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자족 2 (제레미야 버로우즈)

카테고리 없음 2014. 1. 20. 06:02

그리스도인의 자족 2 (제레미야 버로우즈)

 

 

제 2장 쉽게 이해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자족
 
바울은 자족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문제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이 장(章)은 그리스도인의 자족이 불신자의 눈에 이해하기 어렵게 보이는 여러 가지 측면을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사항들을 숙고해 보면 영적인 이해가 더욱 증진될 것이다.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것, 곧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일이기 때문에 불신자들의 눈에는 어리둥절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1. 그리스도인들은 한편으로는 아주 만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만족하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 신자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든 늘 자족한다. 그들은 언제 어느 때든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심을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항상 불만족한 상태에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자신이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을 겸손하게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들은 오직 천국에서만 죄의 방해를 받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일들로는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아무리 부요할지라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들은 불행하다. 불신자들에게 그토록 큰 기쁨을 주는 듯이 보이는 것들도 신자들은 만족시킬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들은 불행할 것이다.
“하늘에서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시 73:25)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기를 원하는 신자들의 소망을 완벽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가장 암담한 형편 가운데 살고 있는 신자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은혜롭게 자각하게 된다면 기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빌 4:7)을 체험한다. 일단 이러한 평강을 체험하고 나면, 그것이 없이는 결코 행복을 못 느낀다. 그들은 평강의 왕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서는 이러한 평강을 체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할 때에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가장 강력하게 느껴진다.(요일 3:6)
세상 사람들도 평화를 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평강의 왕께 순복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또는 학교에서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가장 만족하고 평화스러운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불신자가 신자에게 “당신은 왜 그토록 만족해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평강을 알기 때문이다』라는 대답을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2. 그리스도인이 자족하는 것은 그들의 소원이 모두 충족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 기대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많은 소유를 확보함으로써 불만족함을 경감시키려고 한다. “이 새 것을 사자, 밖에 나가서 외식하자. 한잔하러 나가자”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러한 것들이 불만을 잠시 감소시켜 줄지 모르나 불만을 없애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처하게 하신 환경에 알맞도록 자신의 욕망을 줄여야 한다. 자족하는 사람들은 영화배우처럼 항상 부유하고 매력적인 사람들은 아니다.
자족이란 얼마나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느냐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자족은 교만한가 겸손한가의 문제이며, 또 어떤 기대를 갖고 있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한 다리는 길고 한 다리는 짧은 사람보다 두 다리가 다 짧은 사람이 더 잘 걸을 수 있다. 많은 소유물을 가지고 있지만 기대가 그것보다 더 크다면 항상 불만을 느낄 것이다. 반대로, 가진 것은 적지만 기대 또한 적다면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이교도 철학자는 오래 전에 이런 말을 했다.
“가장 훌륭한 부자는 욕망이 없는 사람이다.”
 
요즈음처럼 물질에 대한 기대가 끊임없이 증대되고 있는 때에 그리스도인은 좀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욕망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소유를 더하기보다 덜어냄으로써 자족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3. 그리스도인은 또 하나의 짐을 짐으로써 자족을 얻을 수 있다.
또 다른 짐을 더 짐으로써 자족을 얻는다는 것은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많은 환난을 겪은 그리스도인은 환난이 끝나야만 행복이 다시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염려해야 할 또 하나의 짐이 있으니, 바로 죄의 짐이다. 이 죄의 짐에 대하여 더 많이 생각한다면 다른 환난들을 훨씬 가볍게 보일 것이다.
환난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마땅히 공경해야 할 만큼 공경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마땅히 공경해야 할 만큼 공경하지 못하는 것은 죄이다. 우리는 자신의 모든 재산, 건강, 힘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복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은 죄이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에 대하여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하나님을 탓한다면 그것 또한 범죄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좋은 선물들을 남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죄이다. 자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선물들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절감할수록 그리스도인은 환난의 때에도 더욱 자족하게 될 것이다.
 
여기 한 예(例)가 있다. 어떤 한 가정이 소중하게 생각해 오던 계획이 좌절되어 매우 실망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 일로 서로를 비판하며 다투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가정이 믿는 가정이라면, 남편과 아내는 함께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손해야 한다. 다시 한 번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좋은 일에 대하여 그분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도 여전히 슬플지 모르지만, 곧 감사와 자족이 분노와 불만을 몰아낼 것이다.
 
4. 고난이 복으로 바뀐다.

자족을 체험하기 위해 문제점을 먼저 해결할 필요는 없다. 문제점 그 자체가 복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암브로스(Ambrose/339-397년 밀라노의 감독)는 이렇게 말했다.

“가난 그 자체도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부요가 된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영적인 문제를 다루노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에 있는 갈등을 묘사해 주는 말씀이다. 마르틴 루터는 이 구절을 이렇게 주석한다.
“그리스도인은 능력 있는 일꾼이요 놀라운 창조자가 된다. 즉, 우울함으로부터 기쁨을, 두려움으로부터 위로를, 죄로부터 의(義)를,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육체의 소욕”을 가진 사람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도 “성령의 소욕”을 가진 사람에게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어두움 가운데서 빛을 창조하시며 그리스도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환난을 복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5. 자족이란 염려함으로써가 아니라 섬김으로써 온다.

자족은 소유하지 못한 것을 얻으려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얻을 수 있다. 신령하지 못한 사람들은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면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신령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나의 환경을 변화시키셨다. 나는 지금은 부유(건강 또는 행복)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겠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각을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불평이 자신을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한 예(例)로, 구름을 잡기 위해 산꼭대기로 올라가는 어린이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이 꼭대기에 도착해보면 구름은 여전히 더 먼 곳에 있다. 그들은 또 다른 산을 보고 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결코 그들은 구름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환경에 만족해야 하며 자기가 소유하지 못한 것을 얻으려고 계속 손을 뻗치지 말아야 한다.
 
6. 그리스도인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일치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소욕을 변화시키시어 그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되게 하실 때에 자족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그가 갖기를 소망했던 바를 항상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소망 자체가 없어져 버린다. 그리스도인은 기꺼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욕(所欲)을 변화시켜 주시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소원하시는 바를 소원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바를 사랑해야 하며, 그분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하나님께서 부요하게 되신다면, 하나님께서 만족하신다면, 나는 만족한다. 하나님의 지혜와 거룩함이 바로 나의 지혜와 거룩함이며,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고, 나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나는 만족한다.”
 
7. 자족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내면에서 덜 소유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약 4:1).
그리스도인은 경건과 반대되는 내면적인 모든 생각들을 버려야 한다. 자족이란 외부에서보다는 한 사람의 성품 내면에서 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불신자들이 전혀 생각하지 않는 부분들 가운데 하나이다.
 
8. 자족은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는 모든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으로 “양육받는” 신자들이 체험하는 행복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주 유명한 사람이 당신에게 선물을 보냈다면 당신은 그것을 자신이 직접 구입했을 때보다도 훨씬 소중하게 생각할 것이다. 멀리 떠나 있는 남편이나 아내가 선물을 보내왔다면 당신은 그것을 이미 가지고 있는 다른 것들보다 더 소중하게 여길 것이다. 이러한 선물들이 귀중한 것은 그것을 보내준 사람들 때문이다. 그 선물들은 누군가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증표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들, 즉 건강, 집, 음식, 의복, 친구, 가정, 직장, 기회 그리고 오락 등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로 생각한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실들 속에서 기쁨을 얻는다. 다른 사람들이 침울해 있을 때 그들은 기뻐한다. 다른 사람들이 불평할 때 그들은 만족한다. 신자들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든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 세상의 재물은 불신자들이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질 만한 자격이 없는 것들을 은혜로써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다. 그러나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소유하고 거기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조금만 소유하는 것이 더 낫다.
그리스도인은 가진 것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그에게 약속된 영원한 부(富)의 보증 또는 작은 일부분에 불과함을 기억해야 한다. 이생에서 누리는 모든 위로는 하늘나라에서 누릴 기쁨을 조금 맛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9. 능력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님 안에 있다.
고난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복음서 기사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동일한 고난을 겪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위로를 받는다. 그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고통스럽든지 그분은 그의 기분이 어떠한지 알고 계시다. 예수께서는 모든 육신적, 물질적, 감정적 또는 영적 고통을 이해하신다. 예수께서는 가나하셨으므로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실 수 있다. 예수께서는 학대를 받으셨으므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자들을 위로하실 수 있다. 예수께서도 혹독한 고통을 겪으셨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당할 때 힘을 주실 것을 예수께 요청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약속을 기억해야 한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사 43:2).
그리스도인도 죽음을 두려워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도 그렇게 부활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나아감으로써 자신의 모든 짐을 감당한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을 심판에서 건지며 그들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전능한 능력을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환난에서 그들을 붙드실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계신다. 바울은 골로새인들이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골 1:11)될 것을 기도했다. 이것이 그들이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 말씀에는 그들이 견뎌내야 할 시련에 직면해 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견뎌내야 한다.
 
10.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물질적인 것에서 얻었던 행복을 이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얻는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예레미야애가의 기자는 실의에 빠질 만한 모든 일을 다 겪고 있었다.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으로 만족해야 할 필요성을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애 3:24).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기쁘게 만드는 많은 일들을 베풀어 주신다. 그 일들은 우리에게 물을 공급해 주는 송수관과 같은 것이다. 그 일들은 행복을 안겨준다. 간혹 송수관으로 공급되던 것들이 중단될 때마다 우리는 샘에서 직접 물을 퍼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생활에서도 그들의 기쁨과 빛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점점 더 깨달을 수 있다. 사도 요한은 하늘의 환상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성(城)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
하늘나라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행복이 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 위에서도 이 행복을 체험하기 시작할 수 있다.

11.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가 그들 안에 있으므로 항상 자족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에 속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이미 하늘나라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의 내용들을 체험하는 사람들만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영적 체험은 그들을 완전하게 만족시킬 수 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다시 말해 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채워질 수 없는 영적 필요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속에 있는 평안으로 말미암아 자족을 누릴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집에 있을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들에게는 함께 있으면 즐거운 가족들이 있다. 그들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쾌적한 환경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평안을 얻기 위하여 밖으로 나가야 할 경우가 있다. 가족들이 항상 시끄럽게 서로 다투거나, 아니면 환경이 불결하고 불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늘 다른 곳으로 도피하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신자들은 그들끼리 있을 때에는 별로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그들의 영혼은 그들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즐거움을 줄 만한 일을 찾는다. 그들은 “평안”을 찾기 위해서는 스스로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그러나 선한 양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 안에서 행복하다.
 
땅 위에 있을 때 하나님 나라를 체험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의 영광을 누리리라는 것을 절대 확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믿음은 영원한 세상의 기쁨을 현재의 확실한 사실로 만든다. 어떤 그리스도인 순교자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비록 형편없는 아침 식사를 할지라도 저녁은 훌륭하게 먹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곧 하늘나라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도 고린도인 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이러한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6-18)
바울은 또 이 편지의 그 다음 부분에서 계속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확신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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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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