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탓입니다 (시39:9)

요셉은 자신을 푼돈에 팔아넘긴 형들의 옹졸한 시기와 선을 넘어간 배신에 대해 "나를 보내신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 하신 것"이며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욥도 여호와의 불이 떨어지고 갈대아 사람들의 잔혹한 약탈이 자행되고 악창으로 몸까지 망가졌을 때에 분노와 복수의 불길에 휩싸이지 않고 입술로도 범죄치 않았으며 오히려 "주신 분도 여호와요 취하신 분도 여호와니 오직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뿐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다윗은 죽은 개처럼 여겨졌던 시므이가 자신을 비루한 자로 여기며 돌맹이를 던지며 저주의 무례한 입...술을 놀렸을 때에 오히려 격분한 충신들을 달래고 면박까지 주면서 "주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 두라"고 했던 분입니다.

아무리 억울하고 아무리 쓰라리고 아무리 다급해도 하나님을 사려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태를 이해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반응하는 믿음의 선배들이 있어서 좋습니다. 물론 당사자는 억울함과 분통과 원망을 온 몸과 생으로 삼켜야 하는 고통과 희생이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희생의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교훈을 얻고 생을 갱신하고 시선을 사망의 땅에 떨구지 아니하고 생명과 평강의 하늘로 올리는 열매를 얻습니다. 억울하다 생각하면 한없이 억울하나 자신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된 요셉을 생각하면 영광의 도구로 쓰여진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억울한 희생과 참혹한 죽음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그리하신 것입니다. 욥과 요셉과 다윗은 그런 예수님을 예표하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희생과 손해를 미덕으로 여기자는 건 아닙니다. 그 자체로는 할 수만 있다면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실 때 기쁨으로 맞이하는 준비는 필요할 듯합니다.

막상 그런 현실에 부딪히면 내공이 드러날 것입니다. 말은 화려해도 몸은 사리는 분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제가 늘 그러니 그런 분들의 행보가 더 잘 보입니다. 경건의 연습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낍니다. 유익이든 손해이든 하나님의 행하심을 늘 감지하며 촐삭대지 않고 잠잠히 입을 열지 않는 연습부터 하렵니다.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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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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