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된 욕심

얼마 전, 이스라엘의 무차별적인 폭격을 맞고 무너진 가자지구의 한 민간인 아파트 건물 더미 아래서 신음하던 젊은 여인을 봉사자들이 힘을 합하여 무사히 구출해낸 장면을 뉴스로 보면서 세계인이 모두 기뻐한 적이 있다. 이 여인은 임신 8개월의 무거운 몸이었고 병원으로 후송하던 중 안타깝게도 차 안에서 숨졌다. 죽은 어머니로부터 제왕절개로 태어난 아기가 인큐베이터에서 살아 숨 쉬는 앙증스러운 모습이 전 세계로 방영되는 것을 보면서 악한 세상에서 기적을 본다면서 누리꾼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그 기적의 아기는 끝내 작은 인큐베이트 안에서 눈 한 번 제대로 떠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고 이렇게 푸르른 어머니와 아기가 어이없게도 어른들 욕심의 희생제물이 되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 슬픈 소식은 전 세계 누리꾼들의 분통을 터트리기에 충분했다. 언제나 그렇듯, 전쟁의 희생자는 항상 힘없는 아이와 여자. 노인이란 것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자기 백성을 보호해야할 지도자 ‘하마스’가 오히려 자기 백성을 방패로 삼아 자기의 욕심을 충족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제적, 수적으로 열세한 ‘하마스’가 이스라엘 민간인을 타켓으로 자살 테러를 부추기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보복을 목적으로 가자 지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 민간인의 거주지도, 어린 새싻들의 배움터인 학교 건물마저 아랑곳하지 않고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하고 있다. 지금껏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사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보건부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대규모 공격으로 죽은 가자지구의 희생자 3분의 2는 민간인이라고 한다. 팔레스타인 인권센터에 따르면, 가자지구 주민 약 13만 명은 집을 떠나 국경 쪽으로 피신했고, 6만 명 이상은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기구가 학교시설에 마련한 대피소로 몸을 피하고 있다. 이들은 전기 공급 중단과 식수, 의료품 부족 등으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무서운 일의 시작(뿌리)은 어디서부터인가? 그것은 사명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인간의 욕심 때문이다! 육적으로는 양국 간의 권력욕, 물질 욕이고 영적으로는 이스라엘과 이스마엘의 숙명관계다. 이스라엘은 성경에 근거한 약속된 땅을 되찾고자하는 시도, 즉 사명으로 포장된 욕심이지만, 세상법과는 조화될 수없는 시도라 하겠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질문을 받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입술로는 아름다운 말로 자신의 마음속 욕심을 포장한다. 물론, 모두가 다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많은 전문인들이 그렇다. 억울한 자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호언장담하는 변호사님들, 그러나 막상 억울한 일을 당해 찾아가면 터무니 없이 비싼 사례비를 요구하는 것을 보게 된다.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는 의사선생님들, 때때로 진료비가 없으면 진료를 거부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사명으로 포장된 욕망의 끝은 어딜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정치인들에게서는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겠다.

이런 예는 성경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구약 성경의 발람이 그랬고, 신약의 가롯 유다가 그랬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께 다가와 “랍비여, 평안하십니까?” 입맞춤으로 자신의 욕심을 포장하였다. 구약성경의 발람 선지자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직분을 가지고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하는 삯꾼 목자, 거짓 선지자의 대표적 인물이다.

유다서 1장 11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발람의 길’이란 삯꾼 목자의 길이다. 이렇듯 하나님이 주신 직분을 사사로운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는 자에겐 멸망과 심판이 기다릴 것뿐이다(딤전 6: 20-21). 그렇다면, 현대 교계는 예외인가? 목사님들은 과연 제대로 된 사명 자들만 계실까? 현란한 말솜씨가 사명자의 길인가?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바른 복음을 전해야 한다. 특히, 부름을 받은 자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란 것이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기쁜 소식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나눌 수 있어야 하고 그 복음을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사명 자는 행동하기 전, 먼저 본인의 삶 속에 사랑의 주체이신 주님을 만나야 한다. 주님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는 “내가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일하는가?” 확실한 목적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에만 집착하다 보면 본인에게도 남에게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내 마음 가운데 과연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여유와, 충만함, 그리고 참사람, 그리스도의 피로 회복된 전인적 인격을 갖춘 모습이 있는지 없는지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결국 복음은 “일”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사역도 마찬가지다. 내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하여, 이 일을 하는 것인지, 그 대상과 목적을 분명히 해 두지 않으면 이토록 맹목적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나는 지금 누구를 위해 살고 있으며 하나밖에 없는 나의 생명, 누구를 위해 바칠 것인가? 한 번쯤 깊이 생각하며 심사숙고해 보아야 한다는 것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성도는 물론이거니와 복음을 맡은 사역자들이라면 더욱더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역자가 자신의 사역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동역 자들, 부교역자나 곁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 상처를 입히고도 나는 거룩하고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내가 가장 많이 알고…등등의 자고 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지도력 혹은 깨달음을 따르라 강요하고 있는가? 또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도 더욱 효율적인 사역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사역이란 말인가? 욕심이 사역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사례라고 보겠다. 이 시점에 와서 우리는 주님의 사역 방법을 다시 한 번 배워보고 우리들의 사역자세도 재검토해 보아야만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셔서 감당하신 사역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이지 사람을 희생시키며 그들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히고 죽이려 함이 아니었다는 그 중요한 사실을 우리는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혈기를 죽여야 한다, 교만을 죽여야 한다, 정욕을 죽여야 한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정신없이 뛰고 있는가? 일의 동기 가치를 부여하라(value entitlement), 목적에 가치를 부여하라, 발걸음(행보)에 가치를 부여하라, 삶의 가치를, 죽음의 가치를 부여하라.

우리는 심지 않은 것, 거두어들이는 일에 참여하는 것뿐이다. 생명으로 생명을 심은 이는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 생명을 거두어들이는 기쁨에 참여하기 위하여 부름 받은 종일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심지 않은 생명을 주와 함께 거두어들이는 기쁨을 누리는 특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육신대로, 정욕대로 살겠다 고집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지금 열심 내고 있는 그 일속에 그리스도와 그의 사랑이 빠졌다면 문제다. 그런 사람이나, 그런 마음으로 행하는 사역, 역시, 자살폭탄 테러범만큼이나 어리석고 무모한 짓이며, 사람을 죽이고 자기도 죽는, 그야말로 일말의 가치조차도 없는 하찮은 일에 목숨 거는 것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병기로 사용되게 원수에게 내어주지 말고 사람을 살리는 일, 그리스도의 일꾼, 의의 병기로 사용되어지도록 주님께 내어 드려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잘못된 믿음, 올라가려고 하는 마음, 진실함이 없는 현란한 언어의 유희, 내면적 그리스도인이 아닌, 표면적 유대인이 되어서 외식하는 지도자들, 이렇게 허황된 신기루 같은 거짓 믿음을 사명자란 그럴듯한 포장지로 미화시키는 마음이 자기 자신과의 분열, 대인 관계에서 분열과 자중지란을 일으키게 되고, 더 나아가 감정을 와해(瓦解)시키고, 결국 모든 것을 공중분해(空中分解)시켜버리는 것이라고 말하면 너무 무리한 말일까?.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그리스도의 선물인 은혜를 주셨다. 서로 다른 극단적인 견해차를 보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데 도구로 사용하길 원하신다. 욕심을 버리면 내가 보이고 내가 보이면 우리가 보일 것이다.

나와 너 우리, 모두 다르다. 다양성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안다면, 나와 다르다고 하여 형제. 자매를 원수로 삼지 않을 것이고 사명이란 이름 하에 상대를 무차별 사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와 다르면 비록 성경에 있는 말씀을 믿는다고 고백할지라도 나와 다른 견해는 이단으로 몰아 죽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어디로부터이겠는가? 내 마음속에 과연 올라가려하는 욕심이 없는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상대를 정죄하기 전,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마음을 넓혀야 한다. 나와 다른 것은 수용하고 공존하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것을 주께서 원하고 계심을 항상 염두에 두고 행한다면, 결코 사명이란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려 모함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누구를 위하여 일하고 있느냐.” 내 영혼 깊숙이 파고들듯 울려오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나는 통곡한다. 나 자신만이라도 형제의 영혼을 먼저 생각할 수 있기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로마서 12:3)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찌어다 "(딤전 6: 20-21)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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