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목숨으로 대신하고 네 소유로 대신하리라.


“하나님이 당신의 주(主)이십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소유입니까?”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구원 받은 자와 구원 받지 못 한 자를 구분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롬14:8)” 또한 바울은 ‘믿고 세례를 받은 자는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부활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롬6장) 이것은 내가 주인으로 살았던 과거의 내가 죽고 주의 소유로 다시 났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주(主)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거듭났다고 말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스스로의 주인행세를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주(主, Lord)이신 하나님 앞에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은 엘리사입니다. 엘리사는 소 열 두 겨리로 밭을 갈 정도로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그에게 겉옷을 던져 도제(徒弟)로 부르자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따랐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즉각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주로 인정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소유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친을 장사하고 나서 주를 따르겠다거나 가족과 작별하고 나서 따르겠다거나, 재물이 아까워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지 못 함으로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려는 낙타’가 되어버린 부자청년과 대비되는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이와 대비되는 다른 한 사람은 아합 왕입니다. 그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가지고 시집와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왕비 이세벨에 쥐여서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의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나 국가는 사단의 먹잇감입니다. 아람왕 벤하닷이 군대를 몰고 와서 아합왕에게 “네가 가진 것은 너의 은금과 처들과 자녀들도 다 내것이다.” 하면서 내어놓으라고, 종이 되라고 강요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아합왕에게 보내어 아람군대를 너의 손에 붙여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지만물의 주(主)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대주재이심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아합왕이 패역하고 이세벨이 악행을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져있다 할지라도 이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소유로 삼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합의 보잘것없는 병력과 군대로 아람 대군을 쳐부수게 하십니다. 벤하닷이 이듬해 다시 대군을 몰아 쳐들어왔을 때도 다시 한 번 아람군대를 물리치게 하시고 벤하닷을 비참한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전쟁은 내게 있다 하신 말씀대로였습니다. 만유의 주(主)요 주재(主宰)라 하신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비참한 패배를 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벤하닷은 신하들과 함께 베로 허리를 동이고 아합왕에게 나아와 엎드려 항복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합왕은 주(主)이신 하나님께 여쭈어보지도 아니하고 제 맘대로 일을 처리합니다. 항복하여 목숨을 구걸하는 아람왕 벤하닷을 형제라 부르면서 극진히 예우하고 화친협약을 맺고 놓아줍니다. 멋대로 주인행세를 한 것입니다.

이 일이 있었을 때 하나님의 선지자 하나가 다른 선지자에게 자신을 치라 하고 다른 선지자는 친구를 칠 수 없다 하고... 친구를 치지 않은 그 선지자는 돌아가다가 사자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선지자는 다시 다른 선지자에게 가서 자신을 치라 하고... 그렇게 해서 그에게 얻어맞아 부상을 당한 다음 부상병을 가장하고 아합왕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저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저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멋대로 주인행세를 한 아합왕에게 내려진 무서운 심판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主)이신 것을 알지 못 하고 자신이 주인인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 많습니다.
자신이 주인이고 하나님을 자신을 도와주시는 분쯤으로 여기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주인행세를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실 말씀은 "네 목숨으로 대신하고 네 소유로 대신하리라."일 것입니다.  
내가 나도 모르게 주인행세 할까봐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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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혼자가 아니란다.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멸할 때 여호와의 선지자 100명을 굴속에 감추어두고 보호하였던 오바댜는 막상 때가 닥치자 죽음이 두려워 아합에게 엘리야가 있다고 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까지 머뭇머뭇 하려느냐?’는 질책을 들으면서도 비겁하게 말 한 마디 않고 잠잠하였습니다. 그래서 엘리야 혼자서 용감하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850명을 상대하여 놀라운 승리를 거두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엘리야가 비겁해질 차례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갈멜산 대결에서 승리하고 바알선지자들을 죽인 엘리야, 기도로 비가 내리게 하고 폭우 속에 허리를 동이고 마차를 탄 아합왕 앞에서 달렸던 그 엘리야가 이세벨의 ‘죽여 버리겠다.’는 말 한 마디에 혼비백산 목숨을 구하여 도망합니다. 그 용감하던 모습이 온데간데없습니다.

엘리야는 유다땅 남쪽 끝 브엘세바까지 도망하여 내려간 다음 거기에 사환을 남겨두고 자신은 하룻길이나 광야를 들어가 로뎀나무 아래 드러누워 ‘하나님, 차라리 저를 죽여주십시오.’ 하고 애걸합니다. 어떻게 우리의 영웅 엘리야가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특별한 인간은 없는 모양입니다. 생명의 위협 앞에서는 누구나 비겁해지는 모양입니다. 야고보서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약 5:17)’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엘리야의 연약한 모습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연약하지만, 우리도 믿음으로 순종하면 엘리야처럼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격려의 말씀일 것입니다. 그 엘리야를 천사가 어루만지며 두 번이나 떡과 물을 가져다 먹이고 기운을 차려 호렙산으로 가게 합니다.

엘리야가 호렙산에 가 그 곳 굴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영어성경(NIV)을 보니 “What are you doing here, Elijah?” ‘너 여기서 뭣 하고 있니? 엘리야야.’ 입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어떤 물으심이었을까요? 야단이나 꾸지람이었을까요? 비난이나 빈정거림이나 재촉이었을까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정한 음성의 위로였을 것입니다. 그랬길래 엘리야가 신세한탄, 넋두리를 하였지요. “그들이 우상숭배하고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열심이 특심한 저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저마저도 죽이려고 합니다. 무서워 죽겠습니다.” 그 하소연을 들으시고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여호와의 앞에 산에 섰으라.” 하시고 강한 바람, 지진, 불로 지나가십니다. 그리고 세미한 소리로 엘리야에게 임하십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능력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물으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러나 이번에도 엘리야는 똑같은 신세한탄과 넋두리입니다. “저만 홀로 남았습니다. 무서워 죽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꾸짖지 않으시고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왕이 되게 하고,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가운데 7,000인을 남기리니 다 그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7,000명이라니요! 엘리야는 홀로 남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엘리야뿐 아니라 이처럼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지키고 계셨고 또한 돕는 자들과 사역자들을 예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겁, 연약한 존재임을 이미 아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엘리야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얼마나 힘이 났을까요?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안다면, 많은 동지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결코 두려워하거나 낙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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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소리로 부르라.

     

온 세상이 하나님 없다 한다고 하나님이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온 세상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손가락질한다고 기독교가 거짓의 종교가 되는 것 아닙니다.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무너진다 해서 진리가 무너지고 사라지는 것 아닙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 이유이며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다수가 진리행세를 하고 종교들은 수(數)싸움, 세력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갈멜산에서 나뭇단 위에 송아지를 각 떠서 올려놓고 850대 1의 싸움을 벌이는 우리의 영웅 엘리야,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바알이여, 응답하소서.” 외치며 뛰노는 수백 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향한 엘리야의 조롱이 참으로 고소하고 속 후련합니다.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깐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엘리야의 조롱을 받은 바알 선지자들은 더욱 큰 소리로 바알을 부르며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들의 몸을 상케 하나 저녁 소제 드릴 시각이 되어도 바알은 응답이 없었습니다.

이제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야곱의 아들들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고, 그 돌들로 단을 쌓고, 단 둘레에 도랑을 파고, 단에다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를 각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물을 퍼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붓게 합니다. 부은 물이 단에 흘러내리고 도랑에 넘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는 어떤 인위적인 방해나 장애도 막지 못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을 핥았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보고 엎드려 ‘여호와, 그는 참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합니다.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바알의 선지자들을 모조리 잡게 하고 기손 시내로 끌어다가 죽입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기도하자 삼년동안 계속되었던 가뭄이 끝나고 억수같은 비가 쏟아져 타고 목마른 대지를 시원하게 적십니다. 정말 통쾌한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바알 선지자들과 엘리야의 역할이 어쩐지 뒤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성령에 취하여 춤을 추고, 종말이 왔다고, 주님이 곧 오신다고 아우성을 치지만 세상은 팔짱을 끼고 눈을 내리뜨고 깔보면서 “더 큰소리로 불러라, 저는 하나님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깐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조롱하고 있는 것 같아 속이 상하고 화가 나서 미치겠습니다. 우리의 통쾌한 승리는 어디로 갔습니까?    



젊은 시절 3년 동안 군대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들은 소리가 있습니다. “제군들은 돼지들이다. 돼지를 먹이는 것은 때가 되면 잡아먹고 잔치에 쓰려는 목적 때문이다. 국민과 부모님들의 세금으로 제군들은 3년 동안 먹고 입고 자면서 훈련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때가 되면 제군들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그게 하필이면 삼년동안이었군요.

엘리야의 사명은 삼년동안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엘리야를 숨기시고 까마귀를 동원하여 먹이시고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어 삼년 동안의 가뭄에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열왕기 18장에 들어가자 드디어 하나님의 출동명령이 엘리야에게 떨어집니다.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삼년의 모진 가뭄이 끝나고 단비가 내리느냐 마느냐가 엘리야의 행동에 달렸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함께 등장하는 궁내대신 오바댜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궁내대신 오바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며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 여호와의 선지자 100 명을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이며 살려내었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오바댜가 엘리야를 만나 엘리야가 오바댜에게 아합에게 전갈을 하라고 하자 나를 죽게 하려고 그러시느냐고 펄쩍 뜁니다. 정작 나서야 할 때 두려움으로 인하여 나서지 못 하는 모습입니다. 엘리야가 자신이 아합에게 보이겠다고 하나님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자 비로소 마지못해 아합에게 가서 고합니다.

아합이 엘리야에게 달려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라고 일갈하자 엘리야는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좇았다.”고 말하고 ‘바알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을 불러오라, 대결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갈멜산으로 나아오라 합니다. 백성들에게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언제까지나 머뭇머뭇하려느냐고 질책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한 마디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부답, 마지못해 수동적으로 이끌려옵니다. 인간이란 이렇게 연약하고 비겁한가 봅니다.

사실 삼년가뭄에 고통 받는 것은 악한 아합왕과 이세벨이 아닙니다. 그들은 궁중에서 잘 먹고 잘 삽니다. 정작 고통 받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삼년가뭄 징벌은 악한 아합과 이세벨에게보다 머뭇거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진 것이라 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머뭇거리며 입을 다물고 있는 궁내대신 오바댜와 비겁한 백성들 때문에 아합과 이세벨의 폭정과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진멸하는 악행이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입 다물고 머뭇머뭇하는 그들이 바로 방관자요 공범자요 폭정과 악행의 바탕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가진 채 입 다물고 머뭇거린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세상은 어두워가고 악은 횡행하며 비리와 악행이 난무하나 입을 열어 진리를 외치고 공의를 말하는 자는 적습니다. 자신의 안일을 위하여 입 다물고 죽어가는 영혼을 바라보면서도 복음의 입을 열지 않는 오바댜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말씀을 맡은 엘리야도 없고 백성도 없는 갈멜산에는 오늘도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춤을 추고 진노의 태양이 쨍쨍하고 대지를 시원하게 적실 비는 내릴 낌새조차 없습니다. 모두들 머뭇머뭇하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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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쟁이

네델란드 기업가 바스 란스돌프(Bas Lansdorp)가 2023년까지 화성에 지구인을 보내는 ‘마스 원(Mars One) 프로젝트’를 추진한답니다. 처음에 4명을 보내고 그 후 2년마다 4명씩 더 보내는 식으로 보낸답니다. 지난 4월 22일부터 화성으로 갈 희망자를 모집했는데 불과 2주일 사이에 7만 8천 명이 지원을 했답니다. 화성까지 가는데만 약 8개월이 걸리고 지구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편도우주여행인데도 말입니다. 지원한 희망자는 미국인이 1만 7천 324명, 중국인이 1만 241명, 그 다음으로 영국인이 3,581명이랍니다. 지구를 떠나고 싶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은가, 놀랍습니다.





화성까지 지구인들을 싣고 날려 보낼 우주선은 우주정거장까지 화물을 싣고 오가던 무인 우주왕복선 드래건(용)호를 개조해서 사용할 것이랍니다. 화성에서 지구로 귀환할 수 있는 기술력이 지금은 없기 때문에 화성에 가면 거기에서 살든지 죽든지 해야 한답니다.

소요경비는 약 6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데 란스돌프는 이 경비를 “마스 원 프로젝트” 전세계 TV중계권 판매로 충당할 것이라고 한답니다. 화성 우주인들이 화성으로 출발하여 도착하고 화성에 정착하여 생활하는 전 과정을 TV로 생생하게 중계한다는 것입니다.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처럼 말입니다.

마스-원 프로젝트는 올 8월 31일까지 화성 이주희망자 지원을 받고 전세계 300개 지역에서 1차로 50~100명씩 선발하고 다시 네 차례의 선발과정을 거쳐 28~40명을 선발한 다음 7년 동안 우주인 훈련을 시킬 예정이랍니다.


화성에 우주인 정착촌이 건설된 상상도를 보면 근사해 보이기도 합니다. 원추형 우주선 단독주택들이 줄을 지어 이어져 있고, 사다리인지 계단인지도 보이고, 앞에는 태양광발전설비가 펼쳐져 있고, 자동차 같은 것도 서 있고 흰 우주복을 입은 우주인들도 보입니다. (사진이 안 올라가네요)
멋있어 보입니까? 지구로부터 아득히 먼 우주공간의 별천지가 환상적으로 보입니까? 당신도 화성 우주인으로 지원해 보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화성은 태양으로부터 1.52 AU(1 AU는 지구-태양 간 거리, 1억 5천만 킬로미터), 즉 태양으로부터 약 2억 3천만 킬로미터 떨어진 타원의 궤도를 686.98일 (1.88년)에 한 바퀴씩 공전하고 있습니다. 화성은 지구보다 훨씬 작습니다. 지름이 6,794 ㎞로 지구지름의 절반이 약간 넘고, 질량은 지구의 10분의 1이 조금 넘을 뿐입니다. 화성표면의 중력은 지구의 0.38배에 불과합니다. 체중이 3분의 1 정도로 줄어드니까 헤비급 체중을 가진 사람도 화성에서는 몸이 가벼워져서 날아갈 듯 한 기분을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화성의 자전주기는 지구와 아주 비슷한 긴 24시간 37분입니다. 또 자전축의 기울기도 지구가 23.5도인데 비하여 25도로 아주 비슷하여 낮과 밤, 그리고 계절의 변화도 지구와 비슷할 것으로 생각지만 낮에는 기온이 25도 가까이 올라가고 밤에는 영하 110도까지 떨어집니다. 하늘에는 감자처럼 생긴 조그만 달이 두 개나 떠다닙니다.  

화성의 대기는 지구의 100분의 1에 불과합니다. 대기라 할 것도 없습니다. 뭐, 진공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주성분은 95% 탄산가스입니다. 오존층이 없고 자기장도 없으므로 태양광선의 자외선이 살인광선처럼 대기를 통과하고 우주로부터 방사능 입자들이 쏟아져 들어올 것입니다. 더러 먼지폭풍도 분답니다. 만일 인간이 우주복 없이 화성의 대기 속으로 나선다면 화성의 낮은 대기압이 고성능 진공소제기처럼 달려들어 호흡과 혈액의 산소와 수분을 증발시키면서 뽑아내어 인간의 몸을 순식간에 북어처럼 말려버릴 것입니다. 우주선 주거공간에 그대로 머문다 할지라도 우주방사선을 얼마나 막아낼 수 있을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화성에서는 화성의 지표면에 놓여있는 것이 다를 뿐 우주정거장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우주복을 입고 밖에 나오는 것 말고는 그저 거주 공간 안에 전자게임이나 하면서 갇혀 있는 것밖에 할 일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지구와의 무선통신이나 인터넷이 가능하긴 하겠지만 지구와 화성 사이를 전파가 오가는데 몇 십 분이나 걸리니 그것도 문제입니다.

지구로부터 가져갈 수 있는 식량이나 물이 얼마나 될지, 화성에 도달할 때까지 좁은 우주선 안에 갇혀 캄캄한 우주공간을 8개월 동안 날아가는 동안 우주인들이 정신적 고통과 우주방사선 속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무중력상태가 가져올 무기력증과 골다공증 그리고 정신적 스트레스, 인간관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화성에 도착한 다음 어떻게 식량과 물을 조달할 수 있을지, 화성의 혹독한 환경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불의의 사고는 없을지, 과연 정착이 가능할지.....

화성은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트루먼 쇼’ 같은 흥미로운 TV중계가 아니라 화성우주여행과 화성착륙의 위험한 순간들과 화성에서 우주인들이 하루하루 당하는 고통과 비극, 인간의 무모한 실험결과를 TV중계로 지켜봐야 할지, 란스돌프가 이 미래지향적이고 창의적인(?) 프로젝트를 통하여 거부와 유명인사가 될 수 있을지, 결국 악한 인간들의 호기심을 이용하여 살인쇼를 벌인 악마가 될지.......  
지구에 매장지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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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로 인하여 사르밧 과부의 통과 병에 가루와 기름이 다 하지 않는 기적이 계속되고 덕분에 극심한 삼년동안의 가뭄 속에서 과부와 그 아들은 엘리야와 함께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 때 사르밧 과부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습니까?”였습니다. “당신이 왜 내게 오셨단 말입니까? 당신이 오시지 않았다면 그저 세상풍조 가운데, 죄 가운데 섞여 맘 편하게 흘러가고 있었을 텐데 당신이 오셔서 나의 죄를 깨우쳐 나를 괴롭게 하고 그 죄로 인하여 내 아들이 죽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한 움큼의 가루와 한 방울 기름을 먹고 죽으려고 하던 삼년 전 그 때를 잊어버린 듯이 엘리야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과부에게 생각난 죄는 무슨 죄였을까요? 과부가 무슨 간음죄 같은 죄를 저질렀던 것일까요?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과부에게 생각난 죄는 하나님께 대한 죄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합과 이세벨의 폭정 하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대세에 이끌려가며 저지르는 우상숭배의 죄였을 것입니다. 목숨을 위하여 하나님을 버린 죄였을 것입니다. 과부는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와 함께 삼년동안 지내면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그 죄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노하고 계신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부에게는 삼년동안 가루가 다 하지 않고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기적만 필요하였을 뿐, 그런 문제는 엘리야의 문제이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과부가 울부짖자 엘리야가 그 죽은 아들을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에 안고 올라가 자기 침상에 눕히고 하나님께 간구하였고 아들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제야 과부는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인 줄 아노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과부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하다고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만일 삼년동안의 가뭄이 끝난 다음 아무 일 없이 엘리야가 과부의 집을 떠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 같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 목숨의 문제만 해결되면 하나님은 큰 필요 없습니다. 가루와 기름이 다 하지 않는 기적이 중요하지 죄와 영혼의 문제 따위는 별 문제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개인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적 풍조로 인하여 “너는 너, 나는 나”, 목회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거나 서로간 프라이버시에 속하는 일은 건드려지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쓰디쓴 죄와 회개의 말씀은 덮어둔 채 가루가 다 하지 않고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축복의 말씀만 달콤하게 먹이다가 떠나기도 하고 성도들은 그렇게 삼년가뭄을 잘 지내고 떠나기도 합니다. 이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들의 죄를 건드려 생각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고백이 있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루와 기름이 다 하지 않는 기적’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나를 괴롭게 하려고 내게 오셨습니까?” 엘리야의 모습과 과부의 고백을 통하여 진정한 목회자상을 생각해 봅니다. 이 어두운 시대일수록 더욱 절실히 필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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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따로 있냐?


<열왕기 16장>

지난 주 유다왕국 아비얌 이야기, 하나님께서 등불을 주시고 유다와 예루살렘을 튼튼히 하셨다는 이야기에 이어 이번 주는 다시 북이스라엘 왕조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번,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들어 죽은 슬픈 이야기 기억하시겠지요? 그 일이 있고서도, 또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의 말씀에도 아랑곳없이 여로보암은 우상숭배의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이 22년 동안 재위하고 죽은 다음 그 아들 나답이 왕이 되는데 이때부터 북이스라엘은 피비린내 나는 권력다툼, 왕위찬탈, 쿠데타와 살육의 비극이 이어집니다. '너만 왕이냐, 나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질서와 위계, 권위가 무너지는, 광야에서 고라가 모세를 대적하였던 것처럼, 좀 나간다는 자들이 너도 나도 지팡이를 들고 일어나 서로 물고 뜯는 것 같은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겨우 2년을 재위한 다음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모반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나답왕을 죽입니다.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진멸해 버립니다. 아비야가 병들었을 때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24년을 재위하고 죽고 그 아들 엘라가 왕위에 오릅니다. 그러나 엘라 역시 나답처럼 2년 만에 신하인 시므리에게 살해당합니다. 시므리 역시 바아사 집안의 모든 남자를 그 친구까지 죽여서 깡그리 씨를 말려버립니다.

그런데 그 시므리는 불과 7일 만에 끝납니다. 시므리가 모반하여 왕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은 무리가 오므리를 왕으로 삼아 디르사를 에워싸고 공격하자 시므리는 왕궁에 불을 지르고 거기에서 타죽고 맙니다. 그렇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이번에는 백성들이 반반으로 나누어져 절반은 디브니, 절반은 오므리를 옹위하고 싸움을 벌립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이긴 오므리가 대권을 잡아 12년을 군림하게 됩니다. 오므리는 그 12년 동안 사마리아를 건축하게 되고 죽으면서 아들 아합에게 왕의를 물려줍니다. 이세벨이라는 악한 왕비를 맞아들인 악한 왕 아합 말입니다.
(여로보암-나답)-(바아사-엘라)-(시므리)-(오므리-아합)....,
왕권이 죽이고 빼앗는 자들의 손에 이리저리 옮겨다닌 셈입니다.

자, 보십시오. 이 모든 비극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인간이 왕이 되고 자신이 주인이 됨으로써 죽이고 죽고 빼앗고 빼앗기는 피비린 내나는 싸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진정한 왕이 될 수 없습니다. 참 된 왕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만물과 인간은 주를 위하여 지음 받았습니다(골 1:16). 그 인간이 피조물의 위치를 벗어나 주이신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그리하여 스스로 주인 되고 임금 되려는 순간 사단 마귀의 쟁탈전은 시작되기 마련입니다.

이 세상을 보십시오. 세상은 권력의 싸움터요 나라들간의 전장(戰場)입니다. 피조물들이 서로 주인 되려고, 서로 왕권을 차지하고 재물을 가지려고 다투는 싸움터입니다. 세상은 돈과 생명을 빼앗고 빼앗기는 싸움터입니다. 진화론자들은 이를 생존경쟁이라는 말로 합리화하고 글로벌 경쟁을 정당화하는데, 그렇다면 인간이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동물이란 말입니까? 오늘날 세계 인구는 70억을 넘어 폭발하고 있고 선진국과 후진국은 부와 가난의 양극화, 나눔과 사랑의 상실 속에 바야흐로 지옥도를 펼쳐가고 있습니다.

개인도 그렇습니다. 나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다툼은 무엇 때문입니까? 나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우리 속에서 생명과 멸망의 다툼들이 일어나는 것은 내가 주님을 주로 모시지 못 하고 내가 주인이 되고자 할 때가 아니던가요? 내가, 내 마음이 주님을 떠난다면 즉시 사단마귀의 쟁탈목표가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온전히 주님을 나의 주, 나의 왕으로 모셨을 때 비로소 안연과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등불을 주시고 견고케 하신 것은

 

[왕상 15: 3-5]
3 아비얌이 그 부친의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 마음이 그 조상 다윗의 마음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나
4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저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 아들을 세워 후사가 되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셨으니
5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열왕기는 이제 북이스라엘에서 눈을 돌려 남쪽 유다왕국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솔로몬의 아들이면서 악한 친구들의 말을 듣고 독한 말로 나라가 갈라지게 한 르호보암 왕은 17년 동안 재위하였는데 예루살렘 주위에 산당과 우상을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세웠습니다. 애굽왕 시삭이 예루살렘으로 쳐 올라와 왕궁과 성전의 보물과 황금방패를 다 뺏어가는 바람에 놋방패를 만들었다는 부끄럽고 비참한 기록을 남기고 죽습니다. 그런데 열왕기는 그 못 난 르호보암의 어미가 이방 암몬사람 나아마라는 것이 두 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왕기 저자는 여자의 역할, 어머니의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르호보암이 죽자 그 아들 아비얌이 왕이 되어 3년을 치리합니다. 그리고 그 어미는 아비살롬의 딸 마아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비얌은 르호보암에 이어 불과 3년 동안 남유다왕국의 왕으로 재위합니다. 아비얌도 좋은 왕이 되지 못 하였습니다. 그는 죄를 행하였고 그 마음이 그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비얌의 그 짧은 재위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아비얌에게 등불을 주시고 그 아들을 세워 후사가 되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에는 전쟁이 있었다고만 간단히 기록되어 있지만 역대하 13장을 보면 아비얌과 여로보암 사이의 큰 전쟁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 왕 아비얌은 40만 군대를 동원하고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두 배나 되는 80만 대군을 동원하여 앞뒤로 협공을 하여 아비얌 군대를 위기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유다 군대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 군대를 패하게 하여 무려 50만의 북이스라엘 군대가 엎드러지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온전치 못 한 아비얌을 도우셨습니다. 또한 아비얌은 무려 22명의 아들을 남겼고 그 중 아사가 아비얌의 뒤를 이어 왕이 되어 41년 동안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행하며 우상을 없이 하고 나라를 든든히 세워가게 됩니다.

온전치 못 한 왕 아비얌에게 왜 하나님은 이토록 은혜를 베푸시고 많은 후손과 또 훌륭한 아들을 주셔서 예루살렘을 든든히 하셨을까요? 열왕기 저자는 다윗 때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조상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부모의 신앙이 자손에게 얼마나 큰 복이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뿐이었을까요?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것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이 온 세상 이방족속보다 나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우상숭배로 달려간 북이스라엘이나 예루살렘 성전을 가지고서도 우상숭배에 빠졌던 남왕국 유다나 다 마찬가지였고 이방족속보다 하나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다를 택하시고 그 계보로 메시아를 보내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7절을 보면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로 우상숭배를 하고 온전치 못 하였던 왕들의 이름들이 황송하고 영광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등불을 주시고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신 것은 아비얌이 비록 패역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 메시아의 계보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요 그 조상 다윗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패역하고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없는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에게 생명의 등불을 주시고 복을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무슨 공로가 있거나 세상사람들 보다 나은 점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말씀 안에, 그 계보 안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여 십자가에 우리 위해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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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아들의 이름 "아비야"


<열왕기상 14장>

오늘 말씀도 북이스라엘을 우상숭배의 나라로 이끌어간 여로보암의 집에 일어난 슬프고도 기이한 이야기입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이 들었습니다. 아비야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으며 다음 왕위를 이어받을 장래가 촉망되던 청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아들의 병으로 인하여 죽게 되자 여로보암은 아내에게 변장을 하고 실로의 선지자 아히야를 찾아가도록 시킵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는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못 합니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 하는 나무토막, 돌덩어리 우상이 도와줄 턱도 없습니다. 결국은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해주었던 그 선지자, 곧 사람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사울이 군급할 때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의 아내가 아히야를 찾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아히야에게 여로보암의 아내가 변장하고 찾아올 것을 알려주시면서 여로보암의 아내에게 아비야가 죽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여로보암의 집안 모든 남자가 거름(똥)이 말갛게 씻기는 것 같이 끊어질 것, 성에서 죽은 자는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새가 뜯어먹을 것이라는 참혹한 마지막을 예고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로보암의 집에서 오직 아비야 한 사람만이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으므로 백성들의 슬픔 속에 묘실에 장사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예언을 들은 여로보암의 아내가 디르사로 돌아가 집 문지방에 이를 때에 아이가 죽습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이 슬퍼하며 아비야를 장사하였습니다.

아비야가 하나님께 선한 뜻을 품었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왜 아비야를 데려가시고 나답 같은 패역한 아들이 여로보암을 이어 왕이 되게 하고 다시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와 패역의 길로 계속 가도록 버려두셨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열왕기의 기록 전체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곧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은, 인간이 왕이 되어 우상을 따라가는 나라든 개인이든 결국은 멸망’이라는 것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비야 같은 청년을 도우시고 세우셨다면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늦추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래 봐야 그것은 아비야 재위로 끝나고 결국 멸망이 되었을 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아비야’는 ‘여호와는 아버지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가진 아비야의 아버지는 불행히도 우상숭배의 대명사와도 같은 여로보암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비야는 아비를 잘못 만나 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 둘째 계명은 ‘우상을 만들지도 섬기지도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까지 하시며 우상을 섬기는 자의 죄를 삼, 사대까지 갚을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상숭배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전율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위해서라도 하나님을 꽉 붙잡아야 합니다. 한 편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아비야, 곧 ‘여호와는 아버지이시다’를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패역한 이스라엘로부터 일찌감치 불러내어 데려가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슬픈 일이지만 말입니다. 모든 남자들이 거름(똥)처럼 말갛게 씻겨질 것이나 오직 한 사람 아비야만이 묘실 속에 장사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아비야는 ‘여호와는 아버지시다’라는 이름을 가졌음에도 아버지 여로보암의 우상숭배로 인하여 슬픈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이게 우리 이야기 같습니다.  우리가 바로 마귀 아비에게서 난 자, 진노의 자녀, 멸망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흘리신 십자가의 보혈로 죄를 벗고 거듭 나 하나님의 자녀, "아비야"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심판과 멸망으로부터 영원한 생명과 영광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내신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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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년 후 이루어진 예언

[열왕기상 13장]

오늘 말씀은 여로보암에게 일어난 기이한 사건에 관한 기록입니다. 유대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벧엘로 가서 여로보암이 분향하는 단을 향하여 외칩니다.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아라 이름 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또 그 예조로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이 말씀을 보니까 마태복음 1장 21절에 기록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금송아지 앞 제단에서 분향하다가 그 소리를 들은 여로보암이 손을 펴 ‘저를 잡으라.’ 할 때 그 손이 말라서 거두지 못 하게 되고 단이 갈라지며 재가 쏟아집니다. 놀란 여로보암이 그 하나님의 사람에게 자기 손을 고쳐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리고 그를 붙잡고 자기 집으로 가자, 예물을 드리겠다 하나 그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다른 길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다른 길로 돌아가다가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에 속아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되고 사자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이 슬픈 선지자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게 됩니다.

분향이 무엇입니까? 분향은 하나님께서 향내를 맡으시며 받으시는 것입니다. 분향은 자신을 드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죄인과 죄인의 분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죄 때문에 향내가 아니라 악취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사장으로 하여금 죄 없는 짐승을 잡아 태워서 죄의 악취를 잠시 제거한 다음 성소에서 분향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또 이것은 죄 없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제물이 드려진 다음에야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5장은 성도의 기도가 금대접의 향으로 드려지는 광경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상은 죄든 뭐든 가리지 않고 분향을 받습니다. 우상이 악취 덩어리니 죄나 악취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우상 앞에 분향하는 것은 자신을 우상에게 드리는 행위입니다. 지금 여로보암이 하는 짓이 바로 그짓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지 300 년이 지난 다음 “단아, 단아.” 하고 외쳤던 '하나님의 사람', 그 슬픈 선지자의 예언은 성취됩니다. 유다왕국의 요시야 왕은 산당을 헐고 우상을 훼파하며 하나님의 전을 수축하고 율법책을 찾아 절기를 지키며 유다왕국이 잠시나마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는 영적대각성운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벧엘의 산당을 헐고 묘실에서 산당 제사장들의 뼈를 꺼내어 우상의 단 위에다 불사르고 산당 제사장들을 단 위에서 죽이고 그 뼈를 거기에다 불사르는 통쾌한 일을 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날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실 그 날도 이처럼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여로보암은 그 선지자의 무서운 경고를 받고도 우상숭배의 길에서 떠나지 않았을까요? 결국은 그 후손과 집안이 땅에서 끊어지는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는데 말입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권력 때문에,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제사 드리러 가면 그들의 마음이 유다왕국으로 돌아설까봐 그랬다지만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왜 여로보암을 따라 단과 벧엘에 세운 금송아지 앞에 엎드려 제사하고 분향했을까요? 참으로 이상하고도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 같으면, 우리 같으면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뭐? 금송아지에게 절하라고?" 반란을 일으켜 여로보암을 내쫓고 금송아지와 제단을 때려부수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여호와 신앙으로 돌아갔어야 할텐데 말입니다.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내심 백성들은 그게 더 좋았을 것입니다. 일년 삼차 절기 때만 되면 뜨거운 중동지방의 태양 아래 땀 흘리며 예루살렘까지 먼 길을 가지 않아도 되니 그게 좋았을 것입니다. 가까운 벧엘이나 단에 가서 제사 드리니 그게 훨씬 편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까지 가봐야 레위지파가 제사장이라고 거들먹거리며 제사 지내고 분향하는 것도 눈꼴시었는데 이젠 직접 제사 드리고 분향할 수 있으니 그것도 속시원했을 것입니다. 금송아지에게 제사하는 게 좀 께름찍해서 도저히 자기가 나서서 하지는 못 하겠지만 여로보암 왕이 앞장서서 해주니 자기책임도 아니고 마음의 부담도 한결 덜어졌을 것입니다. 벧엘과 단의 금송아지는 결국 여로보암의 권력을 위한 계략과 백성들의 편안하게 자기 마음대로 믿고 싶어하는 마음이 합치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편안한 길이 아닙니다. 신앙이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슬픈 선지자가 사자에게 죽임당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고쳐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은 싸움이라고 말씀합니다. 씨름이요, 싸움이요, 전쟁이라고 말씀합니다. 속이는 자들과 거짓선지자들과 허탄한 세상의 유혹과 때로는 강압과 위협과 위험이 끊임없이 공격해 오고 때로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끊임없이 여호와의 전에, 오늘날 우리들은 날마다 주님 앞에 나아가 그 얼굴을 뵙고 그 말씀으로 새힘을 얻고 그 능력으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여로보암이 이끄는대로 편안한 우상숭배의 길로 이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여로보암들이 편안한 신앙의 길로 이끌어갑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께름직해 하면서도 여로보암들이 만들어놓은 편안한 곳에서 자신이 좋은대로 신앙생활을 한다 합니다. 사자에게 죽임당할 줄도 모르는지 하나님의 말씀도 고쳐서 행한다 합니다.  
"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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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읽은 세계명작문고 “솔로몬의 동굴”이 생각납니다. 탐험가 세 사람이 맹수와 토인들의 땅 아프리카에서 보화가 가득한 솔로몬의 동굴을 찾아내는 모험 이야기인데 얼마나 재미나게 읽었던지요. 아프리카 밀림과 무서운 동물들, 토인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모험 끝에 휘황찬란한 보물들이 숨겨져 있는 동굴을 찾아내기는 하였는데 그들을 덮치는 위험들, 그 동굴 속에 그 세 사람을 가두려고 음모를 꾸민 주술사 마술할멈이 거꾸로 자기 꾀에 빠져 큰 바위 문 밑에 깔려 죽는 장면, 세 사람이 횃불을 들고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따라가서 마침내 출구를 찾아내는 장면, 부족들간의 전쟁에 그들도 끼어들어 전투를 하는 장면들이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열왕기 10절 말씀을 보니 스바 여왕이 나오고 수많은 금은과 재물이 오고 천하가 솔로몬의 지혜와 부를 동경하고 사모하며 모여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0장 14절을 보니까 솔로몬의 세입금의 중수가 금 666 달란트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1년간 세입금이겠지요. 그런데 하필이면 왜 ‘666’일까요?

금 666달란트가 오늘날 화폐기준으로 얼마나 될까 계산해 보았습니다. 1 달란트는 약 30 킬로그램입니다. 요즈음 금값이 1온스 (약 30 그램)에 1,600 달러 가량 된다니까 금 1달란트 30 킬로그램이면 그 값이 160만 달러 정도 되겠군요. 그런데 666달란트니까 666 곱하기 160만 달러 하면 약 10억 달러, 한국 돈으로는 1조 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세입금이로군요. 1년에 1조원의 황금이 굴러다니던 당시의 예루살렘.... 생각만 해도 어마어마하군요.

솔로몬왕은 그걸로 상아와 금으로 된 보좌를 만들었습니다. 눈부신 황금보좌였을 것입니다. 또 금으로 방패를 만들었습니다. 금 600세겔로 만든 큰 방패 200개를 만들었는데 금 600세겔이면 6.8 킬로그램, 방패 한 개가 36만 달러짜리나 되는군요. 작은 방패는 금 3 마네로 만들었는데, 그러면 금 1.7 킬로그램이 사용된 9만 달러짜리 방패네요. 적군이 보기만 해도 질리고 기가 죽을 휘황찬란한 황금방패들인 셈입니다. 솔로몬의 하는 일들이 황금과 돈이 넘쳐나 어디에 써야 할지 주체를 못 하는 로또에 당첨된 졸부의 모양새입니다. 병거 1,200, 마병 12,000에다, 은이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고 백향목이 뽕나무 같이 많은 예루살렘, 과연 스바 여왕이 보고 정신이 현황(아찔)할 수밖에 없었겠다 싶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라가 솔로몬이 죽자 남북으로 찢어졌고 황금방패는 애굽에 빼앗기고 나라는 분열된 채 결국은 멸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고 파괴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고 말았는가?” 열왕기 저자는 애통으로 가슴을 치고 비탄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이것을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솔로몬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라고.

열왕기상 11장에서 열왕기 저자는 솔로몬의 타락을 소상하게 적고 있습니다. “바로의 딸 외에도 많은 이방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왕의 후비가 700인 빈장이 300인이요.......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암몬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고,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산에 산당을 짓고, 암몬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고, 이족 후비들을 위하여......” 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두 번이나 저에게 나타나 경고하셨는데도 솔로몬은 우상숭배에서 돌이키지 못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그토록 지혜로운 솔로몬, 그토록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솔로몬, 잠언 3천을 말하고 전도서 아가서를 남긴 솔로몬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단 말입니까? 열왕기를 읽는 우리는 절대로 안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도 마찬가지라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애 1:12)라고.

솔로몬은 오직 하나님만을 붙잡았던 다윗 같지 않았습니다. 마치 아버지에게는 관심이 없고 아버지가 주시는 선물에만 관심이 있는 아이 같이 솔로몬은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만족하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떠한 부귀영화, 지혜, 명예로도 채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 밑 빠진 독과 같고 바닥이 없는 무저갱 같은 인간의 욕망입니다. 부귀영화는 인간의 욕망을 채울 수 없는 허망한 거품 같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듯 하지만 오히려 인간의 주인이 되어 인간을 노예로 삼고 결국은 멸망으로 끌고 가고 맙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으로 만족을 얻으려는 자의 끝은 멸망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자가 복 된 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 솔로몬을 부러워할 것 없습니다. 천하의 명성과 부귀영화와 지혜를 가졌던, 수많은 처첩들과 울긋불긋 우상들의 전들을 가졌던 솔로몬이 복 된 자가 아니라, 가진 것 없어도 오직 주님을 마음속에 모신, 가난한 심령에 천국을 소유한 저와 여러분이 진정 부요한 자들이요 복 된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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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8장 시작부분을 보면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완성하고 언약궤를 모셔올 때 여호와 앞에 소와 양으로 드린 제사가 너무 많아 헤아릴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었다고 되어 있는데, 8장 끝부분을 보면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릴 때는 소가 이만 이천이요 양이 십이 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두 차례의 제사에 드려진 소와 양의 수가 모두 얼마나 되는지 짐작조차 어렵습니다.  

번제는 전부를 태워드리지만 화목제는 기름을 태우고 나머지는 드린 자와 제사장이 함께 나누어먹습니다. 칠일, 칠일, 모두 십사일 동안 절기로 지켰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전낙성식을 하고 십사일 동안 실로 어마어마한 수의 짐승이 제사로 드려지고 이스라엘 백성 전부가 화목제물을 나누어 먹으며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한 것입니다. 대한민국 서울에서 올림픽을 하던 1988년에 故정주영씨가 북한에 끌고 들어간 소가 1,001 마리라고 하는데, 백성들이 드린 이만 이천 마리의 소와 십이만 마리의 양을 오늘날 식량부족으로 허덕이는 북한사람들이 본다면 아마 눈이 뒤집혀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9장에 들어가면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 나타나셨던 것처럼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걸으며=walk) 내가 네게 명한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나라가 영원하고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을 지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내 앞에서 행하며”의 원래 뜻이 “내 앞에서 걸으며”라는 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말 성경은 ‘행위(doing)’나 ‘걷는 것(walking)'을 모두 “행(行)”으로 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선한 행위를 요구하신다고 오해하기 쉬운데 그게 아닙니다. 창세기 17장 1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에서도 ‘행’은 doing(행함)이 아니라 walking(걸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힘 드는 노동과 수고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걷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솔로몬에게 “만일 노와 네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고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숭배하면 끊어버릴 것이요, 이 전이라도 던져버릴 것이라.”고 엄히 경계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솔로몬과 그 후대는 ‘하나님 앞에서 걷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떠나 옆길로 빠져 행하였고 우상을 섬겼고 하나님을 불순종하여 그 노를 격발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나라는 쪼개어지고 결국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화려하게 건축하고 법궤를 모셔 들인다고 다 끝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하나님 앞에서 걷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우상을 섬기며 악을 행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악행을 하면서 성전에 와서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에 속지 말라.”고 절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벗어나 옆길로 빠지고 어둠 속을 걸으며 더럽고 악한 일을 행하고 우상을 좇다가 여호와의 전에 와서 뻔뻔스럽게 제사를 드린다면, 더러운 헌금을 드리며 이걸 받으시라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조폭두목, 우상두목으로 만드는 것이고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제사를 받으실 리 없고 그러한 성전에 계실 리 없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성전을 허물고 예루살렘을 폐허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한 번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다 끝나는 게 아닐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만을 섬기며 주님의 계명을 사랑하며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빛 가운데 걸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 때의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 다른 것을 섬기며 악한 행실로 산다면 주님은 슬퍼하며 우리를 떠나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7절은 우리 몸이 성전인 것과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만일 우리가 거룩하게 살지 못 하고 성전을 더럽히면 멸하실 것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 부름 받은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항상 빛 가운데로, 하나님 앞에서 걸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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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8장>

드디어 솔로몬의 성전이 완공되고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려져 성전에 모셔 들여집니다. 이스라엘 장로들과 모든 지파의 두목, 곧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족장들이 모이고 제사장들이 궤를 멥니다. 그야말로 온 나라의 경사요 축제입니다. 얼마나 많은 양과 소로 제사를 드렸던지 그 수가 많아 기록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왕기 저자는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지성소로 메어 들였고, 그 처소의 그룹들이 날개를 펴서 그 궤와 채를 덮었는데 채가 길어서 내전 앞 성소에서는 보였다고 되어 있으며, 제사장들이 두 돌판이 들어 있는 궤를 모셔 들이고 나올 때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여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섬기지 못 하였으며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신비하신 임재의 역사가 나타나고 넘쳐났던 것 같습니다.

이 때 솔로몬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격과 환희가 어떠하였을까요?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 회중을 향하여 축복하고 경과보고를 한 다음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솔로몬의 한 말과 그의 기도가 오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심과 존귀하심, 그 언약의 이루심을 선포하고 간구하는 그의 기도는 오늘날 성경을 읽는 우리의 가슴을 울리도록 장엄하고도 간곡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 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리이까.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이름을 두신 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 범죄한 자가 기도를 하거나, 백성이 범죄함으로 기근이 들어 기도할 때나, 온역이나 질병, 적국의 침략으로 환난당할 때나, 이방인이 기도를 하거나, 전쟁을 할 때나, 범죄함으로 적국에 잡혀가서 기도할 때에나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성전을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하면 하늘에서 들으시고 구원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일을 당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의 성전을 향하여 두 손을 들고 기도하면 들어주실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어떻게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성전 때문이지요.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이렇게 아뢰고 구할 수 있는 것은, 성전을 지었기 때문이요 그 성전 안으로 하나님의 궤를 모셔 들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열왕기의 이 대목을 읽으며 하나님을 가까이에 모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며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성전에 모셔 함께 거한다는 것은 얼마나 굉장한 일이며, 얼마나 큰 힘이며, 권세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 오랜 세월을 두고 염원하며 성전을 짓고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 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격은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요? 그러나 슬프게도 그 감격은 오래 가지 못 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졌고 백성들은 성전을 돌아보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을 진노케 하고 나라가 갈라지고 결국은 멸망을 당하고 성전이 파괴되는 비극의 역사를 당하게 됩니다.

그것은 돌과 나무로 지은 성전은 영원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몸이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주를 믿는 우리의 마음이 영원한 성전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처럼 굉장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고 힘들여 짓지 않아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믿는 믿음으로 건축하는 성전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처럼 두 손을 들고 성전을 향하여 간구하지 않고 언제나 내 속에 계신 주님께 두 손을 모으고 구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주님과 은밀하게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언제나 예배드릴 수 있고 손을 내밀고 구하는 것, 필요한 것을 달라고 말씀드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솔로몬 성전 보다 더욱 귀한 성전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인지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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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성전을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거의 20만 명이나 되는 인원이 7년 반 동안 건축한 솔로몬 성전은 그 크기가 길이 60 규빗, 너비가 20 규빗, 높이가 30 규빗입니다. 1 규빗이 45 센티미터니까 대충 생각해보면 길쭉하면서 높이가 높은 아담한 4~5층짜리 빌딩 사이즈입니다. 그리고 그 입구에 폭 20 규빗, 길이 10 규빗 되는 높다란 낭실(현관)이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두는 너비, 길이, 높이가 각각 20 규빗 되는 정육면체 모양의 내소가 있습니다. 성전 안에 또 성전이 들어있는 모양새입니다. 그리고 내소 안에는 높이 10 규빗 되는 크기(사람 키의 3배 가까운)의 커다란 그룹천사 둘이 지킵니다. 온갖 장식들과 값비싼 백향목과 전나무의 목재와 빛나는 황금으로 싸여 있습니다. 내소 안이 마치 보물창고와 같이 화려하고 온갖 보화들로 가득한 셈입니다.

솔로몬은 놋 세공의 뛰어난 장인인 히람을 두로에서 초빙하여 성전의 온갖 기물을 만들게 합니다. 야긴과 보아스로 알려진 두 기둥은 높이 18규빗(8미터가 약간 넘음)에다가 다시 그 위에 얹은 5규빗 높이의 머리 부분을 더하면 그 높이는 모두 10미터가 넘고, 기둥의 굵기는 성인 서너 사람이 둘러서야 할 정도로 거대한 놋 기둥입니다.
물을 담는 바다는 직경이 4.5 미터나 되는 엄청나게 거대한 솥 모양으로 그 두께는 사람의 손 넓이나 되고 그 아래에는 열두 마리의 소가 둘러서서 받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 바다에는 물을 440 톤이나 담을 수 있습니다.
그 앞에는 다시 사람 키만큼이나 되는 높이의 바퀴 달린 받침대 10개를 만들고 880리터가 담기는 물두멍을 열 개를 만듭니다.

이 모든 것이 놋입니다. 사용된 놋이 얼마나 많았던지 놋의 중량을 측량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업이 발달된 오늘날도 놋(청동:구리+주석, 황동:구리+아연)이 비싼데 당시 놋으로 이 엄청난 기구를 다 만들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몇 년 전 솔로몬 당시의 놋 제련소터가 발견되었다지요.

하나님은 왜 이토록 엄청난 황금과 놋, 온갖 귀한 것으로 아름다운 성전을 짓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먼저 존귀하고 엄위하신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준비하여 주님을 맞이하며 주님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요?

둘째, 하나님의 전은 하늘보좌, 하늘나라의 아름다움을 조금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가게 될 하늘나라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집은 솔로몬성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고 굉장한 곳입니다. 다윗은 악인의 장막에서의 천 날 보다 하나님의 전 문지기로의 하루가 더욱 낫다고 하였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성전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 보다 하나님의 성전이 된 우리의 마음과 몸이 아름다운 것을 더욱 원하십니다.
우리는 마음과 몸을 아름다운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은 우리 몸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루아침에 요란하게 깨어지고 다듬어지는 것이 아니라 7년 동안 돌 다듬는 소리, 철연장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듯이 평생을 두고 은밀하고 조용하게 맞추어져가는 성전입니다.
인간들이 만든 백향목과 황금과 놋으로 된 온갖 장식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로 아름답게 이루어져가는 성전입니다.

넷째,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아름다움과 부요함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와 교회를 아름답게 세우기를 원하시며 이를 위하여 히람을 보내셨던 것 같이 돕는 자를 보내시고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성령으로 깨우치고 인도하시며, 인내와 온유, 사랑으로 열매 맺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대하며 힘쓰십시오. 당신을 성전 삼으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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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 저자는 솔로몬의 일천번제, 지혜로운 재판 이야기에 이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솔로몬 왕에게 얼마나 복을 주셨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수가 해변 모래같이 늘어나고 평화와 번영, 부요와 강성의 꿈이 펼쳐집니다. 모든 주변의 나라들이 솔로몬의 지혜와 힘 앞에 엎드리고 부족함이 없는 풍성함을 누립니다. 두로왕 히람과 같은 돕는 자들이 나타나서 부왕 다윗의 필생의 꿈이었던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역사가 시작됩니다.

솔로몬 왕은 나무 베는 벌목공 3만을 동원합니다. 운반인부 7만 명과 돌 캐는 채석인부 8만이 동원됩니다. 감독하는 관리가 3천300입니다. 도합 18만이 넘는 인원이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대공사에 동원됩니다. 그리고 7년 6개월에 걸친 대역사 끝에 화려한 솔로몬의 성전이 완공됩니다. 하나님의 전은 돌로 건축된 다음 백향목과 잣나무 재목으로 입혀지고 황금으로 화려하게 입혀지고 장식됩니다. 그야말로 꿈같이 아름답고 멋진 여호와의 성전이 완성됩니다.

그런데 이어서 솔로몬이 자신의 궁전을 건축하였다는 이야기가 기록됩니다. 열왕기 저자는 아무 비평 없이 건축기간과 건축규모를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열왕기 저자의 의도를 헤아려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솔로몬의 궁전 건축은 우선 건축기간이 13년으로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소요된 기간의 거의 두 배에 달합니다. 궁전의 높이는 하나님의 성전과 똑 같은데 넓이는 4 배가 넘습니다. 거기다 성전보다 좀 더 큰 규모의 낭실과 전을 3 개를 더 건축합니다. 결국 왕궁의 건축규모가 하나님의 전 건축규모의 일곱 배가 넘습니다. 그런데 그 건축의 수준이 여호와의 전과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면서 솔로몬이 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왕궁을 아울러 짓는 것을 누가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도가 지나쳤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 보다 훨씬 큰, 일곱 배나 더 큰 화려한 궁전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앞에 하나님의 전이 오히려 초라해지지 않았겠습니까? 열왕기 저자는 이 사실을 수치(數値)로 나타냄으로써 여기에 또 하나의 이스라엘 역사의 비극의 씨앗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전은 돌과 백향목과 전나무로 건축되고 온갖 기명과 기구, 천사들의 모양과 종려와 꽃 등, 장식들이 황금으로 덮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아름답게 건축하고 황금과 온갖 보석으로 꾸미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보물이나 황금 같은 그런 것들을 좋아하셔서일까요? 하나님이 그런 것들이 필요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네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하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나라의 모형입니다. 영원한 하늘아버지 하나님의 집의 모형입니다. 나의 가장 귀한 보물을 그곳에 두고 하나님의 전을 아름답고 귀하게 치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주님을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이요, 이 세상 떠날 때 내가 마음을 둔 곳, 하늘나라 아버지의 집으로 가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황금으로 치장하고 온갖 귀한 보석으로 꾸미도록 하신 것은 영원을 향한 사모의 마음, 소망의 마음을 이렇게 가지도록 하려 하신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자신의 왕궁을 더 크고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하나님의 전과 같은 화려한 왕궁, 하나님의 전 보다 일곱 배나 더 큰 어마어마한 왕궁, 장가 든 바로의 딸을 위하여 아름답게 꾸민 왕궁......, 과연 솔로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였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잘못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보다 자신을 더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집 보다 자기 집을 더 크게 짓고, 하늘나라 보다 자신을 더 위하여 보물을 쌓아두고 이 땅에 미련을 두는 잘못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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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그렇게나 은혜를 베푸셨는지요?  (0) 2013.01.30

열왕기상 3:16-28)


오늘 성경말씀은 너무나도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인데 이걸로 횡설수설 좀 해볼까 합니다. ‘일천번제’ 바로 다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솔로몬의 지혜가 솔로몬이 원래 가졌던 지혜가 아니라 일천번제를 드린 다음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였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열왕기 저자의 의도일 것입니다.

창기 두 여자가 한 집에서 각각 아들을 낳았는데 한 여자가 잠자다가 자기 아들을 깔아서 죽이고 다른 여자의 아들과 바꿔치기 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다투다가 솔로몬 왕 앞에 나와 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으로 다스려지는 이스라엘에서 창기라면 가장 비천한 죄인의 신분인데 감히(?) 왕 앞에 나와 재판을 받습니다. 우리도 신분의 고하나 귀천과 관계없이 이와 같이 누구든지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요즘 세상 같으면 DNA검사로 간단히 판별할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게 있었을 리 만무하지요. 그런데 우리 잘 아는 바와 같이 솔로몬은 칼을 가져오게 한 다음 아기를 둘로 갈라서 두 여자에게 나누어주라는 판결로 진짜 어머니를 알아내는 재판을 합니다. 그리고 이 지혜로운 판결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솔로몬에게 있는 하나님의 지혜에 두려워 떨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다음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는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그리고 그가 누린 막강한 권세와 평화와 부귀영화가 부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솔로몬의 재판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메시지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1. 솔로몬을 통하여 전지하신 심판의 하나님을 보여 주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끔찍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주가 되려면 전지(全知)하셔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넓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다 아시고 판단하시지 못 한다면 하나님은 심판주가 될 수 없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악(惡)이 지배하고 악행(evil doing)과 범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매우 유용한 도구와 무기가 될 것입니다. 착한 자는 당하기만 할 것이고 나쁘고 교활하고 못 된 자들은 항상 빼앗아서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억울한 일은 보상받지 못 하고 악한 자들은 처벌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사야서 40장 27절은 말씀합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하나님이 너의 사정을 모르시고 너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 하실 거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명철은 한이 없으시다.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신다.”

2. 심판은 칼로 나누어 하는 것이다.
솔로몬 왕은 칼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심판은 칼로 하는 것입니다. 칼로 쪼개고 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합니다(히 4:12). 주님의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옵니다(계1:16).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 그 터럭의 3분의 1은 성 안에서 불태우고 3분의 1은 성 밖에서 칼로 치고, 3분의 1은 공중에 뿌려 흩어라, 내가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마지막 날에는 악인과 선인이 나누어질 것입니다. 좌편과 우편으로 나뉘어질 것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와 그렇지 못 한 자들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은 피할 자가 없습니다.
 
3.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지혜와 다르다.
솔로몬이 칼로 아기를 나누라고 명령하였을 때 주변의 신하들이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였을까요? 혹시 왕이 미쳤다고,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요?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이 세상의 지혜로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우고 어린아이들에게는 열려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4. 사랑이 이긴다.
솔로몬의 재판에서 아기의 진짜 어머니는 사랑으로 이겼습니다(승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이깁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믿음, 소망, 사랑, 세 가지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 말씀합니다. 주님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 없는 자는 이기지 못 할 것이며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 할 것입니다.

5. 참된 사랑을 보여줍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자신의 좋아하는 감정과 착각합니다. 좋아해서 만나고 결혼했다가 싫어지면 갈라서고 병이 들거나 화상이라도 입어 모습이 달라지면 떠나갑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신의 필요에 따라 상대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자기를 위한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를 위한 사랑, 상대중심의 사랑입니다.
진짜 어머니인 여자는 칼로 아기를 쪼개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닌 여자에게는 자기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아기가 살든지 죽든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진짜 어머니의 사랑은 아기를 향한 사랑이었고, 거짓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 아니 이기심이었던 것입니다.

6. 하나님의 사랑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하여 인간을 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또 말씀하기를 우리는 사나 죽으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우리 인간을 지으셨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중심이거나 이기심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을 위한 사랑, 하나님 중심의 사랑이었다면 인간이 범죄하여 죄인이 되고 진노의 자녀가 된 순간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에게서 돌아섰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대로 죄인들을 싹 쓸어버리고 다시 지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이 된 인간을 포기하거나 내버리지 못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긍휼로 불타는 듯 하였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사랑입니다.

7. 진퇴양난, 절체절명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구원의 방법
자, 오늘 말씀은 솔로몬왕이 칼로 아기를 자르라 하였지만, 좀 바꾸어서 그 창기 두 여자가 아들을 놓고 양쪽에서 잡아당기기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서로가 죽어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진짜 어머니는 압니다. 자기가 아들을 놓아버린다면 저 무지한 여자가 오늘밤에 그 아들을 깔아뭉개서 죽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어도 뺏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 여자는 아기가 찢어져도 안 놓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손을 놓는다면 아들은 저 여자에게 깔려죽을 것이고, 안 놓는다면 이 자리에서 찢겨서 죽을 것입니다. 아들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이라면 이 경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아들은 죽는 수밖에 아무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을 절망이라고 합니다.
우리 죄인들이 그랬습니다. 사단의 손아귀, 사망의 권세에 붙잡혀 끄집어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그 죽음의 자리에, 십자가에 대신 내어주셨습니다.
십자가, 그것은 솔로몬의 칼 보다도 더욱 기이한, 천사도 경악한 기이한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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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철든 다음에야 알았네
    - 대장쟁이 이응한 그게 언제였던가, 무덤가 할미꽃 핀 뒷동산에 올라 끝없이 파란 하늘 솜털같은 구름이 흘러가다가 사라지고 사라지는 걸 넋놓고 바라보며 산너머 저 멀리를 꿈꾸던 그 때가.
    그러나 하늘엔 그 포근하고 아늑한 솜털구름만 피는 게 아니라 공포의 먹구름과 고통의 칼바람도 몰아친다는 걸, 저 인생의 산너머엔 아름다운 꿈이 흐르는 낙원이 아니라 황야와 광야야 거친 바다와 때론 나락같은 벼랑도 있다는 것을
    아, 나는 철이 들어서야 알았지. 그리고 그 분의 손을 잡지 아니하면 단 한 발짝도 뗄 수 없다는 것도 철이 들어서야 알았지. 그제야 알았지... 얼마나 먼 길을 상처투성이로 헤맨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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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와 역대기는 유대인들의 바벨론포로생활이 끝날 무렵에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열왕기 끝에는 포로로 잡혀가 37년 동안 옥에 갇혀있던 여호야긴 왕이 풀려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고, 역대기 끝에는 바사왕 고레스가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허락하는 장면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열왕기를 기록하던 저자(들)의 심정이 어떠하였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종살이생활로부터 건져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고 솔로몬에 이르러 찬란한 번성과 부귀영화를 허락하시기까지 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패역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였다는 뼈아픈 역사 속에 교차하는 온갖 후회와 감회가 열왕기와 역대기를 기록하던 그들의 가슴 속에 가득하였을 것입니다.

열왕기 저자는 3장 1절부터 솔로몬이 저지른 불순종과 패역의 출발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이 애굽왕 바로의 딸을 데려와 아내로 삼은 것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왕이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왕이지만 이스라엘에 수많은 이방여인들과 우상들을 도입한 장본인입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지혜와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우상숭배로 이스라엘을 타락케 하고 남북왕조로 갈라지게 만든 단초를 제공한 왕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읽어보면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솔로몬의 이방여인과의 혼인이 이스라엘의 패망의 원인이었다 하여 이방여인 아내와 자식들까지 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솔로몬의 손에 나라가 든든하게 서게 하시고 산당에서 드린 삼천번제를 받으시고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솔로몬이 왕으로서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고 재판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자 그 기도를 기뻐하시고 지혜 뿐 아니라 부귀영화까지 더 하여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도 세상 사람들은 인류역사상 솔로몬보다 더 지혜로운 왕, 솔로몬보다 더 부귀영화를 누린 왕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열왕기 3장을 보면 솔로몬이 삼천번제를 드린 때는 솔로몬이 벌써 바로의 딸을 데리고 온 다음입니다. 벌써 싹수가 노랗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에다 그 엄청난 부귀영화까지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이방여인과 우상을 끌어들여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의 길로 이끌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렇게 하셨을까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이미 다 보시고 다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바로의 딸을 아내로 데려온 솔로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부귀영화까지 더 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잘 다스리고 재판할 수 있도록 지혜를 구한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다고 부귀영화까지 주셨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그런 솔로몬에게 그렇게나 은혜를 베푸신 것일까요?

1.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완전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부족하고 불순종하여도 복을 주시고 영광을 허락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완전하신 그 분의 위치에서 우리를 대하셨다면, 우리에게 완벽을 요구하셨다면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을 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도 마치 불완전하신 것처럼 눈높이를 낮추고 내려오셔서 우리를 대하십니다. 부족한 우리의 잘못 된 삶, 잘못된 기도를 탓하지 않으시고 들어주시며 함께 하시며 동행해 주십니다. 이것이 임마누엘 하나님입니다.

2. 그러므로 기도는 완전한 자만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타락의 원흉이 될 것을 아시고도 기도를 들어주셨다면 우리도 실수하고 넘어지고 잘못 구할지라도 하나님은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낮은 자, 천한 자, 심지어 자신을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 박을 자들까지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시고 위하여 피 흘리시며 기도하셨습니다.

3. 하나님은 후회가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찬란한 부귀영화를 허락하신 것이 실수였을까요? 솔로몬이 그렇게 될 줄 모르시고 부어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시며 후회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멸망의 길을 갔다 할지라도 솔로몬에게 베푸신 은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베푸신 사랑이었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그 섭리와 구원계획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4. 무엇보다도 그것은 솔로몬을 통하여 보여주신 하늘나라의 예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부어주신 것은 그 날이 오면 우리에게 허락하실 천국,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우리에게 씌워질 면류관,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예표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보다 더욱 큰 영광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천국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우리가 완전하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우리는 부족하지만 주님의 공로로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을 통하여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망쳐먹은 솔로몬을 너무 욕하지 마세요. 그게 바로 천국에서의 우리 모습 아닐까요?
자격도 공로도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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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晩秋)
                             이응환
 
산자락을 태우던 단풍이 꺼지고
갈색 이파리들이 타다만 재처럼
패잔병처럼 나뒹군다

이렇게 떠나야 하는가고
늙어버린 억새들이 흰머리를 흔들며 수군댄다

우리 청춘 간밤에 어디로 가버렸냐고
페이브먼트 위에 나뒹구는 이파리들
궁시렁거린다

가을이 황금색?
아니다, 똥색, 똥색이란다
가로수에 매달린 이파리들이
날 보고 까르르 웃는다
지나온 길바닥에 내 청춘이 떨어졌단다
주워가란다, 놀린다

무심한 흰 구름은 저 혼자 달아나고
코스모스는 하늘을 향해 가녀린 손을 내젓는다

어디로 가는 거냐고
다들 떠나느라고 분주하다
눈 내리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도 못 하면서

그대여,
찬 서리 내리고 두려운 어두움이 깔릴지라도
그대는 슬퍼하지 말지니 방황하지 말고 오라,
내가 두 팔 벌리고 기다리고 있나니
...
갈 곳이 있다는 것,
날 기다리는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것,
이보다 더 축복 있으리요 


별똥별의 "가을노래" 패러디임 


 
별빛 세레나데(피아노)

 
It's Suppertime


<삼하 24장>

다윗이 행한 인구조사가 왜 하나님 앞에 그토록 큰 범죄였을까요? 왕이 국가의 인구를 조사하는 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입니까? 우리는 다윗왕의 인구조사가 왜 하나님의 그토록 큰 진노를 부른 범죄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곧 하나님의 소유 된 나라, 신정국가(神政國家)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유라는 말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이 주인이시며 참 되신 왕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소유 된 나라의 힘은 사람의 많음이나 군대의 강함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나라의 힘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 있습니다. 나라의 힘이 순종의 크고 적음에 달려 있습니다. 순종하면 강하고 불순종하면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사사기의 기드온 300용사의 이야기에서부터, 또한 수많은 성경의 이야기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인구조사를 통하여 자신이 실질적인 왕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인구조사가 왜 하나님께 범죄가 됩니까? 자기가 셈할 수 있는 돈은 자기 돈입니다. 남의 돈을 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겠다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라 자기소유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대적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 하고 자신이 직접 챙기고 다스리겠다는 교만이며 불순종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순종으로 막강하던 하나님의 나라는 급전직하(急轉直下), 불손종의 약한 나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 범죄는 또한 선악과사건과 닮아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과도 닮아 있습니다. 스스로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주인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약삭빠른 요압은 그것이 하나님 앞에 무서운 범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번 뒤집어진 다윗의 눈은 되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요압은 할 수 없이 아홉 달 20일이 걸려 이스라엘 전역을 돌아다니며 인구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다윗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용사 80만, 유다장정 50만, 무려 130만을 헤아리는 대군을 보유한 나라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렇게 강성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제야 다윗은 자신의 범죄를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약하고 위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좀 강해졌을 때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 자신의 힘에 의지하려고 합니다.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합니다. 얼마나 간사하고 악한 것이 인간의 심사인지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치시려고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조사를 하도록 감동을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으로만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셔서 치시려고 다윗으로 하여금 범죄 하도록 만드셨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해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되어진 사건을 살펴볼 때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게 된 동기가 교만이었고 하나님을 떠나 자신을 세우려는 욕심에 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윗 왕, 모두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다윗에게 진노하신 이유는 바로 힘들고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찾다가 형통하고 나아졌을 때는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서며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고 교만해지는 이스라엘 백성과 다윗의 죄악 된 마음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견자 갓을 통하여 다윗에게 셋 중 하나의 벌을 택하도록 하십니다. 첫째 7년 기근, 둘째 다윗이 석 달 동안 대적에게 쫓김, 셋째 삼일동안 온역. 이 세 가지 중 어느것을 택할 것인가? 다윗은 세 번째를 선택합니다. 그 자신이 화를 당하지 않고 백성들이 화를 당하는 쪽을 선택한 얍삽한 짓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손"이라..... 그렇군요. 하나님의 손 안에, 하나님의 소유로, 죽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 손에 죽겠다....., 진작 그럴 것이지요. 다윗이 뒤늦게이지만 하나님의 손 안에 잡혀 있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간곡히 권면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6:1) 그렇습니다, 설혹 죽이신다 하여도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만이 우리의 복입니다.  

.....
.....
사족....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의 성도수를 셈하고
솔로몬에게 넘겨주려는 다윗 같은 목사님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허물고 있습니다.
기근과 쫓김과 온역이 그 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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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18:31)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압살롬을 피하여 다윗 왕과 그 신하들은 황급히 도망하였고 슬픔과 두려움과 고통 속에 기진맥진 하였습니다. 만일 쉴 틈을 주지 않고 그 뒤를 추격하자는 아히도벨의 계략대로 되었다면 다윗은 압살롬의 손에 거의 틀림없이 잡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셨습니다. 압살롬이 후새의 거짓계략을 택한 것입니다. 후새는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을 통하여, 그리고 사독과 아비아달은 요나단(동명이인)과 아히마아스를 보내어 다윗에게 빨리 피하라고 기별을 합니다. 다윗에게로 가던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압살롬측에 발각되어 바후림의 어떤 사람 집에 들어가 우물 속에 숨었을 때 그 집 여인이 우물을 덮고 그 위에 곡식을 널어 두 사람이 들키지 않게 합니다. 그리하여 다윗 왕에게 후새의 전갈이 전달되고 다윗왕 일행은 급히 요단강을 건너 도망합니다. 그야말로 아슬아슬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숨 막히는 상황이 계속됩니다. 그리고 다윗일행이 마하나임에 도착하였을 때 거기에서는 암몬족속 사람들이 먹을 것을 풍성하게 가지고 와서 다윗과 그 일행으로 하여금 기운을 차리게 해 줍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다윗을 위기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기력을 회복하고 전열을 정비한 다윗과 백성들은 뒤쫓아 온 압살롬 군대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을 보호하기 위하여 다윗을 성에 머물게 하고 군사들을 인솔하여 전장으로 나갑니다. 그런데 다윗이 출전하는 그들에게 부탁합니다. “나를 위하여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아니, 지금 다윗이 압살롬 생각할 때입니까? 쥐가 고양이 생각하는 꼴입니다. 전쟁에 나가는 부하들과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를 하든지 격려를 해 주어야 할 텐데 다윗은 오히려 왕권을 찬탈하고 자신을 죽이려는 반역자요 원수가 된 아들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접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에브라임 수풀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다윗 군대는 압살롬 군대를 패배시킵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도망하다가 그의 자랑인 긴 머리가 걸리는 바람에 대롱대롱 상수리나무에 매달리고 맙니다. 요압의 부하는 다윗의 부탁대로 압살롬을 죽이지 않고 요압에게 가서 보고합니다. 그런데 요압은 작은 창 세 개를 들고 가서 나무에 매달린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고 그 부하들은 에워싸고 압살롬을 쳐 죽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압살롬의 시체를 구덩이에 던지고 그 위에 큰 돌무더기를 쌓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 왕은 대성통곡을 합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승전을 한 다윗의 군사들은 다윗의 통곡 때문에 풀이 죽고 마음이 슬퍼서 슬금슬금 죄지은 사람들 같이 성으로 도망하여 들어갑니다. 다윗은 얼굴을 감싸 안고 계속 슬피 웁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이 모양을 보다 못 한 요압이 다윗에게 따집니다. “왕이시어, 우리가 몽땅 죽고 압살롬이 이겼어야 하는 겁니까? 백성들 앞에 이 무슨 망발이십니까?” 그제야 다윗은 마음을 추스르고 백성들 앞에 나섭니다.

죽어 마땅한 원수 된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왕의 통곡....., 우리는 성경의 이 대목을 읽으며 참 슬프고도 착잡한 복잡한 심정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된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다윗은 패역한 아들, 아버지인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압살롬마져 사랑하여 그 죽음 앞에 통곡하였는데, 이 모습을 어찌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저는 이 말씀을 통하여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아픔을 생각합니다. 하필이면 압살롬이 나무에 매달려 창에 가슴을 찔려 죽는 것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그 참혹한 십자가에 아들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고통을 나타낸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우리에게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마음과 고통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원수 된 죄인들을 살리기 위하여 품안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내어주셔야 했던 그 아픔과 그 고통이 하나님이라고 왜 없었겠습니까? 죽어 마땅한 원수 된 죄인들이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하나님의 눈에서 어찌 피눈물이 나지 아니하였겠습니까? 그 순간 독생자를 내어주신 그 고통과 죄인 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그 사랑과 기쁨이 범벅이 되어 또한 하나님의 가슴을 얼마나 헤집었겠습니까?

다윗 왕의 통곡을 들으며 백성들은 민망하여 마치 죄지은 사람들처럼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내어주시고 죄인들을 부르시며 통곡하는 음성을 듣는다면 어찌 더욱 민망하고 죄송하지 아니 하겠습니까? 압살롬을 위하여 우는 다윗왕의 통곡을 들으며 독생자를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세상의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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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16장)
7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8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9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급전직하(急轉直下)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 올라가다가 갑자기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속된 말로 잘 나가다가 망하여 추락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다윗의 처지가 그렇습니다.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게 왕궁을 빼앗기고 생명의 위협을 당하며 도망치고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들이 다 압살롬에게 돌아가다니요. 백성들이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다윗 왕을 배반할 수 있단 말입니까? 못 믿을 게 인간들이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게 백성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잘잘못을 따지고 누구를 탓하고 원망할 겨를도 없습니다. 다윗은 황급히 도망치고 있습니다.

위기를 당하고 상황이 바뀔 때 사람들의 본색이 다 드러납니다. 참된 친구는 어려울 때 나타납니다. 가드사람 잇대가 죽어도 함께 죽겠노라고 다윗 왕의 앞장을 섭니다. 사독과 아비아달이 법궤를 메고 다윗 왕을 따라나섭니다. 아렉사람 후새는 다윗의 변함없는 친구로 예루살렘성에 남습니다.

기회주의자들과 간교한 자들도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모사가 되어 일거에 일등공신과 권력자가 되려고 획책합니다. 므비보셋의 종 시바는 이 기회를 이용, 므비보셋이 다윗 왕을 배반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주인의 재산을 가로챕니다. 더욱 악한 것은 바후림에서 등장하는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은 이제 다윗왕은 끝났다고 다윗 왕을 욕하고 저주합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 왕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한 자여, 네가 잘 될 줄 알았더냐.” 다윗에게 갖은 악담과 저주를 퍼부으며 돌을 던지고 티끌을 던집니다. 견딜 수 없는 모욕입니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가 나섭니다. “제가 가서 감히 우리 왕을 저주하는 저 개 같은 자의 머리를 베겠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비새를 만류합니다. “아니다. 그냥 두어라.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요 명하신 것이라, 나는 달게 받겠노라.” 기세가 오른 시므이는 계속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립니다. 그 수모를 당하며 도망하는 왕과 신하들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욕과 수모를 감수하며 참아내는 다윗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닥친 이 수모와 환난이 밧세바와의 범죄로 인한 징벌이며, 그래서 다윗이 이 수모를 달게 받고 있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욱 깊은 다윗의 신앙과 이 일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그저 다윗의 죄를 징벌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왕은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이셨습니다. 원래 왕은 누구의 자리였습니까? 하나님의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셨지만 다윗에게 왕의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이 질문을 우리에게 바꾸어 해 봅시다.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는 누구 것이며 천국은 누구 것이었습니까? 우리가 그 이름 믿는 것 하나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약속을 받았지만 우리에게 그런 자격이 있었더란 말입니까?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그 영광의 자리에 앉혀질 자격이 도대체 티끌만치라도 있습니까?

잠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부자가 매일 동네를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10달러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니, 왜 돈을 주십니까?” “그냥 드리는 겁니다. 받아 두십시오.” 사람들이 처음에는 미안하고 계면쩍어 쭈뼛거렸지만 날이 가자 자연스럽게 돈을 받게 되었고 드디어는 당연하다는 듯이 돈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자는 돈 주기를 중단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을 것 같습니까? “아니 왜 돈을 안 주시는 거죠?” 지금까지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텐데 안 주는 것을 원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세상에 태어나 찬란한 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우리의 목숨을 거두어 가신다 해도, 지금까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지으신 아름다운 세계를 보게 하시고 누리게 하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은혜만으로도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구원을 받을 공로가 티끌만치라도 있었단 말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어느새 벌레 같은 날 위해, 이 추악한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주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그 보혈의 공로를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라고 고백한 욥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설사 지금 나의 생명을 지금 거두어 가신다 해도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은혜와 지금까지 허락하신 생명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윗이 시므이의 저주를 달게 받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신 것이요 하나님이 거두어 가신다 해도 순종해야 할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단순히 다윗에게 밧세바 사건으로 인하여 벌을 주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나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하여 그 값이 치러지(졌)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시므이의 저주를 달게 받으며 다윗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다윗의 진정한 축복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징벌과 고난이 없이 평안하게 왕의 지위와 부귀영화를 누렸다면 다윗은 어떤 사람이 되었을 것 같습니까? 주어진 것을 당연한 것으로 누리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 복된 자이겠습니까,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는 다윗이 복 된 자이겠습니까?
당신은 어떤 다윗이기를 원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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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4장)
4 드고아 여인이 왕께 고할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가로되 왕이여 도우소서.
5 왕이 저에게 이르되, 무슨 일이냐, 대답하되, 나는 참 과부니이다. 남편은 죽고
6 아들 둘이 있더니, 저희가 들에서 싸우나 말려 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저가 이를 쳐 죽인지라.
7 온 족속이 일어나서 왕의 계집종 나를 핍박하여 말하기를 그 동생을 죽인 자를 내어 놓으라, 우리가 그 동생 죽인 죄를 갚아 저를 죽여 사자 될 것까지 끊겠노라 하오니, 그러한즉 저희가 내게 남아 있는 숯불을 꺼서 내 남편의 이름과 씨를 세상에 끼쳐두지 아니하겠나이다.
8 왕이 여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가라. 내가 너를 위하여 명령을 내리리라.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주관자,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왕이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자요, 치리하는 자요, 인도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법을 집행해야 할 그 왕이 먼저 간음과 살인을 저지른 죄인입니다. 다윗은 암논의 일이나 압살롬의 일을 법대로 처리하지 못 합니다. 우리는 이 일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어쩌다가 그런 실수를 저질렀단 말입니까? 다윗이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 범죄가 하나님의 맡기신 왕의 책무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올무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버리시거나 바꾸지 아니하셨습니다.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원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인간 왕을 원했습니다. 사울이든 다윗이든 또 누구이든 인간 왕은 완전할 수 없고 인간 왕이 다스리는 나라도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인간 왕을 세우면 백성들이 어떤 고통을 받을 것인지를 말씀하시고 경고하신 바 있습니다.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그술로 도망한지 삼년이 지났습니다. 오늘말씀 사무엘하 14장을 보니 요압이 계략을 꾸며 드고아의 한 슬기로운 여인을 상제로 꾸며 다윗왕에게 보냅니다. 드고아 여인이 다윗왕에게 말합니다. “남편은 죽고 아들 둘이 있었는데 서로 싸우다가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쳐 죽였습니다. 사람들이 살인자를 처단하겠다고 남은 아들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대가 끊어지고 남편의 이름은 이 땅에서 영영 끊어질 것입니다.” 왕이 대답합니다. “생명을 위한 법이지, 법을 위한 생명이란 말인가? 그대의 아들은 죽임 당하지 않으리라.” 그러자 드고아 여인이 말합니다. “왕이시어, 그게 바로 왕이십니다. 어째서 아들을 돌아오지 못 하게 하십니까?”

법은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법대로 집행하면 살아날 자도 없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자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롬 3:10) 그래서 생명을 위하여 법의 집행을 유예하는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살리시려고 죄인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용서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가르칩니다. 왜 우리가 남을 용서하는 것이 먼저이겠습니까? 그것은 먼저 남을 용서해야 나의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기 보다도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나 자신부터 용서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행동으로 인정하는 고백이라 할 것입니다.

법대로 했다면 아담과 하와는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용서하셨습니다. 가죽옷을 해 입히셨습니다. 의의 옷의 예표입니다. 법대로 했다면 동생을 죽인 가인은 참살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을 용서하시고 표를 주셨습니다. 구원의 인치심의 예표입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께서 거저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자기 아들을 대신 처벌하시고, 그 피 값으로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교만한가요?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쉽게 잊습니다. 남을 쉽게 용서하지 못 합니다. 남을 정죄하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 하는 잘못을 쉽게 저지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러한 잘못을 계속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다윗은 의인이고 압살롬은 악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압살롬은 마귀의 자식이고 다윗은 하나님의 자녀일까요?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은 다윗이나 압살롬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압살롬은 악인, 다윗은 의인으로 만들어놓고 다윗 편에 섭니다. 압살롬을 정죄하고 나를 다윗의 편에 속한 의인으로 간주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고 자신은 다윗 같은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교만해지는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삼하 14장)을 좀 더 읽어보면 다윗은 압살롬을 그술로부터 데려오게는 하였지만 완전히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으로 용서가 안 되어 그랬는지, 남의 이목이나 체면 때문에 그랬는지는 몰라도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2년을 지냈습니다. 이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으면서 아들에게는 용서를 베풀지 못 한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용서를 베풀지 못 하고 자신은 의인의 편에 서고 압살롬은 악인의 편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2년이 지나자 압살롬이 요압에게 ‘차라리 그술에 그냥 있는 게 나을 뻔 했다.’고 말합니다. 온전한 용서가 아닌 반쪽짜리 용서로 인하여 압살롬의 마음에 응어리와 한이 맺혔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제야 마지 못 해 다윗왕은 압살롬을 부르고 입을 맞춥니다. 그러나 마지못해 하는 용서 역시 참된 용서가 아닙니다. 이때부터 압살롬은 이를 악물고 절치부심, 와신상담, 반역의 준비를 진행합니다.

용서는 완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히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쌍해서 구원하여 지옥으로부터 건져내신 다음 어디 다른 곳에 놔두고 꼴 보기 싫다고 얼굴조차 안 보시는 반쪽짜리 용서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은 돌아온 탕자를 완전히 용서하고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히 용서하시고 맞아들여 자녀로 삼으시고 기뻐 뺨을 부비고 입을 맞추며 끌어안으시는 완전한 용서를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시는 한없는 용서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 사랑을 입은 자가 남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교만이요 죄입니다.

만일 다윗이 압살롬을 완전히 용서하고 사랑하였더라면 압살롬이 아버지를 반역할 수 있었을까요? 만일 그랬더라면 이스라엘 역사가, 성경의 기록이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당신은 혹시 누군가를 반쪽짜리 용서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완전한 용서를 하십시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보십시오.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십일조는 무엇인가? 1. 십일조에 대한 일반적인 가르침 일반적으로 기독교신자들이 ‘십일조’ 하면 떠올리는 것이 말라기 3장 말씀이다. (말3:8~10)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 말씀에 의하면 십일조와 헌물은 하나님의 것이요 이를 드리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요 저주를 자초하는 행위이다. 그런가하면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를 하늘 문을 열고 축복하신다는 것을 자신을 시험하라고까지 하면서 약속하신다. 그런데 오늘날 십일조는 구약시대의 유물로, 또한 교회의 헌금강요 내지 치부수단으로 매도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과연 그럴까? 2. 구약시대 십일조의 시작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처음 정하신 것은 민수기 18장에서이다. (민18: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이 말씀 그대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아 회막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에게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것이다. 레위지파는 성막에서 섬기도록 구별되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다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지만 레위인들에게는 분배되는 땅이 없다.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거주지로 삼고 제물로 드릴 짐승을 간수할 성읍 주위의 조그만 땅밖에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의 기업이다. 그들에게 나의 십일조를 돌린다.”고 말씀하신다. 민수기 맨 앞으로 돌아가 1장과 2장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20세 이상의 남자를 다 세도록 하셨는데 여기에서 레위지파는 빠진다. 그리고 3장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레위 지파 중 일 개월 이상 남자의 수를 다 세도록 명령하신다. 세었더니 22,000 명이다. 다음은 이스라엘 자손 중 처음 난 남자를 생후 일 개월 이상으로 모두 세라고 명령하신다. 세었더니 22,273명이다. 레위인 남자의 수보다 이스라엘 자손 처음 난 남자의 수가 273명 많다. 하나님은 모든 처음 난 남자, 곧 장자는 하나님의 것이라 주장하셨고, 이 뿐 아니라 생축의 처음 난 것과 곡식과 열매의 처음 거둔 것도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셨는데 여기 민수기 3장에서 보면 그 장자들을 도로 돌려주는 대신 레위인을 하나님의 것으로 삼겠다고 하시면서 교환하고 계신다. 그리고 돌려주실 장자가 레위인보다 273명 더 많으니까 한 사람에 오 세겔씩 돈으로 계산하여 1,365세겔을 받아 챙기신다. 너무하시다. 장자와 레위인을 바꾸어 주시면서 대충 넘어가시지 않으시고 그걸 돈으로 계산해 다 받으시다니. 3. 장자의 의미, 레위인의 의미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의 장자를 유난히 푸대접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우선 다윗이 말째 아들이다. 메시아의 계보인 유다는 넷째다. 야곱도 동생이다. 하나님은 장자혐오증에라도 걸리셨는가? 그렇다. 하나님은 장자혐오증에 걸리셨다. 인류의 장자인 아담은 선악과사건을 저질러 모든 인류에게 죄와 죽음을 선사했다. 아담과 하와의 장자인 가인은 동생 아벨을 때려죽였다. 가인이 한다는 소리가 “제가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였다. 하나님의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였을 것이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그렇지 않은가? 형이 동생을 지켜주어야지 누가 지켜준단 말인가? 그렇다. 못 된 인간의 맏아들은 형 노릇을 못 했다. 동생들을 지켜주기는커녕 오히려 때려죽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의 장자(장자권)를 압류하고 자신의 아들을 인간들에게 살려내는 맏형으로 내어주셔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형이 되셨다. 가인이 압류당한 장자권을 가지고 오셔서 말이다. 그렇다. 성경 여러 곳에서 그렇게 말씀하신다. 시편 22편과 히브리서 2장을 보라. 그는 우리와 똑같이 되셔서 형제가 되셨다 하지 않는가. 광야에서의 성막은 무슨 뜻인가? 성막은 ‘하나님이 그 구원하신 백성과 함께 계신다’, 곧 임마누엘을 의미한다. 그런데 성막은 하늘의 참된 성소의 그림자이다. 그런데 태초부터 그 하늘의 참된 성소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섬겼던 자가 계셨지 않은가? 누구인가? 바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그 장자를 내어주신 것이다. 하늘에서 아버지를 섬기시던 맏아들을 내어주셨으니, 그러니 하나님께서 인간의 장자(장자권)를 몰수하고 “장자는 내 것이다. 모든 처음 난 것은 내 것이다.” 주장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런데 민수기 3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자를 되돌려주신 것이다. 그리고 대신 레위인을 택하여 회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신 것이다. 그리고 돌려주신 장자가 더 많은 만큼 오 세겔씩 돈으로 쳐서 받으신 것이다. 이렇게 셈에 철저하신 것은 단 하나의 생명도 허투루 여기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자신의 아들로부터 섬김을 받으시다가 그 아들을 내어주시고 광야에 내려와 성막 가운데 계시면서 레위인들로부터 섬김을 받는다는 것은 완전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다. 4. 십일조의 의미 레위인들이 기업도 없이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려면 형제들에게서 십일조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도 그렇다. 만일 십일조가 없었다면 2000년간 교회가 어떻게 지탱되어 올 수 있었겠으며 선교사는 어떻게 보내며 복음이 과연 우리에게까지 전해질 수 있었겠는가? 그건 구약시대 이야기고 신약시대에는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고 레위인이 따로 없고 그래서 십일조도 필요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십일조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내어야 한다. 십일조를 내어야 하는 이유는 가나안 땅을 분배받았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가나안 땅은 천국의 예표이다. 신약성도들은 십일조 낼 필요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자는 천국 땅을 분배받지 않을 모양이지? 왜 하나님은 십일조를 받아서 레위인들에게 돌리셨는가? 민수기 18:21절 말씀은 레위인들의 섬김의 대가(갚음)라 하셨다. (민18: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천국은 하나님의 아들의 것이다. 천국은 예수님의 것이다. 가나안 땅을 분배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내어야 하는 것처럼 천국을 분배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도 십일조를 내어야 한다. 그 십일조는 하늘성소에서 섬기시던 아들의 몫이다. 그런데 그 아들을 죄인들에게(이스라엘 백성에게) 내어주시고 대신 회막에서 레위인으로부터 섬김을 받으시니 황송하게도 레위인이 그 십일조를 받게 된 셈이다.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하나님은 아들을 위하여 창조하셨고 아들에게 다 주셨다. 아버지의 것은 다 아들의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아들에게로 상속된다. 당연히 천국은 아들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셨고 그 아들의 천국까지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이다. 그 생명, 그 살과 피, 아니 그 아들 되심, 후사 되심, 상속권을 몽땅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죄인이었던 우리가 아들이 십자가에서 찢어주신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까지 분배받는 것이다. 가나안 땅을 분배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십일조를 내었는데 영원한 하늘의 약속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과 아들 됨을 받은 우리가 후사가 된 우리가 십일조를 안 내다니? 5. 아브라함과 야곱의 십일조 아브라함이 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는가? 하나님의 아들, 영원한 제사장, 곧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일조는 바로 구원의 주이신 그리스도에게 드린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십일조의 예표이며 모형인 것이다. (히브리서) 야곱은 하나님이 나를 지키사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십일조를 드리겠나이다, 하고 서원한다. 아비 집은 영원한 구원의 처소요 안식의 처소요 천국의 예표이다. 야곱에게 아버지의 집......., 그것은 장자 에서가 물려받게 되어 있으며, 죄(?)를 범하고 도망가는 야곱에게 아버지의 집에 평안히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득한 훗날의 소망이다. 이 장면은 마치 재산을 팔아 타국으로 떠나는 탕자나 하나님을 떠나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죄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러한 신세의 야곱이 “제게 아비 집으로 평안히 돌아오게 하신다면 십일조를 드리겠나이다.” 하는 것은 죄인이 “하나님 아버지의 집, 곧 주님의 소유인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시오면 십일조를 드리겠나이다.” 하는 것과도 같다. 아버지의 집, 천국에 들어오는 자는 십일조를 당연히 내어야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들의 십일조가 레위인들이 아직 허리 속에 있을 때 있었던 일로 아브라함, 야곱, 레위인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멜기세덱, 곧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이라고 풀이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아비의 집, 가나안 땅, 곧 본향인 천국으로 돌아갈 자가 드리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십일조는 천국을 분배받는 자, 천국에 들어가는 자의 표인 셈이다. 6. 십일조는 주님께 드리는 것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십일조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다. 가나안 땅을 분배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를 드린 것은 구원을 얻은 신약성도들이 주님께 드리는 십일조의 모형이요 예표이다. 이것을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7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히7: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In the one case, the tenth is collected by men who die; but in the other case, by whom is declared to be living. (NIV) 동사가 현재시제이므로 우리말 성경에 ‘받았느니라’는 ‘받느니라’라고 해야 옳다. 즉 구약시대에는 죽을 자들, 곧 레위인들이 십일조를 받았으나, 신약시대에는 살았다고 선언된 자,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일조를 받으신다는 것이다. 신약에서 십일조는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십일조를 받으실 분이 분명해진 것이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 아니다. 오히려 구약의 십일조가 신약에서 이루어질 십일조의 예표인 것이다. 7. 십일조는 성도의 신앙이요 힘이요 자랑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라면 십일조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 십일조의 주인은 주님이시다. 십일조는 천국생명을 얻은 성도의 표다. 구원 받은 백성이 드리는 것은 예배이다. 찬양이다. 이것은 입술로 드리는 것이다. 구원 받은 백성이 드리는 것은 삶이다. 거룩한 산 제사(롬12:1-2)다. 이것은 거룩한 의의 병기로 드리는 것이다. 주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몸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다 입으로 때우고 몸으로 때우는 것이다. 입으로, 몸으로가 아닌 현찰로 드려야 하는 것이 바로 십일조이다.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요 이를 안 드리는 것은 도적질이라는 말씀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변함없다. 구약시대에 십일조를 도적질하는 것은 하나님의 재물을 훔쳐 먹는 것이었지만 신약시대에 십일조를 도적질하는 것은 주님의 생명을 훔쳐 먹는 셈이 되지 않겠는가? 오늘날 교회들이 재물로 타락하고 성도들의 믿음의 고백인 십일조가 잘못 쓰이는 경우가 많다 해도 십일조는 성도의 거룩하고 당연한 의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십일조와 헌금의 잘못된 쓰임과 교회의 대형화와 개교회주의에 의한 헌금독점현상은 인간들의 문제이며 고쳐야 할 문제이지 십일조 자체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반기독교, 반교회인사들이 마치 십일조가 교회의 부패의 원인인 것처럼 말하면서 십일조 무용론 내지 해악론을 펴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십일조 없는 교회, 십일조 없는 기독교가 과연 힘이 있겠는가? 십일조 없이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힘 있게 확장되어갈 수 있겠는가? 십일조 안 드리는 성도는 천국 못 간다는 뜻 절대로 아니다. 구원은 십일조가 아닌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일조는 이 세상에서의 물질적 축복의 조건도 아니다. 이 세상의 물질적 축복을 위하여 드리는 십일조는 일종의 거래이자 기복신앙의 전형이며 하나님께서 받으실 리가 없다. 십일조가 성도에게 지워지는 책임이요 의무도 아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에게 그러한 의무를 지우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무슨 조건을 걸거나 바라면서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다. 구원은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다. 그러나 주님의 살과 피, 그 생명을 받은 성도는 스스로 기쁨과 즐거움으로 자원하여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옳다. 아니 참으로 십자가의 사랑과 구원을 받은 자는 자원하여 주님을 섬기며 십일조가 아니라 십이조, 십삼조, 아니 가진 모두를 주님께 아낌없이 드리고자 하는 마음일 가지게 될 것이다. 어쨌든 십일조는 천국백성의 자랑스러운 의무요 표요 힘이요 자랑이다. 이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군대의 보급선이다. 아름다운 드림이 하나님나라, 그리스도의 몸을 아름답게 세우고 이기게 할 것이다. (1년 전의 글인데요......^^)

[사무엘하 7장]

하나님께서 마침내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시고 다윗 왕을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자기는 궁에 편안히 사는데 하나님의 궤가 초라한 장막에 있다는 것이 마음에 죄스럽고 부담이 됩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려는 자신의 뜻을 내비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에게 “네가 나를 위해 집을 건축하겠단 말이냐? 내가 언제 집 지어 달라고 하더냐?”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보좌로 삼고 땅을 발등상 삼으시는 하나님께 거할 집을 지어드리겠다는 다윗을 어처구니없어 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여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무엇을 바라고 베푸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높은 곳에 계시며 우리가 무엇을 되갚을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총하여 다윗 왕을 ‘내 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종’이란  ‘내 소유, 내 것’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내 것인 너에게 내 것을 가지고 주는데 내 것인 네가 내게 그 은혜를 도로 갚겠다는 거냐? 그렇다면 너는 내 것이 아니라는 말이냐? 나는 너의 하나님이 아니란 말이냐?”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또한 “네가 나를 너의 소유를 두는 곳간처럼 지은 집에 거하라는 거냐? 내가 너의 소유냐?” 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소유가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풍성하게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 분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소유 된 우리는 풍성하게 받으면 다만 풍성하게 기뻐하며 찬양할 뿐입니다. 이것이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유 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입니다. 이것이 바로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단을 통하여 다윗에게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내가 했다. 내가 너를 세워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며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멸하였다. 네가 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한 것이다. 내가 앞으로도 이렇게 너의 이름을 세우리라. 또 나의 백성을 심고 모든 대적으로부터 지키리라.”
그렇습니다. 다윗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는 일을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쓰임 받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을 위하여 다윗의 집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은 훗날 다윗의 자식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거하실 집’이 아닌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집’이라고 말씀하신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주만유를 지으신, 우주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이 거하실 집을 인간이 짓는다는 것이 말이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그 이름을 두실 집’을 건축하기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돌아보면 인간들이 얼마나 악하고 어리석었던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나자 하나님의 법궤를 실로에 처박아 두고 ‘각각 제 소견에 선한 대로 행하는’ 사사기 시대를 살았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블레셋과의 싸움에 하나님의 법궤를 동원했다가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을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필요할 때는 써먹고 필요 없을 때는 처박아두는 소유물로 여긴 셈입니다.

훗날의 이야기이지만 솔로몬 성전을 건축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백성들의 열심은 화려한 솔로몬 상전을 건축할 그 때뿐이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을 지은 다음 백성들은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어두고 하나님 섬기는 일은 제사장들에게 맡겨놓고 제 멋대로 악을 행하며 우상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전은 퇴락하고 율법책은 먼지구덩이 속에 처박혔습니다. 히스기야 왕과 요시아 왕에 이르러 퇴락한 전을 수축하고 먼지 덮인 율법책을 찾아내어 잠시 나아지는 듯 했으나, 결국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하나님의 소유이기를 싫어하였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자식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그 이름을 손으로 지은 돌과 나무로 된 전에 두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두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거룩하신 영광의 이름을 우리의 심비에 새기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에게, 우리 심령에 새겨지면 우리는 하나님의 확실한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저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이름을 믿는 자”, 곧 “마음에 하나님의 이름을 새긴 자”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을 마음에 새김으로 하나님의 성전 된 자들입니다. 그 이름으로 인 친 하나님의 소유 된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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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본 사람들 이야기 좀 해야겠다. 대학에 다니는 내 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아빠, 인터넷 MP3로 일본 꺼 듣다가 나 졸라 열나서 죽는 줄 알았어.”
“그게 무슨 소리야?”
“응, 일본가수 둘이서 부른 노랜데, 한국 사람과 한국을 욕하는 가산데, 너희 한국놈들이 우리 일본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미개인 생활할 텐데, 고마운 줄 모르고 우리를 욕한다느니, 군인, 징용으로 남양군도에서 죽여주고 탄광에 끌어가서 죽여주고, 정신대 끌고 가서 죽여주고 그래서 인구를 조절해 줬는데 은혜도 모른다느니, 너희 한국놈들은 더럽고 치사하고 영원히 욕을 보고 죽어 없어져야 할 족속이라느니 그런 가사야. 어떻게 그런 가사의 노래를 만들어 국제적으로 유포시키는지 알 수가 없어.”
"그러게 말이다. 정말 나쁜 사람들이네. 그런데, 너 '졸라'가 뭐냐? 아가씨가."
그런데 딸에게서 그 소리 듣고 나니 나도 '졸라' 열난다.

일본....,
하늘에서 천신(天神)이 내려와 태평양가에서 모래장난을 하고 놀다가 물과 모래를 손에 잡고 주루룩 흘려놓은 것이 일본열도란다.
자기네 왕은 천신이 내려준 천황이고 자기네들은 황국신민이란다.
신공황후란 여자, 바람을 부르고 파도를 일으키는 능력을 지닌 이 여자가 선단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 신라를 정벌했더니 신라왕이 신공황후의 그림자만 보고도 놀라 기절을 했단다.
그들은 가야땅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部)를 설치하여 한반도를 다스렸고 백제왕은 충성을 서약하여 칠지도를 바쳤단다.

그들에게 조센징은 더러운 인간의 대명사이다.
골프를 치면서도 세컨샷에 온그린 못 시키고 그린 주변에서 칩샷으로 핀에 가까이 붙여 파(Par)를 잡는 걸 지저분하다고 조센징Par라고 부른다.
그들은 고대 일본왕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백제유물에서 대경실색하면서 한사코 그들의 문명이 한반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기네들은 더러운 조센징의 피나 문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게 아니라 남쪽에서 올라온 남방민족이라는 것이다.
아니 무슨 뼈다귀 같은 걸 묻어놓았다가 구석기 유물을 발견했다고 조작을 해서 글쎄 70만년전부터 일본에 고대인류가 살았단다.

그들은 경복궁을 포위하고 대신회의에서 을사보호조약을 강제체결, 대한제국을 강제합병하였다. 그리고 만주국을 강제 편입하였다.
그리고 일본열도, 한반도, 만주를 포함한 그 광활한 지도를 그려서 기념전단과 기념우표를 발행하였다.
대동아공영(大東亞共營),
그들은 조선과 만주가 다함께 황국신민이 되었다고 떠들었지만, 자기네들은 일등국민, 조선은 이등국민, 만주는 삼등국민으로 차별하였다.
그리고 강제수탈과 언어의 말살, 수백만의 인명을 희생시키고, 20만에 달하는 이 땅의 딸들을 끌어가 놈들의 정액받이로 더럽혔다.
 
을사보호조약, 이 조약이 효력이 있는 것인가?
일본은 이 조약이 효력 있다고 주장하지만 고종황제의 수결(手決:손에다 인주를 발라 찍는)이 없다는 점에서 무효라는 것이 한일합방을 추적해온 분이 밝혀낸 사실이다. 고종황제가 한사코 조약체결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미리 계획한대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면 축하연을 벌리기로 하였는데, 한성에서의 조약체결이 지체되는 바람에 이완용 등 대신들이 서명하기 1시간 전에 일본에서는 벌써 한일합방축하의 팡파레가 울려퍼졌다나.....
무력시위와 이완용의 매수, 황제의 동의 없이 어인(御印)을 훔쳐 찍은 조약.... 이것이 어떻게 효력이 있다는 것일까?
그러나 이 을사보호조약이, 비록 무력으로 협박을 하고 이완용이를 매수하고 대신들을 을러대어서 체결한 것이라 하더라도 형식과 절차라도 제대로 갖추었다면 일본은 이런 점에서는 큰소리를 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종황제는 목숨을 걸고 수결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고종황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일본 군인들에게 아내(일본이 민비로 낮춰 부르는 명성황후)를 살해당하고 나라의 주권까지 빼앗기고 끝내 독살 당한 불쌍한 군주(君主).
그러나 이 고종황제가 일찍이 서양문물에 눈을 돌리고 나름대로 신지식을 갖추고 일본의 침략에 저항한 선구자적 인물이었다면?
헤이그에 이준 밀사를 보내고 런던에 이한응 공사를 파견하여 한일합방의 불법성을 만방에 알리려 애썼던 고종황제,
일본에 100여명의 선발된 인재를 보내어 서양문물을 공부하고 오도록 하고 서양에도 끊임없이 사신을 보내고 세계정세를 읽어냈던 고종.
그 고종황제의 선구자적 모습은 궁궐에 발전기를 설치하여 전등을 켜고 미국인과 합작하여 한성전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동양에서는 가장 먼저 전차를 도입, 운행하고 가로등을 켠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일본은 한반도를 강점하고 그들이 한반도를 개발하고 문명화했다고 강변한다.
새빨간 거짓말이요 억지다.
일본의 강점으로 인한 암흑기와 수난의 시대가 없었더라면 우리나라는 훨씬 일찍 문명국, 선진국으로 올라섰을 것이 확실하다,
적어도 우리나라의 전력사(電力史)를 보면 분명히 그렇다.
 
에디슨이 탄소필라멘트 전구를 발명한 것이 1882년이다.
그런데 7년 뒤인 1887년 3월 6일 경복궁의 향원정 연못가에 발전기가 설치되고 건천궁에 전깃불이 처음 켜졌으니 이는 일본의 궁중 보다 2년이 앞선다.
고종황제는 1872년부터 건청궁에서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였는데,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계기로 미국 초대 전권공사로 임명된 푸트(Lucius H. Foot)의 요청에 따라 1883년 유길준(兪吉濬)을 대표로 하는 10명의 사절단을 미국으로 파견한다.
유길준은 이 때 뉴져지에 있는 에디슨전기회사를 방문하고 전기시설을 둘러본 다음 뉴욕헤럴드 신문사와 인터뷰를 하였는데,
“우리는 일본에서 전기용품을 관람한 일이 있다. 그러나 전기불이 어떻게 켜지는지는 몰랐다. 우리는 인간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마귀의 힘으로 불이 켜지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곳에 와서 비로소 전기가 어떻게 켜지는지 알게 됐다. 또 지금까지 사용하던 석유등 보다 값싸고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조선에도 전기를 사용하고 싶다.”
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있다(1883년 10월 15일자 뉴욕헤럴드 신문에 보도).

그리고 조선정부는 1884년 9월 4일 에디슨전기회사의 전기시설을 왕궁에 설치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고 1885년 6월 4일, 에디슨사의 설립자요 사장이던 에디슨은 전기시설 설치책임자로 프레이자(Everett Frazar)를 임명하였으며, 2년 가까운 공사 끝에 위에서 말한대로 1887년 3월 16일 최초의 전등이 켜졌고, 이는 동양최초의 전기시설 설치사업이자, 이 땅을 암흑으로부터 일깨우려는 개화사업(開化事業)의 상징적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당시 조선왕실은 한반도의 이권을 독점하려는 러시아의 감시를 받고 고종이 감금되기도 하였으며(유명한 영화배우 율 부리너의 할아버지는 함경도 지역의 산림채취권과 광산채굴권을 독점, 수많은 조선사람을 혹사하고 자원을 수탈해가서 치부한 사람이다), 또한 조선은 일본과 청나라 등 열강의 세력각축장이었다.
고종황제는 이들 열강의 세력에 맞서기 위하여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러시아 등의 감시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사업을 추진, 미국인 콜브란(Collbran)의 자문을 받고 이근배, 김두승, 두 사람을 대표로 하고 고종이 단독출자하여 1898년 1월 26일, 이 땅 최초의 전기회사인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였으니 이것이 최초의 전기사업인 셈이다.

한성전기회사는 종로에 전기철도와 전차를 설치하고 1900년 4월 10일, 민간최초의 가로등을 설치하였으며 청량리에서 서대문까지 노선을 확장하여 운행하였다.
요금은 5전이었으며, 정거장이 아니라 아무 곳에서나 손을 번쩍 들면 태워주는 식이었다고 한다.
전차와 정거장, 주변의 밝은 가로등, 그리고 진고개 거리를 밝힌 600개의 가로등,
당시 한성(漢城)에 도착한 여행자들은 동양최초의 현대적 교통시설과 전등을 갖춘 이 도시를 보고 놀라워했던 것이다.
또한 뒤를 이어 1901년부터는 한반도 방방곡곡, 특히 항구에는 민간에 의하여 발전기가 도입되고 전기사업이 추진되었으니, 고종은 백성들의 기업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었던 셈이다.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 개발된 내연기관 발전기를 국내에 들여와 사업을 펼치는 전기회사가 한 때는 60여개나 될 정도로 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
또한 한성전기회사는 1903년에 용산구 청암동 한강변에 250 KW짜리 발전기 2 대를 설치하여 민간에 대한 전기판매를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된 전차는 1968년 12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서울시내에서 사라졌다. 내가 한국전력에 입사하기 위해 면접시험과 신체검사를 받으러 을지로 입구의 한국전력 본사에 갔을 때가 1968년 10월이었는데 그 때까지도 전차들이 지지직거리며 스파크불이 번쩍거리는 전선 아래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의 전차요금은 일반 5원이었다. 5전과 5원이라....)
 
그러나 고종황제의 이 전기사업은 미국인 콜브란이 150만원에 달하는 공사비용 등, 채무변제를 요구하고 채무변제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한성전기회사를 콜브란의 개인소유로 바꾸어 타인에게 양도하겠다고 경고하고, 사옥에 게양된 태극기를 내려버리고 성조기를 게양하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전차타기 거부운동까지 일으키는 사태로 발전하는 바람에 난관에 봉착한다.
이에 외부대신 조병식은 이 부당한 콜브란의 요구를 조목조목 반박하였고, 대로한 고종황제는 전기사업 면허취소를 하교하기까지 하고 나선다.
그러나 고종은 러시아나 일본 등 한반도를 집어삼키려는 열강으로부터 국권을 지켜내기 위하여는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콜브란과 협상을 벌여 70만원의 부채상환에 동의하고 이 사태를 마무리한다.
 
고종황제는 미국으로부터 개화사업의 동반자가 아니라 열강으로부터 한반도를 구해줄 동맹국의 역할을 기대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까지 하였건만...,
끝내 한반도는 최종의 승자가 된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그리고 일본 강점시기에도 전기사업은 계속되고 수많은 민간전기회사들이(일본인들의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생겨나긴 했지만.......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감격의 해방을 맞았고 상해임시정부가 돌아왔으며,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공화국이 탄생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진다면 이 공화국 정부는 건국의 절차를 제대로 밟은 것일까?
국가는 국민의 합의에 의하여 세워지는 것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그 때 국민들은 국민의 합의를 거쳐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을 수립하였던가?
백성들끼리 공화국을 세우고 대통령을 뽑기로 언제 합의하였던가?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는 과연 고종황제나 대한제국으로부터 주권을 위임, 또는 인계 받은 정부였는가?
혹은 온 겨레의 합치된 위임에 의하여 후일 공화국을 수립할 주체로 인정되었던가?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어떤 절차로 그랬단 말인가? 국민투표라도 하였던가?
그것은 명백한 반란이었다.
적어도 절차상으로 엉터리로 세워진 것이 대한민국이다.
우리는 이 점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왕실에서 쫓겨 나오고, 흩어지고, 이방자라는 일본계집과 반강제로 혼인하고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일본의 작위를 받고....
그렇게 일본의 대한제국황실 말살음모로 풍지박산된 대한제국의 황실은 이 땅의 백성들에 내팽개쳐졌고, 그렇게 잊혀져 갔던 것이다.
그렇게 저들의 '천황'은 우리의 '황제'를 말살시켰던 것이다.
우리의 나라와 국호는 그렇게 사라져갔던 것이다.  

오직 일본의 압제로부터의 해방, 그 기쁨과 감격 뿐, 누구하나 주권의 회복과 정권의 인계인수절차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정식대로 하자면 먼저 대한제국과 일본 당사자에 의해 이 한일합방 조약의 문제가 종결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다음에 대한제국으로부터 공화국 수립을 위한 주권인수 절차가 황실과 국민 사이에 이루어져야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대한제국은 사라져 버리고 을사보호조약의 당사자도 아닌 상해임시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위임받는다는 것이 어디 올바른 절차였더란 말인가?
 
그러나 이제 어찌하랴?
혹시 그 때 누가 그런 소리라도 했다면 미친 놈 취급을 받거나 돌에 맞아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그래도 생각해 보자.
설사 대한제국이 무능력하고 줏대 없고 한심스러운 국가였다고 치자.
그래도 엄연히 우리나라 아닌가?
설사 대한제국의 황실이 그 무능력 때문에 주권을 빼앗기고 그래서 겨레를 비참한 절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케 한 일본의 폭정으로부터 회복시키는데 아무런 역할도 못 하고, 그래서 백성에게 염치도 없고, 그래서 백성에게서 버림받고 또 그 버림이 대한제국의 황실에 의하여 달갑게 받아들여졌다 하더라도, 적어도 백성끼리는 새로운 정부의 바탕과 주권의 인수인계 형식에 대한 합의가 있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하다 못 해 대한제국의 황실로부터 그 주권이 백성에게, 아니 국민에게 귀속되었음을 선언하는 절차라도 있었어야 할 게 아닌가?
이러한 절차가 없었으니 지금 우리가 일본에 대하여 한일합방이 무효라고 주장하면 일본이 “이 봐, 너희와는 상관없어, 조약체결 당사자 오라고 해.”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랬더라면 과연 서울과 평양에 두 개의 정부가 세워질 수 있었을까?
만일 어느 한 쪽이라도 대한제국으로부터 주권을 위양 받는 절차라도 취했더라면 서로가 정통성을 주장하는 일이 가능했겠는가?
나는 대한제국의 복권이나 왕실의 재건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 민족이 생각도 없이 내팽개친 주권과 역사에 대한 인식이 안쓰러워 몇 자 적어 본 것이다.
 
그 잔혹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많은 삶을 살았던 비운의 황제 고종...
그가 지하에서 오늘을 바라본다면 뭐라고 할 것인가?
.
.

내가 이 글을 쓴 것은 10년도 더 지난 2,000년도 무렵이다.

얼마전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고 런던올림픽 축구 3,4위전에서 승리한 다음 박종우 선수가 태극기와 "독도는 우리 땅" 플래카드를 들고 그라운드를 뛰어 일본의 심기를 건드리고 IOC는 올림픽에서 정치적 세레머니를 했다고 나서고.......
그런 판에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 왕은 '통석의 념' 따위의 언어를 가지고 방한할 생각 말라. 일본 왕이 한국을 방문하려면 한국의 희생자들에게 사죄해야 한다."고 일침을 가하는 바람에 일본땅이 들썩거린단다.

이웃나라에 저지른 악행에 대하여 죽어도 사과하지 않는 일본, 영토에 대한 집착, 또다시 그 악행을 저지르겠다는 듯이 군국주의의 부활을 외치는 일본을 보면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일각에서는 대통령으로서, 외교작으로 옳지 못 한 언행이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내뱉은(?) 말이 왜 그리 시원하게 느껴지는지?
우리 모두가 하고 싶은, 그리고 고종황제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던가?

저들이 지금 우리의 발꿈치를 물지만 우리가 저들의 머리를 뭉갤 날이 언젠가 아니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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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6:1-11> 

오늘은 사무엘하로 들어가서 좀 건너뛰어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오던 사건을 살펴봅시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왕 사울이 길보아산에서 세 아들과 함께 죽은 다음부터 다윗은 더 이상 사울왕에게 쫓길 필요는 없었지만, 사울왕의 군장 아브넬이 사울왕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옹립하고, 유대족속은 헤브론에서 다윗을 왕으로 세워 다시 수년간 사울과 다윗 집안간의 싸움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다윗으로 사울집안을 이기게 하시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고, 또한 침략해온 블레셋을 패퇴시키셨으며, 다윗은 또한 여부스족속으로부터 시온산성을 빼앗아 다윗성이라 하고 예루살렘에서 다스리게 됩니다.

이 때 다윗의 나이가 38세 때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윗은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 20여 년간 모셔져 있던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오기로 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뺀 삼만의 무리를 데리고 가서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그 앞에서 여러 가지 악기, 비파와 수금과 소고와 양금과 제금 등으로 주악을 울리며 모셔옵니다. 3만의 인파와 천지를 울리는 주악, 팡파레 속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오는 행사는 그 규모가 대단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뜁니다.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잡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웃사를 치셔서 죽이십니다. 놀란 다윗은 법궤 모셔오기를 중단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가드의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놓고 철수합니다.

하나님은 왜 법궤를 붙잡은 웃사를 죽이시고 다윗의 ‘법궤 모셔가기’ 행사를 매몰차게 거부하셨을까요? 그것은 다윗의 ‘하나님 모셔가기’ 행사가 잘못 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4장을 보면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동할 때 하나님은 법궤와 성막기구를 움직이는 상세한 법도를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궤와 장막을 옮기는 일은 레위지파 자손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 곧 대제사장들이 법궤를 장과 해달가죽, 그리고 순청색 푸른 보자기로 덮고 채를 뀁니다. 그리고 성소의 모든 거룩한 기구를 덮습니다. 그러면 레위지파 중 고핫자손들이 메고 갑니다. 이 때 고핫자손들도 함부로 법궤나 성물에 손을 대면 죽임을 당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게르손 자손들은 성막의 앙장들과 덮개 같은 것을 메고 갑니다. 므라리 자손들은 장막의 널판들과 기둥들을 메고 갑니다. 하나님의 장막을 옮겨가는 것은 이렇게 엄숙하고 두려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렇게 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도 범람하던 요단강에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들어갔었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레위인들로 하여금 메게 하지 않고 소가 끄는 수레에 실었습니다. 수레에 싣다니, 아니, 하나님이 무슨 물건이나 곡식입니까? 하나님의 법궤를 수레에 실은 것은 홉니와 비느하스를 죽이고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아갔던 블레셋이 재앙으로 혼이 난 다음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때 사용한 방법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야 모르니까 그럴 수 있었겠지만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소가 왜 날뛰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잘못을 깨닫지 못 하였고 웃사는 하나님의 법궤를 붙잡았던 것입니다. “하나님, 가만히 좀 못 계시겠어요?” 

우리는 하나님을 함부로 취급하고 하나님의 음성, 의사표시까지 짓눌러버리는 웃사의 잘못을 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못 대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버릇없이 구는가 하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과 경고를 무하고 자기 마음대로 해버립니다. 심지어 성령하나님을 무슨 물건이나 기운처럼 “성령 받아랏!” 하고 뿌려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좋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대하고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되는 것입니까? 아무리 격의 없는 친구사이나, 사랑하는 부부사이나, 부모자식간이라도 서로를 존중하는 예절은 있는 법입니다. 무시당하고서야 마음이 좋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한없이 좋으신 분이지만 동시에 한없이 거룩하시고 엄위하시며 두려운 분이십니다. 우리는 한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복주시기 원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또한 엄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길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로부터 석 달 뒤, 뒤늦게 다윗이 이를 깨닫고 다시금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올 때는 제대로 했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물론 레위지파 제사장들이겠지요) 여섯 걸음을 행할 때 희생으로 제사를 드렸고 다윗은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어린아이처럼 그 앞에서 춤을 춥니다.
"좋으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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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30:1-6)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제 삼일에 시글락에 이를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남방과 시글락을 침로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 있는 대소 여인들을 하나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에 이르러 본즉 성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시고 기름 부으셨다면 다윗의 앞길은 순탄하고 형통해야 맞는 것 아닙니까?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복 된 삶이 시작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다윗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다윗은 10년 세월을 사울왕에게 쫓기며 도망자 생활을 합니다.
아무도 자기편이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고 창화하던 민심조차 등을 돌려 다윗이 도망하는 곳마다 누군가가 사울왕에게 고자질하였고 다윗이 숨은 곳을 알아낸 사울왕은 부하를 거느리고 쫓아왔습니다. 심지어 다윗이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해준 그일라성 사람들까지 다윗을 잡아서 사울왕에게 내어주려고 하였고, 좀 도와줄 줄 았았던 나발은 다윗을 모욕하기까지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대적이 되어 버린 유대땅에서 다윗이 안심하고 거할 곳은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환난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다윗에게 찾아와서 다윗은 불한당 패거리 우두머리가 되어버립니다.

사울왕에게 쫓기던 다윗은 블레셋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가서 아기스의 부하 노릇을 하기에 이릅니다.
아기스가 떼어준 시글락성을 근거지로 삼아 산적노릇을 합니다.
부하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들을 침략해서 남녀노소를 모조리 죽여버리고 소와 양, 노새와 약대, 옷과 재물을 약탈해오는 악랄한 마적단 산적 생활을 합니다.
아기스에게는 유대땅을 약탈하였노라고 거짓말을 하여 아기스로 하여금 다윗을 믿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으신 다윗이 블레셋 왕의 부하노릇, 산적노릇까지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된 것입니다.

다윗은 결국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전쟁을 벌이자 아기스의 부하로 참전하여 조국과 동족을 쳐야 하는 곤란한 입장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을 의심하는 아기스의 부하들이 다윗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다윗과 부하들은 시글락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번에는 그 사이에 아말렉이 시글락에 쳐들어와 성을 불태우고 다윗과 부하들의 아내들과 자녀들, 모든 재산을 약탈해 가버린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쩌면 인생이 고달파도 이렇게 고달프고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있는 것입니까?
다윗과 부하들은 너무나 기막히고 암담하여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상심하고 분노한 부하들은 다윗을 돌로 치려고까지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얻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성경을 보면 "But David found strength in the Lord his God", 즉 “그러나 다윗은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안에서 힘을 찾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어성경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말 성경의 번역이 훌륭하지만 때로는 영어성경이나 원어성경을 찾아보는 것이 더 확실히 뜻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영어성경이나 히브리 원어성경이 ‘안에서’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그저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안에서’ 곧 ‘하나님 안에서’ 힘을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라고 기록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의미를 가지는지요?

원수가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고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가 ‘안에’, 곧 ‘하나님 안에’ 있다면 안전할 것입니다.
비록 현실이 참담하고 모든 소망이 끊어지는 것 같아도 내가 ‘안에’, 곧 ‘하나님 안에’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하나님이 애당초 계획하신 곳에 이르도록 인도하실 것이며, 나를 향하여 품으신 뜻을 이루실 때까지 나를 버리시거나 잃어버리시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 사무엘상하는 또한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다시금 발견한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다면 밖의 모든 상황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산성이시며, 요새시며, 방패이시며 피할 바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힘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믿었을 때 하나님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다윗을 다시금 일으키시고 달려 나가게 하시고 다윗을 도우사 대적을 쳐 이기게 하시고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아오는 기쁨을 얻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도 다윗이 세상임금 역할을 하는 사울을 피하여 도망하고 사방의 위험들과 대적들로 인하여 위협받은 유대광야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와 살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아버지의 집에 이르는 날까지 우리의 삶은 원수들과 대적들이 출몰하는 거칠고 험한 광야의 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다윗이 당한 것 같은, 모든 것이 끝난 듯 어처구니없고 절망적인 환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지라도 저들은 우리를 꺼꾸러뜨리지 못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우리는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이미 하나님의 손바닥에,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히어졌기 때문입니다. (엡 2:6)

우리가 이것을 믿지 못 하거나 잊어버릴 때 우리는 위급할 때 낙심하고 두려워하며 환난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다윗처럼 일으키시고 달려 나가게 하시고 회복하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주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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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28장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하여’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칼빈 장로교의 웨스트민스터 신조도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이어야 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과연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부족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무슨 보탬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있든 없든 이미 완전하시며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우리를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지으셨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가 들어간다는 뜻일 겝니다.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 영광의 존재가 된다는 뜻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기 위하여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순종이라고 말씀한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 ‘사무엘상하’는 ‘사무엘상하’가 ‘다윗상하’라 하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사무엘상하에는 책이름 ‘사무엘’ 이야기보다 다윗의 이야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영화에서도 주인공은 끝까지 죽지 않는데 사무엘상하를 보면 주인공 사무엘은 사무엘하가 시작되기도 전인 사무엘상 28장에 벌써 죽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완전히 다윗의 이야기뿐입니다.

‘사무엘상하’든 ‘다윗상하’든 이 책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순종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다윗과 그 다윗을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사무엘상하입니다.

사무엘상하를 다시 읽어보십시오.
사울은 악하고 다윗은 착헤서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사랑하신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악함과 선함으로 사울과 다윗을 비교한다면 다윗이 사울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울왕도 처음에는 행구 속에 숨을 정도로 수줍고 착한 청년이었습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질투하고 다윗을 죽이려고 날뛰기는 했지만, 다윗은 밧세바와 간통하고 그 남편, 자신의 충성된 부하 우리야를 모살하였습니다. 죄질로 보자면 다윗이 사울보다 오히려 악하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다윗의 편이 되어 주셨고 마침내 다윗을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순종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울왕은 적이 쳐들어오는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 하고 자기 생각대로 제사장이 드려야 할 제사를 드렸습니다.
살찐 소와 양이 아까워서 아말렉 왕과 가축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였습니다.
다윗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사울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어도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왕을 자기의 손으로 죽일 수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였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밧세바와 간통하고 우리야를 죽인 죄를 지적하자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꼬꾸라져 회개하였고, 시므이가 저주를 퍼붓고 욕을 하며 흙을 던지는 것을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생각하고 감내하였습니다.
다윗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걸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임재의식과 순종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시게 하였다고 믿습니다.
사무엘상하가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불순종하는 자는 버림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습니다.
우주만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피조 되었고 주관 되고 있습니다.
피조세계는 곧 창조주에 대한 순종의 세계입니다.
순종은 존재를 가능케 합니다.
창조주에게 순종하지 않는 피조세계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피조세계에서 오직 인간만이 불순종합니다. (또 있군요, 사단 마귀...)
창조주에 대한 불순종은 자기파괴와 타락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피조세계란 창조주에게 순종하는 세계라는 사실입니다.
순종이 존재의 조건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조차도 피조세계 안으로 피조물의 위치로 낮아져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 분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 2:6)
하나님은 순종한 예수님을 살리시고 그 이름을 만물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모든 무릎으로 그 앞에 끓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조차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영광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은 피조세계에서는 오직 순종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또한 마지막 날에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 곧 순종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그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순종해야만 죄인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불순종의 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순종하기는커녕 조롱하고 대적하고 밟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불순종의 결국은 버림받음 밖에 없습니다.
사무엘상하는 불순종하는 사울왕과 순종하는 다윗의 대비인 셈입니다.

사무엘상 28장에는 불순종으로 인하여 끝내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울왕의 비참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블레셋 대군이 쳐들어오자 사울왕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왕을 이미 버리셨기 때문에 아무 응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군급한 사울왕은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죽은 사무엘의 혼을 땅속으로부터 불러올려 도움을 청합니다.
마치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것 같은 처절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신접한 여인이 불러올린 사무엘의 신으로부터 사울왕이 들은 것은 엄중한 정죄와 파멸의 선고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울왕은 길보아산에서 아들들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오직 순종입니다.
순종만이 생명의 길이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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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9장 13-26]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왜 누구는 택하시고 왜 누구는 버리시느냐고요?
왜 하나님은 모두를 구원하지 않으시느냐고요?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다고요?

그럼, 산더미같이 많은 진흙을 몽땅 파서 지고 와야 옳다는 겁니까?
자기 죄악으로 죽은 자들을 한 사람도 빼지 않고 모두 구원해 주어야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 되는 것입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택하신 대로 구원하신다 하여 나쁜 하나님이 되고, 저녁 다섯 시에 포도원에 들어와 겨우 한 시간만 일한 품군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다 하여 악한 주인이 되는 것입니까?
토기장이가 자기 쓸만큼 진흙을 가져다 자기 맘대로 어떤 것은 귀한 그릇으로 만들고 어떤 것은 천히 쓰는 그릇으로 드는 게 잘못입니까?
또 가져왔다 해서 모든 진흙을 공평하게 모조리 고려청자로 만들어 주어야 진흙들이 불평을 않도록 공평하게 되는 겁니까?
토기장이가 진흙 일부를 가지고 도자기 구울 가마를 만든들 진흙이 할 말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왜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은 사랑하셨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에서나 야곱이나 다를 바 전혀 없으나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셨을 뿐입니다.
그들을 그렇게 쓰셨을 뿐입니다.
야곱을 그렇게 택하시고 에서를 그렇게 사용하시고 성경에 기록케 하셔서 오늘날 성경을 읽는 저와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푸시려 한 것입니다.
먼 훗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렇게 그들을 각기 사용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 하고 애굽 백성이 되어 혼나고, 애굽군대가 되어 바다에 수장되고, 가나안 족속이 되어 진멸 당하였습니까?
또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다 구원 받았습니까?
광야에서 죽고,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하고 앗수르에 멸망당하고
바벨론에 침공당하여 죽고,
겨우 얼마, 남은 자만이 구원 받지 않았습니까?
인류역사를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하’자, 예수님 ‘예’자도 못 들어보고 죽어갔습니까?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선택되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러분의 선택으로 여러분의 공로로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어서 영생과 천국을 약속 받았습니까?
인류역사 수 천 년에 오늘날 자유세계에 태어나서 복음을 듣고 예수 믿을 수 있게 된 것이 여러분의 공로이며 여러분의 선택입니까?

하나님이 불공평하신가 할 것이 아니라 그 엄청난 구원의 축복이 어떻게 내게 왔는가를 생각하십시오.
너도 나도 다 받는 축복이 아닙니다.
너도 나도 다 받는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값싼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흔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 엄청난 구원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어찌 나 같은 것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기 되는 구원의 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는가? 생각할수록 그것이 귀하고, 그것이 감사하고, 그것이 말할 수 없이 큰 은혜가 아닙니까?

.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를 놓고 어느 한 편에 치우친 주장과 주의를 만드는 것은 옳지 못 하다고 믿습니다. 성경을 읽을수록, 그 구원의 신비를 알수록 우리는 입을 막을 뿐입니다. 3년 전 설교문의 일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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