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신자와 적극적인 고백

하나님의 성회는 그의 초기부터 믿음생활의 중요성을 인정해 왔다. 성경이 그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믿음생활이 두드러지게 강조되어 왔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믿음은 두 가지를 믿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 것이다. (히11:6)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모든 하나님의 축복은 믿음을 통해서 받는다. 구원(행16:31), 성령세례(행11:15-17), 하나님의 보호(벧전1:5), 자유와 물질적인 공급을 포함한 약속들의 기업(히6:12) 및 증거의 동기(고후4:13) 등은 많은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 가운데 있는 것들이다.

모든 세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신자들이 강한 믿음을 보여주는 성경의 모범에 유의하는 것은 중요하다. (롬4:20-24) 그들은 믿음을 약화시키거나 파괴하는 것에 대하여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믿음을 더해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으며(눅17:50),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써 지속적으로 믿음을 키워야 한다. (롬10:17) 믿음의 생활은 곧 승리의 생활이다. (요일5:4)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때때로 사람들은 위대한 성경의 진리에 대하여 극단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가끔 교사들은 이러한 극단주의들을 옹호하였다. 어떤 때는 추종자들이 이러한 가르침들에서 더욱 벗어나 그리스도의 주장에 대하여 반대로 나타났다. 적극적 및 부정적 고백은 최근에 어떤 집단 내에서 극단적인 형태로 받아 들여진 표현들이다. 이에 관한 책이나 사용 형태에서 나타나는 정의는 이러한 용어의 의미에 대하여 어떤 통찰력을 제공한다. 이 극단들은 표면화 시킨다는 사실이 곧 고백의 교리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중요한 진리이다.

성경은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요일1:9) 그들은 그리스도를 고백해야 한다.(마10:32, 롬10:9,10) 그들은 선한 고백을 유지해야 한다. (히4:14, 10:23)

그러나 사람들이 교리를 강조함에 있어서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나거나 위배할 때는 그들은 그 교리를 존중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을 책망하고 그 교리를 존중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을 책망하고 주의 일을 말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이 극단들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키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어떻게 배치되는지 알리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적극적 고백의 가르침에 대한 입장들

적극적인 고백의 가르침은 “고백하다”라는 단어에 대한 영어사전의 정의에 근거하고 있다. 즉 “인정하다, 혹은 자인하다, 믿음을 인정하다” 등이다. 고백은 또한 믿게 된 어떤 것을 긍정하는 것이나 알려진 어떤 것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과 깨달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으로서 묘사된다. 이러한 관점은 한 단계 더 나아가서 고백을 적극적인 관점과 부정적인 관점으로 나눈다. 부정적인 것은 죄, 아픔, 가난 혹은 다른 원치 않는 상황을 인정하는 것이다. 적극적인 고백은 바람직한 상황을 인정하거나 자인하는 것이다.


이 가르침에 관하여 다양한 해석과 강조가 있겠으나 결론은 기분나쁜 일이 부정적인 고백을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피해질 수 있으며 좋은 일이 적극적인 고백을 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같다. 여러 책에 표현된 대로 이 견해에 따르면 신자가 부정적 자세를 인정하지 않고 적극적인 자세를 계속 긍정할 때 그는 자신을 위하여 좋은 환경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는 가난, 질병 그리고 아픔 따위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고백할 때만이 아프게 될것이다. 어떤 사람은 질병 자체와 질병의 증상을 인정하는 것의 차이를 구분하기도 한다.

이 견해는 하나님은 신자들이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좋은 차를 타고, 가장 좋은 것들을 갖기를 원하신다고 주장한다. 신자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당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은 사탄에게 그들의 돈에서 손을 떼라고 말하는 것이다. 신자는 그 필요가 영적이든, 육체적이든, 재정적이든 관계없이 그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다. 그것은 믿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행동하게 한다고 가르친다.

이 입장에 따르면 사람이 말하는 것은 그가 무엇을 받으며, 무엇이 될 것인지를 결정한다. 이와같이 이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도 못한 상태에서 고백하기를 시작하도록 가르침 받는다. 사람들은 그들이 말한 것을 가질수 있다고 가르침 받는다. 이러한 이유로 입 밖으로 나간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말을 충분히 반복하면 입 밖으로 나간 말은 궁극적으로 원하는 축복을 야기시키는 믿음을 낳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이 적극적 고백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문제가 없는 인생을 약속하고 있으며 이것의 옹호자들은 성경구절을 가지고 그것을 지지하는 것 같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문맥에서 떼어 생각하거나,그 주제에 관하여 성경의 다른 곳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무시할 때 문제가 생긴다. 극단주의는 진리를 왜곡시키며 궁극적으로 개인적으로는 신자들에게 상처주고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주장에 해를 끼친다. 신자들이 믿음의 생활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갖고 계신 승리에 대하여 연구할 때 모든 교리에서와 마찬가지로 균형잡힌 성경의 강조를 추구해야 한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과 동행함에 있어서 신자들을 돕기보다는 당황하게 하는 극단주의를 피하는데 도움을 준다.


신자들은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을 고려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성서해석에 대한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는데 그것은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라는 것이다. (고전2:13) 이 원리의 기본적인 적용은 확립된 교리 안에서 주어진 주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말해야 하는 모든 것을 고려하는 것이다. 성경의 전체적인 조명에 근거를 둔 교리만이 이 성경적인 해석법칙을 확인한다.

적극적인 고백의 가르침이 약함을 시인하는 것이 곧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재정적인 어려움을 시인하는 것이 가난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질병을 시인하는 것이 치료를 받지 못하게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면 그것을 성경의 조화와 반대되며, 이미 영역을 벗어난 것이다.

예를 들면 여호사밧은 적군에 대항할 힘이 없다고 시인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놀라운 승리를 안겨주었다.(역대하20장)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시인하였으며, 그가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완전하여져서 강하게 되었다.(고후12:9,10) 그리스도께서 필요한 것 이상으로 놀랍게 공급하신 것은 제자들이 무리를 먹일 만큼 충분히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인정하고 시인한 후에 있었던 일이다.(눅9:12,1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공적으로 수고할 수 있게 지도하신 것은 그들이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을 시인한 후의 일이었다.(요21:3-6)

이 사람들은 부정적인 고백을 사실과 반대되는 적극적인 고백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무엇이나 된 것처럼 가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처한 상황을 말하였다. 비록 그들이 부정적 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말했지만 하나님은 놀라웁게 간섭하셨다.

성경으로 성경을 비교해 보면 적극적인 말로 표현하는 것이 항상 행복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도 아님은 분명해진다. 바울, 스데반, 드로비모와 같은 초대교회ㅡ이 지도자들이 이러한 가르침을 몰랐기 때문에 풍부하고 건강한 상태로 살지 못했다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넘어간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다. 교리는 성서의 전체적인 테두리 안에서 개발될 때만이 건전하게 될 것이다.

“고백하다”에 대한 헬라어는 “같은 것을 말하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고백할 때 그리스도에 관하여 성경이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말해야 한다. 사람들이 죄를 고백할 때 죄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말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성경의 어떤 약속을 고백할 때 그 주제에 대한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과 일치하는 약속을 말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어거스틴은 이에 관하여 적절하게 말하였다. “당신이 복음 안에서 좋아하는 것을 믿고 싫어하는 것을 배척한다면 당신이 믿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적절하게 생각해야 한다.

적극적인 고백의 교리가 한 사람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다고 가르칠 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한다고 적절하게 강조하지 못한 것이 된다. 다윗은 주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소원을 비쳤을 때 그는 가장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대상17:4) 다윗은 재료를 모으도록 허락을 받았지만 성전건축은 솔로몬이 할 일이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였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가시를 제거하는 대신에 바울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다.(고후12:9)

하나님의 뜻은 알 수 있고 믿음으로 주장할 수 있지만 마음의 소원이 항상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결정하는 기준은 아니다. 즐길 수 있는 것이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경우가 종종 있다. 야고보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3)고 기록하였는데 여기서 이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정욕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타락한 욕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원하는 기쁨 혹은 즐거움을 의미한다. 이 단어에 대한 번역으로는 정욕이라는 말보다 기쁨이라고 번역한 곳이 여러 군데 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께서 그 잔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였다. 그것은 그의 소원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도에서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셨다. 그래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고 하셨다.(눅22:42)
성경은 신자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모를 것이다. 그는 바울이 가끔 그랬던 것처럼 당황하게 될 때도 있을 것이다.(고후4:8) 그때에 단순히 마음의 소원에 근거한 적극적인 고백을 하기 보다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롬8:26,27)
하나님의 뜻은 항상 신자의 계획이나 욕망보다 우선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야고보의 말은 항상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약4:15)

신자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적극적인 고백을 반복하는 것만큼 간단한 것이 아니다. 기분좋은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다. 반대로 기분 좋지 않은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있을 수도 있다. 신자들은 바울의 친구들이 했던 것처럼 “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행21:14)하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고난이 없는 삶을 요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신자는 강청하는 기도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한다.

적극적인 고백의 견해가 신자들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들에 대하여 기도하기 보다는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칠 때 그것은 강청하는 기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간과하게 만든다. 적극적인 고백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물질적, 육체적 및 영적인 축복의 영역 안에 있으므로 신자들은 이러한 축복들을 위하여 기도하기 보다는 그것들을 고백하고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약속된 축복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이다. 

양식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6:11)하며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지혜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이지만 성경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약1:5)고 말씀한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라고 하셨으나(눅24:49), 또한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가르치셨다.(눅11:13)

홍해에서 모세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기도하지 말라고 하시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출14:15) 신자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깨우쳐 주는 성경구절이 많이 있다.(롬12:12, 빌4:6, 살전5:17) 예수께서는 기도에 있어서 강청함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자기의 손님에게 줄 빵을 구하려고 밤중에 찾아온 강청하는 친구에 대한 묘사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기본원리가 되었다.(눅11:5-10)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주님이 기도에서 강청함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경우이다.(눅18:1-18) 이 사람들에게 기도없는 적극적인 고백이 아니라 강청함을 권유하셨다.

하나님은 길은 사람의 길보다 높아서 우리는 성경 안에 있는 모든 명령들에 대한 이유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지혜로서 필요를 채워주기 위한 과정의 일부로서 기도에 기름을 부으셨음을 안다. 강청하는 기도는 의심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순종의 표시일 수도 있다.

신자들은 이생에서 고난 받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적극적인 고백의 가르침은 이생에서 왕처럼 다스린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신자가 환경에서 지배당하기 보다는 환경을 지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가난과 질병은 신자들이 지배해야 한다고 자주 언급되는 환경들 가운데 들어있다.


만일 신자들이 이 세상의 임금들을 본으로 삼는다면 그들이 고난이 없는 인생을 추구하는 것은 맞는 말이다.(그러나 이 세상의 임금들조차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영적인 성장보다는 물질적 육체적 번영에 더욱 관심이 많다. 그러나 신자들이 그들의 본으로 왕중의 왕을 택한다면 그들의 욕망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과 모범에 의해서 변화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될 것에 대하여 기록한 롬8:17이 진리라고 인정할 것이다. 즉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바울은 자기의 약함을 감추기 보다는 그 약함 안에 있는 영광에 대하여 자랑하기까지 하였다.(고후12:5-10)


그리스도는 부요하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고후8:9) 그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마8:20)

하나님이 그의 예비하신 것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많은 재물을 축척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지만 만일에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필요할 때 육체적인 쾌락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중요한 것이 비극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심을 그만 두신 적이 없었고,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그는 고난 가운데 계셨다. 그는 장로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마16:21, 17:12) 그는 고난당하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 먹기를 원하셨다.(눅22:15)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제자들은 그의 고난이 예언의 성취였음을 인정했다.(눅24:25,26,32)

신자들이 이생에서 왕처럼 다스리는 것이 왕의 모델로서 그리스도를 취하는 것임을 깨달을 때, 그들은 고난당할 수 있음과 때로는 모든 환경을 기분좋은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기분 좋지않은 환경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보다 왕다운 것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그가 고난당할 것을 보았다.(행9:16). 후에 그는 골로새인들을 위하여 당한 고난을 기뻐하였다. 그는 그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그의 몸에 채우는 것”으로 보았다.(골1:24) 하나님은 신자들의 필요를 공급한다고 약속하시고, 경건한 자를 유혹에서 어떻게 건지는지 알고 계신다. 그러나 그리스도처럼 인생을 다스리는 것은 또한 고난을 포함을 하고 있다. 자신을 주님께 맡긴 신자는 이것을 받아 들어야 한다. 만일에 인생이 기준 좋은 경험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는 환멸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며, 그가 그 마음에 있는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냉소주의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눅9:23) 이것은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을 부인하는 것이며 우리의 문제들을 시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들은 항상 믿음의 부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들은 믿음에 대한 자랑거리일 수도 있다. 이것은 히11:32-40에서 크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레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자들은 실재적인 시험을 적용해야 한다.

이 적극적인 고백의 가르침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조사해 보면 풍족한 사회에 살고 있는 기존의 크리스찬들을 향하여 호소하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그들은 “우리는 당신들이 믿는 것과 똑같은 것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를 실천하는데 그것이 당신들과 다른 점이다.”라고 말하면서 영적인 엘리트 의식을 부추긴다.

믿음에 대한 실재적인 시험은 그것이 우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그 가르침이 풍족한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는가? 혹은 그것이 세상의 난민 가운데서도 역사하는가? 그 가르침이 믿음을 위하여 무신론자의 정권에 의해서 옥에 갇힌 신자들에게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 잔인하고 무자비한 독재자의 손에 순교를 당하거나 가혹한 육체적 상처를 입은 신자들은 자격미달의 신자란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는 우주적인 적용을 지닌다. 그것은 부유한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빈민굴에서도 효과가 있다. 그것은 도시에서 뿐만 아니라 정글에서도 효과가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외국에서도 효과가 있다. 그것은 부유한 나라에서나 가난한 나라에서 똑같이 효과가 있다. 그 열매를 시험하는 것은 여전히 교사 혹은 가르침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사람에게 속한 것인지 결정하는 한 방법이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

신자들은 레마라는 말을 정확하게 사용해야 한다.

적극적인 고백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사람들 가운데 헬라어 “레마”에 대한 문헌은 거의 없으므로 구두 전달(Oral communication)에서 사용된 그대로 그것을 상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짓는 것은 일반적으로 이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로고스는 기록된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고, 레마는 현재 믿음에 의해서 말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믿음에 의해서 말해진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영감을 받은 것이 되고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을 갖는다고 한다.

이 구분에는 두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첫째로 이 구분은 헬라어 신약에서나 혹은 70인역에서 정당화되지 않는다. 두 단어는 헬라어 신약이나 70인역에서 동의어로 사용된다. 70인역의 경우에 레마와 로고스는 둘다 대화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사용되는 히브리어 “다바르”를 번역하는데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다바르”라는 단어(번역하면 하나님의 말씀)는 예레미야 1:1과 2절에서 사용되었다. 그런데 1절에서는 레마로 2절에서는 로고스로 번역되었다.

신약성경에서 레마와 로고스는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베드로전서 1:23과 25 절 같은 구절에서 볼 수 있다. 23절에서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로고스”라고 썼고, 25절에서는 “주의 레마는 세세토록 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엡5:26에서 신자들은 “물로 씻어 레마로” 깨끗이 되었다고 했다. 요15:3 에서 신자들이 “내가 일러준 로고스로 이미 깨끗하여졌다.”고 한다.

로고스와 레마 사이의 차이는 성경적 증거에 의해서 뒷받침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로고스로 말해졌든지 레마로 표현되었든지 상관없이 그것은 영감된 것이며, 영원하고 힘이 있는 기적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었든지 말해졌든지 그 기본적인 특성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둘째로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사람들 가운데 문제가 있다. 성경구절은 믿음의 유추나 문맥에 관계없이 선택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레마 원리라고 하는 이런 작용에서 사람들은 말씀이 그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대로 따르는 것보다 그 말씀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의미하도록 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다. 몇가지 예에서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기 때문보다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해 진다. 신자들이 성경의 구절을 문맥에서 따로 떼어 놓거나, 어떤 구절은 영원하고, 다른 구절은 현재의 것으로 하는 크리스찬 실존주의의 형태를 피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결론

어느 교리에 대하여 생각할 때 그것이 전체적인 성경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는지 질문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진리의 전체적인 견해 이하에 근거한 교리는 그리스도의 목적에 해를 끼칠 뿐이다. 그것은 때로 성경을 송두리째 거부하는 견해보다 더 해롭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언급되어 있다면 그 가르침이 성경의 다른 원리와 모순되거나 극단적인 강조를 하고 있어도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치료, 필요에 대한 공급, 믿음 및 신자의 권위 등과 같은 위대한 진리를 가르친다. 성경은 절제된 마음이 승리하는 생활에서 중요한 요소임을 가르친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들은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의 테두리 안에서 항상 생각해야 한다.

잘못 사용되는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의 이러한 위대한 진리에서 물러서려고 하는 유혹을 받게 된다. 어떤 경우는 사람들이 과장된 강조가 그들의 기대를 항상 만족시키지도 못하며 문제에서 해방시켜 주지도 못한다는 것을 발견할 때하나님까지도 등질 수 있다.

그러나 교리적인 탈선들이 발전되어 가는 사실이 그것들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거부하는 이유가 아니다. 의견차이의 존재가 신자들이 성경을 더욱 열심히 연구해야만 되는 이유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종들이 충실히 전체적인 하나님의 지혜를 선포하는 이유이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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