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5장)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신 밤하늘별꿈 

“너는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람이 왜, 무엇을 두려워했단 말입니까? 아브람이 얼마나 두려워했으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셔야 했을까요? 아브람이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자신에게 후사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아브람이 두려워한 것은 후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후사가 없는 것이 왜 그렇게 큰 두려움이 되는 것일까요?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인간 뿐 아니라 짐승도, 물고기도, 벌레도, 나무도, 꽃도, 모든 동식물...., 산 것들은 다 죽습니다. 그런데 씨를 퍼뜨리고 새끼를 낳습니다. 그렇게 생명이 이어져 내려갑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때 모든 사람들은 사람도 그렇게 후손을 남기는 것이 생명을 이어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후사가 없는 것, 대가 끊어지는 것을 죽음 보다 더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아브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불러내셨고 함께 하시는데도, 그 하나님이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데도 후사 없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화를 내시지도 아니하시고 꾸지람도 아니하십니다. “아브람아, 다메섹 엘리에셀이 네 후사가 아니다. 네 몸에서 나는 자가 네 후사가 될 것이다.” 말씀하시고 아브람을 이끌어 밖으로 나가 밤하늘의 별을 보여주십니다. “저 별들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밤하늘의 별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의 가슴속엔 아직도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라면서 여름날 밤 쳐다보던 밤하늘, 모래알처럼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밤하늘 별들이 꿈처럼 남아 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믿으매 이를 그의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좀 따져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네 후손이 저 별과 같을 것이다.”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이 어째서 의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따져봐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후손이 별처럼 많아지는 것이 복입니까? 복이겠지요. 특히 아들 낳기 원하고 자손이 번성하기 원하는 한국인들에겐 정말 큰 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의 입장에서 본다면, 만일 그 자손들이 예수님을 모르는 육신의 자손이라면, 진노의 자녀, 멸망의 자식들이라면 번성한 자손은 외려 끔찍한 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라면, 구원받은 후손이 아니라면 그것은 복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불러내시면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신 그 복도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리키며 보여주신 그 밤하늘 별은 아브람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은 이를 정확히 지적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후손’이라고 말씀하신 그 ‘후손’은 복수명사 ‘후손들’이 아닌 단수명사 ‘한 후손’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아니, 하나님, 왜 ‘후손들’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후손’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기초문법도 모르십니까?” 하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 곧 ‘오실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의”로 여기실(인정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만일 아브람이 따져서 ‘후손’이 아닌 ‘후손들’의 약속을 받아내었더라면 절대로 의로 여기심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로 여기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브람이 ‘후손’의 약속, 곧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자 하나님께서는 “나는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냐?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여호와란 말이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신 약속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었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람은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고 증거를 요구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도 믿지 못 하는 악하고 약한 존재인가 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도 눈에 보이는 증거, 예언, 계시 같은 것들을 찾아다니는가 봅니다. ‘나는 여호와로라.’ 하시면서 자신의 이름을 거신 하나님으로서는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믿음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화도 안 내시고 아브람에서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아브람이 그것들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갭니다. 비둘기는 쪼개지 않습니다. 솔개가 내릴 때 아브람이 쫓습니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들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브람의 자손들이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하고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은 자빠져 자고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리고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납니다. 그리고 그 날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 후손이 애굽 강에서 유브라데 강까지의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알다시피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의 이야기요 약속입니다. 예표입니다. 그렇다면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삼년 간 공생애를 마치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하나님의 아들 아니겠습니까? 비둘기는 성령이고요. 그래서 비둘기는 쪼개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이 그 손으로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을 쪼갠 것처럼 아브람의 후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쪼갤 것입니다. 횃불이 그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모든 죄인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 오직 그 한 길이 될 것입니다.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John 14:6) 
이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은 쪼개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그 아들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 몸이 쪼개진 아들의 살과 피는, 그 생명은 온 땅에 밤하늘별처럼 산산이 부서지고 뿌려질 것입니다. 그렇게 온 세상 모든 죄인들을 구할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밤하늘별을 보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내어주사 십자가 위에서 산산이 부서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브람은 밤하늘별처럼 많은 후손을 보고 기뻐하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십자가의 고통과 산산이 부서져 흩뿌려질 아들의 살과 피로 그 가슴이 찢어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그 고통 너머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구원받을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밤하늘이 아니라 우주를 가리키셨습니다. 우리 사는 이 지구, 우리 태양은 우주 한 구석 티끌입니다. 우리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만 해도 지름이 10만 광년이나 되는 거대한 별무리이고 은하계에는 태양과 같은 별들이 2천억 개나 된답니다. 그런데 우주 안에는 은하계와 같은 갤럭시(Galaxy)들이 또 천억 개나 된다고 합니다. 그럼 우주공간에 태양과 같은 항성만 해도 몇 개나 될까요? 1천억 곱하기 2천억 하면 얼마나 되지요? 어떤 우주과학자가 관측 가능한 우주의 별을 계산해 보았답니다. 700해. 지구상의 모든 해변, 강, 사막의 모래 알갱이 수 보다 많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끝 간 곳 없이 드넓은 그 우주를 괜히 밤하늘 장식용으로 만드셨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그 후사들에게 나눠주시려고 만드셨을 것입니다. 그 날이 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 우주를 상속받아 다스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찬송과 영광이 온 우주에 가득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가리키며 보여주신 밤하늘별은 하나님의 그 꿈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십자가 너머의 그 꿈, 하나님의 꿈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당신의 가슴 속에 그 하나님의 꿈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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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카고에 잠시(약 2년간 사는 중) 살면서 문득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여기에 적어본다. 그것은 한국이 미국보다 물가지수가 더 높다는 것(시카고 한국일보, 2019. 3. 19, 시카고 41위, 서울 6위… 참고) 사실 미국인들의 수입이 한국인들보다 약 2배 많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정확한 통계를 통해 비교해야겠지만, 그렇다면 현실적인 면에서는 어떨까? 물가지수는 한국이 터무니 없이 높다는데, 그 이유가 뭘까? 

이것을 비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최근 세계 물가지수 통계가 발표되었는데, 서울의 경우, 전세계적으로 6번째로 물가가 비싸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머물고 있는 미국 시카고의 경우는 41위. 이것은 어떤 기준으로 물가를 비교했는지 모르겠지만, 느낌상으로 시카고의 물가는 서울에 비해 많이 싸다. 

내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마켓에 가서 장을 보면, 재료값은 정말 싸다는 느낌이 든다. 예컨대 닭 한마리에 약4불, 사과는 파운드에 80-90센트, 감자는 한 봉지에 약2불, 아무튼 여기서는 고기값과 채소값이 싸다. 요즘 서울의 물가는 어떤지 잘 모르나 여기서는 음식재료비는 저렴해서 나가 외식하지 않는 이상 살기 편하다. 어쩌면 행복하다는 말이 적합하다. 

외식(eating out)의 경우는 좀 다르다. 대학교 카페테리아의 경우, 아침 조식은 약 10불, 점심은 13불, 저녁은 15불 정도. 음식점에서 음식을 주문해서 먹으려면 팁(Tip)까지 약 14-5불 정도 드는 것 같다. 해서 가능하면 집에서 조리하는 것이 유리. 

그렇다면 왜 서울의 물가는 그리도 천정부지로 올랐는가? 아마도 지난 해부터 물가가 고공행진을 하는 모양이다. 물가가 오르는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게다. 내가 경제에 대해 문외한이기에 그 이유를 논하는 것은 넌센스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정무가 물가변동을 잡지 못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이에 정부는 물가비교가 어렵고, 서울 물가는 세계 물가와 동등하다고 부인한다. 연합뉴스, <카드뉴스> 서울물가… 2017. 12. 11). 

일반 서민들에게는 물가가 안정되는 것이 좋다. 돈 많은 부자들은 물가에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일반 서민들은 물가에 따라 삶의 행복지수가 다르다. 만일 한달 수입이 200만원 정도 되는데, 물가로 지출되는 비용이 절반이 넘는다면 그들에게는 삶의 만족도가 낮을 것이다. 그러므로 물가지수는 매우 중요한 삶의 기초가 된다. 

선거철만 되면 후보자들이 “여러분의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라는 질문을 한다. 이는 자신이 당선되면 좀 더 잘 사는 나라, 도시, 그리고 가정을 만들겠다는 의도된 질문이다. 서민들은 다른 것 없다. 물가만 잘 잡아 주면(수입 대비) 정치 및 경제 지도자들에게 특별한 불만이 없을 게다. 그러나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지금의 지도자들은 정말 반성여야 할 게다.


khcho (128.♡.♡.131)  ㆍ    2019-03-20 14:25



출처: 아멘넷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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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5: 9-14)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이스라엘에서 붙잡혀와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여종 소녀부터 선지자 엘리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문둥병을 고치려고 왕에게 허락을 받고 금은보화를 잔뜩 싣고 이스라엘로 와 선지자 엘리사의 집 문앞에 당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밖에 나와 보지도 않고 사환을 보내어 나아만 장군에게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하고 전갈을 합니다. 그야말로 나아만 장군에게 치욕적인 대접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크게 분노하여 아람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분노한 나아만 장군이 아람으로 돌아가면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이스라엘을 침공할지도 모릅니다. 그 때 나아만 장군의 종들이 나아만 장군에게 손해 볼 것 없으니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잠그라고 설득하였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마지 못 해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자 그의 문둥병이 나아 피부가 어린아이의 살 같이 깨끗하게 바뀌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라면 대단한 사람일 것이고 그가 대단한 능력으로 자신의 병을 고쳐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찾아온 아람 장군 나아만 장군은 사환을 시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라는 말을 전하는 선지자 엘리사의 태도에 실망하고 분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라면 굉장한 모습과 능력으로 임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던 유대인들은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님이 회당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한 줄을 읽고 자신을 가리키며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하자 실망하였습니다. 거기에다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하지 분노하여 예수님을 산 낭떠러지에 끌고 가 밀어뜨려 죽이려고 하였습니다(누가복음 4장). 마침내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놓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신을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하였습니다. 이미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사람들이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 하고 멸시하고 핍박하며 버릴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이사야 53장) 

  

나아만 장군이 일곱 번 몸을 잠근 요단강은 700년 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사례를 받을 그 강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마지 못 해 하나님의 사람의 말에 순종하여 일곱 번(일곱은 하나님의 숫자를 뜻한다지요.) 강물에 몸을 담그자 그 더럽고 지긋지긋한 문둥병이 깨끗하게 나아 피부가 새롭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님을 따라 세례를 받으면 문둥병 보다 더욱 끔찍한 죄악을 벗고 거듭 나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입니다. 문둥병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천국의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멸시받고 핍박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그 아들을 보내셨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도 아니하며, 실망하여 돌아가며, 분노하여 예수님을 버리고 밟아버리기까지 합니다. 광야의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살 텐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죄악을 벗고 구원을 받을 텐데,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세례를 받기만 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고 영원한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굉장한 일이 일어날 텐데 말입니다. 

  

우리는 잡혀 와서 종이 된 이스라엘 계집아이처럼, 실망하고 분노하여 돌아가려는 나아만 장군을 설득한 종들처럼 저 완고하고 이마가 금강석처럼 굳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 돌아서는 자를 설득하는 사명을 맡은 자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전하지도 아니하고 데려오지도 아니하고 설득하지도 아니하고 가만히 입을 막고 바라보고만 있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너무나 많은 나아만 장군들이 문둥병에, 아니 죄악에 시달리며 죽어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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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불복종 선언문


– 2018년 12월 12일, 중국 청두 이른비 언약 교회, 왕 이 목사.

나는 하나님께서 중국에 세우신 당국자들을 성경의 가르침과 복음 전파 사명에 근거하여 존중합니다. 세상의 왕을 자리에 앉히거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만드신 여기 중국의 역사적, 제도적 상황에 순종합니다.


나는 기독교 교회의 목사로서, 올바른 질서가 무엇이고 좋은 정부가 무엇인지 성경을 밑바탕으로 이해하고 바라봅니다. 동시에 교회를 박해하고 사람들에게서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박탈하는 이 공산주의 체제의 사악함에 분노가 치밀고 분통이 터집니다. 그러나 나는 사회, 정치 제도를 변혁 하라는 사명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목표를 이루라고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에게 복음을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끔찍한 현실, 불의한 정치, 독단적인 법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를 나타냅니 다. 모든 중국인은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런 현실과 정치와 법률을 볼 때 우리는 세상의 제도나 문화를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데서 진정한 소망을 얻고 완벽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목사로서 나는 복음을 굳게 확신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르칩니다. 악한 모든 것을 비판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복음서에서 하신 명령과 그 영광스러운 왕의 측량할 길 없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누구의 인생이나 너무 짧게 끝납니다. 하나님은 기쁘게 회개하고자 하는 사람 모두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그런 사람 모두를 회개로 이끌라고 교회에 엄중하게 명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들을 기쁘게 용서하기를 갈망하시고 기꺼이 그렇게 해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세상에 증언합니다. 천국에 관하여 이 중국에 증언합니다. 천국의 영원한 삶에 관하여 이 땅의 덧없는 인생들에게 증언합니다. 이것이 중국 교회가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목표이자 내가 받은 목회 사명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공산주의 체제가 일시적으로 중국을 지배하도록 허락해주셨습니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존중합니다. 주님의 종 칼뱅(Calvin)이 말했듯이, 악한 통치자는 악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고, 그 심판의 목표는 하나님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촉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법을 집행할 때, 주님의 징계와 훈련에 굴복하듯이 기쁘게 굴복할 것입니다.


동시에 나는 이 공산주의 체제의 교회 핍박이 말도 못하게 악랄하고 불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교회의 목회자로서 나는 이 사악함을 공개적으로 엄중히 고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회자 로서 내가 받은 소명은 하나님과 성경을 거역하는 그런 인간의 법을 비폭력인 방법으로 거역하라고 명령합니다. 나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악한 법에 불복종하는 대가를 기쁘게 감당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개인적으로 악한 권세에 불복종하든지 교회가 불복종하든지,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권리를 얻기 위해 싸우는 투쟁’이 아니고, 시민 불복종 형태의 정치적 행동주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는 중국의 제도나 법률을 바꿔보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목회자로서 관심을 쏟는 한 가지는, 내가 이렇게 믿음으로 정부에 불복종하고 또 그렇게 불복종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상에 증언할 때, 죄로 가득한 사람들 본성이 무너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나의 불복종은 복음이 명령하는 일부입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그리스도의 지상대명령은 우리에게 큰 불복종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악한 권세에 불복종하는 목표는 세상을 변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또 다른 세상에 관하여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교회가 되는 것이지, 다른 어떤 세속 기관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극적인 관점에서 교회는 세상과 반드시 분리되어야 하며, 세상의 제도가 되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적극적인 관점에서 교회는 다른 세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이 세상에 증언하기 위해 행동해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양심과 복음에 관계된 모든 문제에서 인간에게 순종하지 말고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나는 영적으로 불복종하고 신체적으로 고난을 겪음으로써, 영적인 세상이 존재하며 영광의 왕이 계신다는 진리를 세상에 증언합니다.


나는 중국의 어떤 정치나 법률 제도를 바꾸는 것에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심지어 나는 교회를 핍박하는 공산주의 정부의 정책이 언제쯤 바뀔까 하는 질문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체제에서 살고 있고 앞으로 어떤 체제에서 살게 될지 상관없이, 세속 정부가 교회를 계속 핍박하고 오직 하나님의 소유인 인간의 양심을 더럽히는 한, 나는 계속 믿음으로 불복종할 것입니 다. 인간과 사회는 오직 그리스도께 구원받고 은혜로우며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굴복해야 희망이 있는데, 이 진리를 실천하여 더 많은 중국인에게 알려주라는 것이 내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중국 공산주의 체제가 교회를 핍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핍박을 사용하여 더 많은 중국인이 세상의 희망을 버리고, 영적으로 깨어나는 광야를 지나, 예수님을 알도록 인도 하고 계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그분의 교회를 계속 훈련하고 세워가신다면, 나는 하나님의 계획에 기쁘게 순종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은혜롭고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내 말과 행동 어느 것도 사회, 정치적 변혁을 바라거나 모색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사회 세력이나 정치 권력이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을 행하는 이들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자들을 위협하기 위해 정부 권력자들을 세우신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은 잘못 한 일이 없다면, 어두운 권세를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나는 종종 연약해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복음의 약속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그것에 에너지를 다 쏟아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지금 중국 사회 전체에 전하고 있는 좋은 소식입니다.


나는 교회가 어둠의 권세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공산주의 정권이 교회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내가 장기간이나 단기간 감금되어 내 믿음과 구세주에 대한 권력자들의 두려움을 줄여줄 수 있다면, 나는 매우 기쁘게 그 길을 갈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교회를 모질게 핍박하는 당국자 들과 법을 집행하는 이들의 사악함을 거부하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불복종해야만, 그들의 영혼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신체의 자유를 잃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를 들어 쓰셔서, 내 신체의 자유를 앗아간 그들의 권세보다 더 높은 권세가 있으며 그들이 절대 제한할 수 없는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깨우쳐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그 자유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충만한 자유입니다.


정부가 나에게 어떤 죄를 덮어씌워 기소하든지, 나에게 어떤 오물을 퍼붓든지, 그 혐의가 내 믿음과 글과 발언과 가르침에 관련된 한, 순전히 사탄의 거짓말이고 미혹입니다. 나는 그 혐의를 단호하게 부인합니다. 나는 형기를 마치겠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핍박하는 법에 굴복하지는 않겠습니다. 나는 처형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유죄를 인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게다가 주님의 교회에 대한 핍박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중국인에 대한 핍박이야말로 중국 사회에서 가장 사악하고 끔찍한 폐해라는 사실을 반드시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는 기독교인뿐 아니라 비기독교인에게도 해를 끼치는 죄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께 나오지 못하도록 중국 정부가 잔혹하고 무자비하게 위협하고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사악한 처사는 세상에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어느 날 이 체제를 무너뜨리신다면, 그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이 사악한 정부를 의롭게 징벌하시고 그들에게 복수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천년 넘게 지속된 교회만 있었을 뿐, 천년 넘게 지속된 정부는 이제껏 없었습니다. 영원한 믿음만 있습니다. 영원한 권력은 없습니다.


나를 철창에 가둔 자들은 어느 날 천사들에 의해 철창에 갇힐 것입니다. 나를 심문하는 자들은 결국 그리스도께 추궁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 대해 생각할 때, 주님께서는 나를 감옥에 가두기를 꾀하는 자들과 적극적으로 감옥에 가두는 자들에 대한 연민과 슬픔을 내 마음에 가득 채워주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나를 들어 쓰시고 인내와 지혜를 허락하시기를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당국자들은 나를 아내와 자식들에게서 떼어놓고, 내 평판을 더럽히고, 내 인생과 가족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을 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누구도 나를 강압해서 믿음을 저버리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 누구도 내가 다른 삶을 살게 강요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 누구도 나를 죽은 자들에게서 살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훌륭한 당국자 여러분, 악행을 중단하십시오. 내 유익을 위한 충고가 아니라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를 위한 충고입니다. 진심으로 간청합니다. 자제하십시오. 대체 왜 나 같은 초라한 죄인 하나 때문에 지옥에서 영원히 형벌 받는 대가를 치르려 하십니까?


예수님은 구원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죽었다가 우리를 위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나의 왕이시며 세상 전체의 왕이십니다. 나는 예수님의 종입니다. 나는 그래서 감옥에 갇혔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들을 온유하게 거부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모든 법을 기쁘게 어길 것입니다.


부록: 믿음의 불복종을 구성하는 요소

나는 성경이 어떤 정부 어떤 기관에도 교회를 운영하거나 기독교인들의 믿음에 간섭하는 권세를 주지 않았다고 굳게 믿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교회를 억압하고 기독교인의 믿음에 간섭하는 행정 시책과 법적 조치 일체를 거부하라고 나에게 명령합니다. 성경은 평화로운 수단으로, 온유하게 저항하고 적극적으로 참으면서, 기쁨 충만한 마음으로 그런 것들을 거부하라고 명령합니다.


나는 그것이 영적 불복종 행위라고 굳게 믿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고 복음을 억압하는 현대의 권위적인 체제에서 영적 불복종은 복음 운동의 필수 불가결한 일부가 되었습니다.

나는 영적 불복종이 마지막 때의 행위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것은 죄와 악이 지배하는 일시적인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증언하는 행위입니다. 정부에 불복종하는 기독교인은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본을 따릅니다. 평화로운 불복종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일부가 되는 것을 피할 뿐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내가 영적 불복종을 실천할 때, 성경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과 은혜를 의지하라고 명령합니다. 나는 그렇게 굳게 믿습니다. 또한 나는 우리가 두 영역에서 주의하여 도를 넘지 말아야 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첫째 영역은 마음입니다. 사람들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그들 영혼을 향한 사랑이 영적 불복종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환경을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이 영적 불복종의 목표입니다. 어느 때든지 외적 억압과 폭력 때문에 내적인 평화와 인내를 잃는다면, 그래서 교회를 핍박하고 기독교인들을 학대하는 사람들을 증오하고 원망하기 시작한다면, 영적 불복종은 그 순간 실패로 돌아갑니다.


둘째 영역은 태도입니다. 복음은 믿음에서 나온 불복종은 반드시 비폭력적이어야 한다고 명령합 니다. 물리적으로 저항하는 대신에 적극적으로 고통을 받고 심지어 불의한 처벌도 기꺼이 감내하는 것에 복음의 오묘함이 있습니다. 평화로운 불복종은 사랑과 용서에서 나옵니다. 십자가란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기꺼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불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을 무한히 갖추고 계셨음에도, 그 모든 수욕과 상처를 고스란히 감내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못 박은 세상에 평화의 감람나무 가지를 내미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거부한 세상을 거부하신 방법이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억압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이 체제 아래서 다른 이들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며, 믿음에서 나온 이런 불복종을 실천하라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부르셨다고 굳게 믿습니다. 나는 그런 방법으로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것이 내가 전파하는 복음의 오묘함입니다.



주님의 종, 왕 이.


출처: https://vomkorea.com/2018/12/14/wang-yi/


시민 저항 운동 

하나님의 성회는 하나님의 계명에 도덕적으로 저촉되는 시민 저항 운동에 대하여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 


원주 감영에 핀 태극기


        성경은 믿는 자에게 가르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로마서 13:1,2).  그 명령 위에 그리고 그것에 대하는 말씀은 민간 권세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명했을 때 말한 성령의 감동된 제자들의 응답이었 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사도행전 4:20).         


기독교인은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14:15).  민간 정부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명하신 것들을 하는 것을 금지 할 때에, 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들을 하라고 명할 때에, 우리는 정부에 대하여 평화스럽게 저항하는 데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 배경을 가집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시민적 저항에 대하여 성경으로 보증하는 경우와 불법적 항의를 하기 위하여 이기적으로 정당화시키는 경우를 주의 깊게 구별해야만 합니다.  많은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가 시민적 저항의 행동이 있기 전에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기도하며 성경말씀에 의지하는 교회는 이기주의 적인 동기로 행하지 않도록 안전하게 해줍니다.         


1989년 총회의 결의사항 9는 정부가 성경의 적용과 개인의 양심을 침입하는 한 분야에 대해 반대하는 목회자들의 행동에 관한 선언문을 채택했습니다.  “총회는 목회자들이 모든 성경적 수단으로 낙태를 반대하는 운동에 참가하는 것을 인정하며, 모든 성경적이 아닌 행동을 인정하지 않고, 그들이 “태어나지 않은 아기를 살해”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중재 행위에 비폭력적이며 평화스러운 행동으로 참여해도 좋다는 부분까지 개인 목회자들의 재량에 맡긴다.”         


중요한 표현인 “성경적인 수단으로” 와 “중재 행위에 비폭력적이며 평화스러운 행동”은 명백히 개인의 해석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면 시민적 저항에 적절한 모양은 무엇입니까?  좀 더 직접적인 대답이 없을 경우에 하나님의 성회는 성경과 성령의 도움을 받은 개인의 양심이 지침으로 사용되어야만 한다고 선언할 것입니다. 


관심사


원주 감영에 핀 태극기


정부는 허락하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일이라고 선언하신 일들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행할 때에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중의 반응은 다른 사람이 그들의 개인 신앙에 짐을 지우려고 할 때에 보통 부정적 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그들의 확신을 언제나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적 진리에 대하여서는 그리스도를 닮은 모형이어야만 합니다.  모든 인간은 아무리 복음에 반목적 (反目的)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하는) 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그리스도께서 위해서 죽으신 영혼인 것입니다.         


또 다른 관심사는 지나치게 영적인 기독교인은 폭력적인 수단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구약성경의 예를 사용할지도 모르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약속을 시작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나쁜 죄인들을 향하여서는 연민과 이해를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분노와 판단은 자신들의 의로움은 주장하면서 그들의 논설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판단하는 종교적인 위선자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냉담 역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폭력과 대치를 피하기 위해서 어떤 기독교인들은 주위에 산재해 있는 악에 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은밀한 제자는 아마도 결코 제자가 아닐 것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야고보서 4:17).  균형이 열쇠입니다. 기독교인들 은 예수 그리스도의 감독하에서 성경적인 확신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이 위치에 대한 공식적인 기술은 1989년도 제43차 하나님의 성회 총회에서 채택된 낙태와 시민 저항 운동에 대 한 결의안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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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까지 늘 남침례교단 소속의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오순절파 은사주의 교회에 다니던 고등학교 친구들은 우리 교인들을 부드럽게 표현하여 ‘경직된 신자들’이라고 불렀다. 나는 친구의 초대로 그들의 은사 부흥 집회에 참석해 보고서야 그들이 한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다니던 제일침례교회 성도들은 찬송가에 있는 찬송을 부르고, 목사님의 설교를 조용히 경청하며 예배를 드렸다. 예배의 질서를 깨는 것이라고는 겨우 설교 중에 가끔씩 ‘아멘’이라고 하는 말들 뿐이었다.

 

은사주의 교회에서의 경험이 내게 생소한 느낌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상당히 절제된 표현일 것이다.

 

친구의 초청으로 참석했던 그 부흥 집회의 첫 날 밤에, 나는 수많은 방언을 들었다. 절제할 수 없는 웃음(그들은 성령의 웃음이라고 불렀다), 기절, 강렬한 대성통곡, 두통과 암에서 나음을 입는다거나 하나님의 노하심이 몇 개의 미국 도시에 내린다는 예언 등이었다. 그리고 남녀 성도들이 예배당 안을 뛰어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한쪽 구석에서는 한 젊은 남성이 마치 전류가 흐르는 전선을 붙잡은 것처럼 경련을 일으키며 위아래로 펄쩍펄쩍 뛰었다. 내가 앉았던 자리의 몇 줄 뒤에서는 한 여성이 주님을 찬양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춤추는 꼭두각시처럼 보였다. 한번은, 어떤 나이든 여성이 내게 다가와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안수를 받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내가 간절히 소망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 제안을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이런 일을 몇 번 경험한 후에, 은사지속론자인 내 친구는 내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나는 친구에게 불편한 마음을 표현했지만, 사실 그러한 현상들이 진정으로 성령의 역사인지 확실히 모르겠다고 시인했다. 나는 의심이 들기는 했지만, 내가 하나님의 사역을 거역할까봐 두려워서 내 눈으로 본 모든 현상을 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또 다른 질문을 했다. “만일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정말로 방언이 아니라면, 그리고 사람들이 기절하는 현상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확실히 모르겠어. 그리고 내가 현재 은사중지론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무엇이 사람의 몸과 감정을 그렇게 완전히 동요시키는지 궁금하기는 하네.”

 

1990년대 중반 즈음에 토론토와 펜사콜라 같은 장소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오순절파 은사주의자들에게서 나타났다. 많은 현상들이 성령의 역사로 여겨졌다. 거기에서 기적 같은 치료가 일어났고, ‘거룩한 웃음’과 ‘성령의 파도타기’가 있었다. 하늘에서 금가루와 천사의 깃털이 내려온다는 주장도 있었다.

 

논란이 된 그러한 현상은 캘리포니아 레딩에 있는 베델교회와 전세계적으로 다양한 은사주의 교회와 기관들에서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다.

 

영들을 분별하라 

 

이러한 현상들 중에 몇 가지는 명백하게 성경 말씀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현상이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내 친구가 20여 년 전에 “이러한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라고 물었던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이러한 현상이 성령이 진정으로 역사하는 결과의 산물인가, 아니면 절제되지 않은 감정에서 단순히 일어난 일인가, 아니면 자기 암시에 의한 결과인가? 그도 아니면 어떤 사람들이 제안하듯이 사탄의 역사일까?

 

성경 말씀은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기 위하여 영들을 점검하라고 요구한다(요일 4:1).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위협은 그들 진영 밖의 이방 문화가 아니라 그들 내에 있는 거짓 선지자들이었다. 거짓 선지자들은 참 선지자들보다 더 많은 군중을 끌어들였고 더 잘 알려져 있었다.

 

표면적으로, 금송아지 사건은 크고, 소란스럽고, 심지어 축하하는 대규모의 군중들이 있는 진정한 부흥의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것은 생기 있는 예배나 성령에 의해 인도된 예배와는 정반대였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분별의 표지’ 

 

우리보다 앞서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씨름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성령 강림 이후로 모든 부흥 운동은 참과 거짓, 알곡과 쭉정이가 뒤섞여 있는 듯하다.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하여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1730-4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 제1차 대각성 운동이라고 알려진 유명한 부흥 운동이 있었는데,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다. 그때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를 포함한 여러 설교가들의 설교로 미국과 유럽 대륙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회심을 하는 성령의 엄청난 역사가 있었다.

 

많은 이들이 분명하게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지만, 에드워즈와 다른 설교가들은 그 부흥 운동 기간 동안에 성령의 역사를 왜곡하는 여러 문제들이 있었다고 시인했다. 그들이 시인하는 사항들에는 위에서 언급했던 현상과 유사한 급격한 감정적 신체적 징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떤 교회 지도자들은 부흥 집회에서 나타난 과도한 행위를 비판하며 이를 ‘과도한 열정’이라고 일축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사탄의 일로 철저히 거부했다.

 

에드워즈는 ‘성령의 사역을 분별하는 표지들’(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 1741)에서 부흥 운동을 요한일서 4장에 비추어 평가하였다. 그는 그가 ‘불확실한 표지들’이라고 부른 징후들, 즉 진정으로 성령의 사역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부인하기도 어려운 징후들을 조사했다.

 

에드워즈가 제안하는 분별의 표지들은 내 친구와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 제기되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때, 쭉정이에서 알곡을 골라낼 수 있는, 훌륭한 지혜를 제공한다.

 

불확실한 표지들

 

에드워즈는 ‘분별의 표지들’(Distinguishing Marks)의 제1부에서 성령의 역사로 인한 표지가 아닐 수도 있는 현상들에 대하여 몇 가지를 나열한다.

 

1. 몸에 나타나는 결과

기절이나 고함을 치는 등의 감정적이거나 신체적인 반응은 성령에 의한 표지가 아닐 수도 있다. 경련, 비틀거림, 웃음 등 여러 많은 징후들이 첫 번째 대각성 운동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이러한 현상이 개인의 특성일 수도 있고 감정적으로 압박을 받을 때 나타나는 돌발적인 행동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이것이 반드시 성령에 의해 촉발되는 현상은 아닐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성경은 성령의 영향력 하에 몸과 감정에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에 대하여 정확한 공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2. 흥분된 감정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영혼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람을 압도하고 그들의 감정을 고취시킬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감정적인 반응을 공식화하는 일에 대하여 경고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성령의 영향에 의해 영적 경험을 했음에도, 감정적으로 그렇게 격하게 반응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3. 즉각적인 개인적 계시

현대 은사주의자들은 이것을 “형제님, 하나님이 저에게 당신을 위하여 말씀을 주셨습니다”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때로 그 말씀은 성경 말씀일 것이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사탄도 성경을 알고 잘 인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자극에 의한 현상은 성경 말씀이 인용되더라도 항상 신뢰할 수는 없다.

 

에드워즈는 부흥 운동이 항상 지도자들과 참가자들의 판단 오류로 인해 문제가 있었고 사탄의 속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주의를 기울이고 분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확실한 표지들

 

그러면 성령의 역사로 여겨지는 일은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성경의 역사라고 구별할 수 있는 5가지 확실한 기준을 제시하였다.

 

1. 그리스도의 사역을 돕는 사랑이 깊어짐

성령이 사람을 온전히 움직이면 그 사람에게는 예수의 복음에 대한 큰 애정이 솟아난다. 그리스도는 신자에게 최고의 기쁨이 된다. 더 나아가, 성령은 신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게 한다.

 

2. 죄를 제거하고 세상에 속한 것을 끊으려는 열망

성령은 크리스천이 죄를 싫어하고 거룩한 열망이 일어나도록 그를 새로 창조하신다. 세속적인 쾌락을 높이 사는 마음은 비록 그것이 좋은 일이더라도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된다. 

 

3. 하나님 말씀에 대한 사랑과 열망이 깊어짐

에드워즈는 성경 말씀이 죄인들을 그리스도와 거룩한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주어졌기 때문에, 사탄은 사람들 안에 성경 말씀을 사랑하는 열망을 결코 넣어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악마는 거룩한 책인 성경을 향하여 필사적으로 증오심을 보여 왔으며, 성경이 어둠의 왕국을 멸망하게 할 빛임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4. 건전한 교리에 대한 신념이 확고해짐

성령은 성경 말씀에서 가르치지 않는 교리를 신자에게 수용하도록 이끌지 않을 것이다. 성령이 진정으로 역사하시면, 성령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영원성의 실재와 심판날의 확실함을 사람에게 확신시켜 주신다. 이러한 신념은 영적 눈이 열린 사람들에게 단단한 초석이 된다.

 

5.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짐

성령의 참된 역사는 크리스천에게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도록 인도하는 겸손을 심어줄 것이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반드시 이어지게 된다. 에드워즈가 말했듯이, “사랑은 값없이 주신 은혜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모든 탁월함과 자기 의를 포기하게 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적대하고 증오하는 자들과 비교하여 우리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오늘날을 위한 지혜

 

어떤 은사주의자들은 에드워즈가 은사지속주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과장된 표현을 지지한다고도 주장했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그가 유작으로 남긴 ‘사랑과 그 열매’(Charity and Its Fruits)의 고린도전서 13장 설교에서, 은사 중단의 표지들을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부흥 운동에 대한 에드워즈의 통찰에서 은사지속주의자나 은사중지주의자나 모두 똑같이 많은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흥 운동을 제기하는 오늘날의 주장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우리는 에드워즈의 저술로부터 어떤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부흥 운동에 대한 그의 풍성한 저술을 통해서, 우리는 아마도 네 가지 정도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모든 현상이 주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영적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기 바란다. 만일 그것이 말씀에 어긋나 있으면, 거짓된 표지로 여길 필요가 있다.

 

둘째, 모든 영들이 다 거룩한 것은 아니다. 스프로울(R. C. Sproul)이 말하고 있듯이, 거룩의 영은 또한 진리의 영이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된 성경 말씀에 비추어 봄으로써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다. 만일 영적 경험이 성경 말씀을 더 깊이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향한 더 깊은 사랑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성령의 역사에 의한 참된 영적 경험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셋째, 지역 교회와 교회의 설교 사역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게 하는 운동에 대해서는 우리가 의심을 해야 한다. 현대의 부흥 운동은 그 운동을 이끄는 개인과 운동이 일어나는 초교파 모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고의든 아니든, 그러한 경험은 특히 성경적 설교처럼 지역 교회 내에서 평범한 수단을 통해 행해지는 은혜 사역을 경시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운동은 종종 내가 ‘번개 영성’이라고 부르는 일을 조성한다. 이 운동의 지지자들은 특정한 목사가 특정한 장소에서 제공하는 매우 극적인 감정적 경험을 통해서만 성화를 추구하며, 거기에서 영적 번개불에 맞고 즉각적으로 더 성화되기를 원한다. 이 반응은 성경에서 성화를 점진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 사실과는 정반대로 흐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성경은 성화가 하나님의 평범한 은혜를 통하여 일생을 거쳐 천천히 진행된다고 가르친다. 에드워즈는 회심자들에게 개인 숭배를 멀리하고 예수님께 향하며, 부흥 운동 모임에서 떠나 지역 교회로 향하라고 말한다. 예수님 때와 같이 오늘날에도 성령의 진정한 역사에 대해서는 그들의 열매로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마 7:16).

 

그러면 오늘날 내 친구의 질문에 내가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20여 년 전에 내가 본 현상에 대해 나는 여전히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성령과의 친밀한 만남은 삶에 극적인 변화를 동반한다는 에드워즈의 생각에 동의한다. 경직된 신자이든 열정적인 은사주의자이든 영적 경험의 결과가 삶에서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God’s Spirit or Human Hysteria? My Time Among the Charismatics by by Jeff Robinson

번역: 정은심

 

2005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팀 켈러 목사와 존 파이퍼 목사 등이 이끄는 TGC(The Gospel Coalition; 복음연합)의 한국어 사이트(tgckorea.org)가 2018년 11월 오픈되어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주제의 글과 동영상이 매일 새롭게 업로드 되고 있다. TGC코리아는 TGC는 물론 개혁주의 신앙을 전달하는 또 다른 인기 사이트인 Desiring God(존 파이퍼), Ligonier(R.C. 스프로울), 9 Marks(마크 데버), Unlimited Grace(브라이언 채플)의 수준 높은 자료들을 공식적으로 허락받아 한국에 소개하고 있다. 

 

ⓒ TGC코리아(https://tgckorea.org)

나는 최근에 지옥에 관한 교리를 두 번 가르쳤고, 그 두 번을 다 눈물로 끝마쳤다.

 

지금도 두 번째 강의 때 일어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수업이 끝났을 때, 하나님을 오랫동안 섬겨 온 나이가 많은 한 부인이 침울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분은 울면서 자기 어머니에 대해 질문했다. 혹시 현재 지옥에 있지는 않은지 알기를 원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대답하는 상투적인 대답을 했다. 우리는 개인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결코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그분의 어머니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실제로 나는 몰랐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런데 나는 그녀에게 또 다른 말도 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의 어머니가 지옥에 있다면, 그에 대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만일 하나님이 나와 당신을 지옥에 보내신다면,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이 옳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옥 심판은 죄를 지은 우리에게 마땅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 부인은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진지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부둥켜안고 서로의 죄와 지옥의 무게를 느끼며 함께 울었다.

 

지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가 가진 지옥에 대한 견해는 우리가 죄와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깊은 연관이 있다. 지옥에 관해 생각할 때 흔히 저지르는 두 가지 잘못이 있다. 한 가지 잘못은 지옥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옥을 자신과는 생각이 다르고, 정치적인 견해가 다르고, 삶의 방법이 다른 사람들이 가야 할 장소로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복음의 은혜는 물론 우리와 같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무관심을 가져온다.

 

조나난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이런 문제점을 잘 파악했다. 그는 어떤 사람이 “지옥을 인정하면서도 그곳이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장소라고 믿을 때, 오직 나 아닌 타인들만 가게 될 장소라고 확신할 때, 그런 사람은 오히려 지옥을 부정하는 상대에게 강력한 반대 의견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지옥을 믿으면서도 그 장소가 결코 자신들과는 관계없는 곳이라고 여기며 우월감을 느낀다고 한다.  

 

오늘날 계속해서 주장되는 지옥 교리는 대개 이 교리를 반대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신약학자인 데일 알리슨(Dale Allison)은 그가 젊은 시절에 가졌던 지옥 교리에 대한 반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에 관한 소책자를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소책자는 모든 유대인, 무슬림, 힌두교인이 지옥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로 고통을 당한다는 교리를 분명히 가르친다. 그 소책자의 저자는 성경 본문을 인용해서 자신의 주장을 입증했다. 나는 그때 이런 주장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졌다. 나는 그 글을 읽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픈 마음으로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죽은 후에 지옥의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개념은 내가 자유주의 신학을 만나기 오래 전부터 혐오스럽게 다가왔다.”

 

나는 이런 지옥 개념이 혐오스럽다는 견해를 인정한다. 우리는 그와 같은 지옥 개념을 반박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개념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가야 하는 장소로 지옥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옥이 나와 상관없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장소라는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추어 판단할 때 거짓된 것으로 드러난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당신과 같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 누구도 지옥에서 형벌을 받을 수는 없다. 오히려 그들 역시 당신과 똑같다는 이유 때문에 지옥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지옥에 관한 충격적인 진리이다.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진리는 우리도 다른 사람도 모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 때문에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고 선언하는 성경의 말씀은 외적인 기준으로 서로를 비교하고 판단하는 우리의 오만을 깨뜨린다.

 

어떤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지옥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지옥에 가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옥을 피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죄 없는 아들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우리처럼 되셨기 때문이다(고후 5:21).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의 운명이 바뀔 수 있다.

 

어떤 방법으로 지옥을 가르쳐야 하는가?  

 

우리가 지옥에 관한 설교와 교육을 실천할 때,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을 유념해야 한다.

 

1. 사랑의 하나님이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시는 이유를 설명할 때, 다른 사람들이 아닌 우리 자신에게서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시는 하나님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변증하기 위해 역사 속에 악명 높은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사람을 예로 들려는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악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죄악이 우리 속에도 실재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내면에 있는 강력한 증오, 깊게 뿌리박힌 자기중심적 아집, 마음과 뜻과 영혼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순종할 수 없는 전적인 무능을 솔직히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우선적으로 지옥 교리를 적용할 때,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성경의 진리가 예수 믿는 우리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과 그 결과로 우리가 지옥의 실재를 믿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분명히 보고 알게 될 것이다.

 

2. 지옥을 믿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입술로는 부인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옥 형벌을 강하게 믿는다. 하지만 자신들이 믿는 지옥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지옥을 말할 때 진지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자기가 먼저 공적인 대화에서 지옥에 대해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에 관해 설교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지옥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고, 또 영원한 고통 속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싫어한다. 나도 그런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지옥 형벌의 엄중한 무게를 숨기면, 예수님이 죄로 인해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복음의 위대한 가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 결국,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눅 7:47). 

 

3 지옥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복음 선포에 필수적이다

 

우리가 지옥을 우리가 마땅히 가야하는 곳으로 여기지 않고 설교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으로 설교하게 된다.

 

이 둘은 필연적으로 서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느끼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과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놀라움은 늘 함께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옥과 복음이 어우러질 때 나타나는 엄중함과 절박함, 그리고 경외감을 가지고, 그 둘을 함께 설교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도 바울처럼 이렇게 외치게 될 것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Are We Proclaiming a Hell We Don’t Deserve—and a Christ We Do? by Peter Gurry

번역: 김재덕  

 

2005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팀 켈러 목사와 존 파이퍼 목사 등이 이끄는 TGC(The Gospel Coalition; 복음연합)의 한국어 사이트(tgckorea.org)가 지난 11월 오픈되어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주제의 글과 동영상이 매일 새롭게 업로드 되고 있다. TGC코리아는 TGC는 물론 개혁주의 신앙을 전달하는 또 다른 인기 사이트인 Desiring God(존 파이퍼), Ligonier(R.C. 스프로울), 9 Marks(마크 데버), Unlimited Grace(브라이언 채플)의 수준 높은 자료들을 공식적으로 허락받아 한국에 소개하고 있다. 

 

ⓒ TGC코리아(https://tgckorea.org)

[요한복음 18: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얼마 전 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사후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주장의 유력한 근거로 알려진 임사체험(臨死體驗·Near Death Experience)이 사실은 꿈의 일종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과학뉴스 사이트인 라이브 사이언스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유체이탈 체험 연구센터(Out-Of-Body Experience Research Center)’ 연구 결과를 인용, ‘임사체험은 자각몽(自覺夢·Lucid Dreaming)의 일종’이라고 지난 16일 보도했다. 영혼 비슷한 것이 육체를 벗어나(유체이탈) 터널을 통과한 뒤 밝은 빛을 향해 날아가는 자각몽은 스스로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꾸는 꿈으로,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꿈의 내용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으며 현실처럼 생생한 데다 나중에도 또렷이 기억할 수 있다. 이하생략” 

‘사람이 죽으면 사후세계가 있는가, 과연 천국과 지옥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인간의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작년엔가 신문에 딸 이민아 목사를 먼저 보낸 이어령 박사의 기사가 났지만 이어령 박사 또한 이 문제 앞에서 깊이 고뇌하였을 것입니다. 저도 양로원에서 일하면서 늙고 병들어 치매증세를 보이며 쇠약해져가는 노인들을 보면서 과연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참으로 인간에게만 사후세계와 영원의 약속이 주어졌다는 것인가, 우리의 믿음이 사실이요 진실인가 하는 생각이 다시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 곧 물질세계에 속하여 살아가는 영적존재입니다. 영적존재이면서 현실세계에 속하여 살아가기 때문에 현실세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죽음의 경계를 넘어 이 땅, 곧 물질세계의 영역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물질세계에서 죄악 가운데서 살아가는 죄인들에게 영적인 세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죄와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물질세계에 사는 인간들이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는 쉽게 믿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 하십니다. 우리가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고 묻는 도마의 질문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라고,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고 간단히 말씀하지 않으시고 ‘진리’를 넣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 그것이 진리요 사실인가입니다. 진리가 아니라면 길도 생명도 아버지의 집도 모두 허탕이요 거짓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신앙여정도 따지고 보면 진리의 문제요 사실의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 믿음이 사실과 진리가 아니라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요, 부활도 없고, 천국과 지옥도 없고, 일생을 속아 사는 우리가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진리가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진리 위에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싸움은 진리 싸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와 눈에 보이는 이 현실세계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세상적 판단의 손가락질과 과학과 지식의 안개 속에서 증거도 없고 지식도 없는 죽음의 너머를 믿고 나아가는 믿음의 씨름을 일평생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 하였는지요? 평생 예수 믿다가도 막상 죽음 앞에서는 “죽어봐야 알지”라는 불신앙으로 무너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리의 편에 서는 것은 그러나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오직 택한 자만이 진리의 편에 설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낳으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요1:13). 빌라도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재판과정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인도 위험인물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대인들이 민란을 일으킬까봐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들었으면서도, “진리가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물었으면서도,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진리 편에 서지 못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시고 천국과 지옥이 참으로 있다는 것을 믿었다면 빌라도는 민란이 일어나는 한이 있어도, 설사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진리 편에 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현실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이 기록을 보면서 이미 예정된 바에 따라 빌라도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과 진리에 속한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는 사실에 다시금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만세 전에 나를 택하시고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를 새롭게 할 뿐입니다. 내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를 믿을 수 있다는 것, 약속을 받아 영원한 생명, 구원을 얻었다는 것, 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서 내가 진리에 속하였다는 것,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이요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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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의 구성과 요약

 시편의 구성

 

시편의 구성은 모세오경의 구성과 비슷한 유형을 갖추었습니다.

그 주제와 내용에 따라 총 다섯 권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러한 구분은 모세오경에 나타난 각 책의 주제들과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제1권은 창세기에 대응하며, 주로 나타나는 내용은 인간에 대한 것.

제2권은 출애굽기에 대응하며, 주요 내용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것.

제3권은 레위기에 대응하며, 주요 내용은 성전에 관한 것.

제4권은 민수기에 대응하며, 주요 내용은 방황과 불안에 관한 것.

제5권은 신명기에 대응하며, 주요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것

  

구분

제1권

(1~41편)

제2권

(42~72편)

제3권

(73~89편)

제4권

(90~106편)

제5권

(107~150편)

저자

거의 다윗

다윗,고라

아삽,고라

미상

다윗

편집자

다윗

히스기야

요시야

에스라

느헤미야

편집

시기

B.C.

1020~970

B.C.

970~610

B.C.

970~610

B.C.

430년까지

B.C.

430년까지

시 편 수

41편

31편

17편

17편

44편

내용요약

예배의 노래

국가적

중대사 찬양

국가적

중대사 찬양

찬양의 축가

찬양의 축가

오경

관련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관련

제목

인간과 창조

구속받음

예배와 성소

광야의 방랑

성경과 찬양

중심

사상

타락과 회복

구속

거룩(성소)

땅(방황)

하나님의

말씀


 

 

시편의 요약

 

시편의 배경

유다인들이 처음에 시편을 부른 이름은 ‘기도(트필롯)’였다. 그러다 후대에 가서는 ‘찬양(트힐림)’ 또는 ‘찬양의 책’이라 불렀다. 구약성서에서 찬양하라는 동사(hll)의 2/3 이상이 시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아무튼 기도와 찬양은 시편의 두 측면이다. 그리스어 성서는 시편이 “현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그리스어 psallo)” 것이라 하여 ‘프살모이(psalmoi, 찬미가)’라 불렀다. 시편의 영어 이름(psalms)도 여기서 연유하였다. 우리 말 성서 이름 ‘시편’은 시모음집이라는 뜻의 중국어 성서 이름 ‘시편(詩篇)’을 딴 것이다.


저자

시편 이외에도 성서에 나오는 노래는 적지 않아요. 이런 노래는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애송되었기 때문에, 원작가를 밝히기가 쉽지 않아요. 시편에도 첫머리에 다윗, 아삽, 코라의 후손, 모세 등의 작품이라고 나와 있으나, 이들의 작품으로 확인할 수는 없어요. 시편은 사실상 하나님 백성 전체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다만, 다윗은 음악을 즐기고 시와 노래로 하나님께 찬양과 기도를 드린 대표적인 인물이기에, 자연스럽게 시편의 대부분을 그의 작품으로 여기게 된 것이죠.

 

저작 시기

시편은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되었어요. 아마도 대부분은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의 황금시기인 기원전 10세기와 가장 어려웠던 시대인 바빌론 포로기 전후에 생겨났을 거에요. 이런저런 시들이 한데 모아져 현재와 비슷한 꼴로 형성된 것은 대략 기원전 2세기경으로 여겨져요. 그때 모세오경을 모방해서 시편을 다섯 권(시편 1-41; 42-72; 73-89; 90-106; 107-150)으로 나누었을 거에요.

신약성서는 구약성서를 가리켜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책과 시편들”(루가 24,44)이라 했어요. 즉 시편은 그 때까지도 완결되지 못한 성문서를 대표하는 성서로 꼽힌 것이지요.


저작 배경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렸고 어려운 처지에서는 구원을 탄원해 왔기 때문이죠. 비단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하나님 백성 전체가 드리는 전례에서도 시편은 중요한다. 시편을 한마디로 규정하면 ‘응답의 성서’라고 할 수 있어요. 오경 전체가 하느님이 하신 큰일을 전하고 예언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다면, 시편은 하나님의 그 일과 말씀에 대한 하나님 백성의 응답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어요. 하나님이 하신 큰일들을 체험한 이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고, 당신 백성을 지켜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아니 드릴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렇기에 주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며 사는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우리와 함께 해주시며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을 “나의 바위, 나의 구원자”(시편 19,14)라 고백해 왔던 것입니다.


시편을 읽는 방법

시편은 그 자체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서, 나아가 신약성서를 포괄하는 성서 전체의 맥락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시편 한 구절, 또는 한 편을 이해하려면 시편 전체의 흐름과 함께 성서가 대변하는 이스라엘의 신앙 맥락과 연관시켜 보아야 합니다.

가령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야훼는 나의 목자”(시편 23,1)란 구절만 보더라도, ‘야훼’라는 하나님 이름이 성서에서 드러내는 깊은 뜻과 그에 대한 다양한 신앙고백이 갈무리되어 있습니다. 또 ‘목자’라는 말 속에는 자신이 양이라는 고백과 함께, 목축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의 생활양식은 물론 거기서 비롯된 목자와 양의 실질적 관계, 이 관계를 유비시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간의 관계를 가리켰던 다른 성서 표현 등이 다 담겨 있지요.


시편의 분류와 감상

시편은 그 형식과 내용에 따라 크게 찬양시, 탄원시, 감사시, 그밖의 시로 나뉩니다. 여기서도 그렇게 몇 가지로 나눠 함께 감상해 보겠습니다.


1. 찬양시

유일하신 절대자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이 믿고 따르는 하나님을 기리고 찬양하는 시편들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권유로 시작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를 나열한 다음,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짧은 축복문 및 기도문으로 마무리하는 꼴로 짜여 있습니다. 대개 시편 8; 19; 29; 33; 67; 95-100; 103-106; 111; 113-114; 134; 136; 145-150편 등을 찬양시로 봅니다. 일례로 시편 8편을 감상하겠습니다.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시편 저자는 왜 하나님을 찬양합니까?(8,3-6) 시의 첫머리와 끝머리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이름을 기립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너무나 크고 고맙기 때문입니다. 이 시에서 중심이 되는 하느님의 업적은 창조사업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나타나는 창조 업적이 시인의 입을 빌어 다시금 묘사됩니다. 도대체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당신 창조의 중심에 놓으시고 뭇 만물을 돌보게 하셨는지, 시인은 다만 감격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본래부터 그럴 만한 자격이나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약성서의 히브리서 저자는 이 시편을 빌어 예수님을 노래합니다(히브 2,6-9). 이 시편에 나오는 인간상이 예수님 안에서 드러난다고 보았던 것이죠. 여하튼 우리는 이 시편을 노래하면서 새삼 자연 속에 있는 인간의 위치와 사명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가득이나 생태계의 위기를 느끼는 이 시대에, 이 짧은 시편의 울림은 크게 번져 갑니다. “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노래하면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시편 22편)


2. 탄원시

박해를 받거나 죽음이나 질병 같은 심각한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며 구원해 주실 것을 탄원하는 내용이지요. 시인은 먼저 자신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뒤 그 고통을 해결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을 고백합니다. 이어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들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하나님께 구원을 간청합니다. 이러한 탄원은 한 개인이 드리기도 했고, 전쟁에서 패배할 경우와 예루살렘의 파괴 같은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집단적으로 드리기도 했습니다. 이 유형이 시편에서 가장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탄원시는 시편 3; 5; 22; 25; 28; 44; 60; 74; 78-80; 83; 85; 90; 94; 102; 123; 137편 등입니다. 한 예로 시편 22편을 읽어 보겠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시인은 하나님을 ‘나의 무엇’이라고 부릅니까?(22,19)  이 시편은 울부짖음으로 시작합니다. 그 울부짖는 소리가 중반 이후까지 이어지다가, 구원자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마감됩니다. 지금 “뼈 마디마디 드러나 셀 수 있는” 처지에 빠진 이 시인이 겪고 있는 곤경과 어려움은 몹시 심각합니다. 그런 처지에서도 시인은 끝끝내 하나을 믿고 의지하며 자신의 구원을 맡겨 드립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마태 27,46)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감사시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행위의 위대함을 노래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내용입니다. 시작은 찬양시와 비슷한데, 본문에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나열하면서 하느님께 영원히 찬미를 드리겠다는 약속과 지속적인 신뢰심을 표현한 다음, 끊임없이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함을 공동체에 권유하면서 미래지향적으로 끝맺고 있어요. 감사시에도 부분적으로는 탄원과 찬양의 내용이 들어 있어요. 사실 이 세 가지는 서로 어울려 다니거든요. 대표적인 감사시인 시편 18; 30; 32; 34; 40; 66; 92; 116; 118; 124; 129; 138편 등에서 18편을 살펴보겠습니다. 야훼여, 당신을 사랑합니다(시편 18편)

* 시인이 하나님을 “나의 무엇”이라고 부른 열한 가지 표현을 찾아보십시오(18,1-2. 28).

시인은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이 베푸신 구원행위를 나열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원수의 손에서”(3,17절), “거센 물 속에서 건져 주시고”(16절), “어깨를 펴게 해 주시고”(19절), “상을 내리시고”(20절), “붙들어 주시고”(26절), “적대자들 위에 높여 주셨습니다”(48절). 그렇기에 시인은 “그 고마움을 어찌 만민에게 알리지 아니하고 당신의 이름을 노래하지 않으리이까?”(49절)하며 토로합니다.

시인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하늘을 밀어 제치시는”(9절) 자연의 주재자이시고, “옳게 살았다고 상을 내리시는”(20절)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시인은 우리가 의지할 대상은 인간이나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뿐이시며(31절), “한마음으로 당신을 위하면 당신께서도 한마음으로 위해 주신다”(25절)고 체험에서 우러나온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사무엘 하권 22장에서 다윗의 노래로 나올 만큼 오래 된 노래입니다.

복되어라,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시편 1편)


4. 그 밖의 시편들

 

(1) 지혜시·교훈시

시의 주요 내용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르게 사는 길을 일러주는 시편들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 곧 토라와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히 지키면 주님의 굄을 받지만, 그 말씀을 어기고 듣지 않으면 멸망에 이른다는 교훈을 심어 주지요. 대표적인 시편은 1; 9-10; 14; 19; 37; 73; 112; 119; 127-128; 133편 등이지요.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시편 1편)

* 시인은 의인을 무엇에 비유합니까?(1,3)

1편은 지혜시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시편 전체의 서시(序詩)이기도 해요. 비록 여섯 줄밖에 안 되는 짧은 시이지만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지요. 이 시는 행복으로 가는 길과 멸망에 이르는 길을 제시해요.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길 바라고 그것을 위해 온갖 애를 다 쓰지만, 누구나 행복하진 않죠. 또 참된 행복이 무언지도 아리송하구요.

1편이 보여주는 행복한 사람은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2절)입니다. 여기서 법은 토라(율법)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전체, 곧 성서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지요. 되새기는 일 역시 머리 속으로 궁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면서 체험하고 고백하는 일이죠.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그 말씀에 젖어 사는 이들은 날마다 도처에서 자신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하며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살게 되죠. 그런 사람은 늘 싱싱하게 살며 제 철 따라 열매를 맺게 되어요. 반면에 아무리 부와 명예를 누려도 악인의 길은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이”(1,4) 아무 소득 없는 멸망의 길이라고 일러 주어요. 마치 이 시편은 격렬한 일생을 마치고 인생의 황혼에서 던져주는 한 선배 그리스도인의 충고이자 유언 같지 않으셔요?


(2) 왕도시(王道詩)

이스라엘의 왕이 지녀야 할 덕과 해야 할 바를 알려 주며, 아울러 당신이 세우신 그 왕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주는 내용을 담았지요. 이스라엘의 왕은 하느님께서 ‘기름부은 자’였는데, 포로기 이후에는 ‘기름부음 받은 자’가 다시 올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왕, 곧 메시야로 이해되었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 시편들은 메시야 시편이라고도 불려요. 주요 시편은 2; 20-21; 45; 72; 89; 101; 110; 132; 144, 1-11 편 등이지요. 너는 내 아들(시편 2편)

성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상의 통치자는 절대주권을 갖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버리려는 헛일을 꾸미는가 묻습니다(1절).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그분의 가르침을 좇을 때만이 통치자의 권한은 정당성을 갖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은 하나님의 가소로움과 분노를 다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 시편은 사도행전 4,25-26과 13,33에 인용되었죠.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메시야이신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밝힙니다.

 

이외에도 시편은 하나님의 현존장소인 예루살렘을 기리는 시온시(46; 48; 76; 84; 87; 122편),순례시(121편), 전례시 등으로 나뉘어 진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냉장고에 코끼리를 집어넣는 법”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물리학과 학생은 냉장고의 부피가 코끼리의 부피보다 작기 때문에 냉장고에 코끼리를 집어넣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기계공학과 학생은 냉장고를 코끼리보다 큰 것으로 특별제작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식품가공학과 학생은 코끼리를 토막 내어서 조림가공을 해서 부피를 최소화한 다음 냉장고에 넣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육사생도는 냉장고 앞에 코끼리를 세워놓고 명령합니다. “들어 갓!” 

부자청년(또는 부자관원)이 영생을 얻고자 하나 재물 때문에 주님을 따르지 못 하고 근심하며 돌아가는 이야기는 마태복음 19장, 마가복음 10장, 그리고 누가복음 1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자청년이 돌아간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제자들이 놀라서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이 깜짝 놀랐던 것처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또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이 각박한 세상을 살면서 돈, 재물이 없이 사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돈 없는 것, 가난한 것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고 저주와도 같은 것입니다. 돈 때문에 도적질하고 빼앗고 다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돈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고 돈 가지고 안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돈은 말도 히죽 웃게 만들고 죽은 자도 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3세기 때 중동지역과 이집트에 복음이 전해지고 기독교가 흥왕할 때 (7세기에 이슬람이 생기기 전까지 중동지방은 기독교 지역이었습니다) 안토니인지 혹은 안토니우스(Anthony, Antonius)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엄청난 재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젊은 시절 바로 이 말씀을 듣고 나서 고민을 했습니다. 결국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옷 한 벌만 가지고 사막, 광야에서 수도하였습니다. 친구들이 1년에 두 차례씩 음식을 갖다 주었습니다. 음식을 소금과 함께 먹고 포도주도 안 마시고 물만 마셨으며 1년에 한 번 부활절을 제외하고는 머리를 깎거나 빗지도 않았고 물론 목욕을 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기둥에 올라가서 수도하여 ‘기둥성자’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버리고 수도를 하였습니다. 가난한 성자들, 맨발의 성자들... 이러한 신앙생활의 행태가 나중 유럽에서 베네딕트 수도원이라든지, 프란시스 수도원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모든 재산을 버리고 수도를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16절을 보면 이 사람이 주께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사람의 관심은 예수님이 아니라 영생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선생님이여.”라고 부르면서 영생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또 이렇게 묻습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아니 영생이 무슨 선한 일과 맞바꾸는 상품입니까? 선한 일을 해서 영생을 얻겠다는 것은 돈을 주고 사겠다는 것과 똑같은 것 아닙니까? 그리고 죄인은 선한 일을 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사과나무에서 무엇이 열립니까? 사과가 열립니다. 다른 것이 열릴 수 없습니다. 죄인에게서 무엇이 납니까? 죄가 납니다. 다른 것이 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청년에게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청년은 대답합니다. “이 모든 것을 제가 지켰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오해하기 쉽습니다. “아, 주님께서도 율법을,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라고 하셨구나.” 그러나 이것은 잘못 생각입니다. 지금 이 청년은 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묻습니까? 이 청년은 지금 가슴이 허전한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양심과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사람의 속을 다 아십니다. 이 청년이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온전한 것이 아님을,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기만 해도 살인”이라 한 것같이 악한 인간이 계명을 지킨다 해도 그것은 그 악한 본성을 덮는 가식적 행위일 뿐이라는 것을, 인간은 다 악하다는 것을, 계명으로 고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다시금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모든 소유를 버리고 나를 따르라.” 

그렇습니다. 영생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바로 생명입니다.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것입니다. 온전하려면, 영생을 원한다면 생명 되신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생명 되신 주님을 따르는 것이 곧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네가 가진 재물을,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부자청년의 비극은 그것이었습니다. 등에 진 재물을 내려놓지 못 해 낙타가 된 것입니다. 그 재물, 그 짐을 내려놓고 영생이신 주님을 따르면 될 것을...... 

그 부자청년에게 말씀하셨던 주님은 지금 우리를 향해서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생명의 주로 믿느냐? 내가 너에게 생명을 주려고 온 하나님인 것을 믿느냐?” 
이 물음에 당신은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주여, 믿습니다. 주님은 이 죄인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고백이라면 당신은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내려놓아야 한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결코 세상 것을 내려놓지 못 하는 낙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죄인이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 되신 주님을 따르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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