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영(1-1) (롬8:15~17) / 로이드존스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롬 8:15-17)

 

 

기록된 말씀 중에 이보다 더 위대한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심지어 이처럼 위대한 장에서조차 매우 독특한 진리의 표현으로 돋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전영역과 구석구석 도처에서 발견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진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왜 그 사도가 이 진리의 말씀을 진술하셨는가를 정확하게 깨닫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반향을 일으키는 구절들에 따른 위험성은 우리가 그 말씀 자체로 만족하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것들이 우리에게 주는 어떤 일반적인 인상으로 만족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너무 즐깁니다. 그리므로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교훈을 참으로 적용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말씀을 살펴 보겠습니다. 바울이 왜 이것을 언급했을까요? 그 목적이 무엇일까요? 바울이 그렇게 했던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대답이 15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이미 지나간 그 무엇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 사도는 이 말씀을 기록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저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낙심케 하는 영으로부터, 다시 말해서 낙담 혹은 침체의 영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이 실제적으로 그 문제를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그 순간은 아니었을지라도 바울의 관심사는 저들이 그런 고통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한 가지 목적은 저들에게 영적 침체에 대한 해독제를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이 종의 영, 패배의 영, 그리고 낙심의 영이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도가 이같이 중요한 진술을 어떤 연관성 없이 한마디 던지고 만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갑자기 던져진 매우 중요한 진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같은 진술들이 이 위대한 사도의 기록에서 거의 계획대로 나타났듯이 여기에서도 매우 실제적인 문제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약성경 안에 가지고 있는 이런 서신들은 교리와 신학으로 충만합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 나오는 서신들의 모음이 신학 교과서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것입니다. 그것이 명심해야 할 정도로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규약들이나 교리들을 언제나 보이는 실제적 목표로 가장 최일선에 제시되어야 하는 목회적 요소와 함께 소개되어야만 합니다. 이런 편지들은 우선적으로 목회서신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도가 실제적인 기쁨과 또 자신들이 믿고 받아들였던 기독교 신앙을 살도록 사람들을 돕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특별한 진술을 어떻게 하게 되었는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 낙심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문제, 당신이 좋아한다면 죄를 처리하는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능력 있는 서신 제6장 서두에서부터 그 문제를 취급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지금까지도 그것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가 편지를 쓰고 있는 대상인 이 사람들은 개종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왔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지금 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문제에 접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그것이 저들에게 적대적이며 철저하게 반항적인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품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그 어떤 것들을 접하면서도 역시 그런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투쟁이요 또한 전쟁입니다. 내부와 외부에 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에서 주님이 살으셨던 것처럼 자신들도 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특별한 문제, 곧 낙심과 침체가 유입되는 그 문제를 매우 자주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는 벌써 마귀가 우리를 낙심시킬 때에 교묘하게 사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에 관한 많은 사례들을 고찰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평범한 것입니다. 특별히 기독교 신앙을 매우 진지하게 생각하는 양심적인 타입의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유형의 사람은 "나는 개종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은 "이것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삶이다. 나는 그런 삶을 살아야만 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바로 그 사람에게 찾아오는 특별한 시험에 대해서 고찰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저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어떤 진리를 ?닫지 못하고 또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 가능한 그 무엇을 깨닫는 데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차라리 그런 표현을 더 좋아한다면, 신앙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실패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에 관한 많은 일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신앙이란 활동성이란 점을 고찰해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망각하다가 어려움을 당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이 신앙을 적용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이유를 고찰해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이 계속해서, 그리고 끈질기게 신앙을 적용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출발을 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순간이라도 평안하게 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적절하게 적용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유발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앞에 펼쳐진 진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적절히 활용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붙잡지 못하고 실패하는 가장 분명한 일들 중에 하나가 죄의 결과로 나타난 인간의 형편입니다. 우리가 그 점에 대해서 다 살펴본 바 있습니다. 당신은 과거에 여러 차례 읽었던 성경 말씀, 그때마다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말씀이 어느 날 갑자기 당신에게 살아 있는 말씀으로 그리고 과거에 결코 체험하지 못했던 그런 방법으로 다가오는 그런 성경 구절을 발견한 적이 없습니까? 우리들은 모두 여러 차례 이 같은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그 진리에 형식적으로 동의하지만 그것이 말씀하시는 바를 적절하게 적용하지 못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는 바로 그것이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이 특별한 문제의 본질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도 바울이 '종의 영'이라고 부르는 바를 초래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종의 영'이란 무슨 뜻입니까? 그는 종의 정신 혹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돌이켜 새로운 율법 혹은 고차원적인 율법으로 전환하려는 경향에서 비롯됩니다. 제가 지금 율법과의 관계를 매우 분명하게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십계명 혹은 도덕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생각합니다.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또 그분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저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셨음을 압니다. 또 칭의에 대해서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이제야 적극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매우 교묘한 방법, 곧 자신들도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저들은 새로운 종류의 율법을 붙들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저들이 종의 영 혹은 노예의 영을 가지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자신들이 담당해야만 될 대단한 임무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또 자신들이 적용해야만 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산상설교를 읽고 또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모범, 곧 자신들이 살고 싶어하는 삶의 표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또다른 가르침들을 거기에서 발견하고 관심을 돌립니다. 또 저들은 서신서들을 두루 섭렵하고 사도들을 통해서 주어진 세밀한 규정들을 거기에서 발견한 후에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라고 말합니다. 저들이 그런 것들을 발견하여 그것을 자신들이 마땅히 담당하고 또 일상생활 가운데서 실천해야만 될 그 무엇으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환언해서, 거룩이 저들에게 큰 짐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들은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조직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들이 수행해 나갈 수 있는 어떤 훈련준칙들을 소개합니다. 이런 태도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그 가르침의 고전적인 방법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수도원 제도의 전체적인 사상체계에서 볼 때 그것은 바로 이 같은 것을 전시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기독교 진리와 직면한 남녀 성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들은 "그래,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상하고 수준 높은 삶이야. 만일에 혹자가 성공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문제가 될 거야"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저들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어. 사업을 하거나 전문 직종에 계속 종사하면서 이 세상에서는 전혀 그렇게 살수는 없어. 그렇게 하려면 당신 자신을 세상에서 분리시키지 않으면 안 돼. 그 길은 세상을 떠나는 수밖에 없어." 저들은 그렇게 합니다. 그것은 이런 생각에 대한 극단적인 형태입니다. 거룩이나 거룩에 대한 훈련과 영적인 삶은 평생 동안 지속되어야만 될 일입니다. 더군다나 당신은 특별히 그 일에 자신을 투자해야만 하고 또 법칙과 규정을 세워야만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에 의하면, 그것이 바로 종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로마 카톨릭에게만 한정된다고 말할 필요가 없으며 또 자신들이 '카톨릭'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제한시킬 수도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매우 보편적일 수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적인 성도들 사이에도 그런 일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율법을 우리 자신들에게 쉽게 부과합니다. 물론 우리가 그것을 율법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율법 밑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런 경향에 젖어 있습니다. 저는 많은 인용을 통해서 이것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서신들이 이에 대한 인용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교회에 보내는 바울서신의 논증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바울은 특별한 말씀으로 이 문제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제2장에서 바울이 이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을 들어보도록 합시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 자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골2:16-23).

 

이제 그것은 초대교회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에 대한 통찰력을 우리에게 제공해 줍니다. 일종의 수도원 제도, 곧 가장 교묘한 방법이 유입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런 특별한 형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향 혹은 시험의 가능성은 여전히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똑같은 일로 편지를 써서 경고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에 나오는 그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회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딤전4:1-3). 그것은 지금까지도 매우 보편적인 그 무엇입니다.

 

저는 매우 철저하게 복음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한 처녀가 고기 먹는 것을 중단했던 사례를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짐승이 먼저 죽어야 하고 또 그것이 사랑의 정신이 파괴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것임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율법을 부과했던 처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녀는 매우 진지했고 또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도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돌이켜 자신 위에 부과했던 한 새로운 율법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방금 전에 인용했던 그 사도의 말씀, 곧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폐하라는 말씀은 바울이 언급했던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보여 주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현재에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어떤 일들의 견지에서 해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새로운 율법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부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후에 이에 대한 계속적인 설명을 시도할 텐데 세밀한 것은 그때에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것을 원리적으로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종의 영'은 언제나 그것을 수반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두려움의 영이 나타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종의 영을 주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여기에서는 "너희가 또다시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적 침체와 치유'(로이드존스) 제12장 종의 영(211~218p)에서 발췌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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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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