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저항 운동 

하나님의 성회는 하나님의 계명에 도덕적으로 저촉되는 시민 저항 운동에 대하여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 


원주 감영에 핀 태극기


        성경은 믿는 자에게 가르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로마서 13:1,2).  그 명령 위에 그리고 그것에 대하는 말씀은 민간 권세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명했을 때 말한 성령의 감동된 제자들의 응답이었 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사도행전 4:20).         


기독교인은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14:15).  민간 정부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명하신 것들을 하는 것을 금지 할 때에, 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들을 하라고 명할 때에, 우리는 정부에 대하여 평화스럽게 저항하는 데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 배경을 가집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시민적 저항에 대하여 성경으로 보증하는 경우와 불법적 항의를 하기 위하여 이기적으로 정당화시키는 경우를 주의 깊게 구별해야만 합니다.  많은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가 시민적 저항의 행동이 있기 전에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기도하며 성경말씀에 의지하는 교회는 이기주의 적인 동기로 행하지 않도록 안전하게 해줍니다.         


1989년 총회의 결의사항 9는 정부가 성경의 적용과 개인의 양심을 침입하는 한 분야에 대해 반대하는 목회자들의 행동에 관한 선언문을 채택했습니다.  “총회는 목회자들이 모든 성경적 수단으로 낙태를 반대하는 운동에 참가하는 것을 인정하며, 모든 성경적이 아닌 행동을 인정하지 않고, 그들이 “태어나지 않은 아기를 살해”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중재 행위에 비폭력적이며 평화스러운 행동으로 참여해도 좋다는 부분까지 개인 목회자들의 재량에 맡긴다.”         


중요한 표현인 “성경적인 수단으로” 와 “중재 행위에 비폭력적이며 평화스러운 행동”은 명백히 개인의 해석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면 시민적 저항에 적절한 모양은 무엇입니까?  좀 더 직접적인 대답이 없을 경우에 하나님의 성회는 성경과 성령의 도움을 받은 개인의 양심이 지침으로 사용되어야만 한다고 선언할 것입니다. 


관심사


원주 감영에 핀 태극기


정부는 허락하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일이라고 선언하신 일들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행할 때에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중의 반응은 다른 사람이 그들의 개인 신앙에 짐을 지우려고 할 때에 보통 부정적 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그들의 확신을 언제나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적 진리에 대하여서는 그리스도를 닮은 모형이어야만 합니다.  모든 인간은 아무리 복음에 반목적 (反目的)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하는) 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그리스도께서 위해서 죽으신 영혼인 것입니다.         


또 다른 관심사는 지나치게 영적인 기독교인은 폭력적인 수단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구약성경의 예를 사용할지도 모르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약속을 시작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나쁜 죄인들을 향하여서는 연민과 이해를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분노와 판단은 자신들의 의로움은 주장하면서 그들의 논설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판단하는 종교적인 위선자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냉담 역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폭력과 대치를 피하기 위해서 어떤 기독교인들은 주위에 산재해 있는 악에 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은밀한 제자는 아마도 결코 제자가 아닐 것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야고보서 4:17).  균형이 열쇠입니다. 기독교인들 은 예수 그리스도의 감독하에서 성경적인 확신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이 위치에 대한 공식적인 기술은 1989년도 제43차 하나님의 성회 총회에서 채택된 낙태와 시민 저항 운동에 대 한 결의안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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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까지 늘 남침례교단 소속의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오순절파 은사주의 교회에 다니던 고등학교 친구들은 우리 교인들을 부드럽게 표현하여 ‘경직된 신자들’이라고 불렀다. 나는 친구의 초대로 그들의 은사 부흥 집회에 참석해 보고서야 그들이 한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다니던 제일침례교회 성도들은 찬송가에 있는 찬송을 부르고, 목사님의 설교를 조용히 경청하며 예배를 드렸다. 예배의 질서를 깨는 것이라고는 겨우 설교 중에 가끔씩 ‘아멘’이라고 하는 말들 뿐이었다.

 

은사주의 교회에서의 경험이 내게 생소한 느낌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상당히 절제된 표현일 것이다.

 

친구의 초청으로 참석했던 그 부흥 집회의 첫 날 밤에, 나는 수많은 방언을 들었다. 절제할 수 없는 웃음(그들은 성령의 웃음이라고 불렀다), 기절, 강렬한 대성통곡, 두통과 암에서 나음을 입는다거나 하나님의 노하심이 몇 개의 미국 도시에 내린다는 예언 등이었다. 그리고 남녀 성도들이 예배당 안을 뛰어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한쪽 구석에서는 한 젊은 남성이 마치 전류가 흐르는 전선을 붙잡은 것처럼 경련을 일으키며 위아래로 펄쩍펄쩍 뛰었다. 내가 앉았던 자리의 몇 줄 뒤에서는 한 여성이 주님을 찬양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춤추는 꼭두각시처럼 보였다. 한번은, 어떤 나이든 여성이 내게 다가와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안수를 받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내가 간절히 소망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 제안을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이런 일을 몇 번 경험한 후에, 은사지속론자인 내 친구는 내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나는 친구에게 불편한 마음을 표현했지만, 사실 그러한 현상들이 진정으로 성령의 역사인지 확실히 모르겠다고 시인했다. 나는 의심이 들기는 했지만, 내가 하나님의 사역을 거역할까봐 두려워서 내 눈으로 본 모든 현상을 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또 다른 질문을 했다. “만일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정말로 방언이 아니라면, 그리고 사람들이 기절하는 현상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확실히 모르겠어. 그리고 내가 현재 은사중지론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무엇이 사람의 몸과 감정을 그렇게 완전히 동요시키는지 궁금하기는 하네.”

 

1990년대 중반 즈음에 토론토와 펜사콜라 같은 장소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오순절파 은사주의자들에게서 나타났다. 많은 현상들이 성령의 역사로 여겨졌다. 거기에서 기적 같은 치료가 일어났고, ‘거룩한 웃음’과 ‘성령의 파도타기’가 있었다. 하늘에서 금가루와 천사의 깃털이 내려온다는 주장도 있었다.

 

논란이 된 그러한 현상은 캘리포니아 레딩에 있는 베델교회와 전세계적으로 다양한 은사주의 교회와 기관들에서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다.

 

영들을 분별하라 

 

이러한 현상들 중에 몇 가지는 명백하게 성경 말씀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현상이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내 친구가 20여 년 전에 “이러한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라고 물었던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이러한 현상이 성령이 진정으로 역사하는 결과의 산물인가, 아니면 절제되지 않은 감정에서 단순히 일어난 일인가, 아니면 자기 암시에 의한 결과인가? 그도 아니면 어떤 사람들이 제안하듯이 사탄의 역사일까?

 

성경 말씀은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기 위하여 영들을 점검하라고 요구한다(요일 4:1).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위협은 그들 진영 밖의 이방 문화가 아니라 그들 내에 있는 거짓 선지자들이었다. 거짓 선지자들은 참 선지자들보다 더 많은 군중을 끌어들였고 더 잘 알려져 있었다.

 

표면적으로, 금송아지 사건은 크고, 소란스럽고, 심지어 축하하는 대규모의 군중들이 있는 진정한 부흥의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것은 생기 있는 예배나 성령에 의해 인도된 예배와는 정반대였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분별의 표지’ 

 

우리보다 앞서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씨름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성령 강림 이후로 모든 부흥 운동은 참과 거짓, 알곡과 쭉정이가 뒤섞여 있는 듯하다.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하여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1730-4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 제1차 대각성 운동이라고 알려진 유명한 부흥 운동이 있었는데,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다. 그때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를 포함한 여러 설교가들의 설교로 미국과 유럽 대륙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회심을 하는 성령의 엄청난 역사가 있었다.

 

많은 이들이 분명하게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지만, 에드워즈와 다른 설교가들은 그 부흥 운동 기간 동안에 성령의 역사를 왜곡하는 여러 문제들이 있었다고 시인했다. 그들이 시인하는 사항들에는 위에서 언급했던 현상과 유사한 급격한 감정적 신체적 징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떤 교회 지도자들은 부흥 집회에서 나타난 과도한 행위를 비판하며 이를 ‘과도한 열정’이라고 일축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사탄의 일로 철저히 거부했다.

 

에드워즈는 ‘성령의 사역을 분별하는 표지들’(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 1741)에서 부흥 운동을 요한일서 4장에 비추어 평가하였다. 그는 그가 ‘불확실한 표지들’이라고 부른 징후들, 즉 진정으로 성령의 사역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부인하기도 어려운 징후들을 조사했다.

 

에드워즈가 제안하는 분별의 표지들은 내 친구와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 제기되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때, 쭉정이에서 알곡을 골라낼 수 있는, 훌륭한 지혜를 제공한다.

 

불확실한 표지들

 

에드워즈는 ‘분별의 표지들’(Distinguishing Marks)의 제1부에서 성령의 역사로 인한 표지가 아닐 수도 있는 현상들에 대하여 몇 가지를 나열한다.

 

1. 몸에 나타나는 결과

기절이나 고함을 치는 등의 감정적이거나 신체적인 반응은 성령에 의한 표지가 아닐 수도 있다. 경련, 비틀거림, 웃음 등 여러 많은 징후들이 첫 번째 대각성 운동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이러한 현상이 개인의 특성일 수도 있고 감정적으로 압박을 받을 때 나타나는 돌발적인 행동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이것이 반드시 성령에 의해 촉발되는 현상은 아닐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성경은 성령의 영향력 하에 몸과 감정에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에 대하여 정확한 공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2. 흥분된 감정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영혼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람을 압도하고 그들의 감정을 고취시킬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감정적인 반응을 공식화하는 일에 대하여 경고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성령의 영향에 의해 영적 경험을 했음에도, 감정적으로 그렇게 격하게 반응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3. 즉각적인 개인적 계시

현대 은사주의자들은 이것을 “형제님, 하나님이 저에게 당신을 위하여 말씀을 주셨습니다”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때로 그 말씀은 성경 말씀일 것이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사탄도 성경을 알고 잘 인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자극에 의한 현상은 성경 말씀이 인용되더라도 항상 신뢰할 수는 없다.

 

에드워즈는 부흥 운동이 항상 지도자들과 참가자들의 판단 오류로 인해 문제가 있었고 사탄의 속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주의를 기울이고 분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확실한 표지들

 

그러면 성령의 역사로 여겨지는 일은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성경의 역사라고 구별할 수 있는 5가지 확실한 기준을 제시하였다.

 

1. 그리스도의 사역을 돕는 사랑이 깊어짐

성령이 사람을 온전히 움직이면 그 사람에게는 예수의 복음에 대한 큰 애정이 솟아난다. 그리스도는 신자에게 최고의 기쁨이 된다. 더 나아가, 성령은 신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게 한다.

 

2. 죄를 제거하고 세상에 속한 것을 끊으려는 열망

성령은 크리스천이 죄를 싫어하고 거룩한 열망이 일어나도록 그를 새로 창조하신다. 세속적인 쾌락을 높이 사는 마음은 비록 그것이 좋은 일이더라도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된다. 

 

3. 하나님 말씀에 대한 사랑과 열망이 깊어짐

에드워즈는 성경 말씀이 죄인들을 그리스도와 거룩한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주어졌기 때문에, 사탄은 사람들 안에 성경 말씀을 사랑하는 열망을 결코 넣어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악마는 거룩한 책인 성경을 향하여 필사적으로 증오심을 보여 왔으며, 성경이 어둠의 왕국을 멸망하게 할 빛임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4. 건전한 교리에 대한 신념이 확고해짐

성령은 성경 말씀에서 가르치지 않는 교리를 신자에게 수용하도록 이끌지 않을 것이다. 성령이 진정으로 역사하시면, 성령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영원성의 실재와 심판날의 확실함을 사람에게 확신시켜 주신다. 이러한 신념은 영적 눈이 열린 사람들에게 단단한 초석이 된다.

 

5.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짐

성령의 참된 역사는 크리스천에게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도록 인도하는 겸손을 심어줄 것이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반드시 이어지게 된다. 에드워즈가 말했듯이, “사랑은 값없이 주신 은혜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모든 탁월함과 자기 의를 포기하게 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적대하고 증오하는 자들과 비교하여 우리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오늘날을 위한 지혜

 

어떤 은사주의자들은 에드워즈가 은사지속주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과장된 표현을 지지한다고도 주장했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그가 유작으로 남긴 ‘사랑과 그 열매’(Charity and Its Fruits)의 고린도전서 13장 설교에서, 은사 중단의 표지들을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부흥 운동에 대한 에드워즈의 통찰에서 은사지속주의자나 은사중지주의자나 모두 똑같이 많은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흥 운동을 제기하는 오늘날의 주장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우리는 에드워즈의 저술로부터 어떤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부흥 운동에 대한 그의 풍성한 저술을 통해서, 우리는 아마도 네 가지 정도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모든 현상이 주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영적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기 바란다. 만일 그것이 말씀에 어긋나 있으면, 거짓된 표지로 여길 필요가 있다.

 

둘째, 모든 영들이 다 거룩한 것은 아니다. 스프로울(R. C. Sproul)이 말하고 있듯이, 거룩의 영은 또한 진리의 영이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된 성경 말씀에 비추어 봄으로써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다. 만일 영적 경험이 성경 말씀을 더 깊이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향한 더 깊은 사랑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성령의 역사에 의한 참된 영적 경험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셋째, 지역 교회와 교회의 설교 사역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게 하는 운동에 대해서는 우리가 의심을 해야 한다. 현대의 부흥 운동은 그 운동을 이끄는 개인과 운동이 일어나는 초교파 모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고의든 아니든, 그러한 경험은 특히 성경적 설교처럼 지역 교회 내에서 평범한 수단을 통해 행해지는 은혜 사역을 경시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운동은 종종 내가 ‘번개 영성’이라고 부르는 일을 조성한다. 이 운동의 지지자들은 특정한 목사가 특정한 장소에서 제공하는 매우 극적인 감정적 경험을 통해서만 성화를 추구하며, 거기에서 영적 번개불에 맞고 즉각적으로 더 성화되기를 원한다. 이 반응은 성경에서 성화를 점진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 사실과는 정반대로 흐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성경은 성화가 하나님의 평범한 은혜를 통하여 일생을 거쳐 천천히 진행된다고 가르친다. 에드워즈는 회심자들에게 개인 숭배를 멀리하고 예수님께 향하며, 부흥 운동 모임에서 떠나 지역 교회로 향하라고 말한다. 예수님 때와 같이 오늘날에도 성령의 진정한 역사에 대해서는 그들의 열매로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마 7:16).

 

그러면 오늘날 내 친구의 질문에 내가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20여 년 전에 내가 본 현상에 대해 나는 여전히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성령과의 친밀한 만남은 삶에 극적인 변화를 동반한다는 에드워즈의 생각에 동의한다. 경직된 신자이든 열정적인 은사주의자이든 영적 경험의 결과가 삶에서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God’s Spirit or Human Hysteria? My Time Among the Charismatics by by Jeff Robinson

번역: 정은심

 

2005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팀 켈러 목사와 존 파이퍼 목사 등이 이끄는 TGC(The Gospel Coalition; 복음연합)의 한국어 사이트(tgckorea.org)가 2018년 11월 오픈되어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주제의 글과 동영상이 매일 새롭게 업로드 되고 있다. TGC코리아는 TGC는 물론 개혁주의 신앙을 전달하는 또 다른 인기 사이트인 Desiring God(존 파이퍼), Ligonier(R.C. 스프로울), 9 Marks(마크 데버), Unlimited Grace(브라이언 채플)의 수준 높은 자료들을 공식적으로 허락받아 한국에 소개하고 있다. 

 

ⓒ TGC코리아(https://tgckorea.org)

나는 최근에 지옥에 관한 교리를 두 번 가르쳤고, 그 두 번을 다 눈물로 끝마쳤다.

 

지금도 두 번째 강의 때 일어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수업이 끝났을 때, 하나님을 오랫동안 섬겨 온 나이가 많은 한 부인이 침울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분은 울면서 자기 어머니에 대해 질문했다. 혹시 현재 지옥에 있지는 않은지 알기를 원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대답하는 상투적인 대답을 했다. 우리는 개인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결코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그분의 어머니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실제로 나는 몰랐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런데 나는 그녀에게 또 다른 말도 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의 어머니가 지옥에 있다면, 그에 대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만일 하나님이 나와 당신을 지옥에 보내신다면,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이 옳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옥 심판은 죄를 지은 우리에게 마땅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 부인은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진지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부둥켜안고 서로의 죄와 지옥의 무게를 느끼며 함께 울었다.

 

지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가 가진 지옥에 대한 견해는 우리가 죄와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깊은 연관이 있다. 지옥에 관해 생각할 때 흔히 저지르는 두 가지 잘못이 있다. 한 가지 잘못은 지옥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옥을 자신과는 생각이 다르고, 정치적인 견해가 다르고, 삶의 방법이 다른 사람들이 가야 할 장소로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복음의 은혜는 물론 우리와 같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무관심을 가져온다.

 

조나난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이런 문제점을 잘 파악했다. 그는 어떤 사람이 “지옥을 인정하면서도 그곳이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장소라고 믿을 때, 오직 나 아닌 타인들만 가게 될 장소라고 확신할 때, 그런 사람은 오히려 지옥을 부정하는 상대에게 강력한 반대 의견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지옥을 믿으면서도 그 장소가 결코 자신들과는 관계없는 곳이라고 여기며 우월감을 느낀다고 한다.  

 

오늘날 계속해서 주장되는 지옥 교리는 대개 이 교리를 반대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신약학자인 데일 알리슨(Dale Allison)은 그가 젊은 시절에 가졌던 지옥 교리에 대한 반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에 관한 소책자를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소책자는 모든 유대인, 무슬림, 힌두교인이 지옥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로 고통을 당한다는 교리를 분명히 가르친다. 그 소책자의 저자는 성경 본문을 인용해서 자신의 주장을 입증했다. 나는 그때 이런 주장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졌다. 나는 그 글을 읽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픈 마음으로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죽은 후에 지옥의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개념은 내가 자유주의 신학을 만나기 오래 전부터 혐오스럽게 다가왔다.”

 

나는 이런 지옥 개념이 혐오스럽다는 견해를 인정한다. 우리는 그와 같은 지옥 개념을 반박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개념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가야 하는 장소로 지옥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옥이 나와 상관없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장소라는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추어 판단할 때 거짓된 것으로 드러난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당신과 같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 누구도 지옥에서 형벌을 받을 수는 없다. 오히려 그들 역시 당신과 똑같다는 이유 때문에 지옥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지옥에 관한 충격적인 진리이다.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진리는 우리도 다른 사람도 모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 때문에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고 선언하는 성경의 말씀은 외적인 기준으로 서로를 비교하고 판단하는 우리의 오만을 깨뜨린다.

 

어떤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지옥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지옥에 가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옥을 피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죄 없는 아들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우리처럼 되셨기 때문이다(고후 5:21).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의 운명이 바뀔 수 있다.

 

어떤 방법으로 지옥을 가르쳐야 하는가?  

 

우리가 지옥에 관한 설교와 교육을 실천할 때,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을 유념해야 한다.

 

1. 사랑의 하나님이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시는 이유를 설명할 때, 다른 사람들이 아닌 우리 자신에게서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시는 하나님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변증하기 위해 역사 속에 악명 높은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사람을 예로 들려는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악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죄악이 우리 속에도 실재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내면에 있는 강력한 증오, 깊게 뿌리박힌 자기중심적 아집, 마음과 뜻과 영혼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순종할 수 없는 전적인 무능을 솔직히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우선적으로 지옥 교리를 적용할 때,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성경의 진리가 예수 믿는 우리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과 그 결과로 우리가 지옥의 실재를 믿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분명히 보고 알게 될 것이다.

 

2. 지옥을 믿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입술로는 부인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옥 형벌을 강하게 믿는다. 하지만 자신들이 믿는 지옥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지옥을 말할 때 진지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자기가 먼저 공적인 대화에서 지옥에 대해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에 관해 설교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지옥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고, 또 영원한 고통 속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싫어한다. 나도 그런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지옥 형벌의 엄중한 무게를 숨기면, 예수님이 죄로 인해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복음의 위대한 가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 결국,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눅 7:47). 

 

3 지옥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복음 선포에 필수적이다

 

우리가 지옥을 우리가 마땅히 가야하는 곳으로 여기지 않고 설교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으로 설교하게 된다.

 

이 둘은 필연적으로 서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느끼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과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놀라움은 늘 함께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옥과 복음이 어우러질 때 나타나는 엄중함과 절박함, 그리고 경외감을 가지고, 그 둘을 함께 설교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도 바울처럼 이렇게 외치게 될 것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Are We Proclaiming a Hell We Don’t Deserve—and a Christ We Do? by Peter Gurry

번역: 김재덕  

 

2005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팀 켈러 목사와 존 파이퍼 목사 등이 이끄는 TGC(The Gospel Coalition; 복음연합)의 한국어 사이트(tgckorea.org)가 지난 11월 오픈되어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주제의 글과 동영상이 매일 새롭게 업로드 되고 있다. TGC코리아는 TGC는 물론 개혁주의 신앙을 전달하는 또 다른 인기 사이트인 Desiring God(존 파이퍼), Ligonier(R.C. 스프로울), 9 Marks(마크 데버), Unlimited Grace(브라이언 채플)의 수준 높은 자료들을 공식적으로 허락받아 한국에 소개하고 있다. 

 

ⓒ TGC코리아(https://tgckorea.org)

[요한복음 18: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얼마 전 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사후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주장의 유력한 근거로 알려진 임사체험(臨死體驗·Near Death Experience)이 사실은 꿈의 일종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과학뉴스 사이트인 라이브 사이언스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유체이탈 체험 연구센터(Out-Of-Body Experience Research Center)’ 연구 결과를 인용, ‘임사체험은 자각몽(自覺夢·Lucid Dreaming)의 일종’이라고 지난 16일 보도했다. 영혼 비슷한 것이 육체를 벗어나(유체이탈) 터널을 통과한 뒤 밝은 빛을 향해 날아가는 자각몽은 스스로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꾸는 꿈으로,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꿈의 내용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으며 현실처럼 생생한 데다 나중에도 또렷이 기억할 수 있다. 이하생략” 

‘사람이 죽으면 사후세계가 있는가, 과연 천국과 지옥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인간의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작년엔가 신문에 딸 이민아 목사를 먼저 보낸 이어령 박사의 기사가 났지만 이어령 박사 또한 이 문제 앞에서 깊이 고뇌하였을 것입니다. 저도 양로원에서 일하면서 늙고 병들어 치매증세를 보이며 쇠약해져가는 노인들을 보면서 과연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참으로 인간에게만 사후세계와 영원의 약속이 주어졌다는 것인가, 우리의 믿음이 사실이요 진실인가 하는 생각이 다시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 곧 물질세계에 속하여 살아가는 영적존재입니다. 영적존재이면서 현실세계에 속하여 살아가기 때문에 현실세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죽음의 경계를 넘어 이 땅, 곧 물질세계의 영역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물질세계에서 죄악 가운데서 살아가는 죄인들에게 영적인 세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죄와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물질세계에 사는 인간들이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는 쉽게 믿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 하십니다. 우리가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고 묻는 도마의 질문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라고,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고 간단히 말씀하지 않으시고 ‘진리’를 넣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 그것이 진리요 사실인가입니다. 진리가 아니라면 길도 생명도 아버지의 집도 모두 허탕이요 거짓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신앙여정도 따지고 보면 진리의 문제요 사실의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 믿음이 사실과 진리가 아니라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요, 부활도 없고, 천국과 지옥도 없고, 일생을 속아 사는 우리가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진리가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진리 위에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싸움은 진리 싸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와 눈에 보이는 이 현실세계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세상적 판단의 손가락질과 과학과 지식의 안개 속에서 증거도 없고 지식도 없는 죽음의 너머를 믿고 나아가는 믿음의 씨름을 일평생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 하였는지요? 평생 예수 믿다가도 막상 죽음 앞에서는 “죽어봐야 알지”라는 불신앙으로 무너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리의 편에 서는 것은 그러나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오직 택한 자만이 진리의 편에 설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낳으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요1:13). 빌라도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재판과정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인도 위험인물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대인들이 민란을 일으킬까봐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들었으면서도, “진리가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물었으면서도,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진리 편에 서지 못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시고 천국과 지옥이 참으로 있다는 것을 믿었다면 빌라도는 민란이 일어나는 한이 있어도, 설사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진리 편에 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현실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이 기록을 보면서 이미 예정된 바에 따라 빌라도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과 진리에 속한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는 사실에 다시금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만세 전에 나를 택하시고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를 새롭게 할 뿐입니다. 내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를 믿을 수 있다는 것, 약속을 받아 영원한 생명, 구원을 얻었다는 것, 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서 내가 진리에 속하였다는 것,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이요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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