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한 신자가 귀신들릴 수 있는가?



동양종교와 미국내의 사교의 보급으로 전에 외국에서 선교사들이 보고한 것과 유사한 귀신들린 역사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런 일은 너무나 자주 발생하는 반면 이러한 영역에 있어서의 가르침은 너무나 미미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신약성 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라는 명령 이상의 것을 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영혼의 원수에 대하여 확고하게 경고하고 있으며, 귀신은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손길”, 성령의 권능,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통하여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다.


극단주의의 위험


  어느 무시된 교리를 강조할 때 성경의 의도를 넘어서 극단주의로 나갈 위험이 있다.  또한 무시된 교리를 전체의 사역으로 삼음으로써 목회의 궤도를 벗어날 가성도 있다.  이것은 귀신론의 주제에 매혹된 어떤 사람들의 경우와 같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관심을 귀신론에 집중함으로써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들이 귀신을 많이 쫓아내면 낼수록 쫓아내야 할 귀신의 수도 많아지기 때문에 귀신쫓는 이외의 사역은 실제적으로 무시된다.   그리스도를 높이기보다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빠지게 되는 이러한 경향은 성 경의 균형에 모순된다.  또한 귀신을 좇아낼 때 여러 가지 토해내는 등 외적인 현상에 대한 부수적인 선입관은 성경에서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귀신이 영적인 존재임을 잊었다.) 거품을 일으켰던 경우에 있어서도 성경은 귀신이 쫓겨가기 전에도 지속적으로 있었던 일이었으며 귀신이 쫓겨날 때만 있었던 현상이 아님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귀신론에 대하여 비성경적으로 지나치게 강조한 경우 유감스러운 부작용이 있는데 그것은 때때로 성경적인 가르침까지도 악평을 듣게되는 것이다.  이것은 16세기와 17세기의 영국 그리고 17세기 미국의 소위 마법의 결과였다.  영국에서 사례들이 보고된 것이 있는데 그중에는 아이들이 그들의 몸속에 들어갔다고 추정되는 악령을 토해냈다는 것이다.   1962년 커튼 마더(Cotton Mather)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바드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유능한 설교가였다.  이 사람이 마녀들에 대하여 메사추세츠주의 살렘에 사는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귀신들린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들의 증언때문에(이 아이들은 다른 설명이 더욱 필요하겠지만 거짓말하는 귀신에 의하여 움직였던 것 같다.) 19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150 명이 감옥에 들어갔다.  고발 당한 사람들 앞에서 이 아이들은 발작을 일으키다가 혼수상태처럼 보이는 상태에 들어갔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당한 고통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대었다.  고발당한 사람 중 상당수는 기독교 순교자에 해당하는 믿음과 정신을 보였지만 인격적으로 고상한 판사는 이 사람들을 유죄로 판결하였다.  이 재판이 공개된 결과로 이때 당시의 미국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하여 외면 하게 되었으며 사탄과 악령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미신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탄이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귀신이나 악령들에 대하여 잘못된 관심을 갖게 하여 성경이 제시하는 명확한 가르침의 도에서 떠나도록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귀신이나 악령에 대하여 잘못된 태도를 갖게 될 때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외면하게 되고 하나님의 일은 방해를 받게 된다.  그러나 조심한다고 해서 귀신론을 가볍게 취급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귀신의 활동과 그들의 수가 많은 것을 명확히 가르쳐 주고 있다.  영어 성경에서 마귀(devils)라는 단어는 실상 귀신(demons) 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더욱 자명한 일이다.   실지로 마귀라는 단어는 (헬라어, Diabolos는 “참소자”이다) 사탄에게만 적용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가 귀신들을 통해서 역사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사탄은 피조물이며 제한받는 영이며, 편재하지도 않는다.  사탄은 세계의 곳곳에 흩어져 있는 귀신들을 통해서 대부분 그의 일을 수행한다.  귀신들을 쫓아내던 예수의 사역은 적어도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치유하는 사역의 일부였다. (행10:38)-여기서 사용된 “눌린”의 뜻은 오늘날 사용되는 의미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제기되는 질문은 오늘날도 귀신이 활동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한 신자도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 있는가 혹은 누군 가가 중생한 신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성령과 귀신이 한 집에 같이 거할 수 있는가?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 아닌가?


저자들이 말한 것 


  대부분의 옛날 저자들은 참된 기독교인들 안에 귀신이 거할 수 없으며 귀신이 참된 신자들을 사로잡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한 예로서 존 네비어스(John L. Nevius)라는 장로교 선교사는 거의 40년간 중국에서 살았는데 귀신들린 사례를 많이 보았지만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빅톨 플리마이어 (Victor Plymire)라는 오순절 계통의 개척 선교사는 티베트에서 유사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더욱이 최근 여러 교단의 저자들은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넬슨(M. H. Nelson)이라는 의사는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고통당하는 듯이 보이는 기독교 인들에 관한 많은 보고서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들 중 몇몇은 하나님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불순종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외견상 이 의사는 영원한 보장을 믿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귀신이 신자의 몸과 마음에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신자의 몸이 귀신에 의하여 사로잡히는 것은 매우 의심스럽다 고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귀신이 기독교인의 속사람을 사로잡지 않은 채 기독교인의 몸속 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하는 성경의 관점에 배치되는 것 같다.  또한 책임이 관계되는 한에 있어서 한 사람을 여러 모양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이방인의 사고방식이다.  만일에 귀신이 몸이나 마음(혹은 자세)중 어느 영역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들어간 것이 된다. 


성경이 말하는 것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문제들로부터 구원하고 계시며, 귀신들리는 것 으로부터도 구원하신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일어난 사건에 대한 그들의 해석과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는지 우리는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비겁하게 두려워하는 영(spirit of cowardly fear)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으로부터 구원받으려면 두렵게 하는 귀신과 근신 혹은 절제의 영(한글판에는 spirit 이 마음으로 번역되었음:역자주)으로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두려움을 쫓아낼 필요가 있는 악한 영이라고 해석한다면 동일한 논리로 선한 영들이 들어오기를 간청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잘못은 명확한 것이다. 

 

사랑이나 절제는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들이다.  사랑이나 절제의 영은(a spirit of love and of self-control) 우리가 성령을 따를 때 결과로서 나타나는 자세를 의미한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영(spirit)이라는 단어는 자세 혹은 기질을 나타낸다  다윗은 상한 영(broken spirit:상한 심령, 시51:17)이라고 말했으며 솔로몬은 겸손한 영(humble spirit: 마음을 낮추는 것, 잠16:19)이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고린도에 갈 때에 매대신 사랑과 온유한 영(love and meek or gentle spirit:사 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하였다.(고전4:21) 베드로는 온유하고 조용한 영의(meek and quiet spirit: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 로 단장하라고 말하였는데 (벧전3:4) 실제로는 조용한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이라는 단어는 자기 자신의 심령이나 그것의 표현으로 자주 사용한 것 을 알 수 있다.(학개1:14), 행17:16, 고전2:11 등. 그러나 학1:14, 행17:16 에 서 spirit 을 한글 성경에서는 마음으로 번역했다 : 역자주)   이와같이 문맥상 독립된 영적 존재라는 뜻이 나타나 있지 않다면 거만한 영, 성급한 영, 졸리운 영, 시기의 영 등과 같은 말은 귀신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갈6 장) 이나 죄의 기질로 취급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이러한 죄의 기질을 귀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개인 개인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지 않게 되며, 회개할 필요성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은 이러한 죄들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세를 버리라고 한다.  우리 안에서 싸우는 싸움은 성령과 귀신 사이에 싸움이 아니라 내 주하는 성령과 육신과의 싸움인 것이다.(육신은 죄의 경향을 띤 모든 감각기관을 의미한다.) 


  “영”이라는 단어가 귀신에 대하여 사용될 때는 성경은 악령 혹은 더러운 영이 라고 말한다.  때로는 이 단어는 같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더러운 마귀의 영(a spirit of an unclean devil, 한글 성경에는 더러운 귀신으로 번역되었음: 역자주. 눅4:33)과 같은 것이 있다.  많은 경우 이 귀신들은 질병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모든 질병을 귀신이나 악령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실재로 많은 구절들이 귀신에 의한 질병과 그렇지 않은 질병 사이에 분명한 구분을 보여준다.(마4:24, 8:16, 9:32,33, 10:1, 막1:32, 3:15, 눅6:17,18, 9:1 등) 이들 중 어느 구절에도 귀신에 의한 질병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있었다는 단서를 보여주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모든 예가 오순절 이전에 사건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이모니조마이”라는 헬라어에는 귀신에게 사로잡히다, 혹은 귀신들리다라는 뜻인데 많이 나타나지 않는 단어이다.  이것은 오직 한번 동사로 사용되었는데 심하게 귀신들린 가나안 여인의 딸의 경우이다.  그 외에는 “귀신들린”이라고 번역 되는 분사로써 사용되고 있다. (마8:28,32, 9;32, 12:22, 막5:15-18, 눅8:35) 다시 말하거니와 이 귀신들린 사람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 고 할 수 있는 단서는 없다.  이들 중 대부분은 심한 괴로움을 겪거나 급격한 인격의 변화를 경험하였다.    신자도 귀신들릴 수 있다는 사상은 또 다른 큰 문제를 야기시키는데 그것은 믿음을 잠식하며, 하나님과 하나님이 제공하는 구원에 대한 개념을 약화시킨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1:13) 지난 시대에는 우리가 이 세상 풍속을 쫓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다 (엡2:2)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였으며 우리를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으로 삼으셨다(엡2:19)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되었는데 우리의 몸 안에 귀신이 거한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린다.   우리가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롬6:17)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도록 자 유인이 되었다.  지금도 신자는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  만일 신자가 죄를 짓는 다면 그것은 그렇게 하고자 하는 자기의 의지 때문이지 귀신에 의해서 침입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로마서는 귀신을 좇아낼 것을 요구하지 않고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데 사람이 믿음으로 자기의 신분이 결정된다.   

 

 만일 신자에게 귀신이 있다면 예수님도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분쟁사태를 초래 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 낸다고 말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사탄의 왕국이 서로 대적하며 분쟁하고 있다고 가정하였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거부하였다.  눅11:21,22 은 사탄이 신자를 사로 잡으려고 할 때에 예수께서 사탄을 이기시고 무장해제 시킨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귀신이 돌아와서 그 집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만 귀신이 다시 들 어갈 수 있다.(눅11:24-26, 마12:43-45)   진실한 신자에게 귀신이 있다는 사상은 또한 구원과 평강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잠식한다.  이것은 신자가 다음 어떤 귀신이 자신을 침입할지 전전긍긍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엄청난 두려움을 자아내게 한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가 소유했다고 확신시켜주는 자유와 배치되는 것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이나 2 세기 교회의 신자들은 이런 종류의 두려움을 갖지 아니했다.   주후 139년경에 목자(The Shepherd)라는 매우 영향력 있는 기독교 책을 슨 헤마스(Hermas)는 부패를 책망하며 기독교의 덕목을 격려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사람 안에서 악령이 거하면서 주관할 수 있다고 말하였지만 이러한 악령을 지니고 있는 사람 안에 성령이 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였다.  성경은 신자를 위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4:4).  신자는 귀신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이다.  이것은 기본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외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지적한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사탄이 그 안에 가득하여 성령께 거짓말하기 전에 이미 타락하였던지, 아니면 스스로 교회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다.(행5:13,14 참조) 적어도 그 당시에 자칭 그리스도인 이상은 아니었다.


악령을 대적할 것 


  귀신들린다는 말을 진실할 신자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하게 보인다.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사탄과 그의 무리들은 외부적인 원수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탄의 세력에 대하여 전쟁 중에 있으며 그들은 우리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엡6:12 참조) 성경적인 강조점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에서 무엇을 대면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 요구는 우리가 누군가를 시켜서 우리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은 밖에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으며 시험하고 있지만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요구는 깨어 있어 전신갑주를 입고 굳게 서라는 것이다.(고후10:3-6, 엡6:10-18, 벧전5:8,9)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사탄을 물리쳤다.(마 4 장)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사탄과 그의 귀신들을 믿음으로 대적해야 한다.(약4:7, 벧전 5:8,9) 그리고 믿음의 방패는 원수의 불화살을 꺼버릴 것이다.(엡6:16,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대대로 천사를 통해서 오듯이 사탄의 공격도 대대로 귀신이나 귀신들린 사람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사탄의 공격이 외부적이라는 사실은 욥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의 육체에 있는 가시의 경우인데 바울은 이것을 자기를 치기 위하여 사탄이 보낸 사자라고 불렀다.(고후12:7 참조) 바울은 이것을 떠나게 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간구하였으나 하나님은 거절하시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하셨다.  그 결과 바울은 그의 연약함과 수치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여기서 사탄의 사자가 귀신인지, 질병인지, 혹은 사람인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치고 공격하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내쫓아 달라고(cast out) 간구하지 않고, 떠나게 해 달라고(to be kept away) 간구하였다.  또한 우리는 바울이 그 자신과 우리 안에 서 유일한 소망으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보고 있음을 유의하여야 한다.(골 1:2,29) 


  우리는 또한 영들 분별의 은사가 성령의 내주함이 없는 사람들을 주관하는 영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지 신자들 안에 있다고 여겨지는 귀신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만일 진리가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다.(요일2:24) 오직 우리가 포도나무에서 잘려져 죽은 가지로 버려졌 을 때만이 사탄이나 혹은 그의 귀신들이 우리를 주장할 수 있다.  우리의 구속은 전인적인 구속이다.  모든 대가는 이미 지불되었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그리스도가 귀신들렸다고 공격하였다.  그것은 마귀의 교묘한 수작으로서 오늘날 성실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이 귀신들렸다고 공격하게 만드는 것이다.  확실히 여러가지 구원들이 있다.  그러나 귀신들림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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