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성전이시다 / 샘 스톰스

 

 

내가 인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예들 중 하나를 들면, 많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참된 성전이시며 구약 시대 성전의 물리적 구조가 예수님 안에서 완벽하게 구현된다고 단언한다. 그런데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종말에 나타날 사건들과 더불어서 또 하나의(제3의) 물리적 성전이 세워지는 것을 승인하고 감독하시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해석 원리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기 위해 이 주제를 잠시 검토하겠다.

 

이 중대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은 구약 성경의 서사(narrative)인데,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광휘, 하나님의 장엄하고 빛나는 영광이 자기 백성 중에서 가시화되는 광경, 곧 하나님의 '쉐키나'를 목격한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광휘와 영광, 즉 '쉐키나'가 없다면 이스라엘 자손은 이방 세계를 특징짓는 어둠 속에 있었을 것이다. 솔로몬 성전이 건축되기 전에, 하나님은 모세가 지은 장막 곧 성막에서 자기 영광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오시고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고 자기 백성을 더불어 만나시려는 곳이 바로 성막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게 할지니라"(출25:8)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곳에서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섰고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셨다"(출33:9).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한"(출40:34) 곳이 바로 성막이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었다(참고. 레9:23; 민14:10).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머무는 동안 성막에 적용된 원리는 솔로몬 성전에 훨씬 잘 적용된다.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 곧 본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로 메어 들였을 때"(대하5:7),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는데, 왜냐하면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했기 때문"(대하5:14).

 

바로 이런 예비적 배경을 바탕으로, 우리는 사도 요한의 다음과 같은 놀라운 선포를 듣는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스케누)는 문자적으로 "장막을 치다" 또는 "천막에 거하다"라는 뜻인데,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가 지은 천막 곧 이동식 성막과 최종적으로 솔로몬 성전을 처소로 삼았던 구약 성경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이 분명하다.

 

사도 요한이 말하려는 요지는 하나님이 이제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되 더 인격적인 방식으로, 곧 육신이 되신 말씀으로(예수님 안에서!)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말씀이신 나사렛 사람 예수는 하나님의 참되고 궁극적인 '쉐키나' 영광, 곧 자기 백성 중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철저하고 완전하게 나타내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거처는 자기 아들의 육신이다! 지금 성육신하신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로 구체화된 대단히 탁월한 영광에 비하면, 과거에 신비로운 구름으로 갈진 천막/성막/성전 안에 간직되었던 그 영광은 단지 예시적으로 깜빡거리는 램프의 불빛 불과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참고. 골1:19).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람의 손으로 지은 천막이나 장막에 거하시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분명한 현존은 대리석과 황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성전에서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 예수님은 인간의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며, 하나님이 그 안에서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자기 장막을 치시는 분이다.

 

요지는 옛 언약에 속한 성전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모형 또는 전조였다는 것이다(모형론에 대해서는 아래서 좀 더 살펴볼 것이다). 성전은 바로 모세 율법이 보관된 장소였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그 율법의 성취이시다. 성전은 계시와 관계의 장소였는데, 하나님은 성전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만나시고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과 만난다. 성전은 제사의 장소였는데, 죄 용서는 성전에서 이루어졌다. 이제 우리는 죄 용서를 위해 예수님께 나아간다(막2:1-12을 보라). 이스라엘 자손은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에서 예배하고 절기를 기념했다. 오늘날 우리는 지리적 장소와 상관없이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참고. 요4:20-26).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만나고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사람의 손으로 지은 특정 건물이나 장막이나 구조물로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간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게리 버지(Garry M. Burge)의 다음 진술은 옳다. "신성한 공간은 더 이상 어떤 장소가 아니라 한 사람에게 있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교회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거하기를 기뻐하시는 성전으로 여겨진다. 여호와 하나님의 '쉐키나'는 이제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영구적으로 능력 있게 깃들인다. 바울은 에베소의 신자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 사실을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이라고 부르는데, "그의 안에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엡2:21-22).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처소는 "예루살렘에 세워진 문자적인 성전도 아니고 단순히 하늘도 아니며, 소아시아에 있는 이방인 신자들이 일부를 이루는 교회다."

 

이 성전의 설립은 계속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프로젝트이며 지속적인 과정이다(또한 엡4:15-16을 보라). 비록 지속적인 "성장'을 경험하는 "건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바울은 우리가 교회를 유기체로 이해하기를 원하는 것이 분명하다. 베드로도 다소 역설적인 어법을 사용해서 신자들을 "살아 있는 돌들"(벧전2:5)이라고 언급한다는 점을 상기하라!

 

바울은 이 진리를 근거로 고린도의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다시 호소한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바울은 성적 순결을 요청하는 대목에서도 다음과 같이 거듭 호소한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또한 이 진리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벧전2:4-10을 보라).

 

우리는 이 모든 논증을 통해 고린도후서 6장 16절 후반부에 나타난 바울의 최종 선포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바울은 이런 논지를 보강하기 위해 장차 올 성전에 대해 예언한 구약 성경의 여러 본문(레26:11-12; 사52:11; 겔11;17, 20:34, 41; 삼하7:14)을 종합하는데, 그중 하나인 에스겔 37장 26-27절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선포하신다.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게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거두절미하고 요지를 말하겠다. 하나님은 자신이 영원히 거하실 종말론적 성전에 대한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시작하여 부활에서 완성함으로써 성취하고 계신데,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점진적으로 세우는 일이 포함된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세워진 문자적이고 물리적인 성전은 어떻게 될까?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이 정하신 구속 목적에서 영적인 중요성을 상실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는 마태복음 23-24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검토해야 한다(나는 이어지는 두 장에서 이에 대해 많이 언급할 것이다).

 

예수님이 유대 백성에 대해 심판하실 때, 성전 건물들은 예수님이 감람산으로 가기 위해 떠나시는 그 순간에 물리적.영적 측면에서 모두 주님께 버림받는다. 예수님은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23:38)고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기를 그친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을 때"(마27:51), 하나님은 성전을 자기 현존으로 축복하거나 성전을 이가봇(영광이 떠났다)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인정하기를 영원히 그만두신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성전에 극적으로 들어가신 것(마21:1-7. 소위 "개선 입성식")과 똑같이 극적으로 예루살렘과 성전을 떠나신다. 한 때 웅장하고 영화로웠던 이 하나님의 집은 이제 이방인들에게 완전히 넘겨진다("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너희에게 버려진 바 되리라"[마23:38]. 강조는 필자의 것임). 에스겔이 본 환상에서 성전을 떠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겔10:18-19, 11:22-23을 보라). 주후 70년에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물리적으로 최종 파괴되는데, 이로써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영적인 유기가 외형적으로 완결된다. 이제 예수님은 성전을 떠나서 결코 되돌아가시지 않는다. 참으로 성전을 떠나 감람산에 앉으시는(마24:3) 예수님의 행동은 에스겔 11장 23절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가운데에서부터 올라가 성읍 동쪽 산에 머무르고."

 

이것은 오늘날 바위 돔 사원이 서 있는 장소 근처인 예루살렘에 세워질 것으로 흔히들 생각하는 미래의 성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성전 건물을 짓고 그 안에서 종교 활동을 재개하는 일도 전적으로 가능하다. 그 일이 가져오게 될 종교적 열광은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함축된 정치적.군사적 파장 또한 명백하다. 이 일이 앞으로 언제 발생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비록 실제로 발생하더라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세우는 일 외에 다른 어떤 종말론적.신학적 의미는 전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현재와 미래에 영원히 거하기를 기뻐하시는 유일한 성전은 예수님과 그분의 영적인 몸인 교회다.

 

하나님이 장차 성전 재건을 승인하시리라고 제한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구속과 관련해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퇴행을 나타내는 터무니없는 발상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태도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를 부인하는 처사가 될 것이며, 그리하여 고린도후서 6장의 이 대목과 다른 곳에서 바울이 명시적으로 단언하는 내용을 모욕하는 처사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후서 6장의 이 구절에서 밝히는 현실적인 주장을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우상 숭배와 관련된 어떤 표현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교회로서 하나님의 현존을 오늘날 세상에 나타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히 또 하나의 문화 단체나 우리 이웃의 "체감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사회봉사 집단"이 아니다. "대신에 교회는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으로서, 예수님 안에서 공통의 신원으로 연합되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다 같이 예배하고 경외하는 일을 중심으로 모이는 '하나님의 가족'이다. 우리의 삶이 그처럼 영광스럽고 고상한 신원을 늘 반영하기를 기원한다.

 

 

샘 스톰스의 [개혁주의 무천년설 옹호]에서 발췌(21-27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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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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