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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낙스의 회심: 교황주의의 웅덩이에서 건짐 

존 낙스 (John Knox, 1513-1572)는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Edinburgh)에서 가까운 해딩턴 (Haddington) 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곳에서 문법학교를 마치고 글라스고우 (Glasgow) 대학과 세인트 앤드루스 (St. Andrews) 대학에서 법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낙스는 카톨릭 교회에서 자라났고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잉글랜드에서 윌리엄 텐데일이 성경 번역에 헌신하고 있을 때 스코트랜드에서는 틴데일의 영성을 이어 받을 존 낙스가 태어난 것이다.

낙스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초기에 비추어진 대단한 빛을 통하여 놀라운 방법으로 회심하게 되었다. 14살이었을 때 낙스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첫 순교자 패트릭 해밀턴이 화형당하는 것을 보았고, 또한 토마스 길리엄 (Thomas Guylliame)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서 복음의 빛을 보게 되었다. 낙스는 개신교 교리를 확산시키고 있었던 조지 위샤트를 만나 회심하게 되고 종교개혁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의 설교를 들은 낙스는 카톨릭에 대해서 등을 돌리고 개신교로 전향하였다. 그는 대단한 변화를 했다. 낙스는 “하나님이 교황주의의 웅덩이에서 나를 건져 내기를 기뻐하셨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개혁주의 신앙을 수호하고 왕실과 교회 당국에 비판적이었다. 이처럼 낙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조지 위샤트였다.

그리고 낙스는 요한복음 17장을 읽으면서 큰 영적인 체험을 하였다. 그는 “내가 처음 신앙의 닻을 내린 말씀이 이 말씀이다”라고 말했는데,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는 분명 낙스를 새로운 믿음으로 불타오르도록 인도하였다. 그는 성경을 최고 권위의 주도 원리로 삼았으며, 3년 동안 성경연구에 몰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약 1540경 회심 후 그는 강단에서 진리의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하여 부패한 영혼들의 심령을 깨우치는 사역에 헌신하게 된다.

16세기 스코틀랜드 교회의 암울한 상태

1) 성직자들의 무지와 부도덕과 타락
16세기 스코틀랜드 교회는 오랜 시간 동안 로마교회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성직자들과 교회의 주교들, 수도원장, 수사, 성당 참사회원들은 너무나도 무지했다. 심지어 어떤 사제들은 알파벳도 모를 정도였다. 주교들과 성직자들에 의해 설교는 우선순위에 있어서 뒤로 쳐져 있었고, 성경에 바탕을 둔 설교는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사람들은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이 자신들의 구원에 필수적이며, 죄 사함은 미사의 제물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고 배웠으며, 그들의 그릇된 삶이 그릇된 교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또한 교회는 재산과 수입과 인력이 풍부했으며, 스코틀랜드 전체 재산의 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가난했지만, 교회는 가장 좋은 건물을 차지했다. 이처럼 교회가 부패하고 비대해져 안일에 빠진 이유는 면죄부, 연옥, 성례전과 같은 것들을 통해 많은 수익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는 도덕적인 측면에서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었다. 고위 성직자들은 순결을 서약하였지만 성적타락이 극심했고 여러 주교들이 사생아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평범한 사제들도 문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성직자들은 청교도적 금욕 생활을 영위하지 않았으며 매우 세속적이었다. 이처럼 교회는 무지하고 부도덕했고 타락했다.

2) 종교개혁자들이 핍박을 받고 화형 당함
16세기초 쯤 위클리파의 가르침과 존 후스의 개혁사상이 스코틀랜드에 들어오게 되고 또한 윌리엄 틴데일의 신약 성경이 글라스고 지방에 유포되면서 박해가 시작되었다. 성경을 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개신교라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또한 스코틀랜드 의회에서는 성경읽기를 금지하는 법률이 통과되었고, 윌리엄 틴데일이 번역한 신약성경을 금서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당시에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교회에 의해 심한 핍박을 받거나 처형을 당했다. 예를들면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인 패트릭 해밀턴 (Patrick Hamilton)과 조지 위샤트 (George Wishart)는 붙잡혀 세인트 앤드류 성 밖에서 화형 당했다. 이들의 순교 이후에도 종교개혁이 성취될 때 까지 약 30년 동안 20여명의 개신교도들이 교회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러한 상황들은 16세기 스코틀랜드 교회가 영적으로 매우 암울한 시대임을 알려 준 것이다. 타락한 그 시대가 낙스의 가슴에 교회 개혁의 싹을 키우게 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대각성의 불을 지피게 하였다.

존 낙스의 종교개혁에 대한 열정 -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를 만드는 꿈”

존 낙스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교회를 세워가는 꿈이 있었다. 그의 종교개혁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었고, 스코틀랜드를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즉 스코틀랜드 성시화에 대한 꿈이다. 낙스는 세인트 앤드루스 성에 포위되어 포로로 잡혀 프랑스 갤리선의 노예로 있으면서도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다시 설교할 때 까지 죽을 수 없다고 말했다.

영국 왕 에드워드 6세의 도움으로 노예선에서 풀려난 낙스는 영국에서 설교자로 사역을 했다. 먼저 존 낙스는 전국을 순회하며 교황들의 추악한 삶을 폭로하고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교회법, 제도와 미사 등을 비판하면서 종교개혁적 복음을 계속 전파했다. 낙스는 공기도서의 사용을 거부하고 설교를 중심으로 자기가 고안한 예배서를 사용하였다. 낙스가 전한 말씀 앞에서 개개인의 죄악과 세상의 타락은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먼저 그는 영국에서 카톨릭을 반대하는 설교를 했는데 특히 성찬식 때 카톨릭의 화체설이나 루터파의 공재설을 부인하고 개혁파의 영적 임재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설교에서 무릎을 꿇고 성찬을 받는 관습을 거리낌 없이 비판하면서 성찬식 때 무릎을 꿇는 행위를 금지시켰고 신자들을 성찬상에 둘러 앉게 하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개혁주의 방식으로 성만찬을 집행하였다. 그의 종교개혁적 설교는 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데 불과 몇 달 만에 주민들은 로마 카톨릭을 폐기하고 미사 대신 성찬식에 참여함으로써 개혁주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표방하였다.

그러나 영국에서 그의 사역은 오래가지 못했다.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고, 카톨릭교도 ‘피의 메리 (Bloody Mary)’가 영국 여왕으로 등극했기 때문이다. 이 잔학한 여왕은 예수의 십자가를 증거 하지 못하도록 개신교를 박해했고 수 많은 목회자들을 처형하였다. 낙스는 박해를 피해 영국을 떠나 칼빈이 있는 제네바로 향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교회 당국은 반 종교 개혁적이어서 나중에 낙스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사르고 이단으로 정죄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난민 목회사역

낙스는 피의 여왕 메리의 박해를 피해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여 제네바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낙스는 칼빈을 만나 함께 사역을 하게 된다. 낙스는 칼빈이 목회하는 제네바 교회 옆 건물 칼빈 강당에서 약 200여명의 영국 피난민들을 섬기며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칼빈의 예배 모범서를 본따 “기도의 형식과 성례의 집행”을 작성하여 성도들에게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는 교회 직분을 목사, 장로, 집사로 나누고 평등과 자율과 연합을 근간으로 한 장로정치를 시행했다. 낙스는 제네바에서 1556-1559년 까지 영어 사용 난민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말씀을 선포하였다.

또한 낙스는 스코틀랜드와 영국에서 벌어지는 종교탄압과 폭정에 맞서 유명한 글 괴물 같은 여성 통치에 대한 ‘첫 번째 나팔소리’를 발간했다. 그는 이 글에서 종교개혁을 탄압하는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두 여왕들을 ‘괴물’이라며 비판하였다. 그리고 낙스는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 성경 전체를 새롭게 번역하는 일을 시작하였으며 성경 주석의 집필 과정에도 관여했다. 그것이 바로 1560년에 출판된 그 유명한 ‘제네바 성경’이다. 그 후 영국 백성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교회에 올 수 있게 되었다. 이 제네바 성경은 영국을 ‘책의 나라’로 바꾸어 놓았으며 청교도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고 제네바 성경에는 장로교의 교리 문답서가 추가되었고 각주가 들어갔다.

낙스는 제네바에서 몇 년 동안 지내면서 열렬한 칼빈의 제자가 되어 개신교 신학에 깊이 빠져 들었고 그의 신앙은 상당 부분 칼빈주의화 되었다. 또한 그의 사상을 지배했던 종교개혁의 주요 원리들을 많이 터득하게 되었는데 그 원리의 핵심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낙스는 제네바 아카데미를 가리켜 “사도시대 이후 지상에 존재한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불렀다.

스코틀랜드 부흥을 위한 낙스의 기도 - “오 하나님, 스코틀랜드를 나에게 주시옵소서 아니면 죽음을 주시옵소서”

낙스가 고향 스코틀랜드로 귀국할 때 했던 감동적인 기도가 있다. “오 하나님, 스코틀랜드를 나에게 주시옵소서 아니면 죽음을 주시옵소서” 라고 부르짖었다. 그는 스코틀랜드 부흥을 위하여 목숨 건 기도를 드린 것이다. 귀족들과 시민들이 돌아오는 존 낙스를 환영했지만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은 낙스의 기도를 잉글랜드의 군사들보다 더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도하는 능력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메리 여왕의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낙스는 인간의 무기력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오 주님이시여 나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나의 여러 가지 죄를 심판하지 마소서. 그리고 주로 세상이 내게 대해 비난할 수 없는 그러한 것들을 심판하지 마소서.” 낙스는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 없는 민족보다 강하다”고 말하였다.

고난과 핍박, 오직 눈 앞에 죽음만이 이르렀던 상황을 거치면서 낙스는 기도를 배웠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기도로 잘 감당하였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였고 심시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특별히 그는 스코틀랜드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 사람이다. 단 한 사람의 기도로 인해 스코틀랜드 교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백성들의 심령 가운데 놀라운 부흥이 임했다. 낙스의 기도가 스코틀랜드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다.

세인트 자일스 교회에서의 교리 설교 - “영적 각성과 부흥이 일어남”

1559년, 낙스는 12년 동안의 힘든 망명 생활을 끝냈다. 제네바 아카데미의 영향을 받은 낙스는 복음적 교리들과 제네바의 종교개혁 원리를 가지고 그의 고향인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당시 교회는 카톨릭 일색이었지만 낙스는 스코틀랜드 개혁주의 운동에 앞장 서게 되었다. 그는 칼빈주의적인 종교개혁을 알리며 카톨릭 색채가 가미된 모든 것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에 팽배한 미신과 우상 숭배, 폭정을 제거할 것을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에는 항상 활기와 박력과 능력이 넘쳤으며, 솔직한 말과 담대한 용기와 열렬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 가득하였다. 낙스의 설교의 핵심 교리는 선택과 칭의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보혈이었다. 그는 신자들이 크게 기뻐해야 할 진리라고 말하면서 설교 말씀을 적용한 후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분연히 일어나라고 촉구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는데 전력을 쏟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개혁주의 신앙으로 인도하였다. 낙스의 설교는 스코틀랜드의 개신교 신자들에게 희망으로 살아 있었고, 개혁주의 운동의 새로운 영적 생동감과 열정을 불어 넣었다. 낙스의 종교개혁은 일단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메리 여왕 앞에서의 낙스의 강력한 설교

그러나 메리여왕의 등극으로 인해 카톨릭 교회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여왕 메리는 의회를 설득하여 개신교회라는 이단을 박멸하고 옛 카톨릭 왕국을 재건하고자 했다. 여왕 메리는 법으로 금지시켰던 미사를 거행하도록 명령하였다. 그 다음 주일에 종교개혁에 불탄 낙스는 세인트 자일스 교회 (St Giles' Catheral) 강단에서 복음주의 교리를 주장하고, 로마교회를 반대하는 설교를 하였다. 그는 로마교회와 교황제도를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하면서 미사에 대해 맹공을 퍼부었다.

메리 여왕이 낙스의 설교를 들으면서 떨었으며 그녀는 잉글랜드가 그녀를 사로잡기 위해서 보낸 군대보다도 그의 설교를 더 무서워했다. 여왕특사인 토머스 란돌프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한 시간 안에 귓전에 계속해서 때리는 5백 개의 나팔보다도 더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 넣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한 청년은 낙스의 다니엘서 본문의 설교를 들었을 때 “내 양심이 너무 찔려 펜을 잡고 필기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설교 이후 낙스는 곧 메리 여왕 앞에 출두하라는 소환을 받았다. 여왕은 종교의 문제를 거론하며 자신은 로마 교회야말로 참된 하나님의 교회라고 생각하므로 로마 교회를 수호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자 낙스는 “로마교회를 창녀라고 부르면서 로마교회는 교리에 있어서나 관습에 있어서나 온갖 영적인 간음으로 인해 완전히 더럽혀져 있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존 낙스를 이기지 못해 자신은 더 이상 그의 적수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한 메리는 자신의 결혼 문제를 건드리자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복수심에 가득찬 메리 여왕은 낙스를 반역죄로 몰고 가지만 그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세인트 자일스 교회에서의 낙스의 설교는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의 설교를 듣던 많은 회중들이 다시 살아났다. 많은 시민들은 성경적인 개혁 운동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개혁 운동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일꾼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설교를 통하여 서민 대중을 개혁의 대열에 동참시켰다. 그의 설교의 권세는 도시를 개혁시켜 버렸다. 스코틀랜드에 말씀을 통한 대각성 운동과 영적부흥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과 부흥은 낙스의 설교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낙스를 통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승리

드디어 스코틀랜드에 종교개혁이 찾아왔다. 1560년 8월, 스코틀랜드 의회는 교황의 권위를 배격하고 교황의 관활권을 폐지했다. 또한 카톨릭 미사 집전을 금지하고, 이를 세 번 이상 위반할 시 사형에 처하기로 했다. 그리고 계급적인 교회 제도의 악습과 오류를 비판하고, 교육 개혁과 빈민 구제를 결의했다. 이에 대해 권징서와 신앙고백서를 마련하기 위해 낙스와 다섯 명의 개신교 사역자들로 구성된 신조작성위원회를 구성했다. 신조작성위원회는 4일 만에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The Scot Confession)'을 작성했다. 1560년 의회는 총 25개 조항으로 구성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균형 잡히고 건전한 교리”라고 승인하면서 국가의 신조로 채택하였다.

이 신앙 고백서는 성경이 교회의 권위가 아닌 성령의 조명 가운데 해석되어야 하며, 성경만이 무오하고 절대적 권위를 가진다고 진술하고 있다. 또한 교회 의식 가운데 미신적인 것이 많으므로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은 모두 제거할 것을 주장하며, 칼빈의 가르침대로 성찬을 영적 임재로 해석했다. 이 신앙고백은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나오기 까지 스코틀랜드 교회의 교리적 표준이 되었다. 이어 1561년 12월 5일 낙스는 5명의 목사와 36명의 장로와 함께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를 조직해, 스코틀랜드 역사상 최초의 장로교 총회가 시작됐다. 스코틀랜드 개혁주의 교회가 재조직되었다.

결국 스코틀랜드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전복되고 장로교 형태의 스코틀랜드 개혁 교회가 합법적으로 확립되었다. 스코틀랜드는 낙스의 개혁에 힘입어 기독교 국가로 변하여 갔으며 지구상에서 가장 칼빈주의적 성향이 강한 나라가 되었다. 계속되는 수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은 불굴의 칼빈주의자가 되었다. 종교개혁의 승리와 부흥의 주요 요인은 낙스의 용기있는 설교였다.

불꽃같은 인생을 살았던 낙스의 삶과 죽음

낙스는 수 많은 환난들과 극적인 사건들로 가득찬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낙스는 저격을 당하기도 하고 매복한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기도 했었다. 그의 목숨은 종종 위험에 빠지기도 했었다. 혹독한 박해가 심했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떠나 독일 프랑크푸르트, 스위스 제네바를 거쳐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던 낙스의 순례자의 삶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깊은 섭리가 담겨져 있었다. 낙스의 인생가운데 이 고난의 시기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훈련 기간이었다. 고난을 통해 영적 지도자로 잘 준비된 낙스를 하나님은 크게 사용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불과 황무지와 흘리는 피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낙스의 영향력은 특히 교회의 개혁에 있어서 지대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 교리의 체계를 세워주고 예배 방식을 확립해 주었다. 낙스가 생각한 성경적인 교회정치는 장로회주의였다. 이것은 스코틀랜드의 개혁가들에게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까지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그의 영향력 때문에 스코틀랜드는 오늘날까지도 튼튼한 개혁교회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낙스의 불굴의 신앙과 확신이 17세기 청교도들과 언약도들을 낳게 하였고 그들의 중요한 사상적 뿌리가 되게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스코틀랜드의 역사와 문화를 형성하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인생 말년을 맞이한 낙스는 뇌졸중으로 인해 심신이 몹시 약해졌다. 그는 임종 전에 부인에게 고린도전서 15장과 요한복음 17장을 읽어 달라고 했다. 그후 낙스는 아무런 고통도 움직임도 없이1572년 11월 24일 에딘버러의 자택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회심 이후 주님의 영광을 위해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낙스의 인생은 끝이 났다. 제네바 대학 바스티용 종교개혁 기념비에는 국제적 종교개혁 운동가 기욤 파렐, 존 칼빈, 장 테오도르 드 베자, 존 낙스의 인물이 새겨져 있다. 낙스는 칼빈, 파렐, 베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낙스는 교회를 진리의 토대 위에 세운 스코틀랜드 개신교 운동의 핵심 인물이요, 16세기 로마교회의 교권주의가 팽배했던 스코틀랜드에 종교개혁을 뿌리내리게 한 위대한 종교개혁자이다. 그는 영국 뿐 아니라 역사의 전 과정에 영향을 미친 주목할만한 사건들을 일으킨 개혁운동의 아버지이다. 진리를 위해 담대하게 불었던 트럼펫 소리는 수 백년이 지난 오늘 우리들의 귓가에도 울려 퍼지고 있다.

존 낙스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 - “복음을 담대히 선포하는 용기있는 설교자가 필요하다”

1. 그는 진리를 위한 하나님의 나팔수였다.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의 영적 기류가 악한 길로 갈려고 할 때 마다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시대를 깨웠던 진리를 위한 하나님의 나팔수였다. 또한 여왕과 시의회가 교회 개혁을 꺽을려고 할 때 마다 방향이 흔들리지 않게 나아갈 길을 말씀에 근거하여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을 통해 말씀하기를 원하셨던 진리를 타협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하였다. 그는 시대를 분별하여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성경적 진리를 위하여 투쟁하였다. 그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믿음이 분명하였으며 진리에 목숨을 건 사람이었다.


2. 그는 능력있는 설교자였다.
낙스의 삶에서의 중요성은 그의 탁월한 설교의 능력이었다. 설교가 그의 생애의 중심이었고 그의 설교에는 항상 활기와 박력과 능력이 넘쳤고 솔직한 말과 담대한 용기와 열렬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 가득하였다. 이것은 복음의 능력을 느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는 설교는 하나님의 사역이요, 설교의 메시지는 그분의 말씀이라는 확신과 또한 성령께서 설교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확신을 굳게 붙들었다. 그의 설교의 핵심은 “죄사함, 복음적 교리, 성령의 조명, 그리스도의 고난, 죽음, 부활, 그리스도의 의와 풍성하신 은혜, 하나님의 자비와 형벌” 등 이었다.

3. 그는 기도하는 설교자였다.
고난과 핍박, 오직 눈 앞에 죽음만이 이르렀던 상황을 거치면서 낙스는 기도를 배웠고 기도에 관한 글도 많이 썼다. 낙스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기도로 잘 감당하였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였다. 특별히 그는 스코틀랜드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 사람이다.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은 낙스의 기도를 잉글랜드의 군사들보다 더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심시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4. 그는 용기있는 설교자였다.
낙스의 인생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용기이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을 드리고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하며 살아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낙스는 왕의 절대 권력과 부패에 맞서 싸우면서 여왕도, 교황도, 국민들도,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턴 백작은 낙스의 묘 앞에서 "여기 일평생 사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은 한 사람이 누워있다" 라고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그는 죽으면서 “나는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건전한 교리와 악을 꾸짖은 담대함에 있어서 모든 참된 목회자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

또 다른 부흥을 갈망하며

종교개혁의 승리와 부흥의 주요 요인은 낙스의 설교였다. 강단에서 낙스와 같이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팔수 역할을 감당하는 설교자가 나와야 한다. 오늘날 이 시대는 악하고 음란하고 매우 혼탁하다. 이러한 때에 악한 시대를 잘 분별하여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시대를 진리로 심령을 깨우는 불꽃같은 설교자가 필요하다. 낙스처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용기있는 설교자를 그리워 하고 있다. 부흥이 없는 이 때에 조국교회와 유럽교회에 또 다른 부흥이 일어나기를 갈망한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또 다른 부흥은 낙스와 같이 진리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설교자, 능력있는 설교자, 기도하는 설교자, 용기있는 설교자들을 통하여 일어나게 될 것이다.

김현배 ⓒ 뉴스파워










인간극장 휴먼시네마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 행복한 눈물 (Happy Tears)

http://youtu.be/sDxVix7JieM?list=PL1XAdPlOLH2hN2ejbjC2XIy5KZSpSvL6U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http://youtu.be/_aWecTKRC2Q?list=PL1XAdPlOLH2hN2ejbjC2XIy5KZSpSvL6U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김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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