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 마 13:24-30
                                    김경열 목사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마 13:25)
 But while men slept, his enemy came and
 sowed tares among the wheat, and went
 his way.(Matthew 13:25)]

1941년 12월 7일은 주일이었습니다.

미국은 2001년 9월11일 테러 사건과 
이 날을 가장 자존심 상한 날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로 일본군 비행기 353대가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던 날입니다.

미국 장교나 사병들은 주말인 토요일 저녁 
술 파티가 벌어졌습니다. 
주말에 정신이 해이해졌고
술에 취해 마음에 무장이 해제되었습니다.

하와이 진주만 공격 한 시간 전에 초병병사가
레이더망에 새까맣게 날아오는 물체들을
상관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전날 밤
술에 취한 장교는 상부에 보고도 않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잠이 들었습니다. 

한 시간 후에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일본군 비행기 353대가 진주만을 공격했습니다. 
그때에 미군 3,000여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177대의 항공기가 파괴되었습니다. 
미국은 지금까지도 이 날을
가장 자존심을 잃은 날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똑같습니다. 
육체도 정신도 영혼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육체가 잠들면 물질을 도적맞고
사상이 잠들면 영토를 빼앗기고
신앙이 잠들면 영혼을 도적맞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위기는 잠들 때 찾아옵니다.
잠든 사이에 원수마귀가 우리의 영과 육을
공격하고 파괴합니다. 

그래서 신앙인을 파수꾼이라고 합니다.
파수꾼이란 깨어 지키는 자를 말합니다. 
깨어있다는 말은 육체만 아니라
더 중요한 정신과 영적인 세계를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3가지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1) 하나는 신앙을 지키는 영적인 파수꾼입니다.
성도는 자신을 지키고, 가정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고, 나라를 지키고, 
신앙을 지키는 영적인 파수꾼들입니다. 

2) 또 하나는 가정을 지키는 파수꾼입니다. 
지금 가정의 붕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요즘 끔찍한 살인이나 사건들이
가정 붕괴에서 오는 것이 많습니다. 
가정이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21세기의 위기는 가정이라고 말합니다.
 
3) 또한, 민족을 지키는 파수꾼입니다.
나라 없이는 신앙의 자유도 있을 수 없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문화, 안보 어느 것 하나
건강하지 못합니다. 
내 나라, 내 조국을 위해 
기도의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원수 마귀의 정체성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잘 때 원수가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고 하였습니다.

가라지란 독보리라는 말인데
팔레스틴 지역에 서식을 합니다. 
독이 있어 먹으면 구토를 일으키고 설사를 하며
심하면 목숨까지도 잃게 되는 
무서운 독성을 가진 보리입니다.

종들이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가 생겼다고 하니
주인이 “원수가 그렇게 하였다.”고 
원인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라지를 뽑아 버릴까요?
"아니다. 그냥 놔둬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을 다칠까 염려가 된다.”고 하시며, 
추수 때가 되면 먼저 거둬서 불에 사르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독보리와 같은
가라지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은 우리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가라지와 같은 존재들을 왜 그냥 놔두고
계시는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싹 뽑아 버리고 싶지만 곡식이 뽑힐까봐
추수 때까지 기다리신다는 말씀입니다. 
곡식은 성도를 말합니다. 
얼마나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은 원수가 
가라지를 뿌리지 못하게 
파수꾼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하신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농부가 좋은 씨만 뿌렸는데 
원하지 않는 가라지가 생겨났습니다. 
원수가 곡식 가운데 덧뿌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지금, 사회나 교회나 가라지와 같은 
독보리가 뿌려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좋은 씨만 자라는 게 아니라
원치 않는 가라지도 자랍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농사짓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벼가 자랄 때 보면 벼 이삭 사이에 잡초가 자랍니다. 
농부들이 늘 논에 가서 뽑아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원치 않아도 자라는 잡초가 바로 가라지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너무 잘 아시고 
가라지를 비유로 우리의 신앙을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지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뿌리고 간 자가 있습니다.

1. 누가 가라지를 뿌리고 갔습니까?(25절)

주님이 말씀하신 원수는 가라지를 
덧뿌리고 간 원수마귀라고 했습니다. 

밭에 좋은 씨를 뿌렸는데 
원치 않는 가라지가 자라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할 때
주님은 이미 아시고 원수가 
이렇게 하였다고 했습니다.(27절)
주님이 말씀하신 원수는 우리를 대적하는 
악한 영, 사탄마귀 귀신입니다.

원수 마귀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가라지의 특성은 곡식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1) 가라지를 덧뿌린 원수 마귀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원수마귀는 5가지 특징은

(1) 파괴자입니다.
에덴동산에 들어가서 아담의 축복을 파괴했고
가정에 들어가면 가정의 행복을 파괴하고
마음에 들어가면 평안을 파괴합니다.

(2) 이간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간시키고
인간과 인간관계를 이간시켜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그러나 주님은 원수 마귀가 파괴한 
모든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요1서 3:8)

(3) 거짓자입니다. 
요 8:44에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됨이라.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마귀에게 속아서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다가 불행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거짓은 원수 마귀가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정직한 예배, 정직한 헌금,
정직한 삶을 살기를 원해야 합니다. 
우리를 파괴하고 이간시키고 거짓되게 만드는
마귀를 주님은 원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적이라는 말입니다. 

(4) 또한, 원수 마귀는 절망에 빠트리는 자입니다.  
교만이 사탄의 부추김이라면
절망은 사탄의 방해 작전입니다. 

성도들을 절망케 함으로써 하던 일을 중단케 만듭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이 절망에 잘 넘어집니다.
교만에 안 넘어가는 사람도 절망에 쉽게 넘어집니다. 

(5) 원수 마귀는 비교의식으로 파괴하는 자입니다. 
C.S 루이스는 현대의 마귀는 비교의식을 통해
인간을 유혹한다고 했습니다. 
열등의식이나 비교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마귀에게 속기 쉽습니다.

이런 비교의식은 마음에 여유가 없고
시기질투와 탐욕에 빠지게 됩니다. 
마음에, 가정에, 삶의 현장에 원수가 
가라지를 덧뿌리지 못하게 신앙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2. 그러면 언제 원수가 가라지를 덧뿌렸을까요?(25절)

1) 위기가 잠들 때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이 잠든 틈을 타 
원수가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곡식 가운데 몰래 덧뿌리고 갔습니다. 
원수 마귀는 이렇게 '은밀하게' 틈을 타고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잠든 틈을 이용해서 원수가 침투해 들어 왔습니다. 
가라지를 뿌린 시간도 잠든 사이라고 했습니다.

잠은 좋은 것입니다. 
피곤할 때 잠은 쉼이 되고 건강에 좋습니다. 
불면증에 걸려 잠이 오지 않아
괴로워하는 호소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즉, 평안한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이 복잡하거나 불안하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잠은 축복입니다. 

2) 그러나, 자지 말아야 할 때 잠을 자는 것은 불행이 됩니다.
 
운전하며 존다던지 보초가 잠이 들면 큰일 납니다.
제자들도 깨어 기도해야 할 시간에 
잠이 들었다가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사울왕도 전쟁 중에 잠이 들었다가 
축복의 물병을 다윗에게 빼앗겼습니다.
유두고는 창가에 걸터앉자 졸다가 떨어졌습니다. 

육신은 잠을 잘지라도 영적인 잠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지키고, 가정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고, 나라를 지키고, 
신앙을 지키는 영적인 파수꾼들 되기를 축복합니다.

3. 왜 주님은 가라지를 제거하지 않았습니까?(29-30절)

1) 곡식을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29절)

당장 가라지를 뽑아버리고 싶지만
곡식을 보호하기 위해서 가라지를 뽑지 않았습니다. 
가라지의 특성은 뿌리가 강해서 뽑다가
곡식까지 함께 뽑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원치 않으나 
추수 때까지 가라지도 자라고 있습니다. 

곡식을 보호하기 위해서 입니다. 
곡식은 바로 우리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가라지 때문에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1) 왜 하나님이 이런 가라지 같은 악을 제거하지 않으실까요? 
(2) 가라지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데 왜 침묵하고 계실까요?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곡식이 다칠까봐 당장 뽑아 버리고 싶지만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놔두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본질은 곡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곡식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 값으로 내놓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주님의 피 값이 우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값입니다. 
그만큼 주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가라지가 있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2) 주님은 결코 악을 방치하지 않으십니다.(30절) 
추수 때까지 라고 했습니다.

(1) 추수 때가 되면 먼저 가라지를 
불에 태워 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2) 지금은 곡식이 다칠까봐 참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추수 때가 되면 분명하게 곡식과 가라지가 구별됩니다. 

(3) 추수 때는 종말의 때를 의미합니다.
인생에 반드시 끝날이 있고
세상에도 반드시 종말의 시간이 있습니다.  
지금은 가라지가 곡식을 해치고 있는 때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세요.

추수 때가 되면 먼저 가라지를 모아서 
불에 던지겠다고 하셨습니다.(30절)

그 날이 바로 주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를 말합니다. 
그날에 곡식은 주인의 곳간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알곡으로 
주인의 곳간에 들어가길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깨어서 지키는 자가 파수꾼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영적인 파수꾼입니다. 
파수꾼이 잠이 들면 큰일 납니다.

한 번 가라지가 뿌려지면 추수 때까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가라지는 마음에, 가정에, 사회에서도 
끊임없이 자라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잠잘 때 찾아온 위기입니다. 

원수들이 가라지를 뿌리지 못하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정신도, 영혼도, 기도도, 사명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신앙의 파수꾼의 역할을 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평생감사
김경열 목사
                         뉴욕영안교회 드림
                          (917-963-9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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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말씀 : 왕상 16:30-33
                                        김경열 목사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왕상 16:33)  
 And Ahab made a grove; and Ahab did
 more to provoke the LORD God of Israel
 to anger than all the kings of Israel that
 were before him.(1 kings 16:33)]

우리는 6월을 '호국 보훈의 달'이라고 합니다.
우리 근세 역사에 6월만큼 잔인한 달도 없습니다. 

요즘 생태계 파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민물고기 어종에도 외래종이 들어와서 
토종 물고기 씨를 말리고 
외래종 황소개구리가 토종개구리를 다 잡아먹어서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습니다.  

신앙에도 생태계 파괴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던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 여인과 결혼을 해서 유일한 신앙의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아합왕이 그러했습니다. 

아합왕은 이스라엘의 7대 왕인데도 
이방여인 이세벨과 결혼을 하고 
우상을 끌어들였고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이방 선지자 850명을 정치 들러리로 세웠습니다. 

하나님만 섬기던 유일 신앙의 생태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앙의 생태계가 파괴된 
이스라엘 땅에 재앙을 내렸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하늘을 닫아 버렸습니다. 
잘못된 지도자를 만나 애매한 백성들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역사는 냉혹하고 굉장히 중요합니다. 

역사를 바로 보지 않는 사람은 
거울을 보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역사의식이 없는 민족은 내일의 비전이 없이
현실에만 안주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마사다'란 곳이 있습니다. 

로마군에 마지막까지 항전하다가 죽어간 곳입니다. 
로마에 패하게 될 때 '로마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자유를 위해 수의를 입자'고 
96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민족의 혼을 지키던 곳이 마사다입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지금도 반드시 신병훈련을 끝마치면 
마사다에서 '다시는 마사다가 함락되게 하지 않는다.'는 
민족정신을 심어 주고 구호를 외친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역대 왕들을 통해 
그 시대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역사를 거울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나라의 평화가 있고 흥왕했던 시대의 
역대 왕들을 보면 3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1) 하나님과 동행했던 시대였습니다. 
(2) 하나님이 인생의 우선순위가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은 목숨 걸고 제거했습니다. 

이런 시대는 나라가 흥했고 평화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그러했고 여호사밧이 그러했고
히스기야 등 많은 왕들이 그러했습니다. 

반면에, 불행과 인생의 말로가 비참하게 끝난 왕들을 보면 
하나님을 버렸고 하나님을 분노케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왕 아합이 그런 사람입니다.
 
아합 왕이 유일 신앙의 생태계를 파괴시켰습니다. 
조상적부터 섬겨오던 여호와 하나님
이스라엘에 유일신앙의 생태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민족적인 재앙을 내렸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하늘을 닫아 버렸습니다.
잘못된 지도자를 만나 애매한 
백성들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영적 세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원수마귀는 지도자를 먼저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든 나라든 
지도자를 위해서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지도자는 공동체의 흥망을 가늠하는 것입니다. 

청교도 신앙으로 세워진 미국이 1960년대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 3가지 신앙을 무너뜨렸습니다. 

미국 공립학교에서 기도를 폐지하고
십계명을 철거했습니다. 
학교에 채플(chapel)시간을 없애고
성경 교육시간을 없애버렸습니다. 
창조론 교육을 못 시키게 했습니다. 

그 후부터 신앙의 생태계가 파괴되었습니다. 
미국사회는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발족과 히피족이 생기고 
청소년들의 마약 복용자가 수없이 늘어나고
총기 사건이 수없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아합 왕 한 사람의 타락으로 
온 백성이 엄청난 고난을 당하는 
불운한 역사를 거울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생태계를 파괴한 아합 왕의 범죄를
본문에 3가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아합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고 했습니다.(왕상 16:30)

1)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여호와 보시기에’란 말은 '여호와의 눈'을 뜻합니다. 
성경에 900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눈은 어떤 눈일까요? 
① 우리의 안과 밖을 다 보시고 
정확한 평가를 내리시는 눈입니다. 
② 하나님의 눈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사람은 겉만 보고 평가하기 때문에 실수할 때가 많습니다. 
거짓을 말해도 진실로 받아들이고
진실을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때가 있습나다.
겉만 보고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조차 실수할 뻔한 일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2대 왕을 뽑을 때 이새의 아들 중에
하나를 택하여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이새의 가정에 갔는데 장남 엘리압은 
왕이 되려는 야심만 품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보니 키가 크고 외모가 준수했습니다.
나라의 왕이 되려면 이 정도는 생겨야 될 것 아닌가 생각하고
서슴없이 기름을 부으려고 할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무엘아, 네 손에 든 기름병을 멈춰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내가 그를 버렸노라.(삼상 16:7) 

사람의 눈은 이렇게 실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정확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관점에서 평가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합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악하게 산 왕이었습니다. 

2) 뿐만 아니라 아합은 이전의 왕들보다 
더 악했다고 했습니다.(30절 하)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하나님만 섬겨야 할 텐데
우상을 끌어들였고, 선지자들을 죽이는 
잔인한 왕이 되었습니다.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지난 모든 왕들보다 더 악한 왕이라고 했습니다. 

유일한 신앙의 생태계를 파괴시켰기 때문입니다. 
아합의 생애를 역사의 거울로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가길 축복합니다. 

2. 아합은 죄를 가볍게 여겼다고 했습니다.(왕상 16:31)

가볍게 여긴다는 말은 하찮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보잘 것 없이 여긴다. 시시하게 여긴다는 겁니다. 

하찮게 여기니까 죄를 짓고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볍게 여기니까 쉽게 죄를 짓습니다.
  
1) 그러나 죄는 무서운 것입니다.

죄는 반드시 대가를 받습니다. 
죄 값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죄는 3가지 관계를 가로 막습니다. 

(1) 하나님과 관계가 막힙니다. 
죄짓고 나면 마음에서 평안이나 기쁨이나 
안식이 떠납니다. 삶이 불안해 집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후 누군가가 나를
죽일 것만 같다고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2) 죄로 인해 기도의 응답이 막힙니다.(사 59:1-2)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손이 짧아서 너희를
구원치 못함이 아니요, 귀가 둔해서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죄악의 담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3) 죄는 축복을 가로 막습니다.(창 3:18)
아담을 향해 너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아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선악과 사건 이후로 평안만 잃은 것이 아니라
땅이 저주를 받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죄는 영혼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이 파괴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죄는 반드시 댓가를 받습니다.

2) 죄 값으로 죽는 아합의 말로를 보세요.(왕상 22:34)

여호사밧을 대신 죽게 하려고 왕복을 입게 해서
전쟁터로 보내고 자기는 변장을 하고 철갑과
갑옷을 입고 나갔는데, 어느 한 사람이 무심코 당긴 
화살이 하필 아합 왕의 갑옷 솔기를 맞췄습니다. 
솔기란 철갑과 갑옷 사이에 이음매를 말합니다. 

즉, 갑옷을 입고 철갑으로 보호를 했는데 
우연히 당긴 화살이 이음매 사이로 박혀서
아합이 죽었습니다. 

우연히 당긴 화살이 
아합 왕의 철갑과 갑옷 사이로 화살이 박힌 것입니다. 
기가 막힌 사건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숨은 손길을 알아야 합니다. 

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아합은 죄를 가볍게 여긴 것이 
불행으로 가는 길목이었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거울입니다. 

WCC. 종교 혼합주의 동성애가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악입니다.

이슬람교를 섬기는 중동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전국에 이슬람 모스크를 짓고
인천에 이슬람 대학을 짓고
공장을 지어서 할랄 식품으로 이익을 창출한다고
아랍의 사람을 불러 들이니 
백의 민족 단일 민족은 옛말이 되었고
그들의 종교까지 가지고 오니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의 거울을 보고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3. 아합은 결혼의 선택을 잘못 했습니다.(왕상 16:31절하)

1) 이방 여인 이세벨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세벨은 우상을 섬기는 
시돈 왕 엣바알의 딸입니다.(왕상 16:31)

이것은 정치적인 정략결혼입니다. 
요즘도 재벌가의 자녀들 
권력있는 정치인들의 정략결혼을 보세요. 

결국 가정이 걷잡을 수 없이 깨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결혼은 가장 신성한 것입니다. 

결혼의 매개체는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이뤄진 공동체가 가정입니다. 
부부는 오직 사랑으로 맺어지는 신비한 관계입니다. 

결혼을 선택할 때는 적어도 몇 가지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결혼하기 전 젊은이들에게 5가지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1)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인가? 
(2) 가정을 책임질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인가? 
(3) 미래의 비전이 있는 사람인가? 
(4) 성품에 덕이 있고 지혜로운 사람인가? 
(5)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는 사람인가? 

이런 몇 가지 결혼관을 가지고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가 많습니다. 
직업의 선택, 결혼의 선택, 진로의 선택 등
자신이 결정하는 선택입니다. 

그러나 선택은 자유지만
결과는 반드시 선택한 자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아합 왕은 불행한 선택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현숙한 여인을 선택해서 결혼하는 것이 상식인데
우상을 섬기는 이방나라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을 선택했습니다. 

이방나라와 연합해서 세력을 키우겠다는
정치적인 야망으로 인해 유일하신
하나님만 섬기던 이스라엘 땅에 
신앙의 생태계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이세벨이 섬기던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끌어 들였습니다. 

아합은 이세벨이 조종하는 대로 
이방선지자 850명을 정치 들러리로 세웠습니다.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이세벨의 충동에 의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왕상 21:2)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는 
악한 왕이 되었습니다.(왕상 21:25하)

2) 결국, 아합 왕은 하나님을 분노케 했습니다.(16:33)

하나님을 노하게 한 아합 왕의 말로를 보세요. 

이세벨은 개들이 시신을 먹어버렸습니다.
부인이 비참하게 죽었습니다.(왕상 21:23) 

아합 왕의 피를 개들이 와서 핥았고
그 물이 창기들이 목욕하는 물이라고 
했습니다.(왕상 22:38) 
가장 부끄럽고 저주스런 죽음을 말합니다. 

왕하 10:7에 자식들 70명을 목을 잘라
광주리에 담아서 이스르엘로 보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심히 노하신 결과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거울입니다. 
역사의 거울을 보고 고쳐야 합니다. 
수정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합 왕의 비참한 말로는
이스라엘의 유일 신앙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파괴시켰기 때문입니다. 

아합은 하나님 눈 앞에서 악을 행하였고 
죄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분노케 한 왕으로서 가문이 몰락하고
하늘이 3년6개월 닫히는 재앙이 내렸습니다.
유일신앙의 생태계를 파괴시켰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거울입니다. 
이슬람이나 동성애 문제 가볍게 볼 일이 아닙니다.

이런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바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양심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고
법도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삶을 살아가세요.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십니다.

평생감사
김경열 목사 
                            뉴욕영안교회 드림
                             (917-963-9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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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시 119:163-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라.(시 119:165) 
 Great peace have they which love thy law: 
 and nothing shall offend them.(Psalms 119:165)]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 앞에 별명을 붙여 주기도 하고
상징적 이름을 별명으로 대신 쓰기도 합니다.
(돼지 같은 사람, 법이 없어도 사는 사람 등) 

1세기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름 앞에 꼭 붙이는 별칭이 있었습니다. 

그 별칭이 티테디오스(Titedios)라는 말입니다. 

이름 앞에 꼭 티테디오스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바울의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 바울,
티테디오스 베드로 라고 불렀습니다.
 
티테디오스 라는 말은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초대교인들이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를 붙인 이유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죽음 앞이나
어떤 환경에서도 '염려 근심 걱정에서 
해방된 자'라는 것을 증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충만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고백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환란과 핍박 속에서 집을 빼앗기고
재산을 약탈당하고 직장을 빼앗기면서도
예수님의 피 값으로 내 생명을 살려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예수 안에서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서로 고백하는 증표로 티테디오스 요한,
티테디오스 도마, 티테디오스 스데반,
디테디오스 폴리갑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고백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티테디오스 목사, 티테디오스 권사,
티테디오스 장로, 티테디오스 집사,
티테디오스 성도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고백입니다.

요즘 우리의 환경이 그리 녹녹치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주변 강대국들의 국제관계뿐 아니라
하노이 북미 결렬로 한치 앞의 문제를 
예견할 수 없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어쨌던 꼬인 실타레를 풀고 싶어 
한미 정상회담을 4월 11일에 한답니다.

잘못하다간 꺼져가던 북한 핵이 다시 살아나고
볼모로 잡혀 끌려 다닐지도 모르는 문제 속에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드를 배치시키고 준비했다지만
이것은 실효성에서 공격용이 아닌 
방어용에 그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만 바라보고 기댈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또한 중국도 원론적인 대화와 평화만을 강조하면서 
북한의 핵무장을 적극 저지하려는 자세는 볼 수 없습니다.

북한 미사일 발사를 우려하면서
우리가 방어하기 위해 사드를 배치한다고 할 때에
중국의 태도는 우리에게 큰 배신감만 느끼게 합니다. 

우리의 안보를 강대국에만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불안하고 초라한가를 처절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아무리 혈맹관계라 해도 국가생존이 달린 국가안보를 
동맹국에만 의존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스라엘은 주변 적대국들 사이에 
80기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만 
사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핵 주권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스라엘과 같은 생존전략을 배워야 합니다. 
누구도 이스라엘을 건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안보나 외교 전략을 
원점에서 새로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유사시를 대비해서 자체 잠재력을 키워야 합니다. 

다시 자주국방을 든든히 세워가야 합니다.
상대는 핵이라는 대포를 가지고 덤비는데
우리는 소총가지고 싸우겠다면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정치권도 안보에 깊은 관심을
국민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당리당략에만 혈안되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라 없는 정치나 경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국가 안보를 정치에 이용한다면
국민은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가안보에 여야가 따로 없습니다. 
북한은 남남갈등을 노리고 있습니다. 
온 국민이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입니다. 

이런 어려운 난국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향해 기도의 손을 높이 들어야 합니다.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생사화복의 열쇠가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지켜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고
통일도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염려하는 일들을 주의 손에 맡기고
우리 민족을 하나님이 지켜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전쟁을 보면
승패가 무기나 사람의 숫자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손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서독의 통일은 전문가들도 
20, 30년이 지나도 힘들다고 했는데
예상을 뒤엎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이 되었습니다. 

배후에 기도의 힘이 있었음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세상이 요동칠지라도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처럼 세상 것 때문에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 티테디오스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 
험난한 인생길을 살아오면서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셨다고 고백하는 
결코 염려하지 않는 티테디오스 다윗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본문에 다윗은 3가지의 
진정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 다윗은 정직한 신앙으로 살기를 고백했습니다.(163절)

1) 나는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한다(163절)고 했습니다.

다윗은 지난 날 정직하게 살지 못했습니다. 
이를 통해 엄청난 고난을 경험했습니다.
그 후에 정직하게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고 숨기려고
충신 우리아를 전쟁터 맨 앞에 세워서 죽게 만든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 죄값으로 자식이 죽기도 하고
아들이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반기를 들었고
왕이 맨발로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믿었던 신하가 구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 모든 죄를 숨기려고 거짓된 인생을 살았던
죄값이었습니다. 

이런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침상이 젖도록 눈물로 회개하며
하나님께 정직하게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라고 기도했습니다. 

사실 손발이 죄를 짓고 몸이 죄를 지었는데
오히려 몸을 고쳐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고쳐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내 마음 속에 정직한 영을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 이후로 내가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거짓을 버리고 정직하게 돌아올 때
하나님은 다윗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허물과 실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정직한 사람을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도 지난 날 잘못 산 것이 많을지라도
정직하게 돌아오면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사업도 정직하게 해야 합니다.
음식점을 하면서 조미료나 넣어서 입맛을 속이려고 하거나
곰탕에 우유를 타서 우러난 뼈국처럼 만들어 장사한들 
얼마나 가겠습니까? 언젠가는 들통이 나서
문을 닫게 됩니다. 

정직함이 자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관계도 정직해야 하고 
부부관계나 친구관계나 성도 관계나 
모두 정직이 제일 중요합니다. 

물질문제에 있어서도 신용이 분명해야 합니다. 
사실 친한 사람일수록 물질관계를 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돈을 빌렸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값아야 합니다. 
신용이 자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지역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장로가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처럼 행동하더니
성도들에게 많은 돈을 빌려서 도망을 갔습니다. 

이자를 20, 30%씩 몇 개월 잘 주니까
사람들이 집까지 담보해서 돈을 맡기고
친척 친구를 소개하면 소개비까지 주었답니다. 
상식적으로 20, 30%이자를 주는 사업이
정상적이겠습니까? 금융 다단계였습니다.
사기를 치고 잠적해 버렸습니다. 
속인 자도 문제였지만 속은 사람도 문제였습니다. 
상식을 벗어난 물욕에 속았습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나라마다 국민성의 특징이 있습니다. 

독일은 정직성이랍니다. 
물건을 만들어도 튼튼한 정품을 만듭니다. 
그래서 독일에서 만든 자동차나 물건을
선호하는 것은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튼튼하고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독일차 중에 폭스바겐이
리콜을 당했습니다. 배출 가스를 조작했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금전적인 손실뿐 아니라
(Made in germany) 독일에서 만든 물건에 대한 
정직성에 금이 간 것입니다. 

미국은 법치국가입니다. 
모든 것은 법대로 처리합니다. 
준법정신이 강합니다. 
다인종이 살면서도 질서가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공권력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짝퉁 천국이라 합니다.  
중국 제품을 인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뢰가 없고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는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잠 20:10)
장사를 하면서도 저울추를 속이는 것은
사람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속이는 행위가 됩니다. 

다윗은 거짓을 미워하고 싫어한다고 했고
정직하게 살기를 고백했습니다.

2. 다윗은 찬양하며 살기를 고백했습니다.(164절)

1) 찬양은 받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에 은혜가 없이는 찬양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윗이 하루에 일곱 번씩 찬양한다는 것은
7곡이 아니라 7번씩 드린 것입니다. 
다윗은 하루의 출발과 마침이 찬양이었습니다. 
찬양을 한다는 말은 
은혜 안에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마음에 감사와 은혜가 없이는 찬양을 할 수 없습니다. 
세상 근심, 걱정, 염려로 가득차고 복잡하면
찬양이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루에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며
드리는 찬양이 얼마나 됩니까? 
세상에 분주하다 보니 찬송을 잃어버리고 살지는 않습니까? 

찬양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다윗이 악기를 다루며 찬양할 때 사울에게 있던 
악신이 떠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삼상 16:23)

바울과 실라가 옥중에서도 기도하고 찬양할 때
옥문이 열리고, 옥터가 움직이고, 쇠사슬이 풀리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행 16:25-26)
이것이 찬송의 위력입니다. 

계 7장에 흰옷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를 부르면서 찬양을 드리는 것을
사도요한이 보았습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이런 찬양을 새 노래라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동안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보좌 곁에서 
거대한 성가대가 거룩하다 거룩하다 
찬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사 6장) 

성도의 삶은 늘 찬송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찬송한다는 말은 늘 감사가 있다는 말이요,
은혜 안에 사는 것을 말합니다.

전에 선교를 갔을 때 찬송을 통해 
깊은 은혜를 체험했던 적이 있습니다. 

선교지를 왕복 12시간을 오가면서 
1장부터 차 안에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30장, 50장, 100장을 부르는 동안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동행한 선교대원들이 여기저기서 
흐느껴 울면서 회개하기도 하고
기뻐서 감격하기도 하면서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 이후로 선교 여행을 떠날 때는 찬송을 부르자고 합니다. 
그러면 멀미도 덜하고 불평도 안합니다.
피곤도 덜하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면 
얼굴이 환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의 영이 교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충만한 사람은 입안에서 찬송이 떠나지 않고
항상 찬송을 흥얼거립니다.
 
여러분도 늘 찬양을 통해 
악한 영들을 물리치고 영적 승리를 선포하며
성령이 충만한 은혜가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3. 다윗은 주의 법을 사랑한다는 고백입니다.(165절)

1) 주의 법이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말씀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주의 말씀이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다고 했고(시 119:103)
주의 말씀은 내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했습니다.(시 119:105)

인생의 앞길을 비취는 등불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생명입니다. 

말씀은 살아있는 생명이라고 했고
육체와 영혼과 정신까지 전인적인 삶을 치료하는 
수술도가 된다고 했습니다.(히 4:12)

바로 사는지 잘못 사는지 기준이 되는
다림줄이 하나님의 말씀이요,(암 7:7-8) 
말씀은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아무리 반석같이 단단하고 완악한 심령이라도
말씀이 속에 들어가면 깨트려서 
변화시키는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말씀을 사랑하는 자의 결과를 보세요.(165절)

먼저 큰 평안을 주십니다. 
그냥 평안이 아니라 큰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환경이나 조건에서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평안이 아니라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평안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큰 평안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은혜임을 다윗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장애물을 제거해 주십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장애물이 많습니다.
사람과의 장애물, 물질과의 장애물, 
건강의 장애물, 사업의 장애물 등 
수많은 장애물이 복병처럼 숨어있는 세상에서
장애물이 없으리라는 것은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앞길에 평안도 주시고
장애물도 해결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신앙인의 진정한 고백이 무엇입니까? 

다윗처럼 정직하게 살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늘 찬송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말씀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6-8) 

이것이 티테디오스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영적인 삶이요, 
풍성한 은혜의 삶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늘 이런 티테디오스
'결코 염려(근심,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고백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평생감사
김경열 목사    

뉴욕영안교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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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버스정류장은 매우 붐볐습니다. 
생기발랄한 젊은 남녀 세 쌍이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플로리다 해변으로 가는 버스였습니다. 
승객이 모두 타자 버스는 곧 출발했습니다. 
세 쌍의 남녀들은 여행의 기분에 취해 
한참을 떠들고 웃어 대다가 시간이 지나자 
점점 조용해졌습니다. 

그들 앞자리에는 한 사내가 돌부처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무거운 침묵, 수염이 덥수룩한 
표정없는 얼굴... 

젊은이들은 예사롭지 않은 그 사내에게 
점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누구일까? 
배를 타던 선장?

아니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퇴역 군인? 

일행 중 한 여자가 용기를 내어 사내 곁으로 
가서 말을 붙였습니다. 
그에게는 뭔지 모를 우수의 그림자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포도주 좀 드시겠어요?” “고맙소” 

그는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습니다. 

그리곤 다시 무거운 침묵. 
여자는 일행 속으로 돌아갔습니다. 
사내는 애써 잠을 청하려는 듯 등을 뒤로 기댔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버스는 음식점 앞에 섰습니다. 
어젯밤 말을 붙였던 여자가 그 사내에게 
함께 식사를 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는 수줍은 표정을 보이면서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식사 도중에도 그는 뭔가에 긴장한 듯 
담배를 연신 피워 물었습니다. 

식사를 끝내고 다시 버스에 올라탔고 
젊은 여자는 그의 옆자리에 가 앉았습니다.

얼마 후 사내는 여자의 집요한 관심에 항복했다는 듯,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천천히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빙고. 
지난 4년 동안 뉴욕의 교도소에서 
징역살이를 하고 이제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소.

나는 부끄러운 죄를 짓고 오랜 시간 
집에 돌아갈 수 없으니, 
만약 나를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되거나 
혼자 사는 것이 고생이 된다고 생각되거든 
나를 잊어 달라고 했소. 

재혼해도 좋다고 했소.

편지를 안해도 좋다고 했소. 
그 뒤로 아내는 편지를 하지 않았소. 
3년 반 동안이나...

석방을 앞두고 아내에게 다시 편지를 썼소.

우리가 살던 마을 어귀에 
커다란 참나무 한 그루가 있소.

나는 편지에서, 
만일 나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일 생각이라면 그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달아달라고 말했소. 

만일 아내가 재혼을 했거나 
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면, 
그래서 손수건을 달아놓지 않았으면 
나는 그냥 버스를 타고 어디로든 가버릴 거요.

그의 얼굴이 이렇게 굳어져 있는 것은 
거의 4년 간이나 소식이 끊긴 아내가 
자기를 받아줄 것인가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여자는 물론이고 
그녀의 일행들도 이제 잠시 뒤에 전개될 광경에 
대해 궁금해 하며 가슴을 조이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른 승객들에게도 전해져 
버스 안은 설렘과 긴장감으로 가득 찼습니다. 

빙고는 흥분한 표정을 보이거나 창 밖을 
내다보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굳어진 얼굴에서 깊은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치 그는 이제 곧 눈앞에 나타날 실망의 
순간을 대비하며 마음 속으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을과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20마일... 15마일... 10마일... 

물을 끼얹은 듯 버스 안은 정적이 감돌았습니다. 

자동차의 엔진 소리만이 꿈결에서처럼 아스라하게 일정한 리듬으로 고막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승객들은 모두들 창가로 몰려가 숨을 
죽이고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버스가 마을을 향해 산모퉁이를 돌았습니다. 

바로 그때. “와~!!” 

젊은이들의 함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습니다. 
버스 승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얼싸안았습니다. 

참나무는 온통 노란 손수건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20개... 30개... 아니 수백 개의 노란 
손수건이 물결치고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남편이 손수건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까 봐...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참나무를 온통 
노란 손수건으로 장식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것은 오로지 빙고 한 사람뿐.. 

그는 넋 잃은 사람처럼 자리에 멍하니 앉아 차창 밖의 참나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이윽고 빙고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늙은 전과자는 승객들의 뜨거운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버스 앞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미국 소설가이자 칼럼니스트인 
피트 하밀이 뉴욕포스트에 게재한 
‘고잉 홈(Going home)’이란 제목의 글입니다. 

이 감동적인 이야기는 1973년 
Tony Olando & Dawn이 만든 노래 
‘오래된 참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주세요'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가 전세계적으로 크게 히트를 기록하면서 
모두가 기억하는 감동 스토리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노란 손수건은 용서와 포용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부끄러운 과거를 용서해 주고, 
고달픈 세월을 마다하지 않고 남편을 
기다려준 아내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I'm coming home, I've done my time... 
(나 형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If you still want me... 
(당신이 아직도 나를 원한다면)

Tie a yellow ribbon around the old oak tree... 
(그 오래된 참나무에 노란 리본 한 개를 달아주세요.)

1979년 이란의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면서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일하던 미국인 50여명이 
인질로 억류되었는데, 
당시 인질로 붙잡힌 한 외교관의 아내가 
남편이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오길 바란다는 
염원을 담아 노란 리본을 집 앞 나무에 매달았고, 
이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미국 전역에 
인질들을 조기 석방하여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노란 리본 캠페인이 확산되기도 했습니다. 

그 뒤에도 노란 리본은 걸프전과 이라크전 등 
전쟁터로 떠난 군인들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란다는 상징으로 사용됐습니다.

~The Yellow Ribbon around the old tree~

무조건 정치적인 대립으로 뜻없이 생각없이
이슈화 보다는 실제적인 노란 리본의 
숭고한 뜻을 되새겨 보는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동실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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