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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2:16-18)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성경의 오직 한 가지 주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입니다.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하나님의 약속이요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단 하나의 구원의 길, 생명의 길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 말고도 다른 구원의 길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독생자를 참혹한 십자가에 절대로 내어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면, 하나님께서 죄인인 당신을 지옥으로 던지려 하신다면(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이 죄인을 대신하여 예수님이 죽어 주셨습니다.”라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돌아보시며 물으실 것입니다. 
“얘야, 너 저 친구 아니? 저 친구 말이 네가 저 친구를 위하여 대신 죽었다는구나.” 
그 때 예수님이 대답하실 것입니다, “예, 아버지, 저 친구 제가 압니다. 제가 저 친구를 위하여 죽었지 않습니까?”라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그 분을 구세주로 믿고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대신 죽어주심 말고는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때 마귀가 쪼르르 달려 나와서 항의를 합니다. “하나님, 저놈이나 나나 죄인인 건 똑 같은데 왜 저놈만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그 때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그래, 네 말대로 둘 다 죄인이지. 그런데 저 친구는 내 아들이 대신 죽어주었단다. 널 위해서는 누가 죽어 주었니?” 

할 말이 없어진 마귀가 한참 생각하다가 또다시 이의를 제기합니다. 
“맞긴 한데, 그래도 이건 부당합니다. 왜 하나님은 저놈에게만 아들을 내어주신 겁니까? 특혜입니다. 우리 마귀를 위해서도.....” 
하나님께서 호통을 치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내게 자기의 하나 뿐인 아들을 번제로 바쳤다. 그래서 나도 나의 독생자를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어 주었다. 더 할 말 있니?”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합니다. 어느 누구도 시비 걸 수 없고 책잡을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75세에 광야로 불러내어 믿음의 연단을 하시고 마침내 백세에 얻은 하나 뿐인 아들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는 명에도 순종하는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실 이유를 만드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내게 독자를 내어주었으니 나도 내 독생자를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과 그 아들을 위하여 내어주는 것이다.” 아무도 시비할 수 없는 구원의 이유를 만드신 것입니다. 

성경의 중요한 원리의 하나는 “하나”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이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이신 것처럼(삼위일체) 아브라함과 이삭도 갈라놓을 수 없는 ‘아버지와 아들’,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풍습이나 히브리 사상, 히브리어(語)에는 조상이나 자손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모든 할아버지, 조상은 그냥 다 아버지(아브)입니다. 모든 자손은 그냥 다 아들(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요 우리는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은 그들이 아브라함과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유대인들만 아브라함의 아들로 구원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참 뜻은 믿음으로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의 아들들이 되게 하여 구원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중요한 이 원리에 따라 우리는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아들이 됨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조상이니 자손이니 하고 번역하고 있는데 히브리 원어성경은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까? 믿음으로 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아들로, 또 다윗의 아들로 오십니다.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을 담고서 말입니다. 즉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시고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를 흘려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버리고 예수님의 살과 피, 그 생명을 받아먹습니다. 울며 통회하며 자복하며 믿음으로 받아먹습니다. 죄인 되었던 나의 생명을 버리고 주님이 찢으시고 흘려주신 그 생명의 살과 피를 받아먹습니다. 육으로는 아브라함의 아들의 살과 피를 받아먹는 것이요 생명으로는 예수님의 가져오신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장 12-13절이 뜻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사람의 뜻으로 나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낳으시는 자들이니라.“ 

그렇게 우리는 다시 태어납니다. 하나님은 그 험난하고 머나먼 구원의 길을 통하여 마침내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우리가 다시 태어났으니 우리가 누구의 아들이겠습니까? 우리도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즉 육으로는 아브라함의 아들이요 영으로는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특혜시비를 못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은 수풀에 걸린 숫양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예비하신 것은 아무도 시비할 수 없는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로 드렸던 아브라함의 처절한 모리아산의 사건 보다 더욱 참혹하게 하나님은 독생자를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결박하여 나뭇단 위에 잠시 눕혔다가 끝났지만 하나님은 그 참혹한 십자가에서 아들을 저며 그 살과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구원을 누가 반대하며 누가 시비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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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2:1-2)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네 후손이 저 밤하늘별처럼 되리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100세에 낳은 하나 뿐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니요? 이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지시입니다. “하나님, 이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그렇게는 못 합니다. 차라리 저의 목숨을 거두어 가십시오.” 이래야 맞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 말 없이 하나님의 명을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지시하셨다는 사실을 아내 사라에게조차 말하지 않고 이른 아침, 나귀에 나뭇짐을 지우고 아들과 하인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을 향하여 사흘 길을 갑니다. 그리고 하인들을 산 아래 남겨놓고 아들 이삭에게 번제에 쓸 나무를 지워서 데리고 산을 오릅니다. 

아들 이삭이 묻습니다. “아버지, 나무와 칼은 여기 있는데 번제에 쓸 양은 어디 있어요?” 
아비의 가슴을 에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실 거야.”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은 함께 죽음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자신을 태울 나뭇짐을 지고 모리아산을 오르는 이삭의 모습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결박하여 나뭇단 위에 눕혔습니다. 
성경에는 이삭이 반항하거나 소리 지르거나 도망치려 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사흘 길을 걸어가서 나뭇짐을 지고 산을 오를 정도의 사내아이가 만일 저항하거나 도망쳤다면 100세를 훨씬 넘긴 아브라함이 감당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설마 진짜로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시겠어? 이러다 마시겠지.’ 하고 생각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말만 하다 마는 하나님, 쇼 하는 하나님”으로 여긴 것이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대로 아들을 번제로 드리려고 칼을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은 황급히 아브라함을 두 번이나 불러 제지하셨습니다. 그리고 수풀에 걸린 숫양을 잡아 대신 번제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다시금 하나님은 후손과 땅의 약속을 재확인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이 사건에 관하여 신약성경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 11:19) 
아브라함과 이삭은 이삭을 죽여 번제로 드리면 하나님이 이삭을 다시 살려주실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에 나눈 말씀에서는 밤하늘 가득한 별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었고 이를 믿었으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의로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에서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과연 하나님을 생명의 하나님,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으로 믿었는가, 곧 부활신앙을 가졌는가를 친히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으로 믿지 못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믿음이 없다면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에게 하나님 노릇 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곧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죽어도 다시 살릴 수 없는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맡기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두려워서, 죽음이 무서워서 도저히 죽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생명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우리의 영혼을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온전히 그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부활절이 지났습니다. 만물이 새 생명의 환희로 가득한 계절입니다. 
자신의 부활신앙을 점검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으니 당신도 시험하실 것입니다. 
당신에게 부활신앙이 있는지, 당신 안에 부활의 주님, 생명의 주님, 영생의 주님이 계신지 확인하십시오. 이것이 없이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을 것입니다. 
부활의 하나님, 부활의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는 죽어도 살 것이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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