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이지만 예수 믿고 나서 제게 두 가지 의문이 생겼더랬습니다.
그 한 가지는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다 지시고 대신 죽으셨다면 계속 죽어 계셔야지 어째서 부활하셨는가? 예수님이 도로 살아나셨다면 죄인들이 도로 죽어야 하는 거 아닌가?”였고,
다른 하나는 “어째서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하시는가? 예수님이 수 십 억 인구 중 하나일 뿐인 나를 위하여, 그것도 2천 년 전에 죽으셨다고 말씀하는 것은 도무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걸.”이었습니다.
이 의문들을 어떻게 해결했느냐고요?
사실 이 두 가지의 의문을 해결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참 많이 생각했지요, 아무도 안 가르쳐 주었으니까요.

오늘은 첫 번째 의문에 관하여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대신 예수님이 죽으셨다면, 그래서 우리가 살려면 예수님이 계속 죽어 계셔야 한다는 생각은 수학적 사고였습니다.
이를테면 “맞바꾸기, 가감셈법”인 셈이지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셨다면, 그런데 죽으셨던 예수님이 도로 사셨다면 우리가 도로 죽어야 맞다는 단순한 셈법 말입니다.
그 수학적 생각이 잘못 된 것이라는 것을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우선 예수님이 계속 죽어계셔야 우리가 그 대가로 안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죄와 사망, 저주의 권세가 계속되는 경우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죄와 사망, 저주를 근원적으로 깨부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박살이 난 죄와 사망의 권세가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 붙잡아둘 수가 없는 것이지요. 죄와 사망의 권세가 박살났으니 예수님의 부활은 당연한 것이지요.

또한 예수님의 화목제물을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과 저주를 무마하거나 사단에게 제공되는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사단에게 제공된 제물이라는 '사단배상설'을 가르치는 이단도 있다고 하더이다만....)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희생제물을 죽여 그 피를 들고 지성소로 들어갔습니다. 만일 그 희생제물에 흠이 있거나 대제사장 자신에게 부정이 있으면 그는 죽임당하고 살아나오지 못 합니다.
예수님은 죽으셔서 제물인 자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 제물에 흠이 있거나 하나님이 만족하지 못 하셨다면 우리의 죄도 해결될 수 없고 예수님도 살아나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 없고 흠 없는 예수님의 제물을 받으시고 아담 이래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제물을 기쁘게 받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모든 인류의 지를 사해 주시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실 수밖에 없고 예수님의 부활은 그 제사가 완전히 이루어졌고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단 한 번의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그것은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완전한 승리입니다.

하나님은 승리하신 예수님을 우편보좌에 앉히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 주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주님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부활절입니다. 주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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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9: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종려주일입니다.
누가복음 19장 41절부터를 보니까 가슴이 아픕니다. 왕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우셨습니다.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오셨는데, 사람들이 눈이 가리워서 알아보지 못 하여 비극을 당합니다.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NIV 영어성경을 보면 "because you did not recognize the time of God's coming to you." 하나님이 오시는 것을, 성자 하나님이 오시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을 네가 알지 못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원 후 70년,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피가 바다를 이루는 그 비극을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미래를 보시고 예수님이 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데 예루살렘을 그 당시의 예루살렘으로만 생각해야 할까요? 지금 우리 마음이 예루살렘이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도 눈이 가리워 알지 못 하면 예수님이 오셔도 우리의 영혼은 그 비극을 당할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이들은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기쁨으로 영접하는데, 어떤 이는 거부하고 비웃고 장난으로 여기고 조롱합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이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주지 않는다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고, 별 볼 일 없다고, 자기 맘에 안 든다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립니다.

우리는 죽어서 천국으로 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마음에 먼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 주님이 재림하실 때 천사들이 믿는 자들을 모은다고 합니다. 이 말은 성도들을 모아 천국으로 데리고 간다는 뜻도 되지만 이미 주님의 통치하심으로 천국이 된 성도들을 모은다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천국을 이루셨겠지요? 주님이 계시면 야러분의 마음은 천국입니다. 혹시 새끼 나귀를 타고 여러분의 마음 앞에 오신 주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보시면서 아, 이 사람은 나를 원하지 않는구나, 내가 들어갈 수가 없구나, 하고 슬피 우시지는 않겠지요?

이 종려주일, 우리에게 오신 주님을 향하여 노래하며 찬양하며,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나의 왕이여, 어서 오소서, 나를 다스려 주소서. 우리에게 목숨을 내어주시고 영원한 새 생명을 주신 우리의 왕, 우리의 구주, 예수님을 눈물과 감사와 사랑으로 영접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 원합니다.
이 봄날, 이 종려주일,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모셔 들여 봄날 꽃들처럼 기쁨과 향기로 가득한 천국, 하나님 나라를 여러분의 마음에 이루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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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이 가장 크다고 말씀하시고선 다시 천국에서는 세례요한이 가장 작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그헐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앞뒤가 안 맞는 말씀 같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성경은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입니다. 성경은 구원의 책입니다. 구약성경 전체가 여자의 후손, 메시아의 약속입니다. 양과 소를 잡아 태워드리는 구약시대의 제사는 속죄제물 주님을 예표하는 것이고,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도 오실 메시아에 관한 것입니다.
그 중 주님 오시기 700여 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광야의 소리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사40:3, 5)

그로부터 700여 년 뒤 세례요한은 약대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매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의 소리가 되어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세례요한은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다가 자기에게로 오시는 주님을 보고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 베풀 것을 요청하셨고 세례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성경이 예언한 구세주에게 세례를 베푼 엄청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헤롯왕이 동생 빌립의 아내를 취한 것을 비판하였다가 옥에 갇히게 되고 헤롯의 아내가 된 헤로디아의 딸이 연회에서 춤을 추어 헤롯왕을 기쁘게 하였고 헤롯왕이 상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주겠다 하자 헤로디아는 딸에게 세례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달라고 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목이 잘려 죽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례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참 이상하지요. 주님께서는 왜 세례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크다고 하시고서는 금방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 중 메시아를 직접 본 선지자는 세례요한뿐입니다.
신들메 풀기도 감당할 수 없다 한 요한은 황송하게도 그 분에게 세례까지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선지자, 모든 사람 중에서 세례요한이 가장 큰 자입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가장 큰 자일까요?
당연합니다. 천국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제일 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친구들을 집으로 초청했다 칩시다. 여러분은 가장 친하고 제일 잘 아는 가까운 친구를 옆에 앉힐 것입니다. 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서 얼마나 크냐는 그리스도와 얼마나 잘 아느냐, 예수님과 얼마나 가깝고 친밀하게 아느냐로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를 아는 지식에 자라가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선지자 중에서는 최후의 선지자로 메시아를 직접 만났으며 그 분에게 세례를 베푼 세례요한이 따라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이루시는 구원사역을 보지 못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시는지, 어떻게 온 세상 죄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는지 전혀 알지 못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잡혀서 옥에 있을 때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3) 하고 여쭈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어떻게 구원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것인지,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도대체 왜 광야의 소리로 외친 세례요한 자신이 옥에 갇혀 죽게 생겼는데도 구출해내지 못 하시는 건지, 도대체 구세주 그리스도가 맞긴 맞는지 이해가 안 되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생명의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구원사역이 이루어지는 것인지나 십자가의 죽으심에 관하여는 전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실 것인지 끝내 모른 채 그만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청구에 의하여 헤롯왕에게 목 잘려 죽임 당하고 말았습니다. 요한으로서는 참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례요한이 듣지 못 한 것, 보지 못 한 것을 듣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모든 인류를 구원하셨는지, 어떻게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는지 신약성경을 통하여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왜 그렇게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마음 가운데 모시고 살며 늘 기도하고 찬송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국에 가면 세례요한보다 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천국에 가면.......,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보다 작은 세례요한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약대털옷을 입고 가죽띠로 허리를 동이고 있을 테니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작은 세례요한이 우리에게 물을 것입니다.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말씀해 주세요. 도대체 우리 주님이 어떻게 구원을 하셨나요? 저는 그것이 너무 궁금했는데, 그놈 헤롯이 내 목을 잘라가는 바람에.....“

여러분은 그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세례요한님, 주님은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세례요한이 되물을 것입니다. “아니, 왜요? 주님이 왜 죽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세례요한은 왜 예수님이 로마군대를 단숨에 쳐부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지 않으셨는지, 왜 그렇게 맥없이 십자가에 죽으셨는지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세례요한에게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만 했는지, 예수님이 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셔야 했는지 설명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주님이 어떻게 죽으셨는지도 물을 것입니다.

“주님은 은 삼십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팔렸습니다.
가야바 대제사장 집에서 밤새 맞고 침뱉음 당하고 곤욕을 당하셨습니다.
유월절 아침에 빌라도 총독에게 끌려갔습니다.
채찍질을 당하여 피투성이가 되셨습니다.
로마군병들은 주님께 가시관을 씌우고 희롱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골고다 언덕으로 끌고 가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군병들은 그 아래에서 주님의 겉옷을 제비 뽑았습니다.
사람들은 머리를 비웃으며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신을 구원하여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 뜨거운 태양 아래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목이 마르다 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소리 지르시고 '다 이루었다.' 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하늘이 캄캄해지고 지진이 났습니다. 성전휘장이 둘로 나뉘어 찢어졌습니다.
로마군병은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고 주님은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그렇게 죽으셨고 그러나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고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죽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울면서 그 이야기를 들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묻고 또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세례요한과 같이 울면서 그 이야기를 또다시, 또다시 되풀이해야 할 것입니다.
자, 여러분, 준비 되셨습니까?
세례요한 만날 준비.

* 여러 해 전 미국교회에서 이 내용으로 짧게 영어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준비되었냐고 물었을 때 미국교회 성도님들이 일제히 대답했습니다, "Yes, we are!"
(똑같이 한 목소리로 외쳐서 깜짝 놀랐습니다. 점잖은 한국인 성도님들과는 다르더군요. ^^)

여기 앉아있는 저나 여러분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 끔찍한 박해의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고, 공산치하나 이슬람국가나,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오지나, 옛날 우리 선조시대, 복음이 전하여지지 않은 시대에 태어나지도 않았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린 덕분으로 예수 믿고,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자유로운 나라에서 마음 놓고 예수 믿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러나, 한 편 생각해보면 암만 생각해도 그 끔찍한 박해를 받았던 신앙인들과 순교자들이 받을 생명의 면류관이나 상 같은 건 우리에게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냥 이렇게 평온하게 예수 믿다가 조용히 천국에 가서‘아이고, 미안해라,’한 구석에 가만히 찌그러져 있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고난 받을 자신은 도저히 없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고전 10:13)”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이 연약한 것을 미리 아시고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하셨는가 싶어 감사하기도 합니다. 생명의 면류관이나 주님의 칭찬이나 상급이 없어도 편하게 예수 믿다가 천국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놓고 보니 또 공짜로 구원 받는 것이, 다른 이들은 고난을 받는데 혼자 편하게 구원 받는 것이, 또 나 위하여 십자가 지신 주님 뵙는다는 것이 너무 죄송합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로마시대와 같은 무서운 박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와 같은 위협, 공산당이 들이대는 총칼, 전기고문, 물고문, 손톱을 뽑고 눈을 뽑고, 기름가마에 튀기는 그런 박해를 당한다면 이길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려 목사인 저도 자신 없습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죽은 다음에야 어찌 되든지 지금 당하는 이 고통을 견딜 수 없다, 우선 살고 보자고, 그런 무서운 박해를 당한다면 저는 이길 자신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다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고문과 박해를 당한다 해도, 바로 눈앞에, 발 앞에 한 쪽은 유황불, 그 속에서 울부짖는 끔찍한 지옥이 있고, 한 쪽에는 아름다운 낙원, 주님이 바로 내 앞에서 두 팔을 벌리고 나를 향하여 오라 하시는 광경이 펼쳐진다면, 내가 만약 주님을 부인한다면 그 끔찍한 고문은 멈추겠지만 바로 그 보다 더 끔찍한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되고, 만일 내가 그 끔찍한 고통을 받으며 숨을 거둔다면 주님이 나를 안아 주시고 위로하시고 칭찬하시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며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 눈앞에 빤히 보인다면, 그렇다면 무슨 끔찍한 고통이라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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