동기부여를 줄 수는 없다. 이것은 왜 순종이 열매인지를 보여 준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죄 용서만이 아니라 중생과 새로운 순종으로 시작된 완전한 회복임을 상기해 보라.

 

이러한 마음을 다한 신뢰와 순종이 언제나 하나님의 의도였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찰 때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나머지 피조물을 신실하게 다스리도록 하셨다. 우리는 약한 것이 아니라 강하게, 불성실한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악한 것이 아니라 의롭게,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으로 창조되었다. 타락은 파괴와 분리와 분열을 만들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도덕적 본성이나 자신의 형상을 가진 자로서 인간에 대한 기대를 변경시킬 수 없다. 하나님은 완전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며, 다시 온전한 파트너로서 인간과 더불어 교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빛 아래서 우리는 시편 40편에 나오는 시인의 입 속에 담겨진 새 노래를 읽을 수 있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40:6~8).

 

용서는 좋은 것이며, 순종은 더 좋은 것이라는 것은 선지서에서도 마찬가지로 일관되게 반복된다. 그런 다음 히브리서 10장에 오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10).

 

논증은 아주 평이하다. 요점은 옛 언약 예배는 죄를 없이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용서 자체는 새 언약에 약속된 유일한 언약적 복이 아니다. 그런 다음 히브리서 저자는 죄 용서뿐만 아니라 마음에 기록된 율법에 대한 예레미야 31장을 인용하면서 다시 되풀이 한다(히10:15~17).

 

핵심에는 우리 죄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단번에 용서되었을 뿐만 아니라 순종이 최종적으로 우리의 언약적 대표에 의해 단번에 드려졌으며, 그래서 하나님은 마침내 아들 안에 있는 사람들 자신이 향기나는 제물이 되도록 하셨다는 선언이 있다. 말하자면, 이 구절은 하나님이 실제로 원하는 것이 언약 범한 자를 위한 동물 속죄 제물이 아니라 언약에 순종하는 인간 자신이 감사 제물이다. 율법은 어긴 들에 대한 규정은 있지만 모든 죄에 대한 참된 용서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기뻐하시는 감사의 순종적인 을 주지는 못한다. 대신 이스라엘 사람들이 속죄일에 예루살렘 여행을 위해 가족들의 짐을 꾸릴 때마다, 그들이 자신들과 함께 데리고 가는 울고 있는 양은 계속적으로 그들의 죄를 생각나게 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우리 그리고 자신의 뒤에 던져 버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호의를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게다가 하나님은 우리 죄를 묻어 버리고, 우리를 살려 새 생명을 주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는 한 가족을 가지기를 원하신다. 율법은 궁극적으로 용서를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온전하게 하지 못한다(히7:19). 복음은 궁극적인 용서와 완전함 두 가지 모두를 준다. 즉 지금 용서와 영광 중에 우리의 것이 될 완전함의 시작을 준다.

 

그러므로 이러한 선언에는 용서를 넘는 두 종류의 복음에 대한 메시지가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희생은 죽음만이 아니라 삶, 십자가에서 기꺼이 처형당하신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언약적 뜻에 날마다 순종하는 것도 포함된다. 둘째,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우리에게 전가되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안에서 율법이 절대로 이룰 수 없었던 그 순종을 우리 안에서 이룰 수 있다. 하나님이 "첫째 것을 폐하심(옛 언약)"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새 언약)"이다. 더 이상 우는 양과 염소가 없으며, 한 몸 곧 우리 주님의 몸이 새 언약 제사 즉 순종과 죽음의 제사가 준비된다.

 

확실히, 우리 순종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내적인 쇄신과 갱신은 언제나 진행 중이며, 우리가 영화롭게 되었을 때의 마음의 거룩과 삶에는 모자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 이러한 새 언약의 복은 돌이킬 수 없다.

 

이 모든 것 안에 있는 모순은 순종에 근거해 생명을 약속한 바로 그 율법이 죽음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롬7:10). 이것은 완전히 직관에 반대되는 것이다. 모든 종교에서 그리고 우리가 거리에서 만나는 보통사람들에게 있어, 종교의 목적은 사람들을 더 착한 사람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양심에 기록된 율법인 행위 언약을 행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복음은 우리 밖에서 오는 소식이며, 메신저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복음은 우리에게 자연스럽지 않고 완전히 낯설다.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없다. 종교는 속박이다. 그러나 복음은 누군가 우리를 위해 행한 좋은 소식을 전해 준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1~4)

 

하나님 자신은 율법 자체가 결코 할 수 없는 것을 하셨다. 율법은 명령한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새로 회심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숙한 신자를 위한 좋은 소식이다. 존 머리가 말한 것처럼, "율법은 칭의에서 한 것보다 성화에서 더 많은 것을 할 수 없다." 처음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세우는 것보다 우리에게 성화를 위한 힘을 주는 것이 율법의 직무는 아니다(심지어 도덕법의 세 번째 용도에 있어서조차).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 생명과 능력의 유일한 원천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할 때와 동일하다. 즉 율법(그리고 우리의 순종)이 결코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복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은혜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구원받았고, 구원받아가고 있으며, 구원받게 될 자로서 율법(도덕법의 세 번째 용도)에 대해 반응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판결로서의 하나님의 율법은 심판에서 "무죄 선언"을 해 주는 복음과 함께 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면서, 그 동일한 율법은 우리 길을 보여 주고, 하나님의 불변하는 뜻을 계시해 준다.

 

용서는 위대하다. 그러나 순종은 더 위대하다. 속죄제물은 죄 용서를 받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감사제물은 하나님이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이다(직설법)(롬12:1~2).

 

그러므로 복음은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직설법(즉 하나님이 행하신 것에 대한 좋은 소식-하나님의 자비)이 명령법(즉 도덕법의 세 번째 용도로서의 율법)에 동기를 부여한다. 율법 언약에 의해 결정되는 성화를 위해 오직 은혜로 용서와 칭의를 받은 것이 아니다. 모순은 그대로 남는다. 즉 율법 언약은 정죄로 인도하는 반면 약속 언약은 율법이 요구는 하지만 결코 줄 수 없는 바로 그 순종으로 인도한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내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비록 여러분이 눈에 보이는 언약 공동체에 가입되어 있다 할지라도 구원은 여러분의 것이 아니다. 복음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크며,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을 위한 심판은 엄중하다.

 

한 예화가 이 실마리들을 하나로 묶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각종 최신 장비를 가진 신형 돛배를 상상해 보라. 위성기술을 가지고 있는, 이 돛배는 여러분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맞는 계획을 짤 수 있다. 심지어 여러분이 좌표에서 벗어날 때 경보 신호를 울릴 수도 있다. 이제 여러분이 인상적인 장비를 의지한 채, 바다로 나가 돛을 활짝 펴고 전력 항해를 하다 점점 바람이 줄어들게 되어 완전히 고요한 상태가 되었다고 해 보자. 그때 돌풍이 갑자기 동쪽에서 접근하고 있다고 라디오가 경보를 해 준다. 일단의 동료 선원들이 라디오에서 조언을 준다. 그러나 안내 시스템에 의해 제공되는 각종 정보들과 동료들의 유익한 조언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어떤 바람 없이는 안전한 곳으로 방향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여러분은 온갖 좋은 기술을 가지고도 항구로 움직일 수 없다.

 

기독교인의 삶도 종종 이와 같다. 우리는 미끄러지듯이 항구에서 나와 우리 죄가 용서되고, 우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아는 기쁨으로 흥분된 채 전력으로 항해한다. 우리 구주에 대한 새로운 사랑으로 감사로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구주께서 자신의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지정해 놓은 길을 열심히 따라가려 한다. 그러나 넓은 바다로 나갔을 때, 영적인 침체를 만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방향을 제시해 주지만 능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또한 영적인 기술의 장식품은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이 책을 읽거나, 저 세미나에 참석하거나 또는 영적 승리를 위한 이 계획을 따르거나 죄를 극복하기 위한 이런 단계들을 따름으로써 배를 다시 바른 방향으로 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안내자들은 흔히 율법(즉 하나님의 지시)도 아니고 복음(즉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행동)도 아니다. 단지 동료 선원들의 유익한 조언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이 제공하는 조언은 복음보다는 더욱 율법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공을 위한 조건으로서 요구사항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언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여러분이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느낌을 더 깊게 받게 된다. 완전히 지쳐 여러분은 포기하고 다시는 항해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든지 아니면 여러분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신선한 강력한 바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바람은 언제나 구원을 베푸시는 그리스도다. 여러분이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 무엇을 하셨으며, 신실하지 않은 항해자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새로운 세계에 대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듣는 일이다. 이것만이 돛에 바람을 잔뜩 받게 해서 바람이 거세게 불 때, 여러분을 안전하게 항구로 다시 돌아가게 할 수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전 생애는 항해하는 과정으로서 확신을 가지고 넓은 바다에 나갔다가, 점점 지치기도 하고, 또다시 하나님의 소중한 약속으로 다시 우리의 항해를 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어떤 지점에서도 전력 항해를 하고 있거나 물 속에서 죽은 경우는 없으며, 단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로마서 6~8장에서 발견하는 움직임이다. 승리의 직설법으로 시작해서(6:1~11), 도덕적 명령법을 통해(6:12~14), 다시 직설법으로 갔다가(6:15~7:6), 죄와 싸우면서 완전히 지쳤다가(7:7~24), 다시 승리의 직설법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로 돌아갔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희망으로 가는데, 이런 희망을 위해 지금 우리는 성령을 계약금으로 가지고 있다(8:1~39).

 

그러므로 이 모든 것에 있어 결정적인 것은 율법의 세 번째 용도에 있어서조차(명령보다 인도하는), 율법은 율법이 하는 것만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율법이 처음에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했다가(도덕법의 두 번째 용도), 다음으로 그리스도가 다시 우리를 율법으로 인도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성화된다(도덕법의 세 번째 용도)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율법은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최선의 길을 안내해 준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서 행하신 것에 대한 직설법인 선포 없이는, 율법이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것은 절망 아니면 자기 의다.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보다 더 많이 우리는 감사함으로 돛에 바람을 잔뜩 받게 하는 능력을 복음의 덕분으로 돌려야 하고, 그러한 감사가 이루어지는 바른 길을 율법의 덕분으로 돌려야 한다. 시작과 중간과 끝에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1:16).

 

 

마이클 호튼의 '언약신학'(9장 새 언약적 순종- 여전히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에서 발췌, 257~268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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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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