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성도만은 되지 말자

 

 

작금 소위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가나안성도들이라는 말은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는 신자들을 가리키는 신조어이다. 곧 교회나 목회자 혹은 신도들에게 상처를 입고 교회에 나가는 것을 포기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자기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과 관련해 교회를, 혹은 목회자 때로는 한 때 함께 교회에 다녔던 신도들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상처받고 이로 인해 원망과 불평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이유들로 인해 자기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변명할 수 있는 주장의 근거라고 말하기에는 그리 단순하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자기들이 받은 상처나 혹은 불만과 불평을 교회에 나가지 않는 빌미로 삼는다는 것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가나안성도들이 과거에 어떤 어려움을 겪었거나 상처를 받았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을 탓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정당하지 않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했었다. 광야는 본래 그런 환경이다.

 

물론 가나안성도들이 광야의 성도들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빠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끼친 대상이 교회이거나 목회자이거나 신도들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남 탓만 하고 있다가는 그들이 정작 싫어하는 그들과 함께 망하는 길로 접어들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탓하고 있는 동안 자기 마음은 정당한 이유를 찾아서 편안할지 몰라도 그 영혼은 그 상처를 준 자들와 똑같이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에게 지워진 삶의 무게가 고달프다 할지라도 담담히 짊어져야 한다. 적어도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주시지 않는 분이다. 그것이 신앙이다. 반대로 남을 탓하고 핑계를 대는 것은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자와 다를 바 없다.

 

핑계하고 탓해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어렵더라도 교회의 지체들과 그 마음의 짐을 덜어내는 여정을 출발해야 한다. 불을 토하듯 그 심정을 토하더라도 불만과 불평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체들과 함께 광야의 길을 걸으며 그 짐을 지는 신자들에게는 하늘로부터 참된 위로와 안식이 내려 올 것이다.

 

기독교개혁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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