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하나님 말씀과 신앙을 무겁고 힘 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은 힘들고 두렵고 어렵고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힘들게 듣고 하나님을 어렵게 섬기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은 “항상 기뻐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꿀송이 같습니다. 하나님은 재미있고 유머러스하신 분입니다. 율법 가운데에도 하나님께서는 금방 혼인한 남자는 군대도 빼주고 집에서 아내를 즐겁게(♥) 해 주라고 말씀하시고, 성경 한 가운데에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노골적인의 언어로 쓰인 아가서도 넣어놓으시고, 또 신나고 흥미진진한 드라마 같은 에스더도 넣어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신나게 읽는 책이 에스더가 아닐까 합니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300년 무렵부터 에스더에 나오는 부림절을 가장 신나는 명절로 삼고  있다고 합니다. 아달월,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이른 봄인 2-3월의 음력 14일이 되면 유대인들은 회당에 모여 두루마리로 된 에스더를 읽으며 유대민족을 위기에서 구한 영웅인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기리고 다채롭고 즐거운 행사들을 즐깁니다. 에스더서를 낭독할 때 ‘하만’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사람들은 도구들을 이용해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발을 구르면서 야유를 보낸답니다. 에스더 이야기를 통하여 어린이들에게 목숨을 걸고 자기 민족을 구해낸 에스더의 애국 애족심을 가르치고, 또 만두 같은 크기로 사람 귀 모양의 떡을 만들어 ‘하만의 귀’라는 뜻의 ‘오젠 하만’을 만들어 먹는답니다. 예쁜 공주의상, 카우보이 차림, 옛 로마 호민관의 관복, 색색의 가면 등을 차려 입은 어린 아이들이 온 거리를 누비며 퍼레이드를 벌일 때면 축제는 절정에 이릅니다. '벤 예후다'라는 예루살렘의 중심거리는 울긋불긋한 옷, 머리에 쓴 마스크 등으로 뒤덮이고, 사람마다 플라스틱 망치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머리를 '삑' 소리가 나게 때리고 때린 사람이나 맞은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웃고 즐긴답니다. 그렇게 부림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신나고 즐거운 명절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을 믿는 유대인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고 거부하는지, 자신들이 읽는 그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이라는 것을 왜 인정하지 않는지, 이사야서 53장이 묘사하는 고난 받는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왜 애써 부인하는지,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에스더조차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데도 왜 믿지 않는지 참으로 안타깝지만 아무튼 유대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에스더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지만 에스더서의 줄거리 앞부분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페르시아의 황제 아하수에로는 연회를 베풀고 만조백관 앞에서 황후 와스디(Vashti)의 미모를 자랑하기 위하여 그녀에게 연회장으로 나올 것을 명령하였으나 황후는 왕의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진노하여 황후를 폐위하고 전국에 영을 내려 후임 황후를 간택하게 되는데 유대인 처녀 에스더가 황후로 간택 받게 됩니다. 그 에스더는 부모를 여읜 후 그녀의 사촌오빠 모르드개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 후 모르드개는 대궐 문 앞에 앉아 있다가 황제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우연히 알게 되어 에스더를 통하여 황제에게 보고토록 하였고 황제는 화를 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르드개의 이 공로는 잊혀지게 됩니다.

아각의 후손 하만이란 자가 왕의 총애를 받아 하늘을 찌르는 세도를 휘두르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고 절을 합니다. 그러나 유독 모르드개만 그에게 무릎도 꿇지 않고 절도 하지 않습니다. 하만은 화가 나서 모르드개만 아니라 유대인 전체를 죽여서 말살할 흉계를 꾸밉니다. 진멸할 대상이 유대민족이라는 것을 숨긴 채 ‘악한 족속’이라고 써서 그 악한 족속을 일시에 진멸하겠다는 계획을 세워 왕의 재가를 받아냅니다. 각 도에 유대민족을 진멸하라고 명령하는 조서가 내려가고 이에 유대민족은 통곡하며 부르짖습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연락하여 왕의 앞에 나가서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거절합니다.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함부로 왕의 앞에 나가면 죽임을 당할 수 있는데 에스더가 한 달 넘게 왕의 부름을 받지 못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인지 어찌 아느냐?’고 에스더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이에 에스더는 왕에게 나아가기로 결단하고 유대인들에게 금식을 요청하고 자신도 삼일 동안 금식을 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에스더를 읽으면서 주인공인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비장한 각오에 가장 큰 관심을 갖게 됩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오늘 화를 불러온 모르드개의 뻣뻣한 자세에 대하여도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어찌 보면 모르드개는 지나치게 꼿꼿한 태도로 불필요한 박해를 불러일으킨 사람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모르드개는 대궐문에 앉아서 천하를 호령하는 하만에게 허리를 굽히지 않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대궐문에는 왜 나와 앉는단 말입니까? 대궐문에 앉았으면 적당하게 하만에게 허리 굽히는 시늉이라도 하든지, 그게 정 싫으면 대궐문에 나오지 말든지, 꼴보기 싫으면 하만이 올 때는 화장실에 가는 척 피해버리든지 했더라면 쓸데없이 그렇게 엄청난 위기와 화를 불러오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모르드개는 대궐문 앞에 나와 앉아서 하만을 피하지도 비굴하게 허리를 굽히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이 일로 유대인들이 굵은 베를 입고 애통하며 금식할 때 에스더가 다른 옷을 보내면서 굵은 베를 잠깐 벗어놓고 대궐로 들어오라고 권하였을 때도 굵은 베를 벗을 수 없다면서 좋은 옷 입기를 거부합니다. 참으로 골치 아픈 사람입니다. 깐깐한 고집불통, 대쪽 같은 딸각발이 선비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르드개의 이 같은 고집과 기개와 지조를 사용하셔서 기이한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오늘날 모르드개 같이 신앙과 절개를 지키는 그리스도인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눈을 뒤집고 찾아도 없습니다. 웬만하면 티나지 않게 적당히 타협하고 모나지 않게 처신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요 슬기요 요령인 시대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기이하고 놀라운 일을 행하고 싶으셔도 모르드개 같은 사람이 없어서 도무지 그럴 기회가 없으신 것 같습니다.
이 시대에 어디 모르드개 같은 사람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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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탄절에 생각해보는 말씀>
이 성탄절에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족보에 관하여 말입니다.

1. 요셉과 마리아

우리 한글성경 마태복음 1장 첫머리는 아래와 같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마 1:1-3 =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잘 아시는 대로 “낳고”, “낳고”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남자가 어떻게 낳습니까? 이는 명심보감과 또 조선시대의 학자 주세붕 선생의 시조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실 제.....”의 영향을 받은 번역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경의 원본, 즉 헬라어 원어성경도 '낳고'로 되어 있을까요? 아닙니다.
헬라어 성경 원전에는 “아브라함 에겐네덴 톤 이삭, 이삭 데 에겐네덴 톤 야곱....”,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버지가 되었고, 이삭은 야곱의 아버지가 되었고....”로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를 비교적 정확히 번역하고 있는 NIV 영어성경을 볼까요?
“A record of the genealogy of Jesus Christ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Abraham was the father of Isaac, Isaac the father of Jacob, Jacob the father of Judah and his brothers......“
역시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버지였고, 이삭은 야곱의 아버지,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의 아버지.....“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성령님의 역사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습니다(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육신으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생물학적으로 예수님과 아버지 요셉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관습과 율법에 따라 요셉은 예수님의 아버지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예언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을 통하여 오셨다는 말씀이 과연 옳으냐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마리아의 계보를 거꾸로 위로 올라가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 3: 23-25 =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아모스요 그 이상은 나훔이요 그 이상은 에슬리요 그 이상은 낙개요.....
누가복음 우리말 성경번역도 좀 이상합니다. 왜 “이상은, 이상은...”으로 번역하고 있느냐 말입니다.
헬라어 원어성경을 볼까요? 헬라어 성경은 “온 휘오스, 호스 에노믹섹토, 요셉, 투 헬리, 투 맛닷, 투 레위, 투 멜치.....” 즉 예수님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로, 요셉의 아들이요, (그는) 헬리(의 아들), (그는 맛닷(의 아들), (그는) 레위(의 아들이요).......로 주욱 올라가서 다윗에 이르러 아버지 요셉의 족보와 만나게 되고, 계속 올라가서 아브라함으로 이어지고, 아담으로 이어지고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NIV 영어성경도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Now Jesus himself was about thirty years old when he began his ministry. He was the son, so it was thought, of Joseph, the son of Heli, the son of Matthat, the son of Levi, the son of Melki, the son of Jannai, the son of Joseph.........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된 대로, 요셉의 아들이었고, (요셉은) 헬리의 아들, (헬리는) 맛닷의 아들, (맛닷은) 레위의 아들..........
그러므로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은 마리아에게서 나신 예수님은 족보로는 요셉을 통하여, 혈통으로는 마리아를 통하여 약속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아들”로, 그리고 “여자의 후손(창세기 3:15)”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내신 다음 가나안 땅(두 지파 반은 요단강 동편)을 열두 지파에 분배하게 하시고 그 땅이 혼인으로 인하여 이리저리 섞이지 않도록 같은 지파끼리만 혼인하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유다지파의 혈통이 온전히 이어져 내려오고 같은 유다지파에 속한 요셉과 마리아가 혼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아, 조상과 후손 말인데요. 우리말 성경에는 있지만 원어성경에는 조상이나 후손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여자의 후손(창 3:15)”이라고 되어 있으나 원어성경은 “여자의 씨”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말 성경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도 원어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아들“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할아버지도 없고 조상도 없으며 아버지와 아들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금도 자신들을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셨을 때 자신들은 아버지 아브라함 속에 들어있었다고 믿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므로 그들은 그 때 아브라함(의 허리) 속에서 아브라함과 함께 택함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것은  또 성경의 중요한 핵심사상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아버지와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빌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사실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2. 아버지가 되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자가 시집을 가도 성(姓)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하여 서양에서는 여자가 결혼하면 남편의 성(姓), 아니 Family Name, 가족이름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성(姓)의 의미와 서양의 Family Name의 의미 또한 같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 하면 내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여자는 시집가서 그 집의 가족이 아니라 아들(씨)을 낳아 대를 이어주는 일종의 생산도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죽어서도 자신의 이름조차 없이 처녀 때의 성씨로 묘비에 기록됩니다.
이스라엘 풍습, 성경의 역사에 의하면 여자가 결혼하면 남자와 한 몸이 되었습니다. 율법, 곧 하나님의 법(Law)에 따라 그 집의 가족이 되고 아버지의 딸(Daughter in Law)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맺어주셨으니 아무도 나눌 수 없고 아들을 못 낳아도 내쫓거나 돌려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 하면 어떻게 했을까요? 아내가 어떻게 해서든 아들을 만들든지 주워오든지 남편에게 주어서 아버지가 되게 하였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아브람은 75세였고 사라는 65세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약속하셨지만 사라는 이미 폐경을 지난 할머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하인이던 다메섹 엘리에셀을 후사로 생각하기도 하였으며(창15:2), 사라는 자신의 몸종인 하갈을 남편의 품에 안겨서 이스마엘을 낳게도 하였습니다.
몸종은 소유물이었기 때문에 사라가 자신의 몸 대신 몸종의 몸을 사용하여 씨(아들)를 얻는 것은 정당한 권리행사였습니다. 아내가 자신이 강구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후사를 만들어서 남편에게 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이것이요, 이 아이의 아버지가 되시오.” 하면 남편은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낳고”가 아니라 “아버지가 되었고”인 것입니다.

아들과 후사에 관한 한 모든 권한이 여자에게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라가 두 번이나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요구하였고 아브라함이 이로 인하여 번민할 때 하나님은 사라의 말대로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레아와 라헬은 아들 낳기 경쟁을 하면서 자신의 몸종들인 빌하와 실바를 남편 야곱에게 안겨서 아들을 낳게 하였으며 그렇게 열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첩의 자식이니 서자(庶子)니 하며 차별하였겠지만 성경 어디를 봐도 열 두 지파가 차별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다 똑같은 아들들이요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되었습니다. 아들과 후사에 관한 전적인 여자의 권한은 또한 다윗에게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도록 한 밧세바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후사를 정하는 권한이 아내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사람들이 다 아는 대로, 사람들이 다 인정하는 대로”, 즉 성경과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요셉과 마리아의 맏아들이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과학적으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알다시피 구세주는 절대로 남자의 씨로 잉태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원죄가 이어져 내려온 남자의 씨를 통하여 잉태되면 모든 인류의 죄를 지고 죽으실 메시아가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성령으로 잉태되게 하여 여자의 몸을 통하여 보낼 수 없다면 어찌 죄의 대속이 가능하고 구원이 가능하겠습니까? 과학에 묶여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실 수 없다면 그게 무슨 창조주 하나님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여자의 후손”과 “처녀가 낳을 것”을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바와 같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너에게서 나리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가 5:2)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오신 날을 기뻐합니다.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약속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아들로, 또 여자의 씨로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구원의 역사를 인하여 찬양합니다.
이 성탄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이 모두에게 임하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의 죄를 대속하신 구세주이십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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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3-4)

앞서 우리는 로마서 말씀 중 첫 사람 아담을 통하여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된 것과, 하나님께서 둘째 아담인 예수님을 통하여 죄인들을 구원하시려 그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사람으로 보내셨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자마자 성령님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게 됩니다. 이 시험은 과연 예수님이 죄 없는 사람으로 죄인들을 대신할 대속물이 될 수 있느냐 하는 자격시험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대표선수 사람이 되셔서 골리앗 앞에 선 작은 다윗과 같이 되신 예수님이 마귀의 엄청난 시험을 이길 수 있느냐 하는 사생결단의 대결이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십일을 금식하고 주리신 인간이신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함으로써 대속자와 구세주의 자격을 상실하게 만들려는 마귀의 모략과 유혹은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마귀의 무시무시한 시험을 이겨내지 못 하면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실패로 끝나는 것입니다.

마귀의 첫 번째 시험은 주리신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유혹한 것이었습니다. 주리신 주님께 이 유혹은 견디기 힘 드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사흘 굶어 도적질 안 하는 사람 없다는 말이 있듯이 사십일을 굶주리지 않았다 해도 인간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유혹과 시험은 아마도 먹는 문제, 돈 문제일 것입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사는 문제가 먼저지 하나님이나 믿음은 다음이 아닙니까?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믿음을 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믿는 자들 중에도 먹고사는 문제나 눈앞의 이익 때문에 양심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자들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향하여 광야를 행진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을 것과 마실 물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였고 ‘애굽 땅에서 고기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를 그리워하였습니다(출16:3).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지 못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보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16:4).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면서도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온전히 믿지 못 함으로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실상 먹는 문제는 핑계일 뿐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하나님을 믿겠다거나 교회에 나가겠다는 사람은 정작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아쉬울 일이 없으므로 하나님을 더욱 멀리 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먹고사는 문제와 관계가 없어야 합니다. 풍성할 때나 궁핍할 때나 주리고 목마를 때나 배부르고 평안할 때나 믿음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순탄하고 형통할 때나 어렵고 환난이 닥칠 때나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먹는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도와주시면 하나님이 계시고 궁핍하고 시련이 닥칠 때면 하나님이 아니 계시는 그런 믿음을 어찌 믿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잘 먹고 평안하게 산다 해도 결국은 죽어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 세상의 풍요는 결코 우리의 생명을 연장해 주지 못 합니다.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는 것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믿음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 져서 믿음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잃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맙시다. 연약한 인간이 되어 그 어려운 시험을 당하셨으나 능히 승리하신 주님을 우리 모두 용감하게 뒤따릅시다. 주님이 능히 이기셨으니 또 우리를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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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조각목이 무슨 나무인지 아십니까? 저는 ‘조각목’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무슨 예술가들이 조각(彫刻)하는 데 쓰는 나무인줄 알았습니다. 한자(漢字)로 풀어보면 조각목(棗角木)은 ‘대추나무 조, 뿔 각, 나무 목’, 그러니까 대추나무처럼 가시가 돋아나고 뿔처럼 단단한 나무라는 뜻입니다. 중동지방 광야, 사막에 자생하는 나무입니다. 메마른 광야에서 갈증에 시달리고 더위와 추위, 바람에 뒤틀려 있습니다. 단단하게 굳어 깎고 다듬기도 어렵습니다. 세상의 거치른 먼지바람 속에 시달려 강퍅해진 악한 인간들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버려진 가시떨기나무 가운데로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에 나왔을 때 하나님은 광야에 흩어진 이 뒤틀린 가시나무들을 깎아 법궤, 분향단, 번제단, 널판 등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불러 모아 성도를 만드시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게 하심 같다 싶습니다.

법궤는 길이가 2규빗 반, 너비가 1규빗 반, 높이가 1규빗 반입니다. 1 규빗이 45 센티미터 정도니까 길이가 2규빗 반이면 불과 110 센티미터 남짓입니다. 어린아이가 들어가 누우면 딱 맞을 작은 사이즈입니다. 조각목을 깎고 다듬어서 정금으로 싸되 안팎으로 싸고, 윗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금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달되 이편에 두 고리, 저편에 두 고리를 달고,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 금으로 싸고, 그 채를 빼내지 말고 꿰어서 두고 증거판을 그 속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조각나무에다 너무 안 어울리는 과분한 황금장식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속죄소를 두라고 하셨습니다. 속죄소는 조각목이 아닌 정금으로만 만들었습니다. 그 크기는 길이 2규빗 반, 너비 1규빗 반으로 법궤의 크기와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정금으로 만든 두 그룹천사가 날개를 연하여 마주 보며 속죄소 위를 덮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법궤는 성막 안 가장 깊은 지성소에 모셔졌습니다. 누구든지 함부로 들어가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성소 분향단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죽임 당했습니다. 지성소에는 1년 1차 대제사장이 속죄제사를 드릴 때만 들어갔습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먼저 제사장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고 정결케 한 다음 온 이스라엘의 죄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제사장의 옷자락에 달린 방울소리로 지성소에 들어간 제사장이 살아있음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와 성막을 옮겨가며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다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강에 들어서자 범람하던 물이 멈추어 쌓였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와 성막을 실로에 두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터에 법궤를 모시고 나갔다가 블레셋에 죽임 당하고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우상의 전에 법궤를 두었더니 다곤 신상이 동강나고 목이 잘라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두려움에 빠진 블레셋 사람들은 금독종 다섯 개를 만들어 제를 올리고 법궤를 수레에 실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돌려보냈습니다. 그 법궤를 벧세메스 사람들이 들여다보다가 (오만)7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후일에 다윗이 법궤를 모셔오려고 할 때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끄는 소가 뛰는 바람에 법궤를 붙잡았다가 웃사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랫동안 법궤는 두려우신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믿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과연 법궤는 정말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몇 가지 의문점을 갖습니다. 우선 하나님을 의미하기엔 법궤 싸이즈가 너무 작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하늘과 땅, 물속 무엇이든 어떤 형상도 만들어 섬기지 말라 하신 하나님이 법궤를 만들어서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모시고 섬기라고 명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또 속죄소를 그 위에 두게 하신 것도 이상합니다. 법궤가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하나님 위를 속죄소로 덮으라는 것도 이상하고 거기에다 피를 뿌리라고 하는 것은 정말 너무너무 더 이상한 일입니다. 또 그룹천사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룹들의 보호를 받다니요. 그룹들, 네 생물과 천사들은 법궤 아래에 들어가서 법궤를 떠받드는 모양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법궤는 쓸데없는 조각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광야에 버려진 것과 같은 우리 죄인들을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어린아이처럼 순전하고 작은 자를 위한 것일 것입니다. 조각목 법궤는 죄인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처소가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법궤 위에 놓인, 법궤와 싸이즈가 똑같은 속죄소는 조각목이 아닌 정금입니다. 죄가 전혀 없으신 천하인간 보다 더 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똑같은 크기의 인간의 모양으로 오셔서 우리를 덮고 피 흘려 대속하실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 참혹한 피흘림의 속죄소를 두 그룹천사가 날개를 펴고 눈물로 옹위하였을 것입니다.

그 속죄소 아래 조각목 법궤 안에는 증거판, 곧 말씀의 돌판을 넣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조각목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 안에 가져야 합니다. 그 약속과 증거의 말씀, 그 믿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품어 안고 속죄소의 피, 곧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될,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실 성도일 것입니다. 애굽에서 죽어 누워 소망 없이 썩어가던 관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로 인하여 생명의 법궤가 되는 것입니다. 광야에 버려진 악하고 쓸모없는 조각목이 이렇게 영화롭게 빛나는 법궤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택정하사 가시떨기나무 같은 죄인이던 우리를 불러 다듬어 법궤 되게 하시고, 모든 죄와 허물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 정결케 하시고, 모든 악함과 부족함과 흠을 정금으로 싸 온전하고 영광스럽게 하시며, 천군천사로 지켜 인도하시며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애굽에서 죽어, 죄악 가운데서 죽어 관에 넣어져 못질 당한 것 같던 당신, 가시떨기 조각목 같이 악과 독으로 가시 돋았던 당신, 이제 두려움과 떨림으로 나아와 하나님의 법궤가 되십시오.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전이 되십시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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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 교회들이 수련회 가서 관 속에 들어가는 이벤트를 한다고 하더군요. 관 속에 들어가 누우면 관 두껑이 닫히고 못을 꽝꽝 박는 망치질 소리가 울리고... 그렇게 한 동안 깜깜한 관 속에 누워서 죽음의 공포와 절망, 인생의 허무함, 생명과 구원의 은혜를 실감나게(?) 느낀다고 그러더군요. 그렇지만 좀 무서운 이벤트이니까 혹 폐쇄공포증이나 심장질환이 있으신 분은 조심해야겠다 싶네요. 창세기는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로 끝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100세에 이삭을 주시고, 이삭에게서 난 야곱에게 열 두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7년 기근을 당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 인도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 다음 관 속에 집어넣으시고 대못을 꽝꽝 박으신 것 같습니다. 무려 430년 동안 관 같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도록 놔두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잊어버리신 것도 아닌데 그렇게 430년 동안 고통과 슬픔 속에 말입니다.

모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바로공주의 아들, 왕자의 신분으로 40년, 그러나 자신의 동족을 박해하는 애굽 군사를 보고 격분하여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쳐 나와 미디안 광야에서 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게르솜을 낳고 40년 동안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구나.” 탄식하며 양을 치는 아무 희망도 없는 신세였습니다. 그런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산 호렙의 가시떨기나무 가운데로 찾아오셨습니다. 모세는 가시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신기한 광경을 보려고 다가섭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좋은 나무 놔두고 가시떨기나무 가운데로 오신 것일까요? 가시떨기나무는 소망도 없고 소용도 없고 메마른 광야에 버려진 볼품도 쓸모도 없고 불쏘시개로나 쓰이는 저주 받은 것 같은 나무입니다. 모세가 그런 가시떨기나무가 된 게 아닐까요? 가시떨기나무 같은 모세....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애굽왕자 시절을 그리며 살인자로 쫓기는 신세, 속절없이 늙어가는 몸을 이끌고 죽을 때까지 양이나 쳐야하는..... 그 마음은 40년 세월 속에 절망과 울분, 체념과 원망으로 돋아나고 자라나 가시떨기나무의 무수한 가시들이 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다 불모지에 버려진 가시나무들입니다. 날마다 아픔과 슬픔의 가시, 미움과 원망의 가시, 체념과 절망의 가시를 돋우고 메마른 광야에서 발악하듯 살아가는 가시떨기나무들.... 조그만 이파리 하나마다 그 이파리 하나도 새에게 먹히지 않겠다고 가시를 곧추세우고, 그 가시로 서로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삶. 그러면서도 애절한 한 편의 시와 같은 인생, 평생 노래 한 번 부르지 않다가 마지막 순간 가장 길고 뾰족한 가시에 자신의 가슴을 찔리우고 일생에서 가장 슬프게, 가장 아름답게 한 번 운다는 가시나무새 같은, 그러나 아무리 슬피 울고 아무리 목 놓아 운다 해도 아무도 들어주는 이,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이 사라져야 하는 허무한 인생들, 슬픈 존재들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가시떨기나무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불로 오셨습니다. 심판의 불로 오셨다면 가시떨기나무들은 불살라져 없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불타 없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불이 붙은 가시떨기나무들로 광야를, 온 세상을 불타게 하려고 오셨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 12:49)”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결코 잊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타는 아픔과 끊어지는 슬픔을 돌아보시는 하나님 앞에 모세는 순종함으로 신을 벗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가슴 속 응어리진 모든 가시들을 하나님의 불로 태워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찌르는 아픔과 슬픔과 죄악의 가시들을 하나님의 불로 태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불로 가시떨기나무 같은 우리의 가슴을 태우시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게 하실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관 속에 누워 430년 썩은 것 같은 우리들로 영화로운 법궤, 세상을 태우는 복음의 불덩어리로 다시 타오르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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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9: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

예루살렘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며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주님을 맞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몰랐고 마음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하였고 끝내 주님을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40여년 뒤....., 서기 70년....

여호와 유일신을 섬기는 유대인들은 다신교 우상숭배를 하는 로마에 길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갈등은 점점 커졌고 기원후 66년 무렵부터 시작되어 로마에 저항한 유대독립운동은 70년의 예루살렘 함락과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항전하던 960여명의 자결로 처절하게 막을 내립니다. 이스라엘 전역이 로마의 무자비한 진압의 칼날에 파괴되었고 예루살렘의 함락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참극이었습니다. 

유대항쟁 초기에 로마군에 항복하여 목숨을 건진 요세푸스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지형적으로, 또 인공적으로 난공불락에 가까운 천혜의 요새였습니다. 로마군 티투스 장군은 주후 70년 4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토성을 쌓아 둘러막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항복을 요구하였으나 예루살렘의 극렬 유대인들은 결사항전을 외치며 결의를 다지기 위하여 식량을 불태우고 온건파 유대인들을 살해하였습니다. 나중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벽을 둘러 1만 여개의 투항을 하려 했거나 탈출을 시도했던 유대인들을 처형한 십자가가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된 다음 유대인들 중 일부가 금화와 보석을 입에 넣거나 삼키고 예루살렘을 탈출하였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로마군들은 유대인들을 잡아 산 채로 배를 갈라 금은보화를 꺼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4개월이 넘는 동안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마침내 로마군의 성벽 파쇄기 공략으로 성전 뒤편 성벽의 일부가 무너지고 전투는 다시 성전에서 계속되고 성전이 함락되고 다시 예루살렘 시내가 로마군에게 함락되면서 무려 110만여 명이 사망한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으로 막을 내립니다. 포로로 잡힌 유대인은 9만 7천여명에 불과했고 로마군은 성전에서 약탈한 보물을 가지고 로마로 귀환하였으며 지금도 티투스 개선문에는 그 당시 모습을 그린 벽화 부조가 남아 있습니다. 제사장을 죽여 배를 가르자 금화가 나왔고 불에 탄 성전기둥에서 녹아내린 금이 벽돌과 바위틈으로 스며들자 성전은 로마군에 의하여 깡그리 “돌 하나도 남지 않고”  훼손되고 맙니다. 지금 그 자리에는 이슬람 황금사원이 버티고 서 있고 남아있는 통곡의 벽은 벽이 아니라 성전 뜰 한편의 축대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참혹한 앞날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보며 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아들을 그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맞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참혹한 예루살렘의 비극이 그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여 살리기 위하여 내 아들을 내어 주었다. 그런데 네가 거부하고 내치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내치고 짓밟아 죽인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예루살렘의 비극은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한 자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예수 믿으라는 협박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놓고 제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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