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기도응답이 되지 않는가? / 박신 목사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20)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신자들마저 매번 당혹해지는 일이 있습니다. 때로는 성경의 약속과 현실의 상황이 이율배반적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무엇이든 믿고 구하면 주신다고 약속합니다. 본문도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즉, 무슨 일이든지 쉽게) “예”(즉, 이뤄진다)가 된다고 분명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틀렸든지 우리가 틀렸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틀렸을 리가 없으니까 우리가 틀린 것입니다. 무엇이 틀린 것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시늉만 냄으로써 성경대로 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본문은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가 되지 않는 경우는 신자가 그리스도 밖에 있거나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뜻을 곡해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광의로 해석해선 신자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경우란 없습니다. 구원을 얻은 후로는 그분의 은총과 권능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며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때로 신자가 죄를 범하거나 사단의 유혹에 빠져도 주님은 당신의 때와 방법으로 당신의 품 안으로 되돌려 놓으십니다.

반면에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죄와 시험에 빠지지 않고 성실히 교회 생활을 하는데도 그렇습니다. 단순히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많은 선지자를 통해 메시아를 보내어 죄와 사단과 사망의 멍에에 묶여 있는 죄인들을 구원해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또 정말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까지 해서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 구원 안에 들어온 신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약속하신 모든 것도 아멘으로 화답하여 지키면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생긴다는 것이 본문의 뜻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하나님의 약속을 굳건하게 믿고 기도했으니 당연히 예가 될 것이라고 또 되어야만 한다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말하자면 바울은 실제로 어떻게 아멘으로 화답했는지에 관해선 구체적으로 알아 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요컨대 기도할 때만 그리스도 안에 있지 평상시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따르는 모습과 바울이 따랐던 방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는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었지만 우리는 마찬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같은데도 정말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이 가까스로 예가 되는 까닭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환난 중에 있었음에도 그 환난 중에 주님께 받은 위로로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성도들을 위로해주었습니다.(1:6) 또 성도들을 오직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대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했습니다.(1:12) 인간적 지혜나 욕심으로 성도들을 자기 뜻에 맞추어 조종하려고 한 적이 전혀 없으며 정말 하나님께 받은 은혜만 전해 주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바울 혹은 아볼로 파로 나뉘었지만 바울 자신은 자기편을 만들어 이득 혹은 명성을 얻으려는 욕심이 추호도 없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쓰지 아니”(1:13)했다고 합니다. 말로 가르친 것과 실제 삶이 다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당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먼저 보낸 편지대로 하지 않았다고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비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계획의 변경도 단순히 자기 욕심과 편의대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고 결국은 그분의 은혜를 다 같이 알고 누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될 것이라고 담대하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로서 사나 죽으나 성도들이 영적으로 유익하고 충만해지는 것만으로 자기 자랑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던 자가 새로이 구원을 받고 또 구원 받은 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는 것만이 바울이 취할 성령의 열매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가 노력한 결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가 어떻게 말했습니까?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함이 없노라.”(1;17,18) 의문문을 사용해 부정의 뜻을 강조했습니다. 고린도 교인을 대할 때에 육체를 좇은 적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하기만 간절히 기도했고 또 자기가 전한 것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뿐이었으며 자기 역시 전한 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매사를 그렇게 경영할 때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교회 생활 성실히 하고 또 하나님 약속은 반드시 이뤄질 것을 확실히 믿고 있으니까 단순히 무엇이든 기도하면 다 이뤄지리라고 기대합니다. 바울처럼 사람이나 일을 경영할 때에 주께 대하듯이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미혹된 한 영혼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되살아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라는 모습이 자신의 자랑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일을 위해서만 기도해서, 그것도 억지로 쥐어짜듯 얻어낸 응답이 자랑일 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예가 된다는 뜻은 절대로 단순히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렇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정말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원하는 대로 실제로 살 때에만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이실 만큼 우리를 사랑했던 그 사랑은 결코 철회, 가감, 수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약속이 우리에게 응하느냐 못하느냐는 당신의 사랑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너무나 지당한 이치가 아닙니까?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절대 변화가 없지만 자녀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 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또 부모도 사랑하는 자녀니까 무엇이든지 요구하는 대로 무조건 다 해주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그런 부모라면 참 부모 되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자녀를 완전히 망치려고 작정하지 않는 한 그렇게 못합니다.

반면에 자녀가 부모가 원하는 대로 자랄 때에는 자녀의 소원을 그것도 당신의 뜻에 맞는 일만 선별해서 들어주지 않습니까? 본문 식으로 바꿔서 표현하면, “부모의 약속은 얼마든지 부모의 뜻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자녀는 그 뜻에 맞게 순종하면 부모의 기쁨이 되느니라.” 그런데도 아이는 “나는 부모의 사랑 안에 있으니까 내가 요구하는 것은 얼마든지 예가 된다.”고 착각합니다. 분명 자녀가 부모 사랑 안에 있지만 얼마든지 예는 안 됩니다.

성경이 “그리스도 안에”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사신 삶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오직 자기를 버리고 남을 살리는 삶만 살았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남을 살리는 기도를 하면 얼마든지 예가 됩니다. 그러나 자기를 살리는 기도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맞을 때만 예가 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뜻도 여전히 신자를 세상 앞에 제사장으로 세워서 남을 살리려는 것뿐입니다. 그 일에 필요하다면 신자가 스스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과 상관없이 당신의 궁극적인 계획에 따라 궁핍하게도 혹은 부유하게도 하십니다.

혹시라도 아무리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약속을 믿고 기도했는데도 잘 응답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믿음이나, 정성이나, 열심의 부족을 점검해보기 보다는 지금 기도하는 내용이 남을 살리려는 것에 초점이 있는지부터, 그것도 자기가 죽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면서까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10/5/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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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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