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의 은사

 

두 가지 방언

 

방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람에게 하는 대인(對人) 방언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게 하는대신(對神) 방언이다.

 

사도행전 2장 4-12절의 말씀을 보자.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빌리아,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외국에 나가 본 일도 없고 그래서 외국어라고는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여러 외국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할 줄 모르는 외국어를 성령의 능력으로 말하게 되는 것이 대인(對人)방언이다. “외국어 하나 마스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성령의 은사로 배우지도 않고 들어보지도 못한 외국어를 술술 말할 수 있다니 참으로 탐나는 은사구나”하고 생각한다면 그 오해이다. 대인 방언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원래 인간의 언어는 하나뿐이었다. 모든 민족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들이 교만해져서 한 곳에 모여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다

 

창세기 11장 1-9절의 말씀을 보자.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이때부터 인간들은 여러 나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를 여러 나라 말로나누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데 나라마다 인종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서 소위 언어의 장벽이 복음의 땅 끝 전파의 방해가 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이 언어의 장벽을 성령의 능력으로 무너뜨리는 것이 바로 이 대인 방언인 것이다.

사도행전 2장 11절에“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라고기록되어 있다.

 

대인 방언이란 흔히 오해되고 있듯 어떤 외국어를 배우지도 않고 그냥 술술 말하게 되는 그런 은사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꼭 전해야 하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갑자기 성령의 충만을 받아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나도 모르게 그들의 언어로 말을 하게 되는 것이 대인 방언인 것이다.

 

어느 목사님이 계셨다. 이 분이 남미를 방문했을 때의 일인데, 마침 주일이라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어디 교회가 없나 하고 주위를 살펴보았더니 호텔 근처에 작은 교회가 있어서 덮어놓고 들어갔는데, 들어가 보니 모두가손뼉을 치며 신나게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더니 한 성도가 앞으로 나와 간증을 하는 것이었다. 

 

아니, 간증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한국 목사님은 스페인어는 전혀 몰랐고 다만 눈치로 그렇게 추측했을 뿐이다. 그냥나가버릴까 생각도 했으나,  이런 교회에서는 어떻게 예배를 드리나 하는 호기심으로 그냥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간증이 끝나자 그곳 목사님이 단상에오르더니 한국 목사님보고 앞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당신은 처음 보는 동양 사람인데 보아 하니 믿음도 좋고 간증꺼리도 많은것 같은데 오늘 여기 온 것도 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이니까 여러 사람들 앞에서 간증을 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도 말을 알아들은 것은 아니고 눈치로 그렇게 이해한 것뿐이다.

 

한국 목사님은 말이 안 통해서 못하겠다고 손짓발짓으로 거절을 했으나 어떻게 된 것이 그곳 목사님은 막무가내 간증을 하라고 강권하는 것이었다.

할 수없이 한국 목사님은 단상으로 올라가서 간절한 기도를 올린 다음, 에라 모르겠다, 아무렇게나 지껄이자 하고 아무 소리나 나오는 대로 마구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앉아 있던 사람들이 조용해지더니 한국 목사님이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목사님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소리를 더욱 열심히 지껄였다. 이윽고 사람들은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하더니 여기저기서 엉엉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증이 끝나자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는 것이었다. 이 한국 목사님은 성령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전혀 알지 못하는 스페인어로 간증을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인 방언이다.

이런 대인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 중 극히 드물게는 필요할 때면 언제나그것도 여러 나라 말을 자유롭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책에서 보니 St.Francis Xavier 라는 사람은 인도, 한국, 일본, 등지에 파견된 전도사였는데, 이 은사를 받아 외국어를 전혀 배우지 않고도 그 나라 말로 전도  사명을 완수했다고 한다. 또 어떤 할머니는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는데도 교회에서 목사님이 영어로 하는 설교를 스페인어로 다 알아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 또 하나의 방언인 대신(對神) 방언은 어떤 것인가?

대인 방언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인에게 말을 하고또 그들의 말을 알아듣는 것이라고 한다면, 대신 방언은 나의 영이 성령의도우심으로, 또는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께 직접 기도를 드리는 하늘나라의 언어인 것이다. 대신 방언은 말하자면 신비한 영의 언어이며, 이런 뜻에서 대인 방언보다 훨씬 귀한 은사인 것이다. 

 

이 대신 방언은 신비한 영의 언어이기 때문에 나의 영과 하나님 외에는 알아듣는 사람이 없고, 사람들 중 특별히 방언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만이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있다.

대신 방언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우리가 보통 방언이라고 말할 때에는 이 대신 방언을 가리킨다. 그 이유는 대인 방언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시는 특수 은사이지만, 대신 방언은 많은 사람에게 주시는 흔한 은사이며, 그러면서도 대인 방언보다 훨씬 신령하고 유익하며 그래서 누구나 다 받아야 하는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 방언(대신 방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이제부터‘방언’하면 이 대신 방언을 말한다)

 

방언을 받아야 하는 이유

 

은사는 받겠다고 해서 다 받아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그 은사를 사모하고 오랫동안 기도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그 은사는 오지 않는다. 그러나 예외가 하나 있다. 방언의 은사는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주신다. 

 

방언의 은사는 누구나 받는 은사이고, 누구에게나 주시는 은사이고, 누구나 받아야 하는 은사인 것이다.

방언의 은사는 제일 작은 은사, 별로 귀한 은사가 아닌 것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방언의 은사는 성령의 모든 은사 중 가장 흔한 은사이다.

그러나 어느 면에서는 성령의 모든 은사 중 가장 귀한 은사가 방언의 은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희귀한 것이 귀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사는데 꼭 있어야 하는 귀한 것일수록 그것을 아주 흔하게 공급해 주신다. 그것 없이는 단 몇 분도 살지 못하고 죽고 마는 공기 같은 것은 하나님은 무한량으로 공급해 주신다.

방언의 은사는 매우 흔한 은사이고,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주시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아주 귀중한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럼 방언이 어째서 그토록 귀한 은사인가?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1) 방언은 나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수단이다.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나의 영 사이에 전용 무전기를 설치해 놓은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무전기를 통해 아침저녁으로 그리고 수시로 하나님과 나의 영이 비밀 통화를 하는 것이다.

 

2) 방언으로 기도를 하면 나의 영이 나도 모르는 것을 기도한다.

 

사람이 기도를 할 때, 곧 인간의 언어로 기도를 할 때, 그 기도의 내용은매우 제한적이다.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것, 생각할 수 있는 것 밖에는 기도할 수 없다. 그러나 영으로 기도를 할 때에는 곧 방언으로 기도를 할때에는 내 속에 있는 영이 직접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생각, 나의 육신의 욕망이나 세상적인 욕심을 떠난 순수한 영적 소원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3) 방언은 신령한 곳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방언을 받은 사람이라면 입술과 혀에 경련이 일어나면서 방언이 터져 나오던 그 첫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신령한 것을 몸으로 직접 느끼는 하나의 강렬한 체험이다. 그때 느꼈던 희열과 하나님께 바쳤던 뜨거운 감사를 잊지 못할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신령한 영계에 그 한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이다.

 

4) 방언은 다른 신령한 은사로 통하는 문이다.

 

성령의 신령한 은사, 예언, 병 고치는 능력, 능력 행함의 은사 등 은사를 받은 사람 중에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말하자면 방언은 신령한 은사로 들어가는 활짝 열린 문인 것이다. 방언을 받지 못하고는 다른 신령한 은사를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5) 방언 기도하는 것에 의해서 영이 자란다.

 

방언 기도를 통해 나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을 하게 되고, 이 하나님과의 계속적인 교통을 통해 나의 영이 성장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영이 성장하게 되면 그 만큼 하나님을 더 가까이 체험하게 된다.

 

방언을 받는 방법


방언을 받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간절히 사모하며 주야로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은사 중에는 그 은사가 이미 임해 있는데도 본인이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방언의 은사는 본인의 입으로 방언이 터져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은사가 임하는 즉시 본인이 그것을 알게 된다. 방언은 반드시 기도하는 중에 받게 된다.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방언이 터져 나오는 일은 절대로 없다. 

때문에, 평소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방언의 은사는 결코 임하지 않는다. 방언 그 자체가 기도하기 위한 은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오래 믿고도 방언도 받지 못한 사람은 대개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방언의 은사는 속으로 묵상 기도를 할 때에도 임하지 않는다. 크게 소리 내어 외치며 기도할 때에 방언의 은사가 임한다. 혼자서 기도할 때보다도 여러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큰 소리를 내며 열정적으로 기도할 때에 방언의 은사는 더 잘 온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를 받고자 하는 사람은 될 수 있는 대로 큰 소리로 기도를 해야 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도원에 가거나

금요 철야기도나 은사 집회 등에 자주 참석해서 모두들 큰 소리로 통성 기도를 할 때, 그 속에 끼어 힘을 다해 큰소리로 외치며 기도를 해야 한다.

방언의 은사를 달라고 외치며 기도할 때 방언이 갑자기 터져 나오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다른 것을 위한 기도를 정신없이 하고 있을 때 예기치 않게 방언이 터져 나오는 수가 많다.

 

처음 방언은 어떻게 터져 나오나?

입술이 비틀리거나 혀가 경련을 일으키거나, 혀가 굳어져 입천장에 올라붙거나 하여간 발성 기관인 입술이나 혀에 갑작스런 이상이 생겨서 이상하고 묘한 소리가 튀어나온다. 이게 방언이다. 방언의 은사가 임한 것이다.

이때 주의할 것이 있다. 방언의 은사가 왔구나! 하고 입술과 혀의 움직임을 멈추면 안 된다. 

 

계속 입술과 혀를 놀려야 한다. 계속 입술과 혀를 움직여 소리를 내야 한다. 있는 힘을 다해 큰 소리로 정신없이 땀을 흘리며 미친

사람처럼 뜻도 모르는 소리를 질러대야 한다. 이렇게 1분이고 2분이고 계속 하고 나면 이제 방언의 은사하는 내 것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다 끝난 것은 아니다. 다음은 연습을 해야 한다. 

시간 나는 대로 혼자 앉아서 소리를 내어 방언하는 연습을 하며, 또 여러 사람들이 모여 큰 소리로 통성 기도를 할 때, 특히 방언으로 기도를 할 때, 그 틈에 끼어 방언 기도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래서 아무 때고 마음만 먹으면 방언을 자연스럽게 술술 나오도록 연습을 쌓아 나가는 것이다.

어느 정도 소리 내는 연습이 되면 다음에는 그 소리에 내 마음의 간절함을 싣는 연습을 한다. 이상한 소리만 내는 것이 방언 기도는 아니다. 마음속의 간절함을 그 소리에 실어 드리는 것이 방언 기도인 것이다.

 

 

방언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방언을 받기 위해 열심히 기도를 하며 노력은 하는데 방언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방언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방언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데 있다. 아직 방언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방언이란 시동을 걸어 놓은 자동차 엔진처럼, 가만히 있어도 방언이 저 혼자 나오는 것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를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하고는 이제 입속에서 방언이 나오나 안 나오나 입 다물고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방언의 은사는 받지 못한다. 방언의 은사는 입술이나 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심령 속에 오는 것이다.

 

처음 방언이 터져 나올 때, 입술이나 혀가 경련을 일으키거나 마비되거나 하는 것은 하나님께 이제부터 너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노니 앞으로는 방언으로 기도를 해도 좋다, 하는 하나님의 신호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신호를통해 내가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내 힘으로,나의 의지로 내 혀와 입술을 움직여 방언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방언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입에서 술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식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그게 하나님의 은사냐? 하고 물으실 분도 계시겠지만, 방언이란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에 실려 올라가는 나의 영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에 한 중년의 신도가 있었다. 다른 교회에서 옮겨온 분인데, 꽤 오래 교회에 다녔으면서도 방언을 하지 못했다. 

 그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방언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방언 받기를 갈망했고 우리 교회로 옮겨 온 이유도 그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방언을 받게 하려고 매일 밤교회에 함께 나와 강대상 밑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기도를 드렸다. 그는 우리말로 기도를 드리고 나는 방언으로 기도를 드렸다.

다른 사람에게 방언을 받게 하기 위해 함께 기도를 할 때에는, 가능한 한 큰 소리로, 되도록 빠르게 그리고 열성을 다해 소리를 내야 한다. 이렇게

여러 날 동안을 했는데, 그래서 방언이 올 때가 되었는데, 안 오는 것이었다.

 

“성도님, 방언이 올 때가 되었는데, 이상한 거 느껴진 것이 없나요?” 그러자 그가 말했다.

“방언이 입에까지 왔다가 그냥 갔어요. 아직도 기도가 부족한가 보죠?”

“내? 방언이 입에까지 왔다가 그냥 가요?”

정신없이 기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입술이 비틀리는 것을 그는 느꼈다.

순간, 방언이 왔구나 하고 생각한 그는 이제 자기 입에서 방언이 구구절절 쏟아져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입술을 벌리고 가만히 있었는데,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방언은 가만히 있는데 저 혼자 줄줄 나오는 것은 아니다. 방언을 받고 싶어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바로 이것을 이해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 중에는 자기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지껄이면 그게 무슨 은사냐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방언은 바로 그런 은사인 것이다. 

방언은 뜻 모르는 소리를 지껄이는 은사가 아니라, 영으로 기도하는 은사인 것이다. 소리는 내가 내는 것이다. 소리는 내가 의도적으로 내지만,

성령께서 그 소리에 영들은 듣고 아는 “뜻”을 실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방언이다.

 

방언은 소리에 그 뜻이 있지 않다


아직 방언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방언을 이미 받아서 방언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방언할 때 내는 소리 그 자체에 뜻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마치 인간들의 언어처럼 소리나 소리의 순서에 어떤뜻을 가지고 있을 것이란 것이다.

 

명확하게 말하지만, 방언 기도를 할 때 내는 그 소리 자체에는 아무 뜻도없다. 랄랄랄 하든 룰룰룰 하든 또 뭐라고 하던 소리 그 자체에는 아무 뜻

도 없다는 말이다. 필자도 처음 방언을 받았을 때에는 소리 그 자체에 어떤뜻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후,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내가 방언으로 기도를 시작하면 나의 영이 하나님을 향해 영 자신의 의지로기도를 드리기 시작한다. 내가 방언 기도를 하며 내는 소리는 단지 나의 영이 지금 기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밖으로 들어내고 있을 뿐, 내 영이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기도의 내용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밤새도록 입으로는 랄랄랄랄 하고 한 가지 소리만 하고 있어도 기도하는 영은 하나님을 향해 온갖 내용의 기도를 다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언 소리를 듣고 어떻게 그것을 통역하는가 하는 문제가 나온다. 이 문제는 방언 통역의 은사를 말 할 때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하자.

방언 기도를 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저 입술만 놀리고 뭐라고 소리만 내고있으면 그것이 방언 기도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모든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진정과 간절함과 뜨거운 열정이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기도가 되는 것이다. 입술로만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혀와 입술만 움직여 이상한 소리만 낸다고 그것이 방언 기도는 아니다. 그 방언에 하나님을 향한 나의 진정과 간절함과 열정이 실려야 하는 것이다.

 

한 여자 집사님이 있었다. 남편에게 딴 여자가 생겨 남편이 집을 나갔다.

이 여자 집사님은 밤마다 교회에 나와 밤을 새며 방언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들어보니 소리만 요란했지 전혀 방언 기도가 아니었다.

남이 하니까 소리만 흉내 내어 하는 가짜 방언이었다. 사실은, 기도원 같은 곳에 가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방언 소리를 들어보면 방언 기도 아닌 소리뿐인 가짜 방언을 하는 사람들도 상당 있는 것이다.


귀신 방언이 있는가?

 

사람들 중에는 귀신 방언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몇 해 전, 어떤 사람이 간증하는 중에 들은 것인데, 그가 하루는 산에 가서 밤에 기도를하고 있는데, 새벽 무렵이 되어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큰 소리로 방언을 하며 산 길을 내려오는데 그 방언이 좀 이상해서 분별을 해 보았더니 귀신이 따라오면서 그들의 입을 빌어 하는 귀신 방언이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잘 못 안 것이다. 귀신 방언이란 없다. 방언은 성령의은사이기 때문에 귀신은 절대로 방언을 할 수 없다. 방언은 나의 영과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드리는 기도인 것이다. 따라서 귀신 방언이란 없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오직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귀신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실 리가 없는 것이다.

또 하나, 이것은 내가 잘 아는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교회에 나이 많으신 여자 집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이 집사님의 다 큰 자제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어서 이 여자 집사님은 매일 밤 교회에 나와 아들을 위해 기도를하고 있었다. 시간이 자정을 넘어 기도가 한창 무르익을 때면, 이 집사님은 강대상 밑에 엎드려 방언으로 기도를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하루는 스스로신령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어느 젊은 여자 집사님이  이 할머니 집사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집사님 방언은요, 모두 하나님을 원망하는 방언이에요.”
 

할머니 집사님은 이 말에 그만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매일 밤잠을 안자고자정을 훨씬 넘기면서까지 기도를 했는데, 그게 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기도였다니!

할머니 집사님은 그 후에도 매일 밤 교회에 나오기는 했으나 기도는 할 수가 없었다. 겁이 나서 방언 기도도 못하고 우리말로 기도를 하려고 해도 통기도가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매일 밤 멍하니 그냥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그 젊은 여자 집사님은 참으로 엄청난 잘못을 저질러 놓았다. 아들의 병을 위한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를 막아버린 것이었다.

 

방언에는 귀신 방언도 없지만, 하나님을 원망하는 방언도 없다. 방언 기도란 나의 영이, 나와 함께 하시는 성령과 더불어 교대로 혹은 이중창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귀신 방언에 대해 몇 마디만 더 하자.

 

<부르는 소리> 2부“기도와 응답”의 초판이 발간된 것은 1989년 11월 15일이었다. 지금 필자가 얼마간의 수정을 가하며 컴퓨터에 입력 작업을 하고 있는 지금은 2003년 10월이다. 그러니까 초판을 낸지 거의 14년 만에 수정판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그 14년 동안, 필자는 이 귀신 방언 때문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기도 하고 또 많은 항의 전화를 받았다. 분명히 귀신 방언은 있는데 어째서 없다고 하느냐? 하는 항의였다. 


그 중 어떤 여자 목회자께서는 상당히 흥분된 목소리로 필자를 비난하는 전화를 걸어 왔다. 그 분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부르는 소리>는 목회자들이 많이 읽고 있는데 그런 잘 못된 소리를 써서사람들을 잘 못 가르치고 있으니 죄가 크다. 빨리 귀신 방언이 있다고 수정해라.” 나는 대답했다.

“귀신 방언은 없습니다.”

그 분은 나를 설득할 기세로 말했다.

“왜 없어요. 내 귀로 듣고 있어요!”

나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귀신 방언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귀신들린 사람이 방언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을 가지고 귀신 방언이라고 말한다. 실은 나도 그런 방언 같은 소리는 많이 들었다.4-5년 전의 일이었다. 성지 순례를 떠난 일행 중에 귀신들린 젊은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버스 속에서 토하기 시작했다. 그날 밤 숙소에 들었을 때, 나는 그 여인을 내 방으로 불렀다. 그녀 등에 손을 얹고 방언으로 귀신을쫓기 시작했다. 나는 좀처럼 귀신 쫓는 일은 하지 않지만, 그 날은 나도 모르게 그것을 하게 되었다. 한 참 방언 기도를 하지 그녀는 다시 토하기 시작했다. 나는 열을 내서 방언을 하며 귀신에게 나가라고 소리를 쳤다. 여인은 더욱 심하게 토하고 나는 더욱 큰 소리로 방언을 하며 귀신을 쫓아내려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때,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쓱 쳐들더니 나를 행해 방언으로 대들기 시작했다. 워낙 큰 귀신같아서 나는 그만 쫓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 귀신이 그 여자의 입을 빌어 나에게 방언으로 대항했다고 지금 내가 썼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그 귀신은 그 여자의 입을 통해 방언을 말한 것이아니라, 내 방언 흉내를 낸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이것을 귀신 방언이라고 말한다. 귀신이 방언하는 소리를 내 귀로 똑똑히 들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귀신도 방언을 한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다.

 

 

방언은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 중 하나로 성령으로부터 받는 은사요, 은사는 오직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이다. 비록 귀신이 방언 같은 소리를 낸다고해서 그것이 어떻게 방언이 되는가?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이 남들방언하는 소리를 듣고 자기도 따라서 그런 소리를 낸다고 그게 방언인가?

아니다. 빙언 흉내다. 흉내는 알맹이 없는 빈껍데기 일 뿐이다. 귀신이 방언 같은 소리를 한다고 그게 방언이란 말인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단지방언같이 들리는 소리일 뿐이다. 귀신 방언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얼마간의 영 분별의 능력이 있거나, 약간의 방언 통역의 능력만 있었더라면 그 귀신이 남의 입을 빌어 지껄이는 그 소리가 방언 아닌 소리일 뿐이라는것을  알았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방언은 소리 내는 은사가 아니라 기도하는 은사인 것이다. 방언은 기도다. 방언이란 입으로는 뜻을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면서, 내 영은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있는 것이 바로 방언인 것이다. 그런데, 귀신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올려? 그럼, 그것은 귀신이 아니지. 따라서 귀신은 절대로 방언을 할 수 없다. 다만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방언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귀신 방언이 있다거나 귀신도 방언을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귀신들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이정도 말했는데도 아직도 귀신 방언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믿어도 좋다.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속은 못 보고 겉만 본다. 영은 못 보고 육만본다. 그래서 귀신들린 사람이 방언 같은 소리를 하면 그 귀에 울리는 소리만을 듣고 그게 귀신 방언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영의 소리는 못 듣고귀에 울리는 소리만 듣고 모든 것을 판단해버리는 것이다.

방언에는 귀신 방언도 없지만, 하나님을 원망하는 방언도 없다. 다시 말하거니와 방언은, 성령으로부터 받은 참 방언이라면,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올라가는 내 영의 간절하고 신령한 소망인 것이다.

방언에 대해 또 한 가지 잘 못 알려지고 있는 것이 있다. 방언을 일본 방언이니 중국 방언이니 혹은 독일 방언이니 하고 부르는 것이다. 대인 방언에는 물론 일본 방언도 있고, 중국 방언도 있다. 일본말을 모르는 사람이 일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에 갑자기 성령의 충만을 받아 자기도 모르는 일본말이 쏟아져 나왔다면 이것은 일본 방언이다.

 

그러나 대인 방언이 아닌, 우리가 하는 대신 방언에는 일본 방언이니 중국방언이니 하는 것은 없다. 아마도 방언을 하는데, 그 방언이 일본말 비슷하게 들린다고 해서 일본 방언이라고 이름을 붙였겠지만, 방언은 그것이 설사 어느 나라 말처럼 들릴지라도 방언은 그냥 방언인 것이다.

 

 

방언 배우는 법

 

어떤 교회에서는 방언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방언을 가르친다.반면, 방언을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 일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에 의하면 방언이란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인데 어떻게 그것을 가르치고 배우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주시는 것이므로 사람이 노력해서 그것을 배울 수도 없고 또 가르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예외가 하나 있다. 방언의 은사가 바로 그것이다.


방언의 은사만은 배워서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어째서 방언의 은사만은 배워서 할 수가 있는가? 사실은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방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방언의 은사가 이미 와 있는데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은사가 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느껴도 방언을 하는 방법을 몰라서 못하는 사람들에게 방언 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방언을 가르친다는 것은 방언의 은사 자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와 있는 은사를 입으로 내서 말할 수 있게 소리 내는 연습을 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방언 소리 내는 연습은 어떻게 하나?

 

1) 다른 사람이 방언하는 소리를 듣고 그 흉내를 내어 혼자서 소리를 여러 번 반복해서 해 본다. 이때, 소리 그 자체에는 아무 뜻도 없으니까 소리에 너무 신경 쓸 것 없이 그저 혀 돌아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소리만 내면 된다.

다섯 살짜리 어린이가 엉터리 영어 흉내 내듯 해도 되고, 하여튼 쉴 새 없 이 혀와 입술을 놀려서 아무 소리나 끊기지 않고 나오게 하면 된다.

 

2) 다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방언으로 기도하는 곳에 가서 그 속에 끼어 앉아 크게 소리를 내어 방언 기도를 해 본다. 모두들 열심히 소리 내어 기도를 하기 때문에 옆 사람이 뭐라고 기도를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옆 사람이 혹시나 내 엉터리 방언을 듣고 흉보지나 않을까 따위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마음껏 큰 소리를 내어 방언을 해 본다.

 

3) 이제는 정성을 다해 열심히 소리를 내면서 나의 영혼을 그 방언 소리에 싣도록 노력해 본다.

 

4) 좀 더 숙달된 방언을 하기 위해서는 자주 방언 기도를 해야 한다. 신령한 사람이 방언 기도를 하면 그 옆에 함께 앉아 그의 방언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그를 따라 방언기도를 한다. 이런 것을 자주하면 방언 기도의 영력이 자란다.

 

영적으로 깊은 방언을 하기 위해서는 방언을 하면서 나의 정성을 그 방언 기도 위에 다 쏟아 넣어야 한다.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도 연습을 해서 방언 흉내를 낼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방언은 아니다. 방언은 사람의 힘으로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셔야 하는 은사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고도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소리 내는 방법만 배우면 곧 방언을 할 수 있지만,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소리를 배워 방언 같은 소리를 낸다 해도 그것은 방언이 아니다. 사실은, 우리들 주위에 방언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성령을 받지 못하고 입으로 소리만 내는 방언 아닌 가짜 방언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방언 통역의 은사를 받아 이들 방언하는 것을 들어보면 가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방언 받고 조심해야 할 일

 

방언은 가장 귀한 은사이다. 방언은 나의 영이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수단이다. 방언은 이렇게 귀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믿는 사람 모두가 다

이 방언의 은사 받기를 원하신다. 그렇긴 하지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 은 방언은 모든 은사 중 가장 낮은 은사라는 사실이다. 가장 귀한 은사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낮은 수준의 은사이다.


방언의 은사는 모든 신령한 것으로통하는 문일 뿐이다.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것은 이제 내 앞에 신령한 영의 나라로 통하는 문이 막 열렸을 뿐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이 은사를 받고 조심해야 할 첫째는 교만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모든 은사가 다 그렇지만, 방언도 내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로 거저 주신 것이기 때문에 결코 그것을 남들 앞에 자랑할 것이 못되는 것이다. 

 

천사 루시퍼는 자기의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서 교만해졌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란 사실을 잊고 하나님처럼

뭇 천사들의 찬양을 받으려고 하다가 하늘에서 쫓겨 마귀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인하여 교만해지는 것은 그것이 바로 마귀의 마음인 것이다. 교만은 마귀의 특성이며, 교만하다는 것은 마귀를 닮았다는 것이다.


방언은 모든 신령한 것으로 통하는 문이다. 이 은사 받아 더욱 겸손해지고 경건한 생활을 하게 되면 차츰 하나님의 더욱 신령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한다. 방언이 귀한 은사라는 것은 그것이 신령한 하나님이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하는 점이다. 그러나 자칫 교만해져서 그것을 남에게 자랑을하거나 경박하게 사용하면 그 신령한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닫히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이 신령한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여럿이서 한 자리에 모여 방언으로 기도를 할 때에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남들이 조용조용 기도를 하면 나도 조용히 작은 소리로 기도를 하고, 모두들 큰 소리로 외치며 기도를 하면 나도 크게 외치며 기도를 한다. 사람들이모두 조용히 기도를 하는데 혼자서 큰 소리로 외쳐대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어느 작은 교회의 새벽기도 시간이었다. 모두들 조용히 소곤소곤기도를 하는데 근처에 사는 다른 교회 신도들이 몇 사람 와서 큰 소리로

방언을 외쳐대는 바람에 그만 그 교회의 경건하고 조용한 새벽기도 분위기가 엉망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자기만 생각하고 외쳐대는 방언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시지 않는다.  


필자가 자주 가는 서울에 있는 산에 있는 모 기도원에 가보면, 남이야 방해를 받건 말건 혼자서 큰 소리로 성난돼지 울음소리 같은 소리를 내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산에서야 아무리 큰 소리를 치고 악을 쓰며 기도를 해도 상관없지만, 성전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중에 혼자서 악을 쓰는 것은 좀 생각해볼 문제다.

 

방언을 잘 하는 사람들끼리 한 자리에 모여 방언 기도를 하면 처음에는 조용조용 시작하다가 차츰 기도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하면 모두들 힘을 다해 외쳐대다가 다시 낮아지기 시작해서 종용해지고 그러다가 또다시 고조되기 시작하면 모두들 있는 힘을 다해 외쳐댄다. 여럿이서 한 자리에 모여 기도할 때에는 이렇게 높게 낮게 피도를 타면서 때로는 결렬하게 때로는 잔잔하게 기도를 해 나간다. 이렇게 기도를 해 나가면 어느덧 서로의 마음이 하나가 되고 각자의 영이 하나로 융합이 되고 각기 외쳐대는 기도의 내용이 하나가 된다. 그리고 놀라운 기도의 응답이 나타난다.

 

거듭 말하거니와, 방언을 받았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체험하기 시작해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체험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귀로만 듣고 알던 하나님을 이제는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열려라 참깨! 하면 보물을 가득히 숨겨 둔 바위 문이 열리듯, 방언을 말하면 놀라운 보화가 가득 숨겨진 신비한 하늘나라의 문이 내 앞에 스르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방언은 언제 하는가

 

방언은 아무 때나 하고 싶을 때 하면 된다. 그러나 특히 방언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1) 나도 모르게 입에서 방언이 나올 때.

 

기도를 하려고 꿇어앉았는데 나도 모르게 입에서 방언이 튀어 나올 때가 있다. 또 말씀을 읽다가 감동이 왔을 때, 특히 묵상 중에, 또 우리말로 기도를 하는 중에 방언이 절로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 무엇인가 간절히 바라고 싶을 때, 혹은 어떤 일로 인하여 심령이 몹시 상했을 때에도 나도 모르게 입에서 방언이 나온다. 이럴 때에는 당연히 방언으로 기도를 한다.

 

2) 나의 기도 내용을 남에게 숨기고 싶을 때.

 

기도의 내용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이 들어서는 좀 거북한 것도 없지는 않다. 그럴 때에는 방언으로 가도를 하면 된다. 기도 전체를 방언으로만 해도 되고, 숨기고 싶은 그 부분만 방언으로 해도 된다. 이때에는 마음속으로는 우리말 기도를 하되 입으로는 방언을 하는 것이다.

필자는 안수 기도를 해 줄 때에는 방언으로 한다. 그 사람 앞에서 그 사람 을 위한 기도를 할 때에는 아무래도 그 사람 귀에 듣기 좋은 기도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때때로 이것은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되고 그 사람에게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하면 되는 것이다.

 

3)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를 모를 때.

 

기도를 하기 위해 꿇어앉기는 했으나 무엇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할지 금방 생각이 안 날 때가 더러 있다. 이럴 때에는 방언이 아주 유용하게 사용된다.또 기도를 하다가 갑자기 기도 말이 막히는 수가 더러 있다. 이럴 때에도 기도를 끊지 말고 방언으로 이어나가면 된다.

 

4)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하고 싶을 때.

 

방언 기도란 나의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그리고 나는 그 내 영이 드리는 기도의 내용을 모른다. 그러니까 기도의 내용도 모르면서 그것을 나의 기도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바로 방언 기도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방언 기도는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며, 모든 것을 하나님 뜻에 맡기는 기도이다. 내 생각으로, 나의 필요에 따라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모든것을  오로지 하나님 뜻에 맡기며 하나님 뜻에 따르겠다는 나의 영의 기도인것이다. 

 

그래서 이런 방언 기도를 할 때에는“지금 내 영이 드리는 이 기도가 그대로 다 이루어지게 해 주옵소서”하며 정말 그렇게 될 것을 마음속에

간절히 바라면서 방언을 해야 한다. 내가 방언으로 기도를 드릴 때, 나의 영이 드리는 기도의 내용을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 기도는 모두 나의 기도로 하나님 앞에 상달이 되는 것이다.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내 육신이 내가 아니라 내 영이 나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시인하는 것이다.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내 육의 소원이 아닌 내 영의 소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방언은 귀한 것이다.

방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고, 더러는 방언을 업신여기는 사람들도 있고, 방언을 금하는 교회도 있고, 또 더러는 방언은 옛날(초대교회시대)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방언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5) 귀신을 쫓을 때, 병을 고치기 위한 기도를 할 때.

 

귀신을 쫓거나 병을 고치기 위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방언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때에는 방언으로 기도를 한다. 귀신을 쫓거나 병을 고치기 위한 기도를 할 때에는 그 기도에 기도하는 사람의 모든 영력을 집중해야 하는데, 우리말로 기도를 이어나가기 보다는 방언으로 하는 것이 훨씬집중이 잘 된다.

병을 위한 기도를 할 때, 그 앓는 사람에 대해 또 그 병세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을 때에도 방언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 방언으로 기도를 하고 있으면 그 사람의 병세가 어느 정도인지 나을 수 있을 것인지, 그  환자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성령께서 알게 해 주신다.

어떤 사람은 귀신을 쫓을 때, 방언으로 하면 더 큰 능력이 나온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경험으로는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귀신이 무서워하는 것은 방언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그 능력을 의지해서 귀신을 쫓는 그 사람의 믿음과 능력의 크기이다.

 

6) 방언으로 찬송을 할 때.

 

찬송가의 가사 대신 방언으로 찬송을 부른다.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찬송가 가사를 몰라서 혹은 생각이 안 나서 방언으로 바꾸어 찬송가를 불렀다면 이건 방언으로 부르는 찬송이 아니다. 방언으로 부르는 찬송은 열심히기도를 하고 열심히 찬송가를 부르다가 자기도 모르게 가사 대신 방언이 나야 하는 것이다. 자신은 지금 우리말 가사로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있는데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는 방언 가사가 나와야 방언으로 부르는 찬송인 것이다.

 

방언 찬송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미 있는 찬송가 곡조에 방언 가사로 노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때의 감동에 의해서 방언과 더불어 곡조가 즉흥적으로 만들어져 나오는 경우이다.

 

두 가지 중 후자가 더 자연스럽다. 사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차츰 감정이 격해 오르면 그드리는 기도 말에 높낮이와 장단과 강약이 붙게 되고 그것이 조금씩 발전을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이 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음악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에서 비롯되었다.

 

7)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기도드려야 할 때 방언으로 기도한다.

 

우리말 기도를 드린다면 한 시간, 아니 두 시간도 더 걸릴 긴 기도도 방언으로 드린다면 단 10 분이나 5분 동안에 다 드릴 수 있게 된다. 아니, 단

10초 동안에도 다 드릴도 수 있다. 방언 기도는 나의 영이 영이신 하나님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이다. 육신을 입고 사는 인간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영은 시간을 초월한다. 따라서 나의 영이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시간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 모든 기도를 한데 묶어서 한 순간에 하나님께 올릴 수가 있는 것이다. 기도를 많이 하고 방언이 갖는이런 비밀을 알며 방언에 능숙한 사람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방언은 흔히 알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유익하고 귀한 은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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