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가장 시급한 문제.......
믿으세요. 믿으면 됩니다. 너무 쉽고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냥 믿고 구원자로 받아들이세요. 입으로 “예수님 내 구주”, 그 이름을 부르세요.

그런데 안 믿어진다고요? 아직 믿고 싶지 않다고요?
할 수 없지요.
그러나 한 가지만 기억하세요.
마지막 날에, 죽음이 당신을 덮쳐 캄캄한 무저갱으로 끌어갈 때, 그 때는
주의 이름을 부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세요. 구원자는 그 분밖에 없어요.
당신이 한 평생 하나님 떠나 살고 예수를 거부하였다 해도
당신의 마지막 순간에 부르는 소리를 그 분은 들으시고 손을 내미실 것입니다.
성경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셨거든요.

그러나 또한 기억하세요.
모든 죽음이 주의 이름을 기억해내고 부를 만큼 그렇게 여유 있게 오는 건 아니거든요.
그 절박한 순간에 주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고, 기억이고 뭐고 즉사할 수도 있거든요.
그러니 일평생 불안 속에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아슬아슬 주님을 찾겠다는 생각일랑 마시고,
당신의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기 전에, 당신의 시간이 다 하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세요.
오늘 이 시간 무릎을 꿇고 주님을 당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이세요.
그리고 죄의 짐, 죽음의 짐을 내려놓고 영혼의 평안을 누리세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놀라운 안식과 기쁨과 축복을 누리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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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려면 사람이 되어 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면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생명을 주시려면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쪼개 생명을 쏟아내고 죽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하여 여자의 몸을 통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사람이 되려면 그 방법이어야 했고 생명을 쏟아 내어주고 죽으시려면 그 길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구원의 길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절대로 아들을 내어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처녀가 어떻게 아이를 낳느냐고요? 과학적이 아니라고요?
그럼 전능하신 하나님이 과학 때문에 피조물을 사용하실 수도 없고,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실 길도 없어야 하나요? 그래서 우리를 구원할 아무 방법 없어 손 놓고 바라만 보아야 하는 무능력한 하나님이어야 하나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14)
이미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은 처녀의 몸을 통하여 오셨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예수님 나신 날을 기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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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있는 찬송, 미국에서 만났던 찬송

 

나는야 친구되신 하나님과

 

 

 

 

 

 

오래전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근처 훼어필드 한인교회에서

미국 첫 목회를 시작하면서 교회비품을 점검하는 가운데 기존 한영 찬송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미국에 있는 많은 한인교회에서는 널리 쓰여진 찬송가책,

영어와 한글이 같이 있는 찬송가, 펴보니 대부분은 아는 찬송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 하나 살펴보면서 발견한 찬송이 바로 이 찬송이었습니다.

피아노를 떠듬떠듬 치면서 불러보니까 어린이용 찬송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귀에 은근히 강한 인상으로 들어왔습니다.

참 특이한 가사!

이런 노래, 이런 가사도 있구나,

"나는야 친구되신 하나님과 푸른 초장 한없이 거니네...

​손을 잡고 기쁨을 나누면서 댠둘이서 한없이 거니네..."

​친구되신 하나님과 초장을 거닌다.... 오! 음!...

미국 캘리포니아의 그 넓은 초장들,

물론 원래 사막지방이니 모든 물을 ​밖에서 끌어오는 것입니다만 어쨌든,

그 푸른 초장들...

그래서

미국이라는 곳에서

한인 교회당에서 ​

그 텅빈 예배당에서 이 노래를 부르면

참 특이한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때묻고 교활한 어른에서 순수한 어린이로 변화되는듯한 느낌..

느낌적인 느낌^^

 

 

 

최근 이 노래가 기억났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긴 세월 거의 불러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생각이 나서 찾아보니,

어? 한국에서도 아주 옛날부터 불렀던 어린이 찬송이었구나?!하는 발견,

그런데 왜 나는 이 노래를?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아마도, 이 노래를 모르고 있었을까? 아닌가? 나만, 우리만 몰랐나?

특정 교단에서 주로 불렀나? 의문?

암튼 저는 30대 중반에야 알게된 어린이? 찬양^^

 

더 나아가 카톨릭에서도 가사를 바꾸어서

차분한 분위기로

성가곡으로 부르고 있었구나?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사이트를 찾아보다가 1935년경에 발표된

이 노래로 말미암아

저작권 다툼이 있었구나 하는 것도....

 

그리고 미국 사이트에는 이 노래에 대해

우리 어머니가,

우리 할머니가,

어린 시절 너무 너무 많이 부르신 노래라고 추억을 말하는...

미국 주일학교의 추억에는

잊지 못할 노래라는 것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친구되신 하나님과 손을 잡고 걷는 날,

믿을 수 없는 꿈만 같은 사실,

믿으니 이 세상 천국같애....

 

 

그 은혜가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린이 동요풍

 

 

 

 

My God And I 

 

My God and I go in the field together; 

We walk and talk as good friends should and do; 

We clasp our hands, our voices ring with laughter; 

My God and I walk through the meadow's hue. 

We clasp our hands, our voices ring with laughter; 

My God and I walk through the meadow's hue. 

 

He tells me of the years that went before me 

When heavenly plans were made for me to be; 

When all was but a dream of dim reflection; 

To come to life, earth's verdant glory see. 

When all was but a dream of dim reflection; 

To come to life, earth's verdant glory see. 

 

My God and I will go for aye together, 

We'll walk and talk just as good friends do; 

This earth will pass, and with it common trifles, 

But God and I will go unendingly. 

This earth will pass, and with it common trifles, 

But God and I will go unendingly.

 

 

발췌: https://m.blog.naver.com/PostList.naver?blogId=panem


지금 이 글을 정리하고 있는 저를 포함, 성도라 이름 하는 우리는 모두 어느 위치, 어느 자리에 있든지에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이라 고백하면서 지금껏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 사회생활을 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같은 기독교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여도 그 사람의 인격성향, 지식수준의 유무, 환경, 혹은 타고난 성품 등등이 신앙생활에도 작용하는 듯, 정통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분들의 신앙 색깔이 비슷해야 하고 또 비슷할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고 모두 제각각임을 알고 놀라게 된다. 지면 관계로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고 신앙생활 상태를 간단히 두 부류로 분류해보면 1. 건전한 신앙인 2. 불(비)건전한 신앙인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모두 교회에 등록된 교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교파별,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말미암아 각자가 쌓아온 신앙의 색채가 다르게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편의상, 건전한 신앙인, 불(비)건전한 신앙인이라 나누어 부르도록 하겠는데, 건전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비바람이나 홍수가 내려도 끄떡도 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나가는 굳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면, 건전하지 못한 신앙인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열심을내기보다는 사람(인기도 높거나 자기 취향에 맞은, 말을 잘하는 목사님이나 교사를 더 따름)의 말에 비중을 더 많이 두거나 혹은 신비적 현상, 나타나는 어떤 기현상, 이적과 기사 같은 것에 마음을 더 빼앗겨 거기에 열심을 내는 성도가 아닐까 성경 말씀에 비추어 유추해 볼 수 있다.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까 너무 경직되지 마시기를…

이런 것은 초대교회에서도 나타난 현상인데, 건전하고 바른 신앙인의 대표적 인물을 말하라면 당연히 바울 사도를 포함한 사도(가롯 유다 제외)들, 사도들을 통해서 전하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액면 그대로 믿으며 그 말씀에 복종하며 살아간 성도들을 칭하는 것이라면, 불건전한 신앙인의 대표적 인물을 꼽으라고 하면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가 아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 추종세력들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들(우리들)이 건전한 신앙인과 불건전한 신앙인으로 극명하게 갈라지게 되는 명암의 갈림길, 그 차이점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올바른 신앙의 길로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내가 건전한 신앙인으로서 성경 말씀이 원하는 대로 바른 생활을 잘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무엇으로 어떻게 진단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많이 있겠지만, 몇 가지로 간단히 요약하면:

1.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건전한 신앙인이며,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불(비)건전한 신앙인이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성육신 하신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건전한 신앙인, 예수님을 천사장 정도로 믿으면 불(비)건전, 내지 이단자가 된다. 성령 하나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성령님을 온전한 인격을 갖추신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은 건전한 신앙인, 성령을 부리는 영, 혹은 영향력 정도로 규정하는 자(교리)는 불(비)건전한 신앙인(이단)으로 규정한다.

2.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신앙생활의 잣대(Canon)로 삼는 자가 건전한 신앙인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내 신앙생활의 잣대(Canon)로 삼는다는 것을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또 개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생활의 잣대로 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별님의 생뚱맞은 말씀? 하고 속으로 피식 웃으실 분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간 자기 신앙상태를 한 번 점검해보시고 내가 과연 성경을 몇 번이나 통독을 하고 설교 말씀을 전하고 있으며 성경을 몇 번이나 읽고 신앙생활을 해 나오고 있는지, 스스로 자가 진단을 해보시기 바란다. 놀랍게도 내 마음과 생각 속에는 여기저기서 얻어들은 말들, 세속적인 표현을 빌리면 "들은풍월"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보다 훨~ 더 많이 가득 들어차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될 것이다. 아니, 놀라야 정상이다. 

현역 목사님들조차도 (모든 목사님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 이점 오해없으시기를…) 많은 목회자들이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속에서 그 말씀이 주는 뜻을 강론하며 풀어 가르치기보다는 인터넷상에서 떠돌아다니는 좋은 예화들, 인기 있는 목사님들의 설교 말씀들을 듣고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설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나머지 몇 구절은 성경 말씀을 양념처럼 집어넣고 "하나님 말씀을 전했다" 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목회자들이 의외로 많이 있음을 보고 아연실색 할 것이다.

댓글 객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나타나는 기적과 이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말씀에 착념하라고 권면이라도 하노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소리 하지 마라.” 무섭게 되받아침을 보고 씁쓸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물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었고 말씀을 많이 알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도 유대교 랍비들은 하루는 24시간 중 밥 먹는 것,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성경을 읽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함을 알 것이다.

성경 말씀을 많이 읽거나, 성경 말씀을 많이 아는 것, 그것이 문제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주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었거 말씀을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읽은 말씀을 마음에 화합시키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면 모순인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들은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속에 나를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외형적 신앙생활, 자기 의를 들어내는데만 중점을 두었고 말씀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그 정신은 무시했기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3. 죄에 대한 처리 문제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사람의 신앙이 건전한가 불건전한가 하는 것을 알아보는 세 번째 방법은 그 사람의 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지난 번 칼럼 글 아래 남긴 한 독자님의 질문, 1.말씀의 잣대(canon)하셨는데 로마서 2장 14,15절에 나오는 양심의 송사와의 관계와 히브리서 13장 18절에 나오는 "우리에게 있는 선한양심"과 연관지어 설명하여 주실수 있는지요?)의 답으로도 가할 듯, 죄에 대한 처리 문제를 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그 사람 속의 양심의 소리가 진정한 소리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의 양심은 과연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본래 인간은 선한 양심( good conscience)이 하나님을 찾아가게 되는 것인데, 마음속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파수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깨끗한 양심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대화하며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이다.(창 1: 27절 참조) 이렇게 인간은 다른 동물에게 없는 특별한 인지(knowledge)능력과 양심(conscience) 이란 것이 있다. 타락하기 전, 인간의 마음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선한 양심( good conscience)을 심어두셨고 그 선한 양심을 따라, 재판석을 차리기도 하고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할 수 있어, 선(善)과 악(惡)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책망과 질책, 변명 그리고 위로의 음성이 들려오기도 하고, 또 때로는 자신을 신원하여 주고 달래어 주며 어루만져 주기도 하는 것이다.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모두 내 마음속에 있다고 해야 하나?) 이런 현상을 “서로 송사하며 변명하기도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롬 2: 15절 참조) 문제는 그 양심이 병들고 화인 맞아 더는 그 양심이란 것마저 믿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딤전 4 : 2)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물(말씀)과 피로 거듭난 성도는, 그동안 병들어 제 기능을 상실했던 양심이 먼저 살아나게 된다. 이렇게 선한 양심으로 살아난 성도(벧전 3 : 21절 참조)를 가리켜 거듭난 성도(Born Again Christian)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외형적 성도가 아닌 내면적 참 그리스도인으로 바뀐 상태가 거듭난 성도란 것이다. 죄 문제를 다룰 때, 인간(성도)에게 나타나는 표현(행동)에 주된 관심이 있는가, 아니면 인간 속에 있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다시 살아난 양심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말씀), 내적 신앙인격에 관심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의 깨끗함에만 치우치게 되면, 바로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문제아(兒)로 대두될 수 있다. 이런 사람이 율법주의자요, 바리새인처럼 외식하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 7) 주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주어진 양심을 부지런히 살피시는 주님께서 실망치 않도록 주께 마음을 내어드리는 자가 성도요, 이런 사람은 비록 육신의 소욕에 이끌려 잠시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절대로 고의적인 죄나 계속되는 자범죄를 지을 수가 없다. (요한 1서 5: 18절 참조)


4. 성령 충만함을 입고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한다

성령 충만과 성령 소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자. 우리나라 번역문만으로는 해석이 상당히 애매한 부분이 있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만 이해하고 있어도(원어나 영어를 알지 못하여도)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충분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다. 기록하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고 구원의 은총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분도 성령 하나님이시기에 그러하다.

그러나, 구원과는 상관없이 성경 말씀을 좀 더 깊이 있게 연구하려하거나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스승이라면 자국어로 된 번역문만 보는 것보다는 원어를 배울 수 있다면 이해력을 돕는데 편리하고, 더욱 명쾌한 해석을 답으로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성경 교사님들은 원문을 읽거나 배울 필요까지 없다고 하나 적어도 원문에서 가장 근사치로 번역되었다는 권위 있는 영어 성경에서 그 뜻을 찾아보는 정도라도 자신을 계발시킨다면 주님의 말씀을 억지해석하지 않고 자신에게나 가르침을 받는 사람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그도저도 할 수 있는 형편이 안되고 성경 공부를 가르치거나 난해한 단어를 좀 더 이해하기원하는 분이라면, 우리나라 정통교단에서 인정하는 신학자들의 저서를 구하여 참조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임을 전제로, 별이가 이곳에 들어오는 다른 분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연구하는 마음을 지녔기에, 모국어 번역문만으로는 애매모호한 단어나 댓글은 영어 성경, 혹은 원어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고 하는 것이다.

1) 성령 충만함의 의미란 무엇인가?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테일러의 헬라어 사전을 인용하면서“ 무엇이 마음을 사로잡을 때 충만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기운으로 살라고 말하는 것으로 성령에 의해서 지.정.의. 전인격이 성령의 힘에 의해서 조종을 받고 있는 것으로 말한다.

성령의 충만함에 관하여 충만한이란 ‘가득차다’. 혹은‘성령으로 흠뻑 젖은 것’, 단순히 그들 속에 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넘쳐흐르는 성령으로 충만된, ’성령으로 흠뻑 젖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성령의 충만을 두 가지로 구분을 한다. 특별한 경우에 주어지는 충만으로 어떤 특수하고 고유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성령 충만을 입은 사람들이 있다. 그 예로 브사렐과 오홀리압 엘리사벳의 경우들이 있다.

그리고 생활상에 주어지는 성령의 충만이다. 엡5장 18절의 말씀을 관련하여서는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여기서 성령 충만을 지시하는데 여기서 나오는 것은 어떤 한 상태나 조건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계속적인 현재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전자의 임무수행을 위한 충만과 구별을 한다.

이것과 관련하여 그는 롬5장2절의 말씀에 관련한 존 오웬의 ‘성령과의 교제’를 진술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소망가운데 기뻐하는 것 ... 그것은 어떠한 고난이나 영광을 통해서 영혼을 인도하며, 성령께서 우리 마음가운데에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부어주심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 성령은 모든 두려움과 슬픔을 극복하게 하시면서 즐거움과 희열 그리고 때로는 말할 수 없는 심령의 환희로 우리 영혼에 충만케 채워주기도 하신다" .”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 중에서,

뿐만 아니라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죄에 대하여 애통하게 하시며 의로 교육하시고 선한길 의의길로 인도하시기를 그 나라에 가기까지 하신다. 성령님께서는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나를 버리고 멀리 달아나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항상 함께 계시면서 내가 죄 앞에 무릎을 꿇고 쓰러질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한없는 사랑으로 탄식하시며 간구 해 주고 계신 것이다. (롬8: 26-27절 참조) 이것을 신학상 용어로 "견인(
堅忍(perseverance))
"이라고 한다. 
 
2) “성령을 소멸치 말며(to; pneu'ma mh; sbevnnute)”(살전 5: 19) 여기에서 “소멸”이란 단어는 원어가 주고자 하는 뜻이 우리나라 번역문만으로는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다. “소멸하다”의 헬라어 원어는 “스벤누테( sbevnnute)”, 번역하면, “태우다.” “불사르다” “ 등불을 끄다.(put out, quench)”그런 뜻이 포함되었다. 그러니까, 한자어 번역문 “태워서 없어지다, 사라지다”의 뜻과는 사뭇 다른 뉘앙스를 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원어에 가장 가깝게 번역되었다는 영어만 보더라도 (KJV) “Quench not the Spirit” (살전 5: 19)이다. Quench의 사전적 의미는 “소멸시키다” 이 한 가지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을 끄다. 가열된 것을 물로 식히다.) 그런 여러 가지 뜻이 있다.

그러니까, 적용하자면, “성령 충만을 불같은 성령, 불의 혀” 이런 강렬한 표현을 사용한다면, “성령의 활동하심을 제지하거나 거역(불순종)하게 되면 내 속에 계신 성령님이 잠잠히, 탄식하시는 것이다. 이런 상태로서는 성령의 불같이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없게 된다. 이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다. “순우리말로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로 번역을 해야 정확하다는 것이다 . 성령 소멸'은 내주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을 떠나버리신다라고 하는 뜻보다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성령의 불을 끈다. " 혹은 "성령의 역사를 억누르게 된다."는 의미가 더 정확하다고 본다.
성령님에 대한 인격적인 의미로 소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인류에게 있어 불은 매우 소중히 다루어야 했기에 그만큼 관리 보호가 필요 했을것이라고 보며, 불(능력을 의미)이 꺼지지 않도록 늘 보살펴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재론하자면, 성령의 소멸이라고 하여서, 한자어가 주는 개념의 완전히 떠나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불같은 성령의 능력을 상실한 상태”가 되지 않도록 하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더욱 정확히 이해가 된 것이다. 만약, “소멸”이란 한자의 뜻대로라면, 성경 전체의 맥락이 이해되지 않고 거기서 멈추어야 하고 끊겨져 버리는 것이다. 성령은 한번 십자가의 은혜에 근거하여 임하시면 영원히 떠나지 않으신다. 그래서 성령으로 인친다 라고 하는 것이다.(엡 1: 13- 14 ) 한 독자님이 제기하신 "성령 소멸"이란 어떤 것인가에 관한 지난 칼럼의 댓글에 관한 답변,

그리고 또 다른 독자님과 지난 칼럼 글 아래 댓글로 남기신 질문을, 칼럼 글로 다루겠다는 약속을 드렸기에, 오늘은 그 두 분의 질문을 근거로 생각해본 내용이긴 하나,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기 원하는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정리해본 것이다. 짧은 지면에 원하시는 만큼의 만족한 답변이 소개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저로서는 기도하면서 성경에 근거하여 최선의 답변을 드리려고 노력한 것이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이 정성 하나만으로 은혜점수를 후하게 주셨으면 좋겠다.^^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들의 마음에 조명하여 주셔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주님의 은혜가 아침햇살처럼 우리 심령에 두루 비치시기를 기도해 본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 26-2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 20절 말씀)



출처: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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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필자는 우연히 어느 기독 싸이트에 들어가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 어떤 목사님의 칼럼 글을 읽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내용을 잠시 요약하면, 모 선교단체의 집회가 그 교회에서 있었다는 것이고, 집사님 한 분이 (아마도 그 선교단체를 도우시는 책임을 맡으신 듯) 그 선교사님과 발제자 목사님을 식사 대접하고 싶으시다는 제안을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목사님, 좋아하시는 음식이 뭐예요?”"저야 늘 잘 먹으니 선교사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드시죠, 선교사님, 뭘 드시고 싶으세요?” “회 ~ 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답하시더라고 한다.

목사님 자신은 “그래요, 그럼 여기가 좋겠군요” 하며 일식집으로 방향을 틀려고 하셨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자 식사를 대접한다는 집사가 급히 길을 막듯이 서둘러 말하기를. “거기는 불편하니 설렁탕을 드시죠, 설렁탕 전문점이 있으니 그리로 가요” 하며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통보하듯 말하며 앞장서 씩씩하게 걸어가셨다는 것이다. 그 발제자 목사님께서는 당황스럽고 불쾌한 마음에 “저기요, 당신께서는 그냥 가세요, 선교사님 식사 대접은 내가 하겠소” 라고 거침없이 말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집회를 앞두고 있어 꾹 참으며 뒤따라갔고, 선택의 여지도 없이 설렁탕을 시켜 먹으면서 설렁탕 속에 든 고기들을 한쪽에 골라내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들어내는 그 목사님을 보며, 눈치를 채신 집사님이, “어머 목사님께서는 설렁탕을 안 좋아하시나 봐요?” 물었고, 그분은 망설임 없이 “네.” 하고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더욱 우스운 것은 그런 무례한 자신을 회개하거나 뉘우친다는 것이 아니고, 그 집사님이 말장난을 했고 자기는 덩달아 장단에 맞춰 말장난까지 할 기분이 나지를 않는 것, 그 집사님의 말장난에 놀아난 기분이 들어서란 것이다. 처음부터 물어볼 것도 없이 알아서 하면 될 것을 인사치례나 할려고 형식적으로 물어보는 의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란 것이다! 너무 황당하지 않은가?

필자가 보는 시각은 그 집사님이 너무 안쓰럽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운 때에, 자신이 후원하는 선교사님께서 집회를 하실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신 목사님이 고맙고 감사해서 선교사님과 함께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싶은데, 주머니 사정은 여의치 않다. 고민 끝에 결정을 했겠지. “내가 아무리 어렵다곤 해도 현지에서 모처럼 나오신 선교사님 대접도 할 겸, 그 선교사님을 불러주신 목사님도 모시고 한 끼 대접을 하는 것이야.” 그래서 딸랑거리는 주머니 사정, 집에서 눈을 흘길 아내의 얼굴도 떠올랐을 것이고….그러나 겉으로 표시 낼 수야 있나? 명색이 선교책임 집사인데….꼭 한번은 대접을 해서 보내드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큰 마음을 먹고 초청을 했다. 두 분 음식취향을 물어보아야 예의이긴 한데, 딸랑거리는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간이 쿵덕거린다. “에이, 설마, 선교사님과 목사님이신데….비싼 횟집이야 가자고 하시겠어? 요즘 경제가 어려운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저…목사님들 무슨 음식을 좋아하세요?”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이크,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선교사란 분이 “횟집.”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다급해진 집사님께서 부랴부랴 목사님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진다. “목사님, 목사님께서는 설렁탕 좋아하시죠?” 너스레를 떨면서 설렁탕 집으로 모시고 가는 그분의 마음을 한 번 생각해 보라. 얼마나 초라하고 얼마나 슬플 것인지… 식사가 나왔다.

선교사님과 목사님의 얼굴이 저녁 굶긴 시어머니의 얼굴처럼 부어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목사님은 보란 듯, 설렁탕 속에 든 고기들을 죄다 꺼집어 내어서 밥상 위에다 착착 쌓아둔다….

“목사님, 설렁탕 좋아하지 않나봐요.” 어떤 대답을 기대했을 것 같은가? 적어도 양떼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라고 명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목사님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네.”라고 대답을 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 집사님께서 처음부터 물어본 것이 ‘말장난’이란 것이며, 자신은 그런 말장난에 맞장구를 친 것이 억울해서 죽겠다는 요지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그 글을 읽는 내내…필자는 그 집사님의 가슴을 생각하면서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의분(?)이 일었다.

성도는 주님의 양떼,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안다면, 결코 그럴 수 없다. 목동이건 목자건 주님의 양떼를 맡았으면 그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펴야 하고, 약한 자 병든 자는 싸매어 주어야 하는데….주인되신 주님을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게시판에도 최근 연로하신 은퇴 목사님 한 분께서 종종 글을 올리시기에 참으로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나도 환영인사 댓글이라도 남겨야겠다는 마음으로 오늘 아침 그분이 올리신 글에 들어가 찬찬히 정독을 하던 중, 역시 너무나 놀라운 말씀을 대하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그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어느 유명한 강사님이 목회자 부부 세미나에서 강의한 내용이며, 그 연로하신 목사님께서 그 강의 내용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신다는 것인데, 나쁜 뜻은 없으신 것 같고, 목사님들에게 좀 더 겸손한 자세로 성도를 섬겨야한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한 좋은 의도일테지만,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기에...안타깝다. 그 내용 일부분을 잠시 옮겨보기로 하고, 그 부분은 편의상 괄호로 표시한다.

(“교회 주인이 장로인가 목사인가? ''''라는 질문으로 강의는 시작되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주인은 성도들이라는 답변 말고 장로가 주인인가? 목사가 주인인가? 묻는다. 곤란한 질문에 강사는 힘주어 말한다.

1. 목사는 목회적 명예의 주인, 장로는 사회학적 교회 살림을 맡은 주인,

2. 목사는 초청받은 임기제의 주인, 장로는 자생한 종신주인.

3. 목사는 대가를 받는 주인이고, 장로는 대가를 받지 않은 주인이다.

4. 목사는 장로 인사권이 없는 주인, 장로는 목사의 인사권이 있는 주인.

5. 목사는 언젠가 떠나야 할 주인, 장로는 영원히 그곳에 살 주인

결론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보면 목사는 교회학적 형식상의 주인이고, 장로는 사회학적으로 실질적 주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들은 장로들을 잘 섬겨서 목회 잘하라는 당부였다. 섬기는것이 몇배 섬김을 받는진리. 으뜸이 되는진리. 높은 자리에 앉는진리. 이 진리를 모르는 석두목사가 되지 말라.)

더 많은 내용이 있지만, 주요 핵심을 말하자면, 교회의 주인은 장로와 목사란 것이다! 목사는 유급주인, 장로는 무급주인이란 이야기이며, 이것이 진리라고 역설하시고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초년병 목사님이 그런 말을 지지했다고 하면, 성경을 제대로 모르니까 그러려니…할 수도 있겠지만, 긴 세월을 개혁교회 안에서 헌신봉사 하시다가 달려갈 길을 마치고 이제 은퇴까지 하신 어르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더욱 놀랍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교회(敎會)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1. 교회(敎會)

가 무엇인가?
믿는 자의 무리다. ‘에클레시아’란, “임금의 대관식에 초대받은 사람들”이란 뜻이다. (신약성경에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모임)

2. 교회(敎會)
는 누가 세웠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셨다. (마16:18) 예수 그리스도께서, 12제자를 불러 교육시키셨고 (마 10:1-5, 16. 마 5:1-2), 70인을 조직하여 파송하셧다 (눅 10:1-2), 120문도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았고, (행 1:15), 베드로가 설교할 때, 3000명 회개역사( 행 2: 41, (행4:4) 5000명 회개역사, 남녀의 큰 무리들( 해 5:14), 이렇게 잠시, 초대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때, 성도들을 불러모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심이 확실하다.

3 교회(敎會)
의 주인 (소유주)은 누구인가?
교회의 주인, 교회의 소유주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 20:28).”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사셨기에,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고전 1:2, 고전 10:32, 고전 11:6, 고전 15: 9, 갈 1:13, 딤전 3:15)을 보면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라 명시해 두셨음을 보아 알 수 있다.

4. 교회(敎會)
의 머리는 누군가?
교회의 머리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 1:22-23절 말씀).” (골1: 8절 참조).

5. 교회(敎會)
는 어디에 세워져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한다. (마 16:18, 고전 10:4, 시 18:31 절 참조)

6. 교회(敎會)
는 누가 운영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영으로 친히 운영하신다. (슥 4:6,하박구 2:20절 참조)

7.
목사와 장로 그리고 집사는 누군가?
그들은 교회(敎會)의 기구다. 직분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 (엡 4:11-12) 주님의 교회를 각 직분대로 맡아서 섬기는 봉사자요, 일꾼, 청지기들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12:42절)"

우리가 이 청지기의식, 일꾼의식을 가지지 못하면, 이런 결과를 빚게 되는 것이다. 청지기의식이라 함은 지난번 칼럼에서 다룬 적이 있기에 여기서 재론하지는 않겠다.그러나 주님의 선한 일꾼들이라면 교회의 주인이 되신 성령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먼저, 일꾼들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여기실 것마저 포기하셨고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모진 십자가를 참아 내셨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시사 하늘에 오르셨다. 그 후에 보혜사 성령님을 스승으로 보내어 주셨다. 성령님을 우리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목적도 인간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다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신 목적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교회의 필요에 따라 어떤 이는 교사로, 어떤 이는 목사로, 어떤 이는 가르치는 자로, 어떤 이들은 사랑으로 섬기는 자로, 또 어떤이는 봉사자로, 세우셨다. 세우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교회가 분리되고 파괴되고 우위를 가리기 위해서 세우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서로 섬기고 서로 사랑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더욱 든든하게 서 갈 수 있도록 세우신 것임을 믿어야 한다. (엡 4:11-12절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한 형제요 자매이다. 동시에 우리는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고 직분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격에 있어서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누가 더 높고 더 낮은 사람이 없다."나는 하나님의 집을 섬기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청지기요, 일꾼일 것뿐이다."하는 것을 인지(knowledge)하고 충성(loyalty)을 다짐하는 것, 이것이 선한 일꾼들이 가져야 할 태도인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이런 올바른 ‘일꾼의식'을 가지고 직분에 임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가 없다.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직분자요, 그리스도의 일꾼된 우리는 그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생명의 양식인 복음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서로 아끼며, 서로 세워주며, 서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교회의 주인이라고, 내가 하나님의 특별한 자요, 신령한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이미 그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사탄이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영혼들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며, 교회의 주인의식이 잘못될 때, 목사가 장로가 교회의 주인 되어, 성도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려 할 것이고, 그런 잘못된 사상으로 인해서 성도들의 영혼을 실족시키고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그렇다면, 그런 종들을 과연 착하고 충성스런 종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하겠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1-2절 말씀)"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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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을 말하는  기독교 신자 중에서 그처럼 중요하게 강조 있을?

 

 번째 질문 -------------------------------------------

 

진실을 말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제일의 성경적 리입니다. 현대 사회의   진실을 부주의하게 취급하거나 고의적으로   결과입니다. 가족이나, 친구 에서 들의 정직함에 대해   있는 것은 개인 개인의 관계에 있어서 근본적인 일입니다.

 

재정과  과정의 세계는 정직함의 중요성에 대해서 무나   있기 문에사기나 오해가 생기지 도록,  합의  주로 문서로 성해  것을 하고 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녀들의 말과 약속이,  약속을 입증하는 법률 문서 이도, 모든 면에서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줄 것을 하십니다.

 

진리가 ? 2   전에 유대의 총독 빌라도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 질문은 늘날에도 문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실에 대한 절대  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애쓰면서 정거리는  그러한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실한 인은 그러한 질문에 솔직한 대답을 갖을 것을 구합니다.

진실은 입증   있는 정한 사실일? 바르 동하는 것이나 또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자체는 진실함을 의미하나요? 진실은 사람마다 다른 것인가요? 진실은   믿지 아도 참된 것인가요?

 

진실은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 아니며, 황마다 다른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은 보편적인 진실을 아야만 하며, 현대 문화가 그것에 대해 논박할 때라도 그것을 하고, "사랑 에서" 그것을 어해야 합니다 (소서 4:15). 진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세상의  음성 문에  사람들이 수에 빠져  르침 따라니다. 백하게   있는 유일한 진리는, 모든 것을 조하신 조자께서 선언하시고 믿음과 행위의 도로서 우리를 위해 기록해 놓으신 하나님의 율법 책인 성경에 기록된 진리 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개인적이며 실제적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진리에 대해서 말할  아니라 그것에 의해 살도록 우리들에게 니다. 성경의 진리는 사실적일  아니라 도덕적입니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이  입니다. , , 관계,  , 그리고 심지어 개인의  가운데서도 우리들은 위선을 보며 공공연한 결의가 정직과 신으로 보입니다. 위선은 진실과 직함의 외면만을 보여주지만, 그러나 가면은 함과 진리의 용을 숨깁니다. 위선은 실제적인 삶은 다른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받기를  라도

으로는 다른 사람의 복지를 염려하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입니다. 위선은 이기적인 행동  습관이 비밀러운 마음을 지배하고 있을 , 으로는 하나님께 신하는 것처럼 미는 것입니다.

 

정직은 진실과 정직한 행동의 문제입니다. 마음을 여는 것이나 직하게 말하는  말하는 사람에게    에라도 스스 진실함을 합니다. 약속  약을 지키는 것은 정직의 행위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것은 정직과 진실에 대한 (名望) 벗겨버리는 것입니다. 지적인 정직함은 마음   직하고 있는 개인적 의견 될지도  그러한 모든 진실에 대해서 까지도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성실함은 직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수님은 나다나엘  속에 사한 것이   사람”(요한복음 1:47)이라고 말씀하습니다. 사람은 정직하지 더라도 으로만 정직해 보일  있습니다. 진실로 정직한 사람은 진리와 함께 하며 (고린도전서

13:6) 불의와 위선에 대해서는 화를 내며 슬퍼합니다.

 

사기는 오직 세상에서만 찾아볼  있는 정직함  립니다. 그러나 만일 사도 바울이  당시에 믿는 자들에게   도록 권면해야만 했다면, 우리는 우리들이  신자들을 대할   정직하게 행하도록   조심해야만 합니다. 교회의 연합 그것을 합니다. 너희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아니하? 너희  행하고 속이는.  너희 제로다.” (고린도전서 6:7,8).

 

마가복음 10:19  기록된  청년에게 하신 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계명을 아나니 인하지 말라, 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증거 하지 말라속여 하지 말라,  모를 공경하라 였느니라.”  5, 6, 7, 8, 그리고 9 계명은 모두 “ 하지 말라 하는 계명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증거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관심사: 

 

어떤 선의의 마음을 가진 기독교인이 약성경에서  말했 것이 나중에  결과를  주었던 사람에 대한  지적합니다. 이러한 부터 그들은  말하는 것이 용되 예외의  있다고 결론을 습니다. 이러한 결론을 받침해주 로서 사적인 사건에 기초를     인용합니다. 만일 하나님을  하는 사가 찾아와서  고소된 사람이나 가족들에 대해서 물을  다른 사람의 생명 호하는 것이  일이 닐까? 성경은 계명에 대해서 외의 경우를  주지  있습니다.

 

짓말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일이 아닙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말을 말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 것은 못된 이기적인 이유를  것을 북돋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못에 대해 주어 하는 형벌 피하는 것은  상대방 사람에게도 생명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종류 정직함을 정당화시키는 교활한  우리들의 사회의 심각한 재해인  상대주의(상대론, relativism) 황윤리(situational ethics) 했습니다.

 

교회에서 특별  것은  기독교인들 사이의 성실함과 정직함입니다. 령님을  위한 노력으로, 혹은 지도자로서  사람의 (名望) 높이기 위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방법보다는 간적인 방법 사용합니다. 적인 형상이 령님에 인도함을 받은 상으로 표현될  진실은 태롭 니다. 모든 영적 지도자들 바울과 함께 마음으로 우리를 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하지 ,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 일이 없노 라고 증거   있어야 합니.

기독교인은 말과 행동으로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진실함에 대한 본을 보이 위하여 부름 받았습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  첨부: 상대주의 - 절대적으로 바른 진리 있을   바른 것은 그것을 정하는 기준 의해 해지는 것이라는 주장.

 

상황윤리  1960  말에 겨난 용어로서 보편적인 윤리 규범 정하면서, 구체적인 상황 처한 개인 자신의 윤리적 당위(當爲) 스스로의 직관을  식별해야 하거나 윤리 규범  그대로 따라야 다고 주장하는 윤리 학설이다. , 절대적인 리의 윤리를 따지기 보다는  상황 따라서는   없었다는 것을  자기 행위에 대하여 자기 합리화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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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에서의 옷을 입고 염소털로 손등을 덮고 염소고기를 손에 들고 떨면서 아버지 이삭에게 나아갔어요. 에서가 아니고 야곱이라는 게 들통나면 축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은 야곱의 손을 만져보고 옷 냄새를 맡아보고 완전히 속아 넘어갔어요.
“목소리는 야곱인데 손 만져보고 냄새 맡아보니 에서로구나.” 그리고 염소고기를 먹고 야곱을 축복하였어요.

우리가 천국 가는 것도 하나님 속이기예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어린양의 그 피를 들고 두려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은 속아주실 거예요.
속아주시기로 작정하고 아들을 내어 주셨으니까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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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안 보입니다. 전기(電氣)도 안 보이고, 자력(磁力)도 안 보이고, 전파도 안 보이고, 힘, 에너지, 중력, 인력(引力)도 안 보입니다. 우리는 그 안 보이는 것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생명도 안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 보이는 생명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가장 작은 바이러스로부터 모든 동식물, 거대한 고래까지 생명으로 삽니다. 이 지구, 온 세상이 생명으로 가득합니다. 
생명이 무엇일까요? 전기작용? 물리학적 현상? 화학작용?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생명이 무엇인지, 그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낼 수 없고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생명 한 조각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생명 또한 영적세계에 속한 것일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생명이 무엇일까, 내가 죽으면 이 생명은 어디로 가는 걸까, 오늘밤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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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두려운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 이후를 알 수도 없고 죽음에서 다시 돌아올 수도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죽음 앞에 두려워 떨며 일평생 매여 종노릇하다가 결국 죽습니다.
오직 한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죽을 생명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오셔서 십자가에 몸을 깨뜨려 흘려주신 영원한 새 생명으로 바꾸는 것, 그 길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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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2장 (글롯사와 디알렉토스)

(행 2:1-5) 오순절 날에 마가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는120문도들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는 대 사건이 발생합니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던(창11:1) 인류의 언어 체계가 바벨탑 사건으로 하나님께 범죄하며 구음의 언어가 하나였던 인류의 언어를 빼앗기고 흐트러지게 됩니다.(창11:7-8) 이렇게 빼앗기고 흐트러졌던 인류의 언어가 하늘의 언어로 회복되는 때라. 요엘2:28에서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일, 마지막 때에 이러한 일이 있겠다 예언하신 요엘2장의 말씀의 성취가 보혜사 성령이 이 땅에 임하시는 행2장의 말씀입니다.

어떤이들은 행2장의 방언을 영언이라 부름니다.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였던 (창11:1) 시점에서 (창2:7)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곧 (창11:1)의 언어가 하나님과 아담이 사용하시던 동일한 하늘언어였음이 확인됩니다. 이로써 곧 (행2:1-5)방언을 곧 영언(하늘언어)이라 추리해 낼 수있는 근거가 됩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잃어버렸던 인류의 하나였던 언어 체계가 행2장의 보혜사 성령이 이 땅에 임하시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늘언어, 영언이 회복되는 사건이라 주장한다면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겠는지요?

행2:4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방언의 원어는 글롯사 즉 ‘혀’ tongue, 언어 language라는 의미로 방언은 혀에서 나는 소리, 혀에서 발생하는 언어라는 의미 입니다.

6 절에는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여기에서 “듣고 소동하여” ‘듣다’의 원어의 의미는 디알렉토스, 들려 오는데로 들었다 하는 의미 입니다. 즉 혀에서 글랏사로 말한 방언이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인하여 듣는이의 귀에 각각 다른 언어 디알렉토스로 들렸다는 의미 입니다.

글롯사와 디알렉토스를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글롯사)
1. 방언을 본토 말로 할 수 있습니다.
2. 방언을 외국어 말로 할 수 있습니다.
3. 방언을 하나님과 아담이 사용하던 하늘 언어(영언)로 말할 수 있습니다.

(디알렉스토)
A. 혀에서 방언을 말하는 대로 들렸다.
B.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로 다른 언어, 또는 하늘 언어로 들렸다

다음과 같은 6가지 형태로 방언으로 말하고 들릴 수가 있다

1A: 본국어 방언으로 말을 하고 본국어로 들렸다
1B: 본국어 방언으로 말을 하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외국어, 또는 하늘언어로 들렸다

2A: 외국어 방언으로 말을 하고 외국어로 들렸다.
2B: 외국어 방언으로 말을 하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본국어 또는 하늘언어로 들렸다.

3A: 영언 방언을 말 한대로 영언으로 들렸다.
3B: 영언 방언을 하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외국어 또는 본국어로 들렸다.

120문도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외국어와 본국어 또는 하늘언어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자 오순절 날 여호와께 제사하기 위하여 모여 온 디아스포라와 현장에 있던 본토인들에게 각각 자기언어로 기도소리를 듣게 됩니다.

오순절에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던 현장에는 다른 나라에 이민 가서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 들이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일년에 세번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 와 얼굴을 보이라는 명령을 지키기 위하여 세계 각처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각 나라에서 올라 온 사람들을 나라별로 세어보니 대략 17개국의 사람들과 본토인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17개국에서 온 디아스포라 들에게 각각 자기나라 말로 방언이 들렸다.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온 각각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나라 외국어로 들렸으므로 오순절의 방언은 순전히 외국어 언어였다?.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순절의 방언이 다만 외국어로 말하고 외국어로 들리는 각 나라의 방언이었다면 디알렉토스의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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