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의 열쇠인 복음 (그레엄 골즈 워디)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것 같더라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5:1-6,9)

 

 

                                                어린 양과 사자

 

묵시는 종교적인 글들을 기록하는 일종의 문체로서 기원전 약 2세기경부터 유대인들 사이에 성행했습니다. 이 묵시의 특성 중 하나는 환상을 본 자가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에게서 그런 계시를 받았는지를 서술하며(묵시는 '계시'를 뜻하는 헬라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또한 두루마리에 써서 계시할 때가 이르기까지 봉해 놓도록 명령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그 두루마리의 공표는 때가 이미 이르렀고 그 비밀이 드러났음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요한계시록 5장에서 바로 이러한 특성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두루마리에는 하나님의 메시지, 즉 그분의 나라에 관한 진리가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펼칠 수 있겠습니까? 요한은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 관한 진리를 펼칠 합당한 자가 없고, 그렇게 되면 두루마리가 봉해진 채로 있게 될 것 같아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 옵니다. 어떤 분이 이기었는데, 그분이 그 두루마리를 펼칠 수 있는 분이라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분은 유다 지파의 사자(the Lion)이시며 다윗 왕가에서 나온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간단한 묘사를 듣자 요한은 엄청난 위엄과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압도되고 맙니다. 여기서 그분은 자신의 칼에 적의 피를 묻힌 채로 싸움터에서 갓 돌아온 전사(戰士)이신 왕(the warror-king)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분은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정복자이십니다. 그래서 그분께 대적하려던 모든 자들은 공포에 질리게 되었고, 결국 패하여 도망쳤습니다. 이처럼 승리를 이루어낸 자신의 능력과 권세로 인하여 그 사자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모든 사람에게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고개를 돌려 그 사자를 보았을 때 그는 그런 영광스럽고 위엄 있는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그가 본 것은 오히려 '마치 죽임을 당한 것 같이' 서 있는 어린 양이었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 묵시의 전형적인 이 수수게끼 같은 표현조차도 동물의 왕인 사자로 묘사된 주님의 이미지(image)를 산산이 부숴 버리는 효과를 증대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것을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우리 손이 미치는 곳에 놓아둔 승리의 표현입니다. 이처럼 요한은 묵시의 이미지를 능숙하게 사용해서 복음의 핵심적인 파라독스(paradox)를 예증합니다. 즉 하나님의 승리는 그분의 아들의 낮아지심과 죽으심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승리하기 위하여 사자는 어린 양의 온유함을 취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로써 이제 그 두루마리는 펼쳐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한 소리가 찬양으로 들려옵니다.

 

당신은 그 두루마리를 취하여 그 인봉들을 떼기에 합당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일찍 죽임을 당하사...(때문입니다)

 

그 어린 양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으로 인하여 이제 하나님의 계시자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제목이 붙은 것(계1:1)은 매우 적절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모든 진리의 열쇠가 곧 이 땅에서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이 사실을 묵시적 어법으로 엮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드러내 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하신 분을 죽임 당한 어린 양이라고 묘사한 것입니다. 그는 이런 어법으로 요한계시록의 중심 사상은 복음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한계시록의 의미를 풀어내려면 오로지 이 땅에서 구원 사역을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참된 말씀이며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도 역시 복음에 대한 해설입니다. 물론 요한계시록이 복음의 어떤 함축적인 의미들을 강조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복음에 관한 책이라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윌콕(Michale Wilcock)은 요한계시록의 기록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다시 말씀과 증언, 즉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메시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머지 않아 영감된 그 밖의 성경책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모임에서 큰 소리로 읽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그가 이미 소유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간추린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리의 패턴(pattern)을 되풀이 하시는 것은 그 때가 마지막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엄청남 권능과 형용할 수 없는 영광을 보이시며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우선 복음 중심 사상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복음은 실제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2천여 년 전에 팔레스타인에 오셔서 그분 자신과 그분의 사역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복음 사건의 효과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에까지 미치게 됩니다. 그러나 효과들 그 자체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은 아닙니다. 따라서 복음의 효과들 또는 열매들과 복음 자체를 구별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거듭남, 믿음, 성화는 복음의 열매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복음의 열매들인] 믿음이나 거듭남 또는 성령을 주심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나의 대속자로서 사시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우리는 구원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조차도 복음은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의 한 열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음을 믿어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이 사실은 복음을 성부 하나님이나 성령님의 사역이라고 못박아 말할 수 없다는 데서 잘 드러납니다. 복음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분 안에서 일어난 완전하고 완성된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우리 안에서 일어난 사역이 아닙니다. 이러한 복음, 이것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근거인 것입니다. 바울의 서신들에서는 이 후자의 사실을 가리켜 종종 의롭게 여김(칭의)이라고 말합니다. 의롭게 여김이란 어떤 사람에게 올바르다 또는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리자이신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가진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공로를 그대로 옮겨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죄인을 의롭게 여기시는 것은 순전히 그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 계신 분이 계시다는 사실에 근거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 죄인이란 믿음을 가진 죄인을 뜻하는데, 그(또는 그녀)는 이땅에 실제로 오셨던 그리스도를 하나님 앞에 서 계신 자신의 대리자로 의뢰하는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인물인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 땅에서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를 위한 실제 대리자이셨다는 이유만으로 지금도 우리의 대리자로서 그곳에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 중심 사상을 말할 때, 그것은 곧 우리 구원의 모든 것이 복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회개시키시고 성화시키셔서 마침내 영화롭게 하시므로, 복음은 진정 하나님의 능력임을 뜻합니다. 또한 그것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시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온 역사와 인간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복음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시작과 계속과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유일의 방편이라는 사실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뽑아 버려야만 할 잘못된 사고는 복음이란 단지 우리를 회개시키는 데 쓰이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생각입니다. 한번은 제가 어떤 선교사의 보고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는 선교지에 파견된 한 목사님이 자기의 교인들에 대해 선교본부에 써 보낸 편지를 보고했는데, 그 내용은 "우리는 이제 복음을 압니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더 확고한 것을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고는 복음을 그리스도인의 체험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영생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보고 일단 우리가 그 관문에 들어선 후에는 우리를 계속 전진시킬 수 있는 어떤 확고한 실재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성화 또는 거룩하게 되는 것 또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장 등을 종종 회개한 후에 도달해야 할 새로운 단계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단계에 이르는 방법들이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온전한 헌신" 또는 "스스로를 비움" 또는 "옛성품을 죽임"으로 그곳에 이를 수 있다고 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극적인 체험을 분명히 경험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서적들과 설교는 "더 깊은 삶으로 나아가는 단계들" 또는 "풍성하고도 승리하는 삶의 열쇠" 등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여기서 저는 그러한 경건에 관한 표현이나 용어들을 흠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문제 삼고 있는 점은 단지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 - 우리를 회개시킨 그 복음 - 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성화에 이르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났음을 뜻한다는 사실입니다.

 

 

                                                  복음 중심 사상

 

또한 우리의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과 연관하여 복음 중심 사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복음 중심 사상은, 신구약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모든 목적의 궁극적 목표는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것이라고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알파와 오메가로서 그리스도의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는 창조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창조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충분히 파악하려면, 창조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구절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요한복음 1:1-2은 우리에게 육신이 되어 나사렛 예수로서 오신 그 말씀이 곧 창조자이셨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1:15-20에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신 그리스도(골1:20)가 곧 창조자이시며 창조의 목적이시며 목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죄가 창조계를 망치자 하나님께서 계획하여 내신 일종의 사후대책이 복음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복음은 창조 이전에 세워진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모든 만물을 궁극적인 목표에 이르게 하려는 분명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는 구약성경의 언약들과 율법의 의미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이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 역사의 진행 과정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언약 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이란 하나님과 그분의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과의 관계의 본질을 밝혀 놓은 일종의 규약인 셈입니다. 그리고 모세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구원 사역으로 수립된 이 언약관계를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신약성경에서는 이 언약을 주제로 삼았으며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이 언약의 성취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탄생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모든 언약의 약속들의 성취로서 묘사됩니다(눅1:46-55, 68-79; 2:29-32을 보십시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율법을 성취하셨다(마5:17)는 것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언약 파트너(covenant partner)로서 [그 언약이 요구하는] 삶을 완전하게 살았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에게 받으신 그분의 세례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는, 인간으로서 취한 선택을 완전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참 아들이시며 사랑하는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이 점과 연관지어서 누가는 계보를 열거하는데(눅3:22-28), 이러한 계보의 열거를 통해서 누가는 "너는 내 아들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알려줍니다. 참 인간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38절의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는 의미는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는 예언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들)'에 대해서 "내가 그것들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왔다"(마5:1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선지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메시아에 관한 어떤 예언들을 성취하러 오셨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포괄적인 것으로서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죄에 대한 심판을 예언한 말씀은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성취됩니다. 그리고 새 언약, 새롭게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들, 사람들 안에 거하실 하나님의 새로운 처소에 관한 모든 약속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이처럼 이 모든 것들은 복음 사건 속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후에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설명할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예언의 약속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예'(yes)가 된다"(고후1:20)는 바울의 확신을 살펴봅시다. 사실 바울은 이러한 확신을 안디옥에서 행한 설교에서 이미 표현하였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노니 곧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킴으로써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그들의 자녀인 우리를 위하여 성취하셨다"(행13:32-33).

 

4.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내게는 산다는 것이 곧 그리스도이다"(빌1:21)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빌립보서 2장에 묘사된 그리스도로서, 육신의 고통을 받으시고 영광된 처소로 올라가 하나님과 더불어 계신 그분입니다(빌2:6-11). 따라서 주님은 곧 복음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로 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원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피조물 간의 참된 관계를 계시하시며 다시 세우심으로써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기 자신 안에서 이 일을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구원 사역을 값없이 선물로 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죄인에게 그 일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그런 죄인은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그러나 죄는 없이 완전하게 순종하심으로써 소유하게 된 똑같은 상태를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골3:4)라는 바울의 표현 외에는 달리 더 잘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삶과 죽음의 결과로써, 그분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심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죄 없는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참되신 언약의 파트너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사랑받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외롭고 거룩하신 분이시며 심판받으신 죄인이시며 새 생명이시며 성령이 총만하신 분이시며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바로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 즉 복음이 존재한다는 사실로 인하여 그리고 오로지 이 사실에서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 동기와 원동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복음의 열매는 바로 글자 그대로 즉 복음에서 나오는 열매인 것입니다. 거듭남, 믿음, 성화, 끝까지 인내함, 이 모두는 복음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더 깊은 헌신"이나 "전적인 헌신"을 이루어 내려고 가하는 율법주의적인 요구들이나 감언이설 또는 위험들은 복음의 은혜에서 벗어날 경우 단지 낙담과 환멸, 배반만을 산출하는 몹쓸 잡초일 뿐입니다.

 

5. 그리스도는 재림의 의미입니다

복음 사건인 그리스도의 초림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의미를 이미 세워놓은 것입니다. 아마도 요한계시록을 곡해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의 관계를 파악하지 못해서 생기는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관계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드리려 합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까닭은 새로운 또는 다른 사역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영광 가운데 다시 돌아오셔서 이미 그분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성취하신 사역을 궁극적으로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그분은 자신의 모든 영광 가운데 오셔서 모든 권세와 권능을 가진 자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자가 지금은 맏음으로 붙잡고 있는 것이 그 때에는 모든 이의 눈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믿는 자가 지금은 믿음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믿는 자의 대리자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그 때에는 믿는 자 안에서 실재로서 완전해질 것입니다. 즉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갖고 있는 신분이 그 때에는 우리들 자신 안에 갖춰져서 실재의 상태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이 자기 사고의 구조로 삼고 있는 초림과 재림 간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고통받는 그리스도와 영광 가운데 임하시는 그리스도 간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어린 양(the Lamb)과 사자(the Lion)와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사자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 중에 나타나실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메시아/왕으로서 지닌 위엄의 상징인 것입니다. 반면에 어린 양은 고난 받으신 나사렛 예수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사자를 보려는 자는 먼저 어린 양 안에서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의 메시아 왕국은 오직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으로만 그 실재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 때문에 높아지셨으므로 여전히 어린 양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림 때에는 그 어린 양으로부터 사자의 위엄이 발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복음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로서는 사자의 영광이 가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오직 믿음만이 복음을 통해서 그 영광을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왕이신 그리스도로 묘사하는 신약성경의 증거는 믿든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성질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사복음서를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관한 기록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의 구원이 그러한 역사적 사건에 달려 있다고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믿도록 확신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믿는 것일 뿐, 그 외의 방법으로는 그런 인식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각각 다르게 반응한 사실이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거짓 선지자로 몰아 배척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분이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주거나 자신들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줄 인물이라고 생각하여 그분을 좇기에 열광적이었습니다. 단지 소수의 사람만이 그분 안에 이스라엘의 참된 영적 소망의 해답이 있음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분의 제자들조차도 그분의 말씀 중 어떤 것들은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사실상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오해했던 말씀들을 마침내 제대로 이해한 것은 오순절에 성령님이 임하신 이후였음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맏는 자들의 현재의 삶을 유목민처럼 장막에 거주하는 자들에 빗대어 묘사합니다.

 

우리가 이 장막에 있는 동안 짐을 진 것처럼 탄식하는 것은 그것을 벗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하늘 집을 입음으로 죽을 것이 생명에 의해 삼켜지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목적을 우리로 이루도록 하셨으며 그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이 육체의 집에 사는 동안은 주님에게서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는 우리가 보이는 것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고후5:4-7).

 

이처럼 주님에게서 떨어져 있는 데서 우리가 미완성이라는 느낌과 인식이 비롯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결코 모호한 정의를 가진 개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언제나 그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유지시키시는 그리스도, 즉 복음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복음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에게 성령님이 주어진 것은 마침내 주님과 떨어져 있는 일이 결코 없는 그 나라에 믿는 자가 참여하게 될 것임을 보증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성령님은 이러한 보증으로서 어떠한 일을 하십니까? 그분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사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믿게 하시며 의지하게 하십니다. 이처럼 성령님의 일은 우리가 믿음 그 자체나 성령님 자신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을 힘있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에게서 떨어져 있지만, 우리는 주님이 곧 우리를 위해 구원을 이루신 나사렛 예수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써 지금은 이 구세주가 모든 것을 정복하신 사자, 즉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주님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그분을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께서 어린 양으로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모든 것을 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현재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결과에 대한 이와 같은 가르침들은 신약성경 안에 진부하리 만큼 수없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요한은 이런 가르침을 한 번 더 제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구약성경에 쓰인 표현과 이미지로 다시 옷 입혔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리가 이후에 알게 되겠지만, 우리에게 대단히 큰 가치가 있는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이 목적이란 오스틴 패러(Austin Farrer)가 묘사한 것처럼 이미지(image), 즉 지나간 과거의 문화와 사람들이 사용하던 옛 이미지들을 되살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획의 장엄함을 살짝 그러나 새롭게 들여다보고 놀라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수시로 갈등을 겪는 일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이미지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시각에서 벗어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 어린 양의 받으신 고난 때문에 믿는 자 각자의 고난도 그것이 작든 크든 간에 무의미의 늪 속에 가라앉힐 수는 없는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간추림

 

사자는 영광스러우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이미지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열어 주실 수 있고, 그것의 실재를 알려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처럼 우리가 그 사자를 볼 수 있으려면 그분께서 먼저 죽임 당한 어린 양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나라의 계시를 풀 수 있는 열쇠는 복음 사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고 지적합니다. 이것은 또한 요한계시록의 열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모든 존재의 의미는 복음 안에 계시되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통하여 그 나라가 임하는 것과 계속되는 현재 질서 사이의 긴장 속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곧 복음으로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요한계시록의 주제인 것입니다.

 

 

* 중심주제 *

어린 양과 사자 사이의 긴장은 복음이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유일한 열쇠임을 보여 준다.

 

 

그레엄 골즈워디의 [복음과 요한 계시록] 중에서 발췌(25-39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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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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