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 두가지는
'눈물'과 '웃음'이라고 합니다.

눈물에는 치유의 힘이있고,
웃음에는 건강이 담겨 있습니다.

기쁠 때 몸 안팎으로 드러나는 가장 큰
행동이 웃음 입니다.

당신의 마음 속에는
특별한 스위치가 있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켜고 끌수 있는

행복 스위치 입니다.


지금 내가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지 않다면

 나도 모르게 그 스위치를

꺼 놓고 있는건 아닐까요?

행복은 누리고

불행은 버리는 것입니다.

소망은 쫒는것이고

원망은 잊는것입니다.

기쁨은 찾는 것이고

슬픔은 견디는것 입니다.

건강은 지키는것이고

병마는 벗하는것 입니다.


사랑은 끓이는 것이고

미움은 삭이는 것 입니다.

가족은 살피는 것이고

이웃은 어울리는 것 입니다.

자유는 즐기는 것이고
속박은 날려 버리는 것입니다.

웃음은 나를 위한 것이고

울음은 남을 위한것입니다.

기쁨은 바로 행복 입니다.
행복은 누가 만들어 줄까요?
그것은 바로 당신 자신 입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밝고 환한행복 스위치를

다시 켜보세요.

          - 담아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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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닫고 돌이켜야 산다!


대한민국이 왜 재앙의 길로 스스로 걸어가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심판은 정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씀만 제대로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끔찍히 싫어하시는 죄는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다윗의 길이 아닌, 여로보암의 길, 산당을 세우고 가증한 것을 섬기며, 금송아지를 보고 출애굽 해준 신이라 섬기며,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배도의 길로 걸어가는 이스라엘에게 심판은 당연한 것이었다.


에스겔, 예레미야, 호세아같은 선지자들이 그렇게 삶으로, 마음으로, 눈물로 전했던 메세지는 심판이었다. '멸망'을 위한 심판이 아닌 '회복'을 위한 심판이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이 선포했던 메세지는 '평화'와 '축복'이었다. 현 시대에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로 아직도 '평화' '정의'가 실현되고 있다고 믿고 있거나, 그렇게 말하고 있는 분들은 제발 눈을 뜨시고 정신 차리길 바란다.


우상정권, 인간이 신이 된 나라, 공산주의, 기독교 박해국가 1위, 예수 믿으면 3대가 멸하는 나라, 적그리스도 체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억압, 박해, 고통 속에서 자유가 없이 70년 넘게 살아가는 우리 국민들(북한 주민들).


그런데 저 북한 정권이 무너지길 바라지 않는다고? 손 잡고 함께 평화? 대화?




90억 가까이 대북지원을 선포한 것은, 왕이 우상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는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이게 배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국가 지도자가 바알과 손을 잡고 가겠다고 대놓고 선포하고 있는데, 아직도 한국의 기독교인들을 정신 못 차리고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인 희년과 자유를 마땅히 누려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억압 받고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데, 멀쩡하게 제사하고 예배하고 있던 남유다는 심판이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천만명에 육박하고 교회들이 이렇게 많은데, 생명력을 잃고, 빛과 소금은 커녕 자살하는 사람 눈 뜨고 구경만 하고 있고, 북한의 우상 정권 아래에서 국민들이 억압받고 있는데 거룩한 '모양'으로 교회에서 예배만 드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정상인가?


강도 만난 자를 보고 그냥 지나치는 것도 모자라 강도를 도와주고 있는 이 나라가 지금 정상인가?


윌버포스, 링컨 등 마땅히 억압과 박해 속에서 살아가는 흑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합당한 것이라고 얘기했을 때, 미국의 백인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하게 예배 드리면서 흑인 노예 해방을 반대했다. 왜? 자신들이 피해보기 싫어서. 손해 보기 싫어서.


대한민국이 정신차려야 산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정신 차려야 산다.

대한민국 그리스도인들이 속히 깨닫고 돌이켜야 살 수 있다.



출처: John Kwon 페이스북

엉뚱한 곳에 관심을 쏟지 마라!

‘소득 없는 분주함’을 조심하라!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를 향해 정면 공격을 퍼붓다가 실패하면 그의 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좀 더 교묘한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그분께 받은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도록 그의 관심과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기만적인 방법을 동원한다. 그것은 성도가 중요성이 떨어지는 어떤 다른 것에 관심을 쏟도록 유도해서 결국은 자신의 사명에서 멀어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종종 자신의 목적을 이룬다.


결국은 자신의 사명에서 멀어지도록 만드는 것


선한 사람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심어주신 비전에 따라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눈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수산을 떠나 그의 사랑하는 성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다.


그에게는 왕에게서 받은 권세가 있었고, 성의 재건에 필요한 물질이 있었다. 그리고 느헤미야의 목적과 계획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알려졌을 때 그들은 “일어나 건축하자”(느 2:18)라고 단호히 외쳤다.


예루살렘 성의 재건 추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원수가 보인 첫 번째 반응은 그 모든 계획에 조롱을 퍼붓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이 느헤미야와 그를 돕는 사람들을 비웃고 조롱했을 때에도 느헤미야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느 2:20)라고 단호히 응수했고, 재건은 계획에 따라 계속되었다.


성의 재건을 막으려는 다른 모든 방법들이 실패로 돌아가자 음모자들은 느헤미야에게 회담을 제안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그들의 제안이 자신에게 위해(危害)를 가해 그의 기념비적 사업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려는 악한 술수임을 꿰뚫어보고,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느 6:3)라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아주 지혜로웠다. 이와 같은 대답이 기만적인 제안에 응수하는 상투적인 대답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사용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에게 맡기신 사명이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모두 뒷전으로 밀려나야 했다.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우리 아버지의 일을 이루어드리겠다는 사명감에 압도당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숭고함에 감탄하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그 밖의 다른 하찮은 일들에 시간을 투자하라는 악한 자의 모든 속삭임을 뿌리치게 될 것이다.


이미 주전 445년에 느헤미야의 입에서 나온 이 말, 즉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느 6:3)라는 말로 악한 자를 완패시키자! 이 말 외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우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려는 사탄의 말은 종종 아주 예기치 못한 곳에서 나온다. 마르다는 마리아를 불러 주님의 발 앞에서 떠나게 하려고 했다.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때로는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가 우리를 사명의 길에서 벗어나게 만들 수도 있다. 또는 아주 정당한 활동이 그런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야단법석을 떨며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생활 때문에 너무나 자주, 너무나 빨리 예수님의 발 앞에서 떠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관심을 쓸데없는 곳으로 돌리는 것들은 모두 속히 떨쳐버려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소득 없는 분주함’에 빠지고 말 것이다.


현재 유행하는 대부분의 교회 프로그램의 비본질적 활동들과 계속 증가하는 기독교 단체들은 우리가 방심하는 사이에 우리의 관심을 엉뚱한 곳으로 돌려 우리를 미로 같은 샛길로 끌고 갈 수도 있다. 그 끝은 아무 열매 없는 막다른 골목이다.


우리의 재능을 낭비하지 않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검증된 방법들을 사용함으로, 한편으로는 무기력한 교파주의의 수렁을 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열된 비생산적인 활동을 피해야 한다. 현재와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우리의 관심을 자꾸 곁길로 끌고 가는 것들을 피하는 기술을 능숙하게 익혀서 늘 열심히 사용해야 한다.



출처: 갓피플 말씀테마 (http://gp.godpeople.com/archives/70700)

개혁주의 선교원리에 관한 논의

 

이광호 목사




1. 서론

   우리시대에 ‘선교’라는 용어는 이미 보편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이 기독교 초기부터 사용된 말은 아니었다. 교회가 수행해야할 본질적 사명 가운데 하나가 복음전파이므로,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있어서는 선교라는 말이 복음전파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그렇지만 우리 시대에 있어서 선교라는 용어는 인간의 종교적 열정과 연관되어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세상에 대한 물질적 봉사의 영역으로서 선교를 요구하도록 했다. 그에 대한 증거로, 우리는 주로 가난한 나라에 선교를 하는 것이 보편적인 경향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으며 가난한 나라의 성도들이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듯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현대 교회의 경향이다.     

  본래 선교학의 유일한 근거는 신구약 성경이다. 성경의 요구와 가르침에 근거하여서만 선교의 의미가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선교학이 현대교회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이래 선교학은 성경중심으로 발전되기 보다 세계 속의 급변하는 상황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개혁주의 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말씀을 기초로 한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선교에 있어서도 종교적 자기 열정이나 결심이 아니라 기본적인 신앙고백의 틀 위에서 선교가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선교의 목적은, 미리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된 성도들이 하나님의 택한바 된 백성들을 찾아 그 고백을 전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통해 필자는 현대선교의 다양한 신학적 양태들을 간단하게 살펴봄과 동시에, 전통적 개혁주의자들은 선교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졌으며 그들은 어떠한 고백을 했는지 신앙고백서들을 통해 살펴보기를 원한다. 그리고 현대 선교에 있어서 적극성과 소극성의 문제와 함께 구체적인 성경말씀들을 살펴봄으로써 개혁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우리의 선교원리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현대선교의 다양한 신학적 양태

   (1) 자유주의 선교이론

       우리 시대에 가장 경계해야 할 선교신학은 자유주의자들의 사상이다. 자유주의 선교이론은 ‘Missio Dei 사상’에 근거한다. 이를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교회의 안팎을 구분할 필요가 없는 하나님의 세상통치를 의미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심각한 오해를 하여 인본주의적 해석을 가미하고 있다. 이에서 나온 선교사상들이 남미의 해방신학, 유렵의 정치신학, 아프리카의 흑인신학, 한국의 민중신학, 현재 이슈가 되어있는 여성신학 등 소위 행동신학(Doing Theology)이다.   

  1960년대가 되면서부터 포스트 모더니즘의 사조와 함께 선교학 마저 고유한 복음전파의 개념을 크게 상실 당하게 된다. 특히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독교 내부에서 상황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사회과학적인 면이 과대하게 강조되었다. 최근에 들어와 신학의 타학문 분야에서 이에 대해 자성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즉 신학이 없는 선교학에 대한 비판과 성경을 도외시한 사회과학 쪽으로 치우친 선교학 연구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2) 복음주의 선교이론

       복음주의 선교이론의 특색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참여에 있어서 인간 즉 지상교회들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은 결과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선교실적을 논하게 된다. 그들은 선교활동 자체가 인간의 공적이 되며 그 공적이 곧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외적인 활동으로 인한 선교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평가를 하기도 한다. 

  복음주의 선교학에서는 소위 기독교화(Christianization)에 치중하여 기독교의 영역을 넓히는 것에 힘을 쏟는다.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선택이나 예정에 대한 교훈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는다. 대신 보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주로 강조하며 하나님을 이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고유한 하나님의 경륜이나 섭리보다 인간의 자기연민에 기인한 감성적 사고의 결과일 따름이다.  


   (3) 개혁주의 선교이론

       개혁주의 선교이론에서는 구원과 선교 전반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참여할 뿐이다. 개혁주의 선교이론에 있어서는 외적인 결과를 통해 성공과 실패를 논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온전히 순종했는가에 관심을 기울이며 반성하게 된다.

    개혁주의 선교이론의 근거는 오직 신구약 성경말씀이다. 이 말씀에 조화되는 전통적인 신앙고백들이 곧 선교이론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즉 개혁주의자들은 인간의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계획과 경륜에 모든 것을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3. 전통적 개혁주의자들의 선교에 대한 자세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선교에 대한 이해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선교’에 관한 별항이 들어있지 않다. 현재에 있어서도, 많은 경우 우리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신앙의 표준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헌법은, 제1부 교리표준 <1. 신앙고백>에서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제35장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하여’를 첨가한 문서를 채택하고 있다. 물론 나중에 첨가된 이 조항은 원리적 측면에서 앞의 전통적 신앙고백서에 조화되어야 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현대 개혁주의 선교 이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5장을 전반적으로 잘 고찰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제35장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하여], 제1항에서는 “하나님은 ‘은혜계약 안에서’, ...... ‘복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거저 주신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장에는 전체적으로 ‘모든 인간’을 뜻하는 문구들이 되풀이하여 등장하고 있다. 제1항에는 ‘모든 멸망한 인류’, ‘모든 사람’, 제2항에는 ‘모든 사람’, ‘모든 사람들’, 제3항에는 ‘모든 사람’, 제4항에는 ‘모든 민족’ 등이 나타난다. 여기에 언급된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이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의 대상은 모든 사람들이요 온 인류임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그러나 고신 교단이 채택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5장을 그렇게 해석하게 되면 앞의, 제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관하여’와 제10장, ‘효력있는 부르심에 관하여’에서 고백하고 있는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하게 된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동일한 신앙고백서에서 서로 배치되는 항목을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제35장 제1항의 모든 멸망할 인류와 ‘모든 사람’ 앞에는 각각 ‘하나님의 은혜 언약 안에서’ ‘복음 안에 있는’이라는 수식어가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제2항에서도 ‘모든 사람’ 앞에 ‘복음 안에서’라는 말과 ‘진실로 회개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이라는 수식어가 있다. 제3항에서도 ‘복음을 듣는’ 이라는 수식어가 ‘모든 사람’ 앞에 붙어 있다. 그리고 제4항에서의 ‘모든 민족’은 all nations가 아니라 every nations로 해석하여야 한다. 이는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민족에 속한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과 종족을 초월한 개념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때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5장이 앞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조회되는 고백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만인을 다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의 영원한 예정과 부르심을 통해 주를 믿는 성도들만 부르고 계시고 그의 은혜와 마찬가지로 궁극적 심판도 실제적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선택에 의한 제한적 구원에 관해서는 대소교리문답에서도 그대로 명시되어 있다.

 

   (2)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도 복음전파의 기초는 하나님의 선택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요리문답 제54문에서 거룩한 공회 즉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관한 문항에서 ‘인류가운데서 선택된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부르시고 계심’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선교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영생에의 참여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기인함을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83문에서는 교회의 문을 여는 천국열쇠의 핵심은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의 가르침’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특히 84문에서는 복음의 선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는 하늘나라의 문이 열리게 되지만, 불신자와 위선자들에게는 천국문이 닫히게 됨을 선언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와 유기된 자 사이에는 복음의 선포 즉 선교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구분되어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2) 벨직 신앙고백서

       벨직 신앙고백서에서도 하나님의 선택교리는 명백하게 나타난다. 특히 벨직 신앙고백서 제16장 [영원한 선택]에서, 하나님의 선택적 구원에 대해서는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무력함을 밝히고 있다.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어떤 노력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영원한 선택만이 구원이 있게 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인간의 노력여하에 달려 있지 않다.

  벨직 신앙고백서에서 밝히고 있는 바, 인간의 구원이 인간들의 여하한 활동에 달려있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달려 있음은 현대 선교학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3) 도르트 신경

      도르트 종교회의(the Great Reformed Synod of Dortrecht, 1618-1619)는, 알미니안 주의가 생겨나고 그 사상이 퍼짐에 따라 개혁교회 내에서 심각한 어려움을 당하게 됨으로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소집되었다. 도르트 신경은 첫째교리에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遺棄)’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도르트 신경 첫째교리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遺棄)’의 말미에 <잘못된 주장을 배격함>이라는 별항에서 선택교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변증하고 있다. 특히 제1절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배격하고 있다. 그리고 제3절에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선택을 부인하는 자들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무런 효력이 없게되어 인간은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는 바 은혜로써 주신 칭의와는 아무런 관계를 갖지 못하게 될뿐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4. 선교의 적극성과 소극성의 문제

   개혁주의 신학에서 선교는 소극적 성격을 띤다. 그러나 그 소극성이라는 것은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며 인간의 적극적인 자기노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개혁주의자들의 선교에 대한 적극성은 하나님의 경륜에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며 인간의 선교적 자기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가는 것이 아니다.

    

   (1) ‘선택 및 예정교리’와 선교의 조화 

       복음전파에 있어서 과연 선택 및 예정교리와 현대선교를 조화시킬 수 있을까? 물론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다 알 수 없다. 단지 말씀의 가르침을 좇아 그 뜻을 따를 따름이다. 선교는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교리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의 선택을 무시한 채 ‘기독교’라는 종교를 확장하기 위한 것이라면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적 의미에서의 선교를 벗어나는 것이다. 선교는 인간의 종교적 성공’이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올바른 선포’가 중요한 문제이다.

  선교는 이미 설정된 구원의 완성을 지향해야 한다. 즉 이미 설정된 선교의 완성을 향해 각기 주어진 은사에 따라 겸손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선교의 착실한 과정이요 목적인 것이다.     


   (2) 무분별한 열정에 대한 주의

       현대적 개념에서 일어나고 있는 선교활동은 자칫 인본주의적으로 흐르기 쉽다. 선교활동 여하에 따라 구원받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할 것이라는 생각은 알미니안주의적 신학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알미니안주의 에서는 “믿고자 하고 이 믿음 안에서 인내하며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전체적이므로 이 선택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도록 할 뿐, 그 외의 다른 주장은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대선교는 소위 선교 전략적 방법에 치중하려 하며 그것을 위해 많은 선교사와 선교비가 필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을 떠난 선교지도자들은 더 많은 사람을 해외로 보내고 더 많은 돈을 지원함으로써 선교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지나치게 되면 인본주의적 종교활동으로 전락할 뿐 성경이 가르치는 바 진정한 선교가 되지 못한다.   

 

   (3) ‘선포냐, 설득이냐’의 문제

       개혁주의 선교신학에서는 ‘선포’에 더 많은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고 한다면 복음주의 선교신학에서는 ‘설득’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선포’나 ‘설득’이라는 용어 대신 ‘전달’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 이는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고자 함일 것이다. 그렇지만 선교에 있어서 이에 대한 문제해결을 하는 선교 신학적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것이다.  

  자칫 ‘설득’은 말씀 전달자의 사랑과 관심이 풍부한 것처럼 보여질 수 있는 반면, ‘선포’는 일방적인 것으로 매우 건조한 의미로 들려지기 쉽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보아, 선교 신학에 있어서 ‘설득’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감성적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선포’는 하나님으로부터 연유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이지적 사랑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선교학자들 가운데는 ‘선포적 전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설득이  타협의 위험을 동반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세계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며, 궁극적 설득자는 성령 하나님이심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물론 복음의 선포를 통해 하나님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성도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하는 것도 선교에 포함되어야 할 영역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종교적으로 확장시키기 위하여 선교전략이나 방법에 지나치게 치중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전략이나 방법에 열중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자연스런 인도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경험이나 주장에 의지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5. 성경말씀에서 얻는 교훈

   1) 복음전파에 대한 적극적 교훈

      (1) 모든 족속을 제자 삼도록 요구하심(마태복음 28:18-20)

          흔히 선교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마태복음 28장 맨 뒷부분을 언급한다. 그래서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말씀의 의미를 잘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에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세상의 ‘모든 족속 모든 사람’(all nations everybody)을 제자로 삼을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주님께서 여기서 요구하시고 있는 것은 복음이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 민족에서부터 이방에 까지 미치게 되었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오히려 개별적 자기 판단을 중지시키고 계신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하신다. 즉 자기 이름으로 자기 판단에 따라 세례 베푸는 것을 엄히 금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주님께서 분부하신 내용에 국한됨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인간의 활동이 이에 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오히려 주님의 뜻을 멀리 하는 것이다.

      

      (2) 주님의 증인이 됨(사도행전1:8)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은 인간의 선택사항이 아니다. 성경은 오히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게 되었을 때 성도는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 1:8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우리 시대의 선교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구속사 가운데서 특별히 주어진 말씀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이라는 말씀은 오순절 성령께서 강림하심을 의미한다. ‘너희에게’ 라고 하는 말씀은 지상의 교회를 의미한다. 그 오순절 성령이 주님의 몸된 교회 가운데 오시게 되면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언약의 민족인 유대인의 범주를 벗어난 이방에 미치는 복음의 의미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밖에 없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3)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의 의미(딤후4:2)

          이 말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바 단순히 ‘전도’를 계속하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복음의 선포가 지속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전파’는 말씀선포의 의미를 가진다. 이웃에게 ‘예수 믿으시오’라고 하는 일반적 의미에서 전도의 말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언약과 더불어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복음전파, 즉 선교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 가장 중요한 핵심에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선포가 있어야만 한다.말씀선포 보다 더 중시되는 다른 선교적 활동이 있다면 분명히 견제되어야 할 일이다.   



   2) 복음전파에 대한 소극적 교훈

      (1) 노아홍수 사건에서 얻는 교훈(창세기7:1,13; 벧전3:20)

          노아 홍수때 구원을 받은 사람은 모두 여덟명에 지나지 않는다. 왜 단지 여덟명인가? 우리는 노아의 방주의 규모를 알고 있다. 그 큰 배에 사람을 태운다면 아마 수 천명이라도 태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소수의 몇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심판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노아의 가족 이외의 모든 사람들을 악한 사람들로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악함이란 윤리적 악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사람들의 진리를 떠난 악함이었다.

  노아 당시에도 순진한 어린이들이 있었을 것이며 일반적인 범죄능력을 상실한 노약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노아의 방주에 오르지 못했던 것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악함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떠난 악함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자칫 잘못 생각하면 그런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 방주에 태우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어쩌면 오늘 우리 시대의 열정적인 교인들은 그 큰 방주에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각종 동물을 암수 일곱씩 태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하나라도 더 태우려 애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셨다. 노아의 가족 이외에는 한 사람도 방주에 타는 것을 허락지 않았으며 노아의 가족 역시 방주에 한 사람이라도 더 태워 구원해야겠다는 적극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 가나안 땅에서의 냉혹함(신명기7:1-5)

         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 살고 있던 이방 민족들에 대한 무차별한 도륙(屠戮)을 명령하셨을까? 여호수아서에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이어진다[여리고성 함락(수6:20-21), 아이성 전투(수8:24), 하솔과의 전투(수11:6-15)].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회유하여 이스라엘에 포함시키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을 모두 쫓아내라고 명령했으며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도륙하라고 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타협을 원하시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의 법칙만 있을 따름이다. 인간의 자기 자비심이나 연민은 오히려 위험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족속들을 철저하게 추방하고 도륙했던 것은 그 땅이 하나님의 백성만이 살아야 할 곳이기 때문이었다.

  오늘 우리시대 같으면 그 이방 사람들을 잘 권유하여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는 논리를 펼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내는 방법이라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한 뜻을 나타내심으로써 그 의미를 명확히 하셨다.    


      (3) 세례요한의 무자비함(마태복음 3:5-9)

          세레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많은 사람들이 와서 세례받기를 원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세례를 베풀었지만 다른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세례 베풀기를 거부했다.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세례를 받기 위해 그에게로 왔다. 그런데 요한은 그들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3:7)고 책망하며 그들에게 세례 베풀기를 거절했다.

  우리 같으면 그런 경우 어떻게 하려 할까? 그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 스스로 찾아왔다. 누가 강압적으로 데려온 것이 아니라 자기 판단에 의해 그렇게 했던 것이다. 만일 오늘날 잘못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자발적으로 찾아온 그들에게 마땅히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며 그런 식으로 쫓아내는 것은 비복음적인 것이라 간주할 것이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렇게 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복음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밝혔던 것이다.

         

      (4) ‘복음의 비밀’과 ‘깨달음이 허락된 자’에 대한 이해(마태복음 13:10-17)

          복음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들의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별적으로 주어진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자기백성’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함임이 복음서 처음부터 계시되어 있다(마1:21).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다 이루시기 전에 이미 ‘자기백성’의 존재를 인정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많은 비유의 말씀을 하시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은 자기의 말을 듣기는 들어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즉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깨달음에서 벗어나 있는 자들이 그 말을 듣는다 해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엄숙한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경험에 따라 일반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려는 위험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녀에 대한 특별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에게는 모든 것을 드러내어 가르쳐 주시지만 자기 자녀가 아닌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밀을 알려 주지 않으신다.  

           

       (5) 교회의 정결을 요구함(고린도전서 5장)

           사도바울은 교회의 정결을 교회 안에 들어와 복음의 맛을 상당부분 보았을 사람들에게 조차 하나님의 교훈을 떠날 경우 저들을 교회로부터 쫓아내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그 사람들은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 주변의 권유와 자기의 판단에 의해 교회 내부로 들어왔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면 그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어’ 교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함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의 노력으로 인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복음을 증거하는 이들은 이러한 원리를 염두에 둔 채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강권하여 교회를 채우려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언약과 섭리 가운데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판단이나 노력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6. 결론

   개혁주의 신학원리에 있어서 선교란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에 참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교란 인류의 구원에 대해 인간의 노력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하나님의 예정된 섭리 가운데 온전히 참여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복음전파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에 있다. 이는 인간의 노력여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예정과 선택’이라는 하나님의 전적인 자기활동에 근거한다. 이러한 생각들은 근래의 개혁주의 신학사상에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구원역사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므로 그냥 방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성도로써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섭리에 온전히 동참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숙한 성도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여 그 뜻에 순종하는 가운데 게으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선교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제도적 보완이나 노력을 지속해 나가되 선교지도자들은 그 일들 또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행해져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교회밖에 있는 자들 중, 외견상 누가 하나님의 구원에 부르심을 받은 자인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잃어버린 양들이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전도의 미련한 방법(고전1:20)을 통해 주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 가운데 미리 부르심을 입어 주님의 몸된 교회에 속해 있는 우리가 아직 세상에 속해 살고 있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찾아 나서는 것이 곧 종된 자들의 삶인 것이다.  

  인간의 구원을 선교라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어느 정도 결정할 수도 있다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된다. 위에서 살펴본 바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그것을 가장 경계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의 백성을 예정하여 선택해 두고 있음을 믿는다. 우리가 힘을 다해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의 섭리 가운데서 그의 뜻에 순종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노력 여하가 복음에 참여하게 되는 수를 늘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원리에 입각한 선교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덜 열정적으로 비쳐질 우려가 없지 않다. 물론 그렇지 않으나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도리어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을 다 알 수 없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의 범주를 알 수 없으므로 인해 더욱 부지런히 주님께서 허락하신 선교사역에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복음에 성숙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개혁주의적 올바른 선교이론을 확립함으로써 주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해야만 할 것이다.

(교회와 문화 제8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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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교만

 

조나단 에드워즈

 

"겸손만큼 한 사람을 사탄의 손에서 멀어지게 하는것은 없다"

 "자신의 마음을 믿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잠언28:23)

 

우리 시대에 있어서 가장 으뜸으로 사악한 오류는 "영적교만"이다

교만이 무서운 것은 어떤 다른 타락보다도 구별해 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영적인 질병이 먼저 치료되기 전에는 다른 어떠한 영적인 질병도 치료될 수가 없다

교만보다 더 자가 당착에 빠지게 하고 찾아내기 힘든것은 없기 때문이다

 

영적교만의 본질은 바로 자기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과 그러한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것은 다 악한 것으로

배재해 버리는 것이다.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어떠한 가르침도 필요치 않다고 느낀다,

그렇기에 그는 충고들에 대해 항상 우습게 생각한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쉽게 충고를 받아드린다,

그는 자신을 평가하는데 매우 주의깊으며 자신이 얼마나 빗나가기 쉬운 존재인가를 님감하게 생각한다,

만일 자신이 빗나간 길은 걷고있다고 생각되면 그는 그 문제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조사하며 중구할 것이다.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은 타인들은 바라보면서 가장 거친 말로 그것을 표현한다.

종종 그들의 비난은 악한 자 들뿐 아니라 자신보다 월등한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들을 향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허물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며 사람들에게 비꼬아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겸손한 자들은 항상 자신의 죄악됨과 비천함에 압도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안의 죄를 바라보며 그것을 걱정한다.그러므로 남의 마음에 대해 왈가왈부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해 불만족스러우며 자신의 영적인 냉담함을 탓하고 남들은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감사하는 줄로 여긴다, 또한 자신의 동료 크리스챤들에 대한 그들의 호소는 사랑과 겸손의 마음을 담고

있으며,타인들에게 그리스도와 같은 한량없는 상냥함과 겸손으로 대한다,

 

영적인 교만은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외면적으로 다르게 행동하게 하며,다른 방식으로 말하게 하고

표정과 행동속에 나타난다,그러나 겸손한 크리스챤은 자신의 세상적인 의무를 충실히 다하지만

그는 홀로 천국을 향해 묵묵히 걸어간다 ,

그러나 그는 단지 구별을 위한 구별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는 결코 자신을 의도적으로 구별되게 보이도록,그렇게 나타나도록 따로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것의 나중이 되려하며,양보하고,따르고,순종하고자 하며 죄를 제외한 모든 일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자 한다.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의 또 다른 유형은 늘 주목받는 존재가 되고자 노력한다는 점이다,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존경을 받고자 자긍심을 갖고 행동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남들이 자신에게 복종하고 존경을 표할때,그것을 당연히 여기며 마음껏 그것을 받아 들인다,

사실 그들은 그러한 처사를 기대하고 있으며 만일 자신에게 마땅히 할 바를 행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악한 감정을 갖는다

 

<죠나단 에드워즈 영적교만중에서

 

출처: 개혁주의마을/Jennifer

한반도를 위협하는 영적문제들 가운데,

특별히 동성애나 이슬람 문제는

그래도 어느 정도 분별하여 대처하려는듯한 모습이,

한국교회 안에서도 보이고 있지만,

유독 북한(한반도) 문제에서만큼은,

아주 견고한 진이 가로막고 있음으로 인해,

'영적분별'을 방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그나마 깨어있는 교회들에서도,

예배 때 대표기도를 하는 걸 들어 보면,

이슬람 세력, 동성애 차별금지법, 신천지 이단에 대해선

경계하면서, 무너지게 해달라고까지 기도도 하지만...


유독 북한에 대해서만큼은

직접적으로 저 사악한 독재정권이 무너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교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게 지금 한국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는, 어쩔 수 없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정치적 프레임"이라는 거대한 장벽 때문이다.


마지막 때, 사단은

아주 교묘하고 치밀한 계략을 꾸민다.

민감한 문제들을 세상적인 프레임안에 싹 다 가둬버린다.


즉, 이런 문제는 세상적인 정치문제다 라고 여기며

사단이 쳐놓은 그 프레임 안에 영적분별이 필요한 문제들을

다 가둬버렸다.


사단이 교회들을 미혹시키고

이땅을 '지옥화'시키는데 가장 성공한 전략 중 하나다.


교단 내에서도, 교회 내에서도,

같은 교회안의 성도들끼리도,

정치적 성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지고,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되니,

이 문제만큼은 유독 분별이 더 어렵고,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들은

교인들의 눈 의식하며 눈치보느라,

강대상에서 제대로 된 선포도 하지 못한다.


이렇게 교회안에서 쉬쉬하고

입다물고 침묵하며 방관하는 사이,

어느새 "좌파, 우파, 진보, 보수"라는

세상의 프레임들이 교회안에도 깊이 뿌리내려지고,

결국 그 프레임 안에서 해석되어질 수밖에 없도록 되버려서,

이로 인한 수많은 오해와 미혹들이 발생한다.


대표적인 예로 한반도(북한) 문제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도 반드시 교회가 나서서

관심갖고 분별하며 나아가야 할 문제들이다.




하지만 현실은...

"보수,진보, 좌파, 우파"라는

세상의 프레임 안에 다 갇혀 버려서

교회가 담대히 말을 꺼낸다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그런 구조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다.

진리 그 자체이시다.

진리는 말 그대로 진리일뿐이지,

그 진리를 보수다, 진보다 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교회가 말씀에 근거한 오직 진리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이 세상이 말하는 어느 프레임에 속해 있든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 진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제대로 캐치하고 그 진리에 의해

분별하며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사단은 간교하게도

분별이 필요한 모든 문제들을

그런 프레임 안에 가둬놓았기에

어쩔 수 없이 좌든 우든 어느 한 방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게 되어져 버렸다.


그래서 그런 프레임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그 프레임에 의해 기준 삼고

그 안에서만 생각하고 판단을 한다.


결국... 그런 프레임 안에 갇혀버리면,

진짜 영적분별이 필요한 문제들을

온전히 진리대로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


북한인권, 종북... 같은 문제들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관심을 가지면

"보수,우파, 극우"라고 하며 그 프레임안에 집어넣는다.


대부분의 교회가 다 이런식이다.


교회는 세상 정치문제에 신경쓰면 안된다...

복음에나 더 신경써라 등등...

이런 프레임들이 교회안에도 가득 퍼져 있기에

교회들이 쉽게 함부로 소리를 낼 수가 없게 되어져 버렸고,


그나마 세상의 프레임 신경쓰지 않고...

정치 문제도 교회가 관심 갖고,

목소리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회들을 보면...


폭압집단에 의해 맞아죽고 굶어죽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은 터부시한 채...


되려 북한정권을 적극 지원해줘서

그들과 함께 평화통일을 이루어

한반도 평화를 이루게 힘쓰자거나,

동성애자들을 사랑으로 품고

그들의 인권을 존중해주고,

그들의 성적취향을 인정해주자는 등,


소위 '좌파적 프레임'안에 갇혀 버려서,

지금 대한민국에서 분별이 필요하고,

우리가 기도하고 행동하며 나아가야 할

이런 시급한 문제들에 대해,

되려 反진리적 행동을 하는 교회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 지금 한국교회의 뼈아픈 현실이다.


아무리 진실이나 팩트를 전한다고 해서

진실이나 팩트, 그 자체가 '절대 진리'가 될 수 없음을 본다.


진리는 반드시

그안에 성령님이 내주하시고 역사하셔야만 가능하다.


그 사람안에 진리가 제대로 역사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팩트나 진실을 알리고 전한다 해도,

그 진실과 팩트 또한 사단이 주는 세상적 프레임,

그 안에서밖에 적용이 되지 않는다.


프레임에 갇혀 있어선 안된다.


진리에 겹치는 부분에 야당이 들어와 있으면

야당이 같은 같은 프레임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여당이 들어와 있으면

여당이 그 프레임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것이 '우파'라는 프레임에 진리가 겹치는 것이고, '

좌파'라는 프레임에 겹치지 않는 것 뿐이다.


교회는 '좌파'나 '우파'가 아니라,

오직 '예수파'가 되어야 한다.


NWO, 베리칩, 짐승의 표 등등,

마지막 때의 징조를 분별하고 전하는 것은 분명 귀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에만 집중한 나머지,

정작 이 나라와 민족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로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성령안에서 바르게 분별하지 못하고,

내 생각, 내 지식, 내 논리에 의해서만

판단하고 나아가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이것은 지금 대한민국의 교회들에게 있어서,

결코 예외일 수가 없는 문제다.


같은 민족, 같은 동포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물음에 결코 피해갈 수 없는 문제다!


지금 저 북한땅은

참혹한 그 자체인 지옥의 저주를 받은 땅이 되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성경 어디를 봐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의 저주를 보더라도,

60년간 이어져온 저 북녁땅과 같지 않다.


배가 고파서 사람의 인육을 먹는다는 이야기는

저 먼 구약시대의 이야기가 아닌,

불과 10년도 안된 저 북녁땅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충격적인 실제상황이다.


지금부터라도,

교회가 세상의 기준과 프레임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만 의식하고 바라보며,

오직 진리에 입각한 행동을 보여야 한다.


우리의 모든 행위를 달아보시고

불꽃같이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얼마나 내 일처럼 관심을 갖고,

죽어가는 동포들의 고통의 절규에 귀기울이고,

기도하며 행함으로 나아갔는지...


반드시 우리에게 그 핏값과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글: 엘샤다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선교에 대해 어떤 말을 하는가?

 

Timothy Monsma


번역: 김 상 래 목사

 

 

 

        일반적으로 종교 개혁시대의 신앙고백들과 개혁자들의 저서들 속에서 선교를 강조한 부분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혹시 당신은 선교를 강조하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지금까지 우리는 요리문답과 선교와의 관련성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오늘날 다시 신앙고백을 작성해야 한다면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고백들보다는 더 분명하고 자세하게 선교와 관련된 주제들을 신앙고백 속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신앙고백서와 선교에 대한 우리의 편견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합니다. 기존의 신앙고백들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이미 그 속에는 선교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가 주어졌지만 우리가 그것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은 아닌가? 라는 질문을 던져 보고자 합니다. 저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중에서 선교에 대해서 직접적인 메시지를 던져주는 세 문답을 살피면서 우리의 오해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선교적 그리스도인(The Missionary Christian)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2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32: 그런데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이라 불립니까?

 

: 왜냐하면 내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그의 기름 부음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지자로서

그의 이름의 증인이 되며,

제사장으로서

나 자신을 감사의 산 제물로 그에게 드리고,

또한 왕으로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자유롭고 선한 양심으로

죄와 마귀에 대항하여 싸우고,

이후로는 영원히

그와 함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것입니다.

 

 

       이 질문과 대답은 31문 바로 다음에 이어서 나옵니다. “왜 그분을 그리스도곧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부릅니까?” 대답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큰 선지자요, 우리의 대제사장 일뿐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다가 32문의 대답은 놀라운 말을 덧붙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그의 기름부음에 참여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곧 모든 신자들이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의 직으로써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든 신자들의 직이라고 부릅니다. 이 직분은 베드로전서 29절을 비롯한 신약 성경 곳곳에서 가르쳐집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32문의 대답은 선교에 대한 부르심으로 직접적인 적용을 할 수 있는 구절로 이어집니다. “나는 그의 이름의 증인이 되도록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들을 귀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위임 받은 선지자직의 사명이며,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서 행해진 선지자직을 잘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주해하면서 우르시누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의 선지자직은

1.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아는 것이다.

2. 그분에게 속한 모든 곳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지식을 신실함과 담대함을 가지고 계속해서 알려지게 함으로 이들이 우리와 동일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는 힘과 능력이 드러나 하나님이 경배 되어지도록 해야 한다.

(The Commentary of Dr. Zacharias Ursinus on the Heidelberg Catechism, Eerdmans, 1954, p. 179)

 

 

       만약 우리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이 부분을 진지하게 여긴다면, 복음을 듣고 이해할 것이라는 소망으로 사람들을 교회로 초청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고백과 삶으로 복음을 제시해 주어야만 합니다. 사람들은 복음이 자신의 마음과 삶에 강한 인상을 주기 전까지는 결코 교회에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제시함에 있어서 좀 더 능숙한 사람과 서툰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기회가 허락하는 한 이러한 복음의 증인되는 실천을 멈추지 않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인용한 요엘 선지자의 말씀은 모든 신자들의 선지자 직임과 선교를 위한 요청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2:17,18,21).”

 

        젊은이나 늙은이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시대 속에서 여전히 선지자로서 증인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증인된 삶은 우리가 속한 가정과 교회에서 시작해야 하고, 세상 끝에 이르기까지 결코 쉬지 말아야 합니다.

 

 

 

선교적 교회 (The Missionary Church)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4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54: “거룩한 보편적 교회에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처음부터 마지막 날까지 모든 인류 가운데서

영생을 위하여 선택하신 교회를

참된 믿음으로 하나가 되도록

그의 말씀과 성신으로

자신을 위하여

불러 모으고 보호하고 보존하심을 믿습니다.

나도 지금 이 교회의 살아 있는 지체이며

영원히 그러할 것을 믿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교 사역은 실제로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진리를 배웁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성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몸인 교회를 확장하는 사역을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교회의 머리이자 왕이신 그 분께서는 이러한 사역을 성취하심에 있어서 두 가지 수단을 사용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성령으로 하여금 사람들의 마음과 삶 속에 강력하게 역사하게 하시고, 또한 그분의 종들을 통해서 선포되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셔서 이 사역을 성취해 나가십니다.

 

        구원의 말씀이 자동적으로 온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이 전해지는 것은 연약한 사람들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을 통해서 해석되고 선포됩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들의 삶으로 드러나는 말씀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이 충실히 이루어지도록,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회를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불러 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될 때 까지”(24:14) 증거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요한의 환상 중에서 24장로들은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5:9) 대속하신 어린양을 찬양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현재 지구 위에 살고 있는 모든 5000여 족속과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파송 되어야 하고, 모든 민족의 언어로 말씀을 옮기는 성경번역 사역이 이루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역들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그의 몸인 교회를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불러내는 사역을 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역은 창조 때부터 종말까지계속해서 이어질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신약의 성도들과 본질상 동일한 방식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구원의 메시지는 현재도 전해지고 있고, (비록 맹렬한 반대가 역시 일어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전해질 것입니다.

 

선교적 기도(The Missionary Prayer)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3문도 역시 선교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합니다.


 

 

123: 둘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 “나라이 임하옵소서,

이러한 간구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성신으로 우리를 통치 하시사

우리가 점점 더 주님께 순종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교회를 보존하시고

흥왕케 하옵시며,

마귀의 일들과

주님께 대항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세력들,

그리고 주님의 거룩한 말씀에 반대하는

모든 악한 의논들을

멸하여주옵소서.

주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져

주께서 만유의 주가 되실 때까지 그리하옵소서.“

 

 

        요리문답 54문이 교회를 확장되는 선교적인 교회로 정의했지만, 123문은 우리의 눈을 들어 더 큰 것을 보게 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가 설명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은 교회보다 더 큰 것입니다. 그 분 나라는 천사들과 인간들 모두를, 그리고 기구로서의 교회와 유기체로서의 교회를 포함하며, 하나님의 법칙이 드러나는 모든 곳의 통치를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전능한 법칙에 우리 자신이 먼저 복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이 우리 자신의 마음과 삶 가운데 더욱 충만하게 되기를 열망하지 않은 채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는 것은 또한 그분의 교회를 보존하고 흥왕케해달라는 기도를 포함합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교회 성장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수적인 성장과 영적인 성장, 그리고 구조적인 성장이 모두 성장에 해당되는 것들입니다. 요리문답을 주해하면서 오토 텔레만(Otto Theleman)도 이것을 지적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성취되는 것은선교적 활동을 통해서이다.”(And Aid to the Heidelberg Catechism, Douma Publications, Grand Rapids, p. 425)

 

        교회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에 대해서 헤르만 리델보스는 말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 것은 아니지만 둘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The Coming of the Kingdom, Presbyterian & Reformed, Philadelphia, 1962, p. 355) 교회 성장의 필요성을 외치는 사람들이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사이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된 비유들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반드시 교회의 성장을 가져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유기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리문답의 답변은 어두움의 나라와 빛의 나라 사이에 벌어지는 전투를 묘사하는데 까지 나아갑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쉽게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종들은 어디에서든지 이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자로부터 원래대로의 회복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던져 피 흘리기까지 악의 세력들과 전투하는데 헌신하도록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좋은 군사들이 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좋은 군사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뢰가 결코 우리의 게으름의 변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종들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기위해서 준비하고, 공부하고, 듣고, 전략을 세우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대학과 신학교를 통해서 국내와 해외에서 선교에 헌신할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주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는것입니다. 왕이신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그분의 나라는 이러한 완성의 상태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최고의 방법은 산 위에 초막을 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최고의 방법은 지금 여기서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명령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하심과 능력 주심 안에서 우리는 능히 할 수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선교의 모든 원리들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선교 사역을 위한 충분한 기반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요리 문답에 제시된 선교의 증언은 고백되고 실천되어야만 합니다.

 

  

       저자 설명: 티모씨 몬스마 박사는 기독교개혁교회(CRC) 파송 선교사로 나이지리아에서 12년 동안 선교사로 사역을 감당했으며, 이후에 카이퍼 칼리지, 미 중서부개혁 신학교에서 선교학을 가르쳤고 이후에 미국 에스콘디도에서 도시선교단체의 디렉터로 헌신했다. 도시: 선교의 새로운 개척지라는 책을 저술했으며, 미국 PCA 교단의 임명을 받아 아프리카의 주요 8대 도시를 돌면서 선교의 전망을 보고했으며 세계 여러 나라에서 선교와 관련된 강의를 담당했다.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종말의 때를 예상하는 시나리오들!

 

현재의 한국교회는 주님의 오실 날(휴거)에 대한 관심이 지나친 쪽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너무 무관심한 쪽도 있는 것 같아 종말의 때를 가늠해보는 데 다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필자의 생각을 써 본다.

 

물론 이 글은 개인적인 견해기에 얼마든지 다르게 말할 분도 계실 것이다. 필자는 논쟁을 유발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입장과 비교하여 보라고 쓴 글임을 밝힌다.

 

때를 알게 하는데 필요한 4대 요소

1. 이스라엘, 2. 적그리스도, 3. 교회의 배도, 그리고 4. 666 시스템

 

이 중에서도 가장 주목해야 보아야 할 요소는 바로 이스라엘이며, 적그리스도의 출현은 7년 대환란 기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그가 언제 어떤 식으로 출현하는가를 보아야 할 것이며, 그것과 발맞추어 나타나는 것이 음녀교회이기에 작금의 교회들이 어떻게 배도하여 음녀교회로 가고 있는가를 살펴봐야 하고, 마지막은 666표 혹은 시스템인데 이것이 어떤 세력에 의해 어느 정도 진행되어 가는지를 살펴본다면 주님 오실 때를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글은 이 네 가지 요소의 진행상황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알아보자.

 

 

 

1. 이스라엘

 

주님 재림의 시각에 대한 이스라엘 사건들은 먼저 흩어졌던 자들이 모여 건국하여 독립을 얻어야 하고, 그 다음은 수도였던 시온(예루살렘)을 차지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무너진 성전을 제 3성전을 건축하여 제사를 드리는 것일 것이다.

 

그 년도를 보면 1948년에 이스라엘 독립 , 예루살렘 점령이 1967년이고 성전건축은 아직 준비 중인 상태에 있다.

 

주님의 재림과 직결되어 있는 것은 바로 제 3성전 건축일 것인데

앞으로 어떤 경로로 건축될 것인가를 예상해본다면

 

(1) 적대세력인 이슬람의 완전 무력화가 된 후,

(2) 이슬람의 화해무드에서 묵인하에 되어지는 경우, 

 

(1)의 경우, 이슬람의 완전 무력화가 되려면?

아마도 그것은 아랍권 특히 러시아와 밀접한 이란을 초토화해서

아랍권을 제압해야 하는데 그 시기는?

* 참고로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한다는 뉴스는

지난 2005년 이후부터 매년 중동의 중심뉴스였다.

특히 2010년 이후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2) 이슬람과 화해무드에서 아랍권의 묵인 하에

성전이 건축되어진다는 것인데, 그런 평화기가 언제쯤 올 것인가?

* 참고로 아랍권과 평화협정은 일부 이루어졌고 지금도 이루어져가고 있다.

(이집트와 요르단과는 완료, 시리아, 팔레스틴과는 협상중)  

물론 환난전 휴거를 지지하는 자들은 이 성전 건축 이전에 이방인의 때가 차면

휴거 사건이 있다고 믿는다.

 

2. 두 번째 요소, 적그리스도(안티그리스도)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활동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필수 요소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는 누구이며 단 9장에 나오는

언약(평화협정)을 누구와 굳게 세운다는 말인가?

 

1) 출현 시기

ㄱ, 일반적으로 환란 기를 수습할 위대한 메시야 지도자로 출현

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평화협상의 중재자며 평화의 보증자로 출현

 

그렇다면 지금은 환란 기에 얼마나 근접해 있는 시점인지,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중재자며 보증자가 될 여건인

결정적인 전쟁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 참고로 어떤 분은

지금 몇 째인의 시기(혹 몇 째나팔의 시기)라고 하는데

그것은 근거가 희박한 것이고 아직 이스라엘과 결정적인 언약을 맺게 할 중재자가 나타날 때는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혹자는 적그리스도가 될 후보군에 대해서 이미 성급하게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교황, 영국왕실, 유럽연합 대통령, 미국 대통령 등)

아직 두고 볼 일이다.

 

3. 세 번째 요소 NWO(세계단일정부)

 

NWO의 세력은 성경적으로 봤을 때

적그리스도의 몸통이 되어 환란기에 세계를 꾸려갈 자들인데,

놀랍게도 NWO 세력들이 등장하여 이미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를

하나로 묶는 일을 시작했고 지금도 열심히 진행해나가고 있다.

 

그래서 환란기 때는 세계를 666 체제로 만들고

저들의 통치를 세계가 따르도록 할 것이다.

그때 활용되는 것이 666표일 것인데

베리칩이 666표인가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NWO 세력들이 하려고 하는 것들

1)정치-UN,

2)경제-WTO,

3)문화-New Age,

4) 종교-WCC(URO)

 

* 참고로 NWO세력은 각계로 침투하여

세계를 하나로 묶는 일을 이제는 드러내놓고 활동하고 있다.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천주교 제수이트 등등)

 

이것들에 대한 것은 시중에 많은 책과 알리는 자들이 있으므로 생략하겠다.

 

4. 네 번째 요소 음녀교회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교회 중에 음녀교회가

적그리스도(짐승)와 연합할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데

현재 상황은 WCC를 숙주삼고 천주교 제수이트(예수회)와

개신교 지도자 중에 프리메이슨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타종교와도 세계 평화공존을 근거로 하나로 만들어가고 있고,

개신교 또한 그렇게 되고 있다.

 

결론

주님의 재림 사건은 이처럼 종합적인 상황가운데 일어날 것이라고 본다면,

성경에 기록된 것을 가지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봐야 할 것이라고 본다.

 

개인적인 체험에 근거로 한 말과 성경의 숫자에 대한 풀이 등,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연현상과 국지적인 사건에

너무 큰 비중을 두고 예측하는 것 등은 위험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에 대해 너무 민감하다가는

자칫 미혹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 때의 참된 신앙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나라는 이미(Already) 진행되어지고 있고,

아직(Yet)인 상태라는 것이다.

 

문제는 각자가 자신 안에 예수님으로 인해

거듭난 속사람이 얼마나 주님의 형상으로 건축되어지고 있고,

주님의 사명을 현실 속에서 광염(光鹽)으로 나타나지고 있는 것을

스스로 점검하는 일일 것이다.

 

주님 다시 오실 날(주님 앞에 서는 날)

자신이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가장 귀한 종말의 때에 신앙관이라고 본다.

 

 

출처 : 이웃블로그/ 필그림

이슬람 선교에 대한 반성 및 전망
                                                이광호 목사 / 실로암교회

 

지난 9. 11 미국 테러사건 이후로 이슬람에 대한 정보들이 일반인들에게 매우 가까이 다가왔다.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에 대해 생소하게 여길때도 교회는 이전부터 이슬람 선교를 위해 다각적인 활동을 해왔다. 이러한 상황들을 접하며 이슬람 선교에 대한 반성 및 전망을 해 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흔히들 이슬람 선교가 매우 어렵다고 한다. 이슬람 세계 가운데서 살고 있는 선교사들이 특별히 어려운 이유는 역사 가운데 있었던 상호 적대적 감정과 이슬람이 기독교 이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기독교의 진리를 모방하고 있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나는 인물들이 코란에 대거 등장하게 된다. 기독교에서 중요한 인물이라 인식되는 거의 대다수 사람들이 이슬람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들이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솔로몬, 예수 등이 그렇다. 특히 예수는 이슬람에서 마호메트를 제외한다면 지금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인물로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역사적 관계]


AD 7세기 초반 이슬람이 등장하던 초기부터 이슬람은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서 저항하는 종교가 된다. 당시 아라비아 반도에 있던 유대교 세력과 갈등을 빚게 되고 기독교에 대해서도 갈등관계에 놓이게 된다. 특히 632년 마호메트가 사망하고 나서 이슬람 세력이 당시 동로마제국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갈 때 기독교는 사막으로부터 밀려드는 이슬람 세력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슬람의 입장에서는 기독교 영토를 정복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1세기 말에 일어난 십자군 운동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적대적 관계에 대한 인식을 확대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슬람에 의해 성지를 빼앗긴 기독교의 성지 탈환운동이 곧 십자군 전쟁이다. 그 때는 이미 팔레스틴을 비롯한 성지들은 이슬람의 땅이었다. 아브라함, 다윗, 솔로몬과 관계있는 땅이요 예수와 연관된 땅이 이슬람의 땅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땅은 악한 유대교와 기독교인들에 의해 유린을 당하다가 알라의 은총을 힘입어 이슬람이 회? 므?땅이다. 그런데 서구의 기독교인들이 십자가를 앞세워 자기의 땅이라며 다시 침범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악한 서구 기독교 세력의 침략이었다.

이슬람의 입장에서는 서구의 십자군 운동에서도 알라의 은총으로 기독교 세력을 성공적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그 후 6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그 땅은 이슬람의 성지로 인정되어 오던 터였다. 그러던 중 19세기 말이 되면 유대인들의 시오니즘(Zionism) 운동이 일어나 다시 팔레스틴을 회복할 꿈을 키워가게 된다. 19세기 후반부터 활발하게 진행된 서구의 과학문명이 이슬람을 위협하다가 급기야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당시 이슬람의 종주국 역할을 하던 오스만 터키가 전쟁에 패망함으로써 팔레스틴을 서방의 기독교 세계에 넘겨주게 된 것이다.

현대사 가운데서 이슬람의 짓밟힌 자존심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절정에 달한다. 팔레스틴 지역에서 이스라엘이 독립하게 되고 뒤이어 이슬람의 성지 예루살렘을 기독교 세력에 빼앗기게 된다. 이스라엘의 독립에는 기독교 국가인 영국의 역할이 컸으며 이슬람의 눈에 비치는 유대교는 기독교의 한 분파일 따름이었다. 그들이 볼 때는 역사 속에 잠복하고 있던 십자군 운동이 고개를 들면서 급기야 팔레스틴에 이스라엘이 건국됨으로써 서구 기독교 세력의 교두보가 마련된 것이다. 이 후 이슬람의 눈에 비쳐진 것은 신 십자군 운동이었던 것이다.

1991년 걸프전은 종교전쟁이었다. 적어도 이슬람의 숨겨진 시각은 그러하다. 당시 다국적군이라는 군대는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스라엘 등 모두 기독교 세력이었던 것이다. 정치가들이나 지도계층의 인물들은 다양한 목적에 따른 나름대로의 이해를 했겠지만 적어도 이슬람의 잠재된 사고들은 그러했다. 다국적군이 기독교를 중심으로 뭉쳐진 군대가 아니었으나 그들의 눈에는 충분히 그렇게 비쳐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슬람선교에 있어서 교회의 반성]

서구 기독교는 사실상 이슬람을 정치적 갈등 대상으로 생각지 않는다. 정치가들이나 경제인들은 자기의 목적으로 인해 어떤 사고를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그들의 땅을 정복하는 것이나 경제적 우위를 점하는 것을 목적으로 생각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적잖은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시대에 들어와 성지순례는 보편화 되었다. 오늘날은 해외여행이 어느 정도 보편화되었지만 불과 수십년 전만해도 상상하기 조차 어려웠다. 해외여행의 보편화는 교통과 통신, 경제적인 여건이 현대적으로 발전한 후의 일인 것이다. 이는 비단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서구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불과 30여년 전만 해도 일반 성도들은 이스라엘이나 소아시아 지역을 방문한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시대에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한번쯤 그 지역을 다녀올 수 있을 만큼 보편화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만큼 이스라엘이나 소아시아 지역 등을 다녀오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졌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별 생각없이 성지를 방문하지만 이슬람에서 볼때는 그것이 기독교인들의 '탐심'에서 일어난 반응이다. 우리가 성지라고 하는 지역들은 모두 이슬람과 이해관계가 있는 땅이다. 실제로 기독교인들이 성지를 방문하는 것은 그 땅이 자기와 어떤 관련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그 땅은 성경에 나타난 지명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 가운데 그곳을 정복할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지만 이슬람의 입장에서 보아, 그 땅을 자신의 종교 혹은 자신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기독교! 인들이 있다는 사실은 예사문제가 아니며 거기에는 어떤 불순한 '탐심'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기독교인들의 구체적인 종교적 대응방법이다. 1990년대 초반 이래 많은 이슬람 선교단체들에서 '역라마단 운동'을 하고 있다. 금년에도 11월 17일부터 한달간 이어지는 모슬렘의 금식기간에 맞추어 기독교에서는 특별 기도회를 계획하고 있다. 역라마단 운동이라 일컬어지는 이 기도회 안내책자는 35개 이상의 언어로 출간되고 있으며 2천만명 이상의 교인들이 이 기도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필자는 우리 시대에 들어와 시작된 역라마단 운동은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부분이라 여긴다. 다수의 이슬람 관련 선교단체들과 이슬람 선교관심자들이 그 일을 먼저 시작했다. 이슬람의 라마단은 그들의 생각에 성스러운 금식의 달인데 기독교인들은 그와 때를 같이 하여 이슬람을 위한 특별기도를 하며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의도가 나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식으로 기도하는 동안, 그들은 우리를 적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속된 말로 맞불지피기 처럼 오해될 소지가 다분히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불교의 사월 초파일날에 맞추어 기독교에서 불교도들을 위한 대대적 기도회를 하는 것과 흡사하다. 이는 종교적 마찰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되 나팔을 불며 광고를 하는 가운데 떠들썩하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 우! 리의 그러한 자세가 그들의 마음문을 닫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자기들을 위해 기도하는 줄도 모르는 사이 우리가 진정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쩌면 그들 가운데 감격해 하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슬람에서 생각하는 기독교와 우리의 자세]

기독교인인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것이 있다. 모슬렘들 중 다수는 기독교에 대해 상당한 오해를 하고 있다. 그들은 서구인과 기독교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문화란 곧 서구문화를 일컫는 것이다. 그들의 사고에는 서구인은 기독교, 동양인은 불교라는 식이다. 모슬렘들 중 다수는, 기독교인들을 상종해서는 안될 악한 자들로 여기는 경향이 짙다. 물론 그들은 그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원래 동양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라 면전에서 면박을 주거나 당황하게 만들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한국사람 처럼 동양인이 기독교인이라면 어떻게 동양인이 기독교인일 수 있느냐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다. 그들의 생각에는 얼굴이 희고 코가 큰 노랑머리를 가진 사람이 기독교인이지 동양인은 원래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나라의 옛날 사람들이 선교사라 하면 서양인을 생각했던 것과도 같다. 얼굴 피부가 새까만 아프리카 사람이나 동남아시아의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이 선교사라 하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과도 흡사하다.

극단적인 이슬람 지성인들은 동양의 기독교인들은 서양 기독교 세력의 용병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세계정치와 경제력을 장악하고 있는 서양 기독교인들에게 돈을 받거나 정신적인 어떤 영향을 받고 기독교인이 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우리는 이슬람에 대해 좀 더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 같다. 이슬람 세계에 복음을 선포하려면 그들 앞에서 종교적 정복자의 모습을 가져서는 안된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가 믿는 종교인으로 바꾸려는 듯한 자세를 보여서는 곤란하다. 우리는 단지 그들의 좋은 이웃이 되어줄 수 있을 따름이다. 우리가 그들의 좋은 이웃이 되었을 때 그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에 관심을 가지고 물어올지도 모른다.

[마무리]

세계는 지금 인간이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전투적 정황가운데 놓여있다.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다 해도 온 세계가 그러한 분위기기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이슬람의 우위에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아가 경제적 과시를 할 것도 아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대상은 하나님의 진리를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는 이슬람의 사람들이다. 우리의 목적은 그들을 서구의 종교를 가지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들의 눈과 귀가 열리기를 바랄 따름이다. 우리가 목적하는 바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 게 전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의 경계심을 덜어주어야 한다. 그들이 우리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한 그들의 좋은 이웃이 될 수 없다.

이번 초가을 미국이 테러를 당한 이후 부터 시작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력과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이슬람 원리주의를 추구하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를 바라보는 범 이슬람 세력 사이에는 이미 종교적 갈등이 야기 되었다. 그것을 종교적 갈등으로 볼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쉽게 그렇게 단정할 수 없다. 일반적인 측면에서 보기에는 그렇게 인식될 수도 있다. 일본이나 한국 같은 나라는 서양인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편에 서 있다. 물론 테러 세력을 응징한다는 훌륭한 명분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이슬람의 시각에는 단순히 그렇게 비쳐지지 않을 수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원리주의 이슬람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을 적극적으로 응징하고자 하는 국가들은 대개 기독교 국가들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호주 등은 이슬람에서 보기에 한결같이 서구 기독교 세력들인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는, 미국이 주도하는 서구 기독교주의는 인간들을 세속화 시키는데 앞장서고 있으며 인간을 타락시키고 있다. 강력한 살상 무기들을 대량생산할 뿐 아니라 더러운 모든 서구의 영화산업은 미국이 주도하고 있다. 성생활이 문란하고 윤리도 도덕도 없는 나라이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돈이 있고 힘이 있으니, 자존심이 상해도 할 수 없이 참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기독교란 그런 종교이다. 그들에게 가서 '기독교를 믿으라' 든지 '나는 기독교인이다' 라고 이야기 하면 그들의 머리에는 부정적인 것들만 떠오를 따름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이슬람 선교인데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될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여기서 결론적으로 유념해야 할 것 몇 가지를 정리해 볼 수 있다. 우선, 그들이 오해할 수 있는 어떠한 공격적 자세도 버려야 한다. 역라마단 운동 등을 통한 기독교적 대응을 알면 그들은 즉시 저항적 자세를 취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서구와 기독교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그들이 자연스럽게 알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무분별한 서구적 복식이나 행동양식은 잘 점검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위상은 아무런 자랑거리도 아니다.

 

그들 앞에서 한국의 위상이나 부는 전혀 자랑스러워 할 것이 못된다. 이슬람 지역에 퍼져있는 한국산 자동차나 제품들을 보고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결단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보고 도리어 겸허한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문화를 우러나는 마음으로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문화적 우월주의는 복음전파의 길을 가로막을 따름이다. 그들의 문화를 통해 우리가 배우려는 자세가 있음을 그들로 하여금 알! 게 해 주는 것은 많은 신뢰를 얻게 할 것이다. 지금까지도 이슬람 선교는 매우 어려웠다. 앞으로는 더욱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기를 원한다.
(빛세계선교회 2005 IMTC 강의)

출처: 실로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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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혹의 영, 분열의 영, 그리고 식물이 된 한국교회!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야 4:7)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눅 10:19)


제가 깨달은 것을 함께 공유하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으로 올리는 것이니, 부디 가벼운 마음으로 읽으시고 마음에 합당하지 않는다 생각되시면 그냥 읽고 잊어 버리셨으면 합니다.


지금 유럽은 기독교가 거의 말살된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세시대의 그 아름다운 교회들은 이슬람 사원이 되든지 아니면 술집으로 팔려나가고 교회 신자들도 나이 드신 어르신들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메리카 쪽을 한번 보겠습니다.

미국은 오바마 대통령 시절, 동성애를 옹호하고 이슬람세력들이 급속히 퍼진 가운데 지금 트럼프 대통령을 통하여 다시 기독교가 일어서고 있습니다. 남미는 현재 타락한 천주교가 오랫동안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아시아는 인도는 힌두교, 또는 불교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특히 동남아 국가들, 말레이시아나 터키 등은 이슬람이 장악을 하고 있고 필리핀은 천주교가 대세를 이루고, 일본은 여러가지 잡신들을 섬기고 중국은 공산주의 영에 사로잡힌 나라입니다. 아프리카쪽은 오랫동안 토속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물론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통계상으로 본 것입니다.


그럼 대한민국은 어떨까요?

오랫동안 샤머니즘 미신과 우상을 섬기는 나라였는데, 100여년 전 한 이방 선교사가 피를 흘리며 전해준 복음을 듣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 하나님을 섬기게 됐으니, 지난 4,500년 역사동안 지금처럼 잘 살아본 적이 없을 정도입니다. 단순한 한강의 기적이 아니고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 문을 여시고 흔들어 채워주신 결과입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이 나라를 축복하시어 열방과 어깨를 같이하도록 세워주셨고, 받기만 하던 나라에서 두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고, 자연 재해로 어려움을 겪는 나라들에 각종 물자를 공급하고 기술자를 파견하는 등 참으로 자랑스런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럼 이제 사단의 입장에서 한번 보겠습니다.

사단은 유럽을 이슬람과 자유주의 신학으로, 동성애로, 남미도 잡신과 접속한 천주교로 다 잡았고, 중국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나라이고, 베트남과 캄보다아도 사회주의 나라이고, 아시아도 거지 반이상 장악한 상태이고, 이제 최종적으로 한국만 접수하면 되는데, 이 골치 아픈 한국이 "동성애 절대 안돼, 이슬람도 안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왕이시고 말씀에 따라 동성애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라며 치열한 영적전쟁 중입니다.


이 한국을 하루빨리 처리해야 되는데 한국에 예수 믿는 사람들 때문에 안되서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시지만 사단도 자기의 사람들을 도구로 써서 자기의 일을 완성해 나갑니다.


거기에 쓰임 받는 사람들이 바로 북한 정권과 이땅의 종북좌파 세력들, 즉 공산주의(주체사상) 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전교조, 민노총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분열의 영과 미혹의 영으로 눈과 마음을 가리워져 버리니 모두가 사단의 도구가 되어 대한민국을 말아먹기로 작정하고 덤빕니다.


저는 지난 8월15일 날 시청 앞 광장에서 벌어진 일에 경악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여기가 서울인가 북한인가 제 눈을 의심할 정도로, 공공연하게 북한을 찬양하고 미군 나가라고 외치는 우리 젊은이들을 보고 저들의 배후에 있는 미혹의 영에 의해 이땅이 너무나 많이 점령되었음을 다시 실감했습니다.


<관련영상> 8.15 사드반대집회 “미국놈들 몰아내자”



저들이 지식이 없어서 저렇게 무모한 행동을 합니까? 아닙니다. 저들은 그게 나라를 위한 것이고, 그게 합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걱정하는 어르신들의 얘기는 무조건 수구꼴통으로 치부해버리는 등, 오랜 세월동안 전교조로 인한 교육의 폐해가 이제 저런 열매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8월 20일 서울 지하철 내부에서 죄수복을 입고 "양심수 이석기 석방"을 외치는 저 청년들은 자기가 지금 시대의 양심(?)에 의한 올바른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상의 영, 미혹의 영이 저들을 사로잡아 대한민국을 파멸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엡 6:12)


세상에는 하나님과 사단의 두 세력만 존재합니다.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구제에 힘쓰고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했더라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사단에 속해 있는 사람이지, 하나님의 자녀는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영혼 구원에 있고 또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이 땅을 다스리는 것 말입니다. 그 사명을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음부가 이기지 못하는 권세를 교회에게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사단이 지금 이 땅을 자기의 세력 하에 두기 위하여 우는 사자같이 돌아다니는데 이 땅의 교회들은 그져 자기 교회만 부흥되고 잘되기만을 바라고, 어떻게든 신도수 늘려서 높은 건물 세우기에 혈안이 되어 땅 따먹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국을 축복하시고 한국교회를 축복하신 이유는, 한국교회를 통하여 한국만 잘먹고 잘살라고 축복하신게 아니라, 저 북녁땅의 고통받는 동포들을 복음으로 자유케하도록,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들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사명을 위해 이런 축복을 허락해 주셨는데, 현실은 세계는 고사하고 자신의 나라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우는 사자같이 두루다니며 죽이고 도적질하는 사단을 박살내라고 한국교회에게 이런 큰 복과 은혜를 부어주셨는데, 마귀를 대적하여 죽이지 못하고, 깨워 기도하지 못한 결과가 지금의 한국의 암담한 현실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가 어디 있습니까?

사단은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온갖 궤계와 술수로 이 땅을 분열시켜왔고, 국민들을 미혹하였습니다. 기도하고 깨어 있어야 할 교회는 천하에 용서 받지 못할 죄를 지었습니다.


일제시대의 신사참배는 총 칼 앞에 저지른 죄였고, 지금의 WCC는 목숨의 위협이 없는 평화로운 시대에 스스로 우상숭배의 죄를 지었습니다. 오히려 일제시대 신사참배의 죄보다 더 큰 죄를 지은 우리 세대는 하나님 앞에 베옷을 입고 재위에 앉아 통곡하며 회개하여야 합니다.


세월호 사건이 대통령의 탄핵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원래 사단은 죽이고 도적질하는게 의무이고 할 줄 아는 게 그 것 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깨어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대적했으면 사단이 계획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나라가 이렇게 풍전등화 같이 위태롭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욥기서에도 사단이 멀쩡한 욥을 참소하고 공격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세월호와 같은 비극적인 사건을 일으키신 게 아니고 대한민국의 죄가 관영하여 사단이 하나님께 참소하니 공의의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 뿐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통해 일하고 있고, 사단도 자기의 일꾼을 통해 이 땅을 도적질하고 있는데, 오늘날 교회가 식물교회가 되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한국과 교회에 복을 주시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저 북한의 형제들을 해방시키시고 하나님이 친히 왕이 되셔서 이 땅을 통치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원하옵기는 하나님,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명 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아버지 지금 이 땅에 이 나라를 위해 눈물로 골방에서 기도처소에서 기도하는 이 백성을 보고 이 나라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또 요나의 외침을 듣고 니느웨 백성이 재옷을 입고 회개하였을 때 그 땅 십이만 명을 아껴 보신 것 같이 지금 이 땅에 당신의 백성이 회개하고 주님의 긍휼을 구하니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다." (시 86:5)


주님! 이 땅을 덮고 있는 분열의 영과 미혹의 영을 제하여 주시옵고, 사단의 도구로 전락되어진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을 뒤덮고 있는 어두움을 거두어 주시사 저들이 빛 가운데로 나오게 하여 주시고 이 땅을 소요케 하는 종북좌파 세력들을 제하여 주소서...


저들의 악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하시고 우리가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아도 저들이 흔적조차 없도록 이 땅을 지켜주시옵소서... 이 땅 교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교회에게 맡겨주신 기도의 사명을 감당케 하옵소서...



출처: 이웃 블로그/ 진실함

교회란 어떤 곳인가

 

?

 

박일민 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서울의 하늘만큼 십자가로 가득한 도시를 만나기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밤이면 교회 종탑의 빨간 십자가들이 한무리의 물결을 이룬다. 그러나 한국의 교회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그 수에 비해서 너무나도 미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상당 부분이 교회에 대한 인식의 부족함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교회란 과연 어떠한 곳인가?

성경은 교회를 가리키는 데, 다음 몇 가지 ?현들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이 표현들을 통해서 교회가 어떠한 곳인지를 알아 볼 수가 있다.

 

에클레시아

성경에서 교회를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표현은 희랍어 '에클레시아'이다. 이 말은 '안에서 밖으로(out of)'를 의미하는 전치사 '에크'와, '부르다(to call)'를 의미하는 동사 칼레오가 합해진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 말은 "밖으로 불러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밖으로'는 '세상 밖으로', 또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 밖으로'를 뜻한다. 그리고 '부르다'는 '구원에로의 부르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에클레시아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 가운데서 구원에로 불러내진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에 따라서 교회는 흔히 구원에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집합체라고 일컬어져 오고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교회는 성도(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교통하는 곳(집합체)이라고 할 수 있다. 성도의 교통은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교통으로도 나타난다. 그리고 피차의 교제(코이노니아)를 통한 성도들 사이의 수평적인 교통으로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예배와 교제가 있는 것이 교회이다. 예배와 교제가 없으면, 또는 이 둘 중에 하나가 없으면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세상적인 축복이나 나누어 가지는 기관이 아니다. 교회는 정신 수양원이 아니다. 교회는 사교 모임이 아니다. 교회는 단순한 자선 단체가 아니다.

 

에클레시아는 어느 한 가정에 모인 사람들이나(고전 16:19, 골 4:15 등), 하나의 독립된 단체를 구성한 사람들에 관계없이 사용되었다(행 5:11, 11:26 등). 그리고 독립된 단체들이 연합하여 모여진 경우에도 사용되었다(행 9:31). 이것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면서 예배를 목적으로 모인 지상의 모든 집합체라면, 그 규모나 형태에 관계없이 교회가 되어짐을 뜻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규모나 형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예배와 교제가 있으면, 건물이 없이도 교회이다. 직분자가 없어도 교회이다. 십자가 상이 걸려 있지 않아도 교회이다. 이런 것들은 부수적인 것들에? 불과하다. 핵심은 예배와 교제이다. 만일 자기 자신을 교회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너무나도 큰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은 이러한 생각 때문에 생겨난다.

 

성경은 에클레시아 이외에도 교회를 가리킬 때, 다음과 같은 많은 비유적인 명칭들을 사용하고 있다. 이 비유들 속에는 교회가 어떠한 곳인지, 또는 어떠한 곳이 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주의깊게 살펴 볼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의 몸

사도 바울께서는 고전 12:27에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렀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의미한다. 사도께서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그래서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엡 1:22, 23)라고 하셨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명령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설립자, 또는 특정인의 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교주를 모시는 사이비 집단이 되어 버리고 만다. 교회는 주님의 교훈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단호히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머리와 지체 사이에는 유기적인 관계가 유지된다. 서로가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도 머리되신 주님과 하나이어야 한다. 교회는 주님과 생각이 같아야 한다. 감정도 같아야 한다. 교회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으로 기쁨을 삼아야 한다. 교회는 주님과 함께 탄식을 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범사에 주님을 배우고, 주님을 닮아서,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한다.

 

만일 교회는 즐거워하는데 주님의 마음은 아파하시는 일이 있다면 , 그 교회는 심각한 병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이름만 교회일 뿐, 실상은 교회가 아닌 상태에 있는 것이다.

머리는 한나이지만 지체는 많다. 많은 지체들은 각기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체들은 한 머리 안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조화와통일을 이룬다. 교회의 성도는 하나 하나의 지체들이다. 서로의 분량과 역할이 각기 다른 지체들이다. 그러나 성도는 머리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간에 조화와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면, 피리를 부는 자가 있을 때 함께 즐거워하며 춤을 추고, 애곡을 하는 자가 있을 때 함께 슬퍼하며 가슴아파 할 수 있어야 한다. 지체들끼리의 대립이나 견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교회와 교회들 간에도 지체 의식이 있어야 한다. 주님의 진정한 몸된 교회들이라면, 교파나 교단이 다르다고 하여 서로 간에 반목이나 질시를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교회들은 상호 보완적인 역할로 머리되신 주님을 섬겨야 할 지체들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던 곳이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다는 것은 그들이 민족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마음이 성전, 즉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신약은 교회를 가리킬 때,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나 하늘의 예루살렘, 또는 새 예루살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갈 4:26, 히 12:22, 계 21:2).

하나님은 무한하시어서 온 우주 어디에나 편재하시고 계신다. 그러기에 하늘에 올라 가든지 땅 아래로 내려 가든지 하나님의 낯을 피할 곳은 아무 곳도 없다(시 139: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자신의 지정된 거처로 삼으셨다(합 2:20).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전을 찾도록 명하셨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제사를 드릴 때에 성전을 찾았다.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더라도 반드시 성전을 찾았다. 기도할 때도 시간을 정해 놓고 성전을 찾아갔다. 교회를 예루살렘에 비유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는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집이요 보좌이다. 모든 성도들이 마시도록 생수가 흘러나는 생명샘이다. 하나님의 은헤가 시작되는 시은소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의 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함께 모여서 세속적인 행사나 모임 또는 오락만을 즐기느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고 있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교회는 성도의 마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마음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중심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손쉽게 모여 교제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언제든지 들러서 기도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교회생활과?? 비례한다. 여기에는 거의 예외가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할 거리에 떨어져 있으면서 한 주간에 한 번 정도나 힘들여 찾아가는 곳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복잡한 여건 때문에 부득이한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교회를 옮기는 것이 좋다. 아니면 차라리 교회 옆으로 이사를 하는 것이 좋다.

 

성령의 전

교회는 개인 신자의 경우와 더불어서 성령의 전이나 집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고전 3:16, 엡 2:21-22, 벧전 2:5). 교회가 성령, 즉 거룩한 영의 전이라는 말은 교회가 거룩하게 구별되어진 곳임을 의미한다.

 

교회는 세속과 구별이 된 곳이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께 바쳐진 곳이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것으로 인쳐진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이들을 성도라고 부른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나 의식들도 세상적인 일들과 구별이 되어 있다. 그래서 성직 또는 성례라고 부른다. 읽는 책이나 부르는 노래도 세상 것둘과 구별이 되어 있다. 그래서 성경 또는 성가라고 부른다. 건물이나 물건들이 겉으로 보기에 세상의 것들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세상 것들과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것들이다. 그러기에 성전 또는 성물(성구)이라고 부른다.

 

한편, 교회는 불의나 죄와 구별되어진 곳이기도 하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거룩하심을 이루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의 장소이다. 여기에는 말이나 행동이나 계획 등이 모두 다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많은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 성도라는 이름을 주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이름에 합당하도록 날마다 죄에 대하여 죽어지기를 힘써야 한다. 그리고 온전히 거룩한 새사람으로서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

이 과정에는 개인차와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다. 이 때문에 교회는 거룩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간혹 잡음들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이러한 잡음 때문에 교회를 오해하거나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거룩해져 가는 흔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최소하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최근 우리 주변에는 세상과의 구별을 상실한 교회들이 없지 않다. 생각이나 언어, 행동이나 벌리고 있는 행사에서 세상과의 차이를 발견하기가 힘든 경우가 많다. 일부 가사를 제외한다면, 동작이나 마음가짐이나 기교 등이 세상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노래가 유행하고 있다. 나누는 대화도 세상사 일색이다. 집안이나 직장에서 어른이면, 교회에서도 무조건 어른 행세를 하려 하기도 한다. 교회에서조차 계 모임이 이루어진다. 심지어는 성전이 세속 모임을 위해 대여되기까지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양 무리 속에 숨어 있는 염소를 골라내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염소 무리 속에 끼어 있는 양을 구해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또다시 주님으로 하여금 오늘의 예루살렘 보시고 눈물울 흘리시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눅 23:28). 그래서 교회로 하여금 구별된 곳이 되게 해야 한다.

 

진리의 기둥과 터

사도 바울께서는 교회를 가리켜서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고 하셨다(딤전 3:15). 교회를 기둥이나 터에 비유한 것은 교회의 기초와 사명이 무엇이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교훈을 주시려 함이었다.

교회의 터는 진리이다. 교회는 오직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한다. 교회가 혈연이나 사업이나 권력 등의 기초 위에 세워져서는 안 된다. 교회의 기초는 오직 진리되신 그리스도이어야 한다.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지 않은 교회는 정상적인 성장을 할 수가 없다. 혹 성장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비진리나 교주를 그 기초로 삼고 있는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는 아무리 십자가를 내다 붙이고, 그럴싸한 교회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도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들을 형제로 보지 않는다. 이방인으로 여긴다.

 

교회가 붙들어야 할 기둥도 오직 진리이신 그리스도이다. 교회는 진리의 소호자이다. 교회는 진리만을 전하고, 진리만을 가르쳐야 한다. 진리는 타협이나 양보를 허락하지 않는다. 타협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외로울 때가 많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 할 때도 많다. 이것이 교회가 가야 할 길이다. 지금까지의 교회 역사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 위에 세워졌다. 그러기에 교회는 그 피를 지키기 위하여 수없이 피를 훌려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자기 자신의 생각만을 진리라고 독선적인 주장을 늘어 놓으면서 분쟁과 분리를 일삼는 것은 옳은 자세가 아니다. 진리는 자기의 생각이나 고집이 아니라, 원수까지라도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만을 따라야 한다.

 

그렇다고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양보하면서까지 타협을 모색하시는 것 역시 옳은 일이 아니다. 교회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

 

금 촛대

사도 요한은 교회가 금 촛대로 나타나는 계시를 보았다고 기록했다. "내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 1:20).

 

교회가 밝히는 빛은 하나님과 진리이다. 하나님이 빛이시요(요일 1:5), 진리, 즉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이 바로 빛이기 때문이다(요 8:12). 이 빛은 흐려지거나 변하지 아니하는 빛이다. 그러기에 가장 고상한 빛이다. 따라서 교회는 금으로 만든 촛대에 비유가 되었다.

 

촛대에서 빛이 나오기 위해서는 먼저 심지가 타지고, 양초가 녹아져야 한다. 자기 희생이 우선하지 않으면 빛은 생겨나지 ?는다. 교회는 등경 위에 있는 등불이나 산 위에 있는 동리처럼 높이 들려져야 한다. 그리고 피 흘리기까지의 수고와 자기 희생을 통해서 진리와 착한 행실로써 세상을 비추어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 결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교회는 만에 한나라도 허물과 실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려는 자들에게 거침돌이 되는 일이 생겨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린 소자 하나라도 실족치 않게 하려는 세심한 주의를 항상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신부

사도 바울께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 비유를 하셨다. 그리고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교회가 주께 하듯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셨다(엡 5:22-25).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에 비유가 되어진다.

마치 남편과 아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와?? 하나이다. 여기에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한 것과 같은 의도가 담겨 있다. 그리고 신부로서의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고, 항상 순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또 오직 그리스도께만 복종을 해야 함과 동시에, 희생을 아끼지 않는 헌신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돌보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교회를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회는 밤 언제쯤 올 줄 모르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와도 같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둠과 함께 졸거나 잠이 들러서는 안 된다.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진다 해도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기름을 준비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며 기다려야 한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진리에 대한 왜곡이 심할수록, 죄악이 관영할수록, 불평이나 탄식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귀가 바라는 것이다. 그럴수록 교회는 더욱 재림에 대한 임박한 의식을 가져야 한다. 밤이 깊었다는 것은 새벽이 가까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많은 수의 교회들이 있다. 그러나 교회의 수량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참된 역할이다. 교회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집합체이다. 따라서 교회는 조직이나 건물이나 행사 등 겉으로 나타나는 것에다 관심을 집중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 비유되어진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 예루살렘, 성령의 전, 진리의 기둥과 터, 금 촛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기능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 있는 교회가 된다.

 

출처: 행복충전소/DMpa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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