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4) 누구를 의지할 수 있으랴.

대장쟁이 ㆍ 

[욥기 7:1-6]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품군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품군은 그 삯을 바라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되었다가 터지는구나.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왕으로부터 소환장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왕으로부터 소환장을 받은 그는 몹시 두려웠습니다. 함께 가 줄 친구가 필요했습니다. 그에겐 친구가 셋 있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그가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고, 세상에 둘 도 없는 특별한 친구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친구 또한 그가 사랑하고 있었으나 첫 번째 친구만큼 소중하게 여기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친구는 친구로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평소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던 친구였습니다. 그는 세 친구에게 차례로 함께 가자고 청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싫다고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대궐 문 앞까지는 함께 가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곤란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 함께 가주고말고. 내가 왕에게도 잘 말씀드려 줄게.” 세 친구는 누구이며 왜 그렇게 대답할 걸까요? 첫 번째 친구는 재산을 말합니다. 아무리 재산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더라도 죽을 때에는 고스란히 남겨둔 채 혼자 떠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두 번째 친구는 친척과 친구를 말합니다. 무덤까지는 함께 따라 가주지만 그를 무덤 속에 남겨둔 채 돌아가 버릴 것입니다. 세 번째 친구는 善行(선행)을 말합니다. 선행이란 평소에는 남의 눈길을 끌지 못하지만 죽은 뒤까지도 그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탈무드 이야기가 꼭 성경적이지는 않지요. 선행(善行)을 우리가 죽을 때 가지고 갈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라고 바꾸어서 읽는다면 좋을 것 같네요.

인간은 외로운 존재입니다. 극한 고난이나 죽음 앞에서는 결국 혼자 남겨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결국은 혼자 가야 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아무리 가깝던 친구라도 아무도 함께 해 줄 수 없습니다. 아내조차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라 하고 떠나버린 다음 홀로 고통 가운데 남겨진 욥, 그 욥에게 그의 가장 친한 친구 셋이 찾아와 칠일칠야를 곁에 있어 주었지만, 생각하면 그렇게 고마울 수 없는 친구들이지만, 그러나 그들에게서도 인간이라는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사야 2장 22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2:22)” 시편 146편 3절은 말씀합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인간은 의지할 존재가 못 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한 존재, 그 근본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은 한계를 가진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스러질지 모르는 들의 꽃 같고 풀잎 같은 존재, 죽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46편은 오직 하나님만이 도움이시며 소망이라고 말씀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4절)

또한 인간은 공감하고 고통이나 마음을 나누는데도 한계를 가집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世界觀, World View)을 가지게 됩니다. 각자 나름대로의 틀과 모양과 색깔을 갖춘 창(窓)을 통하여 사물을 바라보고 느끼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똑같이 느끼거나 나눌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애쓴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입니다. 보십시오.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자기가 셋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욥의 친구라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욥에게 충고하려고 나섰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나름대로 욥의 처지와 욥이 당하는 고난을 자신이 가장 잘 이해하고 공감하며 그래서 충고를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욥을 온전히 이해하지도 알지도 공감하지도 못 했으며 아무런 도움도 되지도 못 했습니다. 엘리바스의 이야기를 들은 욥은 “너도 평소에는 푸르다가 막상 마시고자 하면 말라버리는 시냇물 같은 자로구나.” 하고 실망과 분노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친구에 대한 실망이라기보다 인생은 애당초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발견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누구를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인생이 하소연할 곳, 의지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7장에 들어가면 욥은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극심한 고통 가운데 순간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죽기보다 못 한 생명이라고,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러시느냐고, 나는 가련하고 불쌍한 생명이라고, 이제 내가 죽어 흙에 누우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으실찌라도 다시는 있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소연하며 간구합니다.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 나를 돌아보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건지소서.”
그렇습니다. 하나님밖에는 없습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 하던 우편강도가 생각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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