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 교회들이 수련회 가서 관 속에 들어가는 이벤트를 한다고 하더군요. 관 속에 들어가 누우면 관 두껑이 닫히고 못을 꽝꽝 박는 망치질 소리가 울리고... 그렇게 한 동안 깜깜한 관 속에 누워서 죽음의 공포와 절망, 인생의 허무함, 생명과 구원의 은혜를 실감나게(?) 느낀다고 그러더군요. 그렇지만 좀 무서운 이벤트이니까 혹 폐쇄공포증이나 심장질환이 있으신 분은 조심해야겠다 싶네요. 창세기는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로 끝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100세에 이삭을 주시고, 이삭에게서 난 야곱에게 열 두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7년 기근을 당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 인도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 다음 관 속에 집어넣으시고 대못을 꽝꽝 박으신 것 같습니다. 무려 430년 동안 관 같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도록 놔두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잊어버리신 것도 아닌데 그렇게 430년 동안 고통과 슬픔 속에 말입니다.

모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바로공주의 아들, 왕자의 신분으로 40년, 그러나 자신의 동족을 박해하는 애굽 군사를 보고 격분하여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쳐 나와 미디안 광야에서 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게르솜을 낳고 40년 동안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구나.” 탄식하며 양을 치는 아무 희망도 없는 신세였습니다. 그런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산 호렙의 가시떨기나무 가운데로 찾아오셨습니다. 모세는 가시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신기한 광경을 보려고 다가섭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좋은 나무 놔두고 가시떨기나무 가운데로 오신 것일까요? 가시떨기나무는 소망도 없고 소용도 없고 메마른 광야에 버려진 볼품도 쓸모도 없고 불쏘시개로나 쓰이는 저주 받은 것 같은 나무입니다. 모세가 그런 가시떨기나무가 된 게 아닐까요? 가시떨기나무 같은 모세....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애굽왕자 시절을 그리며 살인자로 쫓기는 신세, 속절없이 늙어가는 몸을 이끌고 죽을 때까지 양이나 쳐야하는..... 그 마음은 40년 세월 속에 절망과 울분, 체념과 원망으로 돋아나고 자라나 가시떨기나무의 무수한 가시들이 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다 불모지에 버려진 가시나무들입니다. 날마다 아픔과 슬픔의 가시, 미움과 원망의 가시, 체념과 절망의 가시를 돋우고 메마른 광야에서 발악하듯 살아가는 가시떨기나무들.... 조그만 이파리 하나마다 그 이파리 하나도 새에게 먹히지 않겠다고 가시를 곧추세우고, 그 가시로 서로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삶. 그러면서도 애절한 한 편의 시와 같은 인생, 평생 노래 한 번 부르지 않다가 마지막 순간 가장 길고 뾰족한 가시에 자신의 가슴을 찔리우고 일생에서 가장 슬프게, 가장 아름답게 한 번 운다는 가시나무새 같은, 그러나 아무리 슬피 울고 아무리 목 놓아 운다 해도 아무도 들어주는 이,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이 사라져야 하는 허무한 인생들, 슬픈 존재들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가시떨기나무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불로 오셨습니다. 심판의 불로 오셨다면 가시떨기나무들은 불살라져 없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불타 없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불이 붙은 가시떨기나무들로 광야를, 온 세상을 불타게 하려고 오셨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 12:49)”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결코 잊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타는 아픔과 끊어지는 슬픔을 돌아보시는 하나님 앞에 모세는 순종함으로 신을 벗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가슴 속 응어리진 모든 가시들을 하나님의 불로 태워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찌르는 아픔과 슬픔과 죄악의 가시들을 하나님의 불로 태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불로 가시떨기나무 같은 우리의 가슴을 태우시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게 하실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관 속에 누워 430년 썩은 것 같은 우리들로 영화로운 법궤, 세상을 태우는 복음의 불덩어리로 다시 타오르게 하실 것입니다.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먹고 사는 문제  (0) 2021.12.19
조각목 법궤 (2)  (0) 2021.12.12
예루살렘의 참극  (0) 2021.12.05
예수님은 정말 나를 위하여 죽으셨는가? 1  (0) 2021.11.25
주님이 우시진 않겠지요?  (0) 2021.11.18

(눅19: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

예루살렘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며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주님을 맞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몰랐고 마음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하였고 끝내 주님을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40여년 뒤....., 서기 70년....

여호와 유일신을 섬기는 유대인들은 다신교 우상숭배를 하는 로마에 길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갈등은 점점 커졌고 기원후 66년 무렵부터 시작되어 로마에 저항한 유대독립운동은 70년의 예루살렘 함락과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항전하던 960여명의 자결로 처절하게 막을 내립니다. 이스라엘 전역이 로마의 무자비한 진압의 칼날에 파괴되었고 예루살렘의 함락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참극이었습니다. 

유대항쟁 초기에 로마군에 항복하여 목숨을 건진 요세푸스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지형적으로, 또 인공적으로 난공불락에 가까운 천혜의 요새였습니다. 로마군 티투스 장군은 주후 70년 4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토성을 쌓아 둘러막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항복을 요구하였으나 예루살렘의 극렬 유대인들은 결사항전을 외치며 결의를 다지기 위하여 식량을 불태우고 온건파 유대인들을 살해하였습니다. 나중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벽을 둘러 1만 여개의 투항을 하려 했거나 탈출을 시도했던 유대인들을 처형한 십자가가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된 다음 유대인들 중 일부가 금화와 보석을 입에 넣거나 삼키고 예루살렘을 탈출하였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로마군들은 유대인들을 잡아 산 채로 배를 갈라 금은보화를 꺼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4개월이 넘는 동안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마침내 로마군의 성벽 파쇄기 공략으로 성전 뒤편 성벽의 일부가 무너지고 전투는 다시 성전에서 계속되고 성전이 함락되고 다시 예루살렘 시내가 로마군에게 함락되면서 무려 110만여 명이 사망한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으로 막을 내립니다. 포로로 잡힌 유대인은 9만 7천여명에 불과했고 로마군은 성전에서 약탈한 보물을 가지고 로마로 귀환하였으며 지금도 티투스 개선문에는 그 당시 모습을 그린 벽화 부조가 남아 있습니다. 제사장을 죽여 배를 가르자 금화가 나왔고 불에 탄 성전기둥에서 녹아내린 금이 벽돌과 바위틈으로 스며들자 성전은 로마군에 의하여 깡그리 “돌 하나도 남지 않고”  훼손되고 맙니다. 지금 그 자리에는 이슬람 황금사원이 버티고 서 있고 남아있는 통곡의 벽은 벽이 아니라 성전 뜰 한편의 축대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참혹한 앞날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보며 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아들을 그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맞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참혹한 예루살렘의 비극이 그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여 살리기 위하여 내 아들을 내어 주었다. 그런데 네가 거부하고 내치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내치고 짓밟아 죽인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예루살렘의 비극은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한 자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예수 믿으라는 협박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놓고 제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각목 법궤 (2)  (0) 2021.12.12
조각목 법궤 (1)  (0) 2021.12.05
예수님은 정말 나를 위하여 죽으셨는가? 1  (0) 2021.11.25
주님이 우시진 않겠지요?  (0) 2021.11.18
천국에서 큰 자  (0) 2021.11.1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