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2014-07-21 부터 2017-10-09까지 "뉴스M 자유토론장"에서 진행되었던 진리님과 어부님간에 나누었던 방언토론 내용으로 방언(성령세례)에 관심이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기독교계에 유익이 될 것으로 믿으며 토론 내용을 공개 합니다. 

토론이 페이지의 맨 아래쪽 부터 날짜별로 진행되며 윗쪽으로 올라왔으며, 토론의 내용이 상대방의 일방적인 삭제로 인하여 매끄럽지 않게 진행 되었음을 미리 알립니다.

출처: http://www.newsm.com/bbs/view.html?idxno=5431

 

어부 2017-10-09 12:41:22

방언에는 골방이나 또는 공개적인 새벽기도 장소에서 각자 기도할 때에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여 기도하는 개인방언이 있습니다. 또한 14장에 나타나는 공적인 예배 중에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교회에 예언적인 방언을 말하는 공중방언이 있습니다. 알지 못하면서 성령의 거룩하신 방언의 사역을 이러구 저러구 거짓 증언하는 죄악을 범하지 않으시기를 아무나 설교하는 교회도 아닌 단체의 신성남님에게 권면 드립니다.

지상에 몇천, 몇만?가지, 자기 언어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언어가 많이 있듯이 영계에는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없는 영언(방언)이라는 헤아릴 수 없는 언어가 무수히 많이 있답니다. 방언의 은사에는 영계의 헤아릴 수 없는 언어들과 수많은 지상의 언어 모두가 사용되어 질 수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지상의 언어는 모두 쏼라 쏼라 영계의 언어는 따락 따락 랄랄라로 들릴 수가 있지요. 하나님과의 비밀한 개인 방언기도를 알아듣는다는 전혀 성격적이지 않은 가짜 은사자들에게 현혹되지 않기를 권면 드립니다. 방언을 모르면 다만 모른다, 겸손해 지시기 바랍니다. 

대개의 성령세례 초년생의 방언으로는 개인적으로 베비 방언으로 부르는 랄랄라 방언이 주를 이룹니다. 갓난아기들이 입을 떼고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떼 떼 떼 하듯이 방언 초년생들에게 나타나는 방언의 은사가 랄랄라 방언이지요. 저의 경우에 초창기부터 베비방언을 사용하여 기도를 해 왔는데 10년쯤 되니 순전한 언어방언으로 바꿔 주셨지요. 유창한 언어방언의 은사를 받은 후로는 랄랄라 흉내도 낼 수가 없더군요^^

개인방언은 보좌에 좌정하여 계신 하나님과 직통으로 교통하는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없는 기도요, 귀신이라도 알아 들을 수 없는 비밀한 기도입니다. 고전14장에 나타나는 공중방언은 반드시 예언의 은사자가 알아 듣고 교회에 예언을 선포하는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가 함께 나타날 때에 교회가 진리의 영이시요 예수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의 뜻이 선포되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한국교회의 성도들이시여 걱정할 일이 무엇입니까? 한국교회에는 보혜사 성령께서 공중방언의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신 일이 없습니다. 공중방언의 역사는 오순절 교단인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서만 나타나는 역사입니다. 공중방언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아니하는 한국교단의 중생한 자들이 염려할 일이 전혀 못됩니다. 방언의 은사를 부정하는 은사중단론자에게 공중방언의 역사? 전혀 나타날 일이 없으므로 왈가불가 할 일도 되지 못합니다.

공중방언과 예언의 역사가 나타나는 예배 현장에서 예언이 끝난 후에 회중 각자가 개인방언으로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공중방언과 개인방언이 동시에 일어나는 예배상황입니다.


어부 2016-10-21 17:31:53

영성(Spirituality, Spiritual Formation)이란 무엇인가?

영성: 신령스러운 품성이나 성질, 또는 정신적 경향, ‘영혼의 품질’, ‘영혼의 성향’ 혹은 ‘영적 센스’라고도 한다.

영성이라는 단어에 속한 “영”이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로 퓨뉴마( Pneuma)이다, 그 의미는 창1-2장에 나타나는 "숨 • 호흡"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생기 즉 호흡을 받고 생령이 된 인간은 호흡이 끊어지면 육신은 썩어 흙으로 돌아가고 하나님께로 온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생기, 호흡, 생령”이라는 단어는 모두 “영”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중국 여행사 Guide인 어느 조선족 자매의 간증입니다. 남한에서 여행 온 목사라고 하는 group을 안내하는데 그들로 부터는 무시 당하거나 불손한 일이 전혀 없이 예절이 바르고 다른 남한에서 온 여행객들과는 다르더랍니다. 아!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은 틀리구나. 그렇게 느끼고 있던 중에 우리 교회의 선교팀을 만나게 되고 기독교 인에 대하여 자세히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만나서 참으로 기쁘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이 같고 있는 영성으로 공산당원의 마음을 녹이는 힘, 바로 우리가 같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성 입니다. 

90년대초 부터 인터넷이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영성이란 단어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2000년도에 [생명의 삶과 소금과 빛]이라는 온누리 교회에서 발간하는 신앙잡지에 영성이란 무엇인가? 로 소개되면서 기독교계에 영성이란 단어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으로 압니다.

신령스러운 품성이나 성질, 성향 또는 정신적 경향을 의미하는 단어로 한마디로 이것이다. 신앙인들이 한마디로 딱 짤라 말할 수 없는 단어가 영성이란 단어이다. 영성이란 단어와 함께 신령이라는 단어를 제시합니다. 신령이란? “하나님께 속한 모든 영적인 것” 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것이 구원받은 성도를 통해서 표면으로 나타날 때에 성도의 믿음과 영적인 성품에 따라, 또는 어떠한 교리의 가르침을 받느냐에 따라서, 각각 다른 영성으로 나타날 수 있다. 칼빈이냐 장로교회냐 성결교 감리교이냐 오순절이냐 하나님의 성회이냐에 따라 영성의 차이가 천차만별로 나타날 수가 있다. 같은 오순절 성령을 받은 한 몸에 붙어있는 한 영성임에도 기존세대들 하고 청년세대의 영성이 또 다릅니다. 또한 영성을 다른 말로 믿음의 색깔(Taste)로도 표현합니다. 믿음의 열심으로는 따라올 자들이 없는 은사가 넘치고 성령충만한 오순절파의 영성에도 각자에게 있는 개성에 따라 믿음의 색깔이 조금씩 다른 모습 입니다.

(살전5: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온 영과 혼과 몸의 상태가 주 앞에서 어떠하느냐에 따라 영성이 다르게 나타난다 볼 수가 있다.

성경적인 영성(靈性, spiritual formation)이란? 무엇인지를 바르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과학 문명과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 같지만 사람은 원래부터 영적인 존재이므로 영적인 목마름과 갈망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영을 넣어 주셨기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인다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1:19)”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성경적인 영성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도록 본래에 넣어주신 영의 성질" 입니다.


어부) 2016-08-17 06:22:50

제13장 동성연애

남자이건여자이건 간에 동성연애 행위는 국가적인 도덕기준의 심각한 침식을 반영하는 영역이다. 동성연애자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전례없는 대담성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탈선에 연루된 것을 부인하는 다른 사람들이 이제는 이러한 사람들의 옹호자가 되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크리스찬들이 깊이 관심을 가지는 한 가지 이유는 동성연애를 국가적으로 용인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그 국가의 영적 상태의 한 표시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표류하였을 때, 그 민족은 남색(sodomy)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악을 용납하였다.(왕상14:24)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 동성연애는 용인되지 아니하였다.(왕상15:12)

하나님의 성회는 모든 믿음과 행위는 성서에 근거하여 평가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성경은 동성연애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권위있는 법에 의하여 그 입장이 확립되도록 고려해야 한다.

동성연애는 죄이다.

때때로 인간적인 이유는 동성연애를 심리학적인 문제이거나, 육체적인 상태 혹은 생활방식의 신중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죄라고 한다. 이 문제에 관한 교회의 관심은 소수 그룹에 대한 차별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문제이다. 성경은 이것에 대하여 명확하게 말씀한다.


1. 동성연애는 하나님이 태초에 제정하신 성의 원리에 반대되기 때문에 죄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1:27) 하나님이 남자를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셨다(창2:18)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남자에게 적합한 배필을 창조하셨다.(창2:18) 남자의 외로움은 다른 남자를 창조함으로써 제거된 것이 아니라 여자를 창조함으로써 제거되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이 여자를 그에게 데려왔을 때 아담음 “이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칭하리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3,24)라고 하였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성의원리를 제정하셨는데 이 원리에 의하여 인간이 번식하게 되었다. 심리학적으로 이러한 관계는 건전하였다. 육체적으로 이 관계는 자연스러웠다. 사회학적으로 이상적인 가정 단위를 세웠다. 성경적인 개념은 인간의 성이란 이성적으로 일부일처적 관계가 이상적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동성연애를 택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성의 원리를 거부하는 것이다.그들의 탈선한 성행위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성의 특성에 대한 죄를 유발하는 것이다.(롬1:27) 그리고 그들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
라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사회적 단위를 구성하는 것이다.(창2:24) 바리새인들과의 토론에서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이 제정하신 성의 원리를 반복하셨다(마19:4-9) 그는 이성 간에 결혼을 제외한 유일한 생활방식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독신생활임을 지적하셨다.


2. 동성연애는 성경이 악하다고 하기 때문에 죄이다.


하나님이 독특한 의미로 이스라엘을 그의 나라로 부르셨을 때 하나님은 애굽의 압제로부터 기적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이상의 일을 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행동을 안내하며 지시하는 한 율법을 주셨다. 도덕에
관계되는 율법 가운데 동성연애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 있다.


레18:22에서 하나님은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 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레20:13에서는 이것을 위반한 사람에 대한 가혹한 형벌을 명령함으로써 이 하나님의 명령을 보강하고 있다. 즉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금지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롬1:21-27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창조주보다 창조물을 섬기며 경배하는 사람들의 생활에서 따라오는 결과들을 기록하였다. 그들은 그들 사이에서 자기들의 몸을 부끄럽게 하였다. 그들은 성을 순리대로 쓸 것은 바꾸어 역리로 썼다. 그들은 불의, 음행, 악의, 탐욕, 악독이 가득하였다. 그들은 부정한 자요, 원통함을 풀지 않은 자요, 무자비한 자였다.


바울의 시대에 고린도는 부도덕으로 유명하였다. 이 도시는 상업 뿐만 아니라. 악폐와 부도덕의 중심지였다. 교회가 이 도시에 세워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모든 종류의 부도덕을 어떻게 보시는지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였다.
그 기록은 매우 뚜렷하다. 바울은 기록하기를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리고 계속하기를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하리라”(고전6:9,10)고 하였다. 바레트(C. K. Barrett)는 그의 주석 “고린도전서”(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에서 탐색은 미동을 상대로 하는 남색을 의미한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탐색과 남색은 남자 동성애 관계에서 하나는 소극적이고, 하나는 적극적인 상대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기록하기를 법은 “불법한 자와 순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를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하였다.(딤전1:9,10) 이 사람들은 의롭다고 묘사되는 사람과는 대조적으로 경건치 않은 자들이라고 하였다.


3. 동성연애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죄이다.


고대 소돔이라는 도시는 동성연애에 대한 동이어가 되었다.(영어로 sodom 사람은 남자 동서연애자를 의미한다:역자주) 다른 악한 것들이 이 사회에 존재하는 동안 동성연애도 현저하게 되었다. 소돔의 동성연애자들은 매우 타락하여 자기들의 동네에 찾아온 손님들을 욕보이려고 위협하였다. 역사적인 기록은 그들이 난폭해져서 롯이 손님들을 맞아들인 그 집의 문을 부수려고 하였던 것을 보여준다. 오직 하나님의 간섭으로 롯과 그의 가족은 악한 의도에서 건짐을 받았다.
이 사람들은 너무 타락하여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창19:4-11,24,25) 이 도시들에 대한 심판의 가혹한 정도는 너무 강렬하여 베드로와(벧후2:6) 유다(유7)가 하나님의 심판을 설명하는데 사용하였다.


동성연애자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


성경이 동성연애는 죄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지만 또한 동성연애자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가르친다. 동성연애는 도덕적인 문제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그 죄인을 도우실 수 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
이 없다.


고린도에 있는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권세에서 구원받는 이전의 동성연애자들이 있었다. 고전6:9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수 없는 자 중에 동성연애자를 포함시켰다. 그리고 11절에서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과거시제이다. 그들은 동성연애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죄로부터 구원받았다.


성경은 속죄의 효력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제한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제거할 수 없을 만큼 어두운 죄의 자국은 없다. 세례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보라”(요1:29)고 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 ”(고후5:21)고 기록했다. 요한도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요일1:9)고 기록했다.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능력을 통해 사람들은 그들의 죄의 본질과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고후5:17)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죄의 심판과 권세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는 동성연애자들도 다른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와야 한다.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행위는 회개와 믿음 두 가지를 다 포함한다.


예수를 주시요, 구세주로서 영접해야만 한다. 이러한 회심의 개념들은 순서적이기보다는 동시적이요(회개가 먼저 오고 그 다음에 믿음이 오는 순서적인 것 보다는 회개와 믿음이 동시에 있을 때 회심의 역사가 있다는 의미이다.:역자주),이 둘이 다 포함된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한다. 예수는 그의 승천에 앞서 제자들에게 주었던 교훈 속에서 회개와 죄사함이 반드시 전파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눅24:47) 회개는 죄로부터 돌아서는 시점에서 마음이 변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에 반하는 다른 자세들과 행위들도 포함된다.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던 빌립보 감옥의 간수처럼 구원을 소원하는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행16:30,31) 곧 그가 죄의 심판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로부터도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회개와 마찬가지로 순종하는 믿음도 구원의 조건이다.


동성연애자에 대한 크리스찬의 자세

크리스찬은 동성연애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습관에 관계된 사람들에 대해 크리스찬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떤 죄들은 타락한 자와 초신자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다른 죄보다 더 책망 받아야 한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크리스찬은 동성연애자들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는 자세를 갖도록 확인해야 한다.

그들은 이러한 행위를 용인하게 하는 감상주의적인 경솔함을 피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기를 원하는 자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간과해서도 안된다. 증언을 위한 기회가 전개될 때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정직하게 원하는 사람들과 하나의 또 다른 생활방식으로서 동성연애에 대한 동정심을 구하는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기 위해 성령의 인도를 따르도록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5절에 언급된 부도덕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엡5:6)라고 성경은 신자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계속해서 성경은 신자들이 열매없는 어두움의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엡5:11) 하나님께서 정죄하는 것을 교회가 너그럽게 봐줄 수 없다. 만일 동성연애자들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제안을 거부한다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영역 밖에 놓아 둘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교회의 교제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성연애 도착증에 빠진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기는 구한다면 크리스찬은 도울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신자의 마음에 널리 뿌려진 것처럼 이 사랑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처럼 신자들도 죄를 미워하면서 죄인을 사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신자들은 동성연애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행하는 길이 죄의 길임을 깨닫도록 돕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해 신실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 누리는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능력과 풍성한 생명에 대해 증거해야 한다. 그들은 동성연애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축복을 원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모든 것을 해야 한다. 그럴때 그들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을 아는 만족을 누리게 될 것이다.(약5:20)


어부 2016-07-25 07:47:57

간증이란?

간증은 하나님께로 향한 당신의 순례 기록이며,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효과적인 도구의 하나이다.

간증이 효과적인 증거가 되는 이유
첫째는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경험한 바를 듣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고, 
둘째는 아무도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반박할 수 없으며, 
셋째는 개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쉽게 나눌 수 있고, 
넷째는 다른 사람도 자신의 삶을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도록 할 수 있고, 
다섯째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버리게 할 수 있다.

효과적인 간증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민감한 부분에 대해 먼저 파악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삶 가운데서 건드리거나 자극을 받으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영역이나 필요가 존재한다.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간증을 나눌 때 자신의 민감한 부분을 중심으로 간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이 자신의 문제를 솔직하게 인정할 때, 비로서 사람들은 당신을 진실하며 가까이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게 되어 자신의 민감한 부분도 당신에게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필요한 부분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도와주셨는가에 대해 나누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간증을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삶, 믿게 된 경위, 믿음 후의 삶의 변화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전했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삶에서는 자신을 청중들과 동일시하면서 그들의 민감한 부분을 드러냈고, 믿게 된 경위에서는 왜 제자가 되었으며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해 밝히고 있다. 끝으로 믿음 후의 삶의 변화에서는 자신의 필요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해결되었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간증을 나눌 때 주의해야 할 점으로는 
첫째, 자신의 지난날을 다 이야기하지는 말 것(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 것)
둘째, 바울의 간증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눌 것, 
셋째, 민감한 부분을 상세히 설명할 것, 
넷째, 복음을 명확하게 소개할 것, 
다섯째, 민감한 부분의 해결책을 설명할 것, 
여섯째, 신중하게 나눌 것, 
일곱째, 1인칭을 사용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하되
설교를 하려 들거나 자기 자랑을 늘어놓지 말 것, 
여덟째, 자신의 간증의 가치를 인식할 것(그리스도와 하신 사역을 높이고 있는가?)
아홉째, 사실을 말할 것, 
열번째, 기도하며 성령의 감동으로 준비 할 것 등이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당신의 간증에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삶 가운데 있었던 민감한 부분을 사실적, 구체적, 그리고 개인적으로 간결하게 써야 한다. 믿게 된 경위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영접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믿은 후 변화에서는 당신의 민감한 부분과 관련 지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를 설명하되, 설교로 발전되어서는 안 된다.


어부 2016-06-25 12:28:36

신자의 보장

하나님의 성회는 신자의 보장에 관하여 하나님의 성회 조례에 선언하였다(제 8조 1항)

신자의 보장은 그리스도와의 생생한 관계에 좌우한다는 성서적인 가르침의 견지에서(요15:6), 
거룩한 삶으로의 성경의 부르심의 견지에서(히12:14, 벧전1:6),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책임이 사람에게 일부 있다고 하는 분명한 가르침의 견지에서(계22:19), 
잠시 믿던 사람이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의 견지에서(눅8:13),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한번 구원받은 사람이 그 구원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고 하는 무조건적인 보장의 입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왜 이러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지 더욱 설명하고자 한다.

신자의 보장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의 극단적인 입장의 중간에 서있다. 우리는 양쪽의 가르침에서 성서적인 요소를 받아들인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특권을 올바르게강조하는 반면 알미니안주의자는 사람의 자유의지와 책임 또한 올바르게 강조한다. 그러나 이 두 입장을 적절하게 이해하려면 그것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임의에 의해서 때묻지 않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특권을 믿으며 또한 사람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믿는다.

하나님의 성회에 의해서 취해진 신자의 보장에 관한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4가지가 강조되어야 한다.

1.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요3:16, 롬10:11-13, 벧후3:9)
2. 구원은 믿음으로 받으며 유지된다.(롬3:28, 갈2:20-21, 엡2:8, 빌3:9, 히10:38, 벧전1:5)
3. 계속적인 죄는 신자의 믿음에 해롭게 영향을 준다. (롬3:5-8, 고전3:1-3, 히3:12-14, 12:1, 요일1:8, 3:8)
4. 신자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면 상실된다.(요17:12, 딤전4:1, 5:12,15, 히6:4-6, 10:26,27,38, 벧후2:20, 
요일5:16)

1.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구원 받기로 예정되었으며, 또 다른 사람은 멸망 받도록 예정되었는가?” 그리고 “누가 택함을 받은 자인가?” 이 두가지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복음의 메시지가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을 향하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명확해진다. 신약성경을 읽는 사람은 이 위대한 진리를 놓칠 수 없다.

그러나 로마서 9-11장에서 신자의 구원에 있어서 사람의 자유의지가 배제되며 택함을 받은 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떠나서 완전히 그의 주권으로 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 있다. 예를 들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내가 긍휼히 여길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9:11,13,15,16,18)
그러나 이 구절을 선택에 관하여 가르치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볼때 사람의 의지가 선택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야곱은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선택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이 무엇을 할 것인지
하나님이 미리 알고 계시다는 것에 근거한다. 이 진리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쓴 베드로의 편지에 나타나있다. 이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었다.(벧전1:1,2)

이 진리를 또한 롬8:29에도 나타나 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기록했다. 하나님은 미리 자비를 보일 조건을 정하셨다. 그리고 그의 미리 아시는 지식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를 선택하신다.(엡1:4). 이와같이 하나님은 그의 주권 안에서 구원의 계획을 제공하셨으며 이에 따라서 모든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있다. 이 계획안에서 사람의 의지가 고려된다. 구원은 누구든지 원하는 자에게 열려 있다.

2.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 받으며 유지된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명백히 말씀한다.(엡2:8)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한다. (합10:38, 롬1:17, 갈3:11, 히2:4) 신자의 구원은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아 받
아들여짐과 같이 신자의 구원은 의로운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의 생활로 인하여 유지된다.
크리스찬이 되는 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 이것은 강조되어야 한다. 죄인이 자기가 행한 어떤 선한 일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경우는 없다. 그는 전적으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는다.

믿음으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대신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믿음으로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 앞에 맡기며, 그리스도를 본다. 자신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을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을 깨닫는다.(빌3:9) 그는 믿음을 통해서 자신이 받아들여진 것을 알고, 이러한 지식은 그에게 기쁨과 평안을 준다. 그러나 신자의 상태는 그의 신분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믿음 때문에 안전하게 서있다. 
그의 신분은 그가 믿음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그는 의로운 위치에 서 있으며 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었다.

신자의 상태 혹은 신자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로 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성령과 협력하여 순종함으로써 얻어지는 점진적인 성화인 영적 성장과 관계가 있다.(롬6:12,13, 8:13, 골3:1-5, 벧후1:5-7) 성숙해 가는 과정 속에서
신자는 그의 승리 뿐만 아니라 실수를 통해서도 배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보장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견고할 동안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으로 지키심을 받기 때문이다.

그의 영적 성장은 그의 안에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께 대한 순종과 주의에 따라 달라진다. 완전을 향하여 성장하는 동안에 그는 여전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완전한 자로 간주된다. 자신을 적응시키는 과정 속에서도 그는 안전하며 그의 구원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신자의 보장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나 구원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 보증된다. 이 보장은 신자가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을 유지하는 한, 타락할 수도 있고 결점도 있는 신자에게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3. 계속되는 죄는 신자의 믿음에 악영향을 준다.

성경은 신자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를 지으며, 그가 죄를 지었을 때 그가 의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요일1:8,9, 2:1) 이와는 달리 크리스찬이 죄악의 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즉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그는 습관적으로 죄를 범할 수가 없다. (요일3;8,9 여기서 헬라어 시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죄를 짓는 것은 마귀의 일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누구든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며 습관적으로 죄 짓기를 계속하지 아니한다. 그는 마귀의 자녀가 하는 식으로 죄짓는 것을 계속할 수 없다. 그 대신에 크리스찬은 계속적인 자기의 믿음에 악영향을 주는 것을 인정하고, 죄를 내려놓고 영적으로 자라야 한다.

이것은 크리스찬이 죄를 범할 수 있고 여전히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많은 사람의 첫 번째 반응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염려, 교만, 시기, 쓴뿌리 등은 공통적으로 범하는 과오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죄를 범하는 신자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욱이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죄 없는 완전을 요구하신다고 주장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신분이 그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면 믿음에 의해서 그에게 씌워진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것인가? 만일에 사람이 흠 없는 생활을 유지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얻은 것이 된다!
그리고 또한 사람이 흠 없어야만 하나님이 받으신다면 크리스찬의 삶은 바울이 롬8:1에서 주장한 것처럼 정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계속적으로 철저한 자기 분석과 참회를 행하며, 두려움과 정죄로 가득 차 있으며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확신과 기쁨이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롬5:9-11을 보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비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우리는 위하여 영광에 이르는 모든 길을 제공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 이러한 확신은 그 안에서 우리로 기뻐하게 한다.)

관련된 질문으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순간에 죄를 범한 신자에게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할 수 없으며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신자는 구원을 잃게 될 것이며 영원한 파멸에 이를 것이라고 가르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낙심되는 일인가!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안과 밖을 들락날락하면서 회전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안전하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그러나 크리스찬이 범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강조되어 말해져야 한다. 옛날의 죄를 계속해서 범할 수는 없다.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신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며, 그에게는 이전 것은 지나갔으며 새것이 되었다.(고후5:17)

이와같이 이제 죄를 범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전의 삶은 과거의 것이며, 안에 잠재된 힘이며 다스려져야 하며, 새로운 신분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롬6:11) 이전의 삶은 과거의 것이며, 안에 잠재된 힘이며 다스려져야 하며, 새로운 신분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롬6:11) 이전의 습관과 행실이었던 것은 이제 부자연스러우며 우리의 새로운 마음에 반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죄짓기를 계속하지 아니한다)”고 사도 요한은 말했다. 즉, 죄는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낯선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된 새로운 피조물은 죄를 짓지 아니한다. 그러나 옛것이 잠시 우발적으로 우세하게 될 때 새 피조물은 이 부자연스러운 침입에 대항하여 싸우게 되는데 즉시 의지할 것은 그리스도이시다.

죄를 범한 신자가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면 그는 자신의 영혼이 멸망하게 되었다는 실망을 안고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미쁘시고,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보혜사를 모시고 있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확신을 가지고 돌아온다. 이와같이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특권을 사용하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자신의 신분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신자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강조하는 것도 필연적이다. 신자는 자유의지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계속해서 자유의지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 믿음을 계속 유지 하는 것은 신자의 책임이다.

또한 신자는 죄에 대하여 가벼운 자세를 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가로 사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롬6:1)하며 바울은 묻는다. 그 대답은 단호
하게 부정적이다. 바울은 지속적인 죄가 신자의 믿음에 악한 영향을 준다는 것과 믿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알았으며 또한 가르쳤다.

지속적인 죄는 주제넘게 하며, 고자세가 되게 하며 또한 반역의 증거이다.(민15:30,31) 번역은 의지나 믿음의 순종에 반대되는 것이다. 신자는 반드시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히12:15) 항상 주의해야 한다. 성경의 권면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고후13:5)는 것이다.
왜 이러한 경고와 우려를 하고 있는가? 이렇게 반복되는 경고들은 믿음을 잃게 되면 영원한 영혼의 파멸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신자의 구원은 그의 의로운 행동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그의 의로운 행동으로 유지되는 것도 아닌 것이 사실인 반면 신자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처럼 또한 믿지 않음으로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것도 똑같이 사실이다.
죄와 불신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죄는 믿음을 위태롭게 하며, 믿음을 잃는 것은 자신의 신분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히3:12-14 은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형제들에게 불신에 대하여 경고하였는데 이 불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는 불신의 원인으로서 죄의 유혹을 언급하였으며,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만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할 자가 될 것이라고 상기시켰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믿음에 의해서이다. 믿음을 제거하면 거기에는 더 이상 서 있을 곳이 없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신자들에게 “삼가 혹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지 않도록”(히3:12) 훈계하는 이유이다.

4. 구원은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상실될 수 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쉽게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롬10:21을 보라. 여기서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나 적용할 수 있는 원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신자가 성령의 계속적인 점검을 무시하고 예수를 그의 구세주로 모시기를 거부하는 곳에까지 이르면 그는 구원을 상실하게 된다.

잠시동안 믿다가 유혹이 올 때 배반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눅8:13)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약한 형제가 실족하는 것은 가능하다. (고전8:11) 생명책에 기록되었던 이름이 그 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것은 가능하다.(계22:19)
한 사람이 그의 구세주이신 예수를 이미 배반하였는지 판단하는 것은 항상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에 관한 판단은 전지하신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사실은 확실할 수 있다. 즉 만일 하
나님이 탕자를 돌아오게 하시는 그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직도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아니하셨는데도 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그 사람을 삭제해 버린다.

성경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성령의 탄식에 응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소망을 끊임없이 제의하고 있다. 예수의 초청은 자격을 따지지 않는다.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실 때 이것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다.

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10:13)고 성경이 말씀하실 때도 모든 사람에 대한 것이다.

 

 

어부 2016-06-14 07:31:55

중생한 신자가 귀신들릴 수 있는가?

동양종교와 미국내의 사교의 보급으로 전에 외국에서 선교사 들이 보고한 것과 유사한 귀신들린 역사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런 일은 너무나 자주 발생하는 반면 이러한 영역에 있어서의 가르침은 너무나 미미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라는 명령 이상의 것을 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영혼의 원수에 대하여 확고하게 경고하고 있으며, 귀신은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손길”, 성령의 권능,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통하여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다.

극단주의의 위험

어느 무시된 교리를 강조할 때 성경의 의도를 넘어서 극단주의로 나갈 위험이 있다. 또한 무시된 교리를 전체의 사역으로 삼음으로써 목회의 궤도를 벗어날 가능성도 있다. 이것은 귀신론의 주제에 매혹된 어떤 사람들의 경우와 같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관심을 귀신론에 집중함으로써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들이 귀신을 많이 쫓아내면 낼수록 쫓아내야 할 귀신의 수도 많아지기 때문에 귀신 쫓는
이외의 사역은 실제적으로 무시된다.

그리스도를 높이기보다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빠지게 되는 이러한 경향은 성경의 균형에 모순된다. 또한 귀신을 좇아낼 때 여러 가지 토해내는 등 외적인 현상에 대한 부수적인 선입관은 성경에서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귀신이 영적인 존재임을 잊었다.) 거품을 일으켰던 경우에 있어서도 성경은 귀신이 쫓겨가기 전에도 지속적으로 있었던 일이었으며 귀신이 쫓겨날 때만 있었던 현상이 아님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귀신론에 대하여 비성경적으로 지나치게 강조한 경우 유감스러운 부작용이 있는데 그것은 때때로 성경적인 가르침까지도 악평을 듣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16세기와 17세기의 영국 그리고 17세기 미국의 소위 마법의 결과였다. 영국에서 사례들이 보고된 것이 있는데 그 중에는 아이들이 그들의 몸속에 들어갔다고 추정되는 악령을 토해냈다는 것이다.

1962년 커튼 마더(Cotton Mather)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바드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유능한 설교가였다. 이 사람이 마녀들에 대하여 메사추세츠주의 살렘에 사는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귀신들린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들의 증언 때문에(이 아이들은 다른 설명이 더욱 필요하겠지만 거짓말하는 귀신에 의하여 움직였던 것 같다.) 19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150명이 감옥에 들어갔다. 

고발당한 사람들 앞에서 이 아이들은 발작을 일으키다가 혼수상태처럼 보이는 상태에 들어갔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당한 고통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대었다. 고발당한 사람 중 상당수는 기독교 순교자에 해당하는 믿음과 정신을 보였지만 인격적으로 고상한 판사는 이 사람들을 유죄로 판결하였다. 이 재판이 공개된 결과로 이때 당시의 미국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하여 외면하게 되었으며 사탄과 악령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미신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탄이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귀신이나 악령들에 대하여 잘못된 관심을 갖게 하여 성경이 제시하는 명확한 가르침의 도에서 떠나도록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귀신이나 악령에 대하여 잘못된 태도를 갖게 될 때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외면하게 되고 하나님의 일은 방해를 받게 된다. 그러나 조심한다고 해서 귀신론을 가볍게 취급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귀신의 활동과 그들의 수가 많은 것을 명확히 가르쳐 주고 있다. 영어 성경에서 마귀(devils)라는 단어는 실상 귀신(demons)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더욱 자명한 일이다.

실지로 마귀라는 단어는 (헬라어, Diabolos는 “참소자”이다) 사탄에게만 적용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가 귀신들을 통해서 역사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사탄은 피조물이며 제한 받는 영이며, 편재하지도 않는다. 사탄은 세계의 곳곳에 흩어져 있는 귀신들을 통해서 대부분 그의 일을 수행한다. 귀신들을 쫓아내던 예수의 사역은 적어도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치유하는 사역의 일부였다. (행10:38)-여기서 사용된 “눌린”의 뜻은 오늘날 사용되는 의미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제기되는 질문은 오늘날도 귀신이 활동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한 신자도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 있는가 혹은 누군가가 중생한 신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성령과 귀신이 한 집에 같이 거할 수 있는가?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 아닌가?

저자들이 말한 것

대부분의 옛날 저자들은 참된 기독교인들 안에 귀신이 거할 수 없으며 귀신이 참된 신자들을 사로잡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한 예로서 존 네비어스(John L. Nevius)라는 장로교 선교사는 거의 40년간 중국에서 살았는데 귀신들린 사례를 많이 보았지만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볼수 없었다고 한다. 빅톨 플리마이어(Victor Plymire)라는 오순절 계통의 개척 선교사는 티베트에서 유사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더욱이 최근 여러 교단의 저자들은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넬슨(M. H. Nelson)이라는 의사는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고통 당하는 듯이 보이는 기독교인들에 관한 많은 보고서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들 중 몇몇은 하나님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불순종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외견상 이 의사는 영원한 보장을 믿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귀신이 신자의 몸과 마음에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신자의 몸이 귀신에 의하여 사로잡히는 것은 매우 의심스럽다고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귀신이 기독교인의 속 사람을 사로잡지 않은 채 기독교인의 몸속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하는 성경의 관점에 배치되는 것 같다. 또한 책임이 관계되는 한에 있어서 한 사람을 여러 모양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이방인의 사고방식이다. 만일에 귀신이 몸이나 마음(혹은 자세)중 어느 영역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들어간 것이 된다.

성경이 말하는 것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문제들로부터 구원하고 계시며, 귀신들리는 것으로 부터도 구원 하신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일어난 사건에 대한 그들의 해석과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는지 우리는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비겁하게 두려워하는 영(spirit of cowardly fear)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으로부터 구원받으려면 두렵게 하는 귀신과 근신 혹은 절제의 영(한글판에는 spirit이 마음으로 번역되었음:역자주)으로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두려움을 쫓아낼 필요가 있는 악한 영이라고 해석한다면 동일한 논리로 선한 영들이 들어오기를 간청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잘못은 명확한 것이다. 사랑이나 절제는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들이다. 사랑이나 절제의 영은(a spirit of love and of self-control) 우리
가 성령을 따를 때 결과로서 나타나는 자세를 의미한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영(spirit)이라는 단어는 자세 혹은 기질을 나타낸다. 다윗은 상한 영(broken spirit:상한 심령, 시51:17)이라고 말했으며 솔로몬은 겸손한 영(humble spirit: 마음을 낮추는 것, 잠16:19)이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고린도에 갈 때에 매대신 사랑과 온유한 영(love and meek or gentle spirit: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하였다.(고전4:21) 베드로는 온유하고 조용한 영의(meek and quiet spirit: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단장하라고 말하였는데 (벧전3:4) 실제로는 조용한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이라는 단어는 자기 자신의 심령이나 그것의 표현으로 자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학개1:14), 행17:16, 고전2:11 등. 그러나 학1:14, 행17:16에서 spirit 을 한글 성경에서는 마음으로 번역했다 : 역자주)

이와같이 문맥상 독립된 영적 존재라는 뜻이 나타나 있지 않다면 거만한 영, 성급한 영, 졸리운 영, 시기의 영 등과 같은 말은 귀신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갈6장)이나 죄의 기질로 취급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이러한 죄의 기질을 귀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개 개인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지 않게 되며, 회개할 필요성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은 이러한 죄들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세를 버리라고 한다. 우리 안에서 싸우는 싸움은 성령과 귀신 사이에 싸움이 아니라 내주하는 성령과 육신과의 싸움인 것이다.(육신은 죄의 경향을 띤 모든 감각기관을 의미한다.)

“영”이라는 단어가 귀신에 대하여 사용될 때는 성경은 악령 혹은 더러운 영이라고 말한다. 때로는 이 단어는 같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더러운 마귀의 영(a spirit of an unclean devil, 한글 성경에는 더러운 귀신으로 번역되었음:역자주. 눅4:33)같은 것이 있다. 많은 경우 이 귀신들은 질병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모든 질병을 귀신이나 악령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실재로 많은 구절들이 귀신에 의한 질병과 그렇지 않은 질병 사이에 분명한 구분을 보여준다.(마4:24, 8:16, 9:32,33, 10:1, 막1:32, 3:15, 눅6:17,18, 9:1 등) 이들 중 어느 구절에도 귀신에 의한 질병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있었다는 단서를 보여주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모든 예가 오순절 이전에
사건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이모니조마이”라는 헬라어에는 귀신에게 사로잡히다, 혹은 귀신들리다라는 뜻인데 많이 나타나지 않는 단어이다. 이것은 오직 한번 동사로 사용되었는데 심하게 귀신들린 가나안 여인의 딸의 경우이다. 그 외에는 “귀신들린”이라고 번역되는 분사로써 사용되고 있다. (마8:28,32, 9;32, 12:22, 막5:15-18, 눅8:35) 다시 말하거니와 이 귀신들린 사람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
고 할 수 있는 단서는 없다. 이들 중 대부분은 심한 괴로움을 겪거나 급격한 인격의 변화를 경험하였다.

신자도 귀신들릴 수 있다는 사상은 또 다른 큰 문제를 야기시키는데 그것은 믿음을 잠식하며, 하나님과 하나님이 제공하는 구원에 대한 개념을 약화시킨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골1:13) 지난 시대에는 우리가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다
(엡2:2)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였으며 우리를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으로 삼으셨다(엡2:19)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되었는데 우리의 몸 안에 귀신이 거한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린다. 우리가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롬6:17)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도록 자유인이 되었다. 지금도 신자는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 만일 신자가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그렇게 하고자 하는 자기의 의지 때문이지 귀신에 의해서 침입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로마서는 귀신을 좇아낼 것을 요구하지 않고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데 사람이 믿음으로 자기의 신분이 결정된다.

만일 신자에게 귀신이 있다면 예수님도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분쟁사태를 초래 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 낸다고 말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사탄의 왕국이 서로 대적하며 분쟁하고 있다고 가정하였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거부하였다. 눅11:21,22은 사탄이 신자를 사로 잡으려고 할 때에 예수께서 사탄을 이기시고 무장해제 시킨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귀신이 돌아와서 그 집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만 귀신이 다시 들어갈 수 있다.(눅11:24-26, 마12:43-45) 진실한 신자에게 귀신이 있다는 사상은 또한 구원과 평강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잠식한다. 이것은 신자가 다음 어떤 귀신이 자신을 침입할지 전전긍긍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엄청난 두려움을 자아내게 한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가 소유했다고 확신시켜주는 자유와 배치되는 것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이나 2세기 교회의 신자들은 이런 종류의 두려움을 갖지 아니했다. 주후 139년경에 목자(The Shepherd)라는 매우 영향력 있는 기독교 책을 쓴 헤마스(Hermas)는 부패를 책망하며 기독교의 덕목을 격려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사람 안에서 악령이 거하면서 주관할 수 있다고 말하였지만 이러한 악령을 지니고 있는 사람 안에 성령이 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였다. 성경은 신자를 위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4:4). 신자는 귀신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이다. 이것은 기본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외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지적한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사탄이 그 안에 가득하여 성령께 거짓말하기 전에 이미 타락하였던지, 아니면 스스로 교회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다.(행5:13,14참조) 적어도 그 당시에 자칭 그리스도인 이상은 아니었다.

악령을 대적할 것

귀신들린다는 말을 진실할 신자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하게 보인다.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사탄과 그의 무리들은 외부적인 원수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탄의 세력에 대하여 전쟁 중에 있으며 그들은 우리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엡6:12 참조) 성경적인 강조점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에서 무엇을 대면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 요구는 우리가 누군가를 시켜서 우리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은 밖에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으며 시험하고 있지만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요구는 깨어 있어 전신갑주를 입고 굳게 서라는 것이다. (고후10:3-6, 엡6:10-18, 벧전5:8,9)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사탄을 물리쳤다.(마 4장)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사탄과 그의 귀신들을 믿음으로 대적해야 한다.(약4:7,벧전 5:8,9) 그리고 믿음의 방패는 원수의 불화살을 꺼버릴 것이다.(엡6:16,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대대로 천사를 통해서 오듯이 사탄의 공격도 대대로 귀신이나 귀신들린 사람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사탄의 공격이 외부적이라는 사실은 욥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의 육체에 있는 가시의 경우인데 바울은 이것을 자기를 치기 위하여 사탄이 보낸 사자라고 불렀다.(고후12:7 참조) 바울은 이것을 떠나게 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간구하였으나 하나님은 거절하시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하셨다. 그 결과 바울은 그의 연약함과 수치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여기서 사탄의 사자가 귀신인지, 질병인지, 혹은 사람인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치고 공격하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내쫓아 달라고(cast out) 간구하지 않고, 떠나게 해달라고(to be kept away) 간구하였다. 또한 우리는 바울이 그 자신과 우리 안에서 유일한 소망으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보고 있음을 유의하여야 한다.(골1:2,29) 우리는 또한 영들 분별의 은사가 성령의 내주함이 없는 사람들을 주관하는 영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지 신자들 안에 있다고 여겨지는 귀신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만일 진리가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다.(요일2:24) 오직 우리가 포도나무에서 잘려져 죽은 가지로 버려졌을 때만이 사탄이나 혹은 그의 귀신들이 우리를 주장할 수 있다.

우리의 구속은 전인적인 구속이다. 모든 대가는 이미 지불되었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그리스도가 귀신들렸다고 공격하였다. 그것은 마귀의 교묘한 수작으로서 오늘날 성실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이 귀신들렸다고 공격하게 만드는 것이다. 확실히 여러 가지 구원들이 있다. 그러나 귀신들림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어부 2016-06-11 02:42:28

성령세례 간증

이민 와서 신앙생활 하며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주의 은혜를 알게 된 이후 나의 행동반경은 교회, 가정, 직장 삼각지대를 벗어나 본일이 없습니다. 교회 중심적인 생활이지요. 당연히 수십년을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가서 뒤로 잠그고 나오는 그러한 신앙생활로 모든 공예배와 부흥회, 특별집회의 현장에 제가 있습니다. 당연히 예배준비와 예배실 뒷정돈까지 제 담당 입니다. 그러면서 성령세례 받고 기뻐 어쩔줄 몰라하는 여러 성도님들 수없이 보아 왔습니다. 

1. 그 중에는 한국에서 갓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유학생활로 미국으로 와서 10년동안 공부하며 신앙생활 열심히 하다가 부부박사 학위에다, 아들 딸 낳고 한국으로 떠나기 직전 부부가 성령세례 받고 금의환향하는 복된 성도의 귀환을 여럿 보아 왔습니다. 성령세례 받고 기뻐서 얼굴에 홍조를 뛰며(신부의 얼굴에 연지 곤지 발라야만 있을법한 그런 홍조) 기뻐하는 모습, 자신이 처음 성령세례 받을 때의 담담하던 기쁨보다도 더한 기쁨으로 다가오곤 하던 기쁨,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그런 기쁨 입니다. 

2. 친한 친구 사이인 두 자매가 성경공부에 참석하게 되고 성령세례에 대하여 공부한 이후, 첫 부흥회에서 입니다. 한 자매는 성령세례 받고, 다른 자매는 자신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예배 후 성전에서 대성통곡을 하게 됩니다, 이를 아시게 된 목사님이 “모든 죄를 자복하라” 하며 안수를 합니다. 그 자매 “주님! 잘못 했습니다. 주님! 잘못 했습니다” 하며 째지는 듯한 절규의 자복이 있자, 그 자매의 입에서 따라락 하며 금속성 같은 소리로 방언이 터져 나올 때의 그 모습이 선합니다. 그 두 자매의 남편들은 한전에서 wasting house에 파견 나와있는 engineers 님들. 

나는 그 이후로 죄를 자복할 때 성령세례를 주시는 성령님을 더욱 경외하게 되고, 집회 후에도 나타나는 성령님의 민감한 역사를 놓치지 않으려 끝까지 성전을 떠나지 않는 버릇이 있습니다.

3. 하성의 어느 목사님은 목사가 된지 7년이 되기까지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고 방언을 할줄 몰랐다고 합니다. 성령세례을 간절히 사모하며 밤마다 지붕에 올라가서 별을 세며 기도를 해도 방언을 안 주시더랍니다. 오순절 교회의 목사이기에 얼마나 더 간절 했겠나 짐작이 가는 대목 입니다. 그런데 주일 날에 흑인아이 하나가 성전에서 슬피 울고 있더랍니다. 아이가 슬피 우는 것이 어찌나 불쌍한지 그 아이를 껴 앉고 같이 기도하는데, 그리도 간절히 사모하던 방언이 갑자기 터지게 되고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4. 부엌에서 음식을 조리해 성도들 섬기기를 즐겨 하는 여 집사님, 목사님과 면담을 하는데 목사님이 “집사님은 음식으로 섬기기를 좋아하는데 그 섬김이 주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로 하지 않고 자신의 기쁨을 위해 하기 때문 입니다. ? 아니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내가 할 수 일이라고는 음식 만드는 일 외에 아무것도 없기에 부엌에서 헌신하는데, 목사님은 그것도 모르시고 야단만 치시다니, 분하고 억울하고 속상해서 예배실에서 기도 합니다. 독이 올라 주님께 하소연하며 기도를 하는데, 하고자 하는 기도는 안 나오고 말이 꼬이며 바라지도 않던 방언, 성령세례를 받게 된 내자^^ 입니다.

5.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는 감사의 눈물로 밤낮을 지새는 집사님, 성찬예식에서 반주자의 때롱하고 시작하는 반주에 맞추어 성령님께서 눈물 button을 누르셨는지, 동시에 눈물이 펑 쏟아지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성찬위원으로 떡과 잔을 돌리던 집사, 그 후에 성령이란 단어에 눈을 뜨게 되고 더욱 큰 은혜를 사모하게 됩니다. 가족수련회에서 “방언 받기 원하면 앞으로 나오라” 장로교회에서 오신 강사의 초청하는 소리에 일착으로 앞으로 나가 산 땅바닥에 무릎 끓고 기도를 한다. “성령님이 임하실텐데 모두들 죄를 회개하라” 고 외친다. 집사님 모든 죄를 자복하며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나는 잘못까지도 낱낱이 고백하며 회개 한다. 안수하며 “무엇을 원하느냐”는? 강사목사의 질문에.“방언을 원 합니다” 큰소리로 답하며, 할렐루야를 외친다, 계속되는 할렐루야가 이상한 소리로 꼬이며 이전에 알지 못하던 소리가 입술에서 나온다. 사모하던 방언, 성령세례의 순간이다. 그 도시 교계에 급뉴스, 여야(잠긴동산) 집사가 요~오~란하게도 성령세례를 받았다더라. 

여러 말로 방언 받은 예들을 열거함은, 은혜를 더욱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에게, 주시고마 약속하신 성령세례의 역사를 나타내고자 함이다.

여야 집사, 방언 허락하심을 감사함으로 새벽기도, 부흥회 때 열심으로 사용하던 중. 10여년 동안 사용하던 랄랄랄 방언, 한 순간 거두어 가시고 새로운 방언을 주셨는데, 순전한 각종 언어 방언 이다. 

금요예배에서, 당시 가장 사모하던 말씀이 본문으로 선포되는 순간, 내 심장은 쿵쾅되며 온 몸에 전율이 온다. 예배후에 기도 시간이다, 자신을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없이 무언가에 억제 당하여, 성령님께 붙잡힌 듯한 상태로 기도를 한다, 평소 같으면 기도한지 얼마 후 시간이 지나서 깊은 기도에 들어 갔을 때에야 나오던 방언이, 기도 시작과 동시에 컨트롤 할 수 없는 언어로 나온다, 마치 audio cassette tape이 뒤집혀서 꺼꾸로 돌아갈 때 들리는 소리와 동일하다. 이렇게 새로운 방언을 받게 되었다.


각종 방언 및 방언찬양이, 나의 영, 혼, 육의 상태, 기분에 따라 어떤 언어로 나올 줄을 모른다. 비록 피곤하더라도 입을 열어 성령님께 의탁하면 어느 때는 버벅대는 소리로 시작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아주 맑은 천상의 소리와도 같은 아름다운 찬양이 흘러 나온다. 제가 워낙 찬양 드리기를 좋아하거든요.. 

대학생인 한 형제는 “여야님은 크신 분이시다” 라고 감당 할수 없는 말로 나를 놀라게 한 일이 있다. 교회에서 “장로님은 교회의 고급인력 입니다” 하는 말씀은 주님이 주시는 칭찬 같은 고무 되는 말이지만, 성도이면 누구나 다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좀더 누린다고 “크신 ? 분이시다” 한다면 그 말은 분명 불편한 말이다. 

요한복음21장25절 말씀을 빌려 저의 증언의 참됨을 구성 합니다.
이러한 일어난 일들을 증언하기 위하여 올리는 글이 참된 줄 알며, 성령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나,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곳에 방언이란 무엇인가? 의 공간을 모두 사용하더라도 기록된 댓글로 두기에 부족한 줄로 압니다.


어부 2016-05-31 17:19:40

제14장 교회의 휴거

하나님의 성회의 근본진리에 대한 성명은 “복스러운 소망”이라는 제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께서 오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부활하고 살아남은 자들과 함께 변화할 것은 간절하고 복스러운 교회의 소망이다.” (살전4:16, 롬8:23, 딛2:13, 고전15:51,52) 

예수는 그가 다시 오실 것을 가르치셨다.

예수는 그가 다시 지상에 오실 것을 가르치셨다. 그는 이 사실에 대하여 그의 제자들이 항상 준비되어 있도록 주의 깊게 경고하였다.(마24:42-51, 25:1-13, 막13L37, 눅12:37) 그들은 현재의 시대가 예수의 오심과 더불어 끝이 날 것이라고 이해하였다.(마24:3) 그의 재림에 대한 확증은 그가 죽으시기 전에 그의 추종자들을 위로한 진리들 중 하나이다.(요14:2,3)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에 하늘을 쳐다보는 무리들에게 두 천사가 나타나서 그가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되풀이 하였다. 그들은 그가 가신 그대로 오실 것이라고 선포하였다.(행1:11) 이것은 그의 재림이 문자적으로 육체적으로 볼 수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서신서가 예수의 재림을 가르친다.

신약의 서신서들은 예수의 재림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며, 재림의 절박성은 이 주제를 다루는 모든 성경구절을 통하여 나타난다. 비록 초림과 재림에 관한 가르침의 전체 대의는 재림이 경고 없이 갑자기 일어날 것임을 강조하며, 신자는 끊임 없이 준비된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빌4:5, 히10:37, 약5:8,9, 계22:10)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이러한 기대의 상태에서 살았다.(고정1:7, 살전1:9,10) 고전15:51과 살전4:17에서 바울이 “우리”라고 한 것은 그가 예수께서 오실 때에 살아 있으리라는 소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상으로부터 신자들의 휴거

재림에 관한 성경구절을 비교해 보면 어떤 것은 죄인들의 심판을 수반하고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가시적인 사건으로 말하며, 또 다른 경우는 재림이 신자들에게만 알려지며 지상으로부터 그들의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후자의 경우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휴거라고 불리운다. 이 단어는 우리말 성경에는 없으나, 널리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웹스터 사건”(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Unabridged)에서 휴거에 대한 정의를 “그리스도가 참된 교회와 그에 속한 자들을 그들이 그 주와 함께 하늘의 기쁨을 즐길 수 있는 지구 위의 왕국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라고 내린다. “휴거된다.”는 단어는 살전4:17의 “끌어 올려”라는 표현대로 번역해도 무방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가 오실 때에 한 장소에서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을 신자들이 지구에서 갑자기 없어지고, 불신자들은 남아서 환난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마24:26-42) 예수께서 그의 재림에 대하여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를 보고 통곡할 때라고 말씀하셨다.(마24:30) 사도바울은 주의 재림을 악인에 대한 심판과 진노의 때라고 말하였다.(살후1:7-10)

살전 4:13-18에서 바울은 재림의 다른 양상을 생각하였다. 이 간단한 구절은 신약에서 휴거에 대한 가장 직접적이고 명백한 가르침이며 이것은 오직 살아있는 신자와 주 안에서 죽은 신자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있다. 이때에 재림하는 그리스도를 보는 악한 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바울은 예수께서 공중에 오시는 것을 묘사했으나 슥14:4 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재림시에 그의 발이 땅에 닿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요일3:2 말씀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며, 우리는 주님과 같이 될 것이다.

살전4:17에서 사용된 “끌어올려”에 대한 헬라어는 행8:39에서 빌립이 에디오피아 사람에게 세례를 준 후에 사용된 “이끌리어”라는 단어와 똑같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단어는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 것을 말하고 있는데 휴거시에 지구에서 신자들을 끌어올릴 능력의 근원을 밝히는 것이다.

살후2:1에서 바울은 휴거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이라고 불렀다. 이 “모임”에 대한 헬라어는 히10;25에서 예배를 위한 크리스찬의 모임에 대하여 사용된 “모이기”와 똑같은 단어이다. 그것은 성도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의 주변에 모이는 성도들에 대한 한폭의 그림이다.

경건한 사람들이 지구에서 초자연적으로 휴거되는 것은 성경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에녹의 생애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은 하나님과 동행한 후에 지구에서 기적적으로 없어진 것이다.(창5:21-24) 히브리어 기자는 이 경험을 “죽음을 보지 않고 이 세상에서 돌연히 없어진 것을 보여준다.(왕하2:1-13) 고전15:51은 살전4:14-18과 똑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바울은 휴거시에 살아있는 신자와 죽은 신자에게 일어날 변화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는 이것을 비밀이라고 불렀으며(고전15:51), 전에는 숨겨졌으나 성령에 의해서 알려진 진리라고 하였다. 빌3:21에서 바울은 주님의 오심과 “우리의 낮은 몸”이 변하게 되는 때와 연결 시키고 있는데 이것 역시 휴거에 대한 또 다른 언급이다.

휴거에 관한 구절은 그의 백성을 위해서 주님이 오시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한 구절은 그의 성도와 함께 오시는 주님을 묘사하고 있다. 골3:4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와 함께 나타나는 신자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유다서 14절 역시 그의 공적인 나타남과 관련된 많은 다른 구절들에서 말하고 있는 심판을 행하시려고 주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재림하시는 것을 미리 보고 있다.


성경은 스스로 모순되지 않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위하여 오시는 것과 성도들과 함께 오시는 것은 그의 오심에 대한 두가지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이다. 이 두가지 상태 사이의 중간 시기는 적그리스도가 통치하고 악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는 대환란 시기라고 가정하는 것은 성서적으로 정확하다고 믿는다. (단12:1, 10-13, 마24:15-31, 살후2:1-12)

크리스찬과 대환란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께서 오시기 전에 심각한 환란을 견뎌야 하지만 교회는 대환란이라고 불리우는 시기 이전에 휴거될 것이다. 살후 2장에서 바울은 주의 날이(대환란은 주의 날의 일부이다.) 시작되기 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야만 한다고 가리키고 있다. 불법의 사람(적그리스도)이라 하는 한 사람이 나타나야 한다. 바울의 시대부터 불법의 비밀이 활동하였으나 참된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는 영이 막고 있다. 오직 교회가 휴거에 의해서 지구에 없어질 때 이 사람은 공적으로 앞으로 나올 수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있는 휴거에 대한 구절에 이어서, 살전 5장에서 바울은 주의 날에 대하여 경고하였다.(살전5:2,3) 그리고 그는 즉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이 임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시키고 있다.(살전5:4) 바울이 여전히 주의 날에 대하여 말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살전5:9) 바울이 대환란을 포함하여 주의 날의 심판에서 신자들이 구원받을 것을 의미했다는 것은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찬은 주님의 나타나심에 대하여 주의해야 한다고 신약성경은 여러차례 말한다. 그러나 대환란이나 적그리스도의 출현에 대비하라고 가르치고 있지는 않다. 그러한 일들이 휴거 이전에 일어나야 한다고 기대하는 것은 신약에 충만하게들어있는 임박성에 대한 가르침(the teaching of imminence) 시대의 마지막 징조가 나타날 때 그들은 위를 보며, 대환란이 아니라 그들의 구속을 기대하면서 고개를 들어야 한다.(눅21:28) 주님의 오심에 대한 징조들은 그가 공적으로 나타나기 전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징조들이 휴거 이전에 이루어져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건들이 휴거 이전에 일어나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임박성의 교리(the doctrine of imminence)와 조화되지 않는다.

교회가 대환란 전에 세상에서 들려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다루시는 것과도 부합된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 안에 안전하게 들어갈 때까지 홍수를 보내지 않았다. 그는 소돔에서 롯을 구출할 때까지 소돔을 멸망시키지 않았다. 성경의 무게는 환란 전 휴거를 지지하는 편에 실려 있다. 신약에서 재림에 대한 가르침이 있는 곳마다 절박성이 강조된다. 휴거 이전에 다른 사건을 개입시키는 것은 이러한 가르침에 위배된다.


크리스찬들이 주님의 오심을 바라보는 동안 디도에서 한 바울의 말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즉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2:11-14)


어부 2016-05-29 13:47:04

제16장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

본문은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의 교리에 관하여 하나님의 성회 총회의 입장을 나타낸다. 여기서 명백하게 선언되고, 성경적으로 유효한 중대한 진리에 대한 설명이 오순절 운동에 의미 있는 것으로 증명될 것이다.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설립 당시부터 성령세례를 중생의 체험 후에 일어나며 중생과는 다른 경험으로 인정하였다. 그것은 또한 성령세례의 초기의 외적 증거는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임을 인정해 왔다. 하나님의 성회 근본진리에 대한 성명(제 8항)은 그 헌법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성명을 포함하고 있다.

신자의 성령세례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초기의 외적인 표적에 의해서 증거된다.(행2:4) 이때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방언의 은사와 같지만(고전12:4-10,28) 목적과 사용에 있어서는 다르다.
이 성명은 1916년 채택된 이래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시간과 경과와 함께 각 세대의 평가로서 하나님의 성회는 이것이 성경적으로 건전한 입장임을 보아 왔다. 다음과 같은 용어의 정의와 성경의 고찰은 우리가 왜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라고 믿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다.

용어설명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에 대한 교리를 생각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의 테두리 안에서 여러 가지 표현이 사용될 것이다. 성령세례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취한 것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직전에 세례 요한이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성령과 불로 우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11)라고 말하였다. 그의 지상사역을 마치실 때 예수께서 요한의 말을 언급하셨다.(행1:5)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사건을 보고하는 자리에서도 이 말을 반복하였다. (행11:16)

성령세례는 중생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며, 중생과는 구별된다. 성경은 성령께서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세례를 주는 경험이 있음과(고전12:13),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성령 안에서 세례를 주는 경험이 있음을(마3:11)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경우는 같은 경험을 언급하고 있다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례를 베푸는 집행자와 수세자가 세례로 들어가는 요소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 경험의 독특성은 여러 곳에서 설명되고 있다. 에베소 제자들의 경우가 한 예이다. 그들이 요한의 세례 밖에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한 후에(행19:3), 바울은 그들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 제자들은 물로 세례를 받았고 이어서 바울이 그들 위에 손을 얹었을 때 성령께서 임하셨다. 이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은 것과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 사이의 시간 경과는 짧은 것이었으나 그들이 물로 세례를 받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성령세례는 구원 후에 일어나며 구원과 구별되는 것이다.

성령세례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목적에 대한 수단이 된다. 신자에 대한 성경적인 이상은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다. 성령세례는 신자에게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경험하도록 인도하는 위기경험(crisis experience)이다.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라는 표현은 성령이 채우는 능력으로 임하는 최초의 외적 표시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을 연구한 결과 신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외적인 표시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증거는 항상 신자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외적인 표시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증거는 항상 신자가 성령으로 세례받을 때 일어나는 것이지 어떤 미래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행10:44-48)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그의 사역에 대하여 설명을 요구했을 때 베드로는 성령세례를 받은 신자들에게 눈에 보이게 나타났던 증거를 말하였다. 그는 왜 이방인 신자에게 물세례를 주도록 주선했는지에 대한 이유로 이것을 말하였다.(행11:15-17)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최초의 증거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으로서 과거 경험의 증거 이상의 가치가 있다. 그것은 각 신자가 개인적인 헌신의 시간을 가질 때와 방언 통역을 동반한 회중의 모임에서 계속적으로 풍성함을 더해준다.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성령이 신자들에게 그들이 배우지 못한 언어로 말하게 하는 능력을 말한다. 사도행전에서 방언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고린도전서에서 사용된 단어와 같은데 사람이나 천사의 실질적인 언어이다.(고전13:1) 이 단어를 생각하거나 도취도니 소리로 번역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우리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신약시대에 방언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대로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신자가 성령의 도움을 받아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발성”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빈센트(M.R. Vincent)가 관찰한 바와 같이 “특별한 단어이며 기적적인 충격 아래서 명백하고 큰 발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스트롱(James Strong)은 이 단어가 단순히 똑똑하게 발음하는 것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능력은 감정이 올라간 상태나 단어와 구절을 반복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하는 소리를 흉내낸 결과도 아니다. 이와 반대로 방언으로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성령이 주시려는 발성의 길을 막고 있을 뿐이다. 신자는 성령의 초자연적이며 자극을 주는 능력에 의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반응하며, 성령이 발성을 주시는 대로 말해야 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하기 위한 어떤 인위적인 기교도 성서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방언을 최초의 외적 증거로 믿는 이유 사도행전을 보면 사람들이 성령으로 세례받는 경우가 다섯 차례 기록되었다. 이중 세 경우는 상세히 다루고 있으나 다른 두 경우는 상세히 기술되지 않았다.

상세히 다룬 경우를 보면 바람의 소리나 불의 혀 같은 것이나 예언 혹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 등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상세히 묘사된 각각의 경우에 모두 나타나는 유일한 현상은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 10장, 19장의 사건에서 나타나고 있다. 구체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성경적인 경험이 묘사될 때마다 이 경험과 현상과의 관계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바람의 소리와 불의 혀가 선행되고 그리고 제자들의 경험이 나타났던 것을 또한 유의해야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처음의 성령이 부어주신 사건 후에도 반복되었다고 가리킬만한 것은 없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뒤따랐으며 이것은 성령으로 세례 받은 직접적인 결과였고 오순절날 이후에도 계속하여 나타났다.

상세한 것이 나타나지 않은 두 경우의 상황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신자들의 경험에 동반된 것 같이 보인다. 사마리아의 마술사였던 시몬은 신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가리키는 무엇인가를 보았다. (행8:18,19) 만일 그 경험이 동반하는 표적이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되었다면 사마리아 신자들이 성령을 받았는지 몰랐을 것이다. 이 사건을 상세히 묘사된 세 경우의 경험과 비교해 볼 때 시몬이 보고 들은 것은 사람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한 것이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가장 논리성이 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개한 후 사울이 그의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함 받도록 하기 위하여 아나니아라고 하는 제자를 주께서 보내셨다.(행9:17) 시력이 회복된 것은 묘사되고 있지만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함 받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9장에서 더 이상 언급이 없다. 그러나 고전14:18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한다.”고 증거하였다. 바울이 언젠가 방언을 시작했을 것이므로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방언을 시작하였다고 가정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이것은 성령세례를 상세히 다룬 그 사건들과 완전한 조화를 이룰 것이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과 동반할 뿐 아니라, 사도들과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성령세례의 초기 증거로 인정하였다. 베드로와 및 그와 함께 한 사람들도 고넬료의 집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연유는 “방언을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행10:45,46) 이 증거를 근거로 베드로는 편견을 버리고 이 회심자들에게 물세례를 주도록 하였다. 베드로에게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고넬료의 집에 성령의 부어주심에 대한 증거였다.

후에 베드로가 고넬료 사건에 대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 및 형제들과 토론하게 되었을 때 그는 다시 그가 본 현상을 언급하였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막겠느냐”(행11:17)고 하였다. 사도들과 형제들이 방언을 성령세례의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인 것을 다음 구절에서 볼 수 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행11:18)고 하였다.

고려할 질문들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의 교리에 관하여 여러 질문이 제기되었다. 
다음은 그 중에 자주 제기되는 것들이다.

1. 사도행전은 역사를 위한 책인가 아니면 신학을 위한 책인가? 그리고 교리가 선언적인 서술 이하의 것을 근거로 이루어 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는 성경 자체가 대답하고 있다. 성경은 바울로 하여금 쓸 수 있도록 영감을 주셨는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된 것으로 교훈(교리)...에 유익하니(딤후3:16)”라고 했다. 또한 바울은 기록하기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롬15:4)라고 하였다.
교리는 성경에서 고립된 몇 구절을 근거로 하면 안된다. 오히려 내용이 풍부하게 함축된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선언적인 서울에 근거하고 있지 않고 하나님에 관계된 성경 구절을 비교한 것에 근거한다. 삼위일체 교리와 같이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의 교리는 이 주제에 관계되는 풍부한 성경말씀을 근거로 한다. 베드로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방언을 성령 충만함 받은 증거로 인정하였을 때 이 모형을 근거로 교리화한 것은 명확한 것이다.(행10,11장) 양적으로나 횟수에 있어서 이 주제의 무게는 교리화를 위한 견고한 근거를 제공한다.

2.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사도시대에만 속한 형상인가? 바울이 “방언이 그칠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하였는가(고전13:8)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사도시대나 혹은 신약의 정경이 완성될 때까지만 존재할 것이라는 암시는 성경 어느 곳에도 없다. 바울이 방언이 그칠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또한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도 암시하였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10) 그는 또한 방언이 그칠 때 지식과 예언 같은 것들도 동시에 현저하게 변할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때까지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새 방언으로 말하며”(막16:17)가 그대로 적용된다.

3. 바울이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고전12:30)고 했을 때 그것은 부정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수사의문(rhetorical question)이 아닌가?
바울의 질문을 이해하기 위하여 방언 말하는 것의 여러 가지 기능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성령세례에 대한 최초의 증거 역할을 한다. 
(행10:46, 11:15) 사적으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나 기도하는 것은 자기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고전14:2,4) 회중안에서 방언통역과 함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교회의 덕을 위함이다.(고전14:5) 모든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기를 원하는 바울의 마음과(고전14:5)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고 질문한 수사의문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성령세례 받을 때 모든 신자들은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고 개인 기도시에 혹은 자기의 덕을 위하여 계속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성령께서 회중 안에서 방언과 통역을 통하여 자기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쓰시는 도구는 아니다. 회중 안에서 성령은 그 뜻대로 성령의 나타남을 주신다.(고전12:11) 이러한 바울의 서술은 서로 모순된다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

4. 만일 증거 혹은 은사로서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면 왜 교회사에서 이러한 현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가 있는가?
어떤 성경적인 교리가 태만으로 인하여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사실 위대한 영적 개혁은 자주 교리의 부흥이었다. 예를 들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교리는 마틴 루터와 다른 사람들이 다시 강조할 때까지 거의 완전히 잊혀졌었다. 성화의 교리는 다시 교회의 주목을 받게 되는 웨슬리 부흥운동 때까지 무시를 당해왔다. 성령세례와 방언에 대한 진리는 교회 역사를 통하여 20번 이상의 부흥기에 나타났었으나, 최근의 부흥운동 안에서처럼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성화에 대한 교리의 부흥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최초의 증거로서 방언을 말하는 성령세례의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교리를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초기 사역시의 그의 가르침을 거부하였다. 모든 신자들을 위한 지침은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이다.(살전5:21) 시험의 근거는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행17:11)

5.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교리는 사람들이 실질적인 성령세례를 추구하기보다 방언을 추구할 위험성이 있는가?
불행히도 이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교리의 남용이 교리를 무효화시키지는 않는다. 남용과 가짜는 교리를 논박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순수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다른 방언이 성령세례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것인 반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의 명령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령으로 충만함 받기를 힘쓰는 것이 항상 강조되어야 한다. 방언은 자연스럽게 이 경험에 수반된다.

6. 만일 사람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하면 영적 교만의 유혹은 없겠는가?
사람들이 진정으로 성령세례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교만 대신에 겸손을 낳게 할 것이다. 신자들은 인격적 고귀함 때문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봉사와 보다 의미있는 사람을 위한 능력을 받기 위하여 받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자신의 공로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그것은 얻거나 살 수가 없다. 하나님의 모든 은사와 마찬가지로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7. 방언으로 말은 못하지만 주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어 놓은 진실로 거듭난 사람들은 어떤가?
방언을 못하는 헌신된 신자들 안에 성령이 거하시며, 이런 신자들 중에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어 놓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질문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사람들은 그 교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가장 헌신된 신자의 경험에 근거한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회중 안에 있는 경우가 아니면, 개인 경건의 시간에 방언으로 말할 것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결정해야 한다.

또한 사람들은 각각 다른 성질의 재능과 다양한 수준의 능력을 갖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무엇을 완수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모든 공급을 받아들였다면 얼마나 더 많이 성취했을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성경은 신자들이 인간 비교에 근거하여 크리스찬의 경험을 평가하지 말고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개인적인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명백히 가르친다. 바울은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여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10:12)하고 기록하였다. 교리는 항상 인간의 경험에 근거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결론

요약하면 성경의 기록은 성령세례에 관하여 상세히 다룰 때마다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언급되는 유일한 현상임을 말한다. 상세한 설명이 없는 경우에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수반되는 경험이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사도와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로 받아들였다. 성경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개인지도와 예배에 있어서 신자를 위한 특권이며 신자들이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성령의 주권적인 선택에 따라서 회중의 방언으로 말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배제하고자하는 성경적인 제한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일이 적당히 질서있게 행해져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또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14:39,40)고 말씀한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모든 신자를 위한 특권이다. 바울이 “나는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전14:5)고 기록했을 때 그는 비성경적인 소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부 2016-05-29 13:29:48

성령세례에 관한 포인트

1. 세례의 4가지 종류

1)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의 세례.
2)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세례.
3) 회개와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신자에게 받으라 명령하신 물세례.
4) 이미 중생한 자에게 약속하신 성령세례.

2. 물 세례는 명령인데에 반해서 성령세례는 약속이다.

1)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2:38-39)

“선물”은 좋은 것이다. 그래서 사모하고 구해야 할 것이다.
“약속”은 명령이 아니라 약속이다. 약속의 가치를 알아야 하고 그 약속을 믿어야 한다.
“얼마든지”라 함은 받는 자의 차별이 없고 제한도 없고 부족함이 없이 모든 구원받은 신자들을 향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2) 성령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상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과 하나님의 맡기신 일을 이루어 드리려고 애써 본 사람만이 구하게 되어있다. 성령세례를 구해야 함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 나의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려지기 위하여 성령세례를 구해야 한다.

구약의 스룹바벨 처럼 하나님의 전을 세워 드리려 하면서 자신의 능력과 지혜만을 의지하여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철저한 실패를 통하여 이 사실을 배우게 될 수밖에 없다.
슥4:6절은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이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3) 성령을 구하는 자가 전심으로 구하며, 믿고 기다리되 의심하지 않고 약속을 붙잡고 받을 때까지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다른 어떤 것을 구할 때보다 성령을 구할 때 기뻐하신다.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눅11:13)

4) 신자가 구할 수 있는 것 중에 최고이면서 동시에 그 외에 모든 것까지 다 받을 수 있는 것이 성령이시다. 성령을 받으면 그 분과 함께 권능이, 지혜가, 성결이, 담대함이, 또 사랑과 기쁨과 희락과 화평 등등의 수없이 많은 구하지 않은 것까지 다 신자의 열매로써 주렁주렁 매달리게 되는 것이고 결국은 그 열매가 하나님의 제단에 거룩하게 드려지는 것이다. (갈5:22/롬15:16-18)

3.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차이

1) 세례는 항상 시작을 나타낸다. 신자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제부터 예수를 구원자로 믿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섬기고 따르며 사랑하고 충성하는 삶을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목적도 바로 그 일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함이다.

2)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선물로 구하여서 받는 것에서 그쳐버리고 마는 우를 범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성령세례는 시작이라면 성령충만은 그 목적이 이루어지는 완성이다. 성령세례는 시작이라면 성령충만은 그 목적이 이루어지는 완성이다. 영어로는 “fill to overflowing”이란 말이다. 꽉 차고도 넘쳐서 흐르는 상태이다. 어느 신자의 삶에서나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고 유익하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사실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세례받은 수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다 같은 곳에서 끝나지 않는다.

성령충만한 삶이란? 1. 성령께서 나를 인도(lead)하신다는 상태이고 2. 성령께서 나를 통치하고 주관(governing and ruling)하신다는 상태를 동시에 의미한다. 

3)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갈5:24) 말씀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상태”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그 사실을 알며 동의하며 나아가 언젠가 그것이 사실이 되도록 노력해야 된다.

4) 충만이라는 말이 “fill”이라 할 때는 "내 자신을 채움"이라면 to overflowing이라고 할 때는 “다른 이에게 흘러가 생수가 됨”이란 뜻이다. 성령세례는 나를 세워주는 것인데, 성령충만은 남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도록 타인을 세워주는 것이다(요7:38-39)

5) 물세례도 그 자체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베드로 사도는 벧전3:21에서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이것이 매일매일 계속해서 일어나야 할 반복되며 또 앞으로 전진해야 할(process and progress) 영적 순례 여정의 첫걸음인 것을 분명히 한 것처럼, 성령세례도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하였다. 여기서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단어는 진행형으로 씌어졌다. 즉 이것은 단회적 사건(성령세례는 한번 받는 것에 반해)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딛3:5절에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도 역시 진행형으로 씌어졌다. (NIV는 renewal이라 했는데 좋은 번역은 KJB처럼 renewing이라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뜻과 일치함)

다시 말하면 성령세례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날마다 신자의 삶에서 그 능력과 역사가 계속 되어서 결국은 하나님의 역사가 완성되는 것을 사모하며 늘 그렇게 되도록 자신의 삶의 주권을 성령님께 넘겨드리며 자기 자신은 오히려 부인함으로 육체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성령충만의 삶이라는 것이다

 

어부 2016-05-29 13:28:23

요14장은 성령장이다.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이러한 일이 일어 나리라 하나님은 말씀으로 먼저 약속 하셨고 먼저 주신 이 말씀을 붙잡고 믿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이 실현되도록 하신다. 요한복음의 말씀을 붙잡고 이해해야만 행2장의 역사가 일어나며 왜 그러한 일을 하시는지 알게 된다. 

요14장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어라. 내가 떠나감은 너희에게 성령을 보내기 위하여 내가 가노라. 내가 성령을 보내줄 것을 너희는 믿으라. 성령을 오실 것을 약속 하셨다. 우리들은 성령이 오신 것을 알고 또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성령을 받은 나와 성령을 통하여 오신 예수님과 하나되어 연합 된다. 연합된다는 것은 마음이 하나되고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주님과 하나되는 일치가 이루어진다.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 멀리 계신 것 같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계시는 것이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므로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됨이 14장의 말씀이시다

그 다음에 15장에 포도나무의 비유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나를 떠나면 결국은 그 가지는 말라 비틀러지고 아무짝에 쓸모가 없어지게 되며 결국에는 잘리어 불에 던져 지게 된다. 
예수를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보장하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시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실 때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이다 15장의 내용이다. 

14장의 말씀을 15장에 풀어 주시는 것이다. 14장과 15장을 이해하고 말씀이 풀려야 행2장의 말씀이 이해가 된다. 그러므로 신약의 진정한 성령장은 요14장이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구하라(요15:7, 요14:14, 요1서3:22, 마21:22)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찿을 때니라(호10:12)
그때의 말씀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이나 구하라 그러나 계명을 지켜라. 나를 사랑하는 자는 계명이 쉬우니라. 나를 사랑하는 자는 목숨을 내어놓고 라도 지키게 되느니라. 나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말씀이 그 안에 성령이 그 안에 있으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시리라.

조건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성령이 거하신다. 그러한 사람들이 성령님께 구해야 할 것은 거룩이다. 요15:2~ 3 거룩을 구하는 것이 먼저이다. 거룩과 풍성한 가지는 뗄래야 뗄 수가 없는 관계이다. 거룩해야 가지를 맺으며 거룩하고 더욱 풍성한 가지를 맺게 하기 위하여 더욱 깨끗게 하신다
이 비밀이 풀릴 때, 이때부터 신앙생활이 풀리게 된다. 거룩을 먼저 구하는 자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게 하신다. 내가 우리가 거룩하게 되면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 과실을 맺는 일이다

과실을 맺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더 깊은 거룩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거룩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거룩에도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사람 이미 충분히 거룩한 사람 이사야의 입술을 제단 숯불로 지저서 그를 더욱 참 깊은 거룩으로 인도하십니다. (사6장) 이렇게 맺은 풍성함 열매가 주님께 기쁨이 된다. 이러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돌아가심이 놀랍고 귀한 일임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을 때에 우리가 십자가의 사건을 validated 으로 확인하며 유효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온 인류를 향한 복이었다. 이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하는 것을 세상에 알게 하는 사건이 된다. 어떻게 할 때, 저와 우리의 성도의 삶에서 거룩한 열매들이 풍성하게 맺어질 때에, 내가 구한 것 보다 더욱 풍성하게 열매를 맺게 되며 이렇게 풍성한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되는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것을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이 때에 세상에 선포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에 맡는 이들을 편애하시며 이러한 자들에게 복에 복을 더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십시요. 성령은 우리를 예수와 하나되게 하십니다. 그런 자가 포도나무에 붙어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이 풀리고 그 말씀을 기쁨으로 따르며 찬송으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복에 복을 더 하십니다. 은사를 더 하십니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아 그래서 예수를 믿는구나! 그럴 때에 십자가의 사건이 validated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에 맡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는대로 허락하십니다. 거룩하십시요. 거룩을 구하면 거룩을 더해 주십니다 거룩을 구하면 은사가 더해집니다. 그러한 자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셔서 손을 얹고 기도를 하면 귀신이 떠나가고 병이 낳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황당한 것을 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막연하게 믿는 것이 아닙니다. 확실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께는 제물이 됩니다(롬15:16) 

나에게 풍성한 열매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라고 영혼구원에 쓰임 받으라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예언의 능력을 주시고 병자를 낳게하는 능력을 주시고 기적을 일으키게 하셨는데 처음에는 받은 능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하다가 언제부터 나중에는 자기의 만족을 위하여 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거룩하십시요. 거룩한 사람에게 열매를 맺게 하시며 열매를 맺은 자에게 더욱 큰 열매를 맺게 하시며 더 거룩하게 하시며 그렇게 더 거룩하게 하신 자에게 더 큰 은사를 나타나게 하셔서 더 강력한 은사가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세례는 내 만족을 위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기쁨이 되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다. 성령세례로 인하여 나타나는 권세와 능력과 은사와 모든 기적들은 예수님께 만족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한복음 15:11)

세상의 기쁨이 아닌 내 안에서 완전하게 될 때까지 넘치고 넘치는 기쁨 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내 안에서 차고 넘쳐서 성령이 내 안에서 기뻐하심으로 우리의 기쁨이 더욱 충만하게 되는 것이며 영원한 기쁨으로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어부 2015-09-14 14:38:39

진리님이여. 정이철 목사 논단, [방언(1) – “십자가 복음이 완성된 구원계시임을 증거했던 방언”에서“방언이 영의 세계의 관문이며 모든 은사의 기초라고 주장하는 방언파 은사주의자들까지도 성경의 방언이 외국어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였다는데? 그러한 말을 하는 소속교단이나 사람의 이름을 밝힐 수 있습니까? 

막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진리님이여 ㅉ ㅉ 예수님의 이 세상 마지막 말씀이시며 최초의 방언 말씀인줄로 알고는 있으되 도대체 믿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까? 이를 어쩔꼬! 진리님 그러하니 그대는 예수님을 믿는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막16:17-18의 말씀은 복음의 불모지에 목숨을 걸고 나아가 전할 때에 인간이 예상치 못하는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성도들을 보호하시며 표적과 이적을 나타내며,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게 하며, 독뱀이 물거나 잘못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자에게 안수한즉 나으리라.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방언이 지금의 방언이 아니라면 언제의 방언이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지금의 방언이 아니라면 주께서 말씀하신 복음을 전할 때에 나타날 표적과 이적, 귀신 쫓음,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않아야 할 때는 언제라는 것입니까? 그 때의 방언이 지금 나타나야 할 방언이 아니라면 당신이 하는 그 말은 예수님의 복음 그 자체가 가짜라는 말 입니까? 주를 시험 할 목적으로 시행하는 자들의 예를 들면서 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가짜로 만드는 그대 진리님이여! 그대로 간다면 당신은 열두 지옥, 무저갱에 영원히 빠져야 할 자임이 틀림이 없소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방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구요? 방언으로 유추할 수 있는 어떤 내용도 구약 성경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진리(정이철)님 과연 그러한가 어디 봅시다. 

요엘서 2장에서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정녕 모르십니까?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라 하심은, 그 때에 즉 마지막 때에 나의 성령을 구원받은 만민에게 은사의 기본인 방언의 은사를 부어주실 것을 예언하는 말씀이 아닌지요!^^ 구약에서의 “내 신”이라 하심은 신약의 보혜사 성령이심을 굳이 부정을 하지는 않겠지요? 칼빈 신학에서는 신약의 보혜사 성령을 부정을 하니 당연히 꼬일대로 꼬인 영성으로 부정하고 보겠지요? 칼빈인 중에서도 그대 진리님은 지옥불 예약 1위 구룹으로 예정되어 있음을 알기나 하시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대적하니 지옥불 구덩이 1순위를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이지요. 

믿거나 말거나 구약에서의 “여호와의 신” 이시며, 삼위의 성령하나님이시되 신약에서는 인류의 대 구원의 사역을 일임 맡아 하나님의 성령, 진리의 성령, 진리이신 예수의 영, 보혜사로 오신 성령 하나님을 거부하는 그대는 삼위 중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믿고 받아 들이되 성령 하나님은 부정함으로 결국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격이 됨으로 그대와 그대와 같은 일당들은 구원이 없는 것이요. 아무리 신학박사를 추구한들 그대에게 구원이 없는 줄로 아시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러나 성령 하나님은 배척해도 되느니라 하신 말씀이 있는가 성경을 찾아 보시지요. “믿으라” 하시는 말씀은 삼위일체를 유일하신 하나님이 되도록 온전히 믿으라 하시는 말씀 입니다. 삼위일체 중에서 한 분이라도 부정하면 믿는 것이 아니지요. 예수만 그리스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에 구원이 이르리라 하신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성령세례 받은 성도가 구원을 성령으로 확증 받은 것이다” 즉 성령세례가 구원의 보증이다. 주장한 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의 성경 말씀이라는 말 입니다.

80년대 초, 한얼산 기도원장이었다는 그분을 초대하여 연합집회(1981 Colorado Springs, CO)를 주최하였던 주최측 목회자들이 그 강사를 사기꾼이라 하더이다. 그 사기꾼이라는 사람이 내리는 참 방언, 가짜 방언이라는 것을 신뢰하여 위대하신 정이철 님의 칼럼이라는 글에 인용을 합니까? ㅉ ㅉ

이 글을 읽으시는 “뉴스 M” 의 독자들은 이 글을 한 두번 읽고 판단하지 마시고 계속 연재되는 글에 관심을 가지시고 이곳 구석에 있는 자유게시판에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정이철 류의 칼럼은 얼마든지, 누구든지, 성도라면, 당연히, 대적하여야 함이 하나님 앞에 선한 일이 됨을 믿기에 이 일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어부 2014-09-10 20:16:39

수신자: 진리 님과 만인 성도들에게 어눌한 글로나마 복음(All the Gospel, Whole Gospel)을 전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하여 주신 “주께 영광을 올리며” “NEWS M” 측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순절 신앙인 사도 바울”의 인정도 받지 못하는 “교조주의, 극단 칼빈주의” 주제에 무엇인가는 할 수 있겠는지요” 비로소! 어부가 한 말이지만 “진리님의 주제” 참으로 명언 입니다요. 물론 저의 말에 동의하리라 믿지는 않습니다. ㅎ ㅎ 진리 님 :-)

진리 님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두 영언 자들이었습니다. 교회가 태생하게 된 시발점이 된 첫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는 사건이 주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는 120문도 모두에게 성령세례가 임하고 방언하는 사건이 신약 최초로 일어납니다. “오순절 날이 임하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불이 혀 같이 갈라지게 보이며 각각 120문도 위에 임하였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각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저들이 한 장소에 모여있으되 성령의 임하시는 불의 모습은 혀같이 갈라지며 각각의 사람 위에 일대 일로 임하였다. 구원이 일대 일이듯이, 성령세례도 일대 일 입니다.

방언소리가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말미암아 각 유대인들이 우거하던 외국 지방의 말(디알렉스토)로 각 사람들에게 들리기도 하였다. 방언이 영언이기에 사람의 귀로 알아 들을 수도, 이해할 수 없는 소리 랄랄라, 따락따락, 돌 굴러가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기에, 조롱하여 새 술이 취한 자들의 소리라 하지 않았는가? 진리 님?은 어찌하여 술 취한 듯한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로 복음을 전하였노라 망발을 해 대는가? Tongue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소리인 “글로사” 는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영계의 언어일 수도 있는, 성령의 초월적인 현상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소리로라도 들릴 수가 있는 언어였다. 단층인 진리 님의 귀에는 한국어로 들려야만 방언이라 할 것이다. 그렇지요? ㅎ ㅎ

허참 님의 글에 달았던 댓글을 진리님에게도 드립니다^^ 
“진리님은 “행2:1-11”의 말씀을 “외국어”라는 잘못된 “key”로 열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 잘못된 key로 다른 말씀을 풀어보고자 하시니 열릴리가 없지요 ㅎ ㅎ 고전12:10의 방언과 행2:1-11의 방언이 목적은 다르나 본질은 같습니다요. 곧 방언하는 자의 유익을 위하여, 교회에 덕이 되기 위하여, 또는 주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방언을 해야하는 목적이 다르다. “방언의 본질?”은 ㅎ ㅎ 생략하겠습니다요. 이만하면 익히 아실 분 같아서 더 이상의 힌트는 생략 합니다요. 엉뚱한 곳에서 답을 찾으려 하고 있지요? ㅉ ㅉ 방언중단론자일 수 밖에 없는 진리 님을 향한 예정이, 잘못된 “디알렉스토key”로 인함이었네요 ㅉ ㅉ

“한마디로 설명을 드리지요!^^ “외국어일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듣는 자에게 어떻게 들렸느냐에 따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는 말 입니다. 첫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는 사건에서, 방언소리의 출발점이 tongue 이며 도착점이 듣는 이의 귀 입니다. 천하 각국 13나라?로부터 온 사람들과 현지 유대인들의 귀에 각 나라 외국어로 또는 술 취한 자의 소리와 같이 들렸다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도무지 알아 들을 수 없는 소리 또는 술 취한 자가 횡설수설하듯 하는 방언소리, 120명의 문도가 한꺼번에 큰 소리로 기도하는 군중 속에서 방언소리가 각자가 살던 나라들의 본토 소리로 똑똑하고도 분명하게 들릴리가 있었겠습니까? 현대 방언에서도 중국방언이나 일본방언을 해 보았다는 간증을 쉽지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 외국어 방언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소리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방언이라는 것은 혀의 떨리는 현상에 의하여 들리는 소리라는 것 입니다. “방언이 영의 언어” 임이 성도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성경에 의한 바른 이해 임에도 불구하고, 영의 언어가 인간의 귀로 들어 이해되어야만 하는 언어라, 외국어라, 그 뉘가 그렇게 우기던가요? 허참님도 깜빡 속았습니다요!^^ 영의 언어란? 성도가 하나님께 직통으로 고하는 하나님만이 알아 들으시는 신령한 언어 입니다요. 성령의 초월적인 역사로 버벅대거나 랄랄라 방언소리가 언어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부흥회 강사가 자신은 방언을 하는데 상대방은 자기나라 말로 듣더라는, 또는 자신은 영어로 말하는데 회중들은 자기나라 말로 듣더라 하는 성령의 역사도 들어보지 못하였는지요? “

“성경의 방언은 실제 외국어였으므로 그 나라에서 살거나 살았던 사람들은 다 알아 들었다” 이와 같은 헷소리를 다시는 하기 없기요? 진리 님!^^ ㅎ ㅎ ㅎ


어부 2014-09-10 20:15:43

(Now about spiritual gifts, brothers, I do not want you to be ignorant.)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고전12:1)

(in the tongues of men and of angels) 사람의 방언과 천사(들)의 말로 번역된 (고전13:1) “말(language)의 의미는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 이 동일한 한 언어(tongues)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천사의 방언”으로도 번역할 수도 있겠다 생각된다. 분명한 것은 사람의 방언(tongue)이 천사가 말하는 언어(tongues) 즉 영언(spiritual language)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많은 천사의 말이 있더라도 사람에게는 각자 개 개인의 방언, 각자가 방언을 해야 한다. 복수(men)로 기록된 단어에는 단수인 남자(man)의 의미가 숨겨져 있다.(9-10-14 정정). (in the tongue of men)복수의 사람으로 기록되었으되 방언(tonue)이 단체로 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구원이 일대 일 이듯이, 방언도 일대 일이라는 숨겨 놓으신 말씀이 아니신가? 믿고 구하는 자에게 구원이 있으리라!^^ “믿고 구하는 자에게”라는 의미에는 믿고 구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없으리라 하는 의미와 동일하다. 지난 많은 나 날 동안의 방언이 영언이니, 그렇지 않다느니, 하는 토론은 이제 종결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므로 현대의 모든 성도의 방언이 귀신으로부터 받은 옹알이다 보혜사 성령님이 주시는 방언을 우롱하는 “진리 님”에게는 구원이 없다. 결국이 멸망으로 예정 받은 자 임이 틀림 없다. 지옥 갈 자가 누구인가 궁금한 사람은 진리 님의 얼굴을 보라. 진리 님 그대가 목사라고 하니, 고전13:1절의 말씀을 의지하고 세상에 선포한다. 바로 저렇게 생긴 자로 옹알이? 모라? 하는 자가 지옥 불에 떨어 질 자이다. 궁금한 사람은 저 자를 보시요.

ㅎ ㅎ 중국에서 나병환자 선교를 하는 김요석 선교사의 간증 중에서 패러디한 내용이니 너무 나무라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그 간증에 등장하는 지옥에 갈 사람으로 지목된 자는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진리 님도 회개하고, 구원 받고, 다시 물 침례 받고, 성령세례도 받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쓴 글이니 저를 너무 탓하지는 마십시요! - - - - - - -지옥 갈 사람을 보고 싶으면 진리 님을 보시요!^^ - - - - - - -

진리 님이시여! 지옥 불에 떨어질 준비는 되었습니까?
진리 님이시여! 회개하고 돌아서지 않으면 죽어서 일뿐 만 아니라 살아서도 지옥 일 것이요!^^ :-)


어부 2014-08-23 00:37:40

진리 님! 내어 놓은 것도 없이 이렇게 유야무야 끝을 낼 것 입니까? 토론에 응하시는 듯하여 기대함이 높았었는데 역시 단층이심을 만인에게 스스로 증거만 하는 꼴이 되고 말았네요. 

“쨍그랑” 소리에 뜻이 있듯이 하물며 방언소리에 뜻이 없겠느냐? 나귀소리에게도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뜻을 분명하게 주셨다? 그러므로 영적인 방언, 성도가 하나님께 직고하는 방언이라도? 사람 귀에 들려야만 하는 외국어였다? ㅋ ㅋ 저! 저! 진리 님이라 불리우는 저 인간이 참으로 귀신도 웃기는 소리를 한다? ㅋ ㅎ 님의 주위를 돌고 있을 마귀님들이 배꼽을 잡고 있겠습니다요? ㅋ ㅎ ㅎ 

“나는 방언 안 해요” 왜냐하면 “신앙을 변질 시키는 더러운 방언”이기 때문이다? _ 진리 님의 유명하신 말씀이지요? _ 그 유명하신 님의 “나는 더러운 방언 안 해요” ? 가 진리가 되기 위하여 그 고매하신 칼빈신학으로 증명을 해야 하지 않겠는지요? 

[강산이 변하도록 전교인, 목사 가족 포함 방언중단론자 달랑 20명] 이라는 유명한 수식어는 뉴스앤조이 댓글에서만도 여러 번 있는 사실인데, 대 칼빈신학자가 되 실 분이, 누가 한마디 정도 더 거들었다고, 뭐라고 흠집이 더 나겠는지요? _ “강산이 변하도록 전교인, 목사 가족 포함 방언중단론자 달랑 20명 “ _ 진리 님에게 붙어 다니는 수식어를 보며 칼빈신학에서 스스로 이룬 열매에 느끼는 바가 전혀 없으십니까? ㅉ ㅉ 워낙 단층으로 영적인 일에는 백리로 도망하는 맹 자이시니, 느끼는 바는 있겠는지요 ㅉ ㅉ ? ?

방언 토론에 응하시겠다구요? 이 외에도 토론하기 전에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이 첩첩산중 인데 어찌 님과의 방언토론 입문을 제대로나 할 수 있겠는지요? 비록 메아리 없는 토론?이 될지라도 어눌하고 저만의 특유(characteristic)의 횡설수설 식 “수신자: 만인” 이 될 토론으로 노력 하겠습니다요. ㅎ ㅎ ㅎ

어부 2014-08-14 23:22:48

그런가요? 의도된 확 까발림은 아니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의 마지막 열매”니 모니 하는 식의 지금까지도 그의 댓글에서 주종을 이루고 있는 여러 다른 비본질적인 댓글들에 대한 종합적인 당연한 반응이 아니겠는지요. ㅎ ㅎ 저는 이론에 약한 자이기에 상대에 따라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약점이 있지요. 극약 처방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ㅎ ㅎ

이론적인 토론보다는 성경적인 토론을 원 합니다 
“방언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가 없다” 는 발언, 이는 조용기 목사의 말이 아니지요?, 성경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음에도 그는 단층의 알량한 머리로는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기에, 그는 무어라 합니까? “그들의 사단적인 역사에(마치, 바로의 술사들도 모세의 기적을 흉내낸 것처럼), 아무런 분별도 없이 귀신이 주는 옹알거림을 성령님께서 주신 방언으로 믿고 따른 그 결국이”이라 하지 않습니까? “귀신이 주는 옹알거림” 을 정상적인 성도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의 ordain받고 목사로 Impartation 받은 것이 아니라 사단의 신내림으로 Impartation 받은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귀신이 주는 옹알거림”의 출처가 도대체 어디라는 말 입니까? 성경에도, 지상 어디에도 없는 옹알거림, 성경의 말씀보다 사단이 준 깨우침을 우위에 두고 계속 짓꺼리고 있는 그가 아닌지요. 그의 “옹알거림” 사단이 준 깨우침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가 신봉하는 깨우침대로 결국이 사단이와 함께 제 갈 길을 갈 자가 틀림 없지 않은지요? 

[모세의 기적을 바로의 술사들이 흉내 낸 것처럼, 귀신이 주는 옹알거림을 성령님께서 주신 방언으로 믿고], 

“귀신이 주는 옹알거림”이라는 사단이가 넣어 준 거짓말을 대전제로 그의 말이 진리인양 자신의 주장을 성경 앞에 세우며, 성령께서 기록하게 하신 성경이 증거하는 방언을, 귀신의 흉내 내는 방언보다 못한 것이다. 막말을 하는 결국은 성령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인 사단보다도 못하다는 망령된 말고 열두 지옥? 에 빠지고도, 사단과 함께 무저갱에 영원히 같혀야 할 무서운 말을 하는 저 저주받을 진리 님을 어찌 대하여 할까요? “꺼꾸로 말”의 귀재인 그를 어떻게 할까요? 

“방언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가 없다” 는 말은, “성령이 없는 자는 구원이 없는 자이다” 같은 말 입니다. 즉 “성령도 방언도 모르는 자는 구원이 없는 자이다” 하는 소리를 최소한 인간의 청각은 소유한 그 이기에 알아는 듣되, 성경적으로는 풀어낼 능력도 성경 지식도 이해력도 없기에 바알세불의 힘을 빌리어 “귀신이 주는 옹알이”의 깨우침을 유일한 무기로 사용하는 그가 아니일런지요!^^ 구경꾼 님!^^ 

위의 쿠오트 된 내용으로 진리님의 심사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진리님의 Sympathy 가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가 찬찬히 다시 보세요!^^ ㅎ ㅎ :-)


구경꾼 2014-08-14 06:10:02

어부님은 끝까지 이론적으로 싸우셔야지 교인 숫자로 그래 버리면 안되죠 진리님의 교회의 교인 숫자가 20명이라고 확 까버리니 진리님이 아무 소리도 못 하자나요? 끝까지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토론 하세요.


어부 2014-08-12 07:17:08

진리 님!^^ 제가 시간에 쫓겨 변변한 댓글을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

"방언은 분명히 있습니다"? 
거! 무슨 말씀을 하고자 하시는 것인지 알아 듣지를 못하겠습니다요!^^ 
부연 설명을 부탁 드립니다!^^ (_._)

그리구요!^^
What is Rev. YongKi Cho got to do with your salvation? Hah?

목사 가족 포함 방언중단론자 달랑 20명?
등록교인 78만명에 출석교인 30만명

나는 입이 “쩍”하여 감히 비교조차 못 하겠네요? ㅎ ㅎ


진리 2014-08-10 13:16:18

어부님께서 하시는 방언이 진정으로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같은 성령님께서 우리 믿음의 근간인 말씀의 빛도 함께 활짝 열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부님께서는 여전히 말씀과는 상관 없는 자신의 감정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런 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 없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으로 자타? 가 공인하는 성령을 받고 세계 최대 규모의 종교 집단으로 성공시킨 조용기 목사님의 마지막 열매를 보시기 바랍니다. 

방언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가 없다고, 밑천도 없고 뿌리도 없는 망령된 막말에 가까운 주장과 그들의 사단적인 역사에(마치, 바로의 술사들도 모세의 기적을 흉내낸 것처럼), 아무런 분별도 없이 귀신이 주는 옹알거림을 성령님께서 주신 방언으로 믿고 따른 그 결국을!

"방언은 믿는 사람이 아닌 믿지 않는 사람을 위한 표적으로 주신 것이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어부님께서 받은 방언이 지정의, 인격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확실하다면, 말씀으로 님께서 받은 방언이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어부님께서 받은 방언이 성령님께서 주신 것임을 증명하는 길은 그 길 밖에 없습니다. 

아무런 뜻도 없는 옹알거림을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이라고 계속 주장하는 한, 어부님도 조용기 목사님의 전철을 되밟을 뿐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이라고 자신이 하는 방언을 설마 귀신이 준 것이라고 상상이나 하셨겠습니까? 어찌보면 이 모든 것이, 마귀가 육체의 감정을 이용해 준 아무 뜻도 없는 옹알거림을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으로만 철썩같이 믿고 정작 기독교 믿음의 뿌리인 말씀에는 무지했던,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방언은 복음 전파, 즉 말씀을 증거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일 뿐입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제자들이 전파한 복음은 곧 말씀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교계통계표 2014-08-09 08:12:45

사도 바울이 인정한 방언을 그대로 믿는 교회는 날로 성장한다. 기도도 잘 하는 영적성장과 교인숫자가 날로 늘어난다
반면에 그대로 믿질 못하고 영의 소리인 방언을 부정하는 교회는 날로 쪼그라 들고 교인도 별로 없다는 통계이다. 그러한 교회의 목사도 별 볼 일 없는 목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말한 방언을 인정하고 은사로 받아 교회도 부흥하고 교인들도 기도를 쎄게 하여 교회도 부흥하고 교인숫자도 늘고 목사 개인의 영적성장을 도모하도록 합시다.
방언 기도하여 성장한 오순절 순복음 교회를 본 받고 방언을 하여 부흥하는 기타 다른 교회들이 그 증거물 입니다.

어부 2014-08-09 06:19:52

1993년 미 하나님의 성회 Penn-Del District의 Annual Meeting 마지막 예배 시간이다. District의 superindendant의 불과 같은 권면의 설교 말씀이 끝난 후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서서 찬양을 인도하며 모든 예배가 거의 막바지에 도달 했을 때이다. 

얼마 동안 간절한 기도와 찬양이 어우러지며 예배 중에 운행하시는 성령님의 충만하심이 온 회중 위에 역사하심을 느낄 때, 잠시 고요함이 흐르는 듯 하더니, 갑자기 회중 안에서 낭낭한 소리로 방언소리가 터져 나온다. 갑자기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놀라서 눈을 번쩍 뜨고 회중을 둘러 본다. 그 순간! 통변(예언) 그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감지하고 바로 눈을 다시 감는다. 그런데 그 낭낭하게 들리는 방언소리가 귀에 많이 익다. 바로 2주전 부흥회에서 안수기도가 끝난 후, 모든 순서가 끝나가는 중에도 한 자매가 무릎으로 서서 간절히 기도한다. 그 모습을 본 강사목사님 다가가서 손을 머리에 얹는 동시에 “따따부따, 따따부따” 하며 언어 방언이 터진다. 강사목사님 왈 “방언은 혼자 다 받네” 당시에 언어 방언을 모르던 나에게는 기이하게 보일 수 밖에, 바로 그 방언이 미국인들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진행되는 상황에 놀라 가볍게 감전된듯한 상태로 귀는 쫑긋, 온통 진행되는 상황에 집중 한다.

고린도교회에서 실제로 있었고 사도 바울이 고전14장에 기술한 그 상황이 현재 미국교회 실제 상황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 고린도교회에서는 모든 교인에게 성령의 은사가 넘쳐나 모두가 방언하고 예언하고 선지자 노릇 하며, 사역의 분담이 명확히 구분이 안 되었으며 예배에서 무질서 한 상황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남으로 인하여 신자들이 제기한 질문을 당시 에베소교회에 있던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공중예배 부분에 대한 답변이며 Instruction이 고전14장이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변할 것이요. 만일 통변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예배 인도자는 공중예배 중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여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며 통제해야 한다. 예언(방언)하는 자를 둘 많아야 셋으로 통제와 제한을 받으며 통변은 회중 안에서 한 사람이 하며, 다른 사람은 분별하라. 분별하는 사람은 당연히 예배인도자이다. 하나님의 성회 instruction의 가르침은 예언하는 자가 회중 안에서 통변 할 수 있는 자가 있다는 확신이 없으면 아예 예언을 하지 말라.

지금 처음 당하는, 공중예배 중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에 모든 감각이 동원되어 집중한다.

잔뜩 긴장하여 집중하고 있는데 영어로 말하는 통변이 회중 안에서 낭낭하게 울려 퍼진다. 통변의 내용은 “ 담대하게 나가 전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말씀” 그대로이다. 통변이 나오자, 회중의 여기저기서 여성 성도들의 울음이 터져 나온다. 참다가 째지며 터져 나오는듯한 소리로 “Jesus Christ” “Jesus Christ” 하면서 흐느낀다. 우리 한국 회중들 같으면 “주여” “아버지”하고 울부짖을 것 같은데 그들은 “Jesus Christ” full name을 부르며 흐느낀다.

회중에서 나온 예언과 통변을 인도하시는 목사님이 재차 설명하며 감사 기도와 찬양으로 예배를 closing한다. Praising Pastor가 단에 오르더니 찬양으로 회중을 인도한다. 대다수의 회중들은 움직이지 않고 남아있어 찬양으로, 기도로, 교회에 권면의 말씀을 주신 성령님을 찬양한다. 이 교회는 해외선교 특히 멕시코 선교에 집중하는 교회로“담대하게 나가 전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더욱 선교에 힘쓰는 교회임이 분명하다.

이 글을 기록하는 목적은 이러한 공중예배 중에 나타나는 예언과 통변의 역사가 기독교2000년의 역사가 흐른 현재21세기에서도 여전히 유용하게 나타남을 세상에 알리려 함이다.

이와 같은 공중예배에서 나타나는 예언과 통변의 역사가 현재 오순절 교단, 미 하나님의 성회 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100주년을 넘긴 한국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성회 한국총회를 비롯한 어느 교단에서도 예배 중에 공중방언이나 예언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혹 한국측 신사도 교회에서나 글로리아타임스 측의 예배에서 공중방언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사실이 있었는지, 혹 있었으면 알려주시기 부탁 드립니다!^^ :-)

공중방언의 역사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한국교회, 특히 방언을 부정하는 은사중단론자들에게 고전14장의 말씀을 인용하는 선호도가 높은 것을 보면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뉴욕에 가본 경험이 없는 자가 뉴욕에 대하여 더 잘아는 척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은사중단론자들에게는 공중방언 성구를 인용할 자격이 아예 없다. 주장한들 전혀 무리가 아닙니다.

성령님이시여! 한국 교회에서도 공중방언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히브리서13장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진리 님! 현대 방언 자체를 부정하는 님에게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이 무슨 뜻인지 설명 드리면 받아 들이며 믿으시겠습니까? 

은사주의자들의 대 반격시대 입니다. 천국까지 활짝 열린 세상이니 원하시면 구하는 답변을 얼마든지 얻어낼 수 있는 참으로 빨리 교통하는 마지막 끝 날 말세지말에 우리가 있습니다. 

원하시면 부족한 저라도 나서서 알려드릴 수는 있습니다!^^ :-)


진리 2014-08-09 02:11:10

지정의의 하나님께서 뜻도 없는 소리를 방언으로 주셨다고 계속 우기시니...

어부님, 그렇게 해서라도 믿고 싶은 그 심정,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억지가 너무 심하다 싶습니다. 

그리고 방언을 혼자 할 때, 통역이 필요 없다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 역시 자신이 그 뜻을 알지 못하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정도는 알고 하셔야  하겠지요?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무슨 말인지, 잘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부님께서 하시는 방언이 만약,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 맞다면, 이 말씀의 뜻을 분명히 아실겁니다. 

무슨 뜻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성서신학자 2014-08-08 22:03:01

많은 개혁 신학자들도 방언을 지지합니다. 설령 이들도 방언 은사를 못 받앗을지라도 인정하지요.
오히려 다국어 방언은 사라졌어도 영의 음인 방언은 인정하지요.
하나님과 나만이. 통하는 방언은 다른 사람이 절대로 무슨 뜻인지를 모릅니다. 비밀스런 방언 기도이기에 그러습니다.
방언통역은 오직 대중 앞에서 방언기도나 방언에언을 할 때만 필요하지, 홀로 할때는 통역이 필요 없습니다. 진리님은 뭘 제대로 모르면서 틀린 주장만 하는군요. 신학교에 가서 성경을 공부하시길 강추함다.


어부 2014-08-08 21:41:00

진리 님은 새빨간 거짓말을, 한, 글자, 타이핑의 오류도 없이 정확히 쳐 대는지? 그야말로 강심장(신앙양심에 화인 맡은 자)이시네요! ㅎ ㅎ 이러다가 그 거짓말이 단번에 들통이 날텐데요, 

졸지도 않으시는 오직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과, 오순절 신앙의 시조이신 초대교회 사도들과, 그 허다한 구름과 같은 증인들과, 앞으로 얼마든지 부르시기로 작정하신, 그 약속을 믿고 주 앞에 나오는 자들, 얼마든지 구원 받을, 헤아릴 수 없는 자들과, 생명책에 기록되는 모든 이름들 앞에서 변함이 없으십니까? 

만 천하에 거짓말이 들통이 나면 개혁교단 목사직을 반납이라도 하시겠다. 맹세라도 하시겠습니까?


진리 2014-08-08 08:31:15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이든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이든, 방언은 공히 그 뜻이 분명하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방언의 특징입니다. 

외국어 방언은 말할 것도 없고, 소위 어부님과 같은 분들이 말하는 영언 역시 그 의미가 분명해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고린도전서의 주된 골자이기도 합니다. 

어부님,
내용을 분명히 하시든가? 아니면 통역을 세우셔서 다른 사람들에게 야만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방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 의미도 없는 무슨 주문 같은 것을 이렇게 계속 방언이라고 주장하는 한, 사실상 어부님의 믿지 못함을 스스로 드러낼 뿐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어부 2014-08-07 03:57:27

"방언은 분명히 있습니다"? 어떤 무슨 방언이 있다는 것 입니까? 진리 님이 귀신의 자식이니 귀신방언이 있다는 소리이겠지요? 그렇지요? 방언부정신학에 빠진 자가 무얼 알아 “방언은 분명히 있다” 말을 하겠는지요? 그 말 자체에 어패가 있지 않은지요 ㅋ ㅋ ㅋ

진리 님! 신학대학원생 답게, 목사님 답게 말씀 좀 하시지요.
하고자 하는 말을 신학적인 말씀으로 뒷받침 정도는 되어야 평생 신학하는 분 답지 않겠는지요? 제시하는 방언 성구말씀의 전 후 문맥과 성경 전체에서 통전적이고, 유기적으로 줄기차게 말씀하시는 그 많은 방언 말씀 절들은 지옥 볼에 태워 버렸습니까? 참으로 지옥 불에 떨어 져야 마땅한 자이십니다. 그려!^^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고전14:7),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고전14:9),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고전14:10-11),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 할찌니”(고전14:13),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고전14:8),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고전14:22)]

진리 님이 지금까지 제시하는 방언 성구 구절이 고전14:7-22 까지 입니다

진리 님! 제가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한국인 교회의 성도들, 특히 방언부정신학에 빠진 교인들은 고전14장의 방언에 대하여 말할 자격이 없다. 제 개인적인 소신 입니다. 그 이유를 밝히지요!^^ ㅎ ㅎ ㅎ

몇몇 구절만 쏙 뽑아내어 자신의 소욕을 이루기 위한 성구로 잘도 사용하는데 ㅉ ㅉ 한마디로 혀를 차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진리 님! 이 공간에는 “진리님과 어부님”만의 단독 토론장인줄로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상천하지에 홀로 하나님이신 분과 구원하신 그의 천국 백성들이 이 곳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과연! 누구를 위하여? 박수를 보낼까요? 

성경 부정신학에 빠진 진리님에게 그렇게 가다가 지옥에 빠지라고 박수를 보내고 있을 까요? ? 오순절 신앙의 선조 님들, 사도 베드로부터 사도 요한, 신약 27편 중에서 13-14편을 기록한 사도 바울까지, 누구를 위하여 응원을 보내고 있을까요? 구름같이 둘러 쌓인 허다한 증인들이, 잘하고 있는 “어부”를 위하여 응원을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요? 

진리 님! Cessationalism의 무거운 것과 심판 주로 오시는 분의 경고(계22:19)에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던져 버리세요, 우리 앞에 당한 경주에서 탈락자로 영원한 불 구덩이로 들어가지 마시고 좋은 경주로 끝까지 달리며 결국에는 승리하기를 믿음의 선조들이 진리 님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영”이시니 진리 님의 영의 상태를 잘 알고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영”이 아니이니 진리 님을 잘 알지 못 합니다. 알량한 어부의 시각으로 보니, ㅎ ㅎ “진리” 님은 구원이라는 것을 참으로 모르는 자와 같습니다. 무얼 모르는 자이시니, 허우적 거리며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성경 부정신학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는 것이 아니일런지요? ? ? 진리 님이시여! 그대의 행위는 단연코 구원 받은자의 행위에서 나올 수 없는 가장 사탄적인 짓을 스스럼 없이 하고 있는 줄로 아시요? ? ? 말씀에 정면으로 대적하는 그 많은 칼럼들을, 그 많은 지옥으로 예정된 무리들이 환호하며 추종함에 뭔가 부족한 자의 우쭐함으로 뭔가 하는 것 같으시지요? ㅉ ㅉ 한국교회의Cessationalism의 대표자, ㅎ ㅎJohn MacArthur 와 함께 지옥 맨션1동 1호에 예정된 자, 21세기에서 가장 저주 받은 자 중에 선두를 달리시는 분들, 입니다. 진리 님을 위하여 지금까지 누군가로부터 이러한 직언을 받아 본 일이 있습니까? ? ?

진리 님을 추종하는 자들이 자신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진리 님을 부추기며 잘하신다 응원들이 대단한가요? ㅎ ㅎ ㅎ 아마도 그들은 최소한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대적하는 죄는 피하여 볼 요량으로 그대를 추앙하는 모양인데 정녕 모르시는 진리 님 ㅋ ㅋ ㅋ 무언가 되는 양 우쭐한 그러한 자들, 거시기 한 자들이 세상에도 참으로 많이 있기는 하지요? ㅎ ㅎ ㅎ

진리 님? 스스로의 심장에 손을 얻어 놓고 자문자답을 해 보세요? 나는 과연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 사실이 과거에 있었나 ? 중생의 체험이 있었나 솔직하기 자문자답을 해 보세요. 이 지면에 신앙고백을 적나라 하게 주 앞에 드려 보세요!^^ 아마도 고백 비슷한 것이라도 할 줄조차 모를 것 입니다? 두고 보면 알겠지요 ㅎ ㅎ

토론을 잠시 내려 놓으시고 진리 님 자신이 주 앞에서 무엇인가? 먼저 돌아 보십시요? 


하하하 2014-08-06 22:12:57

강병도 박사의 호크마 주석서를 보면 이 시대에도 고린도전서에 그록된 영의음인 방언은 그대로 존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강병도 박사는 이단이며 시탄인가? 또한 모든 신학자들이 인정한 호크마 주석서
는 무엇인가? 
방언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제발 공부도 하고 주석서를 살펴보기라도 해야할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만 알 수 있는 영의음인 방언은 잇음으로 두번 다시는 헛소리 하지 마십시요. 성경도 인정한 방언을 없다고 하는 자야말로 이단이요 사이비인 걸 아십시요.


하하하 2014-08-06 22:11:59

강병도 박사의 호크마 주석서를 보면 이 시대에도 고린도전서에 그록된 영의음인 방언은 그대로 존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강병도 박사는 이단이며 시탄인가? 또한 모든 신학자들이 인정한 호크마 주석서
는 무엇인가? 
방언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제발 공부도 하고 주석서를 살펴보기라도 해야할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만 알 수 있는 영의음인 방언은 잇음으로 두번 다시는 헛소리 하지 마십시요. 성경도 인정한 방언을 없다고 하는 자야말로 이단이요 사이비인 걸 아십시요.


진리 2014-08-06 11:40:28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방언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님들이 하는 아무 뜻도 없는 소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이 아닙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날!
그 때도 하나님 앞에서  지금처럼 계속 옹알옹알 거리기만 하실 겁니까?

이제는 그만 좀 옹알거리고 속시원하게 말을 좀 해라!.., 하시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방언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님들이 하는 아무 뜻도 없는 소리는 결단코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이 아닙니다. 


어부님, 혹시 아직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계신 건 아니시겠죠?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방언 .. 유/무 2014-08-06 04:19:49

방언을 받은 사람은 방언이 있다고 하고,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방언이 없다고 한다. 천국에 가본 사도바울은 천국이 있다고 하고, 안 가본 사람은 천국이 없다고 고집한다. 가짜 방언은 뺴고 진짜 영의음 방언은 있다. 진실로 회개하면 진짜 방언을 주시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선 안주시기도 한다.

어부 2014-08-06 01:10:04

쨍그랑 하면 무슨소리? 창조의 법칙에 따라, 쓰임을 다하고, 그릇이 깨질 때, 뜻이 있는 소리, 진리 님의 귀에 쨍그랑, 나는 더 이상 그릇이 아니다~~그러한 의미의 소리이지요. 나귀가 프르~르~르 한다거나 히히~힝, 단층의 귀를 같고있는 온전히 인간이신 진리님의 귀에는 어떻게 들리겠습니까? 그 막힌 귀에 자연적인 프르~르~르, 또는 히히~힝 소리 뿐 무엇이 더 들리겠습니까? ? ?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이 세상에는 나귀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진리님의 세계, 이 공간에서 비로소 단층이라 불리움을 받는 1차원의 세계가 있는데, 진리님이야 말로 단층으로 이루어진 1차원의 세계에서만 보고 듣고 있거든요? ㅎ ㅎ 진리님에게 보이는 단층의 1차원 세계로부터 영원한 천국, 주님의 세계에 까지 몇 차원의 세계가 있을까요? 진리님에게만 특별하게 (퀴즈one)로 드립니다. 퀴즈를 온전히 풀고 나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조금 눈을 뜨실까? 요? 진리님의 믿음의 세계에는 오직 보이고 들려야 하는 현세이므로 영의 세계?, 그런 거? 사두개인의 세계? 영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니?, 달나라 가는 세상에 귀신이노가 어데 있느냐? 귀신이노, 사단이노, 그런 존재 거부, 무당 굿판을 뒤엎을 만한 대단한 엘리트 믿음의 소유자? 세상이 우러러 받들만한 믿음, 70년 대초 그러한 자들을 향하여 우러러 보는 대단한 믿음이 저에게도 있었거든요. ㅎ ㅎ ㅎ 믿음이 대단하더라구요 ㅎ ㅎ ㅎ 그 대단한 엘리트 믿음, 하늘을 찌를듯한 진리 님의 바벨탑 믿음 그 믿음의 최고학문의 학위를 하시겠다구여!^^ 장하십니다 그려!^^ ㅉ ㅉ ㅉ 하나님이 어떻게 내려 다 보시는지, 진리님을 향하여 무어라 하시는지? (퀴즈 two)로 드리지요 ㅎ ㅎ ㅎ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기 전에 이미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 들고 진리님 같은 자를 단칼에 치시려 단단히 벼르고 있었든 그 상황을 아십니까? 그가 오죽하였으면 여호와께서 그의 눈을 밝히시기 까지 하며 직접 말씀 하셨을까요?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민22:28),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민22:31),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민22:35) _ 여호와께서 나귀가 인간의 외국어로 말을 하게 하셨을까요? _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2.0 인간의 가장 좋은 시력으로 칼을 들고 있는 여호와의 사자(영)를 볼 수 있도록 하셨을까요? _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갓난아이와 같은 가장 좋은 청각으로 말씀을 듣게 하셨을까요? ? ? 진리 님!^^ 산 세번에 삼 세번을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 ? ?

진리님을 살리려 애쓰는 누구? 나귀는 “길에서 떠나 밭으로 도망하다 좌우에 담이 있는 피할데 없는 좁은 길에 들어서자,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비비어 상하게 하매, 그 나귀는 발람을 구하려? 깨닫고 알아채게 하고자 하여서? 또는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 앞에서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비벼 일부러 상하게 한 연고가 무엇이였을까요 ? ? ? 나귀만도 못한 진리님은 어떻게 하였는지 말씀을 제대로 보는 눈이 있는 성도들은 익히 알고 있지요? ㅎ ㅎ

진리 님! 해서! 말씀을 아전인수 격으로 자신의 소욕을 이루기 위하여 사용하도록 허락하신 일이 없다는 것 입니다요. ㅉ ㅉ


나귀의 프르~르륵 소리가 외국어 였다? 인간의 성정으로 끝까지 우기는 진리 님!이시여!^^ “디알렉토스” 외국어로 들리는 방언이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한국 말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 남편이 성령세례를 받고 나서 “하나님아부지 예수님을 보내 주시고 저의 죄를 사하여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본토박이가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무주구천동? 지방방언으로 외국어 한국 말을 하더라!^^ 그러한 외국어 방언, 성령님의 초월적인 현상에 의하여 일어날 수 있습니다. 대개, 단어로 또는 쎈텐스로 단발적인 언어 방언을 한다는 간증소리는 많이 들어 보았지요!^^ 

@ 외국에서 강사로 등단하여 영어로 말씀을 열었는데 통역을 하지 않기에 왜 통역을 하지 않느냐 물었더니, 당신이 지금 우리나라 말로 하기에 통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 말이 들리면 “아멘”하세요, 강사가 영어로 하였더니 청중들이 자기들 말로 “아멘” 화답 하더라!^^

@ 한국인에게 유명한, 땅따먹기로 시작하는, 원종수 권사의 classic 그 유명한 간증도 못 들어 보았습니까? 저는 초창기 장로교회 입문시절에 들어 보았는데요? ㅎ ㅎ 필라델피아에서 그 나쁜 한국인 부부를 만나 괴 경험을 한 그는 지금도 그 사람들 어디서 사는지 아세요? 간증 때마다 물어 본답니다? ㅎ ㅎ ㅎ 그들이 진리 님 부부가 아니었나요? ㅎ ㅎ 그, 원종수 권사가 나쁜 한국사람을 만나 고생을 하며 우여곡절 끝에 Mckeesport, PA 제가 사는 멀지 않은 지역에 오게 되었는데, 아무도 모르는 미국 시골 구석에 덜렁 떨어져 막막한 상황에서 사도행전의 천사를 보내 주셨는지, 힌 수염을 길게 기르고 하얀 양복, 하얀 모자를 쓴 현대판 천사의 도움으로 정처없이 찾아간 목사님을 만나게 되고 어찌어찌하여 큰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원하지도 않던 간증을 강제로 하게 하실 때 “하나님 정말 이러시깁니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입을 열어 방언으로 간증을 시작하였는데 청중은 영어로 듣더라” 방언 간증 후에 강단에서 내려오고 집회가 끝났는데, 여자 한 사람이 닦아와서는 당신이 안수해 주면 병이 낳을 것 같으니 안수를 해 달라 하는 요청으로 안수기도를 하니 그 자리에서 여인이 병고침을 받게 되었는데, 원종수 권사도 자신에게 신유의 은사가 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진리 님! 위의 두가지 간증의 경우를 어찌 보십니까? 외국어로 나타나는 경우의 실례를 적나라하게 설명을 드렸는데? 두 간증에서 회중들이 들은 외국어가 처음부터 외국어로 혀에서 울려 나온 소리일까요 아님! 두번 째 간증의 인간이 알아 들을 수 없는 천상의 방언소리, 영의 소리였는데 집회를 친히 인도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이 역사하심으로 초월적인 현상으로 “글로~사” “하늘의 언어”가 외국어 “디알렉토스”로 들렸을까요? 강사들이 상대 회중들의 언어로 알아서 말을 전달한 것 일까요? ? ?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권세와 능력을 소유하신 “보혜사 성령님”께서 예배를 주관하시며 말하는 자의 혀를 주관하셔서 자의로 말하게 하지 못하게 하시며 성령의 뜻으로 “디알렉토스” 외국어로 들리게 역사하셨다. 생각이 전혀 들지 않으십니까? 

진리 님!이 처음에 인용하는 고전14:10-11 말씀은 공적인 예배에서 일어나는 공중방언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개인이 골방에서 하는 방언이 아니라는 말 입니다. 대개의 성도들이 방언하면 고전14장의 방언을 말하는데 특히 한국인 교회의 성도들은 고전14장의 방언에 대하여 말할 자격이 없다, 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사람 입니다. 그 이유는

에이효! 이 댓글을 준비하느라 근 반 나절이 걸렸네요1^^ ㅎ ㅎ 눈치도 보아야 하겠고, 일도 보아야 하고, 나중에 계속 하지요! :-)


진리 2014-08-05 14:20:07

"쨍그랑" 하면 이건 무슨 소리겠습니까?
뜻없는 소리는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이겠습니까?

어부님,
하나님께서는 하다못해 단층보다도 못한 나귀에게도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있게 뜻이 분명한 말을 주셨습니다. 

님이 계속 뜻도 없는 옹알거림을 방언으로 주장한다면, 님의 말처럼 지정의의 하나님을 barbarian 으로 만드는 망령된 짓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부 2014-08-04 12:35:29

ㅎ ㅎ ㅎ 나귀를 소리지르게 하셔서 발람이 이해하는 인간의 언어로 들리도록 초월적으로 역사를 하신 일이 구약에 있기는 있지요. 진리 님?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에는 단층임이 틀림 없습니다. 나귀의 프르르~르~르 에 꽃쳐서 “모든 방언이 외국어이다” 결론에 도달 하셨습니까? ㅋ ㅋ 어찌하여서 현대의 나귀들은 외국어 방언을 하지 못할까요 ㅋ ㅋ ㅋ 나귀는 나귀일 뿐, 말 못하는 짐승일 뿐이지, 언어 능력이 있는 짐승으로 창조하신 일이 결코 없습니다요. 차라리 앵무새 소리가 방언, 곧 외국어이다. 신학박사 학위 논문을 쓰시지요. 한마디로 기가차는 단층의 머리에서나 나올 수나 있는 인류 역사에서 최초 유일의 대 오류 입니다요 ㅋ ㅋ ㅋ

워낙 야만이시니 성령께서도 방언에 야만?인 줄로 착각 하시는 인간의 야만의 극치를 달리시는 분, ㅋ ㅋ ㅋ 신학박사를 하신다는 분이시니 평신도 장로로서 물어 나 보겠습니다. 방언의 본질이 무엇인 줄은 아시는지요?


진리 2014-08-04 08:15:37

나귀가 사람의 말을 했지만, 나귀 자신은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그 말을 알아 먹었지요. 

어부님,
님께서 하시는 방언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이와 같이 어부님 자신은 그 뜻을 모를지라도 최소한 듣는 사람들은 알아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통역을 세우지 못하실거면, 자제하시는 것이 피차에 야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부 2014-08-03 06:29:40

방언이 멍멍이나 냐옹이 소리라는 것 입니까? 영언이라는 말 입니까? 앞으로는 한가지로만 말씀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ㅎ ㅎ 댓글을 제가 매번 재 정리를 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를 해야만 하는지요. 대략 알아는 듣겠습니다요!^^

“방언은 영언이다” 방언을 영언이라고 하는 이유는 방언이 하나님께서 주신 하늘에 속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 의미도 분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고전14:10-11)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자기의 소욕을 이루기 위하여 아전인수 격으로 사용하라고 주신 일이 없습니다요. 말씀은 비록 내 입맛에 쓰더라도 거부하지 않고 삼켜야 내 몸에 양약이 되지요. 제 입맛에 맡지 않는다고 혀 바닥으로 탁 튕겨버리는 우리 집 말티~즈 “공주”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뜅겨 버리는 그가 바로 사탄적인 자가 됩니다요. 사탄이가 저 멀리 공중에만 있는 줄로 착각을 하시는가 본데요? 바로 진리 님 마음 속 깊이 쳐 박혀서 님을 올가미로 단단히 씌어놓고 눈을 가리우고 말씀을 깨달을 수 없도록 철저히 막고 있습니다요? 누구보고는 토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시더니 달랑 2절 말씀이 방언 절의 전부인양 들이대는 것을 보니 ㅎ ㅎ ㅎ 그야말로 방언에는 야만인이 틀림 없습니다요 ㅋ ㅋ 

“고전14:10-11” 절이야 말로 님과같이 방언에 야만인 자들이 방언의 진정한 뜻을 알지 못하므로 결국 이러한 자들 앞에서는 야만이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적당하고 질서있게 하라는 말씀이지, 야만인이 방언을 알아 듣지 못한다고, 방언하는 자도 진리 님과 같는 자와 함께 야만이 된다는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말씀이 그리 쉽습니까? ㅎ ㅎ, 고전14장을 유일한 방언 장으로 알고 계시는 진리 님! 좋습니다, 기왕에 “고전14:10-11” 말씀으로 던지셨으니 계속해 보시지요 :-)

진리 2014-08-03 01:15:31

어느 방언에 능통? 한 전문가께서 자신은 평생 외국어 방언를 본 적이 없다고 말을 한 것을, 방언이 영언임을 주장하기 위한 펌글로 올라온 것을 보고 참 아이러니 하다고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방언은 아무 의미도 없는 그냥 소리가 아닙니다. 분명한 의미가 있습니다. 방언을 영언이라고 하며, 또한 외국어 방언이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은 반드시 그 의미를, 방언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야옹"하면 고양이 소리고, "멍멍"하면 강아지 소리임을 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부님과 같은 분들이 하는 방언은 "야멍"이라고 해 놓고, 어떤 때는 고양이 소리라고 하고, 어떤 때는 강아지 소리라고도 했다가, 또 어떤 때는 그도 저도 아닌 닭울음 소리라고 하니, 지정의가 있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가 님들이 하는 방언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최고의 은사는 사랑이니 여기에다 사랑의 은사를 적용시켜,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소리를 계속 옹알옹알 거리게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고전14:10-11)

방언을 영언이라고 하는 이유는 방언이 하나님께서 주신 하늘에 속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 의미도 분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만, 땅에 속한 사람들은 그 뜻을 알 수 없기에 이를 객관적으로 알게 하기 위해서 통역의 은사가 반드시 함께 수반되어야만 하는 것이구요. 

어부님,
뜻을 분명히 안다면 하십시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통역을 세우든지, 그도 아니면 자중하시기 바랍니다.


어부 2014-08-02 12:04:54

지브리 지브리 여러 말은 하시려 하는 것 같은데, 다음의 의미로 질문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대략 정리한, 주신 질문 입니다. 마음에 드시는지요?

1. 방언을 “왜” 의미도 “모른채” 계속해서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듯” 하느냐? 
2. 순간 감정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2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말씀조차 제대로 제시된 일이 없는데 무엇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인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좀 더 명확히 먼저 정리해 주시겠습니까? “순간 감정에 따라 다르게”라 하시면 방언을 인정하시기는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신지요? 딴지식 걸기로 마시고 진지하게 말씀에 의거하여 정리하여 주십시요, 한가지 유의하셔야 할 것은 진리님과 토론을 하는 상대는 신학을 모르는 자 입니다. 가방끈이 워낙 짧기에 정확한 말씀 인용이 아니면 알아 듣는 것 자체를 모릅니다.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제시된 말씀 내용이 달랑(고전14:9-11) 입니까? ? ? ㅎ ㅎ 저는 평신도이기에 오류가 있더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정정하면 될 뿐이겠으나 진리님은 저와는 입장이 다릅니다. 

신분에 걸맛지 않는 ““왜” 의미도 “모른채” 계속해서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듯” 하느냐?” 질문하는 진리 님이 “왜”라는 그 이유를 모른다면 성경은 방언을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 하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주문 외우듯이 중얼중얼 대느냐? 뭐 이런 정도로는 들이대야 긴장이라도 할 것 아닙니까? [1. 방언을 “왜” 의미도 “모른채” 계속해서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듯” 하느냐?] 이와 같은 질문은 토론하고자 하는 자의 자세가 아닙니다요. 님은 지가 어째서 진지하게 응답을 해야 한다 생각 하십니까? ㅎ ㅎ 방언의 의미도 모르며 질문하기에 급급한 님에게 횡설수설 역 질문이 무리인가요? ㅎ ㅎ 

“분명한 계시의 말씀과 방언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성의 있고 규모있는 질문으로 정정 부탁 드립니다.
원하시면 그대로#1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릴 수는 있겠습니다 :-)


진리 2014-08-01 23:32:17

이렇게도 영의 실체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이, 영언이라고 하는 방언을 하는데 왜 뜻도 모른채 마치 주문을 외우듯 주술처럼 매번 똑같은 소리만 읊어 댈까요? 

지정의의 하나님을 다른 말로 하면 인격의 하나님입니다. 왜 분명한 계시의 말씀을 놔두고 뜻도 모르는 개골개골만 하게 하실까요? 그것은 어부님께서 하시는 방언이 하나님께서 주신 영언이 아니라 사단이가 준 개구리 영이란 증겁니다. 

어부님께 영의 실체를 물은 건, 님께서 하시는 방언이(님의 말처럼 영언인 방언이), 이현령 비현령식으로 순간 순간 감정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교리로 영의 실체를 대신하고 말았군요. 

이것이 바로 어부님과 같이 뜻도 없는 소리를 방언이라고 믿고 하는 분들이 믿는 것이 말씀이 아니라 문자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고전14:9-11)

이가 났고 밥을 먹을 수 있다면, 이제부터는 뜻이 분명한 말로 하시기 바랍니다. 이가 나고 밥을 먹은지가 언젠데, 언제까지나 맘마맘마만 하시겠습니까? 


어부 2014-07-31 01:29:23

@ 최소한 내 자신이 영의 실체를 알아야 방언에 마음 문을 열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왜 영의 실체에 대해서 묻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으십니까?
@ 최소한 영의 실체 정도는 알아야 님들이 받은 방언에 객관적인 무게가 실릴 것 아니겠습니까?

진리 님!^^
영의 실체가 무엇이냐 질문 하신다면? 전혀 답지 않은 질문이거든요?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질문에 한마디로 대답한다면 “유일하신 하나님” “I am who I am”라 하시는 분 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 안에서 삼위의 위격으로 존재하시는 “성부하나님”, “성자예수님”, “성령하나님” 삼위가 각각 지정의를 소유하시며, 동일하게 모든 권세와 능력과 위엄을 소유하시며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는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이, 진리님이 똑바로 아셔야 하는 “영의 실체” 이십니다. 

자세히 구분하면, 2000년 전에 승천하신 이 후로 재림 때까지 이 땅에는 계시지 아니하시는 [예수의 영으로 마가의 다락방의 120문도에게 오신 “보혜사 성령님”]이 진리님이 궁금해 하시는 영의 실체 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오신 목적과 사역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재차 설명드릴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 평신도 장로다운 설명에 마음이 흡족 하신지요? 듣기 원하시는 영의 실체의 대답이 되었는지요? 진리님이 찾고자 하는 영의 실체는 무엇이었습니까?

“영의 실체 정도는 알아야 님들이 받은 방언에 객관적인 무게가” 정녕 몰라서 물으시는 것인지? 님의 “영”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이, 달나라 가는 시대에 귀신이 어디 있느냐 하는 70년대의 지식인이라 하는 자들의 수준과 같습니다요? 보혜사 성령님은 초대교회 이후 언제나 성도들과 가까이 임재 하셨습니다. 님이 인정을 해 드린다고 해서 객관적인 무게가 올라가시는 성령님이 아니신 분이심을 이제는 눈치라도 채셔야 합니다. 이제 진리님도 “영의 실체”를 찾으셨으면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십시요.

사도 바울은 고전12:1에서”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권면 합니다. 님이 좋아하신다는 칼빈만의 성령 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절로 계속 됩니다. 믿음도 믿음 나름 입니다. “믿노라”하며 착각으로 믿는 고백?은 커녕, 꿀먹은 믿음, 그러한 고백은 믿는 것이 아니지요? ? ? 사도 바을은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자들에게 신령한 것에 대하여 말을 하고 있는데, 칼빈 선조와 그의 후예들은 은사중단론으로 오해를 깊이 했었네요?, 그러고 보니 칼빈 선조 역시 영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에는 “단층”이었음이 증명 되었습니다요.

없던 성경 지식, 이전에 전혀 알지 못하였던,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풀이가 타이핑하는 순간에 깨달아 지며 이 글을 적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칼빈)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4절 이후 은사와 직임, 역사는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다”하는 절은 은사에 열려있는 침례교회에서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는 구절로 선호하여 사용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씀 하셨거든요? 로마교회(롬12:6-8)의 7가지 은사, 고전 12:4-10의 9가지 은사, 고전12:28의 6가지 은사, 12:31절에서는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 유명한 가장 큰 은사의 사랑 장인 고전13장인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말씀은 기록되고 있습니다. 13장에서는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는 신령한 성도라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 . .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 . .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 .

진리님!^^ 모든 은사에 능하고 비록 성령충만한자 일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다면 이 말씀이 은사중단론자, 술로 충만한 자들 일찌라도 사랑으로만 충만하면 하늘나라에 큰 유익이 되겠다는, 그래서 구원 받기에 아무 염려 없겠다 하는 말씀인가요? ? ? 결코 그럴 수는 없지요. 칼빈 선조도 단층으로 지독히도 깊이 오해를 하셨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 고전13사랑장의 종결이 아닙니다. 이미 말씀 드린대로 14장으로 연결됩니다 14: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로 귀결 됩니다. 결국 사랑이 “도루신령한 것”으로 변하였네요.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로 시작된 말씀이 39절에서는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고전14장의 시작과 끝이 일맥상통한 권면으로 끝을 맺으며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명령하십니다. 선조의 단층을 닮아 그 모양이시니 누구를 어렵게 할 마음은 없습니다 ㅎ 

피차에 한가지 더 유념해야 할 것은 고전 14:37-38의 말씀 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은 정말로 꼭 “잠긴동산” 에게 하는 말씀 같습니다. 그렇다고 진리님에게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성령의 역사를 알지 못한 자 그도 역시 알지 못한 자니라. “알지 못한 자” 현재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긴동산”은 적당하고 질서있게, “진리님”은 기록된 말씀을 믿지는 못할 망정, 역행하며 성도를 견인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해방꾼이 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아직도 질문꺼리가 많으십니까?

@ 사도행전 2장에서 방언을 주신 것은, 방언 자체가 목적이었습니까? 
@ 아니면 요엘서의 말씀이 응하는 것으로, 
@ 곧 성령이 부어지는 것을 나타내는 표징으로 방언을 주신 것이었습니까?

@ 다시 말해서, 성령을 부어주신 목적이 방언을 받기 위한 것이냐? 
@ 아니면 성령을 부어줬다는 증거로 방언을 주신 것이냐?

궁금한 것이 있으시면 더 설명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 :-)


진리 2014-07-24 12:10:10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신령한 은사(영적 은사)를 나누어 줌에 있어서 성경대로 어떤 이에게는 이것을... 그리고 또 다른 이에게는 저것을...(꼭 방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나누어 주심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은 주님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방언은 은사 중에서도 개인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영의 실체는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신비하기만 하고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어부님의 신앙이 방언이라고 하는 개인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서 주님의 몸을 볼 수 있는데까지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이제라도 진지하게 토론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경에 근거한 자유로우면서도 진지한 토론이 되기를 원합니다.

어부 2014-07-24 00:02:25

Review Time 입니다
1. 좋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 신령한 은사 중의 하나이든지, 오순절 믿음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제가 의도한 topic은 Impartation이 지극히 성서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Impartation)하여 영권을 전수한 후에 선교사로 파송 합니다(행13:2-3), 정목사님도 목사로 Ordain(order by virtue of superior authority) 받으셨습니다. 본인도 Impartation을 받으시고는 능력 전수하는 행위를 극 비난하시면, 자신이 받은 안수는 (접신하는 신 내림)을 위한 안수였다는 말 인지요? 자신의 정체성마저 부정하는 자에게, 형님 같은 심정으로 권면을 드립니다, 뒤져라, 차라리 나가 뒤져라, 개나, 소나 다 받는 방언인데, 방언을 받지 못하는 자들을 향한 어느 장로교 부흥사의 일갈 입니다. 목사님도 소나무 뿌리 두어개 정도는 뽑으셔야 하겠네요 (저는 극약처방을 좋아합니다 ㅎ ㅎ) 이 말에 목사님 동료 분께서는 뒤집어지던데요 ㅎ ㅎ, 살아있다고는 하나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자 입니다. 혹 살아 본 일이 없는 자일 수도 있겠네요. 정 목사님, 회개하시고, 돌아 서십시요, 제발! 죽지 마시고, 살아 나십시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함께 주셨습니다. 살아나고자 하는 자유의지가 있으십니까. 보혜사 성령님을 영접하시고 신뢰 하십시요. 좋은 길로 인도 하실 것 입니다. 영적 권능을 받고 목회자가 살아나야 교회 성도들도 살아나지 않겠는지요.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2. 기독교의 기본교리가 삼위일체 교리 입니다. 삼위일체 교리 중에서 성령의 사역을 멸시까지 하시는 님을 위하여 친절하게도 장문의 설명을 준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묵묵무답으로 일관하시니, 교리에서 흔들리고 있는 목사님을 지가 어찌 하오리까? 밑의 댓글로 돌아가서 “평신도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이해”를 읽어보시고, 문제가 발견되면 바로 잡아 주시고, 문제가 없으면 성령 하나님 부분을 받으셔야 토론하는 자의 자세가 아니인지요? 성령하나님의 마지막 말세지말의 성도들을 견인해 가시는 사역을 이해 못하면 목사님이 다음 토픽으로 삼으신 “방언이 은사의 기본이며, 다른 은사를 여는 열쇠이다” 하는 말의 뜻을 이해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저도 진지해 질 터이니, 목사님도 토론의 주고 받아야 하는 기본 룰을 지켜 주십시요. 기본 룰이 흔들리면 진지해 질 수가 없지요 ㅎ ㅎ

3. 목사님이 아전인수 격으로 인용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 의 말씀은 칼럼에서 인용한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요. 히브리서의 원 저자는 주께서만 아시겠지만, “주후 200년경에 쓰여진 체스터 베티 파피러스(p46)에는 히브리서가 바울 서신들 가운데 나온다. 유세비우스에 ... 14), 오리겐은 반복해서 히브리서를 바울의 글로 인용하였다.” 히브리서의 저자를 사도 바울로 인정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며 성도들을 위하여 중보하시는 예수님은 히브리서가 쓰여지던 초대교회 이후 현재는 물론 재림 때까지 이 땅에 계시지 아니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셔서 당시 히브리서를 기록하도록 영감을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히13:8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는” 의 부분을 ( “보혜사 성령의 역사는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의 역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로 변역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도인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시는 보혜사 성령의 역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낼 수가 있습니다. 

“((생명샘 님은 방언이 다른 은사를 여는 열쇠이다. 어부 님은 방언이 은사의 기본(필수)이다)) 

정 목사님!^^ :)

정 목사님 왈! “죄송하지만, 최소한 내 자신이 영의 실체를 알아야 방언에 마음 문을 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정정해도 되겠습니까? 한마디 말만 더 보탭니다 “성령세례는 목적이 아니라, 성령충만으로 가는 수단이며, 체험만이 아니며 그렇게 사는 삶임을 고백 합니다.” :-)

이 방에는 현재 생명샘 님, 진리 님, 어부 님, 이상 3인의 토론 장 입니다. 생명샘 님만이 홀로 소외감을 느끼게 할 수는 없지 않은지요. “도대체 이 말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답변은 생명샘 님의 Turn으로 돌리기 원 합니다!^^ :-)

이상으로 남자의 수다를 잠시 중단 합니다. :-)


진리 2014-07-23 13:45:23

조금 진지해 진 것 같더니 또 시작입니까? 좀 진지해 지십시다. 

((생명샘 님은 방언이 다른 은사를 여는 열쇠이다 
어부 님은 방언이 은사의 기본(필수)이다))

도대체 이 말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2장에서 방언을 주신 것은, 방언 자체가 목적이었습니까? 아니면 요엘서의 말씀이 응하는 것으로, 곧 성령이 부어지는 것을 나타내는 표징으로 방언을 주신 것이었습니까?

다시 말해서, 성령을 부어주신 목적이 방언을 받기 위한 것이냐? 아니면 성령을 부어줬다는 증거로 방언을 주신 것이냐? 하는 겁니다. 

어부님과 구요한님이 받았다고 하는 방언이 진정으로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위와 같은,

((생명샘 님은 방언이 다른 은사를 여는 열쇠이다
어부 님은 방언이 은사의 기본(필수)이다))

이런 말은 결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다 못해 나귀가 하는 말도 사람이 알아 먹었는데, 최소한 한 쪽은 그 방언의 뜻을 알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이 말입니다. 

믿음에 대한 말만 해도 그렇습니다. 믿음은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영에 속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부님이나 구요한님께서 받으신 방언이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 확실하다면, 왜 영의 실체에 대해서 묻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으십니까? 최소한 영의 실체 정도는 알아야 님들이 받은 방언에 객관적인 무게가 실릴 것 아니겠습니까?

((생명샘 님은 방언이 다른 은사를 여는 열쇠이다
어부 님은 방언이 은사의 기본(필수)이다))

성경은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어떤 이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주고, 다른 이에게는 믿음도 주며, 또 다른 이에게는 방언도 말하게 한다고 하는데, 왜 님들은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받아야만 한다고 비성경적인 주장을 하는 것인지.

죄송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구요한님과 어부님이 받은 방언이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오직 말씀으로 증거될 때만 온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부 2014-07-23 12:16:05

아예 오순절 사건을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라 하시지 않구요? ㅎ ㅎ

교회의 태생이 오순절 사건으로 인함이지요
"초대교회 사도바울의 시대에는 성도들 모두가 오순절 신앙인, 영언자 들이었습니다" 로 친절하게 바꾸어 드리겠습니다.

할 말이 없으신 것 같은데 한가지만 더하겠습니다.
"지금 하시는 방언을 점집에 가서 그대로 한 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영락없이 귀신들린 무당이라고 할 겁니다." 하는 님의 말은, 살아 계시며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고 점집의 무당을 더 신뢰한다는 말 입니다. 어찌 이리도 영적 감각이 없으십니까? ㅉ ㅉ 도대체가 영적 무뇌아 이십니다요 ㅎ ㅎ ㅎ 이 밤도 안녕히 . . . .


진리 2014-07-23 11:58:58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롬1:11-12)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이는 곧 ~ 믿음을 인하여...

이 토론은 어부님께서 먼저 제기하셔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토론을 제기하신 분께서 본문에는 충실하지 않고 계속 딴 소리만 하시니, 참 어이가 없습니다. 

바울이 오순절 신앙인의 시조? 라는 말도, 방언을 한 것으로만 친다면야, 발람을 태운 나귀가 더 시조 아닐까요?
오순절 때, 바웋은 아직 사울이었으니 말이지요. 

.어부님과 같은 분들을 위해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하시는 방언을 점집에 가서 그대로 한 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영락없이 귀신들린 무당이라고 할 겁니다.


어부 2014-07-23 11:54:37

초대교회 때의 성도들은 모두가 오순절 신앙인, 영언자 들이었습니다 :-)

어부 2014-07-23 11:48:12

그러니까요!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말하고 있는 본인이 사도바울 자신 입니다. 오순절 신앙인이 "너희와"로 부른 다른 성도들의 믿음을 바울 자신의 믿음과 동일 선상에 올려 놓고,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 . 

진리 님도 자신의 믿음을 사도바울의 믿음의 선상에 올려놓고 동일시하며, 자신의 믿음의 수준에서 바울의 오순절 믿음을 맞추려 하니 핀트가 맞겠습니까? 믿음도 믿음 마련이지요. 본문의 원 저자의 당 시대의 신앙배경을 배제하고 자신 중심의 좁은 시각으로 “믿음”을 대하니 자기 믿음의 경우로 착각 하였지요

정 목사님에게 다시 한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정 목사님은 도대체 "점집" "귀신들린 점쟁이"와 같은 non-biblical한 언어가 아니면 토론을 이어갈 수 없는 분이십니다. 

쿠오트 된 님의 댓글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시는 방언을 점집에 가서 그대로 한 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영락없는 귀신들린 점쟁이라고 할 것입니다." 

“딴 소리만 하시니” “참 어이가 없습니다” 라는 토론장에서의 표현은 상대의 주장을 감당할 수 없다는 허탄한 소리에 불과 합니다

알량한 님의 이해력을 돕기 위하여 장문의 수고를 아끼지 않은 글에는 일언반구 묵무무답이시군요.
잘 알겠습니다. :-)


어부 2014-07-23 07:37:56

진리 님은 Serious 하시군요. 정 목사님 자신 이십니까? 임무교대로Take over하셨습니까? 그 좋아하시는 Impart하는 행위, 성경에 없는 단어 "Impartation"을 파생 시키신 장본인 이십니까?

본문 롬1:11을 가져온 이유가 "나누어 주어(Impart)" 에서 파생된Impartation하는 행위가 지극히 biblical 한 것을 알리기 위함인 줄을 정이철 목사님은 이제 인정하시고 바로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Some을 무슨” 으로 해석한 “한글번역”의 애매한 의미를 바탕으로 한 애매한 믿음, 참으로 정이철 목사다우십니다. “정이철답다” 신종어가 파생될까 염려 됩니다. 성경을 보는 시야의 깊이가 단층으로 얼마나 알량한지는 아십니까? ㅉ ㅉ

“그러므로 어부님의 주장처럼 신령한 은사가 방언만이 맞다면” 언제 그 누가 그러한 소리를 하던가요? 평소에 익히 알고 있던 대로 진리님은 “억지주장”의 대가임을 스스로 증명 하시는군요? 

“성령세례의 필수가 방언이다” 또는 “방언이 은사의 기본이다”, “방언이 구원의 증거이다” 칼빈니스트에게는 아주 생소하고 도전적일 수 밖에 없는 주장을 지극히 biblical 방법으로 제시한 바는 있지만, “방언만이 신령의 은사” 라는 말을 한 사실이 없습니다. 진리 님은 지금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위증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끝 날의 사역을 감당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거부하는 죄가 결코 미약하다 할 수 없을진대, 지난 반10년동안 단층인 자의 악행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자각은 하시는지요. ㅉ ㅉ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악한 행위를 자행했는지조차 한번도 생각해 보신 일이 없지요. 이 글이 진리 님의 눈에 보이며, 성령님의 질책하는 소리가 들리십니까? 자신의 행위를 깊이 숙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에는 누구로부터도 질책하는 소리를 들어 본 일이 없으시지요? 이제, 질책하는 소리가 님에게 임하였으니, 듣고, 회개하고, 정녕 살아 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기독교' 아닌 '삼위일체의 기독교'다 “ 30%의 빈약한 정답 입니다

삼위일체의 삼위 하나님은 동일하게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십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시고, 아들은 성령이 아니시고, 성령은 아버지가 아니시되, 하나님의 영이시되 예수의 영으로 일임이 되신 보혜사 성령께서, 인류 구원의 마지막 때의 사역의 대 역사의 시대를 , 책임으로 감당하시기 위하여, 유일하신 하나님 안에서 서로에 사역을 균등하게 분담하신 그 사역을 현재 신약시대에 감당하고 계십니다.

영원 전부터 예정하시고 영원토록 운행하시는 인류구원의 역사를, 계획하시고, 운행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역사에 비하여, 달랑 3년간의 공생애를 합한 예수님의 33년간의 역사가 너무 미약하다? 피조물로서 그 누구랴 말 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지요,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몸을 쪼개기 까지 하시며, 피 흘리시고, 몸을 상하게 하시며, 십자가에 달리시어, 고통을 당하시고, 인류의 죄 삯을 지불하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을 다 이루시므로 드려진 열매가 하나님의 계획과 동일한 공로로 영광을 받으셔야 마땅 합니다.

신약 시대에 성령님이 감당하시는 2000년의 사역의 시간이 6000년의 하나님의 시간에 비하여 너무 미약하다? 피조물로서 그 누구랴 말 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지요, 영원하신 하나님의 시간과 33년 간의 예수님의 시간과 2000년 간의 성령님의 시간이 동일하게 인류 구원을 위하여 분담하신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섭리로 운행하시는 역사가 삼위 하나님이 동일하고 균등하게 영광을 받으셔야 할 유일하신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계획과 역사 입니다_ 평신도가 이해하는 즉석에서 기록된 삼위일체론이니 너무 나무라지는 마십시요. :)

“신약의 성령은 예수가 승천하신 후에 이 땅에 오셨다. 그 전까지 제자들과 함께 하신 성령은 동일한 제 3의 성령이시나, 예수의 영으로 오신 보혜사 성령이 아니고 구약 시대부터 지상에서 역사하신 성령이다. 본질적으로는 같으나 기능적으로 전혀 다른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마가의 다락방의 120 문도에게 임하신 첫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는 사건 이 후 현재까지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기까지는 보혜사 성령의 시대이다. 게시판에서 늘 주장하던 내용을 님이 정리하여 칼럼에 사용하셨지요? 제가 재 정리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일임 받아서 2000년 전에 임하신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예”로 믿고 기다리는 성도들에게는 현재이든지, 장래이든지, 오실 재림의 순간까지도 언제나, 어디서이든지, 영원토록 유효 합니다.

진리 님이 “성경 전체의 맥을 보는 것입니다” 하셨습니까? 그래요? 그렇게 간단한지 다시 한번 봅시다 :)

단층의 좁은 시야로 보면 당연히 “신령한 은사” 가 “믿음”으로 귀결 되겠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칼빈니스트 진리 님의 믿음이 아니지요. ㅎ ㅎ 누구보다도 방언을 많이 하므로 주께 감사 한다는 오순절 신앙인의 시조이신 사도 바울의 “오순절적인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해를 깊이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이 오순절 적인 믿음의 소유자이기에 신령한 은사들(gift + s)을 나눠 주기 원한다 한 것이지요. 믿음 안에 들어있는 무궁무진한 은사의 유익을 캐어 내시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ㅉ ㅉ

30% 점수의 삼위일체론으로 이해하는 자에게는 말씀의 깊은 숲 속에 있는 생수를 맛 볼 수 있는 은혜가 허락되지 아니 하였습니다요.

저는 신사도나 글로리아타임스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한다는 안수행위(Impartation)가 정이철 목사님으로부터 정치적인 교회의 싸움의 대상이 될 만큼 그들의 말씀인용이 이단적이거나 non-biblical하지는 않다는 확신이 있기에 부득불 그들을 지원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극단적인 신비주의”이나, 또한 장로교회에서 신봉하는 “교조주의, 극단적인 칼빈주의” 역시 양쪽이 동일하게 경계되어야 할 대상 임을 똑 바로 아시기를 바랍니다.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영의 마음 문을 활짝 여시고 용납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천국을 찾아 각각 제 갈 길로 가시기 바랍니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요. ㅉ ㅉ 강도를 억제하려면 힘이 더 있어야 하지 않겠는지요. “오순절 신앙인 사도 바울”의 인정도 받지 못하는 “교조주의” 주제에 무엇인가는 할 수 있겠는지요.

계속 토론을 원 하시면 “무당, 푸닥거리, 쿤달리니, 개소리, 그럴싸하게 ” 등 non-biblical한 잡소리 들이랑, Recycle Bin 으로 보내져야 할 Junk 칼럼으로 마시고, 순수한 성경의 말씀으로만, 그 좋아하시는 조근조근으로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진리 2014-07-22 13:50:40

우선은 본문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뜻이 애매할 경우에는 문맥 전후와 더 나아가서 성경 전체의 맥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12:8-10)

여길 보면, 성령의 은사들 중 세번 째에 믿음과 여덟 번째에 방언이 나옵니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가지도 믿음이나 방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사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부님의 주장처럼 신령한 은사가 방언만이 맞다면, 성경은 이와 함께 나머지 여덟가지도 함께 기록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롬1:11-12절을 보면, 신령한 은사는 곧 믿음이라고만 분명하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믿음과 성령의 은사들 중에 세번 째로 나오는 믿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어부님에게는 먼저 이 둘의 차이에 대한 분별이 급한 것 같습니다. 

어부님,
본문에 그 가리키는 것이 분명할 때는, 그 말씀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이 말씀을 믿는 크리스찬의 본분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어부 2014-07-22 11:50:42

그래요? 그렇게 간단한지 어디 봅시다
Key Word를 선택하라 하신다면 
신령한 자의 눈에는 “무슨 신령한 은사” 나눠 주어” 가 보여야 합니다

Polld을 엽니다

1. 무슨 신령한 은사는 오직 믿음 뿐이다.
2. 무슨 신령한 은사는 고전12:7-10, 엡4:11, 롬12:6-8, 고전12:27-28 의 모두를 포함한다.
3. 믿음은 신령한 은사가 아니므로 나눠 줄 수 없다.
4. 믿음의 은사를 포함한 모든 은사들이 신령한 은사이므로 나눠 줄 수 있다.

@ 주어진 번호 중에서 본인의 믿음대로 2가지를 선택 하시요

어부 님: 2번, 4번을 선택 합니다
진리 님: (__, __ )을 선택 합니다

진리 님은 공란에 몇 번을 선택 하시겠습니까?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진리 님께 “시비꺼리”를 제공 합니다. ㅎ ㅎ

“어부 님”은 그랜드 주석을 받아 들이며, 
무슨 신령한 은사(some spiritual gift)를 “복수의 은사” 로 믿었음으로 “gift + s” 해석 하였다
“Some을 무슨” 으로 해석한 “한글번역” 이 애매하다. “some” 을 “복수”로 해석함이 마땅하다

“『그랜드 주석』은 롬 1:11의 ‘카리스마’를 (1) 이방인에 대해 복음을 전해 주는 은혜 즉 즉 구원(Harrison)과 (2) 사도의 안수로 주어지는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행 8:17, 18, Bengel)의 두 가지 의미가 모두 있다고 해석한다.”

믿음대로 될지어다.


진리 2014-07-22 10:29:09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롬1:11-12)

어부님,
이 말씀은 님께서 올린 글의 본문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나누어 준 신령한 은사를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본문의 신령한 은사는 영적 은사, 곧 영에 속한 은사를 말하는 것으로 믿음은 영에 속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11절에서 말하는 신령한 은사는 님들이 말하는 것처럼 방언이 아니라 12절의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요한님,
님이 받은 방언이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무당 푸닥거리 흉내는 그만 내시고 말씀으로 님이 받은 방언이 성령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또, 이런 식으로 게시판을 계속 더럽히는 것은 님의 인격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밖에는 되지 않음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어부 2014-07-21 21:40:43

정곡을 찌를 줄 모르는 자에게는 "롬1:11-12" 을 논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


어부 2014-07-21 19:41:40

생명샘 님은 방언이 다른 은사를 여는 열쇠이다
어부 님은 방언이 은사의 기본(필수)이다

진리 님도 정곡을 한번 찔러 보시지요 !^^ :-)


어부 2014-07-21 10:37:11

유명하신 진리 님! 따라 왔을 뿐인데 굳이 "네티즌의 도"까지 외면하실 줄은 미처 몰랐네요 ㅎ ㅎ 세상에 믿을 넘이 없다니까요 ㅎ ㅎ 당사자가 지 앞에서는 우선 줄행랑을 치기 바쁘시니 이곳까지 원정 올 수 밖에 없지 않았는지요 좋으신 동무까지 대리인 노릇을 자처하고 있으니 바늘 가는 곳에 실이 따라야 하지 않겠는지요.

그렇게 당하고도 기력이 아직 남아 있습니까? ㅉ ㅉ 정이철의 신내림을 전수 받으신 모양 입니다. 그려. ㅎ ㅎ 신학을 모르신다구요? 글롯과 디아렉스토 라는 단어의 의미를 지금쯤은 알고 있을텐데, 익히 아실 만한 분이 말씀을 외면까지 하시는지요. 그러면 쓰나요. 크게 경칠 당할 일만 남았네요.


진리 2014-07-21 10:25:33

그러니 말씀을 전하러 다니시면 됩니다. 

사단도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했습니다. 
말로는 말씀이 좋아졌다고 하면서, 말씀은 전하지 않고 왜 무당 푸닥거리 같은 허튼 짓을 하고 다니십니까?
이것이 님들이 받은 방언이 사단 마귀가 준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입니다. 

님들이 받은 방언이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 확실하다면, 말씀을 전하러 다니십시오. 

인자를 거역하는 것과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길래, 하나는 사함을 받고 하나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인지?

이 말씀이 님들이 받았다고 하는 방언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올리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기왕에 올려 주셨으니 설명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생명샘 2014-07-21 08:26:36

진리 님
사탄이 준 방언을 하면 왜 하나님께 감사하고 성경 말씀이 더 좋아질까?
희한한 사탄도 다 있네.

마태복음 12 장 32 절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출처: http://www.newsm.com/bbs/view.html?reply_page=1&idxno=543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