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이 과학에 위배되는 이유들

진화론이 과학에 위배되는 이유들 (The Scientific Case Against Evolution)
By Henry M. Morris, Ph.D.

진화론에 대한 믿음은 놀라운 현상이다. 그것은 박테리아와 같은 단세포동물이 서서히 변하여 인간과 같은 고등동물이 된다고 가르치는 대진화에 대한 그 어떤 관찰가능한 과학적 증거도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에게 의하여 열열히 옹호되고 있는 믿음이다. 진화에 대한  증거가 없다고 고백한 가장 앞서가는 진화론자들의 최근의 언급을 인용함으로써 이러한 이상한 상황을 설명해 보려고 한다. 그들의 이러한 의도치 않은 언급들을 통하여 우리는 현재 그 어떤 진화가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과거에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진화는 현재 발생하고 있지 않다.

먼저, 그 누구도 진화가 일어나는 것을 관찰한 적이 없기 때문에, 진화의 사례는 단 한건도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만약 실제로 일어나는 과정이라면, 진화는 아직도 일어나고 있어야만 하며,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수많은 “전이적”형태가 존재해야만 한다. 물론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종류 내부에 많은 다양성을 가지고 있지만 명백하고 뚜렷이 건널 수 없는 장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서로 구별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동식물들 뿐이다. 예를 들면, 개 종류 안에 많은 다양성이 존재하고, 고양이 종류 안에 많은 다양성이 존재하지만, “개냥이” 혹은 “고양개”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다양성은 종종 소진화라고 불리며, 이러한 수평적인 (혹은 정보가 감소하는) 미세한 변화는 상당히 자주 일어나고 있지만, 이러한 변화는 단세포동물을 인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수직적” 진화를 일으킬 수 있지 않다.

진화론적 유전학자들은 종종 초파리 등을 대상으로 연구를 해 왔고, 새롭고 더 나은 종류를 만들기 위한 돌연변이를 일으키려 시도해 왔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해 왔다. 새로운 “기본적 종류”는 커녕 진정 새로운 종도 만들어진 적이 없다.

현대의 가장 앞서가는 진화론자인, 피츠버그 대학의 인류학 교수인 제프리 슈와츠는 최근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새로운 초파리 종에 관한 도브잔스키의 주장을 제외하면, 그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서도 새로운 종들이 형성되었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었고 아직도 그러하다.”
전통적으로 과학적 방법은 실험적 관찰과 반복을 요구해 왔다. (소진화와는 명백히 구분되는 (실제로는 정 반대의 메커니즘인)) 대진화가 단 한번도 관찰되지도 않았다고 하는 사실은 그것이 진정한 과학의 영역에 포함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생존한 진화론자들의 학장이며 진화론이 “간단한 사실”이라고 주장해 온, 하버드대학의 생물학과 교수 어네스트 메이어조차 진화론은 “법칙과 실험”이 그것을 설명하는 데 적절하지 않은 “역사과학”이라고 하는 데 동의한다. 그 누구도 진화가 일어나는 것을 실제로 관찰할 수 없다.

진화는 과거에도 결코 일어난 적이 없다.

진화론자들은 종종 오늘날 우리가 그것을 관찰하기에는 진화가 너무나도 느리게 일어난다고 주장함으로써 위의 주장을 반박한다.  그들은 진화의 진짜 증거는 과거의 화석 기록에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수십억 점의 알려진 화석 기록 중에는 진화의 과정에 있는 전이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단 한점의 논란의 여지가 없는 중간단계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다윈의 말대로 진화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상태라면… 논리적으로 화석 기록에는 덜 진화된 것으로부터 더 진화된 것으로 변하고 있는 중간적 형태를 보여 주는 예들로 가득차 있어야 한다.

진화가 빠르게 일어난다고 믿는 사람들조차 하나의 뚜렷한 “종류”가 다른 복잡한 종류로 진화하는 것은 수많은 세대에 걸쳐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따라서 진정한 중간 단계적 구조들이 화석 기록에 남아 있어야 한다. 결국 수십억 점의 중간단계적이지 않은 구조들이 존재하지 않은가! 그러나 (깃털달린 공룡이라고 하는 것들, 혹은 걸어다니는 고래라고 하는 것들과 같은 몇몇 매우 의심스러운 생명체들을 제외하면)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위 잃어버린 고리로 화석 기록의 많은 간극들을 메우는 대신, 대부분의 고생물학자들은 화석 기록에 화석 종들 사이에 변화하고 있는 중간단계에 대한 그 어떤 증거도 없고 간극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생명이 암석과 같은 무생물로부터 진화하여 무척추동물이 척추동물로 진화했고 원숭이와 같은 생명으로부터 인간이 진화했다고 하는 진화의 전체 역사 가운데 중간단계는 놀랄 정도로 전무하다: 현재 중간단계적 생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화석 기록의 연결고리 역시 아직도 잃어버린 상태이다.

생명의 기원에 관하여는, 이 분야를 선도하는 과학자인 레슬리 오르겔은, 단백질이나 핵산이 상대가 이미 존재하지 않고 혼자 스스로 생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후, 다음과 같이 결론내렸다:
“얼핏 보면, 우리는 생명은 사실 화학적 방법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헌신된 진화론자로서, 그러한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 따라서 그는 RNA가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고 추측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인정해야만 했다:
“RNA 세상을 시작하게한 정확한 사건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연구자들은 많은 가설들을 제공해 왔지만, 각 가설들을 지지하는 증거들은 기껏해야 파편적일 뿐이다.”

이를 쉬운 말로 번역하자면: “생명이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알려진 방법은 없다.” 라고 하는 것이다. 불행히도, 두 세대에 걸쳐, 학생들은 혼합 가스에 관한 스탠리 밀러의 유명한 실험이 실질적으로 생명이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배워 왔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밀러는 모든 것을 유리관 안에 집어 넣었고, 전기 충격을 가한 후, 기다렸다. 그는 아미노산들과 다른 생명체에 필요한 복잡한 고분자화합물들이 그 장치 바닥에 축적되고 있는 것을 알아 냈다. 그의 발견은 생명의 기원에 관한 과학적 연구에 엄청난 진보를 가져 왔다. 실제로, 처음 얼마 동안은 시험관 안에서 생명체를 창조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불행히도, 이러한 실험들은 밀러의 원형 실험보다 그리 많이 발전되지는 못했고, 우리는 원시 국물의 쓴 맛을 보았을 뿐이다.

또한 원시 국물로부터 단세포 생물이 만들어 졌다 치더라도, 어떻게 그 단세포 생물이 캄브리아기라고 하는 시기의 복잡하고 다양한 다세포 무척추동물로 진화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그 어떤 단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진화론을 교리적으로 신봉하는 굴드마저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캄브리아기 대폭발은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놀랍고 수수께기와 같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수께끼는 어떻게 원시의 바다에서 “단단한 부분”이 몸 바깥쪽에 있는 무척추동물들이, 단단한 부분이 몸 안쪽에 있는 최초의 척추동물이라고 하는 물고기로 진화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비록 많은 이론들은 존재하지만, 무척추동물로부터 첫번째 척추동물로 진화하는 전이단계가 무엇이었는지는 미궁에 빠져있다.

다른 종류들 사이 역시 그 어떤 진정한 전이단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과학을 열렬히 비판하는 고생물학자인 나일스 엘드리지는 화석 기록에서 진화론적 전이단계에 대한 증거는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생물들은 동일한 기본형태를 유지한다!
“실질적으로 모든 생명체들이 그 생존 기간 중, 작은 다양성은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안정된 형태를 유지한다고 하는 것은 단순하고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렇다면 진화론자들은 어떻게 그것들의 생존 기간중 변하지 않은 생명체들의 화석으로부터 진화론적 계통수를 만들 수 있었을까?

화석 발견들은 단순한 진화론적 계통수를 만들려고 하는 시도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 – 중요한 기간의 화석은 종종 중간단계가 아닌, 많은 다른 집단의 정의적 특징들이 뒤죽박죽 섞여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주요 집단들은 단순한 일직선, 혹은 점진적인 진화의 방식으로 조합되어 있지 않는 듯하다— 서로 다른 시간대의 서로 다른 집단들의 새로운 특징들은 종종 “잘라서 붙여 넣어진 (cut and pasted)”것처럼 발견된다.  

인류학자들이 수년간 그 중간단계를 찾으려 시도해 왔지만, 원숭이와 인간 사이의 중간단계에 관하여서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중간단계들이 제시되었지만, 그 각각은 순서대로 거부당해왔다.  고인류학자들이 지난 100년 이상동안 발굴한 우리 조상의 수는 2000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이 턱뼈와 이빨, 그리고 다른 뼛조각들과 현존하는 동물들로부터 나온 분자생물학적 증거들을 사용하여, 인간과 침팬지가 공통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다고 하는 약 5백만년에서 8백만년 정도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를 만들었다.

인류학자들은 매우 파편적인 화석적 증거들을 보충하기 위하여 현존하는 동물들로부터 나온 DNA와 다른 분자 유전학적 증거를 사용하여 그들의 진화론적 시나리오에 맞추려고 했다. 그러나 이 유전적 증거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화석적 증거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르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전체적 효과는 분자생물학적 계통학은 그것의 창시자들이 믿었던 것처럼 간단한 것이 전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유전체의 복잡한 역학은, 유전체의 각기 다른 부분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고 하는 것을 포함한, 분자생물학적 계통학에 대한 많은 다른 결과들을 바꾼다.”

다른 저자는 인간으로부터 나온 유전적 자료를 요약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관적으로 결론지었다:
“DNA 염기서열 자료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진화의 과정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은 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사라진 과거에 대한 객관적인 재구성은 단지 창조적 상상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을 뿐이다.”

진화가 현재 일어나고 있거나 과거에 일어난 적이 있다고 하는 진정한 과학적 증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진화는 많은 사람이 주장하는 것처럼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고 결론짓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실, 그것은 전혀 과학이 아니며, 우주적 자연주의를 믿는 믿음에 근거한 임의적 믿음체계이다.

실제로, 이러한 진화에 반대되는 부정적 증거들은, 동시에, 특별한 창조에 대한 강력한 증거들이다. 그러한 것들은 기원에 관한 창조모델을 받아들인다면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이다.

창조론자들은 창조된 종류 내에 멸종을 막고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많은 다양성은 존재하지만, 그 종류들 사이에 명백한 간극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창조론자들은 또한, 창조주가 최초에 만물을 온전히 창조하셨으므로, 그 어떠한 “수직적” 변화는 위쪽이 아닌 아랫쪽 (퇴화)을 향할 것을 기대한다. 따라서 진화에 반대되는 논리와 증거들은, 동시에 창조에 관한 긍정적인 증거들이 되는 것이다.

유전학에서 나온 애매한 증거

진화에 관한 직접적 증거의 부재로 말미암아, 진화론자들은 점점 더 생명체의 DNA와 다른 생화학적 요소들의 유사성과 같은 불확실한 정황적 증거들을 진화가 과학적 사실이라는 것의 “증명” 으로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많은 진화론자들은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DNA 그 자체가 진화의 증거라고 주장해 왔다. 더 자주 사용되는 논쟁은 서로 다른 두 생명체의 비슷한 DNA구조는 그것들이 공통 조상을 공유한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하는 것이다.

위의 논쟁들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창조주가 그의 모든 창조물들을 위하여 DNA에 기반한 같은 형태의 유전적 코드를 사용하실 수 없거나 그러지 않으실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진화의 증거가 아닌 지적인 디자인의 증거일 수 있는 것이다.

DNA유사성의 예로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것은 인간과 침팬지의 DNA가 90퍼센트 이상 일치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침팬지의 많은 생화학적 유사성을 고려한다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인간과 거미 사이의 DNA차이에 비하여 더 유사한 DNA구조를 갖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DNA건, 해부학적 구조이건, 배아적 발달이건간에 유사성이라는 것은 진화론적 관계성 보다는 공통된 디자이너에 의한 창조라는 측면에서 더 잘 설명될 수 있다. 생명체 간의 더 커다란 차이점은 유사성보다 더 중대하며, 공통조상으로부터 서서히 진화했음을 가정하는 진화론은 이에 대한 설명을 전혀 할 수 없다. 서로 다른 종류 사이의 이러한 엄청난 간극이 어떻게 자연적 과정에 의해 생길 수 있었겠는가?

인간과 침팬지 DNA사이의 적은 차이점들은 명백히 그 해부학적 구조와 지성에 있어서 매우 커다란 차이를 만든다. 모든 원숭이들과 인간 사이의 표면적 유사성은 그 어떤 실재적 혹은 관찰적 차이점과 비교했을 때 매우 미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간단계가 존재해야 하는 곳은 어디에나 빈 공간만이 존재했기 때문에 진화론자들은 진화에 대한 증인으로서 화석 기록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환멸을 느꼈고, 최근에는 DNA와 다른 유전적 증거를 진화의 증거로서 홍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저 르윈이 위에서 언급했듯, 유전적 증거는 화석 기록과 불일치할 뿐 아니라 생명체 간의 비교형태학적인 면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르윈은 또한 보다 더 전통적인 다윈주의적 “증거들”과 비교했을 때, 이런 형태의 증거에 의해 도출되는 몇가지 전형적 모순에 대하여 언급한다.

전통적인 방식에 의하여 칙충동물로 분류된 코끼리 땃쥐는… 사실… 진짜 코끼리와 더 가까운 친척이다.  소는 소보다 돌고래에 더 가까운 친척이다. 오리너구리는…캥거루와 코알라와 동등한 진화론적 위치에 놓여 있다.

이러한 방식에 의하여 도출된 더 많은 이상한 비교들이 존재한다.
유전 암호에 “정크 DNA”라고 하는 것이 많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 역시 특별한 형태의 진화에 대한 증거로서 제시되었다. 특별히 그들이 돌연변이를 경험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종종 “유사유전자”라고 불려졌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불필요한 유전자라고 여겨지던 것들이 실재로는 유용한 기능을 수행한다고 한다고 하는 증거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과거에 쓰레기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명백하게 과학적 암호를 송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유전자들이 이미 유적자 더미에서 발견되었다.
따라서 “유사유전자”라고 불리기까지 한, 정크 DNA가 아무런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결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단지 무지에 대한 인정이며 생산적인 연구의 대상이다. 한때 진화의 증거로 여겨졌지만 모두 특정 기능을 하는 것을 알려진 소위 인간의 “흔적기관들”처럼 정크 DNA와 유사유전자 역시 그 사용처가 아직 과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그 생명체에게 필수적인 것이라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이러한 증거들은 기껏해야 정황적 증거일 뿐이고, 창조 모델에서 기대할 수 있는 대로, 최초의 완벽한 창조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악화된 것으로 동일하게 설명될 수 있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전에도 언급했지만, 진화가 현재 일어나고 있거나 과거에 일어났다고 하는 관찰 가능한 증거가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진화론자들조차 진화에 대한 이러한 형태의 진정한 과학적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인정한다.

좋은 질문은 이것이다: 왜 모든 관찰 가능한 진화론적 변화는 수평적이거나 사소한 종류 내의 다양성, 혹은 퇴화하거나 멸종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가? 그 대답은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열역학 제2법칙에서 발견할 수 있는 듯하다.

진화는 결코 발생할 수 없다.

현재 혹은 과거에 진화가 일어났다고 하는 그 어떤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 주요한 과학적 이유는 가장 근본적인 자연의 법칙들 중 하나가 그것을 불가능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열역학 제 2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증가하는 엔트로피에 관한 그 법칙은 실제 세상의 모든 계는 “비탈 아래로”, 말하자면, 해체 및 분열, 그리고 복잡성이 감소하는 쪽으로 향한다고 규정한다.

이 엔트로피의 법칙은, 아무리 따져 보아도, 자연에서 가장 잘 증명되었고 가장 보편적인 법칙들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물리학적 계와 화학적 계 뿐 아니라, 생물학적, 그리고 지질학적 계에도 – 사실 모든 계에게 예외없이 적용된다.

“열역학 제 2법칙의 예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단 한번도 발견된 적이 없다. 열역학 제 1법칙인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같이, 이렇게 정확하고 독립적인 모델의 세부사항의 존재는, 물질이 상호 작용하는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과 독립적인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위의 인용을 기록한 저자는 주로 물리학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는 열역학 제 2법칙이 “모델의 세부사항과 독립적”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한다. 게다가, 실질적으로 모든 진화론적 생물학자들은 환원론자들이다 – 그것은, 그들이 생물계에 “활력적”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고 하는 것이며, 모든 생물학적 과정들은 물리학과 화학적 용어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생물학적 과정들 역시 열역학 법칙들과 조화되게 작동해야만 하며, 실질적으로 모든 생물학자들은 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일반적으로 진화는 어쨋든 일어난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비록 모든 계의 자연적 경향은 해체되는 쪽으로 분해되는 것이지만,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오는 에너지가 지질학적 시대들을 통하여 진화를 지탱할 수 있는 “열린계”라는 것을 이해할 때 그 논쟁은 해결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한 진화론적 곤충학자가 W.A. 뎀스키의 훌륭한 새 책인 지적 설계를 비판할 때 사용한 논쟁이다. 이 과학자는, 그가 “열역학 제 2법칙에 근거한, 진화론에 대한 반박”의 “결점”이라고 부르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그가 “복잡성을 증가시키기 위한 자연과정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변호한다. 그렇다면 그 “결점”은 무엇일까?

“닫힌계의 전체 무질서도는 감소할 수 없지만, 더 큰 계 안에 있는 지역적인 질서도는 지적인 존재의 작용이 없더라도 증가할 수 있다.”    

이러한 엔트로피 법칙에 대한 순진한 답변은 진화론을 변명할 때 일반적이다. 만약 특정 조건이 갖추어 진다면, 열린 계에서 지역적 질서도가 증가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진실은 진화가 그러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오는 에너지에 열려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원래의 태양열이 열려 있건, 닫혀 있건, 특정 시스템에서 복잡성을 증가시킬 수 있도록 전환되는지에 대하여 그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열린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감소되는 엔트로피 (혹은 복잡성의 증가)는 어떤 가이드 프로그램 같은 것과,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에너지 전환 메커니즘을 필요로 한다.

진화는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돌연변이는 어떤 것을 “조직하는” 메커니즘이 아닌, (열역학 제 2법칙을 따르는) 붕괴시키는 것이다.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해롭고, 때때로 중립적이지만, (관찰된 돌연변이에 한해서는) 결코 이롭지 않다. (겸상 적혈구 빈혈 등과 같이 특수한 상황에서 이로울 수 있다고 주장되는 돌연변이들도 실제로는 존재하는 정보의 손실로 인한 것이다 (역자 주)). 자연선택은 결코 질서를 만들어 낼 수 없고, 단지 붕괴하는 돌연변이들을 “걸러낼 수” 있을 뿐이고, 따라서 이미 존재하는 질서를 보전할 뿐, 결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원칙적으로, 모든 계에서 사물이 곧 붕괴되는 성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화가 열린 계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 누구도 진화가 이러한 보편적인 성향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없었고, 이것이 기본적으로 왜 과거 혹은 현재에 진화가 일어났다고 하는 진정한 증거가 아직도 존재하지 않는가에 관한 이유이다.

따라서 진화론자들 자신의 언급으로부터, 우리는 진화에 관한 실질적인 과학적 증거가 존재하지 않음을 배웠다. 관찰 가능한 증거는 엄격한 경계 내에서의 매우 제한적인 수평적 (혹은 퇴보적) 변화일 뿐이다.

진화는 과학이 아닌 종교이다.

입자가 인간으로 진화했다는 생각은 과학 이론의 기준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과거의 화석 기록에서 이러한 진화론적 중간단계는 관찰된 적이 없다; 그리고 엔트로피의 보편적인 법칙은 진화를 불가능하게 한다.

진화론자들은 진화가 과학적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창조론적 과학자들과의 과학적 토론에서 거의 언제나 패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은 현재 과학적 논쟁의 기회를 거부하는 대신, 창조론자들에게 대한 일방적인 공격을 하기를 선호한다.

“공개 토론은 득보다 실이 많으므로, 과학자들은 그것을 거부해야만 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창조론자들의 메세지를 논박할 필요가 있다.”

질문은, 왜 그들이 창조론자들의 메세지를 논박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왜 그토록 단호하게 반-창조론에 헌신되어 있는가?

사실은 진화론자들은 진화를 믿기 원하기 때문에 진화를 믿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창조주 없이 만물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한 그들의 희망사항이다. 진화론은 따라서 본질적으로 무신론적 종교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인본주의라 부르기를 더 좋아하고, “뉴 에이지” 진화론자들은 그것을 범신론의 범주에 놓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다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무신론이건 인본주의이건 (혹은 범신론이건), 목적은 우주와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구성요소의 기원에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제거하는 것이다.

인본주의적 철학의 중심은 자연주의이다 – 자연적 세상이 신적인 혹은 초자연적인 조절이나 안내 없이 그 내부적 원동력에 의하여 나아가며, 우리 인간도 그 과정의 부산물이라는 제안. 인본주의적 운동 초기의 철학자들이 인본주의와 자연주의 중 어느 것이 그들의 입장을 더 잘 기술하는지에 대하여 논쟁했던 것을 기억하면 도움이 된다. 그 두개의 개념들은 상보적이며 서로 뗄 수 없다.

자연주의와 인본주의 모두 하나님을 과학이나 자연에서의 어떤 적극적인 기능, 혹은 생명과 우주의 유지 전반으로부터 하나님을 배제하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이 무신론이라는 것이 매우 명백하다. 그리고 무신론은, 유신론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종교이다! 심지어 교조적인 무신론자이자 진화론자인 리처드 도킨스 역시 무신론이 진실이라는 것은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그것을 믿어야만 하고, 그것은 그 믿음을 종교가 되도록 한다.

진화론의 그러한 무신론적 본성은 진화론적 사고를 이끄는 사람 대부분이 인정할 뿐 아니라, 주장된다. 예를 들면, 언스트 마이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윈주의는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과 원인들을 거부한다.”

캔자스 주립대학의 한 생물학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자료들이 지적인 설계자가 존재해야 함을 가리킬지라도, 이러한 가설은 과학으로부터 배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주의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버드의 스티븐 제이 굴드와 에드워드 윌슨, 영국의 리처드 도킨스, 코넬의 윌리암 프로바인과 같은 영향력 있는 진화론자들, 그리고 다른 진화론의 대변인들이 독단적인 무신론자라고 하는 사실은 오늘날 과학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저명한 과학 철학자이자 열정적인 진화론적 무신론자인 마이클 루즈 역시 진화가 그들의 종교라고 하는 것을 인정했다!

“진화는 그 신봉자들에의해 진정한 과학 이상으로 격상되었다. 진화는 이데올로기, 의미와 도덕성을 지니고 있으며, 완전히 성장한, 기독교를 대체하는 세속적 종교로서 전파되었다… 진화는 종교이다. 이는 진화의 처음부터 사실이었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를 표현하는 또다른 단어는 “세계관”, 현실의 전반이다. 진화론적 세계관은 생명의 진화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전 우주에 적용된다. 우주적 진화의 영역에서, 자연주의적 과학자들은 소수만 이해하는 수학과 형이상학적 가정으로부터 다양한 진화론적 우주론을 생성해 냄으로써, 생명과학자들보다 훨씬 더 실험 과학과 멀어진다. 사회주의자인 제레미 리프킨은 이러한 놀라운 게임에 헌신되어 있다.

“우주론들은 사회에 의해 거대한 우주적 눈속임으로 리모델링 된 작은 물리적 현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증거에 부합하기 때문이 아닌, 모든 증거들과 배치됨에도 진화를 믿어야만 한다. 그리고, 눈속임에 관한 다음의 놀라운 언급을 보라.
“우리는 그 구성물 중 몇몇의 명백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편에 선다… 물질주의에 대한 입증되지 않은 헌신에 대한 과학계의 관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구를 하는 조직체와 물질적 설명을 생산하는 개념들을 만들기 위한 물질적 근원에 대한 선험적 지지에 이끌린다. 그것이 얼마나 비이성적이던, 일반인들에게 혼란스럽게 보이던 말이다. 무엇보다도 물질주의는 절대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의 발을 문 안에 들여 놓는 것을 허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솔직한 문장의 저자는 하버드 대학의 리차드 르완틴이다. 진화는 실험적 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의 타당성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따라서 온갖 가상의 이야기들이 부자연스럽게 교과서들을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진화를 진실로 만들 수는 없다! 최근 한 진화론자의 책을 검토한 다른 진화론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공통조상 혹은 “잃어버린 고리들”을 알아낼 수 없고 특정 진화이론을 설명할 수 있는 검증가능한 이론을 만들어낼 수 없다. 기는 어떻게 첫번째 양서류가 육지를 정복했는지, 어떻게 조류가 날기 위한 날개와 깃털을 만들었는지, 어떻게 공룡이 멸종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선입관과 편견에 의한 상상의 산물일 뿐이라고 단호히 주장한다.”

한 물리학자의 매력적이게 솔직한 고백은 기득권 과학자들의 자연주의에 대한 열정적 헌신을 잘 보여준다. 학생들이 높은 학식을 가진 교수들에게 보이는 신뢰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학생들의 신뢰를 그들을 세뇌시키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한다…우리의 교육 방식은 주로 그러한 선전이다. 우리는 무엇을 입증하는 대신, 우리의 입장을 지지하는 증거에 호소한다. 우리는 현재 받아들여진 이론들을 지지하는 증거와 논쟁만을 소개하고 반대적인 증거들은 생략하거나 얼버무리고 넘어간다.”

창조론을 믿는 학생들은 진화론자 교수가 가르치는 과학 강의에서 위의 언급의 안타까운 현실을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진화는 루즈가 지적하듯, 종교적 무신론에 기반한 유사과학이다. 코넬 대학의 윌 프로바인은 이것을 정직하게 인정한 또 다른 과학자이다.
“창조론자들이 주장하듯, 현대적 진화론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을 무신론자들로 만든다. 사람들이 가진 종교적 견해가 무신론과 동일한 것일 때에만, 그들의 믿음은 진화론과 일치할 수 있다.”

다시금, 우리는 진화론자들의 장황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진화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것은 철학적 세계관 이상일 뿐이다.
“그들은 진화가 모든것을 설명해야 한다고 느낀다…모든것을 설명하는 이론은 폐기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정한 설명적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진화에 관한 다른 것은 그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정할 수 있는 것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실험적 증거는 극히 드물다.”

위의 언급은 너무나도 너그럽다. 진정한 진화 (대진화)를 보여줄 수 있는 실제 실험적 증거는 “드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적 형태로서의 진화의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나의 책, 하나님과의 오래된 전쟁에서, 나는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진화라는 개념이 어떤 형태로던 모든 반-창조 종교의 배후에 존재해 온 거짓 논리라고 하는 것을 기록했다. 여기에는 모든 고대 민족의 종교들과, 불교, 힌두교 뿐 아니라, 창조론적 종교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 내의 “자유주의적” 운동들도 포함된다.

20세기의 앞서가는 진화론자는 일반적으로 근대적 신-다윈주의를 설계한 줄리안 헉슬리경이라 할 수 있다. 헉슬리는 진화를 “계시가 없는 종교”라고 불렀거, 그 제목의 책을 썼다. 그가 나중에 기록한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화는… 지구상에서 나온 생각들 중 가장 강력하고 포괄적인 것이다.”

그 책에서 그는 “하나님 중심에서 진화 중심의 종교적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고 열정적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 가설은…우리의 사고에 있어서 지적이고 도덕적인 부담이 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우리는 그것의 자리를 차지할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물론 그가 말하고 있는 무언가는 진화론적 인본주의라고 하는 종교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진화론적 인보주의 지도자들이 시도하는 것이다.

진화론이 과학에 위배되는 이유들에 대한 연구를 맺으며, 독자들은 다시금 교조적 진화론자들의 언급을 기억하기 바란다. 성경이나 창조론자들의 언급은 전혀 포함하지 않았다. 진화론자 자신들이 모든 면에서 진화론은 과학이 아닌 무신론에 대한 종교적 믿음이라는 것을 보인 것이다.

출처: USA 아멘넷 독자공간게시판/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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