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도 무서운 죄가 있습니까?
‘나 같은 사람은 절대 천국에 갈 수 없어. 하나님은 절대로 나를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나는 지옥에 가야 마땅해......’
그렇게 영원히 용서받지 못 할 것 같은 불안이 혹시 당신의 가슴 속에 있습니까?

인류최초의 살인사건은 동생 아벨을 쳐 죽인 가인에 의하여 저질러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을 죽이지 않으시고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떠는 가인에게 오히려 표를 주어 보호하십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창세기 4장 13-15절)

절대로 용서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죄인인 가인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최초의 살인자, 그것도 동생을 죽인 극악한 가인 같은 악인이 용서를 받는다면 이 세상에 용서받지 못 할 죄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이 용서는 먼 훗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 아담으로부터 세상 끝날까지의 모든 인간들의 죄를 한꺼번에 담당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담보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로 이미 작정하시고 그 피로 가인을 미리 용서하신 것입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해결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인을 용서하신 것은 어떠한 죄인도 용서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죄인이라도 그 죄를 들고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하고 하나님 앞에 울며 나오는 자는 다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용서 할 수 없는 죄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인을 용서하심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저 말고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십자가 아래 나아와 울며 엎드리십시오.
가인이 용서를 받았는데 당신이 왜 용서받지 못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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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 이걸로 횡설수설 좀 해볼까 합니다. ‘일천번제’ 바로 다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솔로몬의 지혜가 솔로몬이 원래 가졌던 지혜가 아니라 일천번제를 드린 다음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였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열왕기 저자의 의도일 것입니다.
창기 두 여자가 한 집에서 각각 아들을 낳았는데 한 여자가 잠자다가 자기 아들을 깔아서 죽이고 다른 여자의 아들과 바꿔치기 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다투다가 솔로몬 왕 앞에 나와 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으로 다스려지는 이스라엘에서 창기라면 가장 비천한 죄인의 신분인데 감히(?) 왕 앞에 나와 재판을 받습니다. 우리도 신분의 고하나 귀천과 관계없이 이와 같이 누구든지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요즘 세상 같으면 DNA검사로 간단히 판별할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게 있었을 리 만무하지요. 그런데 우리 잘 아는 바와 같이 솔로몬은 칼을 가져오게 한 다음 아기를 둘로 갈라서 두 여자에게 나누어주라는 판결로 진짜 어머니를 알아내는 재판을 합니다. 그리고 이 지혜로운 판결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솔로몬에게 있는 하나님의 지혜에 두려워 떨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다음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는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그리고 그가 누린 막강한 권세와 평화와 부귀영화가 부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솔로몬의 재판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메시지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1. 솔로몬을 통하여 전지하신 심판의 하나님을 보여 주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끔찍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주가 되려면 전지(全知)하셔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넓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다 아시고 판단하시지 못 한다면 하나님은 심판주가 될 수 없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악(惡)이 지배하고 악행(evil doing)과 범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매우 유용한 도구와 무기가 될 것입니다. 착한 자는 당하기만 할 것이고 나쁘고 교활하고 못 된 자들은 항상 도덕질하고 빼앗아서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억울한 일은 보상받지 못 하고 악한 자들은 처벌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합니다. 이사야서 40장 27절은 말씀합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하나님이 너의 사정을 모르시고 너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 하실 거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명철은 한이 없으시다.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신다.”

2. 심판은 칼로 나누어 하는 것이다.
솔로몬 왕은 칼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심판은 칼로 하는 것입니다. 칼로 쪼개고 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합니다(히 4:12). 주님의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옵니다(계1:16).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 그 터럭의 3분의 1은 성 안에서 불태우고 3분의 1은 성 밖에서 칼로 치고, 3분의 1은 공중에 뿌려 흩어라, 내가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마지막 날에는 악인과 선인이 나누어질 것입니다. 좌편과 우편으로 나뉘어질 것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와 그렇지 못 한 자들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은 피할 자가 없습니다.

3.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지혜와 다르다.
솔로몬이 칼로 아기를 나누라고 명령하였을 때 주변의 신하들이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였을까요? 혹시 왕이 미쳤다고,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요?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이 세상의 지혜로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우고 어린아이들에게는 열려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4. 사랑이 이긴다.
솔로몬의 재판에서 아기의 진짜 어머니는 사랑으로 이겼습니다(승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이깁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믿음, 소망, 사랑, 세 가지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 말씀합니다. 주님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 없는 자는 이기지 못 할 것이며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 할 것입니다.

5. 참된 사랑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자신의 좋아하는 감정과 착각합니다. 좋아해서 만나고 결혼했다가 싫어지면 갈라서고 병이 들거나 화상이라도 입어 모습이 달라지면 떠나갑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신의 필요에 따라 상대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자기를 위한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를 위한 사랑, 상대중심의 사랑입니다.
진짜 어머니인 여자는 칼로 아기를 쪼개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닌 여자에게는 자기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아기가 살든지 죽든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진짜 어머니의 사랑은 아기를 향한 사랑이었고, 거짓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 아니 이기심이었던 것입니다.

6. 하나님의 사랑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하여 인간을 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또 말씀하기를 우리는 사나 죽으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우리 인간을 지으셨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중심이거나 이기심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을 위한 사랑, 하나님 중심의 사랑이었다면 인간이 범죄하여 죄인이 되고 진노의 자녀가 된 순간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에게서 돌아섰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대로 죄인들을 싹 쓸어버리고 다시 지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이 된 인간을 포기하거나 내버리지 못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긍휼로 불타는 듯 하였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사랑입니다.

7. 진퇴양난, 절체절명의 갈림길,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
자, 오늘 말씀은 솔로몬왕이 칼로 아기를 자르라 하였지만, 좀 바꾸어서 그 창기 두 여자가 아들을 놓고 양쪽에서 잡아당기기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서로가 죽어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진짜 어머니는 압니다. 자기가 아들을 놓아버린다면 저 무지한 여자가 오늘밤에 그 아들을 깔아뭉개서 죽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어도 뺏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 여자는 아기가 찢어져도 안 놓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손을 놓는다면 아들은 저 여자에게 깔려죽을 것이고, 안 놓는다면 이 자리에서 찢겨서 죽을 것입니다. 아들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이라면 이 경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아들은 죽는 수밖에 아무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을 절망이라고 합니다.
우리 죄인들이 그랬습니다. 사단의 손아귀, 사망의 권세에 붙잡혀 끄집어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그 죽음의 자리에, 십자가에 대신 내어주셨습니다.
십자가, 그것은 솔로몬의 칼 보다도 더욱 기이한, 천사도 경악한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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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별처럼요? 말도 안 돼. 못 믿겠어요.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라고 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증거는 쪼갠 고기, 곧 십자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그 어린양은 쪼개어지고 그의 살과 피는 하나님이 가리키신 밤하늘별처럼 흩뿌려질 것입니다. 밤하늘 별은 독생자의 살과 피, 그리고 구원받은 모래알 보다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 아브람의 수많은 영적후손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리키신 밤하늘별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 원대한 우주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광활한 우주를 가리키신 것입니다. 우리 사는 이 지구, 우리 태양은 우주 한 구석 티끌일 뿐입니다. 우리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만 해도 지름이 10만 광년이나 되는 거대한 별무리이고 은하계에는 태양과 같은 별들이 2천억 개나 됩니다. 그런데 우주 안에는 은하계와 같은 갤럭시(Galaxy)들이 또 천억 개나 됩니다.

그럼 우주공간에 태양과 같은 항성만 해도 몇 개나 될까요? 1천억 곱하기 2천억 하면 얼마나 되지요? 어떤 우주과학자가 관측 가능한 우주의 별을 계산해 보았답니다. 700해. 지구상의 모든 해변, 강, 사막의 모래 알갱이 수 보다 많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끝 간 곳 없이 드넓은 우주를 티끌같이 작은 이 지구에 살면서 쳐다나 보라고 밤하늘 장식용으로 만드셨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그 후사들에게 상속재산으로 나눠주시려고 만드셨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열 므나를 남겼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라. 너는 다섯 므나를 남겼으니 다섯 고을을 다스리라.” 아니, 세상의 마지막 때 이 땅 위에 고을이 어디 남아있어 고을을 다스린단 말입니까?

그 고을들은 어쩌면 은하계, 안드로메다 성운 같은 거대한 갤럭시들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드넓은 우주공간의 1,000억 개, 2,000억 개 은하계, 성운 가운데 열 개, 다섯 개씩을 받아 다스리는 것이지도 모릅니다. 그 날이 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 우주를 상속받아 다스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스릴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날 그 날을 고통 가운데에서 탄식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로마서 8장). 그리하여 끝 간 데 없는 광활한 우주공간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나님의 찬송과 영광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가리키며 보여주신 밤하늘별은 하나님의 그 꿈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십자가 너머의 그 꿈, 하나님의 원대한 그 꿈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우주공간 가운데 티끌처럼 작은 이 지구별에서 100년도 못 살고 안개처럼 사라지는 허망한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할 영광의 자녀들입니다.
당신의 가슴 속에 그 꿈이 있습니까?
황당한 상상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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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5) 성적 순결함을 유지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생활에 왜 그처럼 중요합니까?

 

비록 사탄은 우리가 도덕적 순결을 지키면 기독교인의 삶에서 즐거움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거짓으로 위협하지만, 도덕적 순결은 결코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즐거움을 제거 하기 위하여 잘못 설계된 방법이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순결은 진정한 행복과 가족의 관계를 오래 지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한없으신 지혜로우심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성회의 근본 진리에 대한 선언은 성화(악에서 떠나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 와 “국가의 놀랍게 퇴폐되어가고 있는 도덕적 기준” (세속적인 것)에 관한 선언을 포함하 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성적 순결에 관한 하나님의성회의 위치를 바로 세우기 위 해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우리들은 도덕에 대한 성경의 기준이 가장 보편적이며 또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라 고 믿습니다. 그러한 성경의 기준은 모든 세대에, 모든 사회에, 그리고 모든 문화에 적용 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고린도와 로마에 적용이 가능했듯이, 뉴욕, 로스앤 젤레스, 싱가포르, 그리고 바로 여러분의 지역사회에도 적용됩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성(性, sex)으로 넘쳐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질문해야만 하는 것 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이 점점 더 세속적이고 도덕관념이 없는 사회에서 살면서, 성적 생활에 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가? 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무신 론자나 불가지론자(agnostics)들이 행동하는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을 구별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 사람의 성적 순결에 의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성(性)이 넘쳐흐르고, 온갖 종류의 성적 표현이 허락되는 문화 속에서 성적 순결을 18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그것은 누가 정말로 그리스도를 따 르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구별하는 훌륭한 시험이 됩니다. 성적 순결을 유지하는 것은 인 간 본연으로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 그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 에서 구속하시고 성화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필요로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말했던 말씀은 현대의 타락한 사회에도 충분히 적용이 됩니 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 라” (고린도전서 5:1).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 느냐?” (고린도전서 6:9).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고린도전서 6:13). “음행을 피하라” (고린도전서 6:18).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 라” (고린도전서 7:2). “우리는 ... 간음하지 말자” (고린도전서 10:8). 첫 번째 편지에서 말 했던 권면을 듣지 않았을 때,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 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고린도후서 12:21).

 

바울은 모든 개인들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성욕의 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도발 적인 의상, 성적 파티에 관한 공공연한 이야기, 그리고 성에 관련된 유머들은 정욕과 죄악 을 불러 일으키는 강한 자극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성적 유 혹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든지 상관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혼한 사람들에게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 상 얼 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7:5) 라고 권면했습니다. 바울은 성관계를 갖지 않는 것이 배우자를 유혹과 죄악으로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혼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성적 순결을 요구했습니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 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 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고린도전서 7:8, 9). 이러한 여러 말씀을 종합해 볼 때, 결혼 밖에서 성관계를 갖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며, 또한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부도덕한 성관계는 개인의 관계 와 사회의 안전을 파괴합니다.

 

성적 부도덕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성경에 의하면 그것은 간통, 음행, 동성애, 근친 상간, 매춘, 강간, 및 음욕을 포함합니다. 우리 주변의 대중적인 문화는 성관계를 갖지 않 는 다른 모든 것들은 죄가 아니라고 큰 목소리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 복음 5:2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혼하지 아니한 더 젊은 청년들에게 하신 성경말씀은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디모데 후서 2:22) 라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성적으로 흥분을 자아내게 만드는 접촉과 육체적 친밀함은 결혼한 두 사람 사이에서 그들이 성관계에 이르기 전에 자연적으로 진 행하는 과정입니다. 결혼을 통하여 일생을 언약하기 전에 그러한 관계를 갖는 것은 사랑 이라기보다는 정욕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행복을 적절하게 배려해 주는 것보다는 자신 의 쾌락을 위하여 가지는 이기주의적인 만족입니다. 하나님은 신망과 믿음의 아름다운 결 혼생활을 유지하기 원하여 책임있는 기독교인의 결혼생활을 갖기를 바라는 젊은 부부들 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마음과 방황하는 생각을 다스리는 것이 연애를 하는 관계에서 성적 순결을 지키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만일 마음이 즉각적인 육체의 만족을 원하는 생각에만 사로잡히게 되면, 사랑과 책임있는 결혼의 기회는 크게 감소합니다. 그러나 만일 교제의 시간이 상대 방의 육체를 탐구하기 보다는 그의 내면의 삶을 알아가는 시간으로 채워지게 된다면 하 나님이 축복하실 수 있는 영원한 기독교인의 결혼에 대한 가능성은 현실로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적으로 순결치 못함과 죄악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유혹을 잘 알고 있었 습니다. 그는 청년 디모데에게 적어도 세 번 경고했습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 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 (디모데전서 4:12). 그는 디모데에게 순전한 마음으로 여자를 대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20 하듯 하라” (디모데전서 5:2). 그리고 또 한 번,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디모데전서 5:22).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이 청결함으로 순결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상을 약속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태복음 5:8).

 

관심사:

 

성과 성적 자극에 대하여 현대 사회가 받아들이는 모습은 하나님이 과거에 심판하 시고 멸망시키신 타락한 사회의 모습을 급속도로 닮아가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 기독교 청년들이 성적 순결에 대하여 전심으로 책임있는 약속을 지키는 것만이 자멸을 향하여 곤두박질하는 이 사회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과 관계에 대한 이교도의 악한 영향은 심지어 교회의 세계 속까지 미묘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혹시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하며”, 또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벌도 받지 않는다면, 아마도 성경의 기준은 구식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쉽게 이유를 말할 수 있을 지 모릅니 다. 그러나 도덕에 관한 하나님의 표준은 변화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은 그가 우리들을 보 존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세우신 총명한 규칙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니다. 결 혼 전이나 결혼 생활 가운데 성적 순결을 지키는 것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님의 방법은 풍족하게 유익을 주며, 그것은 흔히 성공적인 평생의 결혼 생활로 나타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성화와 세속적인 것에 대한 공식적인 기술은 근본진리에 대한 선언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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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셨으면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고 증거를 요구합니다. 참 당돌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도 믿지 못 하는 악하고 약한 존재인가 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도 눈에 보이는 증거, 예언, 계시 같은 것들을 구하고 찾아다닙니다. ‘나는 여호와로라.’ 하시면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신 하나님께는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믿음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화도 안 내시고 아브람에서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아브람이 그것들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갭니다. 비둘기는 쪼개지 않습니다. 솔개가 내릴 때 아브람이 쫓습니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들고 캄캄함이 임한 가운데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브람의 자손들이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하고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은 자빠져 자고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리고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납니다. 그리고 그 날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 후손이 애굽 강에서 유브라데 강까지의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증거를 요구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증거는 ‘쪼갠 고기’였던 것입니다.

우리 알다시피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의 이야기요 약속입니다. 예표입니다. 성경 전체가 예수님께 관한 책입니다. 그렇다면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삼년 간 공생애를 마치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하나님의 아들 아니겠습니까? 아브람이 그 손으로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을 쪼갠 것처럼 아브람의 후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쪼갤 것입니다. 횃불이 그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났습니다. 쪼갠 고기가 하나님이 횃불로 통과하신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쪼갠 고기’가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 오직 그 한 길이 될 것입니다.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John 14:6)
하나님은 그렇게 아들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복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그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밤하늘별을 가리키신 것처럼 십자가에서 쪼개진 아들의 몸, 그 살과 피, 그 생명은 온 땅에 밤하늘별처럼 산산이 부서져 흩뿌려질 것입니다. 그렇게 온 세상 모든 죄인들을 구원할 것입니다. 또한 밤하늘별은 그 살과 피, 생명을 받아먹고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 아브람의 후손일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밤하늘별을 보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내어주사 십자가 위에서 산산이 부서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입니다.

밤하늘별을 가리키실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브람은 밤하늘별처럼 오실 후손을 보고 기뻐하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가슴은 십자가의 고통과 산산이 부서져 흩뿌려질 아들의 살과 피로 찢어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그 고통 너머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구원받을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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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가리켜 보여주신 그 밤하늘 별은 아브람의 무수한 육신의 후손들이 아니었습니다. 밤하늘 별은 아브람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이를 정확히 지적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후손’이라고 말씀하신 그 ‘후손’은 복수명사 ‘후손들’이 아닌 단수명사 ‘한 후손’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실 때 아브람도 이상하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아니, 하나님, 왜 ‘후손들’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후손’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기초문법도 모르십니까?” 하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러니 아브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 곧 ‘오실 예수’를 믿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속으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믿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니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아, 내게서 날 후손들 가운데 언젠가 오실 메시아, 그 메시아가 저렇게 밤하늘 별처럼 되는 거로구나.” 그렇게 믿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의”로 여기실(인정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만일 아브람이 따져서 ‘후손’이 아닌 ‘후손들’의 약속을 받아내었더라면 절대로 의로 여기심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로 여기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브람이 ‘후손’의 약속, 곧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자 하나님께서는 “나는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냐?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여호와란 말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내실 때 아브람에게 하신 '가나안 땅을 주시고 후손이 번성하며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실' 이 약속은 하나님의 이름을 건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었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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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5장 1절) “너는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람이 왜, 무엇을 두려워했단 말입니까? 아브람이 얼마나 두려워했으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셔야 했을까요? 아브람이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자신에게 후사가 없다고 대답합니다. 아브람이 두려워한 것은 후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후사가 없는 것이 왜 그렇게 큰 두려움이 되는 것일까요?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인간 뿐 아니라 짐승도, 물고기도, 벌레도, 나무도, 꽃도, 모든 동식물...., 산 것들은 다 죽습니다. 그런데 씨를 퍼뜨리고 새끼를 낳습니다. 그렇게 자신은 죽지만 생명은 이어져 내려갑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때 모든 사람들은 사람도 그렇게 후손을 남기는 것이 생명을 이어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후사가 없는 것, 대가 끊어지는 것이 죽음 보다 더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아브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로부터 자신을 불러내셨고 함께 하시는데도, 그 하나님이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데도 후사 없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화를 내시지도 아니하시고 꾸지람도 아니하십니다. “아브람아, 다메섹 엘리에셀이 네 후사가 아니다. 네 몸에서 나는 자가 네 후사가 될 것이다.” 말씀하시고 아브람을 이끌어 밖으로 나가 밤하늘의 별을 보여주십니다. “저 별들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밤하늘의 별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의 가슴속엔 아직도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라면서 여름날 밤 쳐다보던 밤하늘, 모래알처럼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밤하늘 별들이 꿈처럼 남아 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믿으매 이를 그의 의로 여겨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좀 따져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네 후손이 저 별과 같을 것이다.”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이 어째서 의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따져봐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후손이 별처럼 많아지는 것이 복입니까?
물론 복이겠지요. 특히 아들 낳기 원하고 자손이 번성하기 원하는 한국인들에겐 정말 큰 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의 입장에서 본다면, 만일 그 자손들이 예수님을 모르는 육신의 자손이라면, 진노의 자녀, 멸망의 자식들이라면 번성한 자손은 외려 끔찍한 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라면, 구원받은 후손이 아니라면,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면 후손이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많아진다 해도 그것은 결코 복이 아닐 것입니다. 그 후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죽고 결국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참 된 복은 영원한 생명으로만 가능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불러내시면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신 그 복은 후손이 번성하는 그런 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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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4)

왜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개인의 대화와 언어를 그처럼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교회는 정말로 험담을 죄악이라고 믿습니까?

 

언어와 대화는 한 사람의 성품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태복음 12:34).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기도를 통하여 어떻게 아버지 와 대화를 나누셨는가 하는 것(누가복음 22:41, 42)을 읽음으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그분의 독생자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의 모독과 음 란한 말은 그들의 마음의 본질을 나타내 줍니다.

 

입으로 나오는 말은 믿을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말은 칼과 화살과 같은 무기로 표 현됩니다 (시편 57:4, 64:3; 예레미야 9:8). 야고보는 혀와 말의 능력을 배의 키나 산불을 일으키는 불꽃으로 표현했습니다 (야고보서 3:2-12). 기독교인은 오늘날 정치적 선전이 나 미디어 뉴스에서 말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가 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성회는 험담이 죄라고 하는 성경말씀에 동의합니다.

성경은 명확하게 그리 고 자주 소문을 퍼뜨리는 모든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비난합니다.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레위기 19:1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야고 보서 1:26).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태복음 12:35, 3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말씀에서 험담은 기독교인과 성령 충만한 삶의 말과 생각 그리고 행위에 완전히 상반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험담이 가져다 주는 공포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며 가장 강력한 도구 인 언어와 말을 잔인한 무기로 변화시킵니다. 쓸데없는 말 한마디가 진실에 상처를 주며, 지혜로움을 어리석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야고보서 3 장). 험담은 사랑의 반대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3:6; 갈라디아서 5:14, 15). 그것은 도움 대신에 상처를 가져다 줍니다. 그 것은 화평 대신에 분노와 다툼을 일으킵니다 (잠언 16:28; 고린도후서 12:20). 그것은 믿 음 대신에 배신을 가져옵니다 (잠언 20:19).

 

왜 기독교인들 사이에 험담이 존재할까요?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설교하면서, 그리고 야고보는 혀의 힘에 대해서 열정적 으로 이야기하면서, 두 사람 모두 험담이 마귀에게 발판을 마련해 준다고 말합니다. 그것 은 지옥의 불과 같습니다 (에베소서 4:25-32; 야고보서 3:6). 그러므로 기독교 교회에 험 담이 존재하는 주된 이유는 험담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또한 마귀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험담을 하는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슬프게도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일종의 오락으 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험담은 일반적으로 마음을 충족시켜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 님께서 덕을 세우는 방법을 통하여 충족되도록 계획하신 대화와 관계에 있어서의 필요성 을 단지 일시적으로만 만족시켜 줄 뿐입니다. 비록 사람들이 험담을 나누는 것을 통하여 받아들여지고 또 어떤 그룹에 소속감을 느끼도록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룹 밖 에 있는 사람들을 남용하는 일입니다. 때때로 험담은 노여움의 돌출구가 됩니다. 어떤 경 우에는 사람들은 그들이 노여워하는 사람이나 문제에 대해서보다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에 대해서 이야기함으로서 그들의 분노를 발산시킵니다. 이 모든 이유들은 주님 안에서 신뢰와 힘을 갖는 사람, 기독교인의 봉사를 사랑으로 감당함으로 기쁨을 갖는 사람의 생 활에는 험담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잘못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것이 합법적이거나 허용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항상 적당하거나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은 어떤 강요나 습관이 우리들을 지배하거나, 그 것의 힘 아래 우리들이 얽매이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6:12). 기본적으로 진 실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건설적이거나, 다른 사람을 북돋아 주거나, 혹은 다른 사람 들에게 친절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일시적인 감정에 의해서 충동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에게 적절한 것을 행해야만 합니다 (고린도전서 10:23). 다 른 사람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사려 없이 관여하는 것은 자제심이 결여된 것을 보여줍 니다. 다른 사람을 당황하게 하거나, 상처를 주거나, 혹은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어떤 말 이라도 삼가하는 것은 영적으로 성숙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2).

 

우리들은 험담에 관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1)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 를 함으로서 소문을 만들기 시작하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심지어 기도를 요청하는 경우 에 있어서도 그러한 요청을 하는 데 필요한 것만을 말하도록 주의하십시오. 무엇을 암시 하는 질문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불미스러운 일을 캐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2) 비밀을 누설하지 마십시오 (잠언 11:13). 만일 당신이 어떤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어떤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 오직 목사님이나 혹은 적절하게 행동할 위치에 있는 부모 에게만 말하십시오.

(3) 험담을 듣지 마십시오. 험담을 듣지 않겠다는 당신의 의도를 표현 하십시오.

(4)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불을 끄는 사람이 되십시오 (잠언 26:20).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는 중요합니다.

 

말을 하는 가운데 흔히 간과하는 분야는 사려 없는 표현과 조심없는 맹세의 사용입 니다. 철저히 모독하려는 의도 없이도, 어떤 기독교인은 무슨 말을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지 (gee),” “단 (darn)” 그리고 “가쉬 (gosh)” 와 같은 말을 사용합니다. 낱말의 어원에 대 한 연구는 이러한 말들이 “예수 (Jesus),” “댐 (damn),” 그리고 “하나님 (God)” 을 의미 없 이 말하는 것이라고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개인적으로 부지중에 사 용하는 어휘 가운데는 이와 비슷한 어원을 알 수 없는 무의미한 낱말들이 포함되어 있습 니다. 모든 신자들은 그들이 자신을 표현하는데 사용하는 어휘들을 평가해 보는 것이 좋 16 을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의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반영하는 것이어야만 하며, 또 신자의 생활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섬세하게 증거하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관심사:

 

우리는 때때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리고 특별히 개 교회에서, 왜 그토록 긴장되 는 일이 많이 있고, 또 화합하지 못하는 때가 많은지 생각을 해 봅니다. 흔히 그러한 어려 움은 다른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거나 받아들일까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성급하게 내뱉는 부주의한 말 때문에 생기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아니 라 할지라도, “말하기 전에 생각하십시오.” 라고 하는 한 옛 속담은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 고 교회의 연합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는 명령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동 안에, 성령님이 먼저 말씀하실 수 있는 기회를 가지시게 되며, 또한 하는 말이 덕을 세우 며 신자들을 연합시킬 수 있도록 만드는 기회를 가지시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령 충만한 신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주님을 위한 전적인 사랑을 반영하는 말을 사용하기 위해서 하나 님께 드리는 기도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성령 세례는, 내적 충만과 함께 받는 기도의 언어와 함께, 인간의 표현이 적절하지 못하게 보일 때에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찬양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방법을 제공해 줍니다. 우리들이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들은 험담의 유혹에 깊이 빠지지 않게 됩니다. 에베 소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유익한 말씀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 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 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에베소서 4:29).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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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영생해야 한다. 반드시 영생하는 존재여야 한다.
왜 인간은 영생하는 존재여야 하는가? 하나님 때문이다.
우주만유, 끝없이 광활한 우주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주만유를 인식하는 존재가 없다면 광활한 우주가 무슨 소용인가?
하나님을 인식하는 존재가 없다면 하나님 자신은 또 무슨 존재의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이 잠시 생겼다 사라진 다음 하나님 홀로 수백억년 수천억년..., 영원히 혼자 우주만유를 즐기시겠는가?

하나님에겐 하나님을 아는 존재가 필요하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으셨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이사야 43:21)”
그러므로 또한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과 함께 영생하는 존재여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으로’ 지으셨다. 그러나 인간은 뱀에게 속아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인이 되었으며 그 생명은 멸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할 수 없었고 원수 사단마귀에게 헌납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사랑을 버리지 아니하셨고 포기하지 아니하셨고 사랑하는 그의 피조물을 구원하고 회복시키기 위하여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엄청난 희생과 대가를 치르셨다.

이제 인간은 죄를 벗고 울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 사랑에 감사하며 영원히 찬양하는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울며 돌아오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고 면류관을 씌워 아름답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하나님의 나라가 온 우주에 펼쳐질 것이다.
하나님의 후사에게 어찌 상속재산이 없겠는가?
하나님은 우주만유를, 1천억 개의 항성을 가진 은하계, 2천억 개의 갤럭시, 끝없이 광활한 우주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나누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주셔서 우주를 다스리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우주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웅장한 찬양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사야서 43장 21절 말씀은 영원히 성취될 것이다.

해피 뉴이어! 할렐루야!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참 된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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