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자들의 덕행도 하나님의 선물임 

(칼빈의 '기독교 강요' 중에서...) 

 

우선, 나는 불신자들 가운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온갖 재능들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또한 일반의 상식적인 판단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티투스와 트라야누스에게서 나타나는 정의와 중용과 공평이 칼리굴라나 네로나 도미티아누스에게서 나타나는 광기와 무절제와 잔인함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으며, 또한 티베리우스에게서 나타나는 도착적인 음욕이 베스파시아누스에게서 나타나는 금욕의 자세와 엄청난 차이가 있으며, 개별적 덕목과 악행을 일일이 거론하지 않는다 해도 정의와 법을 준수하는 것과 그것들을 멸시하는 것이 서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다 인정하고 있는데, 나 역시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는 서로 큰 차이가 있어서 심지어 죽은 모습에서도 그런 차이가 나타날 정도다. 이것들을 서로 혼동한다면, 과연 세상의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겠는가? 그러므로 주님은 사람들 개개인마다 마음속으로 선한 행실과 악한 행실을 구분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때때로 그의 섭리를 통하여 이를 확증하기도 하시는 것이다. 사람들 가운데 덕을 불러일으키는 자들에게 이생에서 많은 복들을 베푸시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 덕행의 겉모양이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하기 때문에 그런 복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진정한 의를 얼마나 높이시는지 증명해 보이시기를 기뻐하셔서 그들에게 그런 복을 베푸시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겉으로 꾸며내는 의로움에 대해서도 세상적인 상급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내용이 자연스럽게 성립되는 것이다. 곧 이런 모든 덕행들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 말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면 여하한 경우에도 칭찬할 만한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다음과 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진술도 사실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벗어나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아무리 덕망이 높다 할지라도 상급도다는 오히려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이 오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한 일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와 정절과 우정과 절제와 용기와 지혜로 인간 사회를 보존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들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이런 선한 임무를 최악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다. 선을 이루고자 하는 순전한 열심에서가 아니라 단순한 야망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 혹은 기타 부패한 동기에서 악행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불결하여 그들의 선행도 그 근원에서 부패하였으므로, 그것들을 덕행으로 인정할 수가 없고 오히여 덕행과 비슷하게 보여 사람들을 속이는 악행으로밖에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지혜가 제시하는 목표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행하는 일도 비록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그 의도가 부패하여 있으므로 결국 죄악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결론짓기를, 파브리키우스나 스키피오나카토 등 탁월한 선행을 행한 이교도들은 믿음의 빛을 받지 못하여 마땅히 지향하여야 할 행위의 목표를 지향하지 못하였으므로 참된 의로움이 그들에게 없었으며 결국 죄를 지은 것이라고 한다. 사람의 덕행은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에 의해서 판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