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땅 밑은‘보물창고’… 어찌하오리까 [중앙일보]

팠다 하면 나오는 조선시대 유물 유적, 개발·보존 딜레마

① 보물급 불랑기자포 등 철제무기류와 각종 도자기류, 유구 수십 기가 발굴된 서울시 신청사 부지. 발굴 전에 군데군데 박아놓은 H빔이 눈에 띈다.
②서울 종로 청진5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 발굴현장에서 출토된 백자명기 세트. 무덤 부장품인 명기가 살림집터에서 발굴돼 화제가 됐다.
③청진1지구에서 출토된 15~16세기의 달항아리. 당장 보물로 지정되어도 손색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화재청 제공]
전란에, 일제의 파괴에, 개발에 사라진 줄 알았던 조선의 500년 도읍지 한양이 땅속 깊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동대문운동장 땅밑에선 4m 높이의 이간수문(二間水門·도성 밖으로 물을 빼기 위한 2개짜리 문)이 온전히 발굴돼 최근 동대문역사공원에 복원 전시됐다. 피맛골 아래에선 보물급 달항아리 3점이 둥실 떠올랐고, 조선시대 명기(무덤 부장품)도 출토됐다. 서울시 신청사 부지 한 켠에서도 보물급 조선 중기 화포 등 유물과 수십 기의 건물지가 나왔다. 그러나 발굴 전 이미 지하 5층 깊이까지 철제 H빔 수십 개를 박아버린 뒤였다.

◆도심 지하는 보물창고=최근 열린 서울시 신청사부지 발굴 지도위원회에서 박성근 문화시설사업단 단장은 “신청사 부지에는 지하 방제시설이 설치돼 있어 이미 문화재가 교란된 상태라 판단했다”고 해명했다. 조선의 흔적이 살아있을 줄 몰랐다는 것이다.

최근 서울시 도심 재개발과 함께 발굴된 조선시대의 유적은 지하 1.5~6m 아래에까지 골고루 분포돼 있었다. 세종로 지하 1.5m에서는 육조거리 유적층이, 경희궁에선 지하 6m에서 17세기 광해군 무렵의 지층이 나왔다. 선조들은 전란으로 불타 무너진 집터 위에 흙을 덮어 대충 집 짓고 살았던 것이다.

조유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은 “지금이라도 개발의 방향을 바꾸거나 멈출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조 원장은 “서울 4대문 안이라도 보존했더라면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었을 텐데, 조선시대를 느끼며 잘 수 있는 여관 하나 없다”며 “의식적으로 우리 역사를 무시하면서 어떻게 뿌리를 단군에서 찾느냐”고 반문했다.

현재 재개발 대상지역 건물은 대부분 저층이라 지하를 깊이 파고들어가지 않았다. 문화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유다. 그러나 현재 개발 중인 건물은 지하 5~6층까지 파고들어가는 추세라 ‘지하 보물창고’가 파괴될 수밖에 없다. 나선화 문화재위원은 “4대문 안은 ‘문화수복지구’로 가는 게 옳다”며 “선진국의 사례를 참고해 유물과 유적을 어떻게 보존할지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지건길 매장문화재분과위원장은 “현재 서울시 개발계획대로 밀고 나가면 ‘서울’은 완전히 없어진다”며 “서울 전반이나 4대문 안, 그것도 무리라면 고지도를 놓고 보존할 부분을 선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하 문화재, 기록으로라도 남겨야=현행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신축·재건축 부지가 3만㎡ 미만이면 관할 구청과의 협의 하에 문화재 지표조사를 생략할 수 있다. 가령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종로구 관할인 관철동 5-13번지는 발굴 중이고, 중구 관할인 수표동 88-1번지는 지표조사 없이 빌딩이 건설되고 있다. 문제가 된 서울시 신청사 부지 역시 중구 관할 지역이다. 발굴 관련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종로에는 학예사가 있고, 중구에는 학예사가 없어 문화재 관련 건축 인허가에 차이가 난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김봉렬 교수는 “개발은 피할 수 없더라도, 공동의 유산인 지하의 유적은 철저히 기록하고 중요한 부분은 보존·전시해야 한다”며 “서울 도심의 문화재 조사를 의무화하고 조사 결과를 기록해 시대별 ‘지하 문화재 지도’를 완성하자는 장기적인 목표를 세워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남규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는 “서울시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일제가 한반도를 점령한 뒤 가장 먼저 한 것이 거점지역의 향교 등 중세(고려·조선) 도시의 파괴였기에 경주·충주·청주 등의 지하엔 중세 유적이 묻혀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학계의 인식 부족으로 중세 고고학 전공자가 거의 없고, 국가적 몰이해와 개발론이 겹쳐 고려·조선시대 유적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있다”며 “역사에 대한 국민적 이해 없이는 결코 선진국으로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경희 기자

대안은

매장문화재 기금 조성, 지표·발굴조사 비용부터 만들어야
양심적으로 절차 밟는 건축주들만 손실 보지 않게


역사와 문화재가 중요하다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러나 평당 1억원이 넘어가는 도심 금싸리기 땅의 소유자에겐 재산권의 문제다. 재산권이 늘 앞서 문화재 조사는 흐지부지 넘어가던 서울 4대문 안의 발굴이 본격화된 건 2004년 종로구 청진동 르 메이에르 빌딩부터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2004년 1월 1일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공사현장에서 뒹굴던 장대석 사진을 찍어 신고했다”고 기억했다. 황 소장은 “건물을 짓기 전에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가장 먼저 끝내고 그에 따라 건물의 규모와 컨셉트가 나와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전부 거꾸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업은 차치하고 국가와 지자체가 앞장서서 대규모 공사를 추진하며 문화재를 뒷전으로 밀어두는 것도 문제다.

피맛골 일대를 비롯한 서울 도심 곳곳의 발굴을 맡고 있는 김홍식 한울문화재연구원장은 “제일은행·교보빌딩·경희궁의아침 등은 물론이고 지하철 공사를 할 때도 문화재 발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양심적으로 절차를 밟는 건축주들만 극심한 손해를 떠안는 건 문제”라고 말했다. 김 원장은 “유적 보존을 위해 지하는 파지 못하게 하되 지상의 건축제한을 완화해준다거나, 주차장기준법을 풀어주는 등 숨통을 터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현행법상 건물 신축이나 재건축 때문에 문화재 지표·발굴조사를 할 때는 건축주가 비용을 댄다. 출토 유물 등의 매장문화재는 모두 국가로 귀속된다. 문화재가 걸려 발굴이 시작되면 공사 지연으로 인한 손실까지 떠안아야 한다. 문화재청 발굴제도과 심영섭 과장은 “다른 국가들도 홍역을 앓고 지나갔지만, 유적을 파괴하는 원인 제공자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원칙은 만국 공통”이라 전제했다.

하지만 이남규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는 “건축주는 ‘재수없이’ 문화재에 걸려 재산권을 잃고, 국가는 매입할 여력이 없어 유적을 방치하는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 교수는 “매장문화재 기금을 만들어 지표조사·발굴조사 비용이나 중요 유적 보존 부지를 국유화하는 자금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했다. 주택공사·건설업체 등이 개발비의 일정액을 보험금처럼 불입해 펀드를 조성하자는 것이다.

이경희 기자
팔짱 낀 김정은과 리설주, 故김정일이 봤다면…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북한의 ‘퍼스트 레이디’로 알려진 리설주와 동행하는 모습이 공개되자 “고(故)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원하지 않았던 행동”이라는 주장이 탈북자 사이에서 나왔다.지난 1일 북한전문매체 자유아시아방송은 탈북자들과의 인터뷰를 인용해 “사망한 김정일 위원장이 남녀가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행동은 ‘우리식’이 아니라며 금지시켰고 북한 대학들에게 이 방침이 전달됐다”고 전했다.

자유아시아방송에 따르면 인터뷰에 응한 한 탈북 여성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리설주와 팔짱을 낀 것은 사실상 아버지인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를 거부하고 북한 여성들에게 이 같은 행동을 허락한 것과 다름없다”고 언급했다.

고 김정일 위원장은 2003년 노동당 중앙위 간부들에게 “외국풍을 없애고 우리식을 살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팔짱을 끼고 다니는 젊은이들을 단속하고 치마저고리를 입지 않고 현대풍 정장을 한 여성을 통제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김정은 제1위원장과 그의 부인으로 알려진 리설주가 팔짱을 끼고 등장했고, 리설주가 현대풍 정장을 선보임에 따라 고 김정일 위원장의 규제가 완화될 것이라는 분석이 등장하고 있다.

한편 조선중앙TV 등 북한 언론은 지난달 25일 김정은 제1위원장과 리설주가 평양 능라인민유원지 준공식에 참석한 소식을 전하며 리설주의 이름을 처음으로 언급한 바 있다.

출처: 내 사랑 중국/익명회원

 김정일은 악마 그 자체;영하 35도에 발가벗겨 고문
( 이순옥씨 프랑스 라디오 증언에서 발췌) "

저는 북한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근 50여년을
북한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은총으로 96년 아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태어나 북한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제가 영문도 모른 채 지하 감옥소에서 모진
고문과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을 극적으로 취소한다는 통지와 함께
정치범 수용에 보내졌을 때
수용소안에서 겪은 북한 신자들의 모습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김일성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기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유일하게
6,000여명의 수용된 그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을 시킬 수 있는
생산 지휘와 모든 재정업무를 맡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땨문에 저는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작업장들을
이곳저곳 마음대로 갈 수 있었습니다.

어느날 저를 담당하는 재정부장 교도관이 저를
불러놓고 단단히 교육시켰습니다.
"너는 오늘부터 매일 어떤 공장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 공장에는 미친 정신병자놈들만 모여 있다.
그 미친 정신병자놈들은 당과 수령님을 믿지 않고
하늘을 믿는 미친 자들이니 너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곳에 가야한다.
그리고 그 미친자들하고는 절대 눈길
한번 마주치지 말아라.
그렇지 않고 네가 그 자들이 믿는 하늘을 믿게 되면
네 목숨은 여기서 끝나게 되는 줄 알아라."

그런데 거기 가서 그 사람들을 보는 순간 나는
너무 놀랐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무리같지 않았습니다.
1.500도 이상 시뻘겋게 타오르는 용광로의
고열 노동 작업장이었는데
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을때,
무슨 짐승의 무리 같기도 하고 외계인 같기도 하고
도무지 사람의 모습은 찾아볼래야 찾아볼수가
없었습니다.
머리에 머리카락이 붙어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얼굴은 해골같고 이빨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키가 다 줄어들어서 120센티,130센티 요렇게
땅에 딱 붙은 난쟁이들만 움직였습니다.

나는 가까이에 가서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전 너무나 놀랐습니다.
잡혀 올 때는 정상인이었는데
거기와서 하루 열 여섯시간, 열 여덟시간씩
먹지도 못하고
그 고열 속에서 노동하며 고문받다보니
그 사람들은 척추가 녹아 내려서 뒷잔등에
혹이 되어 버렸고
몸이 다 휘어져서 앞가슴하고 배가 마주
붙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한결같이 모두 그렇게 육체가
망가져 기형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프레스 기계로 찍어도 한 판에 그렇게
똑같은 모습으로 찍기는 힘들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일하는 작업장에는 교도관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교도관들은 말로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소가죽 채찍을 윙윙 휘두르고 다니면서 묵묵히
일을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예수를 믿는 그 사람들의 몸에는 옷이 입혀져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처음에 그 사람들을 멀리서 보았을 때
모두가 꺼먼 옷을 입고 있는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찬찬히 보니
그 사람들은 맨 살가죽에다 앞에 시커먼
고무 앞치마 하나만 걸치고 있었습니다.
용광로의 뜨거운 불꽃이 앙상하게 말라붙은 살가죽에
튀고 또 튀고 딱지가 앉고
그 자리에 쇳물이 떨어지고 또 떨어져서
타버리고 해서
그 사람들의 피부는 한 곳도 성한곳이 없었고
마치 들짐승의 가죽과 같았습니다.

어느날 저는 그 곳에서 정말 말로 전하기 힘든,
너무나 끔찍하고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오후, 제가 공장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공장안이 쥐 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작업장 한 가운데 수백명의 죄수아닌
죄수를 모아놓고
담당 교도관들 두 명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미친듯이 고함을 치며 날뛰고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서 문 옆 한쪽에 비켜
서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수령님을 믿지않고 하늘을 믿는
미친 정신병자놈들이라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그 사람들을 차고, 때리고 하면서
인간이하의 취급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너희들 가운데서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대열 앞에 나서라.
하늘을 믿지않고 수령님을 믿겠다고 하면
자유세상으로 보내서 잘 살수있게 해 주겠다"
고 하면서
그 사람들을 윽박지르며 하늘을 거부하라고
채찍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이상했습니다.
수 백명의 그 사람들은 왜 그런지 아무 대답도 없이
그렇게 매를 맞으면서도 침묵으로 맞섰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서 빨리 한 사람이라도
나서야 되는데,
그래야 오늘 누가 맞아죽지 않을텐데
왜 계속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나..
저러고 있으면 또 누구를 끌어내다가 밟아
죽일지 모르는데,
빨리 한 사람이라도 나서야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급하게 생각하며 문 옆에 서서
무서움과 공포 속에서 떨고 있는데
예수를 믿는 그 사람들은 계속해서 침묵으로
대응했습니다.

그 때 독이 오른 교도관이 그사람들에게 달려가서
닥치는 대로 아무나 여덟명을 끌어 내다가 땅바닥에
엎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구둣발로 내리밟고 짓이겼습니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고 허리며 팔 다리뼈가
부러졌습니다.
그 사람들은 고통 중에서도 몸을 뒤틀면서,
짓밟힐 때마다 신음소리를 냈는데
그 신음소리가 너무나도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저는 그 때, 주님이 누군지,하나님이 누군지
전혀 몰랐습니다.
뒤에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이 고통 중에서도
몸을 뒤틀면서,
짓밟힐 때마다, 뼈가 부러지고 머리통이 부서지면서
신음소리처럼 애타게 불렀던 것은 바로
"주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당했던 고통의 천 만분의 일도
제대로 여러분에게 전해주지 못합니다.

미쳐 날뛰던 교도관들은 "
수령님과 당을 믿는 우리가 사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너희가 사는가 보자"하면서
달려가더니 펄펄끓는 쇳물통을 끌어왔습니다.
그리고는 피투성이가 된 그 신자들 위에 부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순식간에 살이 녹고 뼈가 타면서
숯덩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난생 처음으로
내 눈앞에서 사람이 숯덩이로 변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그 충격이 컸던지,
그 곳을 어떻게 튀어나왔는지 기억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동안 도무지 눈을 감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정신적 충격으로 눈만 감으면
눈 앞에 숯덩이가 된 사람들이 어른거려서
도무지 눈을 감을 수도 없고,
잠을 잘 수도 없었고,
일을 제대로 할 수도 없었으며,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정신이 들어갔다
나갔다 했습니다.
저는 그 일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마음속 한구석에
실오라기 만큼이라도 수령님과 당에 대해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때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말입니다.
인간은 주님을 꽉 붙잡어야 된다는 것을
저는 그때 뼈져리게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다시,
우리 어머니가 평생을 하늘에 기도했다는
그 하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간절하게 하늘을 찾았습니다.
"저 사람들이 저렇게 불에 타 죽으면서도
거부하지 않고, 목숨걸고 믿는 하늘이,
진짜로 그 하늘이 어디에 계시다면 나를
좀 살려달라고.....
그리고 저렇게 무서운 짓을 하는 저 자들에게
하늘에서 정말 벌을 내려 줘야되지 않겠냐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며
자나깨나 꿈속에서도 하늘을 찾고 또 찾고
기원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주님께서 그 간절한 저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한달이 멀다하고 공개처형이 있었는데
어느날 누구를 또 공개처형 시키려는지
6천명이나 되는 수용소 사람들을 한자리에
다 모이게 했습니다.
공개처형 때는 반드시 하늘을 믿는 사람들을
맨 앞줄에 앉힙니다.
그런데 하늘을 믿는 자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하늘을 보지 못하게 하라는
김일성의 특별지시와 규정
있어서
하늘을 믿는 그 사람들을 앉힐 때에는
무릎사이에 목을 끼우고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리게 했습니다.
심지어 죽어서도 하늘을 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면서
죽은 시체도 목을 꺽어 거적에 말아서
어두컴컴한 산골짜기 나무 밑에 파묻게 규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날도 신자들은 하늘을 조금도 보지 못하도록
목을 무릎사이에 끼우고 맨 앞줄에 앉아 있었고,
그 뒤쪽으로 다른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누구를 또 공개처형하려는가?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 쇠몽둥이로 머리를 한 대 맞은것처럼
정신이 아찔하여 대답을 할 수 없었고,
일어설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수들이 나를 끌어내다가 앞에 세웠습니다.
내가 군중들 앞에 섰을 때, 수용소 소장이 나에게
"고마운 수령님과 당의 은덕으로 너는 이 시각에
석방이다"라고 통보를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목을 무릎에다 끼우고 맨 앞줄에 엎드려 있던 신자들이
내가 석방된다는 소리에 약속이나 한듯이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었습니다.

그 때 저는 그 분들의 눈빛을 보았습니다.
그 분들은 눈빛으로 간절히 간절히 말했습니다.
"밖에 나가거든 자기들의 실상을 세상에 알려 달라"고...

지금도 제 가슴에는 그 분들의 간절한 눈빛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평생 빌고 또 빌은 그 하늘이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는 그 악명높은
정치범 수용소에서
저를 살려 주셨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희 모자를 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북한의 수용소에 갇혀 있는 그 신자들의 눈빛을
절대로 잊을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 분들이 이 시대의 순.교.자.라고 봅니다.

저의 증언으로 인해 북한 신자들의 인권문제가
150여개 나라에 나갔고 세계가 떠들었습니다.
유럽의 지식인 100여명이 프랑스에 모여
북한 신자들의 인권을 위한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것에 대해
철.
저.
하.
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북한을 위해
"꼭"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순옥(52)씨가
29일 오전 11시 파리의 메종드 라디오 프랑스에서
북한 인권 실태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여자로서 차마 견디기 힘든 고문을 겪었고,
영하 35도 이하 겨울에 발가벗긴 채로 추위에
떠는 [동태 고문]으로
동상에 걸려 열개의 발톱이 다 빠졌다"고
폭로했습니다.
이씨는 "사형장에 끌려가는 한 여성이
집에 두고 온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던 모습이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고
북한 수용소의 참상을 전했습니다

[자료 출처] : 빛과 흑암의 역사


북조선 당국이 남조선에 핵 타격을 하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핵무기로 공격을 하겠다고 직접 협박한 것은 이번 북조선의 협박이 처음입니다. 핵무기는 쓰지 않는 공포의 무기, 쓰지 않고 위력을 발휘하는 무기였는데 쓰겠다고 말하는 순간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핵무기는 인류 최대, 최고, 최악의 무기입니다. 현재 미국과 러시아가 가지고 있는 뜨로찔 2천5백만톤급에서 5천만톤급의 핵무기들은 몇발만 폭발해도 지구는 멸망합니다. 때문에 미국과 러시아의 핵무기만으로도 지구를 수십, 수백번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겨우 초기의 원시적인 원자탄을 몇 개 만든 북조선 당국이 핵무기를 쓰겠다고 남조선과 세계를 협박하고 있습니다. 불을 즐기는 자는 불에 타죽는다는 속담처럼 이제 김정은 정권은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완전히 소멸시켰습니다.

김정은이 어리고 철없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것입니다. 김정은이 자질과 능력이 없으며 지도자의 중요한 덕목을 거의 갖추지 못하고 있어서 아주 조급하고 과대망상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이 이번에 확인됐습니다.
김정은이 핵무기 공격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나는 이제 죽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이나 같습니다. 북조선 내부에서는 외부에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고 핵무기에 관한 상식이 전혀 없으니 북조선 당국의 발표와 보도만 보면서 흥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김정은이 유엔제재 결의에 맞서 핵무기 공격을 하겠다고 선언한 순간 남조선과 미국 등 국제사회와 유엔은 김정은을 소멸시켜야 한다고 결심합니다. 실제로 남조선 국방부는 '북한이 핵무기로 한국을 공격한다면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인류의 의지로 김정은 정권은 지구상에서 소멸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평양의 인민무력부 총참모부나 중앙당, 국가안전보위부, 보안부, 내각 등의 핵심 고위급 간부들은 현 사태의 결말을 짐작을 할 것입니다. 김정은은 이제 끝났고 그 확인이 바로 핵무기 공격을 하겠다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평양과 전국의 모든 핵심간부들에게 남은 것은 김정은 정권이 어떻게 망하는지를 지켜보는 것이고 그 다음에 어떻게 살아남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주장이 황당하고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고 모략선전선동이라고 믿는 간부나 군관, 장령들이 있다면 그 사람은 리성을 잃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김정은 정권은 지난 인류력사의 전 과정에서 권력이 어떤 조건에서, 어떤 문제로, 어떻게 멸망했는지를 보여준 조건을 완벽히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김정은 정권이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김정은 정권의 생존 가능성은 없습니다.

김정은 정권이 김일성 시대만큼 오래 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지적이고 리성적 사고를 아무것도 못하는 뼈속까지 노예의 근성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김정은 정권이 김정일 시대만큼 오래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추세와 물욕에 빠져서 자신의 영혼을 독재권력에 맡긴 철저한 하수인, 머습입니다.
조금이라도 지성과 판단, 분석력을 가지고 과거를 제대로 리해한 사람이라면 김정은 정권이 왜 망할 수밖에 없는지를 너무나도 잘 압니다. 지난 1980년대 말부터 현실의 문제점들을 잘 알고 있는 지식인과 간부들은 지금처럼 해가지고는 북조선이 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지금처럼 해가지고는 정말로 북조선이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며 망하는 길밖에 없다고 말해왔습니다. 지금은 일반 사람들도, 중학교 졸업한 사람들도 북조선은 망한다고 생각해왔는데 지금의 현사태는 어떻게 망하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입니다.
진짜로 김정은 정권이 망할 시간은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지난 2007년 김정일은 북조선 멸망의 대문을 열었고 자신은 죽음의 대문을 열기 시작해 지난 2011년 12월에 결국 죽었습니다.

김정일이 중풍에 걸렸을 때에도 사람들은 그가 죽을 것은 알았지만 좀 길게 살다 죽을줄 알았지만 3년 반밖에 살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김정은 정권이 짧게 5년에서 길게 10년을 보지만 길어서 3년, 짧게는 1년 반안에 죽거나 쫒겨나거나 하면서 독재정권이 끝날 수 도 있습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나, 리비아의 가다피나 모두 죽기 6개월 전까지만 해도 큰소리를 쳤고 또 그 부하들도 그 말을 철두철미 믿었습니다. 후세인은 교수형을 당했고 가다피는 매맞으며 끌려다니다 20세의 젊은 청년이 쏜 총을 맞고 죽었습니다.

지난 2012년 1월부터 김정은이 해온 악행들을 보면 김정은의 결말은 결코 좋을 수가 없습니다. 김정은 정권의 종말은 스스로 자초하는 종말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김정은의 종말이 비극적일수록 그 옆에서 아부와 굴종으로 독재권력의 하수인이 되었던 사람들이 미래도 비참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현명한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 김정은 독재정권과의 리별을 준비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선택입니다. 북조선의 군대와 국가안전보위부, 당과 보안부, 내각을 비롯한 모든 기관의 책임간부와 고위간부들은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결정지을지를 지금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북조선 전국의 로동단련대와 교화소, 정치범, 경제범 관리소, 집결소 등 모든 인민탄압 시설에서 악행을 감행하던 자들도 선택해야 합니다. 김정은 독재정권 종말 이후에 인간으로서 삶을 살고 싶다면 지금 당장 인간으로서, 량심을 가진 인간으로 돌아가 인민의 편에 서야 합니다.
문학적 표현을 빌려서 말하면 지금 북조선은 천지를 뒤흔드는 거대한 격동의 중심에 서 있고 그 격동은 8.15 해방 후 67년만의 큰 변화입니다. 다르게 이야기 하면 세상이 복잡하고 어지럽고 대혼란에 빠진 난세가 바로 지금입니다.

난세에는 영웅이 나오는 법입니다. 지금 북조선의 모든 간부들, 특히 국가안전보위부와 보안부, 군대의 간부들과 군관, 장령들은 영웅의 편에 서서 인민과 함께 하느냐 독재자와 종말을 맞느냐 선택해야 할 시점입니다.
북조선의 모든 간부들도 부인과 자식들이 있고 형제와 친척들이 있을 것입니다. 김정은 독재정권이 종말을 맞으면 과거청산을 할 것이고 그때 독재정권을 심판하겠지만 모든 간부들이 지금처럼 숙청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가혹한 독재를 했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자 처벌을 받은 간부는 몇백명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살아남았습니다. 북조선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독재가 끝난 새시대에도 인간답게 평범하고 안정된 삶을 살려면 지금 살궁리를 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입니다.
김정은 독재정권이라는 거대한 배가 비상사태라는 거대한 폭풍을 만나 조만간 가라앉을 것입니다. 이런 시기에는 독재자의 하수인으로 명령과 지시를 고스란히 집행하기보다는 현명하고 영리하게 인민의 편에 서서 자신의 살길을 만들어내는 것이 살궁리입니다.

분명 북조선 내부에는 반김정은, 반독재세력, 개혁개방 세력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지금 뭉치지 못해서 세력화를 이루지 못했겠지만 조만간에 김정은 독재정권을 대체하는 개혁세력이 될 것입니다.
바로 개혁세력의 편에 서는 것이 김정은 이후시대에 살아남는 최선의 선택입니다. 현명한자는 시대적 상황을 가장 정확히 판단하고 선택을 잘하는 자입니다.
이상으로 주간 시사분석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김승철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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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한에서도 한국의 K-POP이 인기를 끌며 부유층 자제를 중심으로 최신가요와 춤을 배우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답니다.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이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평양 중구역이나 대동강구역에 사는 10대, 20대의 부유층 자녀들 사이에서는 '디스코를 출줄 모르면 아이들 틈에 끼지도 못 한다'는 말이 나올 만큼 댄스가 유행이며, 개별 댄스교습까지 등장해 강사들이 한 달에 20달러가량을 받고 집이나 연습실에서 춤과 노래를 가르치기도 한다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또한, 탈북자 정착교육시설인 하나원 관계자는 "탈북 학생들도 한국의 가요와 춤을 많이 좋아하고 쉽게 잘 따라한다"며 "하나원 수료식이 열릴 때 학생들이 준비하는 댄스공연은 남한의 가수나 학생들 뺨치는 수준"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비록 사회적 통제 때문에 북한에서 K-POP이나 댄스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소수 특권층에 국한되겠지만 우리나라의 문화가 어떤 식으로든 북한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은 분명 긍정적인 일인 것 같습니다.

Gabriel.S Oboe


전쟁은 피한다고 안 일어나는게 아니다.도발하면 통일의 호기로!!!!!

 

1. 개 요

2010년 3월 26일에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PCC-772 천안함이 격침되어 침몰되었다. 이 사건으로 우리 해군 병사 40명이 사망했으며 6명이 실종되었다. 이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경에 북괴가 우리의 대연평도를 향해 170여 발을 포격한 연평도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우리는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80여 발의 대응사격을 실시했다. 이 사건으로 연평도에서 복무하던 해병대원 2명(故 문광욱 일병,故 서정우 하사)이 전사하고 민간인 2명이 사망하였으며, 민간인 3명과 해병대원 1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밖에도 주택 12동이 대파되었고 25동은 불에 탔으며, 차량 3대와 컨테이너 박스도 여러 채 파괴되었다. 연평도의 가옥들이 포에 파손되고 불에 탔으며, 산불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확전을 우려하여 정부는 제대로 대응조치를 취하지 못했으며 많은 국민을 실망시킨 바 있다.



2. 처칠과 제2차 세계 대전

영국 수상 챔벌린은 히틀러와의 별도회담을 통해 독일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합의문까지 받아냈고 귀국 후 자신이 유럽의 평화를 지켜냈다고 자화자찬하였다 그의 자화자찬에 영국국민들은 챔벌린을 개선장군처럼 환영하였다. 당시 해군장관이던 처칠은 그러한 양보로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고 경고하였으나 그의 의견은 무시되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약속을 깨고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점령하였고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결국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였다.

우리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한 것은 전쟁의 발발을 우려한 때문인데 전쟁은 유화정책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웅변으로 보여준 것이다.



3.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일전불사의 정신력이다

챔벌린이 실각하고 1940년 5월 처칠이 수상에 기용되자 영국 해군 병사들은 "원니(처칠의 애칭)가 돌아왔다!"고 외쳤다. 처칠은 "대가가 어떤 것이든 우리는 싸울 것"이라고 선언했다.

처칠은 의회에서 "나는 피, 수고, 눈물, 그리고 땀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이제 단합된 우리 힘을 믿고 앞으로 나갑시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그는 25명의 장관에게 "영국의 긴 역사가 끝내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면, 히틀러가 피 흘리고 숨이 막혀 죽은 뒤에야 그렇게 될 것"이라고 했다. 처칠이 단호한 의지와 용기로 앞장서면서 영국은 달라졌다. 5년 뒤 히틀러의 나치는 무릎을 꿇었다.

1962년 소련은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어 미국의 숨통을 노리려 했다. 그 위기에서 미국을 지켜낸 것은 핵전쟁을 각오하고 쿠바 해상을 봉쇄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용기였다. 이스라엘이 아랍 국가들로 에워싸인 속에서 국가적 존엄을 유지하는 것도 어떤 침략과 위협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행동으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



4. 비스마르크가 한국인이었다면 통일의 호기로 삼았을 것

비스마르크는 당시 군웅활거하던 독일연방을 하나로 통합한 불세출의 영웅이다. 그는 외교에 달인이었다. 아직까지 그를 능가하는 외교관은 없다. 그는 독일 통일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독일이 착안해야 할 것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군비인 것입니다. (중략) 프로이센의 국경은 건전한 국가의 국경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는 지금의 이 크나큰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언론이나 다수결은 1848년과 1849년의 결함이었습니다. 철과 피에 의해서만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렇다. 통일은 씰데 없는 말장난이나 논의로 되는 게 아니다. 강력한 군대와 국민의 정신무장으로서만 통일이 가능하다. 또 외교력을 발휘하여야 한다. 따라서 비스마르크의 외교능력을 배워야 한다. 사실 비스마르크의 외교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이다.

비스마르크는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 교묘히 상대방이 전쟁에 응하도록 트릭을 썻는 데 만약 그가 한국인이었다면 북괴가 스스로 기회를 준 이번 연평도 사건을 한국 통일의 호기로 보고 통일전쟁을 감행하였을 것이다.



5. 독일식 평화통일 불가능한 이유


서독은 동독을 흡수 통합하여 독일 통일을 이룩하였다. 우리도 독일과 같이 평화통일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나 만은 통일되기 전의 동/서독의 환경과 한반도의 환경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상이한 바가 현저하다. 따라서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연목구어(緣木求魚)에 그칠 공산이 크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불가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서독은 민족상잔(民族相殘)을 겪지 않아 상호 적대감이 없으나 남/북한은 민족상잔을 겪어 상호 적대감이 극심하다. 가장 잔혹한 전쟁이 같은 민족끼리의 싸움이라고 한다. 1945년 625전쟁시 초기에는 북한이 남한 전역을 휩쓸었고, 후반기에는 남한이 북한전역을 휩쓴 결과 양측에서의 비전투원의 피살이 각각 1백여만 명이라고 하는데 그 잔혹성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상호 증오와 불신 역시 극에 달하고 있어 평화통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둘째, 분단당시 서독은 동독에 많은 원조를 하였으나 동독이 이 돈을 군사력을 증강하는데 사용하지 않았다. 남한도 북한에 1997년부터 2006년 까지 10년간 약 80여억불의 물자 및 자금 지원을 하였으나 이 물자 또는 돈을 평화적 목적으로만 사용하였다는 증거를 확보하기가 어렵다. 북한은 남한 대부분의 국민의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을 무시하고 몇 번의 핵 및 미사일 발사를 하여 남/북간은 물론 주변국간 긴장을 고조시켰다.

셋째, 독일통일은 동독 주민이 자발적으로 원하여 이루어 진 것이나 북한주민이 조국통일을 원한다는 징후가 없다. 남한에 대한 적대감이 심한데다가 북한지도부가 통치수단으로 북한 주민의 남한에 대한 증오감을 가지도록 부채질한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을 방문한 미국 선교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주민의 남한에 대한 생각은 김정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6. 부칸이 스스로 와해되는 것도 바라기 어럽다.

그 전에 김일성이 죽으면 부칸이 와해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이 많았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측은 완존히 빗나갔다. 또 뽀글이가 죽으면 와해될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틀린 확률이 크다. 중국이 원조를 끊지 않는 한 바라기 어렵다는 것이다. 중국은 한반도 통일을 절대 원하지 않는다. 통일한국이 등장하면 여러 가지로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간도도 영유권을 주장할 것이고 백두산 일부의 반환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통일한국은 군사대국이다. 군사대국이 출현하는 걸 반길 리가 없다. 사실 중국은 얼마 전에 당시 월맹을 건드렸다가 개망신을 당한 적이 있다. 그들의 군사력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강하지 않다. 게다가 그들은 공한증이 있다. 고구려 때 묵사발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7. 다시 도발하면 통일의 기회로 삼아야

평화는 말로만 해서 이루지는 것이 아니고 통일 역시 그러하다. 북괴는 또 다시 도발할 것이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말로만 2배 보복을 외쳐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북괴는 속성상 같은 전술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라서 비대칭전(테러전)의 가능성을 점치는 사람이 많다. 만약 이러한 추측이 현실화된다면 통일한국을 실현해야 한다.



국제정세도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전쟁은 정신력이 중요하다. 과거 월남은 세계 5위의 근사강국이면서도 신발도 못 신은 거지군대 월맹에 패퇴하였다. 따라서 정신력이 해이하면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다. 또 전쟁에서는 내부의 적이 문제이다. 월남은 베트콩(월남빨갱이)이 월맹의 승리에 기여한 바가 크다.

따라서 남한 존재한다는 종부기는 전면전 발발시 북괴를 위하여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척결 또한 필수적이다.

북괴와는 말이 필요없다. 또 다시 도발시에는 통일을 위한 호기로 삼아야 한다.

출처: http://blog.chosun.com/ifins/6355089/ Mr. Right
지인이 보내어온 글


 

10여년전 그날, 부자세습에 분노했던 김일성대 학우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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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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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아 기억나니 주석궁 앞을 밤 새도록 거닐며 우린 북한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었지
대학청사에서 삐라를 뿌리고 투쟁의 불씨가 되겠다던 친구야
굶어 죽어가는 꽃제비를 보며 가슴치던 또 다른 친구야
어떻게든 살아만 있기를…
한국에 오니 사람들은 북한에서 왜 봉기가 일어나지 않느냐고 묻더구나
하지만 그건 이름없이 스러진 숱한 북한의 반정부 투사들을 모르고 하는 소리지
2대 세습도 못견뎌했던 우리인데 이젠 3대 세습이라니…
속으로는 도리질을 하며 겉으로는 충성맹세하는 슬픈 현실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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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주성하 기자가 의 옛 친구들에게 쓴 ‘회한의 편지’

이제는 우리가 헤어진 지 10년도 더 지났구나. 친구들, 아니 동지()들아.

오늘(2일) 아침 북한에서 3대 부자 세습이 공식 확인됐다는 기사를 읽는 순간 가장 먼저 너희 생각이 났다. 함께 뜻을 모으던 옛일들이 떠올라 지금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우리의 운명에 새삼스레 더욱 가슴이 아팠다. 마침 4일은 중국 베이징(北京)대 학생들이 주축이 됐던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운동 20주년이 되는 날이구나. 아마 우리의 고민도 그 무렵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A야. 시국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내가 너에게 처음 던졌던 말을 기억하니? “넌 우리 사회를 어떻게 생각하니”였어. 지금 고백하지만 난 그 말 한마디를 건네기 위해 너를 3년 동안이나 지켜봤다. 북한에서 인간적으로 아무리 가까워도 이런 말은 쉽지 않지. 너도 알다시피 이 말을 하는 순간 상대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긴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내 말이 국가보위부에 들어가는 순간 나는 “최고 정치교육을 받고 있는 놈이 우리 정치제도에 의문을 품었다”는 죄목만으로 정치범이 될 것이 뻔했으니까.

남쪽에서 ‘아일랜드’라는 영화를 봤다. 사는 곳을 천국이라고 주입받은 복제인간들이 그 사실에 의문을 품자마자 죽임을 당하는 미국 영화야. 이 영화를 보면서 그때를 떠올렸어. 착한 너는 그때 나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나를 고발하지 않았지. 그 대신 내 생각을 돌리겠다고 무진 애를 썼지. “장군님을 믿고 따르면 좋은 시대가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네가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는지 궁금하다. 당시 김일성대 인근 도청장치가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었지. 속 터놓고 말할 곳을 찾던 우리는 지금은 금수산기념궁전으로 변한, 가로등이 환한 주석궁 앞 거리를 오가며 날이 새도록 우리 조국(북한)의 미래를 논했지. 그 헤아릴 수 없는 숱한 밤들….

굶주림에 피골상접해 숨져가는 동포들 모습에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던 B야, 너는 어느 날 “이 사회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투쟁의 불씨가 되겠다”며 김일성대 2호 청사 22층에서 삐라(전단)를 뿌리고 분신 자결하겠다고 했어. 난 그때 밤새도록 너를 설득해야 했지. “무서워서 누가 네가 뿌린 삐라를 감히 주워볼 수 있겠니. 필요 없는 짓이다. 8촌까지 멸족당할 게 뻔한 여기서 가족을 먼저 생각하자. 북한이라는 수용소에서 헛된 죽음을 맞는 대신 밖으로 뛰쳐나가 수용소 사람들을 구출하는 투사가 되자”고 설득했었지.

그런데 결국 나 혼자 남한에 왔어. 너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불안감이 자꾸 든다. 김일성대 출신이 처형되는 경우엔 주민들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며 공개총살이 아니라 비밀리에 처형된다고 들은 바 있어. 어떻게든 살아있길….

너를 생각하면 혼자 살아남은 자의 비애가 가슴을 찌른다.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유대인 빅토르 프랑클 박사는 이렇게 말했지.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금서()를 잘 구해오던 C도 생각이 난다. 북한에 100부밖에 출판되지 않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이틀 밤을 새우며 손으로 베끼면서 처음 접해보는 자본주의 경제학에 매료됐던 때가 생각나. 우리는 자본주의도 꽤 괜찮은 사회라며 우리 조국의 사회주의가 갖는 모순에 대해 밤새워 토론했지. 일반인은 구경하기도 힘든 달러를 흔들어대며 여자들을 유혹하고 다니던 고위 간부들의 자식과 지방 어디서나 볼 수 있던 굶어 죽어가는 꽃제비들을 목격하고는 너는 가슴을 쳤지. 넌 “가족까지 버리며 목숨 바칠 용기는 없다”며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조용히 체제에 순응해 사는 길을 택했었지.

그리고 D 동지. 엘리트 군인으로 10년을 바치고 대학에 왔었죠. 나이가 많아 우린 D 동지라고 불렀었죠. 내가 먼저 접근했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D 동지는 “우리 사회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먼저 내게 물었죠. 당신의 현실 인식과 분석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졸업 후 최고위급 간부의 사위가 되어 출세의 길에 들어섰죠. 정운의 후계 추대를 계기로 북한 간부들이 충성 경쟁을 벌인다고 들었습니다. D 동지 역시 앞장서고 있나요? 늘 뛰어난 분이었으니깐. 자식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됐을 지금은 가슴속에 과거의 고뇌를 묻고 있나요, 아니면 버리셨나요?

친구들아. 당시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고뇌는 입으로는 ‘인민’이란 말을 달고 살면서 실제로는 사실상 봉건왕조인 정권이 얼마나 지속될까 하는 답답함이었지. 그러면서 ‘사회주의가 과연 인민을 위한 이상적인 사회냐’ 하는 고민을 했었다.

함께 고뇌했던 우리가 지금은 세 갈래 길로 갈려 걷고 있구나. 누구는 충성계층으로, 누구는 방관자로, 그리고 나는 반항의 길로…. 탈북을 반항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난 늘 우리 마음속에 공통분모가 있었던 그때가 그립다. 밤을 새우고 아침엔 씩씩하게 강의실에 올라가는 열혈청년이었던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온다면….

남한 사람들은 내게 “북한엔 왜 봉기가 일어나지 않느냐”고 묻는다. 자유민주주의를 마음껏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니 세계 유일의 세습체제를 견디는 인민들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겠지. 그런 질문들은 참아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목숨 바쳐 민주주의를 성취했는데 북한은 바보들이 사는 곳 아니냐”며 비아냥거리는 말을 들을 때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단다. 북한 사람들이 흘린 피는 남한보다 100배는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사는 수십만 명의 정치범과 체제에 반항했다는 이유로 귀중한 목숨을 잃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 그들의 희생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누구라도 북한에서 하루만 살아봐도 그런 질문은 할 수 없다. 남한 사람들은 광복 후 소련이 아닌 미국이 진주한 것에, 억울하게 숨지면 이를 써줄 수 있는 언론환경을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한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말할 권리는 한 번도 박탈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신이 분신해도 적어도 자신의 가족은 함께 몰살되지 않음에 감사해야 한다.

10여 년 전 우린 김일성 김정일 2대 세습에도 그토록 못 견뎌 했지. 그런데 지금 3대 세습이란다. 난 너희들에게 “3대 세습이 가능하냐”고 묻고 싶다. 누구나 머릿속에선 도리질하면서 겉으론 충성을 맹세하는 이 현실이 과연 얼마나 오래갈 수 있느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지금 이 글을 너희는 보지 못하겠지. 북한에서 이 글을 볼 수 있는 선택받은 사람 대다수는 나의 김일성대 선후배들일 것이다. 지식인이라면, 더구나 한국 언론까지 볼 수 있다면 3대 세습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두뇌까지 노동당에 맡기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니까.

내가 평양에 돌아가는 날이면 이 글을 꼭 너희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동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어떤 고민을 함께 했었는지 열띤 토론을 벌이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토론기를 다시 내가 몸담은 동아일보에 싣고 싶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이미지 전체보기

 

 

유엔 총회장에서 한국, 미국, 일본, 유럽 대표들

 

김정일 묵념 거부 집단 퇴장!

조갑제닷컴   
 유엔에서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22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총회가 시작되기 전 북한이 김정일 추모 묵념을 요청했고, 카타르 출신의 알나세르 유엔총회 의장이 이를 받아들여 193개 회원국 대표들에게, 총회 일정 시작 직전 ‘1분간의 묵념’을 요청했다.
 
 의장은 “유엔 정회원국에 대한 의전 차원”이라면서 “17일 사망한 김정일을 추모하는 슬픈 임무를 맡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 조선노동당 총비서’, ‘국방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등 줄줄이 이어지는 김정일의 직함을 일일이 열거했다.
 
 당시 총회장에는 193개 유엔 회원국 외교관 중 절반가량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한국 미국 일본의 외교관과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연합(EU) 회원국 외교관 다수가 묵념을 거부하고 퇴장하였다고 한다. 이 외교관들은 25초간 진행된 묵념이 끝난 뒤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유럽의 한 외교관은 “수 만명이 사망한 데 책임이 있는 사람의 죽음”이라며 “김정일은 유엔에 모범이 되는 지도자가 아니다”고 지적했다는 것이다.
 
 히틀러, 스탈린 급의 학살자인 김정일의 죽음에 대하여 '서거', '애도' 운운한 한국의 종북세력을 정치판에서 퇴장시킬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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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애도 기독교인을 경고한 성경(聖經)
 
 '惡人을 無罪라 하는 자는 국민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김정일과 김일성은 스스로 하나님을 참칭한 기독교의 敵, 즉 사탄의 세력이다. 이 父子가 죽인 기독교 신도는 수십만 명을 넘을 것이다.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였지만 사탄의 세력을 용서하란 말이 없다. 
 
 잠언(箴言) 24장 24절은 이렇다. 
"惡人에게 네가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오직 그를 견책하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요 또 좋은 복을 받으리라"
(Whoever says to the gulity, "You are innocent"- people will curse him and nations denounce him. But it will go well with those who convict the gulity, and rich blessing will come upon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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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를 모르는 일부 불교·기독교계의 김정일 애도文 
"世緣을 다하신 데 애도"하는 조계종, "조문단 구성하라"는 NCCK   
 

종북·친북의 가장 독한 뿌리는 宗敎(종교)이다.   
화려한 袈裟(가사)를 걸치고 높다란 단 위에 선 상당수 종교인들은 “안정”“평화”“화해” 같은 그럴싸한 말들로 김정일을 옹호하고 김정일 체제가 지속되길 촉구한다. 두려워 떨 정권의 몇몇 측근을 북녘동포로 가장해 “위로의 뜻”을 전한다. 
  
그런 말, 그런 행동이 도덕적으로 惡(악)을 감싸고, 신앙적으론 사탄의 豫表(예표)적 인물을 감싸는 것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북한주민의 고난·고통·참상이 끝없이 이어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임에도 신경 쓰질 않는다. 
  
그들은 북한의 가련한 이들이 그대로 죽어 가는 것을 “안정”, 종교의 자유가 없는 북한이 계속되는 것을 “평화”, 수령독재와 잘 지내는 것을 “화해”로 扮飾(분식)한다.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어 온 700만 동족이 탄식할 일이다. 땅을 치고 애곡할 일이다. 
  
나치(Nazi)나 日帝(일제)와 협력한 종교인이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면 풍요로운 남한의 종북·친북은 권세를 위함이니 훨씬 악랄하다.

 

선악도 없고 옳고 그름도 없다. 억지와 궤변을 부리며 배부르고 등 따뜻한 남한 대중의 이기적 욕망에 영합한다. 먹물을 퍼뜨린다. 끝도 없이 쫑알거린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21일 김정일 사망에 대한 ‘애도문’을 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세연을 다하신 것(世緣已盡)에 哀悼(애도)의 뜻을 표하며, 깊은 슬픔에 잠긴 북녘의 동포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는 내용이다. 
  
기독교단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역시 1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에 哀悼(애도)를 표하며,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북녘 주민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위로가 함께 하기를 기도한다”고 애도문을 냈다. 
  
“급작스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은 지속되어야합니다(조계종)” “이번 사건이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빌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국제사회는 이번 사건으로 한반도의 안정이 깨어지지 않고 동북아의 평화가 지속될 수 있도록 협력하여 줄 것을 요청합니다(NCCK)”는 내용도 나온다. 
  
平和와 安定...

이는 김정일 이후 북한체제가 급변사태로 흔들려선 안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가?

정치범수용소에 있는 자들로 ‘그대로’ 죽어야 하고, 로동교화소·로동단련대·구류장에 있던 자들도 ‘그대로’ 갇혀 있어야 하며, 공개처형당하는 자들도 ‘그대로’ 당해야 하고, 강제송환당하던 탈북자도 ‘그대로’ 송환되고, 강제낙태·영아살해 당하던 임산부도 ‘그대로’ 있으란 말인가? 북한주민이 자유화·민주화돼서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일도(?) 있어선 안 된다는 말인가? 거대한 감옥인 북한을 ‘저대로’ 놔두란 말인가? 
  
심지어 NCCK는 “한국 정부는 종교계를 비롯하여 시민사회 진영을 포함하는 弔問團(조문단)을 구성하고 남북의 갈등을 해소하는 계기로 삼기를 바랍니다”고 밝혔다.

부끄러움은 찾기 어렵다.
  
종교의 본질 중 하나는 대중을 惡에서 돌이켜 善으로 이끄는 것이다. 김정일이 악당이 아니며 위로하고 조문해야 할 그럴싸한 지도자인 양 떠받든 뒤 무엇을 惡이라 말할 수 있는가? 무엇을 善이라 칭할 수 있는가? 
  
선악을 빼버린 종교는 세속적 출세와 立身(입신)을 한 인간을 떠받드는 천박한 소영웅주의 말곤 남지 않는다. 정치가 저 모양 저 꼴인데 종교마저 이런 식이면 한국이 겪어야 할 것은 혹독한 淨化(정화)의 과정뿐이다. 
  
깨어있는 先覺(선각)들의 투쟁이 절실하다./(펌)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01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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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격고백)북한의 신자들* "김정일은 악마 그 자체;영하 35도에 발가벗겨 고문" (탈북자 이순옥씨 프랑스 라디오 증언에서 발췌) 저는 북한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근 50여년을 북한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은총으로 96년 아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태어나 북한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제가 영문도 모른 채 지하 감옥소에서 모진 고문과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을 극적으로 취소한다는 통지와 함께 정치 수용소에 보내졌을 때 수용소안에서 겪은 북한 신자들의 모습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김일성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기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유일하게 6,000여명의 수용된 그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을 시킬 수 있는 생산 지휘와 모든 재정업무를 맡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땨문에 저는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작업장들을 이곳저곳 마음대로 갈 수 있었습니다. 어느날 저를 담당하는 재정부장 교도관이 저를 불러놓고 단단히 교육시켰습니다. "너는 오늘부터 매일 어떤 공장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 공장에는 미친 정신병자놈들만 모여 있다. 그 미친 정신병자놈들은 당과 수령님을 믿지 않고 하늘을 믿는 미친 자들이니 너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곳에 가야한다. 그리고 그 미친자들하고는 절대 눈길 한번 마주치지 말아라. 그렇지 않고 네가 그 자들이 믿는 하늘을 믿게 되면 네 목숨은 여기서 끝나게 되는 줄 알아라." 그런데 거기 가서 그 사람들을 보는 순간 나는 너무 놀랐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무리같지 않았습니다. 1.500도 이상 시뻘겋게 타오르는 용광로의 고열 노동 작업장이었는데 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을때, 무슨 짐승의 무리 같기도 하고 외계인 같기도 하고 도무지 사람의 모습은 찾아볼래야 찾아볼수가 없었습니다. 머리에 머리카락이 붙어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얼굴은 해골같고 이빨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키가 다 줄어들어서 120센티,130센티 요렇게 땅에 딱 붙은 난쟁이들만 움직였습니다. 나는 가까이에 가서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전 너무나 놀랐습니다. 잡혀 올 때는 정상인이었는데 거기와서 하루 열 여섯시간, 열 여덟시간씩 먹지도 못하고 그 고열 속에서 노동하며 고문받다보니 그 사람들은 척추가 녹아 내려서 뒷잔등에 혹이 되어 버렸고 몸이 다 휘어져서 앞가슴하고 배가 마주 붙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한결같이 모두 그렇게 육체가 망가져 기형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프레스 기계로 찍어도 한 판에 그렇게 똑같은 모습으로 찍기는 힘들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일하는 작업장에는 교도관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교도관들은 말로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소가죽 채찍을 윙윙 휘두르고 다니면서 묵묵히 일을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예수를 믿는 그 사람들의 몸에는 옷이 입혀져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처음에 그 사람들을 멀리서 보았을 때 모두가 꺼먼 옷을 입고 있는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찬찬히 보니 그 사람들은 맨 살가죽에다 앞에 시커먼 고무 앞치마 하나만 걸치고 있었습니다. 용광로의 뜨거운 불꽃이 앙상하게 말라붙은 살가죽에 튀고 또 튀고 딱지가 앉고 그 자리에 쇳물이 떨어지고 또 떨어져서 타버리고 해서 그 사람들의 피부는 한 곳도 성한곳이 없었고 마치 들짐승의 가죽과 같았습니다. 어느날 저는 그 곳에서 정말 말로 전하기 힘든, 너무나 끔찍하고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오후, 제가 공장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공장안이 쥐 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작업장 한 가운데 수백명의 죄수아닌 죄수를 모아놓고 담당 교도관들 두 명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미친듯이 고함을 치며 날뛰고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서 문 옆 한쪽에 비켜 서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수령님을 믿지않고 하늘을 믿는 미친 정신병자놈들이라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그 사람들을 차고, 때리고 하면서 인간이하의 취급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너희들 가운데서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대열 앞에 나서라. 하늘을 믿지않고 수령님을 믿겠다고 하면 자유세상으로 보내서 잘 살수있게 해 주겠다"고 하면서 그 사람들을 윽박지르며 하늘을 거부하라고 채찍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이상했습니다. 수 백명의 그 사람들은 왜 그런지 아무 대답도 없이 그렇게 매를 맞으면서도 침묵으로 맞섰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서 빨리 한 사람이라도 나서야 되는데, 그래야 오늘 누가 맞아죽지 않을텐데 왜 계속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나.. 저러고 있으면 또 누구를 끌어내다가 밟아 죽일지 모르는데, 빨리 한 사람이라도 나서야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급하게 생각하며 문 옆에 서서 무서움과 공포 속에서 떨고 있는데 예수를 믿는 그 사람들은 계속해서 침묵으로 대응했습니다. 그 때 독이 오른 교도관이 그사람들에게 달려가서 닥치는 대로 아무나 여덟명을 끌어 내다가 땅바닥에 엎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구둣발로 내리밟고 짓이겼습니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고 허리며 팔 다리뼈가 부러졌습니다. 그 사람들은 고통 중에서도 몸을 뒤틀면서, 짓밟힐 때마다 신음소리를 냈는데 그 신음소리가 너무나도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저는 그 때, 주님이 누군지,하나님이 누군지 전혀 몰랐습니다. 뒤에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이 고통 중에서도 몸을 뒤틀면서, 짓밟힐 때마다, 뼈가 부러지고 머리통이 부서지면서 신음소리처럼 애타게 불렀던 것은 바로 "주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당했던 고통의 천 만분의 일도 제대로 여러분에게 전해주지 못합니다. 미쳐 날뛰던 교도관들은 "수령님과 당을 믿는 우리가 사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너희가 사는가 보자"하면서 달려가더니 펄펄끓는 쇳물통을 끌어왔습니다. 그리고는 피투성이가 된 그 신자들 위에 부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순식간에 살이 녹고 뼈가 타면서 숯덩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난생 처음으로 내 눈앞에서 사람이 숯덩이로 변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그 충격이 컸던지, 그 곳을 어떻게 튀어나왔는지 기억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동안 도무지 눈을 감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정신적 충격으로 눈만 감으면 눈 앞에 숯덩이가 된 사람들이 어른거려서 도무지 눈을 감을 수도 없고, 잠을 잘 수도 없었고, 일을 제대로 할 수도 없었으며,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정신이 들어갔다 나갔다 했습니다. 저는 그 일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마음속 한구석에 실오라기 만큼이라도 수령님과 당에 대해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때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말입니다. 인간은 주님을 꽉 붙잡어야 된다는 것을 저는 그때 뼈져리게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다시, 우리 어머니가 평생을 하늘에 기도했다는 그 하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간절하게 하늘을 찾았습니다. "저 사람들이 저렇게 불에 타 죽으면서도 거부하지 않고, 목숨걸고 믿는 하늘이, 진짜로 그 하늘이 어디에 계시다면 나를 좀 살려달라고..... 그리고 저렇게 무서운 짓을 하는 저 자들에게 하늘에서 정말 벌을 내려 줘야되지 않겠냐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며 자나깨나 꿈속에서도 하늘을 찾고 또 찾고 기원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주님께서 그 간절한 저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한달이 멀다하고 공개처형이 있었는데 어느날 누구를 또 공개처형 시키려는지 6천명이나 되는 수용소 사람들을 한자리에 다 모이게 했습니다. 공개처형 때는 반드시 하늘을 믿는 사람들을 맨 앞줄에 앉힙니다. 그런데 하늘을 믿는 자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하늘을 보지 못하게 하라는 김일성의 특별지시와 규정이 있어서 하늘을 믿는 그 사람들을 앉힐 때에는 무릎사이에 목을 끼우고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리게 했습니다. 심지어 죽어서도 하늘을 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면서 죽은 시체도 목을 꺽어 거적에 말아서 어두컴컴한 산골짜기 나무 밑에 파묻게 규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날도 신자들은 하늘을 조금도 보지 못하도록 목을 무릎사이에 끼우고 맨 앞줄에 앉아 있었고, 그 뒤쪽으로 다른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누구를 또 공개처형하려는가?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 쇠몽둥이로 머리를 한 대 맞은것처럼 정신이 아찔하여 대답을 할 수 없었고, 일어설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수들이 나를 끌어내다가 앞에 세웠습니다. 내가 군중들 앞에 섰을 때, 수용소 소장이 나에게 "고마운 수령님과 당의 은덕으로 너는 이 시각에 석방이다"라고 통보를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목을 무릎에다 끼우고 맨 앞줄에 엎드려 있던 신자들이 내가 석방된다는 소리에 약속이나 한듯이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었습니다. 그 때 저는 그 분들의 눈빛을 보았습니다. 그 분들은 눈빛으로 간절히 간절히 말했습니다. "밖에 나가거든 자기들의 실상을 세상에 알려 달라"고... 지금도 제 가슴에는 그 분들의 간절한 눈빛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평생 빌고 또 빌은 그 하늘이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는 그 악명높은 정치범 수용소에서 저를 살려 주셨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희 모자를 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북한의 수용소에 갇혀 있는 그 신자들의 눈빛을 절대로 잊을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 분들이 이 시대의 순.교.자.라고 봅니다. 저의 증언으로 인해 북한 신자들의 인권문제가 150여개 나라에 나갔고 세계가 떠들었습니다. 유럽의 지식인 100여명이 프랑스에 모여 북한 신자들의 인권을 위한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것에 대해 철. 저. 하. 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북한을 위해 "꼭"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순옥(52)씨가 파리의 메종드 라디오 프랑스에서 북한 인권 실태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여자로서 차마 견디기 힘든 고문을 겪었고, 영하 35도 이하 겨울에 발가벗긴 채로 추위에 떠는 [동태 고문]으로 동상에 걸려 열개의 발톱이 다 빠졌다"고 폭로했습니다. 이씨는 "사형장에 끌려가는 한 여성이 집에 두고 온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던 모습이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고 북한 수용소의 참상을 전했습니다 이미지 전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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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전체보기 신문발전위원회가 오마이뉴스, 한겨레 등과 함께 親北매체 지원.
金成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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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간첩단 사건을 수사중인 공안당국은 월간지 '민족21' 관계자들이 천안함 爆沈을 주도한 북한 정찰총국의 지령을 받아 활동하였다는 단서를 포착,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고 조선일보가 오늘 보도하였다. 공안당국은 지난 달 민족21 주간인 안영민씨와 父 안재구 전 경북대 교수, 편집국장 정용일의 집과 사무실을 압수수색, 이 잡지 관계자들이 일본에서 정찰총국 공작원을 접선해 지령을 받고 남한에서 수집한 정보를 보고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을 상당수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고 이 신문은 주장하였다. 민족21은 놀랍게도 노무현 정권 시절 국민세금으로 운영되는 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다. 2006년8월호에 실린 기사를 소개한다.

 

 

[이슈추적] 신문발전기금 우선 지원대상 잡지「민족21」

北「통일신보」·조총련「조선신보」와 손잡고 노골적으로 先軍정치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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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成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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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발전위원회(이하 「신문委」, 위원장 張幸勳)는 지난 7월4일 「2006년 신문발전기금 우선지원 대상」 중 하나로 북한체제를 일방적으로 美化(미화)해 온 월간지 「민족21」을 선정, 발표했다. 「민족21」과 함께 우선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매체는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프레시안과 한겨레신문 등 12개社이다. 신문委는 정부기구가 아닌 각계의 추천으로 구성된 독립기구지만, 신문발전기금은 公的자금으로서 전체 규모는 157억원에 달한다.
 
  신문委는 7월4일 보도자료를 통해 ▲독자권익위원회 지원 2억원 ▲고충처리인 지원 1억원 ▲경영컨설팅 4억원 ▲구조개선 및 신규사업 75억원 ▲시설도입 및 정보화사업 75억원 등 우선지원 대상사업자로 선정된 정기간행물 사업자들에게 157억원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주요 언론들이 『157억원의 公的자금이 親與(친여)매체에 편향적으로 지원되고 있다』는 요지로 일제히 비판에 나서자, 신문委는 지난 7월5일, 6일, 7일 보도자료를 내고 『12개 우선지원 대상 사업자가 지원받을 수 있는 기금은 사업비 예산 157억원 중 65억5000만원』이라고 주장했다.
 
  신문委는 같은 보도자료를 통해 『신문발전기금은 新聞法(신문법)과 同法 시행령 근거 조항에 따라 신문발전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집행되는 것이며, 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집행 지침에 따라 엄격히 관리되고, 기금집행 후에는 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평가 지침에 따라 집행과정을 검증받게 되어 있다』고 덧붙였다.
 
 
  先軍정치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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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萬吉 前「민족 21」발행인.

  2006년 신문발전기금 우선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민족21」은 姜萬吉(강만길) 親日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이 2001년 3월 창간한 잡지이다. 이 잡지는 「남북이 함께하는 통일전문지」를 모토로 창간 당시부터 북한 「통일신보」, 일본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와 기사교류를 지속해 왔다.
 
  「통일신보」와 「조선신보」의 기사를 그대로 게재하는 「민족21」은 金正日 독재 유지 논리로 이용되고 있는 「先軍정치」를 美化하고 있다.
 
  「민족21」은 지난해 12월호 한동성 교수 (일본 조선大) 인터뷰 기사에서 『先軍정치는 조선반도의 평화를 확고히 수호함으로써 경제의 부흥발전을 위한 안전한 환경과 조건을 보장하는 정치』, 『나라의 자주권을 지키고 인민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옹호하고 실현하기 위한 정치』, 『우리 민족의 통일을 담보하는 통일애국의 정치』 등으로 격찬했다.
 
  근래 「민족21」에 실린 기사 중 先軍정치를 옹호하는 부분을 일부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先軍정치는 미국의 對北(대북)위협을 돌파하는 데 큰 효과를 발휘했다. … 경제난 극복과정에서도 뚜렷한 힘을 발휘했다. … 「7·17조치」 등으로 대표되는 경제개혁을 본격화한 것도 先軍정치의 성과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 1990년대 중반 경제난으로 발생한 인민들의 동요를 바로잡는 데도 톡톡히 기여했다> (2005년 10월호, 김진환 성공회大 강사 기고문 中)
 
  <先軍정치는 나라의 자주권을 지키고 인민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이다. … 북한이 말하는 핵무기보다 더 강한 것은 바로 軍民(군민)일치, 일심단결의 先軍정치를 의미한다> (2005년 10월호, 「先軍정치 없었다면 이라크 꼴 났을 것」 기사 中)
 
 
  『북한 노동자들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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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21」에서 펴낸 책들.

  「민족21」의 북한에 대한 묘사는 비판이 全無(전무)한 일방적 선전에 가깝다.
 
  지난 5월호에는 「北은 나의 두 번째 고향, 때 묻지 않은 공동체 사회」라는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정기열 감리교신학大 교수와 인터뷰한 평양체류 외국인 다니엘氏의 입을 빌려 이 기사는 북한을 이렇게 격찬했다.
 
  <5년 가까이 그가 경험한 북녘 사회와 사람들에 대한 평가 이야기를 번역해서 요약하면 대강 아래와 같다. 필자 자신과 남녘, 세상 사람들에게 참고가 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北은 조국에 대한 사랑과 제 민족에 대한 긍지가 대단히 높은 사람들이다. 일에 대한 높은 열정과 책임성, 창의성,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정성이 훌륭했다. 그들은 강하되 겸손했으며 동시에 결단성이 있는 사람들이다. 높은 일체감과 공동체 정신으로 강하게 결속된 아름다운 사회였다.…
 
  北은 미국과 밖의 영향이 밀려들 때 그들이 지켜온 아름다운 사랑공동체가 망가지지는 않겠는지 염려할 정도로 아름답고 건강한 사람들의 사회였다.… 나는 그분들이 갖고 있는 그 맑고 깨끗한 「순수함(purity)」을 지킬 수 있기를 기원한다」>
 
  김성한 건설산업연맹 통일위원장이 지난 6월호에 기고한 「北의 노동절은 축제. 투쟁하며 보내야 하는 南과는 정반대」라는 글에서는 북한을 이렇게 미화하고 있다.
 
  <자신들(북한노동자들)이 그곳의 노동자라는 사실에 무한한 자긍심을 느끼고 있음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평양산원」을 다녀온 여성 참가자들은 여성복지에 대한 부분은 北이 오히려 더 잘되어 있다면서 부러워하더군요>
 
  그는 이 글에서 북한의 「노동절」을 참관한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노동절 당일 평양 시내는 상당히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노사 간의 끊임없는 대립으로 인해 남측 노동자들은 5·1절에는 집회현장으로 달려가야 하는 것이 현실인데, 북측은 오히려 편안히 쉬는 것 같아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난 5월호에 실린 김태하 금성학원 副원장 인터뷰 기사에서는 북한의 교육체제를 찬양하고 있다.
 
  <금성학원을 떠나면서 北의 수재교육이 상당히 체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北은 이미 1980년대부터 조기 수재교육을 중시하면서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수학·외국어·컴퓨터·예술·체육 등 각 분야에서 조기교육을 정책적으로 장려해 왔다. 그러나 北이 재능교육에만 매몰돼 있는 것은 아니다.
 
  「전문교육에 주력하면서도 일반교육을 강화해 높은 수준의 재능을 소유하도록 균형적인 교육을 해야 하며, 어린이의 성장 과정과 밀접하게 결부해 점차적으로 완성토록 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이 北의 수재양성정책이다>
 
 
  노골적으로 인민군 찬양
 
  「민족21」의 북한체제에 대한 찬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잡지는 북한의 조선인민군과 金日成·金正日 체제 찬양극인 「아리랑」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북한의 조선인민군은 오직 조국과 인민, 사회주의를 위해 충실히 복무하는 인민의 군대… 일반적 군인이 소비와 파괴로 특징 지워지는 것과 달리 창조와 건설의 군대… 북한은 先軍사상과 先軍정치에 따라 강성대국을 건설하고 「主體(주체)혁명」을 완성해 가는 先軍시대를 이뤄갈 것이다> (2005년 12월호, 일본 조선大 한동성 교수 인터뷰 中)
 
  <자본주의 나라와 달리 조선인민군의 조직성, 결단력, 혁명적 동지애 등 혁명적 군인정신이 全사회의 사상정신으로 확산되고 있다. … 北의 인민군대는 90년대 北의 사회주의가 내외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돌파하는 주축이 되었다> (2005년 10월호, 「先軍정치 없었다면 이라크 꼴 났을 것」 기사 中)
 
  <2002년, 2005년 두 차례의 아리랑 공연으로 침체됐던 北 사회에 활기를 불어넣고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고양시키는 데 일조한 것 같다> (2005년 11월호, 「경제 강국 건설지향 뚜렷, 활기찬 시민들의 모습 속에 희망 가득」 기사 中 )
 
  <아리랑은 조국광복을 맞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참답게 되돌아보고, 김정일 장군님의 先軍정치를 잘 받들어 나가야 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2005년 9월호, 「아리랑 민족의 100년사와 金日成 주석의 업적」 기사 中)
 
 
  『「민족21」은 통일애국의 산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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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 現「민족21」발행인

  「민족21」은 지난 4월 그간의 기사들 중 북한 「통일신보」, 조총련 「조선신보」 기사들을 중심으로 「실리 사회주의 현장을 가다」, 「래일을 위한 오늘에 살지요」라는 단행본을 출간했다.
 
  「통일신보」와 「조선신보」는 책 머리말에서 「민족21」에 대해 각각 『통일애국의 산아들』로서 『참다운 애국애족의 노정』을 걸어왔다고 격찬했다.
 
  <돌이켜 보면 6·15 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성스러운 길에서 우리 「통일신보」가 南의 월간잡지 「민족21」과 손을 잡고 협력해 온 지도 어언 다섯 해가 됩니다.… 7·4 남북공동성명의 채택으로 삼천리강토를 진감한 통일의 환희와 감격을 안고 출현한 北의 「통일신보」, 6·15 시대의 벅찬 흐름과 민족의 뜨거운 통일열기를 떠받들려 태어난 「민족21」은 분명 통일애국의 산아들이었습니다.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 밑에 통일의 주인인 北과 南을 하나로 굳게 단합시켜 온 겨레를 자주통일에로 선도해 나가려는 공통된 지향은 北과 南의 우리 두 언론을 하나가 되게 한 것입니다> (「통일신보」 측 「책을 펴내며」 中)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의 산아로 태어난 남쪽의 통일전문지 「민족21」이 창간된 지 어느덧 다섯 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남북이 함께 하는 유일한 잡지가 걸어온 지난 5년의 역사는 北南 최고 수뇌 분들의 상봉으로 펼쳐진 6·15 시대의 언론으로서 「우리민족끼리」 정신을 남쪽사회에서 구현해나가는 참다운 애국애족의 노정이었습니다. …
 
  우리는 앞으로도 「우리 민족끼리」 정신에 따라 6·15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애국애족의 언론으로서의 사명과 역할을 다할 것이며 이 길에서 언제나 「민족21」과 함께 서 있을 것입니다> (「조선신보」 측 「책을 펴내며」 中)
 
  「통일신보」, 「조선신보」 측 기사를 그대로 인용하는 이들 서적 역시 북한체제에 대한 선전매체로서의 성격이 짙다.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北과 南에 현존하는 사상, 제도의 차이를 넘어 민족이 하나 되어 외국세력에 의하여 동강난 조국을 통일하자는 것이다. 北측에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大용단」이 과거의 불신과 대결을 넘어 민족의 화해와 단합의 흐름을 단번에 만들어내었다. 北측 사람들의 통일관은 꾸밈이 없다. 민족이 단결하면 그것이 곧 통일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아름답고 큰 소리」를 울리는 6·15 공동선언 이행은 그 자체가 끊어진 혈맥을 다시 잇는 통일의 과정이다> (「실리 사회주의 현장을 가다」, 『6·15 선언 후 평양의 3백일, 인민들이 뛰고 있다』 中)
 
  <작품은 김일성 주석의 서거라는 大국상을 당한 1994년의 나날들과 그 이후의 사변들을 형상하였다. 1995년 적대국들의 포위 속에 있던 조선은 「先軍」이라고 불리는 군 선행, 군 중시의 국가 노선을 선포하고, 힘에는 힘으로 대응하는 길을 택하였다. 先軍정치의 관철은 인민생활의 희생도 무릅쓰고 나가야 할 가혹한 노정이었다. 「고난의 행군」의 시기에는 적지 않은 인명피해도 있었다> (「실리 사회주의 현장을 가다」, 『교향악으로 본 북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中)
 
 
  신문委, 『논조에 관계 없이 지급 결정』
 
  「민족21」은 지난 5월 말 이래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장 명진 스님이 발행인을 맡고 있다. 前 발행인 姜萬吉씨는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근식 경남大 교수, 정기열 감신大 교수, 전현준 통일연구소 선임연구위원, 한홍구 성공회大 교수 등이 편집기획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지난 7월6일 신문委에 전화를 걸어 「민족21」에 대한 신문委의 지원에 관해 물어보았다. 권영준 신문委 전문위원은 『해당 기금은 잡지의 논조에 상관없이 공정한 기준에 따라 지급이 결정됐다』고 주장했다.
 
  ─「민족21」에 대한 지원기준이 뭔가.
 
  『홈페이지에 나와 있다. 보도자료로도 발표했다』
 
  ─「민족21」은 북한체제를 美化해 온 잡지이다. 이런 잡지에 公的자금을 지원해도 되는가.
 
  『해당 기금은 잡지의 논조에 상관없이 공정한 기준에 따라 지급이 결정됐다. 신문위원회가 신문법에 따른 항목별 지원기준 점수를 합산해 지원 대상을 결정한 것이다.
 
  특히 잡지는 신청한 회사가 적었다. 골프·다이어트 잡지 등이 대부분이었고, 時事(시사)를 다룬 것은 「민족21」이 유일했다. 결국 「민족21」의 배점이 가장 높았고, 이에 따라 지원한 것이다』
 
  ─논조는 배제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민족21」이 時事를 다뤄서 지원했다는 것은 내용을 고려했다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신문법의 입법취지에 여론 다양성,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가 있다. 전문성을 가진 골프·다이어트 잡지보다 이러한 입법취지에 「민족21」이 적합했다』
 
  ─여론 다양성,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 등을 고려했다는데, 신문법 28조의 지원기준에는 이같은 내용들이 없지 않은가.
 
  『여론 다양성,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는 신문법 입법취지로서 당연히 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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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21」편집기획위원. 왼쪽부터 김근식 경남大 교수, 정기열 감신大 교수, 전현준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한홍구 성공회大 교수.

 
  『실정법 위반 없이 경향성만으로 지원 배제할 수 없다』
 
  ─설령 그 같은 입법취지를 고려했다 해도 「민족21」은 先軍정치 선전 등 북한체제를 일방적으로 미화하고 있다. 공안기관 담당자들도 先軍정치 선전 등의 행위는 국가보안법에 위반된다고 지적한다. 실정법에 위반되는 표현물에 지원할 수 있나.
 
  『명시적인 실정법 위반 없이 단순한 경향성만으로 지원 대상에서 배제할 순 없다. 명예훼손의 경우에도 명시적 위반 없이 명예훼손의 가능성만으론 지원을 금할 수 없다.
 
  신문위원회는 간행물윤리위원회·신문윤리위원회·언론중재위원회·정보통신위원회·선거보도심의위원회 등에 違反(위반)사례들을 자문해 이를 종합적으로 검정했다. 「민족21」은 그 같은 지적사항이 적었기 때문에 선정됐다고 볼 수 있다』
 
  ─「민족21」과 함께 지원했던 잡지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잡지분야는 지원 자체가 적었다. 지원을 유도하기 위해 잡지협회까지 찾아갔는데 신청이 별로 없었다. 잡지는 모두 8개社가 신청했다. 5개가 골프, 1개가 여행, 1개가 여성관련 다이어트 잡지였다. 예를 들어 「월간중앙」 같은 잡지도 신청대상이 될 수 있는데 신청하지 않았다』
 
  ─개별 잡지사에 신청을 권유하지는 않았나.
 
  『개별 社에 연락하지는 않았다. 잡지협회에만 연락했다. 사실 잡지분야 지원은 극히 미미하다. 경영컨설팅, 은행융자 정도이다. 큰 의미는 없다』
 
  권영준 위원은 『올해 지원받은 「민족21」에 실정법 위반이 있다면, 내년에는 지원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질문하시는 기자가 소속된 매체도 내년에 한번 신청해 보기 바란다』는 말로 전화통화를 마무리했다.
 
  洪官熹(홍관희) 안보전략연구소장은 『국민의 血稅(혈세)를 「민족21」과 같은 親北 잡지에 지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사회]
[사회] 北 18세 소녀, "떼죽음속출, 인신매매기승"
하층민 중 1000여 만명 식량난…300만명 아사 위기
▲ 북한의 식량난이 최악의 사태로 치닫으면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사진출처: 좋은벗들> < ▲ 북한의 식량난이 최악의 사태로 치닫으면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사진출처: 좋은벗들> >
▲ 북한의 식량난으로 영양결핍에 걸린 어린이들이 속출하고 있다. <사진출처: 좋은벗들> < ▲ 북한의 식량난으로 영양결핍에 걸린 어린이들이 속출하고 있다. <사진출처: 좋은벗들> >
A씨 “여동생은 끼니를 먹지 못해 처음에는 퉁퉁 부으면서 나중에는 붓기가 빠지고 뼈만 남는 상태가 되기를 3~4번 반복하고서야 눈물을 흘리면서 죽어”

좋은벗들 “대부분의 주민들은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해 물을 끓여 먹으면서 생계를 연명, 이들 중 300만 명 이상이 심각한 아사 위기에 노출되어 있다” 지적

“한 민족, 한 동포인 북한 아이들이 굶어 죽고 있다. 위급한 상황이니만큼 정부가 신속하게 발 벗고 나서야 한다. 식량지원은 정치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인도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이후 대북정책과 관련해 ‘비핵개방 3000’구상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미국 부시대통령과의 대화에서 지난 해 10월 협약된 남북공동선언을 배제한 '실용주의' 정책으로 북한의 핵 포기 방안에 따라 식량지원을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지난 4월 언론을 통해 “북남선언과의 합의를 짓밟고 외세를 추종한다면 우리도 대응을 달리 하겠다”고 밝히고 두 달 만에 ‘남한과의 대화 단절’을 선언했다.

최근 원정화 여간첩 사건으로 남북 간의 냉전관계가 더욱 심화되는 가운데 북한은 식량부족으로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어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시사주간지 <사건의내막>은 통일부 사단법인의 <좋은벗들>에 실린 자료를 토대로 식량난의 현주소와 북한주민들의 실상을 살펴봤다.

WFP(세계식량계획)에 따르면 북한은 10년 만에 최악의 식량난을 겪고 있다. 지난 6월 WEF는 “북한의 전 지역을 답사한 결과 대기근이 일어난 1965년과 흡사하고 북한이 90년대 중반과 같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고 우려했다.

이에 지난 2일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에 63만 톤의 식량을 긴급 지원하기로 결정, 내년 11월까지 5억 달러 규모를 지원할 방침을 밝혔다. 이와 더불어 북한식량지원을 위해 기부국들과 한국정부에 협조를 요청했다.

월남한 A씨는 자신의 경험을 들어 북한주민들이 처한 열악한 실정을 생생히 증언했다. 그는 "식량난으로 내 여동생이 굶어죽었다"며 “처음에는 퉁퉁 부으면서 나중에는 붓기가 빠지고 뼈만 남는 상태가 되기를 3~4번 반복하고서야 눈물을 흘리면서 죽었다”고 애통해했다.

그에 따르면 북한에서 살던 당시 동네에는 700여 가구가 살았는데 식량난으로 인해 250가구의 집이 비었다고 한다. 이들의 상당수는 끼니를 먹니 먹지 못해 굶어 죽거나 먹을 것을 찾아 고향을 떠났다고 A씨는 설명했다.

또한 남한에서 쌀이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주민들은 춤을 추며 기뻐했다고 한다. 평소 크게 올랐던 쌀값이 절반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2000년도에는 남한에서 보내준 쌀과 비료로 인해 북한 주민들의 민심이 흔들렸다고 말했다. 북한에서는 마치 김정일의 능력으로 남한에게 물건을 받은 것처럼 행사하지만 주민들은 이를 알고 있었다는 것.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을 두고 일부에서는 일명 '퍼주기식‘의 정책이라는 논란이 있었지만 북한주민들에게는 생명과 직결되는 유일한 희망이었던 셈이다. 비록 주민들은 겉으로는 표현할 수 없었지만 언제나 남한 주민들에게 고마운 마음과 동포애를 가졌다고 한다.

이처럼 식량난으로 혹독한 생활을 하면서도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킬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A씨는 “정부의 삼엄한 감시와 반동자로 찍힐 경우 사돈에 8촌, 먼 친척까지 연좌제에 묶여 있어 탄압과 핍박을 당하며 죽을 자유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1996년도 북한 국민소득은 700달러였다. 그러나 지금은 공장의 80%가 가동을 멈췄고 20%만이 돌아가는 상황이라 국민소득은 대거 감소했다. 이렇듯 열악한 경제여건으로 말미암아 북한에는 ‘먹고 죽는 건 원한이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라고.

그는 “탈북자들 중에서 한이 많이 맺힌 사람의 경우는 지원을 반대한다”며 “그것은 북한 주민들이 수백만이 죽어도 조금만 참으면 북한 지도부가 무너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전에 죄 없는 사람들만 희생당한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고 말했다.

북한 상황에 대해 대북인권단체 <좋은벗들> 사무국장 이승용씨는 “정부에서 북한의 식량지원에 적극 나서야한다"고 호소했다. 북한이 현재 인구의 절반이 넘는 하층민 중 1000여 만명이 식량난으로 곤혹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만큼 도움이 절실하다는 것. 그는 “대부분의 주민들은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해 물을 끓여 먹으면서 생계를 연명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이들 중에도 300만 명 이상이 심각한 아사 위기에 노출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좋은 벗들> 자료에 따르면 지난 6월까지 황해도와 강화도 인근에서는 매일같이 아사자가 발생하고 있다. 지난 4월 꽃제비보호소, 고아원, 구금시설 등은 물론 홍수 최대피해지역인 평안남도 양덕군에서도 아사자가 발견됐다.

이들은 풀죽을 먹으며 연명하거나 부모 없는 아이의 경우 꽃제비가 되어 이곳저곳 떠돌다 굶어죽고 있다. 이는 황해도를 비롯한 북한의 전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어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다. <좋은 벗들>의 자료를 토대로 북한에서 발생하고 있는 식량난의 실상을 살펴보면 이렇다.

황해남도 연안군에서는 옥수수 밭 경비를 보던 농민들이 옥수수를 서리하러 온 군인들에게 폭행을 당해 한명이 사망하고 한명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있었다. 농민들은 4군단의 포병연대 소속 군인이라 짐작했지만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결국 범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연안군외의 다른 농장에도 옥수수 도적들 자주 나타난다. 보통 한개 작업반에 약 50여명의 인원을 두고 경비를 선다. 옥수수서리뿐 아니라 감자 서리도 종종 일어난다. 한번은 17살의 사내아이가 감자를 훔치기 위해 감자 굴에 들어갔다가 숨진 사례도 있었다. 밀폐된 공간에 가득 퍼진 감자의 독성에 질식해 목숨을 잃었다는 것. 보름이 지나서야 꺼내진 시신의 두 손에는 감자가 들려있었다.

식량난 심화로 인해 군대를 지원하는 사람의 수도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달 함경북도에서는 군입대자가 총 2500여명에 달했다. 일부 부모들은 집에서 밥을 제때 먹이지 못할 바에는 군대를 보내는 것이 낫다는 입장이라고. 자신들이 먹고 살기 힘들기 때문에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부모도 있다는 것. 학생들도 예전에는 간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 갔지만 요즘은 먹을 것이 없어 군대에 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평양시 순안구역에서 비행기정비를 하는 군인은 그나마 형편이 넉넉하다. 월급은 2500원이지만 본인과 가족들에게 입쌀과 안남미가 배급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출근할 때 기름통을 가지고 나와 정비참모들의 눈을 피해 석유를 빼돌려 아내에게 넘겨주고 아내는 이를 항공유 1kg당 1600원을 받고 장사꾼에게 넘겨주는 방식으로 돈을 벌고 있다.

이승용 사무국장은 “평양은 그나마 외부에서 지원이 되는 상황이지만 외곽지역은 거의 죽으로 연명하고 있다”며 “지방의 경우는 상황이 더욱 열악해 600만명 가량이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에서는 지난 2007년 1월 군부대 식량 공급량이 60% 수준으로 떨어지는데 이어 6월경에는 하루 평균 10여 명 안팎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함경도, 강원도, 평안도 등 전국 지역에 쌀 원천이 떨어졌고 12월경 농산물 수확량 감소로 분배량도 감소했다. 식량가격 또한 오름세와 내림세를 반복했다.

2008년 2월 농촌 세대 20%가 식량난에 허덕였고 3월에 이르러 곡창지대 농장원 식량배분이 중단되고 쌀 가격이 1300원에서 2000원으로 급상승했다. 5월까지 아사자가 발생했던 황해도는 7월 들어 햇보리, 햇밀, 햇감자 등이 나오면서 최근 아사자가 줄어든 상황. 현재 강원도, 자강도, 양강도, 함경도 순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장사, 뙤기밭 농사 등으로 자구책을 마련해 생존해 오는 주민들은 '떼죽음'을 당하지 않지만 극빈층의 경우는 식량난으로 인한 죽음이 흔히 발생한다는 것. 북한 내부에서는 “죽을 사람들이 죽는 것”이라며 외면하기 일쑤라고.

이에 대해 이 사무국장은 정부가 북한의 어려운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나는 아사자 피해를 하루빨리 예방해야한다. 사람이 식량으로 굶어죽는 것은 정치적으로 다룰 문제가 아니다”고 말했다. 북한의 식량난을 인도적인 차원에서 바라봐야한다는 지적이다.

또한 “북한의 상황을 외면할 경우 적대적인 관계가 깊어질 것이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북한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협력해나가야 한다. 북한과 소통하기위해 노력해야할 때다. 우리 모두 머리를 맞대고 북한 주민들을 살리는데 힘써야한다”고 강조하며 “올해까지는 적어도 15만 톤, 내년에는 50만 톤의 지원이 이루어져야 아사자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더불어 국민들의 관심과 참여도 당부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북한에 도움을 주면 우리의 경제가 어려워질 것을 걱정한다. 하지만 작은 도움으로 우리의 경제가 무너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우리가 더 발전할 수 있다고 본다. 현재 북한식량난 돕기 100만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있는데 국민들이 관심을 보였으면 한다.”

한편 WFP가 요청한 북한식량 보급과 관련해 부정적인 시각도 제기되고 있다. 이와 관련 김하중 통일부 장관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출범 10돌 기념식에서 “각계 의견을 수렴해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식량지원을 검토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북한주민들에 대한 식량지원 문제와 관련해 인권단체들의 ‘인도적 지원’ 요구가 높아지는 가운데 현 정부가 경색된 남북관계 속에서 어떠한 해법을 내놓을 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출처:dailybreadnews 제휴사 브레이크뉴스(www.breaknews.com) 김문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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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기사 입력 : 2008-10-06 00:40

오! 주여 이들을 버리지 마시고 사랑을 베푸소서.

너무나 기가 막힌 사실



▲ 금수산 기념궁전 외경

북한의 금수산 의사당은 김일성 사망후

그 시신을 안치한 금수산기념궁전

즉 '김일성 시신궁전'으로 바뀌었다.

 김일성이 미라의 모습으로 누워있는 곳이다.

3백만명이 굶어죽던 대아사 기간인 95년에 착공했고

 의사당을 시신궁전으로 재건축하는데

 무려 8억9천만 달러가 들어갔다.

당시의 국제가격으로 치면 강냉이 6백만 톤으로

 2천3백만 인민이 3년간

굶주림을 면할 수 있는 건축비다.

북한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 (www.uriminzokkiri.com)는

 최근 화첩“수령영생위업 실현을 위하여”를

소개하면서, 김일성 시신궁전 내부를 소개했다.

화첩은 금수산기념궁전 건설과 영생탑 건설,

 주체연호 및 태양절 제정, 회고록(계승본)발행,

 혁명사적지 및 전적지들을 새롭게 발굴하고

꾸릴 데 대한 김정일의 활동을

100여장의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화첩 첫 부분에 소개된 금수산기념궁전은

 대성구역 미암동 1973년 3월에

금수산 의사당으로 착공되어

 1977년 4월 김일성 탄생 65돌에

 준공된 주석궁이다.



▲ 95년 김정일이 호위사령관 이을설(좌)에게
'금수산기념궁전' 건설을 지시하고 있다.




▲ '금수산기념궁전' 건물 모형을 보며 설명하는 김정일




▲ 김정일이 기념궁전 벽에 부착할 대리석
견본을 직접 고르고 있다.


김일성은 스스로 죽고나면

대성산 혁명열사능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수령의 후계자로서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으로 모시기 위해

김일성의 유언을 거부하고

금수산의사당 전체를 시신궁전으로 만들었다.

94년 김정일은 김일성의 시신 영구보존과 관련,

궁전으로 만드는 지시를 내렸다.

1995년 6월12일 당중앙위, 당중앙군사위,

국방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

공동 명의의 결정에 따라

 금수산의사당(주석궁)을

금수산 기념궁전으로 바꾸었다.

총부지 면적은 350만㎡,

지상 건축면적은 3만 4910㎡에 달하며,

광장 앞마당 넓이는

 한번에 20만 명이 운집할 수 있는 10만㎡로,

김일성 광장의 두 배에 달한다.

 화강석 70만개를

20여 가지 모양의 규격으로 다듬어 깔았다.

주석궁은 처음 유럽식 궁전을 모방한

5층짜리 복합 석조건물 이었으나,

 시신궁전으로 되면서 중앙홀에

 대형 김일성 초상화와 김일성 입상을 세웠고,

궁전 앞 광장은 김일성 김정일의 생일을 상징해

 너비 415(4월15일 김일성 생일) 미터,

 길이 216(2월 16일 김정일 생일)미터로 되어있다.



▲ 기념궁전 건설에 동원된 건설 장비와 군인들.

광장 건설에는 공병국 1여단

(김일성, 김정일 별장 건설전문)이 투입됐다.

별장건설 전문 부대이므로 중장비들이 동원된다.

이 부대는 다른 건설 부대와 달리

배급 상태가 좋다.




▲ 기념궁전 내에 있는 탈의실. 반드시
양복 또는 한복으로 정장해야 한다.

참배객들은

김일성 시신(미라)이 있는 방에 들어갈 때

외투를 벗어 탈의실에 맡긴다.

남자는 양복, 여자는 한복 차림만 허용되며

점퍼나 작업복을 입은 사람은 입장할 수 없다.

이를 모르는 지방 사람들이 평양까지 갔다가

시신이 있는 곳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내려온 경우도 많다.



▲ 완성된 금수산 기념궁전(97년)




▲ '금수산 기념궁전'을 연결하는 외부 복도




▲ 야외복도에서 궁전 본관으로 통하는 수평 에스컬레이터




▲ 시신 보관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1996년 주민들의 관람을 위해

건물 바깥쪽에 긴 복도를 만들고,

 1998년에는 100여 정보에 달하는

 수목원을 조성했다.

 

지하 200미터의 평양 지하철과 이어졌으며,

주변에만도 30여개의 감시 검문초소가 있어

일반인의 접근이 통제되고 있다.

김일성 시신 보관의 위생과 편의를 위해

궁전 내부에 수억 달러를 들여 자동 공기청정기,

 자동 신발털이 기계와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했다.

모든 방과 홀은

 화강석과 대리석을 다듬어 건설했다.

금수산 기념궁전은 '어버이 수령'에 대한

지극한 효성과 충성의 극치이자,

수백만 명의 목숨을 빼앗으며 건설되었다.

 

이것이 김정일 수령독재의 본 모습이다.



▲ 궁전 왼편 외부 복도(위). 궁전 정문에 건설된 돌문(가운데).
궁전 주변을 둘러싼 화강석 울타리




▲ 완성된 궁전 주석단을 돌아보는 김정일. 주석단
전체가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 궁전 중심홀에 비치된 김일성 립상(입상). 홀 입구에서
60m로 대리석 기둥이 세워져 있다.




▲ 김일성 시신에 참배하기 위해 줄은 선 해외동포들

위기사 죽은 김일성시신은 저렇게 초 호화궁전에 모시고

아래 북한주민들의 실상은 너무 비참해서 ,,,

'김정일의 인민 대학살 현장이네요'

서울시청앞 '북한인권사진전시회'



▲ '북한인권사진전시회' 개막식

12월 8일부터 10일까지 진행되는

북한인권국제대회 개막 행사인

 ‘북한인권사진전시회’가

4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자유북한방송 김성민 대표,

납북자 가족협의회 최우영 대표 등

북한인권관련 단체 대표들과

 자유주의연대 신지호 대표,

성신여대 정외과 김영호 교수 등

국제회의 집행위원회 인사들이

다수 참여했다.

이번 북한 인권 국제대회 공동 대회장을 맡은

유세희 바른사회 시민회의 공동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북한인권의 참혹한 실상을

고발하는 것이 행사의 의의'라며,

 '최근 국제사회는 물론 남한에서도

북한 인권 개선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는데 비해

우리 정부만 북한 정권을 자극하지 않아야 한다'며

 소극적으로 대처한다'며 정부의 태도를 비판했다.

특히 북한이 배급제 재개, 선군강화 등

체제 강화에 나서고 세계 NGO의

 북한내 활동을 금지한 조치는

 “북한 정부 스스로

인권개선 의지가 없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전세계 절규'한나라당 김문수 의원은

여론을 통한 압박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사진으로 보는 생명의'북한인권 사진전시회는

 인간과 동포에 대한 사랑의 전시회,

 생명의 전시회'라며 “인권법보다 중요한 것은

생생한 북한의 현실” 이라고 말했다.

 김의원은 '이 사진전시회는 예술이 아니라

생명이고 죽음이며

간절한 절규”라고 강조했다.

미국 디펜스 포럼 수잔 솔티 회장은

남신우 북한자유연합 부대표가 대신 읽은 편지를 통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합군은 독일인에게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잊지 않도록 수용소를 공개했다”며

“김정일 대학살 전시회를 통해

북한의 학살현장을

바로 알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북한인권 사진 전시회는

 공개처형, 정치범 수용소 등

10개의 주제를 선정, 12월 11일까지

서울광장에서 진행된다.

정재성 기자

'북한의 현실'



▲ 영양실조의 어린아이들





▲ 두만강을 건너다 죽은 탈북자의
주검이 강물에 떠내려 가고 있다.










▲ 기아에 허덕거리고 있는 북한 아이들과 주민들




▲ 심각한 영양실조로 누워있는 북한아이들




▲ 중국 산간지역에서 움막을 짓고 숨어
살고 있는 탈북 모자




▲ 국제인권운동가들이 중국의 강제송환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 탈북어린이 장한길군이 중국 은신처에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김정일에게 쓴 편지




▲ 너무나 대조적이다

 
출처 :냉수한그릇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 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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