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헌금-김은태 목사 

시집간 딸이 성경적 헌금에 대해 의 질문을 해왔습니다. 어느 교회나 그렇듯이 교회에서 헌금 문제로 고민이 생겼나봅니다. 딸에게 보내준 내용을  여기 올립니다.

성경적 헌금이란?
구약에 나타나는 헌금은 대략 두 곳 정도에 나오는데 첫째 민31:50에 나오는 (히)‘코르반’ 은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 (막7:11) 바로 그 단어로 ‘가까이, 친밀해지기 위해, 잘 보이기 위해 바치는 예물’이란 의미를 지닌다. 민수기 31장 50절에 나오는 헌금, 코르반은 앞서 발람과 발락의 사건 후 그들의 계략에 의해 모압과 미디안 여인들과 음행하는 사건 일명 ‘고스비사건’을(민25:) 통해 염병의 저주로 인해 이만 사천 명이 죽은 사건 후 31장에서 미디안을 멸절하여 원수를 갚으라는 여호와의 명령에 미디안에게서 탈취한 재물 중 여호와의 전에 바친 예물이 바로 코르반이다 그러니까 여호와께 잘 보이려는 의도로 드린 헌금인 것을 유대인들이 계속 율법적 종교의식으로 신약시대까지 드려졌던 헌금이다.

또 하나는. 대하34:9,14절에 나오는  (히)’보‘로써 이 ’보‘는 앞의 민수기에 나오는 그 헌금’코르반‘으로 드려지면서 자리 잡은 의무적 성격의 헌금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요시야 왕이 훼파된 성전을 회복할 때에 그 꺼낸 돈으로 목수들과 인부들 임금을 지불하고 성전재건 비용을 충당한 것으로 보아 성전세의 개념으로 자리 잡았던 것 같다. 이 헌금은 신약성경 막12:41-44,와 눅21:1-4에서 등장하는 (헬)’가좁휠라키온‘과 같은 헌금 형태의 헌금이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헌금에 관한 말씀은 막12:41-44와 눅21:1-4절의 내용과 서신서 중에서 고린도교회에 쓴 편지 중에 고전16:1-2과 고후8장과 9장을 할애해서 사도바울이 헌금(연보)에  대한 가르침을 잘 나타내 보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 전에는 분명 ‘연보’로 되어 있는데 개역개정에서는 헌금으로 바뀌어 있다.  성경적 의미는 헌금 보다는 연보의 개념이 맞고 이 연보는 초대교회에서 자연스레 행하던 것이고 당시의 교회는 지금 같은 조직과 법제도가 없던 상황에서 자연스레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그 말씀을 듣고 서로 교체하는 모임이 형성되었고 그 모임에서 어려운 형제들을 서로 십시일반으로 또는 형편과 능력대로 돕고 섬기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예루살렘교회에 핍박과 어려움이 생기자 교회인 성도들이 드러내놓고 활동을 하는데 제약이 있고 숨어 지내야 하고 때론 순교당하거나 잡혀죽은 성도들의 남겨진 가족들을 남은 교회가 돌보아야 할 상황들이 발생하자 사도 바울은 그가 전도해서 세워진 교회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여 물질적인 원조가 필요함을 알렸고 똑 같이 어려운 가운데 있는 아가야나 마게도냐 교회나 고린도의 여러 교회가 힘써, 지나치게 힘써 연보를 하여 도와 것에 대한 기록들이 나오고 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과부의 두 렙돈은 유일한 헌금 즉 연보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의 중요한 가르침은 연보를 하는 것이 성경적이냐 아니냐의 얘기가 아니다.  당시의 교회 즉, 성전에서는 이 연보(헌금)이 자연스럽게 행해지고 있었고 이것은 당연한 것으로 유대인들 사회와 주님에게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미 구약시대부터 행해지던 하나님으로부터 허용된 신앙행위이었다. 성경적(율법)으로 교리적으로 맞느냐 아니냐는 바리새인들의 사고였다. 주님은 어느 시대나 그 시대의 문화나 사회적 개념들을 허용하신다. 그 예수님께서는 연보(헌금)의 금액보다 연보를 하는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셨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연보(헌금)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다.

십일조 역시 연보(헌금)과 같이 취급하시면서 십일조를 내느냐 마느냐의 교리적 율법적 내용이 아닌 내는 자의 마음 중심, 즉 십일조의 중요한바 ‘의와 인과 신’(마23:23)을 누가복음에서는(눅11:42) ‘공의와 하나님 사랑을’ 중요한 관점으로 말씀하시며 ‘행하되 가장 중요한 ’의미‘ 즉 마음 중심을 버리지 말 것을 말씀하신다.
사실 십일조나 성전에서 내는 연보는 당시 유대교의 계율대로라면 ‘연보’의 의미보다 ‘세금’의 의미가 더 크다. 구약의 연보 뿐 아니라 예수님 당시의 연보는 ‘헬’가좁휠라키온 인데 ‘세금궤’에 세금을 내는 의미였고 이 돈은 국고로 들어가 주로 성전을 수리 보수하는데 쓰였다. 물론 명목상은 그랬지만 성전 지기나 제사장 무리들이 뒷주머니에 챙기고 착복했을 테지만 그러니까 잘 살고 많이 있는 자는 그만큼 많이 내는 것이 법 정신과 형평에도 맞고 없는 자는 적게 내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그 사역이 끝나고 부활 승천 하신 후 약속대로 다시(재림)하신 주님이 성령으로 성도 안에 들어오셔서 세워진 참 하나님의 교회인 신약교회에서(교회라는 용어‘에클레시아’는 신약교회에서 사용됨) 행하여진 연보(헌금)은 ‘가좁휠라키온’이 아니라
a. 로기아(고전16:1-2)  b. 하플로테스(고후8: )  c. 율로기아 이 세단어로 나타나는데

첫째 ‘로기아’는 ‘말씀, 설교, 감화’의 의미인 “로고스”에서 기원된 말로 상업적 의미를 지니며  ‘징수’ 라는 뜻이 있다. 그러니까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헌금은 교인이 설교를 듣는 그 교회 공동체에 법제적, 의무적 성격의 헌금을 나타내며 이 역시 자원적의미를 담고 있으며 주일헌금 과 같은 성격의 헌금인 것이다. 그래서 주일헌금은 설교를 듣는 그 교회에 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둘째로 고린도 후서 8장에 나오는  ‘하플로테스’인데 이 단어는   '단순'히 즉 헌금공여자가 그 마음에 공동체나 어떤 대상에 분열이나 이기주의  없이 '성실'히 혹은 '관용'의 마음으로 그 마음에 진정한 사랑과 긍휼을 담아 어려운 형제자매를 돕는 것을 말한다.  이 연보(헌금)은 어려운 성도를 섬기고 돌아보는데 그 목적이 있으므로 구제헌금으로 이해하면 된다.

세 번째는 고린도후서 9장 에 나오는 ‘율로기아’다. 이 단어는 찬미, 찬양, 봉헌, 축복, 부조, 좋은 말씀, 진심을 담은 축하의 말 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축복’이라는 뜻의 ‘율로기오’가 기원이다. 그러니까 이 세 번째 헌금의 배경은 멀리 있는 타 지역의 어려운 교회를 돕기 위해 일 년 남짓 동안 목표액을 정해서 모은 작정헌금 이었다. 이런 헌금은 액수가 클 것이고 바울도 거액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율로기아는 ‘부조’의 개념이 정확한 표현이며 선교헌금의 개념이다.

그러니까 헌금은 1. 목적이 분명하고 2. 대상이 분명하고 3. 사용처가 분명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헌금하는 자의 마음과 자세가 진정으로 돕고, 긍휼히 여기고 감사함고 축복하는 마음가짐으로 성심 성의껏 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의 헌금 개념은 시대가 흘러 이런 형태의 조직교회로 발전하면서 조직과 공동체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 자연스런 요구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그 목적은 분명하고 단순했으며 한국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헌금(연보)는 성경적으로 행하여져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용처는 목회자의 생활비와 교회 유지비용과 전도비(선교) 그리고 구제를 위한 비용충당이 전부였다.
어느 시대나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해야지만 사실 십일조는 성숙된 성도는 당연한 헌금이었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헌금은 마땅한 의무이자 도리며 권리이기도 한 것이다. 이 십일조의 용처는 구약의 제사장과 그 가족(다른 수입이나 직업을 가질 수 없었기에) 들을 위한 것이었다. 오늘도 십일조는 전임 목회자를 위해 드려지는 것이 맞으며 일정한 생활비를 교회가 제공해야한다.
그리고 주일 헌금이나 각종 감사헌금 역시 성격적이고 이것은 교회 공동체 운영을 위해 마땅히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드려야 할 성도의 도리인 것이며  또한 어려운 이웃이나 외국의 어려운 교회를 돕거나 시골의 어려운 교회와 목회자를 돕고 섬기는 구제와 선교헌금 역시 성도가 성의껏 자원해서 드려야 할 헌금이다.

또한 진리의 복음 안에서 구원 받은 성도들이 교제하고 예배하는 교회의 구성원으로써 그 소속된 조직인 공동체를 운영하고 누리려면 마땅히 제반 비용을 충당하고 섬기는 일은 의무요 권리이기도 하다. 작은 친목 모임에도 다달이 회비를 내고 모일 때마다 경비를 책임지는 것이 회원의 의무조항인데 헌금의 마땅한 부분은 자원해서 내는 것이 피차 기쁘고 즐거운 것이므로 더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조직이 크고 방대하면 그 많큼 사용처도 많아질 것은 자명할 것이다.

● 그런데 오늘에는 목회자가 형편에 지나친 사례비를 요구하거나 교회 건물을 건축한다거나 용처가 불분명한 선교비를 걷거나 하는 것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목회자 자신이 정한 이 금액을 채우기 위해 성경의 말씀을 교묘히 이용한다거나 축복이나 저주의 말로 성도를 위협, 또는 미혹하고 기만하여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정말로 잘못된 짓이며 또한 용처가 불분명한 지출 역시 성경적이지 않다. 또한 필요에 지나는 헌금유도나 무리한 교회건물의 확장이나 그로인한 교인들이 감당해야할 이상의 과도한 헌금배당은 짐이 될 것이고 십일조를 안 하면 지옥 간다거나 저주를 받는 다고 말하는 일부 목회자들은 오히려 교인들의 신앙을 병들게 하거나 왜곡된 신앙으로 변질 될 수도 있다.  십일조나 헌금은 축복의 조건이나 구원의 조건이 절대로 될 수 없다.
● 주님은 여러 명목의 헌금을 상황과 시대를 따라 허용하시지만 이 헌금을 내는 주체와 사용하는 주체가 교인이기에 스스로 헌금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마음이 드려져야 하며 진정성이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관리 감독하는 것 역시 교인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 신약교회의 교회나 헌금은 율법과 교리적이지 않다. 구원과도 축복과도 천국과 거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기쁨과 감사와 축복의 마음으로 내는 진정한 헌금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 이루어 진 것이어야 하며 이것이 ‘참 연보’라고 사도바울은 말한다.  


● 왜냐 하면 헌금하는 자의 마음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드리는 것이야 말로 참 연보요 하나님 자신께서 이미 받으신 것이기에 드린다고 잘못되는 것도 없고 못 드린다고 해도 정죄에 빠질 필요가 없다. 십일조도 금액이나 비율에 매이지 말고 드릴 수만 있으면 드리는 것이 좋다.  십의 일도 십의 십도 십의 0.5도 모두 십, 일, 조인 것이다. 모든 종류의 감사도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율법적, 종교적, 교리적 신앙으로 드리면 소용이 없고 억지로 하는 것 역시 바르지 않다. 교회의 형편과 사정에 따라 그리고 섬겨야 할 대상에 따라 최선을 다 해야 하며 그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를 누려야 하며 선하고 사랑스런 축복의 말과 물질을 포함한 여러 수단을 동원해서 성도를 섬기는 것이 주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것이다.
● 주의해야 할 것은 기도하며 주께 지혜를 구하며 반드시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고 자신의 의와 욕심과 교만을 따라 하지 말아야 하며 오해나 교만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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