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 복음의 필수 부분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처음부터 전인(The whole man)에 대한 신유는 중요한 부분으로 인정해 왔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선포하라 명령하신 복음의 한 부분이다.  하나님의 성회 근본진리의 선언에 있는 하나님의 성회 헌법 제12항은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신유는 복음의 필수부분이다.  질병에서 놓임 받는 것은 속죄 안에서 제공되는 것이며 모든 신자들이 누리는 특권이다.(사 53:4-5, 마8:16-17, 약5:14-16). 이 선언에 포함된 모든 사실과 양상을 여기에서 모두 다루는 것이나, 이에 관하여 제기되는 모든 문제에 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 성명이 성경적으로 건전한 것임을 보이고저 한다. 


복음의 필수부분 


  예수와 제자들의 사역을 관할해 볼 때 신유는 과외로 행하는 어떤 일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신유는 예수가 아버지를 나타내시는 자로, 약속된 메시야로 그리고 죄에서 구원하실 자로 오신 것을 증거하는 중요한 요소였다.(요10:37, 28). 성경은 예수의 신유의 사역과 그의 구원하며 용서하시는 사역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의 치유하시는 능력은 실제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그의 권 위에 대한 증거이다.(막2:5-12). 반복적으로 그의 치유의 기적은 그가 복음을 전하는 것과 병행하며 똑같은 동정을 보여준다.(마4:23, 9:35-36)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온 것은 그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병고침을 받기 위함이었다.(눅5:15, 6:17-18)  그는 아무도 거저 보내지 아니하시고(마12:15, 14:14) 그에게 나온 모든 사람들의 질병과 기형된 것과 불구된 것과 상처받은 것을 고쳐주셨다.(마15:30,31, 21:14) 그는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으셨으며 귀신이 일으키는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마4:24) 예수는 질병이 자주 죄의 결과 임을 인정하셨고(요5:14), 또는 사단의 활동에 의한 것임을 인정하셨다.(눅 13:16) 그러나 또한 예수는 질병이 항상 죄의 직접적인 결과만은 아님을 인정하셨다.(요9:2,3) 이것은 때때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기회가 되기도 하였 다.(막2:12)   


치유의 기적은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셔서 하게 하신 사역 중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요9:2,3) 이것은 치료하시는 주 혹은 위대한 의사로서 하나님의 계시한 구약과도 일치한다.(출15:26, 시103:3, 여기서 이 두 경우에 사용된 히브리 분사들은 그것이 치료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임을 가리킨다.) 예수는 신유가 여전히 하나님의 본질과 계획의 중요한 부분임을 보이셨다.   


치유는 또한 예수를 약속된 메시야와 구세주로서 확인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 위대한 의사로서 예수는 이사야 53:4의 예언은 성취하셨는데 이 구절은 히브리어를 보면 매우 강조적이다. 즉 “그는 진실로 우리의 아픔을 자신이 짊어지셨고 (들어서 가져 가셨고), 우리의 고통을(무거운 짐으로서) 옮기셨다.” (여기서 ‘질고 ’라는 말은 아픔이나 질병과 같은 단어이며 ‘슬픔’이라는 말은 욥 33:19 에서 사용 된 육체적 고통과 같은 단어이다.)   


마태는 이를 예수의 치유사역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아픔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마8:17 을 문자적으로 직역한 것임). 이사야는 이것을 예수의 구속사역과 연계시키고 있다.(사53:5) 그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이며 우리를 하나님과의 화평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즉 “그가 채 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의 문맥과 벧전 2:24,25 의 적용은 특히 치유 혹은 죄로부터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 53:4 의 육체적 아픔에 대한 강조점을 볼 때 이 문장은 우리의 죄나 제멋대로 행한 것에 대한 영적 및 육체적 결과로부터 치유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예수가 바로 약속된 메시야인지 아닌지 혹은 자신처럼 메시야 앞에 보냄을 받은 자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때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며 기적을 행하는 메시야적인 사역에 주의를 환기 시킴으로써 대답을 대신하셨다. 치유는 복음의 필수 부분이며 중요한 증거였다.(사 61:1,2, 눅4:18, 7:19-23). 신유는 계속해서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복음의 필수 부분이었다. 예수는 12제자와 70명의 제자들을 보내어 복음을 전파하며 아픈 사람을 고치게 하셨다.(눅9:2, 10:9) 오순절 이후 많은 기사와 이적이 사도들에 의해서 행해졌다.(행2:43) 누가는 사도행전을 예수께서 사도들과 성령이 충만한 교회를 통하여 행하시고 가르치신 것의 장으로 취급하였다.(행 1:1,8 2:4)   


그러나 기적은 사도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예수의 약속은 그의 이름으로 구하는(다시말하면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본질과 목적에 맞게 구하는) 모든 신자들에 대한 것이었다.(요14:12-14) 하나님은 빌립과 같은 집사를 사용 하셔서 복음을 전하며 치유하게 하였고(행8:5-7), 아나니아와 같은 무명의 제자를 통하여 사울(바울)을 치유하게 하셨다.(행9:12-18) 마가는 신자들의 사역에서 치유를 지지하고 있다.(막6:13, 9:38,39, 16:15-18) 신유의 은사는 교회를 세우고, 덕을 세우기 위한 성령의 나타남 중에 포함되며(고전12:7),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증거하는 것과도 관련된다.(고전12:3)   


율법 아래서는 제사장이 관심의 대상인데 그 사역은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을 가리킨다. 이 위대한 대제사장은 무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다.(히4:14,15) 제사장은 희생제물의 피를 뿌림으로써 사람들의 죄를 속한다. 히브리어 성경 안에 나타난 속죄에 대하여 조사한 결과 대부분의 경우에 그것은 구속과 회복을 위하여 지불하는 몸값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를 흘리셨는데 속죄는 바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문자적 으로 속죄소)로 세우셨다.(롬3:25)   


속죄소(Mercy seat)에 대한 말씀은 레위기 16장에 거슬러 올라가는데 대제사 장이 일년에 한번 속죄제물의 피를 속죄소에 뿌리기 위하여 들어갔다. 속죄소는 법궤의 꼭대기에 놓여 있는 금으로 입힌 부분이다. 법궤안에 십계명을 적은 돌판이 있는데 이 계명은 바로 사람들이 어긴 하나님의 법이었다. 율법을 어기면 심판을 초래하고 결국 죽음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죄없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보시고 자비와 축복을 주실 수 있다. 속죄의 원래 목적은 죄를 깨끗이 씻는 것이었다.(레 16:30, 롬5:11 여기서 “속죄”라는 말은 롬11:15 이나 고후15:18,19 에서 “화목 ”이란 단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축복과 호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죄의 결과와 벌에서 속죄를 통하여 면제되는 것이 자명한 일이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에 대한 심판을 사람들이 불평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염병을 보내셨다. 그때 모세는 아론을 회중 가운데로 보내여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더니 그 전염병이 그치게 되었다.(민16:47,48) 우리는 또 한 이스라엘의 수효를 계수할 때 그들의 구속과 그들에게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속전으로 반세겔을 내야 했음을 읽을 수 있다.(출30:12,15) 이 와같이 속죄를 아픈 것을 포함한 죄의 결과를 위하여 제공되었다.   


성경은 사람이 자신의 구속을 위하여 값을 지불할 수 없다고 명확히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속죄를 제공하셨다.(롬3:25, 시65:3, 78:38, 79:9, 롬3:21-28) 이 속죄는 죄뿐만 아니라 죄의 결과를 위하여 제공되었음이 호세아에 의하여 묘사되고 있는데 호세아는 그의 아내가 노예시장에 팔리게 되었을 때 상당한 값을 지불하고 그의 아내를 도로 샀다.(호3:1-5, 13:4, 14:4) 이것은 구리뱀 사건에 의하여 더욱 설명 되고 있다. 즉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살기 위하여 바라보는 것뿐이었다.(민 21:9) 이 모든 것은 갈보리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요3:14-16) 거기서 예수께서 전인(Whole man)을 위하여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다. 신약성경은 이것을 구속이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속죄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구속과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다.(롬3:24, 엡1:7, 골 1:14, 히9:15)   


다시 말하거니와 속죄는 죄의 결과를 위하여 드려진다. 질병이 죄의 직접적인 결과로 인한 것이 아닌 경우일지라도 역시 죄 때문에 세상에 질병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예수께서 오셔서 멸하고자 하시는 마귀의 일들 가운데 있으며(요일3:8), 이와 같이 속죄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오실때까지 우리 몸의 구속을 아직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신음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롬8:23)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새로운 몸을 받게 된다.(고전 15:42-44, 51-54) 그러므로 구속과 속죄 사이의 병행을 통하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몸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 롬 8:23에서 말씀하시는 구속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구속과 관련지어서 이제 죄의 용서를 받는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되어 그의 형상으로 변화할 때 우리 몸의 구속을 받게 될 것이다.(고전15:51-43, 고후5:1-4, 요일3:2) 신유는 이러한 것을 미리 맛보는 것이며 복음의 모든 축복과 같이 속죄로부터 흘러오는 것이다. 또 사53:4 은 구체적으로 육체적인 질병을 말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그의 속죄 안에서 죄뿐 아니라 속죄가 예수께 나오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수단으로서 신유를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신자들의 특권 


  구원이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처럼(엡2:8), 모든 하나님의 축복과 은사도 그의 은혜 혹은 공로없는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의 것이 되었다. 우리가 우리의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며 우리가 그것들을 받을 만한 존재도 아니다. 신약에서 어느 누구도 치유해 줄 것을 당연한 자세로 청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간구하기 위하여 예수께 나왔다. 그들은 그들의 권리로서 치유를 바라보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은혜스러운 특권으로서 그들에게 주어졌다. 신자의 특권으로서 치유의 약속은 복음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제외하지 않는다. 우리는 당연히 주님의 모범을 따르는 일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히5:8, 벧전2:19,21, 4:1214, 19)   


또한 우리는 신유를 육체적, 정신적 건강의 법칙에 순종하는 것에 대한 대용물 (substitute)로 보지 않는다. 예수는 제자들이 무리를 떠나 잠시동안 쉬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셨다.(막6:31) 이드로는 모세가 자기의 책임 중 일부를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하지 않으면 탈진하게 될 것을 보았다.(출18:18) 또한 신유는 노화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모세는 그가 죽을 때까지 힘이 쇠하여지지 아니하고 눈도 밝았었다.(신34:7) 그러나 이러한 특권이 다윗왕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왕상1:1-4) 전도서 12:1-7 에 잘 묘사된대로 점진적인 노화현상은 신자나 불신자에게 임하는 공통적인 경험이다. 치유는 여전히 노인에게도 가능하다. 그러나 치유된 부분이 몸의 다른 부분과 같이 노화되어 간다. 우리는 아직 몸의 구속을 갖지 못하고 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다른 피조물과 함께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질 날을 인내로 기다리면서 신음하며 고통중에  탄식하고 있다.(롬8:2125) 우리가 이 몸을 위하여 무엇을 하든지, 몇 번씩 치유를 받든지 상관없이 만일 예수께서 더디 오신다면 우리는 죽음을 맛 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낙심 시키기 위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성령 안에서 우리의 생명을 촉진시키고 진작시켜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며, 성령은 우리를 소생시키시므로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다.(롬8:11) 사실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진다.(고후4:16)   


실제로 신유의 특권을 보유하기 위하여 필요한 믿음을 갖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은 이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혈루증을 치료받은 여인에게 예수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말씀하셨다.(막5:34)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복음을 듣는 것이 앉은뱅이의 마음에 치유받을 만한 믿음을 불어 넣어준 것을 보고 그에게 일어서라고 명령하였다.(행14:9,10) 마음의 속사람이 새롭게 되는 것은 (롬12:2, 골3:10)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한 로마 백부장의 큰 믿음에서도 볼 수 있으며(마8:5-13) 부스러기라도 자기의 필요를 만족시킬 것이라고 믿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볼 수 있다.(막7:24-30, 마15:28)   


신유가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은 나사렛과 변화산 기슭에서 불신앙이 그 역사를 방해했던 사실을 통해서 증명된다.(막6:5,6, 막17:14-20) 거기서 예수께서는 기도와 금식으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 필요함을 지적하고 계신다.(막 9:29) 기도는 구약에서 중요한 치유의 수단 중 하나였다. 많은 시편이 치유를 위한 기도를 포함하고 있다. 많은 예언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치유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약 5:15 은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며, 주께서 그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큰 믿음은 주님의 단순한 말씀을 통하여 치유를 받게 한다.   


그러나 예수는 적은 믿음이나 약한 믿음을 가진 자로부터 등을 돌리시지 않으셨다. 병든 자들이 믿음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음을 종종 보게 되는데 예수께서는 그들을 도우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일을 행하셨다. 어떤 사람은 만져 주셨고(막 1:41, 8:22), 그들의 손을 잡아 주셨고(막1:31, 눅14:4) 혹은 그의 손을 그들에 게 얹으셨다.(막6:5, 8:25, 눅4:40, 13:13)   


그는 여러 가지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왔는데 그중의 어떤 것은 믿음을 요구하였으며, 어떤 것은 순종을 요구하였다.(막7:33, 8:23) 또 어떤 사람들은 그의 옷이나 그를 만지는 것이 믿음을 표현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막3:10, 5:28, 6:56, 눅6:19) 베드로의 그림자로 그 당시 같은 효과가 있었다. (행5:15) 또한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도 마찬가지였다.(행19:12) 그러나 믿음은 그들의 믿음을 표현하도록 돕는데 사용된 수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수많은 수단이 사용된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 이외에 어떤 수단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 것 같다.   


약5:14도 같은 내용을 담고있다. 여기서 아픈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라고 가르치고 있다. 치유하게 하는 것은 기름 (성령의 상징)이 아니라 믿음의 기도이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한 그 일을 저도 할 것”이라는 약속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 다.(요14:12-14, 16:23,24) 그러나 그의 이름은 그의 특성과 성격을 나타낸다.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만이 우리가 그것을 우리 안에 가지게 된다.(요15:7) 그리고 우리의 뜻은 그의 뜻과 일치하며, 우리는 우리의 의도하는 바를 구할 수 있고 그것을 이루어질 것이다. 


어떤 사람은 치료를 이스라엘 사람에게 한정시키려고 한다.(특히 출15:26 의 약속인 치료 혹은 건강의 언약) 그러나 백부장의 종이나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에 대한 치료는 치료가 이방인들에게도 해당되는 특권임을 보여준다. 사실 치료를 갈망하며 예수께 반응한 사람들의 경우에 그들의 죄를 아직 다루시기도 전에 치유가 이루어지기도 한다.(베데스다 연못의 38년된 병자의 경우, 요5:2-9, 14) 어떤 사람은 신유를 의학적인 치료와 충돌되거나 경쟁관계에 있는 것으로 간주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의사는 자기 기술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다.   


주님이 위대한 의사이심은 사실이다. 또한 아사왕이 병들었을 때에 저가 여호와 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기 때문에 성경이 아사왕을 정죄한 것도 사실이었다.(대하6:12) 그러나 아사는 이미 불신앙과 불순종의 행동으로 앗수르에 도움을 청하였는데 그때 그는 하나님 의지하기를 거부하였다.(대하:16:7) 강조점은 그가 의사를 찾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이 경우 의사는 이방인 의사였을 것이다.) 하나님께 구하기를 거부한데 있는 것이다.  의사는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음이 확실하다.(렘8:22) 예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기름과 포도주를 약용으로 사용한 것을 말씀하셨다.(눅10:34)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치유되었을 때 우리는 그녀가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아오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증하여졌 다는”(막5:26) 것을 듣는다.  만일에 그 여자가 의사에게 가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여기에서 예수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씀을 안하시고 그 여자가 표현한 그 믿음을 받으시고 그것에 대하여 그 여자를 칭찬하셨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의사들이 포기한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기적을 행하신다.  예수는 또한 열명의 문둥이를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보내셨다.(눅 17:4) 율법 하에서는 제사장이 진단, 격리, 건강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레 13:2 이하, 14:2이하, 마8:4) 이와같이 예수께서는 병을 진단하는 사람을 인정하셨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주님의 대리인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모든 치료는 즉각적이든, 점진적이든 하나님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막8:24) 이와는 달리 성경에서 치료된 사람들이 치료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기까지는 신유를 간증하지 않았다.   


오늘날 신유에 대한 남용이 있음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성경의 진리에 대한 적극적인 선포를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사도들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행3:6)라고 말할 수 있었다.  신유의 은사는 여러 가지 은사 가운데 하나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안에 두신 성령의 나타냄들 가운데 하나이다.(고전12:4-11, 28,29)  다른 은사와 마찬가지로 이 은사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덕을 위하여 몸의 지체들을 통하여 수행되어질 수 있다.(지혜의 말씀이 한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 것처럼 신유의 은사가 사람을 치료자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신선한 지혜의 말씀이 각각 필요에 따라 주어지듯이 신선한 신유의 은사가 성령에 의하여 각각 아픈 사람에 대하여 주어진다.)   


우리는 또한 예수와 사도들의 사역에서 새로운 지역과 새로운 환경에서 복음이 전파될 때 치유의 기적이 특히 현저하게 나타났던 것을 보게된다.  이것을 특별한 기적이 바울의 손에 의해서 행해졌던 경우인 것과 같다.(행19:11) 우리는 신유에 관하여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왜 어떤 사람은 치유를 받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그러지 못한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말씀을 전파하고 이어서 표적이 따르기를 기대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회(윤영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유: 복음의 필수 부분  (0) 2018.10.02
그리스도의 지체 사역  (0) 2018.10.02
제자도와 복종운동  (0) 2018.09.25
영원한 심판  (0) 2018.09.24
그리스도의 지체 사역  (0) 2018.09.2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