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지방법원 7월 29일 공동상해, 아동 방임 교사 등 혐의로

신옥주 씨(은혜로교회)가 지난 7월 29일 공동상해, 아동방임 학대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지 약 1년만에 법원으로부터 징역 6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수원지방법원은 소위 ‘타장 마당’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폭행과 특수감금, 그리고 아동 학대 등의 대부부의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다.

   
▲ 신옥주 씨(동영상 캡쳐)

법원은 “신옥주 씨가 일반 목사 이상의 절대적 지위를 갖고 잇었고 타작 마당 등 모든 범죄행위는 피고인(신옥주 씨)의 지시 없이 진행될 수 없다”며 신옥주 씨의 책임을 무겁게 물었다. 또한 “다수의 가족이 해체됐고 피지에 가족들을 남겨둔 피해자들은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인은 여전히 ‘관여하지 않았거나 몰랐다’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신옥주 씨와 함께 기소된 신 씨의 동생과 은혜로교회 관계자들에게도 실형이 선고됐다.

신옥주 씨는 지난 해(2018년) 7월 25일 인천공항 입국장에서 긴급 체포됐다. 신도 폭행, 신도 노동 착취 등의 혐의였다. 신 씨는 피해자들로부터 9건의 고소를 당했지만 피고소인 자격 조사에 출석을 거부한 바 있다.

신 씨는 지난 2016년 8월 8일부로 은혜로교회 문을 닫고 남태평양에 위치한 피지로 떠났다. 세상의 종말(대기근)을 대비한다며 신도들과 함께 출국한 것이다. 신 씨는 “지난 8년간 다시 예언의 말씀을 전한 한국방송을 마감하며”로 시작하는 소위 ‘고별사’라는 것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향후에 있을 대기근에 대비해 은혜로교회 전 성도들은 자원하여 피지에서 식량을 준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신옥주집단피해자대책위원회는 “잘못된 종말론으로 인해 결국 신옥주 왕국 건설에 동원된 것”이라며 “피지로 간 가족들을 구해달라”고 호소했다.

신옥주 씨는 지난 2014년 예장합신에서 ‘이단성’으로 규정을 내리자 크게 반발을 했다. 이어 통합, 합동, 고신도 그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이단적 주장, 참여 금지 등의 규정을 내렸다. 신옥주(은혜로교회) 씨에 대한 한국교회 공교단의 연구 결과는 이단성(합신2014, 통합2016), 이단적 주장(함동2016), 참여금지(고신2015) 등이다.

다음은 신옥주 씨에 대한 예장합동의 연구 보고서(2016년) 주요 내용이다.

1. 신옥주는 누구인가?

신옥주 씨는 중앙총회신학을 졸업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해외 합동총회> 서북노회 소속 목사였다. 2014년에 예장 합신 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고 교단을 탈퇴하였으나 2015년 7월 9일에 예수교장로회(합동총신) 서북노회는 신옥주 씨를 노회원으로 받아들였다.(서북노회 27차 회의록). 그런데 <해외합동총회>와 <합동총신>은 서로 이중교적을 허락하는 교단으로 알려져 별 의미가 없는 일이다.

신옥주 씨는 선교사로 중국에 갔다가 귀국해서 2008년 <은혜로교회>를 개척했고 2009년 8월에는 신 씨가 원장으로 <바울사관아카데미>를 개원했다. 지교회로는 일본 오사카, 호주 시드니, 미국 뉴욕과 중국에 4개 교회와 천안, 대전, 진주, 울산, 대구, 제주 등을 비롯해서 9개와 국내외에 도합 13개가 있다. 2011년 4월에는 용인시 기흥구 중동에 <은혜로교회>의 <바울사관아카데미> 본원을 두고 여러 곳에 분원을 만들었고, 2013년에는 <바울사관아카데미>을 <영적군사훈련원>이란 이름으로 바꾸었다.(중략)

신 씨는 그 동안 자신의 주장이 옳다며 ‘홈페이지에 들어와 얼마든지 설교를 듣고 성경적인 문제를 성경으로 비판하라’고 큰 소리를 치다가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지난 8년 동안 유지해온 홈페이지를 2016년 6월 6일 0시를 기해 전면 폐쇄하여 그의 설교를 쉽게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최근 자신에게 쏟아지는 이단 논쟁과 세상 법에서 연속적으로 패하는 사건과 <피지>로 추종자들을 이주하게 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2. 신옥주의 이단사상은 무엇인가?

1) 신옥주 씨는 성경을 ‘방언’이라 하고 방언인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방언 통역’이며 그것이 곧 ‘예언’이라고 하여 자신의 성경해석을 예언처럼 만들고 있다.

신옥주 씨는 “성경대로 보고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행동한다”고 강조하지만 사실은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엉터리 해석이다. 신 씨는 특별 계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비밀한 것을 풀어낼 수 있는 무엇인가 필요하며(신옥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고>, 도서출판 세줄. 17p), 하나님 앞에 예정된 자녀들에게만 그 성경이 열린 문서이며(신옥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고>, 도서출판 세줄. 18p) 성경을 방언이라고 한다. (중략)

2) 신옥주 씨는 ‘개혁’이란 이름으로 기성교회 목사들을 폄하하고 비판한다.

신옥주 씨는 자신의 격에 맞지 않게 ‘개혁’을 외치고(뉴스앤조이, ‘이단 의혹’ 신옥주 목사 은혜로교회, ‘한국교회 개혁’ 집회. 2015.12.05.), 개혁이란 이름으로 히브리 9:10을 인용하여 기성교회 목사들을 폄하한다.(<성경과 다른 거짓말>59p) 또한 신 씨는 욥기 30:1의 말씀을 근거로 ‘개는 양떼를 지키는 짐승이다’라는 말로 바로 몰각한(몰지각한) 목회자를 가리켜 개라고 하는데 형식적으로는 몰지각한 목사들이라고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자기를 따르지 않는 모든 목회자들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성경과 다른 거짓말> 115p)

3) 신옥주 씨는 표적과 기적을 부정하고 오늘날 주장하는 기적(표적)은 사단을 따라 역사하는 불법이라고 한다.

신 씨는 모든 표적과 기사를 부정하는 한 편 “전 우주적으로 성경적인 이적은 신부 단장을 온전하게 한 그리스도의 신부들인 거룩한 자들이 들림 받는 사건과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자들(성도, 천사)과 함께 다시 강림하시는 사건이다. 이외에 어떤 이적과 기사도 믿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성경과 다른 거짓말> 174p) (중략)

4) 신옥주 씨는 ‘예수는 인성이고 그리스도는 신성이다’라는 이상한 기독론을 주장한다.

신옥주 씨는 반드시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전해야 성경적인 믿음이 생긴다고 하며(<성경과 다른 거짓말> 166p) “예수(인성)는 그리스도(신성)라는 인성과 신성을 성경적으로 온전하게 전한 복음전도자가 많이 없었다.”며 이것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교회 안에 무당> 22p) 이를 자기만이 깨달은 진리처럼 하는데 본 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류광수(81회 99회)씨도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유사한 주장을 한 바가 있다.

5) 신옥주 씨는 ‘피지’를 피난처로 삼고 그곳에 가는 것은 죄를 짓지 않을 환경에서 살게 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신 씨는 급박한 종말을 강조하지만 또한 종말관은 이 지구가 멸망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구가 망하여 없어지는 것처럼 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며 종말이 무엇인지 모르고 성경 한 절도 모르는 사람들의 주장이라는 것이다.(<은혜로교회>. 피지 피난처, 피지 예수 재림설, 피지 탈주극? – 유튜브 영상 녹취) 그래서 신 씨는 피지를 ‘피난처’로 삼고 따르는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생의 염려를 하지 않고 절대 죄는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하는데 그 최적의 장소가 피지라고 밝히고 있다(<은혜로교회> 피지 피난처, 피지 예수 재림설, 피지 탈주극? – 유튜브 영상 녹취). (중략)

6) 신옥주 씨의 회개관은 지은 죄를 공개적으로 자백하게 하는 소위 ‘회개파’ 이단과 같다.

신옥주 씨가 세운 은혜로교회 신자들의 특징은 자신들의 죄를 공개적으로 자백하게 한다. 이런 공개적 자복의 근거는 요한일서 1:9로서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이라는 말씀으로 잠언 28:13의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는 말씀이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과거에 지은 죄를 낱낱이 고백하게 하고 그것을 또 인터넷에 띄우기까지 했다. 그 공개적 자백에는 마땅히 부끄러운 성적 죄까지 구체적으로 자백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한국교회 핵심 교단으로부터(예장 합동, 통합, 고신, 합신, 기성) 이단시 결의된 이유빈 씨의 사상과 같은 것이다(이유빈 <예수전도협회>는 합동(1999/84/참여금지), 기성(1999/54/경계집단), 합신(2000/85/참여금지), 고신(2004/54/공개적 죄 자백금지).

<결론>

신옥주 씨가 성경이 방언이며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 방언통역인데 그것이 바로 예언이라고 하는 점과, 정통교회 목사를 폄하하는 말과 예수는 인성을 그리스도는 신성을 나타낸다는 주장이나, 그리고 죄를 공개적으로 자백하게 하는 행위나, 휴거나 그리스도의 재림과 거룩한 자들(성도, 천사)과 함께 다시 강림하시는 사건 외에는 어떤 이적과 기사도 믿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나, 피지 섬을 ‘이생의 염려를 하지 않고 절대 죄는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환경’이라고 하여 성도들로 그곳으로 이주하게 하는 것들은 비성경적이고 이단적인 주장이다. 따라서 본 교단 성도들은 아예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고, 신 씨의 집회에 참석하거나, 동조하거나, 헌금을 하는 일을 엄하게 금해야 할 것이다.

 

장운철 기자 kofkings@hanmail.net

'은혜의 단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0) 2020.08.13
삼류 복서 아버지와 아들  (0) 2020.04.15
김요석 목사 3편  (0) 2019.07.25
김요석 목사 2편 (잊혀진 마을의 사람들)  (0) 2019.07.25
김요석 목사 1편  (0) 2019.07.25

아래의 글은 2014-07-21 부터 2017-10-09까지 "뉴스M 자유토론장"에서 진행되었던 진리님과 어부님간에 나누었던 방언토론 내용으로 방언(성령세례)에 관심이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기독교계에 유익이 될 것으로 믿으며 토론 내용을 공개 합니다. 

토론이 페이지의 맨 아래쪽 부터 날짜별로 진행되며 윗쪽으로 올라왔으며, 토론의 내용이 상대방의 일방적인 삭제로 인하여 매끄럽지 않게 진행 되었음을 미리 알립니다.

출처: http://www.newsm.com/bbs/view.html?idxno=5431

 

어부 2017-10-09 12:41:22

방언에는 골방이나 또는 공개적인 새벽기도 장소에서 각자 기도할 때에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여 기도하는 개인방언이 있습니다. 또한 14장에 나타나는 공적인 예배 중에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교회에 예언적인 방언을 말하는 공중방언이 있습니다. 알지 못하면서 성령의 거룩하신 방언의 사역을 이러구 저러구 거짓 증언하는 죄악을 범하지 않으시기를 아무나 설교하는 교회도 아닌 단체의 신성남님에게 권면 드립니다.

지상에 몇천, 몇만?가지, 자기 언어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언어가 많이 있듯이 영계에는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없는 영언(방언)이라는 헤아릴 수 없는 언어가 무수히 많이 있답니다. 방언의 은사에는 영계의 헤아릴 수 없는 언어들과 수많은 지상의 언어 모두가 사용되어 질 수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지상의 언어는 모두 쏼라 쏼라 영계의 언어는 따락 따락 랄랄라로 들릴 수가 있지요. 하나님과의 비밀한 개인 방언기도를 알아듣는다는 전혀 성격적이지 않은 가짜 은사자들에게 현혹되지 않기를 권면 드립니다. 방언을 모르면 다만 모른다, 겸손해 지시기 바랍니다. 

대개의 성령세례 초년생의 방언으로는 개인적으로 베비 방언으로 부르는 랄랄라 방언이 주를 이룹니다. 갓난아기들이 입을 떼고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떼 떼 떼 하듯이 방언 초년생들에게 나타나는 방언의 은사가 랄랄라 방언이지요. 저의 경우에 초창기부터 베비방언을 사용하여 기도를 해 왔는데 10년쯤 되니 순전한 언어방언으로 바꿔 주셨지요. 유창한 언어방언의 은사를 받은 후로는 랄랄라 흉내도 낼 수가 없더군요^^

개인방언은 보좌에 좌정하여 계신 하나님과 직통으로 교통하는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없는 기도요, 귀신이라도 알아 들을 수 없는 비밀한 기도입니다. 고전14장에 나타나는 공중방언은 반드시 예언의 은사자가 알아 듣고 교회에 예언을 선포하는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가 함께 나타날 때에 교회가 진리의 영이시요 예수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의 뜻이 선포되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한국교회의 성도들이시여 걱정할 일이 무엇입니까? 한국교회에는 보혜사 성령께서 공중방언의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신 일이 없습니다. 공중방언의 역사는 오순절 교단인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서만 나타나는 역사입니다. 공중방언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아니하는 한국교단의 중생한 자들이 염려할 일이 전혀 못됩니다. 방언의 은사를 부정하는 은사중단론자에게 공중방언의 역사? 전혀 나타날 일이 없으므로 왈가불가 할 일도 되지 못합니다.

공중방언과 예언의 역사가 나타나는 예배 현장에서 예언이 끝난 후에 회중 각자가 개인방언으로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공중방언과 개인방언이 동시에 일어나는 예배상황입니다.


어부 2016-10-21 17:31:53

영성(Spirituality, Spiritual Formation)이란 무엇인가?

영성: 신령스러운 품성이나 성질, 또는 정신적 경향, ‘영혼의 품질’, ‘영혼의 성향’ 혹은 ‘영적 센스’라고도 한다.

영성이라는 단어에 속한 “영”이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로 퓨뉴마( Pneuma)이다, 그 의미는 창1-2장에 나타나는 "숨 • 호흡"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생기 즉 호흡을 받고 생령이 된 인간은 호흡이 끊어지면 육신은 썩어 흙으로 돌아가고 하나님께로 온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생기, 호흡, 생령”이라는 단어는 모두 “영”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중국 여행사 Guide인 어느 조선족 자매의 간증입니다. 남한에서 여행 온 목사라고 하는 group을 안내하는데 그들로 부터는 무시 당하거나 불손한 일이 전혀 없이 예절이 바르고 다른 남한에서 온 여행객들과는 다르더랍니다. 아!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은 틀리구나. 그렇게 느끼고 있던 중에 우리 교회의 선교팀을 만나게 되고 기독교 인에 대하여 자세히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만나서 참으로 기쁘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이 같고 있는 영성으로 공산당원의 마음을 녹이는 힘, 바로 우리가 같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성 입니다. 

90년대초 부터 인터넷이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영성이란 단어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2000년도에 [생명의 삶과 소금과 빛]이라는 온누리 교회에서 발간하는 신앙잡지에 영성이란 무엇인가? 로 소개되면서 기독교계에 영성이란 단어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으로 압니다.

신령스러운 품성이나 성질, 성향 또는 정신적 경향을 의미하는 단어로 한마디로 이것이다. 신앙인들이 한마디로 딱 짤라 말할 수 없는 단어가 영성이란 단어이다. 영성이란 단어와 함께 신령이라는 단어를 제시합니다. 신령이란? “하나님께 속한 모든 영적인 것” 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것이 구원받은 성도를 통해서 표면으로 나타날 때에 성도의 믿음과 영적인 성품에 따라, 또는 어떠한 교리의 가르침을 받느냐에 따라서, 각각 다른 영성으로 나타날 수 있다. 칼빈이냐 장로교회냐 성결교 감리교이냐 오순절이냐 하나님의 성회이냐에 따라 영성의 차이가 천차만별로 나타날 수가 있다. 같은 오순절 성령을 받은 한 몸에 붙어있는 한 영성임에도 기존세대들 하고 청년세대의 영성이 또 다릅니다. 또한 영성을 다른 말로 믿음의 색깔(Taste)로도 표현합니다. 믿음의 열심으로는 따라올 자들이 없는 은사가 넘치고 성령충만한 오순절파의 영성에도 각자에게 있는 개성에 따라 믿음의 색깔이 조금씩 다른 모습 입니다.

(살전5: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온 영과 혼과 몸의 상태가 주 앞에서 어떠하느냐에 따라 영성이 다르게 나타난다 볼 수가 있다.

성경적인 영성(靈性, spiritual formation)이란? 무엇인지를 바르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과학 문명과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 같지만 사람은 원래부터 영적인 존재이므로 영적인 목마름과 갈망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영을 넣어 주셨기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인다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1:19)”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성경적인 영성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도록 본래에 넣어주신 영의 성질" 입니다.


어부) 2016-08-17 06:22:50

제13장 동성연애

남자이건여자이건 간에 동성연애 행위는 국가적인 도덕기준의 심각한 침식을 반영하는 영역이다. 동성연애자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전례없는 대담성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탈선에 연루된 것을 부인하는 다른 사람들이 이제는 이러한 사람들의 옹호자가 되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크리스찬들이 깊이 관심을 가지는 한 가지 이유는 동성연애를 국가적으로 용인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그 국가의 영적 상태의 한 표시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표류하였을 때, 그 민족은 남색(sodomy)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악을 용납하였다.(왕상14:24)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 동성연애는 용인되지 아니하였다.(왕상15:12)

하나님의 성회는 모든 믿음과 행위는 성서에 근거하여 평가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성경은 동성연애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권위있는 법에 의하여 그 입장이 확립되도록 고려해야 한다.

동성연애는 죄이다.

때때로 인간적인 이유는 동성연애를 심리학적인 문제이거나, 육체적인 상태 혹은 생활방식의 신중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죄라고 한다. 이 문제에 관한 교회의 관심은 소수 그룹에 대한 차별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문제이다. 성경은 이것에 대하여 명확하게 말씀한다.


1. 동성연애는 하나님이 태초에 제정하신 성의 원리에 반대되기 때문에 죄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1:27) 하나님이 남자를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셨다(창2:18)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남자에게 적합한 배필을 창조하셨다.(창2:18) 남자의 외로움은 다른 남자를 창조함으로써 제거된 것이 아니라 여자를 창조함으로써 제거되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이 여자를 그에게 데려왔을 때 아담음 “이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칭하리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3,24)라고 하였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성의원리를 제정하셨는데 이 원리에 의하여 인간이 번식하게 되었다. 심리학적으로 이러한 관계는 건전하였다. 육체적으로 이 관계는 자연스러웠다. 사회학적으로 이상적인 가정 단위를 세웠다. 성경적인 개념은 인간의 성이란 이성적으로 일부일처적 관계가 이상적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동성연애를 택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성의 원리를 거부하는 것이다.그들의 탈선한 성행위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성의 특성에 대한 죄를 유발하는 것이다.(롬1:27) 그리고 그들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
라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사회적 단위를 구성하는 것이다.(창2:24) 바리새인들과의 토론에서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이 제정하신 성의 원리를 반복하셨다(마19:4-9) 그는 이성 간에 결혼을 제외한 유일한 생활방식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독신생활임을 지적하셨다.


2. 동성연애는 성경이 악하다고 하기 때문에 죄이다.


하나님이 독특한 의미로 이스라엘을 그의 나라로 부르셨을 때 하나님은 애굽의 압제로부터 기적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이상의 일을 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행동을 안내하며 지시하는 한 율법을 주셨다. 도덕에
관계되는 율법 가운데 동성연애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 있다.


레18:22에서 하나님은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 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레20:13에서는 이것을 위반한 사람에 대한 가혹한 형벌을 명령함으로써 이 하나님의 명령을 보강하고 있다. 즉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금지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롬1:21-27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창조주보다 창조물을 섬기며 경배하는 사람들의 생활에서 따라오는 결과들을 기록하였다. 그들은 그들 사이에서 자기들의 몸을 부끄럽게 하였다. 그들은 성을 순리대로 쓸 것은 바꾸어 역리로 썼다. 그들은 불의, 음행, 악의, 탐욕, 악독이 가득하였다. 그들은 부정한 자요, 원통함을 풀지 않은 자요, 무자비한 자였다.


바울의 시대에 고린도는 부도덕으로 유명하였다. 이 도시는 상업 뿐만 아니라. 악폐와 부도덕의 중심지였다. 교회가 이 도시에 세워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모든 종류의 부도덕을 어떻게 보시는지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였다.
그 기록은 매우 뚜렷하다. 바울은 기록하기를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리고 계속하기를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하리라”(고전6:9,10)고 하였다. 바레트(C. K. Barrett)는 그의 주석 “고린도전서”(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에서 탐색은 미동을 상대로 하는 남색을 의미한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탐색과 남색은 남자 동성애 관계에서 하나는 소극적이고, 하나는 적극적인 상대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기록하기를 법은 “불법한 자와 순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를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하였다.(딤전1:9,10) 이 사람들은 의롭다고 묘사되는 사람과는 대조적으로 경건치 않은 자들이라고 하였다.


3. 동성연애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죄이다.


고대 소돔이라는 도시는 동성연애에 대한 동이어가 되었다.(영어로 sodom 사람은 남자 동서연애자를 의미한다:역자주) 다른 악한 것들이 이 사회에 존재하는 동안 동성연애도 현저하게 되었다. 소돔의 동성연애자들은 매우 타락하여 자기들의 동네에 찾아온 손님들을 욕보이려고 위협하였다. 역사적인 기록은 그들이 난폭해져서 롯이 손님들을 맞아들인 그 집의 문을 부수려고 하였던 것을 보여준다. 오직 하나님의 간섭으로 롯과 그의 가족은 악한 의도에서 건짐을 받았다.
이 사람들은 너무 타락하여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창19:4-11,24,25) 이 도시들에 대한 심판의 가혹한 정도는 너무 강렬하여 베드로와(벧후2:6) 유다(유7)가 하나님의 심판을 설명하는데 사용하였다.


동성연애자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


성경이 동성연애는 죄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지만 또한 동성연애자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가르친다. 동성연애는 도덕적인 문제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그 죄인을 도우실 수 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
이 없다.


고린도에 있는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권세에서 구원받는 이전의 동성연애자들이 있었다. 고전6:9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수 없는 자 중에 동성연애자를 포함시켰다. 그리고 11절에서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과거시제이다. 그들은 동성연애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죄로부터 구원받았다.


성경은 속죄의 효력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제한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제거할 수 없을 만큼 어두운 죄의 자국은 없다. 세례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보라”(요1:29)고 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 ”(고후5:21)고 기록했다. 요한도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요일1:9)고 기록했다.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능력을 통해 사람들은 그들의 죄의 본질과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고후5:17)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죄의 심판과 권세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는 동성연애자들도 다른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와야 한다.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행위는 회개와 믿음 두 가지를 다 포함한다.


예수를 주시요, 구세주로서 영접해야만 한다. 이러한 회심의 개념들은 순서적이기보다는 동시적이요(회개가 먼저 오고 그 다음에 믿음이 오는 순서적인 것 보다는 회개와 믿음이 동시에 있을 때 회심의 역사가 있다는 의미이다.:역자주),이 둘이 다 포함된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한다. 예수는 그의 승천에 앞서 제자들에게 주었던 교훈 속에서 회개와 죄사함이 반드시 전파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눅24:47) 회개는 죄로부터 돌아서는 시점에서 마음이 변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에 반하는 다른 자세들과 행위들도 포함된다.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던 빌립보 감옥의 간수처럼 구원을 소원하는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행16:30,31) 곧 그가 죄의 심판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로부터도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회개와 마찬가지로 순종하는 믿음도 구원의 조건이다.


동성연애자에 대한 크리스찬의 자세

크리스찬은 동성연애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습관에 관계된 사람들에 대해 크리스찬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떤 죄들은 타락한 자와 초신자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다른 죄보다 더 책망 받아야 한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크리스찬은 동성연애자들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는 자세를 갖도록 확인해야 한다.

그들은 이러한 행위를 용인하게 하는 감상주의적인 경솔함을 피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기를 원하는 자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간과해서도 안된다. 증언을 위한 기회가 전개될 때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정직하게 원하는 사람들과 하나의 또 다른 생활방식으로서 동성연애에 대한 동정심을 구하는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기 위해 성령의 인도를 따르도록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5절에 언급된 부도덕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엡5:6)라고 성경은 신자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계속해서 성경은 신자들이 열매없는 어두움의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엡5:11) 하나님께서 정죄하는 것을 교회가 너그럽게 봐줄 수 없다. 만일 동성연애자들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제안을 거부한다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영역 밖에 놓아 둘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교회의 교제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성연애 도착증에 빠진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기는 구한다면 크리스찬은 도울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신자의 마음에 널리 뿌려진 것처럼 이 사랑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처럼 신자들도 죄를 미워하면서 죄인을 사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신자들은 동성연애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행하는 길이 죄의 길임을 깨닫도록 돕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해 신실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 누리는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능력과 풍성한 생명에 대해 증거해야 한다. 그들은 동성연애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축복을 원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모든 것을 해야 한다. 그럴때 그들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을 아는 만족을 누리게 될 것이다.(약5:20)


어부 2016-07-25 07:47:57

간증이란?

간증은 하나님께로 향한 당신의 순례 기록이며,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효과적인 도구의 하나이다.

간증이 효과적인 증거가 되는 이유
첫째는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경험한 바를 듣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고, 
둘째는 아무도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반박할 수 없으며, 
셋째는 개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쉽게 나눌 수 있고, 
넷째는 다른 사람도 자신의 삶을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도록 할 수 있고, 
다섯째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버리게 할 수 있다.

효과적인 간증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민감한 부분에 대해 먼저 파악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삶 가운데서 건드리거나 자극을 받으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영역이나 필요가 존재한다.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간증을 나눌 때 자신의 민감한 부분을 중심으로 간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이 자신의 문제를 솔직하게 인정할 때, 비로서 사람들은 당신을 진실하며 가까이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게 되어 자신의 민감한 부분도 당신에게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필요한 부분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도와주셨는가에 대해 나누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간증을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삶, 믿게 된 경위, 믿음 후의 삶의 변화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전했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삶에서는 자신을 청중들과 동일시하면서 그들의 민감한 부분을 드러냈고, 믿게 된 경위에서는 왜 제자가 되었으며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해 밝히고 있다. 끝으로 믿음 후의 삶의 변화에서는 자신의 필요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해결되었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간증을 나눌 때 주의해야 할 점으로는 
첫째, 자신의 지난날을 다 이야기하지는 말 것(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 것)
둘째, 바울의 간증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눌 것, 
셋째, 민감한 부분을 상세히 설명할 것, 
넷째, 복음을 명확하게 소개할 것, 
다섯째, 민감한 부분의 해결책을 설명할 것, 
여섯째, 신중하게 나눌 것, 
일곱째, 1인칭을 사용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하되
설교를 하려 들거나 자기 자랑을 늘어놓지 말 것, 
여덟째, 자신의 간증의 가치를 인식할 것(그리스도와 하신 사역을 높이고 있는가?)
아홉째, 사실을 말할 것, 
열번째, 기도하며 성령의 감동으로 준비 할 것 등이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당신의 간증에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삶 가운데 있었던 민감한 부분을 사실적, 구체적, 그리고 개인적으로 간결하게 써야 한다. 믿게 된 경위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영접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믿은 후 변화에서는 당신의 민감한 부분과 관련 지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를 설명하되, 설교로 발전되어서는 안 된다.


어부 2016-06-25 12:28:36

신자의 보장

하나님의 성회는 신자의 보장에 관하여 하나님의 성회 조례에 선언하였다(제 8조 1항)

신자의 보장은 그리스도와의 생생한 관계에 좌우한다는 성서적인 가르침의 견지에서(요15:6), 
거룩한 삶으로의 성경의 부르심의 견지에서(히12:14, 벧전1:6),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책임이 사람에게 일부 있다고 하는 분명한 가르침의 견지에서(계22:19), 
잠시 믿던 사람이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의 견지에서(눅8:13),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한번 구원받은 사람이 그 구원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고 하는 무조건적인 보장의 입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왜 이러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지 더욱 설명하고자 한다.

신자의 보장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의 극단적인 입장의 중간에 서있다. 우리는 양쪽의 가르침에서 성서적인 요소를 받아들인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특권을 올바르게강조하는 반면 알미니안주의자는 사람의 자유의지와 책임 또한 올바르게 강조한다. 그러나 이 두 입장을 적절하게 이해하려면 그것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임의에 의해서 때묻지 않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특권을 믿으며 또한 사람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믿는다.

하나님의 성회에 의해서 취해진 신자의 보장에 관한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4가지가 강조되어야 한다.

1.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요3:16, 롬10:11-13, 벧후3:9)
2. 구원은 믿음으로 받으며 유지된다.(롬3:28, 갈2:20-21, 엡2:8, 빌3:9, 히10:38, 벧전1:5)
3. 계속적인 죄는 신자의 믿음에 해롭게 영향을 준다. (롬3:5-8, 고전3:1-3, 히3:12-14, 12:1, 요일1:8, 3:8)
4. 신자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면 상실된다.(요17:12, 딤전4:1, 5:12,15, 히6:4-6, 10:26,27,38, 벧후2:20, 
요일5:16)

1.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구원 받기로 예정되었으며, 또 다른 사람은 멸망 받도록 예정되었는가?” 그리고 “누가 택함을 받은 자인가?” 이 두가지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복음의 메시지가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을 향하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명확해진다. 신약성경을 읽는 사람은 이 위대한 진리를 놓칠 수 없다.

그러나 로마서 9-11장에서 신자의 구원에 있어서 사람의 자유의지가 배제되며 택함을 받은 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떠나서 완전히 그의 주권으로 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 있다. 예를 들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내가 긍휼히 여길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9:11,13,15,16,18)
그러나 이 구절을 선택에 관하여 가르치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볼때 사람의 의지가 선택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야곱은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선택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이 무엇을 할 것인지
하나님이 미리 알고 계시다는 것에 근거한다. 이 진리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쓴 베드로의 편지에 나타나있다. 이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었다.(벧전1:1,2)

이 진리를 또한 롬8:29에도 나타나 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기록했다. 하나님은 미리 자비를 보일 조건을 정하셨다. 그리고 그의 미리 아시는 지식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를 선택하신다.(엡1:4). 이와같이 하나님은 그의 주권 안에서 구원의 계획을 제공하셨으며 이에 따라서 모든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있다. 이 계획안에서 사람의 의지가 고려된다. 구원은 누구든지 원하는 자에게 열려 있다.

2.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 받으며 유지된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명백히 말씀한다.(엡2:8)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한다. (합10:38, 롬1:17, 갈3:11, 히2:4) 신자의 구원은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아 받
아들여짐과 같이 신자의 구원은 의로운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의 생활로 인하여 유지된다.
크리스찬이 되는 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 이것은 강조되어야 한다. 죄인이 자기가 행한 어떤 선한 일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경우는 없다. 그는 전적으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는다.

믿음으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대신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믿음으로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 앞에 맡기며, 그리스도를 본다. 자신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을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을 깨닫는다.(빌3:9) 그는 믿음을 통해서 자신이 받아들여진 것을 알고, 이러한 지식은 그에게 기쁨과 평안을 준다. 그러나 신자의 상태는 그의 신분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믿음 때문에 안전하게 서있다. 
그의 신분은 그가 믿음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그는 의로운 위치에 서 있으며 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었다.

신자의 상태 혹은 신자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로 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성령과 협력하여 순종함으로써 얻어지는 점진적인 성화인 영적 성장과 관계가 있다.(롬6:12,13, 8:13, 골3:1-5, 벧후1:5-7) 성숙해 가는 과정 속에서
신자는 그의 승리 뿐만 아니라 실수를 통해서도 배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보장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견고할 동안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으로 지키심을 받기 때문이다.

그의 영적 성장은 그의 안에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께 대한 순종과 주의에 따라 달라진다. 완전을 향하여 성장하는 동안에 그는 여전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완전한 자로 간주된다. 자신을 적응시키는 과정 속에서도 그는 안전하며 그의 구원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신자의 보장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나 구원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 보증된다. 이 보장은 신자가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을 유지하는 한, 타락할 수도 있고 결점도 있는 신자에게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3. 계속되는 죄는 신자의 믿음에 악영향을 준다.

성경은 신자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를 지으며, 그가 죄를 지었을 때 그가 의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요일1:8,9, 2:1) 이와는 달리 크리스찬이 죄악의 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즉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그는 습관적으로 죄를 범할 수가 없다. (요일3;8,9 여기서 헬라어 시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죄를 짓는 것은 마귀의 일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누구든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며 습관적으로 죄 짓기를 계속하지 아니한다. 그는 마귀의 자녀가 하는 식으로 죄짓는 것을 계속할 수 없다. 그 대신에 크리스찬은 계속적인 자기의 믿음에 악영향을 주는 것을 인정하고, 죄를 내려놓고 영적으로 자라야 한다.

이것은 크리스찬이 죄를 범할 수 있고 여전히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많은 사람의 첫 번째 반응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염려, 교만, 시기, 쓴뿌리 등은 공통적으로 범하는 과오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죄를 범하는 신자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욱이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죄 없는 완전을 요구하신다고 주장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신분이 그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면 믿음에 의해서 그에게 씌워진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것인가? 만일에 사람이 흠 없는 생활을 유지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얻은 것이 된다!
그리고 또한 사람이 흠 없어야만 하나님이 받으신다면 크리스찬의 삶은 바울이 롬8:1에서 주장한 것처럼 정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계속적으로 철저한 자기 분석과 참회를 행하며, 두려움과 정죄로 가득 차 있으며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확신과 기쁨이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롬5:9-11을 보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비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우리는 위하여 영광에 이르는 모든 길을 제공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 이러한 확신은 그 안에서 우리로 기뻐하게 한다.)

관련된 질문으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순간에 죄를 범한 신자에게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할 수 없으며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신자는 구원을 잃게 될 것이며 영원한 파멸에 이를 것이라고 가르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낙심되는 일인가!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안과 밖을 들락날락하면서 회전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안전하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그러나 크리스찬이 범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강조되어 말해져야 한다. 옛날의 죄를 계속해서 범할 수는 없다.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신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며, 그에게는 이전 것은 지나갔으며 새것이 되었다.(고후5:17)

이와같이 이제 죄를 범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전의 삶은 과거의 것이며, 안에 잠재된 힘이며 다스려져야 하며, 새로운 신분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롬6:11) 이전의 삶은 과거의 것이며, 안에 잠재된 힘이며 다스려져야 하며, 새로운 신분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롬6:11) 이전의 습관과 행실이었던 것은 이제 부자연스러우며 우리의 새로운 마음에 반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죄짓기를 계속하지 아니한다)”고 사도 요한은 말했다. 즉, 죄는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낯선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된 새로운 피조물은 죄를 짓지 아니한다. 그러나 옛것이 잠시 우발적으로 우세하게 될 때 새 피조물은 이 부자연스러운 침입에 대항하여 싸우게 되는데 즉시 의지할 것은 그리스도이시다.

죄를 범한 신자가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면 그는 자신의 영혼이 멸망하게 되었다는 실망을 안고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미쁘시고,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보혜사를 모시고 있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확신을 가지고 돌아온다. 이와같이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특권을 사용하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자신의 신분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신자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강조하는 것도 필연적이다. 신자는 자유의지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계속해서 자유의지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 믿음을 계속 유지 하는 것은 신자의 책임이다.

또한 신자는 죄에 대하여 가벼운 자세를 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가로 사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롬6:1)하며 바울은 묻는다. 그 대답은 단호
하게 부정적이다. 바울은 지속적인 죄가 신자의 믿음에 악한 영향을 준다는 것과 믿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알았으며 또한 가르쳤다.

지속적인 죄는 주제넘게 하며, 고자세가 되게 하며 또한 반역의 증거이다.(민15:30,31) 번역은 의지나 믿음의 순종에 반대되는 것이다. 신자는 반드시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히12:15) 항상 주의해야 한다. 성경의 권면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고후13:5)는 것이다.
왜 이러한 경고와 우려를 하고 있는가? 이렇게 반복되는 경고들은 믿음을 잃게 되면 영원한 영혼의 파멸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신자의 구원은 그의 의로운 행동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그의 의로운 행동으로 유지되는 것도 아닌 것이 사실인 반면 신자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처럼 또한 믿지 않음으로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것도 똑같이 사실이다.
죄와 불신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죄는 믿음을 위태롭게 하며, 믿음을 잃는 것은 자신의 신분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히3:12-14 은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형제들에게 불신에 대하여 경고하였는데 이 불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는 불신의 원인으로서 죄의 유혹을 언급하였으며,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만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할 자가 될 것이라고 상기시켰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믿음에 의해서이다. 믿음을 제거하면 거기에는 더 이상 서 있을 곳이 없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신자들에게 “삼가 혹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지 않도록”(히3:12) 훈계하는 이유이다.

4. 구원은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상실될 수 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쉽게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롬10:21을 보라. 여기서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나 적용할 수 있는 원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신자가 성령의 계속적인 점검을 무시하고 예수를 그의 구세주로 모시기를 거부하는 곳에까지 이르면 그는 구원을 상실하게 된다.

잠시동안 믿다가 유혹이 올 때 배반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눅8:13)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약한 형제가 실족하는 것은 가능하다. (고전8:11) 생명책에 기록되었던 이름이 그 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것은 가능하다.(계22:19)
한 사람이 그의 구세주이신 예수를 이미 배반하였는지 판단하는 것은 항상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에 관한 판단은 전지하신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사실은 확실할 수 있다. 즉 만일 하
나님이 탕자를 돌아오게 하시는 그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직도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아니하셨는데도 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그 사람을 삭제해 버린다.

성경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성령의 탄식에 응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소망을 끊임없이 제의하고 있다. 예수의 초청은 자격을 따지지 않는다.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실 때 이것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다.

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10:13)고 성경이 말씀하실 때도 모든 사람에 대한 것이다.

 

 

어부 2016-06-14 07:31:55

중생한 신자가 귀신들릴 수 있는가?

동양종교와 미국내의 사교의 보급으로 전에 외국에서 선교사 들이 보고한 것과 유사한 귀신들린 역사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런 일은 너무나 자주 발생하는 반면 이러한 영역에 있어서의 가르침은 너무나 미미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라는 명령 이상의 것을 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영혼의 원수에 대하여 확고하게 경고하고 있으며, 귀신은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손길”, 성령의 권능,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통하여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다.

극단주의의 위험

어느 무시된 교리를 강조할 때 성경의 의도를 넘어서 극단주의로 나갈 위험이 있다. 또한 무시된 교리를 전체의 사역으로 삼음으로써 목회의 궤도를 벗어날 가능성도 있다. 이것은 귀신론의 주제에 매혹된 어떤 사람들의 경우와 같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관심을 귀신론에 집중함으로써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들이 귀신을 많이 쫓아내면 낼수록 쫓아내야 할 귀신의 수도 많아지기 때문에 귀신 쫓는
이외의 사역은 실제적으로 무시된다.

그리스도를 높이기보다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빠지게 되는 이러한 경향은 성경의 균형에 모순된다. 또한 귀신을 좇아낼 때 여러 가지 토해내는 등 외적인 현상에 대한 부수적인 선입관은 성경에서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귀신이 영적인 존재임을 잊었다.) 거품을 일으켰던 경우에 있어서도 성경은 귀신이 쫓겨가기 전에도 지속적으로 있었던 일이었으며 귀신이 쫓겨날 때만 있었던 현상이 아님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귀신론에 대하여 비성경적으로 지나치게 강조한 경우 유감스러운 부작용이 있는데 그것은 때때로 성경적인 가르침까지도 악평을 듣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16세기와 17세기의 영국 그리고 17세기 미국의 소위 마법의 결과였다. 영국에서 사례들이 보고된 것이 있는데 그 중에는 아이들이 그들의 몸속에 들어갔다고 추정되는 악령을 토해냈다는 것이다.

1962년 커튼 마더(Cotton Mather)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바드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유능한 설교가였다. 이 사람이 마녀들에 대하여 메사추세츠주의 살렘에 사는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귀신들린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들의 증언 때문에(이 아이들은 다른 설명이 더욱 필요하겠지만 거짓말하는 귀신에 의하여 움직였던 것 같다.) 19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150명이 감옥에 들어갔다. 

고발당한 사람들 앞에서 이 아이들은 발작을 일으키다가 혼수상태처럼 보이는 상태에 들어갔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당한 고통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대었다. 고발당한 사람 중 상당수는 기독교 순교자에 해당하는 믿음과 정신을 보였지만 인격적으로 고상한 판사는 이 사람들을 유죄로 판결하였다. 이 재판이 공개된 결과로 이때 당시의 미국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하여 외면하게 되었으며 사탄과 악령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미신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탄이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귀신이나 악령들에 대하여 잘못된 관심을 갖게 하여 성경이 제시하는 명확한 가르침의 도에서 떠나도록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귀신이나 악령에 대하여 잘못된 태도를 갖게 될 때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외면하게 되고 하나님의 일은 방해를 받게 된다. 그러나 조심한다고 해서 귀신론을 가볍게 취급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귀신의 활동과 그들의 수가 많은 것을 명확히 가르쳐 주고 있다. 영어 성경에서 마귀(devils)라는 단어는 실상 귀신(demons)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더욱 자명한 일이다.

실지로 마귀라는 단어는 (헬라어, Diabolos는 “참소자”이다) 사탄에게만 적용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가 귀신들을 통해서 역사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사탄은 피조물이며 제한 받는 영이며, 편재하지도 않는다. 사탄은 세계의 곳곳에 흩어져 있는 귀신들을 통해서 대부분 그의 일을 수행한다. 귀신들을 쫓아내던 예수의 사역은 적어도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치유하는 사역의 일부였다. (행10:38)-여기서 사용된 “눌린”의 뜻은 오늘날 사용되는 의미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제기되는 질문은 오늘날도 귀신이 활동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한 신자도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 있는가 혹은 누군가가 중생한 신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성령과 귀신이 한 집에 같이 거할 수 있는가?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 아닌가?

저자들이 말한 것

대부분의 옛날 저자들은 참된 기독교인들 안에 귀신이 거할 수 없으며 귀신이 참된 신자들을 사로잡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한 예로서 존 네비어스(John L. Nevius)라는 장로교 선교사는 거의 40년간 중국에서 살았는데 귀신들린 사례를 많이 보았지만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볼수 없었다고 한다. 빅톨 플리마이어(Victor Plymire)라는 오순절 계통의 개척 선교사는 티베트에서 유사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더욱이 최근 여러 교단의 저자들은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넬슨(M. H. Nelson)이라는 의사는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고통 당하는 듯이 보이는 기독교인들에 관한 많은 보고서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들 중 몇몇은 하나님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불순종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외견상 이 의사는 영원한 보장을 믿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귀신이 신자의 몸과 마음에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신자의 몸이 귀신에 의하여 사로잡히는 것은 매우 의심스럽다고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귀신이 기독교인의 속 사람을 사로잡지 않은 채 기독교인의 몸속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하는 성경의 관점에 배치되는 것 같다. 또한 책임이 관계되는 한에 있어서 한 사람을 여러 모양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이방인의 사고방식이다. 만일에 귀신이 몸이나 마음(혹은 자세)중 어느 영역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들어간 것이 된다.

성경이 말하는 것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문제들로부터 구원하고 계시며, 귀신들리는 것으로 부터도 구원 하신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일어난 사건에 대한 그들의 해석과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는지 우리는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비겁하게 두려워하는 영(spirit of cowardly fear)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으로부터 구원받으려면 두렵게 하는 귀신과 근신 혹은 절제의 영(한글판에는 spirit이 마음으로 번역되었음:역자주)으로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두려움을 쫓아낼 필요가 있는 악한 영이라고 해석한다면 동일한 논리로 선한 영들이 들어오기를 간청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잘못은 명확한 것이다. 사랑이나 절제는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들이다. 사랑이나 절제의 영은(a spirit of love and of self-control) 우리
가 성령을 따를 때 결과로서 나타나는 자세를 의미한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영(spirit)이라는 단어는 자세 혹은 기질을 나타낸다. 다윗은 상한 영(broken spirit:상한 심령, 시51:17)이라고 말했으며 솔로몬은 겸손한 영(humble spirit: 마음을 낮추는 것, 잠16:19)이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고린도에 갈 때에 매대신 사랑과 온유한 영(love and meek or gentle spirit: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하였다.(고전4:21) 베드로는 온유하고 조용한 영의(meek and quiet spirit: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단장하라고 말하였는데 (벧전3:4) 실제로는 조용한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이라는 단어는 자기 자신의 심령이나 그것의 표현으로 자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학개1:14), 행17:16, 고전2:11 등. 그러나 학1:14, 행17:16에서 spirit 을 한글 성경에서는 마음으로 번역했다 : 역자주)

이와같이 문맥상 독립된 영적 존재라는 뜻이 나타나 있지 않다면 거만한 영, 성급한 영, 졸리운 영, 시기의 영 등과 같은 말은 귀신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갈6장)이나 죄의 기질로 취급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이러한 죄의 기질을 귀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개 개인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지 않게 되며, 회개할 필요성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은 이러한 죄들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세를 버리라고 한다. 우리 안에서 싸우는 싸움은 성령과 귀신 사이에 싸움이 아니라 내주하는 성령과 육신과의 싸움인 것이다.(육신은 죄의 경향을 띤 모든 감각기관을 의미한다.)

“영”이라는 단어가 귀신에 대하여 사용될 때는 성경은 악령 혹은 더러운 영이라고 말한다. 때로는 이 단어는 같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더러운 마귀의 영(a spirit of an unclean devil, 한글 성경에는 더러운 귀신으로 번역되었음:역자주. 눅4:33)같은 것이 있다. 많은 경우 이 귀신들은 질병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모든 질병을 귀신이나 악령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실재로 많은 구절들이 귀신에 의한 질병과 그렇지 않은 질병 사이에 분명한 구분을 보여준다.(마4:24, 8:16, 9:32,33, 10:1, 막1:32, 3:15, 눅6:17,18, 9:1 등) 이들 중 어느 구절에도 귀신에 의한 질병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있었다는 단서를 보여주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모든 예가 오순절 이전에
사건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이모니조마이”라는 헬라어에는 귀신에게 사로잡히다, 혹은 귀신들리다라는 뜻인데 많이 나타나지 않는 단어이다. 이것은 오직 한번 동사로 사용되었는데 심하게 귀신들린 가나안 여인의 딸의 경우이다. 그 외에는 “귀신들린”이라고 번역되는 분사로써 사용되고 있다. (마8:28,32, 9;32, 12:22, 막5:15-18, 눅8:35) 다시 말하거니와 이 귀신들린 사람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
고 할 수 있는 단서는 없다. 이들 중 대부분은 심한 괴로움을 겪거나 급격한 인격의 변화를 경험하였다.

신자도 귀신들릴 수 있다는 사상은 또 다른 큰 문제를 야기시키는데 그것은 믿음을 잠식하며, 하나님과 하나님이 제공하는 구원에 대한 개념을 약화시킨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골1:13) 지난 시대에는 우리가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다
(엡2:2)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였으며 우리를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으로 삼으셨다(엡2:19)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되었는데 우리의 몸 안에 귀신이 거한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린다. 우리가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롬6:17)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도록 자유인이 되었다. 지금도 신자는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 만일 신자가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그렇게 하고자 하는 자기의 의지 때문이지 귀신에 의해서 침입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로마서는 귀신을 좇아낼 것을 요구하지 않고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데 사람이 믿음으로 자기의 신분이 결정된다.

만일 신자에게 귀신이 있다면 예수님도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분쟁사태를 초래 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 낸다고 말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사탄의 왕국이 서로 대적하며 분쟁하고 있다고 가정하였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거부하였다. 눅11:21,22은 사탄이 신자를 사로 잡으려고 할 때에 예수께서 사탄을 이기시고 무장해제 시킨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귀신이 돌아와서 그 집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만 귀신이 다시 들어갈 수 있다.(눅11:24-26, 마12:43-45) 진실한 신자에게 귀신이 있다는 사상은 또한 구원과 평강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잠식한다. 이것은 신자가 다음 어떤 귀신이 자신을 침입할지 전전긍긍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엄청난 두려움을 자아내게 한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가 소유했다고 확신시켜주는 자유와 배치되는 것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이나 2세기 교회의 신자들은 이런 종류의 두려움을 갖지 아니했다. 주후 139년경에 목자(The Shepherd)라는 매우 영향력 있는 기독교 책을 쓴 헤마스(Hermas)는 부패를 책망하며 기독교의 덕목을 격려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사람 안에서 악령이 거하면서 주관할 수 있다고 말하였지만 이러한 악령을 지니고 있는 사람 안에 성령이 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였다. 성경은 신자를 위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4:4). 신자는 귀신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이다. 이것은 기본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외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지적한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사탄이 그 안에 가득하여 성령께 거짓말하기 전에 이미 타락하였던지, 아니면 스스로 교회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다.(행5:13,14참조) 적어도 그 당시에 자칭 그리스도인 이상은 아니었다.

악령을 대적할 것

귀신들린다는 말을 진실할 신자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하게 보인다.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사탄과 그의 무리들은 외부적인 원수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탄의 세력에 대하여 전쟁 중에 있으며 그들은 우리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엡6:12 참조) 성경적인 강조점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에서 무엇을 대면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 요구는 우리가 누군가를 시켜서 우리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은 밖에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으며 시험하고 있지만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요구는 깨어 있어 전신갑주를 입고 굳게 서라는 것이다. (고후10:3-6, 엡6:10-18, 벧전5:8,9)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사탄을 물리쳤다.(마 4장)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사탄과 그의 귀신들을 믿음으로 대적해야 한다.(약4:7,벧전 5:8,9) 그리고 믿음의 방패는 원수의 불화살을 꺼버릴 것이다.(엡6:16,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대대로 천사를 통해서 오듯이 사탄의 공격도 대대로 귀신이나 귀신들린 사람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사탄의 공격이 외부적이라는 사실은 욥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의 육체에 있는 가시의 경우인데 바울은 이것을 자기를 치기 위하여 사탄이 보낸 사자라고 불렀다.(고후12:7 참조) 바울은 이것을 떠나게 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간구하였으나 하나님은 거절하시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하셨다. 그 결과 바울은 그의 연약함과 수치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여기서 사탄의 사자가 귀신인지, 질병인지, 혹은 사람인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치고 공격하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내쫓아 달라고(cast out) 간구하지 않고, 떠나게 해달라고(to be kept away) 간구하였다. 또한 우리는 바울이 그 자신과 우리 안에서 유일한 소망으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보고 있음을 유의하여야 한다.(골1:2,29) 우리는 또한 영들 분별의 은사가 성령의 내주함이 없는 사람들을 주관하는 영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지 신자들 안에 있다고 여겨지는 귀신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만일 진리가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다.(요일2:24) 오직 우리가 포도나무에서 잘려져 죽은 가지로 버려졌을 때만이 사탄이나 혹은 그의 귀신들이 우리를 주장할 수 있다.

우리의 구속은 전인적인 구속이다. 모든 대가는 이미 지불되었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그리스도가 귀신들렸다고 공격하였다. 그것은 마귀의 교묘한 수작으로서 오늘날 성실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이 귀신들렸다고 공격하게 만드는 것이다. 확실히 여러 가지 구원들이 있다. 그러나 귀신들림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어부 2016-06-11 02:42:28

성령세례 간증

이민 와서 신앙생활 하며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주의 은혜를 알게 된 이후 나의 행동반경은 교회, 가정, 직장 삼각지대를 벗어나 본일이 없습니다. 교회 중심적인 생활이지요. 당연히 수십년을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가서 뒤로 잠그고 나오는 그러한 신앙생활로 모든 공예배와 부흥회, 특별집회의 현장에 제가 있습니다. 당연히 예배준비와 예배실 뒷정돈까지 제 담당 입니다. 그러면서 성령세례 받고 기뻐 어쩔줄 몰라하는 여러 성도님들 수없이 보아 왔습니다. 

1. 그 중에는 한국에서 갓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유학생활로 미국으로 와서 10년동안 공부하며 신앙생활 열심히 하다가 부부박사 학위에다, 아들 딸 낳고 한국으로 떠나기 직전 부부가 성령세례 받고 금의환향하는 복된 성도의 귀환을 여럿 보아 왔습니다. 성령세례 받고 기뻐서 얼굴에 홍조를 뛰며(신부의 얼굴에 연지 곤지 발라야만 있을법한 그런 홍조) 기뻐하는 모습, 자신이 처음 성령세례 받을 때의 담담하던 기쁨보다도 더한 기쁨으로 다가오곤 하던 기쁨,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그런 기쁨 입니다. 

2. 친한 친구 사이인 두 자매가 성경공부에 참석하게 되고 성령세례에 대하여 공부한 이후, 첫 부흥회에서 입니다. 한 자매는 성령세례 받고, 다른 자매는 자신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예배 후 성전에서 대성통곡을 하게 됩니다, 이를 아시게 된 목사님이 “모든 죄를 자복하라” 하며 안수를 합니다. 그 자매 “주님! 잘못 했습니다. 주님! 잘못 했습니다” 하며 째지는 듯한 절규의 자복이 있자, 그 자매의 입에서 따라락 하며 금속성 같은 소리로 방언이 터져 나올 때의 그 모습이 선합니다. 그 두 자매의 남편들은 한전에서 wasting house에 파견 나와있는 engineers 님들. 

나는 그 이후로 죄를 자복할 때 성령세례를 주시는 성령님을 더욱 경외하게 되고, 집회 후에도 나타나는 성령님의 민감한 역사를 놓치지 않으려 끝까지 성전을 떠나지 않는 버릇이 있습니다.

3. 하성의 어느 목사님은 목사가 된지 7년이 되기까지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고 방언을 할줄 몰랐다고 합니다. 성령세례을 간절히 사모하며 밤마다 지붕에 올라가서 별을 세며 기도를 해도 방언을 안 주시더랍니다. 오순절 교회의 목사이기에 얼마나 더 간절 했겠나 짐작이 가는 대목 입니다. 그런데 주일 날에 흑인아이 하나가 성전에서 슬피 울고 있더랍니다. 아이가 슬피 우는 것이 어찌나 불쌍한지 그 아이를 껴 앉고 같이 기도하는데, 그리도 간절히 사모하던 방언이 갑자기 터지게 되고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4. 부엌에서 음식을 조리해 성도들 섬기기를 즐겨 하는 여 집사님, 목사님과 면담을 하는데 목사님이 “집사님은 음식으로 섬기기를 좋아하는데 그 섬김이 주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로 하지 않고 자신의 기쁨을 위해 하기 때문 입니다. ? 아니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내가 할 수 일이라고는 음식 만드는 일 외에 아무것도 없기에 부엌에서 헌신하는데, 목사님은 그것도 모르시고 야단만 치시다니, 분하고 억울하고 속상해서 예배실에서 기도 합니다. 독이 올라 주님께 하소연하며 기도를 하는데, 하고자 하는 기도는 안 나오고 말이 꼬이며 바라지도 않던 방언, 성령세례를 받게 된 내자^^ 입니다.

5.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는 감사의 눈물로 밤낮을 지새는 집사님, 성찬예식에서 반주자의 때롱하고 시작하는 반주에 맞추어 성령님께서 눈물 button을 누르셨는지, 동시에 눈물이 펑 쏟아지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성찬위원으로 떡과 잔을 돌리던 집사, 그 후에 성령이란 단어에 눈을 뜨게 되고 더욱 큰 은혜를 사모하게 됩니다. 가족수련회에서 “방언 받기 원하면 앞으로 나오라” 장로교회에서 오신 강사의 초청하는 소리에 일착으로 앞으로 나가 산 땅바닥에 무릎 끓고 기도를 한다. “성령님이 임하실텐데 모두들 죄를 회개하라” 고 외친다. 집사님 모든 죄를 자복하며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나는 잘못까지도 낱낱이 고백하며 회개 한다. 안수하며 “무엇을 원하느냐”는? 강사목사의 질문에.“방언을 원 합니다” 큰소리로 답하며, 할렐루야를 외친다, 계속되는 할렐루야가 이상한 소리로 꼬이며 이전에 알지 못하던 소리가 입술에서 나온다. 사모하던 방언, 성령세례의 순간이다. 그 도시 교계에 급뉴스, 여야(잠긴동산) 집사가 요~오~란하게도 성령세례를 받았다더라. 

여러 말로 방언 받은 예들을 열거함은, 은혜를 더욱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에게, 주시고마 약속하신 성령세례의 역사를 나타내고자 함이다.

여야 집사, 방언 허락하심을 감사함으로 새벽기도, 부흥회 때 열심으로 사용하던 중. 10여년 동안 사용하던 랄랄랄 방언, 한 순간 거두어 가시고 새로운 방언을 주셨는데, 순전한 각종 언어 방언 이다. 

금요예배에서, 당시 가장 사모하던 말씀이 본문으로 선포되는 순간, 내 심장은 쿵쾅되며 온 몸에 전율이 온다. 예배후에 기도 시간이다, 자신을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없이 무언가에 억제 당하여, 성령님께 붙잡힌 듯한 상태로 기도를 한다, 평소 같으면 기도한지 얼마 후 시간이 지나서 깊은 기도에 들어 갔을 때에야 나오던 방언이, 기도 시작과 동시에 컨트롤 할 수 없는 언어로 나온다, 마치 audio cassette tape이 뒤집혀서 꺼꾸로 돌아갈 때 들리는 소리와 동일하다. 이렇게 새로운 방언을 받게 되었다.


각종 방언 및 방언찬양이, 나의 영, 혼, 육의 상태, 기분에 따라 어떤 언어로 나올 줄을 모른다. 비록 피곤하더라도 입을 열어 성령님께 의탁하면 어느 때는 버벅대는 소리로 시작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아주 맑은 천상의 소리와도 같은 아름다운 찬양이 흘러 나온다. 제가 워낙 찬양 드리기를 좋아하거든요.. 

대학생인 한 형제는 “여야님은 크신 분이시다” 라고 감당 할수 없는 말로 나를 놀라게 한 일이 있다. 교회에서 “장로님은 교회의 고급인력 입니다” 하는 말씀은 주님이 주시는 칭찬 같은 고무 되는 말이지만, 성도이면 누구나 다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좀더 누린다고 “크신 ? 분이시다” 한다면 그 말은 분명 불편한 말이다. 

요한복음21장25절 말씀을 빌려 저의 증언의 참됨을 구성 합니다.
이러한 일어난 일들을 증언하기 위하여 올리는 글이 참된 줄 알며, 성령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나,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곳에 방언이란 무엇인가? 의 공간을 모두 사용하더라도 기록된 댓글로 두기에 부족한 줄로 압니다.


어부 2016-05-31 17:19:40

제14장 교회의 휴거

하나님의 성회의 근본진리에 대한 성명은 “복스러운 소망”이라는 제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께서 오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부활하고 살아남은 자들과 함께 변화할 것은 간절하고 복스러운 교회의 소망이다.” (살전4:16, 롬8:23, 딛2:13, 고전15:51,52) 

예수는 그가 다시 오실 것을 가르치셨다.

예수는 그가 다시 지상에 오실 것을 가르치셨다. 그는 이 사실에 대하여 그의 제자들이 항상 준비되어 있도록 주의 깊게 경고하였다.(마24:42-51, 25:1-13, 막13L37, 눅12:37) 그들은 현재의 시대가 예수의 오심과 더불어 끝이 날 것이라고 이해하였다.(마24:3) 그의 재림에 대한 확증은 그가 죽으시기 전에 그의 추종자들을 위로한 진리들 중 하나이다.(요14:2,3)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에 하늘을 쳐다보는 무리들에게 두 천사가 나타나서 그가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되풀이 하였다. 그들은 그가 가신 그대로 오실 것이라고 선포하였다.(행1:11) 이것은 그의 재림이 문자적으로 육체적으로 볼 수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서신서가 예수의 재림을 가르친다.

신약의 서신서들은 예수의 재림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며, 재림의 절박성은 이 주제를 다루는 모든 성경구절을 통하여 나타난다. 비록 초림과 재림에 관한 가르침의 전체 대의는 재림이 경고 없이 갑자기 일어날 것임을 강조하며, 신자는 끊임 없이 준비된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빌4:5, 히10:37, 약5:8,9, 계22:10)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이러한 기대의 상태에서 살았다.(고정1:7, 살전1:9,10) 고전15:51과 살전4:17에서 바울이 “우리”라고 한 것은 그가 예수께서 오실 때에 살아 있으리라는 소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상으로부터 신자들의 휴거

재림에 관한 성경구절을 비교해 보면 어떤 것은 죄인들의 심판을 수반하고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가시적인 사건으로 말하며, 또 다른 경우는 재림이 신자들에게만 알려지며 지상으로부터 그들의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후자의 경우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휴거라고 불리운다. 이 단어는 우리말 성경에는 없으나, 널리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웹스터 사건”(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Unabridged)에서 휴거에 대한 정의를 “그리스도가 참된 교회와 그에 속한 자들을 그들이 그 주와 함께 하늘의 기쁨을 즐길 수 있는 지구 위의 왕국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라고 내린다. “휴거된다.”는 단어는 살전4:17의 “끌어 올려”라는 표현대로 번역해도 무방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가 오실 때에 한 장소에서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을 신자들이 지구에서 갑자기 없어지고, 불신자들은 남아서 환난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마24:26-42) 예수께서 그의 재림에 대하여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를 보고 통곡할 때라고 말씀하셨다.(마24:30) 사도바울은 주의 재림을 악인에 대한 심판과 진노의 때라고 말하였다.(살후1:7-10)

살전 4:13-18에서 바울은 재림의 다른 양상을 생각하였다. 이 간단한 구절은 신약에서 휴거에 대한 가장 직접적이고 명백한 가르침이며 이것은 오직 살아있는 신자와 주 안에서 죽은 신자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있다. 이때에 재림하는 그리스도를 보는 악한 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바울은 예수께서 공중에 오시는 것을 묘사했으나 슥14:4 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재림시에 그의 발이 땅에 닿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요일3:2 말씀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며, 우리는 주님과 같이 될 것이다.

살전4:17에서 사용된 “끌어올려”에 대한 헬라어는 행8:39에서 빌립이 에디오피아 사람에게 세례를 준 후에 사용된 “이끌리어”라는 단어와 똑같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단어는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 것을 말하고 있는데 휴거시에 지구에서 신자들을 끌어올릴 능력의 근원을 밝히는 것이다.

살후2:1에서 바울은 휴거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이라고 불렀다. 이 “모임”에 대한 헬라어는 히10;25에서 예배를 위한 크리스찬의 모임에 대하여 사용된 “모이기”와 똑같은 단어이다. 그것은 성도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의 주변에 모이는 성도들에 대한 한폭의 그림이다.

경건한 사람들이 지구에서 초자연적으로 휴거되는 것은 성경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에녹의 생애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은 하나님과 동행한 후에 지구에서 기적적으로 없어진 것이다.(창5:21-24) 히브리어 기자는 이 경험을 “죽음을 보지 않고 이 세상에서 돌연히 없어진 것을 보여준다.(왕하2:1-13) 고전15:51은 살전4:14-18과 똑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바울은 휴거시에 살아있는 신자와 죽은 신자에게 일어날 변화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는 이것을 비밀이라고 불렀으며(고전15:51), 전에는 숨겨졌으나 성령에 의해서 알려진 진리라고 하였다. 빌3:21에서 바울은 주님의 오심과 “우리의 낮은 몸”이 변하게 되는 때와 연결 시키고 있는데 이것 역시 휴거에 대한 또 다른 언급이다.

휴거에 관한 구절은 그의 백성을 위해서 주님이 오시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한 구절은 그의 성도와 함께 오시는 주님을 묘사하고 있다. 골3:4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와 함께 나타나는 신자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유다서 14절 역시 그의 공적인 나타남과 관련된 많은 다른 구절들에서 말하고 있는 심판을 행하시려고 주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재림하시는 것을 미리 보고 있다.


성경은 스스로 모순되지 않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위하여 오시는 것과 성도들과 함께 오시는 것은 그의 오심에 대한 두가지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이다. 이 두가지 상태 사이의 중간 시기는 적그리스도가 통치하고 악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는 대환란 시기라고 가정하는 것은 성서적으로 정확하다고 믿는다. (단12:1, 10-13, 마24:15-31, 살후2:1-12)

크리스찬과 대환란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께서 오시기 전에 심각한 환란을 견뎌야 하지만 교회는 대환란이라고 불리우는 시기 이전에 휴거될 것이다. 살후 2장에서 바울은 주의 날이(대환란은 주의 날의 일부이다.) 시작되기 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야만 한다고 가리키고 있다. 불법의 사람(적그리스도)이라 하는 한 사람이 나타나야 한다. 바울의 시대부터 불법의 비밀이 활동하였으나 참된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는 영이 막고 있다. 오직 교회가 휴거에 의해서 지구에 없어질 때 이 사람은 공적으로 앞으로 나올 수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있는 휴거에 대한 구절에 이어서, 살전 5장에서 바울은 주의 날에 대하여 경고하였다.(살전5:2,3) 그리고 그는 즉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이 임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시키고 있다.(살전5:4) 바울이 여전히 주의 날에 대하여 말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살전5:9) 바울이 대환란을 포함하여 주의 날의 심판에서 신자들이 구원받을 것을 의미했다는 것은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찬은 주님의 나타나심에 대하여 주의해야 한다고 신약성경은 여러차례 말한다. 그러나 대환란이나 적그리스도의 출현에 대비하라고 가르치고 있지는 않다. 그러한 일들이 휴거 이전에 일어나야 한다고 기대하는 것은 신약에 충만하게들어있는 임박성에 대한 가르침(the teaching of imminence) 시대의 마지막 징조가 나타날 때 그들은 위를 보며, 대환란이 아니라 그들의 구속을 기대하면서 고개를 들어야 한다.(눅21:28) 주님의 오심에 대한 징조들은 그가 공적으로 나타나기 전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징조들이 휴거 이전에 이루어져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건들이 휴거 이전에 일어나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임박성의 교리(the doctrine of imminence)와 조화되지 않는다.

교회가 대환란 전에 세상에서 들려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다루시는 것과도 부합된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 안에 안전하게 들어갈 때까지 홍수를 보내지 않았다. 그는 소돔에서 롯을 구출할 때까지 소돔을 멸망시키지 않았다. 성경의 무게는 환란 전 휴거를 지지하는 편에 실려 있다. 신약에서 재림에 대한 가르침이 있는 곳마다 절박성이 강조된다. 휴거 이전에 다른 사건을 개입시키는 것은 이러한 가르침에 위배된다.


크리스찬들이 주님의 오심을 바라보는 동안 디도에서 한 바울의 말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즉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2:11-14)


어부 2016-05-29 13:47:04

제16장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

본문은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의 교리에 관하여 하나님의 성회 총회의 입장을 나타낸다. 여기서 명백하게 선언되고, 성경적으로 유효한 중대한 진리에 대한 설명이 오순절 운동에 의미 있는 것으로 증명될 것이다.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설립 당시부터 성령세례를 중생의 체험 후에 일어나며 중생과는 다른 경험으로 인정하였다. 그것은 또한 성령세례의 초기의 외적 증거는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임을 인정해 왔다. 하나님의 성회 근본진리에 대한 성명(제 8항)은 그 헌법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성명을 포함하고 있다.

신자의 성령세례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초기의 외적인 표적에 의해서 증거된다.(행2:4) 이때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방언의 은사와 같지만(고전12:4-10,28) 목적과 사용에 있어서는 다르다.
이 성명은 1916년 채택된 이래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시간과 경과와 함께 각 세대의 평가로서 하나님의 성회는 이것이 성경적으로 건전한 입장임을 보아 왔다. 다음과 같은 용어의 정의와 성경의 고찰은 우리가 왜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라고 믿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다.

용어설명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에 대한 교리를 생각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의 테두리 안에서 여러 가지 표현이 사용될 것이다. 성령세례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취한 것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직전에 세례 요한이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성령과 불로 우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11)라고 말하였다. 그의 지상사역을 마치실 때 예수께서 요한의 말을 언급하셨다.(행1:5)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사건을 보고하는 자리에서도 이 말을 반복하였다. (행11:16)

성령세례는 중생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며, 중생과는 구별된다. 성경은 성령께서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세례를 주는 경험이 있음과(고전12:13),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성령 안에서 세례를 주는 경험이 있음을(마3:11)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경우는 같은 경험을 언급하고 있다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례를 베푸는 집행자와 수세자가 세례로 들어가는 요소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 경험의 독특성은 여러 곳에서 설명되고 있다. 에베소 제자들의 경우가 한 예이다. 그들이 요한의 세례 밖에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한 후에(행19:3), 바울은 그들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 제자들은 물로 세례를 받았고 이어서 바울이 그들 위에 손을 얹었을 때 성령께서 임하셨다. 이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은 것과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 사이의 시간 경과는 짧은 것이었으나 그들이 물로 세례를 받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성령세례는 구원 후에 일어나며 구원과 구별되는 것이다.

성령세례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목적에 대한 수단이 된다. 신자에 대한 성경적인 이상은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다. 성령세례는 신자에게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경험하도록 인도하는 위기경험(crisis experience)이다.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라는 표현은 성령이 채우는 능력으로 임하는 최초의 외적 표시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을 연구한 결과 신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외적인 표시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증거는 항상 신자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외적인 표시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증거는 항상 신자가 성령으로 세례받을 때 일어나는 것이지 어떤 미래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행10:44-48)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그의 사역에 대하여 설명을 요구했을 때 베드로는 성령세례를 받은 신자들에게 눈에 보이게 나타났던 증거를 말하였다. 그는 왜 이방인 신자에게 물세례를 주도록 주선했는지에 대한 이유로 이것을 말하였다.(행11:15-17)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최초의 증거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으로서 과거 경험의 증거 이상의 가치가 있다. 그것은 각 신자가 개인적인 헌신의 시간을 가질 때와 방언 통역을 동반한 회중의 모임에서 계속적으로 풍성함을 더해준다.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성령이 신자들에게 그들이 배우지 못한 언어로 말하게 하는 능력을 말한다. 사도행전에서 방언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고린도전서에서 사용된 단어와 같은데 사람이나 천사의 실질적인 언어이다.(고전13:1) 이 단어를 생각하거나 도취도니 소리로 번역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우리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신약시대에 방언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대로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신자가 성령의 도움을 받아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발성”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빈센트(M.R. Vincent)가 관찰한 바와 같이 “특별한 단어이며 기적적인 충격 아래서 명백하고 큰 발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스트롱(James Strong)은 이 단어가 단순히 똑똑하게 발음하는 것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능력은 감정이 올라간 상태나 단어와 구절을 반복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하는 소리를 흉내낸 결과도 아니다. 이와 반대로 방언으로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성령이 주시려는 발성의 길을 막고 있을 뿐이다. 신자는 성령의 초자연적이며 자극을 주는 능력에 의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반응하며, 성령이 발성을 주시는 대로 말해야 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하기 위한 어떤 인위적인 기교도 성서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방언을 최초의 외적 증거로 믿는 이유 사도행전을 보면 사람들이 성령으로 세례받는 경우가 다섯 차례 기록되었다. 이중 세 경우는 상세히 다루고 있으나 다른 두 경우는 상세히 기술되지 않았다.

상세히 다룬 경우를 보면 바람의 소리나 불의 혀 같은 것이나 예언 혹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 등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상세히 묘사된 각각의 경우에 모두 나타나는 유일한 현상은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 10장, 19장의 사건에서 나타나고 있다. 구체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성경적인 경험이 묘사될 때마다 이 경험과 현상과의 관계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바람의 소리와 불의 혀가 선행되고 그리고 제자들의 경험이 나타났던 것을 또한 유의해야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처음의 성령이 부어주신 사건 후에도 반복되었다고 가리킬만한 것은 없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뒤따랐으며 이것은 성령으로 세례 받은 직접적인 결과였고 오순절날 이후에도 계속하여 나타났다.

상세한 것이 나타나지 않은 두 경우의 상황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신자들의 경험에 동반된 것 같이 보인다. 사마리아의 마술사였던 시몬은 신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가리키는 무엇인가를 보았다. (행8:18,19) 만일 그 경험이 동반하는 표적이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되었다면 사마리아 신자들이 성령을 받았는지 몰랐을 것이다. 이 사건을 상세히 묘사된 세 경우의 경험과 비교해 볼 때 시몬이 보고 들은 것은 사람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한 것이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가장 논리성이 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개한 후 사울이 그의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함 받도록 하기 위하여 아나니아라고 하는 제자를 주께서 보내셨다.(행9:17) 시력이 회복된 것은 묘사되고 있지만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함 받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9장에서 더 이상 언급이 없다. 그러나 고전14:18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한다.”고 증거하였다. 바울이 언젠가 방언을 시작했을 것이므로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방언을 시작하였다고 가정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이것은 성령세례를 상세히 다룬 그 사건들과 완전한 조화를 이룰 것이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과 동반할 뿐 아니라, 사도들과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성령세례의 초기 증거로 인정하였다. 베드로와 및 그와 함께 한 사람들도 고넬료의 집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연유는 “방언을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행10:45,46) 이 증거를 근거로 베드로는 편견을 버리고 이 회심자들에게 물세례를 주도록 하였다. 베드로에게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고넬료의 집에 성령의 부어주심에 대한 증거였다.

후에 베드로가 고넬료 사건에 대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 및 형제들과 토론하게 되었을 때 그는 다시 그가 본 현상을 언급하였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막겠느냐”(행11:17)고 하였다. 사도들과 형제들이 방언을 성령세례의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인 것을 다음 구절에서 볼 수 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행11:18)고 하였다.

고려할 질문들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의 교리에 관하여 여러 질문이 제기되었다. 
다음은 그 중에 자주 제기되는 것들이다.

1. 사도행전은 역사를 위한 책인가 아니면 신학을 위한 책인가? 그리고 교리가 선언적인 서술 이하의 것을 근거로 이루어 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는 성경 자체가 대답하고 있다. 성경은 바울로 하여금 쓸 수 있도록 영감을 주셨는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된 것으로 교훈(교리)...에 유익하니(딤후3:16)”라고 했다. 또한 바울은 기록하기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롬15:4)라고 하였다.
교리는 성경에서 고립된 몇 구절을 근거로 하면 안된다. 오히려 내용이 풍부하게 함축된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선언적인 서울에 근거하고 있지 않고 하나님에 관계된 성경 구절을 비교한 것에 근거한다. 삼위일체 교리와 같이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의 교리는 이 주제에 관계되는 풍부한 성경말씀을 근거로 한다. 베드로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방언을 성령 충만함 받은 증거로 인정하였을 때 이 모형을 근거로 교리화한 것은 명확한 것이다.(행10,11장) 양적으로나 횟수에 있어서 이 주제의 무게는 교리화를 위한 견고한 근거를 제공한다.

2.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사도시대에만 속한 형상인가? 바울이 “방언이 그칠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하였는가(고전13:8)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사도시대나 혹은 신약의 정경이 완성될 때까지만 존재할 것이라는 암시는 성경 어느 곳에도 없다. 바울이 방언이 그칠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또한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도 암시하였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10) 그는 또한 방언이 그칠 때 지식과 예언 같은 것들도 동시에 현저하게 변할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때까지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새 방언으로 말하며”(막16:17)가 그대로 적용된다.

3. 바울이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고전12:30)고 했을 때 그것은 부정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수사의문(rhetorical question)이 아닌가?
바울의 질문을 이해하기 위하여 방언 말하는 것의 여러 가지 기능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성령세례에 대한 최초의 증거 역할을 한다. 
(행10:46, 11:15) 사적으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나 기도하는 것은 자기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고전14:2,4) 회중안에서 방언통역과 함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교회의 덕을 위함이다.(고전14:5) 모든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기를 원하는 바울의 마음과(고전14:5)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고 질문한 수사의문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성령세례 받을 때 모든 신자들은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고 개인 기도시에 혹은 자기의 덕을 위하여 계속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성령께서 회중 안에서 방언과 통역을 통하여 자기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쓰시는 도구는 아니다. 회중 안에서 성령은 그 뜻대로 성령의 나타남을 주신다.(고전12:11) 이러한 바울의 서술은 서로 모순된다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

4. 만일 증거 혹은 은사로서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면 왜 교회사에서 이러한 현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가 있는가?
어떤 성경적인 교리가 태만으로 인하여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사실 위대한 영적 개혁은 자주 교리의 부흥이었다. 예를 들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교리는 마틴 루터와 다른 사람들이 다시 강조할 때까지 거의 완전히 잊혀졌었다. 성화의 교리는 다시 교회의 주목을 받게 되는 웨슬리 부흥운동 때까지 무시를 당해왔다. 성령세례와 방언에 대한 진리는 교회 역사를 통하여 20번 이상의 부흥기에 나타났었으나, 최근의 부흥운동 안에서처럼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성화에 대한 교리의 부흥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최초의 증거로서 방언을 말하는 성령세례의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교리를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초기 사역시의 그의 가르침을 거부하였다. 모든 신자들을 위한 지침은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이다.(살전5:21) 시험의 근거는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행17:11)

5.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교리는 사람들이 실질적인 성령세례를 추구하기보다 방언을 추구할 위험성이 있는가?
불행히도 이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교리의 남용이 교리를 무효화시키지는 않는다. 남용과 가짜는 교리를 논박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순수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다른 방언이 성령세례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것인 반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의 명령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령으로 충만함 받기를 힘쓰는 것이 항상 강조되어야 한다. 방언은 자연스럽게 이 경험에 수반된다.

6. 만일 사람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하면 영적 교만의 유혹은 없겠는가?
사람들이 진정으로 성령세례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교만 대신에 겸손을 낳게 할 것이다. 신자들은 인격적 고귀함 때문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봉사와 보다 의미있는 사람을 위한 능력을 받기 위하여 받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자신의 공로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그것은 얻거나 살 수가 없다. 하나님의 모든 은사와 마찬가지로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7. 방언으로 말은 못하지만 주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어 놓은 진실로 거듭난 사람들은 어떤가?
방언을 못하는 헌신된 신자들 안에 성령이 거하시며, 이런 신자들 중에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어 놓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질문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사람들은 그 교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가장 헌신된 신자의 경험에 근거한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회중 안에 있는 경우가 아니면, 개인 경건의 시간에 방언으로 말할 것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결정해야 한다.

또한 사람들은 각각 다른 성질의 재능과 다양한 수준의 능력을 갖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무엇을 완수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모든 공급을 받아들였다면 얼마나 더 많이 성취했을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성경은 신자들이 인간 비교에 근거하여 크리스찬의 경험을 평가하지 말고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개인적인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명백히 가르친다. 바울은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여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10:12)하고 기록하였다. 교리는 항상 인간의 경험에 근거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결론

요약하면 성경의 기록은 성령세례에 관하여 상세히 다룰 때마다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언급되는 유일한 현상임을 말한다. 상세한 설명이 없는 경우에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수반되는 경험이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사도와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로 받아들였다. 성경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개인지도와 예배에 있어서 신자를 위한 특권이며 신자들이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성령의 주권적인 선택에 따라서 회중의 방언으로 말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배제하고자하는 성경적인 제한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일이 적당히 질서있게 행해져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또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14:39,40)고 말씀한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모든 신자를 위한 특권이다. 바울이 “나는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전14:5)고 기록했을 때 그는 비성경적인 소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부 2016-05-29 13:29:48

성령세례에 관한 포인트

1. 세례의 4가지 종류

1)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의 세례.
2)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세례.
3) 회개와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신자에게 받으라 명령하신 물세례.
4) 이미 중생한 자에게 약속하신 성령세례.

2. 물 세례는 명령인데에 반해서 성령세례는 약속이다.

1)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2:38-39)

“선물”은 좋은 것이다. 그래서 사모하고 구해야 할 것이다.
“약속”은 명령이 아니라 약속이다. 약속의 가치를 알아야 하고 그 약속을 믿어야 한다.
“얼마든지”라 함은 받는 자의 차별이 없고 제한도 없고 부족함이 없이 모든 구원받은 신자들을 향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2) 성령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상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과 하나님의 맡기신 일을 이루어 드리려고 애써 본 사람만이 구하게 되어있다. 성령세례를 구해야 함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 나의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려지기 위하여 성령세례를 구해야 한다.

구약의 스룹바벨 처럼 하나님의 전을 세워 드리려 하면서 자신의 능력과 지혜만을 의지하여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철저한 실패를 통하여 이 사실을 배우게 될 수밖에 없다.
슥4:6절은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이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3) 성령을 구하는 자가 전심으로 구하며, 믿고 기다리되 의심하지 않고 약속을 붙잡고 받을 때까지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다른 어떤 것을 구할 때보다 성령을 구할 때 기뻐하신다.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눅11:13)

4) 신자가 구할 수 있는 것 중에 최고이면서 동시에 그 외에 모든 것까지 다 받을 수 있는 것이 성령이시다. 성령을 받으면 그 분과 함께 권능이, 지혜가, 성결이, 담대함이, 또 사랑과 기쁨과 희락과 화평 등등의 수없이 많은 구하지 않은 것까지 다 신자의 열매로써 주렁주렁 매달리게 되는 것이고 결국은 그 열매가 하나님의 제단에 거룩하게 드려지는 것이다. (갈5:22/롬15:16-18)

3.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차이

1) 세례는 항상 시작을 나타낸다. 신자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제부터 예수를 구원자로 믿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섬기고 따르며 사랑하고 충성하는 삶을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목적도 바로 그 일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함이다.

2)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선물로 구하여서 받는 것에서 그쳐버리고 마는 우를 범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성령세례는 시작이라면 성령충만은 그 목적이 이루어지는 완성이다. 성령세례는 시작이라면 성령충만은 그 목적이 이루어지는 완성이다. 영어로는 “fill to overflowing”이란 말이다. 꽉 차고도 넘쳐서 흐르는 상태이다. 어느 신자의 삶에서나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고 유익하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사실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세례받은 수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다 같은 곳에서 끝나지 않는다.

성령충만한 삶이란? 1. 성령께서 나를 인도(lead)하신다는 상태이고 2. 성령께서 나를 통치하고 주관(governing and ruling)하신다는 상태를 동시에 의미한다. 

3)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갈5:24) 말씀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상태”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그 사실을 알며 동의하며 나아가 언젠가 그것이 사실이 되도록 노력해야 된다.

4) 충만이라는 말이 “fill”이라 할 때는 "내 자신을 채움"이라면 to overflowing이라고 할 때는 “다른 이에게 흘러가 생수가 됨”이란 뜻이다. 성령세례는 나를 세워주는 것인데, 성령충만은 남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도록 타인을 세워주는 것이다(요7:38-39)

5) 물세례도 그 자체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베드로 사도는 벧전3:21에서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이것이 매일매일 계속해서 일어나야 할 반복되며 또 앞으로 전진해야 할(process and progress) 영적 순례 여정의 첫걸음인 것을 분명히 한 것처럼, 성령세례도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하였다. 여기서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단어는 진행형으로 씌어졌다. 즉 이것은 단회적 사건(성령세례는 한번 받는 것에 반해)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딛3:5절에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도 역시 진행형으로 씌어졌다. (NIV는 renewal이라 했는데 좋은 번역은 KJB처럼 renewing이라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뜻과 일치함)

다시 말하면 성령세례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날마다 신자의 삶에서 그 능력과 역사가 계속 되어서 결국은 하나님의 역사가 완성되는 것을 사모하며 늘 그렇게 되도록 자신의 삶의 주권을 성령님께 넘겨드리며 자기 자신은 오히려 부인함으로 육체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성령충만의 삶이라는 것이다

 

어부 2016-05-29 13:28:23

요14장은 성령장이다.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이러한 일이 일어 나리라 하나님은 말씀으로 먼저 약속 하셨고 먼저 주신 이 말씀을 붙잡고 믿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이 실현되도록 하신다. 요한복음의 말씀을 붙잡고 이해해야만 행2장의 역사가 일어나며 왜 그러한 일을 하시는지 알게 된다. 

요14장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어라. 내가 떠나감은 너희에게 성령을 보내기 위하여 내가 가노라. 내가 성령을 보내줄 것을 너희는 믿으라. 성령을 오실 것을 약속 하셨다. 우리들은 성령이 오신 것을 알고 또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성령을 받은 나와 성령을 통하여 오신 예수님과 하나되어 연합 된다. 연합된다는 것은 마음이 하나되고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주님과 하나되는 일치가 이루어진다.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 멀리 계신 것 같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계시는 것이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므로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됨이 14장의 말씀이시다

그 다음에 15장에 포도나무의 비유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나를 떠나면 결국은 그 가지는 말라 비틀러지고 아무짝에 쓸모가 없어지게 되며 결국에는 잘리어 불에 던져 지게 된다. 
예수를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보장하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시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실 때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이다 15장의 내용이다. 

14장의 말씀을 15장에 풀어 주시는 것이다. 14장과 15장을 이해하고 말씀이 풀려야 행2장의 말씀이 이해가 된다. 그러므로 신약의 진정한 성령장은 요14장이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구하라(요15:7, 요14:14, 요1서3:22, 마21:22)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찿을 때니라(호10:12)
그때의 말씀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이나 구하라 그러나 계명을 지켜라. 나를 사랑하는 자는 계명이 쉬우니라. 나를 사랑하는 자는 목숨을 내어놓고 라도 지키게 되느니라. 나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말씀이 그 안에 성령이 그 안에 있으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시리라.

조건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성령이 거하신다. 그러한 사람들이 성령님께 구해야 할 것은 거룩이다. 요15:2~ 3 거룩을 구하는 것이 먼저이다. 거룩과 풍성한 가지는 뗄래야 뗄 수가 없는 관계이다. 거룩해야 가지를 맺으며 거룩하고 더욱 풍성한 가지를 맺게 하기 위하여 더욱 깨끗게 하신다
이 비밀이 풀릴 때, 이때부터 신앙생활이 풀리게 된다. 거룩을 먼저 구하는 자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게 하신다. 내가 우리가 거룩하게 되면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 과실을 맺는 일이다

과실을 맺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더 깊은 거룩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거룩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거룩에도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사람 이미 충분히 거룩한 사람 이사야의 입술을 제단 숯불로 지저서 그를 더욱 참 깊은 거룩으로 인도하십니다. (사6장) 이렇게 맺은 풍성함 열매가 주님께 기쁨이 된다. 이러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돌아가심이 놀랍고 귀한 일임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을 때에 우리가 십자가의 사건을 validated 으로 확인하며 유효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온 인류를 향한 복이었다. 이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하는 것을 세상에 알게 하는 사건이 된다. 어떻게 할 때, 저와 우리의 성도의 삶에서 거룩한 열매들이 풍성하게 맺어질 때에, 내가 구한 것 보다 더욱 풍성하게 열매를 맺게 되며 이렇게 풍성한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되는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것을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이 때에 세상에 선포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에 맡는 이들을 편애하시며 이러한 자들에게 복에 복을 더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십시요. 성령은 우리를 예수와 하나되게 하십니다. 그런 자가 포도나무에 붙어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이 풀리고 그 말씀을 기쁨으로 따르며 찬송으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복에 복을 더 하십니다. 은사를 더 하십니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아 그래서 예수를 믿는구나! 그럴 때에 십자가의 사건이 validated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에 맡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는대로 허락하십니다. 거룩하십시요. 거룩을 구하면 거룩을 더해 주십니다 거룩을 구하면 은사가 더해집니다. 그러한 자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셔서 손을 얹고 기도를 하면 귀신이 떠나가고 병이 낳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황당한 것을 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막연하게 믿는 것이 아닙니다. 확실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께는 제물이 됩니다(롬15:16) 

나에게 풍성한 열매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라고 영혼구원에 쓰임 받으라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예언의 능력을 주시고 병자를 낳게하는 능력을 주시고 기적을 일으키게 하셨는데 처음에는 받은 능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하다가 언제부터 나중에는 자기의 만족을 위하여 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거룩하십시요. 거룩한 사람에게 열매를 맺게 하시며 열매를 맺은 자에게 더욱 큰 열매를 맺게 하시며 더 거룩하게 하시며 그렇게 더 거룩하게 하신 자에게 더 큰 은사를 나타나게 하셔서 더 강력한 은사가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세례는 내 만족을 위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기쁨이 되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다. 성령세례로 인하여 나타나는 권세와 능력과 은사와 모든 기적들은 예수님께 만족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한복음 15:11)

세상의 기쁨이 아닌 내 안에서 완전하게 될 때까지 넘치고 넘치는 기쁨 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내 안에서 차고 넘쳐서 성령이 내 안에서 기뻐하심으로 우리의 기쁨이 더욱 충만하게 되는 것이며 영원한 기쁨으로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어부 2015-09-14 14:38:39

진리님이여. 정이철 목사 논단, [방언(1) – “십자가 복음이 완성된 구원계시임을 증거했던 방언”에서“방언이 영의 세계의 관문이며 모든 은사의 기초라고 주장하는 방언파 은사주의자들까지도 성경의 방언이 외국어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였다는데? 그러한 말을 하는 소속교단이나 사람의 이름을 밝힐 수 있습니까? 

막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진리님이여 ㅉ ㅉ 예수님의 이 세상 마지막 말씀이시며 최초의 방언 말씀인줄로 알고는 있으되 도대체 믿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까? 이를 어쩔꼬! 진리님 그러하니 그대는 예수님을 믿는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막16:17-18의 말씀은 복음의 불모지에 목숨을 걸고 나아가 전할 때에 인간이 예상치 못하는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성도들을 보호하시며 표적과 이적을 나타내며,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게 하며, 독뱀이 물거나 잘못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자에게 안수한즉 나으리라.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방언이 지금의 방언이 아니라면 언제의 방언이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지금의 방언이 아니라면 주께서 말씀하신 복음을 전할 때에 나타날 표적과 이적, 귀신 쫓음,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않아야 할 때는 언제라는 것입니까? 그 때의 방언이 지금 나타나야 할 방언이 아니라면 당신이 하는 그 말은 예수님의 복음 그 자체가 가짜라는 말 입니까? 주를 시험 할 목적으로 시행하는 자들의 예를 들면서 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가짜로 만드는 그대 진리님이여! 그대로 간다면 당신은 열두 지옥, 무저갱에 영원히 빠져야 할 자임이 틀림이 없소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방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구요? 방언으로 유추할 수 있는 어떤 내용도 구약 성경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진리(정이철)님 과연 그러한가 어디 봅시다. 

요엘서 2장에서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정녕 모르십니까?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라 하심은, 그 때에 즉 마지막 때에 나의 성령을 구원받은 만민에게 은사의 기본인 방언의 은사를 부어주실 것을 예언하는 말씀이 아닌지요!^^ 구약에서의 “내 신”이라 하심은 신약의 보혜사 성령이심을 굳이 부정을 하지는 않겠지요? 칼빈 신학에서는 신약의 보혜사 성령을 부정을 하니 당연히 꼬일대로 꼬인 영성으로 부정하고 보겠지요? 칼빈인 중에서도 그대 진리님은 지옥불 예약 1위 구룹으로 예정되어 있음을 알기나 하시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대적하니 지옥불 구덩이 1순위를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이지요. 

믿거나 말거나 구약에서의 “여호와의 신” 이시며, 삼위의 성령하나님이시되 신약에서는 인류의 대 구원의 사역을 일임 맡아 하나님의 성령, 진리의 성령, 진리이신 예수의 영, 보혜사로 오신 성령 하나님을 거부하는 그대는 삼위 중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믿고 받아 들이되 성령 하나님은 부정함으로 결국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격이 됨으로 그대와 그대와 같은 일당들은 구원이 없는 것이요. 아무리 신학박사를 추구한들 그대에게 구원이 없는 줄로 아시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러나 성령 하나님은 배척해도 되느니라 하신 말씀이 있는가 성경을 찾아 보시지요. “믿으라” 하시는 말씀은 삼위일체를 유일하신 하나님이 되도록 온전히 믿으라 하시는 말씀 입니다. 삼위일체 중에서 한 분이라도 부정하면 믿는 것이 아니지요. 예수만 그리스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에 구원이 이르리라 하신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성령세례 받은 성도가 구원을 성령으로 확증 받은 것이다” 즉 성령세례가 구원의 보증이다. 주장한 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의 성경 말씀이라는 말 입니다.

80년대 초, 한얼산 기도원장이었다는 그분을 초대하여 연합집회(1981 Colorado Springs, CO)를 주최하였던 주최측 목회자들이 그 강사를 사기꾼이라 하더이다. 그 사기꾼이라는 사람이 내리는 참 방언, 가짜 방언이라는 것을 신뢰하여 위대하신 정이철 님의 칼럼이라는 글에 인용을 합니까? ㅉ ㅉ

이 글을 읽으시는 “뉴스 M” 의 독자들은 이 글을 한 두번 읽고 판단하지 마시고 계속 연재되는 글에 관심을 가지시고 이곳 구석에 있는 자유게시판에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정이철 류의 칼럼은 얼마든지, 누구든지, 성도라면, 당연히, 대적하여야 함이 하나님 앞에 선한 일이 됨을 믿기에 이 일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어부 2014-09-10 20:16:39

수신자: 진리 님과 만인 성도들에게 어눌한 글로나마 복음(All the Gospel, Whole Gospel)을 전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하여 주신 “주께 영광을 올리며” “NEWS M” 측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순절 신앙인 사도 바울”의 인정도 받지 못하는 “교조주의, 극단 칼빈주의” 주제에 무엇인가는 할 수 있겠는지요” 비로소! 어부가 한 말이지만 “진리님의 주제” 참으로 명언 입니다요. 물론 저의 말에 동의하리라 믿지는 않습니다. ㅎ ㅎ 진리 님 :-)

진리 님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두 영언 자들이었습니다. 교회가 태생하게 된 시발점이 된 첫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는 사건이 주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는 120문도 모두에게 성령세례가 임하고 방언하는 사건이 신약 최초로 일어납니다. “오순절 날이 임하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불이 혀 같이 갈라지게 보이며 각각 120문도 위에 임하였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각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저들이 한 장소에 모여있으되 성령의 임하시는 불의 모습은 혀같이 갈라지며 각각의 사람 위에 일대 일로 임하였다. 구원이 일대 일이듯이, 성령세례도 일대 일 입니다.

방언소리가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말미암아 각 유대인들이 우거하던 외국 지방의 말(디알렉스토)로 각 사람들에게 들리기도 하였다. 방언이 영언이기에 사람의 귀로 알아 들을 수도, 이해할 수 없는 소리 랄랄라, 따락따락, 돌 굴러가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기에, 조롱하여 새 술이 취한 자들의 소리라 하지 않았는가? 진리 님?은 어찌하여 술 취한 듯한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로 복음을 전하였노라 망발을 해 대는가? Tongue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소리인 “글로사” 는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영계의 언어일 수도 있는, 성령의 초월적인 현상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소리로라도 들릴 수가 있는 언어였다. 단층인 진리 님의 귀에는 한국어로 들려야만 방언이라 할 것이다. 그렇지요? ㅎ ㅎ

허참 님의 글에 달았던 댓글을 진리님에게도 드립니다^^ 
“진리님은 “행2:1-11”의 말씀을 “외국어”라는 잘못된 “key”로 열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 잘못된 key로 다른 말씀을 풀어보고자 하시니 열릴리가 없지요 ㅎ ㅎ 고전12:10의 방언과 행2:1-11의 방언이 목적은 다르나 본질은 같습니다요. 곧 방언하는 자의 유익을 위하여, 교회에 덕이 되기 위하여, 또는 주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방언을 해야하는 목적이 다르다. “방언의 본질?”은 ㅎ ㅎ 생략하겠습니다요. 이만하면 익히 아실 분 같아서 더 이상의 힌트는 생략 합니다요. 엉뚱한 곳에서 답을 찾으려 하고 있지요? ㅉ ㅉ 방언중단론자일 수 밖에 없는 진리 님을 향한 예정이, 잘못된 “디알렉스토key”로 인함이었네요 ㅉ ㅉ

“한마디로 설명을 드리지요!^^ “외국어일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듣는 자에게 어떻게 들렸느냐에 따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는 말 입니다. 첫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는 사건에서, 방언소리의 출발점이 tongue 이며 도착점이 듣는 이의 귀 입니다. 천하 각국 13나라?로부터 온 사람들과 현지 유대인들의 귀에 각 나라 외국어로 또는 술 취한 자의 소리와 같이 들렸다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도무지 알아 들을 수 없는 소리 또는 술 취한 자가 횡설수설하듯 하는 방언소리, 120명의 문도가 한꺼번에 큰 소리로 기도하는 군중 속에서 방언소리가 각자가 살던 나라들의 본토 소리로 똑똑하고도 분명하게 들릴리가 있었겠습니까? 현대 방언에서도 중국방언이나 일본방언을 해 보았다는 간증을 쉽지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 외국어 방언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소리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방언이라는 것은 혀의 떨리는 현상에 의하여 들리는 소리라는 것 입니다. “방언이 영의 언어” 임이 성도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성경에 의한 바른 이해 임에도 불구하고, 영의 언어가 인간의 귀로 들어 이해되어야만 하는 언어라, 외국어라, 그 뉘가 그렇게 우기던가요? 허참님도 깜빡 속았습니다요!^^ 영의 언어란? 성도가 하나님께 직통으로 고하는 하나님만이 알아 들으시는 신령한 언어 입니다요. 성령의 초월적인 역사로 버벅대거나 랄랄라 방언소리가 언어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부흥회 강사가 자신은 방언을 하는데 상대방은 자기나라 말로 듣더라는, 또는 자신은 영어로 말하는데 회중들은 자기나라 말로 듣더라 하는 성령의 역사도 들어보지 못하였는지요? “

“성경의 방언은 실제 외국어였으므로 그 나라에서 살거나 살았던 사람들은 다 알아 들었다” 이와 같은 헷소리를 다시는 하기 없기요? 진리 님!^^ ㅎ ㅎ ㅎ


어부 2014-09-10 20:15:43

(Now about spiritual gifts, brothers, I do not want you to be ignorant.)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고전12:1)

(in the tongues of men and of angels) 사람의 방언과 천사(들)의 말로 번역된 (고전13:1) “말(language)의 의미는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 이 동일한 한 언어(tongues)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천사의 방언”으로도 번역할 수도 있겠다 생각된다. 분명한 것은 사람의 방언(tongue)이 천사가 말하는 언어(tongues) 즉 영언(spiritual language)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많은 천사의 말이 있더라도 사람에게는 각자 개 개인의 방언, 각자가 방언을 해야 한다. 복수(men)로 기록된 단어에는 단수인 남자(man)의 의미가 숨겨져 있다.(9-10-14 정정). (in the tongue of men)복수의 사람으로 기록되었으되 방언(tonue)이 단체로 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구원이 일대 일 이듯이, 방언도 일대 일이라는 숨겨 놓으신 말씀이 아니신가? 믿고 구하는 자에게 구원이 있으리라!^^ “믿고 구하는 자에게”라는 의미에는 믿고 구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없으리라 하는 의미와 동일하다. 지난 많은 나 날 동안의 방언이 영언이니, 그렇지 않다느니, 하는 토론은 이제 종결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므로 현대의 모든 성도의 방언이 귀신으로부터 받은 옹알이다 보혜사 성령님이 주시는 방언을 우롱하는 “진리 님”에게는 구원이 없다. 결국이 멸망으로 예정 받은 자 임이 틀림 없다. 지옥 갈 자가 누구인가 궁금한 사람은 진리 님의 얼굴을 보라. 진리 님 그대가 목사라고 하니, 고전13:1절의 말씀을 의지하고 세상에 선포한다. 바로 저렇게 생긴 자로 옹알이? 모라? 하는 자가 지옥 불에 떨어 질 자이다. 궁금한 사람은 저 자를 보시요.

ㅎ ㅎ 중국에서 나병환자 선교를 하는 김요석 선교사의 간증 중에서 패러디한 내용이니 너무 나무라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그 간증에 등장하는 지옥에 갈 사람으로 지목된 자는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진리 님도 회개하고, 구원 받고, 다시 물 침례 받고, 성령세례도 받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쓴 글이니 저를 너무 탓하지는 마십시요! - - - - - - -지옥 갈 사람을 보고 싶으면 진리 님을 보시요!^^ - - - - - - -

진리 님이시여! 지옥 불에 떨어질 준비는 되었습니까?
진리 님이시여! 회개하고 돌아서지 않으면 죽어서 일뿐 만 아니라 살아서도 지옥 일 것이요!^^ :-)


어부 2014-08-23 00:37:40

진리 님! 내어 놓은 것도 없이 이렇게 유야무야 끝을 낼 것 입니까? 토론에 응하시는 듯하여 기대함이 높았었는데 역시 단층이심을 만인에게 스스로 증거만 하는 꼴이 되고 말았네요. 

“쨍그랑” 소리에 뜻이 있듯이 하물며 방언소리에 뜻이 없겠느냐? 나귀소리에게도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뜻을 분명하게 주셨다? 그러므로 영적인 방언, 성도가 하나님께 직고하는 방언이라도? 사람 귀에 들려야만 하는 외국어였다? ㅋ ㅋ 저! 저! 진리 님이라 불리우는 저 인간이 참으로 귀신도 웃기는 소리를 한다? ㅋ ㅎ 님의 주위를 돌고 있을 마귀님들이 배꼽을 잡고 있겠습니다요? ㅋ ㅎ ㅎ 

“나는 방언 안 해요” 왜냐하면 “신앙을 변질 시키는 더러운 방언”이기 때문이다? _ 진리 님의 유명하신 말씀이지요? _ 그 유명하신 님의 “나는 더러운 방언 안 해요” ? 가 진리가 되기 위하여 그 고매하신 칼빈신학으로 증명을 해야 하지 않겠는지요? 

[강산이 변하도록 전교인, 목사 가족 포함 방언중단론자 달랑 20명] 이라는 유명한 수식어는 뉴스앤조이 댓글에서만도 여러 번 있는 사실인데, 대 칼빈신학자가 되 실 분이, 누가 한마디 정도 더 거들었다고, 뭐라고 흠집이 더 나겠는지요? _ “강산이 변하도록 전교인, 목사 가족 포함 방언중단론자 달랑 20명 “ _ 진리 님에게 붙어 다니는 수식어를 보며 칼빈신학에서 스스로 이룬 열매에 느끼는 바가 전혀 없으십니까? ㅉ ㅉ 워낙 단층으로 영적인 일에는 백리로 도망하는 맹 자이시니, 느끼는 바는 있겠는지요 ㅉ ㅉ ? ?

방언 토론에 응하시겠다구요? 이 외에도 토론하기 전에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이 첩첩산중 인데 어찌 님과의 방언토론 입문을 제대로나 할 수 있겠는지요? 비록 메아리 없는 토론?이 될지라도 어눌하고 저만의 특유(characteristic)의 횡설수설 식 “수신자: 만인” 이 될 토론으로 노력 하겠습니다요. ㅎ ㅎ ㅎ

어부 2014-08-14 23:22:48

그런가요? 의도된 확 까발림은 아니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의 마지막 열매”니 모니 하는 식의 지금까지도 그의 댓글에서 주종을 이루고 있는 여러 다른 비본질적인 댓글들에 대한 종합적인 당연한 반응이 아니겠는지요. ㅎ ㅎ 저는 이론에 약한 자이기에 상대에 따라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약점이 있지요. 극약 처방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ㅎ ㅎ

이론적인 토론보다는 성경적인 토론을 원 합니다 
“방언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가 없다” 는 발언, 이는 조용기 목사의 말이 아니지요?, 성경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음에도 그는 단층의 알량한 머리로는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기에, 그는 무어라 합니까? “그들의 사단적인 역사에(마치, 바로의 술사들도 모세의 기적을 흉내낸 것처럼), 아무런 분별도 없이 귀신이 주는 옹알거림을 성령님께서 주신 방언으로 믿고 따른 그 결국이”이라 하지 않습니까? “귀신이 주는 옹알거림” 을 정상적인 성도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의 ordain받고 목사로 Impartation 받은 것이 아니라 사단의 신내림으로 Impartation 받은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귀신이 주는 옹알거림”의 출처가 도대체 어디라는 말 입니까? 성경에도, 지상 어디에도 없는 옹알거림, 성경의 말씀보다 사단이 준 깨우침을 우위에 두고 계속 짓꺼리고 있는 그가 아닌지요. 그의 “옹알거림” 사단이 준 깨우침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가 신봉하는 깨우침대로 결국이 사단이와 함께 제 갈 길을 갈 자가 틀림 없지 않은지요? 

[모세의 기적을 바로의 술사들이 흉내 낸 것처럼, 귀신이 주는 옹알거림을 성령님께서 주신 방언으로 믿고], 

“귀신이 주는 옹알거림”이라는 사단이가 넣어 준 거짓말을 대전제로 그의 말이 진리인양 자신의 주장을 성경 앞에 세우며, 성령께서 기록하게 하신 성경이 증거하는 방언을, 귀신의 흉내 내는 방언보다 못한 것이다. 막말을 하는 결국은 성령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인 사단보다도 못하다는 망령된 말고 열두 지옥? 에 빠지고도, 사단과 함께 무저갱에 영원히 같혀야 할 무서운 말을 하는 저 저주받을 진리 님을 어찌 대하여 할까요? “꺼꾸로 말”의 귀재인 그를 어떻게 할까요? 

“방언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가 없다” 는 말은, “성령이 없는 자는 구원이 없는 자이다” 같은 말 입니다. 즉 “성령도 방언도 모르는 자는 구원이 없는 자이다” 하는 소리를 최소한 인간의 청각은 소유한 그 이기에 알아는 듣되, 성경적으로는 풀어낼 능력도 성경 지식도 이해력도 없기에 바알세불의 힘을 빌리어 “귀신이 주는 옹알이”의 깨우침을 유일한 무기로 사용하는 그가 아니일런지요!^^ 구경꾼 님!^^ 

위의 쿠오트 된 내용으로 진리님의 심사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진리님의 Sympathy 가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가 찬찬히 다시 보세요!^^ ㅎ ㅎ :-)


구경꾼 2014-08-14 06:10:02

어부님은 끝까지 이론적으로 싸우셔야지 교인 숫자로 그래 버리면 안되죠 진리님의 교회의 교인 숫자가 20명이라고 확 까버리니 진리님이 아무 소리도 못 하자나요? 끝까지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토론 하세요.


어부 2014-08-12 07:17:08

진리 님!^^ 제가 시간에 쫓겨 변변한 댓글을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

"방언은 분명히 있습니다"? 
거! 무슨 말씀을 하고자 하시는 것인지 알아 듣지를 못하겠습니다요!^^ 
부연 설명을 부탁 드립니다!^^ (_._)

그리구요!^^
What is Rev. YongKi Cho got to do with your salvation? Hah?

목사 가족 포함 방언중단론자 달랑 20명?
등록교인 78만명에 출석교인 30만명

나는 입이 “쩍”하여 감히 비교조차 못 하겠네요? ㅎ ㅎ


진리 2014-08-10 13:16:18

어부님께서 하시는 방언이 진정으로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같은 성령님께서 우리 믿음의 근간인 말씀의 빛도 함께 활짝 열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부님께서는 여전히 말씀과는 상관 없는 자신의 감정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런 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 없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으로 자타? 가 공인하는 성령을 받고 세계 최대 규모의 종교 집단으로 성공시킨 조용기 목사님의 마지막 열매를 보시기 바랍니다. 

방언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가 없다고, 밑천도 없고 뿌리도 없는 망령된 막말에 가까운 주장과 그들의 사단적인 역사에(마치, 바로의 술사들도 모세의 기적을 흉내낸 것처럼), 아무런 분별도 없이 귀신이 주는 옹알거림을 성령님께서 주신 방언으로 믿고 따른 그 결국을!

"방언은 믿는 사람이 아닌 믿지 않는 사람을 위한 표적으로 주신 것이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어부님께서 받은 방언이 지정의, 인격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확실하다면, 말씀으로 님께서 받은 방언이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어부님께서 받은 방언이 성령님께서 주신 것임을 증명하는 길은 그 길 밖에 없습니다. 

아무런 뜻도 없는 옹알거림을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이라고 계속 주장하는 한, 어부님도 조용기 목사님의 전철을 되밟을 뿐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이라고 자신이 하는 방언을 설마 귀신이 준 것이라고 상상이나 하셨겠습니까? 어찌보면 이 모든 것이, 마귀가 육체의 감정을 이용해 준 아무 뜻도 없는 옹알거림을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으로만 철썩같이 믿고 정작 기독교 믿음의 뿌리인 말씀에는 무지했던,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방언은 복음 전파, 즉 말씀을 증거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일 뿐입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제자들이 전파한 복음은 곧 말씀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교계통계표 2014-08-09 08:12:45

사도 바울이 인정한 방언을 그대로 믿는 교회는 날로 성장한다. 기도도 잘 하는 영적성장과 교인숫자가 날로 늘어난다
반면에 그대로 믿질 못하고 영의 소리인 방언을 부정하는 교회는 날로 쪼그라 들고 교인도 별로 없다는 통계이다. 그러한 교회의 목사도 별 볼 일 없는 목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말한 방언을 인정하고 은사로 받아 교회도 부흥하고 교인들도 기도를 쎄게 하여 교회도 부흥하고 교인숫자도 늘고 목사 개인의 영적성장을 도모하도록 합시다.
방언 기도하여 성장한 오순절 순복음 교회를 본 받고 방언을 하여 부흥하는 기타 다른 교회들이 그 증거물 입니다.

어부 2014-08-09 06:19:52

1993년 미 하나님의 성회 Penn-Del District의 Annual Meeting 마지막 예배 시간이다. District의 superindendant의 불과 같은 권면의 설교 말씀이 끝난 후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서서 찬양을 인도하며 모든 예배가 거의 막바지에 도달 했을 때이다. 

얼마 동안 간절한 기도와 찬양이 어우러지며 예배 중에 운행하시는 성령님의 충만하심이 온 회중 위에 역사하심을 느낄 때, 잠시 고요함이 흐르는 듯 하더니, 갑자기 회중 안에서 낭낭한 소리로 방언소리가 터져 나온다. 갑자기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놀라서 눈을 번쩍 뜨고 회중을 둘러 본다. 그 순간! 통변(예언) 그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감지하고 바로 눈을 다시 감는다. 그런데 그 낭낭하게 들리는 방언소리가 귀에 많이 익다. 바로 2주전 부흥회에서 안수기도가 끝난 후, 모든 순서가 끝나가는 중에도 한 자매가 무릎으로 서서 간절히 기도한다. 그 모습을 본 강사목사님 다가가서 손을 머리에 얹는 동시에 “따따부따, 따따부따” 하며 언어 방언이 터진다. 강사목사님 왈 “방언은 혼자 다 받네” 당시에 언어 방언을 모르던 나에게는 기이하게 보일 수 밖에, 바로 그 방언이 미국인들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진행되는 상황에 놀라 가볍게 감전된듯한 상태로 귀는 쫑긋, 온통 진행되는 상황에 집중 한다.

고린도교회에서 실제로 있었고 사도 바울이 고전14장에 기술한 그 상황이 현재 미국교회 실제 상황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 고린도교회에서는 모든 교인에게 성령의 은사가 넘쳐나 모두가 방언하고 예언하고 선지자 노릇 하며, 사역의 분담이 명확히 구분이 안 되었으며 예배에서 무질서 한 상황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남으로 인하여 신자들이 제기한 질문을 당시 에베소교회에 있던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공중예배 부분에 대한 답변이며 Instruction이 고전14장이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변할 것이요. 만일 통변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예배 인도자는 공중예배 중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여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며 통제해야 한다. 예언(방언)하는 자를 둘 많아야 셋으로 통제와 제한을 받으며 통변은 회중 안에서 한 사람이 하며, 다른 사람은 분별하라. 분별하는 사람은 당연히 예배인도자이다. 하나님의 성회 instruction의 가르침은 예언하는 자가 회중 안에서 통변 할 수 있는 자가 있다는 확신이 없으면 아예 예언을 하지 말라.

지금 처음 당하는, 공중예배 중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에 모든 감각이 동원되어 집중한다.

잔뜩 긴장하여 집중하고 있는데 영어로 말하는 통변이 회중 안에서 낭낭하게 울려 퍼진다. 통변의 내용은 “ 담대하게 나가 전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말씀” 그대로이다. 통변이 나오자, 회중의 여기저기서 여성 성도들의 울음이 터져 나온다. 참다가 째지며 터져 나오는듯한 소리로 “Jesus Christ” “Jesus Christ” 하면서 흐느낀다. 우리 한국 회중들 같으면 “주여” “아버지”하고 울부짖을 것 같은데 그들은 “Jesus Christ” full name을 부르며 흐느낀다.

회중에서 나온 예언과 통변을 인도하시는 목사님이 재차 설명하며 감사 기도와 찬양으로 예배를 closing한다. Praising Pastor가 단에 오르더니 찬양으로 회중을 인도한다. 대다수의 회중들은 움직이지 않고 남아있어 찬양으로, 기도로, 교회에 권면의 말씀을 주신 성령님을 찬양한다. 이 교회는 해외선교 특히 멕시코 선교에 집중하는 교회로“담대하게 나가 전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더욱 선교에 힘쓰는 교회임이 분명하다.

이 글을 기록하는 목적은 이러한 공중예배 중에 나타나는 예언과 통변의 역사가 기독교2000년의 역사가 흐른 현재21세기에서도 여전히 유용하게 나타남을 세상에 알리려 함이다.

이와 같은 공중예배에서 나타나는 예언과 통변의 역사가 현재 오순절 교단, 미 하나님의 성회 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100주년을 넘긴 한국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성회 한국총회를 비롯한 어느 교단에서도 예배 중에 공중방언이나 예언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혹 한국측 신사도 교회에서나 글로리아타임스 측의 예배에서 공중방언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사실이 있었는지, 혹 있었으면 알려주시기 부탁 드립니다!^^ :-)

공중방언의 역사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한국교회, 특히 방언을 부정하는 은사중단론자들에게 고전14장의 말씀을 인용하는 선호도가 높은 것을 보면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뉴욕에 가본 경험이 없는 자가 뉴욕에 대하여 더 잘아는 척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은사중단론자들에게는 공중방언 성구를 인용할 자격이 아예 없다. 주장한들 전혀 무리가 아닙니다.

성령님이시여! 한국 교회에서도 공중방언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히브리서13장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진리 님! 현대 방언 자체를 부정하는 님에게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이 무슨 뜻인지 설명 드리면 받아 들이며 믿으시겠습니까? 

은사주의자들의 대 반격시대 입니다. 천국까지 활짝 열린 세상이니 원하시면 구하는 답변을 얼마든지 얻어낼 수 있는 참으로 빨리 교통하는 마지막 끝 날 말세지말에 우리가 있습니다. 

원하시면 부족한 저라도 나서서 알려드릴 수는 있습니다!^^ :-)


진리 2014-08-09 02:11:10

지정의의 하나님께서 뜻도 없는 소리를 방언으로 주셨다고 계속 우기시니...

어부님, 그렇게 해서라도 믿고 싶은 그 심정,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억지가 너무 심하다 싶습니다. 

그리고 방언을 혼자 할 때, 통역이 필요 없다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 역시 자신이 그 뜻을 알지 못하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정도는 알고 하셔야  하겠지요?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무슨 말인지, 잘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부님께서 하시는 방언이 만약,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 맞다면, 이 말씀의 뜻을 분명히 아실겁니다. 

무슨 뜻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성서신학자 2014-08-08 22:03:01

많은 개혁 신학자들도 방언을 지지합니다. 설령 이들도 방언 은사를 못 받앗을지라도 인정하지요.
오히려 다국어 방언은 사라졌어도 영의 음인 방언은 인정하지요.
하나님과 나만이. 통하는 방언은 다른 사람이 절대로 무슨 뜻인지를 모릅니다. 비밀스런 방언 기도이기에 그러습니다.
방언통역은 오직 대중 앞에서 방언기도나 방언에언을 할 때만 필요하지, 홀로 할때는 통역이 필요 없습니다. 진리님은 뭘 제대로 모르면서 틀린 주장만 하는군요. 신학교에 가서 성경을 공부하시길 강추함다.


어부 2014-08-08 21:41:00

진리 님은 새빨간 거짓말을, 한, 글자, 타이핑의 오류도 없이 정확히 쳐 대는지? 그야말로 강심장(신앙양심에 화인 맡은 자)이시네요! ㅎ ㅎ 이러다가 그 거짓말이 단번에 들통이 날텐데요, 

졸지도 않으시는 오직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과, 오순절 신앙의 시조이신 초대교회 사도들과, 그 허다한 구름과 같은 증인들과, 앞으로 얼마든지 부르시기로 작정하신, 그 약속을 믿고 주 앞에 나오는 자들, 얼마든지 구원 받을, 헤아릴 수 없는 자들과, 생명책에 기록되는 모든 이름들 앞에서 변함이 없으십니까? 

만 천하에 거짓말이 들통이 나면 개혁교단 목사직을 반납이라도 하시겠다. 맹세라도 하시겠습니까?


진리 2014-08-08 08:31:15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이든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이든, 방언은 공히 그 뜻이 분명하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방언의 특징입니다. 

외국어 방언은 말할 것도 없고, 소위 어부님과 같은 분들이 말하는 영언 역시 그 의미가 분명해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고린도전서의 주된 골자이기도 합니다. 

어부님,
내용을 분명히 하시든가? 아니면 통역을 세우셔서 다른 사람들에게 야만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방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 의미도 없는 무슨 주문 같은 것을 이렇게 계속 방언이라고 주장하는 한, 사실상 어부님의 믿지 못함을 스스로 드러낼 뿐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어부 2014-08-07 03:57:27

"방언은 분명히 있습니다"? 어떤 무슨 방언이 있다는 것 입니까? 진리 님이 귀신의 자식이니 귀신방언이 있다는 소리이겠지요? 그렇지요? 방언부정신학에 빠진 자가 무얼 알아 “방언은 분명히 있다” 말을 하겠는지요? 그 말 자체에 어패가 있지 않은지요 ㅋ ㅋ ㅋ

진리 님! 신학대학원생 답게, 목사님 답게 말씀 좀 하시지요.
하고자 하는 말을 신학적인 말씀으로 뒷받침 정도는 되어야 평생 신학하는 분 답지 않겠는지요? 제시하는 방언 성구말씀의 전 후 문맥과 성경 전체에서 통전적이고, 유기적으로 줄기차게 말씀하시는 그 많은 방언 말씀 절들은 지옥 볼에 태워 버렸습니까? 참으로 지옥 불에 떨어 져야 마땅한 자이십니다. 그려!^^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고전14:7),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고전14:9),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고전14:10-11),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 할찌니”(고전14:13),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고전14:8),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고전14:22)]

진리 님이 지금까지 제시하는 방언 성구 구절이 고전14:7-22 까지 입니다

진리 님! 제가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한국인 교회의 성도들, 특히 방언부정신학에 빠진 교인들은 고전14장의 방언에 대하여 말할 자격이 없다. 제 개인적인 소신 입니다. 그 이유를 밝히지요!^^ ㅎ ㅎ ㅎ

몇몇 구절만 쏙 뽑아내어 자신의 소욕을 이루기 위한 성구로 잘도 사용하는데 ㅉ ㅉ 한마디로 혀를 차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진리 님! 이 공간에는 “진리님과 어부님”만의 단독 토론장인줄로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상천하지에 홀로 하나님이신 분과 구원하신 그의 천국 백성들이 이 곳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과연! 누구를 위하여? 박수를 보낼까요? 

성경 부정신학에 빠진 진리님에게 그렇게 가다가 지옥에 빠지라고 박수를 보내고 있을 까요? ? 오순절 신앙의 선조 님들, 사도 베드로부터 사도 요한, 신약 27편 중에서 13-14편을 기록한 사도 바울까지, 누구를 위하여 응원을 보내고 있을까요? 구름같이 둘러 쌓인 허다한 증인들이, 잘하고 있는 “어부”를 위하여 응원을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요? 

진리 님! Cessationalism의 무거운 것과 심판 주로 오시는 분의 경고(계22:19)에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던져 버리세요, 우리 앞에 당한 경주에서 탈락자로 영원한 불 구덩이로 들어가지 마시고 좋은 경주로 끝까지 달리며 결국에는 승리하기를 믿음의 선조들이 진리 님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영”이시니 진리 님의 영의 상태를 잘 알고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영”이 아니이니 진리 님을 잘 알지 못 합니다. 알량한 어부의 시각으로 보니, ㅎ ㅎ “진리” 님은 구원이라는 것을 참으로 모르는 자와 같습니다. 무얼 모르는 자이시니, 허우적 거리며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성경 부정신학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는 것이 아니일런지요? ? ? 진리 님이시여! 그대의 행위는 단연코 구원 받은자의 행위에서 나올 수 없는 가장 사탄적인 짓을 스스럼 없이 하고 있는 줄로 아시요? ? ? 말씀에 정면으로 대적하는 그 많은 칼럼들을, 그 많은 지옥으로 예정된 무리들이 환호하며 추종함에 뭔가 부족한 자의 우쭐함으로 뭔가 하는 것 같으시지요? ㅉ ㅉ 한국교회의Cessationalism의 대표자, ㅎ ㅎJohn MacArthur 와 함께 지옥 맨션1동 1호에 예정된 자, 21세기에서 가장 저주 받은 자 중에 선두를 달리시는 분들, 입니다. 진리 님을 위하여 지금까지 누군가로부터 이러한 직언을 받아 본 일이 있습니까? ? ?

진리 님을 추종하는 자들이 자신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진리 님을 부추기며 잘하신다 응원들이 대단한가요? ㅎ ㅎ ㅎ 아마도 그들은 최소한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대적하는 죄는 피하여 볼 요량으로 그대를 추앙하는 모양인데 정녕 모르시는 진리 님 ㅋ ㅋ ㅋ 무언가 되는 양 우쭐한 그러한 자들, 거시기 한 자들이 세상에도 참으로 많이 있기는 하지요? ㅎ ㅎ ㅎ

진리 님? 스스로의 심장에 손을 얻어 놓고 자문자답을 해 보세요? 나는 과연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 사실이 과거에 있었나 ? 중생의 체험이 있었나 솔직하기 자문자답을 해 보세요. 이 지면에 신앙고백을 적나라 하게 주 앞에 드려 보세요!^^ 아마도 고백 비슷한 것이라도 할 줄조차 모를 것 입니다? 두고 보면 알겠지요 ㅎ ㅎ

토론을 잠시 내려 놓으시고 진리 님 자신이 주 앞에서 무엇인가? 먼저 돌아 보십시요? 


하하하 2014-08-06 22:12:57

강병도 박사의 호크마 주석서를 보면 이 시대에도 고린도전서에 그록된 영의음인 방언은 그대로 존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강병도 박사는 이단이며 시탄인가? 또한 모든 신학자들이 인정한 호크마 주석서
는 무엇인가? 
방언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제발 공부도 하고 주석서를 살펴보기라도 해야할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만 알 수 있는 영의음인 방언은 잇음으로 두번 다시는 헛소리 하지 마십시요. 성경도 인정한 방언을 없다고 하는 자야말로 이단이요 사이비인 걸 아십시요.


하하하 2014-08-06 22:11:59

강병도 박사의 호크마 주석서를 보면 이 시대에도 고린도전서에 그록된 영의음인 방언은 그대로 존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강병도 박사는 이단이며 시탄인가? 또한 모든 신학자들이 인정한 호크마 주석서
는 무엇인가? 
방언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제발 공부도 하고 주석서를 살펴보기라도 해야할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만 알 수 있는 영의음인 방언은 잇음으로 두번 다시는 헛소리 하지 마십시요. 성경도 인정한 방언을 없다고 하는 자야말로 이단이요 사이비인 걸 아십시요.


진리 2014-08-06 11:40:28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방언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님들이 하는 아무 뜻도 없는 소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이 아닙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날!
그 때도 하나님 앞에서  지금처럼 계속 옹알옹알 거리기만 하실 겁니까?

이제는 그만 좀 옹알거리고 속시원하게 말을 좀 해라!.., 하시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방언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님들이 하는 아무 뜻도 없는 소리는 결단코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이 아닙니다. 


어부님, 혹시 아직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계신 건 아니시겠죠?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방언 .. 유/무 2014-08-06 04:19:49

방언을 받은 사람은 방언이 있다고 하고,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방언이 없다고 한다. 천국에 가본 사도바울은 천국이 있다고 하고, 안 가본 사람은 천국이 없다고 고집한다. 가짜 방언은 뺴고 진짜 영의음 방언은 있다. 진실로 회개하면 진짜 방언을 주시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선 안주시기도 한다.

어부 2014-08-06 01:10:04

쨍그랑 하면 무슨소리? 창조의 법칙에 따라, 쓰임을 다하고, 그릇이 깨질 때, 뜻이 있는 소리, 진리 님의 귀에 쨍그랑, 나는 더 이상 그릇이 아니다~~그러한 의미의 소리이지요. 나귀가 프르~르~르 한다거나 히히~힝, 단층의 귀를 같고있는 온전히 인간이신 진리님의 귀에는 어떻게 들리겠습니까? 그 막힌 귀에 자연적인 프르~르~르, 또는 히히~힝 소리 뿐 무엇이 더 들리겠습니까? ? ?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이 세상에는 나귀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진리님의 세계, 이 공간에서 비로소 단층이라 불리움을 받는 1차원의 세계가 있는데, 진리님이야 말로 단층으로 이루어진 1차원의 세계에서만 보고 듣고 있거든요? ㅎ ㅎ 진리님에게 보이는 단층의 1차원 세계로부터 영원한 천국, 주님의 세계에 까지 몇 차원의 세계가 있을까요? 진리님에게만 특별하게 (퀴즈one)로 드립니다. 퀴즈를 온전히 풀고 나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조금 눈을 뜨실까? 요? 진리님의 믿음의 세계에는 오직 보이고 들려야 하는 현세이므로 영의 세계?, 그런 거? 사두개인의 세계? 영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니?, 달나라 가는 세상에 귀신이노가 어데 있느냐? 귀신이노, 사단이노, 그런 존재 거부, 무당 굿판을 뒤엎을 만한 대단한 엘리트 믿음의 소유자? 세상이 우러러 받들만한 믿음, 70년 대초 그러한 자들을 향하여 우러러 보는 대단한 믿음이 저에게도 있었거든요. ㅎ ㅎ ㅎ 믿음이 대단하더라구요 ㅎ ㅎ ㅎ 그 대단한 엘리트 믿음, 하늘을 찌를듯한 진리 님의 바벨탑 믿음 그 믿음의 최고학문의 학위를 하시겠다구여!^^ 장하십니다 그려!^^ ㅉ ㅉ ㅉ 하나님이 어떻게 내려 다 보시는지, 진리님을 향하여 무어라 하시는지? (퀴즈 two)로 드리지요 ㅎ ㅎ ㅎ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기 전에 이미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 들고 진리님 같은 자를 단칼에 치시려 단단히 벼르고 있었든 그 상황을 아십니까? 그가 오죽하였으면 여호와께서 그의 눈을 밝히시기 까지 하며 직접 말씀 하셨을까요?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민22:28),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민22:31),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민22:35) _ 여호와께서 나귀가 인간의 외국어로 말을 하게 하셨을까요? _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2.0 인간의 가장 좋은 시력으로 칼을 들고 있는 여호와의 사자(영)를 볼 수 있도록 하셨을까요? _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갓난아이와 같은 가장 좋은 청각으로 말씀을 듣게 하셨을까요? ? ? 진리 님!^^ 산 세번에 삼 세번을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 ? ?

진리님을 살리려 애쓰는 누구? 나귀는 “길에서 떠나 밭으로 도망하다 좌우에 담이 있는 피할데 없는 좁은 길에 들어서자,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비비어 상하게 하매, 그 나귀는 발람을 구하려? 깨닫고 알아채게 하고자 하여서? 또는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 앞에서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비벼 일부러 상하게 한 연고가 무엇이였을까요 ? ? ? 나귀만도 못한 진리님은 어떻게 하였는지 말씀을 제대로 보는 눈이 있는 성도들은 익히 알고 있지요? ㅎ ㅎ

진리 님! 해서! 말씀을 아전인수 격으로 자신의 소욕을 이루기 위하여 사용하도록 허락하신 일이 없다는 것 입니다요. ㅉ ㅉ


나귀의 프르~르륵 소리가 외국어 였다? 인간의 성정으로 끝까지 우기는 진리 님!이시여!^^ “디알렉토스” 외국어로 들리는 방언이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한국 말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 남편이 성령세례를 받고 나서 “하나님아부지 예수님을 보내 주시고 저의 죄를 사하여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본토박이가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무주구천동? 지방방언으로 외국어 한국 말을 하더라!^^ 그러한 외국어 방언, 성령님의 초월적인 현상에 의하여 일어날 수 있습니다. 대개, 단어로 또는 쎈텐스로 단발적인 언어 방언을 한다는 간증소리는 많이 들어 보았지요!^^ 

@ 외국에서 강사로 등단하여 영어로 말씀을 열었는데 통역을 하지 않기에 왜 통역을 하지 않느냐 물었더니, 당신이 지금 우리나라 말로 하기에 통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 말이 들리면 “아멘”하세요, 강사가 영어로 하였더니 청중들이 자기들 말로 “아멘” 화답 하더라!^^

@ 한국인에게 유명한, 땅따먹기로 시작하는, 원종수 권사의 classic 그 유명한 간증도 못 들어 보았습니까? 저는 초창기 장로교회 입문시절에 들어 보았는데요? ㅎ ㅎ 필라델피아에서 그 나쁜 한국인 부부를 만나 괴 경험을 한 그는 지금도 그 사람들 어디서 사는지 아세요? 간증 때마다 물어 본답니다? ㅎ ㅎ ㅎ 그들이 진리 님 부부가 아니었나요? ㅎ ㅎ 그, 원종수 권사가 나쁜 한국사람을 만나 고생을 하며 우여곡절 끝에 Mckeesport, PA 제가 사는 멀지 않은 지역에 오게 되었는데, 아무도 모르는 미국 시골 구석에 덜렁 떨어져 막막한 상황에서 사도행전의 천사를 보내 주셨는지, 힌 수염을 길게 기르고 하얀 양복, 하얀 모자를 쓴 현대판 천사의 도움으로 정처없이 찾아간 목사님을 만나게 되고 어찌어찌하여 큰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원하지도 않던 간증을 강제로 하게 하실 때 “하나님 정말 이러시깁니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입을 열어 방언으로 간증을 시작하였는데 청중은 영어로 듣더라” 방언 간증 후에 강단에서 내려오고 집회가 끝났는데, 여자 한 사람이 닦아와서는 당신이 안수해 주면 병이 낳을 것 같으니 안수를 해 달라 하는 요청으로 안수기도를 하니 그 자리에서 여인이 병고침을 받게 되었는데, 원종수 권사도 자신에게 신유의 은사가 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진리 님! 위의 두가지 간증의 경우를 어찌 보십니까? 외국어로 나타나는 경우의 실례를 적나라하게 설명을 드렸는데? 두 간증에서 회중들이 들은 외국어가 처음부터 외국어로 혀에서 울려 나온 소리일까요 아님! 두번 째 간증의 인간이 알아 들을 수 없는 천상의 방언소리, 영의 소리였는데 집회를 친히 인도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이 역사하심으로 초월적인 현상으로 “글로~사” “하늘의 언어”가 외국어 “디알렉토스”로 들렸을까요? 강사들이 상대 회중들의 언어로 알아서 말을 전달한 것 일까요? ? ?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권세와 능력을 소유하신 “보혜사 성령님”께서 예배를 주관하시며 말하는 자의 혀를 주관하셔서 자의로 말하게 하지 못하게 하시며 성령의 뜻으로 “디알렉토스” 외국어로 들리게 역사하셨다. 생각이 전혀 들지 않으십니까? 

진리 님!이 처음에 인용하는 고전14:10-11 말씀은 공적인 예배에서 일어나는 공중방언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개인이 골방에서 하는 방언이 아니라는 말 입니다. 대개의 성도들이 방언하면 고전14장의 방언을 말하는데 특히 한국인 교회의 성도들은 고전14장의 방언에 대하여 말할 자격이 없다, 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사람 입니다. 그 이유는

에이효! 이 댓글을 준비하느라 근 반 나절이 걸렸네요1^^ ㅎ ㅎ 눈치도 보아야 하겠고, 일도 보아야 하고, 나중에 계속 하지요! :-)


진리 2014-08-05 14:20:07

"쨍그랑" 하면 이건 무슨 소리겠습니까?
뜻없는 소리는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이겠습니까?

어부님,
하나님께서는 하다못해 단층보다도 못한 나귀에게도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있게 뜻이 분명한 말을 주셨습니다. 

님이 계속 뜻도 없는 옹알거림을 방언으로 주장한다면, 님의 말처럼 지정의의 하나님을 barbarian 으로 만드는 망령된 짓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부 2014-08-04 12:35:29

ㅎ ㅎ ㅎ 나귀를 소리지르게 하셔서 발람이 이해하는 인간의 언어로 들리도록 초월적으로 역사를 하신 일이 구약에 있기는 있지요. 진리 님?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에는 단층임이 틀림 없습니다. 나귀의 프르르~르~르 에 꽃쳐서 “모든 방언이 외국어이다” 결론에 도달 하셨습니까? ㅋ ㅋ 어찌하여서 현대의 나귀들은 외국어 방언을 하지 못할까요 ㅋ ㅋ ㅋ 나귀는 나귀일 뿐, 말 못하는 짐승일 뿐이지, 언어 능력이 있는 짐승으로 창조하신 일이 결코 없습니다요. 차라리 앵무새 소리가 방언, 곧 외국어이다. 신학박사 학위 논문을 쓰시지요. 한마디로 기가차는 단층의 머리에서나 나올 수나 있는 인류 역사에서 최초 유일의 대 오류 입니다요 ㅋ ㅋ ㅋ

워낙 야만이시니 성령께서도 방언에 야만?인 줄로 착각 하시는 인간의 야만의 극치를 달리시는 분, ㅋ ㅋ ㅋ 신학박사를 하신다는 분이시니 평신도 장로로서 물어 나 보겠습니다. 방언의 본질이 무엇인 줄은 아시는지요?


진리 2014-08-04 08:15:37

나귀가 사람의 말을 했지만, 나귀 자신은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그 말을 알아 먹었지요. 

어부님,
님께서 하시는 방언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이와 같이 어부님 자신은 그 뜻을 모를지라도 최소한 듣는 사람들은 알아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통역을 세우지 못하실거면, 자제하시는 것이 피차에 야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부 2014-08-03 06:29:40

방언이 멍멍이나 냐옹이 소리라는 것 입니까? 영언이라는 말 입니까? 앞으로는 한가지로만 말씀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ㅎ ㅎ 댓글을 제가 매번 재 정리를 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를 해야만 하는지요. 대략 알아는 듣겠습니다요!^^

“방언은 영언이다” 방언을 영언이라고 하는 이유는 방언이 하나님께서 주신 하늘에 속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 의미도 분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고전14:10-11)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자기의 소욕을 이루기 위하여 아전인수 격으로 사용하라고 주신 일이 없습니다요. 말씀은 비록 내 입맛에 쓰더라도 거부하지 않고 삼켜야 내 몸에 양약이 되지요. 제 입맛에 맡지 않는다고 혀 바닥으로 탁 튕겨버리는 우리 집 말티~즈 “공주”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뜅겨 버리는 그가 바로 사탄적인 자가 됩니다요. 사탄이가 저 멀리 공중에만 있는 줄로 착각을 하시는가 본데요? 바로 진리 님 마음 속 깊이 쳐 박혀서 님을 올가미로 단단히 씌어놓고 눈을 가리우고 말씀을 깨달을 수 없도록 철저히 막고 있습니다요? 누구보고는 토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시더니 달랑 2절 말씀이 방언 절의 전부인양 들이대는 것을 보니 ㅎ ㅎ ㅎ 그야말로 방언에는 야만인이 틀림 없습니다요 ㅋ ㅋ 

“고전14:10-11” 절이야 말로 님과같이 방언에 야만인 자들이 방언의 진정한 뜻을 알지 못하므로 결국 이러한 자들 앞에서는 야만이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적당하고 질서있게 하라는 말씀이지, 야만인이 방언을 알아 듣지 못한다고, 방언하는 자도 진리 님과 같는 자와 함께 야만이 된다는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말씀이 그리 쉽습니까? ㅎ ㅎ, 고전14장을 유일한 방언 장으로 알고 계시는 진리 님! 좋습니다, 기왕에 “고전14:10-11” 말씀으로 던지셨으니 계속해 보시지요 :-)

진리 2014-08-03 01:15:31

어느 방언에 능통? 한 전문가께서 자신은 평생 외국어 방언를 본 적이 없다고 말을 한 것을, 방언이 영언임을 주장하기 위한 펌글로 올라온 것을 보고 참 아이러니 하다고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방언은 아무 의미도 없는 그냥 소리가 아닙니다. 분명한 의미가 있습니다. 방언을 영언이라고 하며, 또한 외국어 방언이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은 반드시 그 의미를, 방언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야옹"하면 고양이 소리고, "멍멍"하면 강아지 소리임을 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부님과 같은 분들이 하는 방언은 "야멍"이라고 해 놓고, 어떤 때는 고양이 소리라고 하고, 어떤 때는 강아지 소리라고도 했다가, 또 어떤 때는 그도 저도 아닌 닭울음 소리라고 하니, 지정의가 있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가 님들이 하는 방언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최고의 은사는 사랑이니 여기에다 사랑의 은사를 적용시켜,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소리를 계속 옹알옹알 거리게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고전14:10-11)

방언을 영언이라고 하는 이유는 방언이 하나님께서 주신 하늘에 속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 의미도 분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만, 땅에 속한 사람들은 그 뜻을 알 수 없기에 이를 객관적으로 알게 하기 위해서 통역의 은사가 반드시 함께 수반되어야만 하는 것이구요. 

어부님,
뜻을 분명히 안다면 하십시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통역을 세우든지, 그도 아니면 자중하시기 바랍니다.


어부 2014-08-02 12:04:54

지브리 지브리 여러 말은 하시려 하는 것 같은데, 다음의 의미로 질문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대략 정리한, 주신 질문 입니다. 마음에 드시는지요?

1. 방언을 “왜” 의미도 “모른채” 계속해서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듯” 하느냐? 
2. 순간 감정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2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말씀조차 제대로 제시된 일이 없는데 무엇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인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좀 더 명확히 먼저 정리해 주시겠습니까? “순간 감정에 따라 다르게”라 하시면 방언을 인정하시기는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신지요? 딴지식 걸기로 마시고 진지하게 말씀에 의거하여 정리하여 주십시요, 한가지 유의하셔야 할 것은 진리님과 토론을 하는 상대는 신학을 모르는 자 입니다. 가방끈이 워낙 짧기에 정확한 말씀 인용이 아니면 알아 듣는 것 자체를 모릅니다.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제시된 말씀 내용이 달랑(고전14:9-11) 입니까? ? ? ㅎ ㅎ 저는 평신도이기에 오류가 있더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정정하면 될 뿐이겠으나 진리님은 저와는 입장이 다릅니다. 

신분에 걸맛지 않는 ““왜” 의미도 “모른채” 계속해서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듯” 하느냐?” 질문하는 진리 님이 “왜”라는 그 이유를 모른다면 성경은 방언을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 하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주문 외우듯이 중얼중얼 대느냐? 뭐 이런 정도로는 들이대야 긴장이라도 할 것 아닙니까? [1. 방언을 “왜” 의미도 “모른채” 계속해서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듯” 하느냐?] 이와 같은 질문은 토론하고자 하는 자의 자세가 아닙니다요. 님은 지가 어째서 진지하게 응답을 해야 한다 생각 하십니까? ㅎ ㅎ 방언의 의미도 모르며 질문하기에 급급한 님에게 횡설수설 역 질문이 무리인가요? ㅎ ㅎ 

“분명한 계시의 말씀과 방언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성의 있고 규모있는 질문으로 정정 부탁 드립니다.
원하시면 그대로#1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릴 수는 있겠습니다 :-)


진리 2014-08-01 23:32:17

이렇게도 영의 실체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이, 영언이라고 하는 방언을 하는데 왜 뜻도 모른채 마치 주문을 외우듯 주술처럼 매번 똑같은 소리만 읊어 댈까요? 

지정의의 하나님을 다른 말로 하면 인격의 하나님입니다. 왜 분명한 계시의 말씀을 놔두고 뜻도 모르는 개골개골만 하게 하실까요? 그것은 어부님께서 하시는 방언이 하나님께서 주신 영언이 아니라 사단이가 준 개구리 영이란 증겁니다. 

어부님께 영의 실체를 물은 건, 님께서 하시는 방언이(님의 말처럼 영언인 방언이), 이현령 비현령식으로 순간 순간 감정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교리로 영의 실체를 대신하고 말았군요. 

이것이 바로 어부님과 같이 뜻도 없는 소리를 방언이라고 믿고 하는 분들이 믿는 것이 말씀이 아니라 문자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고전14:9-11)

이가 났고 밥을 먹을 수 있다면, 이제부터는 뜻이 분명한 말로 하시기 바랍니다. 이가 나고 밥을 먹은지가 언젠데, 언제까지나 맘마맘마만 하시겠습니까? 


어부 2014-07-31 01:29:23

@ 최소한 내 자신이 영의 실체를 알아야 방언에 마음 문을 열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왜 영의 실체에 대해서 묻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으십니까?
@ 최소한 영의 실체 정도는 알아야 님들이 받은 방언에 객관적인 무게가 실릴 것 아니겠습니까?

진리 님!^^
영의 실체가 무엇이냐 질문 하신다면? 전혀 답지 않은 질문이거든요?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질문에 한마디로 대답한다면 “유일하신 하나님” “I am who I am”라 하시는 분 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 안에서 삼위의 위격으로 존재하시는 “성부하나님”, “성자예수님”, “성령하나님” 삼위가 각각 지정의를 소유하시며, 동일하게 모든 권세와 능력과 위엄을 소유하시며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는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이, 진리님이 똑바로 아셔야 하는 “영의 실체” 이십니다. 

자세히 구분하면, 2000년 전에 승천하신 이 후로 재림 때까지 이 땅에는 계시지 아니하시는 [예수의 영으로 마가의 다락방의 120문도에게 오신 “보혜사 성령님”]이 진리님이 궁금해 하시는 영의 실체 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오신 목적과 사역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재차 설명드릴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 평신도 장로다운 설명에 마음이 흡족 하신지요? 듣기 원하시는 영의 실체의 대답이 되었는지요? 진리님이 찾고자 하는 영의 실체는 무엇이었습니까?

“영의 실체 정도는 알아야 님들이 받은 방언에 객관적인 무게가” 정녕 몰라서 물으시는 것인지? 님의 “영”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이, 달나라 가는 시대에 귀신이 어디 있느냐 하는 70년대의 지식인이라 하는 자들의 수준과 같습니다요? 보혜사 성령님은 초대교회 이후 언제나 성도들과 가까이 임재 하셨습니다. 님이 인정을 해 드린다고 해서 객관적인 무게가 올라가시는 성령님이 아니신 분이심을 이제는 눈치라도 채셔야 합니다. 이제 진리님도 “영의 실체”를 찾으셨으면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십시요.

사도 바울은 고전12:1에서”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권면 합니다. 님이 좋아하신다는 칼빈만의 성령 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절로 계속 됩니다. 믿음도 믿음 나름 입니다. “믿노라”하며 착각으로 믿는 고백?은 커녕, 꿀먹은 믿음, 그러한 고백은 믿는 것이 아니지요? ? ? 사도 바을은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자들에게 신령한 것에 대하여 말을 하고 있는데, 칼빈 선조와 그의 후예들은 은사중단론으로 오해를 깊이 했었네요?, 그러고 보니 칼빈 선조 역시 영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에는 “단층”이었음이 증명 되었습니다요.

없던 성경 지식, 이전에 전혀 알지 못하였던,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풀이가 타이핑하는 순간에 깨달아 지며 이 글을 적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칼빈)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4절 이후 은사와 직임, 역사는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다”하는 절은 은사에 열려있는 침례교회에서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는 구절로 선호하여 사용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씀 하셨거든요? 로마교회(롬12:6-8)의 7가지 은사, 고전 12:4-10의 9가지 은사, 고전12:28의 6가지 은사, 12:31절에서는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 유명한 가장 큰 은사의 사랑 장인 고전13장인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말씀은 기록되고 있습니다. 13장에서는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는 신령한 성도라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 . .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 . .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 .

진리님!^^ 모든 은사에 능하고 비록 성령충만한자 일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다면 이 말씀이 은사중단론자, 술로 충만한 자들 일찌라도 사랑으로만 충만하면 하늘나라에 큰 유익이 되겠다는, 그래서 구원 받기에 아무 염려 없겠다 하는 말씀인가요? ? ? 결코 그럴 수는 없지요. 칼빈 선조도 단층으로 지독히도 깊이 오해를 하셨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 고전13사랑장의 종결이 아닙니다. 이미 말씀 드린대로 14장으로 연결됩니다 14: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로 귀결 됩니다. 결국 사랑이 “도루신령한 것”으로 변하였네요.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로 시작된 말씀이 39절에서는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고전14장의 시작과 끝이 일맥상통한 권면으로 끝을 맺으며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명령하십니다. 선조의 단층을 닮아 그 모양이시니 누구를 어렵게 할 마음은 없습니다 ㅎ 

피차에 한가지 더 유념해야 할 것은 고전 14:37-38의 말씀 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은 정말로 꼭 “잠긴동산” 에게 하는 말씀 같습니다. 그렇다고 진리님에게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성령의 역사를 알지 못한 자 그도 역시 알지 못한 자니라. “알지 못한 자” 현재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긴동산”은 적당하고 질서있게, “진리님”은 기록된 말씀을 믿지는 못할 망정, 역행하며 성도를 견인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해방꾼이 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아직도 질문꺼리가 많으십니까?

@ 사도행전 2장에서 방언을 주신 것은, 방언 자체가 목적이었습니까? 
@ 아니면 요엘서의 말씀이 응하는 것으로, 
@ 곧 성령이 부어지는 것을 나타내는 표징으로 방언을 주신 것이었습니까?

@ 다시 말해서, 성령을 부어주신 목적이 방언을 받기 위한 것이냐? 
@ 아니면 성령을 부어줬다는 증거로 방언을 주신 것이냐?

궁금한 것이 있으시면 더 설명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 :-)


진리 2014-07-24 12:10:10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신령한 은사(영적 은사)를 나누어 줌에 있어서 성경대로 어떤 이에게는 이것을... 그리고 또 다른 이에게는 저것을...(꼭 방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나누어 주심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은 주님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방언은 은사 중에서도 개인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영의 실체는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신비하기만 하고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어부님의 신앙이 방언이라고 하는 개인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서 주님의 몸을 볼 수 있는데까지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이제라도 진지하게 토론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경에 근거한 자유로우면서도 진지한 토론이 되기를 원합니다.

어부 2014-07-24 00:02:25

Review Time 입니다
1. 좋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 신령한 은사 중의 하나이든지, 오순절 믿음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제가 의도한 topic은 Impartation이 지극히 성서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Impartation)하여 영권을 전수한 후에 선교사로 파송 합니다(행13:2-3), 정목사님도 목사로 Ordain(order by virtue of superior authority) 받으셨습니다. 본인도 Impartation을 받으시고는 능력 전수하는 행위를 극 비난하시면, 자신이 받은 안수는 (접신하는 신 내림)을 위한 안수였다는 말 인지요? 자신의 정체성마저 부정하는 자에게, 형님 같은 심정으로 권면을 드립니다, 뒤져라, 차라리 나가 뒤져라, 개나, 소나 다 받는 방언인데, 방언을 받지 못하는 자들을 향한 어느 장로교 부흥사의 일갈 입니다. 목사님도 소나무 뿌리 두어개 정도는 뽑으셔야 하겠네요 (저는 극약처방을 좋아합니다 ㅎ ㅎ) 이 말에 목사님 동료 분께서는 뒤집어지던데요 ㅎ ㅎ, 살아있다고는 하나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자 입니다. 혹 살아 본 일이 없는 자일 수도 있겠네요. 정 목사님, 회개하시고, 돌아 서십시요, 제발! 죽지 마시고, 살아 나십시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함께 주셨습니다. 살아나고자 하는 자유의지가 있으십니까. 보혜사 성령님을 영접하시고 신뢰 하십시요. 좋은 길로 인도 하실 것 입니다. 영적 권능을 받고 목회자가 살아나야 교회 성도들도 살아나지 않겠는지요.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2. 기독교의 기본교리가 삼위일체 교리 입니다. 삼위일체 교리 중에서 성령의 사역을 멸시까지 하시는 님을 위하여 친절하게도 장문의 설명을 준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묵묵무답으로 일관하시니, 교리에서 흔들리고 있는 목사님을 지가 어찌 하오리까? 밑의 댓글로 돌아가서 “평신도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이해”를 읽어보시고, 문제가 발견되면 바로 잡아 주시고, 문제가 없으면 성령 하나님 부분을 받으셔야 토론하는 자의 자세가 아니인지요? 성령하나님의 마지막 말세지말의 성도들을 견인해 가시는 사역을 이해 못하면 목사님이 다음 토픽으로 삼으신 “방언이 은사의 기본이며, 다른 은사를 여는 열쇠이다” 하는 말의 뜻을 이해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저도 진지해 질 터이니, 목사님도 토론의 주고 받아야 하는 기본 룰을 지켜 주십시요. 기본 룰이 흔들리면 진지해 질 수가 없지요 ㅎ ㅎ

3. 목사님이 아전인수 격으로 인용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 의 말씀은 칼럼에서 인용한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요. 히브리서의 원 저자는 주께서만 아시겠지만, “주후 200년경에 쓰여진 체스터 베티 파피러스(p46)에는 히브리서가 바울 서신들 가운데 나온다. 유세비우스에 ... 14), 오리겐은 반복해서 히브리서를 바울의 글로 인용하였다.” 히브리서의 저자를 사도 바울로 인정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며 성도들을 위하여 중보하시는 예수님은 히브리서가 쓰여지던 초대교회 이후 현재는 물론 재림 때까지 이 땅에 계시지 아니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셔서 당시 히브리서를 기록하도록 영감을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히13:8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는” 의 부분을 ( “보혜사 성령의 역사는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의 역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로 변역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도인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시는 보혜사 성령의 역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낼 수가 있습니다. 

“((생명샘 님은 방언이 다른 은사를 여는 열쇠이다. 어부 님은 방언이 은사의 기본(필수)이다)) 

정 목사님!^^ :)

정 목사님 왈! “죄송하지만, 최소한 내 자신이 영의 실체를 알아야 방언에 마음 문을 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정정해도 되겠습니까? 한마디 말만 더 보탭니다 “성령세례는 목적이 아니라, 성령충만으로 가는 수단이며, 체험만이 아니며 그렇게 사는 삶임을 고백 합니다.” :-)

이 방에는 현재 생명샘 님, 진리 님, 어부 님, 이상 3인의 토론 장 입니다. 생명샘 님만이 홀로 소외감을 느끼게 할 수는 없지 않은지요. “도대체 이 말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답변은 생명샘 님의 Turn으로 돌리기 원 합니다!^^ :-)

이상으로 남자의 수다를 잠시 중단 합니다. :-)


진리 2014-07-23 13:45:23

조금 진지해 진 것 같더니 또 시작입니까? 좀 진지해 지십시다. 

((생명샘 님은 방언이 다른 은사를 여는 열쇠이다 
어부 님은 방언이 은사의 기본(필수)이다))

도대체 이 말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2장에서 방언을 주신 것은, 방언 자체가 목적이었습니까? 아니면 요엘서의 말씀이 응하는 것으로, 곧 성령이 부어지는 것을 나타내는 표징으로 방언을 주신 것이었습니까?

다시 말해서, 성령을 부어주신 목적이 방언을 받기 위한 것이냐? 아니면 성령을 부어줬다는 증거로 방언을 주신 것이냐? 하는 겁니다. 

어부님과 구요한님이 받았다고 하는 방언이 진정으로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위와 같은,

((생명샘 님은 방언이 다른 은사를 여는 열쇠이다
어부 님은 방언이 은사의 기본(필수)이다))

이런 말은 결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다 못해 나귀가 하는 말도 사람이 알아 먹었는데, 최소한 한 쪽은 그 방언의 뜻을 알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이 말입니다. 

믿음에 대한 말만 해도 그렇습니다. 믿음은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영에 속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부님이나 구요한님께서 받으신 방언이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 확실하다면, 왜 영의 실체에 대해서 묻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으십니까? 최소한 영의 실체 정도는 알아야 님들이 받은 방언에 객관적인 무게가 실릴 것 아니겠습니까?

((생명샘 님은 방언이 다른 은사를 여는 열쇠이다
어부 님은 방언이 은사의 기본(필수)이다))

성경은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어떤 이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주고, 다른 이에게는 믿음도 주며, 또 다른 이에게는 방언도 말하게 한다고 하는데, 왜 님들은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받아야만 한다고 비성경적인 주장을 하는 것인지.

죄송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구요한님과 어부님이 받은 방언이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오직 말씀으로 증거될 때만 온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부 2014-07-23 12:16:05

아예 오순절 사건을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라 하시지 않구요? ㅎ ㅎ

교회의 태생이 오순절 사건으로 인함이지요
"초대교회 사도바울의 시대에는 성도들 모두가 오순절 신앙인, 영언자 들이었습니다" 로 친절하게 바꾸어 드리겠습니다.

할 말이 없으신 것 같은데 한가지만 더하겠습니다.
"지금 하시는 방언을 점집에 가서 그대로 한 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영락없이 귀신들린 무당이라고 할 겁니다." 하는 님의 말은, 살아 계시며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고 점집의 무당을 더 신뢰한다는 말 입니다. 어찌 이리도 영적 감각이 없으십니까? ㅉ ㅉ 도대체가 영적 무뇌아 이십니다요 ㅎ ㅎ ㅎ 이 밤도 안녕히 . . . .


진리 2014-07-23 11:58:58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롬1:11-12)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이는 곧 ~ 믿음을 인하여...

이 토론은 어부님께서 먼저 제기하셔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토론을 제기하신 분께서 본문에는 충실하지 않고 계속 딴 소리만 하시니, 참 어이가 없습니다. 

바울이 오순절 신앙인의 시조? 라는 말도, 방언을 한 것으로만 친다면야, 발람을 태운 나귀가 더 시조 아닐까요?
오순절 때, 바웋은 아직 사울이었으니 말이지요. 

.어부님과 같은 분들을 위해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하시는 방언을 점집에 가서 그대로 한 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영락없이 귀신들린 무당이라고 할 겁니다.


어부 2014-07-23 11:54:37

초대교회 때의 성도들은 모두가 오순절 신앙인, 영언자 들이었습니다 :-)

어부 2014-07-23 11:48:12

그러니까요!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말하고 있는 본인이 사도바울 자신 입니다. 오순절 신앙인이 "너희와"로 부른 다른 성도들의 믿음을 바울 자신의 믿음과 동일 선상에 올려 놓고,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 . 

진리 님도 자신의 믿음을 사도바울의 믿음의 선상에 올려놓고 동일시하며, 자신의 믿음의 수준에서 바울의 오순절 믿음을 맞추려 하니 핀트가 맞겠습니까? 믿음도 믿음 마련이지요. 본문의 원 저자의 당 시대의 신앙배경을 배제하고 자신 중심의 좁은 시각으로 “믿음”을 대하니 자기 믿음의 경우로 착각 하였지요

정 목사님에게 다시 한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정 목사님은 도대체 "점집" "귀신들린 점쟁이"와 같은 non-biblical한 언어가 아니면 토론을 이어갈 수 없는 분이십니다. 

쿠오트 된 님의 댓글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시는 방언을 점집에 가서 그대로 한 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영락없는 귀신들린 점쟁이라고 할 것입니다." 

“딴 소리만 하시니” “참 어이가 없습니다” 라는 토론장에서의 표현은 상대의 주장을 감당할 수 없다는 허탄한 소리에 불과 합니다

알량한 님의 이해력을 돕기 위하여 장문의 수고를 아끼지 않은 글에는 일언반구 묵무무답이시군요.
잘 알겠습니다. :-)


어부 2014-07-23 07:37:56

진리 님은 Serious 하시군요. 정 목사님 자신 이십니까? 임무교대로Take over하셨습니까? 그 좋아하시는 Impart하는 행위, 성경에 없는 단어 "Impartation"을 파생 시키신 장본인 이십니까?

본문 롬1:11을 가져온 이유가 "나누어 주어(Impart)" 에서 파생된Impartation하는 행위가 지극히 biblical 한 것을 알리기 위함인 줄을 정이철 목사님은 이제 인정하시고 바로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Some을 무슨” 으로 해석한 “한글번역”의 애매한 의미를 바탕으로 한 애매한 믿음, 참으로 정이철 목사다우십니다. “정이철답다” 신종어가 파생될까 염려 됩니다. 성경을 보는 시야의 깊이가 단층으로 얼마나 알량한지는 아십니까? ㅉ ㅉ

“그러므로 어부님의 주장처럼 신령한 은사가 방언만이 맞다면” 언제 그 누가 그러한 소리를 하던가요? 평소에 익히 알고 있던 대로 진리님은 “억지주장”의 대가임을 스스로 증명 하시는군요? 

“성령세례의 필수가 방언이다” 또는 “방언이 은사의 기본이다”, “방언이 구원의 증거이다” 칼빈니스트에게는 아주 생소하고 도전적일 수 밖에 없는 주장을 지극히 biblical 방법으로 제시한 바는 있지만, “방언만이 신령의 은사” 라는 말을 한 사실이 없습니다. 진리 님은 지금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위증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끝 날의 사역을 감당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거부하는 죄가 결코 미약하다 할 수 없을진대, 지난 반10년동안 단층인 자의 악행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자각은 하시는지요. ㅉ ㅉ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악한 행위를 자행했는지조차 한번도 생각해 보신 일이 없지요. 이 글이 진리 님의 눈에 보이며, 성령님의 질책하는 소리가 들리십니까? 자신의 행위를 깊이 숙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에는 누구로부터도 질책하는 소리를 들어 본 일이 없으시지요? 이제, 질책하는 소리가 님에게 임하였으니, 듣고, 회개하고, 정녕 살아 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기독교' 아닌 '삼위일체의 기독교'다 “ 30%의 빈약한 정답 입니다

삼위일체의 삼위 하나님은 동일하게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십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시고, 아들은 성령이 아니시고, 성령은 아버지가 아니시되, 하나님의 영이시되 예수의 영으로 일임이 되신 보혜사 성령께서, 인류 구원의 마지막 때의 사역의 대 역사의 시대를 , 책임으로 감당하시기 위하여, 유일하신 하나님 안에서 서로에 사역을 균등하게 분담하신 그 사역을 현재 신약시대에 감당하고 계십니다.

영원 전부터 예정하시고 영원토록 운행하시는 인류구원의 역사를, 계획하시고, 운행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역사에 비하여, 달랑 3년간의 공생애를 합한 예수님의 33년간의 역사가 너무 미약하다? 피조물로서 그 누구랴 말 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지요,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몸을 쪼개기 까지 하시며, 피 흘리시고, 몸을 상하게 하시며, 십자가에 달리시어, 고통을 당하시고, 인류의 죄 삯을 지불하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을 다 이루시므로 드려진 열매가 하나님의 계획과 동일한 공로로 영광을 받으셔야 마땅 합니다.

신약 시대에 성령님이 감당하시는 2000년의 사역의 시간이 6000년의 하나님의 시간에 비하여 너무 미약하다? 피조물로서 그 누구랴 말 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지요, 영원하신 하나님의 시간과 33년 간의 예수님의 시간과 2000년 간의 성령님의 시간이 동일하게 인류 구원을 위하여 분담하신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섭리로 운행하시는 역사가 삼위 하나님이 동일하고 균등하게 영광을 받으셔야 할 유일하신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계획과 역사 입니다_ 평신도가 이해하는 즉석에서 기록된 삼위일체론이니 너무 나무라지는 마십시요. :)

“신약의 성령은 예수가 승천하신 후에 이 땅에 오셨다. 그 전까지 제자들과 함께 하신 성령은 동일한 제 3의 성령이시나, 예수의 영으로 오신 보혜사 성령이 아니고 구약 시대부터 지상에서 역사하신 성령이다. 본질적으로는 같으나 기능적으로 전혀 다른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마가의 다락방의 120 문도에게 임하신 첫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는 사건 이 후 현재까지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기까지는 보혜사 성령의 시대이다. 게시판에서 늘 주장하던 내용을 님이 정리하여 칼럼에 사용하셨지요? 제가 재 정리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일임 받아서 2000년 전에 임하신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예”로 믿고 기다리는 성도들에게는 현재이든지, 장래이든지, 오실 재림의 순간까지도 언제나, 어디서이든지, 영원토록 유효 합니다.

진리 님이 “성경 전체의 맥을 보는 것입니다” 하셨습니까? 그래요? 그렇게 간단한지 다시 한번 봅시다 :)

단층의 좁은 시야로 보면 당연히 “신령한 은사” 가 “믿음”으로 귀결 되겠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칼빈니스트 진리 님의 믿음이 아니지요. ㅎ ㅎ 누구보다도 방언을 많이 하므로 주께 감사 한다는 오순절 신앙인의 시조이신 사도 바울의 “오순절적인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해를 깊이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이 오순절 적인 믿음의 소유자이기에 신령한 은사들(gift + s)을 나눠 주기 원한다 한 것이지요. 믿음 안에 들어있는 무궁무진한 은사의 유익을 캐어 내시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ㅉ ㅉ

30% 점수의 삼위일체론으로 이해하는 자에게는 말씀의 깊은 숲 속에 있는 생수를 맛 볼 수 있는 은혜가 허락되지 아니 하였습니다요.

저는 신사도나 글로리아타임스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한다는 안수행위(Impartation)가 정이철 목사님으로부터 정치적인 교회의 싸움의 대상이 될 만큼 그들의 말씀인용이 이단적이거나 non-biblical하지는 않다는 확신이 있기에 부득불 그들을 지원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극단적인 신비주의”이나, 또한 장로교회에서 신봉하는 “교조주의, 극단적인 칼빈주의” 역시 양쪽이 동일하게 경계되어야 할 대상 임을 똑 바로 아시기를 바랍니다.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영의 마음 문을 활짝 여시고 용납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천국을 찾아 각각 제 갈 길로 가시기 바랍니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요. ㅉ ㅉ 강도를 억제하려면 힘이 더 있어야 하지 않겠는지요. “오순절 신앙인 사도 바울”의 인정도 받지 못하는 “교조주의” 주제에 무엇인가는 할 수 있겠는지요.

계속 토론을 원 하시면 “무당, 푸닥거리, 쿤달리니, 개소리, 그럴싸하게 ” 등 non-biblical한 잡소리 들이랑, Recycle Bin 으로 보내져야 할 Junk 칼럼으로 마시고, 순수한 성경의 말씀으로만, 그 좋아하시는 조근조근으로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진리 2014-07-22 13:50:40

우선은 본문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뜻이 애매할 경우에는 문맥 전후와 더 나아가서 성경 전체의 맥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12:8-10)

여길 보면, 성령의 은사들 중 세번 째에 믿음과 여덟 번째에 방언이 나옵니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가지도 믿음이나 방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사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부님의 주장처럼 신령한 은사가 방언만이 맞다면, 성경은 이와 함께 나머지 여덟가지도 함께 기록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롬1:11-12절을 보면, 신령한 은사는 곧 믿음이라고만 분명하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믿음과 성령의 은사들 중에 세번 째로 나오는 믿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어부님에게는 먼저 이 둘의 차이에 대한 분별이 급한 것 같습니다. 

어부님,
본문에 그 가리키는 것이 분명할 때는, 그 말씀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이 말씀을 믿는 크리스찬의 본분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어부 2014-07-22 11:50:42

그래요? 그렇게 간단한지 어디 봅시다
Key Word를 선택하라 하신다면 
신령한 자의 눈에는 “무슨 신령한 은사” 나눠 주어” 가 보여야 합니다

Polld을 엽니다

1. 무슨 신령한 은사는 오직 믿음 뿐이다.
2. 무슨 신령한 은사는 고전12:7-10, 엡4:11, 롬12:6-8, 고전12:27-28 의 모두를 포함한다.
3. 믿음은 신령한 은사가 아니므로 나눠 줄 수 없다.
4. 믿음의 은사를 포함한 모든 은사들이 신령한 은사이므로 나눠 줄 수 있다.

@ 주어진 번호 중에서 본인의 믿음대로 2가지를 선택 하시요

어부 님: 2번, 4번을 선택 합니다
진리 님: (__, __ )을 선택 합니다

진리 님은 공란에 몇 번을 선택 하시겠습니까?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진리 님께 “시비꺼리”를 제공 합니다. ㅎ ㅎ

“어부 님”은 그랜드 주석을 받아 들이며, 
무슨 신령한 은사(some spiritual gift)를 “복수의 은사” 로 믿었음으로 “gift + s” 해석 하였다
“Some을 무슨” 으로 해석한 “한글번역” 이 애매하다. “some” 을 “복수”로 해석함이 마땅하다

“『그랜드 주석』은 롬 1:11의 ‘카리스마’를 (1) 이방인에 대해 복음을 전해 주는 은혜 즉 즉 구원(Harrison)과 (2) 사도의 안수로 주어지는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행 8:17, 18, Bengel)의 두 가지 의미가 모두 있다고 해석한다.”

믿음대로 될지어다.


진리 2014-07-22 10:29:09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롬1:11-12)

어부님,
이 말씀은 님께서 올린 글의 본문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나누어 준 신령한 은사를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본문의 신령한 은사는 영적 은사, 곧 영에 속한 은사를 말하는 것으로 믿음은 영에 속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11절에서 말하는 신령한 은사는 님들이 말하는 것처럼 방언이 아니라 12절의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요한님,
님이 받은 방언이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무당 푸닥거리 흉내는 그만 내시고 말씀으로 님이 받은 방언이 성령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또, 이런 식으로 게시판을 계속 더럽히는 것은 님의 인격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밖에는 되지 않음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어부 2014-07-21 21:40:43

정곡을 찌를 줄 모르는 자에게는 "롬1:11-12" 을 논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


어부 2014-07-21 19:41:40

생명샘 님은 방언이 다른 은사를 여는 열쇠이다
어부 님은 방언이 은사의 기본(필수)이다

진리 님도 정곡을 한번 찔러 보시지요 !^^ :-)


어부 2014-07-21 10:37:11

유명하신 진리 님! 따라 왔을 뿐인데 굳이 "네티즌의 도"까지 외면하실 줄은 미처 몰랐네요 ㅎ ㅎ 세상에 믿을 넘이 없다니까요 ㅎ ㅎ 당사자가 지 앞에서는 우선 줄행랑을 치기 바쁘시니 이곳까지 원정 올 수 밖에 없지 않았는지요 좋으신 동무까지 대리인 노릇을 자처하고 있으니 바늘 가는 곳에 실이 따라야 하지 않겠는지요.

그렇게 당하고도 기력이 아직 남아 있습니까? ㅉ ㅉ 정이철의 신내림을 전수 받으신 모양 입니다. 그려. ㅎ ㅎ 신학을 모르신다구요? 글롯과 디아렉스토 라는 단어의 의미를 지금쯤은 알고 있을텐데, 익히 아실 만한 분이 말씀을 외면까지 하시는지요. 그러면 쓰나요. 크게 경칠 당할 일만 남았네요.


진리 2014-07-21 10:25:33

그러니 말씀을 전하러 다니시면 됩니다. 

사단도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했습니다. 
말로는 말씀이 좋아졌다고 하면서, 말씀은 전하지 않고 왜 무당 푸닥거리 같은 허튼 짓을 하고 다니십니까?
이것이 님들이 받은 방언이 사단 마귀가 준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입니다. 

님들이 받은 방언이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 확실하다면, 말씀을 전하러 다니십시오. 

인자를 거역하는 것과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길래, 하나는 사함을 받고 하나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인지?

이 말씀이 님들이 받았다고 하는 방언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올리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기왕에 올려 주셨으니 설명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생명샘 2014-07-21 08:26:36

진리 님
사탄이 준 방언을 하면 왜 하나님께 감사하고 성경 말씀이 더 좋아질까?
희한한 사탄도 다 있네.

마태복음 12 장 32 절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출처: http://www.newsm.com/bbs/view.html?reply_page=1&idxno=5431

어떤 부자가 실험을 했단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를 매일같이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돈 10달러씩을 나누어 주었단다. 
“아니, 이 돈을 왜 주십니까?” 
“그냥 드리는 겁니다. 받으세요.” 
시간이 흐르자 처음엔 돈을 받으며 어색해하고 쭈뼛거리던 사람들이 점점 자연스럽게 돈을 받게 되었고 나중엔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자는 돈 나누어주기를 중단하였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항의를 하였다. 
“왜 돈 안 주십니까?” 

생각할수록 빛은 얼마나 놀랍고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선물인가? 
몇 푼 돈 따위와 비기겠는가? 
이 세상에 빛이 있고 우리에게 그 빛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가? 
우리가 만일 볼 수 없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 빛이 있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감사할 줄을 모른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빛을 거두어 가신다면 어찌 될까? 

이 세상의 아름다운 빛을 모든 사람이 다 보는 것이 아니다. 
볼 수 없는 사람도 많다. 
빛을 보지 못 하는 사람은 불행이라 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빛을 보지 못 하는 사람이 불행이 아니라 빛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축복이다. 

소경이며 귀머거리였던 헬렌 켈러는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에서 하나님께서 사흘만 볼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인자한 설리번 선생님과 친구들의 모습, 들판과 숲, 나무와 풀과 꽃의 모습, 타오르는 저녁놀을 보아두고 기억 속에 담아두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본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 된 일인지. 

유명한 맹인가수 챨스 레이는 말년에 개안수술을 받더라도 빛에 노출된 시신경이 몇 분 안에 망가져서 도로 맹인이 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몇 분이라도 좋습니다. 도로 소경이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내 사랑하는 딸을 볼 수만 있다면, 몇 분이 아니라 몇 초만이라도 내 딸의 모습을 보고 내 기억 속에, 내 마음 속에 담을 수만 있다면 수술을 받겠습니다.” 

2004년 봄 강원도 험준한 산골짜기 6.25 전적지에서 52년 만에 발굴된 국군장병의 유골은 은박지에 꼭꼭 싼, 아마도 약혼녀이거나 아내였을 한 여인의 사진을 품에 안고 있어 보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 있었다.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격전지에서 틈틈이 그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그는 얼마나 그 여인을 그리워했을까? 

“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 모습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 모습을 내게 담아 둘 수 있다면.....” 
인간은 그렇게 서로의 모습을 보고,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빛이 있고 눈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만약에 빛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를 볼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고 존재로 나타날 수 없고 인생도 시간도 우주만유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빛이 있음으로 존재는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되고, 빛으로 존재를 인식하는 존재가 있음으로 비로소 만유는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렇다. 
우주는 우연히 생겨난 것이 절대로 아니다. 
우주는 우주를 보는 자에게 지음 받은 것이 분명하다. 
빛은 우주를 보기 위한 것이요 우주만유를 지으신 자와 우주만유를 인식할 수 있는 자를 위한 것이다. 
파동도 아니고 입자도 아닌, 과학으로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찬란한 빛은 하나님의 세계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우주만유가 그 인식해주는 자가 없다면 존재의 의미가 없다면 하나님 자신도 그렇지 않겠는가? 
하나님도 하나님을 인식해 주는 존재가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으로서의 존재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광활한 우주, 캄캄한 어둠 속에 알아주는 이 하나 없이 하나님 홀로 계신다면 하나님이신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빛이 있으라.", 
하나님은 가장 먼저 빛을 지으셨을 것이다. 
(창세기 1장을 보라. 하나님의 창조는 빛부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인식하고 기억하는 존재, 빛을 인식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만유를 함께 바라보면서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존재를 또한 지으셨을 것이다. 
거울처럼, 사진처럼 하나님을 인식 속에, 마음속에 담는 존재,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를 인식하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하나님은 그래서 만드셨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모습을 담은 존재가 얼마 살지 못 하고 죽기를 결코 원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어느 누가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금방 빛바래거나 삭아 없어지기를 바라겠는가? 
어느 누가 자신을 알아주고 교제 나누는 벗이 죽기를 바라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영원히 사는 존재로 지으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코에 직접 자신의 영원한 생기를 불어넣어 인간이 영원히 살도록 '생령'으로 만드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인간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였다. 
선악과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지워버리고 대신 하나님같이 된 자신을 담았다. 
자신의 심령 사진틀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모습이 담겨야 할 마음에 자신의 욕심과 죄악을 담음으로써 더럽혀지고 망가져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인간은 자신의 욕심과 물질, 명예와 쾌락을 담고 멸망길로 향하였고 결국 그런 것들을 조종하는 마귀의 모습을 담기까지 타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은 아들을 내어주셨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보내신 것이다. 
빛으로 보내신 것이다. 
(요한복음 1장을 읽어보라. 주님은 생명의 빛으로 오셨다.) 

그 목적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모습이 지워져버린 심령에 하나님의 모습을 다시 회복시키려는 것이었다. 
보이는 하나님,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 마음에 담으라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그 모습, 그 생명을 담은 자는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슬픈 일이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었으나 사람들은 깨닫지 못 하였고 그 빛 안에 생명이 있었으나 사람들은 그 생명을 얻지 못 하였다. 
사람들은 그 빛으로부터 얼굴을 돌렸고 그 빛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렸다. 

마지막 날 심판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빛, 그 모습이 담겨진, 그리스도의 빛에 다시 곱게 감광된 마음들을 거두시는 것일 것이다. 
보이는 하나님의 모습, 곧 우리를 살리시려 십자가에 죽으신 아들 하나님의 모습으로 다시금 심령을 회복한 자들은 거두시고 여전히 더러운 자신의 욕망과 마귀의 모습을 담은 타락한 영혼들은 소각로, 곧 영원히 타는 유황 불못에 던져 넣으시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아,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음 받은 인간의 영혼이 그 소각장에 던져졌는데 타 없어지지 않는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지금 그대의 눈은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가? 
지금 그대 가슴의 사진틀에는 누가 들어있는가?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유인력과 하나님의 사랑  (0) 2020.01.07
도미니카 밧데이를 다녀와서  (0) 2019.08.30
지옥은 있습니다.  (0) 2019.07.27
아들 번제 (2)  (0) 2019.05.01
아들 번제 (1)  (0) 2019.05.01

지옥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게 있습니다. 지옥이 정말 있는가 의구심을 가지기도 하고 선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이 설마 지옥을 만들어 놓으셨겠는가, 진짜로 우리를 지옥에 던져 넣기야 하시겠는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또 지옥은 사단에게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단으로부터 뺏어내고 지옥으로부터, 사단의 권세로부터 건져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지옥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단으로부터 뺏어내고 지옥으로부터 건져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 무서운 심판을 면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피조물인 사단, 타락한 천사인 사단이 어디다 지옥을 만들 수 있을까요? 자기 맘대로 지옥권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천지만물, 우주만유가 하나님의 지으신 것인데 거기다 사단이 지 멋대로 지옥을 만들고 통치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지으신 거룩한 하나님의 세계 어느 한 구석도 하나님은 사단에게 허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또한 다른 종교의 신 역시 지옥을 만들거나 인간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심판은 있습니다. 지옥은 있습니다. 심판과 지옥은 있어야 하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지으신 거룩한 세계로부터 사단을 제거하고 악을 제하고 거룩하게 회복시키기 위하여 반드시 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원수, 사단의 무리를 영원히 가두고 징벌하기 위하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옥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거룩한 하나님의 세계를 사단이 영원히 더럽히고 누리도록 그냥 놔두실까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세계의 한 자락을 사단에게 제공하거나 할애하여 그 곳에 사단을 놔두거나 가두어 두실까요? 그렇게 되면 그곳은 사단의 악과 더러움으로 영원히 악하고 더러워질 것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거룩한 세계의 일부분을 포기하셔야 할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하나님의 세계 일부를 사단을 위하여 창조하여 제공하는 꼴이 될 것입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 지으신 거룩한 하나님의 세계의 단 한 조각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지옥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옥, 그곳은 모든 것을 정결케 하는 불(Fire)의 장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불이 아니면 그 장소가 더러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은 죄와 더러움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 타오를 것이고 그 불은 영원히 탈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죄를 허용하거나 인간만을 예외로 용서하실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하나님 자신이 죄로 더럽혀지고 악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는 반드시 징벌되어야 하고 그 대가는 지옥불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 죄를 지시고 대신 징벌을 받아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대신 형벌 받아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내어주신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그 방법 말고는 우리를 용서할 방법, 심판으로부터, 지옥으로부터 구원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구원의 방법입니다. 누구든지 이를 믿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삼으면 심판으로부터 죄로부터 면함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면 영원한 진노 아래 놓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속히 심판하지 않으시냐고요? 왜 진작 사단을 잡아 불지옥에 가두어버리고 우주만유, 하나님의 세계를 깨끗이 하지 않으시냐고요? 그렇지요. 당연히 그리 하셔야지요. 하나님도 속히 그리하고 싶으시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심판을 속히 행하셨다면 저나 당신은 존재하지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하나님의 세계를 보지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도 못 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당신을 위하여 오래 참으셨고, 지금도 많은 영혼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미니카 밧데이를 다녀와서  (0) 2019.08.30
빛이 있으라.  (0) 2019.07.27
아들 번제 (2)  (0) 2019.05.01
아들 번제 (1)  (0) 2019.05.01
밤하늘별꿈  (0) 2019.03.28

 



신약시대에 와서 예언자나 선견자는 성서적으로 볼 때 성도에게 붙일 수 있는 합당한 호칭이 아니다. 선견자(先見者, Seer, 로에라, 하지), 선지자( 나비)는 모두 비슷한 역할로써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에게 전해주는 특별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신약시대에 와서, 선견자와 선지자는 필요하지 않다. 다시 말해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그 누구도 구약시대의 선견자(先見者, Seer) ... 선지자들과 같은 개념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서 선견자들을 통해서 전달되어졌다. 그런 점에서 선견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선견된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이 이미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 우리 손에 들려져 있다.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딤전3:15절 참조) 성경을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는 의지만 있다면, 우리들의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그 말씀이 주는 깊은 뜻을 깨닫게도 해 주시고 개인에게 친히 말씀해 주시기 때문이다.

신약시대에 와서 성도가 특별한 사명 자로서, 굳이 따로이 이름을 가지려고 한다면, 그것은 ‘프로바이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로바이더(Provider), 사전적 의미로는 ‘공급자, 준비자’ 그런 뜻이다. 가족에게 의식주를 공급하는 사람, 가족의 모든 생계, 미래를 책임지고 준비하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이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세상보다 한걸음 앞서 가는 사람이요, 주님의 말씀으로 미래에 닥칠 재앙을 대비해 착실히 준비하는 '프로바이더', 다른 말로 하면 "청지기"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미래에 대해서 예측할 수도 없어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 어린 아이들과 같은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만난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고 앞으로 일어날 대재앙, 지구 종말을 전해 주어야 할 책임을 진 사람들이 바로 선견자적 사명을 가진 프로바이더들이다. 세상이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을 먼저 듣고 먼저 아는 우리가 종말에 대한 준비는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해야만 하는가 하는 그 방법론도 확실히 전해 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유비무환(有備無患)

有備無患(유비무환) 사전에 준비를 잘 하면 뒤에 근심 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열명(說命)은 은(殷)나라 고종이 부열이란 어진 재상을 얻게 되는 경위와 부열의 어진 정사를 기록한 글이다. 그가 고종에게 말했다고 한다. “생각이 옳으면 이를 행동으로 옮기되, 그 옮기는 것을 시기에 맞게 하십시오(處善人 動惟厥時). 그 능한 것을 자랑하면 그 공을 잃게 됩니다(矜其能 喪厥功). 오직 모든 일에는 다 갖춘 것이 있는 법이니 갖추어야만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惟事事乃其有備 有備無患).” 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진나라 도승이 정나라에 값진 보물과 가희들을 화친(和親)의 선물로 보내오자 이것을 위강에게 보냈다. 위강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면서 말했다고 한다. “편안히 지낼 때는 항상 위태로움을 생각해야 하고 위태로움을 생각하면 항상 준비가 있어야 하며 충분히 준비되어 있으면 근심과 재난이 없을 것이다(居安思危思則有備 有備則無患).”

현대 과학자들도 이 세상이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주범으로 ‘지구 온난화’를 든다. 지구 온난화(地球溫暖化, global warming) 또는 온난화(溫暖化)는 지표 부근의 대기와 바다의 평균 온도가 장기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이다. 최근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꾸준히 높아질 것으로 예측된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지구 온난화가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의견을 내놓고 있고, 기후변화위원회가 참조한 기후모델에서는 1990년에서 2100년 사이에 1.1 ~ 6.4 ℃의 온도 상승이 예측되었다고 한다.

지구 표면의 온도상승은 해수면 상승을 초래하고, 이는 다시 강수량의 양과 패턴을 변화시켜, 가뭄, 홍수 등의 기상이변을 일으킨다고 한다. 빙하의 후퇴와 기후의 변화는 생태계를 변화시키는 등 인류를 포함한 지구상 생물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것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새로운 빙하기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주장도 있고,. 앞으로 얼마만큼의 온난화가 진행되며 지역에 따라 어떻게 차이가 있을 것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은 이미 온실 가스에 대처하기 위한 교토의정서에 서명하였다고 한다. (위키백과사전 참조)

이 모든 것은 2,000여 년 전에 주님께서 이미 예언해 주신 것이 현실화되어 가고 있는 것일 뿐, 우리에게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 일이 되었으나 일본 열도를 뒤흔든 무서운 해일, 중국의 지진피해, 요즘은 아프리카의 ‘에볼라’까지…, 앞으로 더욱 무서운 신종바이러스의 공격도 있을 것이라고 계시록은 경고해 주고 있다. 사람들은 세상이 이런 곤경을 당할 때 어렴풋하게나마 지구의 종말을 생각하게 된다. 종말에 대한 아무런 의식 없이 살다가도 이런 재앙을 만날 때만이라도 종말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반드시 종말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사실을 먼저 알고 있는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다면, 그는 이미 제대로 된 ‘ 프로바이더’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종말에 대한 바른 인식

종말에 있어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시한부 종말론, 즉 날짜를 정해놓고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짜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말은 하나님 말씀에 의한 것이 아니니까, 절대로 믿으면 안 된다. 언제 세상의 종말과 심판이 있을지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바이더들의 맹활약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지난번 일본 열도를 강타한 해일과 같은 재앙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았다면 사람들이 다 대피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의 종말이 도적과 같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때 임한다. 이것이 문제다. 주님께서 세상의 종말에 대한 구체적인 날짜는 숨기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종말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 역시 가짜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옥에 대한 설교와 종말에 대한 설교를 듣기 싫어한다. 하지만 지옥과 종말에 대해서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는다면 설교자들이 잘 못하는 것이다. 자기 인기를 위해서 시시한 소리, 웃기는 소리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에게서 받는 박수갈채는 한때뿐이고 그분의 진노는 영원하다는 것을 왜 모르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는 종말에 대해 두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로 “종말은 반드시 온다, 그러나 그 날자와 시간은 알 수 없다.” 이다. 이 사실을 모르면, 그 틈을 노리는 시한부 종말론 자들로부터 영적테러를 당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이 내 속에서 역사하시도록 무장되어야만 한다.

종말이 꼭 세상 종말만 종말이 아니다, 개인적인 종말, 죽음도 분명히 찾아온다. 그러나 그 역시 그날과 그때는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종말이나, 지구 종말의 구체적인 날짜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으셨지만, 종말에 대한 징조들을 말씀해 주셨고 그런 징조들을 보거든 대비하라고 하신다. 지구의 종말도 개인의 종말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는 것이 준비 잘 하는 것이며, 그 사람이 바로 '굿 프로바이더', 즉 좋은 준비자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영원히 사는 길이 있다.

이런 사실을 먼저 아는 우리들이 좋은 준비자(Good Provider)가 되어야만 하고, 다른 이에게도 좋은 준비자(Good Provider)가 되라고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긴박한 때, 말도 되지 않는 억지성 주장, 예민한 이슈가 될 신학적 논쟁으로 자긍하며 형제와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마음을 갈라놓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 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마24:6-8)”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최송연의 신앙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敎會)의 주인은 누구인가  (0) 2021.06.18
교회(敎會)의 주인은 누구인가  (3) 2020.05.15
농부의 도리깨질은 내게 유익이라  (0) 2018.12.08
두 번째 종소리  (0) 2018.11.05
가라지 이야기  (5) 2018.10.26

김요석 목사님 관련 글

중국에서 나병환자들을 대상으로 목회하고 계시는 김요석 목사님으로부터 듣게 된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중국의 삼자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데 앞에 7살 먹은 아이가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중국은 20살이 될 때까지 교회를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 사상이 확립되기 전에 교회를 나가면 사상이 잘못될 수 있다고 해서 20살이 되기까지는 교회를 가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7살 아이가 앉아 있으니 궁금해서 예배를 마치고 사람들에게어떻게 저 아이는 교회에 나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은 모택동 정권 당시, 문화 혁명 말기 때에 있었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한 마을에 다정하게 살고 있던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는 만삭의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에서 사상이 불순한 남편이나 아내가 있으면 고발하라는 지시가 자꾸 내려왔습니다. 승진하고 싶은 욕심을 갖게 된 남편은 아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당에 고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 이혼이 되고 말았고, 공관원들이 밤중에 와서 그 아내를 강제로 내쫓았습니다. 추운 겨울날 밤에 그녀는 그 동안 살던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더군다나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그저 몸 하나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추운 겨울밤에 길에서 얼어 죽을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교회 앞으로 갔습니다. 그 당시 교회는 이미 폐쇄돼서 문이 굳게 잠겨 있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교회 앞에 가고 싶어서 그 교회 앞으로 갔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장사하는 어떤 사람이 교회 앞을 지나가는데 바로 그 교회 앞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보니까 어떤 여인이 발가벗고 죽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옆에는 자신의 옷으로 돌돌 감아놓은 갓 태어난 아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그 후에 그 교회를 다녔던 할머니들에 의해서 키워지게 된 것입니다.


김요석 목사님은 독일에서 얼마든지 대학교수를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소록도 나환자촌과 중국 나환자촌에서 18년 넘게 특수목회 활동을 했습니다. 그가 소록도 나환자촌에서 목회할 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목사님의 교회에 다니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나환자도 아니고 멀쩡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믿겠다고 등록하고 1년 후 침례도 받고 나중에는 집사 직분도 받아 열심히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네 사람들이 그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 오가면 네가 나병에 걸리고 그러면 우리한테도 전염된다. 거기 가지 말라.” “, 내 신앙인데 너희들이 간섭할 수 있느냐. 내 마음이다. 그러지 못하겠다.”


그는 동네 사람들이 아무리 협박해도 듣지 않고 온 가족을 데리고 교회에 잘 다녔습니다. 그러
던 어느 날 출산이 임박한 만삭의 어미돼지 5마리를 여기서 저기로 옮기는데 돼지들이 놀랬는지 갑자기 이웃집 채소밭에 뛰어들어 다 뭉개버렸습니다. 이웃집 주인이 배상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채소 값이나 물어주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웃집 주인은 돼지 5마리를 다 줘야 한다고 우겼습니다. 기가 차서 동네 사람들한테 물어보는데 동네 사람들도 그가 얼마나 미웠던지 그렇게 배상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그는 목사님한테 달려와서 어떡하면 좋겠느냐고 자문을 구했습니다. “목사님, 돼지들이 뭉갠 밭이래야 몇 평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돼지들을 다 달라니요. 그럴 수가 있습니까.”


집사님, 성경에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달라면 주라고 했잖아요.” “목사님, 그래도 너무 하는 게 아닙니까.” “집사님, 믿으려면 성경대로 잘 믿어야 합니다.” 그는 믿음이 있어서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냥 어미돼지 5마리를 이웃집 주인에게 다 주었습니다. 목사님이 그를 위로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절대로 굶지 않게 하시고 손해 보지도 않게 하십니다.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열심히 일하십시오.”


그는 그런가 보다 하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어미돼지 5마리가 얼마나 복을 받았던지 한 마리가 새끼 18마리씩 낳았습니다. 어미돼지까지 합치면 거의 100마리가 됐습니다. ‘며칠 전만 해도 저것들이 다 내 것이었는데 어쩔 수 없지 뭐.’ 그는 돼지들을 볼 때마다 아쉬운 마음이 들곤 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내했습니다.


6
개월이 흐르고 가을이 됐을 때 이웃집 주인이 키우던, 큰 황소 3마리가 갑자기 뛰어넘어 그의 밭을 다 짓밟았습니다. 그는 아주 신나서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역시 자기 백성을 손해 보지 않게 하십니다. 100배 이익을 보게 생겼습니다. 씨를 뿌리면 100배로 거둔다는 말씀이 정말 맞습니다.”


집사님,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렇게 계산하는 게 아닙니다. 손해 볼 때는 봐도 남에게 손해 끼쳐서는 안 됩니다. 적정선에서 양심껏 배상받으세요.” “아니, 저 사람이 한 대로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어찌 기독교가 용서의 종교일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떡하면 됩니까.” “그냥 돌려주는 게 용서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절대로 손해 보지 않게 하십니다.” 그는 목사님의 말씀을 그냥 믿고 순종하기로 하고 돌아갔습니다. 이웃집 주인은 야단이 났습니다. ‘한 마리만 배상하면 좋겠는데.’ 그런데 웬걸요.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됐네. 내가 예수 믿는 덕에 자네가 복 받았네. 3마리 다 가져가게. 채소밭 그게 몇 푼이나 되겠어.”


이웃집 주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용서를 받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무리 양심이 없다고 해도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자기 같으면 얼씨구나 하고 황소 3마리를 다 빼앗을 텐데 예수 믿는 사람은 달라도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웃집 주인은 고민하다가 자신도 용서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자신이 6개월간 살지게 키웠던 그 돼지들을 다 몰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내가 잠시 맡은 것이니 돌려주겠네.” “그러면 어미돼지만 돌려주게.” “아니야, 다 받게.” 이웃집 주인이 하도 사정하기에 그는 6개월이나 키워놓은 돼지들을 다 돌려받았습니다.


김요석 목사님은 15년간 독일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한국에 귀국하여 대학 강단에 서지만 영적인 갈등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어떤 목사님의 소개로 나환자 정착촌인 영호마을의 한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합니다.


이글은 영호를 방문하였다가 그들의 삶에 감동한 김요석 목사님의 독일 친구인 클라우드-디터 그래스가 1991년에 독일에 먼저 소개하였습니다.


김요석 목사님은 10년간 영호교회에서 사역하시다가 중국으로 떠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 연락이 끊겨 소식을 아는 분이 없는 상태이기에 부득이 독일어판을 번역하여 출판하게 된 것을 옮깁니다.


은혜가 되시길 바랍니다.


--------------------



한센환우의 벗 김요석 목사님



국민일보 1998.10.10, 00:00



[
이지현기자의 책읽기] 김요석목사의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숨어서 봉사해 `얼굴없는 천사'로 불리는 김요석 목사.독일에서 15년동안 신학을 공부한 그는 귀국후 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했지만 영적인 갈증을 채울 수 없었다.학생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어려운 신학이론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이란 것을 깨닫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인간을 친히 만나길 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이 답답했던 김목사는 마침내 교수직을 버리고 서울에서 남쪽으로 약 6백㎞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에 정착하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 마을은 한센씨병이 음성으로 바뀐 사람들이 정착해 정상인과 이웃을 하며 살고 있는 곳이었다.


`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홍성사)에는 김목사가 이 마을에서 체험한 사랑과 그가 만난 하나님의 손길을 간증한 19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다.신앙의 힘에 의지해 새 삶을 가꿔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김목사는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일상의 크고 작은 어려움과 씨름을 한다고 말한다.그러나 그들이 일반인과 다른 것은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달라붙어 있듯이 하나님께 꼭 매달려 있다는 점이다.아픔을 신앙으로 극복해 낸 이들에게 신앙은 생명이었다.김목사는 척박한 오지,아무도 부임하려 하지 않던 이 마을 교회에 부임해 10여년동안 헌신적인 사역을 했다.행여 그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부정적으로 비쳐질까봐 글을 남기지 않았다.


이 책은 이 마을을 방문했다가 감동을 받은 김요석목사의 독일 친구 클라우스 디터 그래스가 `DAS DORF DER VERGESSENEN'이란 제목으로 1991년 독일에서 먼저 소개했다.김목사는 이 마을에서 10여년간 사역하고 중국으로 건너간 후 연락이 끊긴 상태라고 한다.김목사의 간증테이프는 이미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고 그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많은 사람들이 `얼굴없는 천사'를 만나길 기다리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현재 이 책을 서점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출판사가 책 속의 정착마을 주민들로부터 간곡한 부탁을 받고 모두 수거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한권의 책은 육체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전쟁을 치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감사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과의 만남이란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상대방에게 다가서는 것'이란 것을 알게 해 준 책이다.또 병을 치유받는 기적이 복음의 전부가 아니란 것을,불꽃처럼 영원히 꺼지지 않고 타오를 믿음을 얻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란 것을 깨닫게 해준다


[
겨자씨고름을 빨다


국민일보|기사입력 2002-08-07


중국에서 한센병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김요석 선교사 간증입니다.


친구와 같이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센병 환자의 등에 고름이 들어있는데 아직 덜 곰겨서 짜지지 않았습니다. 김선교사는 그 부분을 입으로 핥았습니다. 자꾸만 빨았더니 그 부분이 약해졌습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고름을 짰습니다. 고름이 터지면서 옆에 친구 얼굴에 튀었습니다. 순간 그 친구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한센병에 전염될까 봐 울었냐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가 말했습니다.


아니다. 네 고름을 빨 때 예수님이 옆에 와 계셨다. 나는 그 주님을 붙들고 있었다. 그런데 고름이 터져 내 얼굴에 튀는 순간 예수님이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아쉬워서 울었다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



김요석 목사



  
김요석 목사님은 15년간 독일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한국에 귀국하여 대학 강단에 서지만 영적인 갈등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어떤 목사님의 소개로 나환자 정착촌인 영호마을의 한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합니다.

이글은 영호를 방문하였다가 그들의 삶에 감동한 김요석 목사님의 독일 친구인 클라우드-디터 그래스가 1991년에 독일에 먼저 소개하였습니다.

김요석 목사님은 10년간 영호교회에서 사역하시다가 중국으로 떠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 연락이 끊겨 소식을 아는 분이 없는 상태이기에 부득이 독일어판을 번역하여 출판하게 된 것을 옮깁니다.

은혜가 되시길 바랍니다.


--------------------


믿음이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음과 같이 진리의 열매를 위하여 스스로 죽는 것을 뜻합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으나 영원히 살아 있는 진리와 목숨을 맞바꾸는 자들을 우리는 믿는 이라고 부릅니다.


[
믿음의 글들]은 평생, 혹은 가장 귀한 순간에 진리를 위하여 죽거나 죽기를 결단하는 참 믿는 이들의, 참 믿는 이들을 위한, 참 믿음의 글입니다.


--------------------


글을 시작하면서

제가 섬기는 교회의 지체들은 영호라는 작은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이 마을은 서울에서 남쪽으로 약6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으로서, 주민이 250명 정도 됩니다.

영호는 아주 특이한 곳입니다. 이곳을 설명하려면 먼저 다른 이야기부터 해야할 것 같군요. 한국에는 아직도 나병이라는 무서운 병이 있는데, 나병이 양성으로 나타난 사람들은 소록도라는 섬에 강제 수용됩니다. 소록도에는 나병 환자들을 치료하는 의료시설이 있지요.

그곳에서 병이 호전되어 양성에서 음성으로 바뀐 사람들은 육지로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두 마을 중에서 한 곳을 선택하게 되는데, 저는 그중 한 마을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사람들을 만날 때 으레 손부터 감춥니다. 비틀려 있거나 아예 끊어져 나간 손가락이 남의 눈에 뜨이기라도 하면 나병을 앓았다는 사실이 금세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그들의 약한 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김요석


저는 제 친구인 김요석 목사의 교회에서 한 달 동안 함께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이야기해준 것과 우리가 체험한 것 가운데 몇 가지를 두 사람이 함께 쓰기로 했습니다. 나환자 정착촌에서 함께 살면서 겪은 김요석 목사의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김광운 화백은 몇몇 장면을 삽화로 그려 주셨습니다.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클라우스-디터 그래스(Klaus-Dieter Gress)

--------------------

1. 만 남


오랜만에 고향인 한국에 돌아왔다. 독일에서 공부한지 15년째 되던 해에 서울에 있는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돌아온 것이다. 나는 한 학기 동안 신학교에서 강의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분열된 감정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러한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나님에 관한 이론적인 질문에는 언제든지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학생들에게 별 도움이 될 수 없음을 느꼈다. 그들은 여러 가지를 묻고 싶어 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신학 이론으로는 그 문제들에 대해 거의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주말에 시간을 내서 목사님이 없는 작은 교회를 돌보고 있었다. 그들은 내게 배운 신학을 그곳에서 늘 적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교인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무미건조한 신학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만족할 수 없었다. 나는 인간을 친히 만나기 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 문제를 생각하면 할수록 나의 체험보다는 교리가 더 많이 떠올랐다. 이러한 불만족스러운 마음은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이것이 내 얼굴에 씌어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나이 많으신 목사님 한 분이 다짜고짜 다음과 같이 물으셨다.

"교수님은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 목사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알고 싶으시다면 교수직에 머물러 있지만 말고 차라리 무슨 일을 해보십시오!"

그러면서 목사님은 한 가지 일을 제안하셨다.

"남부 지방에 제가 아는 작은 마을이 하나 있는데, 교회에 목사님이 안 계십니다. 그곳에 가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결정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교수직이라는 좋은 직장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다. 책 속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람을 직접 만나 악수를 나누듯이, 그렇게 만나고 싶었다.

목사님은 내게 그 마을의 주소를 건네 주셨다. 어느 토요일,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그 마을을 향해 떠났다.


긴 여행이었다. 영호에 도착하자 날이 벌써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두서너 사람이 나를 마중 나왔다. 그 사람들의 얼굴 생김이 특이한 것 같았지만 가로등 불빛으로는 자세히 볼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새로 온 목사입니다."


나는 스스로를 소개했다. 그 사람들은 별말 없이 어떤 작은 방으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이것이 내 방인가? 방에는 가구가 없었을 뿐 아니라 벽은 더러웠으며 작은 벌레들이 여기저기 기어 다니고 있었다. 방바닥에는 밤을 지낼 만한 이불 한 채 깔려 있지 않았다. 나는 너무 피곤해서 옷을 입은 채로 잠들어 버렸다.


주일 아침 8 30분이 되자 교회 종소리가 작게 두 번 울렸다. 오래된 교회당에 가보니 아이들이 스무 명 가량 모여 있었다. 함께 찬송을 부르고 나서 어린이예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첫줄에 앉아 있는 꼬마가 계속 콧물을 훌쩍이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내 눈에 거슬렸다.

"얘야, 이리 와 봐. 내가 코 닦어줄게!"


코를 닦아주고 나서 다시 예수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다른 사내아이 하나가 코를 훌쩍였다. 못들은 척하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소리였다. 결국 나는 스무 명의 코를 모두 닦어주어야 했다. 아이들이 재미있다는 듯이 삐죽삐죽 웃었다.

첫 어린이예배는 그렇게 끝났다.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대예배를 기다렸다. 마침내 시간이 되어 강대상 앞에 섰다. 몇몇 사람들이 머뭇거리며 교회당 안에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마치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이 내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왜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걸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교회 마루바닥 맨 앞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눈길이 그 할머니에게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모습이 저럴 수도 있단 말인가! 할머니의 얼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구멍 다섯 개뿐이었다. 눈도, 코도, 입술도 없었다. 양손조차 다 끊어져 나가고 없었다. 내가 나환자촌에 왔긴 왔구나!


예배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오직 한 가지 생각만 망치질하듯 나를 두들겨대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여기를 떠날 수 있을까?'

처음에는 예배 후에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작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예배가 끝난 뒤에 일부러 천천히 설교원고를 정돈하였다. 내가 늑장부리는 동안 사람들이 전부 돌아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마침내 교회 문을 닫으려고 강대상에서 내려오는데, 그 얼굴 없는 할머니가 고개를 드셨
.


"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

할머니는 손가락이 없는 손을 내게 내밀었다. 이 손을 어떻게 잡아야 하나? 나는 할머니의 손 위에 내 손을 그냥 올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의 느낌은 앞으로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곁에 있던 다른 할머니 한 분은 내 손을 잡고 아예 놓아 주지 않았다.

"할머니, 혹시 어디가 편찮으세요?"

나는 마침내 이렇게 물었다. 할머니는 흉한 얼굴로 웃어 보이려고 애쓰면서 대답했다.

"목사님, 전 열여덟 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건강한 손을 잡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목사님이 이렇게 제 손을 잡아 주시니 너무 기뻐서 "

나는 그 생각을 미처 못했다. 너무나 부끄러웠다. 하나님이 나를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손가락이 다 끊어져 나가고 없는 이 할머니의 뭉툭한 손 끄트머리에서 하나님은 내게 악수를 청하셨다. 바로 그 자리에서 나를 맞이하시기 위해서나는 누군가와 악수하듯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음을 느꼈다. 나의 소원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나는 할머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할머니, 할머니의 가혹한 운명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으십니까?"

"어떻게 제가 감히 하나님을 원망하겠습니까? 오히려 감사드려야지요. 하나님은 아픔 가운데서 제게 복을 주셨는걸요."

"복을 주셨다구요?"

나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그럼요. 예전에는 전도 많이 원망했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여기에서 살아온 긴 세월 동안 나를 잊지 않으시고 그 아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선물로 주셨지요. 하늘나라에 갈 소망도 주시구요. 목사님, 이것이 진짜 복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부끄러웠다.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나의 건강을 하나님의 복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문둥병자로 살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복을 말할 수 있을까? 할머니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2.
가혹한 운명

열여덟 살 때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세수를 하는데 살갗에 이상한 반점이 생긴 거예요. 햇볕에 타서 그렇겠지 생각하고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지요. 그런데 군데군데 허연 부분이 점점 늘어나면서 고름이 차더군요. 어머님께 그것을 보여드렸더니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셨습니다. '문둥병'이라는 말이 제 귀를 때렸어요. 저는 제방으로 뛰어가 방바닥에 엎드려서 많이 울었지요.


그렇게 울고 있는데 어머니가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오시더니 저를 꼭 안아주시더군요.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요!"

나는 죽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머니는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어요.

"얘야, 내 말을 좀 들어보거라. 에미가 도와주마. 동네 사람들에게는 숨겨야 한다. 아무도 널 보지 못하게 해야돼.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널 섬으로 보내버릴게다. 하지만 에미는 널 잃고 살 수 없다."


그때부터 저는 방안에서만 살았지요. 어머니만 이따금씩 돌보아 주셨어요. 밤에는 마당에 데려다 주시기도 했지요. 그렇게 저는 짐승처럼 갇혀 지냈습니다.

"어머니, 전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정말 괴롭고 무서워요."

하지만 어머니도 그 답을 아실 리가 없었지요.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셨어요.

어느 날 저녁, 선잠이 들었는데 누군가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버지였어요. 손에는 낫을 움켜쥐고 . 저는 숨을 쉬지 않으려고 애를 썼어요.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습니다. 정말 아버지가 날 죽이실까?

아버지는 거기 서서 자신과 싸우며 망설이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어요. 아버지는 다시 밖으로 나가 버리셨습니다.

바로 그날 밤, 아버지는 쌀과자가 가득 담긴 그릇을 가지고 제 방에 들어오셨어요.

"남기지 말고 다 먹거라."

제가 하나씩 집어먹는 동안 아버지는 나를 지켜보고 계셨어요. 아버지는 한숨을 깊이 내쉬셨어요.

"네 병 때문에 우리 집안은 풍지박산이 나버렸다. 네가 우리집에서 사는 한 우리 식구는 살 수가 없어. 동네 사람들이 우릴 쫓아내 버릴게다. 네 동생들은 이제 같이 놀 친구도 없고, 용삼이 색시네에서는 파혼하자고 하는구나. 차라리 내 손으로 널 죽이는 것이 낫겠다 싶었는데 이 애비 심정을 알겠느냐?"

저는 솟구치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 오늘 저녁이 마지막이다. 내일부터 넌 이 집에 살 수 없는게야."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한 번도 돌아보시지 않고 나가 버리셨습니다.

저는 아버지 마음을 알 수 있었어요. 아버지는 차마 아버지 입으로 자살하라고 말씀하실 수 없었겠지요. 저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야 했어요.

다음 날 아침, 저는 집을 몰래 빠져 나와 강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미리 와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 어머니였습니다.

"넌 내 딸이야. 내 눈 앞에서 널 죽일 순 없다. , 이 쌀자루를 들고 산으로 올라가거라. 산신령께 치성을 드리면 혹시 고쳐주실지도 모르잖느냐? 그럼 너는 다시 집에 돌아올 수 있을게고."

어머니가 절 꼭 안아 주셨어요. 어머니의 사랑이 따뜻하게 절 감싸 주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주신 쌀자루를 들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어요. 그리고 그날 이후 한번도 저희 식구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하루 종일 산속을 돌아다녔어요. 산꼭대기에 올라가 산신령을 기다렸지만 허사였어요. 저를 도와주려고 나타난 것이라고는 허깨비 하나 없었습니다. 저는 혼자였어요.

배가 너무 고파서 결국 저는 산에서 내려와 버렸어요. 그리고 어느 농가에 밥 한바가지를 구걸했어요. 나는 거지처럼 밥을 동냥하는데, 산 속에 두고 온 쌀자루는 어떻게 되었을까? 산신령이 벌써 다 먹어 버렸을까, 아니면 남아 있을까? 저는 엉터리 산신령에게 화가 났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에게 잡혀서 소록도에 가게 되었지요.

소록도에서는 적어도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거기 있는 문둥병자들은 날 한 가족처럼 맞아 주었어요. 우리는 가족을 대신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잃어버린 아버지와 어머니와 오빠와 언니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소록도 사람들에게는 다른 점이 하나 있었어요. 이 사람들은 신령과 우상을 믿는 대신 하나님 한분만 믿었습니다. 이 하나님은 다른 신들과 달랐어요.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아드님은 문둥병을 무서워하지 않으시는 분이었지요. 저는 이 예수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요.


처음에 문둥병은 제게 사형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저는 아무 가치 없는 사람이 되었지요. 친부모와 형제도 절 거부했어요. 하지만 이제 저는 하나님을 찾았어요. 하나님은 저를 ''이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새 형제와 자매들도 얻었지요. 제게는 장차 하나님의 전에 영원히 거할 소망이 있습니다.

목사님, 이것이 진짜 복이 아니겠습니까?




3.
평화를 위한 굶주림

어느새 겨울이 시작되었고 눈이 많이 내렸다. 얼음처럼 차가운 날씨였다. 어느 날 아침 새벽예배를 마친 후 집에 가보니, 꼬마 다섯이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니?"

내가 물었지만 아이들은 얼어붙은 듯이 서 있기만 했다. 마침내 그 중에서 가장 큰 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사님, 우리 엄마 좀 찾아 주세요. 엄마가 집을 나갔어요."

"무슨 일로?"

"할아버지가 엄마를 때렸어요."

나는 아이들을 집까지 다래다주었다. 할아버지는 집에 계셨다.

"할아버님, 애들 어머니가 왜 집을 나갔습니까?"

"그년이 아주 못된 년이어요."

노인은 욕을 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보니 며느리의 잘못이었다.

"엄마는 곧 집에 돌아오실거야."

일단 아이들을 달래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집에서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몰려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머니들은 여러 가지로 내게 이의를 제기하면서 애들 어머니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말했다.

"애기들 엄마가 잘 도망가부렀어요. 그 노인네가 자기 며느리 징허게 못살게 했당게요. 맨날 며느리 욕이나 허고 돌아댕기는디 그 정도 참은 것도 다행이지요."

" 시아버님이 잘못하시긴 잘못하셨군요."

나는 다음 주일 설교를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머리에는 온통 이 집 생각뿐이었다. 두 사람의 태도에 다 일리가 있었지만, 그 사이에 끼인 아이들은 울면서 지내야 했다. 아이들로서는 어른들 일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가족은 모두 주일마다 예배드리러 나오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들 사이의 화평에 대해 충분히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닐까?

그제서야 나는 이 일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바로 내 잘못이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내 죄를 회개하며 금식하기로 결심했다. 금식이 닷새째로 접어든 날, 차씨 할아버지가 내 금식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목사님, 저 때문에 금식하시는가요?"

할아버지는 나를 책망했다.

"아닙니다. 할아버님 때문이 아니라 저 때문에 금식하는 거예요. 할아버님도 옳고 며느님에게도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불쌍합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울면서 배고파하는 것은 제 탓입니다. 제가 평화와 화해에 대해 충분히 설교하지 못한 탓입니다. 그래서 금식하는 겁니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이 돌아가셨다.

금식한 지 여드레가 지나자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 할아버지는 나를 찾아와 고백하셨다.

"목사님, 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식구들하고 며느리한테 너무 심했는갑네요. 인자 어째야 쓴당가요?"

"할아버님, 할아버님은 이미 가장 선한 길로 발을 디디신 겁니다. 저와 함께 기도하시지요."

나는 차씨 할아버지 댁에 가서 함께 아침을 먹었다. 그때 밖에서 아이들의 환성이 들려 왔다. 아이들의 어머니가 돌아온 것이다. 할아버지는 곧바로 며느리를 맞아들이셨다.

"아버님,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며느리가 먼저 말했다.

"아니다, 인자 다 잘 될 것이다. 내 맘이 달라져야제."

이제 아무도 상대방에게 잘못을 넘기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화해하게 되었다.

나는 두 사람이 화해하는 것을 보면서 내 배를 슬쩍 만져보았다. 배가 쑥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선한 목적을 위한 굶주림, 평화를 위한 굶주림이었다.




4.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 있다

이웃 동네에 살고 있는 한 가장이 우리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그들은 초신자였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는 상태였다. 게다가 이웃 동네는 워낙 불교가 지배적인 곳이었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는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온 동네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그들은 이웃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살아야 했다.

어느 날 저녁 그 집 아버지가 나를 찾아왔다. 잔뜩 화가 나서 목에는 핏대가 서고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모습이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나셨어요? 누구하고 싸우기라도 했습니까?"

나는 다그치듯 물었다.

"아니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제가 지금까지는 화가 나도 꾹 참았다구요. 예수 믿는 사람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목사님께서 늘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옆집 그 인간은 해도 정말 너무 하지 뭡니까? 도대체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 좀 해주십시오. 목사님은 그래도 목사님이니까 뭔가 답이 있지 않겠습니까?"

양씨는 숨을 가쁘게 쉬며 씩씩거렸다. 우선 그를 진정시키는 일일 급했다.

"무슨 일인지 차근차근 말씀해 보십시오."

양씨는 깊이 숨을 몰아쉰 다음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오후에 우리 어미 돼지 다섯 마리가 옆집 채소밭에 들어가서 그 집 채소를 몽땅 먹어치웠거든요. 그랬더니 옆집에서 손해배상을 해달라고 하더라구요."

"그야 당연히 배상해야지요."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저도 손해는 배상해 주려고 했지요. 그런데 그 인간이 말도 안 되는 걸 요구하지 뭡니까!"

"도대체 옆집 분이 원하는 게 뭔데요?"

"글세, 우리 어미 돼지 다섯 마리를 전부 달라는 겁니다!"

양씨는 다시 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무리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이런 경우에 화가 안나는 놈이 어디 있겠습니까, ?"

양씨는 씩씩거리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옆집 사람은 형제님을 시험해 보려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은 형제님이 마구 흥분하고 화내기를 바랄 거예요. 그렇게 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온 동네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려면 그가 원하는 것을 모두 다 주셔야 합니다. 큰 손해를 입게 되더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더 많은 것으로 갚아주실 겁니다."

내 말이 초신자 양씨에게 설득력이 있을까? 양씨는 양손을 허리에 얹고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좋습니다. 어쨌든 저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요. 아까는 정말 화가 났지만, 다 접어두고 하나님께 순종하겠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지요."

그는 돌아갔다.

양씨는 정말로 한 마디 불평 없이 돼지 다섯 마리를 전부 옆집에 주어 버렸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양씨가 미친 거 아니야?"

많은 사람들이 양씨를 비웃었지만, 그중에는 양씨의 태도를 보고 사뭇 진지해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 예수 믿는 사람은 저렇게 하는구나.'

그것은 여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그 사건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나뭇잎이 곱게 물들어가던 어느 가을날 밤, 양씨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목사님, 밤 늦게 죄송합니다.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전에 제가 목사님의 말씀을 따르기는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굉장히 분했습니다. 그래서 옆집 사람이 한 짓을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오늘 아침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지 뭡니까? 글쎄 옆집 황소 일곱 마리가 우리집 밭에서 실컷 뜯어먹고 있는 겁니다.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옆집 사람이 그걸 보고 양심의 가책을 받았는지, 저한테 와서 난처한 얼굴로 이러는 겁니다. '양씨, 어떻게 배상해야 할까?'

처음 생각 같아서는 그 황소 일곱 마리를 냅다 끌어오고 싶었지요. 하지만 목사님께 먼저 여쭈어 보아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목사님, 이제 제가 이겼지요? 그렇지요? 돼지 다섯 마리에 황소 일곱 마리라니, 목사님 말씀대로 하나님은 정말 제가 잃은 것보다도 더 많이 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양씨의 얼굴은 커다란 이익을 얻게 되리라는 기대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기대를 저버릴 수 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형제님, 형제님은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앙갚음 하려는 마음을 버리시고 그분에서 용서하는 마음을 보여주십시오. 형제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양씨의 얼굴이 갑자기 침울해졌다. 그는 올 때와는 달리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맥빠진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 날 저녁, 양씨는 또한번 신이 나서 나를 찾아왔다.

"목사님 말씀이 또 맞았어요! 하나님이 정말 더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어제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옆집 사람에게 아무런 배상도 받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오늘 오후에 그 사람이 돼지 아흔 마리를 끌고 우리 집에 왔지 뭡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 돼지 전부 자네 껄세. 내가 자네 때문에 지난 밤에 한숨도 못 잤어. 지난 번 일로 틀림없이 화가 잔뜩 났을 텐데 왜 내 황소를 달라고 하지 않느냐 말이야. 내가 그걸 생각하느라고 머리가 다 빠개지는 것 같아. , 자네 돼지가 낳은 새끼 열 여덟 마리씩 다 합해서 아흔 마리 전부 데려왔으니 다 가져가게. 그리고 이제부터는 이웃끼리 잘 지내보세."

양씨는 예기치 않은 이 이야기를 듣고 흥분해서 나한테 뛰어온 것이다.

"생각해 보세요. 별안간에 이렇게 많은 돼지를 되돌려 받은 것도 굉장하지만, 지금까지 옆집에서 그놈들 전부를 먹인 먹이를 생각하면 정말 하나님이 제가 손해본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주셨지 뭡니까? 이제 저는 확실히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이 뭔지 아십니까?

좋아라 하던 양씨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마을 전체가 우리를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인정하게 된겁니다. 이거야말로 하나님께 받은 최고의 선물이 아니겠습니까?"




5.
참사랑이란


문둥병은 재발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쉰여섯 되신 그 아주머니에게도 문둥병이 재발했다. 몸과 얼굴이 부어오르고 양쪽 눈과 콧구멍에서 고름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다른 마을 사람들은 아예 그 집에 발길을 끊어버렸고, 나이 지긋한 교회 어른 한 분은 그 아주머니를 소록도로 다시 보내고자까지 했다. 게다가 소문은 꼬리를 물고 이웃 동네까지 퍼져나갔다.

심한 불안과 절망에 빠진 아주머니는 한꺼번에 많은 양의 약을 먹어버렸다. 차라리 죽어서라도 문둥병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리어 위만 상해서 이제는 제대로 먹거나 마실 수도 없게 되었다.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렇게 두 주가 지나갔다.

내가 찾아갔을 때 아주머니는 아무런 기력 없이 누워있었다. 아주머니는 나를 알아보고는 간곡히 부탁하기 시작했다.

"목사님, 제발 저를 다시 소록도로 보내지 말아주세요. 저는 두 번 다시 소록도에서 문둥병자로 살고 싶지 않아요!"

"그럼요. 하지만 여기 그대로 계시려면 건강을 빨리 되찾으셔야 합니다. 아무 거라도 좀 잡수어 보세요!"

"먹을 수가 없어요."

아주머니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부엌을 내다보니 아궁이 위에 생선찌개가 담긴 냄비가 있었다. 나는 숟가락으로 찌개를 떠서 맛을 보았다. 아주머니는 입을 다물지 못할 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내가 병에 옮을 것을 겁내지 않고 자신의 숟가락을 쓰는 것에 깜짝 놀란 것이다.

나는 생선찌개를 가득 떠올린 숟가락을 아주머니에게 건넸다.

"맛 좀 보세요. 아주 맛있는데요!"

아주머니는 내가 건넨 국물을 꿀꺽 삼켰다.

'아주머니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드실 텐데 내가 함께 있으면 어떨까?'

나는 신중하게 생각해본 다음,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냄비가 텅 빌 때까지 아주머니와 함께 숟가락 하나로 번갈아가며 찌개를 먹었다.

배부르게 먹은 송씨 아주머니는 금세 잠이 들었다.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니 온통 고름투성이어서 아주 끔찍해 보였다. 나는 수건으로 고름을 깨끗이 닦아냈다. 닦아도 닦아도 고름은 다시 흘러나왔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그 누런 액체를 비추었다. 고름이 마치 금처럼 반짝였다.

"자매님, 자매님 얼굴에 금이 정말 많기도 하네요!"

나는 크게 소리내어 말했다.

내가 어떻게 아주머니에게 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었을까? 나는 그 동안 아주머니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나는 건강한 사람이고 아주머니는 문둥병자였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내게 잔잔한 웃음을 보내주었다. 내가 그 아주머니의 숟가락을 썼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머니에게 입맞춤과도 같은 것이었다.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담이 무너졌다.

그때 나는 참사랑이란 바로 내가 그 사람의 자리로 옮겨가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 아주머니 앞에서 나는 그분과 똑같이 문둥병자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 아주머니에게 감사했다. 아주머니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내게 가르쳐 주었다. 하나님은 바로 나의 자리에 오셔서 나와 하나님의 사이를 막고 있던 담을 허물어 버리신 것이다.




6.
지체 높은 사람의 방문


어느 나른한 봄날 저녁에 군수가 나를 찾아왔다. 군수처럼 지체 높은 사람이 우리 마을에 찾아온 적은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김 목사님이십니까? 지금에야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사실은 우리 도지사 사모님께서 목사님을 꼭 만나고 싶어하셔서 말입니다. 내일 시간을 내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지체 높은 분이 어디에서 내 말을 들었을까?

"혹시 다른 사람과 저를 혼동하신 것 아닙니까?"

나는 좀더 신중을 기하기 위해 되물었다. 그런데 군수는 영호에 살고 있는 내가 틀림없다고 말했다.

다음 날 급한 환자를 심방할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군수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날짜를 낼 모레로 연기할 수 없을까요? 그날은 시간을 낼 수 있겠는데요."

군수는 아주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느 누구도 군수에게 이렇게 말한 사람이 없었나보다.

"음 목사님이 정 그러시다면 목사님의 대답을 그대로 전하지요."

다음날 아침 군수가 또 찾아왔다.

"내일 오후 두 시가 괜찮으시다면 기꺼이 오시겠답니다."

그가 돌아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우리 마을 길에 무언가 덜거덕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영호는 국도에서 약 6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기 때문에 마을로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고르지 못한 들길을 통하는 것뿐이었다.

그 요란한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알아보려고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때 저만치 한 무리의 일꾼들이 트럭과 불도져를 몰고 마을 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체 높은 사람이 방문할 들길에 자갈을 깔고 땅을 평평하게 고르기 위해서 였다.

약속한 날 점심시간에 군수와 면장과 경찰서장이 공무원 몇 명을 거느리고 미리 왔다. 마을 분위기가 잔뜩 들떠 있었다. 그렇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실제로 본적이 지금껏 한 번도 없었던 탓이었다.

정확하게 오후 두 시가 되자 도지사 부인이 도착했다. 부인은 스물다섯 명의 다른 부인들과 함께 왔다. 상류사회의 부인들이 가난한 우리 마을에 모두 모인 것이다.

물론 나도 긴장이 되었다. 도대체 우리 마을에는 왜 온 것일까? 도지사 부인은 서울에서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듣고, 문둥병자들의 교회를 섬기를 이 목사에게 호기심을 품게 되었다. 그 부인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부인은 그토록 풍요로운 생활을 하면서도 만족할 수 없었다.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 부인의 갈증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부인은 영호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기를 원했다.

"모두 교회로 가시지요. 이렇게 오셨으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시다!"

나는 그 사람들을 모두 교회로 안내했다.

도지사 부인이 이 특별 예배에서 자신이 찾고 있던 것을 찾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부인은 떠나기 전에 내게 물었다.

"목사님, 목사님께 필요한 것을 하나 해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떠나실 때 우리 마을 사람들과 악수를 해주시겠습니까?"

부인은 확실히 불쾌한 듯 했다. 그러나 자가용에 오르기 전에 어떤 할머니 한 분에게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할머니에게는 분명히 큰 영광이었다. 할머니는 그 후로 계속해서 그 부인을 위해 기도했다. 나중에야 나는 그 지체 높은 부인이 손씻을 물을 준비하기 위해 차들이 줄줄이 서서 기다려야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체 높은'분의 방문이 있은 후 우리 마을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국도와 연결되는 길에는 콘크리트가 깔렸고, 전화도 연결되었다. 그리고 두 주 후에는 내 책상 위에 전화가 놓이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아침, 낯익은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들려 왔다.

"목사님, 목사님을 우리 집에서 모이는 성경공부 모임에 모시고 싶습니다. 와 주시겠습니까?"

나는 그 부인의 초대에 기꺼이 응했다. 그 부인은 자신이 찾고 있던 것을 우리에게서 찾았던 
것이다!




7.
아직 늦지 않았다.


다시 봄이 찾아왔다. 모두들 들일을 하러 나갈 무렵이었다. 나는 근처를 돌아보려고 이웃 동네 쪽으로 갔다.

한 채소밭에서 몸집이 작은 할머니가 쪼그리고 앉아 잡초를 뜯고 있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잠시 후에 할머니는 비틀린 잇몸이 부끄러웠는지 당황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이고, 부처님 오셨네! 저는 항상 살아계신 부처님 만나는 것이 소원이었는디."

할머니는 기쁨에 넘쳐서 말했다.

"아닙니다."

나는 놀라서 대답했다.

"저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에요."

이 말밖에는 다른 대답할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가 '목사'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예수가 누구다요?"

할머니는 알고 싶어 했다. 나는 할머니 옆에 주저앉아서 말했다.

"그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예요. 예수는 우리말로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이고,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구원자'라는 뜻이지요. 예수님은 오래 전에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어요. 예수님은 할머니나 저와 똑같은 사람이셨지만, 또 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하십니다. 그 이름의 뜻대로 하나님은 인간을 도와주시고 무엇보다 흉악한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 주셨지요. 예수님은 친구가 많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를 너무나 미워해서 죽여버렸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 주셨어요. 하나님은 이처럼 인간을 돕고 구원해 주시기위해 오늘도 예수님을 모든 나라에 보내 주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예수님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진짜로 우리한테 찾아온당가요?"

할머니는 내 말을 막고 물었다.

"그럼요. 바로 이곳에도 오십니다."

그 사실은 할머니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할머니의 눈이 반짝였다.

할머니는 80년동안 부처님을 공양했다. 그러나 그 조각상은 눈 앞에서 항상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할머니는 절에서 기도를 드리기도 하고 조상의 무덤 앞에서 제사를 드리기도 했지만 의지할 곳이 없기는 마찬가지이였다. 하루가 다르게 힘이 빠지고 죽음의 공포가 다가왔다. 그러나 할머니를 도와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희망의 빛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저도 목사님처럼 예수님 백성이 될 수 있을까 모르겄네요. 나이가 벌써 여든아홉이나 되았는디!"

할머니는 기대감에 부푼 목소리로 물었다.

"나이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시면 할머니도 예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할머니에게 용기를 드리고 싶었다.

"그러면 지금 저를 예수님한테 데꼬 갈 수 있으시오?"

할머니는 조급하게 물었다.

"내일 새벽 네 시에 영호에 있는 우리 교회에 오세요. 매일 새벽기도회가 있거든요. 거기 오시면 예수님을 만나실 수 있어요."

"새벽기도회가 뭐다요? 예수님이 진짜 거기 있어요? 그러먼 제가 제일 좋은 옷 입고 가야 쓰겄네요."

"새벽기도회는 새벽에 교회에 함께 모여 하나님과 예수님께 노래하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일과 말씀을 적어 놓은 책을 읽습니다. 우리는 그 책을 성경이라고 부르지요."

"근디 저는 글을 몰라요."

"걱정마세요. 예수님이 할머니와 말씀하실 길을 찾으실 테니까요. 그럼 내일 새벽에 꼭 오세요."

그날 밤 태풍을 동반한 큰 비가 밤새도록 퍼부었다. 길에는 물이 넘쳐 흘렀고 전기는 끊어졌다. 이런 날 노인이 새벽기도회에 나오기는 힘들겠지 . 그런데 성가대가 막 찬양을 시작했을 때였다. 교회 문이 열리더니 그 몸집 작은 할머니가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손에는 손전등을 들고 있었다.

교회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할머니에게 쏟아졌다. 할머니는 얼굴을 붉히며 무릎을 꿇고 앉더니 두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성경 한 부분을 읽은 다음 설교를 했다. 설교 시간 내내 무릎을 꿇고 앉아 무언가를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예배가 끝나고 다들 돌아가고 난 후에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왔다. 할머니가 아는 사람은 교회에서 나 혼자뿐이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목사님, 진짜 고맙습니다. 진짜로 제가 예수님을 봤어요."

"그러십니까? 어디에서요?"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목사님 옆에 계신 거를 똑똑히 봤당게요! 목사님하고 똑같이 생겼드랑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제가 볼 때에는 목사님이나 예수님이나 똑같당게요."

할머니는 확신하고 있었다.

전에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못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말이 맞다. 우리는 곁에 있는 어린 아이들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볼 수 있다. 나는 할머니에게서 중요한 것을 배우게 되었다.

나는 또 하나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할머니, 아까 예배 시간에 혼잣말씀을 계속 하시는 것 같던데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인자 제가 예수님 만났응께, 인제까지 저 살아온 거 예수님한테 싹 다 애기했당게요. 예수님이 내 얘기 다들어준께 정말로 좋아라우."

할머니는 고마워하며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나는 할머니가 마음속으로 무엇인가를 새로이 품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근디 제가 성경책 읽을라믄 어째야 쓰까요?"

할머니는 도움을 청하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매일 새벽기도가 끝난 후에 나에게 오시라고 말씀드렸다.

말씀드린 대로 할머니는 매일 새벽 나를 찾아왔고, 내가 성경을 펴서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읽어나가면 한 글자 한 글자 따라 읽었다. 이렇게 해서 할머니는 성경구절을 배우게 되었고 새벽기도 때마다 배운 것을 자랑스럽게 외워보이곤 했다.

그렇게 두세 달이 지난 후였다. 할머니는 내가 가르쳐드리지 않은 성경구절들을 외우고 있었다.

"아니, 할머니! 어디서 그걸 배우셨어요?"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처음에는 목사님 따라서 외았는디, 예수님이 도와서 인자는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았당게요."

마침내 할머니는 글을 깨우친 것이다!

그 후에 할머니는 아예 우리 마을로 이사를 오셨고, 손자들도 청년부 모임에 나오게 되었다. 할머니가 직접 손자들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전했던 것이다.




8.
변함없는 사랑


처음 영호에 갔을 때 나는 그곳 사람들의 사정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점차 사람들의 신뢰를 얻게 되면서 비로소 사람들의 사연을 조금씩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중에서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어느 마을에서 젊은이 한 쌍이 결혼했다. 아내가 임신하게 되자 부부는 정말 기뻐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에게 문둥병이 발병했다. 정말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아내는 문둥병자들을 격리 수용하는 소록도로 가야만 했다.

법적으로 남편은 아내와 이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그대로 버려둘 수 없었다. 오히려 아내와 함께 소록도로 들어가 살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관계당국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자 남편은 아기를 부모님 집으로 데려갔다. 이별은 이 젊은 부부에게 너무나도 큰 고통이었다. 남편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나도 문둥병자가 될거야. 그러면 내 마누라, 내 자식과 함께 살 수 있을 것 아냐!"

그는 절망으로 절규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일 년이 지난 후 그는 처음으로 아내가 있는 섬을 찾아 갔다. 아내를 보았을 때 그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얼굴에 문둥병으로 인한 흉터가 있긴 했지만 아내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전 여기서 한 사람을 알게 되었어요!"

아내가 남편에게 주저없이 말했다.

"물론 남자겠지?"

남편은 분노와 질투를 감추려고 애쓰며 말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한테는 당신밖에 없어요. 제가 말하는 그분은 저뿐 아니라 당신도 사랑하시는 분이에요."

"그 자가 누구야? 대체 어디 있지?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군!"

아내는 그에게 작은 책을 한 권 건네주었다. 그것은 목사님이 선물로 주신 신약성경이었다. 소록도로 간 아내는 예수를 믿게 되었던 것이다.

"여보, 이 책은 우리 두 사람에게 다시 희망을 줄거예요. 그것을 읽으면 저의 새 주인이 어떤 분인지 잘 알 수 있어요. 꼭 읽어보세요!"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와 다름없이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시간은 빨리 흘러 헤어질 시간이 왔다. 이별은 이 부부에게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남편은 성경을 읽으면서 믿음의 소망을 아내와 함께 나누게 되었다. 그는 그후 5년 동안 한결같이 아내가 돌아올 날만을 기다렸다. 아이를 언제까지 엄마 없이 키워야 하는지.

그러던 어느 날 소록도에서 소식이 왔다. 아내의 문둥병이 음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아내는 육지에 있는 가족에게 올 수 있었다. 그들은 몇몇 다른 문둥병자가 가족과 함께 영호로 이사했고, 여기에서 새 생활을 시작했다. 건강한 아이들도 태어났다.

이렇게 해서 이 작은 마을은 점점 커져 갔다. 그들은 마을에 예배당도 건축하였다. 그러나 이웃 동네 사람들은 그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이들은 언제까지나 똑같은 문둥이일 따름이었다.

그들이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믿음으로 희망을 잃지 않았다. 매일 아침 해가 뜨기 전, 그들은 작은 교회에 모여 찬양하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었다. 겨울날 영하의 날씨에도 그들은 손뼉치며 찬양하면서 몸을 따뜻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 교회에 오겠다는 목사님은 한 명도 없었다.

긴 세월이 흘렀다. 처음 영호에 온 사람들은 이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다. 문둥병이 재발하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한 중년 부인은 약을 먹어도 아무런 효과가 없어서 발가락을 절단해야만 했다. 문둥병은 늘 그런 흔적을 남겼다. 그런데 그와 똑같이 이 마을에서 늘 하나님의 흔적이 있었다.

젊은 남편이 문둥병에 걸린 아내를 버리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은 문둥병자들에게 신실하셨다. 그 부부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영호 사람들은 몸이 다시 나빠질 때에도 용기를 잃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새 가정들이 늘어났다. 소록도에서 사람들이 왔다. 지금 영호에는 약 예순다섯 가정이 백 명이 넘는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9.
어떤 부유한 농부 이야기


영호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대부분 문둥병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웃 지역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약점보다는 그 약점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더 깊은 상처를 입게 된다. 때때로 그들도 그것 때문에 더 힘겨워한다. 그래도 '문둥이'들의 신앙생활은 점점 꽃을 피웠다. 우리의 예배 시간과 성경공부 시간은 점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어느 날 이웃 마을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 마을로 찾아왔다. 건강한 사람이 우리 마을에 찾아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 아주머니는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서 나를 찾아왔다. 그것은 정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목사님,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제 남편을 좀 도와주세요. 그 양반이 지금 많이 아파요. 한의한테도 가보고 양의한테도 가보았는데 전혀 차도가 없습니다. 절에 가서 불공도 드려보고 스님한테 부탁해서 치성도 드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무당을 불러다 굿을 했지만 그것도 효과가 없네요. 우리 동네 애들 말을 들어보니 예수님은 아픈 사람을 낫게 하신다던데 그게 정말입니까?"

아주머니가 이렇게 영호까지 와서 나에게 도움을 청하기까지 정말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아주머니,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나는 물었다.

"사실 예수님이 누군지 잘 몰라요. 그거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듣고 하지만 예수님을 알고 싶습니다!"

아주머니는 정말 진지하게 말했고, 그 말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이리 들어오십시오. 좀 앉으시지요."

나는 성경을 펴서 신약을 몇 부분 읽어 주었다. 나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기적적인 치료자나 마술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해주고 싶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것도 성경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씀을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예수님이 병자들을 모두 치료해주신 것은 아니라는 말을 듣고도 실망하지 않았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 남편되는 분께 꼭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저한테 들은 대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우리는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 부유한 농부의 아내는 몇 번씩이나 고개를 숙이며 고마워 했다.

며칠 후 그 아주머니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목사님, 저희 집에 좀 와주세요. 우리집 양반이 예수를 믿고 싶대요."

그래서 나는 기쁜 마음으로 교회 장로님을 모셔와 함께 출발할 채비를 했다. 그런데 그 부인의 안색이 변하더니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내게 귀엣말을 하는 것이었다.

"저 사람들은 말고요 목사님만 혼자 오세요."

아주머니는 우리 마을 사람들이 자기 집에 오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우리가 다같이 갈 수 없다면 저도 안 가겠습니다."

나는 불편한 마음을 표현했다. 농부의 아내는 잠시 생각하더니 마침내 결심을 했다는 듯이 말했다.

"좋습니다. 모두 함께 가시지요."

우리는 모두 이웃 마을로 갔다. 아주머니가 방문을 열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한 남자가 고통을 못 이겨 웅크린 채 방바닥에 꼬꾸러져 있었다.

그는 며칠 전부터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했다고 했다. 우리는 그의 주변에 둘러 앉았다. 우리는 먼저 찬송을 몇 곡 불렀다. 그리고 나서 내가 집에서 미리 찾아온 성경 구절을 읽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던 농부의 얼굴이 점점 편안해졌다. 우리는 차례차례 돌아가며 그를 위해 마음을 다하여 기도드렸다. 기도는 길었다. 그 농부에게 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육체의 치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얻는 것이었다.

농부는 이내 잠이 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잠이었다. 아주머니가 고마워하며 우리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돌아온 후에도 그 농부를 생각하며 기도했다.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우리에게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농부의 가족이 모두 새벽기도회에 나온 것이다. 병들었던 농부는 옷을 멋있게 차려 입고 가족들보다 먼저 교회에 왔다. 그는 건강해 보였다.

이 농부의 마음속에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났는지! 이전에는 문둥병자들을 멀리하던 그가 이제는 우리 동네 사람들의 친구이자 후원자가 되었다. 그는 바로 뛰어다니며 자기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있다.

우리의 믿음은 겨자씨만큼 작은 것이었지만 이 일로 인해 큰 믿음의 용기를 얻게 되었다.





10.
안녕하세요?


한국에서는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는데 이것은 "평안하십니까?"라는 뜻이다. 이 인사말과 관련된 일이 하나 생각난다.

나와 가까운 사람이 알고 지내는 여의사가 있었다. 오십대 초반인 그 의사는 광주에서는 꽤 널리 알려진 교수였다.

"자네가 그 의사와 한번 이야기해 볼 수 없을까? 벌써 몇 달 동안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는군.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왠지 자네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친구가 나에게 제안해왔다.

영호에서도 할 일이 많긴 했지만, 이 여교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모르는 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에 갔다. 사무실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커다란 문패에 그 교수의 직함과 이름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방문한 것에 그리 놀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두 시간이 넘도록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주로 미국에서 보낸 유학생활과 화려한 업적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아주 거창하게 설명하더니 갑자기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감탄하며 맞장구쳐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그는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마침내 결정적인 지점에 이르렀다. 지난 해 좋은 교수 자리가 하나 생겼다. 이 교수는 그 자리를 꼭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여러 가지로 애를 썼지만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그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 자신이 그 자리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 실패를 맛본 후에 그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매사에 만족할 수 없었고 두통과 우울증까지 생겼다. 여기까지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상한 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전 모든 걸 소유하고 있습니다. 돈도 많고 이름도 꽤 알려졌죠. 좋은 직장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이제 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지금 몹시 불안합니다. 목사님, 말씀해 주세요. 어떻게 해야 다시 평안한 마음을 찾을 수 있을까요?"

나는 대답했다.

"교수님, 저는 교수님의 우울증에 대해서 의학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문둥병자들이 함께 모여 사는 마을에 한번 오십시오. 그러면 제가 만족이 무엇인지 보여드리겠습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 의사 교수는 정말 우리 마을에 찾아왔다. 우리는 마을 주위를 함께 거닐다가 채소밭에서 일하고 있던 아주머니 한 분을 만났다. 우리를 본 아주머니는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목사님, 이것 쪼까 보씨오. 저번 주에 손가락이 세 번째로 끊어져 불렀거든요. 근디 아직 일곱 개는 멀쩡하다니까요. 정말 감사해 죽겄네요."

어안이 벙벙해진 교수는 나를 바라보았다.

"저게 무슨 말이에요? 대체 뭘 감사한다는 거지요? 저 아주머니는 늙고 못생긴 데다가 문둥병 환자이고 손가락도 일곱 개밖에 안 남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만족하면서 웃을 수가 있는 거죠?"

나는 놀라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그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바로 다른 점입니다. 저 아주머니는 가진 게 별로 없습니다. 더군다나 손가락도 일곱 개밖에 없지요. 그렇지만 자기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아주머니의 얼굴에서 볼 수 있는 저 기쁨은 하나님의 값진 선물이지요.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교수님은 건강하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큰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 교수님은 이제껏 한 번도 감사하지 않았지요. 교수님은 항상 자기 힘으로 기쁨을 만들려고 하지만 교수님 스스로 기쁨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 당연하지요."

그는 이 진리를 깨달았을까?

우리는 아무말 없이 한참 걸었다. 교회 앞에서 그가 멈춰 섰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한 눈치였다.

"목사님, 저는 중요한 걸 배웠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그것을 감사할 때 기쁨과 만족이 온다는 것을요. 하지만 전 도무지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상황이 나빠질 때 다른 사람을 원망하기보다는 자신을 질책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우리는 조금 후에 집에 도착했다.

"잠깐만 기다리시겠습니까? 조촐한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나는 식사기도를 드리고 나서 그에게 음식을 권했다.

상 위에는 밥 한그릇과 김치와 맵게 무친 나물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는 한 술도 뜨지 않았다. 그의 눈빛을 보니 무엇이 문제인지 알 것 같았다.

"목사님, 이걸로 충분하세요? 고기나 생선도 없이 밥 하나 김치 하나로 식사하기가 어렵지 않으세요? 대체 목사님은 뭘 가지고 그렇게 만족하신다는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목사님이라면 서울에서도 아주 좋은 자리를 얻을 수 있을 텐데 가구도 없는 방 하나에 검정 고무신으로 지내다니 저로서는 정말 이해가 안되네요. 목사님은 하나님께 지금의 상황을 감사하시나요? 아까 하나님께 기도하셨지요? 도대체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지요?"

나는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지 않았다.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교수님, 지금 혹시 6,000원 정도 있습니까?"

그에게 그만한 돈이 없을 리가 없었다. 우리는 함께 시내로 나가 서점에 갔다. 나는 성경을 하나 집어 그에게 건네 주었다.

"이 책을 읽으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될 것이고, 평화의 샘을 만나게 될 겁니다."

그 교수는 성경을 가지고 다시 광주로 돌아갔다. 나는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렸다.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나는 그 교수를 잊지 않고 늘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교회 사람들은 그를 위해 함께 기도했다.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 갑자기 버스 한 대가 마을 어귀에서 들어서며 큰 소리로 경적을 울렸다. 서른다섯 명 가량의 사람들이 차에서 내렸다. 그 여교수와 조교 의사들, 그리고 의과 대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일주일 내내 우리 마을과 근방에 사는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해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생활필수품도 몇 상자씩 가져왔다. 일요일 저녁에 우리는 모두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이 방문으로 우리만 도움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교수와 교수를 도와주러 함께 온 사람들의 얼굴에는 만족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 의사는 평안을 찾는 질문의 답을 찾은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평안을 주셨다.

"안녕하세요?"

"평안하십니까?"





11.
가족의 반대를 이겨낸 새댁


이웃 마을에 사는 어는 젊은 새댁이 우리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새댁은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캄캄할 때 시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집을 몰래 빠져 나오곤 했다. 우리는 앞으로도 뾰족한 해결책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시댁이 워낙 엄격한 유교 집안이었기 때문에 새댁은 공개적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시댁 식구들은 며느리의 낯선 신앙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어느 날 아침 시아버지가 마당에 나와 대문 곁에 서 있었던 것이다.

"얘야, 이렇게 일찍 들에 나갔다 오는 길이냐? 그런데 왜 그렇게 손이 말끔하지? 이제 바른 대로 말하거라. , 문둥이 마을에 있는 예수쟁이들과 함께 있다가 오는 거지?"

새댁은 시아버지의 다그침에 놀라고 겁이 나서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깬 가족들이 모두 마당으로 뛰쳐 나왔다. 젊은 남편은 황당한 얼굴로 자기 부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무슨 망신 당할 짓이라도 했어?"

"니 처가 문둥이 마을에 있는 교회에 다닌단다. 여태까지 우리는 감쪽같이 속이고 말이다. 그래도 누가 내게 알려줬으니 망정이지. 그래서 내가 이 아침부터 니 처를 문간에서 지키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발칙한 것 같으니라구!"

노인은 뒷짐을 진 채로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남편이 기겁해서 아내를 꾸짖었다.

"아버지가 당신을 야단치는 것은 당연해. 왜 문둥이들이 믿는 다른 나라 신을 믿어가지고 우리 집안을 쑥대 밭으로 만드는 거야?"

다시 시아버지가 말을 가로챘다.

"네가 예수교를 믿어서 우리 집안의 기강은 엉망이 됐다. 조상님들이 우리를 보호하시다가도 너 때문에 거두어 가시지 않겠느냐? 예수쟁이들이 조상들께 제사도 안 드린다는 말은 나도 들었다. 너도 이제 제사를 안 지낼 셈이냐?"

모두 아버지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새댁은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때부터 집안 식구들이 모두 새댁을 구박하고 구속하기 시작했다. 새댁은 그후로 새벽기도회에 나올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새댁이 집에서 어떤 어려움을 당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몇 주 후에 새댁은 가족들의 강요에 못이겨 교회에 나오는 것을 단념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새댁은 일을 하다가 갑자기 쓰러지더니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상태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저녁에 내가 심방을 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과 시누이가 그 새댁을 옮겨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 처가 몹시 아픕니다. 다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서 걷지도 못하고 헛소리만 해대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남편이 말했다. 난 그들을 바라보다가 함께 기도하자고 말했다. 우리는 새댁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나누어 앉았다. 나는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했다. 특히 이 여인이 견뎌내야 했던 내적 싸움을 위해 기도했다. 시누이가 울기 시작했다.

"저희도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어요. 저희 때문에 언니가 아프다니! 목사님, 저희가 정말 잘못했어요. 이 죄를 어떻게 하면 갚을 수 있을까요?"

시누이는 새언니가 낫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죄를 뉘우치는 마음과 새언니에 대한 염려를 할 수 있는 대로 모두 하나님께 내려 놓으십시오."

두 사람은 내 말대로 소리내어 함께 기도했다.

갑자기 새댁이 눈을 뜨고 입술을 움직였다. 기도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새댁이 잘 아는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새댁도 같이 찬송하려는 듯이 입술을 움직였다. 반응을 보이지 시작한 것이다!

남편이 아내에게 찬송가를 내밀었다. 그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어찌나 크고 또렷하던지 우리는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다시 한번 더 기도를 드렸다. 그러고 나서 남편은 아내를 부축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남편과 여동생이 아픈 새댁과 함께 기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새댁의 몸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친척들은 남편과 그 여동생의 마음이 변해가는 것을 보고 예수교가 사람을 그렇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아주 놀라워했다.

새댁과 남편과 시누이는 한 주도 빠짐없이 영호로 예배드리러 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조상의 보복도, 문둥병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시아버지까지도 내가 무엇을 설교했는지 물어보고, 아무도 몰래 아들의 성경을 뒤적거리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족의 반대는 없어졌다.





12.
슬픈 이야기


서울에서 친구 하나가 영호로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주변을 산책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우리 교회가 사들인 땅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거기에 공동묘지를 만들 생각이었다.

한국에는 돌아가신 분들을 가족의 땅에 묻는 풍습이 있어서, 시골에 가면 여기저기에서 비석이 세워진 둥그런 무덤을 쉽게 볼 수 있다.

친구는 들판을 두루 돌아보았다. 멀지 않은 채소밭 저편에 무덤 하나가 외롭게 솟아 있었다. 그 무덤 위로 풀이 드문드문 나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저기에는 누가 묻혀 있는 거야? 묻힌 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친구는 그 무덤에 관심을 보였다.

"한번 가보겠나? 참 슬픈 일이 있었지."

우리는 풀이 무성한 곳을 지나 그 무덤 앞에 섰다.

"십자가가 새겨져 있군. 자네 교회 교인이었나?"

친구가 내게 물었다.

"작년 11월에 여기에서 한 청년을 장사지냈네. 겨우 스물두 살이었지. 비참한 죽음이었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든."

난 친구가 이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일 아침 우리 교회에서 가장 연로하신 박씨 할아버지를 자네에게 소개해 주겠네. 여기 누워 있는 청년의 아버지 되는 분이시지. 그 부부는 청년이 아기였을 때 양자로 데려왔다는군. 청년은 소록도에서 태어났는데 생모는 해산할 때 죽었지. 아버지는 누군지도 모르고 말이야. 사람들은 먼 친척집에서 아이를 거두어주길 바랐지만 친척들은 그 아이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네. 문둥병이 워낙 무서운 병이고 아이가 정말 건강한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니 그랬겠지. 그러다가 박씨 할아버지가 그 소식을 들은거야. 할아버지가 아내와 함께 소록도를 떠나도 된다는 허락을 막 받았을 때였지. 두 사람은 그때까지 결혼을 위해 육지로 가려고 애를 쓰던 참이었어.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두 사람도 소록도에서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된 사이지.

두 사람은 그 갓난아기의 사정을 듣고서는 곧장 아이를 데려왔다네. 그리고 영호로 이사해서 친자식처럼 정성껏 키웠지. 두 사람은 아이를 낳을 수 없었거든.

아이는 자라서 학교도 잘 다니고 부모님께 큰 기쁨을 안겨 주었다네. 부부는 아이에게 성경 이야기도 들려주었지. 그 아이는 아주 인기가 좋은 청년으로 자랐다네. 그의 기쁨은 우리 모두의 기쁨이었지. 우리가 아는 그 아이는 친절하고 인정 많은 젊은이였다. 학교를 마친 청년은 군에 입대했지. 그는 어느 소도시 근방에서 군대생활을 했어. 그리고 거기서 한 아가씨와 시간을 보냈지.

그는 자랑스럽게 부모님께 도시에 사는 처녀에 대해 말씀을 드렸지.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었지 결혼하기로 약속했다네. 물론 부부도 아들과 똑같은 심정으로 기뻐했네. 그들은 빨리 아가씨를 보고 싶은 마음에 집으로 초대했지. 그런데 몇 주가 지나도록 오지 않는 거야. 그때마다 이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곤 했지. 그런데 사살은 그 아가씨의 부모가 문둥병자들이 사는 마을에 가지못하게 딸을 막았던 거였네. 아가씨의 부모는 두 사람을 멀어지게 만들었고 청년은 절망에 빠졌지.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짤막하게 끝나고 말았네. 두 젊은이는 같이 도망가려고 했어. 아무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곳까지 아주 멀리. 그러나 아가씨의 부모는 그것을 미리 눈치채고 딸을 친척집에 보내버렸다네. 청년은 크게 상심했지.

그는 영호에 와서 부모님의 서랍에 들어 있던 문둥병 치료약을 먹어버렸어. 부모가 청년을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시간이 너무 지난 후였네.

마을 사람들은 너무 놀라 할 말을 잊었다네. 물론 우리는 무엇이 이런 비극적인 결과를 불러왔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 .

박씨 할아버지 내외는 우리 마을이 보이지 않는 곳에 아들을 묻고 싶어했네. 그래서 산이 보이는 이 한적한 곳을 택한걸세."

우리는 아무말 없이 다시 영호로 돌아왔다. 한 젊은이와 그의 비극적인 이야기에 대한 생각에 잠긴 채.





13.
돌아온 아버지


"
목사님, 목사님!"

나는 그것이 정씨의 목소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우리 성가대에서 베이스를 맡아 노래하고 있었다. 내가 채 대답도 하기 전에 그가 허둥지둥 내 방에 들어왔다. 무슨 큰 일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목사님, 아버지와 헤어진 지 사십 년 만에 아버지가 절 찾아오셨어요.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오늘 아침 갑자기 오셨어요!"

정씨는 내 팔을 잡고 나를 문까지 끌고 갔다.

"이리 오세요, 목사님. 저희 아버지를 소개해 드릴게요!"

그제서야 나는 그의 아버지를 알아보았다. 노인은 미닫이 문에 몸을 반쯤 숨기고 있었다. 그는 당황했는지 자신이 쓴 밀짚모자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들었다. 거센 비바람에 주름진 구리빛 얼굴이었다. 양쪽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 셋은 작은 상에 둘러 앉아 수박을 먹었다. 정씨의 아버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 처와 저는 여덟 아들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아이들이 좀 큰 다음에는 밭에서 열심히 저희 일을 도왔지요. 그렇지만 우리의 기쁨은 얼마 안 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넷째 놈이 열두 살에 문둥병에 걸린 겁니다. 우리 식구에게 그런 일이 생겼다는 것을 믿을 수도 없었고, 우선 동네가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지요.

우리는 그 사실을 오랫동안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근선이가 문둥병에 걸렸다는 말이 온 동네에 파다하게 퍼졌지요. 문둥병자는 가족과 고향을 떠나는 게 법이지만 저는 제 아들이 소록도에 산다는 건 꿈도 꾸고 싶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생각했지요. 저는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고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딴 도리가 없었습니다.

전 근선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갔습니다. 한참을 올라가니 좁은 골짜기가 나오더군요. 절벽이 나오면 밀어버릴 생각이었지요. 그러면 그저 사고로 보일 테니까 . 절벽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가슴이 마구 뛰더군요. 저는 저를 따라오고 있는 근선이를 자꾸 돌아다보았습니다. 지금 이 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마침내 발 밑으로 좁은 골짜기가 내려다보였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아들의 어깨를 잡고 .

아니야! 내 아들을 떨어뜨릴 수는 없어. 그래, 차라리 같이 떨어져 버리자! 그런데 근선이 놈이 불안한 눈으로 날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엄마하고 형들하고 동생들을 생각해보세요. 아버지는 우리 가족에게 꼭 필요한 분이에요. 저 때문에 식구들을 내팽개치시면 안돼요.'

아들이 대견했습니다. 그 아이는 우리 식구 모두의 사랑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골짜기를 빠져나왔습니다. 저는 아들을 바닷가까지 바래다주었지요. 작은 배 한척이 와서 아이를 소록도로 데려갔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저는 근선이가 죽었다고 말했어요. 사망신고까지 했지요. 근선이는 영원히 우리 앞에서 사라져야 했습니다.

세월은 화살처럼 지나갔습니다. 아들들은 모두 결혼해서 대부분 고향을 떠났지요. 제 처와 저는 그때까지 건강했기 때문에 어느 아들에게도 짐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끼리 살던 집에서 그냥 살았습니다.

그런데 제 처가 죽고 나자 의지할 데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먹고 사는 문제를 혼자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럴 힘조차 없어져 버리더군요.

전 당연히 큰 아들네로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라는 걸 담박에 알게 되었습니다. 한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 아우네로 가보라더군요. 그래서 얼마있지 않아 짐을 꾸려 둘째 아들네로 떠났지요.

그렇지만 그 놈 집에서도 다를 게 없었습니다. 아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늙은 아비를 기꺼이 맞아들여서 편안히 죽게 해주는 자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내가 잘못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뼈에 사무쳤습니다. 저와 제 처는 오직 아들들만을 위해 살아왔어요. 하지만 우리는 잘못 살았습니다.

전 차량한 마음으로 소록도에 있는 아들을 생각했지요. 그때까지는 그 아이에 대해서는 일절 아무 것도 알려 들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이들을 위해 그 아이를 버린 거지요. 이 놈이 얼마나 죽일 놈인지!

저는 소록도에 가서 근선이 소식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벌써 섬을 떠나 결혼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근선이가 살고 있는 마을을 찾아 이렇게 영호에 오게된 겁니다. 사십 년이 지나서야 하나밖에 없는 진짜 아들놈한테 돌아온 거지요 . 저는 아들네 집 앞에서 오래 망설였습니다 .

근선이가 뭐라고 할까? 저는 원망만 실컷 듣고 쫓겨날 각오를 했습니다. 아비가 가장 필요할 때 저를 버렸으니, 무슨 말을 들어도 싸지 용기를 내서 오긴 왔지만 다른 아들들은 다 어떻게 하고 왔느냐고 하면 뭐라고 하나 .

도저히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돌아서려는 찰나에 어떤 여자가 내다보며 친절하게 말을 걸더군요.

'할아버지, 이리 들어오세요. 누구 찾는 사람 있으세요? 아까부터 서 계신 걸 보았는데.'

그 여자는 바로 제 며늘애였습니다. 그때 외양간에서 나오던 근선이가 저를 알아보았습니다. 아들놈은 저를 끌어안고 울더군요 .

'애비는 사십 년 동안 네 소식 한 번 알아보지 않았다. 내가 원망스럽지 않으냐?'

'처음 소록도에 갔을 때는 너무 외로웠지요. 밤마다 집 꿈을 꾸었어요. 식구들을 미워하면서, 내 운명을 원망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문둥병자이면서도 저와는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반발심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끌리더군요. 그 사람들은 자신을 문둥병자 이상의 어떤 존재로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저는 그들 중 한 사람과 사귀게 되었지요. 그분은 병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대해 말씀해 주셨지요. 그리고 그후로 예수님께 선물로 받은 사랑을 나에게 주었지요. 저는 그 사람들을 따라서 예배와 성경공부에 가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예수를 믿게 되고 난 다음부터는 식구들에 대한 미움을 잊게 되더라구요. 살고 싶은 마음도 생기구요. 전에는 그냥 죽고만 싶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살아있다는 것 자체를 기뻐해야 할 이유가 생겼지요.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에서 나를 떼어놓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그러다가 집사람을 만나게 되었어요. 우리는 사랑하게 되었고 언젠가는 육지로 나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랐지요. 그리고 어느 날 우리 꿈은 현실이 되었어요. 우리는 섬을 떠나서 결혼할 수 있었고 이곳 영호에서 가정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우린 우리와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어요, 아버지.'

그토록 긴 세월 끝에 만난 아들이 오늘 아침에 제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손주놈들도 보여주더군요 ."

할아버지는 긴 이야기를 마치고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이제 할아버지는 아들과 가정을 찾았다. 집을 떠난 탕자가 돌아오듯이 잃어버렸던 아버지가 집에 돌아온 것이다.

"우리 마을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우리 세 사람은 손을 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14.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확성기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교회탑에서 울리는 찬송가 소리였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그날 밤 나는 거의 눈을 붙이지 못했다. 거센 돌풍이 집과 외양간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러나 잠을 자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어제 저녁 느지막이 걸려온 전화 때문이었다.

"목사님, 접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 형제님이십니까? 무슨 일이 있으세요?"

"30분 전쯤에 택시 한 대가 옆집 나씨네 앞에 서더라구요. 그래서 창문으로 내다보니까 그집 애 택상이를 택시에 태우는 겁니다. 집사람을 불러서 '저 집에 또 뭔 일이 났나보다'고 말했지요. 택상이와 택상이 엄마가 택시를 타고 떠난 다음에 그 집 문을 두드렸더니 할머니가 열어주시는데 울어서 눈이 잔뜩 부어 있더라구요. 집안에서 나씨가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게 들리데요. 술에 잔뜩 취한 채로 나와서는 노모를 확 밀어제치고 제 얼굴 앞에서 주먹을 휘둘러 대는데, 나 원 참. 그러더니 '내 집에서는 내 맘대로 할거니까 내버려두라구!'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문을 쾅 닫아버리는 겁니다.

목사님,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애비라는 사람이 자식을 병원에 갈 정도로 패다니, 게다가 이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에요. 이대로 가만이 앉아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 같은데요. 게다가 그 집도 우리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까?

목사님, 나씨와 이야기 좀 해보세요. 혹시 목사님 말씀은 들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하지만 제가 얘기했다고는 하지 마세요. 나씨와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요."

박씨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나는 전화가 끊기 뒤에도 오랫동안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그만큼 그 소식은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박씨의 말은 과정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나씨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그렇게 이성을 잃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그의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나씨는 작년에 큰 양계장을 짓느라고 돈을 많이 꾸어야 했다. 그러나 나씨네가 양계장 때문에 큰 빚을 졌다는 사실을 아는 마을 사람들은 없었다. 그런데 다른 문제가 있는 걸까? 그렇게 성실한 사람이 지난 주에는 왜 그리 술을 많이 마셨을까? 나씨는 내 앞에서는 자신의 어려움을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새벽기도회 후에도 그저 몇 마디 인사말만 나누곤 했다.

그런데 이 집에 숨겨져 있던 불행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다. 나씨 집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단지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 때문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집 식구들이 이런 문제를 털어놓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교회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설교와 성경공부에서 그렇게 여러 번 이야기했고 구역예배에서도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얼마나 많이 이야기했던가!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한 가족이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도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이렇게 서로 돌보지 못하다니!

나는 나 자신과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크게 실망했다. 우리는 얼마나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가!

확성기에서 다시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찬송가가 끝났다. 나는 터벅터벅 걸어서 교회로 갔다. 장마철의 끈끈한 바람이 내 얼굴로 확 불어왔다. 새벽기도회에 친밀한 듯이 모여 있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해야한단 말인가?

나는 강대상으로 올라갔다. 모두들 기대하는 마음으로 강대상을 올려다보며 좋은 말씀을 듣게 되기를 기다렸다. 나는 그들의 이기적인 생각에 화가 났다. 새벽부터 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전화로 들은 이야기를 간단히 말했다. 구체적인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나는 교회에 모인 교인들 앞에서 이 주간에는 심방을 일절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교인들을 그대로 둔 채로 나는 혼자 내 방으로 돌아와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내가 미처 묻기도 전에 말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목사님, 어떻게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제 이야기를 하실 수 있습니까? 저는 그래도 그렇게 심하게 자식을 때리지는 않는다구요."

"제가 말한 사람은 형제님이 아닌데요."

우리는 두 사람 다 어안이 벙벙해져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럼 저희 동네에 그런 사람이 또 있단 말씀입니까?"

"이리 들어와 보세요.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이야기해야 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털어놓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실제 생활에 부딪쳤을 때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나님의 풍성한 용서 가운데 일부분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베풀기 위해서는 얼마나 힘들게 씨름해야 하는지!

이씨가 말했다.

"예배드리러 함께 모여 앉은 우리의 모습은 마치 죄의 실로 짜놓은 옷감 같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어요. 그래서 교회 밖으로 한 걸음만 나와도 다시 싸움이 시작되고 괴로운 일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우리 부부 사이나 식구들 사이에서도 그랬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아들에게 너무 심했어요. 너무 화가 나는 바람에 하나님은 자격 없는 저를 그토록 긍휼히 대해 주셨는데 저는 아들에게 그렇게 못했습니다. 마음으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 그런 짓을 하게 됩니다. 저는 몰매를 맞아도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씨는 절망감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형제님, 저도 형제님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근심을 내려놓았다. 이씨는 돌아갔고 내 마음도 잔잔해졌다.

그렇지만 나씨 일을 어떻게 해야 되나?

그 이튿날에는 나씨도, 그 가족도 보이지 않았다. 새벽기도회에도 나오지 않았고 예배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보기가 머무나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우리는 그들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좋은 생각이 하나 따 올랐다. 그날 어린이 성가대 시험이 있었는데 우리는 시험을 치르는 대신 곧장 나씨 집으로 행진해 갔다. 우리는 가면서 힘차게 노래를 불렀다. 동네사람들은 우리가 대체 어디로 가는지 구경하고 있다.

"오랜만입니다. 어린이 성가대원들이 형제님을 방문하고 싶어해서 이렇게 왔습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나씨의 어두웠던 얼굴에 갑자기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알았다. 이것은 그의 가족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특별한 방문이었던 것이다.

"어서 들어오거라!"

그는 꼬마들을 맞이했다. 금세 작은 상 몇 개가 놓이고 맛있는 떡과 참외가 차려졌다. 우리는 다시 우리와 하나가 된 나씨 집에서 먹고 울고 노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15.
하나님의 씨는 자란다


"
목사님, 계셔유?"

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여기 있습니다. 들어오세요!"

나는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문을 살짝 열리더니 할머니 한 분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 할머니세요? 어서 들어오세요."

유씨 할머니는 고무신을 벗고 방으로 들어왔다.

"목사님, 어떻게 지내셔유?"

할머니는 공손하게 절을 하며 내 안부를 물었다.

"잘 지냅니다. 여기 좀 앉으시지요."

나도 절을 하며 방석을 권했다. 할머니는 방석에 앉아 조용히 기도를 드리더니, 내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목사님, 제 안경 좀 봐주셔유. 귀 가장자리가 영 아프구만유."

"어디 볼까요?"

나는 할머니의 안경테를 약간 구부려서 간격을 넓혀드렸다.

"이제 한번 써보세요."

안경은 편하게 잘 맞았다. 할머니는 수줍은 듯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이구, 목사님이 여기 안 계셨더라면 어쨌을까 몰러!"

할머니는 손가락이 끊어져 나가고 없는 두 손을 무릎 사이에 감추었다.

"목사님, 절대 여기를 떠나지 마셔유. 목사님이 떠나시면 우리는 죄다 목자없는 양떼가 되버릴 거구만유."

할머니가 이렇게 부탁하시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할머니는 문둥병에 걸린 후부터 여든일곱이 된 지금까지 미움과 배척만 당해 왔던 것이다. 할머니의 가족들에게 할머니는 더 이상 세상에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평소에 궁금히 여기던 것을 물어보았다.

"할머니, 제가 할머니를 알게 된 것도 벌써 몇 년이 되었네요. 한 가지 여쭈어 보아도 될까요?"

"그러믄유."

"할머니는 언제 예수를 믿게 되셨습니까?"

할머니는 그때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가 스물두 살 때 어떤 일본 목사님의 전도를 받았구만유. 그 목사님이 무슨 말을 할라치면 일본 사람들이 목사님을 내몰곤 했지유.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못할 짓도 많이 했지만 그 목사님은 참말로 좋은 분이였시유. 일본 군인이 못된 짓을 할 때마다 어쩔 줄을 모르셨지유."

할머니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는 먹을 것이 귀했지유. 쌀은 구경하기도 힘들었으니까유. 그때 생각하면 요즘은 진짜 좋은 시상이지유."

할머니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어떤 일본 목사님 한 분이 오래 전에 이 할머니의 마음에 하나님의 씨를 뿌렸구나. 지금 할머니는 나이든 사람이건 젊은 사람이건 할 것 없이 모든 영호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으로 존경받는 분이 되었다.

할머니는 아침 10시만 되면 교회에 기도하러 가기 위해 작은 집을 나선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자신의 문제인 양 가슴에 품고 오래오래 기도하신다.

요즘 우리는 사오십 명 가량의 노인들을 보살필 수 있는 양로원을 세우려고 한다. 문둥병이든 노인들은 돌보아줄 가족 하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목돈이 없이도 일을 시작해줄 건축 회사를 찾고 있다. 영호에 사는 사람들은 비록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지만 큰 믿음을 가지고 있다.

영호에서는 하나님의 씨가 자라고 있다. 척박한 토양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는 매일 새벽 4시에 새벽기도회로 모인다. 이 시간에 가장 중요한 일은 기도이다. 형제 한 분과 자매 한 분이 기도하고 나면 보통 내가 설교를 한다. 물론 찬송도 한다. 겨울에는 찬송이 특히 중요하다. 우리 교회에는 난방시설이 없는데 힘차게 찬송을 하면 몸이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많은 교인들이 새벽기도회에 온다. 이제 그들은 새벽기도회를 빼놓은 하루 생활리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새벽기도회에서는 이틀에 한 번씩 학생 성가대가 찬양을 드린다. 학생들은 영한대역 성경을 보면서 성경구절을 외운다.

주일 아침이면 어린이예배를 먼저 드리고 11 대예배를 드린다. 남녀 성가대원들이 멋있는 가운을 입고 매주 찬양을 드린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교회는 벌써 꽉 차 버린다. 우리 교회에는 의자가 없기 때문에 모두들 방석을 깔고 앉는다. 시간이 되면 교회탑에 설치한 확성기로 녹음된 찬송가가 울려퍼진다. 그것이 교회종을 대신해준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우리는 일종의 '희망곡'을 부른다. 사람들이 자신이 부르고 싶은 찬송가 장수를 큰 소리로 말하면 반주자와 성가대가 선창한다.

교인들 대부분은 2시 오후예배에 참석하고 예배가 끝나면 구역별 성경퀴즈대회를 연다. 이렇게 매주 점수를 매겨서 연말에 합산하고, 그 중에서 제일 성적이 좋은 구역에게 상을 준다. 주일 저녁에는 청년예배가 있다. 이 예배 때에는 전도사님이 설교를 한다. 교회에 이렇게 집회가 많은데도 내가 기쁨을 잃지 않는 것은 내 곁에 동역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전도사님, 장로님, 집사님, 주일학교 교사, 구역장 등 여러 분들이 교회를 섬긴다. 교회에 속한 사람은 남녀노소 할것없이 함께 일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뿌리신 씨를 거두는 사람들이다. 평일에는 일터에 나가서 각자 일을 하지만 저녁 시간과 주일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따로 떼어 놓는다.

매달 마지막 주일에는 재미있는 행사가 있다. 성격암송대회에서 성경을 가장 많이 외우는 암송왕이 탄생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암송왕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할 뿐 아니라 이 행사를 아주 재미있어 한다.

수요일 저녁에는 교회에 모여 성경공부를 한다. 또 목요일 저녁에는 자매들의 모임이 있다. 집사님들의 모임이라고 해도 좋겠다. 부인들은 우리 동네에 사는 노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하고, 각자 할 일을 분담한다. 금요일에는 다섯 가정씩 한구역으로 모여 구역예배를 드린다. 구역은 우리 교회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기초단위이다.

영호 사람들에게 교회는 두말할 나위없이 중요한 존재이다. 그들은 삶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하나됨'을 교회에서 경험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호도 많이 변했다. 낡은 초가집들이 헐리고 새 집들이 들어섰다. 사람들은 밭일뿐 아니라 양돈 사업도 한다.

"우리 자식들은 우리보다 잘 살아야지요."

동네 어른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영호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교회 지붕에 올라가 석양빛에 빛나는 우리 마을을 보면서 이곳을 이 세상 어느 곳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에는 하나님의 씨가 자라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들판이 있는 것이다.






16.
크리스마스에 생긴 일


아이들은 호기심이 많다. 아이들은 한결같이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한다. 흔히 가족들 중에 교회에서 먼저 나오는 사람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집에 돌아가서 교회에서 들은 하나님 이야기나 예수님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열심히 대단한 선교사인 셈이다. 아이들은 이웃 동네에 가서도 선교사 노릇을 한다.

영호에서 맞이한 첫 크리스마스 때의 놀라운 일을 나는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오기 몇 주 전부터 교회 아이들은 동네 방네 다니면서 말했다.

"얼마 있으면 예수님 생일인데 그때 생일잔치를 할거야. 목사님이 우리를 전부 초대하신대!"

그 말을 들은 이웃 동네 아이들은 귀가 번쩍 뜨였다.

"먹을 것도 주냐? 부처님 오신 날에는 떡을 받았는데."

아이들은 친구들의 요구를 척척 받아주었다. 그들은 큰 소리로 나팔을 불었다.

"우리 목사님 말씀이 예수님은 모든 걸 알고 계신대. 그러니까 예수님 생일에는 우리 모두 배부르게 밥을 먹을 수 있어."

아이들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때문에 번번이 난처한 상황에 빠지곤 했다. 도대체 어떻게 크리스마스 전날까지 그렇게 많은 쌀을 마련할 수 있다는 말인가?

12 24일은 무심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먹을 것을 아끼고 아껴서 쌀 반 자루는 어떻게 마련했지만, 그것말고는 쌀 한 톨도 얻지 못했다. 첫 크리스마스를 이렇게 맞이해야 하다니!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생기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려고 애써 왔다. 그러나 . 공기에 밥을 가득 담아 쪼르륵 소리나는 아이들의 주린 배를 채워줄 수만 있다면, 너무 배가 불러서 아무 말도 못할 정도로 실컷 먹게 해줄 수만 있다면 .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 되었다. 어른 아이 할것없이 예배당에 빽빽이 끼어 앉았다. 방석은 벌써 다 동이 난 지 오래였다. 세 시간 동안 자리를 뜨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극, 합장, 성탄절 이야기 이 모든 것이 어른과 아이들을 사로잡았다. 영호에서 맞이한 첫 크리스마스, 그것은 그야말로 생일잔치였다! 그러나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분명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어른들의 얼굴에서도 푸짐한 생일상의 기대를 읽을 수 있었다. 그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식은 땀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들이 동네방네 다니면서 "예수님은 모든 걸 알고 계신대"하고 말할 때 "하지만 목사님은 그렇지 못해"라는 말을 빠뜨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웃 동네 아이들은 예상보다 많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소원과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내 신학 속의 예수님은 과연 이 난처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실 것인가?

나는 뜨거운 감자를 뱉어버리듯이 내 고민을 밀어내버렸다. 먹든지 말든지, 결국 예수님 생일이니까 난 모르겠다. 잔치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다.

예배를 마치면서 나는 짧지만 분명한 기도를 드렸다.

"예수님, 당신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는 저녁에도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더 이상 없었다.

숨소리까지 들릴 듯이 조용했다. 몇 초가 지났을까, 아니면 몇 분? 내게는 영원처럼 아득한 시간이었다.

그때였다.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떤 남자가 서 있었는데 나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더니 나를 보고서는 교회가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말했다.

"목사님, 쌀을 세 가마니 가져왔는데 어디에 두면 좋을까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감사의 말이 튀어나왔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내 말에 아멘으로 응답했다.

예수님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이 계실까? 예수님은 참으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그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생각에 잠긴 나를 깨웠다.

"서울에서 오는 길입니다. 홍콩에서 주문한 기계가 서울로 왔거든요. 목사님, 홍콩에 있는 제 친구 아시지요? 그 친구가 목사님과 목사님 교회에 크리스마스 인사를 전하면서 이 쌀을 살 돈을 보냈습니다. 마침 사업상의 일로 이 근방에 올 일이 있어서 가져왔지요. 쌀이 택시 트렁크 안에 있는데, 누가 좀 옮기는 걸 도와주시겠습니까?"

사람들의 말문이 동시에 열렸다. 모두들 기쁨에 넘친 나머지 작은 교회당이 들썩들썩 했다.

정말 놀라운 크리스마스였다!

박 장로님은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 위해 집으로 달려갔다. 그 집 아궁이가 동네에서 가장 컸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밥공기와 수저를 챙기려고 집으로 달음질쳤다. 예배당 바닥에는 서둘러 작은 잔칫상이 차려졌다.

한 시간후, 우리는 모두 크리스마스 잔칫상에 둘러 앉았다. 공기에 소복이 담긴 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우리 아이들은 예수님이 자랑스러워서 마구 으시대며 신바람을 냈다. 그리고 행여나 이웃 동네 아이들에게 질까 싶어서 밥그릇을 부지런히 입으로 가져갔다.






17.
어떤 축구 선수


문둥병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이 생긴다. 하지만 이 무서운 병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스포츠 시즌이 될 때마다 주목받던 청년이 있었다. 스무 살의 그 청년은 몸이 민첩하고 공 다루는 솜씨가 대단했으며 골을 잘 넣는다는 평판을 얻고 있었다. 그는 대학축구부원에서 청소년 국가대표선수로 발탁되었고, 주요멤버로 선정될 것이 확실했다. 축구계에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는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

어느 날 연습이 끝난 후 그는 무릎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훈련을 심하게 한 탓이려니 생각하고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삼일 후면 통증이 가라앉겠지. 그러나 스스로 애써 안심시켰던 것과는 달리 고통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선수 생활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경기 도중에 다른 선수와 교체해야만 했다. 그는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절뚝거리며 퇴장했다.

"이상한데요. 이틀 후에 다시 오세요."

의사는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무릎뼈 아래 있는 두세 개의 희끄무레한 반점에 주목했다. 그러나 살갗을 약간 떼어내는 까닭을 청년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지금으로서는 통증의 원인을 명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의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교수님, 축구를 못 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요? 전 축구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청년은 웃어보이려고 했지만 얼굴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의사는 청년이 원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후에 애써 웃으면서 청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위로 했다.

그러나 청년은 위로를 받지 못했다. 의사의 말은 곧 다시 축구선수로 뛸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는 들리지 않았다.

이틀 후, 의사와 청년은 착잡한 심정으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년은 생각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나에게는 축구가 전부인데 . 의사는 의사대로 생각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내 말은 저 청년의 삶을 뒤바꾸어 놓을 텐데 .

"선생님, 제 병명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지요?"

청년은 마침내 마음의 준비를 한 것 같았다.

"이틀 전에 피부를 떼어냈던 걸 알지요? 검사 결과 나병 병원체로 판명되었습니다. 병이 이미 많이 퍼졌어요. 다음 단계로 진전되기 전에 빨리 치료를 해야 ."

"잠깐만요. 지금 제가 문둥병에 걸렸다는 말씀입니까? 저는 더러운 빈민촌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디서 그런 병을 얻었다는 겁니까?"

청년은 분노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벌써 몇 년 전에 감염되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의사는 설명하려고 애썼다.

"가족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아버지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누이 둘을 판잣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제가 데려왔습니다. 좋은 아파트가 생겼거든요."

그 젊은 축구선수의 눈은 기억 속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아득한 기억 저편으로 골목에서 공을 차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기저기 폐수와 더러운 물들이 고여 있었고 누추한 함석지붕집들 사이로 개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떼지어 싸움질을 하거나 더러운 데서 뒹굴었다. 그러나 그것은 벌써 오래 전 일이다. 이제는 모든 것이 변했다.

"어쨌든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지금 바로 소록도로 가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오래 끌면 안됩니다! 되도록 빨리 가족들을 떠나야 합니다. 필요한 것들은 내가 준비할 테니 삼일 후에 다시 오십시오."

의사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는 정신이 나간 듯이 병원을 나와 달음질쳤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관중의 환호를 한 몸에 받던 축구선수가 아니던가! 그런데 이제 문둥이가 되어 섬으로 추방되어야 하다니!

청년이 그렇게 병원에서 나간 지 닷새가 지났다. 의사는 계속 기다렸지만 헛일이었다. 그 청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그날 아예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던 것이다.

학교에 있는 그의 책장에는 책들이 그대로 꽂혀 있었다. 축구복도 잘 개켜져 있었다. 그러나 축구화는 없었다.

청년의 어머니는 친구와 교수님들에게 그의 행방을 수소문해 보았다. 그의 소식을 알고 있는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 친구가 '난 지금 떠날거야. 그리고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어'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냥 웃어 넘겼지요. "

어머니는 터미널에도 나가 보았다. 그러나 버스를 타고 가는 평범한 청년을 주의해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엾은 어머니는 여기저기 버스를 타고 다니며 운전사들과 승객에게 물어 보았지만 아들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이런 식으로 아들을 찾아다니던 어머니는 광주에서 내려가게 되었다. 광주 버스터미널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머니는 어느 가게에서 마른 오징어를 몇 마리 샀다. 배가 고플 때에는 구운 오징어를 씹는 것이 최고였다. 어머니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한 번만 더'라고 생각하며 가게 아저씨에게 아들의 사진을 내밀었다.

"혹시 이렇게 생긴 사람 본 적 있으세요?"

아저씨는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 봤어요. 청소년 국가대표선수 아닙니까? 지난 번에 저희 가게에 왔길래 혹시 광주에서 시합이 있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냥 고개를 돌리고 가버리더라구요. 저는 그냥 우스운 사람도 다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 사람을 찾고 계십니까?"

"이제야 그 애 소식을 듣게 되는군요. 제가 바로 그 애 에미입니다. 혹시 그 아이가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아주머니가 참 안되셨군요.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누구나 그런 식으로 행동할 때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는 법이거든요."

아저씨는 생각하는 듯한 시선으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이유가 있지요. 그 애는 식구들을 생각해서 집을 나간 거예요. 사실은 문둥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고 ."

어머니는 간신히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하지만 누구에게든지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이리 들어오세요. 아들한테 가게를 보라고 하고 우린 저 안쪽에서 이야기합시다."

가게 주인은 어머니를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어머니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한번 해보세요. 잘 되기를 빕니다!"

인정많은 아저씨는 작별인사를 했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바닷가에 서서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소록도가 있겠지. 거기 그 애가 있을거야 ."

어머니는 다음날을 위해 용기를 냈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는 첫 배를 타고 소록도에 갔다. 사무실 사람들은 어머니를 도와주기 위해 여러 가지로 애를 썼다. 어머니는 환자 명부를 찾아보았다. 아들이 있었다! 여기에서야 아들을 찾아헤매던 긴 여정이 끝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어떤 여자분이 어머니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어머니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며 아들을 기다렸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청년 한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들어왔다. 눈에는 검은 안경을 끼고 있었다.

"얘야!"

어머니가 아들을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나 아들은 어머니를 밀쳐냈다.

"엄마, 이러지 마세요! 난 문둥병에 걸린 몸이라구요. 그만 가세요! 여긴 뭐하러 오셨어?"

"문둥병에 걸렸어도 넌 내 아들이야."

"절 잘 보세요. 여기 서 있는 것은 예전의 엄마 아들이 아니에요."

아들은 천천히 안경을 벗었다.

"제 얼굴은 끔찍하게 일그러졌어요. 저는 흉한 병신이라구요!"

그는 지팡이를 보여주었다.

"이 섬에 있는 사람들을 보세요.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가족들에게는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에요. 모두 우리를 혐오스럽게 쳐다본다구요."

아들은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

"얘야,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 문둥병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지 못하도록 하나님께 기도드리마."

이것은 아들이 들은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절뚝거리며 자기 거처로 돌아갔다. 어른이나 아이 할것없이 문둥병자들은 모두 거기에 모여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의 부고(訃告)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며 흘릴 눈물이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평생 흘릴 눈물을 이미 다 써버렸다.

청년은 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 사람들이 그를 발견해서 위를 세척했다. 두 주 동안 세 번이나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그의 아버지뻘 되는 노인 한 분이 자리에 누운 그를 찾아왔다.

"죽기에는 너무 늦었어. 이젠 한번 살려고 해보게나. 내가 도와줌세!"

지난날의 스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청년에게 삶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워 주었다. 이 나이든 문둥병자가 지니고 있는 희망에는 한 가지 비밀이 감추어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었다.

노인과 청년은 일주일 내내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삶에 대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해서, 문둥병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생기는 사람들 사이의 거리감에 대해서, 가까이 지냈던 모든 이들에 대한 그리움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청년은 아버지 같은 노인과 친구처럼 지냈다. 이전에는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그는 바른 길을 찾았다. 예수를 믿는 그의 믿음은 날마다 자라갔다.

그가 축구선수로서 가졌던 희망은 문둥병으로 무참하게 깨졌고 삶에 대한 증오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그는 문둥이들의 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았다. 그리고 그속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되었다.






18.
진짜 문둥이


청년들의 수가 점점 많아졌다. 학생들은 이웃 마을에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 이야기를 좀더 들으려고 우리 마을에 찾아오는 청년들이 생겼다.

어느 주일 오후, 청년예배를 인도하고 있을 때였다. 몸집이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 한 사람이 예배당으로 들어왔다. 그는 신도 벗지 않은 채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그는 앉아있던 청년들을 훑어 보더니 한 청년의 멱살을 움켜쥐고서는 한 마디 말없이 그 빈약한 체격의 청년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람들은 마비된 듯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두 사람의 뒤를 쫓아나갔을 때까지도 예배당의 두 문짝은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청년이 더 맞지 않게 말리려고 했다. 나는 아버지가 자식을 때리는 이런 거친 폭력을 지겹도록 많이 보아 왔다. 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었을 때 그 남자의 주먹이 날아들었고 나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나는 멍한 정신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나의 행동에 놀라고 자신의 주먹이 내게 명중한 것에 놀란 탓인지 그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노여움으로 이글거렸다.

"내 자식이 문둥이들과 어울리다니, 절대 안될 말이지! 저 놈은 문둥이가 아니야. 내가 왜 이런 더러운 곳에서 저 자식을 찾아다녀야 하냐구!"

그는 고약하게 내뱉었다.

나는 내 검정색 단벌 양복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천천히 일어났다. 상처가 약간 났다. 나는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

"여기 문둥이가 어디 있습니까? 이 마을에 더러운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당신이야말로 문둥이입니다!"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까 그의 주먹이 내 얼굴에 명중한 것처럼 내 말 또한 그의 마음에 명중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아무말 없이 돌아서더니 아들을 밀쳐내고 돌아가버렸다. 그제서야 그의 주먹이 다시 날아올 수도 있었으리라는 생각에 식은 땀이 흘렀다.

그가 돌아가고 난 후에야 나는 청년들은 우리가 한 말을 모두 들었다. 이제는 예배를 마저 드리기 위해 예배당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긴장감이 돌았다. 모두들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고개를 숙인채 집을 향해 무거운 발검음을 돌렸다.

나는 집에 돌아와 글을 쓰면서 낮의 일을 애써 잊으려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틀림없이 다시 올 것이다. 나는 그가 난폭하게 굴 것이 무서워서 책상 뒤에서 몸을 움츠렸다. 그가 정말 찾아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데 정말 그가 왔다. 11시가 지난 지 얼마 안되었을 때였다.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열렸다. 그의 손에 쥐어진 몽둥이를 보고 나는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며 떨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가 나에게 앙갚음을 하러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몽둥이를 문 옆 기둥에 기대어 놓고 신을 벗고 들어왔다.

"목사님, 낮에는 죄송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는 방바닥만 내려다 보면서 침묵했다.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목사님, 제가 문둥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힘이 장사 같은 그 남자가 왜소한 내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그는 그제서야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부모님은 문둥병자들이었다. 그가 태어난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 단 한 가지 방법은 가능한 빨리 아이를 건강한 가정으로 입양시킨 것이었다.

아이는 자식이 없는 어느 가정에 아무도 모르게 입양이 되었다. 그들은 친자식처럼 아이를 길러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아이들과 싸우다가 '줏어다 키운 애'라고 놀리는 소리를 들은 아이는 울면서 부모님께 달려갔다. 부모님은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자신도 문둥병에 걸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늘 불안했다. 그러면서 문둥병과 관련된 것은 무조건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미워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청년기에 집을 떠나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도시로 갔다. 그러나 문둥병은 벗을 수 없는 굴레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실제로 발병한 것도 아닌데도 그는 그 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아내에게도 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직업상의 이유로 영호근처로 이사를 온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안고 우리 마을 사람들과 싸웠다. 그는 이웃들을 부추겨 우리 마을 사람들을 증오하며 대적하게 만들었다. 우리 마을 아이들을 볼 때마다 돌을 던져 쫓아버리기도 했다. 문둥병자 부모를 가진 아이들의 심정을 그토록 잘 알면서!

그는 바로 자기 자신의 운명과 싸우고 있었다. 겉에 드러나는 문둥병의 표시는 없었지만 속마음은 친부모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비밀이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찢기워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문둥병이었다. 그런데 자기 아들이 우리 마을에 갔다는 말을 듣게 되자 이성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저녁 무렵에는 낮에 벌어진 일이 마을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는 마침내 아내에게 마음을 털어놓았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호에 있는 목사를 찾아가보라고 용기를 북돋아준 사람은 바로 아내였다.

"목사님, 정말 불안합니다. 이제 우리 가정을 제 과거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것을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식구를 따돌리고 자식들도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게 되면 어떡합니까? 그렇게 된다면 그건 전부 제 잘못입니다."

"영호 사람들은 형제님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자신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도, 우리 자식들의 장래도 절대 포기하지 않지요. 우리는 한마음으로 살고 있고 바깥 사람들과도 유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우리의 업보인 문둥병 때문에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께 형제님의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받아들여 주기를 기도하거나 우리가 다시 건강하고 아름다워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문둥병자라는 운명을 짊어진 우리와 화해하신 후로는 많은 것이 변했지요.

형제님도 형제님의 삶과 화해하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될 겁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도와주실 겁니다."

그의 마음에서 무거운 돌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아들과 함께 우리 교회 청년들을 찾아왔다. 이제 그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 그리고 문둥병자들과의 싸움을 그치게 된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쏟아부어 주시는 평화를 발견해 나가기 시작했다.






19.
청소부 아주머니와 기적에 대한 설교


우리는 뼛속 깊이까지 피곤했다. 눈꺼풀은 무거웠고 주변의 시끌벅적한 소리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노곤했다. 독일에서 온 친구와 나는 광주 고속버스터미널의 대기실 복판에 있는 긴 의자 구석에 비좁게 끼어 앉아 있었다.

버스가 출발할 때마다 소음은 더 심해졌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빠르게 소지품을 챙겨 들고는 버스를 타러 우르르 몰려갔다. 대기실은 사람들이 버스를 타면 잠시 조용해지는가 싶다가 잠시 후에는 새로 온 사람들로 다시 북적거렸다.

친구와 나는 전혀 이야기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다. 우리는 지난 주 내내 이 모임 저 모임을 돌아다녔다. 성경 공부 모임과 청년부 모임, 공장에서 예배드리는 청년들의 모임에서부터 산에 있는 기도원까지, 그리고 새벽예배부터 저녁예배에 이르기까지 쉴새없이 돌아다녔다.

그러나 우리의 주제는 언제나 영호의 양로원 설립 계획으로 돌아오곤 했다. 우리는 순례자 같았다. 몇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발로 뛰어다니고서는 냄새 나는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기도 했고, 공기조절기가 설치되어 있는 고급 리무진을 타기도 했다. 우리는 극에서 극으로 옮겨 다녔다. 어느 교회 장로님의 초대로 값비싼 호텔 뷔페에 가기도 하고 길거리의 작은 식당에서 서둘러 국수를 먹기도 했다. 또 유럽의 성당만큼 큰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가 하면 광주에 있는 작은 이발소의 한구석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우리가 이런저런 걱정거리에 눌려 기진맥진해서 앉아 있을 때 누군가 우리를 옆으로 밀치는 사람이 있었다. 청소부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앞에 팽개쳐 놓은 채 담뱃불을 붙이고 있었다.

자욱한 담배 연기 때문에 눈이 매웠다. 연기 너머로 수건을 두른 머리와 주름진 이마, 상처 자국이 있는 두툼한 뺨이 보였다. 이가 몇 개 빠져 있었으며 코는 납작했다. 아주머니는 나와 내 독일 친구를 위아래로 유심히 훑어 보시더니 내게 웃어보였다. 아주머니의 나이는 얼른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친구가 갑자기 인사를 했다.

"워매, 이 사람 한국말 허벌나게 잘 허네잉!"

아주머니가 얼른 인사를 받았다. 외국인이 한국말로 인사하는 것이 신기해서였을까? 대화는 쉽게 이어졌다. 우리는 손짓 발짓을 하거나 내가 통역을 해가면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아주머니의 남편은 산업재해로 세상을 떴다. 그때부터 아주머니는 터미널 청소부로 일하면서 아이들을 키워왔다. 식구들은 터미널 근처에 있는 방 한 칸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가 아주머니를 만났을 때는 아주머니가 담배를 한 대 피우며 쉬는 시간이었다. 아주머니는 터미널의 넓은 공간을 이리저리 청소하러 다니느라 피곤한 다리를 쉬고 있었다.

나는 아주머니가 곧 우리의 직업을 물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직접 묻지는 않아도 돌려서라도 물어보겠지. 하기는 물으면 안될 이유는 없지. 나는 아주머니가 묻기를 기다렸고, 마침내 아주머니는 내가 작은 시골 교회의 목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는 불교신자여요."

아주머니가 말했다.

"근디 절에 안 간지도 오래 됐어요. 초파일날 부모님 따라 갔던 것이 마지막이라잉."

아주머니가 살던 집 지하에 교회가 있었다. 아주머니는 저녁에 퇴근할 때 지하에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소리를 자주 들었다. 호기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감히 들어가보지는 못했다.

우리는 교회 사람들이 무얼 믿고 있는지 아시냐고 물었다.

"예수 믿는다는 건 알지라. 그리고 그 목사님이 아픈 사람한테 손 딱 엉그믄 싹 나서분다드만요. 그래서 한번 가보고 싶기는 헌디. 내가 다리 땀시 고생을 많이 혀서요. 한번 가보믄 어쩌까잉?"

아주머니가 거리낌없이 물었다. 나는 그 말을 친구에게 통역해 주었다. 우리는 어이가 없어서 서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목사가 기적의 치료자라고? 그것은 목사 본연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기적적으로 병 고치는 일을 기독교의 표징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주머니에게 더 이상 믿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었다. 영호행 버스가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스에 탄 후에 내가 친구에게 말했다.

"자네도 보았지? 기독교 신앙에서 아주머니가 희망을 거는 것은 기적적인 병고침이라구. 아주머니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기적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 안타깝군. 영호 식구들에게도 이 이야기를 해야겠어. 자네가 이런 설교를 한 번 했으면 하는데, 내일 예배 시간이 어떨까?"

우리는 밤늦도록 설교문을 작성했고, 나는 독일어 문장을 우리말로 옮겼다. 우리 교인들은 이 설교를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영호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 4 46절에서 53절까지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본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고향 갈릴리에 있는 가나로 오시는 길입니다. 가나는 헤롯 대왕의 아들인 로마 왕 헤롯 안티파스의 다스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나의 한 혼인잔칫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편 게네사렛 호숫가에 있는 도시 가버나움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왕의 신하가 한 명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중한 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소문에 듣던 예수님이 가나에 오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가나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 자기 집에 와서 아들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어떤지 직접 겪어보셨기 때문에 여기에서 ""라고 하지 않고 "너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임을 증명해 줄 만한 표적과 기사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증명이 안된다고 판단하면 메시아로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왕의 신하에게는 그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메시아든지 아니든지 아들만 구해주면 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같이 가주실 것을 또한번 간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같이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라는 말씀만 하십니다.

여러분이 누구에게 무엇을 부탁했는데 실제로 해주지는 않고 말만 하면 얼마나 실망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고, 집에 가서 아들이 실제로 건강하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와 그의 가족들은 모두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제목을 정한다면 '갈릴리에서 일어난 기적적인 치유'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건 아주 옛날 얘기야. 요즘은 그런 일이 생길 수 없어' 하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또는 '왜 요즘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지? 내 아이가 건강해질 수만 있다면 내가 더 쉽게 믿을텐데'하고 말씀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 2절에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이렇게 단정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어떤 사람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했을까요?

제가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사막이 어떤 곳인지 아시지요? 어떤 사람이 사막에 서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몇 분 동안 꼼짝하지 않고 저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물도 먹지 못한 채 며칠이 지난 터라 그의 혀는 입천장에 딱 달라 붙어 있었습니다. 그는 생각합니다. '지평선 너머에 보이는 저것은 무엇일까? 혹시 물이 아닐까?' 그의 마음은 그곳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무언가가 그를 가로막습니다. 바로 그의 이성입니다. 그의 이성은 계속 그에게 말합니다. '저기 저 은빛나는 띠는 물이 아니라 신기루야. 그러니까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마.' 그는 이성의 판단에 따라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바로 사막에 서 있는 이 사람과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없고 하나님도 없으며 믿음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방향을 돌리고 맙니다.

다른 예를 또 들겠습니다.

창밖에 월출산을 한번 보십시오. 누군가 그 정상에 올라가려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길에 서 있는 안내표지판들은 각각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으로만 보아서는 어느 길이 얼마나 험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길은 끝까지 보이지 않고 봉우리 뒤편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마침내 그는 한 길을 선택해서 서둘러 출발합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망설이기 시작합니다. 그 길에는 자갈이 너무 많고 경사가 급합니다. 그는 멈추어서서 이리저리 생각해보다가 마침내 돌아섭니다. 그러면 다른 길은 좀더 쉬울까요? 그러나 어떤 길을 선택하더라도 매번 망설이게 될 것입니다. 그는 어느 길로 끝까지 가야 할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합니다.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도 그와 같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무엇을 믿는지 보면서 그 사람들을 따라가고 싶어합니다. 믿음의 길은 그들에게 너무나 어렵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이 그 길을 함께 가주실 텐데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광야에 샘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사막에서 목말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상에 올라가는 길을 찾기가 어려워서 산기슭에 서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주며 우리가 정상에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삶과 죽음이 문제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무엇보다 먼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아들이 죽느냐 사느냐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아버지가 예수님의 말씀을 정말 믿는지에 대해 언급합니다.

결국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은 무엇으로 결정됩니까?

우리 예수님을 찾읍시다! 예수님을 신뢰합시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릅시다!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을 찾아가십시오!

오늘 말씀에서는 아픈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먹을 것을 찾고 일을 찾고 보호와 사랑을 찾고 신을 찾습니다. 성경은 "찾으면 찾을것이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 경험을 돌이켜볼 때 우리가 찾는 것 대부분은 한낱 동경으로 끝날 때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발견됩니다. 또한 하나님은 갈릴리에 사는 이 왕의 신하와 그 아픈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여, 하나님을 찾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알리십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많은 말을 들으며 많은 소식과 광고와 약속들을 듣습니다. 우리의 귀는 완전히 노출되어 있습니다. 눈은 감을 수 있지만 귀는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앞에서 눈은 감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귀를 뚫고 들어옵니다. 말씀은 항상 기적보다 앞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말씀은 예수님이 왕의 신하에게 주신 것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셨던 것은 지금 볼 수 없지만 그 말씀은 오늘도 성경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그의 말씀은 효력을 잃지 않았고 아직도 계속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병든 아이의 아버지는 내리쬐는 뜨거운 볕을 뚫고 30킬로미터를 달려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가나' '갈대'라는 뜻입니다. 가나로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은 그가 붙든 마지막 지푸라기 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거기에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구하십시오! 그러면 얻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러 가지로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우리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우리의 이성은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또 우리는 가슴으로 거부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보다 다른 것들을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예수님께 강한 거부감을 느낄 때 우리는 차라리 예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사막에서 길잃은 사람의 예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지평선 너머 보이는 것이 물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갈증으로 목구멍이 타오르는데도 거기에서 몸을 돌이켜 반대 방향으로 갔습니다. 그는 눈 앞에 구원을 두고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몸을 돌이켜 반대 방향으로 간다면 우리는 결코 삶의 갈증을 해결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삶은 사막의 죽음과 같습니다.

월출산에 올라가려는 사람의 예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가는 길마다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상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믿음 적은 것을 도와주소서!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에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를 도와주소서!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믿음의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기 집에 와주십사는 신하의 간청을 예수님이 거절하고 혼자 돌려보냈을 때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이 성경을 읽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참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아닌지 알고자 하는 마음이 왕의 신하나 우리에게 있는지가 드러나는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에게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절박한 상황에 빠져서 좌절하고 있는 한 인간을 만나 주셨고, 그에게 속마음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왕의 신하는 그때까지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기보다는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사람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우리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그 신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한 것처럼 보이는 이 메시아, 곧 기적의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언제나 기적을 행하지는 않는다는 그 메시아에게서 등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갔습니까? 그가 예수님을 신뢰한다면 과연 그의 문제가 풀릴까요? 그의 믿음은 그의 시야보다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까요? 예수님과의 만남에는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을까요? 그의 믿음은 과연 그의 고민을 해결해줄까요? 그의 믿음은 눈으로 결과를 직접 볼 때까지 지속되고 있습니까? 그는 예수님 안에 계신 누군가를 깨닫고 있습니까?

우리도 왕의 신하처럼 예수님의 즉각적인 도움을 바랄 때가 많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예수님의 응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예수님은 말뿐인 분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신뢰합시다! 오늘 말씀은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값싼 말에 속았다고 생각하고 다른 길을 찾아보러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말씀은 바로 왕의 신하가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는 뜻입니다. 생사가 달린 상황에서 온전히 말씀 하나에만 의지하려면 불신을 극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인간의 말과 관련된 경험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과 관련해서도 많은 경험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까? 그의 말씀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똑같은 말씀임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세계와 삶 가운데서 그와 똑같은 능력의 말씀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시험해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약속하고 있는 것을 경험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왕의 신하는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 자리에서 현실을 변화시키는 '행동'이었습니다. 아이는 정말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빈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참으로 행복한 결말이 아닙니까? 무엇이 이 이야기를 행복한 결말로 이끌어 갔습니까? 여기에는 '기적의 치유자가 사경을 헤매던 아이를 살리다'라는 식의 제목을 붙이면 안됩니다. 이런 식으로 유발된 호기심은 하루만 지나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핵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예수가 한 아버지와 그의 가족 모두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주었다'라는 제목, 불꽃처럼 영원히 꺼지지 않고 타오를 제목을 붙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적입니다! 죽어가는 아이의 병을 고치는 것은 일시적인 구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아이와 그의 가족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 36절을 보십시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이러한 믿음의 기적은 예수님이 사시던 때보다 지금 더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보다 눈에 보이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지도 못했는데 내가 왜 그 말을 믿어야 하지?" 하고 묻습니다.

왕의 신하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사렛 출신의 목수 예수를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왕의 명령에 담긴 권위를 알고 있는 그는 목수의 말을 왕의 말처럼 따랐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말씀을 믿으십시오!

여러분,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적을 직접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을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실재를 믿는 사람의 삶은 이미 변화받은 삶입니다.


--------------------


덧붙이는 글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이 열아홉 편의 이야기에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저 그곳에서 놀라운 사람들을 만났을 때 제가 느낀 감정을 몇 마디 덧붙일 수 있을 뿐입니다.

영호에 사는 사람들이 왜 놀라운 사람들이냐구요?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성자는 아닙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일상의 크고 작은 어려움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는 한국 사람이든 독일 사람이든, 문둥병 환자이든 건강하든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시기나 질투, 분노나 다툼이나 불화 등으로 괴로움을 당합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영호와 그 이웃의 그리스도인들 이 하룻밤 사이에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꼭 달라붙어 있듯이 하나님께 꼭 매달려 있다는 점에서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문둥병 때문에 절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살아남은 것처럼 육체적으로도 살아남기 위한 전쟁의 복판에서도 평화를 누린다는 점에서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문둥병을 앓는다고 해서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문둥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훨씬 더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우리보다 뛰어난 점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김요석 목사가 최근에 보내온 편지의 몇 구절로 이 글을 맺고자 합니다.

양로원이 거의 완공되었네.

우리 식구들은 모두 주민을 찬양하고 있어.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건물을 세우게 되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지.

우리 믿음의 공동체가 독일에 안부를 전하네.


클라우스 디터 그래스


출처 잊혀진 사람들의 마을 - 김요석|작성자 karamos

 

[간증] 김요석 선교사 - 1 - 168 line

김요석 선교사님은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을 마치시고 전라도 영암군에 있는 나환자 정착촌의 영호교회를 10여년간 담임하시다가 현재는 선교사로 해외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이 자료는 선교사님이 미국 한인교회 방문 때에 전한 메세지로 극동방송국 에서 편집 방송한 내용입니다.

-----------------------------------------------------------------------------


제가 독일에서 공부할 때, 그 때 유명한 신약학 교수가 강당에서 학생이 하도 많이 오니까 - 유명하니까 학생이 많이 와서 - 갑자기 딱 스톱 하더니 하는 말이 - 그 때, 마가복음 강의를 했는데 갑자기 성경을 번쩍 들어요.


"
여러분들 혹시 이 성경을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 있습니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 때 한 1,500 - 대학원학생들, 학부학생들, 또 다른 과에서 들으러 온 학생들이 많이 있었는 데 아무도 손 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졸업반 학생도 있었고 또 목사고시에 합격한 그런 박사과정의 학생도 있었는데 아무도 손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때 제가 구석에 있다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날 이렇게 보더니만아마 독일사람 같지않게 생겼던 모양이지요. 하는 말이 "당신 어디서 왔소?" 하고 물었습니다.

" 한국서 왔습니다" 이야기를 하니까,

그 분이 하는 말이 "한국은 아직도 샤머니즘과 원시종교에 젖어 있어서 이걸 무조건 믿는 모양인데당신이 여기서 신학을 잘 배워보면은 아마 믿을건 없다는 것을 알게 될거라고그러면서 딱 하는 말이


"
여러분들 이 성경은 껍데기 두 장만 - 가죽으로 된거 앞뒷장 두 개, 이 두 장외에는 믿을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용은 아무것도 아니다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많은 학생들은 조용했습니다.


그 강의를 마치고 나서 제 옆방에 사는 학생에게 물어 봤습니다.

"내가 혹시 독일어를 잘못 알아들어서 그런지 모르니까,

네가 한번 더 소개해 달라. 그 교수가 그렇게 물었나,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나 ? " 했더니, 이 친구가 대답도 안하고

가만히 나를 측은한 듯이 바라보면서 하는 말이

"자네 진짜 이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가?" 물어요.

그래서 제가 "너는 안 믿나?" 하고 대신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 하는 말이 "안 믿는다고"

"그럼 왜 자네는 신학해서 목사 될려고 하는가?"

"- 직업이 좋지 않는가, 좋은 직업이니까 한다"

그런데 저는 어릴 때 자라면서 
'
목사하고 신학할려면 사명감 있어야 된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야 된다'

그렇게 들어왔는데, 갑자기 직업 이야기를 하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무슨 직업이 좋길래?" 하고 물어봤습니다.

독일에는 신학교가 여기처럼 교단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립대학 속에

중심 학부로 서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 학생들이 제일 우수한 학생들

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신학부에서 공부를 못하면 의학부나 법학부로 내려가는 
-
그래서 상당히 자존심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학문적으로 높은데 가슴은 아주 차갑지요.

그리고 목사님도 국가 공무원이니까 
-
아주 고급 공무원이니까 또 상당히 지적 수준이 높고
이렇게 되니까 아주 제일 똑똑한 사람이 오지만 신앙과 신학은 
별개로 공부하는겁니다.


그 때가 6~70년 후반이니까 사회주의 신학이라는거
막스주의 신학이라는거 이야기할 땐데,

한 번은 그 교수가 강의를 하면서

"칼 막스야 말로 사도바울에 버금하는 대 선교사다"

그렇게 공언할 정도로 그런 판도가 날 그 때였습니다.

그 때 제가 고민이 생겼습니다.

'나는 이 신학을 공부한 것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배워서 
좋은 메세지를 전하고 싶어서 하는건데 만약, 그렇다면 내가 뭘 
전해야 되겠는가사람의 생각을 전해야 되겠는가?' 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그 다음 세미나에서 그 분과 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당신이 자꾸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증거를 대봐라
하나님의 존재가 확실하다는 증거를 대라.

하나님의 존재가 실존적이라는 증거를 대라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러면 어떻게 대야 되는 겁니까?" 그러니까,

하는 말이 "당신이 그렇게 믿는다면 하나님과 한번 대면한 적이 
있을것 아닌가하나님 얼굴이 어떻게 생겼던가?

흑인 이든가, 백인 이든가 아니면 당신같은 황인종 이든가?

그 다음당신이 하나님 만났다면 악수라도 한번 했을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 손이 차든가 덥든가?"

제가 그 질문에 아무 대답을 못했습니다. 아무 말 못했어요.

그 보라구.

그러니까 당신 아직 모르면서 괜히 고집으로 믿는다는거요.

고집으로....

그러면서 제가 우왕좌왕 하다가 공부를 끝마치게 되었습니다.

마치고 나서 제가 한국으로 귀국을 했는데

와서 어느 신학교에서 특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들도 많이 오고, 신학교수들도 많이 와서 제 특강을 듣는다고 
앉아 있는데- 전 저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해서 발표를 하고 났는데 
갑자기 끝나기 전에  어떤 목사님이 손을 들고 질문을 하면서

"당신은 자유주의 신학자가 아니냐, 신신학자가 아니냐?"

공격이 들어왔습니다.

저는 독일에서 공부할 때는 복음주의자고 보수주의자라고 비난받다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거꾸로 자유주의다 신신학이다 그러니까

제가 아무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마침 교수님들이 말려서 제가 챙피는 당하지는 않고, 얻어 맞지는 않고 물러갔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어떤 나이 많은 목사님 한 분이 저한테 와서 하는 말이

"참 당신, 이론이라든가 학문적인 것은 훌륭한데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없다이론하고 체험은 다르니까 한번 체험을 해보면 어떻겠는가?"

제게 그렇게 말씀하세요.

"그럼 뭐 어떻게 체험을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목회를 한 번 해보라는 거에요.

그래서 1년 예정으로 그 목사님이 소개한 어느 교회로

주소를 들고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저와 나병 환자와의 만남이었습니다.


#75
최성식 (기쁨가득)


[
간증] 김요석 선교사 - 2(나환자촌) - 05/15 06:59 273 line


김요석 선교사님은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을 마치시고 전라도 영암군에 있는 나환자 정착촌의 영호교회를 10여년간 담임하시다가 현재는 선교사로 해외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이 자료는 선교사님이 미국 한인교회 방문 때에 전한 메세지로 극동방송국에서 방송한 내용으로 두 번째 올리는 글입니다.

~~~~~~~~~~~~~~~~~~~~~~~~~~~~~~~~~~~~~~~~~~~~~~~~~~~~~~~~~~~~~~~~~~~~~~~~~~~~~~~


그것이 첫번째 저와 나병환자의 만남이었습니다.

제가 가서 첫 주일날 설교를 할려고 단 위에 올라섰다가 제일 앞에 앉은

사람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말 문이 탁 막혀 버린겁니다.

한 몇 분 간을 가만히 보고 있었어요.

그분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코도 없고 입술도 떨어지고 눈알도 빠졌습니다.

그 얼굴에는 구멍만 다섯 개가 뚫린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까 손가락도 다 잘라져서 팔목만 남아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무 말 못하고 서 있다가 설교를 했는데, 지금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그 때 무슨 설교를 했는지 무슨 본문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 당황해서

지났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서, 새로 부임한 목사니까 나갈 때 인사나 하자고

광고를 했습니다. 마치고 보니까 아무도 없어요. '그래 잘 되었다'

하고 밖으로 나갈려고 문을 여니까 문 밖에 줄을 죽 서 있어요.

그래서 어쩝니까, "아이구 안녕하십니까" 하고 손을 내미니까...

제일 앞에 앉았던 그 노인이 제가이 쪽에 서 있는데 손을 저 쪽으로

내밀면서 "목사님, 고맙습니다" 하고 팔을 내 밀어요.

뒷 사람이 있다가 그 노인의 팔을 제 쪽으로 향하게 해주는데...

여러분, 악수를 할려면 손이 있어야 되잖아요.

손가락이 있어야 손을 잡잖아요.

악수를 할려고 손을 보니까 손가락이 다 잘리고 팔목만 있는데...

이걸 어디다 잡아야 할지... 여길 잡을까... 저길 잡을까...

하고 망설이는데, 그 짤라진 손목에 노오란 고름 덩어리들이 동실동실

맺혀 있어요.

잡으면 꼭 터질것 같은데... 아이고, 모르겠다 하고 쥐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두 번째 사람의 손을 잡게 되었는데 할머니였습니다.

손을 보니까 반이 잘라졌어요. 손바닥만 반이 남았는데..

제가 그 손을 잡으니까, 갑자기 그 할머니가 왼손을 제 손 위에

떡 올려놓아요.

보니까 손가락이 떨어진 사이로 노랗게 고름이 맺혀 있는데

그걸 가지고 제 손등을 자꾸 비벼대는 겁니다. 꼭 터질것 같아요.

그래서, 아이고! 할머니 왜 이러시냐고 하며 손을 뺄려고 그랬는데

그 때, 그 할머니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제가 18살 때 이 병이 
들어서 지금 나이가 78입니다.

60년간 이 병으로 있다가 한 번도 성한 사람 손 못잡아 봤는데

오늘 목사님 손 잡아보라니까 너무 좋아서 제가 그럽니다."

그 때, 갑자기 제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이 손이 우리 예수님 손이 아니겠는가...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 더러운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 고초 받으신 손!

어쩌면 손가락도 부러졌고 거기서 헌데도 났고 상처난,

그래서 고름도 생긴 그런 비참한 손이었을거다.

내가 예수님 손 잡는데 뭘 이렇게 겁을 내는가!

그 때, 갑자기 독일에서 그 교수가 하던 말....

"자꾸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그러는데 그러면 네가 손 잡아봤냐,

하나님 얼굴 봤냐?"

그 말이 떠올라서 바로, 이것이 해답이구나

'아 이제야 내가 떳떳하게 우리 주님 손 잡았구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10여 년간을 공부하면서도 만나지 못했던 하나님을

오히려 그 분을 통해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할머니 한테 물었습니다.

"할머니, 참 세상이 원망스럽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이 원망스럽지 않습니까?"

어떻게 똑같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떤 사람은 시집가서 손주 볼 
나이에 할머니는 평생 이 고생하며 소외되어 사는데 하나님이 너무 
원망스럽지 않느냐고 제가 물었습니다.

그 때 그분이 뭐라고 그러는지 압니까?

"목사님, 나는 이 문둥병 걸린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 병 걸렸기에 예수 믿고 천국가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적이 뭔지 압니까?

어떤 분은 위암 걸렸다가, 무슨 병에 걸렸다가 기도해서 나으니까

무슨 이적 체험했다 그럽니다 만은 그보다 더 큰 이적,

이적 중에 최고의 이적은 병들지 않고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겁니다.

병들지 않고 기도하는 겁니다
병들지 않고 예수 믿고 예배 드리는 겁니다.

여러분, 그것을 아셔야 됩니다.

우리 건강한 사람들은 받을 축복 다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한번은 어떤 할머니가 밭을 메다가 일곱번째 손가락이 잘라졌어요.

자기도 모르게 툭 떨어진겁니다.

그거 들고는 "목사님!" 하고 불러요. 난리가 난듯이...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제가 일곱째 손가락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어떡하라고.." 했더니 하는 말이

" - 그래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아직 세 개가 남았습니다.

이 세 손가락 가지고 청소도 하고 목사님 밥 할 때도 쓸 수가 있습니다"

열 손가락 중에 일곱이 썩어지고 세 손가락만 남아도 그렇게 감사하고

기뻐하는데...

여러분, 열 손가락 가지고 사는거 감사해봤습니까?

발가락 열 개 다 갖춘것 감사해봤습니까?

발가락 하나만 떨어져 있어도 걷지 못합니다.

균형이 안잡혀서 그냥 쓰러집니다.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겁니다.

이 할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가 그 병이 드니까 온 집안 식구가 난리가 났더래요.

아예 골방에 가둬놓고는 나오지를 못하게 하더랍니다.

6남매 있는데 제일 큰 누나가 그 병에 걸리니까 다들 어디가서 
죽었으면 하는 눈치더랍니다.

여러분, 참 이상하잖아요. 다른 병 걸리면 온 식구가 기도하면서

병원에 입원도 시키고 하는데 왜 그 병만 걸리면 나 몰라라 하는거에요.

모두다 어디로 없어졌으면 하는 겁니다.

한번은 새벽에 눈을 떴는데 아버지가 나와서 숫돌에 낫을 갈더랍니다.

갑자기 마음에 '! 오늘 밤에 아버지가 나를 죽이려는구나...'

생각이 들더래요.

그래서 가만히 누워서 보니까 숫돌을 몇 십분을 갈더니 날카로은 낫을 들고자기 방 안으로 아버지가 들어오더랍니다.

그러더니 한참 서 있다가 나가고, 또 들어와서 한참 서있다가 나가고

그러더랍니다. 그러더니 자기 방에 못 들어오고 있다가 그 다음날 밤에

들어와서 하는 말이 사실, 내가 널 죽이고 싶지만은 차마 애비로서 그럴 수는 없고 우리 집안을 위해서 네가 나가서 죽어달라고 그러더랍니다.

너 하나만 죽으면 너 동생들 시집 장가 가는데 지장이 없다고...

아마 옛날에는 그런 병이 있다면 큰일났던 모양이에요.

이 딸이 그 말 듣고 그래야 되겠다고 "제가 나가서 죽겠습니다"

뒤에 못이 있으니까 그 못에 들어가서 죽겠다고 하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렇게 나와서 죽을려고 하는데 어머니가 뒤따라 나와서

딸이 에미보다 먼저 죽으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서

쌀을 두 되 주면서 이것 가지고 산신령한테 가서 기도하라고 그렇게 
해서 나으면 다시 들어오라고 그러면 시집보내 주께....

제발 죽지는 말라고 그러더래요.

어머니 한 분만 살라고 그러지 다른 식구들은 다 죽었으면 하고

바라더랍니다.

어머니가 하도 간곡히 그러니까 쌀 자루를 지고 산으로 올라가다가

연못 가에 이르렀습니다. 갑자기 죽고싶은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쌀 자루 놓고 신발 벗고는 물에 뛰어들려고 하는데 그 어미니가

뒤 따라 왔어요. 뒤에서 허리를 꽉 껴안으며 울면서 그럽니다.

"에미보다 먼저 죽는 딸이 어디 있느냐? 제발, 죽지말아라"

그렇게 하도 울면서 간곡하게 부탁하니까 차마 죽지 못하고 살겠다고

나왔다가 섬으로 끌려갔다가 또, 우리 마을로 와서 살게 된 겁니다.

그러면서 그 분이 하는 말이 뭔지 압니까?

"저는 문둥이라도 되었기에 예수님 만나고
예수 믿고 천국 가지 않습니까?

정말 불쌍한 것은 우리 어머니, 아버지고 우리 형제입니다.

예수 안 믿고 지옥 갔을걸 생각하니까 너무 안타깝습니다."

여러분, 이런 믿음 보셨습니까?

믿음이란게 뭔지 압니까?

지금 주어진 상태에서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슨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가난하건 역경에 처해있건 병들어 있건

그 가운데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 기도가 진실로 나올 때

그것이 믿음이요 성령충만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충만인 것입니다.

처음에 거기에 갔더니 사흘이 지났는데 누가 와서 밥을 안해줘요.

밥 먹으라는 말도 없고. 그래서, 이거 이상하다 목사는 오자마자

한 며칠 굶어야 되는가 보다하고 그냥 있었더니 나흘째 되는 날 ,

한 사람이 와서 부엌을 보더니 아무것도 안해 먹은게 보였던 
모양이에요.

"목사님, 왜 밥 안해 먹습니까?" 그래요.

"글쎄, 내가 쌀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서 못해 먹는다고.....

책가방만 하나 들고 내려왔는데 ....."

그러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아이고, 우리보다 더 가난하네.."

그러더니 쌀을 얼마 걷어오더니 한끼를 해 줘요.

그렇게 사는데 바로 제 사택 옆에는 돼지 막을 쳐놨습니다.

겨울되면 뭐라는지 아십니까?

"목사님, 이 돼지가 얼어 죽을테니까 한 두 마리만 안고 자시요
그럽니다.

돼지를 안고 자면 돼지가 오줌싸고 똥싸고 하지요.

이것 참 기가 막히는거에요.

, 굶더라도 제대로 된 집을 지어야 되겠다 생각해서..

마침 그 때 영농자금을 융자해 주길래 타다가 집부터 지어버렸어요.

집을 근사하게 지어놨는데 그게 전부 빚덩어리가 된 거라.

축사도 만들고 돼지도 넣고 그랬는데 돼지 파동이 80년 초에 일어나서

완전히 돼지 값이 없어지니까 꼼짝 못하게 된 거에요. 굶게 된 거에요.

그래서 주는대로 먹어야지 하고 있었어요.

그 때 헌금도 한 주일에 5~600원 밖에 안나오니까 전구 깨어지면

그거 하나 사서 갈면은 남는게 없어요.

성미라고 걷어서 가만 보니까 저녁 끼니를 못 먹는 사람이 있어요.

목사가 그것을 알고 나혼자 밥 해 먹을 수 없으니까 
도로 갖다 줬습니다.

이거 밥 해 먹으라고.

그 때 제가 깨달았어요.

! 교회 공동체에서는 제일 가난한 사람은 목사가 되어야 하는구나

두 끼 먹는 사람이 있다면 목사는 한 끼 먹어야 족하고...

한 끼 먹는 사람이 있다면 목사는 굶어 죽어야 되겠다...

내가 굶어 죽으면 하나님께서 배불리 먹여 주시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생활하면서 1 년쯤 지났는데 부활절 날인가...

성미가 많이 걷혔어요. , 다들 보니까 끼니는 있어요.

내일은 내가 한 번 세 끼를 해 먹어야 겠다.

딱 한 번만 세 끼 해먹어야 되겠다 생각해서 새벽기도 마치고

쌀을 한 홉씩되고 있는데 갑자기 왠 사람이 찾아왔어요.

문을 여니까 모르는 남자가 서 있습니다.

누구시냐고,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니깐 우리 교회에서 30리 떨어진

다른 면에 사는 교회 목사님이에요. 어떻게 오셨냐 했더니

목사님 제가 미안한 부탁 드리러 왔다 그래요.

무슨 부탁이냐고, 하시라고 그랬더니

"쌀 좀 얻을까 하고 왔습니다" 그래요.

그 때 깨달았어요.

하나님께서 갑자기 웬 쌀을 이렇게 몇 되씩 주나 했더니

이건 날 먹으라는게 아니고 누구 줄 사람있으니까 잠시 맡으라는 거구나

생각해서 이유나 물어보고 뺏겨야 되겠다 싶어 왜 그럽니까? 하고

물었지요.

그분이 애가 셋이에요. 사모님 하고 다섯 식구 사는데 그 마을에서 한 달에 사비를 2만원씩 받기로 하고 왔답니다. 제가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야, 그거 많이 받네, 그런데 뭐하러 얻으러 왔나' 했더니 하는 말이

이 곳에 온지 1년쯤 되었는데 한 석달째 사비가 교회서 나오지를 못하고

할 수 없이 사모님이 하루에 일당 2,500 원씩 받고 받일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허리를 다쳐서 며칠 일하러 못나가니까 혼자라면 굶겠는데

조그만 애들이 자꾸 배고프다고 그래서 오늘 새벽기도 마치고 기도하면서 무작정 걷다가 제일 먼저 만나는 교회 들어가서 그 교회 목사님 한테

쌀 꾸어 오겠다고 기도하고 왔다는 거에요.

응답 받고 온 사람인데 쌀을 안 줄 수가 없는거지요.

그래서 그 응답 잘 받고 왔수다. 하나님께서 그 응답 주실려고 어제 주일날 쌀을 많이 모아 주신 모양이라 그러면서 당신은 다섯 식구고 나는 혼자니까 당신 거라고 그러면서 쌀을 줬습니다.

가는데 보니까 그 목사님이 다리를 절뚝절뚝 절어요.

다리를 왜 저느냐 했더니, 그 분이 군대 있던 사람인데 지뢰를 밟아서

다리가 잘려서 의족을 했어요.

그 때 마침 어떤 분이 제게 자전거를 하나 보내 왔어요.

새 자전거라 비닐도 아직 안 뜯은건데.

딱 한 번 타보고는 아까워서 천천히 타야되겠다고 놔둔건데.

30리씩 절뚝거리면서 걸어갈걸 생각하니까 마음이 안되어서 속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저 분이 자전거 탈줄 안다 그러면 주고 안 그러면 안 주고 그래야 겠다'

하고 물어봤더니 탈줄 안다고 그래요.

그럼 뭐 할 수 없다고 가져가라고...

속으로 그랬지요.

다리 절뚝 거리면서 자전거타는거 보다는 다리 절뚝 거리지 않고

걸어다니는게 더 복이 아니겠는가 하고...

"목사님, 또 필요하면 오십시오. 제가 맡았다가 주겠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몇 달 있다가 두 번 더 왔어요.

그 때마다 묘하게 쌀이 생기고 분식이 생겨서, 그것만 생기면

'! 손님이 오겠구나'

하고 기다렸습니다.

한 번은 웬 스님이 찾아왔어요.



#83
최성식 (기쁨가득)


[
간증] 김요석선교사 -3(스님의 방문)- 05/24 07:47 122 line


한번은 왠 스님이 찾아왔어요.


교회 스님이 머리 빡빡 깍고 장삼을 입고 오니까 그 좀 이상해요.

그래서 어떻게 왔냐고 문을 여니까 그 분이 하는 말이


-
여기 스님같은 목사님이 계셔서 찾아왔다 그래요.

- ? 하고 물었더니

- 스님같은 목사님 계신다는 거에요.


그 말이 좀 고약합디다. 그래도 어떡합니까... 들어오라고.

하는 말이

- 예수와 석가모니는 형제 지간인데 석가가 예수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목사님 하고 나 하고 나이 따지지 말고 내가 형님하겠소. 동생하시오.

그럼 그렇게 하자고, 그렇게 하자는데 그럼 뭐라 그럽니까...

그러더니 앉아요. 눈이 부리부리하고 사람이 좀 무습게 생겼어요.

나는 바짝 말라가지고 압도 되었지요.

앉아서 불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니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저는 조용히 듣고 있었지요.

교회 와서 이 사람이 설법을 하는 거지요.

한참 얘기를 듣는데 가만 들어보니까 내가 언제 읽었던

고대 인도 경전에 나오는 말을 이 사람이 인용을 하는거 같은데

조금 내용이 다른거 같애요. 그래서 제가 형님 하나 질문해도 되겠냐고

- 뭐냐고

- 내가 볼 때는 그 인용하신 부분이 인도 경전에 마지막 부분인데

왜 첫번째 부분으로 인용하시는지 혹시 잘못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갑자기 그 사람 눈이 동그래지며 날 이렇게 보더니

- 아니 목사님도 스님 하셨소?

- 그런게 아니고 좀 읽어봤다고

그런저런 이야기 하다가 이제 배가 고픈 모양이에요.

아침 8시쯤 온 사람인데 그 때가 오후 3시쯤 되었으니까.. 하는 말이

- 아니 왜 밥 안주냐 그래요 손님 왔는데

- 오늘 혹시 있을지 없을지 몰라도 아마 식사가 되면 4시30 되면 합니다그 때 한번 있는데 그 때까지 형님 계시면 제가 드리고 바쁘시다면 그냥 가셔도 말리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갈줄 알았더니 하는 말이

- 먹고 가야 되겠다는 거에요.

그래서 앉아 있었지요.

그 때 마침 또 손님 오셨다고 그 할머니가 밥을 해서 갖고 왔어요.

조그마한 소반에다가 밥 한 그릇, 김치 하나, 물 한그릇,

숟갈 하나, 젓가락 하나 이렇게 딱 들어오니까 스님이

- 내 밥 어디있소? 그래요.

그래서 제가 숟갈을 들고는 밥 그릇에다 반을 이렇게 그어 놓고

- 위는 형님 잡숫고 아래는 제가 먹겠소. 그러니까

숟갈로 잡숫겠소, 젓가락으로 잡숫겠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밥상을 옆에 놓고

저 한테 큰 절을 하면서

- 형님! 그런다 말이에요.

아니, 동생이 갑자기 형님 되는 법이 어디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분이 하는 말이

- , 제가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그래서 스님 동생이 갑자기 생겨버렸어요.

나는 또 밥상 보고 은혜 받는 사람 처음 봤습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 얘기 안하는 거에요.

형님 얘기 해주시오. 그래서

그 양반 하고 단 둘이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참 기가막힌 일이 생겼지요. 나는 좀 불편스럽지요.

이 친구 있으니까 밥을 반 그릇 뺏기니까 밥 먹을 때는 갔으면

좋겠는데 기어이 있는 거에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 형님! 왜 이렇게 사십니까? 그래요

- 뭐가? 그러니까

자기는 중이래도 고기도 먹고,갈비도 먹고 다 먹는데

, 이렇게 먹느냐 말이지요. 거꾸로 된거 같단 말이지요.

- 자네 어떻게 불자가 살생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

물었더니 하는 말이

- 나는 해탈을 했기 때문에. 아무거나 먹어도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 참 해탈도 괜찮은 해탈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한 6개월을 들락날락 했어요.

어떤 때는 일주일에 매일 오기도 하고 두세 번 오기도 하더니

한번은, 여기 가난한 집에 와서 없는거 자꾸 얻어 먹는게 미안하니까

- 제가 한턱 내겠소.

그러면서 자기 절로 오라고 그래요.

30리 떨어졌는데 거기 갈려면 허기가 져서 난 못가겠어요.

그래서 못가겠다고 그랬지요.

그랬더니 자동차를 보내 드릴께 오시라고 그래요.

- 중이 무슨 차가 있냐고?

- 중은 있을건 다 있다고 그래요.

그 다음날 차를 보내와서 타고 갔더니

법당에 200여명 사람들이 꽉 모여 있어요. 꽤 큰 절인데.

그 사람이 가운데 마이크를 잡고 좌정하고 턱 앉았어요.

저 친구가 무슨 말 하려나 하고 뒤에 앉아서 들었더니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딱 첫 서두가 이렇게 나옵니다.

-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극락이 저희 것임이요.

그 주어가 하나 바꼈어요.

그렇지만 극락이나 천국이나 파라다이스는 같거든.

그 다음이 문제요.

-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부처님을 볼 것임이라.

어두가 바껴진거에요. 그것만 바뀌고는 한 시간 내내 강의한게

나하고 성경공부 했던 8복음 얘기를 한 거에요.

그 친구 그랬어요. 8복음 보더니

- 이거 이거 부처님 교훈이라는 거에요.

그러더니 그렇게 써 먹습디다.

그 가난한 속에서도 제가 한 끼 먹으면 이틀 굶고 또 한 끼 먹으면

사흘 굶고 이렇게 살았는데 그래도 하나님께서 죽이시지는 않습디다.

죽을 일은 없고 한 번 누웠다가 일어날려면 하늘이 새까매져요.

누웠다 일어나기는 힘들어서 앉아서 자야겠다 해서 앉아서 잤는데

앉아서 일어나는 건 쉬운데 누웠다 일어날려니까 아무것도 안보여요.

이거 정말 영양실조 걸려서 끝나는가 보다 하는 그런 때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천사가 홀연히 나타났습니다.



#84
최성식 (기쁨가득)


[
간증] 김요석선교사 -4(천사의 방문)- 05/24 07:49 182 line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천사가 홀연히 나타났습니다.

갑자기 그 마을에 군수가 나타났지요, 면장이 나타난 겁니다.

면장도 한번 안오는 마을인데 군수가 나타났으니 난리가 났지요.

그런데 군수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 도에서 제일 높은 분이 나타난겁니다여러분, 한 도에서 제일 높은 분이 누군지 압니까?

도지사지요, 아니 도지사보다 더 높은 사람. 그 사모님이에요.

, 그런데 그 도지사 사모님이라는 분이 찾아왔다는 겁니다.

그럴리가 없다고 나는 도지사 이름도 모르는데 날 찾아올리가 없다고.

군수가 밖에서 목사님 나와 보라는 거에요.


그때 제가 꿈틀꿈틀 댔습니다. 20분 가량 안나갔어요.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얼마나 저 사람이 거창한 사람이기에

하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제가 양말이 하나 밖에 없었는데

그게 빵꾸가 나서 그걸 깁고 있었어요.


맨발로 나갈 수는 없고 그것 기워서 나갈려니까 군수가 자꾸 나오래요.

할 수 없이 맨발로 검정고무신 신고 나갔습니다.

그렇게 만났습니다. 그 천사를 누가 보냈는지 압니까?

여기있는 이 순구 목사님이 보냈어요. 12년 전에.


나는 이 친구 여기(미국) 왔는지도 몰랐는데 10년 만에 처음 만났지요.

미국에 오신지도 몰랐는데 제가 늘 마음으로 빚진 생활을 했습니다.

그 때 정말 영양실조 걸려서 그럴 땐데 
그 분을 만나서 그 분이 저를 자기 공관으로 초대를 했습니다.

갔더니 고기국인거 같애요. 무슨 국인지 몰라도 고기 덩어리가 하나

들어있고 국물이 아주 기름기가 꽉 찬데....그걸 한 숟가락 입에 넣는데

! 여기가 천국이구나.. 생각했어요.


얼마나 맛있던지 한 사발 먹고 염치 없지만은 또 한 사발 더 먹을 수

있냐고 했더니 또 한 사발 줍디다. 어떻게 맛이 있던지.

두 사발 먹고 나니까 입이 탁 막혀요. 그제서야

우리 식구들 생각난거에요.

- 이거 나도 별 수 없구나.

배고프니까 식구(나환자들) 생각없이 혼자 먹었구나.. 해서

아이고, 나 더 이상 못먹겠다고.. 그랬더니 그걸 사모님이 아시고

- 목사님 그럴줄 알고 제가 떡을 두 말 해놨습니다.

갈 때 가져가세요.

내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외출하니까 이 사람들이 어떻게 기다린지 압니까몇 시간을 교회 앞에서 뭘 갖고 올까 싶어서 기다린 겁니다.

버스를 대절해 와서 전남도내 귀부인들은 다 대동하고 왔지요.

오자마자, 우리 가서 예배부터 드립시다 하고 다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겁 나서 안들어갈려고 그래요.

그래서 다 들어오라고 그러고 전도집회를 한겁니다.

내가 찾아가서 전도해야 될 판인데 제 발로 들어왔으니깐

모아놓고 두 시간가량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 후 제 방에 왔습니다.

방이 조그만 해서 다는 못오고 대표만 들어오시라고
제가 대접할 건 없고 냉수만 한 그릇씩 드리겠다고 
그렇게 하고 그 분이 갔습니다.

며칠 후에 그 사모님 한테 연락이 왔어요.

자기 공관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거에요. 그래서

- 목사는 밥 먹으로는 못가고 말씀 전하러 밖에는 외출 못합니다
했지요그러니까 공관에서 예배 드리면 될거 아니냐고 그래요.

그러면 가지요 하고 가서그 공관 생기고 처음으로 거기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큰 회의실인데 전에 우리 교회 찾아온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왔어요. 70명 가량의 부인들이 왔습디다.

거기 기독교인은 별로 없고 불교 믿는 분들이 많았는데 
예배 마치고 하는 말이

- 목사님 말씀 들으니까 그거 부처님 말씀 만큼 아주 재미있으니까

우리 이런거 자주 모입시다. 그래요.

- 나는 그렇게 못한다고 거기서 나오기도 
힘들고 해서 안된다고 그랬더니

- 그러지 말고 한 달에 한번씩이라도 하자고 그럽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떠날 때까지 
도지사 공관에서 성경공부가 시작된겁니다.

놀라운 역사가 그 때 시작된 거지요.


그런 때에 독일에서 절 지도하신 교수님 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자기가 2년 후에는 은퇴를 하게 된답니다.

자기 후임자를 찾아보니까 김요석목사 당신이 제일 적임자인거 같아

추천을 했는데 허락이 났으니까 금년 말까지 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거기 가면은 하루 세 끼 밥은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앉아서 자꾸 저울질 하게 되었어요.

회답 못하고 한 두달 쯤 지났는데 또 편지가 왔어요.

아무래도 한 일년 일찍 와야되겠다. 인수인계 할 것도 있고 그러니까

빨리 오라는 편지가 두 번째 왔습니다.

그 때 제가 해답 안할 수가 없어서 답장을 썼습니다.

- 교수님, 날 그렇게 생각해 주고 위해주는건 좋은데

제가 가만히 기도하면서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

내가 이 교회 남아서 시무하는 것하고 
독일에서 교수님 후임자로 교수하는 것하고

어느게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까 하고 기도하니까

그냥 이 자리에 남는 것이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리라

하는 것을 깨닫고 거절하겠습니다.

하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 다음해 봄 신학기 시작될 무렵, 그 교수님이 일본에 모임이 있어서

왔다가 저 한테 찾아왔어요. 자기 생각에 얼마나 좋은 자리에 앉았길래

그 자리도 마다하고 이렇게 뿌리치는가 하고 온거에요.

밤중에 왔다가 그 다음날 새벽에 떠나야 되는데 
-
여섯시에 서울로 올라가서 비행기 타고 독일로 가야 되는데
그때 우리가 새벽 예배를 4 드렸는데 교수님이 오신 김에 
우리 교인들한테 설교나 해주고 가시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그렇게 하자고 그래요.

새벽 4시에, 전 통역할려고 옆에 섰고 교수님은 말씀 전하실려고 
강단에 섰는데 몇년 전, 제가 처음 그 교회 부임하고 첫 설교할 때 
맨 앞에 앉았던 얼굴에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입술도 없이 구멍만 
다섯개가 남은 그 노인이 제일 앞에 딱 앉아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 교수가 보더니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껌벅껌벅 하고는 한 십분간 가만히 서 있어요.

그래서 왜 이러시냐고 쿡쿡 찌르면서 시작하라고 했더니

, 그러고도 가만히 얼마간 서 있다가 
자기도 정신없이 몇 마디 하고는 내려왔어요
새벽예배 마치고 제가 돌아설려는데 갑자기 제 허리를 꽉

끌어안으면서 눈물이 글썽글썽 해 가지고 저 한테 이렇게 말합니다.

- 당신은 내 제자지만, 난 당신을 존경합니다.

여러분, 이 이상 영광이 어디 있습니까?

날 지도한 교수가 날 존경한다 했으니 
그 이상 더 큰 칭찬이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그 교수님이 떠나갔습니다.

이 양반이 독일 가서 소문을 어떻게 터뜨렸냐 하면


-
, 저 김요석은 매일 하나님 손 잡고 목회하더라.

이렇게 된거에요.

그리고 한달쯤 뒤에 동기생인 독일 친구한테서 편지가 왔습니다.

같이 신학을 공부한 친군데 공부를 아주 잘했던 친굽니다.

이 친구가 목사가 되어서 목회를 하러 갔는데 오천명 모이는 교회인데

한 일년 반 정도 지났더니 삼백 명 밖에 교인이 남지 않았어요.

그래서 왜그랬는가 하고 나중에서 물었더니

이 친구가 설교를 하면서

- 나는 이 성경을 믿지 않지만 여러분들은 알아서 들으시오

하고 설교를 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알아서 안나오게 된거지요.

그러니 이 친구가 고민이 생긴겁니다.

자기는 학문적으로 문법적으로 정확히 논문을 써서 발표를 하는데

그게 안되거든요. 고민을 하다가 내가 이럴거 없이 고증학 교수나 하던가

이 목사직은 그만 둬야겠다고 하던 찰나인데 ..

소문에 자기 동창이 한국에서 매일 하나님 손 잡고 목회한다니까

나 한테 편지를 보내왔어요.

- 내가 들으니까 자네는 매일 하나님 손 잡고 목회 한다던데

나도 만약 가서 하나님 손 한번만 잡을 수 있다든가,

하나님 얼굴만 한번 볼 수 있다면

내가 절대적으로 성경 말씀 믿고 믿는 설교를 좀 할 테니까

나를 자네 부목사로 청빙할 수 있겠는가?

갑자기 부목사가 한 사람 생기게 되었습니다.

제가 답장을 썼지요.

- , 그 대우는 담임목사나 부목사나 똑같이 해 주겠다.

내가 먹는 만큼 너도 먹고, 똑 같이 할 테니까 그 외에는

서로 이의 달지 말자. 그러니까 그럴려면 오너라.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식사 량이 적어서 조금씩 밖에 못 먹으니까

괜찮겠는가.

그 친구가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자기 몸 무게가 110kg 이 넘는답니다. 그러니까 다이어트도 해야되는데

오히려 잘 되었다고 적게 먹으면 좋은 거라고 그러면서 온겁니다.

보니까 보따리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한 가방은 전부 구두만 있고 한 가방은 전부 양복만 있어요.

구두는 왜 이렇게 많이 가져왔느냐? 1년이면 하나 갖고 충분한데 했더니

뭐 옷에 맞춰서 구두를 신어야 된다나...그러고 들고 온겁니다.

나중에 하나도 못 신고 다 나눠졌지만..

사람들이 부목사 왔다고 환영할거 아닙니까?

오후에 왔으니 사람들 다 모여 있었지요.

그 친구가 사람들을 이렇게 둘러 보더니 하는 말이

- 야 이사람들 좀 이상하다.

- 뭐가?

제가 그러니까, 말은 못하고 우물우물 하다가

- 병신같다. 그래요.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독일 격언에 그런 말이 있지 않느냐.

병신 눈엔 병신만 보이고 천사 눈엔 천사만 보인다.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는 다신 아무 말도 안해요.

자기도 천사는 되고 싶었던 모양이지요.




#85
최성식 (기쁨가득)


[
간증] 김요석선교사 -5(똥통에서 만난)- 05/25 13:06 324 line


자기도 천사는 되고 싶었던 모양이지요.

첫 부임했으니까 이번주 설교해라 했더니 하는 말이

내가 독일서도 설교 못했는데 여기서 어떻게 할 수 있겠냐고,

그러니까 우선 하나님과 악수를 좀 하게 하든가

하나님 얼굴과 대면하게 해주기 전에는 설교 못한다는 거에요.

그럴려면 우리 성경공부 하자.

새벽기도 전에 2시쯤 일어나서 둘이서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이 친구는 히브리어성경, 헬라어성경, 라틴어성경 세 권만 들고 왔어요.

히브리어 성경부터 꺼내더니

- 이거봐 이거 문법적으로 틀리지 않았느냐?

문장 자체가 틀렸다는 거지요. 이렇게 따지고 들어가니까 성경공부가 됩니까

그래서, 아직 안되겠다 때가 안되었으니까 휴강하자고 그랬습니다.

그러고 한 이틀쯤 지나가도 밥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 들어오니까

다이어트 하는 것도 좋지만 한 끼도 안먹으니까 죽겠거든요. 그 큰 덩치가..

, 밥 안주냐? 그러길래 자네 다이어트 한다고 그래서 한 일주일은 굶고

그 다음부터 조금씩 먹는거라고 그랬더니

자기는 살 안빼도 좋으니까 좀 먹게 해달라는 거에요.

배가 너무 고프다는 거에요.

그러면 새벽 2시쯤 일어나서 밖에 나가면 큰 빵을 하나씩 줄테니까

나눠먹자고 했더니 좋다고 그래요. 새벽 2시만 기다린 거지요.

새벽에 나가니까 마침 별이 하늘에 총총 빛이 나고 있어요.

- 입을 크게 벌려라. 하늘에서 별빵이 내려온다. 들이켜라.

- 너는 매일 저것만 먹느냐?

- 그렇다. 그러면 배가 부르다.

자기는 입을 크게 벌려도 배가 더 고프다는 거에요.

그렇게 굶기를 밥 먹듯 하면서 몇 달이 지났는데

좀 좋은 일이 생겼는지 어느 날 쌀이 많이 들어왔어요.

그러니까 이 친구가 하는 말이 한 끼 먹더라도 실컷 먹자고 그래요.

- , 매일 조금 먹다가 갑자기 많이 먹으면 탈 나니까 안된다. 그랬더니

- 탈 나는건 둘째치고 배불러 봐야 되겠다는 거에요.

그러더니 밥을 한양푼 이나 많이 해갔고는 거기다 김치 넣어서 비벼 먹는 거에요.

처음에는 김치 못먹겠다고 밥만 먹던 친구가 말입니다.

쫄아진 배에다가 갑자기 많이 들어가고 거기다 김치까지 섞어 먹었으니

배가 이상할거 아닙니까. 급한 설사를 만났지요.

변소를 가는데 급하지요.

그런데, 우리 변소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은 구덩이를 깊이 파고

나무 판대기를 두개 걸쳐 놓았어요. 그래서, 몸무게가 60kg 이내 같으면

별 요동이 없는데 그 이상 되면은 판대기가 흔들흔들 해집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 60kg 이상이 없었으니까 항상 안전했는데

이 친구 110kg 짜리가 들어가니까 흔들흔들 했지요.

전에는 조심스럽게 앉아서 일 보니까 괜찮았는데 이번에는 너무 급하니까

팍 주저앉아 버린거에요. 그러니까 나무 판대기가 뚝 부러진 겁니다.

변소 깊이가 한 4m 되는데 이 친구 키가 아무리 크도 ....

다행히 딱 걸려서 쑥 들어가지는 않고 목까지 꽉 찼어요.

갑자기 변소 안에서 소리가 요란하게 나요.

저 친구 교회에서는 은혜 못받더니 변소 가서 은혜 받았나 왠 저렇게 찬송을

부르나 하고 안가고 있었더니 지나가는 아이들이 보고는 저 한테 뛰어왔어요.

- 목사님, 저기 코 큰 목사가 똥통에 빠졌어요.

가봤더니 턱 걸쳐 있어요. 그런데 110kg 짜리를 제가 어떻게 들어냅니까?

- 조금 기다려라. 사람들 모아서 오겠다고

그러고 한 30분이 지났어요.

그러니 30분 동안을 똥통에서 온 몸이 저려진 거지요.

끌어내서 샘물 퍼가지고 씻어내는데

서양 사람들은 몸에 털이 많아서 노란 액체들이 붙어서 잘 안떨어져요.

빨래비누로 해도 냄새는 그대로 나는 거지요.

- , 안되겠다. 했더니

자기가 좋은 수가있다고 그래요. 들어가더니 향수를 가져왔어요.

그걸 막 뿌려대는데 그 냄새에다 향수 뿌리니까 더 안되겠어요.

새벽 예배 때 이 친구 나가니까 냄새 난다고 교인들이 다 도망가는 거에요.

- , 봐라. 이 교회 안에서 병신이 누구냐.

제일 더러운 냄새는 네가 피우고 있지 않느냐.

그 다음날 밤이 되었는데 그 친구가

- 아이고 성령불이 내 몸에 내렸는가 보다 그래요.

몸이 뜨겁고 이상하다고 그래요. 방도 찬데.

- 야 그럴리가 있냐, 어떻게 성령불이 네 몸에만 임하냐 나는 괜찮은데...

옷을 벗겨 보니까 몸에 뭐가 두들두들 났어요. 그게 뭔지 아세요?

똥독이라는 거에요.

이 사람, 자기는 성령불인줄 알고 있다가 아무래도 그거는 아닌거 같다고..

몸이 괴로우니까 갑자기 머리를 내밀면서 안수기도를 해달라는 거에요.

그 마을에서 아이들이 아프면 약도 없고 병원도 없으니까 사탕을 하나

입에 넣어주고 기도해 줍니다. 그러면 열도 내리고 그랬어요.

그래서 기도하면 다 된다고 그랬더니 이 친구가 그 동안 뭐라 그랬는지 압니까?

- , 미신적인 짓 하지 말라고, 병이 났으면 약을 먹여야지, 사탕 먹여서

되느냐? 병원에 데리고 가야지 그러면되느냐?

하면서 늘 비방하던 친군데 자기가 급하니까 기도해 달라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 이 사람아!

병 낫는 거는 자기 믿음으로 낫는 거야. 예수님께서도 자기가 고쳤다고

말씀 안하셨어. "네 믿음이 너를 구했으니" 하셨지 않느냐. 그러니

너 믿음 없으면 안된다.

- , 다음에 믿으면 되지 않겠냐, 앞으로 믿을 테니까 기도 해달라.

- 그래도 안되겠다구.

그렇게 똥통에 빠지고 나더니 이 친구가 사람이 달라졌어요.

그런데도 뭔가 확실치는 않아요.

하나님 말씀 믿어야 되겠네 하면서도 딱 걸리는게 성령입니다.

성령은 없다는 거에요. 하나님 o.k , 예수 그리스도도 좋은데.

성령은 좀 곤란하다는 거지요.

-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뭐. 못 믿겠다는거.

그리고 얼마 지나서 이 사람과 월출산에 산책을 갔습니다.

몇 시간 걸어가면 되니까.

그 날도 같이 가는데 이웃 마을 청년이 오토바이를 타고 왔어요.

그걸 보고 이 친구가 꾀가 났어요.

내 저거 타고 먼저 가 있을테니까 넌 천천히 오너라 그래요.

제가 그랬습니다.

우리나라 민요에 정든님 버리고 가면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그랬으니까

그냥 나랑 같이가자 그랬더니 괜찮다면서 타고 갔어요.

제가 두 시간쯤 뒤에 도착했더니 냇가가 있는데 오토바이가 다리 옆에

넘어져 있고 운전하던 사람은 넘어져서 이마가 찢어져서 일어나고 있고

이 사람이 보이지 않아요. 고함을 지르면서 이름을 불렀더니

다행히 다리 밑 물 속에 떨어졌어요.

마침 물이 있어서 다치지는 않고 옷만 버리고 미안한 듯이 일어나요.

- 괜찮아? 목 안 부러졌어. 다리 안 부러졌어.

- 괜찮다.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몇 미터 높이에서 뚝 떨어졌으니 굉장한 타박상을

입은 거에요. 밤에 자는데 얼마나 아픕니까.

그게 표시 없이아프거든요. 실컷 얻어 맞은 것처럼.

- , 나 진짜 믿을테니까. 기도 해달라. 아파 죽겠다.

- , 믿음 없이는 안된다.

마침, 우리 마을에 타박상에 먹는 좋은 민속 약이 하나 있는데

그거 먹을려면 먹으라. 그런데 냄새가 좀 고약하다.

여러분, 그게 뭔지 아십니까? "똥물" 입니다.

변소를 만들 때 구덩이를 깊이 파고는 삼베로 덮은 항아리를 변소 깊숙히

내려 놓습니다. 그러면 몇 년 동안 쌓이면 덩어리는 안들어가고 노오란

엑기스만 빨려들어갑니다. 그게 가득 찰 때 쯤 되면 끌어내서는

사이다 병에다 나눠 담아요. 그걸 집집마다 매달아 놓았다가 급할 때

사용하는데 그걸 누가 두 병을 가지고 온게 있었어요.

이거라고 주니까.

당장 뜯더니 한 병을 꿀꺽꿀꺽 마셔요.

다 먹더니 이 친구는 또 장이 긴지. 한 병 더 먹어야 되겠답니다.

그래서 두 병을 마시고 나니, 그게 얼마나 독합니까?

이 사람이 쓰러져서 곯아 떨어져 자는 거에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몇 시간을 자더니.

일어나서는 깨끗하다는 거에요. 안 아프다는 거에요.

그럼 됐다고. 그런데 그 냄새는 고약합디다.

입만 벌리면 그 친구 입에서 냄새가 나요.

나중에 이 친구가 독일돌아가서 목회를 하는데 자기 교회 대학생

하나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넘어졌답니다.

일주일 동안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아무리 주사를 놓아도 낫지 않더래요.

그래서 나한테 편지하기를 그 약좀 보내줄 수 있겠느냐고...

허허~ 아주 특별 약을 수출까지 할 뻔 했습니다.

, 똥통에 빠져도 이 사람이 안되요.

똥물 까지 먹고 속까지 다 씻어내고 나니까 사람이 달라집디다.

여러분, 똥통에 빠진 걸로 끝내야지.

똥물 까지 뱃속에다 채웠다가 끌어내서야 되겠어요.

이 친구가 그러고 나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성령도 인정하게 되고 사람이 확 달라졌습니다.

설교를 하는데 근본이 달라진 겁니다.

성경을 공부하는데 야! 이 구절, 이런 구절이 언제 있었지?

, 이거 처음 보는데.... 모든 것이 새로와 지는 겁니다.

완전히 사람이 달라졌어요.

그러고 있는 그 때입니다.

그 때 무슨 문제가 있었느냐 하면은 애들 유치원 딴데 못가니까

유치원도 지어야하고 중고등학생들도 불어나니까 교육관 같이 집을 짓고

싶은데 돈이 없는 겁니다.

저는 집 짓는 일 그만하자.

그냥 있는대로 하고 안되면 땅 바닥에서 하지 못 짓겠다 하니까.

전체 공동회의로 모여서 그럽니다.

- 아니 목사님, 지난 주에 설교 했지 않습니까?

모세가 기도하니까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메추리 고기가 내려왔는데

우리는 하나님 보고 기도할 때 만나나 메추리 고기 말고

시멘트 하고 벽돌, 철근 좀 내려달라 그러고 지으면 안되겠습니까?

그래 기도하면 되겠다. 그러면 기도하라 했더니 철야기도 합니다.

- 하나님, 철근 내려주시오. 벽돌 내려주시오.

하고 기도 끝나면 하늘 쳐다보고 갑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아무 것도 안 내려오거든요.

어느 날, 할머니 한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손수건에 뭘 꼼지꼼지 묶어서 가져왔는데 뭐냐고 뜯어 보니까

돈이 삼만 팔천원 들었어요. 아이고, 이 큰 돈이 왠 일이냐 했더니

사실은 제가 죽을 때 쓸 관 값입니다 그래요.

그 사람들은 죽을 때 관에다 묻혀 죽는 걸 괜찮은 걸로 압니다.

그래서 꼭 그 관 값을 일생동안 모아 뒀다가 죽을 때 유언하면서

관 하나 사서 넣어주시오. 그럽니다.

관 살려면 몇 년 더 모아야 겠지만 이걸로 우리 짓는데 보태 씁시다 하고

내어놓은 거에요.

제가 할머니 죽을 때 관은 누가 해주고 하고 물었더니

- 제가 그걸 몰랐습니다. 죽으면 예수님께서 다 책임져 주시는데

내가 무슨 관이 필요가 있겠느냐.. 이걸 깨달았습니다.

내가 참 믿음이 없는 사람이요. 그럽니다.

관 값이 들어오니까 공사를 시작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충 설계하고 기초공사부터 하자 하고 제가 건축감독을 맡았습니다.

먼저 구덩이를 이 만큼 팠어요.

바로 그런 찰나에 도지사께서 오셨어요.

예고없이 들이닥친 겁니다.

보니까 구덩이를 파 놓고 집 짓는 것처럼 해놓은 거에요.

- 목사님! 여기 뭐 할려고 이럽니까?

- 사실은 여기 교육관 지을려고 그럽니다. 애들 유치원도 마들고 그럴려구요.

- 건축자재는 어디 있습니까?

- 없지만, 하늘에서 내려오나 하고 지금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 분이 안 믿는 분이었어요. 그 날은 그렇게 갔어요.

그 다음날 도지사 사모님 한테 연락이 왔어요.

- 목사님, 어제 지사님 가셔서 안좋은 일 있었습니까?

- 아니, 모르겠는데요.

- 거기 갔다오더니 잠을 잘 못자요.

- 글쎄요.

- 거기 지금 뭘 하고 있습니까?

- 집 지을려고 그러고 있습니다.

- 그러면 돈 있습니까?

- 돈은 없고 지금 하늘에서 철근하고 벽돌 내려오라고 기도 중입니다.

그때사 웃어요. 그리고 며칠 지났는데

도지사님 하고 비서실장하고 군수하고 총무국장하고 네 사람이 찾아왔어요.

이 만한 상자를 하나 들고 왔더라고.. 앞에 내 놓길래 이게 뭡니까?

하고 보니까 돈이 가득 들었어요. 만원짜리가.

- 아니, 이거 뭡니까?

- 집 짓는데 보태 쓰라고 가져왔습니다.

제가 도로 내 밀었습니다.

- 이거 못 받습니다.

교회는 우리 믿는 성도들의 기도와 땀으로 건축하는 겁니다.

하나님 역사로 건축하는 거지. 이런 걸로는 못 짓습니다.

여러분, 바로 그렇습니다. 교회 역사는 우리 성도들의 기도와 땀,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간구로서 역사되는 겁니다.

세상의 어떤 권세나 세상의 물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도지사님이 뭐라고 그러는지 압니까?

- , 나도 믿으면 될거 아니냐고, 이거 헌금이라고 헌금이니까 받으세요.

그럽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장로님들이 당장 급하니까 이거 헌금이라니까 받읍시다 그래요.

그렇게 해서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목수를 불렀지요. 물건 샀지요. 짓기를 시작했는데 반을 짓고 나니까 돈이

다 떨어진 겁니다. 목수가 와서 하는 말이

- 목사님, 내일 물건 안들어 오면요. 더 이상 못 지어요.

- 그래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오늘이래도 뭐가 오겠지요. 기다려 봅시다.

내일은 내일이고, 오늘은 그만 끝내시오.

바로 그날 저녁 때입니다. 두 사람이 미국서 찾아왔어요.

나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제가 독일에서 올 때, 3년 전이었지요.

러가프 대학이라고 뉴저지에 있는 의과대학이 있습니다.

그 대학에 가서 채플 시간에 설교를 하고 떠나왔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떠난 3년 동안을 그 학생들이 헌금을 했어요.

학생 대표가 그 헌금을 가지고 온겁니다. 그 마을 까지...

여러분, 어떤 역사이건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고 계셨다는 겁니다.

이제 부목사로 왔던 그 독일 친구가 떠날 때가 되어서 마지막 떠나는 밤에

둘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데 이 친구가 이렇게 물어요.

- 아무리 내가 은혜받고 성령 받아도 걱정되는게 하나 있다.

설교를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교인들에게 은혜를 주겠는가?

가만 보니까 자네는 설교만 하면 사람들이 아멘, 아멘 하는데

나는 일년 내내 해봤자 아멘 소리 한 번도 못들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래서 제가 그 친구 손을 잡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 이 사람아, 설교는 입으로 하는게 아니네. 말로 하는게 아니야.

자네가 월요일부터 토요일 까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고

하나님 뜻대로 일주일을 살면은 주일날 강단에 올라가서 아무 말 안하고

한 시간을 서 있어도 온 교인은 은혜 받는다.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는 문자로 그냥 붙어있는 정지된 상태가 아닙니다.

우리 몸과 팔과 다리로 움직이는 역사입니다. 우리가 온 몸으로 행하고

손으로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고 이 친구가 독일로 돌아갔습니다. 놀라운 역사가 벌어졌어요.

삼백명 밖에 안남았던 교인이 만명으로 늘어난 겁니다. 일 년 반 사이에.

이 친구가 너무 기뻐서 역시, 엘리야의 이적은 아직도 있는 모양이라고 그래요.

자기 교회 300주년 기념행사로 한 주간을 비블목회라는 성경사경회 비슷한 것을

하는데 와서 해 달라는 초청장이 왔어요.

그러면서 편지 맨 끝에 뭐라고 썼는지 압니까?

- 나는 당신의 영원한 부목사 -

허허~ 그러니 이 친구 아직도 제 부목사인 셈입니다.

몇 달 뒤 그 행사 즈음에 제가 독일로 갔습니다.

강단에 올라갈려고 그러는데 교인이 굉장히 많아요. 꽤 큰 교회니까.

갑자기 이 친구가 서더니 제 손을 딱 쥐고 하는 말이 다른 이야기는

다 해도 좋은데 자기가 똥통에 빠진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거에요.

전 다 잊고 있었는데 이 친구가 일깨워 주니까 아예 첫 날,

그 이야기를 다 해 버렸지요.

앉아 있었던 분 중에서 신문사 편집국장 한던 분이 있었는데

다음날 신문에 '똥통에서 만난 성령예수' 라고 칼럼이 나왔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참 하나님의 은혜는 놀랍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부정하고

, 부정하던 사람도 그렇게 변화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삶을 살면 살수록 특이한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이제 전에 왔던 스님친구 이야기로 다시 돌아옵니다.

이 친구가 한번은 오더니 하는 말이

- 형님, 제가 인도에서 공부하다가 티벳으로 넘어올 때 티벳에서 어떤 고승을

만났는데 아주 많이 수양된 스님인데 그 분이 아주 괜찮습디다.

생불(살아있는 부처) 같습니다.

형님하고 대화하면 맞을 테니까 언제 티벳 가면은 그 분을 만나보세요.

그 이야기 할 때는 잊어버렸지요.

그런데, 중국에 문둥병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기록을 보니까 다른 나라는 공개 되었지만 거기는 폐쇄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걸 읽고 나니까 내가 여기 가까이 있으니까 중국을 한번 가봐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90 최성식 (기쁨가득)

[간증] 김요석선교사 -6(홍콩으로....)- 05/27 08:57 306 line

내가 여기 가까이 살면서 중국을 한번 가봐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거기 갈려면 비행기 표도 준비해야지요.

준비할 게 많은데......

그때는 80년대 초라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기 전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무조건 가겠습니다.

비자를 받으려면 홍콩 가서 비자를 받아야 되는데..

홍콩까지 가게 되면 하나님 뜻인지 알고 가겠습니다.

전 아무것도 없습니다......

늘 갖고 다니는 노트 몇 권, 성경책 몇 권, 가방 하나 들고

서울로 떠나기 위해서 광주역으로 갔습니다.

광주역에 도착해서 보니까 주머니에 서울 갈 여비가 없어요.

생각도 못하고 나온 거지요.

저녁이라 밤차 타고 올라가야 되는데 마음으로는 '내일 모레 떠난다' 생각하고

내일은 주일이니까 서울에 있는 후배 목사님 교회 가서 자고

모레 가면 되겠다 생각하고 광주역 광장에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 분이 지나가더니 절 보고는

- ! 목사님 아니세요. 어디 가십니까?

- , 서울 갑니다.

자기가 차표를 사주겠다고 그래요. 그래서 차표를 끊었습니다.

밤차 타고 새벽 여섯 시에 서울역에 도착했습니다.

서울역 광장에서도 가만히 서 있었어요.

또 웬 분이 지나가더니 절 보고는

- 목사님, 여기 뭐하러 왔습니까?

- , 지금 중국 갈려고 왔습니다.

- , 그럼 비행기 예약했습니까?

- 아직 안했습니다.

- , 그럼 티켓 샀습니까?

- 아직 안샀습니다.

절 가만히 쳐다봐요.

- 그럼, 언제 갈렵니까?

- 내일 갈겁니다.

- 그러면 오늘 밤 어디서 묵을 예정입니까?

- 아무개 교회서 묵을 예정입니다.

그리곤 헤어졌어요.

후배 목사님 교회를 찾아가서 주일 저녁예배와 다음날 새벽예배를 인도하고

공항으로 나갈려는데 어제 서울역에서 만났던 그 사람이 새벽에 절 찾아 왔어요.

- 목사님 내가 돈이 없어서 왕복표는 못 끊고 가는 편도만 끊었습니다.

이거 갖고 다녀오십시오.

- 그래요. 그럼 가지요.

그렇게 해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 도착해서 수속 다 밟고 나니까 수속 받는 아가씨가 공항세를 내라 그래요.

한국은 아직도 있나 몰라요. 최근에는 안가봐서 모르는데..

돈이 없어서 없다고 그랬지요.

주머니 아무리 뒤져봐도 동전 두개, 200원 남아 있는데

이거면 되겠냐고 했더니 안된데요. 오천원이래요.

그래도 없는걸 뭐..

그 때는 여행 많이 안갈 때입니다.

- 외국 여행 가는 분이 공항세도 없어요?

- 하여튼 없다고..

그 아가씨가 가만히 있더니

- 아이구, 내가 내 드릴께 다음 번에는 갖고 다니세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 공항 생기고

공항세 안내고 나가는 사람 처음 봤대요.

비행기를 탔습니다.

저는 버스처럼 생각을 한거에요. 버스는 타면 빈 자리에 가서 앉잖아요.

제일 앞 좌석 보니까 넓은데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뒤에는 와글와글 한데..

그래서 앞에 가서 앉았지요.

, 그랬더니 스튜어디스가 옷도 벗겨주고, 가방도 올려주고 아주 친절해요.

가운데 자리에 턱 앉아 있었더니 아무도 안타요. 그 이상하다....

여기 빈 자리 있는데 왜 자꾸 뒤로 가나...? 궁금해 하고 있는데

웬 사람이 탔는데 제 옆에 않아요. 신사분인데..

날 보더니 옆 자리가 비어 있어야 되는데 아마 내가 있었던 모양이지요.

좀 불편하지만은 어쩝니까.

자기 자리는 거기니깐 둘이 그냥 앉았습니다.

그 칸에 둘만 탔지요.

제가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 선생님, 혹시 예수 믿습니까?

날 이렇게 보더니

- , 돈 벌기도 바쁜데 예수님이 뭐요.

그러고는 자기 서류를 꺼내더니 체크하면서 보고 있어요.

내가 민망해서 가만히 있었지요. 비행기가 떠서 한 삼십 분이 지났습니다.

- 선생님, 제가 딱 하나만 더 물어보고 관두겠습니다.

- 뭐요?

- 이 비행기가 갑자기 폭발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살 방법이 있습니까?

이 사람이 갑자기 불안했던 모양이에요.

스튜어디스를 불러요.

아가씨 이리 좀 오라고..

- 이 비행기 안전한가?

- . 기술적으로는 다 안전한데 그 다음은 저도 모릅니다.

그 아가씨 대답한번 명쾌하게 합디다.

그러니 이 사람이 서류보다가 딱 놓고는 가만히 있어요. 불안한지.

난 눈 감고 모른척 하고는 갔지요.

얼마 지나니까 그때서야 이 사람이 날 보고

- , 선생님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 물어보시라고, 뭐냐고.

- 선생님은 이 비행기가 폭발해도 살 어떤 방도가 있습니까?

- 물론이지요. 난 이게 폭발해도 살 방법이 있기 때문에

혹시 선생님은 모르고 계시나 해서 제가 물어본겁니다.

- 그럼 혹시 저한테 가르쳐 줄 수 있겠습니까?

- 물론 가르쳐 줄 수 있지만 그 서류부터 좀 치우시오.

그 서류는 다 집어 넣어요. 그러면 이야기 해줄테니.

그 사람이 서류를 다 집어 넣은 후에 제 가방에서 성경책을 꺼냈습니다.

- 그게 뭡니까?

-. 이거 성경입니다.

- 난 뭐 특수 낙하산이라도 있는줄 알았는데...

- 이 안에 사는 방법이 다 있다고.. 낙하산이야 사람이 잘못 만들 수도 있는데

여긴 살 수 있는 틀림없는 방법이 있기 때문에 알려 주려고 그러는데..

듣기 싫음 말라고..

- , 아니에요. 말씀해 보세요.

그렇게 해서 홍콩까지 가는 4시간을 비행기 안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한겁니다.

비행기 안에서 듣기 싫다고 나갈 수도 없잖아요.

창세기부터 하다가 시간이 없어서 하나님은 어떻고, 삼위일체는 어떻고

이야기를 하니까 처음에는 재미있는지 들어요.

그러다가 홍콩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이 사람이 하는 말이

- 선생님. 이제 됐습니다.

- 뭐가 됐어요?

- , 비행기 폭발 안했어요. 그러니 이제 성경공부 그만하자구요.

- 그럼 뭐 할 수 없지 그만둡시다.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그 때사 이 사람이 저한테

- 뭐하시는 분이세요?

- 목삽니다.

- 어디에 가세요?

- 중국 갈려고 그럽니다.

- 중국 가기 힘든데 .... 비자 받는데도 한 주일은 걸릴건데....

어느 호텔에 머무실렵니까?

- 아직 예약 안했습니다.

- 그러면 제가 예약해 드릴까요? 어느 호텔을 원합니까?

- 아 그것도 아직 모르겠어요.

- 그럼 누구 아는 사람 있습니까?

- 아니 없습니다.

- 그럼 어디서 묵을랍니까?

- 아는 사람 없어도 내리면은 아마 누군가가 날 맞이할 겁니다.

그러니까 걱정 안하고 갑니다.

- , 그래요.

비행기에서 내리고도 전 계속 그 사람 줄줄 따라갔지요.

앞에 큰 차가 한 대 대기하고 있어요. 이 사람이 온다고..

운전수가 나와서 회장님! 그러는거 같애요.

그 사람이 날 보더니 다시 물어요.

- 누구 나왔습니까?

- 아직 안나왔네요.

차 타고 갈려다가 갑자기

- 목사님, 이리 타시오. 오늘 저녁은 우리 집에서 묵으시오.

- , 그래요.

속으로는 '아마 당신이 그 사람인 모양이다' 하고 탔지요.

가는데 큰 집에 들어갔어요. 한 부부가 사는데, 일 하는 사람인 모양이에요.

점심때라 점심을 가지고 왔는데 전화가 막 오는 거에요.

뭐는 어떻게 팔고 뭐는 어떻게 팔아라. 그러고 난리에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 선생님, 바쁜데 딱 하나만 물어봅시다.

- 뭐냐고?

- 그동안, 돈을 얼마나 벌었길래 그렇게 바쁩니까?

- , 그 한 1억불까지 벌려고 그랬는데 그게 잘 안되네요.

- 그러면 일생 돈 버는 소망이 1억불 입니까?

- , 그럼요. 1억불이면 성공이죠.

그 당시 80년 초니까 큰 돈인거 같아요. 난 그게 큰 돈인지 아닌지 잘 모르지만.

제가 그랬지요.

- 제가, 100억불 벌 수 있는 아이디어가 있는데 알고 싶지 않습니까?

- , 그래요. 목사님이 거짓말 하겠나?

- 난 거짓말 안합니다.

갑자기 비서한테 전화 걸더니 모든 약속 취소하라는 거에요. 전화 딱 끊고

- 들읍시다. 우리 서재로 갔습니다.

또 성경책을 꺼냈습니다.

- , 그겁니까?

- 그거라구....

그때 제가 그 분한테 직설적으로 물었습니다.

- 자꾸 그겁니까, 그겁니까 그러는데 내가 하나 물어보자구

지금 이 세상에서, 세계에서 돈 제일 많이 가진 사람들이 누군지 압니까?

여러분, 그때 80년대 뿐 아닙니다. 90년대인 지금도 그래요.

지금 현재 세계에서, 월스트리트든, 동경이든, 싱가폴이든, 어디든간에

돈 제일 많이 가진 사람 누군지 알아요? 유대인입니다.

세계 금융시장의 7~80% 를 쥐고 있습니다. 그 이상하지 않아요.

유대인 인구가 600만도 안되는데.. 세계에 있는 사람 다 합쳐봐야 천만도

넘을까 말까 하는데. 55억 세계 인구가 있는데 그 중에 80% 돈을 쥐고 있다면

뭔가 비밀이 있지 않겠어요? 돈 잘버는 비결이.. 그게 뭔지 압니까?

바로 구약성경입니다. 히브리 성경이에요.

여러분, 이 히브리 성경 안에는요. 이 세상에서 잘 살 수있는 비결과 방법이

다 나와 있습니다. 번성하고 번영하는 방법이 다 나와 있어요.

성공하는 비결이 다 나와 있습니다. 그게 구약입니다.

신약은 뭔지 압니까?

신약은 구약에서 번 돈을, 물질을 얼마나 선하게 쓰느냐.

쓰는 방법이 나와있는 거에요. 그게 신구약의 차이 입니다.

이 사람이 가만히 들어보니까 유대인들이 홍콩서도 금융권을 쥐고 있거든요.

파리, 런던 금융시장도 다 그렇거든요.

- , 그 말 맞네요. 정말 그러네요.

- 바로 여기 있다구. 이 안에 당신이 100억불 아니고 1000억불 이상 벌 수 있는

비결이 이거라구. 들을려면 듣고 말라면 말라고.

- 아아, 그거 듣겠어요.

그래서 일주일은 그 안에서 비자 나올 때 까지 성경공부 시작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짜가 없더라구요. 그 집에서 공짜로 밥 먹여 주니까 이제

복음 전하게 하는 거에요. 히브리 말로 성경공부 하니깐 재미있거든 또.

그렇게 성경공부를 하는데 회사에선 일주일 사이에 난리가 난겁니다.

이 사람이 무슨 거래를 하는데 자기는 자신있게 물건을 샀는데, 선물거랜가..

뭐 이상한 용어에요. 잘 모르지만.. 그걸 했는데 그게 값이 내려가는거에요.

벌써, 50% 가 내려갔는데 계속 내려가니까 50% 라도 팔아야 되겠습니다 하고

밑에서 보고가 올라온 거에요. 이 사람이 고민이 생긴거지요. 저 보고 물어요.

- 목사님, 사실은 이 사업상의 문제는 절대로 아내하고도 이야기 안하는데

내가 다 판단하는데 이건 조금 곤란합니다. 목사님 한테 자문 좀 얻을까 하는데

되겠습니까?

- 뭐든지 이야기하라고, 뭡니까?

-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 50% 가 내려갔는데 이걸 제가 팔아치워야 될지.. 그러면

50%를 건지고 또 50% 손해 보는데 지금 고민입니다.

저는 단순하게 이야기 했지요.

- 보시오. 사업이라는 것은 밑지면 안되지 않소. 남아야지 밑지고 팔면 되겠냐고

팔지 말라고 그러니까

- , 그말 맞다고 ..

그리고 안팔았네 오후에 되니까 30%로 뚝 떨어져 버렸어요.

20%가 또 날아가 버린 거지요.

그러니까 밑에서 또 팔자는 거에요. 나한테 한번 더 물어봐요.

- , 밑져서는 안된다고.. 장사는 밑지는 거 아니라고 남아야지

남을 때 팔아야지 왜, 밑질 때 파냐고...

나는 그냥 원칙대로 판단한 거지요.

그 다음날 되니까 이게 10% 까지 내려간 거에요. 90% 날아간 거지요.

그렇게 되니까 이 사람이 포기하고

- 목사님 말씀 듣겠습니다. 하고 놔 둔거에요.

그 다음날 되었는데 이게 갑자기 50% 다시 뛰는 거에요.

이 사람 생각에 이상하거든요.

- 지금 팔까요. 그럼 50% 건지는데..

- , 밑지면 안된다 그랬지 않냐고..

그랬더니 그 다음 100% 로 뛴거에요. , 이제 되었다 싶은 거에요. 이 친구,

- 이제 팔까요. 된거 같은데..

- 뭐가 됐냐고, 본전가지고 뭐하냐고, 남아야 장사지. 더 기다려 보라고.

이게 또 오르는 거에요. 보전보다 한 30% 더 뛰었어요.

- 지금 팔까요.

- 그래도 장사는 적어도 배는 남아야지..좀더 기달려 보라고.

그런데, 며칠 있으니까 200% 되어서 배를 남겼어요.

그 때 이 사람이 욕심이 생긴겁니다.

- 아이고, 이제 안팔랍니다. 더 오를건데..

자기 생각에 또 오를거 같거든. 그때 제가 제동을 걸었습니다.

- 욕심내면 안돼. 고 정도로 끝내야지..

그 사람이 제 말 듣고 팔았어요.

팔고 나자마자 그 다음날 바로 뚝 떨어지는 거에요.

신기하거든요.

- 이야. 목사님! 그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을 들어보이면서

- 바로 이거라구, 여기에 다 있다고..

그러고 이제 내가 떠나려니까 이 사람이 비행기표 자기가 예약했으니까

자기가 그걸 줘야 갈 수 있으니까 조금만 더 머물렀다 가라고 그래요.

안된다고, 난 지금 바쁘다구 빨리 갔다와야 되겠다고 했더니

제 가방에다 돈을 가득 넣어주는 거에요. 그래서 그랬지요.

- , 난 돈이 필요없다구. 보라구 내가 가만 있어도 호텔 보다 더 좋은 방에서

자고 지금 가지 않냐고, 비행기 표도 당신이 지금 사줘서 가고 있는데 돈

필요없다고.

우리 예수님께서 전도하러 갈 때 전대도 갖지 말고 두 벌 옷도 갖지 말고

그냥 가라고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하니까 지금까지 다 됐으니까 필요없다고.

그랬더니 이 사람 뭐라는지 압니까?

- 목사님 하나님은 돈 없어도 사는지 몰라도 내 하나님은 돈 없으면 안되니까

쓰든 안쓰든 가져가 보세요.

그래도 안된다고 뿌리쳤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 돈이 고스란히 가방에

다 들어 있었어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쓰나 하고 상해에 도착했습니다.

#92 최성식 (기쁨가득)

[간증] 김요석선교사 -7(실력자와 대결) 05/27 22:35 310 line

그래서 이걸 어떻게 쓰나 하고 상해에 도착했습니다.

상해 도착했을 때 제가 찾아간 것이 상해대학에 독일에서 같이 공부했던

중국 교수가 있었어요. 그 사람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사실은 내가 중국에 있는 문둥병자들을 도우러 왔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신학한 목사니까... 그 위치를 알려달라.

이 친구 뭐라는지 압니까?

중국에는 문둥병자가 하나도 없다는 거에요.

, 그러냐? 했더니.

등소평 동지가 교시를 내렸는데

우리 사회주의 복지국가에서는 그런 병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발표했기 때문에 무조건 없다는 거에요.

위에서 그렇다면 그런 줄 알라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그렇지 않다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한참 생각하더니 북경에 자기 친구가 당 보건국에 있는데

그 친구는 혹시 알거라고 편지를 하나 써줘요.

그 편지를 들고 북경으로 가서 그 사람을 만났습니다. 만나서,

사실은 내가 목산데 당신 친구하고 친하다.

십 여 년 전에 같이 공부했던 친군데 당신한테 부탁하러 왔다고 했더니

놀라면서 여기 문둥병자 있다는걸 어떻게 알고 왔냐 그래요.

속으로 `, 여기 틀림없이 있구나` 생각했지요.

그런데 자기는 말해줄 수 없다는 거에요.

그러면 오늘 저녁 나랑 같이 식사하자.

식사하면서 얘기를 들으려고 그랬는데, 마침 이 사람이 하는 말이

자기 친구가 다른 성에 책임자로 있는데 그 친구 말에 의하면

그 성에는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말했다고 그러지는 말고

그에게 잘 이야기 하면 되는데..어떻게 하겠느냐고 그래서,

그러면 오늘 저녁식사 자리에 그 친구를 데리고 나오라고.

저녁에 두 사람이 나왔어요.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얘기 했지요.

- 난 목사다. 그리스도인만이 그 병자를 도울 수 있다.

그 외에는 아무도 못 도운다.

확실히 실력자들은 자신감이 있어요. 싱긋이 웃으면서

- , 있다고.

있지만 안된다고.. 소개해 줄 수 없다고 딱 잘라요.

내가 좀 실망하는 빛을 띠니까 느닷없이 사람이 하는 말이

- 그 기독교인은 술을 안 먹는다지요?

- , 그렇습니다.

- 그래요?

-익 웃더니 아주 독한 빼주를 시켜요. 그것도 큰 병으로.. 그리고

큰 잔에다 따르는 거에요. 그리고 조그마한 잔에도 붓더니

나한테 겁 준다고 불을 확 질러요. 아주 독한 술이니까

잔 위에 불이 확 솟아오릅니다.

- 나하고 이거 마시기 해서 이기면은 내가 안내하겠소!

참 묘한 타협안이 나온겁니다.

내가 먹지도 못하고.... 설사 그걸 마신다 해도

그 사람한테 이길 수 있겠냔 말이지요.

옛날 바울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수 있다면 날 지옥 보내라고까지 기도했는데.

내가 이걸 마셔야 저들을 도울 수 있다면 하나님 용서하십시오.

마셔야 되겠습니다. 아멘 하고

마시자고 그랬습니다.

중국말로 '감빠이' 하게 되면 시작부터 끝까지 한꺼번에 쭉 들이키는 겁니다.

한번이라도 쉬면 안되요. 감빠이 하기로 하고 마시는데

먼저 그 사람이 쭉 들이켰습니다.

그리고 저도 잔을 들고 입에 다 댔습니다.

쭉 들이키는데 냉수에요. 독주가 아니고.... 나는 시원하게 잘 마셨지요.

잔을 탁 놓으니까 이 친구가 하는 말이

- ! 주량이 세다.

두 잔째도 쭉 마셨습니다.

- ! 주량이 세다는 거에요.

세 잔째...

그 큰 잔으로 세 잔째 마시고 나더니 그 사람이 중도에 콕 꼬구라져요.

나는 세 잔까지 다 마시고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술이 깬 그 사람이 절 찾아왔어요.

제 앞에 와서 - 큰 형님! 하고 큰 절을 합니다.

그리고 사나이로서 약속 한건 지킨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 사람따라서 문둥이가 있다는 곳으로 갔습니다.

가서 보여 주는데..

저기 들어갈려면 마스크하고, 모자 쓰고, 장갑 끼고 들어가라는 거에요.

괜찮다고 나는 그냥 들어가겠다고, 자기는 안들어 가겠답니다.

들어갔는데, 요쪽은 가지 말라 그래요. 보니까 뭘로 막아놨어요.

보는 사람 아무도 없길래..

사람 심리라는게 가지 말라는데 더 가고 싶잖아요.

문을 살짝 열고 쑥 들어갔지요. 깜짝 놀랐어요. 세상에.....

난 전부 다 돼지인줄 알았어요.

,다리 없는 사람들이 그냥 뒹굴면서

긴 죽통에 얼굴을 대고 핥아먹고 있는거에요.

여러분! ,다리가 없으면 걷지 못하지 않습니까.

얼마정도 갈려면 배로 걷습니다. 배로....

뱀이 기어가듯이 사람이 기어간다는게 말이 됩니까?

보니까 눈알도 다 빠진 사람들이 코로.. 떨어진 곳에서

냄새 맡으며 먹을걸 찾는 거에요.

하도 기가 막혀서 한 사람을 끌어안고 앉힐려니까

뒤에서 경비원이 와서 절 끌어내요. 실망이 되서 문을 열고 나오는데..

그래도 좀 낫다는 사람, 괜찮다는 사람들 보니까

팔이 하나씩 떨어진 사람, 눈알이 하나씩 빠진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저쪽에서 아리랑 소리가 나요.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데 소리 나는 쪽으로 가보니까

웬 할머니가 흥얼흥얼 대고 있어요.

눈 하나 빠지고, 팔은 하나 없고 이런 사람인데..

- 당신 한국사람이요?

- 아니요, 조선사람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어머니, 아버지가 북간도 왔을 때, 자기가 14살에 만주에 와서 그 병이 들었답니다.

그래갔고는 여기 와서 40년을 산거에요. 그래서 할머니가 되었는데..

부모님은 어디 계시냐고 물었더니... 갑자기 애가 되어 버렸어요.

- 우리 엄마! 우리 엄마!

울부짖으며 우리 엄마 좀 찾아달라고 그럽니다.

40 년이 지나도 그 마음은 아직 14살 마음이었던 거지요.

제가 위로할 말이 없어서 그 할머니 손을 꽉 잡았습니다.

반이 잘라진 손등인데...

갑자기 제 손등에 뜨끈뜨끈 한 불덩어리 같은게 떨어져요.

그 할머니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건데 그게 그렇게 뜨거울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나도 그만 그 자리서 같이 엉엉 울었습니다.

제가 엉엉 우니까.. 저 한테 물어요.

- 선생님, 뭐하시는 분이요?

- , 나는 예수 말씀 전하는 사람입니다.

- 예수가 뭡니까?

- 예수님은 우리를 병들지 않고 죽지 않게 하시는 분입니다.

가만히 있더니..

- 선생님. 나같은 병신도 그런분 알 수 있을까요?

- , 물론입니다.

- 어떻게요?

제가 할말이 없습니다.

여기 같으면 교회 가보시오. 성경 읽으시오. 하지만

거기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한참 생각하다가 제가 그랬지요.

- 할머니, 마음 속에 하고 싶은 말 다 하세요.

그리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시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대답하십니다.

그렇게 하고 거기서 돌아 나올려는데 그 분이 그래요.

- 선생님, 또 오시지요.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이 싹 없었지만

- , 언제 또 기회가 되면 오겠습니다. 하고 떠났습니다.

나오면서 너무 기가막혀서 저 사람들 어떻게 도울까 하다가 수용소장을

만났습니다. 홍콩에서 받은 가지고 있던 돈을 다 주면서

- 이걸 갖고 저 사람들 옷이든 뭐든 좀 해주시요.

그 때사 돈이 이렇게 필요했구나 한걸 알았지요.

수용소장이 그 돈을 받더니 뭐라고 그러는지 압니까?

-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 누군지 모르지만

우리 모택동 동지보다 더 훌륭합니다.

그러고는 갑자기 자기 입을 막아요. 누가 들었나 싶어서..

그렇게 하고 떠나왔는데 6개월 후가 되었어요.

아무래도 한 번 더 가봐야 되겠다 해서 그곳을 가니까

제가 오기 닷새전에 그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어요.

그래서 기가막혀서 돌아나오는데 갑자기, 그 중국 병자들이 막 나한테로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오더니

- 예수! 예수! 하고 소리 질러요.

- 왜 이러냐고? 물었더니

내가 6개월 전 거기를 떠난 후로 이 할머니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겁니다.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다른 환자들 보고

- 나는 문둥이가 아니다.

나는 이제 예수을 알기 때문에 문둥이가 아니다.

그리고 죽기전에 그러더랍니다.

- 나는 죽는게 아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고향으로 간다.

나를 이제 문둥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러면서 세상을 떠났다는 겁니다.

제가 그 때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전도는 결코 연기해서는 안된다

내가 다음에 와서 하지 했으면 벌써 그분은 세상 떠난겁니다.

바로 마찬가집니다. 여러분!

가까운 사람 전도하는거 미루면 안됩니다.

가까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미루면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때는 벌써 늦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그 마을에 머물 때 한 번은 팔십 먹은 노인이 찾아왔었습니다.

그 노인이 하는 말이

- 저도 여기서 살게 해주시오.

- 할아버지, 여기는 병자들만 사는 곳이라 안됩니다.

- 나도 병신 중에 병신입니다.

그리곤 얘기를 들려주는데..

그 분이 사십 년 전에 아들 여덟과 딸 둘, 십 남매를 뒀는데

그 중에 11살 된 네째 아들이 갑자기, 손이 고꾸라지고

눈이 비뚤어지더래요.

병원에 가니까 문둥병이라고 그러더랍니다.

그러면 얘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니까,

집에서 키우면 안되고 격리시켜야 하니까 섬으로 갖다 주라는 거에요.

그 때는 오래전이니까 교통도 불편할 뿐더러

그런 병 있으면 버스도 안 태워 줍니다.

배를 타기 위해 며칠을 걸어서 갑니다.

병 때문에 집 같은 곳에서는 안 재워주니까 저녁이 되면 산 밑에서 잠을 잡니다.

그 아이가 피곤해서 쪼그려 자는걸 보다가

얘는 앞으로 죽을 고생밖에 더하겠나 그럴바에야 내가 여기서

죽여서 땅에 파묻어 주는게 낫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돌을 들어 애를 때렸답니다.

그런데 마침 돌이 빗나갔어요.

두번째 돌을 들고서 가까이 가서 칠려고 하니까..

차마 아버지로서 죽일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데리고 부둣가에 왔습니다.

부두에서 환자들 싫어나르는 배를 보니까 눈알 빠진 사람, 코 떨어진 사람,

, 다리 다 떨어진사람들을 싣고 갑니다.

내 아들도 앞으로 저렇게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기가 막히더래요.

그래서 그 아들을 끌어안고는 저 구석으로 갔어요.

- 얘야, 네 팔자도 참 나쁘다. 나도 애비로서 책임이 있으니까

너혼자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고 내가 너하고 같이 죽겠다.

우리 둘이 같이 죽자.

그러고는 그 아들을 끌어안고 물속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뛰어 들어가니까 그 아들이 뭐라고 그러는지 압니까?

- 아버지! 죽일 놈은 나지, 아버지는 아니잖아요. 죽일 병신은 나니까

나만 물속에 콱 박아버리고 그냥 가세요.

자기 죽는 것도 모르고 아버지 살리려고 애를 씁니다.

- 아버지! 아버지는 살아야지요. 죽일 사람은 나요. 죽일 놈은 나요.

집에 가면 어머니도 있고 형님도 있고 동생도 있는데 아버지는 사세요.

나 혼자만 죽여줘요.

울면서 그 아들이 아버지를 살리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래서 차마 죽지는 못하고 다시 나왔습니다.

그 아들을 섬으로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사십 년이 지났습니다.

일곱 아들, 두 딸 모두 시집,장가 보내고

그 많던 재산도 자식들에게 다 나눠주고 했는데 부인이 세상을 떴습니다.

혼자 살면서 아들네 집에 왔다갔다 하다가

내가 너무 오래 살아도 이거 욕되는구나 해서

고향에 와서 죽고 싶은 마음에 고향으로 내려오다가 갑자기,

사십 년 전에 버렸던 그 아들이 생각나는 겁니다.

내가 다른 자식들에게는 재산도 주고 했는데 그 아들은 버리기만 하고

한번도 돌보지를 못했는데 죽기전에 만나서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해야되겠다 해서 찾아온 겁니다.

우리 마을에 아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 분이 와서 아들을 만난 겁니다.

자기는 만날 때, 그 아들이 자기를 원망하고 인상을 험하게 쓸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아들이 자기를 대접하면서 절을 하고, 손주 소개하고 난리에요.

그래서 물었습니다.

- 얘야, 네가 날 원망할 줄 알았더니 어찌 이렇게 날 대접하냐?

- 아버지가 날 버리고 떠날 때는 며칠, 몇 날을 아버지 엄마가

그렇게 원망스럽더니 예수 믿고 나니까 왜 그렇게

아버지 엄마가 고마운지..

날 낳으시고 날 천국가게 해 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고.

이 때까지 사십 년을 아버지 한번 만나게 해 달라고

부모님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버님이 저한테 온 것은 하나님이 저한테 보내신 겁니다.

이제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러면서 울더랍니다.

이 때, 이 노인이 저보고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 목사님, 나는 지금까지 가짜 아들 일곱을 위해 살았습니다.

진짜 아들은 제가 두 번이나 죽일려고 그랬습니다.

이런 병신이 어디있습니까?

정말 살려야 될 아들은 자기가 돌로 때려 죽이고 물에 빠뜨려 죽일려 그랬고

없어도 될 가짜 아들만 위해서 일생을 살아왔다는 거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았습니까?

없어도 될 가짜를 위해서 살아왔습니까?

버려도 될 욕심을 위해서 살아왔습니까?

인생에 아무 소용이 없는 욕심만을 위해 살아왔습니까?

정말 소중하고, 지켜야 될 믿음 다 팔아먹고

주님 사랑 다 팔아먹는 진짜는 버리고 살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앞으로 여러분 인생이 정말 참을 찾고, 진실을 찾고, 진짜를 위해

살아나갈 때 지금보다 하나님께서 더욱 큰 축복으로 여러분에게 충만히

내리실줄 믿습니다.

#93 최성식 (기쁨가득)

[간증] 김요석선교사 -8(보석같은 진리) 05/27 22:38 357 line

제가 한번은 정상인이 사는 마을에 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저는 어느 마을에 가든지, 거기 백 호가 되든 삼백 호가 되든

크든 적든 간에 그 마을 사람들이 다 전도될 때 까지 거기에서 묵습니다.

그래야지 나중에 제가 다른 곳에 갔다와도 시험에 안들거든요.

그 마을에서 다른 사람은 다 전도 되었는데 그 마을에서 잘 사는

어떤 한 분이 전혀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제일 잘 사는 열 가정 중에 한 가정인데.. 아주 잘 사는 그런 집이었는데

, 이 사람은 전연 받아들이지를 않을려고 그래요.

다 변화되고 그 집 한 집이 남았는데..

나중에 찾아가서 물어 봤어요.

- 당신, 내가 볼 때는.. 당신 얼굴을 보니까

꼭 하나님의 축복 받을 사람인데 어째서 그렇게 거부하느냐?

한 숨을 푹 쉬더니

- 사실은 제가 그럴 사정이 있습니다.

- 그게 뭐냐고?

- 제가 지은 죄가 많아서 그렀습니다.

- 당신이 지은 죄가 아무리 많다 할찌라도 하나님 앞에 솔직히 고백하고

자복하면은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다.

그분이 하는 말이

- 이것은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어쩔 수 없어서....

사실은, 나도 진작 믿고싶은 마음이 있었지만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 그 죄가 뭔지, 하나님께도 말 못할 사정이라면.. 나 한테는 말할 수 없소?

- 제가 그걸 말을 못합니다.

만약 그 말을 하게 되면 저는 이 마을에서 매장 당하고

맞아 죽을지도 모릅니다.

- 그럼 마음대로 하시오.

그렇게 평생 동안 가슴에 품고 고민하다가 죽는거 하고

탁 풀어 제치고 깨끗하게 회개하고 죽는게, 차이가 있을 테니까.

고민하다가 죽는거 하고 맞아죽더라도 차라리 깨끗이 자복하고 회개하고

죽는거 하고 어느게 좋겠는지 한번 잘 생각해 보시요.

첫날은 그렇게 하고 나왔습니다. 며칠 후에 그 사람이 찾아왔어요.

- 제가 고백하겠습니다.

얘기를 하는데, 이 분에게는 딸이 여섯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안이 궁하니깐 그 딸들을 상해에다 판 거에요.

제일 첫째 딸이 14살 때 팔았어요.

중국돈으로 돈이 꽤 들어왔습니다. 그 재미있거든요.

그 돈으로 집도 새로 짓고 하니까 살거 같거든요.

한번 그 맛을 들이니까 두번째 딸을 또 팔았어요.

동네 사람들한테는 외갓집 갔다하고 두번째 딸도 팔았습니다.

돈이 들어오니까 또 재미있거든요. 그래서 세번째 딸도 팔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둘은 어리니까 남기고 네 딸을 팔았는데 ..

해마다 하나씩 팔은 거에요.

동네 사람들은 외갓집이 잘 사니까 애들을 거둬 주는 모양이다.

시집보내 주는 모양이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넷을 팔고 나니까 집도 새로 짓고 그 동네에서 아주 부자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전혀 양심의 가책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딸들도 여기서 고생하는것 보다는 큰 도시에 팔려가면 호강하면서

살지 않겠느냐 하면서 좋다고 간거에요.

그런데 여러분, 그 딸들이 팔려서 어디로 갔겠습니까?

정말 죽은거와 같은 그러한 인생을 맞이했을지도 모르잖아요.

이 사람이 지금까지는 팔아놓고 아무런 양심의 가책없이 지냈는데

복음이 들어가니까 양심의 가책이 생긴겁니다.

참 이 복음의 역사는 묘하지요.

어떤 사람에게는 기쁨이요, 생명이요, 천국이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이요, 멸망의 성서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은 복음을 들은 후로 괴로운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그런거 안 믿는다. 나는 공산주의 사상 그대로 신봉하겠다는

식으로 그렇게 뻗대고 나갔던 겁니다.

그러면서 그 분이 하는 말이

- 선생님! 이런 죄인도.. 아무리 사랑이 많은 하나님이라도

용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친딸을 팔아먹고 그 돈으로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아무리 하나님이 자비로우시다 하더라도

이것을 용서해 주실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물질에 대한 유혹입니다.

떡에 관한 본능적인 유혹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어떤 극단적인 예가 될 수 있지만 어쩌면

우리도 이같이 이런 본능적인 유혹 때문에, 먹는 것 때문에,

물질 때문에 어쩌면 가장 귀한 신앙을 팔아먹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가장 귀한 양심을 팔때가 있습니까?

우리가 이것을 한번 생각을 해 봐야됩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것을 이길 힘이란 것은 기도 밖에 없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내가 항상 하나님 믿고 살아가는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확인하는 그러한 결정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시험은 마태복음 4 5절에 나타나는

성전 지붕에서 뛰어내려라 하는 시험입니다.

여기에도 두 가지 유혹이 있습니다.

하나는 순간적이고 인기적인 것으로 사람을 현혹시키는 시험입니다.

아까 저녁 먹다가 평생 처음 듣는 이름이 TV 에서 나왔어요.

마이클 조단, 그게 여기서(미국) 애들부터 어른까지 부러워하고

난리라면서요. 아주 인기있고 그렇다는데..

이런 사람들이 인기있고 좋다고 현혹돼 따라가다가는 실망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연예인이라든가 코메디언 좋아하며 그런 사람 따라가다가 실망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사적인 예로 특히, 독일에 히틀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뭇솔리니같은 2차대전 때의 그런 사람 보세요.

히틀러가 연설을 하게 되면 온 독일 국민이 열광했습니다.

심지어는 당시 개신교 총회장 하던 루더빈 밀러 라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히틀러 연설할 때 나타나서는 연설 다 끝날 때 마지막 축도를 합니다.

그 연설을 위해서 축도를 하는데 제일 끝에 '아멘' 하지 않고 - 예를 들어서

'영원히 있을찌어다' 이렇게 해놓고 나서는 아멘해야 되지 않습니까? -

그런데 이 사람 뭐라 그랬는지 압니까?

축도 후에 마지막을 '하이 히틀러' 로 끝을 맺습니다.

완전히 히틀러가 예수였습니다. 그런식으로 온 교회 - 개신교, 카톨릭 천주교까지

온 국민이 열렬했습니다. 히틀러가 최고다! 히틀러가 예수다!

나중에 히틀러 예수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그 다음 어떻게 되었습니까?

2차대전 끝나고 나서 지금까지도 히틀러 망령에 계속 배상금을 지급하고

있는 것이 현 독일입니다.

여러분들 지금도 이와같은 유혹!

인기적인, 물질적인 유혹이 계속 따르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이와같이 마귀는

이 선동하는 불의의 지도자 같이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시험입니다.

당시에도 이같은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유다라는 사람이 당시 팔레스틴에 나타나서 예수님 태어나시기 한 100년 쯤

전인데. 많은 군중에게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나를 따라오면 요단강이 옛날

홍해처럼 갈라져서 이 나라를 독립시키겠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유다라는 사람의 뒤를 따라가 '당장 독립되는구나' 하다가 당시 총독이었던

파디우스라는 사람에 의해서 전부 몰살된 사실이 역사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 한 때는 예수님과 똑 같이 내가 사흘 만에 예루살렘 성벽을 전부 무너

뜨리겠다고 선동했다가, 당시 총독이던 안토니우스 필릭스라는 사람에 의해

파멸된 사실이, 예수님 태어나시기 50년 전, 100년 전 사이로 일어났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한 것은 이와같은 과거의 혁명가나 거짓선지자의 약점

을 이용해서 유혹하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중국이야기로 들어갑니다.

티벳이란 나라를 찾게 되었습니다.

전에 이야기했던 스님이 자기가 인도에서 공부를 하고 티벳으로 넘어왔는데

티벳에 아주 훌륭한 고승이 있는데 그 분을 만나면 형님하고 대화가 되리라

해서 저한테 편지까지 적어줘서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고승이 있다는 사찰을 찾아갔습니다.

처음에는 그 고승이 만나주지를 않아요. 그래서 친구 스님이 넣어준 서신을

넣어줬더니 만나겠다고 그래요. 제가 들어갔더니 앞에 조그만 방에서 둘이가

마주 앉아서 대좌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잘왔냐, 못왔냐 그런 말도 없이 그냥 저를 한참 쳐다 봅니다.

저도 한참을 쳐다 봤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입을 열면서 하는 말이

- 당신의 영과 내 영이 다른데 무엇 때문에 날 찾아왔소?

- 나의 영과 당신의 영이 다른 것은 제가 압니다.

그래서, 당신의 영과 내 영이 무엇이 옳은 영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 , 그러냐고. 그렇다면 며칠 후에 다시 만납시다.

한 주일쯤 지나니까 다시 불러요.

갔더니 절 한참 보다가 뭔 말을 할려고 그래요.

무슨 주문 같은 것을 외우더니 가만히 있습니다.

아무 말도 안하고 그렇게 몇 시간을 서로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붓하고 벼루하고 종이를 하나 꺼내서 제 앞에 던져 줘요.

- 지금 우리 둘이서 한 이야기를 여기에 써 보시오.

아무 말 안했어요. 몇 시간을.... 그런데 갑자기 그런단 말이에요.

제가 그것을 받아 쥐고 붓을 들어서 한자를 적어서 줬습니다.

그것을 받아보고 내려놓더니

- 당신 얘기를 좀 듣고 싶소.

- 그럼 내가 얘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 그렇소. 얘기 해보시오.

가방에서 성경책을 꺼내들고 앞에다 펼쳤습니다.

- 그게 뭐요?

- 내가 나 자신에 대해 할 이야기는 없고, 이 책에 있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 해보시오.

거기서 성경공부에 들어갔습니다.

당대에 티벳의 대 고승인데 그 앞에서, 마태복음의 팔복음은 어떻고

하면서 죽 이야기를 해나갔습니다. 한 몇 시간을 듣더니

갑자기 손을 들어요. 오른 손을 들더니

- 그 책을 내게 빌려줄 수 있겠소?

- 빌려드리지요.

성경책을 주고 나왔는데 두 달이 지나도 보이지를 않아요.

부르지도 않고, 나오지도 않고...

두 달 동안사찰에 머물면서 기다린 겁니다.

그 때 20살 넘은 한 청년이 머리를 빡빡 깍고 들어왔는데 행동이 좀 이상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한테다 흙을 던지질 않나.. 고함을 지르지 않나..

자기가 싼 배설물을 들고는 집어던지질 않나..

그러니까 같이 있던 스님들이 골치가 아프다고 묶어놓기도 하고,

밖에 내놓기도 하고 이랬는데 어느날 이 젊은 청년이 날 만나보고

내 앞에 와서는 조용해져요. 그러니까 그 스님들이 하는 말이

두 사람의 영이 비슷한 모양인데 좀 데리고 있으라고.

온 몸에는 자기 오물로 다 뒤집어 쓴 사람인데....

나도 불청객이라 부탁을 안들어 줄 수도 없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그래서 저랑 같이 제 방에서 묵게 되었습니다. 3일 쯤 지나니까

그 청년이 정상으로 돌아와서 내가 쓰던 신발도 닦아놓고 세숫대야에

물도 떠다 주고 그래요. 그래서 괜찮은 청년인데 왜 그랬느냐 그러면서

그 청년에게 제가 그랬습니다.

- 너는 정말 지혜롭고 착하고 선한 청년인데 괜히 엉뚱한 짓을 한 모양인데

이제는 괜찮을 거다. 그러니까 겁내지 말고 살아라.

이 사람이 괜찮아지니까 스님이 와서 하는 말이

- , 당신의 영이 우리 영보다 조금 더강하기 때문에

이 청년이 고쳐진거 같으니까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 그럼, 내보냅시다.

했더니 이 청년이 안갈려고 그래요. 한 주일만 더 있다 간다고 그래서.

그러면 그러라고. 한 주일 더 있다가 이 청년이 가면서 하는 말이

- 선생님! 만약 여기서 떠나시면 저희 집에 한번만 꼭 들러 주십시오.

- 내가 기회가 되면 찾아가겠다고.

그 청년이 그러고는 주소를 적어주고 사찰을 떠났습니다.

한 두달 지났는데 그 고승이 절 불러요.

들어가니까 그 성경책을 저 앞에 턱 놓으면서 하는 말이....

깜짝 놀랄 말을 합니다.

- 이렇게 바른 진리를 왜 이제 가져왔소?

이 사원이 선지가 2000 년이 넘는데 이같이 바른 진리를

, 아무도 이곳에 와서 그냥 던져라도 주지않고

지금까지 한 마디 말도 전해주지 않았소?

놀라운 말 아닙니까? 여러분!

이런 말 할 때 뭐라고 대답해야 됩니까? 성경적이고 불교적으로..

성경적이요 불교적으로 딱 맞는 대답이 뭐겠습니까?

이게 지혜거든..

그 사람한테 아이고 미안합니다. 늦게와서.. 이건 말이 안되잖아요.

참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것도 말이 안되잖아요.

참고 있다가 올 때까지 기다려라 그것도 말이 안되고.

뭔가 이 사람이 공감할 만한 말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 하루가 천년이요 천년이 하루로다.

어때요? 가장 불교적이고 기독교적인 말 아닙니까.

이게 지혜거든요. 똑같은 말인데도 우물우물 하지말고 묻자마자

턱 나와야 되는거라. 그 사람이 처음 얘기할 때 제가 숨도 쉬지 않고

"하루가 천년이요 천년이 하루로다"

하니까 그분이 무릎을 탁 치면서,

고맙다고 절을 하면서 선물을 하나 줍디다.

이만한 곽에다가 담은건데 꺼내보니까 피리 같애요.

때가 새카맣게 묻어 있어요.

툴툴 털고 한번 불어보라고 그래서 불어보니까

참 신비한 소리가 납디다. 그게 무슨 피린지 압니까?

자기 스승이 죽을 때 남겨준 다리 뼈로 만든 뼈 피리였습니다.

티벳에서는 장례식이 우리하고 다릅니다.

사람이 죽으면 친척들이 메고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피리를 불면은 새들이나 들짐승이 몰려와요.

올라가서는 시체를 눕혀놓고 발바닥부터 칼과 끌로 다 오려냅니다.

살을 다 뜯어냅니다. 그리곤 주먹밥처럼 만들어서 새에게 던져 줘요.

얼굴살까지 모든 살을 깨끗이 닦아 냅니다.

아마 자연환경에도 좋을 것 같애요.

화장한다든가 매장한다든가 하는 것보다훨씬 낫지요.

그렇게 자연에 다 돌려주고는 제일 튼튼한 뼈가 이 다리 뼈인데

제자라든가 아주 친밀한 사람에게 선물로 줍니다.

그럼, 거기다가 구멍을 뚫어서 피리를 만들어 불거나

다른 걸로 이용하게 됩니다.

이 분이 여섯 살 때 입적을 했는데 100년 전 사셨던 자기 스승이 죽으면서

물려준 피리에요. 그러니까 100년이 더 넘은 사람의 뼈로 만든 피리인데

자기가 근 60년 이상을 가지고 있다가..

얼마나 고마웠으면 그걸 제게 줬겠습니까?

여러분, 전도 잘하면 이렇게 뼈 피리도 얻게 됩니다.

아무 부담없이 받게 됩니다. 그것만 받은게 아닙니다.

그 분이 그 때 70이 되었으니까 하는 말이,

나도 얼마 안있으면 죽을텐데 죽게 되면은 자기 다리뼈 하나를 가지라고..

그래서 미래의 피리까지 얻게 된겁니다.

몇 년 전에 찾아갔더니 아직 세상 안 떠나셨어요.

서로 즐겁게 재회만 하고 왔습니다.

여러분, 정말 그렀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진실된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보석같은 복음을 전하는데

그 받는 상급이 뼈 피리 뿐이겠습니까?

하늘나라에는 더 많은 상급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그 사찰에서 제 일은 다 끝났지요. 그러고 내려왔습니다.

기차 타고 내려오다가 갑자기 그 젊은 청년이 준 쪽지가 생각나서

주소를 보니까 거기서 하루쯤 떨어진 마을이었습니다.

주소를 따라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어마어마한 큰 집이었습니다.

앞에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요. 내가 잘못왔나 하고..

주소를 다시 봤어요. 맞길래 그 앞 초소에 가서 물어봤습니다.

그 집이 맞다고 그래요. 이 사람을 아는가 했더니, 그 집 아들이라 그래요.

들어갔습니다. 그 부모들이 나와서 반가이 맞이해줘요.

부모가 그 지역에서 상당한 실력자였습니다.

저 보고 물어요.

- 뭐하시는 분이세요.

- 전 복음 전하는 기독교 목삽니다.

그 사람이 갑자기 눈이 뚱그래지면서 하는 말이

- 못 들은걸로 할테니까, 딴데 가서는 절대 이런 말 하지 마세요.

- 그럴줄 알고 이야기 했습니다.

당신은 비밀을 지켜줄거 같아 이야기했노라고 웃었더니 자기도 웃어요.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6개월 동안 티벳에서 세수한번 제대로 못하고 있던거

거기서 목욕도 하고 깨끗이 닦게 되었습니다.

며칠을 잘 대접받고 떠나게 됐는데.... 저는 그냥 그것으로 끝나는줄 알았어요.

그 뒤 3년 후에 하나님의 엄청난 이적을, 그 사람을 통해서 일어나게 하실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것은 지금 이야기하지 못하고 3년 후의 이야기가 됩니다.

그 집을 떠나 다시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데 한 하루쯤 왔어요.

중간에 기차가 역에 서니까 사람들이 바뀌어 들어오는데 한 노인이

제 앞에 앉았습니다. 한 열 시간쯤 가면서 제가 가지고 있는 독일어 성경을

보고 있는데, 저녁나절 쯤 갑자기 이 노인의 입에서 놀랄만한 소리가 나왔습니다.

세상에, 저는 그런말 처음 들어봤어요. 그 중국 땅에서.. 그 오지에서.

"다쓰 하일리그 쉬리프트 다쉬 마르진"

독일어가 툭 튀어나온 겁니다.

성경이 하일리그 쉬리프트라는 독일어로 가죽 겉장에 금박지로 쓰였는데

그걸 읽은 거에요. 그 사람이 손을 내밀면서

- 이걸 한번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제가 얼마나 놀랐던지 얼른 건네줬습니다.

그 분이 그걸 만져보면서 갑자기 눈물이 글썽글썽 해서 하는 말이

- 제가 50년 만에 이걸 다시 만져보는 겁니다.

#95 최성식 (기쁨가득)

[간증] 김요석선교사 -9(공산당 이론가) 05/28 20:47 323 line

- 제가 이걸 50년 만에 다시 만나는 겁니다.

그분이 1940년대 상해대학 학생이었습니다.

아직 공산당이 천하를 통일하기 전이었는데 그 때 자기가 주원래 밑에서

심복으로 일하면서 학생연맹을 주도했답니다. 맨날 데모나 하고 시위나하고

폭력을 휘두르다가 한번은 자기 대학에 독일인 교수가 있었는데 그 분이

자기를 부르더래요.

- 이 사람아 자네 공부도 안하고 왜그렇게 맨날 싸움만 하는가?

- 우리 중국에는 공산주의가 필요합니다.

공산주의 혁명을 하기 위해서 제가 이 일을 합니다.

했더니 그 분이 그렇게 이야기 하더랍니다.

- 나도 공산주의자였네.

나이 50이 되어서야 이게 위선이라는 것을 깨닫고 전향했는데

진리라는 것은 천 년이 지나도 이천 년이 지나도 변치 않아야 되는데

이 공산주의는 벌써 맑스가 태어난지 100 년도 안되어갔고

벌써 수 차례 변질되었고 지금 살아있는 스탈린이나 레닌이나

그 사람들은 가짜 공산주의자들이다. 진짜가 아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 그럼, 뭐가 진리입니까?

하고 얘기를 했더니 그 교수가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게나 하고

준 책이 바로 내가 가졌던 그 책과 똑같은 고딕체로씌어진 성경이었습니다.

가져가서 읽어보니까 자기 마음에 안들지요.

혈기 왕성한 20대 였는데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고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을 대고.... 도저히 맞지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도로 갖다 줍니다.

이건 우리하고 안맞습니다.

우리 중국 인민을 위해서는 이걸로 안됩니다. 우린 싸워야 됩니다.

그러고는 성경을 던져줬습니다.

그 때 그 교수가 눈물이 글썽글썽 하면서 하는 말이

- 이 사람아! 국가 지도자가, 사회 지도자가 잘못된 진리를 쫓아가면은

그 민족과 그 사회는 망하게 되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울더래요.

그래도 자기는 그거 안하겠다 하고 열심히 혁명운동을 했답니다.

그러다가 과연 1949년에 중국이 통일되고 자기도 그 공로로 인해서 주원래의

보좌관이 되었다가 60년대 들어와서는 교육장까지 맡은 공산주의 이론가로

출세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걸로 끝났으면 몰랐지요.

1966년에 문화혁명이란 것이 일어납니다.

그 때 완전히 파괴됩니다. 개혁파들.. 대표적인 유서기 주석이 처형당했지요.

등소평은 발가벗겨서 쫓겨났지요. 그 밑에 있던 개혁파들 전부 꽁꽁 묶여서

벙거지 씌워갖고 강제노동으로 쫓겨 납니다.

쫓겨나면서 부하들에게 온갖 돌팔매를 받고 침 뱉음을 당하면서

갑자기 옛날에 40년대에 자기 스승 생각이 나더랍니다.

그 독일인 교수가....

"지도자가 잘못된 진리를 따라가면 너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온 민족도 망한다"

기가 막히더랍니다.

10 여년간을 강제노동소에 있다가 등소평이가 집권을 하면서 자기도 복권이 됩니다.

등소평이가 같이 일하자고 이 사람을 불렀답니다. 그 때 이 사람은 공산주의에

완전히 환멸을 느껴서 못하겠다고 하고 낙향해서 고향에서 살던 때였습니다.

그럴 때 절 만난 겁니다.자기 집이 가까우니까

- 선생님 우리 집에 며칠 유하시면 안되겠습니까?

제가 좀 의논 드릴 것이 있습니다.

- , 그래요.

저도 뭐, 갈 때는 많지만 오라는 데는 없었지요.

그러니까 아무데나 오라는데는 서슴치 않고 갔습니다.

자기 집에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두 손을 모으고는

- 선생님! 제게 글좀 가르쳐 주시요.

- 아니, 당신은 독일어도 이렇게 잘하고

상해대학 총장까지 지낸 학자인데 나한테 배울게 뭐가 있습니까?

- 그것이 다 허삽니다. 제가 50 년을 헛살았습니다.

내 나이 70 인데 50 년을 헛 살았습니다.

나를 스무살 난 학생으로 보시고 가르쳐 주시요.

전 공산주의 운동하면서 50년을 완전히 헛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기간 다 빼고 머리 하얀 스무살 된 학생으로 봐주시오.

제가 선생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날부터 그 집에서 거의 반년 가까이를 유하면서

나는 그 분에게 성경을 가르쳐주고, 저는 그 분에게

아주 정확한 중국어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아주 좋은 조건이 되었지요.

이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진심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변화가 뭔지 압니까?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들은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못살겠다는 겁니다.

그 동네가 팔백 호 이상되는 동넨데 인구가 이 천여명 되었습니다.

이삼십대 청년들이 한 사백명 가량 되었습니다.

그 분이 하는 말이 노인들은 빼놓고 우선 젊은 사람들만 변화시켜 놓으면

어른들은 자연히 따라올거라고.

그 집 뜰이 굉장히 넓은데 거기다가 지붕만 대충 해놓고는 이삼십대 청년들을

모두 모아놓고 매일 저녁 야간 성경공부를 시작한 겁니다.

그 분이 낮에는 나하고 공부하고 밤에는자기가 청년들하고 공부를 시작한 겁니다.

한 달, 두 달, 세 달이 지나는데 놀라운 역사가 벌어집니다.

중국 사람들은 술을 잘 먹습니다. 담배를 지독하게 피웁니다.

술 먹고 담배 피우게 되면 뭐합니까? 노름하게 됩니다.

노름하고 나면 뭐합니까? 잃었니, 땄니 하면서 싸우게 됩니다.

모두 난장판이에요. 특히 겨울에 되면 일을 안하게 되면은 난리납니다.

그런데 성경공부를 하고 나니까 술이 끊어지지요. 담배가 끊어지지요.

술 팔러 온 사람이 이상한 동네가 되어버렸다고 그래요. 술을 안먹으니까.

그런데 그 소문이 지역 당에 까지 났습니다.

저 동네 좀 이상해졌다는 거지요. 그래서 당에서 확인을 하러 왔습니다.

와보니까 매일 저녁에 모여서 공부를 하거든.

거기 뭐라고 쓰였나 하면은 '진리학사'라고 쓰붙여 놨어요.

그걸 보고 진리라는 것은 모택동 사회주의니까

! 정말 이건 모범적인 마을이라고 하면서

표창해야 되겠다고 돌아갔습니다.

'진리학사' 라는 명칭으로 정식 허가가 났습니다.

청년들이 달라지니까 예의가 생기게 됩니다. 어른을 공대합니다.

이 공산주의라는게 어른, 아이 없는게 공산주의 거든요.

아무나 보고 동무라 그러지않습니까. , 아래가 없어요.

그런데 복음을 받아들에게 되니까 부모를 공경하게 됩니다.

어른들에게 공손해지게 된 겁니다.

아이들에게는 엄하게 교육이 됩니다.

동네가 확 달라졌어요.

처음에는 다리 같은게 부서졌으면 당에서 다리 만들어주기를 기다렸는데

이제는 자기들 스스로 합니다. 당에서 와보니 좋거든요.

전에는 맨날 투정하더니 이제는 자기들이 알아서 모든 것을 하니까

정말 모범적인 마을이라 그래서 표창까지 받았어요.

예수 믿고 당에서 표창받는 건 처음 봤어요.

변화가 되긴 되었는데 그래도 뭔가가 좀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여덟 살 먹은 한 아이가 절도죄로 인민재판에 불려나왔습니다.

거기는 마을에 규율이 있습니다. 그래서 동네에서 지은 절도라든가 그런 사건들은

경찰서까지 가지 않고 마을에서 촌장하고 위에 사람들이 모여서 유죌로 동의하면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게 소위 말하는 인민재판이지요.

유죄로 판결이 나면은 나이만큼 두들겨 팹니다.

오십 살난 사람이 죄를 지으면 볼기짝을 오십 대를 때립니다.

나이 많이 먹고도 정신 못 차렸으면 많이 맞으라 그런 뜻인 모양이에요.

그런데 여덟 살 난 애가 절도죄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절도의 사유는 달걀 두 개를 훔친 죄입니다. 그거 절도거든요.

도둑질은 도둑질이니까 애가 여덟 살을 긴 몽둥이로 맞아야 되는데

저도 명예 촌장 자격으로 그 재판에 참석을 했습니다.

제가 촌장의 선생이니까 명예 촌장이 된거지요.

모두 동의해서 벌을 내리자고 결정이 났어요. 그래서 제가

내가 한 마디 해도 되겠는가 했더니 하라고 그래요.

- 법이란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만약 법으로서 사람을 다 죽이게 되면

나중에 법 지킬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은가?

가만 들어보니까 말이 옳거든요. 모두 그렇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사람을 살려야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한번 얘기해보자고..

내가 다시 이 아이 하고 대화를 한번 나눠보겠다 그랬어요.

그 아이에게 제가 물었습니다.

- 얘야, 너 계란 두 개를 훔쳐 먹었냐?

- . 배가 고파서 그랬습니다.

그 때가 저녁 때였습니다.

- 그럼 너 점심 먹었냐?

- 안 먹었습니다.

- 아침은?

- 안 먹었습니다.

- 어제 저녁은? 아무말 못해요.

- 어제 점심은? 아무말 못합니다.

애가 이틀 굶고 나니까 지나가다가 이웃집에 계란 낳아놓은걸 보고

그냥 먹은겁니다. 그말 듣고 제가 할 말을 잃었어요.

제가 모인 사람들을 향해 물었습니다.

- , 어떤 사회단체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은 누가 지느냐?

- 단체 장이 집니다.

- 이 마을에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느냐?

- 촌장입니다.

- 그렇다면 여기서 촌장보다 더 높은 사람 누구냐?

- 선생입니다.

명예촌장이니까....항상 명예짜 붙으면 더 높아요. 중국에선.

- 그럼 됐다. 이 재판에서 피고는 나다.

내가 이 동네 어른으로서 이 아이가 이렇게 이틀 동안 굶을 정도로 모르고

있었다는건 어른인 나의 책임이다.

어느 아이도 이틀 굶고 지나가다가 계란 안먹을 아이가 없다.

이 아이가 그토록 굶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은 어른의 책임이다.

그러니까 내 나이대로 때려라.

그러고는 제가 형틀 위에다 엎어졌습니다. 다들 눈이 뚱그래졌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그 애 엄마가 튀어나와서 울면서 얘기를 합니다.

- 아닙니다.

제가 밭일 하는라고 너무 바빠서 이 애에게 밥을 못해줬습니다.

제 책임입니다.

그 때서야 그 여자 남편되는 애 아버지가 엉엉 울면서 나와서 꿇어앉아요.

- 그게 아닙니다. 제 잘못입니다.

사실은 제가 노름병을 못 고쳐서 집에 있는 쌀까지 다 팔고

그래서 그렇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절 때리세요.

그 마을에 노름이 없으졌으니까 이웃마을까지 가서 노름을 하다가

재산을 다 날린 겁니다.

그러는데 이번엔 이웃집에 있는 사람이 나와서 하는 말이

- 그런줄도 모르고 있은 우리가 잘못입니다.

이웃에서 그렇게 불행한 일이 벌어진 것을 모르고 있은 우리가 책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법입니다. 뭔지 압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그 어떤 더러운 사람도 거리끼지 않습니다.

어떤 허물도 아름답게 가리워줄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제가 그 일을 보고는 안되겠다. 이 마을이 물질적으로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되겠다 하고 생각하던 차에

거기서 나오는 축산물이 있었습니다.

뭐냐하니까 소, 돼지, 닭들인데.

그걸 가지고 어디다 파는지 봤더니

거기서 아주 가까운 시장에다 내다파는데 값이 아주 적어요.

그래서 틀림없이 어딘가는 좀 많이 주는데가 있겠다 싶어서 좀 멀리 나가봤습니다.

거기서 한 300km 떨어진 곳에는 아주 큰 시장이 있는데

거기서는 이웃시장에 파는 것보다 세 배나 비쌉니다.

그래서 거기다 팔면 되지 않겠느냐 했더니

거기까지 갈려면 가다가 짐승들이 다 죽을거라는 거에요.

, 죽냐니까. 삼백 킬로 짐승들 끌고가면 다 죽을거 아니냐는 거에요.

그러지 말고 트럭 불러서 갖다주면 몇 시간이면 갖다 줄거 아니냐?

이 사람들은 그 생각을 못한 거에요.

제대로 공산주의도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공산주의면 모아서 팔고 해야되는데 다 자기것만 팔고 오니까 안된거지요.

당장 큰 트럭 두 대를 빌려서 일차적으로

돼지, 소를 모아서 팔러가게된겁니다.

첫 사업이니까 나보고도 가자고 그래요. 그럼 가자고 해서

한 차에 세 명씩 여섯 명이 타고 뒤에는 소와 돼지를 잔뜩 싣고 떠났습니다.

한참 가니까 중간쯤 기름넣는 곳이 있어요.

거기서 기름도 넣고 쉬고 있는데

갑자기 어깨가 떡 벌어지고 힘이 센 듯한 청년들 몇이 오더니

- 이 물건 뭐 할거요?

- 이거 우리들이 저기 시장 가지고 가서 팔겁니다.

요만한 쪽지를 주면서 이 상점에 가서 팔라 그래요.

값만 맞으면 팔지요. 하고 들고 왔습니다.

시장에 도착했어요. 굉장히 큰 시장인데..

사업을 제대로 할려면 물건을 팔때는 값을 제일 많이 주는데 팔고

살 때는 제일 싼데서 사야 되잖아요.

기본만 알면 되니까.

찾다보니까 어디가 제일 많이 주길래 거기서 팔았습니다.

조금전에 만났던 사람들이 준 쪽지의 상점에서는 값을 싸게 불러서

안팔고 제일 많이 주는데서 팔았지요.

중국에는 수표 거래가 없습니다.

전부 현찰로 돈을 받으니까 큰 자루에 두 자루가 꽉 찼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큰 돈을 보니까 이야~ 하면서 감탄합니다.

앞에 두 자루를 싣고 뒤 차는 호위를 하면서 두 대가 빈 차로 가면서

휴게소 가서 저녁도 좀 잘 먹고 기름 넣고 들어가야 되겠다 하고 갔습니다.

웬걸, 도중에 한 20 여명 되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람들이 빙 둘러섭니다.

나는 뒷 차 타고 있었는데 뒤에서 보니까 옥신각신 해요.

가보니까 돈을 내라는 거에요.

통행세를....

중국에는 두 가지 세력이 있습니다.

하나는 공식적인 세력이고 또 하나는 비공식적인 세력이 있는데

비공식적인 세력한테 걸린 겁니다.

동네 사람들은 안된다 그러고 난리났지요.

공동재산인데 얼마 정해서 떼 줄 수도 없고 해서 안뺏길려고

다투는데 제가 가서 물었습니다.

- 뭣 때문에 그럽니까?

두목 되는 사람이 앞에 나와서

- 우리가 돈이 필요해서 그럽니다.

- 뭐하는데 쓰실라고 그렇게 필요합니까?

- , 좋은 일에 쓸라고 그러니까 내놓으시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 내가 보는 성경책에는 누가 부탁하거든

거절하지 말라 그랬으니까 드려야지요.

돈 가져 오라고 해서 두 자루 몽땅 다 줘버렸습니다.

다 가져 가라고.. 그렇지 않아요?

, 줄바에야 다 주지....

어떻게 계산해서 줄 수도 없잖아요.

그 많은 돈을 헤아릴 수도 없고 그래서 다 가지고 가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같이 갔던 마을 사람들이 깜짝 놀란거지요.

깍아서 조금 줘야지.

그걸 다 주는 법이 어디 있냐는 거에요.

저 분은 지혜는 있는거 같은데 장사는 못하는 모양이다 그래요.

제 첫번째 제자인 촌장인 그분도

이름이 노학이란 분인데 얼굴이 새카맣게 된거에요.

가면 이제 동네 사람들 한테 맞아 죽었다 싶은 거지요.

다 주고 마을로 돌아갑니다. 편안하잖아요.

만약, 안주려고 하다가 싸움이라도 나면

사람이 다칠 수도 있는데 우선 사람을 편안하게 해야지요.

돈 다 주고 나면은 그 사람이 우리한테 시비 걸리 없지않습니까?

그러고 한 30분쯤 달리는데 지프차 두대가 앞에 와서 끼익 서요.

#96 최성식 (기쁨가득)

[간증] 김요석선교사 -10(천국의 소인) 05/28 20:50 311 line

지프차 두 대가 앞에 와서 끼익 서요.

그 두목하고 아까 그 사람들이에요.

- 왜 쫓아 왔소?

돈 보따리를 도로 내줘요.

- , 이거 도로 가져왔소?

-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해서 내가 이거 못받겠소.

- 무슨, 예감이 이상하길래....?

- 다른 사람은 두들겨 맞아야 돈을 주고, 피를 봐야 돈을 주는데

당신은 서슴치 않고 그것도 깍아달라는 것도 아니고 몽땅 다 주니까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해서 못받겠소.

그러니까, 기분 나빠서 이거 못받겠소. 도로 가져가시오.

그 어떡합니까 도로 주는데, 그래서 받아 가지고 다시 차를 타고 가는데

한 얼마쯤 가는데 갑자기 앞 차가 딱 서요.

막 뛰어내리는 거에요.

무슨 일 났는가 하고 내렸더니.

-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 ?

- 돈이 더 왔습니다. 우리 것보다 더 많이 들어 있어요.

- 저 놈들이 이걸 핑계삼아서 우릴 두들겨 패고 차까지 뺏을려는거

아닌지 모른다고, 이거 어떻게 하지요?

하고 안절부절 해요.

- 그래, 그럼 어떡하지.

- 이거 도로 갖다줍시다. 남의 돈 갖다 줍시다.

- 그렇지, 남의 돈 가져오면 안되지. 그 옳은 말이다.

그럼 돌아가서 갖다주자.

도로 그 사람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가니까

- , 왔소?

- 돈이 더 많아져서 그 돈 돌려주려고 왔습니다.

- 참 이상한 사람들이네...

남은 억지로 뺏어가는 판인데. 더 있으면 그냥 가면되지....

- 왜 돈을 더 넣었소?

- 제가 선생을 보니까 아무래도 제가 그 돈을 가지고 있는것 보다는

며칠간 번 건데, 선생께서 그 돈을 쓰시면 훨씬 더 유익할것 같아서

평생 한번 사람 노릇 해볼려고 그랬습니다. 그냥 가져가시오.

그 어떡합니까? 자꾸 가져가라는거. 그냥 들고왔습니다.

집에 오니까 온 동네 사람들 난리가 났지요.

앞으로 소 팔고, 돼지 팔 때는 선생 갑시다.

이건 판 돈 보다 들어오는 돈이 더 많다는 거지요.

집에 들어왔습니다.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오는데 갑자기

노학이라는 그 노인 제자가 두 손을 벌리고는 앞 마당에 콱 엎드러져요.

그러고는 막 엉엉 웁니다. 놀라서

당신 왜 이러냐고 그랬더니

- 선생님, 날 그냥 발로 콱콱 밟아서 때려 주시요.

- 왜 그럽니까?

- 제가 가룟유답니다.

- , 가룟유다가 왜 살아왔냐? 갑자기 왜 그럽니까?

- 사실은 제가 아까 선생님을 의심했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원망했습니다. 제자가 스승을 원망하고

의심한다는 것은 배신하는 겁니다. 제가 가룟유다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를 때려 주십시오. 한번 배신하면 열번, 스무번

배신할 수 있는데.. 제가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선생님, 그 뜻을 제가 몰랐습니다.

- 내 뜻이 뭔데?

- 선생님은 먼저 사람 다치지 않기 위해서 아닙니까.

돈이 중요한게 아니고.. 몽땅 다 주면 절대 해칠리가 없지 않습니까.

깍자,깍자 하니까 두들겨 맞고 치고 그렇게 되는거 아닙니까.

제가 선생님 뜻을 몰랐습니다.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사람이 우선이다. 그리고 이 살기 등등한 도둑에게는 전부 다 줄 때

그 사람들 기가 막혀서 손을 못댄단 말이에요.

여러분, 바로 그렇습니다.

아무리 물질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사람만큼 물질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업하면서 왜 실패하는지 압니까?

사람을 경시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을 경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그러셨어요.

"네가 아무리 곳간에 보물을 많이 쌓아놓았을지라도

오늘밤 네 생명을 거둬가면 그 보물이 무슨 소용이 있느뇨"

여러분, 기독교 경제학 1대 원칙이 "사람 중시" 입니다.

그게 사업의 비결인겁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통곡을 하면서 그래요.

그래서 제가.. 아니라고 나는 이렇게 훌륭한 - 정말 회개 금방하는 -

제자가 있어서 오히려 고맙다고...

그러고는 며칠 있는데 웬 손님이 찾아왔어요.

누군지 알아요?

그 두목이 저 한테 찾아온 겁니다.

와서는 대뜸 저한테 무릎을 꿇더니 하는 말이

- 아무리 봐도 선생께서는 무술의 고수 같은데

한 수 가르쳐 주십사고 찾아왔습니다.

뭐 눈에는 뭐가 보인다고..

싸움꾼 눈에는 싸움꾼 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에요.

자기가 여섯 살때 부턴가, 일곱 살 때부터 그 세계에 들어왔답니다.

어릴 때 부터 소매치기부터 시작해갔고 들어와서 한 30년 가까이 그 세계에서

기반을 다져서, 하여간에 싸움이라면 자기를 따를 사람이 없다나 그러면서

사람도 자기 손으로 수십 명을 죽였고 그렇게 했는데 며칠 전 선생님을

딱 만나보니까 보통 고수가 아닌데 한 수 좀 가르쳐 주시오.

그러니까 그 노학이란 분이 하는 말이

- 큰 스승이 그렇게 자네가 한 마디 한다고 들어 주겠는가,

자네 정승을 보이게.

내가 무슨 힘이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 선생은 아무 힘 없으니까 그냥 가거라 그렇게는 못했던 모양이요.

그 노인도 아주 근엄하게 물리쳤지요.

첫 날은 갑디다. 그런데 다음 주 또 왔어요.

- 당장 제가 제자로 삼아달라기는 너무 고귀하신 분이고

제가 가끔 놀러 올테니까 한 수 좀 가르쳐 줬으면 좋겠습니다.

생각나실 때 마다 한번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두 번째 제자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옛날 공산당 이론가에다가 도둑 두목까지 저한테 몰려오게 된 겁니다.

이제 본래 제가 살고 있는 마을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거기는 식구가 참 많습니다.

아주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기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고민거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혼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이혼 상담하러 오는 사람도 없고

자식 걱정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딱 하나 있어요. 배고픈 겁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세상을 떠날 때 하는 말이

- 선생님, 천국가면.. 밥 세끼 먹는 곳이 천국이지요.

- 천국은 밥 세끼 반드시 먹는 곳이다.

그러면 아멘 합니다. 여기는 아무도 아멘 안하네.

세상을 떠날 때 제가 물어봅니다.

-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가장 하고싶고 원하는 소망이 뭐냐?

- 딱 한번만 배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두 끼도 아니고 세 끼도 아니고 딱한 끼만....

그러나, 그렇게 해주지 못합니다. 제 대답은

- 조금 있다가 천국 가면은 얼마든지 첫 날은 많이 먹을 수 있으니까

실컷 먹으라. 거기가면 뭐든지 있다. 즐기라고....

여러분, 이 병은 중국 말로 '마팡빙' 이라 그럽니다.

마귀의 바람으로 얻은 병이라 그래요.

그렇다면 이 병은 절대 낫지 않는 병이라는 거지요.

사실, 이 병이 나면은 영양이 충분히 섭취 되어야 되고

약이 충분히 공급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야 스톱이 되어서

계속 이겨나가는데.... 그렇지 못하면 계속 험악하게 온 몸이

썩어서 들어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손가락이 떨어지고, 손목이 잘라지고, 팔뚝이 잘라지고,

또 이 어깨까지 다 잘라집니다. 두 다리까지 다 잘라지고 몸퉁이와

머리만 남게 됩니다. 그 머리에 눈알까지 그냥 붙어 있으면 좋은데

눈꺼풀이 썩게 되면 눈알까지 다 떨어져 버립니다.

코가 떨어지고 귀가 떨어지고 얼굴에는 아무것도 남는게 없습니다.

여기서 저기로 갈려면 걸어가야 되는데 발이 없으니까 기어갑니다.

뭘로 깁니까? 배로 밖에 길 수 없습니다.

양팔이 없고 두 다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세상을 떠날 날이 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아는 모양이요.

죽을 때 되면은 저 한테로 와서 제 옆에서 죽기를 원합니다.

저는 가는 곳마다 사택이 많습니다.

왜냐하니까 이십명이나 삼십명이 되는 팔다리 없는 사람들

제가 매일 하루씩 돌아가면서 잡니다.

여기서 하룻밤 자고 저기서 하룻밤 잡니다.

자다보면 누가 변을 보게 되면 제가 일어나서 갖다가 변도 뉘고

소변도 보게하고 돌아옵니다. 그렇게 자다가 몇 번씩 깨다가

어떤 날은 하도 피곤해서 나도 모르게 엎어져서 자니까

그 죽게 된 것을 아는 그 사람이.... 사람 죽을 때는

꼭 압니다. 제가 그걸 늘 경험했어요.

배로 기어서 제가 있는 곳으로 옵니다.

몇 시간을 그렇게 왔겠지요. 그러다가는 지쳐서

제가 이렇게 자면은 제 팔뚝을 베고서 쓰러져 잡니다.

그러다가 아침에 깨니까 여기 세명, 저기 세명, 또 아래에다

몇 명이 누워갔고 죽어있었습니다. 다 세상을 떠났어요.

제가 그걸 보고는 너무 기가막혀서 그 때 부터는 밤에 잘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니까, 그 사람들 마지막 소원이, 앉아서 하나님 앞에 가는 겁니다.

엎어지니까 앉아 있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두 다리가 없고 팔이 없으니까 지탱할 수 없습니다.

- 하나님 앞에 가는데 누워서 갈 수 없으니까 저를 좀 안아 주세요.

그래서 안겨서 세상을 떠납니다.

한 번은 제가 다른 마을에 갔다가 몇 달 만에 돌아오는데 거기 촌장이

그럽니다.

-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한 사람이 있는데 죽었나 싶어서 파묻을려고 들고 나오면

벌떡 일어난다는 거에요. 또 죽었나하고 보면은 일어나고

그래서, 너 왜 안죽냐? 하고 물었더니

- 선생님 올 때까지는 못 죽는다는 거에요.

그래 제가 도착하니까 빨리 저 사람한테 가보라고.

벌써 다 썩었는데 안죽는다는 거요. 그래서 가봤습니다.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나요.

- , 날 그렇게 찾나?

- 선생님, 제가 하나님 나라에 가기 전에 딱 세 가지만

물어보고 가야되겠습니다.

- 뭐냐?

- 나같이 이렇게 추한데, 더러운데....

우리 부모님도 날 버렸는데.... 하나님께서 외면하면 어떡합니까?

-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널 기쁘게 받아 줄거다.

진짜 부모님은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염려하지 마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다.

- 두 번째는 그래도 내가 하나님 모르는데

하나님 날 알 수도 없으니까...

선생님 이름 써서 소개장을 하나 써주시오.

그러면, 제가 선생 이름 쓰인 소개장 가슴에 품고 가서 보이겠습니다.

여러분, 이런 큰 영광이 어디있습니까.

, 내 이름 쓴 소개장 가져가서

"하나님 이 사람 천국 갈 자격 있으니 받아주시오"

그렇게 쓰달라는 겁니다.

그 때 제가 그랬습니다.

- 그거 필요없다.

하나님 벌써 알고 계신다.

당신 요말 하는거 까지 지금 듣고 계신다.

- 그렇지만 내가 너무 이렇게 몰골이 사나운데

거기가서 하나님하고 손 붙잡고 한번 손이라도 잡아야 되는데

이거 손이 없어서 어떡하지요?

- 그런 염려하지 마라.

당신이 천국에 들어서는 순간 당신은 변화된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팔이 생기고 손가락이 생기고 눈이 생기고 머리가 생기고

발이 생긴다. 그게 천국이다.

여러분, 천국이 바로 그렇습니다.

천국에는 병이 없습니다. 늙지 않습니다.

영원히 건강하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는 곳입니다.

그렇게 변화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는 가장 거룩한 모습으로 의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얼마나 좋은 곳입니까?

그 때 이 사람이 갑자기.... 요만큼 잘라진 팔뚝이 위로 올라갑니다.

만세 부르듯이 올라가면서

- ! 선생님.

날 놓아주세요.

하늘이 열리면서 빛이 나오면서 큰 손이 제 손을 잡습니다.

그러고는 세상 떠났습니다. 그 세 마디 외치고.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옆에 있는 사람까지 다 은혜를 받는 겁니다.

저는 죽음을 통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전 늘 하나님 나라 가는 모습을 보면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천대받고 아무도 보지 않으려고

외면당했던 그 사람이지만은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보다도

더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자가 세례요한인데 그 보다 더 큰 자는 누구냐?

천국에서 제일 적은 자가 그 보다 더 크다.

천국에 들어서면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위대한 사람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그걸 믿지 않아요. 이 사람들이.

- 당신, 천국에 가면 모택동 동지보다 더 높다고 그랬더니

- -! 그럴리가 있겠냐고?

그런 사람들이 이제는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보면은 그곳은 지옥같은 곳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지옥같은 곳에서 천국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여기에 와보니까 한 달여 되도록 지나면서 이 곳을 보니까

이곳은 정말 제 눈으로 보기에 천국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사는 분들도 다들 천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과연 하나님 앞에 나도 천삽니다. 그렇게 자신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천국에 천사가 없다면 그건 천국이 아니지요.

천국에 천사가 없다면 그게 어떻게 천국일 수 있습니까?

그건 지옥밖에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떤 오아시스인지 신기루인지 모릅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천국같은 모습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이거 조심해야 됩니다.

사람이 악하고 악하게 되면 아무리 에덴동산

같은 곳도 지옥으로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미국 땅 보세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먹을 것 풍부하고 얼마나 좋습니까?

아마 그 사람들 여기 와보면 여기가 천국이라 그럴겁니다. 확실해요.

그런데 그 천국 같은 곳에서 과연 여러분 천국 같은 생활 하십니까?

여러분, 선교해야 되겠다. 땅끝까지 전도해야 된다 하지만은

여러분, 가장 귀한 전도가 뭔지 압니까?

제가 그 비결부터 한번 가르켜 드릴께요.

어떻게 하면 전세계를 복음화 시킬 수 있는가?

#97 최성식 (기쁨가득)

[간증] 김요석선교사 -11(신비로운하나님 05/28 20:54 298 line

어떻게 하면 전세계를 복음화 시킬 수 있는가?

이 미국 땅을 전부 다 하나님 나라를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달려있습니다.

제가 그 예를 들지요.

로마가 기독교국이 되기 전에 아주 다신교였습니다.

로마가 국교로 될 그 당시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에 기독교 인구는

전 인구의 3%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황제 칙령이 내려서 기독교 국가로 변했습니다.

왜 그렇게 된지 압니까?

당시에 호화찬란했던 그 로마 문명에 물질의 부가 놀랄만큼 컸습니다.

요새 미국 같을지 모릅니다. 정말 풍부했습니다.

노예도 많았고 부자도 참 잘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나중에 왕족들 귀족들이 아들, 딸을 시집장가

보낼려고 가만 보니까....

대개 격이 맞게 혼인을 시키지 않습니까?

재벌집은 재벌집하고, 권력층은 권력층하고

찾아보니까 마땅한 며느리감이 안보이는 겁니다.

귀족집의 딸, 왕족집의 딸들 보니까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아주 더러운 처녀들입니다.

제대로 처녀같은 처녀가 없는 겁니다.

사윗감 고를려니까 또 그래요.

그래서 왕족들 귀족들이 가만히 생각하다가

그러면 이 땅에서 정말 순결하고 깨끗한 며느리감이 어디있는가

하고 찾았더니놀랍게도 그렇게 박해받고

업신여김 받던 그리스도인 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딸들은 순결하다 깨끗하다.

몸만 깨끗한 것이 아니고 마음도 깨긋하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깨끗하다.

그렇게 소문이 난겁니다.

과연, 만나보니 그렇거든요.

귀족집에서 왕족집에서 혼사를 이루기 위해 청혼을 합니다.

저쪽에서는 안할려고 그러지요. 그렇지만 강제로라도 데리고 온겁니다.

딸을 데려오고 또 사위도 삼게 되고 그렇게 된겁니다.

강제로 결혼을 한 이 그리스도인 처녀가 귀족 집, 왕족집에 시집을 와서

아이를 낳게 됩니다. 아이를 뱃속에 갖게 되었을 때부터

하나님께 기도 합니다. 남편은 믿지 않지만

우리 시부모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지만

이 아기만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뱃속에서 부터 기도했습니다.

아기는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인이 되버린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한 대가 지나고, 두 대가 지나고, 삼 대....

이렇게 백 몇 년이 지나니까

당시 왕족, 귀족이 전부 그리스도인이 되버린겁니다.

황제까지도, 황후까지도 그리스도인이 되버렸습니다.

그래서 국교가 된겁니다.

완전히 복음화가 이루어 졌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와 똑같으리라고 봅니다.

여러분 이 성경에서는 과거라는 것이 없습니다. 항상 현재입니다.

항상 같은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세계 복음화를 이루는 것은 선교사가 가서 할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하고

세상 사람들 보기에 깨끗하다면

얼마가지 않아서 완전 복음화는 문제 없으리라 봅니다.

그렇지 않아요?

온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딸은 아름답고 깨끗하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아들은 훌륭한 사윗감이다. 그렇게 되니까 얼마나

쉬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 가정에 여러분 자녀가 앞으로 이 땅을 복음화 하느냐 못하느냐는

여기에 달렸습니다. 그것은 먼저 여러분 부모들이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먼저 인격자가 된 후에 한 단계 높은 거라는 겁니다.

이 사탄의 이 유혹은 타협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이것은 또한 자기자신을 불신하고 하나님에 대한 그 소망을 버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함으로써 정말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그런 유혹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복종으로 대항해서이겼다는 사실입니다.

한번은 당 간부에게 나도 그런 타협안을 받아봤습니다.

당 간부가 하는 말이

-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은 내가 눈 감아 주니까 가능한데

당신은 지금 굉장한 세력과 싸우고 있는데

1 16억으로 싸운다는 거에요.

그래 무슨 말인가 했더니, 중국 공산당하고 나하고 싸운다는 거요.

왜냐하니까 중국 공산당이 하지 말라는걸 하고 있으니까

거기에 대한 반대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러지 말고 내가 당신이 건강한 사람 마을에 가서

일 하는 것은 보호해주고 절대적으로 눈감아 줄 테니까,

거기서는 나오는게 어떻겠는가?

그러면 당신이 가서 배고프게 고생하지 않아도 되고

앞으로 당신 가만 보니까 그 병에 전염되어 곤란할

수 도 있으니까 어떻게 하겠느냐고..

참 기가막힌 타협안입니다. 요런게 딱 걸리거든요.

제가 한참 생각하는 척 하면서 그랬습니다.

- 이 보시라고, 내가 여기온 것은 성한 사람들 위해서 여기 온게 아니라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 위해서 왔는데, 내 목적한 바가 그건데 나는 이건

안해도 좋아. 이 성한 사람들 위해서는 딴 사람이 얼마든지 와서 할 테니까

여기 놔두고 난 그냥 거기 들어가 있겠다고.

그랬더니 그 사람 하는 말이 나중에 후회 할 건데 하면서 협박도 하면서

물러났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이같이 사탄으로 부터 시험받을 때가

많습니다.

너무 그렇게 말씀대로 하지 말고, 너무 그렇게 성경적으로 신앙대로

따라가지 말고, 좀 적당하게 타협하면서도 따라갈 수 있지 않느냐!

이거얼마나 엄청난 말입니까? 적당히 하면은......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때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세가지 유혹이라는 것은 항상 우리가 당할 것을

예수님이 표본으로 받은 유혹인줄 압니다.

우리 인생 살아가면서 이같은 일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한번은 제가 기차를 타고 다른 성으로 이동하는데 긴 시간을 여행하니까

또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국 기차에 대해서 좀 이야기 해야되겠네요.

사람이 꽤 많습니다.꽉 차요. 화장실 까지 꽉 찹니다.

그러니까 화장실 볼일 보러 가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탈 때 깡통을 하나 큼직한걸로 들고 탑니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다 그래요. 그 자리에서 일볼거 다 보고

창문 열고 휙 던져 버리면 되니까.... 떨구고는 가고 급하면

또 볼일 보고 그렇게 갑니다.

그런데 문 열 때 좀 조심해야 되지요.

앞 칸에서 잘못 던져 버리면 그 다음 칸으로 떨어지니까.

처음엔 제가 그걸 몰랐는데

중국 사람이 문을 열 때 상당히 신중하게 살며시 열길래

저 사람이 느려서 그런가 보다 했더니 아니에요.

금방 탁 닫고 나니까 밖에서 탁 떨어지는 소리가 나요.

그렇게 기차를 이용하는데 북경에서 타면은 한 8일간을 와야 됩니다.

그러니 차 안에 냄새는 고약하지요.

여자는 여자대로 이렇게 앉아서 싸고..그러니까

거기는 꼭 목욕탕 같애요. 왜냐하면 일어나면 또 자리 뺏기거든

누가 와서 앉으니까 나갈 수도 없고 들어올 수도 없고 꼼짝없이 앉아있게

됩니다.

그런 판인데 지루하니까 내가 성경을 읽고 있었어요.

앞에 웬 아주머니가 타고 앉았는데 자꾸 날 힐끔힐끔 보는 거요.

갑자기 말문을 턱 열더니

- , 선생 그 뭐가재미있어서 하루종일 봅니까?

중국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산다 그러면 좋아합니다.

- , 이 책에는 잘 먹고 잘 사는 얘기가 있어서 봅니다.

- , 그러면 나도 좀 들려달라고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됩니까.

중국에는 전도를 함부로 못합니다.

그렇지만 상대방이 물으면 대답은 할 수 있거든요.

그래요 그럼 내 얘기 하지요. 얼마나 갑니까 했더니 하루 더 간데요.

그럼 시간은 충분하니까 얘기 하겠다고 , 이제 그 때부터 성경공부

시작한겁니다. 창세기 부터 시작했어요.

에덴의 동산이 나오고..... 이야기 성경으로 쭉 풀어 나갔는데

구약이 끝나기 전에 내릴 때가 되었어요. 선생, 다음에 언제 만나면

계속 합시다 하고 그 아주머니가 내렸어요. 이름도 성도 모르고 헤어졌어요.

그 다음 해에 기차를 타고 어디를 가게 되었는데 이 기차가 가다가 도중에

그냥 섰어요. 몇 시간 후에 간다, 다음에 간다 말도 없이 섰어요.

그래서 기관사한테 물어보니까 내일 아침쯤 떠난다 그래요.

그 추운 때니까. 가서 저녁먹고 어디서 자고 들어로래요.

가차 안에는 불도 안 들어오고 하니까.

사람들이 다 내렸습니다.

나도 내려서 어디가서 밥을 먹을까 하고 어영부영 하는데

저 쪽에서 막 소리를 치면서 부르는 소리가 나요.

난 여기 평생 처음 온 사람이니까, 나는 아니겠지 하고

음식점을 찾고 있는데 갑자기 웬 사람이 제 허리를 꽉 껴안아요.

보니까 웬 부인이에요.

- 당신, 누군데 이러오?

- 아니, 선생 날 모르겠소.

- 모르겠다고,

- , 그 때 저... 아담 이야기 해 주고 그런 사람 아니냐고..

가만 보니까 알듯 하기도 하고 잠시 만났던 사람이라

워낙 오래되어서 모르겠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내 앞에 앉아서 이야기 듣던 그 아주머니에요.

나 만날라고 기차만 타면 맨날 첫칸부터 마지막 칸 까지

다 돌아다녔다는 거에요. 그래서 왜 그랬는가 했더니

이 사람이 이 성, 저 성을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행상인이에요.

이 성에서 받아서는 저 성에 팔고, 여기것은 또 저기다 팔고

그렇게 한번 나가면 몇 달 씩 돌아다니는 사람인데

외부에서 온 행상인이 오면 얘기를 듣고 싶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오게 되면은 이야기를 잘 하는데

날 만난 이후로는 나한테 들은 성경 이야기만 한 거에요.

뭐라고 했냐니까?

아담이 하와하고 결혼했는데 첫 날 밤에 뭐가 잘못되서

큰 할아버지가 집에서 쫓아냈다고..

그런식으로 이야기를 재미있게 엮어 나가니까 사람들이 자꾸 그 얘기를

하라고 그래서, 계속 하다보니까 이야기 밑천이 떨어진거에요.

날 만나서 들어야 계속 이어지는데....

그래서 기차만 타면 기차 안을 뒤지면서 찾았다는 거에요.

못만나니까 자기가 기도까지 했다고 그래요.

당신 하나님이 누군지 몰라도 좀 만나게 해달라고...

그리고 1년 만에 만난겁니다.

자기 집으로 가자고 그래요.

기차가 멈춰 선 그 동네가 바로 자기 집인 겁니다.

가니까 아,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는데 한 이 백명 가량이 몰려왔어요.

이 아주머니가 어디 나갔다 오면 동네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으러

이 집으로 오는 거에요. 나한테 성경 이야기 듣고 나서는

그 때부터 일년 내내 그것만 이야기 한겁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듣고 또 다른 얘기 없냐고 할 판인데 절 만난 거지요.

잘 되었다고 선생이 직접하라고......

그러고는 동네 사람들을 모아온 겁니다.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쉬지않고 열 네 시간 성경공부를

그 때 처음 해봤습니다. 그날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아침

아홉시 까지 모두 앉아서 제 얘기를 들어요.

창세기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이야기 해 나가니까

자기들이 들었던 내용하고 좀 다르니까

- 그 아줌마 이야기 한거 틀렸지 않냐고....

그렇게 공부를 했는데 사람들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거기가 바로 교회가 되어 버렸어요.

세례도 안받고 성경도 모르던 사람이..

아담과 하와가 결혼해서 뭐가 잘못돼서 쫓겨났다고 이야기 했던 사람이

그 교회 지도자가 된겁니다.

성경을 하나 주면서 예전처럼 이야기 하지말고

그냥 처음부터 죽죽 읽어나가라고 그러다 보면 다 외워지니까

그렇게 하라고.

제게 몇 가지를 물어요.

사람 죽으면 어떻게 해줘야 되는지....

그냥 묻어니까 섭섭하더래요.

제가 어떻게 하라 그러고 기도문을 적어줬습니다.

또 젊은 애들이 혼인을 하는데 그냥 당서기 앞에 가서 선서 하는데

그게 좀 싱겁대요.

거기 갔다와서 뭔가 하나님 한테 알리는게 없냐고..

그래서 그것도 가르쳐 주고 기도문을 적어줬습니다.

세례라는게 있다니까 ....

그거 벼슬인데 받아야지요 합니다.

난 또 세례가 벼슬이라는 사람 처음 봤어요.

그래서 이거는 함부로 받는게 아니고 시험을 쳐야 한다 하니까

시험을 어떻게 치냐 해서... 당신 특별히 봐줘서 시험은 면제 하는데

성경을 처음 부터 끝까지 네 번 큰 소리로 소리내서 읽어라.

여러분, 바로 그렇습니다. 속으로 그냥 웅웅하고 읽는거 하고

소리내서 읽는거 하고 다릅니다. 한번 성경을 소리내서 읽어보면 전연 달라요.

마음 속으로 읽는 것, 두번 읽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렇게 네 번을 읽고, 마지막 한 번은 당신 친필로 한 권을 성경을 쓰라고.

그 때 무시험으로 세례를 주겠다.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겠다고. 자기는 자신 있다는 거에요.

기차타고 계속 읽어대면 되니까....

소리 크게 하면 다른 사람 시끄럽지 않냐고 했더니

소리내서 읽으면 옆에 사람 다 들으니까 자기가 이야기 책 읽어준다고

그러면 된다는 거에요.

그렇게 해서 교회가 하나 생기게 된겁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참 신비로워요.

이처럼 전도는 미루면 안됩니다. 당장에 해야되는 거에요.

하나님의 선이란 것은 미루면 안됩니다.

이 선행이라는거 내 돈 좀 벌면 하지요.

, 지금 내가 몸이 피곤하니까 한 숨 자고 나서 하지요.

그 때는 벌써 늦었습니다.

선한 일과 사랑과 전도는 당장 해야하는 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남편 눈치만 보고 있다가 다음에 기분 좋을 때 전도하지 그러고 있으면

이미 늦은 겁니다. 그 순간에 성령이 함께 역사하실지 어떻게 압니까?

여러분, 성령의 역사는 진실되게 행하는 자에게 반드시 나타납니다.

은혜의 역사도 진실되게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나타난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제가 혼난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그거 이야기하고 끝내야겠어요.

#98 최성식 (기쁨가득)

[간증] 김요석선교사 -마지막(사랑의파워) 05/28 20:56 205 line

제가 혼난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그거 이야기하고 끝내야겠어요.

95 12월인데,

집에 있는데 갑자기 배가 이상해요.

몇 시간을 계속 아픈 거에요. 저도 참을성이 있는 사람인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정도로 배가 아파요. 갑자기 생각에

아하! 이게 맹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맹장 걸릴리가 없는데 하고 생각을 하는데

, 걸릴 이유가 딱 하나 있는 겁니다.

제가 그 사람들이 쓰러져서 제 팔을 베고 옆에서 죽을 때,

죽을 때되서 죽었는가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굶어 죽었어요.

허기가 져서... 먹을게 없는 겁니다.

풀도 뜯다가 겨울이 되어서 말라버리니까 그것도 안되는 거에요.

그래서 생각하다가 옛날, 어른들 말에 땅만 파면 먹을게 있다고

그래서 땅을 한 번 파봤습니다. 한 오륙십 센티 팠더니 땅 속에서

보드라운 흙이 나와요.

제 생각에 갑자기 이게 밀가루 같다는 생각이 든겁니다. 그래서

그걸 반죽을 해갔고 마른 풀 하고 섞어서 자꾸 몇 시간을 반죽

했더니 쫄깃쫄깃 해져요. 그걸 갖다가 수제비를 만들었어요.

그걸 줬더니, 딴 사람은 맛있다고 잘 먹는데 나는 얼굴이 붓고

이상해요. 몇 번 연습하니까 그 다음에는 괜찮아요.

그걸 한 덩어리 먹으니까 위가 든든해요.

아마 그래서 맹장이 걸렸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튼 내가 생각할 때는 맹장이에요.

제가 나귀가 한 마리 있습니다.

그 나귀는 다른 마을을 찾아가는데 그 마을에 있는

어떤 사람이 나귀 세끼를 한 마리 죽일려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하도 불쌍해서

- 여보시오. 그거 죽이지 말고 나한테 파시오.

- 죽일려는 동물은 안파는데 그냥 버릴테니까 당신 가져가시오.

- , 죽일려고 그럽니까?

- 성질이 고약해서 죽이려 그럽니다.

나한테 오더니 성질이 왜 그렇게 좋은지 말도 잘 듣고 좋아요.

우리나라 말을 할려니 대상이 없었는데 잘 되었다고

그 나귀 이름을 돌쇠로 지었습니다.

돌쇠야! 돌쇠야! 오라 그러면 오고, 다리 좀 주물러 달라 그러면

다리도 주물러 주고, 어깨도 두들겨 달라 그러면 두들겨 주고

한국말은 잘 알아 들어요. 그런데 중국말로 하면 못 알아 들어요.

제가 하도 배가 아파서 돌쇠를 불렀습니다.

- 내가 지금 배가 아프다. 그러니까 알아듣는듯 해요.

엎드리길래 겨우 올라타고 나귀를 타고 여덟 시간을 나왔습니다.

배는 찢어지게 아픈데 그 마을에 갔더니 병원도 없고

의사도 없어요. 맹장은 수술해야 되는데.

보니까 침 놓는 사람이 하나있고,

동물 치료하는 수의사가 한 사람 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사람은 제대로 배운 수의사가 아니고

그냥 거들다가 배운 사람이에요.

의사라고 생각하고 들어가서

- 내가 맹장이니까 수술을 해야되는데 배를 찢어서 좀 해주시오.

그 사람이 덜덜 떨면서 하는 말이

- 나는 돼지 배하고 소 배는 열어서 봤는데 사람 배는 안 열어봤기 때문에

못하겠다는 거에요.

침술 놓는 사람한테

- 당신은 할 수 있소?

- 나도 못합니다.

- 그럼 마취약은 있습니까?

- 그것도 없습니다.

제가 들은게 있어서 침으로 마취를 해보라니까

자기는 한 번도 안해봤지만 그건 해보겠대요.

대강 혈을 잡아서 마취를 했습니다.

그 수의사는 덜덜 떨면서 안하는 겁니다.

- 수술 칼 있소?

- 오랫동안 쓰지 않았는데요.

하면서 숫돌에 자꾸 갈아요.

제가 그랬지요.

- 내가 의사니까 그리고 당신 옆에 보조가 두 사람 있으니까

걱정말고 시작하시오.

그 사람이 보조가 누가 있나 해서 둘러보니까 아무도 없거든.

- 어디있소? 안보이는데...

- 내 눈에는 보이니까 괜찮다고 하라고.

보통 오른쪽에 맹장이 있으니까 이쪽을 째라고...

내가 의사라고 그러니까

- 그럼 당신 시키는대로 하겠소.

- 그러라고.

옆구리를 찢고 창자을 꺼냈는데 어느건지 모르겠다는 거에요.

옆으로 볼려니까 나도 안보이고.. 그럼 안되겠다 도로 집어넣고

가운데를 길쭉하게 째라.... 나도 볼 수 있게

그러니 그 사람이 배꼽 위 부터 쭉 쨌어요.

조금 적당히 쨌으면 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까 맹장은 조그맣다고 그러는데 알아야지,

나도 봐야되니까 그렇게 찢었습니다.

그 참 속이 이상하게 생겼습디다.

저보고 이겁니까, 저겁니까? 그래요.

나도 모르지 어느건지.. 그건 아닌거 같다. 그것도 아니거 같다.

그러다가 뭐가 부패된 듯한게 조그만게 달려나와요.

아 그거 같다. 잘라버려라.

잘라내고 내장을 도로 집어넣었습니다.

난 아무 실로나 배를 끌어매면 되는 줄 알았어요.

나중에 알았지만 수술하는데 실이 다르다고 그러대요.

이불 꿰매는 굵은 실로, 바늘을가지고 대충 끌어맨 겁니다.

그게 붙어갖고 아물지가 않아요. 그 때가 겨울인데,

날씨는 춥고 배는 열었다 닫으니까 얼어오는거 같고.

거기다 무슨 약을 쓰야 되는데 나중에 알았지요.

피는 멈췄지만 물이 줄줄나고 그래요.

할 수 없이 나귀를 타고 어두워 가는데 우리 마을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돌아와서 있는데 이 삼일 후에

눈도 오고 하는데 다리가 얼어오기 시작합니다.

설상가상이 그 말인거 같애요.

배는 찢어졌지요. 두 다리는 점점 얼어옵니다.

하도 기가막혀서 들어가서 드러누워있는데 꼼짝을 못하는 겁니다.

다리가 점점 부어오르면서 거기서 누런 진물이 나오고 퉁퉁 붓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까 다리를 잘라내야 될 정도로 그렇게 심각했습니다.

,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오더니 좋아해요.

- , 좋아하느냐? 했더니

- 당신도 우리같이 된거 같다고...

두 다리 잘라지면 이제 어디 안가고

우리하고 평생 살테니까 좋다는 거에요.

그런데 내가 너무 괴로와 하니까 보더니 안됐던지

팔다리 없는 사람들이 기어와서 제 다리를 맛사지 하는 겁니다.

팔다리 없으니까 얼굴을 갖다가 그냥 비벼 댑니다.

팔이라도 좀 있는 사람은 팔로 비비는데 거기서 뭐가 나옵니까?

자기 몸에서 나오는 피고름이 그냥 묻어서 제 발을 감싸기 시작합니다.

제 찢어진 배 안에도 비벼대니까

배 위에도 이만큼 고름으로 덮였습니다.

나중에 굳어지니까 그것이 깁스처럼 그렇게 말라요.

그런데 그 부풀어 오른 배가 점점 가라앉는 겁니다.

그 두꺼워진 다리도점점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나중에 그게 장화처럼 벗겨져요. 무릎까지 이렇게 길게..

벗겨지니까 이만큼 두꺼운데..

피고름 장화! 그 때 처음 봤습니다.

배에서도 그걸 뜯어내 봤습니다. 깨끗해졌어요.

여러분 제가 그 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가장 더러운 문둥이 고름으로도

최고의 명약을 만드는구나!

그 안에 이들의 사랑이 있기에......

아무리 더러운 것도 사랑과 함께라면

최고의 명약이 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놀라운 것을 하나 깨달았습니다.

내가 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푼다고 왔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어떤 분은 제가 예수님과 닮아간다고 그럽니다.

예수님처럼 산다고 그러지만 사실 그렇지 못합니다.

그 때 제가 깨달은 겁니다.

예수님과 저와의 차이점이 바로 이거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천년 전에 많은 문둥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저는 문둥병자가 제 다리와 배에서 나는

고름을 깨끗이 고쳤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주님과 저의 차이라는 것을 그 때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오히려 이 문둥병자 보다 더 아랫사람이

아닌가.

오히려 내가 그들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가 그들에게 도움을 받았구나!

사실로 그렇습니다. 제가 진실로 고백하는 것은

제가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그 때 비로소 주님이 제게 하신

그 일의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 이렇게 겸손을 배우라는 거구나.

내가 가장 낮아져야 되겠다.

주님의 십자가 지기 위해서는 가장 낮은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영적으로건 육적으로건 가장 낮은 사람이 되어야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질 수 있겠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뭔지 압니까?

성령의 역사가 뭔지 압니까?

그것은 사랑의 역사입니다.

사랑을 하기에 그 더러운 고름이 가장 귀한 약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기에 교만한 사람이 가장 겸손하고 착한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사랑하니까

하나님께서 쓰시고 그 고귀한 십자가 까지 대신지게 맡기셨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주님의 사랑, 그 사랑을 받아서 실천할 때마다

그 사랑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 은혜의 역사 반드시 나타날줄로

믿습니다.

 

 

                  

'찬양의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의 십자가 보혈 아니면  (0) 2020.01.27
유대땅 언덕에  (0) 2019.12.14
In The Garden By Alan Jackson  (0) 2019.02.26
둥지를 흩으시고  (0) 2018.09.30
His Eye Is On The Sparrow(참새도 먹이시는 하나님)  (0) 2018.09.3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