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의 연합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왜 아직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다루지 않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적용함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만일 이 연합을 다루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논의는 온전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이해 역시 심각하게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제보다 더 중심적이고 근본적인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구속이 적용되는 여러 측면만 더불어 이 주제를 다루지 않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주제는 그 자체로 매우 광범위하고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구속이 적용되는 한 단계 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넓은 견지에서 보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속이 적용되는 모든 단계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구속을 적용하는 일에는 물론, 단번에 이룬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중심에 자리한다. 구원 과정 전체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한 단계에서 시작할 뿐 아니라, 구원은 다름 아닌 이 연합의 다른 단계들이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짧은 표현이 말하는 것이 바로 연합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할 때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뜻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단순히 구속의 적용을 의미할 때만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어떤 측면은 구속의 적용에만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룰 것이다. 하지만 먼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갖는 포괄적인 의미를 먼저 이해할 때, 구속의 적용과 관련해서도 이 말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련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들을 살펴보면 그 범위가 어디까지 미치는지 알게 된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어디로부터 시작해서 어디로 향하는지를 알게 된다.

 

성부께서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정하심으로 구원이 시작되었다.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3-4). 성부께서 영원 전에 우리를 택하시되,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하셨다. 여기에 내포된 것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영원 전에 성부께서 우리를 택정하실 때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말은 곧 성부께서 영원한 사랑의 경륜으로 구원받은 자들을 택정하실 때,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상관없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았다. 우리가 그 원천에까지 구원을 최대한 거슬러 가보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자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나중에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거기에 그렇게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신 것도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과 연합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롬 6:2-11, 엡 2:4-6, 골 3:3-4). 바울은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이루신 구속 역사를 생각할 때, 창세전에 성부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연합과 상관없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저주받은 나무에 달려 죽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그리스도와 백성들 간의 연합을 가능하게 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은혜의 신비로운 작정과 상관없이 구속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는 곧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이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엡 5:25).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어졌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 지금 바울은 행위가 아닌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진리를 주장하고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구원을 받음으로 확정되었다. 구원의 시작뿐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누리기 시작하는 것 역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라는 사실에 놀랄 이유는 없다. 영원 전에 성부의 택정하심으로 구원이 시작된 것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된 것이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단번에 구원에 참여하는 것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실제로 구속에 참여한 자가 될 때까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보류된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사람들이다.

 

하지만 새 생명의 시작만 그리스도 안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생명이 지속되는 것 역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동일한 관계 덕분이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된다(롬 6:4, 고전 1:4-5, 참조. 고전 6:15-17).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여 살아감으로 신자들은 새 생명을 누린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게 된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잠들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다(살전 4:14, 16).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죽음으로도 끊어질 수 없다는 사실만큼 이 연합의 불변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죽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죽음으로 영혼과 육신이 분리된다. 하지만 그렇게 분리된 상태에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시 116:15).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고 영화롭게 될 것이다. 마지막 나팔 소리와 더불어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을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날 때, 그들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난다(고전 15:22). 그리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화롭게 된다(롬 8:17).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창세전에 성부 하나님의 선택에 뿌리를 박고 있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화롭게 되는 것으로 결실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지평은 광대하고 장구하다. 공간과 시간에 갇혀 있지 않고 영원까지 이른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시야는 두 개의 초점을 따라 궤적을 그린다. 하나는 영원한 경륜 속에 있는 성부 하나님의 택정하신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영광이다. 전자는 그 시작이 없고, 후자 역시 그 끝을 모른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와 더불어 영화롭게 되는 것은 영원한 세대를 통틀어 계속될 완성의 시작일 뿐이다.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과거를 돌아보고 장래를 조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현세의 역사로만 국한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 땅의 역사가 의미가 있고 소망이 있는 것은 신자들이 이런 조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사는 삶과 영광의 소망 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것이 무엇인가? 신자들이 하나님이 이미 정하신 경륜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큰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 당하는 여러 어려움과 당혹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인내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신자들로 하여금 큰 확신으로 장래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가운데 즐거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항상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기초로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살아가고, 장래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신자에게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택정하심의 실체를 확신하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을 통해 항상 현재적으로 누리는 그분과의 연합이다. 영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입은 것처럼, 지금도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을 성부로부터 받는다(참조. 엡 1:3-4). 신자가 영원한 기업의 후사로 인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셨고, 그 안에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참. 엡 1:13-14).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아니고는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 어디를 보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암담함과 두려움뿐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있음으로 시간과 영원의 전체 그림이 완전히 달라지고 하나님의 백성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으로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아주 포괄적인 주제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라고 하는 궁극적인 시작에서부터 택함을 받은 자들이 영화롭게 되는 종국적인 결실에 이르기까지의 전체 구원 과정을 포함한다.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을 적용하는 어느 한 단계에서 그치지 않는다. 성취와 적용에 이르는 구속의 전 과정의 토대가 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이 모든 것을 아우를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친히 값 주고 사셔서 구속해 주시기로 한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효력 있게 적용하고 나누어 주실 것을 확증한다.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을 적용하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구속이 효력 있게 적용되기 전에는 실제로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가 아니다. 에베소 교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그들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받았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들도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 역시 상기시켰다(엡 2:3, 12).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받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아들과의 교제를 위해 유효한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는 그들도 그리스도에 대하여 외인이었던 것이다(고전 1:9). 이처럼 성부 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이 있어야, 사람은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가 되고 구속의 복을 누리는 즐거움에 참여하게 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런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본질은 무엇인가? 몇 가지를 말할 수 있다.

 

1.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영적이다. 신약성경에서 "영적, spiritual"이라는 말만큼이나 더 자주 왜곡되는 단어도 드물 것이다. 모호하거나 막연한 느낌을 가리킬 때 사람들은 이 말을 사용한다. 신약성경에서 "영적"이라는 말은 성령과 관련해서 쓰인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이 내주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행하는 사람이다. 영적인 마음이란 성령에 붙잡히고 성령에서 비롯된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영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 연합의 끈이 바로 성령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참조. 고전 6:17, 19, 롬 8:9-11, 요일 3:24; 4:13). 우리는 구원하는 은혜가 역사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성령 간의 긴밀한 관계를 더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성령은 주의 영이시고 그리스도는 성령의 주다(참조. 롬 8:9, 고후 3:18, 벧전 1:11).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크나큰 신비다. 성령이 연합의 끈이라는 사실은 이 신비를 손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신비를 환히 밝혀 준다. 한편으로는 이 신비를 감각적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순전한 감성으로 다가가도록 돕는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영적인 이유는 그것이 영적인 관계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신자가 누리는 연합은 한 하나님으로 세 위께서 누리시는 그런 연합과는 다르다. 삼위 하나님의 연합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보는 연합 - 한 인격 안에 있는 두 본성 - 과도 다르다. 우리가 누리는 영혼과 육신으로 한 인간을 이루는 연합과도 다르다. 단순히 감정, 정서, 지각, 생각, 마음, 목적과 같은 것들의 연합도 아니다.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연합이다. 하지만 성령의 본성과 사역과 일치하는 아주 신령한 연합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 중에 거하고 그의 백성이 그분 안에 거하는 연합은 성령의 본성이나 사역과 일치하는 우리의 분석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신령한 연합이다.

 

2. 이 연합은 신비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관련하여 "신비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기에 앞서 먼저 성경에 나오는 "신비"라는 말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이해가 도무지 불가능하거나 불가사의한 일을 가리키기 위해 흔히들 이 말을 사용한다. 하지만 성경이 신비라는 말을 쓸 때의 의미는 아니다. 로마서 16:25-26에서 사도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도록 몇 가지를 이야기 한다. 여기서 바울은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 신비와 관련하여 우리가 눈여겨볼 것이 네 가지가 있다. 우선, 영원 전부터 신비로 간직되었다. 하나님의 생각과 경륜 속에 감취었다. 둘째, 하지만 계속해서 감추인 상태로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따라 나타나고 알려졌다. 셋째, 하나님 편에서의 이런 계시는 성경을 통해 이루어졌고 성경에 담겨 있다. 성경을 통해 온 나라들에 계시되었고 더 이상 비밀로 감취어 있지 않는다. 넷째, 이 계시가 목적하는 바는 온 나라들이 믿음의 순종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신비란, 눈으로 보지 귀로도 듣지 못하며 사람의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셨고 계시와 믿음으로 우리에게 알려지고 또 우리가 누리게 된 비밀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신비가 바로 이 같은 신비다.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면서, 그것을 남편과 부인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과 비교한 후에 이렇게 말한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2). 바울은 또다시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고 하면서 이 연합에 대해,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다"고 말한다(골 1:26-27).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비다. 이런 사실을 통해 우리는 이 연합의 가치와 이 연합에 포함된 친밀함을 잘 알 수 있다.

 

이 연합을 성명하기 위해 성경이 말하는 광범위한 유비가 아주 인상적이다. 가장 고차원적으로는 삼위 하나님의 각각의 위격 간에 이루어지는 연합에 비교된다. 너무나 경이롭고 놀랍기는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요 14:23, 17:21-23). 가장 낮은 차원으로는 건축물을 구성하는 각각의 돌들과 그것들을 떠받치는 모퉁잇돌과의 관계에 비유된다(엡 2:19-22, 벧전 2:4-5). 이 두 가지 경계 사이에 있는 다양한 차원의 관계와 존재에서 비롯된 많은 각종 유비들이 이 연합을 성명하기 위해 성경에 등장한다.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 사이의 연합과도 비유된다(롬 5:12-19, 고전 15:19-49). 남편과 부인이 이루는 연합과도 비유된다(엡 5:22-33, 참조. 요 3:29). 인간의 몸과 머리가 이루는 연합과도 비유된다(엡 4:15-16). 포도나무와 가지에도 비유된다(요 15장). 이처럼 생명이 없는 존재의 영역에서 삼위 하나님의 위격에 이르는 다양한 차원의 존재들에서 비롯된 유비들이 이 연합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우리는 위대한 원리를 배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본질과 방식을 모퉁잇돌과 다른 돌들 사이에 이루는 것과 같은 연합 정도로 격하시켜서도 안되고, 포도나무와 가지가 이루는 연합으로 한정해서도 안되며, 사람의 머리와 몸, 혹은 남편과 부인이 이루는 연합으로 축소시켜서도 안된다. 연합의 방식과 본질과 성격은 각각의 경우마다 다르다. 유사하기는 해도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 간의 연합을,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차원의 연합 가운데 하나로 한정해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연합을 삼위 하나님의 각 위격 간의 연합의 차원과 동일시해서도 안된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사용되는 유비는 동일성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곧 우리가 삼위 하나님의 삶 속에 결합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이 위대한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이런 비유들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사고할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원리인 유비가 곧 동일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다. 무엇을 서로 비교했다고 해서 그것이 같다는 말은 아니다. 피조물이 참여하는 이런 모든 연합과 조화 중에서 가장 고상한 것이 바로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누리는 연합이다. 가장 위대한 신비는, 한 하나님 안에 세 위격이 계시는 삼위 하나님의 연합이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경건의 신비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셔서 육신 가운데 나타나신 성육신의 신비다(딤전 3:16). 하지만 피조물이 참여하는 가장 위대한 신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와 누리는 연합이다. 그리스도와의 이런 연합이 신비라는 사실은, 그것이 신성 안에서 성부와 성자가 누리는 연합과 비교된 사실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믿음을 발휘하는 데 포함된 기이함을 묘사할 때 우리는 흔히 신비로운mystical 이라는 표현을 쓴다. 믿음의 삶에는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신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사귐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이 사귐은 곧 그리스도와의 교제communion를 말한다. 믿음의 삶이란 승귀하셔서 영존하시는 구속자와 누리는 살아 있는 연합과 교제의 삶이다. 믿음이란, 이 땅에 오셔서 단번에 구속을 성취하신 구속주에 대한 믿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요 중보자로 영존하시는 분을 믿는 믿음이기도 하다. 이처럼 믿음이란 살아계셔서 구원자와 주가 되시는 그분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정점에서 발휘되는 것을 교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사귐에 비교할 수 있는 인간 사이의 사귐은 어디에도 없다. 의식적으로 서로 주고받는 사랑으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과 교제하시고, 그의 백성들은 그분과 교제한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고 말한다(벧전 1:8). 믿음의 삶은 사랑의 삶이요, 사랑의 삶은 교제의 삶, 곧 영존하셔서 자기 백성을 위해 중보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분과의 신비로운 친교의 삶이다. 믿음의 삶은 죄와 상관없이 자기 백성들과 같이 모든 일에서 동등하게 시험을 받으심으로 그들이 당하는 유혹과 고난과 연약함에 대한 무한한 연민을 가지신 분과의 사귐이다. 진정한 믿음의 삶은, 쇠와 같은 냉랭한 이지적인 동의가 아니다. 믿음의 삶이란 열렬하고 뜨거운 사랑과 사귐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의 교제야말로 참된 신앙의 면류관이요 최고봉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전체 구원 교리의 중심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작정된 모든 것, 단번에 이루신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획득하고 보장된 모든 것,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을 적용하고 참여함으로 누리도록 하신 모든 것,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복의 상태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가게 될 모든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라는 이 범주 안에 다 포함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특권과 복락의 정점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로서 하나님의 권속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는 양자됨이란 있을 수 없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입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되기 위한 선택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바울은 성부께서 거룩하게 하시려고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 백성을 택정하신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사랑 안에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양자 삼으셨다고 덧붙인다(엡 1:4-5). 거룩하게 하기 위해 한 백성을 택정하신 것과 양자 삼으시기 위해 예정하신 것이 대구를 이룬다. 하나의 위대한 진리를 이렇게 두 가지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두 가지 표현 방식을 통해 우리는 성부께서 이루신 선택에 포함된 두 가지 서로 다른 측면을 본다.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양자됨은 이 놀라운 은혜를 상보적으로 잘 나타내 보여준다. 양자됨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정점에 이르고, 양자됨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다(롬 8:17). 생명이나 죽음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의 일이나 모든 것이 그들의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3:22-23).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고가 감취어진 그분과 연합되었고, 모든 정사와 권세와 머리이신 그분 안에서 그들은 완전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다함이 없이 풍성한 은혜와 진리와 지혜와 권세와 선하심과 사랑과 의로움과 신실하심의 샘에서, 이 세상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과 장차 누리게 될 삶을 바라는 소망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길어 올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연합만큼 주 안에서 확신과 능력과 위로와 기쁨을 누리게 하는 진리는 없다. 이 진리는 또한 성화를 불러일으킨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승천하신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를 얻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연합에 포함된 고상한 특권과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인식함으로 감사와 순종과 헌신이 촉발되기 때문이다. 연합은 교제를 의미하고, 이런 교제는 우리의 주가 되시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을 경외하고 사랑과 겸손으로 동행하게 한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5-6).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관련하여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이 측면을 간과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해하고 누리는 데 심각한 결함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다른 위격들과 누리시는 관계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우리가 누리는 위격들과의 관계를 적용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신다(요 10:30).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우리 역시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가지시는 것과 유사한 관계를 누리게 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이는 우리 주께서 말씀하신 바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너무나 엄청난 말씀임이 분명하지만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물론 성부께서도 오셔서 신자 안에 거처를 정하신다. 이것보다 더 놀라운 말씀은 아마 그리스도의 이 말씀일 것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0-23). 신자들과 연합하여 그들과 함께 거처를 정하시는 분은 성부만이 아니다. 성령께서도 그렇게 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그렇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의 연합이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는 요한의 말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바울의 말은 예수께서 친히 사도들에게 하신 증거를 되풀이한 것일 뿐이다.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이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누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너무나 제한적으로 만들고 축소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장 고상한 차원의 신비다. 여기서 신비란 뭔지 모를 막역한 느낌이나 황홀경과 같은 신비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참되고 살아계신 한분 하나님과 사귀는 신비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삼위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 안에서 각각의 위격이 가지신 독특함을 누리는 세 분의 구별된 인격과의 교제이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성부를 알고, 아버지로서의 그분만의 독특한 성품과 역사를 통해 그분과 교제한다. 그들은 또한 성자를 알고, 아들과 구주와 구속주와 존귀하게 되신 하나님으로서 그분이 가진 독특한 성품과 역사 안에서 그분과 더불어 교제한다. 그들은 또한 성령을 알고, 대언자와 보혜사와 거룩하게 하시는 분으로서 그분이 가진 독특한 성품과 역사 안에서 그분과 더불어 교제한다. 이 교제는 황홀경 가운데 누리는 몽롱하고 막연한 것이 아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계시에 기초한 믿음이요, 성령의 내적인 증거를 통해서 이 계시를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믿음이다. 이뿐 아니라 깊은 감정의 샘을 솟구치게 하는 거룩한 사랑과 기쁨에 겨운 믿음이다. 신자들은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하는 지성소로 들어간다.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일으킴을 받아 하늘에 앉게 되기 때문이다(엡 2:6). 그들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안에 감취었다(골 3:3). 악한 양심으로부터 깨끗하게 된 마음과 물로 씻기움을 받은 몸을 가진 그들은 믿음의 확신으로 가까이 나아간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소가 아닌 하늘로 들어가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을 뵙고 있기 때문이다(히 9:24).


 

[구속,2부 14장,복있는 사람,pp.235-251]

가져온 곳 : 
블로그 >CONNOR`S READING SPACE
|
글쓴이 : Connor|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존 머레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칼빈의 '성경의 영감'에 대한 개념  (0) 2013.07.2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