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 시 119:163-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라.(시 119:165) 
 Great peace have they which love thy law: 
 and nothing shall offend them.(Psalms 119:165)]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 앞에 별명을 붙여 주기도 하고
상징적 이름을 별명으로 대신 쓰기도 합니다.
(돼지 같은 사람, 법이 없어도 사는 사람 등) 

1세기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름 앞에 꼭 붙이는 별칭이 있었습니다. 

그 별칭이 티테디오스(Titedios)라는 말입니다. 

이름 앞에 꼭 티테디오스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바울의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 바울,
티테디오스 베드로 라고 불렀습니다.
 
티테디오스 라는 말은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초대교인들이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를 붙인 이유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죽음 앞이나
어떤 환경에서도 '염려 근심 걱정에서 
해방된 자'라는 것을 증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충만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고백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환란과 핍박 속에서 집을 빼앗기고
재산을 약탈당하고 직장을 빼앗기면서도
예수님의 피 값으로 내 생명을 살려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예수 안에서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서로 고백하는 증표로 티테디오스 요한,
티테디오스 도마, 티테디오스 스데반,
디테디오스 폴리갑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고백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티테디오스 목사, 티테디오스 권사,
티테디오스 장로, 티테디오스 집사,
티테디오스 성도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고백입니다.

요즘 우리의 환경이 그리 녹녹치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주변 강대국들의 국제관계뿐 아니라
하노이 북미 결렬로 한치 앞의 문제를 
예견할 수 없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어쨌던 꼬인 실타레를 풀고 싶어 
한미 정상회담을 4월 11일에 한답니다.

잘못하다간 꺼져가던 북한 핵이 다시 살아나고
볼모로 잡혀 끌려 다닐지도 모르는 문제 속에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드를 배치시키고 준비했다지만
이것은 실효성에서 공격용이 아닌 
방어용에 그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만 바라보고 기댈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또한 중국도 원론적인 대화와 평화만을 강조하면서 
북한의 핵무장을 적극 저지하려는 자세는 볼 수 없습니다.

북한 미사일 발사를 우려하면서
우리가 방어하기 위해 사드를 배치한다고 할 때에
중국의 태도는 우리에게 큰 배신감만 느끼게 합니다. 

우리의 안보를 강대국에만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불안하고 초라한가를 처절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아무리 혈맹관계라 해도 국가생존이 달린 국가안보를 
동맹국에만 의존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스라엘은 주변 적대국들 사이에 
80기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만 
사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핵 주권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스라엘과 같은 생존전략을 배워야 합니다. 
누구도 이스라엘을 건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안보나 외교 전략을 
원점에서 새로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유사시를 대비해서 자체 잠재력을 키워야 합니다. 

다시 자주국방을 든든히 세워가야 합니다.
상대는 핵이라는 대포를 가지고 덤비는데
우리는 소총가지고 싸우겠다면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정치권도 안보에 깊은 관심을
국민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당리당략에만 혈안되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라 없는 정치나 경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국가 안보를 정치에 이용한다면
국민은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가안보에 여야가 따로 없습니다. 
북한은 남남갈등을 노리고 있습니다. 
온 국민이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입니다. 

이런 어려운 난국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향해 기도의 손을 높이 들어야 합니다.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생사화복의 열쇠가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지켜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고
통일도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염려하는 일들을 주의 손에 맡기고
우리 민족을 하나님이 지켜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전쟁을 보면
승패가 무기나 사람의 숫자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손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서독의 통일은 전문가들도 
20, 30년이 지나도 힘들다고 했는데
예상을 뒤엎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이 되었습니다. 

배후에 기도의 힘이 있었음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세상이 요동칠지라도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처럼 세상 것 때문에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 티테디오스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 
험난한 인생길을 살아오면서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셨다고 고백하는 
결코 염려하지 않는 티테디오스 다윗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본문에 다윗은 3가지의 
진정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 다윗은 정직한 신앙으로 살기를 고백했습니다.(163절)

1) 나는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한다(163절)고 했습니다.

다윗은 지난 날 정직하게 살지 못했습니다. 
이를 통해 엄청난 고난을 경험했습니다.
그 후에 정직하게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고 숨기려고
충신 우리아를 전쟁터 맨 앞에 세워서 죽게 만든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 죄값으로 자식이 죽기도 하고
아들이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반기를 들었고
왕이 맨발로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믿었던 신하가 구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 모든 죄를 숨기려고 거짓된 인생을 살았던
죄값이었습니다. 

이런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침상이 젖도록 눈물로 회개하며
하나님께 정직하게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라고 기도했습니다. 

사실 손발이 죄를 짓고 몸이 죄를 지었는데
오히려 몸을 고쳐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고쳐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내 마음 속에 정직한 영을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 이후로 내가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거짓을 버리고 정직하게 돌아올 때
하나님은 다윗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허물과 실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정직한 사람을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도 지난 날 잘못 산 것이 많을지라도
정직하게 돌아오면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사업도 정직하게 해야 합니다.
음식점을 하면서 조미료나 넣어서 입맛을 속이려고 하거나
곰탕에 우유를 타서 우러난 뼈국처럼 만들어 장사한들 
얼마나 가겠습니까? 언젠가는 들통이 나서
문을 닫게 됩니다. 

정직함이 자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관계도 정직해야 하고 
부부관계나 친구관계나 성도 관계나 
모두 정직이 제일 중요합니다. 

물질문제에 있어서도 신용이 분명해야 합니다. 
사실 친한 사람일수록 물질관계를 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돈을 빌렸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값아야 합니다. 
신용이 자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지역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장로가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처럼 행동하더니
성도들에게 많은 돈을 빌려서 도망을 갔습니다. 

이자를 20, 30%씩 몇 개월 잘 주니까
사람들이 집까지 담보해서 돈을 맡기고
친척 친구를 소개하면 소개비까지 주었답니다. 
상식적으로 20, 30%이자를 주는 사업이
정상적이겠습니까? 금융 다단계였습니다.
사기를 치고 잠적해 버렸습니다. 
속인 자도 문제였지만 속은 사람도 문제였습니다. 
상식을 벗어난 물욕에 속았습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나라마다 국민성의 특징이 있습니다. 

독일은 정직성이랍니다. 
물건을 만들어도 튼튼한 정품을 만듭니다. 
그래서 독일에서 만든 자동차나 물건을
선호하는 것은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튼튼하고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독일차 중에 폭스바겐이
리콜을 당했습니다. 배출 가스를 조작했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금전적인 손실뿐 아니라
(Made in germany) 독일에서 만든 물건에 대한 
정직성에 금이 간 것입니다. 

미국은 법치국가입니다. 
모든 것은 법대로 처리합니다. 
준법정신이 강합니다. 
다인종이 살면서도 질서가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공권력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짝퉁 천국이라 합니다.  
중국 제품을 인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뢰가 없고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는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잠 20:10)
장사를 하면서도 저울추를 속이는 것은
사람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속이는 행위가 됩니다. 

다윗은 거짓을 미워하고 싫어한다고 했고
정직하게 살기를 고백했습니다.

2. 다윗은 찬양하며 살기를 고백했습니다.(164절)

1) 찬양은 받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에 은혜가 없이는 찬양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윗이 하루에 일곱 번씩 찬양한다는 것은
7곡이 아니라 7번씩 드린 것입니다. 
다윗은 하루의 출발과 마침이 찬양이었습니다. 
찬양을 한다는 말은 
은혜 안에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마음에 감사와 은혜가 없이는 찬양을 할 수 없습니다. 
세상 근심, 걱정, 염려로 가득차고 복잡하면
찬양이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루에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며
드리는 찬양이 얼마나 됩니까? 
세상에 분주하다 보니 찬송을 잃어버리고 살지는 않습니까? 

찬양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다윗이 악기를 다루며 찬양할 때 사울에게 있던 
악신이 떠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삼상 16:23)

바울과 실라가 옥중에서도 기도하고 찬양할 때
옥문이 열리고, 옥터가 움직이고, 쇠사슬이 풀리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행 16:25-26)
이것이 찬송의 위력입니다. 

계 7장에 흰옷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를 부르면서 찬양을 드리는 것을
사도요한이 보았습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이런 찬양을 새 노래라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동안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보좌 곁에서 
거대한 성가대가 거룩하다 거룩하다 
찬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사 6장) 

성도의 삶은 늘 찬송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찬송한다는 말은 늘 감사가 있다는 말이요,
은혜 안에 사는 것을 말합니다.

전에 선교를 갔을 때 찬송을 통해 
깊은 은혜를 체험했던 적이 있습니다. 

선교지를 왕복 12시간을 오가면서 
1장부터 차 안에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30장, 50장, 100장을 부르는 동안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동행한 선교대원들이 여기저기서 
흐느껴 울면서 회개하기도 하고
기뻐서 감격하기도 하면서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 이후로 선교 여행을 떠날 때는 찬송을 부르자고 합니다. 
그러면 멀미도 덜하고 불평도 안합니다.
피곤도 덜하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면 
얼굴이 환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의 영이 교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충만한 사람은 입안에서 찬송이 떠나지 않고
항상 찬송을 흥얼거립니다.
 
여러분도 늘 찬양을 통해 
악한 영들을 물리치고 영적 승리를 선포하며
성령이 충만한 은혜가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3. 다윗은 주의 법을 사랑한다는 고백입니다.(165절)

1) 주의 법이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말씀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주의 말씀이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다고 했고(시 119:103)
주의 말씀은 내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했습니다.(시 119:105)

인생의 앞길을 비취는 등불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생명입니다. 

말씀은 살아있는 생명이라고 했고
육체와 영혼과 정신까지 전인적인 삶을 치료하는 
수술도가 된다고 했습니다.(히 4:12)

바로 사는지 잘못 사는지 기준이 되는
다림줄이 하나님의 말씀이요,(암 7:7-8) 
말씀은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아무리 반석같이 단단하고 완악한 심령이라도
말씀이 속에 들어가면 깨트려서 
변화시키는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말씀을 사랑하는 자의 결과를 보세요.(165절)

먼저 큰 평안을 주십니다. 
그냥 평안이 아니라 큰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환경이나 조건에서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평안이 아니라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평안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큰 평안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은혜임을 다윗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장애물을 제거해 주십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장애물이 많습니다.
사람과의 장애물, 물질과의 장애물, 
건강의 장애물, 사업의 장애물 등 
수많은 장애물이 복병처럼 숨어있는 세상에서
장애물이 없으리라는 것은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앞길에 평안도 주시고
장애물도 해결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신앙인의 진정한 고백이 무엇입니까? 

다윗처럼 정직하게 살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늘 찬송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말씀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6-8) 

이것이 티테디오스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영적인 삶이요, 
풍성한 은혜의 삶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늘 이런 티테디오스
'결코 염려(근심,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고백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평생감사
김경열 목사    

뉴욕영안교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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