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칠언 강해 1 (첫째 -용서의 말씀) 아더핑크


십자가 위에서 하신 주님의 일곱 마디 말씀 
 
첫째  용서의 말씀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인간은 그 최악의 일을 저질렀습니다. 세상을 지으신 주님이 자기 땅에 오셨으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영광의 주님이 사람 가운데 거하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배척하였습니다. 죄로 어두워진 눈들은 주님에게서 그가 원하신바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이 탄생하셨을 때 사관에는 주님을 모실 방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장차 사람들의 손에서 받으실 대접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예시하여 주었습니다. 주님이 탄생하시자 곧 헤롯 임금은 어린 주님을 찾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백성이 야기 시킨 적대감을 말해 주며 또한 주님에 대한 인간의 적대감이 극에 달할 십자가를 미리 보여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거듭 거듭 주님의 원수들은 주님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자 하였습니다. 이제 드디어 그들은 그들의 사악한 욕망을 채우게 되는가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을 원수들의 손에 넘기워 주셨습니다. 몇 차례 거짓된 심문이 있었고, 심문자들은 주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하여 낼 수가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심문자 빌라도는 주님을 미워하는 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하고 끈질기게 고함치며 위협하는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사악한 행위가 저질러졌습니다. 보통의 죽음으로는 앙심을 품은 주님의 원수들 마음에 만족을 채워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극도의 고통과 수치스런 죽음이 결정되었습니다. 십자가가 준비되고 그 위에 구주께서 못 박히셨습니다. 이윽고 주님의 십자가는 공중으로 곧게 세워졌습니다. 주님은 말없이 거기에 매달려 계셨습니다. 그런데 순간 주님의 창백해진 입술이 움직이려는 듯이 보입니다. - 그가 동정을 구하시려는 것일까?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일까?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에게 저주를 퍼부으시려는 것일까? 그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기도하시려는 것입니다. 바로 그의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십자가 위에서 하신 우리 주님의 일곱 말씀 중 첫 번째의 말씀은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일입니까! 이 얼마나 교훈적인 일입니까! 주님의 공생애는 기도로 막이 올랐습니다(눅 3:21).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의 공생애가 다시금 기도로 막이 내리는 것을 봅니다. 확실히 주님은 우리에게 모범을 남기셨습니다! 이제 주님의 두 손은 더 이상 병자들을 위하여 일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두 손이 십자가에 못 박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주님의 두 발은 불쌍한 자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도록 주님을 모시고 다닐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두 발이 저 잔인한 나무에 단단히 못 박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주님이 사도들을 가르칠 수가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사도들이 주님을 버리고 도망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기도하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교훈이 되고 있습니까!
어쩌면 이 글이 나이 많고 병들어서 더 이상 주님의 포도원에서 활발히 일할 수 없게 된 어떤 이들에게 읽혀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지난 날 선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목사나 주일학교 교사나 전도지를 나누어 주던 전도인 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늙어서 자리에 누워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직 당신은 여기 땅 위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으로 하여금 기도의 사역에 참여하도록 며칠 더 당신을 이 땅 위에 남겨 두시는지 누가 압니까? 어쩌면 당신이 지난 날 봉사했던 모든 일 보다도 더 많은 일을 기도를 통하여 이룰 수 있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 귀한 기도의 사역을 비웃도록 시험을 당하면 당신의 구주를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하여 그의 최후 순간에서 까지도 기도하셨습니다.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우리를 미워하고 우리에게 잘못을 범하는 자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 것인가를 보여 주는 완전한 모범을 우리에게 남겨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람도 우리의 기도가 미치지 못할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살인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을진대 우리는 이제 분명히 죄인 괴수를 위해서라도 기도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신앙 동지여, 결코 희망을 잃지 맙시다. 곁길로 나아가는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시간 낭비로 생각됩니까? 날이 갈수록 그 자녀의 장래가 어두워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까? 그 아이가 이제는 하나님의 자비마저도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까? 아마도 당신이 그처럼 오랫동안 기도해 오던 사람이 그 시대의 사탄숭배 의식 가운데 하나에 빠져들었거나 아니면 공공연하고 뻔뻔스러운 불신앙자, 곧 한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공공연한 원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누구도 당신의 기도에 미치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이 기도에 관하여 또 하나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 기도의 효력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원수들을 위하여 하신 이 십자가 위에서의 중보기도는 분명하고 확실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응답은 오순절날 3천의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온 사실에서 확실하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줄 아노라”고 말한 사도행전 3:17에 근거하여 저자는 이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베드로가 사용한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라는 말이 우리 주님의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하는 말씀과 연결이 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베드로가 행한 한 차례의 설교에 3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온 사건에 대한 하나님편의 설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뛰어난 웅변술로 인하여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구주의 기도로 인하여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신앙 동지여,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진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 오래 전에 그는 당신과 나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 증거로 요한복음 17:20을 찾아보십시오. 다시 한 번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 완전하신 모범을 본받아 행하여 유익을 얻도록 합시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원수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합시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면 우리도 역시 버려진 죄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기도의 효력을 목격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본문으로 직접 들어가 봅시다. 곧,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1. 여기서 우리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 중의 날에 일어나야 될 일에 관하여 얼마나 많은 것을 미리 알려 주셨습니까! 성령께서는 우리 주님의 수난 받으실 일을 그 수반될 모든 형편과 함께 얼마나 자세하고 완벽하게 미리 보여주셨습니까! 여러 일들 가운데 구주께서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시리라”(사 53:12)는 사실이 예언되어 왔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현재 하나님의 우편에서 행하고 계시는 사역에 관한 예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는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가 자기를 믿는 자들을 위하여 지금 하고 계시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한편 이사야 53:12은 그가 십자가 위에 달리셨을 때 행하실 자비하신 행위에 관한 예언의 말씀인 것입니다. 범죄자들을 위한 주님의 중보기도가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 하였느니라 하시니라”(사 53:12)는 말씀 속에 연결되어 있는 것을 살펴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의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리라는 것은 이사야 53장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예언의 항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사야 53장은 우리에게 구주의 낮아지심과 고난을 보여주는, 적어도 열 가지의 항목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 항목들은 주께서 멸시를 받아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될 것이며, 간고를 많이 겪고 질고를 아는 자가 될 것이고, 맞으며 찔리고 상할 것이며, 잠잠히 저항하지 않고 도수장으로 끌려가실 것이고, 털 깎는 자 앞에서 벙어리가 되실 것이며, 사람의 손에서 곤욕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맞으실 것이고,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실 것이며, 그의 무덤이 부자와 함께 될 것이고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을 것이며, 마지막으로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실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 하였느니라”하는 예언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하신 주님의 기도에서 그 성취를 본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위하여 간구하셨습니다.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2. 여기서 우리는 그의 백성과 하나가 되신 그리스도를 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전 어느 경우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게 이와 같은 요청을 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도록 아버지께 빈적이 없으셨습니다. 이제까지 그는 자신이 친히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에게 그는 말씀하시기를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습니다(마 9:2).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눈물로 발을 적시며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부은 죄인인 한 여인에게 그는 말씀하시기를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그 자신이 친히 직접 그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대신에 아버지께 그들의 죄사하여 주시기를 구하셔야만 한단 말입니까?
죄 사하여 주는 일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특권입니다. 어떤 유대 서기관들이 의론하기를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7)고 한 것은 옳은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앞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참 인간이셨습니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셨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죄를 위하여 드리는 바 희생제물로 삼으시려는 특별한 목적으로 사람의 아들 곧 인자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예수께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하고 외치실 때 그는 십자가 위에 계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는 그가 죄 사하여 주는 특권을 행사하지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놀라운 정확성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On earth: 땅 위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노라”(마 9:6)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땅 위에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금 땅에서 들려 계신 것(요 12:32)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대속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계셨습니다. 의로우신 자가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인들의 대표자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더 이상 그의 신적인 특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권위의 자리에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금 아버지 앞에서 비는 자의 입장을 취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찬송을 받으실 주 예수께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시는 기도를 대할 때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백성과 절대적으로 하나가 되신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더 이상 그는 죄 사하는 “권세” 혹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땅위”의 위치에 계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시는 중보자의 위치에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는 마땅히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를 대신하여 드리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3. 여기서 우리는 죄와 그 죄의 결과로 비롯된 죄책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봅니다.
레위기 5:15,16에서 하나님은 부지중에 그릇 범과한 죄에 대해서도 반드시 속(贖)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곧, “누구든지 여호와의 생물에 대하여 그릇 범과하였거든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너의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소의 세겔로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 없는 수양을 떼 중에서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서 성물에 대한 범과를 갚되 그것에 오분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건제의 수양으로 그를 위하여 속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우리는 또 민수기 15:22-25에서 “너희가 그릇 범과하여 여호와가 모세에게 말한 이 모든 명령을 지키지 못하되 곧 여호와가 모세로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여호와가 명한 날부터 이후 너희의 대대에 지키지 못하여 회중이 부지중에 그릇 범화하였거든 온 회중은 수송아지 하나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리고 규례대로 그 소제와 전제를 드리고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 것이라 제사장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면 그들이 사함을 얻으리니 이는 그릇 범죄함이며 또 그 그릇 범죄함을 인하여 예물 곧 화제와 속죄제를 여호와께 드렸음이라”하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우리가 시편 19:12에서 발견하는 다윗의 기도, 곧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하는 대목은 바로 이러한 성경구절들에 연상시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든지 모르고 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보실 때 죄는 어디까지나 죄로 남아 있습니다. 부지중에 그릇 범한 죄라 할지라도 알고 지은 죄와 꼭 마찬가지로 속할 것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는 결코 그의 의의 표준을 우리의 무지의 수준으로 낮추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무지는 무죄가 아닌 것입니다. 사실 무지에서 비롯된 죄는 모세의 때보다도 오늘날 우리의 때에는 더욱 더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무죄로 인하여 범한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핑계를 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고 완전하게 그의 뜻을 나타내어 보이셨습니다. 우리의 손에는 그의 온전하신 뜻이 담긴 성경이 들려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성경의 내용을 모른다고 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게으름을 탓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모든 것을 분명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말씀에 의하여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아직 많은 것에 대하여 무지한 상태로 있으니 그 잘못과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다고 해서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이 감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무지에서 비롯된 죄도 역시 여기 주님의 기도가 분명히 보여 주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표준이 얼마나 높은 것인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 것인지를 밝히 아십시오. 그것을 깨달았다면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무한 충족한 속죄에 대하여 그에게 감사와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4.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마음이 어두워진 것을 봅니다.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하고 소리 질렀던 사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악독한 요구가 빌라도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그 저주 받은 나무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저희가 친히 저희 눈으로 그 잔혹한 범죄행위를 본 목격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으로 주님께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하고 말씀하셨단 말입니까? 그가 하신 말씀의 뜻은 저희가 자기들의 범죄가 얼마나 끔찍하고 큰 것인가를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는 분이 영광의 주님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강조점이 “알지 못함이니이다”에 놓여진 것이 아니라 “자기의 하는 것을”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그가 누구이신 것을 알아야만 했었습니다. 그들의 무지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를 본 구약 성경의 예언들은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심을 명백히 입증하여 주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의 가르치심은 유일무이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에게서 흠을 잡으려 하던 자들마저도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 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 7:46)하고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의 생애는 얼마나 완전한 것이었습니까! 그는 사람 앞에서 이전에 이 땅위에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그러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선한 일만을 행하고 다니셨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 뜻을 따라 행하셨으며 그를 기쁘시게 하셨고 그의 백성을 위하여 일하셨습니다. 그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를 희생하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의 생애는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사시는 생애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하늘의 증거를 받는 생애였습니다. 이는 하늘로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무지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핑계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한 일은 오로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롬 8:7)는 사실을 여지없이 입증하여 주었습니다.
이 끔찍한 비극이 아직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죄인들이여, 당신들이 하나님의 크신 구원을 소홀히 여기는 일이 얼마나 큰 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모르고 있단 말입니까! 당신들을 당신들의 모든 죄에서 구원하여 주실 수 있으니 그 유일하신 분을 구주로 영접하기를 거절하는 당신들의 행동에 얼마나 끔찍하고 두려운 죄책이 따르는지를 모르고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이 사람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아니하리라”고 말하는 죄악이 얼마나 가공한 것인가를 모른단 말입니까! 당신들은 당신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당신들은 지금 당신들의 생사에 관한 문제를 냉담한 태도로 무관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흔히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을 것인가?”하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예수를 멸시하고 배척하든지 아니면 당신의 영혼의 구주요 생명의 주님으로 영접하든지 간에 당신은 예수와 상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지금 당신이 취하고 있는 행동이 당신에게는 하찮은 일,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 해 동안 당신은 주의 영이 당신을 위해서 행하시는 역사를 저항해 온 것이 아닙니까? 수년 동안 당신은 극히 중요한 생각들을 묵살해 온 것이 아닙니까? 오랫동안 당신은 마음 문을 닫아 성령이 못 들어오시게 하고 귀를 막아 그의 호소하시는 음성을 듣지 아니하고 눈을 감아 그의 뛰어나신 아름다움을 보지 아니한 것이 아닙니까? 아! 당신은 지금까지 당신이 해온, 그리고 지금도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영적으로 눈이 멀어있습니다. 당신은 당신 스스로 지금 끔찍한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구원 받을 수가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오, 이제라도 구주께 나아와 이렇게 간구하십시오. “주여, 나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5.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보여주신바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하나의 훌륭한 모범을 봅니다.
산상설교 가운데서 우리 주님은 그 제자들에게 가르쳐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하셨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전파하신 바를 몸소 실천에 옮기셨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 친히 육신의 몸을 입으신 진리이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요 14:6)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자신이 가르쳐 전하신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친히 실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나의 훌륭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주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모범을 남기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원수들을 개인적으로 용서하여 주지 아니하신 사실에 주의 하십시오. 이와 마찬가지로 마태복음 5:44에서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원수들을 용서하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말라는 뜻입니까? 이것은 우리를 오늘날 성경을 올바로, 그리고 철저히 가르쳐야 할 필요성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관점으로 이끌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경우에서든지 우리가 항상 용서해야 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나는 이 질문에 강조하여 대답하거니와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 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눅 17:3,4) 하셨습니다. 성경은 여기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용서해야 할 것을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죄를 범한 자가 먼저 “회개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이 범한 죄를 인정하고 또 그것을 뉘우치며 다시는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 우리가 그를 용서하여 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죄를 범한 자가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런 경우 나는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의미하고 있는바에 대하여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에게 죄를 범한 형제가 돌이켜 회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그에게 악감을 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음속에 미움이나 악의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나는 그가 나에게 마치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은 것처럼 그를 대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범죄한 형제를 너그럽게 보아주는 것이 될지는 몰라도 성경이 요구하는 의를 바로 세우는 일에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형제가 죄를 범할 때 우리는 그를 경계해야 하고 그가 돌아와 회개할 때 우리는 그를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데도 언제나 우리를 용서하여 주십니까? 그렇지 아니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선언하기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하였습니다. 주의해야 할 일이 또 하나 더 있습니다. 만일 어떤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지 아니하여 내가 그를 용서하여 줄 수가 없고, 또 그를 마치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아니한 것처럼 대할 수도 없는 경우라 할지라도 나는 그에 대하여 마음속에 악감을 품지 않아야 할 것이며 또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그를 위하여 기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범의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죄범한 형제를 용서하여 줄 수 없을 경우라도 그를 용서하여 주시도록 우리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6.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게 우선적으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봅니다.
우리 모두가 알아야 될 필요가 있는 것 중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는 죄인들이며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갈 수 없는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상한 이념들을 선택하고 아무리 좋은 결심을 갖고 또 아무리 훌륭한 법률을 채택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모두가 헛된 일일 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성품을 가지려 노력하고 또 아무리 하나님께서 인정하실만한 일을 행하려고 애를 쓴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 사이에 죄의 담이 가로막혀 있는 동안에는 헛수고에 그칠 뿐입니다. 만일 우리의 두 발이 모두 마비되어 있다면 제 아무리 좋은 신발을 신는다 해도 아무 쓸모없는 일일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두 눈이 멀어 있다면 제 아무리 좋은 안경을 낀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일 것입니다. 먼저 나의 죄를 용서받는 문제가 기본적이며 근본적이며 절대적으로 필요한 급선무인 것입니다. 내가 여전히 나의 죄 가운데 있다면 아무리 친구들 사이에서 널리, 그리고 높이 존경을 받는다 해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내가 여전히 용서받지 못한 죄인으로 남아 있다면 아무리 사업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나의 지은 바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눈보다 희게 씻기워 졌는가?”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아야 될 필요가 있는 것 중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근거 혹은 기초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 사이에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 지나가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대개의 경우 인간의 용서는 아량의 문제에 속하고 때로는 종종 그것이 애매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용서는 공평과 의를 희생하고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법정에서 판사는 양자택일을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곧, 피고가 유죄로 판명이 되었을 때 판사는 그에게 법에 따라 형을 선고하든지, 아니면 법의 요구를 무시하고 그를 사면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합니다. 전자의 경우는 공의요 후자의 경우는 자비입니다. 판사가 법의 요구 곧 공의와 그 요구를 무시하는 사면 곧 자비로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가능성이 있는 방법은 제 3자로 하여금 그 피고를 대신하여 그 형을 치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법정에서는 이것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이 일이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희생하고 자비를 베풀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땅의 심판자로서 그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결코 하나라도 희생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와 동시에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제 3자 곧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이 깨뜨린 그의 율법에 대한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킴으로써 이 일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모든 신자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몸에 그들의 죄를 지고 친히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이 일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는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는 피고인 죄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의 공의에 저촉되지 않고 사면을 받아 의롭게 될 수 있는 의의 기초를 제공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의의 기초는 모든 믿는 자들만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하기를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6-48)하였고 또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3,39) 하였습니다. 구주께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신 것은 그 자신이 지금 흘리고 계신 대속의 피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으리라”는 성경 말씀도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몸으로 드리시는 바 대속의 제들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원수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기도하실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우선적으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 그 근원을 바로 지적하여 주셨습니다.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또한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도 역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독자여, 당신의 죄는 사함을 받았습니까? 당신의 죄과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멀리 옮겨져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은”(골 1:14) 사람 중에 하나가 되어 있습니까?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7. 여기서 우리는 구속적인 사랑의 승리를 봅니다.
우리의 본문 서두의 “이에”라는 말에 자세히 주의하여 보십시오. 바로 앞선 구절을 보면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로 되어 있습니다. “이에”, 곧 “이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에” - 그 때는 인간이 그의 죄악의 일을 저지르고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에” - 그 때는 인간의 사악함이 그 절정에 이르렀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에” - 이때는 저들이 그 사악한 손으로 감히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순간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순간 저들을 향하여 무서운 저주를 퍼부으실 만도 하였습니다. 주님은 이 순간 의로우신 진노의 번개를 명하여 저들을 그 자리에서 죽이실 만도 하였습니다. 주님은 이 순간 땅으로 그 입을 벌리게 하여 저들을 산채로 삼키도록 하실 만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순간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치를 당하고 계셨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고 계셨으며 멸시와 배척과 미움을 받으셨으나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구속적인 사랑의 승리를 의미하였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이 사랑이 그대로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힘의 용사 삼손은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그 몸의 마지막 힘을 그의 원수들에게 복수의 죽음을 선사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완전하신 구주께서는 그 사랑의 위대한 힘을 원수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기도하심으로써 보여 주셨습니다. 그야말로 비할 데 없는 은혜였습니다! “비할 데 없다!”는 표현은 옳은 표현입니다. 이는 스데반 집사마저도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완전히 따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7장에 돌아가 보면 스데반 집사가 먼저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다음으로 그의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한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곧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59:60). 그러나 그리스도의 경우는 이와 반대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그의 원수들을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을 생각하셨습니다. 모든 일에 주님은 뛰어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적용과 권면의 말로 결론을 맺어야 하겠습니다. 이 장을 읽어 온 독자여, 당신이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당신이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를 대적하는 것이 반드시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인가!” 깊이 생각하기를 진지한 심정으로 권유합니다.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저희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독자여, 지금 이 시간 당신의 경우는 저들의 경우와 다르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지금 마땅히 당신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해야 하고 당신의 생명의 주님이신 그에게 금 면류관을 드려 왕으로 모셔야 하며 이후로 그만을 기쁘게 하여 드리고 그에게만 영광을 돌리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정신을 차리십시오. 당신의 위험은 더 큰 것입니다. 당신이 그에게서 고의적으로 돌아서면 당신은 당신의 모든 죄에서 당신을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에게서 돌아서고 마는 결과가 됩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하였습니다.
이제는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의 사죄의 완전성에 관하여 한마디 덧붙일 것만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점에 확고한 지식을 갖지 못하여 혼동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저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 이전에 지었던 모든 죄들이 어떻게 사하여졌는가는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중생한 이후로 지은 죄들에 관하여는 분명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 주셨던 용서가 취소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피는 과거의 죄에만 관계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현재와 미래의 죄에 관해서는 저들 스스로 해결해야 될 문제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모든 죄를 다 용서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용납하여 주시고 또 천국에 가는 일이 내 힘과 노력으로 그리스도를 붙드는 일, 혹은 나의 순종과 나의 신실성에 달려 있는 것이라면 과연 나에게 동요가 없이 안정된 평안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립시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용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다 덮고도 남음이 있는 용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료 신자여,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들”을 그 몸에 지고 저 저주받은 나무 위에 달리지 아니하셨던가요? 그가 죽으신 것은 당신의 모든 미래의 죄까지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과거에 지은 죄들만 아니라 당신의 미래에 지을 모든 죄까지도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는 자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그리스도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용서를 받은 백성입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 4:8) 하셨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다시 죄가 전가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입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고로 나는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땅 위에서 100년을 더 산다 해도 다시는 죄가 나의 구원에 대하여 나에게 책임을 지우지 아니할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처지에서 영원히 벗어났습니다. 성령의 증거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골 2:13). 여기서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은 나의 모든 죄가 사하여졌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하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들”이 사하여 졌는데 어찌 정죄함이 있을 것입니까?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할 것이며 누가 능히 정죄할 것입니까(롬 8:33,34)? 주 안에 있는 독자여, 우리의 모든 죄 사함받은 일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일에 저자와 하나가 됩시다.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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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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