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맥아더의 [무질서한 은사주의]를 비판한다  

 

In Criticism of John MacArthur's <Charismatic Chaos> 

 

 

  

구요한 목사

( 서울대 경제학과. 뉴욕 법과대학원.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졸업. 서울 생명의교회 목사)

 

  

 

 

  존 맥아더는 비록 뛰어난 강해설교자이자 목회자이지만 그의 [은사 I & II]는 건전한 영적 체험의 결핍과 영적 현상에 대한 무지 및 신학적 편견이 낳은 추악한 부산물이다-

 

필자가 90년대 초에 존 맥아더의 Charismatic Chaos( [은사 I & II ]로 번역됨)1)을 처음 대했을 때, 그는 자신의 무경험이나 나쁜 경험에 의해 기적 종식론을 주장하면서도 그것을 마치 성경의 가르침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먼저 은사주의자들의 수많은 실책을 자세하고 다양하게 수집한 그의 열심에 놀랐고 동시에 몇 가지 전통적이고 독단적인 교리로 영적인 현상을 쾌도난마같이 난도질하는 그의 만용에 또 한 번 놀랐다.  

 

존 맥아더는 자신이 마치 현대의 선지자인양 서문에서 자화자찬을 주저 않고 늘어놓는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책을 보고 오늘날의 은사운동에 대해 성경적으로 바른 견해를 가지게 되어서 감사하다'는 편지가 쇄도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필자가 아는 어떤 집사는 존 맥아더가 쓴 [은사]라는 책 제목만 보고 혹시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뭔가 배울게 있나 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보았다가 너무나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소리를 하여 조금 읽다가 내다버렸다. 

 

또한 필자가 아는 한국 유수 장로교 신학교 출신의 한 목회자는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흥의 현장에서 성령의 역동적인 능력을 체험한 후 "한국에서 신앙생활하고 신학 교육을 받으면서 이런 것에 대해 전혀 소개 받지 못하고 마치 전통적인 것이 신앙의 전부인 양 잘못 소개한 전통주의자들에 의해 '영적으로 기만 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맥아더 식의 의견을 따르고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존 맥아더의 일방적인 논리 전개로 악 영향을 받아서 성령의 다양한 사역을 소멸하고 있는 것이 나는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는 [은사운동 변호](Charismatic Manifesto)라도 한 권 집필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후 시간이 다소 흘렀고 필자의 우려는 사실로 드러났다. 은사운동에 대한 시비가 있을 때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존 맥아더의 주장을 마치 군대의 야전 전투교범처럼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존경하는 수많은 개혁, 보수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도 어쩐 일인지 오늘날의 성령의 외적인 사역에 관해서는 체험이 있는 평신도보다도 못한 엉뚱한 견해를 마치 성경의 가르침인 양 내세우는 경우를 필자는 너무나 많이 목격해 왔다. 문제는 그들 자신의 잘못된 견해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가진 권위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존 맥아더도 마찬가지이다. 강해 설교가로 이름이 나있고 스스로 개혁, 보수주의자를 표방하기 때문에 반(反) 은사운동의 성향이 있는 한국의 수많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그의 견해를 금과옥조같이 따르고 있다.  

 

필자 또한 말 그대로 '은사주의자들의 혼란들'을 누구보다도 피부로 느낀 사람이다. 지나친 건강 축복 복음, 병적인 체험 추구, 영적인 교만, 체험을 말씀 위에 놓는 오류, 오늘날의 계시에 대한 오해, 몇 가지 신기한 영적인 은사를 가져야 신령한 신자라고 착각하는 오류 등 은사주의자들이 저지르는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는 존 맥아더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지 않고 전통적이고 해묵은 몇 가지 독단적이고 편파적인 교리로 성경이 지지하는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이나 관행조차 무차별 포격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나는 만용이고 객기에 지나지 않으며 더 나아가서 성령을 소멸하고 성령을 훼방하는 끔찍한 죄에까지 이를 수도 있다.  

 

존 맥아더는 자신이 마치 개혁, 보수신학의 선봉장인 것처럼 과시하지만 필자가 알기에는 그가 제시하는 몇 가지 독단적인 교리는 오늘날 개혁, 보수신학 내에서조차 심각한 도전을 받는 주장들이다. 더군다나 '경험보다는 교리를 중시한다'는 그 자신이 자세한 주석적인 근거도 없이 은사주의자들의 여러 가지 오류를 나열해 놓고는 '그러므로 그들의 주장은 틀렸다'는 식의 경험적 논리를 서슴지 않고 내세운다.  

 

맥아더 식으로 어느 한 신학 전통의 오류를 파헤친다면 이 세상에 남아있을 것이 과연 있을까?  

 

존 맥아더 자신의 전신인 '세대주의자의 혼란들'은 어떤가? 심심찮게 시한부 종말론으로 홍역을 치루는 이유는 세대주의자들이 성경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 아닌가? 예수님의 천상 재림 따로, 지상 재림 따로 라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어떤가? 맥아더가 배운 신학 전통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아닐까? 필자도 원한다면 맥아더식으로 [세대주의자들의 몽유병]이란 책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바른 교리와 바른 전통은 내세우지만 바른 행위와 삶이 죽어 있는 '죽은 정통'의 폐해는 어떠한가? 교조적 집단이기주의, 개교회주의, 형식주의, 전통주의 및 총회 임원의 부정선거, 장로 및 임직자의 금권선거, 강도사 및 편목 가입으로 인한 금전 개입 등, 필자는 소위 말하는 정통 교파에 직접 소속한 경험을 통해, 이들이 얼마나 썩어빠지고 화석화되었는가를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사람이다. 만일 내가 [정통 교회의 흙탕물]이란 책을 출판한다면 맥아더의 [은사] 못지않는 오류를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오늘날의 은사운동을 무작정 변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부 반(反)은사주의자들에 의해 성경의 진리가 왜곡되고 성령의 다양한 사역이 소멸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지면 관계상 필자는 맥아더의 주장의 오류와 독단을 그가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개혁, 보수주의의 입장에서 간단하게 비판하고자 한다.   

 

 

첫째 그는 진리는 체험이 아니라 말씀에서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진리는 체험이 아니라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그러나 체험이 진리의 이해를 주도해서는 곤란하지만 체험 또한 진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수단 중의 하나이다.  

 

흔히들 "은사주의자들은 체험을 중시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교리(또는 말씀)를 중시한다"고 한다. 그럴듯한 말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문제가 있는 주장이다. 필자는 이 문제를 시간을 두고 곰곰히 생각하고 연구한 결과 그 주장의 오류를 발견했다. 이 주장은 이렇게 풀어 쓸 수 있다. "적어도 성령의 외적인 사역에 관한 한 일부 은사주의자들은 체험의 통찰력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지만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무 체험에 근거한 인간의 논리를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말하자면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말씀이나 교리 그 자체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들이 해석한 말씀'이란 말이다. 자신들의 무 체험에 근거하여 논리적으로 '해석한 말씀'만이 유일한 해석이라고 주장하는 그들이야 말로 말씀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사람들이 아닌가? 기록된 말씀은 불변하지만 성경에 대한 인간의 해석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 발전, 변화해 가야 하지 않는가?  

 

성경의 진리는 원어나 역사적인 배경을 연구하고 독단적인 교리에 충실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체험이 없는 경우 사변적이고 편파적인 교리가 생길 위험성이 너무나 많다. 오늘날의 기적을 부정했다가 실제로 자신이 체험한 후에 종전의 견해를 바꾸고 성경을 다시 이해하기 시작한 전문교역자나 신자들의 이름이나 간증 목록을 대라면 책 한 권도 모자랄 것이다.  

 

존 맥아더는 은사주의자들이 반(反)지성적이라고 비판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반(反) 체험주의자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 같다. 둘 다 모두 바른 성경해석과 건전한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계시(revelation)라는 말의 정의 문제이다. 개혁, 보수신학은 성령의 감동(Inspiration)과 조명(illumination)을 구분한다. 성경의 기록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 없고 완전하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들에게 깨닫게 하는 것은 성령의 조명이다. 성령의 감동은 완전하지만 성령의 조명은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보수신학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 기록된 성경에 대해서만 (특별)계시 라는 말을 사용한다.  

 

존 맥아더는 이런 식으로 계시란 말을 정의한 후, 은사주의자들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 이들이 마치 종결된 성경의 기록에 무엇을 더하는 것처럼 이해하고 펄펄 뛴다. 천하에 이런 이단이 어디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개혁, 보수주의자들 예를 들어, D. A. 카슨, 웨인 그루뎀, 번 포이트레스 등이 지적하듯 성경 자체는 계시라는 말을 그렇게 좁은 의미의 전문용어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 "계시하다"의 헬라어는 아포칼립토이며 명사형은 아포칼립스이다. 성경에서 이 말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마 11:27),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것(엡 1:17), 기록된 성경과는 상관없는 사적인 계시(고전 14:26)를 말할 때에도 사용된다.  

 

계시라는 말을 기록된 성경과 동일시 하는 것은 조직신학자들의 독단이지 성경의 가르침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개혁, 보수신학을 접할 기회가 없는 은사주의자들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계시라는 단어를 성령의 조명이란 차원에서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좁은 의미의 전문 술어로만 이해하여, 마치 기록된 성경 계시에 무엇을 더하는 식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들의 용어 사용상의 미숙을 탓할 수는 있겠지만 사실 그들은 성경에 있는대로 사용했지만 듣는 자가 자기들의 신학의 편견으로 그렇게 듣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용서 못할 이단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이 말하는 계시는 개혁, 보수신학이 말하는 성령의 조명이지 감동은 아니다.  

 

감동(inspiration)이란 말도 문제가 있다. 사실 이 말도 성경이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라 라틴어에서 생긴 말이다. 한글 개역성경은 성령의 감동(이 경우는 영어로 moved by or prompted by the Holy Spirit 의미에 해당)이라는 말을 너무나 평범하게 자주 사용한다.  

 

그러므로 교역자들이나 일반 신자들이 기도의 응답을 받거나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평범한 의미로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은 하등 잘못이 아니다. 개혁, 보수주의자들도 평범한 의미로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계시라는 말만 왜 좁게 전문적인 의미로만 정의하는가? 물론 역사적으로 몬타너스같은 이단들이 자신들의 사적인 계시를 기록된 성경의 계시와 동일시 하는 오류를 범해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시라는 말을 사용하기만 하면 곧 성경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친 과민 반응이다. 모든 솥뚜껑을 자라로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성경 자체가 계시라는 말을 평범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는가?  

 

 

 

셋째, 과연 오늘날에도 사도시대와 같은 기적이 지속되는가? 존 맥아더는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그러면서 그러한 기적 종식론이 마치 개혁, 보수신학의 대표적인 입장인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은 물론 개혁, 보수신학자들인 번 포이트레스, 고든 피, 웨인 그루뎀 및 잭 디어 등도 기적 계속론을 주장하고 있다.   

 

더군다나 기적 종식론을 주장하기 위해 성경의 기적 시기를 3시기(모세, 엘리야 및 사도시대)로 구분하는 것은, 기적의 기능을 특별 계시인 성경의 기록을 증거 하는 것으로만 국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기적 (또는 이사와 이적)의 기능은 너무나 다양하다.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신 이유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요 3:2; 9:32-33), 사도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사실(고전 2:4; 고후 12:12),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마 12:28),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때문에(마 14:14; 20:34; 막 1:41 등),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출 14:4; 요 2:11), 믿음에 대한 반응으로(마 9:22; 15:28), 사람들의 절실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왕상 17:1-16, 17-24), 전파하는 말씀을 확실히 증거 하기 위해(막 16:20), 사람들을 모아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마 4:24-25) 등 무수히 많은 이유로 기적을 행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이런 명백한 성경의 구절들은 하나도 인용하지 않고 조직 신학자들의 독단만 앵무새처럼 나열한다. 번 포이트레스는 기적을 특별 계시인 성경의 기록을 증거 하는 좁은 의미로만 국한시키는 조직신학자들의 횡포를 신랄하게 비판한다.2)  

 

필자는 맥아더에게 묻고 싶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과거의 신학자들이 반대파를 대항하기 위해 고안해낸 변증법적인 기적 종식론을 마치 불변의 금과옥조처럼 주장하는 그 태도가 과연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내세우는 개혁, 보수주의자의 태도인가? 은사주의자들이 체험에 의해 성경을 해석한다고 비판하기 전에 독단적인 논리로 성경의 진리를 외면하는 오류를 맥아더는 먼저 시정해야 하지 않는가?

 

 

II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부정하다가도 자신들이 실제로 체험한 후,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기적 종식론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학자들이 반대파를 대항하고 자신들의 무 체험을 변호하기 위해 고안해낸 인간의 논리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기적 종식론은 수백 년의 교회사를 통해 너무나 정교하게 개발, 보완되어왔기 때문에 짧은 지면으로 모든 종식 이론을 반박하기에는 부족하다. 더군다나 체험이 있는 경우는 기적 종식론의 허구성을 금방 깨닫지만 실제 체험이 없는 사람들은 너무나 논리가 정교하고 동시에 자신들의 무 체험을 지지해 주기 때문에 좀처럼 기적 종식론을 버리지 못한다. 지면 관계상 여기에서는 존 맥아더의 대표적인 오류 몇 가지를 비판하는데 그치고자 한다. (좀 더 관심이 있는 분은 신앙 변증 시리즈의 <기적은 계속된다>를 보기 바란다.)

 

 

 

첫째 맥아더는 오늘날의 기적을 부정하기 위해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기적과 오늘날의 그것들과를 비교한다. 맥아더에 의하면,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모든 사람들의 모든 병을," 그것도 "즉각적"으로 고쳤는데, 오늘날 기적을 행한다는 사람들은 모든 병을 고치지도 못하고 고치는데 시간도 걸린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신약적인 기사와 표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한다.  

 

맥아더는 같은 세대주의자인 노만 가이슬러3)의 주장을 답습하고 있으며 에드워드 그로스4)도 이 주장을 따른다.  

 

성경은 과연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맥아더가 주장하듯 문자적으로 "모든" 사람의 "모든 병"을 다 고쳤다고 기록하는가? 도대체 맥아더의 태도가 학자적이지 못하다. 왜 그는 자기의 주장을 지지하는 성경 구절만을 인용하고 부정하는 구절들은 무시하는가? 그는 자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감(減)했기 때문에 그 자신이 걸핏하면 은사주의자들을 이단이라고 부르듯 그 자신이야말로 이단 중의 이단이 아닌가?

 

성경 말씀을 살펴보자. 성경은 여러 군데에서 맥아더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왜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 중에서 단지 한 명만 고치셨을까?(요 5:1-9).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거나(마 13:5), 권능을 행하실 수가 없어서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다(막 6:1-6).

 

이 구절들에 의할 때 어쩌면 맥아더 류의 교회에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잘못된 신학 이론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즉각적이 아니라 2회에 걸쳐서 소경을 고치셨다(막 8;22-26).

사도 바울도 모든 병을 다 고친 것은 아니다(빌 2:25-27; 딤전 5;23; 딤후 4:20).

 

왜 이런 모순이 생기는가? 맥아더는 성경이 말하는 "모든"이란 말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기록을 경직적으로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세대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오류이다. 성경에는 모든이란 말이 5천 5백회 이상 사용되며 여기에 any, none, every를 합치면 그 수는 1만 번을 상회한다고 한다.5)  

 

스타인은 모든이란 단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과장법으로 해석할 것인가를 판정하는 몇 가지 지침을 제공한다. 그는, 다른 곳의 기록과 상충되는 경우나, 다른 곳에서의 예수님의 행동과 상충되는 경우, 또는 일상생활에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보편적인 술어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과장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타인의 지침을 따를 때, 성경에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모든 사람의 모든 병을 고쳤다는 기록은 필자가 예로 든 성경 구절들과 상충되므로 문자적이 아니라 과장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 과장법을 자주 사용하는 목적은, 어떤 특정한 사실을 단순화하여 강조함으로써 듣는 사람들의 관심을 고조시키고 주의를 사로잡아서 결단과 변화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필사본(기록된 성경)이 태부족하여 듣는 것이 강조된 당시에 단순화한 과장법은 기억하기에 많은 도움이 되는 방법이었다.  

 

맥아더 식으로 주장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만인구원설(universalism)이 옳다.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 기록한 구절들이 많기 때문이다(요 1:7; 벧후 3:9 등). 그러나 이러한 구절들은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 의해 그 의미가 제한되므로(마 1:21; 요 17:9; 엡 1:12; 롬 11:7),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만 구원을 받는다는 제한 속죄론(limited atonement)이 개혁, 보수신학의 입장이 아닌가?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맥아더의 주장은 성경의 기본적인 성경해석학에 위배된다. 개혁, 보수신학의 강점이 기록된 말씀에 근거한 논리의 일관성인데 맥아더는 자신의 논리를 내세우기 위해 성경의 명백한 기록마저 무시하는 횡포를 서슴지 않고 저지르기 때문이다.

 

성경을 경직적인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세대주의의 오류이다. 이들은 성경 구절들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한 결과 "교회의 구원 따로, 이스라엘의 구원 따로"라는 이원론적인 구원관을 주장하며 "예수의 천상 재림 따로 지상 재림 따로"를 주장하여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원조가 되었다. 제이 아담스는 지나치게 문자적인 해석에 집착한 세대주의자들의 성경해석법을 한 물체가 여러 개로 보이는 "초점이 맞지 않는 렌즈"라고 부른다.  

 

더군다나 맥아더는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성경해석법을 주장하지만, 전형적인 세대주의적인 용어인 '문자적 해석,' '통상적 의미'란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그러나 개혁신학자인 번 포이트레스는 이러한 용어의 개념의 모호성을 통렬하게 비판한다.6)  

 

또한 노만 가이슬러의 말장난을 한번 살펴보자. 그는 예수님이 모든 병을 '즉각적으로 고치셨다'는 자기의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2회에 걸쳐서 소경을 고치신 사건(막 8:22-26)을 즉각적인 치유라고 주장한다. 즉 한 단계, 한 단계가 '완전한 치유를 향한 즉각적인 치유'였지 불완전한 치유가 아니라는 것이다.7)  

 

'두 번에 걸친 즉각적인 치유'가 성립되는 개념이라면 3번, 4번, 5번 더 나아가서 10번에 걸친 즉각적인 치유 개념도 성립되어야 하지 않는가? 이 모두가 완전을 향한 즉각적인 치유가 아니고 무엇인가?  

 

더군다나 가이슬러는 은사주의자들의 기사와 표적에 대한 목격담을 모조리 부정한 후, 자신은 실제로 드물게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의 수많은 기적 목격담은 부정하고 자신의 목격은 진짜라고 주장하는 그 주장 자체가 다른 사람의 체험은 믿지 못하겠지만 '나의 체험'은 중시하는 체험적인 주장이 아니고 무엇인가?

 

 

맥아더의 또 다른 횡포를 살펴보자. 그는 기적에 대해 이렇게 단언한다.

 

사도시대의 기적들이 그 이후의 시대에도 계속된다고 말하는 곳이 성경 어디에도 없다. (끝난다고 기록한 구절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필자 주.) 또한 성경은 신자들로 하여금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가 나타나는 것을 구하라고 권면하는 곳도 없다. 신약 성경 모두를 살펴볼 때 신자들과 성령의 관계에 대해 명령형으로 말하는 곳은 다섯 군데 밖에 없다.  

 

성령으로 행하라(갈 5:25).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

성령으로 충만하라(엡 5:18).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살전 5:19)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유 20).8)

 

 

필자는 맥아더가 어떤 성경을 보는지 궁금하다. 필자가 보는 성경은 맥아더의 성경과는 판이하다. 성령과 은사를 "구하라"고 명령하거나 권면하는 구절들이 도처에 있다.

 

구하라 . . . . 찾으라 . . . . 문을 두드리라 . . . .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 9, 13).

너희는 더욱 좋은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

신령한 것(은사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노력하라(고전 14:1).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나게 하노니(딤후 1:6)

성령을 소멸치 말고 예언을 멸시치 말고(살전 5:19-20).

 

왜 이런 오류가 생기는가? 맥아더는 기적 종식론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믿고, 성경에서 '성령이나 은사를 구하라'고 명령하거나 권면하는 구절들은 오늘날의 우리들과는 상관이 없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그 구절들이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착시 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자신의 편견과 전제로 인해 분명한 성경의 기록을 외면하는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바른 신학과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틀릴 수 없다'는 영적인 교만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오류를 자아낸 것이다.

 

 

III

 

Q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쟁쟁한 개혁 신학자이다. 그는 강의 시간에 '성경에 기록된 기적은 사도시대에 중지되었으며 악하고 음란한 세대만이 오늘날 기적을 요구한다'(마 12:39)는 요지로 강의했다. 필자는 강의 후 즉시 항의성 질문을 했다. 헤르만 리델보스의 The Coming of Kingdom(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의 임함의 제일의 표적은 귀신이 쫓겨나고 병이 낫는 것이며, 피터 와그너 교수의 연구 조사 등에 의하면 기적은 지금도 지속된다. 그런데도 기적은 사도시대에 끝났다고 주장하는가? 

  

Q 교수는 전혀 언짢은 기색을 하지 않고 웃으면서 "미스터 구의 말이 옳다. 나도 피터 와그너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필자는 발걸음을 돌리는 Q 교수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필자가 존경하는 교수가 실제로는 기적이 오늘날에도 지속된다고 믿으면서도 공적인 강의시간에는 기적 종식론을 주장하는 그 이중성에 어이가 없었다.  

 

성경을 최고의 권위에 두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성경 중심의 개혁 신학을 자부하는 이곳에서조차 오늘날 도도하게 밀어닥치는 성령 운동의 거센 풍파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자기들의 신학을 애써 인간적으로 보호하려는 노력이 측은해 보였다.  

 

이런 대화를 어느 동문에게 말했더니 그는 한술 더 떠서 말하기를 "교수들이 오늘날에도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 성령 운동이 교내에 불어 닥칠 것이므로 조심하는 것"이라는 엉뚱한 논리를 전개한다.  

 

"성령 운동이 밀어닥치는 것이 걱정되어 오늘날의 기적을 부정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불안하여 나의 신학으로 브레이크를 걸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개혁주의자라고 자부하는 그 이중성에 또 한번 어이가 없었다.  

 

어떤 운동이 교회에서 무시하거나 소홀히 취급한 분야를 강조하면 반대자들은 "그렇게 하면 전통 교회가 중시해 온 xx분야가 소홀히 취급되기 쉽다. 그러므로 이런 운동에는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비판한다. 그러면 비판자들은 왜 새로운 분야는 소홀히 취급했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사역이라면 회개하고 받아들일 생각은 하지 않고 지금까지 잘해왔던 것 잘못될까봐 걱정하고 있다니! 왜 하나님의 일을 자기가 걱정하는가? 이것이 바른 교리의 산물인가, 게으름과 편견의 산물인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교수들의 이러한 내적인 갈등을 모른 채 그들의 기적 종식론으로 무장된 수많은 사역자들이 강의 시간에 배운 그대로를 실제 목회에서 적용하고 있으며, 그 밑에서 배운 평신도들 또한 비판의 여지없이 배운 대로 믿고 행동하여 성령의 사역을 소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맥아더같이 영향력을 끼치는 극우파 보수주의자들이 계속 기적 종식론을 지지하는 저서들을 출판해 내고 있으니 말이다.

 

필자도 맥아더식으로 한 번 말해보자. 맥아더 식으로 주장하면 오늘날의 '설교'는 신약적인 설교가 아니다.

 

성경을 보라.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한 설교는 준비가 없이 즉흥적이었고, 상당 부분이 성경에 기록될 정도로 성령의 감동이 완벽하였고 내용에 오류가 없었다.  

 

성경을 보라.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설교 준비했다는 말이 어디 나오는가? 그러나 오늘날의 설교는 어떤가? 상당 시간을 소비하여 여러 참고서를 보면서 준비해야 하고, 성령의 감동도 부족하고 오류투성이다. 맥아더 식으로 주장하면 이런 설교를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또한 성경에는 말씀을 전파라고 했다(딤후 4:2). 맥아더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우리는 기록된 성경 말씀을 읽든지 암송하여 그대로 전파해야 한다. 왜 설교를 인간적으로 서론, 본론을 구분하고 예화를 넣고 2대지 3대지로 구성하는가? 성경에 이런 식으로 설교하라는 명령이나 권면이 어디 있는가? 그러면서도 오류투성이인 자신의 강론에 맥아더는 어떻게 감히 신약적인 용어인 '설교하다'(케이루소)라는 말을 사용하는가?  

 

맥아더 식으로 말하면 오늘날의 설교는 신약적인 의미의 설교가 아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설교가 신약적인 의미의 설교가 아니라고 해서 필요가 없는 것인가?  

 

왜 자기들이 하는 것은 다 성경적이고 자기들이 잘 모르고 생소한 것에 대해서는 완벽을 요구하는가?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의 사역을 사사건건 트집 잡은 바리새인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는가?  

 

또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모든 병을 즉각적으로 고쳤기 때문에 오늘날도 '기사와 표적'이라는 명칭을 붙이려면 예수님이나 사도들과 문자적으로 똑같아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 은사의 차이를 간과한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슈퍼 모델이다. 그들이 올림픽 수영 선수라면 우리는 대충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올림픽 수영선수처럼 수영하지 않으면 수영이 아니란 말인가?  

 

사람마다 말씀 전하는 은사의 정도에 차이가 있듯이 믿음의 분량이 다르고(롬 12:3), 은혜의 정도가 다르고(엡 4:7), 기름부음의 정도도 다르므로(요 3:34에서 예수님은 한량 없이 성령을 받으셨다), 은사의 효과에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교회의 일상적인 체험에서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수만 명의 교인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십 수명의 교인들에게 설교를 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기도로 병을 낫게 하든(약 5:16), 은사로 병을 낫게 하든(고전 12:10, 30)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맥아더는 벤자민 워필드의 잘못된 기적종식론을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다. 20세기 초에 프린스턴 신학교의 벤자민 워필드는 그의 [사이비 기적]에서 오늘날 기적 종식론의 이론적 근거를 확고히(?) 마련했다. 그에 의하면 기적은 "사도들이 하나님의 정당한 권위를 위임받은 대표들이라는 사실을 확증(authentication)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사도시대가 끝났으므로 기적은 "필연적으로 소멸되었다"(necessarily passed away)고 주장한다.  

 

워필드는 기적이 그렇게 끝나는 것이 성경의 "원칙"(principle)이며 "역사적인 사실들"(facts)이 이를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경의 원칙에 의해서 기적은 사도시대에 끝났으므로 그 이후에 일어난 기적은 모두 '사이비 기적'이라고 주장한다. 워필드는 사도들의 범위를 확대시켜서 사도들 또는 사도들로부터 직접 안수를 받은 사람들로 국한하며 그 마지막 사람이 죽었을 때 기적이 끝나는 것이 성경의 원칙이라고 주장한다.  

 

워필드는 그 증거로 주후 100년에서 150년까지 50년간의 교부시대 동안에 기적이 일어났다는 증거가 "전혀 없거나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주후 150년부터 300년까지는 기적에 관한 기록이 "더러"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없었다"고 주장한다. 주후 4세기에는 기적이 많이 일어났다고 하지만 이것은 기적이 아니라 "기이한 일"(marvels)이라고 한다.   

 

 

비판해 보자.  

 

먼저 워필드는 기적의 기능을 사도성 증거나 특별 계시인 성령의 기록을 증거하는 기능에 국한시켰다. 그러나 필자는 이 책의 서두에서 기적의 기능은 이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밝혔다.  

 

워필드의 아류인 토마스 에드가는 '기독교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은 초대교회 시대에 기적이 없이 말로만 복음을 전파했다면 누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겠느냐? 그러므로 기적은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해 주었다'고 주장한다.9)  

 

오늘날의 기적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의 충분성(Sufficiency of the Scripture)을 내세우기 위한 것인데, 에드가는 오늘날의 기적을 부정하기 위해 '사도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조차 그 자체로는 부족했다'는 이단성 발언을 서슴지 않고 한다.  

 

둘째, 필자가 보기에 워필드의 주장은 자가당착이다. 사도시대에 완전히 끝나는 것이 성경의 원칙이라면 그 이후에는 전혀 일어나지 말아야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없었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는 자기 주장을 억지로 내세우기 위해서 져스틴(Justin Martyr, 100-65), 이레니우스(Irenaeus, 130-200) 등의 기록을 제시하면서도 이들의 기록을 증거로 삼을 수 없다는 독단을 서슴지 않는다.  

 

정통 교회의 수많은 교부들이 기적이 일어난 사실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워필드는 그들의 주장을 믿을 수가 없으니 자기의 논리에 의한 기적 종식론을 믿으라는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이 경험을 성경보다 앞세우는 만큼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자신의 논리 또는 신학을 성경이나 믿을만한 신자들의 증언보다 앞세우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워필드 뿐만이 아니다. 무수한 보수주의자들이 성경을 최고의 권위에 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논리나 신학을 앞세워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난도질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워필드는 또한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이 초기에는 기적을 부정하다가 후기에는 자신의 견해를 바꾸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의 초기의 종식론을 옳은 것으로 인용하였다. 어거스틴은 초기에는 성경과 동등한 권위의 새로운 계시를 주장하는 몬타너스의 열광과 광신을 대항하기 위해 기적 종식론을 주장했다.10)  

 

그러나 어거스틴은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자신이 직접 목격한 후 그의 견해를 바꾸었다. "오늘날에도 기적이 부족하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우리들이 성경에서 기적을 행하신 것으로 읽고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떠한 수단과 방법이라도 사용하신다."11)  

 

어거스틴은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기독교 신자들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기적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되고 있다. . . 사실은 오늘날에도 기적들이 예수의 이름, 또는 가끔 성찬식을 통해서 가끔 성자들의 중보기도를 통해서 일어나고 있다."  

 

기적 종식론자인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리차드 개핀 교수조차 필자와의 대화에서, 워필드의 주장은 '주석적 근거가 없는 역사적인 경험(또는 무경험)에 의한 주장'이라고 한 마디로 일축해 버린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많은 개혁, 보수신학자들이 '(무)경험에 근거한 워필드의 주장'을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인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맥아더는 더 나아가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사도시대에 끝났다고 주장한다.12) 그러므로 오늘날의 우리들은 말씀 중심으로 살아서 마귀의 세력을 대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다만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음을 청결하게 하고(약 4:7-8), 근신하고 깨어서 믿음을 굳게하면 마귀를 대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벧전 5:8-9).

맥아더는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성품의 문제이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영적인 전쟁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품성의 문제이다. 사도들이 기록한 서신서들의 거의 모든 강조점들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신약의 서신서들을 읽어 보라. 오늘날의 교회를 특징짓는 귀신의 세력들에 대한 병적인 고집은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신자들에게 귀신들을 찾고, 귀신들에게 말하고, 귀신들을 대항하고, 조롱하고, 쫓아내라고 가르치는 것을 한 군데에서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13)  

 

에드워드 그로스14) 및 데이빗 폴리슨15)도 그들의 저서에서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피터 와그너 교수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귀신을 한 번이라도 실제로 쫓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체험 만능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 중 상당수는 실제 체험이 없으면 지극히 추상적인 논리로 해석되거나 영해 (spiritulization)될 가능성이 너무나 많다. 그러므로 맥아더는 다른 사람들을 체험주의자들이라고 비판하기 전에 '내가 무 체험을 바탕으로 한 논리에 의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닌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더군다나 필자는 맥아더 식의 견해를 이해할 수가 없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귀신을 쫓아내면 '구속사적'이니 '계시사의 독특한 사건들'이니 등등 거창한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동일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오늘날의 신자들이 귀신을 쫓으면 '신비주의'니 '무속신앙'이니 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그만큼 자신들의 체험의 결핍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 특히 사도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현학적이고 추상적인 교리를 도출해 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이 아닌가?  

 

더 나아가서 맥아더의 주장은 성경해석상의 전형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 그는 첫째 A(기술)가 아니라 B(품성)이라는 헬라식 흑백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나 성경은 도처에서 A(기술?)는 물론 B(품성)라고 강조한다. 신자들은 성령의 은사(맥아더가 말하는 기술)도 필요하고 성령의 열매(품성)도 맺어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한 피조물을 초월하시는 분이자(A) 내재하시는 분이다(B).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자(A) 완전한 사람이시다(B).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자 인간의 믿음을 필요로 한다.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다.  

 

 

둘째 그는 서신서 어디를 보아도 귀신을 쫓아내라는 말이 없다는 것이다. '귀신 쫓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서신서들에는 한 군데에서도 기록되지 않았느냐'(침묵에 의한 논증Argument from Silence)는 주장이다.  

 

로마 교회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죽었다는 기록이 성경에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마리아 승천설을 주장한다고 한다. 이런 식이라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서신서에는 단 한 군데에도 기록되지 않았는가?'  

 

침묵에 의한 논증은 비판자의 논리에 의해 비판자 자신이 부메랑같이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서신서들은 주로 교회 내부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내무생활 지침서'이며, 복음서나 사도행전은 '야전 전투교범'이라고 할 수 있다. 작전과 규율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만 있어도 야전전투와 내무생활을 혼동하지 않는다.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른 곳에서 자세히 기록한 사실을 구태여 서신서에서 불필요하게 재반복하여 기록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전통적인 개혁, 보수신학에서는 기독교의 교리와 경험을 공식화하기 위해서는 역사서(주로 이야기체로 기록된 사도행전, 복음서 등)가 아니라 교훈서(특히 바울의 서신서)를 주요 교과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리를 확립시키는 데 있어서 성경의 교훈적인 부분이 역사적인 부분에 비해 우선권이 있다'것이다.  

 

많은 개혁, 보수신학자들이 이런 주장을 한다. 그래서 사도행전이나 복음서를 중심으로 하여 성령론이나 마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공격한다. 그러나 보수신학 일각에서는 이러한 접근 방법은 '성경 안에 성경'을 인정하는 비성서적인 태도라고 비판한다.  

 

맥아더는 축귀에 대해서는 서신서를 기준으로 해석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도 예배 시 악기를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하게 얼버무린다. 악기 사용의 근거를 신약의 서신서는 커녕 신약도 아닌 구약의 시편 150을 참고로 인용할 뿐이다.16)  

 

오늘날 누군가가 맥아더 식으로 "신약 성경 특히 서신서를 보라. 예배시 악기를 사용하라는 명령이나 권면이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예배 시 악기를 사용하는 교회는 잘못된 교회이다"라고 주장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주장의 타탕성 여부를 성경에 비추어 상고하기는 커녕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이 살짝 돈 사람이 아닌가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초기 종교 개혁가들의 영향을 받아서 미국의 청교도들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주도한 제1차 영적대각성이 일어나기 전까지 대 예배 시 악기 사용을 금지했으며, 시편을 단조롭게 창(Chanting)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믿어왔다. 그들은 서신서에 악기를 사용하고 세상의 음악의 멜로디를 사용하라는 기록이 없다고 성경을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어느 지도자는 청교도 시대가 성경의 진리가 가장 완벽하게 구현된 시대라는 엉뚱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나 예배에 대한 이런 주장(성경 해석)이 다시 수정되었다는 기록을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절대 다수의 교회가 예배 시 악기를 사용하면서 어떤 교리적 갈등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다.  

 

결국 문제는 예배 시 악기 사용의 여부를 성경 전체는 물론 하나님이 주신 일반 은혜의 산물로 보지 않고 굳이 서신서에서만 찾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런 엉뚱한 교리를 주장한 것이다.  

 

이처럼 개혁, 보수주의자들은 신앙고백, 선택교리, 예배의 기준, 선교와 전도, 교회의 정치제도, 유아세례 등 교회의 핵심적인 교리와 실천기준의 근거를 복음서나 사도행전에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나 사도행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기적을 행하거나 축귀를 하면 왜 큰 일이 난 것같이 야단법석을 부리는가?  

 

맥아더 식의 무 체험자들을 따라야 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도 사역의 현장에서 복음서나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필요할 때에는 축귀를 하여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자를 따라야 하는가? 어느 편이 성경적인가? 독자 여러분의 현명한 판단을 바란다.

 

 

 

IV. 윌리암 데아르테가의 맥아더 비판

 

 

교회사학자인 미국의 윌리암 테아르티가는 [성령을 소멸함]17)에서 존 맥아더의 [은사 I & II]를 혹독하게 비판한다.  

 

다음은 데아르티가의 견해를 정리한 것이다.

 

맥아더의 [은사]는 이전 책인 The Charismatics: A Doctrinal Perspective(1978)(은사주의자들: 교리적 전망)의 수정 증보판이다. 이 두 책에서 맥아더는 오순절주의/은사주의 운동은 기독교 교회에 혼란과 무질서와 혼란만을 야기시켰으며 그것은 환상과 잘못된 신학에 기초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맥아더는 미국 남가주 선 밸리 소재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의 담임목사이자 성경교사이며, 그의 근본주의적 설교를 통해 매주 1만 명 이상의 교인들이 모여들고 있다.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맥아더는 은사주의 신학에 대한 공격자일 뿐만 아니라 동료 복음주의자에 대해서도 과도한 공격을 서슴지 않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현재 구원과 제자도와의 관련성에 대해 동료 세대주의자와의 신학 논쟁에 연루되어 있다.  

 

맥아더는 효력 있는 구원 체험은 제자훈련의 과정으로 인도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구원 체험 자체가 영생을 보증하기에 충분하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반대한다. 편견이 없는 복음주의 학자들은 서로 다른 견해의 교환이 되어야 할 논쟁이(약 3:17), 서로가 서로를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난투극으로 전락되었다고 한탄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맥아더는 반대자들의 견해를 공격하기 전에 그것을 통상적으로 잘못 해석하거나 과장한다고 말한다.  

 

베델신학대학원(미네소타주 세인트 폴 소재)의 학장이자 복음주의 학자인 밀라드 에릭슨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맥아더는 오해했다고 비판했다.  

 

바울이 성령 충만한 삶과 성령의 은사를 담대하게 사용하는 것을 규정하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이 교리는, 특히 오순절주의/은사주의 신학에 대한 맥아더의 비판과 적절한 관련성이 있다.

 

 

은사의 신학은 극단적인 기적종식론의 신학이다  

 

대부분의 근본주의자들18)과 같이 맥아더의 영적 이해의 배경에는 스콧틀랜드 실재론19)의 가정이 자리 잡고 있어서 영적 현상에 대한 그의 이해를 저해하고 있다. 그는 신비주의란 부정적인 것이며 은사주의 신앙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신비주의는 객관적이고, 증명 가능한 사실과는 별개로 영적 현상을 인식하려는 믿음의 체계이다. 그것은 느낌, 직관 및 다른 내적 감각들을 통해 진리를 추구한다. 객관적인 자료는 도외시되기 때문에 신비주의는 내부로부터 그 권위를 찾는다.

 

신비주의와는 반대로 맥아더는 "진정한 영적 경험들"을 가질 것을 허용한다. 이것들은 회개, 염려, 기쁨과 잃은 자에 대한 불쌍한 마음과 같은 경건한 감정들과 같은 구원의 과정의 감정들을 말한다.  

 

기대했던 바와 같이, 맥아더는 객관적인 진리의 근거는 성경과 개혁 신학이라고 믿는다.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신학은 개혁 신학이다. 그것은 역사적 복음주의다. 그것은 역사적 정통 신학이다." 맥아더의 논리는 단순하다. '오순절주의/은사주의 신학은 개혁 신학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따라서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은사주의에 대한 맥아더의 공격은 기적 종식론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벤자민 워필드 보다 도가 지나쳐서 17세기 이래로 볼 수 없었던 극단적인 기적 종식론을 주창한다.  

 

그는 오늘날 소위 말하는 수많은 기사와 이적을 점검해 보았지만 진짜는 하나도 없었다고 결론짓는다. 증거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으려는 그의 의지'가 문제다. 진정한 기적에 대한 의학적인 검증이 수없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그 모든 것들을 부정한다.

 

 

 

맥아더의 '기능심리학'(faculty theology)  

 

한때 맥아더는 심각한 우울증에 걸린 신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아마 이 학생에게는 축귀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의 신학적인 틀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그는 상담이나 전문적인 심리학자를 통해 이 학생에게 제공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제공했다. 이 학생은, 생각이 잘못되었으며 나쁜 생각하기를 중지해야 된다는 상담을 받았다.  

 

불행하게도 맥아더의 접근 방식은 중세기에 시작되어 칼빈이 사용한 기능심리학적인 것이었다. *기능심리학은 의지가 마음의 최상의 기능이며 그것은 보다 저급한 감정이나 생각을 지배할 능력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 학생에게는 우울증적인 생각을 중지할 수 있는 의지력의 발동이 필요할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생각 즉 지성이 마음의 최상의 기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지성이 마음의 최상의 기능이며 감정은 가장 저급한 기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인간이 전인격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플라톤의 헬라적인 인간관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신앙도 성경 공부, 신학 공부 등 지성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감정적인 체험을 격하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필자 주)

 

 

 

오만한 신학  

 

맥아더의 [은사]를 읽어가노라면 그가 보편적인 교회의 다른 저서들을 얼마나 읽지 않았나 하는 것에 대해 그저 놀랄 따름이다. 마치 개혁 신학 외에 교부들이나 기독교의 다른 전통의 저서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A. J. 고든이 초대교회의 치유사역에 대해 제시한 증거들은 그냥 무시되었다. 맥아더에게는 개혁 신학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는 마치 교회가 A.D. 90년에 갑자기 사라졌다가 종교개혁 기간 중에 다시 나타난 것처럼 가르친다.  

 

맥아더의 신학에서 가장 비극적인 요소는 성령을 대적하는 문제와 성령에 대한 죄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기각해 버리는 데 있다. 성령을 대적하는 죄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신성에 대한 증거를 거부하는 것이므로 오늘날의 신자들이 이 죄를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맥아더는 주장한다.  

 

이것이야 말로 세대주의의 또 다른 위험성이다. 이런 주장은 오늘날의 신자는 성령에 대한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오늘날의 신자와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분리시킨다. 만일 성령의 '세미한 음성'이 어떤 사람에게 성령의 사역을 대적하는 위험을 경고하면, 지성을 통해 그 목소리는 (대다수가 동의하는) 바른 교리에 반대되는 것이으로 쉽게 거부해 버린다.  

 

이런 점에서 맥아더의 신학은 완벽한 바리새 신학이 되어버렸다. 즉 내가 속한 교단의 신학은 완전하므로 이상하거나 새로운 것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만일 동료 신자들이 나와 동의하지 않으면 그는 이단성의 유희에 빠지는 것이다. 나의 신학을 도전하는 꿈이나 환상은, 이 세대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일 수 없다. 따라서 바리새 전통을 따르는 기적 종식론자는 사람이나 하나님으로부터의 신학적인 견책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분별에 실패한 바리새주의   

 

비록 바리새주의는 분명한 역사적인 형태를 가졌지만, 어떤 특정한 시대에 바리새적 이단 현상을 구분해 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바리새주의가 무엇인지를 알아내어, 오류를 증명하고 여러 가지 새로운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엡 4:14), 그것을 진정한 교회의 사명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바리새 영(靈)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대다수가 동의하는 정통신학'(consensus orthodoxy))에 근거하여 비판하며, 현재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문제가 혹시 그들 자신의 신학적 취약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성경에 비추어 보는 경우가 드물다.  

 

바리새주의의 또 다른 주요한 특징은 열매를 기준으로 다루기를 거절하는 데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비록 어떤 운동이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달을 때, 극단주의와 혼란을 자아내어 '혼합된 열매'(mixed fruit)를 맺기도 하지만 그 운동은 전체적인 결과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리새주의자들은,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를 구분하지 않고, 어떤 운동에 대해 그들의 마음을 결정한 후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 극단적으로 치우친 증거를 찾는다.  

 

바리새주의자들의 주장과 미국 법정은 재미있는 유사성을 공유한다. 우리 신앙인들은 논쟁할 때 특히 법정공방전과 법정주의의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 수십 년 동안 미국 TV의 주인공은 형사 법정의 변호사가 아니면 검사들이었다.20) 법정공방의 특징은 상대방의 잘못을 과대포장하면서 자신의 약점은 감추는 것이다.  

 

이런 방법이 법정에서는 유용할지 모르지만 영적 진리를 파괴하기 마련이다. 이런 방법은 논란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운동이 가진 진리를 인정하지 못한다. 기독교 사역이나 개인의 잘못만 잔뜩 열거해 놓고 그들의 통찰력이나 장점은 하나도 인정하지 않는 논쟁은 바리새 영으로 전염되기 쉽다.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적 비판과 바리새주의를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슬픔과 자비를 보이지만 후자는 자기 의에 찬 기쁨과 "내가 그렇게 경고하지 않았는가"라는 잘못된 영에 사로잡혀 있다.

 

 

 

기독교 비극으로서의 바리새주의   

 

모든 바리새주의에는 기회를 놓치는 비극적인 요소가 있다. 교회의 긴급한 사명은 최근의 이런 바리새주의로 인한 손실을 속히 없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간섭으로, 바리새주의와 (함부로 이단이나 사이비로 정죄하는) '마녀 사냥'으로 인해 야기된 혼란, 분열, 두려움 및 과대망상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바리새주의야 말로 교회의 영원한 이단이며 그것을 그렇게 인정할 수만 있다면, 현재의 위기는 보다 높은 수준의 분별과 영적 성숙을 향한 고통스럽지만 필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이상 필자는 존 맥아더의 견해를 그의 저서인「은사 I & II」를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 보았다. 필자가 강조하는 바는 존 맥아더가 은사주의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내세우는 개혁, 보수신학의 교리들의 상당 부분이 개혁, 보수신학자들로부터도 심각한 도전을 받는 주제들이라는 사실이다.  

 

전 세계적인 성령 운동의 태동으로 인해 과거에는 당연하다고 믿어온 전통적인 교리들을 성경에 비추어 상고해 본 결과 상당한 오류가 있다는 사실이 개혁, 보수신학자들에 의해서도 속속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개혁, 보수주의자의 태도가 아닌가? 인간이 만든 교리가 아무리 정교해도 틀린 것이 판명되면 당연히 성경의 가르침에 종속되어야 하지 않는가?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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