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설교를 들으러 올까?

참된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온다는것 그것도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언제나
그러했다는 것을 저는 역사적 증거를 통해
이미 입증한바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설교를 하면 반드시 사람들이 온다'라고
믿지 못한다는것은 결국 성령과 그분의 역사를
거의 배제한채 이 문제 전체를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오랜시간이 걸릴수도
있으며 실제로도 오랜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설교는 하나님이 친히 주신 방법이기에 효과가 있으며 열매가 있고 영광이
있다는것 반드시 그렇다는 것이 저의 전체적인
논지입니다
우리를 설교로 부르시고 우리에게 설교를 맡기신분이 하나님이시니 그가 친히 그것을
높이실 것입니다

결국 불완전한 설교관을 가지고 불완전한 설교를 한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다루어온
대부분의 문제들을 불러일으켜왔으며
믿는자들이 근심하고있는 어려운 상황을
몰고 왔습니다

설교와 설교자 ㅡ마틴로이드존스

 

설교자체를 포기해야 하는가

지금부터는 교회자체가 장애물이 될수 있기때문에 진정 복음을 전파하려면 교회부터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이 주목한것은 교회 출석인원이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싶다면
그들과 섞여 살면서 삶을 공유하며 하나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야한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들이 성경과 기독교교리를 계속 전하는한 다른 결과를 기대할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교회와 목회자의 주된 임무

교회와 목회자의 주된 임무는 다름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이에대해 어떤 답변을 제시할까요?

주님의 사역은 두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주님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요한은 그런 기적을 표적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님이 이런 표적을 자주 행하셨으나 이런일은
부차적인 일이지 주된일이 아니었습니다
오천명을 먹이신후 사람들이 왕으로 삼으려 할때 주님은 혼자 산으로 떠나셨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곁길로 세게하는 유혹으로
여기셨습니다
이런것들을 추구하는 일은 교회와 목회자의
주된 역할이나 주된 임무가 될수 없습니다

한남자가 예수님께 찾아와 부탁을 드렸습니다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누게 하소서
예수님은 그에게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예수님은 그런일을 하려고 천국을 떠나 이땅에
오신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오순절날 성령으로 충만해진
즉시 설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있는
한남자를 고친 것을 보고 흥분하여 관심을 가졌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여겨 큰 혜택을 얻지는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설교로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면서 방금 행한 기적보다 훨씬
중요한 그리스도와 구원에 관한 진리로 관심의
방향을 즉각 돌려버렸습니다
사도들이 강조한 것은 바로 이것이였습니다

행4장에서 당국자들은 무엇보다 가르치거나
설교하지 못하게 하려고 노심초사했습니다
기적보다도 '이이름'으로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을 큰 문제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보고 들은것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수 없는 심정을 느꼈습니다


초대교회에 한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헬라파과부들은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그것은 긴급하고 예민한 사회문제 였습니다
이것은 교회출범 즉시 찾아온 중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굶고 있고 실제적인 고통을 격고있는데도 설교를 계속해야 하겠습니까?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도들은 그위험성을 간파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우리는 오직 기도하는 일과 말씀사역에 힘쓰리라
이로써 교회의 영원한 우선순위가 정립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부흥

교회사를 조감해볼때 교회역사상 위축된 시기는 항상 설교가 쇠퇴했던 때입니다
매번 종교개혁과 부흥의 새벽을 알렸던 현상이
무엇입니까?
설교가 새로워진 것입니다
교회역사상 위대한 운동이 일어날것을 알렸던
전조현상은 언제나 참된 설교가 되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설교와 설교자 ㅡ마틴 로이드존스

 

 

설교야말로 사람의 소명중에 가장 고귀하고
위대하며 영광스러운 소명입니다
또한 참된 설교야말로 오늘날 교회에 가장
긴급한 필요일뿐 아니라 세상의 가장 큰 필요임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현대 교회와 현대사회에 설교가
설 자리라는 것이 과연 있을까요?

설교의 쇠퇴와 몰락

설교가 한때 교회의 삶에서 차지했던 위치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위치에서 추락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설교를 쇠퇴시킨 교회의 태도

첫번째로 꼽는 요인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진리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위대한 교리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면서
설교는 윤리적인 담화나 도덕적훈계 정치적 담론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습니다

두번째는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위대한
강당꾼들이 참된 설교에 끼친 악영향에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쇼맨쉽이 상당했을뿐만 아니라 회중을 다루며
그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일에 전문가들이었습니다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해졌고 웅변과 수사가
그자체로 중요한 문제가 되었으며 설교는 결국
오락의 한 형태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진리를 언급하는 경우에도 지나가면서 잠깐
다루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요인은 설교문이 진정 무엇인지
에 대해 잘못된 개념이 형성되었다는 것
따라서 설교행위가 진정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잘못된 개념이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설교집의 인쇄와 출판도 설교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문학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들로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메시지의 진실성
보다는 문학적인 표출에 더 큰 강조점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설교자라기 보다 수필가에 가까웠습니다
이모든 일의 결과로 설교에대한 새로운 개념이
들어왔는데 설교 대신 강연에 언급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위협하는 요소들

그에 더하여 예배의식 흔히 예배의 요소라고 불리는 부분이 새롭게 강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추세입니다
즉 설교가 쇠퇴하면서 예배의 형식적인 요소가
강화된 것입니다
설교가 퇴조하면서 성공회의 예배형식으로 부터 점점 더 많은 아이디어들을 빌려오고 있으며 회중이 예배에 더 많이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교독문을 도입하고 음악과 노래와 성가대 찬양의 비중을 늘립니다
이것은 설교에 대한 반작용의 일부입니다

더 나쁜 변화는 공예배에 오락적인 요소가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영화가 도입되며 말씀과 기도는 심각할 정도로 축소된 반면 노래에는
더많은 시간이 할애되고 있다는 것은 메시지를
경시하는 전반적인 풍조를 보여주는 한가지
현상입니다

이모든것에 더하여 설교자들이 점점더 간증할
사람들 특히 각분야에 유명인들을 많이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제가 이모든것들을 오락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음을 눈치채셨습니까?

또한가지는 이른바 개인사역 내지는 상담이
점차 강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가 쇠퇴하면서 개인상담이 상승세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삶에는 새로운 스트레스와 긴장과
어려움들이 있기때문에 좀더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각 사람의 어려움을 파악해서 다루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불신자가 아닌 교회의
가치를 믿는 사람들 실제로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설교와 설교자ㅡ마틴로이드존스

현상들을 시험해야 할 우리들의 의무 - 로이드 존스

얼마 전의 우리의 연구에서, 우리는 어떻게 현상들을 시험해야 하는지를 숙고하기 시작했으며, 저는 여러분에게 감정을 신뢰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충고를 했습니다. 저는 이제, 각각의 현상들을 긍정적으로 시험하고 분별하는 방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번째로 우리는 우리의 이성과 지혜를 사용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성경이 아니라, 이것으로 시작하는 것에 놀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물론, 초대교회는 우리처럼 온전한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 때문입니다.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들은 시험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그들은 영들을 분별할 수 있었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이성과 지혜로 시작하며, 이것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분에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저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이성과 지혜를 결코 포기하거나 내던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성경에서 발견되는 하나의 원리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저는 이것을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할 문구로 삼고 싶습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자제력을 상실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중에 이 문제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특히, 오늘날 미국과 영국에서 그리고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 이 일들에 새로운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다가와, “이제 여러분이 이 복을 얻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의 마음을 ...
여러분이 이 은사를 원한다면 자신을 버려야 한고, 여러분의 자제력을 상실해야 합니다”라고 가르칩니다.

저는 이것이 항상 잘못된 것임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이 점만은 명백히 하고 싶습니다. 어떤 이는 저에게 “
그런데 당신은 분명히, 사람이 스스로 기독 신앙을 믿을 수 없으며, 단순히 지적인 이해와 노력만으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벗어나고 있소. 당신은 이것을 강조하는데 결코 지쳐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 그 말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지적인 과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진리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가 비합리적인 것도 비이성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기독 신앙을 믿게 될 수는 없으나,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여러분은 기독교가 모든 것 중에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느모로 보나, 우리가 우리의 지성을 일부러 버려야 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성경 안에서도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결코 없습니다. 고의로 생각을 중단하고 우리 자신이 공허한 상태에 빠지게 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을 다른 권세들에 내맡기는 것은 결코 성경이 옹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은 이렇게 해서 일어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이성을 조명하여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이성을 배제하고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가 행하시는 일은 우리의 이성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것입니다. 이 마음과 이성이 죄의 성향에 지배되기
에 우리를 기독교, 혹은 하나님의 나라로 결코 인도할 수 없다는 것 외에는, 이치상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마음과 이성을 고양시킬 수 있습니다. 인간은 결코 그의 이성과 지혜를 떠나서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절대로! 발생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 이성이 전에는 거절했던 진리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대답은 지적인 자멸을 허용하거나, 자제력을 상실하고 생각을 중단하거나, 고의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능력들을 포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성령의 조명과 인도하심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할 때에 성령은 여러분의 마음을 밝혀 줄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고린도전서 2:10에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점이 분명하다고 확신합니다. 지성만 가지고는 우리는 진리를 이해할 수 없으나, 성령을 통하여 계시가 주어질 때 우리의 마음과 이성은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 안에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혜를 사용해야 할 첫 번째 답변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더욱더 중요한 두 번째 답변을 제시하고자합니다
. 고린도전서 1, 12, 13장 그리고 14장에 있는 논증의 배후에 있는 전제 조건은 지혜와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며, 이것은 모든 신약성경에서도 동일합니다. 왜 고린도 교회에서는 이러한 은사들을 시행하고 나타내는데 어려움이 생겼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이성과 지혜를 사용하지 않고 자신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요한일서에 있는 권면을 받아들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 만일 여러분이 마음과 이성과 지혜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어떻
게 영들을 분별하고 시험할 수 있을까요? 이 일은 불가능
이런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여기에 한편은, 성령을 소유한 사람과 다른 한편은 악령들과 적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이 있습니다. 양자는 우리를 끌어들이고,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무엇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자신을 내어버리거나, 자제력을 잃어버리거나, 사고(思考)를 그치거나, 이성과 여러분의 지혜를 사용하기를 중단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시험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고린도교회에 문제가 발생했던 이유도 그들이 그렇게 행하지 않았거나 그렇게 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살펴볼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 저는 이것을 얼마 후에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 방언의 은사를 오용하는 포괄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은사를 오용하는 경향이 있었고 어쨌든 그들이 함께 모였을 때 종일토록 이것을 시행하기를 원했습니다. 따라서 사도는 외부인이 들어오게 되었을 때, 끼치는 영향을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
하겠느냐”(고전 14:23). 이것이 사도가 다루어야 했던 상황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방언으로 말하면서, 그들의 교회 모임의 모든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사도가 그들에게 충고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의 권면과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이는, 방언이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을 내어버리거나, 자제력을 잃어서는 안 되고 여전히 통제 아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제시하는 구절은 고린도전서 14:32입니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이제 이 말씀은 확실하게 이것을 단번에, 영원히 해결해 줍니다! 여러분이 스스로를 방종에 내어버려선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다른 영들에게 자신을 노출시킬 것이며, 여러분은 시험할 수도 나아가 통제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권면으로 이 장을 마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사고와 이성 그리고 지혜를 내버린다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여기에 한 자기 문제가 있는데 곧이어 이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이것은 저에게 있어, 가장 놀라운 진리의 특성 중의 하나로, 어떻게 단번에 그리고 동시에 여러분이 성령에 붙들림 바 되고 이끌려 지면서, 여전히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영광이며, 기독교를 거짓되고 그럴듯한 다른 모든 종교들로부터 구별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인 이성과 지혜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참으로 저는 이것을 긍정적인 충고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온 인류를 사로잡는 기독교적 구원의 본질적인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사람의 이성과 마음과 의지를 사로잡습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사고(思考)를 중단하면 복을 얻게 될 것이라는 어떠한 가르침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자체의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지혜의 눈을 밝혀주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마음은 한껏 펼쳐지고 사로잡힌 바 되지만 지성과 전인(全人)이 수반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방법이나 암시를 통해서 우리의 사고를 중단시키려는 어떠한 가르침도 의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조명을 끄고서, 어떤 음악이나 문구를 리듬있게 반복하는, 잘 알려진, 심리학적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보다 더 미개한 종족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 즉, 그들이 이런 방식을 통해서 어떻게 자신을 홍분시켜서 이성과 지혜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지 직접 보았거나, 읽어 보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어떠한 것이라도 의심해야만 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이것에 근접하는 것은 전혀 없으며 여러분은 오히려 엄밀하게 정반대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이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과연 이것이 진리일진대, 명백한 것은 이것은 우선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일어나는 어떤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에게 “자제력을 상실하십시오”라고 암시하는 어떠한 가르침이 있다면, 이미 그 자체로 적어도 의심할 근거가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우리는 영들을 시험하는 두 번째 대원리로 넘어 갑시다. 이것은 성경 자체입니다. 저는 이미 초대교회는 우리처럼 온전한 성경을 가지지 않았었다고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드렸습니다. 교회가 생겼을 때 이런 문제들은 이미 일어났었고, 바로 이것 때문에 사도들이 그들의 서신서들을 써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전에 이미 시험해야 할 상황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오늘날 우리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것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엡 2:20)고 말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가지게 된 것도 바로 이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입니다. 여기에 권위있는 가르침이 있으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가르침이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이미 여기에 주어졌기 때문에 성경에 다른 것을 덧붙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시험들을 적용하는 방법들을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성경과 분리시키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사에 정통한 모든 사람들은 제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 것입니다. 그것은 항상 거짓된 운동, 혹은 소위 이단의 특징이었습니다.
특별히 영적인 은사와 나타남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경우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들은 항상 성령을 말씀에서
따로 떼어놓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성경말씀은 더 이상 필요없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내적 광명을 소유했다면 왜 성경을 필요로 하나요? 여러분이 성령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받고있다면 어디에 성경이 필요하나요?”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새로운 성령의 나타남으로 우리에게 제시되는 모든 것에도 적용해야만 하는 가장 우선적인 시험들 중에 하나입니다. 특별히 은사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성경에 제시된 입장을 고수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런 운동의 역사에서, 비록 그들이 시작은 잘하지만, 점차적으로 성경을 적게 사용하고 소위 “예언의 메시지”라는 것에 더욱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 경향을 종종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에 관해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하나님 말씀을 설명하는 대신에 이것을 인쇄하여 유포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항상 가장 위험스런 징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진리는 성경에 있으며,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조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일반적이고 가치있는 원칙으로 이것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점점 더 성경에 근거하려 하지 않고, 이것을 설명하는데 보내는 시간이 점점 더 줄어든 반면에 성령으로부터 직접적인 메시지에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경향을 발견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모로 의심을 해야 할 책임이 있으며, 경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성령의 주권적 사역 - 로이드 존스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로이드 존스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교자체를 포기해야 하는가?  (0) 2018.01.09
설교와 설교자  (0) 2018.01.06
구속에서의 성령의 사역  (0) 2017.05.01
성령의 사역  (0) 2017.04.29
지금은...  (0) 2017.03.26

구속에서의 성령의 사역

로이드 존스

 

지금부터 다루려고 하는 주제에 접근할 때 마음에 새겨야 할 본문으로 고린도전서 2장 6-7절보다 접합한 것은 없을 듯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이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마리 정하신 것이라.” 저는 우리가 바로 사도가 말한 온전한 사람들이라는 전제 아래 이 강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려는 일은 분명 하나님의 지혜를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그가 고린도인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이런 식으로 설교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아직 “어린 아이”였으며 “육신에 속한 자”(고전 3:1)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헬라인들이 관심을 가졌던 그런 지혜가 아니라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운명에 관련된 일들이 담겨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감추어진 지혜를 연구해 보려 합니다.

 

 

1. 성령의 일반적 사역에 대한 보충 사항

 

우리는 지금 성령의 사역을 고찰하는 가운데 성령의 일반적 사역을 살펴보았고, 지난 강의에서는 요한복음 16장에 기록된 성령의 사역에 대한 우리 주님의 말씀을 함께 고찰했습니다. 주님은 “그(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구절이 일차적으로 성령이 영혼 안에서 하시는 일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성령이 세상에 계신 것 자체로 인해 행하시는 일에 대한 묘사라고 해석했습니다. 지난 주 금요일 이 강단을 떠나 제 방에 들어가면서, 이전에는 분명하게 알지 못했던 무언가가 떠올랐습니다. 그 내용을 추가적으로 말씀드릴 테니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세 가지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정말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은 성령의 오심이 그리스도 그분이 진실로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오시는 분이며, 선지자이자 교사이자 하나님의 계시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라는 최종 증거이자 표시가 되리라는 것이었따는 사실이 제방에 들어가서야 떠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의를 다루시는 제사장이기도 합니다. 죄의 속죄라고 하는 단 한 가지 가능한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의를 제공하시는 분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는 만유를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이 세상 신이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인 사탄을 멸하시고,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다시리고 계시며 앞으로도 다스리실 것입니다. 모든 권세가 그리스도께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임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선지자, 제사장 왕이시라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보여 줍니다.

 

우리는 또한 성령이 일반적인 복음의 부르심을 제시하는 일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 부르심은 불신자로 남아 있는 자들과 신자가 되는 자들 모두에게 주어지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성령은 그 메시지가 전달되도록 하시고 일반적이고 외적인 부르심이 선포되도록 하십니다.

 

 

2. 외적 부르심에 대한 상반된 반응

 

그러나 우리는 즉각 한 가지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 부르심, 즉 복음의 제시는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졌지만 그 결과 두 가지 부류가 생겨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볼수 있듯 어떤 사람들은 믿었고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 주님은 “청함을 받는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는 말씀으로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예언하셨습니다. 회중이 앉아 복음을 들었을 때 어떤 사람은 그로 인해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받지 못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되었고, 우리 주님이 예언하셨으며, 처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교회사에 수 없이 나타난 사실입니다. 한 부모의 자녀들이 같은 집, 같은 환경에서 자라 같은 곳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어떤 아이는 구원받고 어떤 아이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가?’라는 질문이 즉시 떠오릅니다. 성령의 사역을 다룰 때는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믿음에 관련된 가장 신비스러운 문제이지만, 그것이 이 문제를 피할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문제이지만 하나의 사실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탐구하는 것은 우리의 임무입니다. 물론 주의 깊고 지혜롭게, 우리의 편견을 확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알고자 하는 소망으로 탐구한다는 조건 하에서 그렇습니다. 여러 사람이 이 질문에 대답해 왔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일반적 부르심이 주어졌지만 그 반응은 달랐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해결책이 제시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질문에 어떤 대답들이 주어졌는지 살펴보는 것이 의미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 가지 대답은 일반적으로 펠라기우스는 공교롭게도 영국에서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그 말을 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사실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펠라기우스에 대해서는 위대한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가 효과적으로 논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펠라기우스에게 고맙게 생각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가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금 그의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잡느라 많은 글을 쓰게 했다는 것뿐입니다!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은 원죄란 없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펠라기우스는 사람들은 일종의 중립적 상태에서 태어나 살아가며, 모든 사람은 완벽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선이나 악을 선택할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거나 거부할 능력이 있다는 견해를 고수합니다. 성령은 사람 안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 견해에 따르면 성령이 하신 유일한 일은 사람을 사용해 성경을 만들어 낸 일이었으며, 그 후에는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시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성경에 동의하거나 거부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펠라기우스의 견해이며, 애석하지만 현재에도 교회 바깥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이 이 견해에 추종합니다.

 

반펠라기우스주의자(semi-Pelagians)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 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령은 사람들을 도우시지만 사랑은 사람들 자신에게서 생겨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소망하고 진리를 알고 싶어 하기 때문에 성령이 그들에게 오셔서 도우십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펠라기우스는 너무 극단적이었습니다. 사람들 스스로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없고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이런 소망을 나타내면 성령이 도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반펠라기우스주의입니다. 일종의 협력적 은혜를 가르치고 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가 진리와 구원의 지식에 이르도록 우리와 협력하여 은혜로 도우시는 것뿐입니다.

 

그 다음에 - 저는 이 이론들을 역사에 등장한 순서대로 살펴보고 있는데 여기서는 아마도약간 순서가 바뀔 것입니다 - 일반적으로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라고 알려진 이론이 있습니다. 이것은 17세기 초 네델란드 사람인 아르미니우스(Arminius)에세서 비롯되었습니다. 그의 위대한 제자 중 한 사람인 존 웨슬리(John Wesley)와 마찬가지로, 아르미니우스는 사람은 전적을 부패했고,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어서 성령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받아들여 믿을 수 있도록 충분한 분량의 은혜를 주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그 은혜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믿고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나요?”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이유는 믿을 수 있는 능력은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지만, 일부의 사람만 그 능력을 사용하기로 선택하고 나머지는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에도 협력의 요소가 나타나 있지만 약간 다르게 표현되었습니다.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사람이 먼저 소망하면 성령이 와 그들을 돕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인 견해는 사람은 아무것도 소망하지 않고 허물과 죄 가운데 죽어 전적으로 부패했지만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모든 사람에게 소망하고, 믿고, 받아드릴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사람ㅇ 성령과 협력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협력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멸망할 것입니다. 이것은 존 웨슬리와 이후 그를 따른 모든 사람이 실제로 가르쳤던 견해입니다.

 

루터파 견해는 다릅니다. 역사적으로는 이 가르침이 아르미니우스주의보다 먼저 등장했지만, 이것이 흔히 개혁주의적 견해라고 부르는 것과 좀 더 유사하기 때문에 순서를 바꾸어 설명하는 것입니다. 루터파의 견해 역시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허물과 죄로 죽었기 때문에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중생의 초기 단계에서 은혜 역시 모든 사람에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고 어떤 사람들은 멸망하게 됩니까? 루터파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하는 것에 저항할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은혜에 저항하면 그는 불신자로 남아 정죄를 받습니다. 저항하지 않으며 은혜로 인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루터파의 아르미이우스주의의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사람이 협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루터파에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능동적으로 협력할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거부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문제에 대한 루터교의 전통적이 가르침입니다. 정통 루터교라면 이 세상 어디에서건 이렇게 가르칩니다.

 

역사적으로 이렇게 네가지 견해가 제시되었습니다. 다섯째이자 마지막 견해는 개혁주의적 견해로, 영국 국교회의 39개 신조는 이 견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사실에 주의하십시오. 이것은 39개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그리고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이나 네델란드 혹은 벨기에 신앙고백 등과 같은 유럽 교회들의 위대한 역사적 개역주의 신앙고백에서, 그리고 다른 개혁주의적 교리에 대한 고전적 진술들에서 명백하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 역시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완전히 무력하고 무능력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한 사람은 구원받고 다른 사람은 멸망하는 일이 벌어집니까?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특별하 사역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성령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 안에서는 행하시지 않은 일을 구원받는 사람들 안에서는 행하신다고 말합니다. 이 견해는 선행적 은혜(prevennient grace), 즉 사전에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여 그들이 믿도록 하는 은혜에 대해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이 견해는 궁극적으로는 다른 모든 일에 앞서는 중생의 절ㅈ대적 필요성의 교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에게 친숙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 고전적 시도들이 있습니다. 저는 딱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중 어떤 이론을 신봉하고 수호할 것이지는 인류의 상태에 대해 우리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되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교리들을 다루었을 때, 저는 개혁주의적 견해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어떤 교리들보다도 이 교리를 다룰 때에는 우리 이성의 한계를 자각하고 열린 마음으로 성경에 다가가며 우리 자신의 개념이나 철학에 너무 이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아가며 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왜 이것을 믿는가? 이런 교리를 사람이 만들어 내었는가? 성경이 이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다행히도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이해함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천국에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도 있을 것이 분명하고, 아르미니우스주의자도, 루터파도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과정에 대해 잘못된 생각과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만일 우리가 이해 여부로 구원받는다면, 더 지적이고 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유리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을 이해하는 것에 의해 구원을 받지 않는다면서 왜 굳이 그런 문제를 갖고 귀찮게 합니까?”

 

그건 정말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우리가 “귀찮게”하는 이유는 성경이 그 문제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이 자녀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이해하고 소원해야 합니다. 저는 그 이상의 일도 할 것입니다. 저의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고, 구원의 길 혹은 과정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맏음을 강화시켜 주고, 확신을 세워주며, 앞으로 주어질 복된 소망의 확실성을 알게해 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그 문제에 대해 스스로를 “귀찮게” 합니다. 지적인 측면에서도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긴 하지만, 이것이 지적 호기심의 대상은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일차적으로 가장 실제적인 이유 때문에 이 문제를 고찰합니다. 즉, 이 문제가 참으로 위로가 되고, 힘을 주며, 우리를 세워 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앞으로 어려 번 말했던 것처럼, “온갖 교훈(doctrine)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엡 4:14) 사람들은 너무 게을러서 교리를 연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는 교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들이 잘못된 교리를 믿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분별할 도구가 없으며, 가르침을 평가할 시금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중요한건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뿐입니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조만간 최신 사이비 종교나 이단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비록 구원에 필수불가결한 사항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 문제들을 고찰해 봅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세세한 부분에서 이 문제들은 실로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결론은 성령이 멸망한 채 남은 사람들 안에서 행하시지 않은 특별한 역사를 구원받은 사람들 안에서 행하신다는 것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3. 구원의 순서

 

 

이어서 또 다른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의미로은 더욱 당황스럽고 난처한 질문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제가 처음에 여러분에 대해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라는 바울의 말을 인용할 수 있다고 말씀 드렸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상태와 능력, 진리를 알고자 하는 소망을 이 말씀과 같이 평가합니다.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여러분을 대단히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어서 고찰할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구원받을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 행해지는 특별한 사역이 있다면 성령은 어떤 순서에 따라 이 사역을 행하시는가?’

 

이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위대한 권위자들, 교회의 위대한 학자들, 수 세기 동안의위대한 신학자들, 이런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수많은 책을 썼고 소위 구원의 순서(ordo salutis, the order of salvation)에 대해 논쟁했습니다. 솔직히 이것이 대단히 황홀한 주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고백합니다. 이번 강의를 준비하면서 이 문제를 고찰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구조적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크로스워드 퍼즐 따위에 의지해야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음의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단계와 과정이 있는가? 성령은 어떻게 이 사역을 진행하시는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지금까지 제시된 것들은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성경 자체는 어떠한 정확한 순서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여기에 가장 근접한 구절은 로마서 8장 28-30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주목하십시오 -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것이 순서입니까?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순서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완전한 목록은 아닙니다. 이 구절에서 사도는 우리에게 완전한 목록을 제시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특별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화에 관심이 있었고 그것을 보증하고 싶었기 때문에 필수적인 단계들만 말했습니다. 그는 성화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본문이 있습니다. 루터파에서는 이 구절을 즐겨 사용합니다. 사도행전 26장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다메섹 도상의 사도 바울에게 주신 위임령에 한 가지 순서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17-18). 하지만 이 또한 완전한 목록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 구절은 목록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순서를 제시하고 있지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구원의 순서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단 두 사람도 의견이 일치는 것을 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은 앞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 학파에 속한 사람들ㅇ 자기들끼리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개혁주의의 권위자들의 의견을 물어보면 이들 중 단 두명도 위의 항목들을 같은 순서로 배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경우에도 역시 정확한 순수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순서를 전혀 다르게 제시하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문제에 접근하는 데에는 두 가지 주요한 방법이 있습니다. 구원의 순서를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거룩하심 가운데 타락의 결과로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시며 구원의 계획을 생각하고 계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순서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영원하신 분의 마음 가운데 있는 일종의 논리적 순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접근 방법은 이와는 정반대되는 것으로서 시간에 따라 즉 이 일들이 시간과 경험 속에 나타나는 방식에 따라 사고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이 순서를 순전히 객관적인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경험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생각하는 대신 아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기 전에 일어나야 하는 일들은 무엇이고, 그것들은 어떤 순서로 일어날까?“ 그것이 객관적인 관점입니다. 이어서 주관적인 관점을 취하여, “내가 아는 것이라곤 그 일이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겁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견해 역시 타락에 대해, 그리고 타락의 결과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느냐에 죄우될 것입니다. 그 교리에 따라 여러분 나름대로 구원의 순서를 정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훈련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 결과를 보면 매우 흥미로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것이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님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것들을 올바른 순서로 배열했다고 해서 구원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말하건대, 비록 그것이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단히 유익하고 가치 있는 것이며, 멋진 영적 훈련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몇 가지 가능한 순서를 제시해 보겠습니다. 저는 그 가운데 하나를 고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첫 번째이자 근본적인 문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구원받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 때문에 칭의를 그 다음에 놓고, 또 그 때문에 중생이 뒤를 잇습니다. 그로부터 믿음이 도출되며, 거기에서 양자됨이 나옵니다. 다음에는 회심을 놓을 수 있는데 여기에는 회개와 돌이킴, 그리고 믿음이 포함됩니다. 다음은 성화, 그리고 그 다음은 견인입니다.

 

한편, 주관적 요소를 더 강조하면서도 신학적 순서를 유지하고 싶다면 다음과 같이 배열할 도 있습니다. 우선 부르심을 사람들 안에서 유효한 것으로 만드는 “효력있는 부르심(effectual calling)"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이어서 중생과 믿음, 칭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회개와 회심, 양자됨, 성화 , 그리고 견인의 순서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순전히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자 한다면, 이렇게 배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죄의 자각, 회심, 믿음, 칭의, 중생, 양자 됨, 성화, 연합과 견인, 제가 위의 세 가지를 주된 분류법으로 제시했지만, 여러분은 각각의 항목의 위치를 거의 무한정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대닫히 유용한 영적 훈련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을 하는 동안 지나치게 연대기적 사고를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시간적 요소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이 요소들이 서로 대단히 엄격하고 기계적인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이어져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이것은 실로 위험한 일이며 언제나 오류에 빠지게 만듭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행동은 시간에 제한 받지 않기 때문이며, 바로 그 때문에 우리에게 어려움이 발생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시간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건들을 시간 속에서 주어진 순서에 따라 경험한다고 해서, 그 일이 반드시 그런 순서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아이가 태어난다는 사실에 대한 첫 번째 증거는 아이가 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는 것이 가장 첫 번째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아이가 울기 위해서는 반드시 태어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생명의 증거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증거가 생명보다 먼저 일어난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삭의 항목 중 일부는 정확히 동시에 일어나며,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관점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선행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특정한 순서를 부여하지 않고서 이런 일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는 업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오늘 강의에서 저는 여러 가지 고백을 했습니다만, 한 가지를 더 고백해야겠습니다. 저는 오늘 밤에 제가 다룬 모든 내용을 여러분께 말씀드릴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상당히 고민했습니다. 저의 이런 생각을 아내에게 말해더니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 모든 내용을 말한다면 사람들은 혼란에 빠질 거예요. 그건 어려워요. 신비라고요." 이 대화가 이루어진 것은 늦은 밤이었고, 아내는 그녀 자신이 혼란스럽다고 고백했습니다.

 

저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어렵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유일한 대안은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내용을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대신, 구원받은 사람들안에서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되 논리적인 설명은 없이 첫째는 이것, 다음엔 저것, 하는 식으로 출발하는 방법뿐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죄의 자각이 첫 번째라는 것은 분명한데요, 그런데 목사님은 중생을 믿음보다 먼저 놓지 않으시는군요!” 그 사람은 당혹스러워하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왜 저기서 시작하지? 왜 저걸 두 번째 놓고 이건 세 번째에 놓는 것일까?”

 

지금까지 저는 여러분과 함께 구원의 순수에 대해 간략하게 고찰해 보았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강단에 서서 말하는 사람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 최선을 다해서 설명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저는 교황이 아니며 교황을 믿지도 않고, 교황의 성좌선언 역시 믿지 않습니다. 성경의 진리와 교리를 해설하려는 사람은 누군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정당함을 보여 줄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서의 문제를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서의 여러 세부 사항들을 살펴나가면서 여러분은 자신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는 것과, 이 순서는 타락했을 때 일어난 일, 원죄의 결과, 그리고 타락하고 잃어버려진 상태에 있는 사람의 상황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한 가지 순서가 다른 것보다 필연적으로 완전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한 일들을 고찰하고 파악해 나가면서, 그 순서가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 확인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자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Jennifer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타/한아름

'로이드 존스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교와 설교자  (0) 2018.01.06
현상들을 시험해야 할 우리들의 의무 - 로이드 존스  (0) 2017.07.15
성령의 사역  (0) 2017.04.29
지금은...  (0) 2017.03.26
로이드 존스 -몸의 부활  (0) 2017.03.03

성령의 사역

부제 : 신앙에 대한 분파별 이해와 구원의 서정

D.M.로이드 존스


우리는 성령님께서 복음의 일반적인 소명을 주시는 분임을 고찰했으며, 또한 이 소명은 모든 이들, 즉 불신자로 남아 있는 자들과 신자가 되는 자들 모두에게 주어진 소명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성령님께서 메시지가 전해지고 선포가 일반적인 외적 소명으로 될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우리는 문제에 봉착합니다. 복음의 제시인 그 소명은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한 분리를 가지고 온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도행전 2장에서 봅니다. 즉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로 나눠진다는 점입니다. 진실로 우리의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때에 이런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교회에 앉아 있는 회중이 복음을 듣습니다 : 어떤 이들은 그것에 의해서 구원을 받고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사실로 우리 주님게서 예견하셨던 것이며, 또한 기독교가 처음 시작된 때로부터 지금까지의 교회사 속에서 풍부하게 보여졌던 것입니다. 한 부모의 자녀들이 동일한 가정에서, 동일한 환경에서 양육되어 동일한 예베에 참석했는데도 한 명은 구원받고 다른 한 명은 그렇지 못합니다.

따라서 질문은 즉시 이렇게 발생합니다. : 왜 이런 차이가 있는가? 그리고 성령님의 사역을 다룸에 있어서 우리는 이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연결해서 가장 신비한 문제들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피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중심질문 : "왜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합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주어진 역사적인 답들을 우리가 살펴 보는 것이 가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I. 질문에 대한 제견해

1. 펠라기안(Pelagian).
펠라기안(Pelagian)의 해답이란 이름으로 일반적으로 주어진 답이 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영국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그는 성 어그스틴이 매우 효과적으로 살폈던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인간적으로 펠라기우스를 감사하게 생각하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어그스틴으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된 가르침을 많이 수정하는 글들을 쓰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에는 원죄가 없습니다. 펠라기우스의 관점에 의하면 사람은 중립적인 상태에서 태어나 산다는 것이며, 각 사람은 완전히 자유의지를 소유하며 선악을 선택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도 거절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사람 안에서 아무것도 행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성령님의 유일한 사역은 사람을 이용하여 성경을 산출 할게 한 것뿐입니다. 성령님께서는 그 이상 아무것도 하시지 않기 때문에, 따라서 성경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에 동의하든지 아니면 거절하든지 하는 결정을 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펠라기우스의 견해인데, 그는 현재까지도 교회 밖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많은 추종자들을 갖고 있습니다.

2. 준-펠라기안(Semi-Pelagians).
그리고 이런 견해와 거의 같았으나 완전히 같지는 않았기에, 때때로 준 펠라기안이라고 불리우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령님은 사람들을 도울 뿐이며, 사랑은 사람 자신들 속에서 기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기 원하며, 그들은 진리를 알기 원하며, 그것 때문에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돕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준 펠라기안주의라고 부르는데, 여러분들은 이런 이름이 왜 주어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 견해는 협동의 은헤(co-operative grace)를 가르칩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은 우리와 협동하는 것으로, 우리를 진리의 지식과 구원에 도달하도록 은혜롭게 돕는다는 것입니다.

3. 알미니안주의 (Arminianism)
이것은 17세기 초에 살았던 화란사람 아르미니우스라고 불리운 자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위대한 제자 요한 웨슬리가 그리했던 것처럼, 아르미니우스는 인류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자신들만 남아 있다면 전혀 소망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성령님께서 사람이 태어날 때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는 충분한 은혜를 주셨다는 점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물론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에 협동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이들에게 복음이 주어졌을 때에 왜 어떤 이들은 믿고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 그에 대한 설명은 성령에 의해서 믿을 수 있는 능력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지만, 단지 어떤 사람들만 그것을 사용하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사용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바로 알미니안의 가르침입니다.

※ 준-펠라기안과 알미니안의 차이.
준펠라기안은 먼저 바라는 자가 사람이며 성령께서 다음에 와서 돕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알미니안은 견해는 사람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가 죄로 죽어 완전히 부패했기 때문이며, 그러나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와서 모든 이들에게 바랄 수 있고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성령과 협동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며,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 웨슬리와 그를 따랐던 모든 자들에 의해서 가르쳐졌던 바로 그 견해입니다.

4. 루터란(Lutheran).
루터란의 견해는 조금 다릅니다. 루터란의 견해에 의하면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으며 죄악 중에 죽어 있는 스스로는 전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중생의 초기 단계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가 다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문제에 관해서 루터란은 답하기를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들이 그 은혜를 거절하면 그들은 불신자로 저주아래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은혜를 저항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것에 의해서 구원을 받을 것이란 의미입니다.

※ 알미니안과 루터란의 차이.
루터란과 알미니안주의와의 차이점을 여러분들은 발견하십니까? 알미니안 주의는 사람이 반드시 협동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루터란은 그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즉 사람은 적극적으로 협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소극적으로 저항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문제에 관한 역사적인 루터란의 가르침이며, 정통 루터주의자들이라는 범주에 속한 세상의 모든 자들 속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5. 개혁파(Reformed) 견해.
개혁파의 견해는 영국교회의 39개조항에서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 그리고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와 화란 혹은 벨직 신앙고백서와 다른 개혁적 교리의 고전적 진술들 속에서 분명하게 명백하게 가르쳐 집니다.
여기에서의 가르침은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되어 힘도 능력도 완전히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는 구원받고 다른 이는 그렇지 못한 이류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 대답은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특별한 역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구원받은 자속에서 역사하시고 그렇지 않는 자 속에서는 역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견해는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즉 사람 속에서 은혜가 먼저 역사하여 그들로 하여금 믿게 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무엇인가 발생하기 이전에 중생의 절대적 필요성의 교리를 궁극적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열님 마음으로 성경으로 가야한 한다는 점 그리고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우리 자신의 철학에 의해서 곁길로 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교리를 접하는 우리가 취해야할 분명한 자세입니다. 행복스럽게도 우리는 이런 견해들을 이해함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하늘에서는 펠라기안들이나 알미니안들 그리고 루터란들이 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구원과정에 대한 생각과 이해에 좀 혼란되어 있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구원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만약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이해 여부에 의해서 결정된다면,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이점을 갖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만 더욱더 지적이며 더 큰 능력을 소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구원받지 않습니다.

※ 이 교리이해의 필요성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을 이해하는 것이 구원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면 왜 그런 것들로 귀찮게 합니까?"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질문이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귀찮게 하는 이유"는 성경이 이 주제에 대하여 많은 것들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이해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만약 이런 이해에 대한 국면을 포기한다면, 저는 믿을 강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저의 호가신을 세워주는 것도, 제게 놓여 있는 복된 소망에 대한 어떤 확신도, 기독교 교리를 이해함도, 그 길을 이해함도, 또한 구원의 길도 전혀 알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지적인 흥미를 만족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비록 이것이 지적인 기준으로도 매혹적인 흥미가 있지만 말입니다. 단지 제가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은 실제적인 이유에 제 자신의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위로를 주며, 참으로 강하게 하며, 굳건히 설수 있게 해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견고한 것에는 관심이 없다가 후에 이단으로 빠지는 경우들을 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엡4:14). 따라서 이런 것들이 비록 구원에 본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런 것들을 살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삶과 실천적인 항목에 있어서 그것들은 진실로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II. 구원의 서정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다음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만약 구원받은 자들의 영혼들 속에서 이런 특별한 역사가 있다면, 성령님께서는 그것을 어떤 순서로 하시는가?
우대한 권위자들, 교회의 위대한 박사들, 여러 세기 동안의 위대한 신학자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성인들은 이것에 관하여 많은 것들을 썼으며, 그들은 이것을 구원의 순서(ordo salutis-order of salvation)라고 불러 왔습니다.

성경 그 자체는 우리에게 어떤 명확한 순서를 주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가장 가까운 접근이 로마서 8:28-30절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계속합니다.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것이 순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미리 정하셨으며, 부르셨으며, 의롭다 하셨고,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한 순서이지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은 완성된 목록이 아닙니다. 사도는 여기에서 완성된 목록을 주는 것에 흥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 가지 특별한 목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도의 영화에 관심이 있었고 그것을 보증하기를 원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필수적인 단계들만 기록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성화에 대하여 언급한 곳을 전혀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구원의 순서에 대한 이런 질문에 관하여 동의하는 두 사람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다섯 개의 다른 학파들에 속한 사람들 조차도 이미 제가 언급한 것처럼 자신들 사이에서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러분들이 개혁파의 권위자들을 ?려보아도 그들 속에서 정확하게 동일한 순서로 이런 항목들을 설명하는 두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완전한 일치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 문제에 접근 할 수 있는 두가지 주된 방법이 있습니다.
① 먼저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런 구원으 순서를 생각할 수있습니다:
자신의 거룩함 속에서 하나님께서 타락하여 죄 속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구원의 계획을 생각하십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의 순서가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영원의 관점에서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순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② 또 다른 방법은 분명히 앞의 것과는 반대인데 일시적인 방법, 즉 시간과 경험 속에서 발생하는 것들을 근거로 순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문제는 구원의 본질에 속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바른 순서, 바른 과정으로 이런 것들을 말했다고 해서 구원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이 구원에 본질적이지 않지만, 진실로 매우 유익하고 가치있으며 나아가 놀라운 한 영적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논리적이며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신다면 이렇게 순서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가장 먼저 근본적인 것이 바로 그리스와의 연합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구원받기에 여러분들을 이것으로 출발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이것 때문에 다음 순서로 칭의를 놓을 것이며, 그 다음으로 중생을 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양자됨을 놓은 다음 여러분들은 회개와 전환 그리고 신앙을 포함하고 있는 돌이킴을 둔 다음 성화와 견인을 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들이 순수하게 주관적이며 경험적으로 이것을 놓고 싶을 때에는 다음과 같이 순서를 둘것입니다; 확신, 돌이킴, 믿음, 칭의, 중생, 양자, 성화, 연합과 견인.

이런 모든 것을 다룸에 있어서 위험은 너무 연대기적(시간적)으로만 치우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위험한 것은 너무 시간적인 요소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렇게 될 때 각각의 항목을 반드시 기계적인 순서로 앞의 것들을 따라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론은 위험하며 진실로 항상 잘못으로 빠지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행동은 시간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한 아이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그가 울고 외치는 것에서 찾을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울음이 먼저 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가 외치기 이전에 탄생이 먼저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삶의 증거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으며, 삶 이전에 그 증거가 먼저 왔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에 대하여 저는 거의 의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시간적인 관점에서 하나가 다른 것에 앞선다고 여러분들은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여러분들은 이런 것들에 올바른순서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 순서가 다른 것보다 필수적으로 완전하다고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모두가 동일한 것으로, 이런 것들을 순서로 보는 것은 우리의 업무이며 우리의 의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붙잡으려 할 때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우리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균형감각이
필요합니다
노래가 점점더 우위를 차지하는 모습이 보이십니까 ?
범죄와 폭력과 죄와 성도착이 난무하는 시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거룩한 것에 침을
뱉는 무서운 시대에 세상의 상태를 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이 노래할때가 아니라

설교할때임을 확실히 알 것입니다
우리는 노래만 하고 있습니다
마냥 행복한 분위기에 젖어 있습니다

지금은 노래할때가 아니라 생각할 때이며

설교할때이고 죄를 깨우쳐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할 때이며 악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우리의 온갖 어리석은 탈선을
선포할 때입니다
노래할때는 나중에 찾아올 것입니다
위대한 부흥이 먼저 임하게 합시다
하늘의 창문이 열리게 합시다
수천명의 남녀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는
모습을 목격합시다
그후에는 노래할 때가 찾아올 것입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는 이 미묘한 유혹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려는 유혹을 경계합시다

부흥 ㅡ마틴로이드존스

 

출처: 사모님사모님/나의기쁨

제 22 장 몸의 부활


부활의 성경적 증거


1. 구약에 나타난 부활의 증거

구원에 대한 전체 교리가 구약에는 신약처럼 분명하게 나오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구약 성경에도 부활에 대한 분명한 믿음에 증거가 나와 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욥19:25-27)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여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라”(시16:9-10)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17:150)

2. 신약에 나타난 부활의 증거

마태복음에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한 여인과 결혼한 일곱 형제의 사례를 제시하며 질문을 한다.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 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마22:23-32)라고 말씀하신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눅14:12-14)


요한복음에는 주님께서 영적 부활과 몸의 부활을 구분하고 계신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 25절은 첫째 부활 즉 중생을 말하며, 28절은 육체적이며 물리적인 부활을 말한다. 계속해서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또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복음서에는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강력한 증거들이 나와 있고 제자들은 모두 “예수와 부활”을 전파했다.

바울은 행24:15, 행17:31, 빌3:20-21, 살전4:13-16 고전15:에서 위대하고도 강력한 문장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느끼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싶도록 만든다.

3. 부활의 본질

부활의 교리는 인간의 영뿐만 아니라 육체 역시 지속된다는 교리이다. 누가복음 24장에는 우리 주님의 부활하신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부활 후 첫 번째 주일 저녁 주님이 다락방에 있는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제자들은 자신들이 영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님은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의심하는 도마의 이야기도 마찬가지 논증이다.

몸의 물리적 부활을 왜 강력하게 주장해야 하는가?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지독한 이단이며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몸의 부활 없이는 구원이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도가 고린도전서 15장을 기록한 이유이다. 기독교는 몸의 부활을 전제한다. 죄는 육체적인 것이어서 오직 몸에만 적용되기 때문에 구원이란 몸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르치는 이단이 있다. 이것이 힌두교와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들은 중요한 것은 몸을 벗어나 육신을 제거하는 것이며 그 순간 죄는 뒤에 남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몸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구속을 가르치는 기독교의 구원과는 정반대이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을 때, 죄의 결과 그들의 영과 혼과 몸, 전인이 영향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해지려면 구원은 영과 혼뿐 아니라 몸 역시 포함한 것이어야 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주님 자신이 부활하신 것처럼 주님은 우리를 부활시키실 것이다. 그것이 완전한 구원이다.

4. 부활체의 본질

이 부활체의 본질은 무엇인가?

첫째, 성경이 우리의 정체성은 보존될 것이라고 매우 분명하게 말한다. 내 몸은 언제나 나의 몸으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눅24:39)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땅에 묻힌 몸과 부활한 몸 사이에 유기적인 연관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땅에 뿌려진 씨와 거둬들인 곡식 사이에는 유기적인 연관이 있다. 우리는 몸의 세포들이 끊임없이 파괴되고 분해된다는 것을 안다. 이십년 전에 가지고 있었던 입자는 이제 내 몸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나는 똑같은 몸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그것을 “혈과 육”이라고 표현했다. 부활체의 실제 구조에 대해서는 성경에 말해 주지 않아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불신자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들이 멸망의 못에 던져지게 되리라는 사실뿐이다. 하지만 신자들의 부활체에 대해서는 대단히 많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둘째, 부활체가 썩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고전15:42) 부활체를 받게 되었을 때, 나는 더 이상 병에 걸리지 않고 나이도 먹지 않으며, 죽지 않을 것이다.

셋째, 부활체가 영광스러운 것이 되리라는 것이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43) 그분의 영화된 몸과 같이 놀라운 영광스러운 몸을 갖게 될 것이다.

넷째, 부활체는 대단히 강력한 몸이 될 것이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43) 권능으로 가득하고 연약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몸이 될 것이다.

다섯째, 부활체가 영적인 몸이 되리라는 것이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니 육의 몸이 있는 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44) 육의 몸은 동물적 본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우리 주님께서 사두개인들에게 동물적인 것과 신령한 것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셨다. 하늘에서는 우리는 신령한 영역에 살며 당연히 동물적 본성은 필요하지 않다.

여섯째, 부활체는 하늘에 속한 몸이 되리라는 것이다.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48-49) 우리는 주님과 같이 될 것이다. 놀라운 기적에 의해 여러분은 완전히 변화될 것이지만, 여러분의 정체성은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 자신이 부활체가 되어 구원이 완성될 것이다. 여러분의 영혼은 이미 구원받았다. 그 때에는 몸도 완전하게 구속받을 것이다.


출처: 청교도 아카데미/강대식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5 장 십자가의 승리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철학과 역사 등 학문들은 어떻게 하면 세상을 바르게 할까에 대하여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수세기에 걸친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상은 이 모양인가? 오늘의 고통은 전적으로 인간들의 조건과 세상의 조건이 안고 있는 난제를 심오한 방식으로 대면해 본적이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근본적인 문제를 성경만이 제기하고 그 해답을 줄 수 있는 질문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이 세상의 삶은 마치 어떤 무장한 강한 자가 죄인을 지배하는 큰 궁정과 같다. 주님께서는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11:22). 바로 그것이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에 대한 주님 자신의 묘사이다. 주님은 자신의 포악한 권세로 사람들을 꼼작 못하게 지키고 있는 강하게 무장한마귀를 대적하러 오셨다.

 

- 오늘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온 세상을 진실로 고통케 한 자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이 세상의 신이 사람들을 어두움에 묶어 두고 있다(고후4:3-4) (2:1, 6:12) (요일5:18-19). 우리는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어야 했다. 카이제르나 무솔리니나 히틀러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만들었나? 세상이 무섭고 처참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의 원인은 사람이 아니라 마귀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6:12). 정치가나 철학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인간 본성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들을 조사하고 인간 본성을 이해하려 한다.

 

- 영적 세계는 두 부류로 나뉜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계시고 또 한편에는 마귀와 그 세력들이 있다. 마귀는 천사적인 존재로서 하나님께 창조 받아 사람보다 먼저 존재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완전하게 만드셨으나 자기의 교만과 무례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배역하여 하나님과 동등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모반하였고 여러 천사들을 설득하여 자기와 같은 보조를 취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마귀와 타락한 천사들이 생겼고 그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넘어 뜨릴까 하는 생각으로 사로 잡혀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마귀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 이름과 그 영광을 손상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시키는 것임을 알았고 그래서 사람에게 다가와 시험을 했다. 사람은 타락하여 죄의 상태로 빠지게 되고 온 우주를 끌고 죄 가운데로 들어간 것이다.

 

- 마귀의 시험과 유혹에 청종한 인간은 마귀의 노예가 되었다. 그 때문에 마귀를 공중 권세 잡은 자”,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부른다. 인류 전체는 마귀의 노예가 되었다. 성경은 마귀의 권능이 엄청나다고 말한다. 구약의 아브라함과 족장들, 선지자들과 경건한 사람들이 다 마귀 앞에 거꾸러졌다. 아담은 완전한 사람이었음에도 마귀에게 졌고 마귀는 너무나 교활하고 강하다.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3:10)라고 했다.

 

- 마귀는 우선적으로 이지를 통해 하나님을 미워하도록 설득하고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한다. 불신앙이라 해서 손해될 것 하나도 없다. 복음은 언제나 그렇게 반대를 받아 왔다. 마귀는 대부분의 인류의 삶을 지배한다(7:13-14).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도 믿지 않았고 아들의 속죄의 죽음도 믿지 않았으며 그들은 그것을 조롱했으며 미련한 것이라고 말했다. 마귀는 그런 사람의 눈에 가리개를 하고 마귀가 원하는 것만 보도록 한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은 진리를 보는 것이다. 마귀는 사람의 생각을 통제할 뿐만 아니라 소원도 통제한다.

그리고 의지까지 지배하여 삶 전체를 지배하고 두려움을 조성한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음에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라”(2:14-15).

 

- 왜 인류는 죽음을 두려워 하는가? 그들은 죽은 다음에는 심판이 있고 율법이 우리 모두를 저주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자기들은 이 모든 것들을 믿지 않는 것처럼 점잖을 빼지만 할 수만 있으면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한다. 이교도들은 태양과 달과 별들을 무서워하고 자기들이 만든 신상을 두려워한다. 마귀가 그러한 삶을 산출해 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과 낙원을 산출하신다. 마귀는 혼란을 산출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혼돈으로 바꾼다. 인간의 생각과 마음과 의지를 장악하여 우리가 친숙해 있는 혼돈으로 끌고 간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 성, 마귀가 지키는 궁성에서 빠져 나갈 수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강한 자가 필요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를 멸하러 오셨다.

 

- 우리 주님께서 사람들 뒤에 있는 이 권세와 사력을 다해 싸우시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서사시이며 얼마나 훌륭한 싸움이며 얼마나 대단한 용전인가? 예수께서 태어나기 전부터 마귀는 그를 없애 버리려고 했으며 그리고 그 싸움은 계속되었다. 헤롯의 칙령, 광야에서 사십 주야를 시험 받으시고 귀신들려 고생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어떠한 싸움을 했는지 살펴보라.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처럼 땅에 떨어지던 그 모습, 주님은 원수를 진정으로 싸워 이길 수 있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순간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아셨던 것이다. 십자가는 끝까지 저항하고 덤벼드는 마귀를 대항한 종결된 싸움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일어난 일은 이 세상이 심판 받는 것이었다(12:31-33).

 

-여러분은 사람들 뒤에 마귀가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 나사렛 예수의 범죄가 무엇이었는가? 그가 누구에게 해를 끼쳤는가? 그의 가르침과 이적에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는 선을 행하러 오셨고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다. 그는 어떤 대접을 받으셨는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혐오와 조롱과 모독적인 행동을 보라. 그들의 신성모독과 조롱을 보면 그것은 사람 속에 역사하는 마귀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 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끓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27:29-31)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27:39-44). 예수님은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셨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였다(13:53).

 

- 여러분도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고 언제나 선을 행하며 다니던 이러한 사람을 미워하며 조롱하며 야유하며 침을 뱉겠는가? 아니면 이와 같은 분을 대접하겠는가?

주님의 죽음은 죽음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사람들 속에서 이렇게 끝이 났다. 마귀는 그를 죽일 수만 있다면 그것은 끝장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야말로 마귀의 무서운 오산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스스로 파멸시키고 자신의 궁극적인 운명을 가져온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사도는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참으로 약해 보였지만 마귀와 그 권세를 없이하시고 부끄럽게 하셨으며 그것들을 이기셨다고 말한다. 마귀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하나님의 능력과 더 이상 접촉하지 아니하는 사람 외에는 어떠한 권세도 부릴 수가 없다. 마귀를 제어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하나님과 접촉에서 벗어나는 순간 마귀에게 사로잡히게 되며 우리는 마귀의 무능한 도구가 되며 그의 집에 잇는 소유물처럼 그의 나라 안에서 희생물이 된다.

 

- 사람을 지옥과 마귀의 손아귀에서 건져낼 수 있는 오직 유일한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뿐이다. 그러나 어떻게 내가 그 능력을 가질 수 있는가?

먼저 하나님과 화해해야 한다. 골로새서에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의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다음에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두 가지 일이 함께 한다. 주님은 바로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계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에 대한 벌책으로 형벌을 담당하셨으므로 우리가 그를 믿으면 우리는 형벌로부터 벗어나고 정죄에서 자유로워진다. 우리는 하나님께 화해하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마귀와 그의 군대로부터 우리를 건져내고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긴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이 바로 그 일이다. 마귀는 자기가 그리스도를 멸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계셨던 것이다.

 

-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속에 들어오고 우리는 거듭나서 새 본성을 받고 새 사람들이 되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고 그리스도의 임재가 우리를 돕기 위해 항상 우리 앞에 가까이 있다. 아마도 마귀가 우리를 두렵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나 그러나 마귀는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 이제 강한 자보다 더 강한 자가 온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이기셨다.

십자가가 있기까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제외하고 온 세상나라를 마귀가 통제했었다. 십자가의 순간부터 이방인들이 믿기 시작하였고 하나님의 나라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늘로 올라가셔서 성령을 내려 보내신 순간 복음은 모든 곳에서 전파되었다. 이방인들이요 이교도들이었고 무지했으며 죄 가운데서 살았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이끌려져 왔고 마귀의 권세에서 풀려났다.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16) 그 능력은 십자가에서 발휘되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사람과 우주를 타락시켰던 궁극적인 원수인 마귀를 파하셨고 마귀는 사슬에 묶였다. 마귀는 짐승들과 그 모든 거짓선지자들과 함께 불못에 던지움을 당할 것이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저 유명한 정복자를를 보는가?

 

모든 것을 이긴 예수

위를 향하여 진군하네

능력의 불에 휩싸여

죄악의 땅은 더 이상 주를 반대할 수 없고

지옥은 당신의 말씀에 기가 꺾이네

주의 큰 이름이 너무 높아

모든 여우들 두려움에 움츠리네

주께서 가까이 오심을 알고 모든

피조물들이 공포에 떠네 - 월리암 월리암스 -

 

출처: 정교도아카데미/김영희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종의 영(1-1) (롬8:15~17) / 로이드존스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롬 8:15-17)

 

 

기록된 말씀 중에 이보다 더 위대한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심지어 이처럼 위대한 장에서조차 매우 독특한 진리의 표현으로 돋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전영역과 구석구석 도처에서 발견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진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왜 그 사도가 이 진리의 말씀을 진술하셨는가를 정확하게 깨닫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반향을 일으키는 구절들에 따른 위험성은 우리가 그 말씀 자체로 만족하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것들이 우리에게 주는 어떤 일반적인 인상으로 만족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너무 즐깁니다. 그리므로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교훈을 참으로 적용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말씀을 살펴 보겠습니다. 바울이 왜 이것을 언급했을까요? 그 목적이 무엇일까요? 바울이 그렇게 했던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대답이 15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이미 지나간 그 무엇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 사도는 이 말씀을 기록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저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낙심케 하는 영으로부터, 다시 말해서 낙담 혹은 침체의 영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이 실제적으로 그 문제를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그 순간은 아니었을지라도 바울의 관심사는 저들이 그런 고통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한 가지 목적은 저들에게 영적 침체에 대한 해독제를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이 종의 영, 패배의 영, 그리고 낙심의 영이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도가 이같이 중요한 진술을 어떤 연관성 없이 한마디 던지고 만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갑자기 던져진 매우 중요한 진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같은 진술들이 이 위대한 사도의 기록에서 거의 계획대로 나타났듯이 여기에서도 매우 실제적인 문제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약성경 안에 가지고 있는 이런 서신들은 교리와 신학으로 충만합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 나오는 서신들의 모음이 신학 교과서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것입니다. 그것이 명심해야 할 정도로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규약들이나 교리들을 언제나 보이는 실제적 목표로 가장 최일선에 제시되어야 하는 목회적 요소와 함께 소개되어야만 합니다. 이런 편지들은 우선적으로 목회서신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도가 실제적인 기쁨과 또 자신들이 믿고 받아들였던 기독교 신앙을 살도록 사람들을 돕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특별한 진술을 어떻게 하게 되었는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 낙심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문제, 당신이 좋아한다면 죄를 처리하는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능력 있는 서신 제6장 서두에서부터 그 문제를 취급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지금까지도 그것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가 편지를 쓰고 있는 대상인 이 사람들은 개종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왔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지금 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문제에 접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그것이 저들에게 적대적이며 철저하게 반항적인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품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그 어떤 것들을 접하면서도 역시 그런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투쟁이요 또한 전쟁입니다. 내부와 외부에 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에서 주님이 살으셨던 것처럼 자신들도 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특별한 문제, 곧 낙심과 침체가 유입되는 그 문제를 매우 자주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는 벌써 마귀가 우리를 낙심시킬 때에 교묘하게 사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에 관한 많은 사례들을 고찰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평범한 것입니다. 특별히 기독교 신앙을 매우 진지하게 생각하는 양심적인 타입의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유형의 사람은 "나는 개종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은 "이것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삶이다. 나는 그런 삶을 살아야만 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바로 그 사람에게 찾아오는 특별한 시험에 대해서 고찰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저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어떤 진리를 ?닫지 못하고 또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 가능한 그 무엇을 깨닫는 데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차라리 그런 표현을 더 좋아한다면, 신앙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실패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에 관한 많은 일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신앙이란 활동성이란 점을 고찰해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망각하다가 어려움을 당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이 신앙을 적용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이유를 고찰해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이 계속해서, 그리고 끈질기게 신앙을 적용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출발을 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순간이라도 평안하게 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적절하게 적용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유발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앞에 펼쳐진 진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적절히 활용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붙잡지 못하고 실패하는 가장 분명한 일들 중에 하나가 죄의 결과로 나타난 인간의 형편입니다. 우리가 그 점에 대해서 다 살펴본 바 있습니다. 당신은 과거에 여러 차례 읽었던 성경 말씀, 그때마다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말씀이 어느 날 갑자기 당신에게 살아 있는 말씀으로 그리고 과거에 결코 체험하지 못했던 그런 방법으로 다가오는 그런 성경 구절을 발견한 적이 없습니까? 우리들은 모두 여러 차례 이 같은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그 진리에 형식적으로 동의하지만 그것이 말씀하시는 바를 적절하게 적용하지 못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는 바로 그것이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이 특별한 문제의 본질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도 바울이 '종의 영'이라고 부르는 바를 초래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종의 영'이란 무슨 뜻입니까? 그는 종의 정신 혹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돌이켜 새로운 율법 혹은 고차원적인 율법으로 전환하려는 경향에서 비롯됩니다. 제가 지금 율법과의 관계를 매우 분명하게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십계명 혹은 도덕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생각합니다.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또 그분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저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셨음을 압니다. 또 칭의에 대해서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이제야 적극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매우 교묘한 방법, 곧 자신들도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저들은 새로운 종류의 율법을 붙들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저들이 종의 영 혹은 노예의 영을 가지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자신들이 담당해야만 될 대단한 임무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또 자신들이 적용해야만 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산상설교를 읽고 또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모범, 곧 자신들이 살고 싶어하는 삶의 표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또다른 가르침들을 거기에서 발견하고 관심을 돌립니다. 또 저들은 서신서들을 두루 섭렵하고 사도들을 통해서 주어진 세밀한 규정들을 거기에서 발견한 후에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라고 말합니다. 저들이 그런 것들을 발견하여 그것을 자신들이 마땅히 담당하고 또 일상생활 가운데서 실천해야만 될 그 무엇으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환언해서, 거룩이 저들에게 큰 짐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들은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조직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들이 수행해 나갈 수 있는 어떤 훈련준칙들을 소개합니다. 이런 태도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그 가르침의 고전적인 방법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수도원 제도의 전체적인 사상체계에서 볼 때 그것은 바로 이 같은 것을 전시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기독교 진리와 직면한 남녀 성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들은 "그래,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상하고 수준 높은 삶이야. 만일에 혹자가 성공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문제가 될 거야"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저들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어. 사업을 하거나 전문 직종에 계속 종사하면서 이 세상에서는 전혀 그렇게 살수는 없어. 그렇게 하려면 당신 자신을 세상에서 분리시키지 않으면 안 돼. 그 길은 세상을 떠나는 수밖에 없어." 저들은 그렇게 합니다. 그것은 이런 생각에 대한 극단적인 형태입니다. 거룩이나 거룩에 대한 훈련과 영적인 삶은 평생 동안 지속되어야만 될 일입니다. 더군다나 당신은 특별히 그 일에 자신을 투자해야만 하고 또 법칙과 규정을 세워야만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에 의하면, 그것이 바로 종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로마 카톨릭에게만 한정된다고 말할 필요가 없으며 또 자신들이 '카톨릭'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제한시킬 수도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매우 보편적일 수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적인 성도들 사이에도 그런 일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율법을 우리 자신들에게 쉽게 부과합니다. 물론 우리가 그것을 율법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율법 밑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런 경향에 젖어 있습니다. 저는 많은 인용을 통해서 이것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서신들이 이에 대한 인용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교회에 보내는 바울서신의 논증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바울은 특별한 말씀으로 이 문제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제2장에서 바울이 이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을 들어보도록 합시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 자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골2:16-23).

 

이제 그것은 초대교회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에 대한 통찰력을 우리에게 제공해 줍니다. 일종의 수도원 제도, 곧 가장 교묘한 방법이 유입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런 특별한 형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향 혹은 시험의 가능성은 여전히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똑같은 일로 편지를 써서 경고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에 나오는 그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회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딤전4:1-3). 그것은 지금까지도 매우 보편적인 그 무엇입니다.

 

저는 매우 철저하게 복음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한 처녀가 고기 먹는 것을 중단했던 사례를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짐승이 먼저 죽어야 하고 또 그것이 사랑의 정신이 파괴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것임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율법을 부과했던 처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녀는 매우 진지했고 또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도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돌이켜 자신 위에 부과했던 한 새로운 율법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방금 전에 인용했던 그 사도의 말씀, 곧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폐하라는 말씀은 바울이 언급했던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보여 주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현재에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어떤 일들의 견지에서 해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새로운 율법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부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후에 이에 대한 계속적인 설명을 시도할 텐데 세밀한 것은 그때에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것을 원리적으로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종의 영'은 언제나 그것을 수반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두려움의 영이 나타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종의 영을 주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여기에서는 "너희가 또다시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적 침체와 치유'(로이드존스) 제12장 종의 영(211~218p)에서 발췌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름

로이드 존스

 

(마 16: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여러분은 자아(自我)가 여러분의 삶을 어느 정도 지배하는지 그 "범위"를 알고자 시도해 본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의 일상의 일, 여러분이 행하는 것과 필히 접하게 되는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들을 살펴보십시오. 잠시 동안 이러한 모든 것 안에 침투해 들어온 자아의 범위를 숙고해 보십시오. 심지어 복음 선포에 까지 자기 이익과 이기적 관심이 영향을 끼친 것을 볼 때 놀랍고 두렵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끔찍한 발견입니다. 우리는 일이 잘되어 가는지에 관심을 갖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까? 우리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과 우연히 사람들을 만날 때 주는 인상 등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무엇입니까?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행동과 행위 뿐 아니라 복장, 외모, 모든 것에서 여러분의 삶 전체를 분석해 본다면, 자아에 대한 이 불건전한 태도가 차지한 범위를 발견하고 몹시 놀랄 것입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갑시다. 과연 우리는 삶 가운데서 단 한 가지, 자아로 말미암는 비참과 불행과 실패와 괴로움의 범위를 깨달은 적이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지난 주(週)로 돌이켜서, 불행과 긴장과 성급함과 언짢음, 말하고 행동한 것들 가운데 지금 진정으로 부끄러워하는 것들, 여러분을 혼란케 하고 균형을 잃게 한 순간들을 마음으로 상고하며 회상해 보십시오. 하나씩 하나씩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 모든 것이 거의 이 자아의 문제, 이 자아의 민감성, 이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귀착되는 것을 발견하고 놀랄 것입니다. 이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자아는 삶 가운데 있는 모든 불행의 주된 원인입니다. 여러분은 "아, 그것은 나의 허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저지른 일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좋습니다. 여러분 자신과 다른 사람을 분석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도 자아 때문에 그렇게 행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여러분도 동일한 이유로 그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음 구절에서 가르치시는 바와 같이, 만일 여러분만이 다른 사람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갖고 있다면,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비난을 받아야만 할 사람은 여러분 자신인 것입니다. 자아를 정직하게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실제적인 수준에서 매우 바람직합니다. 대부분의 불행과 슬픔, 삶과 체험에서의 대부분의 고통들은 그들의 궁극적인 근원이자 출처인 이 자아에서 비롯됩니다.

 

이제 보다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서 자아를 교리적으로 바라봅시다. 자아를 교리적인 방법과 신학적 방법으로 바라보는 것이 매우 바람직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타락의 원인은 자아였습니다. 자아가 없었더라면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귀는 매우 교활해서 죄의 권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아의 관점에서 죄의 권능을 발휘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은 너에게 공평하지 않아. 너는 당연한 원한과 불평을 갖고 있는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이 말에 동의했습니다. 이것이 타락의 전(全) 원인이었습니다. 타락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세계 각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국제 회의가 열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본질은 바로 자아이며, 자기 과시입니다. 이것이 교리적으로 본 자아입니다. 자아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도전을 의미합니다. 자아는 내가 항상 하나님 대신에 자신을 왕좌에 앉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자아는 항상 나를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삶 가운데 모든 불행한 순간들은 궁극적으로 이 분리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과 및 주 예수 그리스도와 참된 교제를 가지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가 지하 감옥에 있든지, 발이 차꼬에 매여 있든지, 또는 화형을 당하고 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다면,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합니다. 이것이 수세기에 걸친 성도들의 체험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어떤 비참이나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과의 분리이며, 하나님과의 분리의 유일한 원인은 자아입니다. 우리가 불행할 때는 언제나 우리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대신 자신을 보고 자신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 때를 의미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의도되었습니다. 사람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의도되었습니다. 사람의 온 존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의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아를 영화롭게 하거나 자아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어떠한 욕망도 필연코 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영예와 영광을 구하는 대신에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정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바로는, 거룩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자아 중심의 생활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거룩을 반드시 행동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자아에 대한 태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거룩은 본질적으로 내가 어떤 일들은 행하고 어떤 일들은 시도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죄로 여겨지는 것들은 일절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아의 교만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자아의 관점에서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하며, 거룩의 본질은 우리의 삶과 체험에서 수많은 파멸을 일으켜 온 이 자아에 대하여 죠지 뮬러와 같이 우리가 죽었으되 완전히 죽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임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수준으로 자아의 문제를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보기로 합시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세상에 오셨습니까? 그분은 궁극적으로 인류를 자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자아를 돌아보지 않는 이러한 삶을 그분 안에서 완전하게 봅니다. 주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베들레헴의 말구유로 오셨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왜 오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오직 한 가지 답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중히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빌립보 2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의 본질입니다. 주님은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원부터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중히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신분과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실 권리를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아를 부인하지 않으셨다면, 결코 성육신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사신 그분의 자아를 부인한 삶을 바라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자주 자기가 한 말은 자기 스스로 한 말이 아니며, 자기가 행한 일은 "내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해하는 십자가의 자기 비하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시고, 자신을 전혀 중히 여기지 않으셨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 하나님, 보시옵소서,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오나이다." 주님은 모든 일에서, 곧 그분이 하신 모든 말씀과 그분이 행하신 모든 것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같이 친히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주님은 조금도 자기를 위하여, 자기 스스로 사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우리에게 그 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마음이니".

 

우리는 당연히 이러한 삶의 극치를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보게 됩니다 그분은 순결하고 결백하며, 결코 죄를 범하시거나 누구에게 해를 입히신 적이 없었지만, 오히려 "욕을 받으시되 되받아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자신을 맡기셨습니다"(벧전2:23).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최고의 예입니다. 신약성경이 주장하는 바는, 만일 우리가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음을 믿는다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최대의 갈망이 자아에 대하여 죽어야 하는 것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의 최종 목적은 단지 우리가 용서를 받거나 지옥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새 백성, 새 인류, 새 창조를 이루고, 그분을 닮은 백성들로 구성된 새 왕국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많은 형제 중에서 처음 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본(本)이십니다. 바울은 에베소인들에게 보낸 서신서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으며,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피조된 그분의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여러분과 제가 구원을 받고 자아의 삶에서 분리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후서 5장에서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며,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을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그 이유에 대하여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이제 후로는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신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삶입니다. 이 삶은 자아 방어나 자아 민감성의 삶이 아니라, 모욕을 당하더라도 복수하지 아니하고,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쪽도 돌려대며, 또 누가 너를 법에 고소하여 네 덧옷을 뺏으려 하면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하여금 억지로 일 마일을 가게 하거든 그와 이 마일을 동행하고,"어떤 사람이 와서 나의 것을 요구하더라도 "이것은 내 것이요"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이 사람이 어렵다면, 내가 도울 수 있으며, 기꺼이 돕겠노라"라고 말하는 삶입니다. 나는 이미 자아를 처리했고, 자아에 대하여 죽었으며, 이제 나의 유일한 관심사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영예입니다.

 

이것이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신 삶이며, 그분께서 죽으심으로 여러분과 저로 하여금 살도록 하신 삶입니다. 감사하옵게도 복음서는 계속해서 그분께서 다시 사셨으며 성령님의 새롭게 하며 강건케 하는 권능과 함께 성령님을 교회에게 그리고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셨다고 증거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힘으로 이러한 삶을 살려고 애쓴다면 반드시 실패할 것입니다. 우리는 시작도 하기 전에 반드시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보내주실 것이며,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복된 약속과 선물이 있기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삶이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죠지 뮬러가 죠지 뮬러에 대하여 죽을 수 있었다면, 어째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심히 악하고, 엄청난 비참과 불행에 이르게 하며, 최종적으로는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아들의 복된 사역을 부인하게 하는 자아에 대해 죽을 수 없단 말입니까.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
글쓴이 : Jennifer| 원글보기

[하나님에 대해서 놀랍고 기이한 경험을 했어도...]


베토벤 교향곡을 듣다가 하나님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경험을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는 황홀한 음악을 듣는 동안 이 같은 경험을 했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썼습니다. 자, 그가 그 경험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것은 단순한 망상에 불과합니다. 그의 말처럼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로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지 않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이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 갑시다. 사이비 경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교향곡을 듣다가 어떤 경험을 했다는 말은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정말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막힌 일몰 장면을 보거나 훌륭한 시를 읽을 때 영혼이 이상하게 고양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기이하고 놀라운 경험을 했다는 글들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근심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 가만히 앉아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떤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경건치 못한 삶을 살았던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이 예전에 어떻게 명성과 돈을 위해 살았고 가족과 그 밖의 것들을 위해 살았는지 책으로 엮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삶 전체가 잘 못 되었음을 깨달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했다고 썼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지금은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지 알리려는 마음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책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 설교중에서...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 로이드존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한일서4:13)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1. 여러분의 관심을 어디다 두고 사십니까?

자기 영혼의 생명에 관심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까? 영원에 대해 흥미를 가집니까? 이것들이 여러분을 흥미롭게 합니까? 확신하건대, 만일 그렇다면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땅의 일을 생각”(빌립보 3:19)하기 때문입니다. 땅의 일이란 육욕적이고 육신적인 일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신문에 나는 살인 사건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왕실가족이나 소위 상류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과 화려한 허식 그리고 인생의 각종 구경거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동일합니다. 결국 그것은 동일한 관심사입니다.

여러분의 관심이 거기서 그칩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관심은 영적입니까? 여러분은 영혼불멸과 보이지 않고 영원한 것들에 관심을 가집니까? 만일 여러분이 이것들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2. 두 번째는 죄의식입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이 자신 속에 악한 생각이 있음을 자각한다는 뜻입니다. 단지 여러분이 하지 말아야 하며 그것으로 인해 괴로움을 느끼는 특정한 일들을 행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고, 여러분의 마음속에 죄와 악한 생각이 있으며 또한 무가치하고 추하고 더러운 것을 발하게 하는 근원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여러분이 스스로를 혐오스러워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르시기를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로마서 7:18-24)라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에 관해 그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내가 제시한 방법에 근거하여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성령 하나님께서 그 안에 들어오시기 전까지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자신을 죄인이라고 느끼고 또 만일 여러분 안에 존재하면서 여러분을 무너뜨리는 그것을 미워한다면, 이는 여러분이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3.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르기를, 그분이 오셨을 때 이 세상의 관원들이 그분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그들이 성령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받았으므로 믿습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추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2:7-8,10)


이 세상의 관원들, 세상의 위인들, 힘 있고 지혜로우며 귀족에 속하는 자들마저도 나사렛 예수를 보고서 한 사람, 목수, 그리고 기술자로만 알았을 뿐입니다. 그들은 그를 일종의 특출한 종교적 천재로 간주하였을 수도 있지만, 그가 영광의 주이심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은 이르기를 그들이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린도전서 2:13)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요한일서 4:1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믿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뿐이시며,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우리가 믿을 수 없습니다.

지성과 이해력과 큰 지혜와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곧 건전하고 균형 잡힌 사고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들에게 제시된 메시지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들었지만 그 속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장 비천하고 무지하며 교육을 받지 못한 문맹인들이 그것을 듣고서 그 안에서 기뻐함과 아울러 그것으로 인해 변화받아 하나님의 교회의 성도들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설명하기를, 성령께서 이들로 하여금 보고 또 믿게 하셨다고 합니다.


4. 여러분은 자기 안에서 육신과 성령간의 투쟁과 싸움이 진행됨을 자각합니까?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그 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갈라디아서 5:17)


그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안에 대조적인 두 가지 성품이 있음을 자각합니까? 그것은 단지 여러분이 때때로 나쁜 일을 저지르기 원하며 그래서 마음속으로 갈등을 겪어야 한다는 의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보다 더 깊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두 사람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자각합니까? 여러분 안에는 거룩하고 영적인 것들을 원하는 새로운 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무너뜨리려는 또 다른 사람이 있으며, 이 두 세력 간에 다툼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는 지를 시험하는 최선의 시금석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처럼 대조적인 세력들과 싸우고 있다면 여러분은 성령께서 자기 안에 계심을 분명히 확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계시지 않다면 그러한 다툼도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는 ‘옛 사람’만 존재할 뿐입니다. 하지만 만일 여러분이 새 사람과 옛 사람간의 투쟁에 직면해 있다면, 성령께서 사실상 여러분 안에 계신 것입니다.


5.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역사하고 계심을 자각합니까?

바울은 이르기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립보 2:12-13)라고 합니다. 이는 크고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일들을 행하려고 결심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주지하다시피, 도덕가들과 종교적 의무를 복종하는 자들은 그 모든 일을 행하며, 그 때문에 스스로 큰 자부심을 갖습니다. 그들은 주일 아침에 침대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일어나 교회로 갑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마음이 움직여서가 아니라 다만 그렇게 하고자 결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든 시간을 조절하며, 그런 후에는 자신의 근사하고 고상한 이상들을 내세우고 의기양양해 합니다. 얼마나 근사해 보입니까!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 2:13)


달리 말해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 안에서 일어나 여러분을 감동시키며 인도하고 있음을 자각하며, 자기 자신에 대해 감탄하고 놀라워합니다. 자만하는 것과는 달리, 여러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것은 내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시며 내 안에 계신 성령이시다. 나는 나의 한계 너머로 이끌어 올려졌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자각합니까?

여러분은 자신 안에서 활동하며 감동시키고, 변화를 일으키며, 인도하고 설득하며, 또한 고무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자각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그분 자신의 영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 거하시며, 여러분 안에서 그런 식으로 그분 자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고 계십니다.


6. 성령은 생명이시며, 생명은 항상 어떤 형태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살아 있는 나무는 열매를 맺지만, 죽은 나무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라디아서 5:22-23)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는지를 시험하는 방법은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삶을 점검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러한 열매가 나타나는지 혹은 그런 증거가 있는지를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으면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실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 이런 것들이 있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이것들이 입증됩니까? 만일 그러하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는 점점 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세 개씩 짝을 이룬 9개의 열매들은- 여러분이 성경 어디에서나 발견하게 될 그분에 관한 가장 완벽한 묘사라 하겠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입니다. 사랑은 그분의 삶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희락은 모든 상황에도 아량곳하지 않는 거룩한 기쁨입니다. 화평은 그분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자비, 양선, 온유...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사 이러한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써, 우리는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7. 우리는 성령을 받았으며, “양자의 양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습니다”(로마서 8:15)

하나님은 더 이상 영원 가운데 멀리 계시는 어떤 막연한 주권자가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분께로 갈 때 우리는 우리 아버지 곧 탕자의 아버지께로 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또한 우리는 두려움 없이 그분께로 갑니다. 이 점을 가리켜 요한은 본장 마지막 부분에서 “사랑은 두려움이 없고”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그분께로 나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바 아버지’를 봅니까? 여러분 자신이 그분의 자녀임을 알고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서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내가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밖에 없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1:·13)


만일 여러분이 이 은사를 갖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이 값 없는 선물을 얻기를 바란다면, 지체 없이 하나님께로 나아가십시오. 자신의 파탄 상태를 인정하며 자신의 공허함을 자백하고서, 은총을 내려달라고 그분께 간구하며 그분 자신의 역속에 호소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그것을 받을 때까지 계속 간구하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들은 너무도 확실하며, 우리는 그분의 은혜롭고 복된 말씀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7)


그분께 간구하십시오. 만일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여러분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풍성함을 얻을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태복음 5:6)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 D. M. 로이드존스, ‘요한일서 강해’중에서.

 

 

 

출처: 개혁주의마을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사도행전 2장 42절에 대한 설교에서 로이드 존스는 강조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간다. 이것들은 기도에 대하여 성경에서 언급된 표현들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감”, “하나님께 나아감”, “그의 존전에 들어감”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는 이유이며,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갈망하는 바로 그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1750~1850년 어간의 웨일즈 장로교 설교자들이 한 기도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그들은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또한 그의 회중들에게 기도할 것을 격려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도하지 않는 칼빈주의자는 진정한 칼빈주의자가 아니다!

 

그 이유는?

 

1) 하나님 한 분만이 죄인에게 새 삶을 주시며, 하나님만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2) 오직 하나님만이 말씀을 축복하사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누어 주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절대 군림하시지만 말씀, 설교, 기도, 경건과 같은 수단을 사용하시어 그의 목적을 성취하시기도 하시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가 제시한 실례들

 

① 웨일스 부흥(1736-1790)에서 다니엘 롤란드(Daniel Rowlands) : 설교하기 이전에 많은 시간을 기도하였다.
② 존 엘리아스(John Elias)는 그 자신의 설교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몇 날이던지 몇 주이던지 계속 기도하였다.
③ 존 웰쉬(John Welsh)는 스코틀란드 종교개혁자인 존 낙스의 사위로서 기도하면서 여러 날 밤을 지샜던 것으로 유명했다.

 

로이드 존스 그 자신도 또한 기도의 사람이었으며, 이 사실을 그의 부인이 증명하고 있다.

 

개혁주의마을/아나니아 

 

마틴 로이드 존스-산상수훈(기도하는 태도(마 6:5-8))

 

서론 : 본문은 경건 혹은 신앙생활의 윤리에 대한 두번째 가르침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빠지기 쉬운 잘못은 본문이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점이다.

 

그러나 본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죄의 교묘한 점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한다.

죄란 우리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심지어 하나님 나라에까지 들어오려고 한다.

죄의 출발점을 생각해보라.

 

그것은 시궁창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에서 출발하였다.

죄는 단순한 어떤 행동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안에 자리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죄의 극치는 술자리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의 자리, 경건의 자리에서 더 드러난다.

 

사단의 모습은 바로 예수님이 40일 금식기도하는 순간에 드러내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고, 기도한다고 마음을 놓을 문제가 아니다.

그런면에서 주님은 우리의 기도하는 태도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1. 잘못된 기도의 문제점

 

1.1 잘못된 기도는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눅18:9-14,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 그는 자신이 지금 기도하고 있다는 그것에 강조를 한다.

 

 

1.2 두 번째 잘못은 자신의 기도를 다른 사람이 봐주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금식기도를 많이 하는지, 철야기도를 하는지를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바리새인의 문제점은 성전에서 기도하고자 나왔는데 너무나 마음에 기도하고픈 마음이 있어서 기다릴 수 없어 길 어귀에서 먼저 하나님을 부르짖고 나아가 성전에서 기도하였다.

 

 

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열심있고 헌신된 신자인지를 보이려고 한다. 우리들도 그러한 문제가 없는가? 골방에서 얼마나 오래 기도하였는지 - 기도굴에서 얼마나 오래 버티고 나오지 않는지를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 한 적은 없는가? 기도시간을 정해 놓고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한 적은 없는가? 좋은 것이지만 그 가운데 우리가 혹여나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적이 없느냐 하는 말이다.

 

 

1.3 기도는 아름다워야 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기도를 미사여구, 훌륭한 문장으로 하려고 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한다면 굳이 말을 꾸미려고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2. 참된 기도의 방법

 

2.1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남을 의식하는 것이다.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말은 바로 그 말이다. 동시에 자기를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했다고 정말 골방만 찾는 사람이 있다. 아니다. 꼭 골방이 아니라 할지라도 당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 그 순간 그곳이 어디든 골방이 될 것이다. 설령 공중기도를 드리는 중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2.2 어디서 기도하든지 기도의 중요한 것은 지금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시편기자는 일심으로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시86:11-12). 이것이 기도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다.

2.3 우리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아들로서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기도는 정기적으로 반복하여 말하므로 듣는다고 생각하지 마라. 기도는 아들과 같은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더욱 더 중요하다.

 

 

 개혁주의마을/아나니아

1. 질병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 증상이고, 그 증상은 가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증상을 잘 추적해서 그 증상을 일으킨 질병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곧 그 질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우리들 교회에 좋지 않은 어떤 증상들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것들을 잘 관찰하여 해결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단점과 아픔을 숨기고 조용하게 넘어가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는 아니다.



2. 교회는 단지 사람들의 행복과 평등한 삶, 환경의 개선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사람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이끄는 것이고 사람을 하나님께 화해시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교회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전해야 하며, 죽어 가는 영혼들을 향해 그 복음을 외쳐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들의 삶이 바뀌도록 하는데 힘써야 한다.



3.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고, 인간의 본질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의 상황은 아무 것도 새로워진 것이 없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치명적인 속임수의 하나는 우리가 20세기의 끝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문제를 가지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컴퓨터와 위성의 시대, 최첨단의 통신시설과 교통, 의.식.주 생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악하고,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살려고 하는데,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

 

로이드존스

 

 

징계를 받을 때

  

 

(히 12:5-11)

 

서론 : 영적침체의 원인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성결의 과정에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함에 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함이다(살전 4:3; 엡 1:4).

 

 

1. 하나님의 목적과 방법


1.1 구원은 전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며, 하나님은 그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 자신의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

 

1.2 하나님께서 이것을 행하시는 데 몇 가지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 그 하나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위대한 교리와 원리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는 것이다.

 

1.3 만일 순종치 않거나 말씀의 교훈을 배우려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다른 방법 - 징계의 방법을 사용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시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시이기도 하다(약 1:2; 계 3:19).

 

 

2. 징계의 의미, 방법


2.1
징계의 의미 : 징계는 연단을 의미하며, 교정, 교훈, 견책을 내포한다. 징계의 본질적인 목적은 성인이 되게 하기 위하여 어린 아이를 연단시키는 것이다.

 

2.2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과 환경을 통해서 징계하신다. 그것이 즐겁든 즐겁지 않든 모두 우리의 성화를 위한 것이다.

 

2.3 징계의 방법 : 물질의 형편, 건강의 문제(고후 12:7-9), 핍박, 우리에게서 자신을 숨기심(호 5:15) 등이 있다.

 

 

3. 징계의 이유


3.1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히 12:5-15).

 

3.2 그리스도인이 징계를 참는 것은 우리의 성장이요, 연단이요, 발전이요, 성화이다.

 

3.3 슬프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자마자 완전한 완성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불완전한 것이 남아 있으며, 옛 사람 그대로이다.

 

3.4 영적인 자신감, 즉 영적 교만 때문이다(고후 12:7-9)

 

3.5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은사를 주셨다. 그 재능만을 믿고 하나님은 필요 없다는 의식을 가지는 자만심 때문이다.

 

3.6 세상과 그 세상의 여러 모습들과 그 풍조에 매혹당하는 위험이 있다.

 

3.7 우리가 자신의 귀를 의뢰하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미 도달된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고 뽐내는 위험이다. 해가 바뀌면 우리의 신앙도 성장해야 할터인데 실제로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세상보다는 천국에 마음을 두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더 잘 아는가?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시 119:71)

 

3.8 우리가 만일 항상 예수님에게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주님과 동행하기를 힘썼다면, 모든 일이 잘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3.9 만일 늘 성공한다면 낮아지게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하나님은 우리를 낮아져서 겸손하기를 원하신다.

 

3.10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내의 필요성을 상기시켜주기 위하여 때때로 우리를 연단시키지 않을 수 없다.

 

믿음의 진정한 척도 / 로이드 존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7,18)

 

이 본문은 성경의 위대한 진리, 특히 바울 사도의 서신 곳곳에서 발견되는 금덩어리 같은 진리 가운데 하나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웅장하고 감동적인 말씀이다. 나는 오늘날의 교회와 세상이 바울 사도와 같이 이처럼 위대한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을 고대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 말씀의 빛에 우리 자신을 비춰 보면 매우 유익할 것이다. 이 본문에 나타난 모습이 오늘날 세상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현재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래, 곧 불길한 전망으로 가득한 미래를 직시하려면 그런 태도를 취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 두 구절이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의 진정성을 가리는 일종의 질산 테스트와 같다고 생각한다. 질산 태스트는 가장 민감하고도 정교한 테스트이다. 정통성을 지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단순히 지성적인 동의에 그치는 정통성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므로 정통성은 질산 테스트라고 일컬을 만큼 진정한 척도는 아니다. 또한 도덕성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도덕성은 진정한 척도가 될 수 없다. 또한 경험, 거듭나는 경험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경험은 질산 테스트라고 불릴 만큼 정교하고도 민감한 척도가 될 수 없다.

 

진정한 척도는 이 구절의 말씀에 나와 있다. 본문은 그 세 가지 척도, 정통성, 도덕성, 경험을 보증한다. 본문에 따르면, 우리의 신앙고백을 판별하는 척도는 삶에 대한 반응이다. 곧 우리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전인적인 반응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을 판별하는 진정한 척도는 공습을 피해 방공호에 숨어 주변에서 터지는 폭탄 소리를 들으면서, 다음번 폭탄이 내 머리 위에 떨어져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르는 때에 어떻게 반응하는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척도란 궁극적인 것, 곧 마지막 순간에 어떤 생각을 하는가?’하는 것이다.

 

전쟁터에 나간 젊은이의 관점에 빗대어 말하면, “삶과 죽음을 비롯한 모든 궁극적인 질문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그런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허리케인이나 토네이도를 비롯한 자연재해나 심각한 유행성 질환이나 질병이 발생해 시간과 영원, 삶과 죽음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에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물음이 바로 우리의 신앙고백을 판별하는 기준이다.

 

그런 순간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이 바로 궁극적인 척도이다.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수많은 시련과 문제와 어려움에 맞닥뜨렸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말한다. 삶이 가장 암울하고 모질게 보이는 최악의 상황 앞에서 과연 우리도 그렇게 반응할 수 있을까?

 

나는 이것이 진정한 척도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믿음의 정통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자신의 믿음을 굳게 확신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척도는 행위와 도덕성을 보증한다. 왜냐하면 지성으로만 믿는 것은 위기 앞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척도는 경험적인 요소, 곧 삶과 그 능력과 활력을 보증한다. 진리를 실제로 삶에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바울처럼 반응할 수가 없다.

 

바울은 어떻게 그 모든 일을 능히 견뎌 낼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이 당한 시련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 박해를 받아도 ?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고후4:8-11).

 

복음이 영광스러운 것은, 그것이 타고난 기질이나 성격과 상관없이 모든 종류의 사람을 그렇게 고백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복음의 영광은 우리의 타고난 성격에 의존하지 않는다. 심리학으로는 이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은 용기와 담력의 철학을 견지했다. 매우 유능하고 지성적인 그들은 인생과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또한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며 당당하게 홀로서기를 원한다면, 어깨를 당차게 펴고, 입술을 굳게 다물고, 주먹을 불끈 쥐고, 자제력을 키우고, 엄격히 훈련하여 의지를 철석 같이 다지고, 절대 굴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스토아주의는 기독교와 정반대이고 아무 상관이 없다. 스토아철학은 체념의 철학으로서, 기독교와는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스토아주의는 상황을 견디고 담담히 받아들이며 단지 버티고 서서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철학이라는 점에서 매우 소극적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기독교의 본질은 매우 적극적이다 기독교인들은 단순히 상황을 견디거나 담담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은 크게 기뻐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넉넉히 이기는자들이다(8:37).

 

바울은 어떻게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위대한 사도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고백하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알지 못하지만, 그들은 모두 바울과 같은 기독교인이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기독교인이 인생을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주 예수를 믿기 때문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바울도 이전에는 믿음으로 대처하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변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변했다. 그는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바라보았다.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모든 사람과 모든 상황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는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게 되었으며, 자신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고, 그 무엇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신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에 관한 복음을 믿었다. 오직 이것만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삶 전체를 바라보게 된 이유이다.

 

우리는 인생의 사소한 문제들에 집착하느라 삶을 전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삶을 깊이 바라보고, 또한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열어 준다. 나는 때때로 기독교 신앙을 마치 사람들을 비행기에 태우거나 높은 산 위로 데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광경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주는 모습으로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기독교인은 삶 전체를 완전하고 온전하게 볼 수 있는 눈을 지니고 있다.

 

세상은 우리와 지나치게 가까이 있다이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세상은 우리를 짓누르고 버겁게 하여 그 안에 파묻혀 길을 잃게 만든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우리를 그런 세상에서 끌어올려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한다. 바울은 이 점을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먼저, 그는 우리가 잠시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기독교인 됨으로써 시간을 올바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받는 가장 위대한 선물 가운데 하나이다. 바울은 잠시라고 말하고 나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라고 덧붙인다. 바울은 시간을 영원이라는 방대한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무한한 시간, 백만 년이 거듭되는 장구한 세월을 떠올려 보라. 그것이 영원이다. 시간을 그런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라. 그렇게 하면 시간이 어떻게 보일까? 찰나처럼 보일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이나 삶의 관점에서 시간을 바라보면, 마치 그것이 제멋대로 구는 독재자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비추어 보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4:14). 지금, 오늘이라는 이 순간은 내일이 되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기독교는 시간의 문제를 해결한다. 기독교인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아있다(2:6). 기독교인은 시간의 독재에서 벗어나 영원에 속해 있다.

 

다음으로, 기독교인은 환난이라는 현실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본다. 바울은 환난의 경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겪은 혹독한 시련을 언급하고 나서 그는 그것을 환난의 경한 것이라고 일컫는다. 그의 고난은 그를 완전히 짓뭉게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몹시 무겁고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었다. 그는 시련 자체가 가볍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절대로 아니다. 그는 그것을 다른 것과 비교하여 그것이 가볍다고 말한다. ‘지극히 크고 영원한 중한 것에 비할 때 그것은 지극히 가볍고 잠시의 것이었다.

 

기독교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기독교인이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이다. 기독교인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사람이다. 기독교인이란, 영원을 목격한 사람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여기에 그의 비밀이 있다. 그는 믿음으로 영광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른 모든 것이 지극히 사소하고 가볍게 여겨졌다. 세상이 주는 모든 것들이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졌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허리케인이 불어 닥치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또한 죽으면 모든 것이 단번에 끝난다. 따라서 바울은 그런 것을 위해 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다.’ 우리의 가정, 자동차, 재산 등 모든 것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그런데 그런 것과는 다른 것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고전2:9) 라고 말한다. 또한 베드로는 이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4)라고 표현한다. 인생의 허리케인이 연이어 몰아닥친다 하더라도, 하늘에 간직된 것에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폭탄을 한데 모아 동시에 터뜨린다 하더라도, 우리의 유업은 영원히 견고하게 지속될 것이다.

 

여기에 비밀이 있다. 일단 이 영광을 보고 나면, 그 무엇으로도 낙심하거나 놀라거나 실망하지 않게 된다. 바울은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이 우리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런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한다. 세상의 환난은 우리로 하여금 이 영광을 바라보고, 그것을 새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바울이 말한 대로, 세상의 환난은 우리를 실망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가 본 영광,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더욱 확고히 바라보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세상에 살았던 성도들의 비밀이요, 오늘을 사는 우리의 비밀이다.

 

 

하나님께서 이 악한 시대에 그 영광을 바라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영광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세우시기를, 그리하여 모든 것이 절망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일 때도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함이니”(고후4:17)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로이드 존스, 영광을 바라보라, 1, pp 10-43

 

 

출처: 청교도의 길

 

가져온 곳: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영원하신 하나님의 작정(로이드존스 교리강좌 요약)

 

 

영원하신 하나님의 작정

The Eternal Decrees of God

 

1. 작정교리를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

 

하나님은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시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일들을 생각하시고, 결심하셨으며, 결정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 혹은 방법에 대한 성경의 묘사를 흔히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The Eternal Decrees of God)의 교리라고 부릅니다.

 

1)성경이 작정의 교리를 말하고 있다.

작정의 교리는 삼위일체의 교리처럼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이해를 넘어섭니다. 하지만 삼위일체교리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단지 그것이 어렵다는 이유로 피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교리는 참으로 어려운데, 영원하신 분의 마음, 즉 우리의 유한한 이해력을 초월하고, 우리의 보잘것없고 왜소한 지성이 파악할 수 없는 범위를 넘어서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어려운 교리를 우리가 살피는 이유는 성경에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며, 성경에 계시된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고찰하고 연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9)

2) 작정의 교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 교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더 위대하고 더 웅대한 개념을 갖게 해 줄 것이며, 그 결과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자극할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 전도에 있어 진정한 난점은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충분히 다루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한하신 하나님을 더욱 많이 알수록, 우리는 그분은 더 많이 예배할 것입니다.

3) 작정의 교리는 우리를 많은 오류로터 구해준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충분하게 깨닫는다면 지금까지의 많은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4) 작정의 교리는 커다란 위로를 준다.

유한한 세상에 잠시 자나가는 미미한 피조물일 뿐인 나의 배후에 하나님 자신의 영원하신 작정이라고 하는 교리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2. 작정의 교리에 접근하는 자세

 

1) 당파심을 버리고 접근해야 한다.

즉 편견들과 모든 종류의 당파심을 제거해야 합니다. ‘당파심(party spirit)'이란 말은 우리 모든 사람은 특정한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으며, 때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리를 발견하는 일보다는 이미 믿어왔다고 생각하는 일을 고수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2) 철학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큰 저주입니다. 철학은 정의상 언제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철학의 목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다르고 있는 문제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주제에 접근할 때에는 그 안에 우리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측면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3)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겸손함과 경외심,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며 언제든지 우리의 한계를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찾고 추구하면서 열린 마음으로 이 교리에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에게 계시된 것을 받아들이려는 자세로 나와야 하며, 한 가지 덧붙인다면 성경의 계시를 넘어서는 질문은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와야 합니다. (성경의 울타리)

믿음은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즉각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경이 계시되어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기꺼이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입니다.

 

3. 작정 교리의 기본 명제들

 

1)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변치 않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성경은창세전에”(1:4을 보십시오.)와 같은 문구를 계속해서 사용합니다. 사도바울이 우리 주님의 나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때가차매”(4:4)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에 대해, 사람들에 대해, 구원에 대해, 이 세상의 모든 삶에 대해, 이 모든 것의 마지막과 궁극적 운명에 대해 명확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 그분이 일어나게 하신 모든 일은 그분 자신의 영원한 계획에 따른 것이며, 그 계획은 고정되어 있고, 확실하고, 변하지 않으며, 절대적입니다.

 

2)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것을 포괄하고 결정한다.

하나님이 특정한 결과를 계획하셨다고 믿는다면, 그 결과로 이끌어 가는 모든 일도 하나님이 계획하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특정한 시점에 창조하시기로 결정하셨음을 믿으며 또한 특정한 시점에 세상의 종말을 가져오기로 결정하셨다고 믿는다면, 다시 말해 종말이 분명히 결정되어 있다면 그 종말로 이끌어 가는 모든 것도 역시 결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발생하는 모든 사건과 일들, 그 종말로 이끌어 가는 모든 것 사이에 일종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의 교리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고 정해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자유롭고 자발적인 행위자들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행동들도 당연히 그 안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1:10-11) 이 말씀은 모든 일에 적용됩니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전체 우주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우연한 사건처럼 보이는 일들을 하나님이 지배하시고, 통제하시고, 결정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성경의 증거가 있습니다. 잠언에는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16:33)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약에는 주님이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10:29)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참새 한 마리의 생명도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었나니”(30). 아주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도 하나님께 통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우리의 자유로운 행위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잠언 21 1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으로 인도하시느니라.” 왕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마치 물을 통제하듯 그를 통제하고 계십니다. 에베소서 2 10절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빌립보서 2 13절에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시나니.”

더 나아가 성경은 우리에게 심지어 악한 행동까지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2:23). 사도행전 4 27-28절에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그 사람들의 끔찍한 죄는 하나님의 뜻에 따러 미리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돈을 벌려고, 그리고 질투심에 가득 차서 비열하고 매우 악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45:8). 즉 그들의 악한 행동들도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영원하신 작정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정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 우리가 이미 인정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즉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도, 그리고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악을 유발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악을 승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한 행위자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허용하시며, 그분 자신의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악을 지배하십니다.

아니면 이렇게 표현해도 좋습니다. 죄를 금하고 벌하는 도덕법을 정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이 또한 죄의 발생을 허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악에 한계를 설정하여 그 악이 벗어나지 못할 정확한 궤도와 이루게 될 결과를 결정하며, 결과적으로 선을 이루도록 지배하십니다. 50 20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 자유롭고 자발적인 행동이었으나 그럼에도 하나님의 위대한 영원하신 목적과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3) 하나님의 모든 작정은 무조건적이고 주권적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어떤 의미에서도 인간의 행동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심지어 하나님이 미리 아시는 바 사람들이 앞으로 취할 행동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그분 자신의 거룩하심 외에는 어떤 것도 좌우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삶에 원인과 결과가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이 교리가 말하는 것은 모든 원인과 결과, 자유로운 행동들은 하나님의 작정들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 11 25-26 :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셨다.

- 9 11 :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이 바울의 논증은 어느 하나도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에 하나님이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13)”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겨야 한다고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무조적적이며 절대적으로 주권적입니다. 바울의 말을 다시 들어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9:14) 심지어 그렇게 생각하는 일조차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9:15~18)

 

4) 하나님의 작정은 효력있는 작정이다.하나님의 작정은 유효적(efficacious)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인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의 전능하심과 그분의 능하심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들은 결코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결정하시고 뜻하시는 것은 틀림없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그것을 꺾을 수 없습니다.

 

5)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본성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작정은 그분 자신의 최고로 지혜롭고, 자비하시고, 거룩하신 본성과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안에는 모순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확실하게 말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결코 죄의 원인이 아니십니다. 하박국 1 13절에는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고보는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1:13)고 말합니다.

둘째,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의 피조물의 본성 및 행동 양식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비록 우리가 조화시킬 수는 없지만, 궁극적인 조화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유를 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그 모든 것을 지배하십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9:20-23)

 

6) 하나님은 창세전에 구원을 작정하셨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그분의 선하신 뜻과 은혜로 말미암아 이 일을 하십니다.(11:25-26), 요한복음 6 37에도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44절에서 우리 주님은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13 38절에는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 13절에는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디모데 후서 1 9절에서는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7)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

이 모든 교리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이것은 왜 그런가? 저것은 왜 그런가? 왜 하나님은 바로를 일으키셨는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택하신 이유가 무엇인가?”는 질문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라는 로마서를 기억합시다. 하나님과 맞붙어 싸우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작은지, 우리가 얼마나 유한한지, 타락의 결과로 얼마나 죄악 된 존재가 되었는지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 가운데 들어가기까지는 궁극적인 이해를 보류해 두어야 합니다. 지금 이 곳, 시간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은 언제나 스스로에게 일관성이 있으심을 믿고, 하나님이 그의 영원하신 작정과 창세전에 결정하신 일들에 대해 명백하게 말씀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결정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그렇게 결정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 결정하신 일들은 확실하고, 안전하고,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것도 그 누구도 당신을 그분의 손에서 빼앗거나, 당신에 대한 그분의 목적을 그만 두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창세전에 정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그분은 나를 아셨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아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여러분이나, 다른 누구도 존재하기 이전에 우리의 이름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위엄 앞에 굽혀 경배합시다. 그분의 거룩하신 임재 안에서 겸손하도록 합시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 그 계시에 우리를 복종시킵시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생명나무| 원글보기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로마 카톨릭 사상 평가

(로마 카톨릭과 기독교복음과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밝혀주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설교)

 

    글/김철호


 

    들어가는 말

   I. 로마카톨릭체제
   II. 로마카톨릭의 중대한 오류들
   III. 결론


 



 

 

우리는 왜 로마 카톨릭을 말해야 합니까? 그것은 성경이 그녀에 대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칫 종교적 편견이나 개신교의 시기심에서 나온 비평으로 오해받기 쉽지만, 그렇다고 침묵을 지키는 것은 경고의 나팔을 불지 않는 파수꾼과도 같이 무책임하고도 비겁한 행위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카톨릭 체제와 사상을 반대하지만, 카톨릭교도들, 즉 천주교인들을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기에,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자 하며, 진리의 말씀의 은혜와 약속에 함께 참여하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권면하고 호소하며 경고해 주고자 할 따름입니다.

이 일을 위해 마틴 로이드 존스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사료되는데, 그는 일반 크리스천들 사이에 매우 객관적이고도 신중한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에 대한 그의 접근은 언제나 신중했고, 소극적 비판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태도로 일관해 왔습니다. 본문 중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로마 카톨릭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기독교의 진리와 위대한 개혁 교리를 적극적으로 선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외에 이 문제를 능히 다룰 수 있는 것은 전무후무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있어 소극적 프로테스탄트는 별 의미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나아가 로이드 존스는 로마 카톨릭주의의 확산이 자기의 믿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무지와 무기력함에 전적으로 기인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이 같은 태도는 그의 설교 중에서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로마 카톨릭주의에 대해 다뤄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서도 역력히 드러납니다. 본고는 바로 그 단 한 번의 예외에 해당됩니다. 그것도 '마귀의 속임수'를 다루는 성경본문 말씀으로 인해 부득불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그의 해명(?)입니다. 이렇듯 본문이 다루는 로마 카톨릭 사상 평가는 로이드 존스가 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그리고 최소한의 비평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격해 보인다면, 그것은 로이드 존스의 접근이 과격해서가 아니라, 로마 카톨릭의 가려진 실체와 실상이 그만큼 치명적이라는 반증일 것입니다.

비록 작은 분량이긴 하지만, 모든 개신교도들뿐 아니라 카톨릭 교도들이 꼭 한 번은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이 객관적으로 제시한 로마 카톨릭 사상평가, 그것은 종교적 편견과 비평을 뛰어넘어서 누구나 한 번쯤 집고 넘어가야 할 바로 우리 모두의 당면과제이며, 이 시대의 영적 분별을 위한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들어가는 말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에베소서 6장11절)

작금에 일어나고 있는 모종의 사건들은 모든 크리스천 지성인들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로마 카톨릭주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않으면 안되게 끔 만들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주의(主義)와 프로테스탄티즘 사이에 화해(和解)를 도모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여러 운동들이 일어나고, 숱한 회의들이 개최되는가 하면, 이같은 일을 환영하는 자들은 우리(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상호존중(相互尊重) 하에 협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니며, 크리스천 정신의 경이로운 구현(具現)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바로 이같은 일련의 움직임 때문에, 현 국면(局面)을 바르게 파악해야 할 당위성(當爲性)이 있는 것이며; 앞 날을 내다볼 때 사태의 긴박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반드시 직면하게 될 모종의 개연성(蓋然性) 때문인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현재의 상황이 지속될 경우, 머지않아 카톨릭의 비중이 절대다수(絶對多數)를 차지하게 될 국가들은 전세계적으로 상당수에 달할 것이며; 그럴 경우, 로마 카톨릭은 '다수결 원칙'(多數決 原則)을 따르고 있는 민주주의(民主主義) 국가 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占有)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로 인해 야기될 모종(某種)의 개연성을 예상(豫想)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영국)라고 해서 수년 내에 그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保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현실을 감안해 볼 때, 우리가 이같은 입장을 점검해 보고, 우리가 직면하게 될 엄청난 사실을 예의주시하는 것은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이 일은 싫고 좋고를 떠나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본인은 개인적으로 전에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러한 성격의 어떤 '프로테스탄트 단체'에 소속된 적도 없고, 그같은 주제로 강단에서 설교해 본 적도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로마 카톨릭주의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代案)은 기독교의 진리와 위대한 개혁 교리를 적극적으로 선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외에 이 문제를 능히 다룰 수 있는 것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있어, 소극적인 프로테스탄트는 별 의미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지금껏까지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여러 해 동안 꾸준히 성장세를 유지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최근 들어 로마 카톨릭 교세(敎勢)가 각 나라에서 실질적인 증가추세를 보이는 반면, 소극적인 프로테스트의 온갖 노력들은 무기력해 보입니다.

본인은 로마 카톨릭주의의 이러한 확산이 자기의 믿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무지(無知)함과 무기력(無氣力)함에 전적으로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본인이 시간을 투자해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으로 인해 부득불 본인은 이 문제-곧 주권과 권능,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및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사악함의 활동들인, '마귀의 속임수'에 대해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좋습니다, 우리는 무엇부터 시작하기로 할까요? 여기에서 본인은 개개인에 관해서는 고려치 않음을 분명히 해 두고자 합니다. 물론, 카톨릭 신자이면서 동시에 크리스천인 개개인들도 존재합니다. 즉 여러분이 카톨릭 교인이면서도 크리스천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본인의 전반적인 의도는, 카톨릭 내에서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체제(體制) 때문이 아니라 그 체제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점은; 로마 카톨릭 교회 내에서도 개인(個人)이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개인에 대해서는 고려치 않을 것이며, 또한 정치적 관점에서도 이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측면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본인은 지금껏 그것이 엄청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를 제시해 왔습니다. 우리는 카톨릭 체제에 대한 역사기록을 알고 있고, 정치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카톨릭의 주장들이 정치적인 힘으로 발전된다는 사실도 알며, 따라서 이러한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정치적 측면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부분에 대해 고려하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그것이 기독교 평신도들과 기독교 정치인들의 소관(所關)으로 보입니다. 본인으로서는 오히려 영적인 측면에 관심이 있는데,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우리 앞에 제시하고자 하는 관건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I. 로마카톨릭 체제

자,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까요? 우선 '하나의 체제'란 관점에서 살펴볼 때; 본인으로서는 로마 카톨릭주의로 알려진 이 체제야말로, '마귀의 가장 위대한 걸작품'이라고 단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체제는 크리스천의 믿음과 성경의 가르침에서 심하게 이탈(離脫)된 종교단체이므로, 본인은 주저없이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과 더불어, 이 체제를 '배교집단'(背敎集團)이라 단언하는 바입니다. 이제 이 점에 대해 분명히 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배교를 기독교의 진리로부터 전적으로 이탈한 기독교라고 정의합니다.

혹자는, "글쎄요, 당신은 직접적으로 로마 카톨릭을 지칭하는 겁니까?" 라고 반문하겠지만, 여기에 대해선 무척 신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일에 카톨릭을 배교집단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진실 그 자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 경우엔 진리에 대한 '부인'(否認)의 문제라기 보다는, 차라리 진리에 대한 '첨가'(添加)로 말미암아, 마침내 진리로부터 이탈하게 된 경우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설명하자면 --- 이것(진리에 대한 첨가)이야말로 온갖 교활함이 들어오는 곳이요, 마귀의 속임수가 들어오는 곳이란 말입니다. 어떤 면에서, 무심코 바라보게 되면, 세상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만큼 정통(正統)인 교회가 없다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있습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人格)과 같은 교리적 측면을 고려해 볼 때는, 로마 카톨릭의 정통성에 문제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나사렛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드님이시라고 믿으며; 예수님의 처녀탄생(處女誕生)을 믿으며; 예수님의 성육신(聖肉身)을 믿으며;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믿으며; 십자가 위에서의 그분의 대속(代贖) 사역과 그분의 육체적 부활(復活)을 믿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昇天)하셔서 하늘나라에 앉으신 사실도 믿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인격적 측면에 대해 로마 카톨릭은 절대적으로 정통이며 --- 애석하게도, 로마 카톨릭이 종종, 대부분의 개신교보다 훨씬 더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 카톨릭의 입장을 그토록 소름끼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사역에 대한 측면을 가지고 카톨릭을 보더라도, 카톨릭의 정통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은혜(恩惠)의 원리'에 대해 고려해 보면, 그것이 그들의 중심 교리(敎理)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영감(靈感)과 권위(權威)에 대해서도 그들은 같은 입장을 고수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개신교보다 더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카톨릭을 단지 일반적인 접근방식으로 바라본다면, 카톨릭은 세계에서 가장 정통적 교회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점에서 교활함이 들어오고 어려운 문제들이 야기됩니다.

카톨릭은 이 모든 것에다 '저주받을 더하기'로써, 전적으로 비(非)성경적인 것들과, 사실상 성경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는 것들을, '첨가'(添加)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카톨릭이 가르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결국에 가서는 우리가 거짓말을 믿는 위치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카톨릭의 교리는 일종의 모조품(模造品)이며, 성경에 명시된 대로, 카톨릭은 다름아닌 '매춘부'(賣春婦, 음녀) 그 자체입니다. 과연 이 문제가 지극히 교활한 것이지만, 다행히도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도 '교활함', 즉, 마귀의 속임수에 대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교활함이 어떤 것인지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반드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문서를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모든 사람에게 어떠한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카톨릭 체제는 무척 방대하고, 그녀의 교활함은 실로 커서 거의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와도 같습니다. 무작위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틀림없이 여러분이 여러 번 접한 경우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들어온 바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혼(離婚)을 용납하지 않으며, 카톨릭 교인 중 누가 이혼했을 경우, 그는 교회로부터 제명(除名)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신문 지상에서 돌연 일부 독실(篤實)한 카톨릭 신도들의 이혼 소식을 접하고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라고 반문하게 됩니다. 글쎄요,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결코 진실된 결혼이 아니었다"고! ... 그들은 어떤 것이든지 해명해낼 수 있고, 어려울게 하나 없습니다. 그들의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체계가 그러하며, 고도의 논법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의 대응이 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혹은 달리 얘기해서, 로마 카톨릭이 실상으로 얼마나 많은 얼굴들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이 나라(영국) 안의 카톨릭을 살펴 보십시오. 또 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의 로마 카톨릭을 살펴 보십시오. 여러분이 미합중국에서의 카톨릭을 살펴 본 다음, 남아메리카에 있는 몇몇 라틴 국가들의 카톨릭을 살펴보게 되면, 그들이 동일한 체제라고 믿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및 기타 유사한 국가들의 카톨릭 교회를 살펴 보고, 독일이나 그 주변 국가들의 카톨릭 교회와 대조해 보면,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같은 카톨릭 체제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도, 사실은 같은 카톨릭 체제입니다. 카톨릭은 얼마든지 그 색깔과 모습, 형태를 바꿀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어디서든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카톨릭입니다,

흡사 카멜레온과 같이 ......여러분은 마귀가 자신을 광명(光明)의 천사로 변모(變貌)시킬 수 있는 것이 마귀의 특징(特徵) 중의 하나라고 우리에게 알려 준,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카톨릭 교회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카톨릭의 '위장술'(僞裝術)에는 끝도 없고, 한계도 없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카톨릭이 고도의 지성적인 형태로 나타나서, 카톨릭 교도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권장합니다만;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금하며, 비(非)지성적일 뿐만 아니라, 고의적으로 미신(迷信)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 나라에서는 관용적이고, 기꺼이 들어주며, 토론도 하고 양보도 하며, 매우 친근한 모습을 취합니다만; 그러나 다른 후진 국가에서는 아주 완고하며, 이교(異敎)에 대해 사악하고도 비열한 방법으로 핍박을 가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동일한 로마 카톨릭 교회요, 동일한 카톨릭 체제이며, 동일한 카톨릭 교도들로서 존재합니다.

나는 이러한 증거들을 통해 카톨릭 교회가 마귀의 걸작품(傑作品)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한 거대한 조직과 체제가 있어, 수십세기 동안 간간이 --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바로 이 일을 행하고 있으니 -- 곧 온갖 교활함과 속임수 가운데서, 성경의 표현대로 "온갖 불의의 속임수로써", 마귀의 속임수를 그대로 드러내 왔습니다. 이 모두가 성경에 분명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두 번째 장에서 이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이 내용이 이 예언에 대한 유일한 설명구절은 아니지만; 그 중의 하나라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은 이 체제가 '발흥(發興)한', 말하자면, 권력을 장악하게 된 사실을 확인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이미 이 조직이 활동해 오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그것이 계시록 13장의 두 번째 짐승으로 묘사되어 있고; 계시록 17장의 일곱 언덕 위에 앉아 있는 '거대한 음녀(淫女)'의 그림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있듯이, 바로 로마 카톨릭이 그러하며 언제나 그같이 행해 왔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역사 속에서 그대로 재현되어 왔으니, 이런 식으로 이렇게 성취되어 왔습니다. 여기 은밀히 유입되어 들어와 한 때 기독교 전체를 실질적으로 장악했던 어떤 체제가 있습니다. 바로 로마 카톨릭이 천천히, 교활하게 스며들어와, 자신의 방식으로 변질시켰고, 그 결과 카톨릭의 영향력은 거의 보편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II. 로마카톨릭의 중대한 오류들

로마 카톨릭이 행한 일은 어떤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 적절히 다루자면 여러 달이 걸릴 것입니다. 이 한 설교에서 필자가 규명하고자 하는 관심사의 전부는 본인의 주장이 진실임을 보이기 위한 몇몇 머리글들을 제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본 내용을 세 가지 주요 표제글로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로마 카톨릭이 어떻게 우상숭배와 미신행위를 도입하는 죄를 범해 왔는지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상숭배(偶像崇拜)만큼 신랄하게 정죄받는 행위도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조각한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로마 카톨릭은 형상(形象)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카톨릭은 신도들에게 형상들을 숭배하도록 가르치고 있으며; 그들은 동상들과 조형물들과 초상화들을 숭배합니다. 여러분이 거대한 천주교 성당에 가보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에 가보십시오. 거기에 사도(使徒) 베드로를 기념하는 동상(銅像)이 있는데, 그 동상의 발가락 부분을 보면, 그 부분이 많이 닳아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구요? 로마 카톨릭의 그릇된 가르침에 희생된 수많은 가련한 희생자들이 그 발가락에 입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절하면서, 형상들과, 동상들과 유물들을 숭배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성인의 유물들과, 뼈 조각들과, 사용했던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어떤 특별한 장소에 안치하여, 그것을 숭배하며 그 앞에 절을 합니다. 이 정도는 그들이 행하는 우상숭배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커다란 오류는 카톨릭의 전 체제와 가르침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를 차단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수많은 오류들 중 가장 끔찍한 오류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 카톨릭 교회 자체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끼어 들어오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카톨릭 교회 자체가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합니다. 교회 밖에서는 --- "extra ecclesiam", 결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 "nulla salus". 즉 카톨릭 교회가 절대적인 필수요건이란 말입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혼 사이에 카톨릭 교회를 끼워 넣고 있습니다.

카톨릭은 그녀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리자(代理者)가 됨을 사칭(詐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약 성경의 어디에서도 그같은 근거를 찾아볼 수 없으되; 단지 로마 카톨릭주의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그녀 자신만이 진리가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합니다. 그녀가 진리를 묘사하고, 그녀만이 진리에 대해 정의내리며 진리를 해석할 수 있다고 합니다.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당연히 그와 정 반대로, '전(全) 신자의 보편적 성직자(聖職者) 체제'를 가르치며, 각 사람마다 스스로 성경을 읽을 권리가 있고, 성령님의 조명(照明) 하에서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 사실을 절대적으로 철저히 부정합니다. 로마 카톨릭, 오직 로마 카톨릭만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으며,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가 스스로 '지속적인 계시(啓示)'를 받아왔노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카톨릭은, 참 프로테스탄트 크리스천들이 믿는 바와는 달리, 계시가 신약성경과 함께 끝났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직도 계시가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에다 첨가해야 옳다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물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반면, 카톨릭이 덧붙인 카톨릭의 전통(전승, 傳承)도 성경과 동일하게 권위가 있고, 구속력(拘束力)을 지닌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으로부터 이탈하게 만드는 카톨릭적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고, 성경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것을 카톨릭의 전통(전승)에다 첨가시킨 다음, 거기에 근거(根據)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활함이 기어들어오는 곳이 이 부분입니다.

마침내 종착역에 도달하게 되면 카톨릭은 우리에게 전체주의적(全體主義的) 충성을 강요합니다. 그녀는 우리가 믿는 것, 행하는 것까지 지배하려 듭니다. 그녀는 스스로 우리의 영혼과 구원(救援)을 책임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일러준 대로, 가르쳐 준 대로 절대적으로 철저히 굴복(屈伏)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로마 카톨릭은 전체주의적 체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인권을 유린(蹂躪)하는 것이나, 히틀러가 그의 잔혹한 체제 안에서 했던 행위만큼이나, 카톨릭이 신도들의 혼을 절대적으로 얽어매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이 전체주의적 체제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절대권위(絶對權威)를 행사하며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버티고 서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드러난 두 번째 증거로서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지만, 로마 교황(敎皇)과 교황에 대한 온갖 가르침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대리자(代理者)'로 일컬어집니다. 그는 사도 베드로의 영적인 직계 후손으로서, 사도적 계승(使徒的 繼承)을 통해 사도 베드로의 모든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말합니다. 나 자신 베드로 수위권(首位權)에 의문을 제기함으로 곁길로 빠지고 싶진 않지만, 그것이 그들의 주장 그대로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 교황을 '거룩한 아버지'(성부, 聖父),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부릅니다. 비록 성경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땅 위의 어떤 사람도 '아버지'(Father)라 부르지 마라.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아버님뿐이다."고 말씀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들은 추기경(樞機卿) 회의에서 '권좌(權座)로부터' 선언한다고 하면서 교황이 "절대무오(絶對無誤)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1870년에 교황의 절대무오성 교리를 규정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그것을 믿어 왔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규정됨으로써, 그가 선언하는 것들은 절대무오하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으니, 곧 하나님의 말씀처럼 절대무오하고, 그리스도 자신처럼 절대무오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여러분이 알다시피, 교회의 권력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처럼" 말하는 이 한 사람의 권위 아래로 모아지게 됩니다. 그는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 있고; 그들은 그 앞에서 절하며,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질 수 없는 경의(敬意)를 그에게 표시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드러난 증거는 사제직(司祭 職)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사제들은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신자들의 보편적 성직체계를 믿지 않습니다. 성직자(사제)가 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카톨릭 교회에서 훈련받고, 교회의 성직수임(聖職受任)을 받아, '사도적 계승'에서 나오는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은 우리 모두가 성직자들이라고 알려 줍니다: "여러분은 선택받은 세대요, 왕가의 성직자 체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직자들의 왕국(王國)'이란 말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전혀 "아니올시다"입니다. "

당신들은 단지 평신도(平信徒)일 뿐, 결코 성직자가 아니며, 오직 카톨릭에서 수임을 받은 사람만이 성직자(사제)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제들에게 기적을 행하는 것과 같은 독특한 권능을 부여해 줍니다. 바로 여기에서 심각하고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들은 사제가 하나님의 은혜가 물에 임하도록 세례(洗禮)에서 사용되는 물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들은 주님의 만찬(晩餐)에서 빵과 포도주와 연관된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의 그같은 능력을 '화체'(化體)라고 부릅니다. 빵은 더이상 그냥 빵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고 그들이 말하는데; 겉모습과 색깔은 잔상(殘像)으로 남지만, 내용물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화체(化體)된다고 하며, 이러한 기적(奇蹟)은 그러한 기적을 일으킬 권능을 소유한 사제에 의해서라야 수행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같은 주장은 당연히 성례전(聖禮典, 성사)에 관한 교리 전체로 이어집니다. 카톨릭엔 일곱 성사(성례전)가 있지만, 본인은 이 중 특히 세례성사(洗禮聖事)와 성체성사(聖體聖事) 대해 관심이 있으며, 그들은 이 두 성사에 기적이 역사한다고 서슴없이 가르칩니다. 그들의 이론은 이러하니, 즉 사제의 역할에 의하여 물과, 빵, 포도주에서 기적이 역사하게 되며, 그 결과 이것들에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부여되는데, 그같은 기적적인 역사는 거의 자동적(自動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현상을 그들은 "ex opere operato"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더이상 그냥 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부여된 물이므로, 그 물을 어린아이 위에 부으면, 어린아이 안에서 기적이 역사(役事)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혹은 성찬식(聖餐式)에서 여러분이 빵을 취하게 되면 --- 거기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포도주는 마시지 못하게 하지만 --- 여러분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것은 마귀의 교활한 속임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첨가'된 것으로서, 거기에 대해 신약 성경에 단 한 단어의 언급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사제에 대한 언급을 마치기 전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니, 곧 로마 카톨릭의 사제는 우리가 그 앞에 나아가 우리 죄들을 고백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카톨릭에서 사제는 면죄(免罪)를 선언하고, 우리에게 죄사함을 베풀 수 있는 권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특별한 능력을 할당받은 사제직(司祭職)에 속한 사람들 외에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도록 교육을 받습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죄(허물)를 하나님께 고백해야 하고, 거듭난 크리스천들의 교회 안에서 서로에게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사제들'에게 고백하라는 말씀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또 하나의 드러난 증거가 있습니다. 본인은 카톨릭 체제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교묘히 끼어 들어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죄를 고백하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지만, 카톨릭 교도들은 사제들에게 갑니다.

네 번째의 증거로 들어 가겠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를 가장 경악스럽게 하는 터무니 없는 궤변(詭辯) 중의 하나입니다. 로마 카톨릭주의의 마리아 숭배가 놀라울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에서 마리아는 '하늘의 여왕'으로 일컬어지며, 그녀는 우리가 일차적으로 찾아가야 할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많은 성당들 가운데서 성모(聖母) 마리아 상(像)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에 의해 가려져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여기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인간적인 모습을 지닌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훨씬 사랑스럽고 부드럽게 다가오며;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하고 강력하며 권위 있으신 반면; 너무 엄격하십니다" --- 이것이 그들의 가르침이며, 마리아 숭배에 대한 설명의 전부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도 엄격하기에 우리는 그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성모 마리아가 거기에 함께 계시는데 그녀는 사랑이 넘치시며; 더욱이 그녀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시기 때문에 예수님께 영향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중보(仲保)해 주시도록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바로 우리 영혼의 구주이신 하나님의 아드님과 우리 사이에 위치하고 계십니다. 로마 카톨릭은 점증적으로 마리아의 권능에 뭔가를 '첨가'해 왔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1854년에 마리아의 '무염시태설'(無染始胎說)을 교리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아의 무염시태설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없이 태어나셨듯이, 성모 마리아도 또한 그렇게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마리아의 몽소승천'(蒙召昇天)의 교리를 발표했는데, 그 의미는 마리아가 여타의 일반인들과는 달리 결코 죽지 않았고 묻히지도 않았으며, 그녀의 아드님처럼 문자 그대로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가르침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세워주며, 그녀를 두드러지게 부각시킴으로 그리스도 자신은 아예 시야에서 가려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 숭배에 뒤이어 '성인'(聖人)들 숭배가 추가됩니다.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성인들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습니까? 자, 그들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현세에서도 완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일부의 성인들이 현세에서 그렇게 완전한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산 결과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의 '공덕'(功德)을 획득하고 쌓아올리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공덕을 과다히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여러분과 내가, 공덕이 아무리 턱없이 모자라고 부족하다 할지라도, 성인들에게 가서 기도하여 간청하면 그들의 과다량의 상당부분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것을 '적공'(積功, 공을 쌓는 일)이라 칭하는데, 곧 성인들이 우리를 위해 중보할 수 있고, 우리가 부족하거나 결핍되어 있음이 발견되면 그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공덕의 잉여분을 우리에게 전가(轉嫁)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여러분은 성인들을 숭배하고, 성인들에게 기도하며, 그들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덕만으로는 충분치가 않고, 여분(餘分)으로 상당량의 공덕이 추가로 보충(補充)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으로 카톨릭의 전반적 체계 및 제도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 자 사이에 교묘히 끼어 들어오는지에 대해 간단히 다섯 가지 요점만 정리해 보았습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한 신성을 부여하고 성육신, 동정녀 탄생 및 정통교리들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같은 일들이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귀의 온갖 속임수가 들어오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한편으로는 로마 카톨릭이 뭐든지 옳은 것만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문제는 그 다음에 '첨가'(添加)시키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그릇된 나머지, 도대체 옳은 것 중에서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아하게 만들 정도입니다.

세 번째 오류는, 로마 카톨릭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심을 강탈할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구원의 영광과 완전성(完全性)과 충분성(充分性)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칭의(稱義) --- 곧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문제와 관련된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 첫 번째 예를 들어봅시다. 루터가 말했듯이 이것은, "교회가 일어설 것인지 넘어질 것인지의 테스트"요 --- 프로테스탄티즘을 존재하게 만든 동인(動因)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영광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 의롭다함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요? 나는 이따금씩 우리 곧 프로테스탄트들이 과연 우리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아해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의롭다함의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할 때, 로마 카톨릭주의가 성장해 간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못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단지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동안에 카톨릭주의는 성공(成功)을 보장받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주의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놀랄만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

로마교의 가르침은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는 데 있어 스스로 기여할 부분이 있으므로, 죄투성이인 인간이라도 선행이나 공적을 쌓는 행위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고 또 그렇게 가르칩니다. 우리 프로테스탄트는 "의인(義人)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와 같으며", 혹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 기록하였듯이, "배설물"(똥)과 같아서 거부해야 할 것이요, 무가치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것을 극구 부인하며, 사람의 의는 가치가 있고 중요하며 유익을 끼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카톨릭이 궁극적으로는 세례(洗禮)를 통해 의롭게 된 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입니다. 세례는 다른 모든 교리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는 여러분의 죄를 사해줄 뿐 아니라, 여러분 안에 의를 주입시켜 주므로, 여러분이 세례에 의해 의롭게 된다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비록 의식(意識)이 없는 영아라 할지라도 전혀 문제되지 않으며, 그들도 세례로 의롭게 되고, 그들의 원죄가 세례로 말살(抹殺)되며, 그들에게 이같은 적극적인 의가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의가 아니며, 그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례 받은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의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옷입지 않고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프로테스탄트의 가르침을 위험한 이단(異端)교리라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펴보셨듯이 카톨릭의 가르침은 모든 것을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안되게 끔 만들어 버립니다. 회개(悔改)하고 그리스도께로 가서 그분을 믿음으로, 구원(救援)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 오직 사제가 베푸는 세례(洗禮)를 통해서만이 구원의 역사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모든 것에서 교회와 사제의 권위가 절대적이며 필수적이 됩니다. 그들 없이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며, 여러분의 운명은 오직 그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없으며, 반드시 이들 중보자들을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오직 한 분의 중보자(仲保者)가 있을 뿐이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아, 교황, 사제들 및 모든 고위 성직자와 하위 성직자들, 이들 모두가 필요하다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그리하여 이토록 중차대한 칭의(稱義, 의롭다함)의 교리에 있어서 그들은 거짓말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 생활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여기에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으니; 곧 경건한 삶보다는 의식(儀式)과 의례(儀禮)의 준수에 더 역점을 두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거룩을 추구하고 성화(聖化)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보다는, 미사에 참석하고 사제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告白)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야 할 책임과 사람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착념(着念)하여 그대로 실행하도록 권면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가르침은 교회의 규율(規律)에 전폭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각종 의식을 지켜야 하고, 그들이 하라고 일러준 대로 행해야 합니다. 특정한 절기에는 금식(禁食)해야 하고,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하며, 사제 앞에 나아가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일단 미사에 참석한 다음에는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해도 됩니다. 여러분의 죄는 덮어졌고, 다시 올바르게 교정되었으니 계속 여러분의 길을 가십시오.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거룩한 삶의 간단명료함 대신에, 여러분에게는 의식(儀式)들과 의례(儀禮)들과 절기(節氣)들이 있습니다.

또다른 심각한 오류(誤謬)는 카톨릭이 '구원의 확신'(구원의 보장성)의 교리를 전적으로 부정(否定)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確信)의 교리만큼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서도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증거하십니다." 그 의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없는데도; 로마 카톨릭은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는 확실성(確實性)과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무슨 구원의 확신(보장성)이란 말입니까? 이것이 그들의 반박이며, 이는 매우 논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로마 카톨릭 체제가 마귀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부분이 바로 여기이며; 적어도 이같은 비범한 천재성으로 이 모든 일을 성사시킬만한 존재는 마귀 외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런 식으로 적용됩니다. 여러분이 세례를 받을 때 여러분의 원죄(原罪)가 말소되고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됩니다. 아 좋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후 죄 문제, 즉 세례받은 이후에 범한 죄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여러분이 받은 세례는 세례 후에 지은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거기에 대해 어떡하시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문젭니다. 프로테스탄트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여전히 우리를 모든 죄와 불의에서 깨끗케 하시며;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나의 과거의 죄들, 현재의 죄들, 미래의 죄들을 덮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단 한 번의 행동으로 충분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로마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세례 후 죄 문제는 전혀 다른 성격의 문제입니다. 거기에 대해 내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사제에게 가서 죄를 고백해야만 하며; 오직 그만이 이 문제를 다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제라고해서 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도달하게 되면, 이들 세례 이후의 죄 문제와 함께 지옥과 처벌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 때 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 문제 없습니다,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여기에 고해성사(告解聖事)가 있습니다. 사제 혼자서 여러분을 위해 그것을 베풀 수 있으며, 그는 능히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고해성사를 받게 되고, 사제에게 특별 고백을 하게 되며 여러분은 면죄를 받게 됩니다.

그것으로 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도 안됩니다! 거진 다 왔지만, 여전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남아있게 됩니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 다행스럽게도, '연옥'(煉獄)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있습니다,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용서받지 못한 세례 후의 죄가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 죄를 씻기 위해 그곳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자, 여전히 남아있는 나의 친척들이 나를 위해 기도를 하며 그렇게 하면서 돈을 지불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에게는 온갖 '면죄부'(免罪符)들과 온갖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들'과 온갖 촛불들과 지불한 돈이 있게 됩니다. 돈을 더 많이 낼수록 이러한 죄들이 연옥에서 더 빨리 처리되며 이 사람은 연옥에서 더 빨리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같은 주장을 성경에서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물론 전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카톨릭이 지금까지 주장해 온 추가계시(追加啓示)의 일부분이며, 이것이야말로 첨가 그 자체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충분치가 못하고, 이 모든 방식들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즉 내가 이같은 로마 카톨릭을 배교집단(背敎集團)이라고 말한다 해서 지나쳤단 말입니까?

 

III. 결 론

이 모든 것들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카톨릭 교도들은 무지 속에 감금되어 있으며 미신행위에 빠져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결과 이 나라에서 이따금씩 칭하는 바 '대륙의 일요일' 중심의 생활방식에 점차 젖어들게 되는데, 그 의미는 여러분이 일요일 아침에 성당에 가서 미사만 드리면, 그 나머지 시간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미사 시간만 끝나면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스포츠와 행락으로 그날을 즐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한다 해서 놀랄만한 일이 못되는 것은, 개인은 고려하지 않아도 되며 관심 밖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교회가 일러준 대로 순종하고, 그 자신을 내맡기기만 하면, 그가 해야 할 일을 다한 것이요, 나머지는 교회가 책임지고 그들의 영혼을 돌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마침내, 그들이 진리의 길을 걷는 자들에 대해 잔혹한 핍박을 가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역사를 통해 로마 카톨릭 체제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뿌렸고, 여전히 도처에서 기회만 주어지면 그런 일들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며, 여러분에게 묻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껏 시간낭비를 해왔을까요? 꼭 이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 만 했을까요? 마땅히 로마 카톨릭주의에 대해 새로운 접근방식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모두가 크리스천으로서 함께 공산주의에 맞설 수 있다는 그 사실에 기뻐해서는 안된단 말인가요? 여러분이 직면해야만 하는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 자신은 여기에 대해 답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 체제가 전적으로 공산주의보다도 훨씬 위험한 체제인 것은, 그 체제가 기독교로 날조(捏造)된 체제이면서도,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주빛 여자'이며, 가장 끔찍하고도, 더럽기 짝이 없는 속임수인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또다른 얼굴은 공공연하고도 명명백백한 무신론적 불신앙(不信仰)입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자(改革者)들은 결코 고집스런 열심당원들이 아니었으며, 결코 바보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열어주신 양눈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루터가 그러했고, 칼빈이 그러했으며, 낙스도 그러했고, 개혁자들 모두가 그러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눈이 열리면서, 보았습니다. 바로 성경에서 경고하면서 묘사하고 있는 이 끔찍한 괴물을 보았으며, 죽음의 위기(危機) 속에서도 이 괴물에 맞서서 프로테스트했습니다.

그들은 그 괴물이 진리(眞理)가 아니라고 말했고, 그리하여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성경이 절대적이고, 최종적(最終的)이며, 정확한 권위임과, 모든 믿는 자들의 성직자 체계 등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그같은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많은 자들이 그 진리를 위해 순교(殉敎)당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엄숙히 경고하는 바, 여러분이 만일 로마교를 인정하는 접근을 더 기뻐하신다면, 여러분은 순교자들의 흘린 피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이 로마교의 가르침을 수용(受容)한다면 결코 스미스필드 근처에 가지 마십시오. 그곳 스미스필드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이 화형에 처해졌기 때문입니다. 존 브래드포드와 그 외의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로마 카톨릭주의를 부인한 이유 때문에 화형을 당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을 부인하고 있고, 그들에 대해 등을 돌리면서, 그들이 잘못한 것이었어, 그들의 실수였어,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를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이들의 허울좋은 논쟁(論爭)에 말려들지 마십시오.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는 이유는 무선통신과 텔레비전 때문입니다. 매스 미디어에 비치는 이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공손하고, 친절하며, 또한 훌륭한 인품을 자아내며, 무척 융통성 있어 보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종종 프로테스탄트보다 훨씬 멋있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저질적으로 비난하고,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하지만 말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그렇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가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단지 카톨릭의 과거만 들춰내려 하고, 마치 16세기에 살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지금 당신은 20세기에 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십니까? 본인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로마 카톨릭의 거만한 허풍(虛風)이 바로 이것이며, 로마 카톨릭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Semper eadem." 어떻게 로마 카톨릭이 달라질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녀가 달라진다면, 그녀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는 셈이 되겠지만, 오히려 그녀는 여전히 말하기를,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절대무오(絶對無誤)하며 교황은 바로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결코 실수를 할 수 없으신 분이시다, 고 합니다.

만일에 로마 카톨릭이 추호라도 변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카톨릭의 핵심주장을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그녀는 결코 변하고 있다고 말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혹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오히려 상태가 더 나빠진 것뿐입니다. 그녀는 16세기에 그녀가 가르쳤던 교리에서 교황의 절대 무오성과 같은 교리들을 오히려 추가시켰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로마 카톨릭 교회는 결코 달라지지 않습니다. 만일 이 지구상에 하나의 거대한 세계교회가 존재해 왔다면,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나머지 모든 교회들을 흡수하고, 무지한 상태에 있는 그들을 집어 삼켜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어려울게 하나도 없으니; 로마 카톨릭 교회는 기독교 모조품이요, 가짜이며; 가장 사악한 매춘부요 가장 마귀적인 집단입니다. 실로 적(敵)그리스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마땅히 거절해야 하고, 고발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대적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녀를 대적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서두(序頭)에서 말했듯이, 성경적인 교리(敎理) 위에 서 있는 기독교입니다.

"그리스도께로 나오라" 혹은 "예수님께로 나오라" 라고만 설교하는 기독교의 모습으로는 잠시라도 로마 카톨릭 교회와 맞설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궁극적으로는 로마 카톨릭의 숫자만 불리워 주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입니다. 복음전도자들이 전도집회를 할 때 "아, 당신은 로마 카톨릭 신자시군요, 당신의 교회로 돌아가십시오." 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들에게 경고해 주어야만 합니다. 이 소름끼치는 모조품(模造品)에 대항해서 맞설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르침과, 단 하나의 권능이 있으니; 성경의 오늘 본문말씀에서 칭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란 신약성경의 진리를 성경적이고 교리적이며 신학적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16 세기에도 동일하게 사용했던 무기입니다. 루터는 단지 피상적인 복음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막강한 신학자였고; 또한 칼빈도 그러했으며; 그들 모두가 그러했습니다. 로마 카톨릭을 침식시키고 로마 교회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역사(役事)된 위대한 진리의 체계였던 것입니다.

현 상황에 대처하는 적절한 방법으로서 이것 이상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의 책임(責任)이 막중합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알아야만 하며, 진리를 이해해야만 하며, 거짓된 가르침을 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과 같은 거짓 기독교에 미혹(迷惑)되고 있는 순진한 사람들에 대해 바로 여러분이 책임이 있으니, 그들의 눈을 열어주며,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그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견고하게 설 때에야 비로소, 성령님의 복이 우리 위에 임하시도록 열정(熱情)과 확신(確信)을 가지고 기도할 자격이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위에 굳게 서고, 성경의 진리 위에 굳게 설 때, 본인이 믿기로는, 하나님의 영님께서 우리 위에 강력한 부흥(復興)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그같은 강력한 부흥만큼 이 가증한 체제, 곧 스스로 로마 교회라 칭하는 저 큰 '매춘부'(賣春婦)를 쓰러뜨릴만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에게 빛을 주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를 분별(分別)하게 하시며, 너무 늦기 전에 우리를 흔들어 깨워 주소서.

 

저자소개 : 마틴 로이드 존스(D. Martyn Lloyd Jones; A.D. 1899-1981)

금세기 최고의 강해 설교자로 알려진 로이드 존스는 1899년 영국의 남 웨일즈 카티프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의학에 뜻을 두고 공부하여, 영국의 성 바돌로매 병원에서 수련기간을 거친 후, 23세의 약관의 나이에 국왕의 주치의였던 토마스 호더 경(Sir Thomas Horder)의 수석 조수가 되는 등, 훌륭한 내과의사로서 장래를 촉망받는 젊은이였다. 그러나 참된 삶을 희구하는 그의 열망은 그로 하여금 1927년 의학계를 떠나 남 웨일즈의 애버라본시의 웰쉬 장로교회의 목사가 되게 한다. 1933년도의 자료에 따르면 웨일즈 지역으로부터 수천 명의 사람들이 로이드 존스의 복음적인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1938년에 그는 런던 버킹햄가에 있는 G. 켐벨 몰간 목사가 시무하던 웨스트민스터 교회에 부목으로 부임, 그와 함께 사역하였다. 그리고 켐벨 목사가 1943년에 은퇴하자, 1968년까지 그 교회에 재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동시에 그는 주간에는 일반적으로 복음 전도자로서 순회 설교 사역을 감당하면서 초청받은 여러교회들에서 설교하였고, 때로는 학생 신앙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영적 지도자들의 공적모임에서 영적인 각성을 촉구하는 수많은 강연과 세미나를 행하였다. 그는 탁월한 복음 전도자로서 설교와 책자를 통해 의사다운 예리한 통찰력으로 진리를 옹호하고, 오류를 드러내는 일에 앞장섰다. 동시에 그는 주님의 양들을 먹이고, 병들어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에 헌신하다가 1981년 3월 1일, 82세의 생을 마치고 그리스도의 품에 안겼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그의 주요 저서로는 「로마서 강해」- 전 8권 / CLC; 「에베소서 강해」- 전 8권 / CLC; 「복음의 핵심」양무리서원; 「산상수훈(上, 下)」/ 정경사; 「의학과 치유」/ 생명의 말씀사; 「마틴 로이드 존스의 십자가」/ 두란노; 「영적침체」/ 새순출판사; 「매일의 묵상」/ 엠마오; 「믿음의 시련(시73편)」/ 청교도신앙사, 「목사와 설교」/ 기독교문서선교회 ..... 등 다수가 있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사역은 위대한 성경의 진리와 개혁의 교리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데 일관해 왔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진리를 굳게 붙잡고 온갖 우상을 버리는 크리스천의 양면적 필수의무 중에 적극적 측면을 빛낸 사역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역이 한 측면만을 위한 것이었다고 단정해 버릴 수는 없으니, 바로 그가 남긴 "로마 카톨릭 사상평가"가 그것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적극적 진리의 선포로써 거짓 진리를 드러내는 접근방법을 택하였을 뿐, 거짓 진리를 분별하는 일을 무시한 것은 결코 아니었음이 본고를 통해 입증되고 있습니다. 비록 짧은 한 편의 설교 본문이지만, 그는 평소 로마 카톨릭에 대해 하고싶었던 말을 이 한 글에서 집약적으로 표출해 냈습니다. 모든 개신교도들에게는 영적 의무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일깨워 주고, 모든 천주교인들에게는 진리와 진실을 볼 줄 아는 영적 분별력을 제시하는 데, 이 작은 책자가 적지 않게 기여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생명나무| 원글보기


      숫자에 관심 없으신 하나님 / 로이드존스


      하나님께서는 거대한 군대를 동원하여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숫자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정결함과 거룩함,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숫자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되며,
      ...
      교리와 거듭남과 거룩, 그
      리고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며

      하나님의 거하시는 장소임을 깨닫는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산상수훈 : 팔복 (The Beatitudes) / 로이드존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5:3)

        [다른 성경버전] “With less of you there is more of God and his rule.” [The Message]
        “Those who know there is nothing good in themselves are happy” [NLV]

        [Amplified 뜻풀이] Blessed: happy, spiritually prosperous with life-joy and satisfaction in God's favor and salvation, especially conditioned by the revelation of His grace, regardless of their outward conditions / the poor in spirit: the humble, who rate themselves insignificant

        [로이드존스 강해] “‘심령이 가난하다’ 그것은 교만이 완전히 사라져있고 자긍심이나 자기를 의지하는 자세가 완전히 사라져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 “심령이 가난해지는 길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4)

        [애통함의 예]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로마서 7:15)

        [애통함의 이유] 1) '죄'에 대한 참다운 인식으로 인하여 (나 자신의, 다른 사람의, 세상의, 그리고 죄의 본질 자체 때문에), 2) 뿌린 것에 대한 결과를 보지 못하는 일로 인하여 (사람의 인식과 주님의 인식의 차이..?)

        [로이드존스 강해] “그리스도인은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삶을 영적으로 생각하며 그 속에서 죄와 죄의 영향들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가진 그런 생각과 진리에 대한 깨달음 때문에 그에게는 또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도 바울처럼 탄식합니다만, 동시에 그리스도와 장차 올 영광을 체험하기 때문에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5)

        [Amplified 뜻풀이] the meek: the mild, patient, long-suffering (게으름/나태함, 유약함, 친절함, 또는 타협주의와의 차이점은?)

        [관련 성경구절]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시편 37:11)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 6:10)

        [로이드존스 강해] “온유란 두 가지입니다.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자세요, 또한 그런 나의 자세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를 아무리 나쁘게 말해도 그것에서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사람이 그를 그렇게 좋게 생각해주며 잘 대해주는 사실에 깜짝 놀라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또한 인내하며 오래 참는다는 것을 뜻하고, 특히 부당하게 고통을 받을 경우에 그러한 것을 뜻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이미 만족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5:6)

        [관련 성경구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한복음 1:16)

        [로이드존스 강해] “‘행복과 복된 상태’를 위해서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절대로 행복해지지 못합니다. 오직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만족을 얻을(행복해질) 것입니다……
        의를 향한 열망은 바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요, 죄를 없이 하고자하는 열망 입니다. 그것은 죄를 짓고싶은 나 자신의 욕망에서 자유를 얻고싶은 열망을 의미합니다. 거룩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 그분과 동행하는 것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지닌 최고의 소원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면, 영적으로 나쁘고 해로운 것들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영적의욕을 무디게 만들어 결국에는 영적침체를 일으키는 그런 것들까지도 피할 것입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이것은 참으로 굉장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리고 목마르면서도 동시에 채움을 입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채움을 받으면 더 주리고 목마릅니다만 다시 채움을 얻고 만족을 얻습니다. 은혜에 은혜가 더해집니다. 이 일은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축복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5:7)

        [관련 성경구절]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8:12)

        [로이드존스 강해]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특별히 하나님 자신에게 적용되는 형용사입니다……
        ‘은혜’는 죄 자체에 대한 것인 반면 ‘긍휼’은 죄로 인하여 생긴 비참한 결과들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측은히 여기는 감정에 행동이 합해진 것입니다......
        그들은 한때 내가 처했던 그런 어두움의 자리에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계속해서 그런 형편에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참 애처롭게 느껴집니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을 긍휼히 여길 수밖에 없게 됩니다. 죄는 미워도 죄인은 불쌍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용서함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체험했다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5:8)

        [관련 성경구절]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브리서 12:14)
        [청결한 마음의 예]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 주시고 내 안에 정직한 새 영을 넣어 주십시오.” (시편 51:10) / “주님, 주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주의 진실하심을 본받아서 살겠습니다. 내가 한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겠습니다.” (시편 86:11)

        [로이드존스 강해] “청결한 마음이란 곧 나뉘어지지 않은 마음입니다…… 우리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며 또한 그것이 우리 삶의 최고의 소망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은, 오직 그러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성경에서 가장 우리를 엄숙하게 만드는 말씀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5:9)

        [관련 성경구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 2:14)

        [로이드존스 강해] “인간의 모든 문제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죄 때문입니다. 개인들 사이이든, 여러 그룹들 사이이든, 나라들 사이이든, 인간의 탐욕, 이기심, 자기 중심성이 모든 문제와 불화의 원인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에 크게 필요한 것은 바로 ‘화평케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낮추셔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의 모든 것이 여기에 담겨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평케 하는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바로 하나님 자신과 그의 아들이 하신 일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먼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관심으로부터, 자기 주장으로부터 완전히 구원함을 받음을 뜻합니다. 그는 자신을 기꺼이 낮추는 사람이요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므로 필요하다면 고난마저도 감수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5:10)

        [로이드존스 강해] “성경은, 까다롭고 불쾌하게 행동하거나 자기 의 또는 어리석음 때문에 불필요한 핍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합니다……
        의롭다는 것, 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곧 주님을 닮은 것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 복있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의인은 정죄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모습과 삶 자체가 사실상 그들을 정죄하고 있으므로 그것 때문에 그들은 완전히 쪼그라드는 느낌을 갖게 되고 기분이 나빠져서 의인을 미워하게 됩니다. 의인이 핍박을 받는 것은, 그들이 나머지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5:11-12)

        [로이드존스 강해]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권세자들에게 핍박을 받을 때 자기들이 드디어 주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할 가치있는 존재로 인정을 받은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http://freeindeed.tistory.com/62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교리에 대한 로이드존스의 설명

          

         

        사도행전을 읽고 초대 기독교 전도자들의 설교를 관찰해 보십시오. 그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이 본문 하나를 택하여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정확한 의미를 말하고 분석하는 모습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설교 방법은 교리들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메시지가 있었고 그들은 그 메시지를 제시하며 교리들을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메시지가 교리라는 사실을 증명하였습니다.  물론 설교가 의도하는 바가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는 설교의 목적과 기능입니다. 교리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기회가 아닙니다. 교리의 목적은 진리를 회중에게 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리를 공부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면 위험합니다. 우리는 나무들 때문에 숲을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말로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시대에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실제적인 문제들은 그들이 문자에 멈춰서 영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야기해서 그들은 전혀 교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고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문자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않고 심지어 우리를 그릇되게 인도하기까지 합니다. 문자는 우리 영혼을 지옥에 떨어뜨리는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한 다음에 교리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그 공부가 전혀 유익이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공부가 매우 지적일지 모르지만 시간을 낭비하는 훌륭한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성경을 글자 맞추기 놀이처럼 또는 조각 그림 맞추기 놀이처럼 서로 맞추는데 사용하면서 전혀 교리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성경공부는 아무 가치가 없고 유익이 없습니다.

         

        ...

         

        이단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이 틀린 말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매우 순수하고 성실한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말과 해로운 말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물론 이런 이설을 말하는 거짓 교사들은 교회 안에서 혼란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내에서 이단이 발생함으로 초대교회는 우리가 보통 신조 또는 신경이라고 칭하는 것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

         

        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참고서에 접근하는 식으로 성경에 접근합니다. 그들은 너무나 자주 성경의 중요한 교리들에 마치 인간의 생각과 사상들처럼 접근합니다. 그들은 예배와 경외의 분위기로 성경의 교리로 나아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해석과 지적에 흥미를 가집니다. 해석과 지적인 지식도 없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성경의 교리는 연구 주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간절히 교리를 알고 싶어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리를 알아서 우쭐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경배와 찬양을 하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교리를 알고 싶어해야 합니다.

         

         

        출처: 양무리마을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들은 무슨 뜻이니이까 하거든 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 너희를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수 4:21-24).

         

        하나님이 기적적인 행동을 보여 주시는 첫 번째 이유는 모든 백성들과 나라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명예를 회복하시며, 자신의 영광과 능력을 주장하십니다. 그는 이런 일을 행하심으로써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교회를 조롱하고 놀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제지하고 사로잡으며 경악시...킬 만한 무언가를 보여 주십니다. 자, 이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흥에 관심을 갖는 주된 이유입니다.

        체험 그 자체를 위해 부흥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부흥의 때에 수반될 수 있는 체험에 대해 지난번에 말씀드렸지만, 일차적으로 그런 체험 자체를 위해 부흥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체험이든 체험을 약속하는 집회에 항상 달려가는 사람들, 이 집회 저 집회 돌아다니는 사람들, 항상 자기 생각만 하면서 체험을 하고 싶어 안달하며 체험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부흥의 일차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명예를 드러내려는 데 있습니다.


        - 마틴 로이드 존스, 『부흥』, 223-224쪽.

        출처: 개혁주의 마을/Grace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 진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 (로이드 존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 건져내 달라고 말한 후에는 이미 건져 내 주신 것으로 믿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결국 그 믿음대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르침을 달리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특정한 죄 때문에 계속 넘어지는 사람이 있을 때 “당신의 유일한 희망은 그 문제를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그 문제를 가져 갈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에베소서 4:28에서 계속 물건을 훔치는 자, 마음에 드는 물건을 취하는 자에게 명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런 사람에게 해 주어야 할 말이 무엇입니까? “그 죄를 그리스도께 갖고 나아가 구원해 달라”고 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자에게 명하는 바는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도적질을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음과 음행과 음란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그만 두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만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1:14-15에서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우리 자신이 무엇인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로부터 돌이켜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 문제를 그리스도께 내 놓고 건져 내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어떤 사람들인지 생각하고 당장 그 일을 구만 두라”고 말합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로이드 죤즈의 로마 카톨릭 평가


        by Martyn Lloyd Jones
        Originally Printed in Great Britain at The Burlington Press, Foxton, Near Cambridge



        작금에 일어나고 있는 모종의 사건들은 모든 크리스천 지성인들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로마 카톨릭주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않으면 안되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주의(主義)와 프로테스탄티즘 사이에 화해(和解)를 도모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여러 운동들이 일어나고, 숱한 회의들이 개최되는가 하면, 이같은 일을 환영하는 자들은 우리(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상호존중(相互尊重) 하에 협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니며, 크리스천 정신의 경이로운 구현(具現)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바로 이같은 일련의 움직임 때문에, 현 국면(局面)을 바르게 파악해야 할 당위성(當爲性)이 있는 것이며 앞 날을 내다볼 때 사태의 긴박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반드시 직면하게 될 모종의 개연성(蓋然性) 때문인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현재의 상황이 지속될 경우, 머지않아 카톨릭의 비중이 절대다수(絶對多數)를 차지하게 될 국가들은 전세계적으로 상당수에 달할 것이며 그럴 경우, 로마 카톨릭은 '다수결 원칙'(多數決 原則)을 따르고 있는 민주주의(民主主義) 국가 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占有)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로 인해 야기될 모종(某種)의 개연성을 예상(豫想)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영국)라고 해서 수년 내에 그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保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현실을 감안해 볼 때, 우리가 이 같은 입장을 점검해 보고, 우리가 직면하게 될 엄청난 사실을 예의주시하는 것은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이 일은 싫고 좋고를 떠나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본인은 개인적으로 전에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러한 성격의 어떤 ‘프로테스탄트 단체’에 소속된 적도 없고, 그같은 주제로 강단에서 설교해 본 적도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로마 카톨릭주의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代案)은 기독교의 진리와 위대한 개혁 교리를 적극적으로 선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외에 이 문제를 능히 다룰 수 있는 것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있어, 소극적인 프로테스탄트는 별 의미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지금까지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여러 해 동안 꾸준히 성장세를 유지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최근 들어 로마 카톨릭 교세(敎勢)가 각 나라에서 실질적인 증가추세를 보이는 반면, 소극적인 프로테스트의 온갖 노력들은 무기력해 보입니다. 본인은 로마 카톨릭주의의 이러한 확산이 자기의 믿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무지(無知)함과 무기력(無氣力)함에 전적으로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본인이 시간을 투자해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으로 인해 부득불 본인은 이 문제-곧 주권과 권능,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및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의 활동들인, ‘마귀의 속임수’에 대해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좋습니다, 우리는 무엇부터 시작하기로 할까요? 여기에서 본인은 개개인에 관해서는 고려치 않음을 분명히 해 두고자 합니다. 물론, 카톨릭 신자이면서 동시에 크리스천인 개개인들도 존재합니다. 즉 여러분이 카톨릭 교인이면서도 크리스천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본인의 전반적인 의도는, 카톨릭 내에서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체제(體制) 때문이 아니라 그 체제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점은 로마 카톨릭 교회 내에서도 개인(個人)이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개인에 대해서는 고려치 않을 것이며, 또한 정치적 관점에서도 이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측면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본인은 지금껏 그것이 엄청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를 제시해 왔습니다.

        우리는 카톨릭 체제에 대한 역사기록을 알고 있고, 정치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카톨릭의 주장들이 정치적인 힘으로 발전된다는 사실도 알며, 따라서 이러한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정치적 측면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부분에 대해 고려하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그것이 기독교 평신도들과 기독교 정치인들의 소관(所關)으로 보입니다. 본인으로서는 오히려 영적인 측면에 관심이 있는데,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우리 앞에 제시하고자 하는 관건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I·로·마·카·톨·릭·체·제

        자,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까요? 우선 ‘하나의 체제’란 관점에서 살펴볼 때 본인으로서는 로마 카톨릭주의로 알려진 이 체제야말로, ‘마귀의 가장 위대한 걸작품’이라고 단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체제는 크리스천의 믿음과 성경의 가르침에서 심하게 이탈(離脫)된 종교단체이므로, 본인은 주저없이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과 더불어, 이 체제를 ‘배교집단’(背敎集團)이라 단언하는 바입니다. 이제 이 점에 대해 분명히 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배교를 기독교의 진리로부터 전적으로 이탈한 기독교라고 정의합니다.

        혹자는, “글쎄요, 당신은 직접적으로 로마 카톨릭을 지칭하는 겁니까?” 라고 반문하겠지만, 여기에 대해선 무척 신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일에 카톨릭을 배교집단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진실 그 자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 경우엔 진리에 대한 ‘부인’(否認)의 문제라기 보다는, 차라리 진리에 대한 ‘첨가’(添加)로 말미암아, 마침내 진리로부터 이탈하게 된 경우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설명하자면 --- 이것(진리에 대한 첨가)이야말로 온갖 교활함이 들어오는 곳이요, 마귀의 속임수가 들어오는 곳이란 말입니다.

        어떤 면에서, 무심코 바라보게 되면, 세상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만큼 정통(正統)인 교회가 없다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人格)과 같은 교리적 측면을 고려해 볼 때는, 로마 카톨릭의 정통성에 문제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나사렛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드님이시라고 믿으며 예수님의 처녀탄생(處女誕生)을 믿으며 예수님의 성육신(聖肉身)을 믿으며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믿으며 십자가 위에서의 그분의 대속(代贖) 사역과 그분의 육체적 부활(復活)을 믿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昇天)하셔서 하늘나라에 앉으신 사실도 믿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인격적 측면에 대해 로마 카톨릭은 절대적으로 정통이며 --- 애석하게도, 로마 카톨릭이 종종, 대부분의 개신교보다 훨씬 더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 카톨릭의 입장을 그토록 소름끼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사역에 대한 측면을 가지고 카톨릭을 보더라도, 카톨릭의 정통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은혜(恩惠)의 원리’에 대해 고려해 보면, 그것이 그들의 중심 교리(敎理)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영감(靈感)과 권위(權威)에 대해서도 그들은 같은 입장을 고수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개신교보다 더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카톨릭을 단지 일반적인 접근방식으로 바라본다면, 카톨릭은 세계에서 가장 정통적 교회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점에서 교활함이 들어오고 어려운 문제들이 야기됩니다. 카톨릭은 이 모든 것에다 ‘저주받을 더하기’로써, 전적으로 비(非)성경적인 것들과, 사실상 성경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는 것들을, ‘첨가’(添加)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카톨릭이 가르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결국에 가서는 우리가 거짓말을 믿는 위치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카톨릭의 교리는 일종의 모조품(模造品)이며, 성경에 명시된 대로, 카톨릭은 다름아닌 ‘매춘부’(賣春婦, 음녀) 그 자체입니다.

        과연 이 문제가 지극히 교활한 것이지만, 다행히도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도 ‘교활함’, 즉, 마귀의 속임수에 대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교활함이 어떤 것인지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반드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문서를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모든 사람에게 어떠한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카톨릭 체제는 무척 방대하고, 그녀의 교활함은 실로 커서 거의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와도 같습니다. 무작위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틀림없이 여러분이 여러 번 접한 경우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들어온 바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혼(離婚)을 용납하지 않으며, 카톨릭 교인 중 누가 이혼했을 경우, 그는 교회로부터 제명(除名)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신문 지상에서 돌연 일부 독실(篤實)한 카톨릭 신도들의 이혼 소식을 접하고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라고 반문하게 됩니다. 글쎄요,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결코 진실된 결혼이 아니었다”고! ... 그들은 어떤 것이든지 해명해낼 수 있고, 어려울게 하나 없습니다.

        그들의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체계가 그러하며, 고도의 논법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의 대응이 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혹은 달리 얘기해서, 로마 카톨릭이 실상으로 얼마나 많은 얼굴들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이 나라(영국) 안의 카톨릭을 살펴 보십시오. 또 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의 로마 카톨릭을 살펴 보십시오. 여러분이 미합중국에서의 카톨릭을 살펴 본 다음, 남아메리카에 있는 몇몇 라틴 국가들의 카톨릭을 살펴보게 되면, 그들이 동일한 체제라고 믿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및 기타 유사한 국가들의 카톨릭 교회를 살펴 보고, 독일이나 그 주변 국가들의 카톨릭 교회와 대조해 보면,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같은 카톨릭 체제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도, 사실은 같은 카톨릭 체제입니다. 카톨릭은 얼마든지 그 색깔과 모습, 형태를 바꿀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어디서든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카톨릭입니다.

        흡사 카멜레온과 같이 ......여러분은 마귀가 자신을 광명(光明)의 천사로 변모(變貌)시킬 수 있는 것이 마귀의 특징(特徵) 중의 하나라고 우리에게 알려 준,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카톨릭 교회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카톨릭의 ‘위장술’(僞裝術)에는 끝도 없고, 한계도 없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카톨릭이 고도의 지성적인 형태로 나타나서, 카톨릭 교도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권장합니다만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금하며, 비(非)지성적일 뿐만 아니라, 고의적으로 미신(迷信)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 나라에서는 관용적이고, 기꺼이 들어주며, 토론도 하고 양보도 하며, 매우 친근한 모습을 취합니다만 그러나 다른 후진 국가에서는 아주 완고하며, 이교(異敎)에 대해 사악하고도 비열한 방법으로 핍박을 가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동일한 로마 카톨릭 교회요, 동일한 카톨릭 체제이며, 동일한 카톨릭 교도들로서 존재합니다. 나는 이러한 증거들을 통해 카톨릭 교회가 마귀의 걸작품(傑作品)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한 거대한 조직과 체제가 있어, 수십세기 동안 간간이 --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바로 이 일을 행하고 있으니 -- 곧 온갖 교활함과 속임수 가운데서, 성경의 표현대로 “온갖 불의의 속임수로써”, 마귀의 속임수를 그대로 드러내 왔습니다. 이 모두가 성경에 분명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두 번째 장에서 이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이 내용이 이 예언에 대한 유일한 설명구절은 아니지만 그 중의 하나라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은 이 체제가 ‘발흥(發興)한’, 말하자면, 권력을 장악하게 된 사실을 확인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이미 이 조직이 활동해 오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그것이 계시록 13장의 두 번째 짐승으로 묘사되어 있고 계시록 17장의 일곱 언덕 위에 앉아 있는 ‘거대한 음녀(淫女)’의 그림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듯이, 바로 로마 카톨릭이 그러하며 언제나 그같이 행해 왔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역사 속에서 그대로 재현되어 왔으니, 이런 식으로 이렇게 성취되어 왔습니다. 여기 은밀히 유입되어 들어와 한 때 기독교 전체를 실질적으로 장악했던 어떤 체제가 있습니다.

        바로 로마 카톨릭이 천천히, 교활하게 스며들어와, 자신의 방식으로 변질시켰고, 그 결과 카톨릭의 영향력은 거의 보편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II·로·마·카·톨·릭·의·중·대·한·오·류·들

        로마 카톨릭이 행한 일은 어떤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 적절히 다루자면 여러 달이 걸릴 것입니다. 이 한 설교에서 필자가 규명하고자 하는 관심사의 전부는 본인의 주장이 진실임을 보이기 위한 몇몇 머리글들을 제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본 내용을 세 가지 주요 표제글로 나누고자 합니다.

        1. 첫째는 로마 카톨릭이 어떻게 우상숭배와 미신행위를 도입하는 죄를 범해 왔는지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상숭배(偶像崇拜)만큼 신랄하게 정죄받는 행위도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조각한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로마 카톨릭은 형상(形象)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카톨릭은 신도들에게 형상들을 숭배하도록 가르치고 있으며 그들은 동상들과 조형물들과 초상화들을 숭배합니다.

        여러분이 거대한 천주교 성당에 가보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에 가보십시오. 거기에 사도(使徒) 베드로를 기념하는 동상(銅像)이 있는데, 그 동상의 발가락 부분을 보면, 그 부분이 많이 닳아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구요? 로마 카톨릭의 그릇된 가르침에 희생된 수많은 가련한 희생자들이 그 발가락에 입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절하면서, 형상들과, 동상들과 유물들을 숭배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성인의 유물들과, 뼈 조각들과, 사용했던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어떤 특별한 장소에 안치하여, 그것을 숭배하며 그 앞에 절을 합니다. 이 정도는 그들이 행하는 우상숭배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2. 두 번째 커다란 오류는 카톨릭의 전 체제와 가르침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를 차단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수많은 오류들 중 가장 끔찍한 오류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 카톨릭 교회 자체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끼어 들어오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카톨릭 교회 자체가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합니다. 교회 밖에서는 --- “extra ecclesiam”, 결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 “nulla salus”. 즉 카톨릭 교회가 절대적인 필수요건이란 말입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혼 사이에 카톨릭 교회를 끼워 넣고 있습니다. 카톨릭은 그녀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리자(代理者)가 됨을 사칭(詐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약 성경의 어디에서도 그같은 근거를 찾아볼 수 없으되 단지 로마 카톨릭주의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그녀 자신만이 진리가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합니다. 그녀가 진리를 묘사하고, 그녀만이 진리에 대해 정의내리며 진리를 해석할 수 있다고 합니다.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당연히 그와 정 반대로, ‘전(全) 신자의 보편적 성직자(聖職者) 체제’를 가르치며, 각 사람마다 스스로 성경을 읽을 권리가 있고, 성령님의 조명(照明) 하에서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 사실을 절대적으로 철저히 부정합니다. 로마 카톨릭, 오직 로마 카톨릭만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으며,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가 스스로 ‘지속적인 계시(啓示)’를 받아왔노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카톨릭은, 참 프로테스탄트 크리스천들이 믿는 바와는 달리, 계시가 신약성경과 함께 끝났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직도 계시가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에다 첨가해야 옳다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물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반면, 카톨릭이 덧붙인 카톨릭의 전통(전승, 傳承)도 성경과 동일하게 권위가 있고, 구속력(拘束力)을 지닌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으로부터 이탈하게 만드는 카톨릭적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고, 성경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것을 카톨릭의 전통(전승)에다 첨가시킨 다음, 거기에 근거(根據)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활함이 기어들어오는 곳이 이 부분입니다.

        마침내 종착역에 도달하게 되면 카톨릭은 우리에게 전체주의적(全體主義的) 충성을 강요합니다. 그녀는 우리가 믿는 것, 행하는 것까지 지배하려 듭니다. 그녀는 스스로 우리의 영혼과 구원(救援)을 책임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일러준 대로, 가르쳐 준 대로 절대적으로 철저히 굴복(屈伏)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로마 카톨릭은 전체주의적 체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인권을 유린(蹂躪)하는 것이나, 히틀러가 그의 잔혹한 체제 안에서 했던 행위만큼이나, 카톨릭이 신도들의 혼을 절대적으로 얽어매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이 전체주의적 체제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절대권위(絶對權威)를 행사하며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버티고 서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드러난 두 번째 증거로서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지만, 로마 교황(敎皇)과 교황에 대한 온갖 가르침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대리자(代理者)’로 일컬어집니다. 그는 사도 베드로의 영적인 직계 후손으로서, 사도적 계승(使徒的 繼承)을 통해 사도 베드로의 모든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말합니다.

        나 자신 베드로 수위권(首位權)에 의문을 제기함으로 곁길로 빠지고 싶진 않지만, 그것이 그들의 주장 그대로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 교황을 ‘거룩한 아버지’(성부, 聖父),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부릅니다. 비록 성경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땅 위의 어떤 사람도 ‘아버지’(Father)라 부르지 마라.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아버님뿐이다.”고 말씀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들은 추기경(樞機卿) 회의에서 ‘권좌(權座)로부터’ 선언한다고 하면서 교황이 “절대무오(絶對無誤)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1870년에 교황의 절대무오성 교리를 규정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그것을 믿어 왔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규정됨으로써, 그가 선언하는 것들은 절대무오하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으니, 곧 하나님의 말씀처럼 절대무오하고, 그리스도 자신처럼 절대무오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여러분이 알다시피, 교회의 권력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처럼” 말하는 이 한 사람의 권위 아래로 모아지게 됩니다. 그는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 있고 그들은 그 앞에서 절하며,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질 수 없는 경의(敬意)를 그에게 표시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드러난 증거는 사제직(司祭職)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사제들은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신자들의 보편적 성직체계를 믿지 않습니다. 성직자(사제)가 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카톨릭 교회에서 훈련받고, 교회의 성직수임(聖職受任)을 받아, ‘사도적 계승’에서 나오는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은 우리 모두가 성직자들이라고 알려 줍니다 “여러분은 선택받은 세대요, 왕가의 성직자 체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직자들의 왕국(王國)’이란 말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전혀 “아니올시다”입니다. “당신들은 단지 평신도(平信徒)일 뿐, 결코 성직자가 아니며, 오직 카톨릭에서 수임을 받은 사람만이 성직자(사제)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제들에게 기적을 행하는 것과 같은 독특한 권능을 부여해 줍니다. 바로 여기에서 심각하고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들은 사제가 하나님의 은혜가 물에 임하도록 세례(洗禮)에서 사용되는 물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들은 주님의 만찬(晩餐)에서 빵과 포도주와 연관된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의 그같은 능력을 ‘화체’(化體)라고 부릅니다.

        빵은 더 이상 그냥 빵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고 그들이 말하는데 겉모습과 색깔은 잔상(殘像)으로 남지만, 내용물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화체(化體)된다고 하며, 이러한 기적(奇蹟)은 그러한 기적을 일으킬 권능을 소유한 사제에 의해서라야 수행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같은 주장은 당연히 성례전(聖禮典, 성사)에 관한 교리 전체로 이어집니다. 카톨릭엔 일곱 성사(성례전)가 있지만, 본인은 이 중 특히 세례성사(洗禮聖事)와 성체성사(聖體聖事) 대해 관심이 있으며, 그들은 이 두 성사에 기적이 역사한다고 서슴없이 가르칩니다.

        그들의 이론은 이러하니, 즉 사제의 역할에 의하여 물과, 빵, 포도주에서 기적이 역사하게 되며, 그 결과 이것들에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부여되는데, 그같은 기적적인 역사는 거의 자동적(自動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현상을 그들은 “ex opere operato”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더 이상 그냥 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부여된 물이므로, 그 물을 어린아이 위에 부으면, 어린아이 안에서 기적이 역사(役事)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혹은 성찬식(聖餐式)에서 여러분이 빵을 취하게 되면 --- 거기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포도주는 마시지 못하게 하지만 --- 여러분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것은 마귀의 교활한 속임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첨가’된 것으로서, 거기에 대해 신약 성경에 단 한 단어의 언급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사제에 대한 언급을 마치기 전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니, 곧 로마 카톨릭의 사제는 우리가 그 앞에 나아가 우리 죄들을 고백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카톨릭에서 사제는 면죄(免罪)를 선언하고, 우리에게 죄사함을 베풀 수 있는 권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특별한 능력을 할당받은 사제직(司祭職)에 속한 사람들 외에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도록 교육을 받습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죄(허물)를 하나님께 고백해야 하고, 거듭난 크리스천들의 교회 안에서 서로에게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사제들’에게 고백하라는 말씀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또 하나의 드러난 증거가 있습니다. 본인은 카톨릭 체제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교묘히 끼어 들어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죄를 고백하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지만, 카톨릭 교도들은 사제들에게 갑니다.

        네 번째의 증거로 들어가겠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를 가장 경악스럽게 하는 터무니 없는 궤변(詭辯) 중의 하나입니다. 로마 카톨릭주의의 마리아 숭배가 놀라울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에서 마리아는 ‘하늘의 여왕’으로 일컬어지며, 그녀는 우리가 일차적으로 찾아가야 할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많은 성당들 가운데서 성모(聖母) 마리아 상(像)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에 의해 가려져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여기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인간적인 모습을 지닌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훨씬 사랑스럽고 부드럽게 다가오며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하고 강력하며 권위 있으신 반면 너무 엄격하십니다” --- 이것이 그들의 가르침이며, 마리아 숭배에 대한 설명의 전부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도 엄격하기에 우리는 그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성모 마리아가 거기에 함께 계시는데 그녀는 사랑이 넘치시며 더욱이 그녀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시기 때문에 예수님께 영향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중보(仲保)해 주시도록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바로 우리 영혼의 구주이신 하나님의 아드님과 우리 사이에 위치하고 계십니다. 로마 카톨릭은 점증적으로 마리아의 권능에 뭔가를 ‘첨가’해왔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1854년에 마리아의 ‘무염시태설’(無染始胎說)을 교리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아의 무염시태설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없이 태어나셨듯이, 성모 마리아도 또한 그렇게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마리아의 몽소승천’(蒙召昇天)의 교리를 발표했는데, 그 의미는 마리아가 여타의 일반인들과는 달리 결코 죽지 않았고 묻히지도 않았으며, 그녀의 아드님처럼 문자 그대로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가르침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세워주며, 그녀를 두드러지게 부각시킴으로 그리스도 자신은 아예 시야에서 가려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 숭배에 뒤이어 ‘성인’(聖人)들 숭배가 추가됩니다.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성인들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습니까? 자, 그들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현세에서도 완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일부의 성인들이 현세에서 그렇게 완전한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산 결과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의 ‘공덕’(功德)을 획득하고 쌓아올리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공덕을 과다히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여러분과 내가, 공덕이 아무리 턱없이 모자라고 부족하다 할지라도, 성인들에게 가서 기도하여 간청하면 그들의 과다량의 상당부분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것을 ‘적공’(積功, 공을 쌓는 일)이라 칭하는데, 곧 성인들이 우리를 위해 중보할 수 있고, 우리가 부족하거나 결핍되어 있음이 발견되면 그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공덕의 잉여분을 우리에게 전가(轉嫁)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여러분은 성인들을 숭배하고, 성인들에게 기도하며, 그들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덕만으로는 충분치가 않고, 여분(餘分)으로 상당량의 공덕이 추가로 보충(補充)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으로 카톨릭의 전반적 체계 및 제도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 자 사이에 교묘히 끼어 들어오는지에 대해 간단히 다섯 가지 요점만 정리해 보았습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한 신성을 부여하고 성육신, 동정녀 탄생 및 정통교리들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같은 일들이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귀의 온갖 속임수가 들어오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한편으로는 로마 카톨릭이 뭐든지 옳은 것만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문제는 그 다음에 ‘첨가’(添加)시키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그릇된 나머지, 도대체 옳은 것 중에서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아하게 만들 정도입니다.

        3. 계속해서 세 번째 오류는, 로마 카톨릭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심을 강탈할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구원의 영광과 완전성(完全性)과 충분성(充分性)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칭의(稱義) --- 곧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문제와 관련된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 첫 번째 예를 들어봅시다. 루터가 말했듯이 이것은, “교회가 일어설 것인지 넘어질 것인지의 테스트”요 --- 프로테스탄티즘을 존재하게 만든 동인(動因)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영광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 의롭다함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요? 나는 이따금씩 우리 곧 프로테스탄트들이 과연 우리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아해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의롭다함의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할 때, 로마 카톨릭주의가 성장해 간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못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단지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동안에 카톨릭주의는 성공(成功)을 보장받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주의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놀랄만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

        로마교의 가르침은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는 데 있어 스스로 기여할 부분이 있으므로, 죄투성이인 인간이라도 선행이나 공적을 쌓는 행위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고 또 그렇게 가르칩니다.

        우리 프로테스탄트는 “의인(義人)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와 같으며”, 혹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 기록하였듯이, “배설물”(똥)과 같아서 거부해야 할 것이요, 무가치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것을 극구 부인하며, 사람의 의는 가치가 있고 중요하며 유익을 끼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카톨릭이 궁극적으로는 세례(洗禮)를 통해 의롭게 된 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입니다. 세례는 다른 모든 교리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는 여러분의 죄를 사해줄 뿐 아니라, 여러분 안에 의를 주입시켜 주므로, 여러분이 세례에 의해 의롭게 된다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비록 의식(意識)이 없는 영아라 할지라도 전혀 문제되지 않으며, 그들도 세례로 의롭게 되고, 그들의 원죄가 세례로 말살(抹殺)되며, 그들에게 이같은 적극적인 의가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의가 아니며, 그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례받은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의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옷입지 않고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프로테스탄트의 가르침을 위험한 이단(異端)교리라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펴보셨듯이 카톨릭의 가르침은 모든 것을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안되게끔 만들어 버립니다. 회개(悔改)하고 그리스도께로 가서 그분을 믿음으로, 구원(救援)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 오직 사제가 베푸는 세례(洗禮)를 통해서만이 구원의 역사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모든 것에서 교회와 사제의 권위가 절대적이며 필수적이 됩니다. 그들 없이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며, 여러분의 운명은 오직 그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없으며, 반드시 이들 중보자들을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오직 한 분의 중보자(仲保者)가 있을 뿐이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아, 교황, 사제들 및 모든 고위 성직자와 하위 성직자들, 이들 모두가 필요하다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그리하여 이토록 중차대한 칭의(稱義, 의롭다함)의 교리에 있어서 그들은 거짓말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 생활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여기에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으니 곧 경건한 삶보다는 의식(儀式)과 의례(儀禮)의 준수에 더 역점을 두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거룩을 추구하고 성화(聖化)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보다는, 미사에 참석하고 사제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告白)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야 할 책임과 사람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착념(着念)하여 그대로 실행하도록 권면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가르침은 교회의 규율(規律)에 전폭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각종 의식을 지켜야 하고, 그들이 하라고 일러준 대로 행해야 합니다. 특정한 절기에는 금식(禁食)해야 하고,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하며, 사제 앞에 나아가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일단 미사에 참석한 다음에는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해도 됩니다. 여러분의 죄는 덮어졌고, 다시 올바르게 교정되었으니 계속 여러분의 길을 가십시오.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거룩한 삶의 간단 명료함 대신에, 여러분에게는 의식(儀式)들과 의례(儀禮)들과 절기(節氣)들이 있습니다.


        또다른 심각한 오류(誤謬)는 카톨릭이 ‘구원의 확신’(구원의 보장성)의 교리를 전적으로 부정(否定)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確信)의 교리만큼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서도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증거하십니다.” 그 의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없는데도 로마 카톨릭은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는 확실성(確實性)과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무슨 구원의 확신(보장성)이란 말입니까? 이것이 그들의 반박이며, 이는 매우 논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로마 카톨릭 체제가 마귀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부분이 바로 여기이며 적어도 이같은 비범한 천재성으로 이 모든 일을 성사시킬만한 존재는 마귀 외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런 식으로 적용됩니다. 여러분이 세례를 받을 때 여러분의 원죄(原罪)가 말소되고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됩니다. 아 좋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후 죄 문제, 즉 세례받은 이후에 범한 죄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여러분이 받은 세례는 세례 후에 지은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거기에 대해 어떡하시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프로테스탄트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여전히 우리를 모든 죄와 불의에서 깨끗케 하시며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나의 과거의 죄들, 현재의 죄들, 미래의 죄들을 덮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단 한 번의 행동으로 충분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로마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세례 후 죄 문제는 전혀 다른 성격의 문제입니다. 거기에 대해 내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사제에게 가서 죄를 고백해야만 하며 오직 그만이 이 문제를 다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제라고해서 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도달하게 되면, 이들 세례 이후의 죄 문제와 함께 지옥과 처벌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 때 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 문제 없습니다,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여기에 고해성사(告解聖事)가 있습니다. 사제 혼자서 여러분을 위해 그것을 베풀 수 있으며, 그는 능히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고해성사를 받게 되고, 사제에게 특별 고백을 하게 되며 여러분은 면죄를 받게 됩니다.

        그것으로 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도 안됩니다! 거진 다 왔지만, 여전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남아있게 됩니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 다행스럽게도, ‘연옥’(煉獄)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있습니다,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용서받지 못한 세례 후의 죄가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 죄를 씻기 위해 그곳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자, 여전히 남아있는 나의 친척들이 나를 위해 기도를 하며 그렇게 하면서 돈을 지불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에게는 온갖 ‘면죄부’(免罪符)들과 온갖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들’과 온갖 촛불들과 지불한 돈이 있게 됩니다. 돈을 더 많이 낼수록 이러한 죄들이 연옥에서 더 빨리 처리되며 이 사람은 연옥에서 더 빨리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같은 주장을 성경에서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물론 전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카톨릭이 지금까지 주장해 온 추가계시(追加啓示)의 일부분이며, 이것이야말로 첨가 그 자체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충분치가 못하고, 이 모든 방식들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즉 내가 이같은 로마 카톨릭을 배교집단(背敎集團)이라고 말한다 해서 지나쳤단 말입니까?


        III·결·론

        이 모든 것들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카톨릭 교도들은 무지 속에 감금되어 있으며 미신행위에 빠져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결과 이 나라에서 이따금씩 칭하는 바 ‘대륙의 일요일’ 중심의 생활방식에 점차 젖어들게 되는데, 그 의미는 여러분이 일요일 아침에 성당에 가서 미사만 드리면, 그 나머지 시간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미사 시간만 끝나면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스포츠와 행락으로 그날을 즐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한다 해서 놀랄만한 일이 못되는 것은, 개인은 고려하지 않아도 되며 관심 밖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교회가 일러준 대로 순종하고, 그 자신을 내맡기기만 하면, 그가 해야 할 일을 다한 것이요, 나머지는 교회가 책임지고 그들의 영혼을 돌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마침내, 그들이 진리의 길을 걷는 자들에 대해 잔혹한 핍박을 가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역사를 통해 로마 카톨릭 체제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뿌렸고, 여전히 도처에서 기회만 주어지면 그런 일들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며, 여러분에게 묻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껏 시간낭비를 해왔을까요? 꼭 이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만 했을까요? 마땅히 로마 카톨릭주의에 대해 새로운 접근방식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모두가 크리스천으로서 함께 공산주의에 맞설 수 있다는 그 사실에 기뻐해서는 안된단 말인가요? 여러분이 직면해야만 하는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 자신은 여기에 대해 답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 체제가 전적으로 공산주의보다도 훨씬 위험한 체제인 것은, 그 체제가 기독교로 날조(捏造)된 체제이면서도,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주빛 여자’이며, 가장 끔찍하고도, 더럽기 짝이 없는 속임수인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또다른 얼굴은 공공연하고도 명명백백한 무신론적 불신앙(不信仰)입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자(改革者)들은 결코 고집스런 열심당원들이 아니었으며, 결코 바보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열어주신 양눈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루터가 그러했고, 칼빈이 그러했으며, 낙스도 그러했고, 개혁자들 모두가 그러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눈이 열리면서, 보았습니다. 바로 성경에서 경고하면서 묘사하고 있는 이 끔찍한 괴물을 보았으며, 죽음의 위기(危機) 속에서도 이 괴물에 맞서서 프로테스트했습니다.

        그들은 그 괴물이 진리(眞理)가 아니라고 말했고, 그리하여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성경이 절대적이고, 최종적(最終的)이며, 정확한 권위임과, 모든 믿는 자들의 성직자 체계 등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그같은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많은 자들이 그 진리를 위해 순교(殉敎)당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엄숙히 경고하는 바, 여러분이 만일 로마교를 인정하는 접근을 더 기뻐하신다면, 여러분은 순교자들의 흘린 피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이 로마교의 가르침을 수용(受容)한다면 결코 스미스필드 근처에 가지 마십시오. 그곳 스미스필드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이 화형에 처해졌기 때문입니다. 존 브래드포드와 그 외의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로마 카톨릭주의를 부인한 이유 때문에 화형을 당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을 부인하고 있고, 그들에 대해 등을 돌리면서, 그들이 잘못한 것이었어, 그들의 실수였어,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를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이들의 허울좋은 논쟁(論爭)에 말려들지 마십시오.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는 이유는 무선통신과 텔레비전 때문입니다. 매스 미디어에 비치는 이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공손하고, 친절하며, 또한 훌륭한 인품을 자아내며, 무척 융통성 있어 보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종종 프로테스탄트보다 훨씬 멋있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저질적으로 비난하고,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하지만 말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그렇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가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단지 카톨릭의 과거만 들춰내려 하고, 마치 16세기에 살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지금 당신은 20세기에 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십니까?”

        본인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로마 카톨릭의 거만한 허풍(虛風)이 바로 이것이며, 로마 카톨릭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Semper eadem.” 어떻게 로마 카톨릭이 달라질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녀가 달라진다면, 그녀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는 셈이 되겠지만, 오히려 그녀는 여전히 말하기를,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절대무오(絶對無誤)하며 교황은 바로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결코 실수를 할 수 없으신 분이시다 라고 합니다.

        만일에 로마 카톨릭이 추호라도 변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카톨릭의 핵심주장을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그녀는 결코 변하고 있다고 말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혹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오히려 상태가 더 나빠진 것뿐입니다. 그녀는 16세기에 그녀가 가르쳤던 교리에서 교황의 절대 무오성과 같은 교리들을 오히려 추가시켰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로마 카톨릭 교회는 결코 달라지지 않습니다. 만일 이 지구상에 하나의 거대한 세계교회가 존재해 왔다면,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나머지 모든 교회들을 흡수하고, 무지한 상태에 있는 그들을 집어 삼켜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어려울게 하나도 없으니 로마 카톨릭 교회는 기독교 모조품이요, 가짜이며 가장 사악한 매춘부요 가장 마귀적인 집단입니다. 실로 적(敵)그리스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마땅히 거절해야 하고, 고발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대적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녀를 대적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서두(序頭)에서 말했듯이 성경적인 교리(敎理) 위에 서 있는 기독교입니다. “그리스도께로 나오라” 혹은 “예수님께로 나오라” 라고만 설교하는 기독교의 모습으로는 잠시라도 로마 카톨릭 교회와 맞설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궁극적으로는 로마 카톨릭의 숫자만 불리워 주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입니다. 복음전도자들이 전도집회를 할 때 “아, 당신은 로마 카톨릭 신자시군요, 당신의 교회로 돌아가십시오.” 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들에게 경고해 주어야만 합니다. 이 소름끼치는 모조품(模造品)에 대항해서 맞설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르침과, 단 하나의 권능이 있으니 성경의 오늘 본문말씀에서 칭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란 신약성경의 진리를 성경적이고 교리적이며 신학적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16 세기에도 동일하게 사용했던 무기입니다. 루터는 단지 피상적인 복음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막강한 신학자였고 또한 칼빈도 그러했으며 그들 모두가 그러했습니다.

        로마 카톨릭을 침식시키고 로마 교회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역사(役事)된 위대한 진리의 체계였던 것입니다. 현 상황에 대처하는 적절한 방법으로서 이것 이상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의 책임(責任)이 막중합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알아야만 하며, 진리를 이해해야만 하며, 거짓된 가르침을 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과 같은 거짓 기독교에 미혹(迷惑)되고 있는 순진한 사람들에 대해 바로 여러분이 책임이 있으니, 그들의 눈을 열어주며,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그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견고하게 설 때에야 비로소, 성령님의 복이 우리 위에 임하시도록 열정(熱情)과 확신(確信)을 가지고 기도할 자격이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위에 굳게 서고, 성경의 진리 위에 굳게 설 때, 본인이 믿기로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위에 강력한 부흥(復興)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그같은 강력한 부흥만큼 이 가증한 체제, 곧 스스로 로마 교회라 칭하는 저 큰 ‘매춘부’(賣春婦)를 쓰러뜨릴만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에게 빛을 주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를 분별(分別)하게 하시며, 너무 늦기 전에 우리를 흔들어 깨워 주소서.

        너희가 마귀의 속임수를 능히 대항하여 서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에베소서 6장 11절).

        *청교도 클럽 puritan,hanmom.com 자료이며, 개혁신학연구소에서 퍼온 글입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교리공부의 목적과 방법, 교리의 필요성과 중요성 

         [마틴 로이드존스]

         

        1장 교리공부의 목적과 방법


        성경본문으로 시작하는 것이 항상 유익합니다. 설교를 하려는 건 아니지만, 제가 말하려는 모든 것의 배경이 되고 본 성경 교리 시리즈 연구에서 하려는 일을 설명해 줄 성경 말씀 신명기 29장 29절로 시작하겠습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이제 서론으로 강의를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는 데는 서너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하려는 일이 과연 옳은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리에 대해 별로 많이 들어 보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심지어 어리석게도 자기들은 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딱하고도 유감스러운 태도입니다. 

        한때 성경 교리에 대한 강좌나 설교는 매우 흔했지만 지금은 비교적 보기 드문 것이 되었습니다. 특히 20세기에 들어 더욱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런 비판을 직접 다루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좋은 출발점이 됩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나는 우리가 마음속으로 아주 분명하게 정리해야 할 몇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즉, 우리가 이 교리 강좌에서 무엇을 하려 하는가, 어떻게 하려 하는가, 왜 하려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1. 성경교리란 무엇인가

            -중략-


        2. 어떻게 성경 교리를 공부할 것인가

            -중략-


        3. 왜 우리는 성경교리를 공부해야 하는가


        지금까지의 내용이 우리가 앞으로 교리를 고찰해  나가려는 방법의 대략적인 정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지막 요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왜 우리는 이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믿는가?’

        이 질문에 대해 제가 제시하려는 몇 가지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성경 자체가 교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관심은 특정한 진리들을 우리에게 분명히 제시하는 것인데, 그 진리들이란 교리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올바르게 읽는다는 말은 교리에 대해 숙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리 자신이 그 교리를 이해하기 원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성경을 대단히 잘 알 수 있으나, 그 교리들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한다면, 성경에 대한 내 지식은 내게 전혀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해볼까요. 그것이 바로 선지자들이 한 일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들에 대해 읽어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던가요? 선지자들은 교리를, 특히 율법에 대한 교리를 붙잡고 있었으며 그 교리들을 역설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적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민족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백성아! 너희는 율법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율법이 너희에게 보여주고 있는 이 사실을 너희는 이해하고 깨달아야만 한다.” 선지자들은 백성에게 교리를 설교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 스스로도 이 일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주님이 산상설교에서 정말로 하셨던 일이 바로 이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5:27~28) 주님은 율법을 취하사 그것을 교리의 형태로 해설하셨습니다. 주님은 교리를 설명하셨습니다. 주님은 그저 율법을 일반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윈리들을 뽑아내서는 그것을 적용하고 시행하셨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사도들이 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고 초대 그리스도인 설교자들의 설교를 관찰해 보십시오. 그들이 무슨 일을 했습니까? 그들은 본문을 취해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그 본문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제시하고 분석하는 등의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설교하는 방식은 교리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메시지가 있었고 그것을 백성에게 제시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교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바로 설교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설교의 목적과 기능입니다. 설교는 단순히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기회가 아닙니다. 거듭 말하건대 설교는 그저 성경 구절의 다른 번역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설교의 목적은 진리를 회중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설교의 본질적인 역할, 그것을 행했습니다.

        신약 서신서들을 예로 들어 봅시다. 서신서는 무엇입니까? 이 서신서들에서는 몇몇 위대한 교리를 강조하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교회들에는 특별히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신서 저자들은 교리를 취해 그것을 실제적인 방식으로 적용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언제나 교리를 표현하고 설명하는 데 관심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제가 이 일을 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저는 성경이 그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합니다. 성경 자체게 그렇게 하며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또 다른 이유는 교리를 공부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해 말하곤 합니다! 우리 주님 당시 유대인들의 진짜 문제는 그들이 문자에만 얽매여서 그 정신은 결코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교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을(words) 안다는 데 만족하여 말씀(word)은 결코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대인의 상황에 우리 모두도 처할 수 있다는 위험한 가능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문자에만 얽매인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자에 얽매이는 것은 우리 영혼을 저주받게 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나서도 교리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연구가 전혀 유익이 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연구가 대단히 지적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보내는 좋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성경교리를 연구하는 또 다른 이유는 수십 세기동안 교회가 언제나 성경 교리들을 강조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해 왔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가장 초창기부터 온갖 희생을 치르고 예수가 주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교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 여러분은 교리적 진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례형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례를 받고자 하는 지망생들은 교리 문답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몇 가지 질문을 받았으며,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시지요? 금세 이단들이 일어나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올바르지 않은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상당히 진실하고 진지하긴 했으나, 옳지 않고 해로운 것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단 교사들과 거짓 교사들은 교회 내에 혼란을 야기했을 뿐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도 잘못 인도했습니다. 교회 내에 이교가 발흥함에 따라 초대 교회는 우리가 보통 신경이라고 부르는 것, 예를 들면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 등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너무 많은 오류와 이단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 그런 신경들을 필수적인 것이 되었으며 교회는 성령의 인도 아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믿지 않는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성경을 펼쳐서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완벽하게 진지하고 진실한 사람들도 성경을 읽고 나서 상당히 잘못된 것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리를 규정해야 합니다..” 교리들에 대한 정의들을 우리는 신경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어떤 의미에서 하나였던 교회가 동방 교회와 서방교회 둘로 나뉘어졌습니다. 하지만 교리는 대체로 동일했습니다. 교회가 죽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 세 개의 위대한 신경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 후에 개신교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새 생명, 새로운 활력, 새로운 이해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교회는 교리를 정리하는 것과 그것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진술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개신교도 간에 흔히 위대한 신앙고백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 교리들을 함께 열거하고 해설해 놓은 것일 뿐입니다. 그 지도자들은 다시 한 번 “사람들에게 성경을 펼쳐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들은 길을 잃기 쉽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떤 것을 믿고 어떤 것을 믿지 않는지를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교회에 대해, 그 외 다른 것들에 대해 말해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영국교회에는 [39개 신조]라는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또한 유럽 대륙에도 많은 유명한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모라비아 교회의 신조와 개혁 교회의 신조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17세기 웨스트민스터에서 작성되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라고 불리는 위대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교회와 전 세계 모든 곳에 있는 장로교회 신앙고백입니다.

        이 모든 신앙고백들 및 그에 수반되는 교리 문답들은 교회 안의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게 하고, 그 믿음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도록 하기 위해 성경 교리를 진술한 것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를 믿음 안에서 든든히 세우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교회의 초기 시절에 이 모든 것이 필요했다면, 종교개혁 시절과 17세기에 이것이 필요했다면, 분명 그것은 지금 현재 이 순간에도 긴급하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오늘날 교회는 사이비 종교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러분의 문 앞에 와서, 그들 말로는 “성경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가르치는 성경을 자기들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말을 하는 순간, 여러분은 본능적으로 뭐가 잘못되었다고 느끼지만, 그들에게 대답을 제대로 하지는 못합니다. 성경교리를 연구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함께 그런 가르침들에서 잘못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성경이 정말로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기시키려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알게 되면 우리에게 제시되는 다른 모든 가르침을 평가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교회 주변에만 이 모든 오류와 사이비 종교의식들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바로 교회 안에도 심각한 혼란이 있습니다. 교리가 존재하지 않고, 분명한 정의가 없으며, 누구든 자기 좋은 대로 말하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교리를 함께 고찰해 보는 일이 지금보다 더 긴급하게 필요한 때는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토대에 서 있는지 알아야 하며,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오는 모든 원수, 모든 교활한 원수, 우리의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오는 마귀가 사용하는 모든 계략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 교리를 여러분과 함께 고찰해 보아야 할 더 고상한 이유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교리 공부는 하나님을 참으로 알며,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에 들어가며,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길이 얼마나 경이로운가를 어느 정도 알게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렇습니다. 계속 성경을 읽고 연구하도록 하십시오. 하지만 세부적인 것들에 매여 헤매지 마십시오. 이 위대하고도 강력한, 교리의 최고봉들을 뽑아내어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합시다.

        우리는 하나님 아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배입니다. 성경에 고찰은 언제나 예배이며, 성경과 그 가르침에 대하여 다른 교과서들에 대해 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말합니다. “신학 대학들이 대체 뭐가 잘못된 것입니까? 내가 아는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신학대학에 들어갈 때는 멀쩡했는데, 졸업하고 나올 때 모습을 좀 보세요!” 그것이 언제나 시실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호들갑스럽게 이야기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그 말이 간혹 사실이라면 제가 여러분에게 그렇게 된 이유를 말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경우의 사람들은 성경을 마치 하나의 교과서인 양 접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너무 자주 이 위대한 교리를 마치 그것이 인간의 사상과 아이디어인 것처럼 접근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예배와 경외하는 마음으로 교리를 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번역과 지적 지식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꼭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교리는 연구 주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교리를 알기를 소망해야 하지만 그 이유는 그것을 배운 후 그 지식으로 교만해지거나 지적 흥분을 느끼려는 것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더 온전한 방식으로 바라보게 됨으로 인해 하나님께 예배와 찬양과 경배로 더 가까이 나아가자고 하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시고, 이 교리들로 인해 우리 모두가 소생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또한 우리 및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 모든 교회가 소생하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다시 한 번 목도하기를 소망합니다.


        (로이드존스 교리강좌시리즈 1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 中에서 발췌)

        --------------------------------------------------------------------------------------------------------



        20세기 최고의 강해설교자 로이드 존스의 위대한 기독교 교리 강좌 시리즈

        - 모든 기독교인의 서가에 자리해야 할 영원한 필독서 -

        - 이보다 더 감동적인 교리서는 없다 -


        <세트 구성>

        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 시리즈 1 (페이지 616, 가격 22,000) -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 시리즈 2 (페이지 456, 가격 18,000) - 성령 하나님과 놀라운 구원

        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 시리즈 3 (페이지 392, 가격 16,000 ) - 영광스러운 교회와 아름다운 종말


        ┃발간사┃ 

        20세기 최고의 강해설교자를 통해 위대한 기독교 교리 시리즈 강의를 듣는 기쁨

        백금산(예수가족교회 담임목사)

         


        지금까지 저에게 영향을 끼친 분들은 부지기수입니다.

        만일 단 한 사람만 꼽으라고 한다면 로이드 존스를 들고 싶습니다.


        저는 그를 통해 신자가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지를 깨달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를 통해 목회자의 영광스러움과 설교의 영광스러움을 보았습니다. 이 외에도 저는 그를 통해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그에게서 성경에 계시된 복음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배웠습니다. 또한 성경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신학만이 아니라 조직신학의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교회사를 아는 것, 특별히 부흥의 역사를 아는 것의 중요함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경건 생활의 불꽃을 유지하는 데 신앙위인들의 전기를 읽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무엇보다 제 인생의 또 다른 결정적인 만남인 조나단 에드워즈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로이드 존스를 통해 청교도 신학의 광맥을 찾아가는 지도를 얻게 되었고, 로이드 존스를 통해 독서의 중요성과 방법에 대해서도 많은 통찰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를 통해 출판사나 도서관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자극도 받게 되었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오늘날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나 내가 활동하고 있는 대부분의 분야들이 로이드 존스를 알게 된 데서부터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에게 참으로 많은 은혜를 입은 셈입니다.

        이제 저는 로이드 존스의 대표적인 작품인 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 시리즈를 출간함으로써 그에게서 받은 은혜의 일부를 갚고자 합니다.

        이 로이드 존스 교리 강의 시리즈는 그의 유명한 로마서 강해를(1955~1968년) 하기 직전에 1952년부터 1955년까지 약 81회에 걸쳐 금요일 밤에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를 설교식으로 강의한 것입니다.


        기독교 교리를 조직신학 책을 통해 말하지 않고 설교를 통해 말했기 때문에 책처럼 항목과 길이에 있어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면은 있지만 교리가 아주 생동감 있게 전달되는 장점이 있습니다.


        내용의 상당 부분은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참고하여 설교식으로 쉽게 풀어쓴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의 탁월한 통찰력과 뛰어난 전달력은 벌코프를 참고한 부분조차 전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조직신학을 딱딱하게 접하지 않고 감동적으로 교리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큰 유익을 줍니다.


        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 시리즈 또한 로이드 존스의 저작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저술에 속하기 때문에 이번 새로운 번역본이 여러분에게 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 시리즈를 공부하는 데 한층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이 책은 제가 꼭 번역하고 싶었던 책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인 사정상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어 훌륭한 다른 번역자를 물색했습니다. 마침내 모래 속에서 진주를 발견하듯이 실력 있는 번역자를 발굴하여 새롭게 번역을 했습니다.


        이 책을 번역한 임범진 형제는 청년 시절부터 제가 저희 교회에서 신앙 지도를 한 제자입니다. 연세대 의대를 나와 현재 충남대 교수로 있는 의사로서 영어 실력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독학으로 이미 벌코프의 『조직신학 시리즈』와 웨인 그루뎀의 『조직신학 시리즈』 등의 기본적인 조직신학 책들을 아주 철저하게 마스터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범진 형제는 저와 같이 로이드 존스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고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강해를 독파하여 제가 저희 교회 32과목으로 편성된 예수대학 성경공부 커리큘럼 중 로마서 강사로 임명한 형제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저자인 로이드 존스도 의사 출신으로서 정규 신학교를 나오지 않고 독학으로 신학 공부를 한 분입니다. 이제 로이드 존스의 이 주저가 역시 의사 출신으로 정규 신학교를 나오지 않고 독학으로 신학 공부를 한 사람에 의해 번역된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제 이 책을 통해 이 땅의 수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위대하고 풍성한 하나님의 진리가 꿀처럼 달콤하게 맛보여지고, 금처럼 소중하게 취급되기를 기도합니다.

         

         

        ┃들어가는 말┃


        로이드 존스 박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매주 금요일마다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한 방에서 토론 모임을 열었습니다. 이 토론 모임에서 다룬 주제들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면서 겪는 실제적인 문제들이었으며, 이 모임에는 많은 사람이 참석했습니다.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들은 온갖 종류의 성경적 가르침에 대한 지식을 요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또한 종종 교리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이 때는 보통 로이드 존스 박사가 토론 말미에서 요약하면서 그것들을 다루곤 했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이 금요 모임의 장소를 본당으로 옮겨 제기된 중요한 주제들에 대한 연속 강의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일단 사람들이 그 방에 수용하지 못할 만큼 많아졌기 때문이었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너무 많은 사람이 그에게 성경적인 교리에 대해 질문을 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1952년부터 1955년까지 교리 강의를 했으며, 그 후에는 1968년에 은퇴할 때까지 그의 대작이라 할 수 있는 로마서 강해설교 시리즈를 계속했습니다. 교리 강좌를 들은 회중은 그 강좌를 매우 높이 평가했고, 교리 강좌를 들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큰 힘을 얻게 되었음을 수년 동안 간증했습니다.


        후에 로이드 존스는 정규 강해설교의 일부로서 교리를 설교하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특정한 교리에 대해 알고 싶어할 경우, 교리 교과서에서 그것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지만 그의 교리 연구의 큰 강점은 교리 강의가 무미건조한 교과서적 강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설교자였으며 이 점이 모든 강의에 확실히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그는 목회자였기 때문에 복음의 놀라운 사실들에 대해 그가 느끼는 경이로움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언어는 명확했고 복잡한 학술 용어들로 뒤죽박죽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틴데일(Tyndale)처럼, 그는 진리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표현되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그는 진리가 머릿속에만 남아 있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모든 강의에 적용 항목을 포함시켜 사람들의 마음과 의지에 분명한 영향을 주고자 했습니다. 이 강의들에 있어서 그의 가장 큰 동기는 하나님의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박사의 설교와 책들을 이미 잘 아는 사람들은 이 교리 강좌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몇몇 주제에 대한 그의 견해가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되어 온 것이며, 그가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 언제나 똑같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과거의 많은 위대한 설교자들의 사역과 마찬가지로 그의 사역이 풍성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결코 변함이 없었으며, 그의 나팔은 불분명한 소리를 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로이드 존스 박사의 테이프들은 마틴 로이드 존스 녹음사(Martyn Lloyd-Jones Recording Trust)에서 배급을 맡고 있으며, 그의 모든 테이프 가운데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것은 이 교리 강의입니다.


        지금은 기독교 신앙의 중요 진리들에 대한 지식이 이전 어느 시기보다도-확실하게는 이 강의가 진행된 1950년대보다-부족한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강건하게 하시는 일에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이 교리 강의들을 다시 사용하시고 복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

         

        교리의 필요성과 중요성


        교리는 성경 해석의 열쇠다


        무엇보다 먼저 교리는 성경 해석, 성경 이해와 관계가 있습니다.

        교리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하는 열쇠와 같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바르게 읽고 해석하고 적용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성경의 교리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배우는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성경의 중요성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자신의 신앙과 삶의 유일무이한 법칙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모든 신앙의 근거와 대상은 바로 성경입니다. 또한 성도들의 삶의 내용 또한 성경을 근거로 합니다. 즉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입니다.


        교리와 성경의 주제

        그렇다면 성경과 교리와는 어떤 관계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면 되었지 교리는 왜 필요합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산다’ 고 하는 것을 조금 더 깊게 생각해 보면 이 말의 의미는 바로 ‘교리대로 믿고, 교리대로 산다’ 고 하는 말과 동일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대로 믿는다고 말할 때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교리란 바로 우리가 믿어야 할 그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성경대로 산다고 했을 때,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내용이 있습니다. 교리란 바로 우리가 살아야 할 그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리란 바로 성경의 내용, 성경의 메시지로서 우리가 믿어야 하고 우리가 살아야 할 성경이 말하는 주제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이러한 중심내용, 주제를 먼저 파악해야만 합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라는 신학자는 성경과 성경 속에 담겨있는 주제를 조직화한 이러한 교리와의 관계를 자연 속에 있는 꽃과 식물원에 있는 꽃의 차이를 통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자연 속에는 여러 가지의 꽃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습니다. 그러나 식물원에 있는 꽃들은 사람들에 의해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위치가 배열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어떤 기준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배열된 식물원의 꽃이 자연 속에 있을 때나 식물원에 있을 때나 동일한 꽃입니다. 그러나 식물원에서는 꽃과 나무들이 일정한 주제나 기준에 의해서 체계적이고 조직화된 상태에서 배열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전체적으로 일목요연하게 꽃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성경과 교리는 바로 이러한 관계에 있습니다. 교리는 바로 성경 속에 흩어져 있는 내용을 같은 주제별로 조직화시킨 것입니다. 즉 성경의 주요 주제들을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종합해 놓은 것입니다.

        즉 교리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내용들의 핵심이자 요약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해당 주제에 대한 교리를 알 때, 그 주제와 관련된 성경의 많은 구절들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열쇠를 가지게 됩니다.


        교리와 전통

        우리는 교리와 성경해석과의 상호관계를 조금 더 분명하게 알기 위해 먼저 전통과 성경과의 관계를 잠시 고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통과 성경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파악하기 위해 초대교회의 상황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성장해감에 따라 초대교회는 교회 안팎으로 위기와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밖으로는 유대주의와 로마제국의 박해와 안으로는 이단의 등장으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를 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단들이 생기면서 이단들은 성경이외의 다른 계시의 원천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성경을 엉터리로 이상하게 주관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초대교회는 어떻게 이러한 이단의 문제에 대처했을까요?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이러한 이단들에 대처하기 위해서 다음의 2가지 사항을 분명하게 주장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만 자신을 계시 하셨다. 성경이외의 다른 계시의 통로는 없다.

        둘째 성경의 해석은 지금까지 사도들로부터 전승되어온 전통적인 방식으로 해야 한다. 성경을 주관적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즉 교부들의 성경해석의 원칙은 새로운 해석이 아니라 전통적인 해석, 주관적인 해석이 아니라 객관적인 해석을 통해서 성경의 참된 해석의 기준, 정통적 해석의 기준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통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전통이란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성경해석, 정통적인 성경해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적인 성경해석은 오늘날 우리가 신조 혹은 신경이라 부르는 내용들에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중세기로 접어들면서 중세 카토릭 교회는 전통에 대한 새로운 주장을 내세웠습니다.

        로마 카토릭 교회는 성경이외의 전통이라는 계시가 있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중세 교회가 하고 있는 성경에 없는 수많은 의식과 행동들을 전통에 근거해서 정당화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중세 카토릭주의자들의 잘못된 성경관과 전통관에 반대하면서 ‘오직 성경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개인적으로 마음대로 해석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말은 성경은 교회 공동체가 함께 읽는 방식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은 초대교회가 해석했던 방식 즉 전통적인 방식으로 읽어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전통이란 단어는 2가지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로마 카토릭은 전통이라는 말을 성경이외의 또 다른 계시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로마 카토릭과는 달리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전통이란 초대교회로부터 전승되어온 바른 성경해석, 정통적 성경해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통이란 2가지의 성경해석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는 역사적으로 선조들이 성경을 해석해 왔던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믿음의 공동체에서 함께 성경을 해석해 왔던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의에 비추어서 볼 때 교리란 무엇입니까?

        교리는 바로 초대교회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성경의 바른 해석, 정통적 해석을 의미합니다. 교리란 바로 이렇게 전통적인 방식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험한 생각은 교리와 성경해석을 서로 분리시켜서 교리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리 따로 성경 따로 분리시키는 것은 교리에 대한 가장 잘못된 생각입니다. 교리는 성경을 해석하고 또한 성경에 의해서 심판을 받습니다. 교리는 성경에 기초하고 있으면서도 성경해석의 틀이기도 합니다. 결국 교리와 성경과의 관계는 순환적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교리가 나옵니다. 그러나 교리가 성경을 해석합니다. 교리와 성경사이에는 이와 같은 피드백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호 보충적입니다.


        교리와 성경해석

        우리는 교리의 일차적인 목적이 바른 성경해석의 열쇠를 제공해 주는 데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종교개혁자 칼빈의「기독교 강요」또한 바로 이런 성경해석을 위한 안내서로서 기록된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와 같은 기독교 교리의 주요 주제에 대한 체계적인 제시는 성경에 대한 가장 뛰어난 안내자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리를 공부해야 합니다.

        교리는 곧 성경의 바른 해석을 위한 지침입니다.

        교리는 곧 역사적으로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성경해석을 연결시켜주는 고리인 셈입니다. 성경을 안다는 것은 곧 교리를 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다는 것은 곧 교리를 바르게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교리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인생관의 안경이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막론하고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매일 살아가는 삶의 배후에는 인생과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하는 인생관과 세계관이 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의 삶과 구체적인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인생관입니다. 전문적인 철학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기독교 교리와 세계관

        이러한 세계관과 인생관의 관점에서 교리를 고찰해보면 교리는 바로 성경적인 인생관과 세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적인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주제들 즉 가장 중요한 교리들은 다음과 같이 크게 8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1) 성경에 대한 교리

        (2) 하나님에 대한 교리

        (3) 인간에 대한 교리

        (4)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

        (5) 성령에 대한 교리

        (6) 구원에 대한 교리

        (7) 교회에 대한 교리

        (8) 종말에 대한 교리


        이러한 성경의 주요 8가지 교리에 대한 내용을 구속사적인 측면으로 요약하자면 창조-타락-구속-완성이라는 주제로 요약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인한 구원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한 구원의 완성이라는 성경의 교리는 바로 이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안경(세계관과 인생관)을 제공해 줍니다.


        우주와 인생의 기원과 목적에 대한 질문

        세상 속에 존재하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세계관과 인생관에 대한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먼저 우주와 인생의 기원 또는 목적과 의미에 대한 질문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왜 살아가고 있는 걸까? 나는 살아야 할 이유와 목적이 있는 것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일까? 이 세상은 언제부터 존재하게 된 것일까?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과 우리 인간이 존재하는 것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 세상과 인간은 영원 전부터 그냥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세상과 인간의 악과 비참에 대한 질문

        또한 이 세상과 인간의 악과 비참의 문제에 대한 질문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인간들 사이에 전쟁을 해야 하는 것일까? 왜 인간사회에는 이렇게 범죄가 발생하는 것일까? 범죄 없는 세상이 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일까? 왜 인간에게는 질병이 있는가? 왜 인간사회에 기근으로 인한 고통이 없어지지 않는가?’


        개인과 역사의 종말에 대한 질문

        또한 개인과 역사의 종말에 대한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죽고 난 다음에 새로운 세상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이 죽으면 그대로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이렇게 살다가 그냥 없어진다면 지금 이 세상에서 조금 더 오래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세상의 역사는 마냥 지속되는 것일까? 앞으로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세계관과 인생관에 대한 인간들의 답변과 하나님의 답변

        이러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들, 즉 우주와 인간의 기원문제, 현재 삶의 목적과 의미의 문제, 인간의 사후와 역사의 종말에 대한 문제 등에 대한 인간들의 답변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으로는 이러한 중요한 질문들에 대해서 답변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유한하고 인간의 경험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철학과 현대인들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하려고 하는 희망을 더 이상 품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 더 적극적으로 우리 인간의 머리로는 풀 수 없는 질문이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무의미한 질문이라고 치부해버리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정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답변 즉 교리입니다. 성경의 창조와 타락과 구속과 종말에 대한 교리야말로 바로 이러한 인생관과 세계관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기 때문에 진리이며, 정답입니다. 성경의 창조교리는 우주와 인생의 기원과 목적에 대한 바른 해답입니다. 성경의 타락과 죄에 대한 교리는 바로 인간의 범죄와 악의 현실에 대한 문제에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구원 교리는 인간의 구원 가능성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종말과 죽음에 대한 교리는 우리의 영원한 미래의 운명에 대한 해답입니다.


        교리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인생관의 요약

        그러므로 교리는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생관과 세계관에 대한 정답 즉 진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리는 나의 믿음을 진리에 기초하게 하고, 나의 삶을 진리에 기초해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즉 교리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사활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교리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바로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하며,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또한 교리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진리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확신을 포기해버리고 상대주의적이고 회의주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현대에 있어서 이러한 진리에 대한 확신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주관주의나 상대주의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세계관속에서 교리에 대한 확신 곧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에 대한 확신은 어두운 이 세상에 비추이는 밝은 등불이 될 것입니다.

         

         

        교리는 교회 공동체의 신분증이다

         

        교리는 공동체의 아이덴티티 즉 공동체의 자기 정체성을 가지도록 해 줍니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개인의 자기 이해가 그 사람의 행동을 규정해주듯이 우리는 누구인가? 라고 하는 공동체의 자기 정체성 또한 공동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와 사명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지름길입니다. 즉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 던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교회의 존재이유와 사명에 대한 정체성 문제입니다. 교리는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에 대한 분명한 울타리를 제공해 주는 표지입니다.


        공동체의 신분표지인 교리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즉 세상과는 구별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와 세상은 무엇이 다릅니까? 무엇이 교회와 세상을 구별해 주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교리입니다. 교회가 믿는 믿음 즉 교리가 교회와 세상을 구별시켜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메시지의 핵심 즉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이고, 세상은 성경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교리는 공동체의 공동체 됨을 확인해 주는 울타리입니다. 즉 교리는 바로 그 공동체의 소속됨을 보여주는 신분증명서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2가지 의미에서 교리를 통한 공동체의 신분을 확인하게 됩니다.


        교회와 세상과의 차이를 보여주는 교리

        첫째는 교회와 세상 또는 기독교회와 기독교회가 아닌 이단을 구별해주는 표입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기독교를 유대교와 구분시켜주는 것이 곧 기독교의 교리였습니다. 즉 기독교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교리를 믿는 사람들이며, 유대교는 이러한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초대교회에 있어서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분명한 교리는 기독교와 유대교를 분리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울타리였습니다. 또한 초대교회 때 일어난 수많은 이단들 가운데 영지주의적 전통의 이단들은 예수님의 완전한 인성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단과 구별하는 참된 기독교는 바로 예수님의 완전한 인성에 대한 교리를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교리가 또한 참된 기독교와 이단을 구별해주는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교파와 교파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교리

        또한 교리는 같은 참된 기독교 안에서 교파와 교파를 구별시켜주는 공동체의 신분표지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16세기 종교개혁당시 같은 개신교 안에서도 루터파와 칼빈파와 영국 국교회 등의 여러 교파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파의 구분은 근본적으로 교회와 세상, 교회와 이단사이를 구별해주는 근본교리는 공통적으로 믿지만 이 보다 조금 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교리들에 대해서는 서로간의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즉 루터파와 칼빈파 사이에는 교리의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 서로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교리적인 차이점이 곧 루터파와 칼빈파의 내부적 결속을 다져주는 공동체의 신분확인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일차적인 교리와 이차적인 교리

        그러므로 우리는 공동체의 신분을 확인해주는 교리의 역할 면에서 교리를 다음의 2가지로 편의상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교리로서 교회와 세상을 구별시켜주는 교리입니다.

        이러한 교리에는


        (1)삼위일체 교리

        (2)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교리

        (3)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교리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이거나 교회라고 하는 탈을 쓰고 있지만 이단으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차적인 교리라 부를 수 있는 것들로서 각 교파사이의 차이를 보여주는 교리들입니다.

        이러한 교리에는


        (1)세례에 대한 교리

        (2)성찬에 대한 교리

        (3)교회정치에 대한 교리 등등을 들 수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답기 되기 위해서, 성도가 성도답게 되기 위해서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근본적인 교리를 먼저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등 동방과 서방, 카토릭과 개신교 등의 모든 세계교회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교리에 대한 내용을 먼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교회의 교회다움에 대한 초석인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은 실제적인 측면에서 자신이 속해있는 교파의 신앙고백에 따른 삶을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같은 문화권을 가진 같은 나라에 태어난 사람들이라 할찌라도 각 가정에 따라서는 가정교육의 분위기와 생활양식이 있게 마련입니다. 성도들은 넓은 의미에서는 세상과 구별되는 신앙과 삶의 양식을 가지게 되지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교파의 신앙고백과 삶의 양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교파가 속해있는 교회의 성도답게 되기 위해서는 각 교파의 신앙고백을 바로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현대교회들에서는 이러한 교회의 근본적인 교리들을 무시함으로 교회가 세상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 지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세속화된 현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자신의 교회가 소속되어 있는 교파의 신앙 고백적 전통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다른 교파의 사람들과는 좀 더 구분되는 분명한 특징을 드러내는 신앙생활을 하는 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교파간의 특색이 없다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바람직한 것 같지만 사실은 단순한 교파의 특징을 드러내는 신앙과 삶이 없는 보편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전혀 그리스도인 답게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교리는 삶의 지도다

         

        교리는 성도의 신앙생활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성도의 신앙성장이 언제나 교리와 윤리가 결합되어 있을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언제나 성도의 윤리는 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이 성도의 삶에 대해서 말할 때는 언제나 그 앞에 교리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사실을 신약성경의 성화교리는 ‘그러므로’라는 한 단어 요약되어 있다는 아주 의미심장한 관찰을 하기도 했습니다. 즉 ‘그러므로’ 앞의 내용이 바로 교리요 ‘그러므로’ 뒤의 내용이 바로 윤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항상 교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 교리를 삶 속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만큼 성화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삶의 경험과 교리와의 관계

        우리의 체험은 언어로 모두 다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체험을 언어로 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리와 체험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 가지 체험을 하게 됩니다. 죄에 대한 각성, 하나님에 대한 갈망 등등.... 이러한 우리의 체험은 곧 성경의 교리로 형성됩니다. 이런 면에서 교리는 우리의 삶의 체험을 그려놓은 지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지도가 나의 경험을 모두 다 기술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지도는 내가 경험한 실제와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둘째로 지도는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집합해 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교리는 우리의 경험을 해석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적 경험과 삶에 있어서 교리가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한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지도하던 한 학생이 신앙생활을 하던 중 갑자기 엄청난 죄의식이 밀려왔습니다. 평소에는 죄로 생각하지 않던 모든 것들이 죄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불결하고 더러운 생각과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의식이 물밀 듯이 밀려왔습니다. 실로 감당하기 힘든 정도의 경험이었습니다. 이 때 이 학생은 상당히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자기 친구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이해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는 학생을 이상한 듯이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죄의식을 체험한 학생은 자신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이 학생의 경험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있어야만 되는 회심의 경험을 한 것입니다. 회심할 때 생기는 죄에 대한 의식이 이 학생에게 생긴 것입니다. 이상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반드시 있어야 할 체험이 생긴 것입니다. 따라서 이 학생이 회심과 성경이 말하는 죄의식에 대한 바른 교리를 배웠더라면 이러한 일이 자신에게 생겼을 때에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며 자신의 체험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교리는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체험을 지도와 같이 그려놓은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교리는 우리 삶의 지도와 같은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신칭의 교리와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태도

        교리는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태도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생각은 착한 일하면 천국가고, 나쁜 일 하면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사실 자연인들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권선징악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아무런 구원받을 만한 자격조건이 없었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이신 칭의 교리를 통해서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이신칭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이신 칭의 교리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과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태도에 있어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신 칭의 교리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자신의 행위나 노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신칭의 교리를 아는 사람은 오직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달려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며 구원에 대하여 전적인 감사를 하나님께만 돌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또한 교리는 ‘왜 우리가 착한 일을 행하여야 하는가? 우리가 바른 삶을 살아야 할 동기는 무엇인가?’ 에 대한 우리의 윤리적 태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신칭의 교리를 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은 우리의 행위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으며,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은혜에 대한 반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삶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윤리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성도들에게는 모든 것이 감사요 모든 것이 기쁨이 됩니다. 또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제 자녀답게 행하여야 한다는 성도의 삶에 대한 분명한 관점을 가지고 행하게 됩니다.


        (백금산목사의 라이브러리에서 발췌-> http://rnrbook.com )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생명나무| 원글보기

        칭의와 성화 / 로이드존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꼐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에 되셨으니 (고전1:30)

         

        칭의와 성화가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살펴봅시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십시오. 

         

        칭의는 성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고, 성화는 본질적으로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복되신 삼위일체 안에서 이렇게 일을 분담하고 계십니다.

        의롭다 하며 옳다고 선언하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거룩하게 하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로, 칭의는 법정에서 일이 그러하듯이 우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인 반면,

        성화는 우리 안에서, 내면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법정에 선 나에게 재판장이 의롭다는 판결을 내리고 자유를 선포합니다.

        그 판결은 내 밖에서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화는 내 안에서 일어나고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셋째로, 칭의는 죄의 책임을 제해 주는 것인 반면,

        성화는 죄의 오염을 제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칭의는 그 정의상 단번에 일어나는 행위입니다.

        반복될 수도 없고 반복될 필요도 없는 일이므로 결코 반복되어 일어나지 않습니다.

        칭의는 하나님이 단번에 선언하는 것이지,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아닙니다.

        반면에, 성화는 계속 진행되는 과정입니다.

        장막을 벗고 완전해질 때까지 주님을 아는 지식과 은혜 안에서 계속 자라 가야 합니다.

         

        칭의와 성화의 본질적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만큼

        비성경적이고 혼란을 일으키는 잘못은 없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과 모든 가톨릭 신앙의 문제점이 여기 있습니다.

        성화와 칭의를 혼동하면 자신이 의롭게 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의심하게 됩니다.

        자신의 상태와 형편이 좋지 못하거나 죄를 지었을 때에는

        자신이 과연 의롭게 되었는지 회의가 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칭의가 법정에서 외부적으로 선언되는 것임을 깨닫는다면,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이미 의롭게 되었음을 알 것입니다.

         

         

        칭의는 죄의 책임을 제해 주며, 성화는 죄의 오염을 제해 줍니다.

         

        '날마다 읽는 로이드존스' 24p 에서..

         

        가져온 곳 : 
        카페 >말씀의 교회와 새빛장로교회
        |
        글쓴이 : 상록수| 원글보기


        거짓된 체험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결과가 일반적으로 교만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체험을 끊임없이 말하자고 그것을 떠벌리고 또한 현상적인 국면에만 강조를 하게 합니다. 재잘거리며 거짓된 안전감을 가지고 삶에 있어서 게으름을 가져옵니다.

         

        그 거짓된 체험에 말려 든 사람들이 그것을 추구함이 없이 또한 거룩을 위해서 애쓰는 것 없이 이러한 체험을 가지게 될 때 어째서 그들이 이제 와서 거룩을 좇아가려고 진력하겠습니까? 그들은 그것을 가졌고 그것이 그들에게 일어났으며 그들은 완벽합니다. 언제나 입심 좋게 재잘거리고 완고한 정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 거짓된 체험에 있어서 겸손이란 없으며 온유함도 없고 체험을 받을 때나 받은 후에도 언제나 완고합니다. 다만 육신적인 자기 만족과 이러한 자기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벌리기를 좋아하여 야단법석을 떱니다.

         


        참된 체험의 결과들은 전적으로 다릅니다. 디엘 무디는 뉴욕시의 윌 스트리트가를 걷고 있을 때에 성령이 자기에게 임했는데 그때에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언제나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너무 거룩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거의 무서웠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다같이 그것이 말로 묘사되기에는 너무 어렵다는데 의견을 같이 합니다.


         

        그것이 너무나 초월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참으로 묘사해 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압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는 그의 사랑을 받아본 자 밖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거짓된 체험을 하게 될 때에 그 사람은 그러한 어려움이 없습니다.


        마귀의 가공품인 그러한 체험은 과장으로 인도하고 또한 기만을 당한 사람은 불덩어리를 묘사할 수도 있고 전류나 뜨거운 기운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정의상 참된 체험은 묘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돌아다니면서 자기의 체험을 떠벌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감추어진 만나요 흰 돌입니다.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글쓴이 : 전상범|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구속에서의 성령의 사역

        로이드 존스

         

        지금부터 다루려고 하는 주제에 접근할 때 마음에 새겨야 할 본문으로 고린도전서 2장 6-7절보다 접합한 것은 없을 듯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이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마리 정하신 것이라.” 저는 우리가 바로 사도가 말한 온전한 사람들이라는 전제 아래 이 강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려는 일은 분명 하나님의 지혜를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그가 고린도인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이런 식으로 설교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아직 “어린 아이”였으며 “육신에 속한 자”(고전 3:1)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헬라인들이 관심을 가졌던 그런 지혜가 아니라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운명에 관련된 일들이 담겨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감추어진 지혜를 연구해 보려 합니다.

         

         

        1. 성령의 일반적 사역에 대한 보충 사항

         

        우리는 지금 성령의 사역을 고찰하는 가운데 성령의 일반적 사역을 살펴보았고, 지난 강의에서는 요한복음 16장에 기록된 성령의 사역에 대한 우리 주님의 말씀을 함께 고찰했습니다. 주님은 “그(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구절이 일차적으로 성령이 영혼 안에서 하시는 일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성령이 세상에 계신 것 자체로 인해 행하시는 일에 대한 묘사라고 해석했습니다. 지난 주 금요일 이 강단을 떠나 제 방에 들어가면서, 이전에는 분명하게 알지 못했던 무언가가 떠올랐습니다. 그 내용을 추가적으로 말씀드릴 테니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세 가지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정말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은 성령의 오심이 그리스도 그분이 진실로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오시는 분이며, 선지자이자 교사이자 하나님의 계시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라는 최종 증거이자 표시가 되리라는 것이었따는 사실이 제방에 들어가서야 떠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의를 다루시는 제사장이기도 합니다. 죄의 속죄라고 하는 단 한 가지 가능한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의를 제공하시는 분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는 만유를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이 세상 신이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인 사탄을 멸하시고,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다시리고 계시며 앞으로도 다스리실 것입니다. 모든 권세가 그리스도께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임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선지자, 제사장 왕이시라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보여 줍니다.

         

        우리는 또한 성령이 일반적인 복음의 부르심을 제시하는 일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 부르심은 불신자로 남아 있는 자들과 신자가 되는 자들 모두에게 주어지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성령은 그 메시지가 전달되도록 하시고 일반적이고 외적인 부르심이 선포되도록 하십니다.

         

         

        2. 외적 부르심에 대한 상반된 반응

         

        그러나 우리는 즉각 한 가지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 부르심, 즉 복음의 제시는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졌지만 그 결과 두 가지 부류가 생겨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볼수 있듯 어떤 사람들은 믿었고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 주님은 “청함을 받는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는 말씀으로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예언하셨습니다. 회중이 앉아 복음을 들었을 때 어떤 사람은 그로 인해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받지 못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되었고, 우리 주님이 예언하셨으며, 처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교회사에 수 없이 나타난 사실입니다. 한 부모의 자녀들이 같은 집, 같은 환경에서 자라 같은 곳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어떤 아이는 구원받고 어떤 아이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가?’라는 질문이 즉시 떠오릅니다. 성령의 사역을 다룰 때는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믿음에 관련된 가장 신비스러운 문제이지만, 그것이 이 문제를 피할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문제이지만 하나의 사실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탐구하는 것은 우리의 임무입니다. 물론 주의 깊고 지혜롭게, 우리의 편견을 확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알고자 하는 소망으로 탐구한다는 조건 하에서 그렇습니다. 여러 사람이 이 질문에 대답해 왔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일반적 부르심이 주어졌지만 그 반응은 달랐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해결책이 제시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질문에 어떤 대답들이 주어졌는지 살펴보는 것이 의미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 가지 대답은 일반적으로 펠라기우스는 공교롭게도 영국에서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그 말을 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사실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펠라기우스에 대해서는 위대한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가 효과적으로 논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펠라기우스에게 고맙게 생각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가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금 그의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잡느라 많은 글을 쓰게 했다는 것뿐입니다!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은 원죄란 없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펠라기우스는 사람들은 일종의 중립적 상태에서 태어나 살아가며, 모든 사람은 완벽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선이나 악을 선택할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거나 거부할 능력이 있다는 견해를 고수합니다. 성령은 사람 안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 견해에 따르면 성령이 하신 유일한 일은 사람을 사용해 성경을 만들어 낸 일이었으며, 그 후에는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시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성경에 동의하거나 거부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펠라기우스의 견해이며, 애석하지만 현재에도 교회 바깥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이 이 견해에 추종합니다.

         

        반펠라기우스주의자(semi-Pelagians)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 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령은 사람들을 도우시지만 사랑은 사람들 자신에게서 생겨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소망하고 진리를 알고 싶어 하기 때문에 성령이 그들에게 오셔서 도우십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펠라기우스는 너무 극단적이었습니다. 사람들 스스로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없고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이런 소망을 나타내면 성령이 도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반펠라기우스주의입니다. 일종의 협력적 은혜를 가르치고 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가 진리와 구원의 지식에 이르도록 우리와 협력하여 은혜로 도우시는 것뿐입니다.

         

        그 다음에 - 저는 이 이론들을 역사에 등장한 순서대로 살펴보고 있는데 여기서는 아마도약간 순서가 바뀔 것입니다 - 일반적으로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라고 알려진 이론이 있습니다. 이것은 17세기 초 네델란드 사람인 아르미니우스(Arminius)에세서 비롯되었습니다. 그의 위대한 제자 중 한 사람인 존 웨슬리(John Wesley)와 마찬가지로, 아르미니우스는 사람은 전적을 부패했고,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어서 성령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받아들여 믿을 수 있도록 충분한 분량의 은혜를 주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그 은혜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믿고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나요?”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이유는 믿을 수 있는 능력은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지만, 일부의 사람만 그 능력을 사용하기로 선택하고 나머지는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에도 협력의 요소가 나타나 있지만 약간 다르게 표현되었습니다.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사람이 먼저 소망하면 성령이 와 그들을 돕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인 견해는 사람은 아무것도 소망하지 않고 허물과 죄 가운데 죽어 전적으로 부패했지만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모든 사람에게 소망하고, 믿고, 받아드릴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사람ㅇ 성령과 협력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협력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멸망할 것입니다. 이것은 존 웨슬리와 이후 그를 따른 모든 사람이 실제로 가르쳤던 견해입니다.

         

        루터파 견해는 다릅니다. 역사적으로는 이 가르침이 아르미니우스주의보다 먼저 등장했지만, 이것이 흔히 개혁주의적 견해라고 부르는 것과 좀 더 유사하기 때문에 순서를 바꾸어 설명하는 것입니다. 루터파의 견해 역시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허물과 죄로 죽었기 때문에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중생의 초기 단계에서 은혜 역시 모든 사람에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고 어떤 사람들은 멸망하게 됩니까? 루터파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하는 것에 저항할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은혜에 저항하면 그는 불신자로 남아 정죄를 받습니다. 저항하지 않으며 은혜로 인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루터파의 아르미이우스주의의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사람이 협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루터파에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능동적으로 협력할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거부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문제에 대한 루터교의 전통적이 가르침입니다. 정통 루터교라면 이 세상 어디에서건 이렇게 가르칩니다.

         

        역사적으로 이렇게 네가지 견해가 제시되었습니다. 다섯째이자 마지막 견해는 개혁주의적 견해로, 영국 국교회의 39개 신조는 이 견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사실에 주의하십시오. 이것은 39개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그리고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이나 네델란드 혹은 벨기에 신앙고백 등과 같은 유럽 교회들의 위대한 역사적 개역주의 신앙고백에서, 그리고 다른 개혁주의적 교리에 대한 고전적 진술들에서 명백하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 역시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완전히 무력하고 무능력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한 사람은 구원받고 다른 사람은 멸망하는 일이 벌어집니까?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특별하 사역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성령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 안에서는 행하시지 않은 일을 구원받는 사람들 안에서는 행하신다고 말합니다. 이 견해는 선행적 은혜(prevennient grace), 즉 사전에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여 그들이 믿도록 하는 은혜에 대해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이 견해는 궁극적으로는 다른 모든 일에 앞서는 중생의 절ㅈ대적 필요성의 교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에게 친숙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 고전적 시도들이 있습니다. 저는 딱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중 어떤 이론을 신봉하고 수호할 것이지는 인류의 상태에 대해 우리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되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교리들을 다루었을 때, 저는 개혁주의적 견해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어떤 교리들보다도 이 교리를 다룰 때에는 우리 이성의 한계를 자각하고 열린 마음으로 성경에 다가가며 우리 자신의 개념이나 철학에 너무 이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아가며 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왜 이것을 믿는가? 이런 교리를 사람이 만들어 내었는가? 성경이 이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다행히도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이해함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천국에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도 있을 것이 분명하고, 아르미니우스주의자도, 루터파도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과정에 대해 잘못된 생각과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만일 우리가 이해 여부로 구원받는다면, 더 지적이고 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유리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을 이해하는 것에 의해 구원을 받지 않는다면서 왜 굳이 그런 문제를 갖고 귀찮게 합니까?”

         

        그건 정말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우리가 “귀찮게”하는 이유는 성경이 그 문제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이 자녀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이해하고 소원해야 합니다. 저는 그 이상의 일도 할 것입니다. 저의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고, 구원의 길 혹은 과정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맏음을 강화시켜 주고, 확신을 세워주며, 앞으로 주어질 복된 소망의 확실성을 알게해 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그 문제에 대해 스스로를 “귀찮게” 합니다. 지적인 측면에서도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긴 하지만, 이것이 지적 호기심의 대상은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일차적으로 가장 실제적인 이유 때문에 이 문제를 고찰합니다. 즉, 이 문제가 참으로 위로가 되고, 힘을 주며, 우리를 세워 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앞으로 어려 번 말했던 것처럼, “온갖 교훈(doctrine)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엡 4:14) 사람들은 너무 게을러서 교리를 연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는 교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들이 잘못된 교리를 믿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분별할 도구가 없으며, 가르침을 평가할 시금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중요한건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뿐입니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조만간 최신 사이비 종교나 이단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비록 구원에 필수불가결한 사항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 문제들을 고찰해 봅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세세한 부분에서 이 문제들은 실로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결론은 성령이 멸망한 채 남은 사람들 안에서 행하시지 않은 특별한 역사를 구원받은 사람들 안에서 행하신다는 것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3. 구원의 순서

         

         

        이어서 또 다른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의미로은 더욱 당황스럽고 난처한 질문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제가 처음에 여러분에 대해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라는 바울의 말을 인용할 수 있다고 말씀 드렸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상태와 능력, 진리를 알고자 하는 소망을 이 말씀과 같이 평가합니다.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여러분을 대단히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어서 고찰할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구원받을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 행해지는 특별한 사역이 있다면 성령은 어떤 순서에 따라 이 사역을 행하시는가?’

         

        이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위대한 권위자들, 교회의 위대한 학자들, 수 세기 동안의위대한 신학자들, 이런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수많은 책을 썼고 소위 구원의 순서(ordo salutis, the order of salvation)에 대해 논쟁했습니다. 솔직히 이것이 대단히 황홀한 주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고백합니다. 이번 강의를 준비하면서 이 문제를 고찰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구조적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크로스워드 퍼즐 따위에 의지해야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음의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단계와 과정이 있는가? 성령은 어떻게 이 사역을 진행하시는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지금까지 제시된 것들은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성경 자체는 어떠한 정확한 순서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여기에 가장 근접한 구절은 로마서 8장 28-30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주목하십시오 -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것이 순서입니까?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순서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완전한 목록은 아닙니다. 이 구절에서 사도는 우리에게 완전한 목록을 제시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특별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화에 관심이 있었고 그것을 보증하고 싶었기 때문에 필수적인 단계들만 말했습니다. 그는 성화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본문이 있습니다. 루터파에서는 이 구절을 즐겨 사용합니다. 사도행전 26장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다메섹 도상의 사도 바울에게 주신 위임령에 한 가지 순서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17-18). 하지만 이 또한 완전한 목록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 구절은 목록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순서를 제시하고 있지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구원의 순서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단 두 사람도 의견이 일치는 것을 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은 앞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 학파에 속한 사람들ㅇ 자기들끼리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개혁주의의 권위자들의 의견을 물어보면 이들 중 단 두명도 위의 항목들을 같은 순서로 배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경우에도 역시 정확한 순수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순서를 전혀 다르게 제시하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문제에 접근하는 데에는 두 가지 주요한 방법이 있습니다. 구원의 순서를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거룩하심 가운데 타락의 결과로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시며 구원의 계획을 생각하고 계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순서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영원하신 분의 마음 가운데 있는 일종의 논리적 순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접근 방법은 이와는 정반대되는 것으로서 시간에 따라 즉 이 일들이 시간과 경험 속에 나타나는 방식에 따라 사고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이 순서를 순전히 객관적인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경험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생각하는 대신 아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기 전에 일어나야 하는 일들은 무엇이고, 그것들은 어떤 순서로 일어날까?“ 그것이 객관적인 관점입니다. 이어서 주관적인 관점을 취하여, “내가 아는 것이라곤 그 일이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겁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견해 역시 타락에 대해, 그리고 타락의 결과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느냐에 죄우될 것입니다. 그 교리에 따라 여러분 나름대로 구원의 순서를 정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훈련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 결과를 보면 매우 흥미로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것이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님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것들을 올바른 순서로 배열했다고 해서 구원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말하건대, 비록 그것이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단히 유익하고 가치 있는 것이며, 멋진 영적 훈련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몇 가지 가능한 순서를 제시해 보겠습니다. 저는 그 가운데 하나를 고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첫 번째이자 근본적인 문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구원받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 때문에 칭의를 그 다음에 놓고, 또 그 때문에 중생이 뒤를 잇습니다. 그로부터 믿음이 도출되며, 거기에서 양자됨이 나옵니다. 다음에는 회심을 놓을 수 있는데 여기에는 회개와 돌이킴, 그리고 믿음이 포함됩니다. 다음은 성화, 그리고 그 다음은 견인입니다.

         

        한편, 주관적 요소를 더 강조하면서도 신학적 순서를 유지하고 싶다면 다음과 같이 배열할 도 있습니다. 우선 부르심을 사람들 안에서 유효한 것으로 만드는 “효력있는 부르심(effectual calling)"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이어서 중생과 믿음, 칭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회개와 회심, 양자됨, 성화 , 그리고 견인의 순서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순전히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자 한다면, 이렇게 배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죄의 자각, 회심, 믿음, 칭의, 중생, 양자 됨, 성화, 연합과 견인, 제가 위의 세 가지를 주된 분류법으로 제시했지만, 여러분은 각각의 항목의 위치를 거의 무한정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대닫히 유용한 영적 훈련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을 하는 동안 지나치게 연대기적 사고를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시간적 요소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이 요소들이 서로 대단히 엄격하고 기계적인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이어져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이것은 실로 위험한 일이며 언제나 오류에 빠지게 만듭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행동은 시간에 제한 받지 않기 때문이며, 바로 그 때문에 우리에게 어려움이 발생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시간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건들을 시간 속에서 주어진 순서에 따라 경험한다고 해서, 그 일이 반드시 그런 순서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아이가 태어난다는 사실에 대한 첫 번째 증거는 아이가 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는 것이 가장 첫 번째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아이가 울기 위해서는 반드시 태어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생명의 증거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증거가 생명보다 먼저 일어난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삭의 항목 중 일부는 정확히 동시에 일어나며,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관점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선행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특정한 순서를 부여하지 않고서 이런 일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는 업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오늘 강의에서 저는 여러 가지 고백을 했습니다만, 한 가지를 더 고백해야겠습니다. 저는 오늘 밤에 제가 다룬 모든 내용을 여러분께 말씀드릴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상당히 고민했습니다. 저의 이런 생각을 아내에게 말해더니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 모든 내용을 말한다면 사람들은 혼란에 빠질 거예요. 그건 어려워요. 신비라고요." 이 대화가 이루어진 것은 늦은 밤이었고, 아내는 그녀 자신이 혼란스럽다고 고백했습니다.

         

        저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어렵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유일한 대안은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내용을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대신, 구원받은 사람들안에서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되 논리적인 설명은 없이 첫째는 이것, 다음엔 저것, 하는 식으로 출발하는 방법뿐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죄의 자각이 첫 번째라는 것은 분명한데요, 그런데 목사님은 중생을 믿음보다 먼저 놓지 않으시는군요!” 그 사람은 당혹스러워하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왜 저기서 시작하지? 왜 저걸 두 번째 놓고 이건 세 번째에 놓는 것일까?”

         

        지금까지 저는 여러분과 함께 구원의 순수에 대해 간략하게 고찰해 보았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강단에 서서 말하는 사람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 최선을 다해서 설명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저는 교황이 아니며 교황을 믿지도 않고, 교황의 성좌선언 역시 믿지 않습니다. 성경의 진리와 교리를 해설하려는 사람은 누군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정당함을 보여 줄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서의 문제를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서의 여러 세부 사항들을 살펴나가면서 여러분은 자신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는 것과, 이 순서는 타락했을 때 일어난 일, 원죄의 결과, 그리고 타락하고 잃어버려진 상태에 있는 사람의 상황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한 가지 순서가 다른 것보다 필연적으로 완전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한 일들을 고찰하고 파악해 나가면서, 그 순서가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 확인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자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칭의와 성화  (0) 2014.11.27
        로이드 존스-체험의 결과  (0) 2014.11.13
        숫자에 관심 없으신 하나님  (0) 2014.09.26
        로이드 존스- 선한 천사들  (0) 2014.09.20
        로이드 존스 - 영적 판단과 식별  (0) 2014.08.2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