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전10:14). 요즘과 같이 지성이 발달한 시대에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라고 충고하는 것은 시간만 낭비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 생각은 큰 잘못이다. 우상 숭배는 우리의 주변과 우리 가운데 놀라울 정도로 널리 퍼져 있다.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이 위기에 처했다. “역병이 시작되었다.”

 

나는 우상 숭배를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피조물이나 피조물이 창안한 것에 돌리는 행위로 정의하고 싶다. 우상 숭배는 다양한 양상을 띤다. 야만이냐 문명이냐에 다라, 즉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의 무지나 지식의 정도에 따라 우상 숭배의 형태가 크게 달라진다.

 

성경의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얼마든지 우상을 숭배할 수 있다. 구약에서 우상은 하나님과 경쟁 관계가 아니라 그분을 섬기기 위한 디딤돌, 곧 도움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우상 숭배는 멸망의 아들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살후2:4) 위세를 떨치고 있다.

 

죄 중에서 우상 숭배의 죄만큼 교회에 혹독한 심판을 가져다준 죄는 없었다.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의 죄 때문에 애굽, 앗수르, 바벨론의 군대에 짓밟혔다. 예루살렘이 불타고, 열 지파가 뿔뿔이 흩어졌으며, 유다와 베냐민 지파가 포로로 잡혀 갔다.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42:8).

 

본성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마음이 우상 숭배의 원인이다. 야담의 후손을 오염시킨 이 큰 유전병은 온갖 형태의 죄를 통해 나타나는데, 우상 숭배도 그중 하나이다. 인간의 부패한 마음이라는 동일한 원천에서부터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7:21,22)이 흘러나온다.

 

인간은 형태는 다를지라도 제각각 자신의 종교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비록 타락했지만, 우리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 폐허 속에 묻혀 있는 고대의 비문처럼, 글자들이 체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양피지 사본처럼,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반쯤 지워진 글자처럼 희미한 무엇인가가 흐릿하게 새겨져 있다. 그러하기에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종교를 갖고, 어떤 식으로든 무엇인가를 경배하려는 성향을 띤다. 어디를 가더라도 거의 예외 없이 이 진리가 확실히 증명된다.

 

자연인에게는 마음과 믿음과 영의 종교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도 은혜로 새롭게 되지 않는 한 타락하고 부패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한, 인간은 잘못된 것을 예배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우상 숭배는 인간의 마음에서 자연스레 생겨나는 결과물이다. 인간의 마음은 개간되지 않은 땅처럼 언제라도 잡초를 무성히 피워낼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천성적으로 성경이 명령하는 예배가 아니라 속되고도 감각적인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려는 성향과 습성이 존재한다. 나태함과 불신앙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눈에 보이는 보조 수단이나 디딤돌을 고안하고, 결국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우리가 만들어 낸 것에 돌리는 죄를 범한다. 우상 숭배는 살짝 경사진 넓은 길처럼 쉽고 자연스럽다. 그와는 달리 영적 예배는 마치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가듯이 우리의 성향을 거스른다. 오직 은혜로만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과 진리로’(4:23)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자연인의 마음은 그런 예배를 싫어하고 다른 방법으로 예배하기를 기뻐한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는 못하는(16:18)’ 교회는 유형 교회가 아니라 선택받은 자들의 집합체, 곧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과 백성 가운데서 불러내신 참신자들이다. 유형 교회는 종종 극악한 이단 사상을 지지하곤 했다. 유형 교회에 속한 교회 가운데 신앙과 실천의 면에서 치명적인 실수로부터 안전한 교회는 어디에도 없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우상 숭배를 하거나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고전5:11).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딤전4:1). 이는 신자들 사이에서 우상 숭배가 모습을 드러낼 것을 암시한 말씀들이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9:20). 이 재앙이 유형 교회에 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만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요한 사도가 복음을 듣지 못한 이교도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우상 숭배는 유형 교회 안에서 실제로 나타났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보라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걸어가며 너희가 피운 횃불 가운데로 걸어갈지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고통이 있는 곳에 누우리라”(50:11). (우상 숭배의 종말을 말씀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과의 일치와 연합을 모색하는 자들이 많다. 일치는 이론상으로는 매우 고귀한 개념이다. 그러나 진리 없는 일치는 아무 유익이 없고 해로울 뿐이다. 평화와 화합은 귀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복음 없는 평화, 곧 공통된 믿음이 아니라 획일화된 감독 제도에 뿌리를 둔 평화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무익한 평화에 지나지 않는다. 훌륭한 주교 쥬얼은 저서 변증학에서 우리는 사람들과의 일치와 평화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과 평화를 누리기 위해 하나님과 전쟁을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교황이 진정으로 우리와 화해하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이 하나님과 화해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상 숭배로부터 영혼은 지키는 방책을 몇 가지 제시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철저한 지식으로 무장하라.

성경을 더욱 열심히 읽고, 그 모든 내용에 정통하라.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라. 성경을 아는 일에 마음과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경계하라. 성경은 성령의 검이다. 성경의 검을 한쪽에 버려두지 말라. 성경은 구름이 잔뜩 낀 어두운 때에 빛을 비추는 등불과 같다. 그 빛이 없이 길을 가지 않도록 조심하라. 성경은 천하 만민의 공도(公道)이다. 그 길을 떠나 아름답고 오래되고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한 것처럼 보이는 곁길을 선택한다면, 결국 형상과 유골을 숭배하고 정기적으로 고해실을 찾는 습관에 치우칠 수밖에 없다.

 

복음을 철저히 고수하라.

복음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철저히 고수하려는 경건한 열정으로 자신을 무장하라. 복음의 일점일획이라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눈에 띄거나 부처적인 신앙의 요소들을 더욱 부각시켜 복음의 참된 요소를 흐릿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조금이라도 엿보이거든, 절대 동조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우리 영혼과 관련된 문제라면 그 무엇도 사소하게 생각하지 말라. 우리의 예배와 관련된 문제라면 무엇이든 조심하라.

 

누구의 설교를 듣는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항상 꼼꼼히 따지라. 결벽증이 심하고 너무 예민하다는 비난을 들어도 개의치 말라. 우리는 사소한 행위가 중요한 원리들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한 번 퇴락의 길로 접어든 그들은 점차 깊은 수렁에 빠져 들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자극했고,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두셨다. 그 결과 그들은 더욱 강력하게 미혹되어 거짓을 믿기에 이르렀다(살후2:11). 그들은 마귀를 시험하다가 그에게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들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해(어리석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사소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노골적인 우상 숭배로 나아갔다.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에 관한 교리로 무장하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 있는 구원에 관한 건전하고도 명확한 교리로 무장하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의 토대 위에 우리 자신을 굳건히 세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보좌 앞에 흠 없이 세우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이루셨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온전히 의지하는 수단은 오직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믿음 뿐이다.

 

주 예수님과 지속적으로 교제하라.

무엇보다 우리는 주 예수님과 지속적으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눠야 한다. 날마다 그분 안에 거하라. 날마다 그분을 우리의 양식으로 삼으라, 날마다 그분의 충만하심을 받아 누리라. 그렇게 한다면, 다른 중재자나 다른 위로자, 다른 중보자라는 개념이 전혀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일단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마땅한 자리에 앉으신다면, 믿음의 다른 요소들도 이내 모두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교회와 목회자, 성례와 예식 등이 모두 본래의 부차적인 위치로 한 단계씩 내려갈 것이다.

 

- 존 라일, 거짓에 속고 있는 교회에게, pp 223-269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