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님이 댓글에 대한 답글들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대하여 제게 질문을 하셨네요.
- 칼비니즘과 알미니즘
- 예수님에 대한 유대교와 기독교의 다른 해석
- 창세기 1장 26, 27절에서 피조된 인간
- 심판과 정죄 (judgement &Condemn)  

부족한 제가 만족스러운 대답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부족하더라도 대답을 드려 보겠습니다.

1. 칼비니즘과 알미니즘에 대하여
칼비니즘과 알미니즘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전지전능"에 대한 논쟁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미리 정하신 자들만 구원을 받게 될까요,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될까요?

예정(Predestination)론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구원 받을 자들을 이미 정하셨다’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절대적 주권을 주장합니다.
반면에 자유의지(Free Will)론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고 주장합니다.

알미니즘의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칼비니즘은 "뭐? 인간이 구원을 받을 것인지, 아닐 것인지 하나님이 모르셨다고?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 않단 말이냐?"고 반박합니다.
이에 대하여 알미니즘은 다시 "아니, 당신들 주장대로라면 이미 다 정해져 있는데 뭣 하러 전도하라 하십니까? 모든 것이 창세전에 정해져 있었다면 그것은 톱니바퀴같이 돌아가는 운명론이 아니던가요?"라고 다시 반문합니다.
쳇바퀴처럼 질문과 반박이 이어지는 모순(창과 방패)과도 같은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의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논쟁은 1618년, 독일에서 열린 도트종교회의(Synod of Dort)에서 예정론을 신봉하는 칼빈주의자들이 자유의지론을 주장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을 정죄하고 Van Oldenbarnevelt에게 사형, Hugo Grotius에게는 종신형 판결을 내리고, 자유의지론을 주장하는 100여명의 교역자를 파직, 독일로부터 추방하고, 자유의지론을 주장하는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들에게는 무거운 벌금을 부과함으로써 자유의지론은 이단으로 정죄하여 처단하는 극단적 조치를 야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도트종교회의에서 캘빈장로교파(Calvinist)에 의하여 “튤립-TULIP"이라고 알려진 예정론교리가 선언되는데, TULIP이라 함은 T: Total Depravity (인간의 전적타락), U: Unconditional Election (하나님의 일방적 무조건적 선택), L: Limited Atonement (예정된 사람만을 위한 예수님의 속죄), I: Irresistible Grace (하나님의 전적인, 거부할 수 없는 은혜), P: Perseverance of the Saints (성도들의 견인, 성도들을 이끌어 마침내 구원이 이루게 하고야 마시는 하나님), 다섯 개의 머리글자입니다.

특히 이 장로교의 TULIP 교리 중 “L", 곧 제한속죄론은 예수님이 구원받기로 정해진 사람들만을 위하여 피를 흘려주셨다는, 구원의 범위와 심지어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 같이 보이는 극단적인 교리입니다.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의 논쟁은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 맞으면 뭘 하겠다는 것입니까?
진리를 해치는 적그리스도의 미혹과 거짓가르침이라면 목숨을 걸고 진리를 지키며 이단을 배격해야 하겠지만 사실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의 논쟁은 사실 구원과는 별 상관없는 논쟁입니다.
사도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언제나 ‘나 같은 죄인의 괴수 바울이 창세전에 택하심을 입어 복음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예정론과 ‘그러므로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는 자유의지론에 입각한 사명선언이 함께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만일 예정론이 극단적 예정론(Supra-Labsarian)으로 치닫는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이미 창세전에 모든 것을 정해 놓으시고, 심지어 언제 어디에서 일어날 교통사고까지, 오늘 내가 무엇을 먹고 무슨 옷을 입고 누굴 만나 무슨 말을 할 것인가까지 다 아시고 예정해 놓으셨다, 어차피 구원받을 자는 구원 받을 것이고 구원 받지 못 할 자들은 아무리 전도해봐야 소용없다, 모세오경의 히브리어 글자들을 가로, 세로 또는 대각선으로 맞춰보면 언제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인가도 이미 예언되어 있다는 등의 황당한 주장까지도 가능하게 되고,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하고 전심으로 사랑할 수조차 없는, 이미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운명에 따라 수 천 년 인류역사의 드라마를 정교하게 펼쳐가는 조작된 인공지능을 갖춘 로봇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 세 분)가 진리인 것처럼 예정론도 옳고 자유의지론도 옳습니다.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의 논쟁은 인간의 좁은 머리로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구원의 역사를 놓고 서로 옳다고 다투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동시에 세 분이신 삼위일체의 신비를 우리 인간의 머리로 풀어내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예정이냐, 자유의지냐를 어느 한 편으로 해석,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장로교에서 칼비니즘을 절대적인 진리로 놓고 알미니즘을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듯 한 행태를 보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정론이 옳습니다.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진노의 자식이던 우리를, 전적으로 타락하여 스스로는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예정하시지 아니하셨더라면, 그리고 강권적으로 이끌지 아니하셨다면, 저나 여러분이나 제 발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구원에 이르렀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지론도 옳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회개와 사랑이 이미 정해진 각본이나 프로그램된 운명에 의한 것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사랑이 미리 정해진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도 값진 참 사랑도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조작된 사랑을 받으시려고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귀한 것은 우리에게서 자발적으로 솟아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참된 믿음과 진실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그 한없는 사랑(예정)에 응답하여 울며(자유의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한 분이시면서 세 분이실 때 참 하나님, 우리의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듯,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이 조화될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진정한 구원과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도 옮길 수 없는 돌을 만드실 수 있느냐?"라는 문제처럼, 예정이냐, 자유의지냐 하는 이 문제는 처음부터 정답과 정답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구원님께 답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족한 대답이더라도 책망하지는 마세요옹.  ^^

어쿠,
1번 질문만으로도 이렇게 길어졌군요. 다음 질문은 다른 글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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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를 위해 죽으셨다 하시는가?>

지금 생각해보면 좀 유치하고 우습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경험으로 볼 때 초신자들에게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의문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나이 들어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처음 예수 믿고 나서 제게 두 가지 의문이 생겼더랬습니다.
그 한 가지는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다 지시고 죽으셨다면 계속 죽어 계셔야지 어째서 부활하셨는가? 예수님이 도로 살아나셨다면 죄인들이 도로 죽어야 하는 거 아닌가?”였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죽으셨는데 어째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하시는가?”였습니다.
존귀하신 성자하나님이신 예수님 한 분의 죽으심이 만인의 죄를 대속하였다는 것은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수 십 억 인구 중 하나일 뿐인 나를 위하여 그것도 2,000년 전에 죽어 주셨다는 것은 도무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의문에 대하여 혼자서 참 많이 생각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저는 그렇게 깨달았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첫 번째 의문에 관하여는 그렇습니다.
우리가 용서 받으려면 예수님이 계속 죽어 계셔야 한다는 생각은 수학적 사고였습니다.
이를테면 “맞바꾸기, 가감셈법”인 셈이지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셨다는 단순한 셈법 말입니다.

그 단순한 수학적 생각이 잘못 된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이 계속 죽어계셔야만 우리가 그 대가로 안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죄와 사망, 저주의 권세가 계속되는 경우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죄와 사망, 저주를 깨부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박살이 난 죄와 사망의 권세가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 붙잡아둘 수가 없는 것이고, 예수님의 부활은 당연한 것이지요.

또한 예수님의 화목제물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과 저주를 무마하거나 사단에게 제공되는 제물이 아니라(사단에게 제공된 제물이라고 주장하고 가르치는 이단도 있더이다만), 죄인이 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요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화목제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계속 진노하고 계셨다면 우리의 죄도 해결될 수 없고, 예수님도 살아나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제물을 받으시고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시고 진노를 거두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실 수밖에 없고 예수님의 부활은 그 제사가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의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위에 말씀드린 대로 두 번째 의문은 주님은 이천년 전에 한 번 죽으셨는데, 어째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역시 납득하기 어려운 의문이었습니다.
어떻게 단 한 번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수십억 인류를 도매금으로 한꺼번에 통째로 구원하신다는 거냐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초월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아니, 시간과 공간을 지으신 창조주이요 주관하시는 전능자이십니다.
주님께는 시간과 공간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기보다 시간과 공간이 다 그 손 안에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지요. 인간의 역사는 기껏 수 천 년인데 하나님은 텅 빈 우주공간에서 수 백 억년 동안 어떻게 기다리셨을까?
그러나 이 역시 하나님을 시간의 틀 안에 집어넣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는 시간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백억년의 풍성한 시간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지요.
태양을 만드시고 지구를 만드시고 고생대, 중생대, 감브리아기, 쥬라기, 신생대........,
그 아득한 시간을 하나님은 필요하신대로 사용하신 거지요.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하십니다.
그것은 아무리 긴 시간이나 짧은 시간, 아무리 크거나 작은 공간이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동시에 지구상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 수 있고 응답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나 현재, 미래가 주님께는 다 “현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 현재형 시제로 “I am"이라고 스스로를 밝히신 것입니다.

주님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어버리거나 기억이 희미해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 결코 되돌아갈 수 없지만 주님은 언제나 되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어느 때이든지 모든 시간이 주님께는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항상 현재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의 십자가 아래 엎드려 나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였을 때 주님은 다시금 생생하게 2000년 전의 ‘현재’로 돌아가 그 십자가의 고통을, 하나도 줄이거나 빼지 아니하고, 기억하셨을 것입니다. 현재형이신 주님은 그 때로 다시 돌아가 그 쓰라린 고통을 다시금 경험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산고(産苦)보다도 더 혹독한 고통일 것입니다.
매번 한 사람의 죄인이 돌아올 때마다 가슴을 찢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그 고통과 그 거친 십자가의 못에 살을 찢는 참혹한 주님의 고통은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너를 위하여 죽었노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더기로 한꺼번에 구원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십자가의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낳으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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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구원을 받으셨나요?
구원을 받으셨다고요? 축하합니다.
그런데, 구원이 무슨 물건입니까?
구원이 주고받는 것이냐, 이 말입니다.

출장 다녀온 아빠가 가져오신 선물에만 정신이 팔려서 아빠를 잊어버리는 아이들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빠이지 선물이 아닙니다.
구원은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구원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으로 일어나고 나타나는 결과적인 일입니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구원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앞서 보내어 가나안 일곱 족속을 다 쫓아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목이 곧은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함께 하셨다가는 순식간에 진멸하게 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지금 모세가 간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곧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가시지 않으시면 가나안 땅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아빠가 떠나신다면 그까짓 선물꾸러미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구원,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직 붙잡아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신앙, 우리가 평생 가야 하는 길은 주님과의 동행이요 주님 계신 곳에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까? 예, 들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해달라고, 그리 아니하시려거든 차라리 저의 이름을 책에서 지워달라고 목숨을 내어놓고 간구한 기도도 아니 들으셨던 하나님이 “하나님, 저와, 또 이 백성들과 동행해 주십시오. 함께 가지 않으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십시오.” 하고 요청한 기도는 들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우리의 기도도 무엇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 하심, 주님의 동행하심을 구하는 기도이어야 할 것입니다.
선물을 향한 기도가 아니라 아버지를 향한 기도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누구든지 그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셨고 누구든지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통함이나 성공이나 부귀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동행, 함께 하심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것을 보십시오.
다른 기도는 몰라도 하나님을 구하는 기도는 반드시 들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모세의 이상한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냐, 내가 함께 가겠다.”고 말씀하셨는데도 “하나님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하고 표적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모세는 하나님께 표적을 구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시고, 모세의 손이 품안에서 문둥병이 발하였다가 깨끗이 낫는 표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기드온은 양털뭉치에 이슬이 젖도록 해달라고 했다가 마르도록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인간은 얼마나 믿음 약하고 걱정근심 염려가 많으며 흔들리는 갈대 같은 존재들인지요?
예수님께서도 표적과 기사를 구하는 악한 세대, 도무지 표적과 기사가 없으면 믿지 못 하는 연약한 믿음을 꾸지람하셨습니다.
모세도 하나님께서 표적을 보여주시고 곁에서 붙잡아 주셔야 비로소 안심하는 연약한 인간이었던 모양입니다.

아무런 표적이나 기사가 없이 꿋꿋하게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은 없는가 봅니다.
인간이 그토록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표적과 기사를 허락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도 도마에게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하셨습니다.
보지 아니하고 믿는 진실로 굳센 믿음을 가진 자를 하나님은 더욱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출33: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선한 형상들과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긍휼이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증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눈에 아무것도 아니 보이고 우리 귀에 아무것도 아니 들려도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그렇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모세에게 반석에 서 있으라 명하셨습니다.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영광 앞에 무사할 수 있는 죄인은 없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세를 반석 틈에 두시고 손으로 덮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영광, 곧 하나님의 얼굴은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등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등만 보게 될 것입니다.
지나고 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인도하심이었다고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석의 틈, 곧 그 몸을 상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두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지켜주실 것을 오늘 성경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를 반석의 틈, 곧 예수님 안에 두고서 말입니다.
그 반석 틈에서 우리에게 날마다 체험하는 우리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와 인도하심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거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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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우주여행을 마치며
 
(인생은 8 밀리미터가 아니다.)


이제 어두컴컴 대장간에서 얼렁뚱땅 시작하여 출발한 대장쟁이 우주비행선이 종착역에 도착하고 작별을 고할 때가 온 것 같다.
우리는 그 동안 글로, 그리고 상상과 생각으로이긴 하지만 경부고속도로에서 우주선을 발사하고 태양계를 날고 우주공간을 여행하였다.
인체의 신비도 살펴보았고 원자의 세계도 들여다보았다.
아득한 시공도 날아보았다.
얼렁뚱땅 두들긴 대장쟁이 우주선이 몹시도 어설프긴 하였지만.

누구든지 우주여행이야기는 좋아한다.
왜 우주이야기가 재미있을까?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영원을 사모하는 본성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것은 인간이 죽어 없어지는 8 밀리미터 짜리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때 인류는 과학이 발달하면 하나님의 존재의 허구가 드러나고 종교가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던 적이 있다.
만일 하나님이 창조주가 아니었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하여 어떻게 해서든 과학탐구를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은 과학탐구를 막지 않으셨다.
그런데 인간들이 살피고 연구하고 쪼개고 부술수록 창조주 하나님의 신비만이 만물 속에 더욱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세상은 과학이 발달할수록 비과학적이 되어가고 있다. 과학기술문명이 꽃을 피우는 21세기에 들어와 온 세계가 정보통신망으로 하나가 되었어도 오히려 현대인들은 과학과 물질문명 속에서 더욱 불안에 떨며 알지 못 하는 영적세계에 의지하려고 한다.
점성술과 운명철학, 요가와 명상, 정신세계와 환생이야기에다 외계인, 우주괴담까지.......,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점과 사주팔자로 자신의 운명을 묻고 ‘오늘의 운세’를 읽는가 하면, 연예인들이 자살을 하고 신이 내려 작두 위를 뛰어다니는 무당이 되는 이해할 수 없는 영적세계의 현상을 보면서도 창조주 하나님은 외면하고 우상과 미신과 귀신은 좇는 것도 희한한 일이다.

누가 내게 왜 기독교를 믿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것이 진리요 사실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진리와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든 불교든 뭐든 뭣 하러 믿는가?
그것은 가식이요 거짓일 뿐이다.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그저 수양이나 하고 마음의 위안을 얻는 행위일 뿐이다.

만일 일평생 예수 믿고 죽었는데, 죽고 보니 영생도, 천국과 지옥도, 하나님도 없더라 한다면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있을까?
“속았구나. 이럴 줄 알았더라면 더 먹고 마시고 즐기기라도 할 걸......,” 그 때 가서 하나님을 욕하고 가슴을 치며 후회해봐야 소용없을 것이다. 하긴 칠 가슴도 없겠지만.

그러나 기독교가 진리이고 사실이라면 우리 인간에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다.
믿으면 영원히 살 것이요 믿지 않으면 영원히 죽는 수밖에.

이 책의 서두에 경부고속도로에 깔린 8 밀리미터, 그것이 인생의 길이라고 계산한 것은 지구의 나이 45억년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
인간이 우주의 티끌 같은 태양계에 속한 지구 위에 붙은 먼지 같은 존재라는 것도 아득한 우주공간을 바라보며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주의 탄생과 종말, 동그라미가 100개씩이나 붙어서 읽을 수조차 없는 숫자의 영원의 시간 앞에, 끝없는 우주공간 속에서 먼지 하나도 못 되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엇이라 해야 옳단 말인가?  

결국은 텅 빈 우주가 동그라미 100 개씩이나 되는 까마득한 시간을 공허 속에 존재해야 한다면, 80년 살다 갈 인간들이나 기껏 수천 년 존재하다 사라질 인류문명이 무슨 의미 있으며 우주와 시간과 공간을 논하는 것은 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또 하나님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성경 첫머리는 하나님이 천지(하늘들과 땅)를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다. 성경의 진실성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성경의 이 첫머리 말씀으로부터 시작한다. 만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거짓이라면 성경의 모든 말씀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과 영원한 생명이나 천국은 모두 거짓일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지으시고 코로 생기를 불어넣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하여 지으셨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죽어 썩어 없어지는 존재로 만들지 아니하셨다.
죽어 없어질 존재는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생기는 인간의 육신이 흙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중에서)

그러나 죄인 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을 떠나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엎드리기 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진리를 찾아 울며 헤매다 마침내 처절하게 가시나무새 울음의 애곡을 남기고 슬프게 죽어가는 것을 아름답다고 여긴다.
하나님께 빌어 영생을 얻기 보다는 끝없이 환생하면서 수양하고 깨달아 마침내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훨씬 멋지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그것을 영혼의 자유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는 절대로 자유에 이르지 못 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창조주로만 채울 수 있는 빈 공간을 사람의 영혼 속에 두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결코 만족함을 얻을 수 없다.
모든 인생의 주(主)는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반드시 계셔야 한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인간의 생명은 헛것이며 우주의 결국은 멸망이요 소멸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소멸될 것이기 때문에 선과 악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며 사랑과 살인조차 그 결과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모든 존재는 헛되고 영원의 시공간 속에 아무 의미 없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계셔야 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여행하면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지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체로 가득한 자연, 오묘하고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인체, 눈, 근육, 심장.......
우주물리학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창조가 없이는 결코 설명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너무나 쉽게 빅뱅이라고 말하지만 이 보다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는가?
어떻게 이 헤아릴 수 없는 신비의 세계가 빅뱅으로 저절로 생긴단 말인가?

우리는 그 작은 원자의 구조도 살펴보았다.
원자 안에 존재하는 놀라운 질서와 구조도 알아보았다.
우연히 빅뱅으로 우주가 생겨났다고?
빅뱅이 된다고 수많은 종류의 소립자들과 양성자와 중성자와 광속으로 달리는 전자들과 전자껍질들과 일사불란한 질서와 운행이 저절로 생긴단 말인가?

빅뱅으로 저절로 생겼다면, 창조주 없이 저절로 생겨났다면, 우주만유의 모든 물질들은 제멋대로여야 옳다.
중력이나 인력, 통일장 같은 우주물리학의 법칙들이 제 멋대로여야 옳다.
그러나 보라!
우주 가득한 일사불란한 우주물리학의 법칙들과 운행의 파노라마를.
우주를 바라보면서 우연을 외치는 자는 양심이 없는 자다.
광활한 우주, 이 놀라운 세계를 바라보면서 두려움에 떨지 않는 자는 영혼이 없는 자다.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을 영원의 시공간 속에 비추어보며 창조주를 생각해 보지 않는 자는 존재의 가치조차 모르는 자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창조주를 사칭하는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몰아 우주 밖으로 내던져버리고 머리를 풀고 애곡하며 영원한 멸망과 망각 속으로 내려가든지.

대장쟁이가 글의 말미에서 믿음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각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하여 하나님을 증명할 생각도 없다.
하나님은 증명의 대상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누구에 의하여 증명되실 분도 아니다.
대장쟁이가 이 보잘것없는 글로 하나님을 증명하려 했다면 그것도 우스꽝스러운 일이요 가증스러운 신성모독일 수 있다.
하나님은 오직 믿음을 통하여만 만날 수 있는 분이시다.
다만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면 대장쟁이는 더 바랄 게 없다.

다만 글을 마치기 전에 이 이야기는 하고 싶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은 너무나 단순하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의 근원이요 출발이다.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다.
하나님께서 그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용서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온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내미신 화해의 손이요 피의 손이다. 아들의 피 묻은 그 손을 잡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요 뿌리치면 영원한 진노에 빠질 것이다.
영원의 시간을 하나님 없는 곳, 곧 지옥에서 보내야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일이겠는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셨다.
영생(永生, Eternal Life)이 무엇인가?
천년, 만년 오래 사는 것이 영생인가?
천만년, 억년, 백억 년 까마득히 오래 사는 것이 영생인가?
아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끝이 있다면 그것은 영생이 아니다.
그 뒤에 기다리는 영원한 멸망의 시간이 더 길기 때문이다.
마지막이 기다리고 있다면 아무리 긴 시간도 영생이 아니다.
영생은 말 그대로 영원한 생명이다.
그것은 오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함으로만 가능하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시간과 공간을 지으신 하나님, 그 분과 함께 하는 것이, 그 분과 영원히 함께 있는 것이 영생이다.
영생이란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


(재탕 글)
생각해보자.
하나님은 왜 끝없는 우주를 만드셨을까?
태양계만 지어도 괜찮고 은하계 정도까지만 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왜 저리도 광대한 우주를 지으셨을까?
밤하늘 별들로 지구의 하늘을 장식할 목적이라면 2,000억의 항성, 1,000억의 은하와 성운들, 700해의 별은 너무 많고 너무 비효율적이고 너무 큰 낭비다.

대장쟁이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첫째, 그것은 하나님의 무변광대하심이다.
하나님은 끝없는 우주공간을 허공에 펼치셔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원수라도 감히 넘볼 수 없도록, 그 끝을 헤아릴 엄두조차 낼 수 없도록 광활한 우주를 통하여 그 능력과 신성과 엄위를 펼치신 것이다.

둘째, 그 날이 오면 온 우주를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으로, 하나님의 자녀들로 가득하게 하기 위하여 만드셨을 것이다.
그 날이 되면 저 광활한 우주공간의 수많은 별들, 은하와 성운들은 구원받은 후사들에게 나누어 주시려고 상속의 선물로 예비하신 것일 것이다.

주님은 누가복음에서 말씀하셨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시고” (누가복음 19: 17)
고을이라니, 마지막 심판 때 무슨 고을이 이 땅에 남으며, 고을을 다스린다니, 우리가 무슨 고을 원님이라도 된단 말인가?

주님이 말씀하시는 고을이란 은하계, 성운인지도 모른다.
우주공간에 은하, 성운(Galaxy)들이 얼마나 많은가?
천억 개!
주님은 착한 종에게 은하계 다섯 개씩, 성운 열 개씩 나누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인지도 모른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로마서 8:19)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다니엘 12:3)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세기 15:5)

위의 성구들을 읽어보라.
하나님은 왜 하늘의 별을 말씀하시는 것일까?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니, 무슨 뜻인가?
왜 궁창의 빛, 영원히 비취는 별을 말씀하시는가?

하나님은 하늘의 별들을 가리키시며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셨다.
아브라함은 이를 어떻게 이해하였을까?
아브라함은 아마 자신의 육신의 후손들이 별처럼 번성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 “후손”이 단수(單數)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갈라디아서 3:16)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 가득하다?
그 살과 피, 그 생명이 하늘에 가득하게 된다?
결국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그 생명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늘에 가득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된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 신앙을 물질세계를 빼버리고 영적인 세계로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을 영적인 하나님으로만 제한하여 생각하려 한다.
구원을 받아도 어디 영적인 세계 어느 한 구석에 가서 머리에 도넛 구름 하나씩 얹어가지고 훨훨 날아다니는 천국을 상상한다.
하나님께서 천지, 곧 물질세계를 지으셨다고 말씀하시는데도 말이다.

하나님은 영적세계만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물질의 세계를 포함한 우주만유의 하나님이시다.
저 광활한 우주공간의 헤아릴 수 없는 별들........
저 우주만유가 하나님의 지으신 것이란 말이다!

하나님은 저 수많은 별들, 성운들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상속되는 것인데 우리를 살리시려고 그리스도를 생명과 함께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또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백만장자, 억만장자의 상속자가 되어도 굉장한데 하나님의 상속자, 후사들이라면 그 상속은 얼마나 굉장해야 할 것인가?

그날이 되면 우리는 저 끝 간 데 모를 우주공간, 우주만유를 상속으로 받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곧 시공을 초월하며, 광속(光速)의 한계를 초월하며, 하나님과 같이 되어 실질적으로 우주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도 받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끝없는 우주공간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후사, 하나님의 아들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리하여 온 우주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우리는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순간이동을 하면서 우주공간을 마음껏 누비고 다닐 것이다.
우리 그 때 거기서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 해도 신나지 않은가?
이 놀라운 소망과 축복이 우리 모두의 것이면 좋겠다.

인생은 8 밀리미터가 아니다.






지난 두 달 반 동안 49편에 걸쳐 올린 저의 부족한 글을 애독하시고 격려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2011. 8. 21 새벽, 글을 마치며, 대장쟁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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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대장쟁이의 엉터리 새 학설(學說)

경부고속도로 길바닥에 깔린 8 밀리미터에서 출발하여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을까’와 ‘우주의 종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까지 왔으니 대장쟁이의 이야기도 이제 종착역에 도착하고 대충 끝난 셈이다.
우주와 생명, 영원의 이야기에 끝이 어디 있겠는가만 그렇다고 빈약한 지식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도 구차한 일이리라.
그런데 이야기를 마치기 전에 꼭 해야 할 것 같은 한 가지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우주를 휘감은 보이지 않는 힘”, 곧 중력에 관한 것이다.
끝으로 그 이야기를 하고서 대장쟁이의 시리즈를 마쳐야 할 것 같다.

아인슈타인이 불세출의 천재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는 상대성이론으로 현대물리학의 새 장(章)을 열었고 원자력의 시대를 연 분이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을 ‘공간의 휨’으로 설명하였다는 것도 앞에서 우리는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인들 우주의 비밀을 어찌 다 알 수 있으랴, 그도 한 사람 인간인 바에야.

1) 중력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주를 휘감은 보이지 않는 힘”, 중력은 오늘날 현대물리학에서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쌍벽을 이룬 이론 중 1913년에 발표된 핀란드의 물리학자 놀드스트룀(Gunnar Nordstrom, 1881~1923)의 중력이론이 있었다. 이 이론은 ‘등가원리’나 ‘빛의 휨’에 있어서는 아인슈타인의 중력장이론과 달랐으나 중력도 “빛의 속도로 전달되는 힘”이라고 보았다.

아무런 매개도 없고 매인 줄도 없이 끌어당기는 힘, 우주를 휘감은 보이지 않는 힘, 우리를 지구에 붙잡아맨 힘, 지구가 무려 1억 5천만 킬로미터의 거리에서 걸음아 나 살려라, 음속의 100배에 가까운 속도로 태양을 돌게 하는 힘, 은하계 중심까지 까마득한 거의 3만 광년의 거리를 두고 음속의 1천배가 넘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태양을 달리게 하는 힘, 그 중력이 과연 놀드스트룀의 주장대로 빛의 속도로 달리는 힘일까?
도대체 중력의 정체는 무엇일까?

또한 현대물리학에서 중력과  전기자기력의 정체를 ‘보존’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원자를 이루는 소립자 이야기 편에서 여러분이 읽은 기억이 나겠지만 물질을 이루는 소립자는 페르미온이고 그 중간에서 매개하는 입자는 ‘보존’이다. 즉 ‘보존’은 물질을 이루지도 않고 질량도 없지만 양자, 중성자를 이루는 결합의 힘을 제공하는 소립자인데, 전기자기력이나 중력도 이 소립자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물질, 천체에서 나오는 이 ‘보존’이 중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2) 중력파(重力波)를 찾아라.

한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중력장에 의하여 빛이 휘어지고, 따라서 중력장도 빛의 속도로 진행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또한 전하를 가지는 전자가 진동할 때 전자기파가 발생하여 빛의 속도로 진행한다.
그렇다면 만일 엄청난 중력을 가진 별이 갑자기 생겨나거나, 반대로 갑자기 없어지거나, 또는 진동한다면 중력의 파동이 만들어질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추론에 의하여 우주물리과학자들은 지금 우주공간으로부터 날아오는 중력파(重力波)를 찾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도 중력파를 찾아내는데 성공하지 못 하고 있다.

그러나 1974년 Joseph Taylor와 Russell Hulse가 펄사(강력한 X선을 뿜어내는 중성자별) 쌍성계인 PSR B1913-16를 오랫동안 세밀히 관측한 결과 궤도 변화가 측정되었고 그 궤도변화의 양상이 중력파에 의한 궤도 에너지 손실량이 예측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표한 후 과학자들은 중력파가 실제로 존재하며 검출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오늘도 우주로부터 날아오는 중력파검출에 나서고 있다.
Taylor와 Hulse는 이 펄사 쌍성계 발견의 공로로 1994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중력파를 직접 검출하기 위해서는 이론적으로 시공간의 진동을 측정해야 한다. 그러나 중력파의 형태가 어떤지, 그 파동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알지를 못 한다.
또한 만일 중력파를 검출한다 해도 천체물리학적 파원에 의한 중력파는 파동의 진폭이 10⁻²⁰ (1해분의 1) 이하로 극히 작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1해분의 1이라는 극히 미세한 크기의 파동이라면 현대과학기술로 중력파를 검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빛의 간섭현상을 이용하여 중력파를 측정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LIGO(Laser Interferometer Gravitational wave Observatory)라는 길이가 4 킬로미터나 되는 중력파 검출기를 만들어놓고, 만일 초신성이 폭발하면서 중성자별이나 블랙홀을 만들 때 강한 중력파가 발생하고 이를 검출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오늘도 우주를 관측하고 있다.

만일 누군가가 우주에서 날아오는 중력파를 검출해내는 데 성공한다면 내년도 노벨물리학상은 틀림없이 그의 차지일 것이다.
여러분도 혹시 도전해 보실 생각은 없으신지?

3) 중력전달입자 보존과 중력파는 과연 존재하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중력이 과연 힘을 전달하는 ‘보존’입자의 작용일까?
모든 천체가 자신의 질량에 비례하여 끊임없이 중력보존이라는 소립자들을 내뿜고 그 보존들이 작용하여 서로를 끌어당기는 일종의 결합력으로 중력이 만들어지는 것일까?
이 우주는 천체들이 경쟁적으로 내뿜는, 광속의 속도로 달리는 보존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일까?
만일 중력이 보존입자의 작용이라면 개기일식과 개기월식 때 지구와 달에 미치는 태양의 중력보존의 영향이 없을 수 있겠는가?

과연 중력파는 존재하는가?
지금까지는 없던 거대한 질량의 천체가 갑자기 생겨난다면 갑자기 생겨난 중력파가 밀려올 수도 있을지 모른다.
거대한 중력을 가진 천체가 어떤 이유로 진동을 일으킨다면 중력의 파동이 밀려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빅뱅 이래 우주공간에서 갑자기 생겨나거나 사라지는 천체나 중력도 있을 수 없고, 거대한 질량을 가지는 천체가 크게 흔들리거나 진동을 일으켜 중력의 출렁임이나 파동을 만들어낸다는 일도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앞서 “18. 우주를 휘감은 보이지 않는 힘”에서 이 대장쟁이는 중력(인력)은 차단도 굴절도 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만일 이러한 중력이 보존의 작용이라면 보존은 모든 천체(물체)로부터 지속적으로 분출되어야 하고, 그 보존의 수는 무한해야 하고, 빛보다 오히려 더 직진해야 하고, 모든 물체를 거침없이 관통하면서 중력을 작용시키며 우주를 지배해야 할 것이다.

중력전달입자 보존, 중력파의 검출, 우주물리학자도 아닌 이 대장쟁이가 쟁쟁한 우주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이론과 주장을 놓고 뭐라 할 수 있겠는가마는, 어쨌든 이 대장쟁이가 보기에는 도무지 말이 안 된다.

4) 반드시 보여야만 하는가?

이제 이 대장쟁이, 엉터리 물리학 썰(說)을 좀 풀어보자.
엉터리라고 비웃음 받던 것이 지동설과 같이 진리와 진실로 입증된 사례도 있으니까 웃지는 마시고.......

성경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면 이 세상은 보이는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우주만유에는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함께 존재한다. (골로새서 3:16)
생명은 보이지 않는다. 영혼도 보이지 않는다.
무당으로 하여금 작두 위를 뛰게 하는 귀신도 보이지 않는다.
천사도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보이지 아니한다 하여 없는가?

과학은 보이는 것만을 다루는 학문이다. 자연계의 모든 현상을 반드시 검출하고 입증해야만 하는 학문이다. 그것이 과학의 본질이요 과학을 과학으로 만들고 과학을 과학답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모르지만 그것이 과학의 한계이다.

중력을 전달하는 보존이라니, 그것은 그것이 없이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물리학적 현상을 해결하기 위하여 물리학자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소립자 아니던가?
물질을 한없이 쪼개나간다 할지라도 그 비밀이 다 밝혀질 수 없다는 것이 물리학자들이 만들어낸 “보존”과 “초끈”이라는 검출되지 아니하는 가상입자로 나타나고 있지 아니한가?

스위스 제네바에 설치한 100억 불짜리 거대강입자가속기를 설치한 목적의 하나가 힉스 입자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양성자를 광속의 99.999991%로 가속하여 충돌시킨다 해도 물질에 질량을 부여하고는 사라져버렸다는 ‘귀신이 곡할’ 힉스 입자가 확인될 것인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 하고 있다.
왜? 그 힉스입자 역시 하나의 가상의 입자가 아니던가?
질량을 전해주고는 사라지다니! 생각해 보면 황당한 이론이 아닌가?
그런데 이 황당한 이론이 과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되고 있는 것이다.  

과학에게 과학 되기를 포기하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제 과학은 벅찬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젠 과학이 보이지 아니하는 진실의 단계로 올라서야 하는 때가 되지 않았을까?
보존의 검출이나 시공간의 문제와 중력의 문제는 과학의 범위를 더 확대하여 “진리”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자 할 때 비로소 조금이나마 풀릴 수 있는 비밀이 아닐까?

현대물리학자들이 인정하는 바 진실 하나는 시간과 공간이 모든 존재의 바탕이라는 사실이다.
시간과 공간이 없으면 존재는 존재할 수가 없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물리학이여, 시간과 공간으로 답을 찾아보자.
창조주가 창조하므로 시작된 시간과 공간 말이다.
왜 과학은 시공간이 존재의 근거라고 하면서 그 출발에 대하여는 다른 견해를 고수하는가?
시간과 공간이 원래부터 존재했다고 한다면, 시간과 공간이 피조물이 아닌, 영원 전부터 존재해온 것이라면 빅뱅이 어떻게 한 점에서 압축된 상태로 준비되고 일시에 폭발로 시작될 수 있었는지는 절대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빅뱅에 시간과 공간의 “창조”를 집어넣으면 자연스레 그 시작이 설명된다.

그건 안 된다고?
그럼 도무지 설명이 아니 된다 하여 가상의 입자를 만들고 가상의 입자로 질량과 중력까지 설명하면서 있지도 않은 것들을 검출해내려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5) 시공간과 빛

빛도 그렇다.
빛은 초속 30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진행한다.
이젠 초등학생도 다 아는 상식이 된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도 우주 저 편 끝을 130억년이나 걸려서 보실까?
우주 저 편에서 이미 130억 년 전에 일어난 일을 하나님은 빛이 도달할 때에야 비로소 보시게 될까?
그렇다면 저 우주 한 구석에서 사단과 그 일당이 숨어서 몇 십억 동안 아무 제재도 받지 아니하고 무엇인가를 실컷 저지른 다음 그 빛이 하나님께 도달하기 전에 도망가 버리면 하나님은 닭 쫓던 뭐 같이 되어버리실까?

하나님께 빛이란 무엇일까?
하나님께 빛이란 우주만유를 즉시에 다 보시는 것이요 우주만유를 주장하고 다스리시는 것일 것이다. 빛이 그러하려면 빛이 겨우 광속이어서는 안 된다. 빛은 발생과 동시에 우주 어디에서나 그 존재와 현상을 즉시 하나님께 나타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빛은 속도의 제한이 없어야 한다.

그럼 보이는 물질세계에 속한 우리가 보는 빛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빛의 세계에 물질이 뿌리는 광자가 나타내는 빛이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 ‘잃어버린 성배’에 나오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보이지 않는 다리가 인디아니 존스가 모래를 뿌리니까 나타난 것.
우리가 보는 빛은 그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가 보는 그 빛은 물질세계라는 제한이 있다.
그래서 1초에 30만 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주 저편 공간에 이르려면 100억년을 달려야 한다.
어떤가?
대장쟁이의 엉터리 새 학설이 그럴듯 하지 않은가?

6) 중력의 비밀을 풀어라.

그렇다면 중력에 관한 대장쟁이의 엉터리 새 학설은 무엇인가?
이 엉터리 학자(?) 대장쟁이는 이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살펴보면서 중력이란 공간이 생겨남으로써 생겨난 것이 아니냐고 썰을 푼 바 있다.
그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중력과 인력이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매인 줄도 없고 매개물질도 없이 우주를 휘감은 그 무서운 힘이 달리 어떻게 설명될 수 잇단 말인가?

그것은 분명하다.
인력과 중력은 보존 따위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중력파(重力波)로 퍼져나가는 것도 아니다.
빛의 속도로 달리는 것도 아니다.
우주만유에게서 나타나는 “자기위치보고”이다.
모든 존재가 우주의 어디에 있든지 그 중력과 인력으로 실시간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빅뱅 때 부여된 공간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공간이 쐐기처럼 모든 물질 사이를 뜨게 한 것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말씀에 의하여 만유를 붙잡고 있는 공간으로 인하여 있는 것이다.

대장쟁이는 물리학자들에게 제안하고 싶다.
중력보존이나 빛의 속도로 전파되는 중력파를 검출하겠다고 애쓰지 말고 중력선(重力線)과 중력의 속도를 다시 연구해보면 좋겠다.
태양빛이 지구에 도달하는 시간은 8분 20초이다.
지구는 자전까지 하므로 우리가 보는 태양빛은 8분 20초 전에 발사된 빛을 8분 20초 뒤의 이동된 위치에서 보게 된다.
중력이 빛과 같은 속도로 전달되는가, 혹은 즉각적, 지속적으로 작용하는가를 개기일식이나 개기월식 같은 때에 확인할 방법은 없을까?

그러나 중력과 인력이라는 것이 그렇다.
힘이란 빛처럼 개별적으로 직진하는 것이 아니라 간섭하고 한 데 모이고 합쳐져 벡터(Vector)로 작용할 텐데 그걸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라나?

아무튼 과학자들이여, 시간과 공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과연 영원 전부터 존재해온 우주만유의 지배자인지, 아니면 피조물인지 알아내기 위하여 연구할 용의는 없는가?
시간과 공간, 빛과 중력의 관계를 새로운 시각에서 연구하고 풀어서 진실로 “만물 속에 나타나는 것”이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인지 아닌지 밝혀낼 의지는 없는가?
그건 과학이 아니고 신학이라서 못 하겠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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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VOu5bTBhdDM

http://i2.media.daumcdn.net/photo-media/201206/06/yonhap/20120606110609045.jpg

한국시각으로 6월 6일 금성일식이 관측되었다지요.
아침 7시 9분부터 시작하여 한낮인 오후 1시 49분까지 …..
그런데 같은 시각 미국에서는 밤이라 관측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금성일식은 105년 뒤인 2117년 12월 11일이라니까  금성일식을 보려면 그 때까지 살아야겠지요?

금성일식을 촬영한 여러 개의 사진들이 보도되고 있는데, 그 중 하나인 이 사진을 보면 이글거리는 태양을 지나는 새까만 콩알같은 금성을 볼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 서울 중구에서 관측된 금성일식의 동영상도 떴군요.

그런데 금성이 저렇게도 작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실은 훨씬 더 작지요.
금성은 지구와 크기가 엇비슷합니다. 지구보다 조금 작지요. 지구지름이  12,700km인데 금성지름은 12,100 km이니까요.
금성은  태양으로부터  약 1억 800만 킬로미터 떨어진 공전궤도를  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금성의 위치가 태양쪽 보다 지구쪽으로 훨씬 가까운데도 저렇게 작은 콩알 같이 작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만일 금성이 태양에 바짝 붙어있다면 그 크기(지름)가 3분의 1도 안 되게 작게 보일 것입니다.

태양이 얼마나 크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태양의 지름은 지구의 109배가 됩니다.
그러니까 지구와 금성의 위치를 바꾸어서 생각한다면, 만일 여기가 금성이고 금성에서 지구를 촬영했다고 치면 지구가 저렇게 똑같이 작은 콩알같을 것입니다. 또 지구를 태양의 위치에 갖다 놓는다면 지구도 지금 촬영된 금성지름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쌀알같이 작게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화성의 위치에 가서 태양을 지나는 지구를 관측한다면 지구는 저 사진과 비슷한 콩알같은 검은 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성일식을 통하여 보는 금성의 모습은 사실 우리 지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 위에서 살고 있습니다.

출처: USA 아멘넷/대장쟁이 목사님
46.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1) 우주란 무엇인가?

우주(宇宙)란 무엇인가?
우주란 하늘과 땅,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총체다.
무한한 시간과 만물을 품고 있는 끝없는 공간이다.
모든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한없는 시공간이다.
한 마디로 모든 존재의 합(合)이 우주다.

우주는 고대 그리스어로는 코스모스(κόσμος)이다.
라틴어로는 우니베르줌(Univerisum)인데 유럽의 여러 언어에서 우주를 가리키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다.
천체를 포함하여 우주 전체를 코스모스로 처음 지칭한 사람은 피타고라스이다.

한자말 우주(宇宙)는 천자문(千字文) 앞부분에 나온다.
하늘 천, 따 지, 감을 현, 누루 황.
집 우,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 우주는 넓고 거칠다.”

대장쟁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골마을엔 아직도 서당이 있었고 머리를 길게 땋은 총각들이 한자를 공부하고 있었다.
서당에 다니는 아이들이 가장 먼저 공부해야 하는 천자문을 외우는 소리를 대장쟁이는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우주홍황(宇宙弘荒)이란다. 우주는 넓고 황량하단다.

어린 시절 대장쟁이는 도대체 어떻게 땅이 무너지지 않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어느 날 어머니를 따라 큰집에 가던 길, 산골짜기 논밭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며 땅 밑에 수많은 기둥들이 서 있어 땅이 꺼지지 않도록 떠받치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

고대 중국에서는 네모난 땅 위에 반구 모양의 하늘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유럽에서는 콜럼버스가 항해를 시작할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먼 바다에 나가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달력과 절기의 측정을 위하여 천체관측이 이루어져 왔으며 이러한 관측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우주론이 등장하게 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일찍이 아리스타르코스가 태양중심설을 제시하기도 하였으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구중심설이 대세였다.
나중 동양에서는 28수를 바탕으로 하는 별자리와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둘러싼 모양을 한 혼천설(混天說)이 나왔고 중세 아람과 유럽에서는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이 정설이 되었다.
그러다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들을 관측하면서 지구중심설에 의문이 생겼고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설을 주장하게 된다.

인류역사를 두고 볼 때 인간이 한없이 광활한 우주에 본격적으로 눈을 돌린 것은 망원경이 발명된 때부터이며 우주의 비밀을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한 것은 우주선을 발사하고 허블망원경을 우주에 쏘아 올려놓은 때로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아득한 우주 저 편에 펼쳐진 은하와 천체들의 모습과 장엄한 쇼를 천연색 사진으로 볼 수 있다. 실로 축복된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우주.......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와 넓이와 시간.......
과학기술을 통하여 드넓은 우주를 내다볼 수 있는 오늘날을 살고 있는 이 축복된 세대는 또한 그 광활한 우주 속에 태양이나 지구는 한갓 티끌이요 인간은 반짝 하는 사이에 가고 마는 먼지보다 작은 한없이 미약하고 덧없는 존재라는 사실도 다시금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2) 우주탄생-빅뱅이론

태초에 우주는 어떻게 생성되었을까? 우리가 알다시피 지난 한 세대 동안 가장 지지를 받은 이론은 빅뱅이론(Big Bang Universe, 대폭발이론)이다.

1912년 베스토 슬라이퍼는 한 나선은하를 관측하면서 빛의 도플러현상 곧 적색편이를 처음으로 계산해내었고 거의 모든 은하들이 지구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왜 ‘모든’이 아니고 ‘거의’냐고? 안드로메다 성운은 우리 은하계를 향하여 맹렬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은하들의 운동방향이 다 같지는 않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발표된 후 1927년, 조르주 르메르트는 우주의 기원이 ‘빅뱅’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단순화 가정(공간의 균질성, 등방향 같은)을 바탕으로 알렉산드르 프리드만이 지배방정식을 만들어내었다.

1929년에는 에드윈 허블이 지구에서 관측되는 은하들이 지구에서 떨어진 거리에 비례하여 더 높은 적색편이현상을 보인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는 우주가 지금도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1940년대 후반에는 러시아출신 미국학자 조지 가모프가 우주가 태초에 밀집된 고온의 한 점에서 출발하였다면 그 때 발산된 복사열이 지금도 우주공간에 남아있을 것이고 그 온도는 우주팽창에 따라 냉각되었겠지만 아직도 절대온도 5도 정도로 우주공간에 퍼져있을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그리고 1964년에는 우주에 날아다니는 극초단파 전파를 연구하던 과학자들이 조지 가모프가 예상한 우주배경복사가 절대온도 2.7도로 측정되고 있음을 발견하였으며, 아울러 우주공간에 태초에 시작된 어떤 소리가 지금도 울리고 있다는 것도 발견하였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모든 정황을 종합하여 지금도 팽창을 계속하는 우주는 과거에는 서로 가까이 모여 있었을 것이고 결국은 극도로 밀집되고 극도로 고온이었던 한 점(點)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되었다. 이러한 논의와 토론이 이루어지던 때 한 라디오 방송에서 프레드 호일이 ‘빅뱅’이란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빅뱅이론을 뒷받침하게 된 우주배경복사에 대한 관측은 이 후로도 이루어졌다. 특히 1989년에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코비(COBE) 위성을 발사하여 우주공간의 배경복사 전체를 온전하게 측정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는 자연에서 측정되는 것과 같은 완벽한 스펙트럼이었으며 이 스펙트럼은 우주가 과거에는 엄청난 고온이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또 1992년에는 코비 위성이 우주가 모든 방향으로 균일하게 똑같은 속도로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관측해내었다.

빅뱅이론이 오늘날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는 정설이지만 빅뱅이론에도 문제점과 의문점은 많이 있다. 우주의 모형과 관련한 장방정식의 오차범위에 대한 논란, 우주배경복사의 온도와 빛의 속도의 불일치성, 단극자의 실종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인플레이션우주론이나 거품우주론이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3) 빅뱅연대기

태초에 우주가 한 점에서 출발하였다는 빅뱅이론에 따른다면 그것은 어떻게 시작하였을까? 빅뱅연대기에 대하여 알아보자.

- 빅뱅의 순간; 플랑크시간
 빅뱅이 시작된 최초의 순간으로 아무런 설명을 할 수가 없는 짧은 시간이다.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라 계산된, 물리학적으로 정의할 수 없는 극히 짧은 순간, 플랑크시간이라고 일컫는 최초의 순간을 말한다. (10⁻⁴³,  1에 0을 43개를 붙인 숫자 분의 1 초)

- 대통일이론시대(GUT era)
 그 다음 극미의 순간을 말한다. 1에 동그라미 35개를 붙인 숫자 분의 1초의 짧은 순간, 온도는 1에 동그라미 27개를 붙인 숫자의 상상할 수 없이 뜨거운 온도이고, 빛과 입자도 구분되지 않는 오직 에너지만이 존재하는 순간이다. 물리학의 4가지 기본 힘인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이 한 가지 힘, 오직 중력으로 아직 통일되어 있는 시기라 하여 대통일이론시대라고 부른다. 이름 붙이는 것도 물리학자들 마음대로다.

- 급팽창(Inflation)
 그 다음 순간 1에 동그라미 32개를 붙인 숫자 분의 1초까지를 말한다. 이 짧은 순간에 우주는 에너지로부터 물질로, 한 점에서부터 1에 동그라미 129개를 붙인 숫자만큼의 부피로 급격하게 엄청난 팽창(폭발)을 시작한다.

- 강입자의 시대 (Hardron era)
 그 다음 만분의 1초까지의 순간이다. 빅뱅으로부터 만분의 1초가 되기 전에 쿼크들이 생기고 쿼크들이 양성자와 중성자를 탄생시킨다. 최초의 물질이 생겨나는 순간이다. 양성자와 중성자는 수소의 원자핵이 된다.

- 입자와 반입자의 탄생
 빅뱅으로부터 시작하여 1초. 이 1초 동안에 입자와 반입자들이 분리되면서 생겨난다.

- 빅뱅 핵합성 (Big Bang Nucleosynthesis)
 빅뱅 1초에서 3분 사이에 일어난다. 우주의 온도는 수십억도, 1억도 정도까지 낮아진다. 핵융합반응이 일어나기 적합한 온도이다. 양성자들이 결합하고 수소핵융합반응에 따라 헬륨이 전 우주에 생성된다.

- 입자와 반입자의 쌍소멸
 3분이 지난 다음부터 시작된다. 빅뱅으로 생겨난 입자와 반입자들이 쌍소멸을 일으킨다. 산술적으로는 제로로부터 양편으로 갈라져 탄생한 입자와 반입자(물질과 반물질)들의 수가 같기 때문에 입자와 반입자들이 쌍소멸을 일으키며 다 사라지고 도로 제로가 되어야 하겠지만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반물질들만 사라지고 물질만 남게 된다.
38만년까지 계속된다.

- 재결합(Recombination)
 빅뱅 후 38만 년이 흘렀다. 팽창하는 우주의 온도가 약 3천도가 되는 순간, 이 온도가 되기를 기다려 원자핵과 자유전자들이 결합하여 많은 물질들이 생겨나고 빛도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때 방출된 빛이 적색편이를 일으켜 오늘날 우주배경복사로 관측되게 된다.
수소와 헬륨이 밀집된 공간에서는 태양질량의 수백 배에 이르는 무거운 별들이 탄생한다.

- 최초의 별들 탄생과 초신성 시대
 38만년 후의 재결합시기에 무거운 별들이 100만 년 정도 지난 다음 초신성 폭발과 비슷한 폭발을 일으키며 자신이 핵융합을 통해 만들어낸 수많은 무거운 원소들을 우주에 뿌린다.

- 암흑의 시대
 38만 년부터 4억년 사이. 수많은 무거운 별들이 생겨났다가 초신성 폭발을 일으키며 우주에 에너지를 방출하는 바람에 양성자와 전자들이 분리되고 4억 년 동안 별과 은하가 만들어지지 못 하는 암흑의 시기를 맞이한다.

- 본격적 우주의 형성
 4억년이 지난 후부터 우주에 뿌려진 수많은 물질들이 이합집산(離合集散)하여 항성과 은하, 성운들이 만들어지고 행성들이 생겨난다.

- 오늘날 137억년이 지난 오늘날의 우주를 이루었다.

4) 우주기원의 비밀

빅뱅이론이 맞다면 빅뱅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을까?
어떻게 1에다 동그라미를 43개 붙인 숫자 분의 1 초라는 터무니없이 짧은 플랑크시간에 1에다 동그라미 27개를 붙인 말도 안 되는 높은 온도가 발생하면서 빅뱅이 시작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만 분의 1초 사이에 우주를 이룰 물질이 출발한단 말인가?
어떻게 단 1초 사이에 입자와 반입자들이 갈라지면서 물질이 생성된단 말인가?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그 작은 공간 속에서 우주가 탄생할 수 잇단 말인가?
끝도 없는 광활한 우주공간을 채운 1,000억 개의 은하들이 그런 식으로 생겨난단 말인가?

어떻게 쿼크와 소립자들이, 양자와 중성자, 전자들이, 광속으로 도는 전자들이 그렇게 일사분란하게 똑같이 무한한 양으로 만들어질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원자번호만 다를 뿐 똑같은 구조로 생긴 원자들, 그 똑같이 생긴 물질들이 그렇게 엄청나게 우주를 이룰 수 있도록 생겨난단 말인가?
입자니, 반입자니, 물질, 반물질, 암흑에너지, 암흑물질...... 하고 떠들지만 그 근원이 도대체 무엇이며 그 재료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떻게 인력(중력), 전기력, 양력, 강력 같은 힘들이 생겨났으며, 어떻게 우주 어니에나 똑같이 작용한단 말인가?
우주를 이루는 모든 물질이나 물리학법칙들이 어떻게 우주공간 어디에나 같을 수 있단 말인가?
대통일이론이라는 것.......
그것은 창조주가 한 분이라는 뜻이 아닌가?  

빅뱅이론은 가장 폭넓은 지지를 받는 우주생성이론이다. 대부분의 우주물리학자들은 분명히 그렇게 우주가 탄생하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관측과 이론과 계산의 결과가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빅뱅의 근원이 무엇이었는가,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우주만유의 출발이 된 모든 힘이 애초에 그 한 점에 모여 있을 수 있었느냐, 그 빅뱅을 일으키게 된 촉발점이 무엇이었느냐 같은 수많은 질문에 대하여는 입을 다물어버린다.

과학자들은 시간과 공간이 모든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바탕임을 인정한다. 시간과 공간이 없다면 물질도 있을 수 없고 존재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우주물리학자들은 빅뱅으로부터 시간과 공간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앞서 이 대장쟁이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의 “공간의 휨”을 인용하여 빅뱅에 공간을 도입하자 인력(중력)의 불가사의한 원인이 설명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이다.

우주물리학자들의 이론과 계산방정식으로도 시간과 공간이 빅뱅과 동시에 시작되었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리고 만일 시간과 공간이 빅뱅과 동시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빅뱅을 일으키기 전에 빅뱅의 그 한 점에 우주만유를 시작하게 한 모든 에너지가 압축되어 있을 수 있는 어떠한 이론도 성립할 수 없다.

우주물리학으로 해결되지 않는 의문점, 빅뱅의 근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창조론을 도입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가 없다. 그러나 과학이 창조를 인정하는 순간 과학은 신학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과학을 위하여 이 문제를 덮어둘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면 과학은 영원히 거짓과 동행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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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암흑에너지와 암흑물질

지난 시간에 반물질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 시간에는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를 이야기해야겠다.

1) 암흑에너지

우주 생성의 순간이라고 믿어지는 빅뱅,
우주과학자들은 그 빅뱅이 있은 지 137억년이 지났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질문을 가질 수 있다.
빅뱅으로 시작된 우주는 끝없이 계속 팽창할 것인가, 어느 정도 팽창하다가 정지해서 그 상태로 영원히 지속될 것인가, 아니면 점점 팽창속도가 줄어들고 정지하고 다시 서서히 줄어들어 합쳐지고 오백억 년, 천억 년, 조 년....., 시간이 지나면 결국 도로 한 점으로 모여서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스티븐 호킹 같은 우주과학자들에 의하면 지금도 우주는 빠른 속도로 팽창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도 팽창속도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점점 빨라지고 있다고 한다. 1997년에 관측된 수퍼노바 Ia 천체의 적색편이 현상은 우주가 수십억 년 전 보다 더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130억 광년 떨어진 곳의 초신성(퀘이사)의 관측을 통해서도 암흑에너지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관측되었다는 것이다.

적색편이라는 것은 빛이 실제보다 적색 쪽으로 보인다는 뜻이다.
기차가 달려올 때는 높은 음의 소리가 나다가 지나가 멀어질 때는 낮은 음의 소리로 들리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빛이 주파수가 짧은 청색 쪽으로 변하면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고 주파수가 긴 적색 쪽으로 바뀌면 멀어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관측된 적색편이 현상은 우주가 지금도 팽창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주가 중력을 이기고 계속 팽창하고 있는 이유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물질들이 가지는 전체 인력(중력)을 이기는 어떤 미지의 힘이 우주를 계속 팽창시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주과학자들은 그 미지의 힘을 암흑에너지(dark energy)라고 부른다.

나아가서 우주를 이루는 74%가 암흑에너지, 22%가 암흑물질, 나머지 4%가 보통 물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4%의 물질도 대부분을 수소와 헬륨 같은 가벼운 물질들이 차지하고 오직 0.4%만이 무거운 물질로 별과 천체들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겨우 0.4%라고?

암흑에너지는 지금도 우주를 팽창시키고 있다. 만일 암흑에너지가 우주를 끝없이 팽창시킨다면 언젠가는 모든 물질이 흩어지고 깨어져 사라져버리고 궁극적으로는 방사선만이 우주 가득히 남게 될 것이라고 한다.

2) 암흑물질

암흑에너지와 암흑물질은 다르다.
암흑에너지는 우주를 끝없이 팽창시키지만 암흑물질은 오히려 그 반대로 작용하고 있다.

우주에는 2,000 억 개나 되는 은하들이 흩어져 있다.
우리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저멀리 아득한 작은 별들이 실은 은하계가 수 십 개씩 몰려있는 은하들의 집단이기도 하다.

우리는 앞에서 ‘중력렌즈’라는 것을 배웠다. 아인슈타인이 ‘공간의 휨’으로 예측한대로 중력에 의하여 빛이 휘어진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태양에 의하여 빛이 휘어지는 각도를 계산해 내었고 그것이 개기일식 때 그대로 관측된 것도 알았다.
이 중력렌즈로 휘어진 빛의 각도를 가지고 역으로 계산하면 빛을 휘게 한 천체가 가지는 중력도 계산해낼 수가 있다.  

그런데 우주과학자들은 우주의 머나먼 곳의 은하들의 집단, 곧 은하단을 관측하면서 이상한 현상을 발견한다. 은하들의 움직임이 은하들이 가진 물질보다 훨씬 더 큰 질량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고 관측되지 않는 어떠한 물질들이 그 은하들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은하계도 그 중심부에 가까이 위치한 천체들의 운행속도와 은하계 가장자리에 있는 먼 천체들의 운행속도가 중력과 인력의 계산으로는 맞아 들어가지 않는 이상한 속도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그것은 은하계 안에도 보이지 않는 암흑물질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빅뱅으로부터 시작하여 물질이 생성되고 우주가 시작되는 과정에 대한 계산공식과 설명이 암흑물질을 빼고서는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도 암흑물질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암흑물질(dark matter)은 전자기파, 곧 빛이나 전파에 대하여 아무 반응이나 작용을 하지 않는다. 빛이든 전파든 무엇이든 그러한 것을 통하여서는 그 존재를 전혀 나타내지 않는 물질이다.
그러나 중력을 통하여, 인력의 힘을 통하여, 중력렌즈를 통하여 그 존재를 나타낸다.
앞서 말한 대로 우주공간에는 우주물질 전체의 약 74%는 암흑에너지, 그리고 약 22%가 암흑물질인 것으로 계산되고 있다.

암흑물질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전자기적인 상호작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양자, 전자, 중성자 같은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렇다고 블랙홀, 중성자별이나 백색왜성이나 갈색왜성을 이루는 중입자 물질(MACHO, massive compact halo object) 같은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최경 초짝입자, 액시온, 불임중성미자 같은 후보물질들이 암흑물질의 후보로 떠올라 있지만 확인된 것은 없다.

암흑물질이 은하계에서도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지구와 우리 몸을 통과하여 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암흑물질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어떤 과학자들은 특별한 관측장치를 만들어서 깊은 폐광이나 지하 암염동굴에 갖다놓았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혹시 암흑물질도 반입자, 반물질 같은 식으로 물질의 반대편으로 생겨난 것은 아닐까?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긴 있다.
그 사람들은 우주를 해석하는 공식 중에서 아인슈타인이 도입한 우주상수에 주목한다. 아인슈타인이 도입한 우주상수는 사실 근거가 없는 추정에 의한 수치라는 것이다. (뭐, 복잡한 공식은 빼고 설명하자, 머리 아프니까.)

그 사람들은 우주공식의 질량에 반질량(反質量)을 도입한다.
또 음양설(陰陽說)인 셈이다.
질량이 생겨나려면 반질량도 생겨났을 것이란 거다.
아니, 반질량이라니? 질량에도 마이너스가 있나?
그러나 그 사람들은 공식과 이론상으로 마이너스 질량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질량 물질이 있다면 어떻게 되는데?
반질량 물질이 질량을 가진 물질을 만나면 반물질이 물질과 합쳐져서 소멸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멸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게 들리는 소리다.

그런데 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우주공간에서 벌어지는 것이 관측되고 있다는 것이다.
거대한 은하단에서 관측된 바, 반질량물질들이 서로를 밀어내어 떨어진 사이에 보통물질로 이루어진 은하가 끼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질량물질들과 질량물질들이 합쳐지면서 사라지는 현상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는 질량이 사라져도 E = mc² 공식에 따른 에너지도 안 나온다. 왜냐하면 질량이 대칭되는 반질량으로 제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란다.
점입가경이다.

그러나 암흑물질이 반질량물질이라는 뜻은 아니다.
만일 암흑물질이 반질량물질이라면 질량물질에 대하여 작용을 하기는커녕 질량을 없애면서 사라지기 바쁠 것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우주공간에는 얼마나 많은 비밀이 숨어있는 것일까?
우주공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우주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현대과학으로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투성이인 것만은 틀림없다.

인류는 현대과학으로 관측되는 현상을 빤히 보면서도 수학공식과 온갖 이론을 동원하여서도 우주의 비밀을 풀어내지 못 하고 있다.
보이는 현상도 풀어내지 못 하면서 빅뱅의 이론을 만들고 우주생성 기원을 공식과 수치로 만들어내었으니 과연 그것이 과연 맞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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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반물질을 잡아라.

이 글을 써나가는 중 어제, 그러니까 2011년 8월 8일에 지구 주위에서 반물질의 띠가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떴다.
지난 2006년 발사된 이탈리아-러시아 합작 파멜라 위성 자료를 분석해 온 과학자들은 지구 1만 킬로미터 상공의 밴앨런대들 사이에 소량의 반양성자가 존재한다고 밝혔다는 내용이다.
반물질은 안 그래도 소립자에 이어서 대장쟁이가 다루려고 했던 소재였는데 마침 기사가 뜬 셈이다.

반물질(反物質, Antimatter).......
반물질은 무엇이고 밴앨런대는 또 무엇인가?  

1) 반물질

반물질이란 말 그대로 물질의 반대되는 물질이라는 뜻이다.
양(+)이 있으면 음(-)이 있듯이 물질이 있으면 반물질이 있다는 것이다.
아니 과학 하다 말고 웬 뚱딴지같이 음양설(陰陽說)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태초에 빅뱅이 일어났을 때 제로(無, 零) 상태에서 물질과 반물질이 생겼다고 말한다. 제로(無, 零)에서 물질이 생겨나려면 수학에서 보는 것과 같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물질과 반물질이 나누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질(Matter)만 남고 반물질(Antimatter)은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반물질은 추상적인 존재인 셈이다.
(Material이라고 하지 않고 Matter라고 하는 것도 재미있다.)

그런데 우습지 않은 것이 반물질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빅뱅 때는 반물질이 모두 사라져버렸는지 모르지만 우주공간에는 아직도 반물질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태양 같은 극렬한 핵반응이 일어나는 천체에서 반물질이 생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1928년인가 1930년에 반물질을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은 폴 디랙(Paul Dirac)이다.
그는 전자기장 내에서의 전자이동을 설명하는 이론을 내어놓으면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을 도입했는데 이게 종전의 이론들보다 정확하게 맞아 들어가는 바람에 유명하게 되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전자는 마이너스 전하를 띠고 양자는 플러스 전하를 띤다.
그런데 디랙은 자신의 이론에서 플러스 전하를 띠는 전자도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그러나 디랙은 이런 주장을 하면서도 실제로 플러스 전하를 띠는 전자가 발견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은 1931년 칼 앤더슨이라는 사람이 실험을 하다가 질량은 같은데 움직임은 반대방향인 전자, 즉 마이너스가 아닌 플러스 전하를 띤 반전자를, 순간적으로 소멸되긴 했지만, 발견한 사건이 터진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디랙의 이론은 전자뿐 아니라 양자, 중성자에까지 해당되는 것이었고 실제로 반대의 전하를 가지는 양자, 중성자 등 반입자들이 발견되었다.
전자는 플러스 전하, 양자는 마이너스 전하를 띤 “거꾸로 물질”.......
이것이 오늘날 반물질로 부르는 것이다.

사실은 반물질(反物質)은 추상적인 반물질이 아니라 기존의 물질들과 반대의 성질을 가지는 물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반물질들은 물질들과 만나면 물질들과 합치면서 소멸되어버린다.
마치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끌어당겨 합쳐지면서 제로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반물질은 그만큼의 물질과 만나서 함께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상태에서는 반물질이 발견되지 않는다.
인위적으로 만들었다 해도 주변의 물질과 합쳐지면서 순간적으로, 수백만 분의 1초 만에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것들이 그냥 사라지지 않는 것이 또 문제이다.
전기가 플러스, 마이너스가 합쳐지면서 번개를 일으키고 열을 내듯이, 알칼리와 산이 합쳐지면서 화학열을 내듯이 반물질과 물질이 만나면서 쌍소멸을 일으켜 에너지를 내는 것이다.
쌍소멸이란 물질도 그 만큼 소멸되고 반물질도 그만큼 소멸되어 양쪽에서 두 배의 물질로 소멸되기 때문에 일컫는 이름이다.

이 쌍소멸은 따라서 물질과 반물질, 두 배의 물질이 소멸되는 만큼의 에너지를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의 E = mc² 공식에 따라 내게 되는 것이다.

1그램의 물질이 소멸되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나오는지 우리는 앞서 대충 살펴보았다.
원자탄도 수소탄도 다 핵분열, 또는 핵융합을 통하여 소멸되는 물질이 에너지로 변환되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그런데 만일 반물질을 이용한 폭탄을 만든다면 그 위력은 원자탄의 1,000배, 수소탄의 300배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반물질과 물질이 만나 쌍소멸되면 소멸의 양도 많아지지만 전혀 손실이 없는 완전한 에너지변환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반물질을 백만분의 1 그램 정도를 만들어서 물질에다 쏜다면 어떻게 될까?
그 반물질이 물질과 닿는 순간 쌍소멸을 일으키면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낼 것이다.
백만분의 1 그램이나 천만분의 1그램의 반물질만 사용해도 엄청난 위력을 가지는 폭탄이 될 것이다.

만일 반물질로 엔진을 만들거나 발전소를 만든다면 엄청난 일이 될 것이다.
반물질 수 백 분의 1 그램만으로도 자동차와 기관차가 움직이고 비행기나 날며,
반물질 1 그램만으로도 2,500만 kwh (칼로와트아워)의 에너지가 발생한다.
반물질 10 그램만 있으면 1개월 만에 화성까지 날아갈 수 있는 강력한 추진력을 가지는 우주선을 만들 수 있다.
사용하는 것도 쉽다. 그냥 반물질을 물질과 만나게만 해주면 된다.
소문이지만 미군은 반물질을 이용한 폭탄개발연구를 하고 있단다.

그런데 지난 (2011년) 6월 6일자 보도에 의하면 CERN의 제네바 80억불짜리 거대강입자가속기에서 반수소 입자들을 만들어 무려 16분 동안 사라지지 않고 붙잡아두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반수소란 수소와 같은데 양자는 마이너스 전하, 전자는 플러스 전하를 띠는 반물질 수소라는 뜻이다.
즉 광속의 99.999991%의 속도로 양자들을 충돌시켜 빅뱅과 비슷한 조건을 만들었을 때 거기에서 입자들과 반입자들이 생성되고 반입자들로 이루어진 반수소들이 만들어졌고 이것을 자기장으로 붙잡아두고 관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반물질이 만들어지고 나아가서 모아질 수 있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사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물질을 만들어 모으는 것은 쉽지 않다.
강입자가속기를 이용하든지 다른 방법을 사용하든지간에 엄청난 속도로 입자들을 가속하여 충돌시켜 빅뱅과 비슷한 조건을 만들어 물질이 붕괴되면서 새로운 입자들과 반물질이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반물질을 만든다 해도 겨우 수 십, 수 백 개 정도의 양성자, 양으로 치면 수 조, 수경 분의 1 그램도 안 될 만큼 적기 때문이다.

반물질을 만드는 것도 어렵지만 반물질이 물질과 접촉하지 않도록 붙잡아서 모으는 것은 더욱 어렵다. 생성되자마자 반물질은 주변의 물질과 만나서 순식간에 소멸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물질을 잡아두는 방법은 물질이 전혀 없는 진공의 허공에다 전기자기력으로 띄워두는 방법밖에 없다.
만일 반물질을 이용한다면 완전진공 가운데 전자기력으로 공중에 띄우는 장치를 만들어 모아두었다가 필요하면 내보내서 물질을 만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폭탄을 만들든, 열기관을 만들든, 로켓을 만들든 반물질을 이용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만일 반물질 폭탄을 만든다면 전기자기장을 이용하여 완전한 진공 허공에 반물질을 붙잡아 둔 캡슐이 될 것이다.
그 캡슐이 적에게 날아가서 그곳에서 반물질이 물질을 만나게만 해주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보도된 기사에 의하면 이탈리아-러시아 합작 파멜라 위성 자료를 분석해 온 과학자들은 밴앨런대들 사이에 소량의 반양성자가 존재한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2) 밴앨런대

밴앨런대(Van Allen Belt 帶)는 무엇인가?
알다시피 태양은 수소핵융합반응을 일으키므로 엄청난 고온, 수 천만도, 1억 도의 플라즈마 상태를 이룬다.
플라즈마 상태란 모든 입자들이 흐물흐물 풀어진 고온상태라는 뜻이다.
그 플라즈마 상태의 태양에서 쉴 새 없이 수많은 입자들이 밖으로 뿜어져 나온다.
이 입자의 바람을 태양풍이라고 부른다.
태양풍은 그 세력이 태양으로부터 명왕성을 지나 세 배의 거리가 넘는 거의 200억 킬로미터 주변에까지 미친다.
태양풍은 태양계 전체를 부드럽게 풍선처럼 감싸고 있다.

지금 보이저 1호 우주선이 175억 킬로미터를 날아가 태양풍 영향권의 가장자리, 헬리오스히스 구간을 곧 벗어날 것이라는 이야기를 “17. 태양계를 벗어나 우주 속으로”에서 이미 한 바 있다.

따라서 지구를 비롯한 모든 혹성들은 태양에서 불어오는 입자들의 부드러운 바람을 맞으면서 태양을 공전하고 있다.
태양에서 불어오는 태양풍이 만일 그대로 지구 대기권으로 쏟아져 들어온다면 그 입자들이 대기권 공기분자들과 충돌하면서 많은 방사선을 만들어내고 지구상의 생명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구는 자기장을 가지고 있어 태양풍의 입자들이 그 자기장에 붙잡히게 된다. 다만 극지방에서는 일부 하전입자들이 오로라 현상을 일으킨다.

태양풍 입자들이 지구 자기장에 붙잡힌 모양은 마치 지구가 조개껍질을 둘러쓴 모양, 지구를 삥 둘러 싼 도넛 모양과 비슷하다.
고도 3,000 미터의 낮은 층과 1,5000 미터가 넘는 높은 층 두 개가 있다. 태양풍의 입자들 때문에 방사능을 띠고 있다. 이것이 바로 밴앨런대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구가 태양풍을 헤치고 밴앨런대를 만들면서 공전하는 모습은 마치 물결을 헤치고 나아가는 선박이나, 마치 자기장 우산을 펼쳐들고 태양풍을 헤치면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구를 비롯한 혹성들이 태양풍 때문에 공전속도가 떨어지는 거 아니냐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거대한 혹성들에 비하면 입자들의 태양풍은 너무나도 미미하기 때문이다.
수억년, 수십억년이 지난다면 혹 모를까.

그런데 이번에 파멜라 위성이 소량의 반양성자 반물질을 발견한 것은 윗층, 아래층 밴앨런대의 사이 공간이라고 한다. 태양의 활동 중에도 생성된 입자들 중에 반입자들이 있고 이 반입자들이 물질을 만나지 못 한 상태로 지구까지 날아와 밴앨런대의 자기장에 잡혔다는 이야기다.

과연 밴앨런대에서 발견된 반물질이 얼마나 되고 우리가 이용하기에 충분한 양이 되는지는 알 수 없으므로 미리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주공간을 드문드문 날라가는 그 반물질들을 우주선으로 낚아채어 모아서 이용할 수 있느냐는 더욱 어려운 문제이다.

그렇지만, 만일 그 반물질을 모아다가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만일 우주선이 그 반물질을 모아다가 전기자기 진공캡슐에 담아서 지구를 향하여 발사하면 무시무시한 폭탄이 될 것이고,
그 캡슐을 지구로 가져와서 평화적으로 이용하면 엄청난 에너지원이 될 수 있을 것이고,
혹은 캡슐에 담아서 우주선의 우주여행 연료공급소로 이용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
.

43. 쪼개고 또 쪼개고

물리학이란 게 그렇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몇 백 년을 연구하고 계산하고 이루어놓은 것이 현대물리학이다.
그 현대물리학을 이 짧은 글들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논한다는 것은 사실 그냥 주마간산인 셈이다.
그런데도, 이 대장쟁이가 컴컴한 대장간에서 대충 얼렁뚱땅 두들기고 빼먹고 넘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더러는 복잡하고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니 이건, 대장쟁이도 그렇지만, 인간의 빨리 결론을 알고 싶어 하는 조급함과 복잡하고 골치 아픈 생각을 하기 싫어하는 이성적 게으름 때문은 아닐까? 이런 복잡하고 잡다한 것을 물리학자들은 어떻게 해내었을까? 정말 존경스럽다.
어쨌든 앞장에서 우리는 수많은 원자번호, 원소들과 소립자들의 종류들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사람들은 잠시 모든 물질은 양자, 중성자, 그리고 주변을 돌고 있는 전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세 가지 소립자가 모든 물질의 기본입자라고 생각하고 행복해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후 수 백 가지의 소립자들이 발견된 것이다.
그 소립자들이 어찌나 많았던지 미국의 원자탄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페르미는 발견된 수 백 가지의 소립자의 이름을 다 기억할 수 있다면 식물학자도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하였다.

수 백 가지의 소립자들의 발견.......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양자, 중성자, 전자가 다시 여러 가지의 하부 구성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또한 뜨거운 기체에서 나오는 빛을 프리즘으로 분광시켜 얻은 스펙트럼이나 제만효과도 양자, 중성자 같은 페르미온(바리온)소립자들이 여러 가지 구성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소립자들을 고유특성, 스핀과 전하, 질량 등으로 분류하고 우주선실험이나 가속기실험을 통하여 소립자들의 충돌실험을 통하여 나타나는 궤적과 전하, 질량의 변화 등을 분석하였으며 다른 입자들로 나누어지고 생성되고 소멸되는 현상들을 연구하게 된다.  
복잡하니까 대충 생략하고......

어쨌든 과학자들은 소립자들이 더 작은 미시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앞에 언급한 대로 1969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미국의 물리학자 머리 겔만은 이들 기본입자의 이름을 ‘쿼크’라고 이름 지었다.  
‘쿼크’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그저 겔만이 애송하던 시의 한 구절에서 따 왔다고 한다.

겔만과 또 한 사람 츠바이크는 처음에 up, down, straight, 세 가지의 쿼크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top, bottom, charm 쿼크가 더 해져 모두 여섯 가지의 쿼크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 6개의 렙톤이 있다.
6개의 쿼크와 6개의 렙톤이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입자라는 것이다.

6개의 쿼크와 6개의 렙톤이 양자, 중성자를 만든다면 무슨 모양이라고 할까?
마치 정육면체 상자 같은 모양이라고 할 수 있다.
6개의 쿼크가 6개의 면을 이루고 6개의 렙톤이 각 면 사이에 선을 이루는 식이라고 이해하면 될까?
뭐 그런 모양은 꼭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12개의 입자가 물질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같은 수의 반입자(反粒子), 즉 12개의 반입자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반입자들은 사라지고 없지만 아무튼 모두 24개의 입자들이 소립자를 이루는 셈이다.

미립자들은 또 있다.
쿼크와 쿼크 사이의 강력(强力)을 매개하는 ‘글루온’이라는 입자가 있다.
두 전하를 갖는 입자 사이에서 전기력을 매개하는 광자라는 입자도 있다.
또 약력을 매개하는 세 가지의 입자도 있다.
쿼크, 렙톤, 광자, 글루온, 중성미자, 뉴트리노........

오늘날 과학자들은 지금까지 발견되고 확인된 입자들을 가지고 기본입자의 표준모형을 만들었다.
6개의 쿼크, 6개의 렙톤, 4개의 매개입자.
그러나 이 기본입자 표준모형이 최종적인 결론은 아니다.
아직도 이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가 끝일까?
쿼크이든 렙톤이든 메존이든 보존이든 이런 것들이 물질의 가장 기본요소들일까?
그것들은 또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그러한 미립자들의 질량을 이루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최종적인 물질의 근원은 무엇이란 말인가?
과학자들의 고민과 탐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쪼개고 또 쪼개고.......
과학자들은 오늘도 쪼개고 있다.
더 강한 힘으로 더 큰 에너지로 입자를 충돌시키면 더 많은 물질의 기본입자를 발견해낼 수 있으리라.
광속의 속도로 무한의 에너지로 입자를 가속하여 충돌시켜보자.
그리하여 빅뱅의 조건을 만들어보자.

그래서 이미 “물질의 근원을 찾아라.”에서 말한 바와 같이 스위스 제네바 인근에 무려 80억불을 투자, 둘레 27 킬로미터에 달하는, 양성자를 1,000분의 1초 만에 광속의 99.999991%까지 가속시킬 수 있는 거대강입자가속기를 설치한 것이다.

그 거대강입자가속기를 설치한 목적은 가장 강한 힘으로 가장 빠른 속도로 소립자들을 충돌시켜 빅뱅의 비밀, 태초의 우주탄생, 물질탄생의 비밀을 엿보자는 것이다.
또한 모든 물질의 질량의 근원이 된, 빅뱅 때 물질에 질량을 부여하고 사라져버린 것으로 믿어지는 ‘힉스입자’를 찾아내는 데 있다는 것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쪼개고 또 쪼개고.......
부수고 또 부수고.......
그렇게 끝없이 쪼개고 부수어 나가면 물질의 비밀 속에 숨어 계시던 창조주 하나님이 마침내 두 손을 번쩍 들고 항복하고 나오실까.......?



42. 원자, 그 미시의 세계

인간의 몸은 약 6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지만 인간의 몸에 붙어서 사는 미생물의 수는 수백 조에 달한단다.
대장균부터 유산균, 각종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등 세포보다 훨씬 작은 수많은 미생물, 인간의 몸에 기생하는 미생물의 수는 은하수의 별만큼이나 많다는 이야기다.

인간은 지구에 붙어산다.
인간은 우주의 티끌 같은 지구 위에 붙어사는 미생물(?)인 셈이다.

인간은 미생물이 아니다.
지구 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광활한 우주를 바라보며 우주만유의 기원을 궁구하고 창조주의 존재를 생각하는 인간이라면, 그 인식과 사고가 드넓은 우주를 활공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 사고가 땅에 고정된 인간은 미생물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지구의 바닥, 땅에 눈을 박고 먹고사는 문제와 인간들끼리의 생존경쟁에만 매달리다가 생을 마친다면 그 생이 미생물과 다를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눈을 들자.
광활한 우주공간과 신비스러운 생명과 물질의 세계를 바라보며 그 기원과 창조주를 생각하자.
영원을 사모하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인류에게 다만 별을 관측하고 바라보는 수준을 넘어 우주의 크기와 생성과 본질에 대하여 관심을 돌리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광활한 우주의 기원은 미시의 원자, 물질의 기원과 통하게 된다.
과연 만물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우주만유는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가?

1) 원자의 발견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부터 인간은 물질의 기본이 무엇인지 궁금해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 이전까지는 엠페도클레스가 주장한 4원소설이 그럴듯한 이론이었다. 4원소설이란 자연의 모든 물질이 흙, 불, 물, 공기, 네 가지의 원소로 이루어져있으며 이 네 가지가 얼마씩 구성되었느냐에 따라 갖가지 물질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뼈는 절반이 불이며 나머지는 흙과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4원소에 냉, 열, 건, 습 등 네 가지 성질을 추가하여 만물이 생성되고 변화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지상의 물질은 이러한 조건들이 항상 변하므로 불완전하지만 천상(天上)의 물질은 완전하여 변하지 않는 한 가지 물질 ‘에테르’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였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4원소설만을 믿은 것은 아니다. 기원전 480년부터 420년까지 살았던 레우시푸스가 최초로 원자설을 주장하였고 그 제자 데모크리토스가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에 도달한다.’고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2,0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설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을 더 신봉하였다. 그러다가 1803년 기상과 대기를 연구하던 영국의 화학자 돌턴이 다시금 원자론을 제안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한동안 원자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기본입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나눌 수 없다.’는 뜻의 그리스어로 “a-tom"이라고 이름을 붙였었다.

돌턴이 원자론을 제안할 당시에는 화학이 발달하기 시작하여 원자의 존재는 믿어지게 되었지만 원자의 존재 자체를 관찰할 수 있는 실험방법이 없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러더포드에 의하여 원자는 양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진 원자핵, 그리고 그 주변을 도는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물질의 최소단위라고 믿었던 원자가 양자, 중성자로 이루어진 원자핵 주위를 전자가 돌고 있는, 마치 태양 주위를 혹성들이 돌고 있는 것과 비슷한 모양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원자의 내부에도 복잡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튼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이 양자와 중성자, 그리고 전자의 수로 결정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발견된 원소들을 양자-중성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의 숫자로 원자번호와 질량수를 나타내는 방법으로 분류하였다.

원자번호 1 수소
원자번호 2 헬륨
원자번호 3 리튬
원자번호 4 베릴륨
원자번호 5 붕소
원자번호 6 탄소
원자번호 7 질소
원자번호 8 산소
원자번호 9 플루오린
원자번호 10 네온
원자번호 11 나트륨(소듐)
원자번호 12 마그네슘
원자번호 13 알루미늄
원자번호 14 규소
원자번호 15 인
원자번호 16 황
원자번호 17 염소
원자번호 18 아르곤
원자번호 19 칼륨/포타슘
원자번호 20 칼슘
(여기서부터는 생략하고 넘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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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번호 26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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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번호 7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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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번호 88 라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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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번호 92 우라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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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번호 118 우누녹튬

이렇게 오늘날 천연원소와 인공원소를 포함하여 118번까지 118 가지의 원소목록이 나와 있다.

사람들은 원자(Atom)가 아니라 양자, 중성자, 전자가 진짜 모든 물질의 기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원자(Atom)이라는 이름은 이미 써먹었기 때문에 소립자(素粒子, Elementary Particle)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물질의 비밀을 다 풀어낸 것 같은 생각에 사람들은 잠시 행복해 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과학자들은 너무나 작은 전자는 그렇다 해도 더 이상 쪼개어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원자(Atom)가 쪼개진 것처럼 전자보다 2,000 배나 큰 양자와 중성자도 더 쪼개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에 겔만이라는 물리학자가 양성자와 중성자 같은 소립자 내부에 세 개의 쿼크가 들어있다고 제안하였다.

2) 원자의 구조

전에 언급하긴 하였지만 기억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다시 원자의 구조를 말하자면 그렇다.
원자의 크기는 대략 1 옹스트롬, 10⁻¹⁰ m (백억분의 1 미터) 정도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들어있는 원자핵의 크기는 1 fm,  10⁻¹⁶ m (원자 지름의 백만분의 1)이다.
(fm= fermi or femtometer, 페르미 또는 펨토미터)

1 옹스트롬(백억분의 1 미터)를 표현하자면...., 지구지름을 1 미터라고 가정한다면 1 옹스트롬의 크기는 1 밀리미터 정도가 된다.
거기다 원자핵은 그 원자 크기의 백만분의 1이다.
즉 1 옹스트롬의 백만분지 1인 1 펨토미터이다.
그야말로 상상이 잘 안 되는 작은 크기다.

그리고 이번에는 원자 크기를 확대하여 지구(지름 약 12,700 킬로미터)만 하다고 가정한다면 원자핵은 그 100만분의 1, 즉 지름이 13 센티미터 정도 되는 크기라는 이야기가 된다.

원자의 껍질을 이루는 것은 질량이 거의 제로라고 취급되는 작디작은 전자(電子)가 원자핵을 광속으로 뱅글뱅글 도는 궤도가 이루는 ‘전자껍질’이다.
그 전자껍질이 이루는 거품이 바로 원자의 크기가 된다.
그러므로 “색즉시공공즉시색”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지구를 이루고 있는 물질도 전자껍질을 벗겨버리고 핵만 남겨 놓는다면 지름 13센티, 주먹보다 약간 큰 작은 공 크기로 줄어든다.

전자껍질을 이루는 전자의 궤도에 관하여는 화학반응을 정리한 원소 주기율표와 슈레딩거 방정식, 그리고 파울리의 베타원리로 밝혀지고 정리되었다.

복잡하고 기니까 얼렁뚱땅 간단히 설명하자면......,
과학자들은 우주의 천체의 운행을 관찰한 케플러의 운동방정식의 법칙을 도입하여 각운동계산을 통해 같은 궤도에 무한히 많은 전자가 함께 돌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과학자 슈레딩거는 원자번호가 높은 원소는 여러 층의 전자껍질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그 각 층이 수용할 수 있는 전자의 수를 아래와 같이 각운동 계산으로 밝혀내었다.

K 껍질: 전자 2개
L 껍질: 전자 8개
M 껍질: 전자 18개
N 껍질: 전자 32개
O 껍질: 전자 50개
P 껍질: 전자 72개

그리고 마지막 층의 전자가 그 숫자와 같으면 매우 안정되어 다른 원소와 화합하지 않는 성질을 가진 불활성기체 같은 것이 되고 마지막 층의 전자수가 위 숫자에 부족하면 그 숫자를 채워 넣으려는 성질 때문에 다른 원소와 쉽게 결합하여 안정된 분자를 이룬다.
예를 들어,
원자번호 1인 수소는 전자가 하나뿐이므로 불안정하다.
왜냐하면 K 껍질에는 전자 2개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원자번호 8인 산소는 전자가 8개이므로 K 껍질에 전자 2개, L 껍질에 전자 6개를 가지는데, L 껍질은 전자 8개가 들어갈 수 있는 층이다.
그래서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한 개가 결합하면 전자가 모두 10 개가 되어 K 껍질에 2개, L 껍질에 8개가 배치되므로 매우 안정된 물 분자(H₂O)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원자번호 2인 헬륨은 전자가 2개로 K 껍질을 이루고 있으므로 다른 원소와 결합하지 않기 때문에 불활성기체로 불리는 것이다.

그런데 원자핵의 크기는 어떻게 알아내었느냐고?
러더포드는 방사성 원소에서 나오는 알파선을 원자에 쏘는 산란시험(散亂試驗)을 통하여 원자내부의 양전하와 질량이 모두 작은 원자핵에 들어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산란시험은 미시세계를 탐구하는데 주로 이용되는 방법으로 전자나 뮤온 같은 렙톤 입자를 쏘아서 표적의 구조를 알아내는 시험이다.

비유를 들자면 짚더미 속에 도끼 같은 금속덩어리가 들어있다고 하자. 손을 집어넣어 짚더미를 헤치고 찾아내지 않고 찾아내는 방법이 무엇일까? 그 한 가지 방법은 짚더미에다 무수한 탄환을 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짚더미를 통과한 탄환의 위치를 모조리 측정하면 짚더미 속의 도끼의 위치와 모양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3) 자꾸만 발견되는 소립자들

아무튼 전자(電子)는 워낙 작으니까 제쳐두고, 원자핵을 이루는 양자와 중성자를 쪼개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양자와 중성자를 결합하고 있는 힘보다 큰 에너지로 충돌실험을 하면 된다. 러더포드는 알파선 방사선을 이용하여 실험을 하였다.
당시에는 아직 입자가속기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양자와 중성자를 쪼개지 않고도 많은 새로운 소립자들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우주로부터 지구로 날아드는 우주선(宇宙線)이었다. 우주선(宇宙線)이란 우주공간을 날아다니는 작은 입자들이다. 대부분 양성자들인데 매우 큰 운동에너지를 갖고 있다. 이 우주선들이 대기권의 공기분자와 충돌하면서 새로운 입자들을 만들어내고 방사선을 발생시키며 일부는 지상에까지 떨어진다.

이러한 우주선들은 태초의 빅뱅으로 인하여 생겼든지 초신성(퀘이사)의 폭발로 생겼든지 지금도 무수히 우주공간을 날아다니고 있다. 만일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달리는 우주선(宇宙船)을 만들어 우주여행을 한다면 우주공간에 흩어진 수소원자 뿐 아니라 이러한 우주선(宇宙線) 소립자들도 우주선(宇宙船)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과학자들은 차곡차곡 쌓은 여러 겹의 사진건판을 기구에 실어 대기권 상층부로 날려 올려 보내고 소립자들이 사진건판을 통과하면서 남긴 흔적들을 분석하여 입자들을 검출하였다.
이렇게 하여 1937년에 뮤온이 발견되었고 또 여러 가지 많은 종류의 소립자들이 발견되었다.  

1945년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의 물리학자 히데키 유가와는 원자핵을 이루는 양자와 중성자들이 무슨 힘으로 뭉쳐져 있는가 하는 문제를 연구하고 그 작은 양자와 중성자들이 중력과 인력으로 결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기력 같은 힘, 즉 핵력으로 결합되어 있고 그 핵력을 매개하는 어떠한 매개입자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실제로 우주선(宇宙線)실험에서 파이메존이라는 매개입자가 발견되었다. 히데키 유가와는 이 공로로 1949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된다.
이렇게 우주선 실험을 통하여 수많은 소립자들이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1960년대에 개발된 입자가속기로 더 많은 소립자들이 발견된다.

소립자는 크게 둘로 나뉜다.
그 하나는 양자, 중성자, 전자와 같이 물질을 구성하는 소립자들이다. 페르미의 이름을 따서 ‘페르미온’이라고 부른다.
다른 하나는 핵을 이루는 결합력 같은 힘의 매개입자들이다. 인도의 물리학자 보제의 이름을 따 ‘보존’이러고 부른다.
우주선실험으로 발견된 파이메존이 바로 대표적인 힘의 매개입자인 ‘보존’이었던 것이다.

소립자들을 질량의 크기에 따라 분류하기도 한다.
가장 가벼운 입자를 렙톤(그리스어로 가볍다는 뜻)이라고 부른다.
대표적으로 전자가 여기에 해당한다.
전자(電子)보다 더 가벼운, 물리학적으로 질량이 제로(0)인 뉴트리노 입자도 있다. 뉴트리노는 원자핵이 베타붕괴를 할 때 나온다.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수많은 뉴트리노는 지금도 거침없이 지구를 관통하여 지나가고 있다.

중간 크기의 질량을 갖는 소립자들은 ‘메존’이라고 부른다.
가장 무거운 소립자들은 ‘바리온’이라고 부른다.
바리온에는 양성자, 중성자들과 람다, 시그마, 카이, 오메가 같은 것들이 있다.


<정리>
* 원자번호: 1부터 118까지
* 전자의 층: K, L, M, N, O, P
* 소립자 분류
1) 역할분담으로 분류
  물질을 이루는 소립자: 페르미온,
  매개소립자: 보존
2) 질량의 크기로 분류
  가벼운 것: 렙톤,
  중간 것: 메존,
  무거운 것: 바리온 (양자, 중성자 등)

(전편 끝부분 수정보충)

핵폭탄(원자력발전도 마찬가지이지만)은 우라늄이나 풀로토늄 같은 물질이 핵분열을 일으켜 다른 물질로 바뀌면서 질량이 바뀔 때, 그 질량이 감소하는 만큼 에너지로 바뀌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우라늄 (92U235)이 분열되어 38Sr94와 54Xe140으로 바뀐다. (스트론튬, 제논)
36Kr92와 56Ba141로도 바뀐다. (크립톤, 바륨)
이런 물질들이 핵분열생성물질들이다.

우라늄이나 풀로토늄이 핵분열을 일으켜 다른 핵분열생성물질로 바뀔 때 약 0.1%의 질량결손이 생기는데 이 결손된 질량이 E = mc²공식에 따라 전부 에너지로 바뀌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10 킬로그램의 우라늄을 분열시켜 그 0.1%, 즉 10 그램의 질량결손을 만들어내면 얼마나 큰 에너지가 나올까?
10 곱하기 광속의 제곱 에르그(erg).......
큰 도시 하나가 파괴될 만 한 에너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맨해튼 프로젝트로 알려진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조차 E = mc² 에 대하여는 현실감을 느끼지 못 하였고 실제로 뉴멕시코 사막에서 이루어진 핵폭탄 실험을 보고서야 그 엄청난 결과에 놀랐다고 한다.

이러한 위대한 발견이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참혹한 파괴가 아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먼저 쓰여 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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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

앞에서 말한 상대성이론은 1905년에 발표된 특수상대성이론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은 서로 등속으로 운동하는 관성계에서의 물리학법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인슈타인은 등속운동이 아닌 가속운동의 경우, 즉 중력과 인력으로 가속도가 붙는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를 1907년부터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실제로 실험을 하여 증명하기보다는 주로 논리와 사고를 통하여 논리적인 모순을 알아낸다든지 새로운 법칙을 발견해 내었는데 이를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이라고 한다. 이것이 실로 그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1) 등가원리

등가원리는 가속도와 중력이 결국 같다는 것을 말한다.
만일 우주선이 지구에 앉아있다면 그 안에 탄 우주인은 우주선 바닥방향으로 지구의 중력가속도 'g'의 중력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그 우주선이 우주공간에서 가속을 하여 지구중력가속도 'g'만큼의 가속운동을 하면서 점점 빨라진다면 그 안에 탄 우주인은 지구에 있을 때와 똑같은 중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만일 밖을 내다보지 못 한다면 그 우주인은 거기가 우주공간인지 지구인지를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우주선이 어떤 별의 인력에 의하여 자유낙하를 한다고 치자.
우주선이 그 별의 중력장에 의하여 점점 가속되면서 빨라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 안의 우주인은 똑같은 무중력상태를 느끼기 때문에 우주선이 점점 빠른 속도로 낙하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될 것이다.
즉 가속도와 중력은 같다. 이것이 등가원리이다.

2) 빛은 중력으로 인하여 휜다.

중력과 가속도가 같다면 빛과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우주선이 로켓을 분사하면서 위로 점점 빨라지는 가속운동을 하고 있다고 해보자.
그 때 좌편에서 우편으로 똑바로 흐르는 빛이 있다고 해보자.
만일 우주선이 정지상태이거나 등속운동을 하고 있다면 그 빛은 직선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우주선이 가속도로 점점 빨라지는 가속운동을 하고 있다면 그 빛은 우주선이 가속되고 있는 방향의 반대방향으로 휘어지는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즉 가속도는 빛을 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속도와 중력이 같으므로 그 가속도와 같은 중력장을 가진 별에서 그 빛을 본다고 해도 똑같이 휘어져야 할 것이다.
결국 가속도와 마찬가지로 중력도 빛을 휘게 만든다는 결론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사고실험을 통하여 밝혀낸 이 일반상대성이론을 1916년에 발표한다. 그리고 태양을 스쳐 지구에 도달하는 다른 별의 빛이 태양의 중력만으로 휜다면 0.875초가 휘겠지만 상대성이론에 의한다면, 즉 휘어진 공간이론에 의한다면 1. 75초 휠 것이라는 계산을 내놓았다.

마침 1916년에 서부 아프리카의 프린시페 섬에서 개기일식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되었다. 영국의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은 과연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옳은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탐험대를 이끌고 아프리카로 가서 개기일식 동안에 별을 관측하는 실험을 하였다.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때라야 태양의 뒤편에 있는 별을 관측할 수 있다.)

실제 측정결과로 별빛은 1.6초 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그 오차범위는 0.3초라고 계산되었다. 이 결과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완벽하게 옳음을 증명한 것이었다.
만일 에딩턴의 관측실험결과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틀렸다고 증명되었더라면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한 공간-빛의 휨은 물론 E = mc² 공식에 의한 질량-에너지 변환도 신뢰 받지 못 하였을 것이다.

그 후 많은 별들이 실제위치와 다른 위치에 있는 것으로 관측되었고 그 빛의 휨 현상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한 공간의 휨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같은 별이 블랙홀 같은 중력장에 의하여 두 개 이상 여러 개로, 혹은 띠 모양으로 흩어진 원호(圓弧) 모양으로 관측되는 현상도 나타난다.

이 때문에 한 개의 성운이 네 개로 보이는 것도 있다.
그것은 그 성운과 지구 사이에 강력한 중력을 가진 천체, 혹은 블랙홀이 여러 개가 있어서 빛을 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일으키는 것을 ‘중력렌즈’라고 부른다.

사고실험을 통한 아인슈타인의 이론들이 이렇게 실제로 맞아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3) 일반상대성이론, 휘어진 공간

대장쟁이는 “19. 보이지 않는 힘”에서 인력(중력)의 기이함과 신비함을 언급한 바 있다.
도대체 아무 연결 된 것도 없는데 어째서 천체들은 인력으로 서로를 끌어당기며, 또 끌려들어가지 않기 위해 달리고 있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힘, 그 정체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과학이 대답할 수 있는 영역이 분명 아니다.
과학은 존재나 현상의 근원을 밝혀내는 문제는 외면하고 이미 존재하는 현상만을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마치 빵을 누가 만들어서 가져왔고 어디서 생겼는지 하는 기원 따위는 관심 없고, 그 빵의 모양이나 성분, 맛이 있느냐 없느냐의 현상만을 문제로 삼는 아이와 같다.  

중력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과학자들이 알 바가 아니다.
다만 그 중력이 만들어내는 현상만이 과학탐구의 대상일 뿐이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장과 천체의 운동을 그물망으로 설명하였다.
여기 한 퐁퐁 그물망(뜀뛰기 하는 그물망)이 있다.
그 가운데에 커다란 볼링공이 들어있고 그물망은 그 볼링공의 무게로 인하여 아래로 쳐져있다. 그 주위를 작은 당구공이 돈다.
그러면 당구공은 볼링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천천히 구르다가 볼링공이 있는 곳에 가까이 오면 속도가 빨라지고 다시 그 빨라진 속도로 인하여 다시 멀리 튀어나가게 된다.
혹은 볼링공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게 된다.
마찰에 의하여 속도가 줄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 그물망으로 태양을 도는 혹성들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

상대성이론은 이 그물망으로 공간의 휘어짐으로 설명한다.
즉, 마치 열차 안에서 튕긴 농구공처럼 당구공이 중력장에 이끌려 빨라지면서 쏘옥 끌려 들어가면 상하방향으로 움직인 거리는 길어지지만 원래 그물망의 평면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 속도는 같다는 것이다.

즉, 같은 그물망, 같은 평면인데 그 평면이 휘어져있기 때문에 움직인 거리가 길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중력장이란 공간의 휘어짐에 따른 현상이라는 것이다.

4) 그렇다면 중력이란 무엇인가?

중력은 무엇인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으로, 또 “공간의 휨” 현상으로 설명하였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중력이라는 현상이 어떻게 생겨났고 작용하는 것인지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물망이 중력장과 공간을 훌륭하게 해석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중력의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매어놓은 줄도 없고 끈도 없는데 잡아당기는 그 중력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일반상대성이론을 만들어낸 아인슈타인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러분도 함께 곰곰이 생각해보자.
중력이 무엇이며 왜 중력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아무 매개체도 없는 허공을 운행하는 천체들이 왜 어떻게 서로를 끌어당기는가 말이다.

5) 빅뱅이란 무엇이었을까?

대장쟁이는 가끔 그런 엉터리 같은 상상을 잘 한다.
아인슈타인처럼 사고실험을 하기에는 어림도 없는 낮은 지능의 머리를 가졌지만 엉뚱한 상상이야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대장쟁이 상상으로는.......,
빅뱅(Big Bang)이란.......
우리는 태초에(in the beginning) 시간과 공간이 원래 있었다고 전제하고 빅뱅을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 한 점에 우주(혹은 우주가 될 모든 물질들)가 압축되어 있다가 폭발할 수 있는가 생각한다. 그 어마어마한 압축과 우주공간을 가득 채우는 어마어마한 폭발의 근원, 그 힘이 상상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아니다.
태초에 공간이란 것은 없었다.
시간도 없었다.
시간과 공간은 아직 창조되지 않았다.
빅뱅이란 창조주가 무한한 우주만유의 질량을 한 점(아니 점도 아니다. 공간이 아직 없었으니까.)에 만들어놓고 거기에 시간과 공간을 부여한 사건이다.
공간이라는 피조물이 만들어져 그 점에 부여되자 비로소 그 질량들이 일시에 폭발하여 그 공간을 따라 사방으로 균일하게 흩어지게 된 것이 빅뱅이다.
시간과 공간이 부여되자 모든 존재가 나타난 것이 빅뱅의 사건이다.
그리고 시간이라는 피조물 때문에, 그 시간을 따라 흐르는 빛 때문에, 사방으로 흩어지는 빅뱅의 속도는 그 폭발의 그 힘이 아무리 커도 질량이 무한히 커져서 넘을 수 없는 한계의 벽, 즉 빛의 속도 이내였을 것이다.

중력이란 공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공간이 마치 스프링에다가 쐐기를 끼워 넣은 것처럼, 혹은 뻥튀기처럼 공간이 들어차면서 그 틈을 벌려버린 것이다.
그래서 모든 물체가 공간을 이기고 도로 제자리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 중력인 셈이다.
지금이라도 공간이 사라져준다면 그 물체는 도로 같은 위치에 원위치 될 것이다.
그런데 한 번 창조된 공간은 사라지지 않고 우주만유를 붙잡고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 물체 사이의 공간이 크면 한데 붙으려는 회복력이 떨어지고, 가까우면 증가하는, 그래서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만유인력의 법칙이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 중력이란 공간이 만들어낸 현상인 것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일반상대성이론이, 아인슈타인 역시 그 중력의 정체, 보이지도 않고 줄도 매여 있지 않는데도 작용하는 그 중력의 정체를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그 중력장을 그물망, 즉 공간의 휘어짐으로 설명하였더니 맞아들어간 것이다.
중력이 공간에 의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블랙홀......, 그물망이 푹 꺼진 그 곳은 공간이 사라져버린 곳이다.
공간이 사라지니 당연히 질량만 남고 부피가 없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 점 보다 더 작은, 아니 부피가 아예 없으면서 어마어마한 질량들만 남은 것이다.  

그렇게 빅뱅은 된 것이 아닐까?
그렇게 공간과 시간이 시작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시간과 공간이, 그리고 모든 존재가 시작된 것이 아닐까?
그것이 우주만유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성경이 말하는 시작(Beginning) 말이다.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heavens and earth."

뭐, 이건 어디까지나 대장쟁이의 상상이다.
대장쟁이가 아인슈타인처럼 사고실험을 할 재주는 없고.......

그렇지만........
다른 설명이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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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임 당한 자들과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

[요한계시록 6장과 7장]

이 세상은 이미 정죄되었고 불태우기 위하여 간수된바 되었습니다. 심판과 마지막날은 반드시 와야만 합니다. 그래야 사단이 완전히 멸망당하고 하나님의 완전한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양께서 나아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일곱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를 받으시자 천군천사가 환호하며 엎드려 경배합니다. 그토록 소망하였던 그 날이 온 것입니다.

드디어 어린양이 인을 떼시기 시작합니다. 첫째 인을 떼시자 활을 가지고 면류관을 받은 자가 흰 말을 타고 등장합니다. 둘째 인을 떼시자 붉은 말 탄 자가 나오는데 땅에서 화평을 제하고 서로 죽이게 합니다. 셋째 인을 떼시자 검은 말을 탄 자가 저울을 들고 등장합니다. 넷째 인을 떼시자 청황색 말을 탄 ‘사망’이라는 자가 나와 땅 사분의 일을 검과 흉년과 사망과 짐승으로 죽입니다. 사실 이것은 사도요한이 처음 보는 것은 아닙니다. 이 네 마리의 말은 이미 구약성경 스가랴서에 등장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지막 날에 대한 말씀(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지진과 전쟁과 기근과 죽음과도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다섯 째 인을 떼시자 하나님의 말씀과 증거로 인하여 죽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영혼들에게 친구 종들과 형제들도 죽임을 당할 것이며 그 죽임 당하는 자의 수가 차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들의 죽음과 희생을 막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수가 찰 때까지 기다리시며 진노를 쌓아 심판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섯째 인을 떼실 때 지진이 나고, 해가 검어지고,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떨어지며, 하늘이 떠나가고 산과 섬이 옮겨집니다. 사람들은 두려워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자신들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가려 달라고 애걸합니다. 참으로 무섭고 참혹한 정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날입니다.

계시록 7장에 들어가면 땅을 완전히 뒤집어엎으려고 땅의 네 모퉁이에 선 천사들을 향하여 다른 천사 하나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기다리라고 합니다. 이 장면은 에스겔서 9장에 먹 그릇을 차고 등장하여 살육하는 기계를 가진 여섯 사람을 기다리게 하고 탄식하며 우는 자들의 이마에 표를 하는 모습을 닮아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인 맞은 자들의 숫자, 이스라엘 각지파에 만 이천 씩, 도합 십사만 사천의 숫자를 듣습니다. 그리고 사도요한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찬양하며 모든 천국천사가 엎드려 경배하며 찬양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요한에게 천사는 ‘이 무리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말해 줍니다.

이 ‘십사만 사천’은 참으로 분분한 해석과 논란을 불러오는 숫자입니다. 이 ‘십사만 사천’과 바로 뒤의 ‘아무라도 능히 헤아릴 수 없는 무리’가 같은 무리인가 다른 무리인가, 십사만 사천은 이스라엘 민족이고 셀 수 없는 무리는 각 나라와 민족으로부터 구원받은 무리인가....... 신천지라는 괴상한 이단이 있습니다. 이만희를 보혜사로 믿는 신천지의 한 신도가 이만희가 있는 한국이 바로 천국이며 이 ‘십사만사천’이 거의 찼고, 다 차면 신천지가 시작될 것이며, ‘십사만사천’에 들어가야 ‘주와 함께 다스리게’ 되어 자신의 부모형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방송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어이없었습니다.

계시록이 기록될 당시 사용된 가장 큰 숫자의 용어는 ‘천’이었습니다. 아직 ‘백만’ 곧 ‘밀리언’이라는 용어가 없을 때입니다. 영어를 생각해 보십시오. ‘열천(Ten Thousand)’, ‘백천(Hundred Thousand)' 식 아닙니까? 즉 ’천‘은 당시의 가장 큰 숫자이였고 열둘은 하나님의 충만한 숫자이므로 ’12천‘, ’144천‘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엄청난 숫자라는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숫자를 딱 정해놓고, 겨우 14만 4천명으로 제한해놓고 무슨 입학시험 보듯이 커트라인으로 잘라 구원하시는 분이시겠습니까?

그보다 저는 특히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나오는”은 영어로 ‘have come' 현재완료형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환난을 피한 자들도 아니요 환난을 면한 자들도 아닙니다. ’환난에서 막 나오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환난을 통과해 나오는 자들인 것입니다. 환난 가운데서 믿음으로 인정받은 자들이요 어린양의 보혈로 구별된 자들인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휴거’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어느 날 자동차를 몰다가, 비행기를 몰다가 운전사가, 비행사가 사라져버리고 환난이 시작된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과 함께 전삼년반환난휴거설, 후삼년반환난휴거설도 있습니다. 하긴 어느 누가 그 무서운 환난을 당하기를 원하겠습니까? 그 날을 감하지 아니하시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 할 것이라(마24:22)는 무서운 환난을 당하지 않고 들림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6장에서는 죽임을 당한 자들, 7장에서는 환난을 통과해 나오는 자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구원의 대열에 들어온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에서 마치 용광로에서 정련된 금이 나오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그가 나를 단련한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한 욥의 말이 생각나는 것은 왜이겠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마음을 아시고 폐부를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심판과 환난을 거쳐서 어린양의 피에 적신 흰옷 입은 무리를 이끌어내시는 것은 만일 심판과 환난이 없다면 가라지와 쭉정이와 찌끼까지도 분리되지 않고 함께 거두어질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심판과 환난이 두렵습니까? 두려워 마십시오. 주를 믿는 당신은 염려할 것 없습니다. 철은 용광로 안에서도 사라지지 않으며 금은 아무리 단련하여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금을 찌꺼기와 함께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의 가진 것이 하나님을 향한 참 믿음이고 참사랑이라면, 당신이 어린양의 피에 씻기어 있다면 하나님은 단 한 사람도 단 한 방울의 귀한 어린양의 피도 잃어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어찌 보면 환난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환난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목을 베고 사자에게 던지고 기름가마에 던지는 개인적인 환난이나 믿음의 증거로 인하여 순교의 피를 흘리는 일은 어느 세대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환난은 있습니다. 풍요와 안일, 회의와 증오, 유혹과 타락 같은 믿음을 무너뜨리려는 시험은 매일같이 우리를 공격합니다. 믿음 때문에 핍박당하고, 손해보고 희생당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 혼돈의 시대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이기기 힘 드는 싸움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이 어두운 세상을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순교의 삶입니다. 우리는 지금 죽임당하며 환난을 통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각자에게 닥친 환난을 믿음으로, 사랑으로, 보혈의 능력으로 이겨내십시오. 휴거로 면하려 하지 마십시오. 담대하게 믿음으로 부딪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마지막 날에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죽임 당하거나(6장), 큰 환난에서 나오거나(7장), 둘 중의 하나이어야 할 것입니다

40. 다시 우주물리학 앞에 선다.

우리는 우주여행을 거쳐 인체와 생명의 신비, 그리고 진화론의 문제, 나아가 에너지와 원자력까지 살펴보았다. (대장쟁이의 과거이력과 넋두리까지......)

특히 생명과 생명체가 결코 우연히 생겨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생명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으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결코 과학으로 밝혀낼 수 없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고 생명체는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창조주의 창조주이심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생명체를 지으신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으로도 창조주의 지위는 보장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명체는 이미 존재하는 재료들, 곧 물질을 바탕으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창조는 궁극적으로 모든 물질과 모든 존재의 기원의 문제다.
우주의 모든 물질, 모든 에너지, 모든 현상의 근원의 문제다.
우주의 모든 존재, 모든 에너지, 모든 현상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창조주의 창조는 시간과 공간의 창조에서부터 출발하여 시간과 공간의 문제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

왜 시간과 공간인가?
만일 시간과 공간이 원래부터 존재한 것이라면 창조주도 어쩔 수 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 속하여 시간과 공간의 피조물(우연히 생겨났든 스스로 존재하든)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시간과 공간이야말로 "스스로 존재하는 (I am who I am)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참신, 곧 창조주의 창조는 시간과 공간의 창조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모든 존재를 있게 하는 시간과 공간이 창조의 시작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창조주는 시간과 공간을 지으셨는가?
과연 창조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시간과 공간이 창조주의 손 안에 있는 것인가?

그래서 창조주의 창조에 관한 과학자적인 궁구(窮究)는 결국 우주물리학 앞에 다시 설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아득한 우주물리학 앞에 선다.
인간의 이 조그만 머리와 인식의 한계로는 결코 헤아려볼 수 없다 할지라도......



고전물리학은 아이작 뉴턴으로부터 시작된다.
영국의 아이작 뉴턴은 1705년 앤 여왕으로부터 고학자로서는 처음으로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고 85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국가와 대중으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그는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하였으며, F=ma 로 알려진 뉴턴의 운동법칙으로 자연현상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설명, 해석하는 고전물리학의 장을 열었다.

뉴턴의 운동 제2법칙으로 불리는 F=ma 공식은 관성의 법칙으로도 설명된다.
어떤 물체의 상태, 곧 속도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이 없으면 그대로 지속된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이 없으면 물체는 정지상태를 지속하거나 직선운동을 그대로 지속한다.
또한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에너지는 불변으로 존재한다.
오랫동안 이러한 뉴턴의 물리학법칙은 자연계의 모든 물리적 현상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풀어내는 궁극적인 진리로 믿어졌다.
그러나 X선과 방사선이 발견되고 원자의 구조가 밝혀지고 난 뒤부터 전자기와 원자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고전물리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게 되면서 현대물리학의 시대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였다.

현대물리학은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론인 상대론과 미시세계의 자연법칙인 양자론을 모두 포함하는 이름이다. 상대론은 아인슈타인이 수립하였지만 양자론은 보어, 하이젠베르그, 플랑크, 슈레딩거, 디락 등 수많은 과학자들의 공동노력과 발견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역학과 전자기학은 쿨롱, 가우스, 옴, 암페어, 비올사발, 키르히호프, 패러데이, 맥스웰 등을 거치면서 수많은 법칙들과 이론들이 정립되었다.

그리고 빛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 이미 앞서 이야기 나눈 바와 같이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함께 가지는 빛의 신비를 파헤쳐가던 과학자들은 광속이 일정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것이 아인슈타인으로 하여금 시간과 공간의 문제와 빛의 관계, 즉 빛의 속도로 날아가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즉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빛과 시간과 공간의 관계에 관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성이론이란 세상의 모든 것이 항구불변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움직임의 상태에 따라서 달라지는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빛과 운동속도에 따라 시간과 길이가 달라지는 것을 나타내고 운동량과 에너지의 관계에서 질량과 에너지는 결국 같다는 유명한 공식  E = mc²를 증명해낸다.

1. 속도에 따라 시간차가 난다. (동시(同時)의 상대성)

이것을 설명하는 데는 버스와 전등이 사용된다.
버스의 한 가운데 천정에 달린 전등이 ‘반짝’ 했다고 치자. 버스가 정지되어 있는 상태라면 그 빛이 버스 앞쪽이나 뒤쪽에 도착하는 시간은 버스 안에 있는 사람에게나 버스 밖에 있는 사람에게나 똑같이 관측될 것이다.
그러나 버스가 달리고 있다면 달라진다.
만일 그 버스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반짝’ 하는 빛도 버스와 함께 달리므로 앞에나 뒤에나 동시에 도착한 것으로 관측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버스 밖에 있는 사람이 관측한다면 빛이 버스의 뒤에는 빨리 도착하고 버스의 앞에는 늦게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 말은 바꾸어서 말한다면 빛이 일정한 거리를 달리면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시간=빛이 달린 거리’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1초는 빛이 30만 킬로미터를 진행한 시간이다.
그런데 달리는 버스 안에서는 빛이 더 먼 거리를 달렸기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이다.

만일 버스가 매우 빨라서 거의 빛의 속도에 가깝다고 치자.
그러면 천정에서 ‘반짝’ 한 그 빛이 버스의 앞에 도착하려면 버스의 속도를 따라잡으면서 한참을 달려야 할 것이다.
버스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모른다. 그러나 버스 밖에서 관측하는 사람이 볼 때는 빛이 한참을 따라가서야 버스의 앞면에 도착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즉 버스 안에서 느끼는 시간은 짧지만 버스 밖에서 관측한 시간은 길어지는 것이고 그것은 버스의 속도가 빠를수록 그 시간은 더 길어질 것이다.
만일 버스가 빛의 속도로 달린다면 빛이 버스를 따라잡지 못 하고 같이 달리게 되고 이것은 시간이 정지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다른 설명으로, KTX 열차 안이라고 생각해보자.
대장쟁이가 농구공을 열차바닥에 튕겼다고 치자.
열차가 정지상태라면 농구공이 움직인 거리는 아래위로 튕긴 거리다.
1초 사이에 농구공은 튀었다 떨어지는 약 2미터의 거리를 움직였다.
그러나 열차가 고속으로 주행중이라면 열차 밖에서 보는 사람이 볼 때 농구공은 엄청난 거리를 날아간 것으로 관측될 것이다.
여기에서 농구공이 빛이라고 치고 그 빛이 달린 거리가 시간이라고 쳐보자.
달리는 열차 안에 있는 사람이 느끼기에는 똑같이 농구공이 한 번 튀었다가 떨어졌을 뿐인데 농구공은 엄청난 거리를 달린 것이다.
즉 엄청난 시간이 흘러간 것이다.

이 관계를 간단한 삼각형 그림으로 그려서 피타고라스 정리에 의한 삼각함수로 풀어내면 결국 속도가 빨라질수록 시간은 느려지고 삼각형의 밑변이 무한히 길어지면, 즉 속도가 빛의 속도에 이르면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계산이 된다.
그리고 이 계산공식에서 (수학을 좀 아는 사람이라면 제곱근공식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약간 복잡하므로 생략한다. )  E = mc² 라는 결과가 도출된다.

2. 질량의 에너지변환

자, 앞에서 말한 대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도출된  E = mc² 공식이 과연 실제로 증명되는가?
빛의 속도와 시간의 관계를 가지고 도출한 이 공식이 실제 물리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좀 엉뚱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기도 하지 않은가?
만일 이 공식이 들어맞는다면 모든 물질은 에너지로 변환되고, 만일 물질이 에너지로 변환된다면 그것은 물질의 질량에다 광속의 제곱을 곱하는 에너지가 나온다는 계산이 되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하면.......
예를 들어 1 그램의 물질이 사라지면 그 물질을 광속 곱하기 광속의 거리로 옮기는 일만큼의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1그램의 질량이 소멸되면 그 1그램을 30만 곱하기 30만 킬로미터, 즉 900억 킬로미터, 곧 지구에서 명왕성까지의 거리의 15배의 거리에까지 옮겨놓을 만큼의 에너지가 나온다는 것이다.

핵폭탄(원자력발전도 마찬가지이지만)은 우라늄이나 풀로토늄 같은 물질이 핵분열을 일으켜 다른 물질로 바뀌면서 질량이 바뀔 때, 그 질량이 에너지로 바뀌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맨해튼 프로젝트로 알려진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조차 과연 물질이 소멸될 때 E = mc² 만큼의 에너지가 나올 것인지에 대하여는 현실감을 느끼지 못 하였고 실제로 뉴멕시코 사막에서 이루어진 핵폭탄 실험을 보고서야 그 엄청난 결과에 놀랐다고 한다.

이러한 위대한 발견이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참혹한 파괴가 아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먼저 쓰여 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계속)

39. 우라늄 핵분열과 원자로

앞서 말한 대로 천연우라늄에는 안정적인 우라늄238이 99.3%이고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불안정상태의 우라늄235는 0.7%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원자력발전소의 핵연료로 사용되는 우라늄은 이 천연우라늄을 정제하여 우라늄235가 3~4% 정도 되도록 농축한 것이다.

핵무기로 사용되는 우라늄은 95% 정도로 농축된 우라늄이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서 미소간 핵무기감축협상의 결과로 많은 핵무기가 해체되었다.
아직 남아있는 핵무기만으로도 인류가 몇 번이나 전멸되고도 남지만, 어쨌든 상당량의 핵무기가 감축되면서 핵무기에서 나온 우라늄235를 천연우라늄에 적당량 섞어서 발전소용 우라늄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핵연료봉은 MOX라고 부른다.  

원자로에서 핵분열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것은 중성자로 우라늄235의 핵을 때림으로써 시작된다.
중성자로 핵을 때리면 불안정한 우라늄235는 핵분열을 일으키고 다른 안정적인 원소로 바뀐다.
그리고 그 질량 차이만큼 에너지를 내면서 중성자 세 개 정도를 아울러 내놓는다.
그러면 그 중성자들은 다른 우라늄235를 때려서 핵분열을 일으킨다.
그렇게 해서 핵분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한 놈을 쥐어박으면 그놈은 열을 내고 쪼개지면서 중성자로 그 옆의 놈들을 또 쥐어 팬다.
그러면 그 옆의 놈도 열을 내고 쪼개지면서 중성자로 그 옆의 놈들을 쥐어박는다.
그래서 원자로 안은 우라늄 235들끼리 중성자로 쥐어 패고 열 내고 쪼개지는 난장판이 벌어진다.
인간은 고걸 이용해서 ‘으흐흐.... 열심히 싸워라......’ 그 열로 물을 가열하고 증기를 만들어서 터빈발전기를 돌린다.

중성자를 얻어맞는다고 다 쪼개지고 갈라지는 건 아니다.
우라늄238은 점잖게 중성자를 모른 체 하기도 하고 중성자를 받아들여 제식구로 만든 다음 풀로토늄으로 바뀌기도 한다.
또 중성자들이 난리를 치는 걸 그냥 두면 너무 과열되기 때문에 카드뮴 봉을 연료봉 사이에 집어넣어 중성자를 흡수해서 줄이고 원자로 냉각수에다 붕산(Boron Acid)을 넣어서 중성자들을 감속시키고 진정시킨다.

원자로를 안전하게 돌리는 것은 냉각재와 중성자감속에 달려있다.
드리마일아일랜드나 체르노빌, 후쿠시마 원전은 모두 원자로냉각재, 즉 물이 원자로에 제대로 공급되지 못 하는 냉각재상실사고, 그래서 우라늄봉이 물로 냉각되지 못 하고 허공에 노출되어 녹아버린 사고이다. 우라늄봉이 녹으면 우라늄이 흘러나오고 위험이 확대된다.

드리마일 아일랜드 원전은 이러한 상황에서 원자로건물 상부에 설치된 비상분무기로 붕산수가 뿌려지고 비상냉각수가 회복되어 그 정도에서 다행히 사고를 수습하였다.
그러나 후쿠시마 원전은 이러한 상황에서 그러한 안전시설이 작동하지 못 하였다. 동경전력관계자들이나 관료들은 상세한 정보를 밝히지 않고 숨겼다. 미국의 기술지원도 거부했다.
궁여지책으로 바닷물을 퍼 넣었다. 소방차를 동원하고 헬기를 동원하여 건물 안으로 퍼 넣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인하여 바닷물에 섞인 여러 가지 불순물들이 방사성동위원소로 바뀌어 오염되고 그 오염된 바닷물이 증발되어 주변으로 확산되고 바다로 흘러들어가 광대한 지역을 방사능으로 오염시키고 말았다.

냉각재 다음이 중성자감속이다.
중성자를 어떤 방식으로 감속시키고 조절하느냐에 따라 원자로의 노형이 달라진다.
서방의 대표적인 원자로형은 가압경수로이다.
경수(輕水)란 가벼운 물, 즉 보통 물을 말한다.
원자로계통에 물을 높은 압력으로 순환시키면서 붕산을 넣는 것이다. 붕산의 농도에 따라 중성자의 속도가 달라진다.
그리고 연료봉 사이에는 카드뮴 봉을 집어넣는데, 운전중일 때는 카드뮴 제어봉이 위로 들려져 있다가 원자로를 정지해야 할 경우에는 자동적으로 아래로 떨어지면서 카드뮴이 원자로 안으로 들어가 중성자를 흡수하여 원자로를 세우도록 설계되어 있다.

한국의 다른 원자력발전소들은 전부 가압경수로들이다.
그런데 월성원자력은 중수로이다.
중수로(重水爐)는 무거운 물, 중수(重水)를 사용하는 원자로라는 뜻이다.
보통의 물(輕水)은 H2O인데 중수는 D2O이다.
무슨 뜻인고 하니 수소원자 두 개, 산소원자 하나는 같은데 중수를 이루는 수소원자는 중성자가 두 개인 수소, 즉 중수소(重水素) 'D'이다.
이 중수소는 자연계에 흔하지 않다. 깊은 호수나 바다 밑에서 정제해서 얻는데 매우 비싸다(월성원자력 직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박대통령이 마시던 시버스 리걸 양주보다 더 비싸다고.....).
또 중수소는 수소폭탄의 원료가 된다.

월성원자력의 중수로는 중수를 냉각재로 사용하면서 천연우라늄을 사용한다. 즉 우라늄 238이 대부분인 천연우라늄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라늄 235가 빨리 소진되기 때문에 우라늄연료봉을 자주 바꿔주어야 하고 그래서 운전 중에도 원자로를 정지시키지 않고 교체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당연히 발전소 안에 쌓이는 폐연료봉의 양도 가압경수로에 비하여 훨씬 많다.

이러한 월성원자력의 중수로는 캐나다(AECL: Atomic Energy Canada Limited)에서 개발된 것이다.
천연우라늄을 사용하면 우라늄 비용은 줄지만 중수비용이 너무 비싸 경제성에서 유리한 것은 없다.
그런데 천연우라늄에 많이 들어있는 우리늄238이 중성자를 흡수하여 풀로토늄239로 바뀌는 양이 훨씬 많아질 수밖에 없으므로 박정희 대통령이 풀로토늄 핵폭탄을 염두에 두고 미국의 견제를 뚫고 캐나다의 중수로를 도입하였다는 추측이 나온다.  

비등수형원자로(BWR)는 가압경수로형이 원자로계통과 터빈계통을 완전히 분리하는데 비하여 원자로에서 증기가 직접 터빈까지 가서 터빈을 돌리는 적극적인 시스템을 사용한다.
좀 더 높은 효율성으로 미국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고, 그리고 최근 중국에서도 채택되고 있다. 한국에는 없다.

구소련에서 개발된 체르노빌원전 같은 원자로는 경수를 냉각재로, 그리고 인공흑연을 감속재로 쓴다.
천연우라늄을 사용한다.
흑연으로 만들어진 파이프들이 핵연료를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원자로가 서방의 가압경수로와는 판이하게 다르고 크기도 훨씬 더 크다.
이러한 원자로는 핵무기를 만들기 위한 플로토늄 생산을 위한 원자로를 발전용으로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서방의 가압경수로는 원자로가 1미터 이상 두께의 튼튼한 철근콘크리트 건물에 들어가 있는데 체르노빌 같은 구소련의 원자로들은 일반건물과 별로 다르지 않은 건물로 지어져 있었다.
체르노빌원전사고는 냉각수상실로 노심이 용융되고 인공흑연들이 연소하면서 엄청난 연기를 뿜어내면서 원자로건물지붕을 날려버리고 방사능물질들이 확산된 사고이다.

흑연감속로에는 구소련의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 말고도 용융염원자로, 영국에서 개발된 마그녹스라는 노형도 있고 영국이 이를 개량한 개량가스냉각로라는 노형도 있다.
그리고 서구의 원자로들도 안전성을 높여 비상상황에서 굳이 조작하지 않고 가만 두어도 자동으로 냉각, 정지, 안정되는 방향으로 기기와 설비가 작동되도록 하는 안전원자로(Passive Reactor)의 모델이 제시되는 등 꾸준히 연구되고 있다.
또한 벨기에를 주축으로 추진하고 있는 미래형원전에 참여하는 문제도 한국이 추진해야 할 과제이다.

핵연료가 사용되고 나면, 대표적인 가압경수로의 경우를 보자면, 우라늄238 95% 정도, 풀로토늄 0.9%, 우라늄235가 분열되어 다른 물질로 변화된 물질들이 3% 정도 된다.
그리고 우라늄235인데도 아직 남아 있는 미연소 우라늄도 0.8%정도 된다.

이쯤에서 핵폐기물 문제를 좀 짚어보기로 하자.
우선 발전소에서 나오는 핵폐기물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용하고 난 핵연료, 고준위폐기물이다.
둘째는 운전중 방사능으로 오염된 쓰레기들이다.
방사능이란 놈이 멀쩡하던 다른 물질을 방사성동위원소로 만들어서 방사능이 나오게 오염시킨다. 이를 저준위폐기물이라고 한다.
저준위폐기물은 고체, 액체, 기체폐기물로 나누어 처리하는데, 누르고 태우고 끓이고 압축시켜서 부피를 줄인 다음 드럼통에 넣어서 폐기물저장고에 집어넣는다.
더 큰 문제는 사용하고 난 핵연료, 고준위폐기물이다.  

사용하고 난 핵연료는 금방 식는 게 아니고 계속 열이 난다.
연탄재가 금방 안 식는 것처럼....
한국의 원자력발전소에서는 이것들을 큰 콘크리트 물탱크에다 넣어두고 냉각시킨다. 그렇게 물속에 쌓아둔 사용후핵연료가 엄청나게 많다. 앞으로 5년 정도 지나면 더 이상 보관할 데가 없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영구방폐장을 건설하려고 했는데 환경단체들이 들고 일어나고 주민들이 결사반대하여 안면도, 굴업도, 울진, 영덕, 부안으로, 쫓겨 다니다가(부안군수는 방폐장 유치하자고 했다가 돌 맞았다.) 지금 경주에 방폐장을 건설하고 있는데 앞으로 더 크고 더 넓은 방폐장이 더 필요하게 될 것이다.

영국, 프랑스 같은 나라는 지하에 저장한다.
폐기물저장소 이에 공원까지 꾸며놓았다.
스웨덴 같은 나라에는 바닷가의 천연동굴을 개조하여 방페장으로 사용한다.
일부 국가에서는 6~7년 지난 핵연료는 열이 좀 덜 나므로 물에서 끄집어내어 공기냉각식 저장고에 보관하기도 한다.

미국은 이미 오래전에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하지 않고 영구보관하는 방향으로 정책결정을 하였다.
네바다 유카마운틴인가 오하이오엔가 엄청난 규모의 방폐장을 건설하고 영구처리를 하고 있다.
미국에서 원자력을 들여오고 한미원자력협정을 맺고 있는 한국도 마찬가지로 영구보존처리방식을 택하고 있다.
미국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재처리하면 나오는 엄청난 양의 플로토늄이 핵폭탄으로 전용될 수 있다는 우려, 그래서 모든 국가로 하여금 아예 재처리를 못 하도록 금지하고 미국 스스로도 솔선수범하는 모양을 취하는 것이다.
프랑스와 일본만이 재처리를 하고 고속증식로를 건설하여 시험운전을 하고 있다. 시험케이스인 셈이다.

한국은 2014년에 한미원자력협정이 갱신되는데 일본처럼 핵연료재처리를 할 수 있도록 요구할 것인가, 지금처럼 방폐장 지어서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지만 계속 보관만 하고 있을 것인가를 결정하고 앞으로의 원자력추진방향을 협의해야 한다.

프랑스의 수퍼피닉스, 일본의 몬주 고속증식로(Fast Breeder Reactor)는 이미 사용된 핵연료를 계속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풀로토늄을 분열시키면서 계속 풀로토늄을 만들어내는, ‘때면 땔수록 연료가 불어나는’ “꿈의 원자로”라 불린다.
고속증식로가 되면 지금처럼 폐연료봉이 거의 나올 필요도 없고 오히려 지하에 저장되었던 사용후핵연료를 꺼내서 재사용할 수도 있다.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일본이 몬주에 고속증식로를 짓고 운전하고 있지만 사용되는 액체금속냉각재(소듐)로 인하여 많은 문제를 겪고 있다.

소듐은 가열상태에서 산소나 물, 콘크리트 등을 만나면 화재와 폭발을 일으킨다. 또한 섭씨 98도 이하로 떨어지면 고체가 되어(물이 얼어붙는 것처럼) 동파를 일으키고 파이프와 용기 등 시설을 망가뜨린다.
이 때문에 일본의 몬쥬 고속로는 화재사고로 10년 이상 정지되어 있다가 수리를 마치고 잠깐 운전에 들어갔다가 다시 정지되고 말았다.

원자로 이야기는 이 정도로 마치자.
그런데 한국에서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했던 실무경험자로서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믿는 대로 원자력발전은 그리 경제적이지 않다.
원자력은 적은 핵연료로 엄청난 에너지를 얻는 것이기 때문에 원자력 에너지는 쌀 것이라고 기대하였지만 미국의 경우 원자력 에너지가 화력보다 더 쌌던 적은 없다.
더구나 1979년 드리마일 아일랜드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강화된 원자력규제요건으로 원자력발전소 건설비는 폭등해버렸다.
한국도 최근 들어 석탄화력의 발전단가가 대용량화와 기술개발, 표준화로 원자력보다 오히려 더 유리하다.  
그리고 핵연료의 특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라늄 238은 전혀 사용도 못 하고 풀로토늄도 못 쓰고 우라늄235만 조금 쓰고는 핵연료를 통째 영구폐기처분을 해야 하는 점도 원자력의 경제성을 제한하는 원인이 된다.

그런데 한국만이 예외였다.
원자력의 놀라운 경제성을 보여준 유일한 국가가 대한민국이다.
특히 고리 1호기가 그랬다.
세계에서 그처럼 값싸게 건설한 원자력발전소는 없었다.
고리 3, 4호기(95만kw 2기) 건설비는 2조 2,000억원 정도 들었다.
대장쟁이가 땀 흘린 영광 1,2호기는 고리 3,4호기 설계를 복제하였기 때문에 설계비용이 절감되었고 총공사비 2조 440억원이 들었다.
이 역시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원자력발전소 건설이었다.

미국에서는 70~80개월이나 걸린 건설공사를 한국사람들은 60개월 이내 마쳐버렸다.
밤샘작업, 돌관작업, 무휴작업.......
그야말로 미친 듯이 일했다.
80년대 초반 미국의 용접사 인건비가 시간당 25불일 때 한국의 용접사는 일당 20불이었다.
한국의 인건비수준이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 하였다.
당시 대장쟁이가 받던 봉급(월 2~30만원) 또한 세계최저임금수준이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면서 밤새우고 머리를 싸매고 하루라도 빨리 건설해야 한다는 국가적 사명감으로 젊음의 피를 짜내었다.

그 결과로 한국의 원자력발전소의 발전원가는 세계에서 유례없이 저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원자력발전소에서는 연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낮고 발전원가의 절반 이상이 건설비용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포항제철의 신화가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하는가?
역시 7~80년대, 세계에서 가장 값싸면서도 우수한 인력 때문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조선, 자동차, 중공업 마찬가지다.
7~80년대에 피땀 흘리면서 바친 세계 최저렴, 최우수 인력이 이루어놓은 것이다.

원자력발전소가 그처럼 저렴한 원자력전력을 생산해내자 많은 기생충들과 업둥이들이 한전에 달라붙었다.
정부관계자들, 핵폐기물 연구한답시고 10년 세월 유럽관광이나 다니던 박사들, 수많은 연구소들, 기술자립을 핑계로 한 한전 뜯어먹기......
영광3,4호기는 기술자립한답시고 그렇게 시작되었다.
달라는 대로 주고 가르쳐가면서 기자재를 사줘서 살려낸 한국중공업....... 거저먹기 원자력연구소.......
에이, 이런 이야긴 그만 두자.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일본이 지금 몬쥬 고속증식로를 시험가동하고 있다.
일본은 고속증식로기술을 개발하여 앞으로 세계원자력시장을 석권해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대장쟁이가 볼 때 고속증식로가 일본에게 그러한 영광을 가져다주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물론 우라늄을 수십 배나 더 사용할 수 있는 고속증식로는 매력적이기는 하다. 그러나 원자력발전소의 전력단가를 결정하는 것은 우라늄, 핵연료가 아니다. 그리고 지구상의 우라늄이 고갈된다면 몰라도 우라늄을 지금처럼 사용한다 해도 앞으로 100년은 더 갈 수 있기 때문에 세계 각국이 고속증식로를 애써 개발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속증식로가 액체금속냉각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 한다면 더욱 어려울 것이다. 기존 가압경수로 같은 재래식 원자력발전소에 비하여 건설비가 훨씬 비쌀 수밖에 없는 고속증식로를 어느 나라가 위험을 무릅쓰고 도입할 것인가?

결국 사람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과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전력공급, 세계에서 가장 강한 경쟁력......., 모두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었던 것이다.

에고~
대장쟁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여?

아, 한 가지 빠뜨린 중요한 이야기 더 있다.
일본 말이다.
안 된 이야기지만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으로 참변을 당한 일본이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였고 2011년 3월 11일 일본북동부를 뒤흔든 지진과 쓰나미로 후쿠시마원전이 노심용융을 일으키고 방사능을 누출하는 최악의 사고를 당하였다.

그런데 몬쥬.......
몬쥬 고속증식로가 설치된 지역도 지진 안전지역이 아니다.
몬쥬 고속증식로에서 만일 최악의 사고가 난다면 막대한 양의 풀로토늄 때문에 후쿠시마보다 더욱 무서운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왜 지진대에 놓여있는 일본이 그토록 원자력발전소에 집착해왔는지.......

핵융합?
태양에서 일어나는 핵융합을 지구에서 만든다면?
인공태양?
수소원자 두 개를 합쳐서 헬륨원자 한 개를 만들고 그 질량 차이만큼 에너지를 얻는 핵융합반응로를 개발한다면 이건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라늄의 핵은 크지만 수소의 핵은 매우 작다.
따라서 아주 고온으로 만들어, 수천만도, 1억 도의 고온 플라즈마를 만들어야 핵융합반응이 일어나는데 그러한 고온을 견딜 수 있는 그릇을 만들 수가 없다. 공중에 띄워놓는 방법도 없고.......
그래서 수소폭탄은 가능하지만 핵융합로는 지금으로서는 그야말로 꿈일 뿐이다.

에고~
아무튼 원자력은 그렇다.
어서 원자력을 대체하는 꿈의 에너지원이 개발되었으면,
그리하여 방사능 걱정 없이 마음 놓고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다.

에고~
오늘도 너무 길었네.
어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야 할텐데.......

38. 에너지와 발전소 이야기

‘에너지’라는 말은 참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활력 있는 사람에게 에너지가 넘친다고도 하고, 어떤 보이지 않는 기운이나 힘,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리학에서는 에너지를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물리학에서 또 ‘일’이란 어떤 물체를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물리학적으로 에너지는 열에너지, 전기에너지, 위치에너지 등으로 구분하고, 산업적으로는 수력에너지, 화력에너지, 원자력에너지, 태양력, 풍력, 조력 에너지 등으로 구분한다.
또 자동차 같은 기계장치를 구동하는 원동기(엔진)나 가정용 난방시설을 운용하는데 사용되는 기름, 석탄 같은 연료도 화석에너지로 부른다.

대한민국은 오늘날 8,000만 킬로와트가 넘는 발전설비를 보유한 나라가 되었다. 그야말로 경이적인 발전설비 세계 최단기간 성장기록을 세운 나라이다.

1945년 해방당시, 그리고 1948년 5월 14일 북한의 일방적인 단전시 한국의 발전설비는 그야말로 보잘 것이 없었다.
60만 킬로와트 짜리 수풍수력, 모두 80만 킬로와트에 달하는 장진강, 부전강, 허천강 발전소 등 거의 대부분의 전력설비는 북한에 있었고, 남한에는 왜정시대에 건설된 2만5천 킬로와트 짜리 터빈발전기 네 대에 보일러 여덟 대를 연결해 놓은 총 10만 킬로와트 짜리 영월 구화력, 서울 당인리화력 2만 5천 킬로와트 발전소 두 개, 춘천, 의암, 청평의 조그만 수력발전소, 부산항 부두에 매어놓은 레지스탕스호 발전함 3만 킬로와트가 거의 전부였다.  

6.25 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화천발전소 확보와 사수를 명하였고 화천수력을 뺏고 빼앗기지 않으려는 전투로 3만 명 이상의 젊은 국군장병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지금 보면 겨우 12만 킬로와트 짜리 작은 수력발전소이지만 당시로서는 휴전 후 남한의 전력사정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산업시설이었던 것이다.

대장쟁이의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수풍수력 하나만 있었으면 남한의 전기는 풍족할 텐데.....” 하시던 이야기는 아직도 뇌리에 또렷하다.
가정에서 쓰는 전기래야 백열등을 켜는 수준이었던 당시, 그러나 일반선은 날이 어두워지면 들어왔다가 통금시간이 되면 꺼지고 특선이래야 온종일 쓸 수 있었는데 그나마 껌뻑거리고 정전되기 일쑤였던 당시 전기사정을 나이 드신 분들은 다 기억하시리라.

그런 전기조차 서민들에게는 얼마나 비쌌던지 조그만 백열등 하나를 방 두 개 사이에 난 구멍에다 매달아놓고 함께 쓰고, 화장실 가는 길에는 푸른 색 5촉짜리 컴컴한 등 한 개 달아놓고, 그나마 아까워서 달달 떨면서 쓰던 전기......,
두꺼비집을 몰래 열고 전선껍질을 깐 다음 계량기를 거치지 않도록 전선을 연결해서 전기를 훔쳐 쓰고, 전선주에 몰래 연결해서 도적질해 쓰고, 남의 집에 들어가는 전깃줄에 연결해서 몰래 쓰는 전기도적질이 또 얼마나 성행하였었던지.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다음 혁명정부가 추진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조선전업, 경선전기, 남선전업 등 민간삼사를 강제로 통합하여 국영화하고 강력한 전력자원개발을 추진한 것이다.
군사혁명 후 불과 한 달 반 뒤인 7월 1일에 한국전력주식회사가 발족된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군사혁명정부는 “새벽종이 울렸네.”, “잘 살아보세.” 새마을운동과 함께 전원개발특례법, 토지수용법 등 법제도를 마련하고, 차관을 빌려와 당인리 2, 3호기, 마산화력, 삼척화력 등을 건설하고 기술요원을 미국으로 보내어 교육시키고 팔당댐, 남강댐을 막는 등 전력설비를 늘이는데 안간힘을 썼다.

대장쟁이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추진되던 1969년 2월에 한국전력에 입사하였다.
입사당시 한국의 전력설비는 모두 163만 7천 킬로와트에 불과하였다.
아직도 영세성이 꾀죄죄 흐르는 한국전력이었던 셈이다.
(오늘날은 원자력 발전소 하나가 100만 킬로와트를 넘고 총발전설비는 8,000만 킬로와트에 이른다. 격세지감이 따로 없다.)
1968년을 끝으로 당시까지 다니던 전차가 철거되고 있었고 서울화력 5호기 25만 킬로와트짜리 터빈이 한강인도교를 건널 수 있느냐, 없느냐로 신문이 떠들기도 했었다.

대장쟁이는 가끔씩 쓸데없는 쪽에 기억력이 좋을 때가 많다.
한국전력 설비규모 163만 7천 킬로와트, 자본금 460억원, 총자산 1,519억원, 1968년 순이익 74억원, 종업원수 12,000 명....... 40년이 넘게 지난 아직도 외우고 있는 숫자들이다.
경부선 길이, 지구둘레, 지구-달 거리, 지구-태양간 거리, 에베레스트 산 높이....,, 이런 돈 안 되는 것들도...., 억지로 외우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쨌든 당시 한국전력의 자본금, 자산규모, 순익규모를 보라, 물론 당시 화폐가치가 높긴 했지만 국가의 전력회사가 얼마나 영세하였던지......

그리고 30년 세월이 지난 후, 대장쟁이가 한국전력을 떠나던 1998년, 한국전력의 발전설비는 5,500만 킬로와트를 넘어서고 있었다.
자본금은 3조 2천억, 자산규모는 62조원.....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값싸게 전기를 쓸 수 있는 나라가 되어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값싼 산업전력 공급으로 기업들은 수출에 열을 올렸고 국민들은 에어컨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세월동안 대장쟁이는 발전소 운전원으로, 그리고 원자력발전소 건설 엔지니어로 뼈 빠지게 일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쁜 한국전력 같으니라고. 대장쟁이를 포함한 2,369명을 명예퇴직금까지 빼앗고 밀어내다니....... 일부 퇴직자들이 퇴직금반환청구소송을 했더니 퇴직금을 "근로기간중 채권, 채무의 정산'이라는 해괴한 해석을 붙여 원고패소판결을 한 법원, 대한민국이 법치국가라고?)

다시 돌아가서, 1970년 여름, 경부고속도로 428킬로미터가 준공되었다. 총공사비 450억원.
그리고 이듬해 또 하나의 거대 프로젝트가 발표되었다, “수풍수력에 버금가는 55만 킬로와트 짜리 고리 1호기 원자력발전소 총공사비 550억원으로 건설추진”.

박정희 대통령이 고리1호기 기공식 축하연 케이크를 자를 때 그랬단다.
케이크를 원자력발전소 모양으로 만든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걸 나이프로 자르라 하니 박 대통령이 좀 머뭇거렸던 모양이다.
그 때 옆에서 장기영 총리, “각하, 자르십시오, 한 쪽은 고리 1호기, 다른 쪽은 앞으로 건설될 후속기입니다.”라고 말했단다.
그제야 박 대통령은 “아, 그래요?” 하고 케이크를 힘차게 잘랐단다.

고리 1호기는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978년 4월에 준공되었다.
실제 전기출력은 58만 7천 킬로와트, 실제 투입된 총공사비는 1,280억원.
이 고리 1호기는 준공되던 해에만 한국전력이 그 해에 올린 순이익 600억원 중 300억원을 혼자 달성하는 효자 발전소가 되었다.
(아, 지금 늘어놓는 이런 모든 숫자와 날짜들도 대장쟁이의 기억에 의한 것이다. 혹시 착오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1978년에 준공된 고리 1호기는 거저주운 거나 마찬가지였다.
고리 1호기는 발전원가가 다른 화력발전소의 10분의 1밖에 안 되는 공짜와 다름없는 전기, 그야말로 돌리기만 하면 이익이 펑펑 쏟아지는 전기를 생산해내는 발전소가 되었던 것이다.

불과 1,280억 원의 공사비(나중에 건설된 원자력발전소들은 공사비가 1조원을 넘어간다.)로 웨스팅하우스가 건설해준 고리 1호기는 킬로와트아워당 2원 정도에 불과한 전력원가로 전력을 생산해 냄으로써 한국전력은 많은 이익을 올려 견실한 재무구조를 확보하고 이후 계속 원자력발전소와 화력발전소들을 건설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축적하게 되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값싼 전력을 공급할 수 있게 된 것(산업전력을 기준으로 보면 한국의 전력요금은 일본의 40%, 미국의 60% 수준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이 세계최강의 수출경쟁력을 갖추게 된 것은 전적으로 박대통령의 선견지명에 의하여 도입된 고리 1호기와 그리고 우수한 기술과 인력을 값싸게 제공한 대장쟁이 같은 산업전사들 덕분이다.

최근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계기로 설계수명이 다 한 고리 1호기를 일부 설비를 교체하여 계속 운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 하고, 비상디젤발전기의 위치가 쓰나미를 전혀 대비하지 못 하고 있다는 지적과 비판이 있지만, 고리1호기가 대한민국 전력산업과 경제개발의 일등공신임에는 틀림없다.  

미국은 전력설비 면에서 상황이 그리 좋지 못 하다.
미국 전역에 100기가 넘는 원자력발전소가 있지만 대부분 60~70년대에 건설된 노후화된 발전소들이다.
1979년 발생한 드리마일 아일랜드 원전사고 이후 미원자력규제위원회(NRC)가 원자력발전소 설계요건을 크게 강화하자 건설비가 급등하고 건설중이던 발전소까지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더욱이 1986년 4월에 발생한 체르노빌원전사고는 미국의 원자력산업을 싸늘한 빙하기로 밀어 넣고 말았다.
이후 30년이 넘도록 미국에서 원자력발전소는 단 하나도 더 건설되지 못 하였다.

물론 미국에는 원자력발전소 말고도 수많은 화력과 수력발전소들이 있기는 하지만 문제는 이제 원자력발전소들이 거의 노후화되었고 그러나 이를 대체할 발전설비의 투자가 쉽지 않다는 데에 있다.
또한 아울러 송배전설비 등 전력설비도 너무 오래 되어 낡았다는 점이 미국의 전력설비의 골칫거리가 되어가고 있다.


(너무 길면 여기쯤에서 쉬었다가 읽으세요, 지송~^_^)


서설이 길었다.
어쨌든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가장 일반적인 전력원은 수력과 화력이라고 할 수 있다.
수력(水力)발전은 댐을 막아 물의 낙차를 이용하여 수차(水車)를 돌리고 수차에 연결된 발전기에서 전기가 나오게 하는 가장 간단한 구조를 갖는다.
고낙차에서는 펠턴수차, 중낙차에서는 프란시스, 카플란 수차, 저낙차에서는 프로펠러 수차가 사용된다. 한국의 수력발전소들은 대부분 프란시스 수차나 카플란 수차이다.

수력발전소는 댐을 건설하는데 많은 비용이 들기는 하지만 일단 발전소를 건설하고 나면 연료가 들지 않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그러나 강수량이 많지 않을 경우 이용률이 떨어지므로 그리 경제적이지는 못 하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낙차가 크지 않고 유량이 많지 않아 남한지역의 모든 하천을 다 막아서 수력발전을 한다 해도 (이를 포장수력이라고 부른다) 발전량이 250만 킬로와트, 원자력 발전소 두어 기의 용량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은 발전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홍수조절과 농업, 공업용수공급에 보다 큰 목적을 두어 ‘다목적댐’으로 건설한다.
바다의 밀물과 썰물을 이용하는 조력발전도 한국의 서해의 곳곳을 다 막아서 조력발전소를 만든다 해도 200만 킬로와트 정도를 얻을 수 있는 정도일 뿐이다.
결국 오늘날 한국의 수력, 조력은 전력공급 면에서는 미미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다.

태양력은 캘리포니아나 애리조나 사막 같은 곳이 좋다. 그러나 이 역시 경제적이지는 못 하다.
집광판(集光板)을 수백만 평, 수천만 평 넓은 면적의 땅에 설치해야 하는 것도 그렇고, 특히 야간, 비오거나 흐린 날에는 발전이 불가능해지는 것도 문제이다.
따라서 태양광발전은 개별적으로 가정이나 시설에 갖추는 것은 몰라도 상업적 발전용으로는 현실성이 떨어진다.
풍력발전도 상황은 비슷하다.

따라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발전소는 여전히 연기를 뿜어내는 화력발전소들이다.
한국의 경우 화력발전소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60%가 넘고 이 중 거의 대부분은 석탄(호주, 인도네시아 등에서 들여오는 수입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50만 킬로와트급 발전소들이다.
과거 60~70년대에는 불과 2만 5천 킬로와트급 조그만 석탄발전소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점차 대용량화하여 오늘날은 수 십 기의 50만 킬로와트급 신형화력발전소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한국의 원자력발전소는 현재 20기 정도가 운전 중이고 몇 기가 건설중이다.
전체발전에서 원자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30~35% 정도 된다.

화력발전소들 중에는 LNG가스를 연료로 사용하는 것들도 있다.
LNG는 연소가스가 깨끗하기 때문에 도시지역에 주로 건설되어 있는데 연료비가 워낙 비싸 전력생산단가가 높은 결점이 있다.
경유를 사용하여 가스터빈을 돌리는 가스터빈발전소도 있고 가스터빈에서 나오는 뜨거운 배기가스를 회수하여 보일러에 집어넣어 활용하는 가스터빈-화력 복합발전소도 있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디젤엔진을 사용하는 내연기관발전소도 있었다.
이러한 발전소들도 전력사정이 어려울 때는 유용했지만 전력생산단가가 비싸서 점차 퇴출되었다.

대표적인 발전소인 석탄화력 발전소들의 구조와 원리는 이렇다.
석탄을 컨베이어로 옮겨 석탄미분기에 집어넣어 밀가루보다 더 곱게 빻는다.
그 미분탄을 뜨거운 공기와 함께 보일러에 불어넣어 연소시킨다.
보일러 안에는 수많은 튜브들이 있고 그 속에는 물이 흐른다.
그 물은 보일러급수펌프로 엄청난 고압(약 200기압 이상)으로 보일러에 공급된 것이다.
급수가 보일러에 들어오기 전에 급수가열기들을 거치면서 상당히 뜨거워진 상태가 된다.

보일러 안에서 튜브를 흐르며 가열된 물은 증기드럼에 들어가서 증발된다.
증발된 증기는 다시 과열기라고 부르는 튜브를 통과하면서 섭씨 약 550도, 150 기압으로 과열된 고온고압증기가 되어 터빈을 돌리게 된다.
터빈은 1초에 60회전 (3,600 rpm)으로 회전하면서 같은 축으로 연결된 발전기를 돌려 전기가 생산되게 된다.

그런데 터빈을 돌리고 난 증기는 어떻게 되는가?
터빈을 돌리고 난 증기를 대기로 내보낸다면 아직도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증기를 공중으로 내다버리는 결과가 된다.
그리고 증기로 날아가는 양만큼 물을 계속 보충해주어야 하는 문제도 생긴다.

그렇다면 진공을 만들고 증기를 진공까지 계속 흐르도록 한다면 증기로 하여금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터빈 출구에 복수기를 설치한다.
복수기에는 엄청나게 많은 바닷물 튜브들이 지나면서 냉각시키고 증기는 복수기의 진공에 끌려들어가면서 그 흐르는 힘으로 계속 터빈을 돌린다.
그리고 물로 응축되어 회수된 다음 다시 보일러로 돌아간다.
이것을 열역학적으로 카르노 사이클, 재생재열 사이클 같은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생략하기로 한다.  
아무튼 이것이 간략하게 말한 화력발전소의 구조이다.

대장쟁이는 그 발전소에서 뜨거운 과열증기가 흐르는 배관들과 계기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아황산가스를 들이키며 뜨거운 버너를 교체하며 수많은 밤을 지새며 젊은 날을 보냈다.
다른 발전소이지만 끔찍한 사고도 있었다.
과열증기배관이 터져서 그 뜨거운 증기에 몇 사람이 그만.......!
또 발전기에 들어가는 수소, 그 수소병이 폭발하는 바람에 산산조각이 난 사고.......,
그런 위험한 곳에서 나를 지켜주신 것은, 이제 와서 돌아보니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또 잠시 휴식)



어쨌든 화력발전소는 그렇고, 원자력발전소는 무엇인가?
원자력발전소는 터빈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생산한다는 점에서는 기본적으로 화력발전소나 같다.
다만 석탄이나 가스, 벙커씨유(Bunker-C Oil)를 태우는 보일러 대신 우라늄의 핵분열을 이용하는 원자로설비를 가진 발전소이다.
그런데 원자로설비가 보일러보다는 더 복잡하고 위험하고 비싸다.

원자로에 사용하는 핵연료는 우라늄이다.
그런데 천연우라늄에는 우라늄 235는 불과 0.3%이고 나머지 99.7%는 쓸모없는 우라늄 238이 들어있다.
그래서 천연우라늄으로부터 우라늄 235를 뽑아내는 농축과정이 필요하다.
이 때 사용하는 방법은 우라늄을 가스화해서 원심분리기로 고속회전 시켜 비중차를 이용하여 우라늄 235의 비중을 높여가는 방법이 주로 사용된다.
이렇게 해서 우라늄 235를 95% 이상 농축하면 우라늄 원폭이 된다.
우라늄 원폭은 플로토늄 원폭과 달리 고온을 발생시키는 다이너마이트 뇌관이 필요 없다.
다만 우라늄을 따로 떼어 놓았다가 한데 합치기만 하면 임계점을 넘는 우라늄이 저절로 핵분열을 일으켜 폭발하게 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북한은 파키스탄으로부터 도입한 원심분리기 2,000 대를 서방의 원자력전문가에게 공개한 적이 있다.

원자력발전소에서 사용하는 핵연료는 우라늄 235가 3~4% 정도로 농축된 것이다.
그러므로 원폭과 같이 폭발할 수가 없다.
핵폭탄용 우라늄이 순도 높은 알코올이라면 발전용 우라늄은 맥주 정도라고나 할까, 대신 연탄처럼 천천히 분열하면서 타게 된다.

한국에는 우라늄농축시설이 없다.
그래서 핵연료는 수입해 온다.
다만 한국전력이나 한국업체들이 우라늄원광을 확보하여 미국이나 캐나다의 농축공장에 공급하고 가공케 할 수도 있고, 그렇게 발전용으로 농축된 우라늄을 한국으로 운반해 와서 한국핵연료주식회사에서 핵연료다발을 제작하기도 한다.

일단 핵분열을 시작하고 나면 위험하지만 처음 우라늄은 손으로 만져도 위험하지 않다.
그래서 수작업으로 우라늄을 작게 뭉쳐서 옐로케이크(Yellow Cake)로 만들어 볼펜 지름 정도의 작은, 길이가 2.5 미터 정도 되는 지르코늄 대롱 안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이 대롱들을 100여개를 묶어 하나의 핵연료다발을 만든다.
핵연료다발은 그 대롱 사이로 물이 자유롭게 흐를 수 있도록 대롱들은 서로 떨어져 있다.

원자로는 그 두께가 15~20 cm에 이르는, 지름 3미터, 높이 6미터 정도의 강철용기이다.
그 안에는 핵연료봉 다발 120개 정도, 노형에 따라서 그 이상이 들어간다.

여기, 원자로에 물이 들어간다.
그런데 원자로에 들어가는 물은 완전히 밀봉된 채 원자로냉각재펌프에 의하여 원자로와 증기발생기 사이를 순환한다.
그리고 가압기에 의하여 그 압력이 유지된다.
만일 이 물이 증발되어 터빈을 돌린다면 터빈계통은 순식간에 방사능으로 오염되어버릴 것이다. 원자로계통의 물과 터빈계통의 물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

원자로계통 안의 물은 증발되지 않는다.
산 위에 올라가서 밥을 지으면 물이 100도가 안 되어도 끓어버린다.
반대로 압력밥솥으로 밥을 지으면 물이 100도를 훨씬 넘어 끓게 되어 더 높은 온도로 밥을 지을 수 있게 된다.
물을 꽉 눌러서 물의 압력을 계속 올리면 물이 끓는 온도는 계속 올라간다.
물을 252.2 kg/cm까지 압력을 높이면 섭씨 372도가 되어야 증발하게 된다.
이것을 물의 임계점이라고 부른다.

이 원리를 이용하여 원자로계통의 물을 증발시키지 않고 섭씨 330도 정도까지 올려서 증기발생기로 보내서 튜브 안을 통과시키면서 튜브 바깥쪽으로 흐르는 터빈계통의 물을 가열하여 증발시키고 터빈계통의 증기로 터빈을 돌림으로써 방사능오염 없이 터빈을 가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림을 그려서 보여드리면 좋겠는데......)

이렇게 해서 화력발전소처럼 섭씨 550도, 150기압의 고온고압증기는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원자력발전소에서는 270~280도, 100 기압 정도 되는 증기라 하여도 엄청난 양의 물과 증기를 순환시키고 엄청나게 큰 증기터빈을 돌려서 화력발전소보다 더 많은 전기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원자력발전소의 매력은 작은 핵연료로부터 엄청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화력발전소가 내뿜은 엄청난 연기나 분진이나 석탄재도 없다.
거대한 석탄수송선박이나 하역설비도 필요 없다.
단지 1년에 한 번씩 핵연료의 3분의 1만 교체해주면 된다.
방사능문제만 없다면 그야말로 클린에너지(Clean Energy)요 꿈의 에너지라 할 만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대로 원자력발전소는 방사능 누출의 위험 때문에 까다로운 설계, 수많은 안전설비와 부대시설을 갖추어야 하고 또한 사용후핵연료와 방사성폐기물처리가 큰 부담이 된다.

원자력발전소 설계와 건설은 철저한 확인과 검증이다.
설계부터 지진에 견디도록, 안전성을 증명하도록 요구한다.
모든 설계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분석한다.
튼튼하게 설계되는 것은 물론이고 시험과 테스트를 거쳐 안전성을 입증하도록 한다.
사용되는 재료도 그 성분, 제조과정(Mill Sheet)과 시험증명(CMTR, Certified Material Test Report)을 요구한다.
가정되는 모든 사고를 가상하여 어떤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비상설비가 필요하고 어떤 기기들이 작동되어야 하는가, 모든 설비들은 고장을 대비하여 예비설비를 갖추고.......

모든 작업들, 이를테면 용접을 할 때도 용접봉 확인, 용접사자격확인, 작업순서와 요건, 온도와 습도조건 확인, 용접 한 번 하고 검사 한 번 하고, 용접 한 번 하고 검사 한 번 하는 식으로, 그리고 그 검사기록을 일일이 서류로 남기는 식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모든 설계와 작업 상황을 데이터화하고 문서화해서 보관한다.
수많은 그 서류와 기록들 가운데, 대장쟁이의 노력과 고심과 땀이 배어있는, 그리고 서명과 필적이 들어있는 설계검토서, 설계변경서, 작업지시서, 부적격보고서들도 지금 영광원자력발전소 등 원자력발전소 품질서류보관소(QA Vault)에 보존되어 있다.  

그리하여 미국형 원자로에서 최악의 사고가 날 확률은 100만분의 1이라느니 천만분의 1이라는 수치가 나온다.
1979년 드리마일 아일랜드 원전사고와 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 이후에 강화된 원자력규제요건은 지나칠 정도로 까다로워서 그대로 설계, 건설, 운전되는 경우, 경미한 사고들이야 그렇지만 중대한 사고가 일어날 확률은 그야말로 제로(0)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다.

사실 일본의 경우는 미국과는 좀 다르다.
그들은 설계와 품질관리시스템을 미국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체기술과 시스템으로 독립적인 건설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쿠시마원전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설계치를 넘어가버린 엄청난 지진과 쓰나미에 침몰되어버린 셈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일본 동해안과 같은 지진대에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한 것은 애당초 좀 무모한 것이었다 싶다.

어쨌든 원자력발전소 설계와 건설의 안전요건이 미국원자력규제위원회(USNRC)에 의하여 엄청나게 강화되는 바람에 원자력발전소 건설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원자력발전원가는 화력발전원가에 비하여 유리할 것도 없게 되어 버렸고, 그래서 미국의 원자력산업계는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포기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원자력발전소를 꾸준히 건설해왔다.
발전소 안에 쌓여만 가는 핵폐기물을 영구저장 할 장소를 얻지 못 해 안면도, 굴업도, 영덕, 울진, 변산반도 등을 환경단체들에게 쫓겨 다니며 전전하다가 결국 별로 마땅치도 않은 경주 방폐장 부지를 수 천억원 지역개발지원을 대가로 지불하고 얻는 곤욕을 치렀지만, 석탄과 석유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국가적 에너지상황 때문에 원자력은 한국으로서는 대안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덕분에 아랍에미레이트 원자력수주라는 대어를 건지기도 했지만.......

획기적인 에너지원은 없을까?
바다 밑에 무한정하게 많다는 얼음메탄, 하이드레이트 이야기도 들리고, 우주공간이나 달에 집광판을 설치하고 전력을 만들어 마이크로웨이브로 지구로 보낸다는 아이디어도 나오는데.......


오늘은 좀 다른 방향의 글이 되어 버렸다.
원자력에너지......
물질의 소실이 에너지로 변환되는.......
아인슈타인이 풀어낸 E = mc²의 비밀을 살펴보기 전에
원자력발전 이야기 좀 장황하게 했다.



어휴, 너무 길게 써버렸네유.
(인내시험?)
독자님들, 지송함당~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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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일이 되면 쌍십절(雙十節)이라고 거창하게 행사하는 나라도 있는데..
제게도 그 때의 기억이 있습니다.
28년 전..., 1983년... 10월 10일 아침 10시 10분쯤...
아직 30대 초반의 젊던 저는 그 때 전라남도 영광군 홍농읍 계마리 517번지, 서해 바닷가 영광원자력 1,2호기 건설현장에 있었더랬습니다.
한 끔찍한 사고가 일어난 건설현장에....

저는 그 때 한국전력 영광원자력건설사무소에서 신출내기 계장이었죠.
1981년에 약 1년간 벡텔(Bechtel)사로 보내져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벡텔사에서 두 달 정도, 그리고 애리조나 팔로버디 원자력건설현장에서 원자력건설요원 교육을 받고는 1982년에 귀국하였고
1년 동안 서울 본사 원자력건설부에서 근무한 다음 1983년 가을, 영광원자력 건설현장으로 투입되어서
1988년 올림픽 하던 해까지 건설현장의 기계분야 건설업무의 핵심에서 엔지니어 10 여명 데리고
도면, 기술지침, 시방서, 보고서 끌어안고 죽어라 일하는 기계기술계장을 했지요.

1983년 9월 1일, 저는 서울 쌍문동에 있는 한전연수원에서 신임계장요원 교육을 받고 있었는데,
그 날 아침 전해진 엄청난 뉴스는 그야말로 끔찍하고도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KAL 007기 피격.. 269명의 목숨이 한꺼번에 국화꽃잎처럼 산산이 부서져 사할린 검은 바다에 떨어진 사건.

아무리 공산당 유물사관으로 인간의 목숨을 우습게 아는 저들이지만 어떻게 저럴 수가...!
밤하늘을 날던 비행기가 미사일로 피격되던 그 순간, 그 미사일은 비행기의 어느 부분에 맞았을까?
미사일이 폭발한 순간 그 자리와 그 근방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비행기는 동강이 났을까, 아니면 큰 구멍이 난 채 추락하였을까, 산산이 부서졌을까?
순식간에 모든 것이 폭음과 함께 부서지고 또 고공에서 비행기 안팎 기압차이로 인하여 순식간에 모든 것이 산산조각으로 휩쓸려나가 흩어지지 않았을까?
그들이 잠을 자다가, 혹은 몸을 뒤척이다가? 혹은 생각에 잠기거나 책을 읽다가?
1만 피트 고공에서, 영하 40도의 차가운 공중에 피투성이로, 조각난 채 내뿌려져 꽃잎처럼 바다 위로 떨어졌을 영혼들...

그 뒤로도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제 자신이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바다를 향하여 떨어지는 끔찍한 상상을 하면서 몸을 떨곤 했지요.
일본의 해안에는 사지와 머리가 잘려져 나간 여인의 몸뚱이가 파도에 밀려나오고, 비행기가 떨어졌음직한 해역에는 소련과 미국의 군함들이 출동하여 수색을 벌리고,
그러나 비행기의 잔해는 흩어지고 희생자들의 시신들은 하나도 찾을 수 없었던 그 사건.
사할린 바다를 찾아간 유족들은 바다를 향하여 오열하고 떠나간 이들을 목 놓아 부르며 꽃다발을 던져 보지만
매정스럽게 뱃전을 때리는 찬바람은 그 통곡소리조차 쓸어가 버리고 던진 꽃다발은 바람에 밀려 되돌아와 뱃머리 물결에 부딪던 그 모습...
그 허무하고도 안타까운 장면들을 보던 그 기억.....


그런데, 269라는 희생자의 숫자 말입니다.
대한민국은 그 때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 게임을 유치해놓고 86년 아시안 게임과 과 88 올림픽 게임이 성공하면 세계 속의 한국이 된다고 떠들고 있었지요.
그런데...., 왜 86년 아시안 게임 때 금메달 숫자가 하필이면 269 개였을까요?
왜 그 희생자수와 같은 숫자였냐 말입니다.
그 269 개의 금메달 중 150 개 이상을 죽의 장막을 헤치고 서울로 기어 나온 중공(그 때는 아직 중국이 아니라 중공이었죠...)이 쓸어가고,
우리는 일본을 제치고 90 개가 넘는 금메달을 땄었지요.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에서 한국이 일본을 누르고 이기기 시작한 것이 이 때부터였지요.
그리고 어느 날 저는 은행에서 번호표 269번을 받아 쥐고 멀거니 그 숫자를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269라...”


다시 되돌아가서... 우리는 연수원에서 2주간인가 교육을 마치고 9월 중순, 영광원자력 건설현장으로 내려갔습니다.
건설현장인 계마리와 사택이 있는 상하리는 약 3 킬로미터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는데, 발전소와 사택을 짓기 위한 정지작업과 굴토작업을 하면서
6.25 전쟁 때 서로 죽이고 죽임 당한 참혹한 살육의 희생자 유골들을 1천 구 넘게 수습했다고 하더군요.
우리 가족이 배정 받은 사택은 17평짜리 아파트 2층이었는데, 아파트들은 바로 수많은 유골들이 나온 그 골짜기에 서 있었습니다.
6.25 때 영광은 유난히 서로 죽이고 죽는 피비린내 나는 보복과 상잔의 땅이었다더군요.
그리고 기계기술과장으로 임명받아 아직은 모든 것이 서먹하고 업무도 익숙지 않을 때였는데...

10월 9일, 한글날이자 일요일... (저는 주님도 모를 때였으니까 주일이 아니라 일요일이었죠.)
저는 그 날 회사에 가지 않고 사택 방안에서 하루 종일 뒹굴었습니다.
당시 건설현장에는 휴일이 없었는데.... "하루 공기 백만 불, 공기단축 달성하여 경제발전 앞당기자!"
이런 슬로건 밑에 누가 감히 일요일이라고 회사에 안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날은 아침부터 종일 비가 추적거리고 내렸거든요. 그래서 집에서 놀게 된 거지요.
건설현장에 비가 오면 철골용접이고, 페인팅이고, 목공작업이고, 콘크리트 타설이고 뭐고 작업이 거의 안 되거든요.

그런데 바로 그 날, 미얀마에 전두환 대통령과 함께 갔던 17명의 각료가 아웅산 묘소에서 한꺼번에 폭사하는 참혹한 테러사건이 터졌고 그 뉴스는 우리를 또다시 놀라게 했지요.
피 묻은 흑백필름에 그들이 남긴 마지막 모습, TV는 폭음과 함께 흩날리는 나뭇조각과 먼지, 아우성, 그리고 무너져 내리는 묘소건물을 보여주고 있었지요.
왜 하필이면 그들은 교회들이 예배드릴 시각인 11시에 그들은 아웅산을 참배하였나 하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리고 3명의 북한군 공작원들... 두 명은 사살되고 한 명이 생포되었다던가, 한 명이 사살되고 두 명이 생포되었다던가...


그리고 이튿날, 10월 10일 월요일 아침...
구름은 걷히고 푸른 하늘에는 다시 빛나는 태양이 솟아올랐지요.
영광원자력 건설현장을 내려다보고 선 금정산 봉우리 위에도 한 줄기 옅은 안개가 휘감겼다 사라지고,
건설현장은 드디어 2호기 원자로 격납건물의 꼭대기부분의 철판, 즉 Upper Dome Liner Plate를 설치하는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최대 600톤짜리를 들어올릴 수 있다는 초대형 링거크레인은 대지를 딛고 높이 100미터가 넘는 Boom을 쳐들었고,
로프를 내려 지름 36M, 무게 178톤이나 되는 거대한 삿갓모양의 철판, 2호기 격납건물 상부돔 철판을 고리로 감아 걸었고, 그리고 고사가 치러졌지요.
웃는 모양의 삶은 돼지 대가리를 놓고 현대건설소장, 작업반장들, 그리고 몇몇 간부들이 배춧잎 만원짜리 지폐를 돼지의 입에 물려놓고 나서 두 번 씩 절하고...,
그렇게 고사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작업반 노무자들이 달려들어 만 원짜리 지폐를 머금은 돼지대가리를 나꿔채어 도망가고,
또 한 무더기의 노무자들이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뒤쫓아 가고...

그런 가운데 600톤 링거크레인은 우렁찬 엔진음 소리를 내며 상부돔 철판을 서서히 격납건물 위로 까마득히 들어 올렸지요.
몇 개월 동안 애써 조립한 돔 철판이 격납건물 꼭대기 위를 덮으면 격납건물도 제 모양을 갖추고,
그 위에다 콘크리트를 치면 격납건물은 공사가 끝나게 되고,
고리원자력에서부터 시작하여 숱한 중량물을 들어주었던 믿음직한 600톤 링거크레인도 조용히 은퇴를 할 참이었지요.

그런데 어찌된 일입니까?
이제 다 올라갔다 싶던 돔 철판이 기우뚱거리더니 크레인의 Boom이 조금씩 슬로비디오처럼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니 저럴 수가, 저럴 수가....!
저는 그 때 크레인 바로 곁에 서 있었는데 크레인의 Boom이 천천히 기울어지는 걸 보면서도
잠시동안은 거대한 격납건물 콘크리트 구조물과 크레인을 위로 쳐다보기 때문에 생기는 착시현상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까마득히 올라갔던 크레인 붐이 진짜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기까지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차마 믿어지지 않는 끔찍한 광경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순간, Boom은 뚝! 뚜두둑 소리를 내면서 중간쯤에서 허리가 꺾였고,
돔 철판은 격납건물 위에 떨어져서 천둥소리를 내면서 미끄러져 내리기 시작하였으며,
이어서 거대한 Boom은 터빈건물을 덮치며 굉음과 함께 무수한 쇠막대기 철봉들을 수수깡처럼 산산이 흩뿌리면서 무너졌고,
아름드리 철골구조물들이 그 충격에 힘없이 휘어져 나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소리도 제대로 못 지르고 넋이 빠졌고,
여태 지어놓은 발전소가 모두 무너지는 게 아닌가, 여태까지 애써 해놓은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끝나는 게 아닌가,
무섭고 참담한 심정에 몸조차 가누지 못 할 지경이었습니다.

얼마 뒤일까, 정신을 차려보니 상부 돔 철판은 격납건물 위에 비스듬히 걸려 멈춰 있었고,
크레인은 와이어로프를 매단 채 터빈건물철골 위로 처참하게 잔해를 눕히고 있었습니다.
아우성과 고함 속에 부상자들을 앰뷸런스에 실어 보내고 이리저리 뛰던 그 순간. 온 세상이 끝난 것처럼 생각되던
아, 잊을 수 없는 그 시간! 이 사고는 한전, 아니 세계의 원자력건설사상 아마도 최대의 사고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래도 상부돔 안쪽에 붙어있던 배관행거 두 개가 하부돔 철판에 걸려서 178톤의 중량물을 멈추게 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철판이 계속 미끄러져서 떨어졌다면 아마도 그야말로 건설현장 절반은 부서지고 엄청난 인명피해가 났을지도 모릅니다.
178톤짜리 그 거대한 두꺼운 돔 철판이 격납건물 위에서 마치 솥뚜껑처럼 미끄러져 내릴 때 철판은 종잇장처럼 찢겨지고,
돔철판 안쪽에 설치해 놓은 살수(Emergency Spray)용 배관은 마찰열로 뻘겋게 달아올라서 휘어지고,
떨어져 나온 쇳조각이 튕겨 나가던 그 속에서 사람이 그 속에 깔린다면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날 터였는데, 그 철판이 얼마간을 미끄러져 내리다가 걸려서 멈춘 것입니다.
그리고 건너편 터빈건물에서 일하던 인부 두 사람이 날아온 쇠토막에 맞아 사망하고 십 여 명이 다치는데 그쳤고....

긴급사고대책반이 구성되고, 공정복구계획이 검토되고, 과기처, 원자력안전센터, 원자력 자문위원 조사단이 현장을 조사하고, 철판, 배관 자재가 긴급발주되고,
밤을 새운 대책회의가 이어지던 몇 날 몇 주일이 우리 건설요원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았답니다.

사고의 원인은 바로 전 날, 아웅산 사건의 날 그렇게 추적거리고 내린 비였습니다.
책임문제로 토목기술자들은 아니라고 우겼지만 그 빗물이 크레인이 선 자리, 팠다가 되메운 그 자리의 지반을 적셨기 때문에 크레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 하고 꺼졌던 것입니다.

그 사고를 수습하는데 우리는 8개월이나 걸렸습니다.
수백 장의 도면과 작업절차서, 텔렉스, 전화, 공급독려, 엄동설한 속에서도 계속된 철판재작업...., 저는 기계기술계장이라 그 복구작업 기술업무의 중심에 있었고...

그리하여, 8개월 뒤인 1984년 6월 8일, 다시 만들어진 상부돔 철판이, 부품을 들여와 재조립한 600톤 크레인에 들려져 8호기 격납건물 위 제자리에 올려지던 날은
사람들이 차마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렸고, 혹은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지요.

5년 동안 원자력 건설현장에서 겪은 사건, 사고, 에피소드도 많지만 그 크레인 사고처럼 엄청난 사고는 없었습니다.


10월 10일, 아침 10시 10분 무렵...
(십 자가 네 개....., 글 제목 보시고 무슨 소린가 하셨죠? 띄어쓰기를 유심히 보셨다면 왜 십 자와 자 자 사이가 띄어져 있나 하셨겠고...)

저는 그 날짜와 시각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10월 10일이 되면 거의 30년 전 사건이지만 어제 일처럼 기억이 납니다.
KAL기 피격, 아웅산 폭파, 그리고 크레인 사고...

저는 그 때 아직 주님도 모른 채, 피할 산성이요 요새가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아직 멀리 있었었지요.
그 위험한 곳에 말입니다


37. 과학은 인간을 영생케 할 수 있을까?

죽기를 무서워하는 인간들은 영생불멸을 염원한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과 동행하며 죽음을 향하여 출발한다.
인체를 이루는 60조 개의 세포는 끊임없이 죽어간다. 그리고 새로 생겨나서 바뀐다.
혈액세포는 120일이 지나면 모조리 죽고 새 것으로 바뀐다. 피부도, 내장표피도 바뀌고, 인체를 이루는 모든 세포가 다 죽고 새로 생겨나 바뀌기를 계속한다.
그러면서 인간은 성장하고 또 늙어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바꾸어지지 않는 세포가 있다. 그것이 바로 뇌(腦)다.
하루에 10만 개의 뇌세포가 죽기는 하지만, 그래서 80세 정도가 되면 뇌가 약 15%가 줄어들지만, 대부분의 뇌세포는 일생동안 살아남는다. 즉 뇌세포는 죽어도 바뀌지 않는 것이다. 뇌세포가 교체되지 않는 것은 그렇게 되면 뇌세포 안에 담긴 기억과 정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세상에 별 희한한 일, 별 희한한 종교도 다 있다.
사이비종교 ‘라엘리언’은 처음 지구에 생명체가 생겨난 것이 외계인들에 의해서였다고 믿는다. 라엘리언은 1973년과 1975년 두 차례에 걸쳐 외계인 ‘엘로힘’과 접촉했다는 클로르 보리롱 라엘이 197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창시하였고 오늘날 전 세계 182개국 6만 여명의 회원들이 있다고 한다.

그들의 라엘리언 무브먼트는 외계인을 절대자로 신봉하며 지적설계론을 주창한다. 그들은 인간은 외계인의 유전자 복제로 탄생했으며 그래서 인간의 영생은 복제인간과 외계인의 재림에 그 해답이 있다고 한다.
모계혈통의 여자로부터 채취한 난자세포에 자신의 체세포를 집어넣어 수정시키면 인간복제가 가능하다. (대장쟁이의 다른 글 “배아줄기세포의 황당한 바람”(2011. 2. 2 자유게시판 게재)을 읽어보시면 배아복제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라엘리언의 영생방법은 그렇다. 그렇게 만들어진 복제인간의 두뇌를 빼내고 자기의 두뇌로 교체하면 한 세대를 다시 더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외계인들이 지상에 재림(?)할 때 마침내 전능하신(?) 외계인 ‘엘로힘’이 오시면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래전 보도된 기사이지만 참으로 악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라엘의 오른팔이었던 장드니 쌩씨르가 ‘최후의 예언자’ 라엘은 실제 외계인과 만난 적도 없고 사실은 프랑스 작가 장 샌디의 책을 표절한 것이라고 폭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미련한 인간들은 그들의 '엘로힘' 외계인이 있다고 믿는단다.

또 다른 사람들이 꿈꾸는 영생의 방법은 냉동인간이다.
만화영화 “빙하시대”를 보면 다람쥐가 도토리와 함께 얼음 속에 냉동보존 되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말이다.
개구리나 어류 중 일부는 냉동되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종이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시베리아 같은 북쪽에 사는 개구리는 겨울철이 되면 체내 혈액의 수분을 따로 모아 혈액의 동파를 방지하고 동면에 들어가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완전히 꽁꽁 얼었다가도 봄이 되면 녹아서 다시 살아난다.
어쨌든 시신을 냉동시켜 보관했다가 몇 백 년 후 모든 질병이 정복되고 인간이 죽지 않는 시대가 오면 그 때 다시 살린다는 아이디어가 ‘냉동인간 아이디어’이다.

1946년 프랑스 생물학자 장 로스탕이 개구리 정충(정자)를 냉동시켰다가 살려내는데 성공했다. 지금은 인간의 정자를 냉동보관 하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제2차 서계대전에서 부상을 입은 로버트 에틴거는 이 소식을 듣고 냉동인간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냉동인간”이라는 책을 내었다.
그리고 1967년 폐암으로 죽은 캘리포니아 심리학과교수 제임스 베드포드가 최초로 냉동인간이 되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이후 인간냉동보존은 비즈니스가 되었다. 1972년에는 생명연장재단, 1976년에는 냉동보존재단이 설립되어 지금까지 207 구의 인간의 시신과 78마리의 동물시신을 영하 197도로 냉동보존하고 있다.  

인간도 개구리처럼 냉동시켰다가 녹이면 괜찮을까?
그렇지 않다. 인체세포에 들어있는 수분이 얼음결정을 만들면 그 얼음이 세포를 날카로운 칼날로 안에서부터 갈라버리듯이 파괴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의 시신을 냉동시킬 때는 시신의 모든 혈액을 뽑아내고 대체액체를 집어넣고 수분을 제거한 다음 급속냉동을 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완전히 해결되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 지금 수백만 달러가 드는 사후냉동보존을 원해 막대한 신청비를 내고 대기자명단에 이름을 올린 사람의 수가 전 세계 2,0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전신냉동을 하는 대신 머리(두뇌)만 냉동보존하면 가격이 훨씬 싸다고 한다.

부활을 꿈꾸며 영하 197도로 냉동되어 잠들어 있는 200구가 넘는 그들, 줄줄이 늘어선 냉동대기자들은 과연 먼 훗날 그들의 소원대로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과학자들은 냉동된 인간들이 소생되려면 뇌세포를 복구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원자를 조작하여 분자를 복구하는 수준의 나노기술 (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 미터)이 확보되어야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즉 나노기술로 만든 초미세 로봇이나 조작장치로 뇌세포를 하나하나 복구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과연 가능할까? 나노기술이 개발된다 해도 뇌세포가 몇 개나 몇 백 개, 혹은 몇 천 개 몇 만 개까지라면 몰라도 과연 1,000억 개나 되는 뇌세포를 나노기술로 만든 나노로봇으로 과연 복구할 수 있을까?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렇게 뇌세포를 복구한다고 해서 과연 생명이 돌아오고 영혼이 돌아올까?

과연 인간은 무엇이며 인격은 무엇일까?
인간의 생명은 무엇인가?
인간의 정신은 뇌가 학습, 축적한 정보들이 만들어내는 것이고, 인간의 감정은 화학물질이 만들어내는 작용일까?
인간의 영혼은 신경세포들이 그렇게 만들어낸 현상이요 뇌가 죽으면 컴퓨터가 망가지듯 꺼져버리는 것일까?
인간의 정신은 뇌신경세포들의 네트워크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것은 아메바세포들의 진화의 결과물일까?
인간은 다만 60조 개의 세포가 만들어낸 오케스트라 같은 연합생명작용일까?
그래서 결국 인간이 죽으면 정신도 영혼도 없이 끝일까?
냉동보존 하였다가 다시 살리면 정신도 영혼도 복구될 수 있을까?
과연 그럴까?
진화론자들이라면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죽는다는 것 말이다. 생명이라는 것, 영혼이라는 것 말이다.
산낙지, 문어를 먹어본 적 있는가?
칼로 잘라놓아도 여전히 살아서 꿈틀거린다.
세포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사람도 그런 식으로 죽는가?
아니다. 사람은 뇌진탕이나 심장마비로 순간적으로 절명한다.
아직 인체의 세포들이 살아있는데도 인간의 생명은 떠나버린다.
만일 인간의 생명과 정신(영혼)이 60조 개의 세포들이 만들어낸 연합생명체의 작용이라면 결코 그런 식으로 죽을 수가 없다.
인간의 생명이 그런 거라면 60조 개의 세포들이 불이 꺼지듯 하나하나 다 죽어야 끝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생명은 60조 개의 세포들이 만들어내는 생명체연합현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인간은 그 영혼이 육신에 담겨져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인간의 육신은 장막(帳幕)이다.
진정한 ‘나’는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다.

“천사가 노래를 불러주었어요.”
“아니, 뭐라고?”
“내가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아빠는 옆방에서 기도하고 계셨고 엄마는 다른 방에서 전화통을 붙잡고 울며 기도하고 계셨어요, 의사선생님은 내 몸 위에 구푸리고 나를 살리려고 애를 쓰고 계셨고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아니?”
“난 위에서 다 보았어요,”
“보았다고?”
Todd Burpo라는 어린아이의 천국체험을 쓴 책 “천국은 진짜로 있다(Heaven is for Real)"의 앞부분은 이런 대화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36. 인간의 뇌와 컴퓨터

앞서 말한 대로 근육의 활동은 근세포에서 나오는 칼슘이온이 마이오신과 액틴 단백질을 끌어당기고 놓도록 조절함으로 이루어진다.
이와 비슷하게 두뇌의 활동도 신경세포에서 일어나는 이온과 신경전달물질의 움직임을 수반한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미세한 전류전자파의 흐름, 곧 뇌파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두뇌의 활동은 특정부위별로 역할이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머리에 전류감지장치를 붙여서 측정하면 뇌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대략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환자의 뇌경색이나 뇌손상 같은 두뇌의 문제가 어느 부위에 있는지도 추정해낼 수 있다. 이것이 병원에서 하는 뇌파검사이다.

뇌파는 0.5~50 헬츠의 매우 느린 진동수의 전자파로 발생한다.
(헬츠: Hz, 1초에 1회의 진동수를 가지면 1 Hz이다.)
정신을 집중할 때는 14~30 헬츠 정도의 주파수가 나오고 격앙되면 더 높은 주파수가 나온다. 눈을 감고 쉴 때는 8~13 헬츠의 알파파가 나오고 수면상태에서는 0.5~4 헬츠의 델타파가 나오고, 꾸벅꾸벅 졸거나 얕은 수면상태, 또는 꿈을 꿀 때는 4~8 헬츠의 세타파가 발생한다.

뇌파의 측정을 더욱 정밀하게 하게 되면, 예를 들어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움직일 때는 어느 부위에서 어떤 뇌파가 나오는지, 오른발을 내디딜 때는 어느 부위에서 어떤 뇌파가 나오는지, 왼팔로 라켓을 휘두를 때는 어떤 부위에서 어떤 뇌파가 나오는지도 알 수도 있다.
이것을 이용하면 생각만으로 물체를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 수도 있다.
즉 뇌파를 컴퓨터에 기억시키고 머리에 연결된 전극으로 뇌파를 보내면 컴퓨터가 이를 식별하여 연결된 물체에 움직임의 명령을 내리도록 하는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뇌’의 주인공 마르탱은 생각만으로 컴퓨터를 조작하고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방대한 외부정보를 얻고 소통한다.

실제 이러한 시도와 실험은 여러 가지로 이루어지고 있다.
마우스를 조작하지 않고 생각만으로 커서를 움직이고 컴퓨터게임을 한다든지 자판을 두드리고 기계를 조작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를 뇌-기계접속(Brain-Computer Interface, BCI)라고 한다.
이 기술은 나아가서 전신마비나 사지불구인 사람에게 인조 팔과 다리를 만들어 달아주고 이를 머리에 부착된 뇌파감지기를 통하여 생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머리 바깥에 전극을 부착하는 방식은 그리 정밀하지 못 하기 때문에 두개골 내부, 곧 두뇌에 직접 전극을 심는 방법이 고려된다. 그렇지만 민감하고 연약한 두뇌에 직접 전극을 부탁하는 것 역시 의학 기술적으로 쉽지 않다. 또한 머리의 외부에서 근적외선을 뇌로 쏘아 분광기로 뇌혈관의 산소량을 측정하는 방법으로 뇌의 의사를 감지하는 기술도 시도되고 있으나 이 역시 한계가 있다.

몇 년 전 네이처誌에 보도된 브레인게이트 이식실험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5년 전 사고로 척수가 잘려 전신마비가 된 20대 매튜 네이글은 브라운대 뇌과학자 죤 도나휴 교수가 개발한 100 개의 전극이 달린 브레인게이트 칩을 뇌 속 운동피질에 이식했다. 그리고 네이글은 ‘움직이겠다.’는 생각만으로 허리를 굽히거나 의수를 움직이는 등 16가지의 움직임을 해낼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기술은 사이보그로 연결된다. 여러분은 자연스럽게 오래 전 재미있게 시청하였던 ‘600만 불의 사나이’와 ‘원더우먼’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또한 SF 영화에 등장하는 초능력의 주인공들을 떠올릴 것이다. 과연 뇌과학의 발달은 그런 시대를 열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인조팔과 인조다리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뇌과학기술은 ‘생각’을 감지하여 컴퓨터로 옮기는 게 아니라 단지 ‘생각’할 때 나타나는 현상인 뇌파를 감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뇌의 서로 다른 움직임이라도 거의 같은 뇌 부위에서 거의 같은 뇌파로 나타날 경우 이를 구분하기가 어렵다. 두뇌의 모든 부위에서 이루어지는 활동과 지시를 뇌파만으로 분석해내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수천, 수만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한 움직임과 수행지시를 뇌파만으로 수행한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SF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 수준의 사이보그 또한 사실상 불가능한 이야기다. 정상적인 인간의 활동과 차이가 없는 빠르고 정교한 뇌파작동장치가 가동되려면 뇌의 각 부위를 엄청나게 세분하여 전극을 삽입해야 하고 슈퍼컴퓨터와 정교, 복잡한 기계장치가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예를 들어 음속보다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으려면 엄청난 강도의 강철근육과 강철뼈도 필요하고 그 힘을 만들어내는 기계장치, 초음속에도 타지 않는 피부.... 이런 것들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빠르고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사이보그도 뇌는 인간의 뇌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인간의 뇌는 사이보그의 그러한 격렬한 움직임에 남아나지를 못 할 것이다.  

오늘날 초고속연산과 무한정에 가까운 기억정보능력을 갖춘 컴퓨터가 등장하여 이제 바둑과 체스게임에서까지 컴퓨터가 인간을 이기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뇌를 컴퓨터가 대신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뇌와 컴퓨터는 다르다.

컴퓨터는 어떻게 기억을 저장하고 연산을 수행하는가?
그것은 컴퓨터가 제아무리 많은 기억용량을 가진다 해도 기본적으로 0과 1의 조합으로 신호를 저장하는 기계일 뿐이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영상이나 생각을 기억하는 기능이 없다. 다만 검고 흰 두 종류의 바둑돌을 사용하는 것처럼 ‘011001110’식으로 반도체 기억소자를 감응시켜놓았다가 이를 끌어오거나 연산시켜 작동시키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기계덩어리일 뿐이다.
아름다운 영상이라도 그 영상을 수많은 화소로 쪼개고 각 화소별로 밝기와 색깔을 0과 1의 신호로 변환하여 저장하였다가 이를 끄집어내어 재생하는 기능을 가진 것이 컴퓨터일 뿐이다.

지능을 갖춘 컴퓨터? 생각하는 컴퓨터?
그런 것은 없다.
그것은 인간이 많은 정보를 분류하고 세분화하여 가장 나은 결론에 도달하도록 알고리즘으로 만들어 입력해서 어떤 질문에 대하여 미리 입력된 해답 중 하나를 찾아내도록 만들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컴퓨터가 아무리 화려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아무리 뛰어난 대답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10010001110...’으로 기억시켜놓은 기계적 신호를 조합하여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컴퓨터의 기억은 사실 기억이 아니다. 신호의 저장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은 기억 자체의 기억이다.
인간이 자신의 뇌의 뉴런에다 입력시켜 기억하게 하는 그 기억이 어떻게 어떤 식으로 저장되며 또한 도출되는지는 현대과학이 풀어내지 못 하는 신비다.
또한 1,000억 개의 뉴런이 서로 연결되어 이루는 끝없는 기억과 사색과 명상의 세계는 컴퓨터로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신비의 세계다.  

생명과학자들은 DNA의 염기서열이 ATGC라는 네 가지의 염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여 30억 개의 핵산, 아미노산 단백질 알갱이에 이 네 가지의 순열조합이 유전정보를 이루어 저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설사 ATGC, 네 가지 염기서열이 조합을 이루어 유전정보를 이룬다 하더라도 그 저장형태는 컴퓨터 기억소자처럼 0101의 단순한 On-Off 식 배열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비밀은 현대과학의 접근을 허용조차 하지 않고 있다.

뇌세포의 기억과 DNA의 유전정보, 그것은 어떻게 어떤 형태로 입력된 것일까? 이 놀라운 아이디어와 설계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도대체 이 신비한 생명체를 만들고 그 정보를 입력한 이는 누구일까?

뇌세포만 보더라도 진화가 허구라는 사실은 또 드러난다.
인간의 몸은 6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지만 인식하고 기억을 저장하고 사고하는 기능일 가진 것은 오직 뇌세포뿐이다.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처음에 생겨난 아메바로부터 진화가 시작되었다면 그 처음 아메바는 지능을 가질 수 있는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기억저장 세포는 누가 발명하였단 말인가?
지능 없는 아메바가 지능 있는 아메바를 발명했단 말인가?

기억 없는 단순생명체 아메바가 진화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기억의 저장기능도 없는 아메바가 어떻게 경험을 살려 개선을 하고 용불용, 자연선택을 해가면서 진화를 한단 말인가?
수십 억 개의 핵산, 아미노산 알갱이로 이루어지는 DNA에 그 신비한 유전정보를 담는 일이 도대체 아메바에 의하여 가능하단 말인가?
혹시 핵산, 아미노산 알갱이에 원래 유전정보가 들어있었다고 우길 것인가?
핵산, 아미노산 알갱이가 ATGC로 그렇게 늘어서서 연결만 되면 유전정보가 저절로 생겨난다고 우길 것인가?

진화론자들이 진화를 주장하려면 가장 먼저 유전정보라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그것이 시작되었는지, 또한 기억이라는 신비한 생명현상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부터 밝혀내어야 할 것이다.
진화야, 제발 우기지 좀 말자.


35. 경이로운 소우주, 뇌(腦) (1)

인체의 신비를 뇌(腦, 골, Brain)를 빼놓고서는 말할 수 없다.
뇌는 신경세포의 덩어리이면서 동물의 중추신경계를 관장하고 정보와 기억을 인지, 저장, 추출, 사용하는 사령탑이다.  

인간, 성인의 뇌 무게는 약 1,400 그램 정도이며 약 1,000 억 개의 신경세포(뉴런, Neuron)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신경세포(뉴런)는 줄기 양 끝에 여러 개의 가지가 난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인간의 뇌는 경이, 그 자체이다.
하나의 신경세포가 다른 신경세포를 만나는 구조를 시냅스(synapse)라고 부른다. 한 개의 신경세포가 만드는 시냅스는 1,000 개 정도 된다. 그래서 1,000억 개의 신경세포가 무려 1,000 조 개의 시냅스연결통로를 가지게 되며 1초에 무려 1경 번에 달하는 전기신호를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시냅스, 즉 각 신경세포의 연결점을 숫자로 나타낸다면 10의 28승이나 되는 엄청난 숫자가 되며, 러시아 신경해부학자 페트르 K. 아노킨에 의하면 이 조합의 수를 타자기로 칠 때 그 길이가 무려 1,500만 km (지구를 375번 도는 길이)에 달한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의 불과 1.4 kg에 불과한 그 작은 뇌는 소우주에 비견되는 것이다.

뇌의 뉴런(신경세포)은 어머니의 태에 있을 때는 1분에 250만 개씩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태어난 다음 성장을 마쳐 일단 뇌가 만들어지면 그 때부터 뉴런은 죽기를 거듭하여 매일 약 10만 개의 뇌신경세포가 죽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뇌세포가 일생동안 소실된다 해도 그것은 전체의 10%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뇌는 크게 대뇌, 소뇌, 뇌간으로 나누어지며 뇌간은 단뇌, 중뇌, 교뇌, 연수의 4부분으로 구분된다.
1) 대뇌
대뇌는 감각과 운동의 중추이며 기억과 판단, 감정 등 정신활동의 중추이다.
대뇌는 좌뇌와 우뇌, 두 개의 대뇌반구로 나누어져 있고 그 가운데가 뇌량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대뇌를 앞뒤로 나누면 이마 쪽 가장 큰 앞부분이 전두엽, 정수리부터 뒤편이 두정엽, 아랫부분이 측두엽, 그리고 뒤통수편이 후두엽이다.
그 주담당 기능은 다음과 같다.  
① 전두엽: 기억, 사고 등 고등활동 관장
② 두정엽: 운동, 감각 담당
③ 측두엽: 청각정보 담당 (귀 담당)
④ 후두엽: 시각 담당 (눈과 연결되어 있음. 눈을 담당하는 뇌부분이 뒤통수 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도 재미있다.)

2) 소뇌
소뇌는 대뇌 아래에 있으며 그 크기는 대뇌의 10분이 1이 좀 넘는 150 그램 정도다.
소뇌는 운동, 근육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어떻게 움직이느냐, 어떤 근육을 사용하느냐는 대뇌의 전두엽이 결정하고 명령을 내리고, 실제로 운동이 시작되면 그 계획대로 실제 운동이 이루어지도록 활동이 피드백 되고 조절되는 것은 소뇌에 의한 것이라 한다.

3) 뇌간
뇌간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① 간뇌
간뇌는 인체의 정상적인 생명활동을 관장한다.
체온을 조절하고 음식을 섭취와 생식기능을 조절하며 각 기관이 제대로 활동을 하도록 대사기능을 조절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또한 간뇌는 감각정보와 운동정보를 대뇌로 보내는 시상이라는 부위와 내분비계, 자율신경계를 관장하는 시상하부, 호르몬을 분비하는 뇌하수체, 멜라토닌을 분비하는 송과샘으로 이루어져 있다.

② 중뇌
중뇌는 뇌줄기 아래쪽과 간뇌 사이에 있는 작은 부위인데 눈의 움직임, 즉 안구운동과 홍체로 빛의 양을 조절하고 수정체 두께를 조절하여 초점을 맞추는 활동을 관장한다.
중뇌의 아랫부분은 청각에 관여하며 귀로 들어온 신호는 이곳을 거쳐 대뇌로 전달된다.

③ 교뇌
교뇌는 대뇌와 소뇌 사이의 정보전달을 중계하며 호흡조절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④ 연수
연수는 뇌간의 가장 아래에 있어 척수와 똑바로 연결되는 부분이다.
호흡, 혈액순환을 조절하며 뇌 전체에서 나가는 뇌신경 12쌍 중 8쌍이 이것을 거쳐 나간다. 동물의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렇게 뇌의 부분과 역할을 대략 훑어보았다.
(설명이 너무 자세하고 길면 학술지처럼 재미없어진다. 그렇다고 안 하고 넘어갈 수도 없고,,,,)
아무튼 인간의 뇌는 놀랍고 신비스러운 작품이다.

인간은 뇌 자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뇌는 인간의 정신과 활동, 생명의 중추이다.
인간의 머리는 척추, 경추를 거쳐 올라간 위치에 얹혀 달려 있다.
뇌는 머리뼈 안에 들어있고 그 아래에는 눈, 코, 입, 귀가 달려있다.
먹고 숨 쉬고 보고 듣는 생명활동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머리에 집중되어 있다.

뇌는 하마조직으로 매우 연약하다.
따라서 뇌는 매우 견고한 보호벽으로 보호되고 있다.
뇌는 우선 연막이라는 엷은 막으로 꼭꼭 싸인다.
그 바깥에는 뇌척수액이 있어 뇌에 전해지는 충격을 완화시킨다.
그 바깥쪽에는 거미막이라는 엷은 막이 다시 싼다.
다시 그 바깥에는 튼튼한 결합조직성 경막이 에워싼다.
이렇게 세 겹의 막과 뇌척수액으로 둘러싸인 다음, 뇌는 단단한 두개골 속에 담긴다.
무려 5중 보호벽인 셈이다.
두개골은 앞이마 쪽이 가장 튼튼하여 충돌이나 외부충격으로부터 뇌를 보호한다.

뇌는 체중의 2.5%에 불과하지만 전체 혈액의 15~20%를 사용하며 몸의 전체 포도당의 50% 정도를 사용한다고 알려져 있다.
뇌로 올라가는 동맥은 내경동맥과 추골동맥, 두 개다.
뇌가 이처럼 많은 포도당과 산소를 필요로 하는 것은 뉴런에서의 이온교환과 신경전달물질의 수송을 위해 필요한 아데노신삼인산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산소와 포도당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뇌에 치명적인 손상이 올 수 있다.

인간의 뇌는 아직도 신비의 영역이다. 최근에 와서 뇌과학(腦科學)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뇌의 신비에 도전하고 있다. 그들의 노력은 뇌를 해부하고 그 기능과 역할, 그리고 정신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다.

2008년 12월 사망한 헨리 구스타프 몰레이슨, 머리글자 H.M.으로만 알려졌던 이 사람은 9살 때 자전거에 부딪힌 후 심한 간질증세에 시달림을 받았다.
증세가 너무 심해서 매일같이 의식을 잃을 정도로 발작을 일으켜 27세에 뇌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간질증세는 완화되었지만 새로운 경험들을 기억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즉, 감각, 언어, 운동, 과거의 기억은 전과 같았으나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기억하는 부분인 내측측두엽 부위를 절제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전에는 기억이 두뇌전체의 기능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 일로 두뇌는 각 부분별로 역할을 분담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H.M.의 협조로 뇌과학은 많은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뇌가 다만 외부정보를 받아 기억, 학습, 판단,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뇌는 감정(感情)의 활동을 한다.
그런데 감정은 외부에서 오는 오감(五感)이 아니다. 슬픔, 분노, 기쁨, 두려움, 행복감 같은 감정은 뇌의 내부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을 관장하는 부위가 있다. 분노의 경우 대뇌의 편도체를 자극하면 일어나게 되며, 편도체를 제거한 동물은 유순해지고 성욕이 생기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인간의 지식과 경험, 인지기능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에 대하여 뇌과학은 학습을 통하여 형성된다고 말한다.
즉 연습이나 경험으로 뉴런 간의 네트워크가 조합과 조화의 반복으로 지식을 획득하고 체계화해 간다고 설명한다.

이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본능적 반응능력, 둘째는 태어난 다음부터 성장하면서 미성숙한 뇌의 활발한 변화를 통하여 신경네트워크를 구축해가는 것, 셋째는 성장이 끝난 성인은 새로운 신경세포결합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므로 신경회로형성을 통한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는 대신 이미 존재하는 기존세포결합이 더 발달하는 형태로 더 정교한 지식을 이룬다는 것이다.

또한 뇌에서는 다양한 신경전달물질, 곧 화학물질이 분비되어 감정과 행동을 자극, 고양, 억제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도파민과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이상을 보일 때 우울증이 나타나며 식욕저하, 흥미상실, 불안, 무기력감을 초래하며, 심지어 자살을 하게 되기도 한다.
심지어 이성간의 사랑도 뇌 신경전달물질의 작용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상대를 좋아하고 마음이 끌리게 하는 것은 도파민이란다.
도파민과 함께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혈압이 오르고 얼굴이 빨개지며, 제 눈에 안경이라고 상대가 뭘 해도 예뻐 보이게 만드는 큐피드의 화살을 날리는 범인은 세로토닌이란다.  
그 다음 보고도 또 보고 싶고 달려가서 보고 싶다는 감정을 만드는 것은 페닐에칠아민(PEA)이고, 열정적으로 껴안게 만드는 것은 옥시토신이라는 물질이란다.

또한 뇌의 활동을 뇌파, 전류로 감지, 측정하여 거짓말탐지기로 사용하기도 하고 뇌의 진단에 사용하기도 한다.  
뇌과학이 계속 발달하면 인간의 감정이나 기억을 기계와 연결시키고 뇌 신경전달물질을 사용하여 조작할 수도 있을 것이라 한다.
시각신경과 감각신경을 조작하여 가상현실을 느끼게 하고 신경전달물질을 뇌에 투입하면 가짜여행, 가짜체험, 가짜섹스도 가능하단다.
적을 고문할 필요도 없이 신경전달물질로 뇌를 조작하여 감정을 조절하여 비밀을 털어놓게 하거나 뇌의 해당부위의 기억을 끄집어내거나 아예 사람을 로봇처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런 식으로 인간을 통치한다면 세상은 인간성 말살의 무시무시한 지옥이 될 것이다.

출처: USA 아멘넷: 대장쟁이 목사님

34. 그대 심장(心臟)의 소리를 들어보라.

모든 동물들이 다 심장을 가지고 있다.
그 작은 모기까지 말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인터넷으로 ‘모기심장’을 검색하면 모기의 녹색심장 사진을 찾아볼 수 있다. 모기의 심장 사진을 보면 모기심장은 마치 치약튜브처럼 생겨서 수많은 심장근육 밧줄들이 순차적으로 움직여 튜브를 짜듯이 짜는 방식으로 혈액을 내보내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렁이 같은 환형동물의 심장도 구조가 간단하다.
지렁이 심장은 두 개의 혈관으로 되어 있다.
한 개는 등 쪽, 한 개는 배 쪽에서 몸을 따라 달리고 있다.
이 두 개를 작은 횡혈관들이 연결하고 있다.
이 중 등혈관이 자동적으로 수축운동을 하면서 혈액을 뒤쪽에서 앞쪽으로 보낸다. 각 체절마다 판막이 있어 역류를 막는다.

바퀴벌레나 지네 같은 절지동물도 간단한 구조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 관 모양으로 된 심장 양편에 근육이 붙어있어 심장을 수축, 이완시킨다. 심장으로부터 심문(心門)이 양편으로 뚫려 있고 그 심문에는 판막이 있어 역류를 막는다. 심장이 수축될 때는 판막이 닫히고 혈액이 동맥으로 나가고 이완될 때는 판막이 열려 정맥으로부터 심장으로 피가 들어온다.
바퀴벌레의 심장은 심문이 13쌍이 있고 몸통이 긴 지네는 100쌍이 넘는 심문을 가지고 있다.

연체동물의 심장은 심방(心房)과 심실(心室)로 구성된 좀 더 복잡한 구조를 가진다.
조개는 심실 하나에 심방 하나이고 오징어, 문어는 심실 하나에 심방 두 개를 가지고 있다. 심실과 심방 사이에는 역류를 막는 판막이 있고 심실에서는 두 개의 동맥이 나오는데 하나는 머리로, 하나는 내장으로 뻗어있다.
오징어, 문어는 이 심장 말고도 좌우 아가미 밑에 아가미심장이라는 작은 심장을 두 개 가지고 있어 아가미로 정맥혈을 보낸다.

인간을 비롯하여 포유류나 조류의 심장은 2심방, 2심실을 갖춘 심장을 가지고 있다.
좌심방, 좌심실과 우심방, 우심실이 완전히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정맥혈과 동맥혈이 섞이는 일이 없고, 따라서 일정한 온도의 뜨거운 동맥혈을 내보내어 체온을 유지하며 활발히 활동할 수 있다.  

자, 인간의 심장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온 몸을 돌고 돌아온 피는 우심방으로 돌아온다. 그 다음 우심실로 들어가서 폐로 보내진다. 폐를 거친 피는 다시 좌심방으로 돌아오고 마지막으로 좌심실에 들어가서 힘차게 온 몸으로 뿜어져 나간다.
그래서 심장은 좌심방, 좌심실 쪽이 우심방, 우심실 쪽 보다 서너 배 더 두껍다. 특히 피를 전신으로 내보내는 강력한 힘을 발휘해야 하는 좌심실 내부는 튼튼한 근육들이 손가락 모양으로 불끈 불거져 있다.

건강한 사람의 심장은 1회 박동에 60~80 ml, 1분간 약 5 리터의 혈액을 전신에 분포된 약 12만 km(지구를 세 바퀴 돌 수 있는 길이)의 혈관들로 내보낸다. 심장을 떠난 피는 불과 1분도 못 되어 전신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
70년을 산다면 일생동안 심장은 30억 번 정도 박동한다.
그 동안 심장이 퍼 보내는 피의 양은 줄잡아 2,300톤, 8톤짜리 트럭 거의 300대분에 달한다.
강한 심장은 강한 운동기능에 필수다. 사이클 황제 랜스 암스트롱의 심장은 주유소의 주유펌프가 작동하는 만큼의 혈액을 공급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잠시 피에 대하여 살펴보자.
피는 물보다 훨씬 진하다.
인체의 피는 약 5리터인데 약 25조 개의 적혈구, 250억 개의 백혈구, 그리고 혈소판을 가지고 있다.
적혈구(붉은피톨)는 산소와 영양분을 운반하고, 백혈구는 몸속에 들어온 해로운 병균을 잡아먹으며, 혈소판은 다친 곳에서 피가 더 흐르지 않도록 굳게 한다.  

손가락 끝만큼 부피인 1cc의 혈액에는 450만 내지 500만 개에 달하는 엄청난 적혈구가 들어있다.  
적혈구는 세포핵이 없는 세포이다. 뼈 속, 골수에서 지속적으로 만들어진다. 적혈구의 크기는 직경이 1,000분의 7~8 mm 정도이고 그 수명은 4개월 정도 된다. 4개월이면 우리 몸의 피가 모조리 싹 바뀐다는 이야기다.

적혈구 한 개는 약 2억 8천만 개의 헤모글로빈을 갖고 있다. 헤모글로빈이 적혈구의 거의 전부인 셈이다. 그래서 피는 헤모글로빈으로 붉은 색깔을 띤다.
헤모글로빈은 고도의 산소보유능력을 가진 단백질이다. 헤모글로빈 한 개가 4개 정도씩, 그러니까 적혈구 한 개가 약 11억 2천만 개의 산소분자를 운반할 수 있다.

헤모글로빈이 산소분자를 운반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철 이온이다.
철이 산소와 쉽게 결합하는 성질을 이용하는 것이다.
철이 산소와 결합하면 산화철, 즉 녹이 되어야 옳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헤모글로빈의 철 이온은 산소와 결합만 할 뿐이지 산화철(녹)로 변하여 부식되지 않는다.

인체의 조직들은 헤모글로빈이 전해준 산소를 사용하여 영양분을 태워 에너지로 바꾸고 탄산가스를 내놓는다.
탄산가스는 체내의 물과 반응하여 중탄산이 된다.
그러면 산성을 띠게 된다.
헤모글로빈은 산성에서는 산소와의 친화력이 떨어져 폐에서 결합했던 산소를 내놓고 탄산가스를 취하게 된다.

대장쟁이는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참여하기 전 화력발전소에서도 오랫동안 오퍼레이터(운전요원)로 일했다.
24시간 교대근무를 했기 때문에 세상이 다 깊이 잠든 깊은 밤을 발전소에서 새운 것이 얼마인지도 모른다.  
석탄가루도 많이 마셨고 아황산가스도 많이 마셨다.
야근하면서 알루미늄 냄비에 삼양라면도 많이 끓여 먹었다.
(알루미늄이 치매를 일으킨다던데.......)

보일러는 석탄과 석유를 태워 섭씨 1,300~1,400도가 넘는 열을 낸다. 보일러 내부를 들여다보면 붉다 못 해 하얗게 보이는 화염은 마치 지옥불을 보는 것 같다.
이 열로 튜브 안을 흐르는 물이 고온고압증기(섭씨 550도, 150 기압 정도)로 바뀌어 증기터빈을 돌리게 된다.
550도의 증기가 흐르는 파이프의 보온재를 벗겨놓고 밤에 보면 파이프가 붉게 보인다.

몸이 에너지와 열을 얻는 것도 화력발전소나 내연기관이나 마찬가지로 결국 지방이나 탄수화물을 태우는 것이다.
그런데 몸에서는 그런 고온이 발생하지 않는다.
고온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타지도 않아야 할 텐데, 고온도 아닌데 영양분이 산소와 화합하여(타서) 열과 에너지를 내는 것은 신비다.

생물학자들은 세포의 미토콘드리아가 에너지와 열을 내는 발전소 역할을 한다고 말하지만 세포 한 개에 2,000개, 내지 3,000 개나 들어있는 그 작은 미토콘드리아에서 어떻게 그러한 반응들이 일어나는지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좀 곁길로 가는 것 같지만, 태양이나 수소폭탄에서 수소가 핵융합반응을 일으키는 온도는 수천만도에서 1억 도에 달한다.
수소핵융합반응을 이용하여 발전소를 만들 수 있다면 거의 무한정으로 막대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원자력이나 수력, 화력도 거의 불필요하게 될 것이고 인류의 에너지난은 한순간에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수천만도나 1억 도의 온도를 녹지 않고 견디는 물질이 없으므로 핵융합로를 만들 수가 없다. 만일 전기자기력으로 수소핵융합 핵을 공중에 띄울 수만 있어도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러한 방법도 없다.
그래서 핵융합로나 인공태양은 현재로서는 꿈일 뿐이다.
만일 핵융합반응을 훨씬 낮은 온도나 상온에서 일으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그래서 많은 과학자들이 상온수소융합반응을 일으키는 방법을 찾느라 애쓰고 있다.

그런데 우리 인체는 낮은 온도에서 영양분을 태워 열과 에너지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다. 세포의 미토콘드리아에서 영양분을 태우고 열과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뜨겁지도 않고, 데지도 않고, 연기도 나지 않는데 인체는 헤모글로빈이 운반해 온 산소로 영양분을 태워 에너지와 열을 만든다.

그리고 연기 대신 탄산가스를 내어 헤모글로빈에게 반출을 부탁한다. 그러면 헤모글로빈은 산소 대신 탄산가스를 싣고 돌아가 폐에서 배출하고 산소를 다시 싣고 심장을 거쳐 다시 돌아온다.
폐는 그렇게 모여온 탄산가스를 후우, 내뿜고 신선한 공기에 포함된 산소를 들이킨다.

다시 우리의 심장의 움직임을 좀 더 들여다보자.
우리가 느끼는 심장박동은 ‘쿵쿵쿵’ 계속되는 압축과 이완의 단순한 운동이다. 우심방, 우심실이 따로 작동하고 좌심방, 좌심실이 따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심장이 내연기관처럼 흡입, 압축, 폭발, 배기의 네 단계 행정과정을 밟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단순한 압축, 이완 반복운동으로 심장은 혈액을 모아 폐로 보내고 다시 되돌려 온몸으로 내보내는 일을 해낸다.

전신을 돌고 심장으로 돌아온 피는 우심방→우심실을 거쳐 폐로 가서 탄산가스를 내뿜고 산소를 취한다.
그 다음 다시 심장으로 돌아와 좌심방→좌심실을 거쳐 대동맥을 타고 전신으로 뿜어져 나간다.

심장이 이완되면 피는 심방으로 들어오고, 심장이 압축되면 심실에서 피가 뿜어져 나간다. 심방과 심실 사이에는 판막이 있어 역류를 방지한다.
우심방, 우심실 사이에는 삼첨판이 있고 좌심방, 좌심실 사이에는 이첨판(또는 승모판)이 있다.
심장은 단순한 이완과 압축운동을 하지만 그 한 차례의 운동으로 심장의 우편은 피를 폐로 보내고 심장의 좌편은 피를 전신으로 내보낸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구조요 절묘한 기능이다.
누가 이러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고 설계를 하였을까?

심장은 어떻게 영양과 산소를 공급받는가? 심장은 관상동맥이라고 불리는 동맥을 통하여 산소와 영양을 공급 받는다. 관상동맥이 고혈압, 저혈압, 고지혈증 등으로 좁아지거나 막히면 심장근육이 제대로 박동하지 못 하고 심지어 괴사하여 심근경색이나 심장마비를 일으키게 된다. 피를 맑게 유지하는 것은 건강을 위하여 매우 중요하다.

우리 몸의 대부분의 근육은 장기간 쉬지 않고 사용하면 지치고 무력해지므로 반드시 휴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심장근육은 평생 휴식이 없다. 평소에 1초에 60~80회 뛰던 심장이 급박할 때면 100회를 넘어 200회 가까이도 뛴다. 그러고도 쉬겠다고 하지 않는다.
당신의 주먹만 한 심장......
당신의 주먹을 반복해서 쥐었다 놓았다 해보라.
얼마동안 쉬지 않고 쥐었다 놓았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심장근육은 지칠 줄을 모른다.

심장근육이 움직이는 것도 그 원리는 전편에서 소개한 ‘근육의 움직임’에서 말한바 다른 근육들과 마찬가지다.
심장의 근세포들이 칼슘이온들을 내뿜는다, 칼슘이온들이 트로포닌 머리에 달라붙는다, 마이오신이 액틴 단백질을 잡아당긴다. 이렇게 심장근육이 수축된다.
다음 순간 이번엔 근세포들이 칼슘이온들을 회수한다. 트로포마이오신이 다시 끼어들고 굵은 필라멘트의 마이오신이 잡았던 가는 필라멘트의 액틴 단백질을 놓는다. 심장근육이 원상태로 돌아가며 이완된다.
이 작동을 대략 1초도 안 되는 동안 한 차례씩 쉬지 않고 반복한다. 심장수술을 위하여 심장을 끄집어내 놓아도 심장은 계속 팔딱거린다. 심장의 수백억 수천억 모든 세포들이 똑같이 움직인다.
칼슘이온들을 내뿜고 회수하는 순간작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과연 진화는 가능한가?
혈액과 심장 없는 아메바세포들끼리의 진화가 가능한가?  
진화를 시작하려는 아메바 덩어리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이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해 줄 혈액과 그 혈액을 보내줄 심장이다.
그 보급선이 없다면 세포들은 진화는커녕 몇 분도 안 되어 죽어버릴 것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처럼 진화가 먼저냐, 피와 심장이 먼저냐 하는 질문이 당연히 제기된다.  

진화를 하자니 심장이 울고 심장이 있으려니 진화가 운다.
이 모순적 상황을 아메바들이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진화론자들이여, 당신들이 아메바들이라면 이 앞뒤 안 맞는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이 놀라운 생명의 움직임을 보라.
쉬지 않고 뛰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어보라.
당신의 마음, 당신의 사랑, 당신의 열정이 쉬지 않고 박동하는 소리를 들어보라.
당신을 살아 숨 쉬게 하고 당신의 영혼을 뛰게 하는 심장의 음성을 들어보라.  
그것은 창조주가 준 당신의 생명의 소리다.  


33. 근육의 움직임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우리 몸은 약 60 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세포 한 개의 지름은 대략 1,000분의 1 밀리미터 정도다. (이 말 수없이 반복하게 되네...^_^)
그러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에는 몇 개의 세포가 늘어서야 연결될 수 있을까? 세포 1,000 개가 1 ㎜의 길이가 된다면 키가 170 ㎝라면 170만 개의 세포가 한 줄로 늘어서서 발끝까지 닿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신경세포를 생각해 보자. 우리 몸은 뇌로부터 등뼈 속의 등골을 거쳐 구석구석까지 뻗어나가 분포된 신경세포들로 완전히 연결된다.
신경세포를 통하여 감각이 전달되고 두뇌의 명령이 전달된다.

인간은 컴퓨터가 아니다.
컴퓨터 기기를 연결하는 케이블은 무생물이지만 신경세포는 하나하나가 다 살아있는 생명의 매개체이다. 그 매개체들, 세포들이 어떻게 감각을 전달하고 명령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일까?

침대에 누운 채로 발가락을 까딱거려 보자.
나의 뇌로부터 어떻게 저 발가락 끝까지 신호가 전달될까?
오른 발 엄지와 왼발 엄지를 서로 문질러 보자. 살살 문질러도 보고 세게 문질러도 보자. 서로 탁탁 부딪쳐도 보자.
어떻게 저 양 쪽 발가락 두 개가 나의 뇌로부터 동시에 명령을 받아 좌우가 똑같이 움직거릴 수 있을까?

나의 뇌와 저 발가락을 연결한 수백만인지 수천만인지, 수억인지 모를 수많은 신경세포들은 어떻게 빼지도 더 하지도 않고 감각과 명령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도대체 그것들은 어떻게 그 신호를 주고받으며 전하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내 몸이 내 마음대로 그렇게 정교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일까?

일어나 걸어보자.
저 산을 향하여 힘차게 달려보자.
하늘 높이 라켓을 휘둘러 공을 날려보자.
도대체 이 신기한 몸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내가 살아 움직이는 것은 근육의 힘이다.
근육은 뼈에 붙어 있다. 뼈에 붙은 힘줄들은 강력접착제로 붙인 것보다 훨씬 강력하게 붙어있다. 그 힘줄에는 근육이 연결되어 있다.
뼈나 힘줄, 근육, 모두 세포들이다. 세포들이 어떻게 그토록 질기게 붙어 있는지부터 기이하다.

근육을 이루는 근육세포들을 살펴보자.
근육세포는 좀 특이하게 이루어져 있다. 근육세포 한 개는 지름이 십분의 1밀리미터에서 백분의 1 밀리미터 정도 되는데 다량의 근섬유 가닥들이 묶여진 다발이다. 이 다발들이 다음 다발과 연결되고 또 다음 다발과 연결되어 밧줄 같은 근육의 섬유를 만든다.
그 사이사이에는 모세혈관들과 신경들이 함께 들어가 있다.
이 근육섬유들이 모인 것이 근육이다.

그런데 이 근육세포들은 어떻게 수축 이완하는 운동을 하게 되는가?
어떻게 세포들이 상호작용하며 전체적인 근육운동을 만들어내는가?
신경세포는 어떠한 신호로 근육세포들에게 뇌의 명령을 전달하는가?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움직이는지만 그 동작 하나하나가 신비한 움직임의 메커니즘이다.

한 때 개구리 다리에 전류를 통하여 개구리 다리가 움직이는 것을 실험하여 근육의 움직임이 미세한 전류신호에 의한 수축작용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우리 머리에서 신경을 통하여 전기신호를 보내면 근육이 반응하여 움직인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엉성하기 짝이 없다.

근육섬유의 움직임의 메커니즘을 비교적 소상히 밝혀낸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1950년대에 앤드류 헉슬리가 주장한 “근수축의 교차결합이론”이 현재까지 가장 근수축 매커니즘을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근수축의 교차결합이론”은 이렇다.
근섬유 한 가닥, 한 가닥은 단백질 알갱이들로 연결되어 이루어진 지름 1,000분의 1 밀리미터 굵기의 끈이다.
그런데 이 작은 단백질 끈들은 각각 마이오신 단백질로 이루어진 굵은 필라멘트와 액틴 단백질로 이루어진 가는 필라멘트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사이에는 마이오신과 트로포마이오신이라는 단백질 끈 두 개씩이 끼어져 있다.
굵은 필라멘트와 가는 필라멘트는 사이사이에 서로 겹쳐져서 마치 양손을 깍지 낀 모양을 이룬다.
근육의 수축은 굵은 필라멘트의 마이오신이 가는 필라멘트의 액틴단백질을 끌어당겨 슬라이딩시킴으로 이루어진다.  

굵은 필라멘트에 붙은 두 개의 마이오신 머리는 근육이 힘을 쓸 때 가는 필라멘트의 액틴 단백질을 잡아당기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가는 필라멘트에는 트로포닌 머리가 달린 트로포마이오신이 있어서 평소에는 굵은 필라멘트에 붙은 마이오신이 가는 필라멘트의 액틴단백질을 잡아당기지 못 하도록 막고 있다.

근육수축이 일어나려면 먼저 신경이 근육의 근육세포를 전류로 진동, 자극하면 소포체에서 칼슘이온이 나와 트로포닌 머리와 결합한다. 그러면 트로포마이오신이 움츠려들면서 자리를 비켜주고 굵은 필라멘트의 마이오신이 가는 필라멘트의 액틴 단백질을 움켜쥐면서 구부러지는 형태로 잡아당김으로써 근육의 수축이 일어난다. 그리고 신경의 작용으로 칼슘이온이 소포체로 도로 회수되면 트로포마이오신이 다시 끼어들어 큰 필라멘트의 마이오신이 작은 필라멘트의 액틴 단백질을 놓도록 만들어 원위치로 돌아가게 한다.
근육의 수백억, 수천억의 수많은 근섬유마다 동시에 일어나는 이러한 복잡하고 정교한 작용에 의하여 전체 근육이 수축되어 잡아당겨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해도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터넷으로 “근육의 움직임”에 관한 자료들을 직접 찾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대장쟁이식으로 좀 쉽게 설명한다면 그렇다.
한글 자음 ‘ㄷ(디귿)' 두 개를 마주 보도록 놓았다고 생각하자.
그 마주 보는 사이에 막대기 하나를 집어넣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 모양이 되는데 가운데 막대기가 좀 길게 양쪽으로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런데 그 막대기에는 문어발에 난 빨판들이 있다. 이 빨판들이  ⊏와 ⊐의 안쪽을 붙잡아서 끌어당긴다. 그러면 ⊏와 ⊐는 서로 가까이 끌려 들어와서 근육의 수축을 일으킨다.
- 막대가 굵은 필라멘트이고 ⊏와 ⊐가 작은 필라멘트이다.
근육섬유는 이러한 조합의 연결이다.
⊏-⊐⊏-⊐⊏-⊐⊏-⊐⊏-⊐ 식으로 말이다.

사실은 그런데 ⊏와 ⊐가 아니라 영어의 E나 ㅌ(티읕), 그 보다 훨씬 많은 층을 이룬다.
양편에 작은 필라멘트 두 개, 그 위에 굵은 필라멘트 한 개, 다시 그 위에 작은 필라멘트 두 개, 그 위에 굵은 필라멘트, 다시 작은 필라멘트 두 개..... 이런 식으로 수많은 층층으로 근육섬유소가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등을 맞대고 붙어서 줄로 연결된 근육섬유를 이루는 것이다.
(아, 이거 설명하느라 대장쟁이 고생하네.)
제대로 이해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것이 앤드류 헉슬리의 “근수축의 교차결합이론”이다.

자, 아무튼 가운데 굵은 필라멘트 막대기 - 의 빨판 같은 손들이 마이오신이고 이것이 ⊏와 ⊐ 가는 필라멘트의 액틴 단백질을 움켜잡고 끌어당김으로써 근육이 수축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작동을 일으키고 제어하는 것이 칼슘이온이다.
근세포에서 칼슘이온들이 뿜어져 나온다.
그 칼슘이온들이 가는 필라멘트의 트로포마이오신의 트로포닌 머리에 달라붙으면 굵은 필라멘트의 빨판 마이오신이 가는 필라멘트의 액틴 단백질을 움켜잡고 당기게 되는 것이다.
다시 힘을 빼려고 하면 근세포들이 칼슘이온들을 도로 회수해 들인다. 그러면 마이오신들이 액틴 단백질을 놓아주고 근육은 이완되어 원상태로 돌아간다.
이러한 복잡한 작동이 1,000분의 1 밀리미터의 작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작동이 일어나는 수백억, 수천억의 근세포들이 근육의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 이제 당신의 팔뚝 근육을 움직여보자.
두뇌로부터 신호를 전달받는 순간 근세포들은 칼슘이온들을 내뿜는다, 칼슘이온들이 트로포닌 머리에 달라붙는다, 마이오신이 액틴 단백질을 잡아당긴다.
자, 힘을 빼보자.
이번엔 근세포들이 칼슘이온들을 회수한다. 트로포마이오신이 다시 끼어들고 굵은 필라멘트의 마이오신이 잡았던 가는 필라멘트의 액틴 단백질을 놓는다. 근육이 원상태로 돌아간다.

자, 손가락을 빠르게 진동시키듯이 움직여보자.
일초에 다섯 번..... 빠른 속도로.
그러면 0.1초 사이에 칼슘이온이 나오고 0.1초에 다시 회수되고, 다시 0.1초에 칼슘이온이 다시 나오고 0.1초에 다시 회수되고......
이 메커니즘이 0.2초 사이에 순간적으로 반복된다.

강하게 힘을 주면 많이, 약간 힘을 주면 적게,
이리저리 동작을 바꾸면 각 근육이 정교하고도 신속하게 칼슘이온의 방출과 회수를 수행하면서 모든 근육세포들을 움직인다.
신기하지 아니한가?
놀랍지 아니한가?
누가 이 신기한 메커니즘을 고안하고 발명했단 말인가?

그러나 현대과학이 아직도 근육의 움직임을 완전히 밝혀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신경세포들이 어떻게 근섬유세포들을 통제하는지, 그 미세한 근섬유들에 어떻게 신경이 반응하고 근섬유의 단백질 알갱이들이 순간적으로 칼슘이온을 방출, 회수하면서 근육수축, 이완운동을 일으키는지, 그 놀라운 메커니즘은 여전히 신비에 싸여 있다.

또한 피로 공급되는 영양분과 산소를 근육세포들이 어떻게 산화시켜 에너지로 바꾸는지, 세포의 발전소로 알려져 있는 미토콘드리아는 어떻게 에너지를 만들어내는지, 현대과학은 다만 추정과 이론과 학설만을 내놓을 수 있을 뿐이지 그 신비스러운 메커니즘의 비밀의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 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가 별로 생각해보지 않은 근육의 움직임조차 경이,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러한 매커니즘을 몰라도 우리는 아무 문제없이 걷고 달리고 던지고 구르는 운동을 자유자재로 하면서 살고 있다.  
이런 놀라운 메커니즘을 DNA 유전정보를 통하여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나 더 낫게 진화시켜서 후대에 물려주어야 하겠다는 따위에도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간다.

두뇌가 명령을 보내고 신경이 근육세포들을 자극하고 근육세포들이 칼슘이온을 방출하고 회수하고........
아무도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마음대로 움직이고 활동할 뿐이다.
우리의 두뇌가 생각하는 대로 우리의 몸은 움직인다.
신경이 온 몸을 두뇌로 연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온 몸의 신경이 뇌의 일부분인 것 같다.
아니, 온 몸이 하나인 것이다.

이 놀라운 작품으로 살면서 누가 진화를 주장할 수 있는가?


<십일조는 누구에게 드리는 것인가?>

기독교 신자는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십일조는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십일조는 신약시대에서는 폐지된 구약의 율법인가?
(여기 또 하나의 뜨거운 감자를 올립니다.)


1. 십일조에 대한 일반적인 가르침

일반적으로 기독교신자들이 ‘십일조’ 하면 떠올리는 것이 말라기 3장 말씀이다.

(말3:8~10)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 말씀에 의하면 십일조와 헌물은 하나님의 것이요 이를 드리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요 저주를 자초하는 행위이다.
그런가하면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를 하늘 문을 열고 축복하신다는 것을 자신을 시험하라고까지 하면서 약속하신다.

그런데 오늘날 십일조는 구약시대의 유물로, 또한 교회의 헌금강요 내지 치부수단으로 매도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과연 그럴까?


2. 구약시대 십일조의 시작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처음 정하신 것은 민수기 18장에서이다.
(민18: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이 말씀 그대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아 회막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에게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것이다.
레위지파는 성막에서 섬기도록 구별되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다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지만 레위인들에게는 분배되는 땅이 없다.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거주지로 삼고 제물로 드릴 짐승을 간수할 성읍 주위의 조그만 땅밖에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의 기업이다. 그들에게 나의 십일조를 돌린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민수기 맨 앞으로 돌아가 1장과 2장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20세 이상의 남자를 다 세도록 하셨는데 여기에서 레위지파는 빠진다.
그리고 3장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레위 지파 중 일 개월 이상 남자의 수를 다 세도록 명령하신다. 세었더니 22,000 명이다.
다음은 이스라엘 자손 중 처음 난 남자를 생후 일 개월 이상으로 모두 세라고 명령하신다. 세었더니 22,273명이다.
레위인 남자의 수보다 이스라엘 자손 처음 난 남자의 수가 273명 많다.

하나님은 모든 처음 난 남자, 곧 장자는 하나님의 것이라 주장하셨고, 이 뿐 아니라 생축의 처음 난 것과 곡식과 열매의 처음 거둔 것도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셨는데 여기 민수기 3장에서 보면 그 장자들을 도로 돌려주는 대신 레위인을 하나님의 것으로 삼겠다고 하시면서 교환하고 계신다.
그리고 돌려주실 장자가 레위인보다 273명 더 많으니까 한 사람에 오 세겔씩 돈으로 계산하여 1,365세겔을 받아 챙기신다.
너무하시다. 대충 넘어가시지 않으시고 그걸 돈으로 계산해 다 받으시다니.


3. 장자의 의미, 레위인의 의미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의 장자를 유난히 푸대접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우선 다윗이 말째 아들이다.
메시아의 계보인 유다는 넷째다.
야곱도 동생이다.
하나님은 장자혐오증에라도 걸리셨는가?

그렇다.
하나님은 장자혐오증에 걸리셨다.
인류의 장자인 아담은 선악과사건을 저질러 모든 인류에게 죄와 죽음을 선사했다.
아담과 하와의 장자인 가인은 동생 아벨을 때려죽였다.
가인이 한다는 소리가 “제가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였다.
하나님의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였을 것이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그렇지 않은가? 형이 동생을 지켜주어야지 누가 지켜준단 말인가?

그렇다. 못 된 인간의 맏아들은 형 노릇을 못 했다.
동생들을 지켜주기는커녕 오히려 때려죽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의 장자(장자권)를 압류하고 자신의 아들을 인간들에게 살려내는 맏형으로 내어주셔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형이 되셨다.
그렇다. 성경 여러 곳에서 그렇게 말씀하신다.
시편 22편과 히브리서 2장을 보라. 그는 우리와 똑같이 되셔서 형제가 되셨다 하지 않는가.

광야에서의 성막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그 구원하신 백성과 함께 계신다’, 곧 임마누엘을 의미한다.
그런데 성막은 하늘의 참된 성소의 그림자이다.
그런데 태초부터 그 하늘의 참된 성소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섬겼던 자가 계셨지 않은가? 누구인가?
바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복음 1장 1절)
하나님은 그 장자를 내어주신 것이다.

하늘에서 아버지를 섬기시던 맏아들을 내어주셨으니, 그러니 하나님께서 인간의 장자(장자권)를 몰수하고 “장자는 내 것이다. 모든 처음 난 것은 내 것이다.” 주장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런데 민수기 3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자를 되돌려주신 것이다.
그리고 대신 레위인을 택하여 회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신 것이다.
그리고 돌려주신 장자가 더 많은 만큼 오 세겔씩 돈으로 쳐서 받으신 것이다.
이렇게 셈에 철저하신 것은 단 하나의 생명도 허투루 여기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자신의 아들로부터 섬김을 받으시다가 그 아들을 내어주시고 광야에 내려와 성막 가운데 계시면서 레위인들로부터 섬김을 받는다는 것은 완전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다.


4. 십일조의 의미

레위인들이 기업도 없이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려면 형제들에게서 십일조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도 그렇다.
만일 십일조가 없었다면 2000년간 교회가 어떻게 지탱되어 올 수 있었겠으며 선교사는 어떻게 보내며 복음이 과연 우리에게까지 전해질 수 있었겠는가?

그건 구약시대 이야기고 신약시대에는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고 레위인이 따로 없고 그래서 십일조도 필요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십일조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내어야 한다.
십일조를 내어야 하는 이유는 가나안 땅을 분배받았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가나안 땅은 천국의 예표이다.
신약성도들은 십일조 낼 필요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자는 천국 땅을 분배받지 않을 모양이지?

왜 하나님은 십일조를 받아서 레위인들에게 돌리셨는가?
민수기 18:21절 말씀은 레위인들의 섬김의 대가(갚음)라 하셨다.
(민18: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천국은 하나님의 아들의 것이다.
가나안 땅을 분배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내어야 하는 것처럼
천국을 분배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도 십일조를 내어야 한다.

그 십일조는 하늘성소에서 섬기시던 아들의 몫이다.
그런데 그 아들을 죄인들에게(이스라엘 백성에게) 내어주시고 대신 회막에서 레위인으로부터 섬김을 받으시니 황송하게도 레위인이 그 십일조를 받게 된 셈이다.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하나님은 아들을 위하여 창조하셨고 아들에게 다 주셨다.
아버지의 것은 다 아들의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아들에게로 상속된다.
당연히 천국은 아들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셨고 그 아들의 천국까지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이다.
그 생명, 그 살과 피, 아니 그 아들 되심, 후사 되심, 상속권을 몽땅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죄인이었던 우리가 아들이 십자가에서 찢어주신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까지 분배받는 것이다.

가나안 땅을 분배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십일조를 내었는데
영원한 하늘의 약속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과 아들 됨을 받은 우리가
후사가 된 우리가 십일조를 안 내다니?


5. 아브라함과 야곱의 십일조

아브라함이 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는가?
하나님의 아들, 영원한 제사장, 곧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일조는 바로 구원의 주이신 그리스도에게 드린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십일조의 예표이며 모형인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이 나를 지키사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십일조를 드리겠나이다, 하고 서원한다.
아비 집은 영원한 구원의 처소요 안식의 처소요 천국의 예표이다.
야곱에게 아버지의 집......., 그것은 장자 에서가 물려받게 되어 있으며, 죄(?)를 범하고 도망가는 야곱에게 아버지의 집에 평안히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득한 훗날의 소망이다.
이 장면은 마치 재산을 팔아 타국으로 떠나는 탕자나 하나님을 떠나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죄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러한 신세의 야곱이 “제게 아비 집으로 평안히 돌아오게 하신다면 십일조를 드리겠나이다.” 하는 것은 죄인이 “하나님 아버지의 집, 곧 주님의 소유인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시오면” 하는 것과도 같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들의 십일조가 레위인들이 아직 허리 속에 있을 때 있었던 일로 아브라함, 야곱, 레위인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멜기세덱, 곧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이라고 풀이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아비의 집, 가나안 땅, 곧 본향인 천국으로 돌아갈 자가 드리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6. 십일조는 주님께 드리는 것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십일조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다.
가나안 땅을 분배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를 드린 것은 구원을 얻은 신약성도들이 주님께 드리는 십일조의 모형이요 예표이다.
 
이것을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7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히7: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In the one case, the tenth is collected by men who die; but in the other case, by whom is declared to be living. (NIV)

동사가 현재시제이므로 우리말 성경에 ‘받았느니라’는 ‘받느니라’라고 해야 옳다.
즉 구약시대에는 죽을 자들, 곧 레위인들이 십일조를 받았으나, 신약시대에는 살았다고 선언된 자,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일조를 받으신다는 것이다.

신약에서 십일조는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십일조를 받으실 분이 분명해진 것이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 아니다.
오히려 구약의 십일조는 신약에서 이루어질 십일조의 예표인 것이다.


7. 십일조는 성도의 신앙이요 힘이요 자랑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라면 십일조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 십일조의 주인은 주님이시다.
십일조는 천국생명을 얻은 성도의 표다.

구원 받은 백성이 드리는 것은 예배이다. 찬양이다. 이것은 입술로 드리는 것이다.
구원 받은 백성이 드리는 것은 삶이다. 거룩한 산 제사(롬12:1-2)다. 이것은 거룩한 의의 병기로 드리는 것이다. 주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몸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다 입으로 때우고 몸으로 때우는 것이다.

입으로, 몸으로가 아닌 현찰로 드려야 하는 것이 바로 십일조이다.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요 이를 안 드리는 것은 도적질이라는 말씀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변함없다.
구약시대에 십일조를 도적질하는 것은 하나님의 재물을 훔쳐 먹는 것이었지만
신약시대에 십일조를 도적질하는 것은 주님의 생명을 훔쳐 먹는 셈이 되지 않겠는가?

오늘날 교회들이 재물로 타락하고 성도들의 믿음의 고백인 십일조가 잘못 쓰이는 경우가 많다 해도 십일조는 성도의 거룩하고 당연한 의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십일조와 헌금의 잘못된 쓰임과 교회의 대형화와 개교회주의에 의한 헌금독점현상은 인간들의 문제이며 고쳐야 할 문제이지 십일조 자체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반기독교, 반교회인사들이 마치 십일조가 교회의 부패의 원인인 것처럼 말하면서 십일조 무용론 내지 해악론을 펴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십일조 없는 교회, 십일조 없는 기독교가 과연 힘이 있겠는가?
십일조 없이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힘 있게 확장되어갈 수 있겠는가?

십일조 안 드리는 성도는 천국 못 간다는 뜻 절대로 아니다.
구원은 십일조가 아닌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일조는 이 세상에서의 물질적 축복의 조건도 아니다.
이 세상의 물질적 축복을 위하여 드리는 십일조는 일종의 거래이자 기복신앙의 전형이며 하나님께서 받으실 리가 없다.
십일조가 성도에게 지워지는 책임이요 의무도 아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에게 그러한 의무를 지우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무슨 조건을 걸거나 바라면서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다.
구원은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다.

그러나 주님의 살과 피, 그 생명을 받은 성도는 스스로 기쁨과 즐거움으로 자원하여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옳다.
아니 참으로 십자가의 사랑과 구원을 받은 자는 자원하여 주님을 섬기며 십일조가 아니라 십이조, 십삼조, 아니 가진 모두를 주님께 아낌없이 드리고자 하는 마음일 가지게 될 것이다.

어쨌든 십일조는 천국백성의 자랑스러운 의무요 표요 힘이요 자랑이다.
이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군대의 보급선이다.
아름다운 드림이 하나님나라, 그리스도의 몸을 아름답게 세우고 이기게 할 것이다.


32. 눈(眼, Eye)

진화론자들에게 눈은 매우 껄끄럽다.
왜냐하면 눈을 진화로 설명하는 것이 도무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창(窓)이라는 우리 인간의 아름다운 눈.......,
아기의 까만 눈동자 보다 더 귀여운 것이 있을까?
사랑으로 응시하는 연인의 그윽한 두 눈 보다 황홀한 것이 있을까?
눈물을 머금고 자식을 지켜보는 부모의 눈길보다 더 따스한 것이 있을까?
눈은 머리 두개골 앞쪽에 난 두 개의 창문에 자리 잡고 있다.
머리의 가장 높은 곳에, 입과 코 위에 자리 잡고 있다.
희한하게도 모든 동물들의 눈이 다 그렇다.
동물들이 각기 제 멋대로 각개전투식으로 진화를 해왔다면 그렇게 눈의 숫자나 위치가 같을 수가 없다.
곤충들의 눈은 홀눈 겹눈으로 돌출되어 달려있지만 포유류나 조류, 양서류 등 대부분의 동물들은 두 눈의 피부가 가로로 찢어져 열려 있고 안구(眼球)가 그 안에 들어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작은 벌레, 곤충들로부터 큰 동물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동물들이 두 개의 눈, 두 개의 귀 또는 두 개의 촉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머리 앞쪽에 두 눈이 있고, 그 아래 두 개의 콧구멍이 있고, 그 아래 한 개의 입이 달려 있는 순서와 배열의 일치를 보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 인간의 눈을 좀 들여다보자.
두 눈썹 밑에 두 눈, 속눈썹이 가지런히 나 있고 깜빡이며 움직이는 눈꺼풀은 눈물샘에서 나오는 눈물로 몇 초 간격으로 안구의 표면을 쉬지 않고 세척하고 윤활해 준다.
안구는 투명체로 만들어져 있고, 렌즈 역할을 하는 수정체가 있고, 광선의 양을 조절하는 홍체가 있고, 각막이 있다.
수정체 동공을 통과한 빛과 상(像)은 안구 안쪽의 망막이라는 우표딱지만 한 작은 스크린에 거꾸로 비치게 된다.
이 망막에 거꾸로 비친 영상은 즉시 70만 개의 신경세포로 뇌로 전달된다.

뇌로 연결된 70만 개의 신경세포 하나하나는 그 끝에 200개 가까운 수많은 신경초(神經草)를, 마치 파뿌리같이 가지고 있다.
이 신경초의 파뿌리 가는 바늘 끝들은 망막에 촘촘히 박혀서 감광점을 이루어 망막에 비친 빛과 색상을 감지한다.
망막에는 모두 1억 3천만 개나 되는 신경초 끝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이 1억 3천만 개의 신경초의 대부분은 명암, 즉 빛의 세기를 감지하고 7~8백 만 개의 신경세포만 색상(color)을 감지한다.

디지틀 카메라이든 텔레비전은 화소가 많을수록 선명한 화질을 제공한다. 얼마 전만 해도 보통 디지틀 카메라는 3메가픽슬(Mega Pixel, 화소) 정도로 만들어졌다. 화점이 3백만 개, 300만 화소라는 뜻이다.
요즈음 나오는 디지틀카메라는 대개 10 메가 픽슬을 좀 넘는 수준이다. 화점이 천만 개를 좀 넘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정도만 해도 화면을 상당히 확대해도 깨끗한 화질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눈은 그 보다 10배가 많은 화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눈은 그런 디지틀 카메라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무려 1억 3천 만 개나 되는 화점을 가진 130메가픽슬짜리 초고성능 동영상 자동카메라인 셈이다.

또한 신기한 것은 망막에 비치는 영상이 1억 3천만 개의 신경초들에 감지되고 70만 개의 신경세포들에 의하여 뇌에 전달되는 과정에서 꼬임이나 혼돈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신경세포와 신경초들이 뇌까지 전달되어 가는 동안 뒤섞이기도 하고 꼬이기도 할 텐데 어떻게 영상이 전혀 꼬이거나 섞이거나 흐트러짐이 없이 전달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망막에 비친 상이 신경세포에 의하여 뇌에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눈의 망막, 70만 개의 신경세포들과 그 끄트머리 신경초 1억 3천만 개가 현장에서 상을 직접 감지하는 뇌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눈은 뇌의 일부분이란 뜻이다.
즉 현장에 파견 나와 있는 두뇌인 셈이다.
그래서 망막에 비친 영상을 즉시 현장에서 헝클어짐 없이 실시간으로 바로 인지하는 것이다.

만일 진화론자들의 주장대로 눈이 진화로, 용불용설에 의하여 생겨났다면 어떻게 될까?
눈이 어느 날 돌연변이로 생겨났을까?
그건 말도 안 된다.
진화를 통하여 눈이 생기려면 먼저 원시생명체가 빛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빛을 감지하면 주변상황을 영상으로 감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하고, 그래서 눈을 갖고 싶어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원시생명체가 그런 걸 알고 그런 의지가 있었다면 누가 가르쳐 준 것일까?

진화과정에 있는 생명체가 진화의 어느 단계쯤에서 눈을 만들기로 결심하게 될지 모르지만, 아무튼 진화론자의 용불용설을 도입한다면, 그 생명체는 눈을 만들기 위하여 먼저 스스로 두개골에 두 개의 구멍을 파내야 한다.
뇌를 보호하는 두개골에 스스로 구멍을 내는 고통의 결단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아직은 수정체도 망막도 없는, 눈의 구실을 전혀 할 수 없는 “눈탱이가 밤탱이 같은” 함몰된 구멍과 혹 주머니나 덩어리 두 개로부터 진화를 시작했어야 할 것이다.
왜 두 개씩이나 필요하지? 한 개도 아파 죽겠는데.......

그리고 진화과정의 그 생명체는 자신의 일생동안 그 눈탱이가 밤탱이 같은, 보이지도 않는 그 두 눈을 달고 고생하면서 진화시키기 위하여 일평생 보려고 애를 써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보고자 하는 일생의 노력과 개선으로 조금 더 나아진 눈탱이의 유전자를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수십만, 수백만 년 동안 대를 이어 노력하고 개선해 나가야 한다, 눈이 만들어지려면.    

아, 그랬다면, 그렇게 눈이 생겨났다면 그들의 노력은 얼마나 눈물겹고 숭고한 것일까?
자연선택이나 용불용설로 진화하려니 뵈지도 않는 눈탱이 밤탱이 같은 혹 주머니는 불필요하니 당장 버려야겠지만 언젠가 후손으로 하여금 보게 하기 위하여 밤탱이같은 눈 혹주머니 달고 그들이 치러야 했을 고생과 희생은 얼마나 컸을까?

“엄마, 왜 이 구멍에다 밤탱이 같은 혹주머니 넣고 다녀야 해요? 그것도 두 개씩이나.”
“아가, 힘들더라도 참아라. 지금 우리는 볼 수 없지만, 우리가 이렇게 몇 십만 년, 몇 백만 년, 몇 천만년 애쓰고 참아내면, 이렇게 몇 만 대, 몇 십만 대, 몇 백만 대를 내려가면 언젠가 우리 후손들은 완성된 눈을 달고 볼 수 있게 될 거야. 그리고 눈이 한 개면 보이긴 하지만 거리측정이 안 되거든. 그래서 두 개를 만들어야 한단다. 알았지?”
만일 눈이 이런 식으로 진화했다면 우리 모두는 소망 중에 인내하며 후손을 위하여 끝내 눈을 진화시켜주신 원시생명체 우리 조상님들께 얼마나 감사해야 할까? 우리는 현충일, 메모리얼데이 보다 더욱 더 그들의 눈물겨운 고귀한 희생을 기려야 할 것이다.

소리를 듣는 귀도 마찬가지다.
모든 감각기관이 다 마찬가지이다.
모든 기관과 장기와 지체가 다 그렇다.
인체의 어느 기관, 어느 부위 하나 허투루 만들어진 것이 없고 불필요한 것이 없다.
근육이 움직이는 시스템도 경이롭기 짝이 없다.
뼈가 어쩌면 그렇게 생겼는지, 어쩌면 그렇게 강한지 신기하다.
피부도 신기하고 신경조직도 신기하다.
염산이 흘러나와 음식물을 소화시키는 위도 희한하다.
혈액도 신비하고 그 혈액이 허파와 간을 거치며 산소와 영양분을 가져다 인체 구석구석까지 공급해주는 것도 신비이다.
호르몬이 나오고 뇌에서 화학물질이 분비되는 것도 경이롭다.
인간의 두뇌는 우주보다 오히려 신비스럽다.
병원에 가서 인체를 그려놓은 그림들을 들여다보면 신비하기 짝이 없다.

이런 것들이 진화의 산물이라 말하지 말라.
이러한 것들이 원시생명체들이 장래에 태어날 후손을 위하여 갖추려고 눈물겨운 노력과 희생을 통하여 진화를 통하여 생겨나고 발전해온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눈(眼)을 놓고 진화를 주장할 수 있다면 그는 바보이거나 심장에 털 난 거짓말쟁이이다.

만일 진화론이 옳다면, 우주만유가 하나님의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면 성경의 첫 문장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새빨간 거짓말이 될 것이다.
우리를 지으셨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거짓말쟁이, 사기꾼이 될 것이다.
창조주도 아니면서 지구에서 우리 인간들이, 아니 호모사피엔스들이 아메바, 벌레로부터 수 억년 동안 열심히 진화해놨더니 가만히 지구를 찾아와서 자기가 창조주, 우리를 지은 하나님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과연 원시생명체 아메바로부터 진화한 존재라면 우리 인간은 벌레나 박테리아와 다를 것이 없고 영혼이고 사후세계도 없을 텐데 하나님은 스러져 없어질 우리 불쌍한 인간을 속여 영생을 약속하고 예배와 찬송을 받고 있는 악신(惡神)이란 말인가?

당신은 이 자리에서 결정하라, 우리 인간이 진화된 아메바요 하나님은 사기꾼이라 말하든지, 아니면 우주만유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든지.


31. 콧구멍이 머리에 뚫린 고래를 찾아라.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진화론의 요체는 필요에 따라 기관이 생겨나고 쓰면 진화하고 안 쓰는 기관은 퇴화한다는 것이다.
이를 용불용설(用不用說, Law of Use and Disuse)라고 한다.
기린이 높은 곳의 나뭇잎을 따먹다보니 목이 길어졌다는 것이다.
(뭘 모르는 소리, 기린의 목이 긴 것은 머리통이 너무 멀리 있다 보니 그걸 몸통에 이어 붙이느라고 길어진 것이다. ^_^ 농담.)

새가 날아오르려고 애쓰다 보니 날개가 생겼다는 것이다.
생명체들은 필요에 의하여, 혹은 우연에 의하여 돌연변이를 일으켜 새로운 종으로 진화한다는 것이다.
걷고 달리려 애쓰다보니 다리가 생겨나고, 헤엄치려다보니 지느러미가 생겨나고, 허우적거리다 보니 날개가 생겨났다는 식이다.
또한 사용하지 않거나 불필요한 신체부위는 퇴화하고 없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꼬리가 없어졌다거나 맹장이 퇴화한 소화기관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용불용설에 의하여 진화하고 적응하며 생존경쟁에서 이긴 놈들은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놈들은 도태되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자연선택설(自然選擇說)이라 한다.
즉 목을 길게 늘여서 높은 곳의 나뭇잎을 따먹은 기린들은 살아남고 목을 늘이지 못 한 기린들은 목이 긴 기린들이 높은 곳의 나뭇잎들을 다 따먹는 바람에 굶어 죽는다는 것이다.
진화에 성공하여 빠른 다리나 날개, 지느러미 같은 생존에 필요한 무기와 장비를 잘 갖춘 동물들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 한 동물들은 자연선택에 의하여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용불용과 자연선택이 진화를 이루어온 원천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돌연변이설도 있다. 갑자기 이상한 게 생겼는데 그게 아주 유용하여 그것을 유전으로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들이다.
또한 대립유전자(對立遺傳子)니 유전자 풀(Genetic Pool)이니 하는 등의 이론들도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에는 진화나무 그림이 등장한다.
고생대 원시생명체로부터 점점 진화하여 여러 가지 동물이 탄생하고 그 중 한 종류는 원숭이와 유원인을 거쳐 인간으로 진화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비슷한 모양의 생물은 늘어놓아 진화를 납득시키려는 것으로 아주 그럴 듯하다.
그러나 이 진화나무는 한 마디로 억지요 거짓이다.
진화나무를 온전히 입증하기 위한 진화중간단계의 화석이나 진화과정중의 화석이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같은 종(種)의 동물들이라도 수많은 종류들이 있다.
예를 들어 개를 보면 불독, 세파트, 진돗개, 시베리안 허스키 등 큰 종류가 있는가 하면 난장이처럼 다리가 짧은 종류, 치타처럼 다리가 길어 날랜 그레이하운드도 있고, 발바리, 치와와 같은 작은 종류도 있고 컵에 들어갈 만큼 조그만 종류의 개도 있다.
만일 누가 이러한 개들을 비슷한 종류끼리 늘어놓고 진화중이라고 주장한다면 다들 웃을 것이다.
그런데 진화론자들은 이런 식으로 비슷한 동식물들을 연결해놓고 진화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작은 미생물이나 세균조차 완벽한 기능과 생존에 필요한 모든 조직을 갖추고 있다. 누가 박테리아나 유산균을 진화가 덜 된 미개생명체이며 지금도 진화중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작년엔가 신문에 보도된 모기의 심장을 찍은 사진을 본 적 있는가?
마치 튜브처럼 생긴 심장에 수없이 연결된 실 같은 근육들이 심장을 치약튜브처럼 짜듯이 혈액을 밀어내도록 되어 있는 신기한 모기심장의, 현수교처럼 보이는 구조를 찍은 그 녹색사진 말이다.
작은 모기조차 정밀하게 만들어진 심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 사진 한 장은 창조주의 지혜와 세미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혹시 못 보신 분들은 구글 이미지로 들어가서 “모기심장”을 검색해보시라.)

누가 작은 개미와 벼룩이 작다 하여 그것들을 진화가 필요한 작은 생명체라 할 수 있는가?
누가 알에서부터 애벌레(구더기), 번데기를 거쳐 껍질을 벗고 날개를 달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오는 나비와 곤충들을 보면서 그것들이 진화를 하면서 희한한 번식방법을 고안해 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누가 수천 리를 헤엄쳐 올라가 자신이 태어난 냇물에 알을 낳고 생을 마치는 연어의 회귀본능과 번식방식을 진화의 산물이라 우길 수 있는가?
암컷이 알을 낳으면 먹지도 않고 그 알을 지키다가 그 알들이 부화되면 그 때 기진해서 죽는 수컷 가시고기의 부정(父精)을 어찌 진화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수천리, 수만리를 날아가는 철새도 그렇지만, 수천리 바다(멕시코만)를 건너 고향으로 돌아가 알을 낳고 생을 마치는 나비는 어떻게 진화로 설명할 수 있는가?
뱀의 독, 복어의 독, 전기뱀장어, 적을 만나면 100도가 넘는 뜨거운 증기를 쏘아붙이는 물고기와 곤충을 진화로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만일 그들이 진화를 통하여 그 독을 만들어내려고 했다면 그들 자신부터 죽고 말았을 것이다.

100도가 넘는 뜨거운 증기를 쏘는 동물이 양쪽에 주머니를 달고 그 안에 서로 다른 성분의 화학물질을 넣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그 물질을 합쳐서 화학반응을 일으켜(테러리스트들이 이런 방식의 화약을 사용한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려는 승객들은 모든 액체가 든 병, 물까지 압수당한다.) 100도가 넘는 뜨거운 증기를 순간적으로 적의 얼굴에 쏘아붙이는 그 기발한 아이디어를 어떻게 발명해 내었단 말인가?
그런 발명을 했더라도 그런 위험한 시도를 했다가 자신부터 폭발로 죽을 텐데 말이다.

공룡(恐龍)도 그렇다.
그 거대한 공룡은 무엇으로부터 진화했을까?
공룡들은 진화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하였단 말인가?
교과서에 나오는 진화나무 그림은 지구상에 출현한 가장 거대한 동물인 공룡의 이전단계, 즉 공룡이 어떻게 진화되어서 생겨났는지는 쏙 빼버리고 마치 공룡이 처음 갑자기 생겨난 원시동물인 것처럼 그려놓았다.
공룡은 도대체 진화중간고리조차 없다.
진화도중에 있는 공룡화석이 발견된 것도 없다.

그렇다면 공룡이 진화초기단계의 원시적인 동물이란 말인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억지이다.
공룡들은 완벽한 골격과 신체, 그리고 생존과 활동기능을 갖추고 나타나 지구를 지배했던 동물이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목이 덜 자란 기린의 화석도 발견된 적이 없다.

고래에 대하여도 생각해 보자.
고래는 물고기가 아닌 포유류 동물이다.
진화론에 의한다면 땅에서 살다가 바다로 들어간 종(種)이다.
특이하게도 콧구멍이 등에 뚫려 있다.
진화론자의 주장대로라면 고래는 도대체 어떻게 진화했을까?

고래가 처음 육상동물이던 시절에는 입 위, 눈 밑에 있던 콧구멍이 수만 년, 수백만 년 물속에 살다보니 점점 올라가서 미간으로 올라가고, 다시 이마로 올라가고 머리를 지나 등에까지 넘어갔단 말인가?
진화도중의 한 때 고래의 기도(氣道)는 뇌(腦)를 지나 허파와 연결되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고래가 물속에서 숨을 오래 참다보니 어느 날 압축된 공기가 등을 뚫고 “빵-” 터지는 바람에 그 때부터 등에 콧구멍이 생겼단 말인가?
그래서 용불용설을 사용하여 원래 있던 콧구멍들은 없애버리고 등에 새로 생긴 콧구멍만 남겨놓았단 말인가?
그리고 그렇게 등에 콧구멍이 생긴 고래만 적자생존, 자연선택으로 살아남고 아직도 콧구멍이 이마나 정수리쯤에 있던 고래는 무대에서 퇴장(退場)하였단 말인가?
만일 고래가 진화했다면 콧구멍의 위치이동이 참으로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진화론자들의 주장이 옳다면 진화도중의 공룡과 콧구멍이 이마나 정수리에 난 진화중인 고래화석을 구경하고 싶다.
진화론자들이어, 그런 화석들을 찾아서 보여 다오.

30. 인류의 조상은 한 여자이다.

1994년, 인류가 한 여자로부터 왔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것은 미국 하와이대학의 레베카 칸 교수, 버클리대학의 윌슨 교수와 마크 스톤킹 교수, 세 사람이었다.
이들은 백인, 흑인, 황인종을 망라하여, 에스키모, 호주, 뉴기니아 원주민까지 전 세계 다양한 인종의 산모 147명으로부터 태반을 기증 받아 체세포의 유전인자를 분석, 추적하였다.

이 연구에 참여한 교수들은 거의 모든 인종의 여성 유전자가 큰 차이가 없으며, 거의 동일한 유전암호체제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즉 지구상의 모든 인류의 어머니는 단 한 명의 여성이라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자에는 진화의 흔적이 전혀 없고 다만 환경적응에 의하여 인종적, 민족적 특성이 나타날 뿐이라는 것이다.

마크 스톤킹 교수는 "인류의 시작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 된 것 같지 않다. 타문화권 사이에 유전적 차이도 거의 없다."라고 하였다.
또 윌슨 교수는 "온 인류에게 자신의 미토콘드리아의 DNA를 물려준 그 여성은 아마도 아프리카 북부나 중동 가까운 곳에 살았을 것" 이라고 추정했다.
그 이유는 온 세계 인류 다른 인종간 유전인자의 차이보다 아프리카의 종족간의 유전인자에 오히려 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약 60조 개의 세포를 가지고 있다.
세포 하나의 크기는 지름이 1,000분의 1 밀리미터에 불과할 정도로 작으며, 그 모양은 달걀과 비슷하다.
노른자에 해당하는 세포핵이 있고, 그 둘레엔 원형질 부분, 바깥은 껍질에 해당하는 세포막이 있다.
인간의 특성을 결정짓는 유전자(DNA)는 세포핵 속에 있는데 약 30억 개의 매우 작은 핵산, 아미노산 단백질 알갱이가 이중나선으로 연결, 조합된 고리다.

그런데, 1970년대에 이르러 세포의 흰자위 부분, 즉 원형질 부분에 존재하는 수 천 개의 미토콘드리아 속에도 유전인자가 들어있으며, 이 미토콘드리아의 유전자는 어머니로부터만 물려받는다는 것, 즉 어머니로부터 딸로 이어져 내려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래서 이 미토콘드리아의 유전자를 감식하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시신이라도 그 신원을 파악할 수 있다. 같은 모계혈통을 가진 사람은 똑같은 미토콘드리아의 유전자를 갖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구상에서 단 한 종류의 유원인만이 진화에 성공했다는 말인가?'
'어째서 인류의 조상인 그 여성 이후로는 진화가 중단되었는가? 진화도 완성되는가?'
'어떻게 지구상의 다른 지역에서는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단 한 사람의 여성이 온 인류의 조상이라면 어떻게 그 여성만의 유전자가 퍼져나갔는가?'
'당신들의 연구결과는 창조설을 지지하는 것인가?’
'그 최초의 여성이 성경에 나오는 이브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결과를 성경과 연관시키는 것은 극구 꺼렸다고 한다.

진화의 흔적이 전혀 없는 인간의 유전인자, 온 인류가 한 여성의 미토콘드리아의 DNA를 물려받은 후손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인류가 진화해 왔다면 어째서 진화를 계속해오던 인류가 그 여성부터는 진화를 중단하였을까?
당신은 당신이 느낀 진화의 필요성(예를 들어 뒷통수나 손가락 끝에 눈이 달렸다면 편리하겠다거나 다리가 더 길었으면 좋겠다거나....)을 당신의 유전자로 당신의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가?

인간은 진화되고 있지 않다.
인간의 유전자는 진화하고 있는 게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대를 이어 내려갈수록 손상되고 병들어가고 있다.  

29. 인간 탄생의 신비

오늘은 유전자(DNA)가 얼마나 신비스러운 것인지 생각해 보자.
인체는 약 60조(兆)의 세포를 가지고 있다.
손가락 끄트머리, 1 입방센티미터 크기에 약 10억 개의 세포가 들어있다.
세포 한 개의 크기는 그 지름이 1,000 분의 1 밀리미터 정도이다.
뼈, 근육, 피부, 장기, 치아, 피, 머리카락......, 모든 것이 그 작은 세포(細胞, Cell)들이다.

인체의 세포가 만들어지는 것은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 분열됨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버지에게서 사출된 정자세포는 크기가 아주 작다. 인체세포 한 개의 싸이즈에 불과하다.
한 번 사정할 때 나오는 정자의 수는 수 억에 달한다.
아버지에게서 사출된 그 작은 수억의 정자세포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어머니의 난자를 향하여 헤엄쳐 간다.

인체에서 가장 큰 세포는 난자세포이다. 그 크기가 약 10분의 1 밀리미터나 되어서 맨눈으로도 보인다. 정자의 크기에 비하면 십만 배 정도나 된다.
정자들이 난자를 향해 헤엄쳐가는 모습은, 좀 과장하면, 스타워즈 영화에서 작은 전투비행선이 거대한 모선에 들어가려는 것과 비슷하다.
그 중 한 개의 정자만이 난자에 들어가 수정된다.
난자세포는 가장 먼저 도착한 정자세포를 받아들인 다음 그 표면을 딱딱하게 굳혀 닫아버린다.
그런데 두 개의 정자가 정확히 동시에 도착하면 일란성 쌍둥이가 된다. 만일 어머니에게서 두 개의 난자가 나왔다면 이번엔 이란성 쌍둥이가 태어나게 된다.

정자를 받아들여 수정된 난자세포는 분열을 시작하게 된다. 둘, 넷, 여덟, 열여섯.......
수정된 난자는 어머니의 태반에서 자라나며 머리가 생기고 팔다리가 생기고 핏줄이 생기고 장기(臟器)가 생겨 태아의 모습을 갖춰가게 된다.
이 모든 것이 DNA에 입력된 유전정보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인간의 세포핵 속에 간직된 유전정보는 약 30억 개의 핵산, 아미노산 알갱이에 입력되어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태아는 아버지로부터 15억 개, 어머니로부터 15억 개의 유전인자를 무작위로 물려받는다. 이렇게 무작위로 추출된 30억 개의 유전자 알갱이로 DNA가 형성되기 때문에, 15억 개와 15억 개가 만들어내는 경우수를 생각해보라, 인류가 아무리 많이 태어난다 해도 똑같은 유전자를 가질 확률은 없다. 똑같은 인간은 태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정자를 받아들인 난자로부터 시작되는 세포분열은 모든 세포마다 똑같이 복제되어 분열되어간다. 분열되는 모든 세포가 똑같은 유전자를 나누어 받아 공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태아가 자라가면서 어떤 세포는 머리가 되고 어떤 세포는 몸통, 팔다리가 되고, 뼈가 되고 장기가 되고 피가 되는 모든 역할분담을 알아서 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머리가 되고 팔다리가 될 유전자정보를 미리 가지고 있다가 그 세포가 되는 게 아니라, 다들 똑같은 세포들인데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각자 알아서 머리가 되고 팔다리가 되고 뼈가 되고 근육이 된다는 말이다.

세포들에게 어느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일도 없다.
중앙지휘통제소도 없다.
어느 한 세포가 DNA 사령관 역할을 하는 일도 없다.
어머니가 태아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되어라, 지휘, 통솔, 감독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태아의 모든 세포들이 자신이 위치한 곳에서 각기 다른 역할을 따라 인체의 모든 다른 부분으로 임무를 부여받고 이행하는 세포들의 민주적 전체주의체제(民主的 全體主義體制?)는 도무지 설명될 수 없는 신비이다.

태아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탯줄을 통해 어머니의 영양분을 공급받지만 어머니의 피가 섞이지 않는 독립적 개체이다.
어머니의 자궁은 물로 채워져 있으며, 물속의 아기는 태어날 때까지 숨도 쉬지 않는 수중동물로 있다가 태어난 다음에야 ‘으앙’ 울음을 터뜨리며 코로 호흡을 하는 육상동물로 바뀐다.
이 또한 신기한 일이다.
또한 태어난 다음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사춘기가 되고 목소리가 변하고 수염이 나고, 생리를 시작하는 시기도, 호르몬이 나오고 면역체가 생기는 일평생의 생명활동도 모두 DNA에 입력된 유전정보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 수많은 작은 핵산, 아미노산 단백질 알갱이들에 입력되는 유전정보, 그 조합과 순열에 따라 나타날 신묘막측한 유전정보의 변화무쌍한 변화는 어디에서 온 것이란 말인가?
누가 그러한 일생의 설계도를 그 유전정보를 거기에다 입력해 두었단 말인가?
이것이 진화를 시작한 아메바의 지혜란 말인가?
우연히 비춰진 햇빛에 무기물질이 광합성을 일으켜 유기물질이 만들어지고, 우연히 합쳐진 200여 종류의 핵산, 아미노산 알갱이들이 그런 정보들을 만들어내었단 말인가?

지구상의 어떤 생명체도 경이롭고 신비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거목이나 아름다운 작은 꽃송이나 곰팡이까지, 고래, 코끼리 같이 거대한 동물부터 작은 곤충이나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생명체의 그 섬세함과 오묘함은 놀라울 뿐이다. 이런 놀라운 생명세계가 모두 DNA에 의하여 대를 이어 이어져가고 있다.
이것이 진화의 산물이란 말인가?  
 



27. 빛, 그 찬란하고 오묘한, 영원하신 신성과 능력 앞에서

빛!
빛에 대하여 글을 쓰려니 두려움이 앞선다.
이 미약한 죄인이 어찌 감히 빛을 논하랴.
빛 앞에서 우리는 두려움에 떨며 겸손히 엎드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빛이라 하시었고
그 분의 창조는 “빛이 있으라!”부터 시작되었다.
빛 되신 하나님은 우리의 폐부를 감찰하시고 우리의 죄를 다 아시며
진리로 인도하는 등불이 되시고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신다.

빛,
세상에 가득한 이 빛이 무엇인가?
우리는 빛 가운데 살며 빛을 보며 산다.
우리는 빛이란 당연히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빛이 우주에 충만한 가장 중요한 것임에도 우리는 빛의 고마움조차 잊고 산다.
그러나 빛이 왜 있어야 하는가?
빛이 없으면 안 되는가?
천왕성과 해왕성이 자기들이 공전하는 길을 보면서 운행하는가?
목성과 토성이 빛 없는 깜깜한 공간을 돈다고 누가 뭐라 하는가?
태양은 왜 빛을 내는가?
태양 자신에게 빛이 무슨 필요인가?
별들은 왜 빛을 내어야 하는가?
왜 우주만유의 모든 존재는 빛으로 인하여 그 존재를 나타내며, 더러는 빛을 발하고 더러는 그 빛을 반사하며, 빛 가운데 함께 거하며, 빛으로 인하여 자신들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나타내어야 하는가?

만일 빛이 없다면.......
빛이 없다고 별들에게 무슨 상관인가?
우주공간을 채운 수많은 별들이 빛이 없다고 없어지는가?
태양이 빛을 내지 아니하고, 목성이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깜깜한 암흑 속에 눈을 꼭 감고 숨어있다 하여, 캄캄한 우주공간을 유령들처럼 돈다 하여, 그것들에게 무슨 상관,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빛이 없다고 그들의 존재가 영향을 받고 그들의 운행이 불가능한가?
도대체 빛은 왜 있으며 무엇 때문에 필요하단 말인가?

우리는 태양과 같은 항성들이 수소연료를 핵융합하면서 높은 온도와 빛을 내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높은 열을 내는 것과 빛을 내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왜 빛이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
빛은 보는 자를 위한 것이다.
보는 자가 없다면 빛은 필요가 없다.
존재는 그 존재를 보고 인식해 주는 존재에 의하여 비로소 존재의 가치를 가진다.
보아주고 인식해 주는 존재가 없다면, 만일 빛이 없고, 그래서 우주만유를 볼 수도 없고, 보아주는 존재, 그 존재들을 인식하는 지적존재가 없다면, 물질세계, 우주만유조차 무슨 존재가치와 의미를 가질 것인가?  

빛이 있다는 것은 만유를 보고 인식함으로써 만유의 존재가치를 부여하는 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질세계가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고 믿는 자들에게 빛은 단지 우연의 산물이다.
그러나 창조주를 아는 자들에게 빛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다.
빛은 자신이 창조한 우주만유를 우리와 함께 바라보며 공유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빛부터 지으셨을 것이다.

빛,
빛은 물질세계의 모든 존재를 드러낸다.
빛을 피할 수 있는 것은 물질세계에서 없다.
빛은 빛의 속도로 직진한다.
빛은 반사하고 굴절하고 산란을 일으킨다.
빛은 분산되기도 하고 모아지기도 한다.
빛은 프리즘을 통하여 아름다운 무지갯빛으로 분광된다.

광학이라는 과학분야가 있긴 하지만, 그러나 지금도 현대과학은 빛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현대과학은 빛을 물리학적으로 정의하지 못 하고 있으며 빛의 정체를 규명하거나 파악하지 못 하고 있다.

빛을 파동(波動)이라고 정의한 시대가 있었다.
그래서 빛이 파동이라면 그 파동을 전달할 매개체(媒介體)가 있어야 하므로 우주공간은 진공이 아니라 에테르라는 물질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었다.

빛을 광자(光子)의 활동이라고 생각했던 시대도 있었다. 빛을 금속에 비추면 전자가 튀어나오는 광전효과(光電效果) 때문이다. 그래서 광자를 뿜어내는 로켓을 만들면 광속 우주여행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빛은 파동과 입자, 두 가지의 성질을 다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빛은 파동도 아니고 입자도 아니다.

만일 빛이 파동이라면 제각기 달리는 수많은 광선의 파동들이 뒤엉기고 부딪히고 간섭하여 빛은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빛이 광자라는 알갱이라면 그 빛의 알갱이들의 수(數)는 한계가 있어 거리가 조금만 떨어지면 광자 알갱이들이 부족하여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아주 작은 한 점이라 할지라도 그 점은 사방 어느 위치에서나 보인다.
아무리 먼 거리의 희미한 빛이라 해도, 아무리 작고 미세하다 해도 망원경이나 현미경을 크게 만들고 확대하면 다 볼 수 있다.
빛이 숫자의 한계를 가지는 광자 알갱이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어느 한 점은 무수히 많다.
그 모든 어느 한 점들이 모두 빛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 점들이 각기 내보내고 반사하는 빛이 서로 무한대로 엇갈린다 해도 그 빛들은 서로에게 방해도 되지 아니하고 간섭도 일으키지 않고 직진한다.

한 나무를 바라보라. 수많은 나뭇잎이 모두 빛으로 자신의 위치를 나타낸다. 각 나뭇잎들은 사방팔방으로 자신의 모양의 빛을 보낸다. 바로 옆의 나뭇잎도, 그 옆의 나뭇잎도, 모든 나뭇잎들이 다 자신을 빛으로 나타낸다. 그런데 그 각자의 빛이 서로 부딪히거나 간섭하지 않는다. 당신이 친구와 함께 나란히 앉아 둘이서 바라본다 해도 그 교차하는 시선들은 전혀 간섭을 일으키거나 빛을 독점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플래시라이트를 들고 한 곳을 향해 이 곳 저 곳에서 이리저리 비춘다 해도, 그 비추는 불빛들이 엇갈리든 부딪히든 불빛들은 전혀 충돌 없고 문제없이 직진한다.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이리저리 달리는 빛,
그 빛은 파동일 수가 없다.
빛은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다.

빛,
입자도 파동도 아닌 빛이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모두 가지는 것부터가 신비스러운 일이다.
빛이 입자도 파동도 아니라면 어떤 기운이나 힘이란 말인가?
그렇다. 빛은 기운이나 힘인 것 같기도 하다.
전기, 자기력이나 인력 같은 힘이나 기운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빛이 만일 그러한 기운이나 힘이라면 그 역시 서로를 밀치고 섞여서 직진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빛은 입자, 파동, 힘(기운), 모두의 성질을 다 가지나 모두 아니다.

현대물리학으로 빛은 전자기파(電磁氣波)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빛을 가시광선(可視光線)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소리를 듣는다.
소리는 공기의 떨림, 즉 공기의 파동이다.
소리의 파동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판자를 들고서 공기를 민다고 생각해보자.
다시 판자를 끌어당겨 공기를 끌어당긴다고 생각해보자.
공기가 판자에 밀릴 때는 압축되어 압력이 높아지고 반대로 판자에 의해 끌어당겨질 때는 약간의 진공이 생기는 것처럼 비게 될 것이다.
공기의 압축되고 팽창된 변화의 파동이 생길 것이다.
판자를 계속해서 밀고 당겨 보자. 빠르게 해보자.
그러면 공기가 압축되고 팽창된 변화가 앞으로 물결처럼 퍼져나갈 것이다.
더 빠르게 이 파동을 만들면 이것이 소리이다.
우리는 그 공기의 압축과 팽창의 변화를 귀로 인식함으로 소리를 듣는다.
소리는 섭씨 0도에서 1초에 약 340 미터를 진행한다(음속).

그런데 우리가 모든 주파수의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초당 약 20번에서 1만 5천 번 진동하는 음파만을 들을 수 있다.
진동수가 낮으면 굵고 낮은 소리가 되고 진동수가 높으면 가늘고 높은 소리가 된다.
사람마다 귀가 다르고 듣는 능력이 다르다.
나이가 들면 고음영역이 잘 들리지 않게 된다.
젊은 사람들끼리 “삐- ” 높은 음역의 소리로 신호를 주고받아도 나이 든 사람들에게 그 소리는 전혀 안 들린다.
고막이 둔해지고 굳어져서 고진동수의 음파에는 반응하지 못 하기 때문이다.

소리도 진동수가 높은 소리가 멀리 잘 나간다.
인간이 들을 수 없는 파장의 소리를 초음파(超音波, Ultra Sonic)라고 부른다.
동물들은 인간이 들을 없는 주파수의 초음파를 듣기도 하고, 박쥐는 초음파를 보내어 반사되어 오는 반향(反響, 메아리)으로 물체를 식별하기도 한다. 고래는 초음파를 이용하여 물체를 탐지하거나 서로 교신을 하기도 한다.
병원에서는 초음파의 반향을 이용하여 환자의 몸 내부를 살피는 초음파검사를 하고, 산업현장에서는 초음파로 금속내부의 결함을 검사하기도 한다.

빛의 파장도 이런 점에서는 음파와 비슷하다.
빛은 파장에 따라 다르다.
인간은 파장이 400 나노미터에서 700 나노미터(10억분의 1 미터)인 빛만을 볼 수 있다.
사람에 따라서 약간 차이가 있다.
벌과 같은 곤충이나 물고기는 인간과 다른 파장, 즉 자외선을 볼 수 있고, 양서류 동물이나 야간에 활동하는 동물들은 파장이 긴 적외선을 보기도 한다.
군인들의 야간투시경은 적외선을 이용하여 어둠 속의 적을 식별한다.

빛은 파장이 짧으면 투과력이 강해지고 파장이 길면 열이 많이 난다.
빛의 파장이 가시광선 보다 짧아지면 자외선이 된다.
자외선은 피부를 약간 통과하며 피부를 태운다.
해변이나 고지대에서, 그리고 눈이 덮인 고산지역에서 피부가 쉽게 타는 것은 자외선 때문이다.

자외선은 그 투과력 때문에 살균효과도 높다.
자외선이 살균효과를 가진다는 것은 자외선이 그 투과력 때문에 작은 생명체를 죽인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구는 고공에 오존층이 있어서 태양으로부터 날아오는 자외선을 99%까지 차단한다.
오존층이 없었다면 지구상의 생명체는 자외선 때문에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고도가 낮은 곳은 이스라엘의 사해(死海)이다.
해발 마이너스 400 미터, 해수면보다 무려 400 미터나 더 낮다.
사해는 몸이 둥둥 뜨는 진한 소금물과 미용효과 높다는 진흙뻘로도 유명하지만 자외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사해에서는 자외선 차단제를 바를 필요가 없다.  
태양광선이 400 미터의 공기를 더 뚫고 내려오면서 나머지 1%의 자외선마저 차단되기 때문이다.

광선이 자외선 보다 파장이 더 짧아지면 엑스선(X-Ray)이 된다.
투과력이 좋기 때문에 인체내부를 엑스선으로 촬영하여 진단한다.

엑스선 보다 파장이 더 짧아지면 감마선이 된다.
감마선은 훨씬 강력한 투과성을 갖기 때문에 금속의 내부를 촬영하여 결함을 찾는데도 사용된다.
방사선(放射線)이란 엑스레이부터 시작하여 투과성을 가지는 광선을 총칭한다.
핵분열이나 핵융합에서는 방사선이 많이 나온다.
핵폭탄이나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알파선이나 베타선은 그리 큰 투과성을 가지지 않지만 감마선은 큰 투과력 때문에 위험하다.

가시광선 보다 파장이 길어지면 투과력이 줄어드는 대신 열을 발생한다. 이것이 적외선이다. 적외선은 그래서 온열치료에 이용되기도 한다.
적외선 보다 더욱 파장이 길어지면 마이크로웨이브가 되고 전파가 된다. 전파도 단파, 중파, 장파가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다.
마이크로웨이브는 그 전자기파의 진동수로 전하(電荷)를 플러스, 마이너스로 바꾸면서 물 분자를 뱅글뱅글 돌려 그 마찰로 물의 온도를 높인다. 마이크로웨이브 전자오븐의 원리다.

전자기파(電磁氣波)란 무엇인가?
전기(電氣)와 자기(磁氣)가 만들어내는 파동이다.
소리와 비슷하게 말이다.
플레밍의 오른손, 왼손법칙에서 본 바와 같이 전기가 움직이면 자기가 발생하고 자기가 움직이면 전기가 발생한다.
이것이 발전기, 전동기의 원리이다.

전하를 가진 입자를 흔들면 그 직각방향으로 자기가 발생한다.
만일 이 대장쟁이가 전하를 띤 작은 입자 한 개를 들고서 앞뒤로 흔들면, 앞으로 밀 때 자기(磁氣)가 왼편 직각방향으로 생기고, 뒤로 당길 때 자기가 오른편 직각방향으로 발생한다.
전하를 띤 입자를 빠르게 앞뒤로 밀고 당기면 자기(磁氣)도 빠르게 좌우로 방향을 바꾸면서 발생하여 파동을 일으키게 된다. 이렇게 전기와 자기의 합친 파동이 전파(電波)이다.

만일 이 대장쟁이가 그것을 1초에 1백 660만 번 흔들면 1천 660 킬로헬츠(1,660 kHz)의 주파수를 가지는 전파가 발생하여 라디오 1660이 방해전파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속도를 계속 빠르게 하여 1초에 억(億), 조(兆), 경(京), 해(亥).... 무한히 올려 가면 단파전파, 마이크로웨이브, 적외선을 거쳐 빛으로, 방사선으로 바뀐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놓고 보면 빛은 물리학적으로 명백히 한 부분의 전자기파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전자기파는 감마선, 엑스선, 자외선, 적외선, 그리고 전파이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전자기파는 빛이라면, 우리는 빛을 간단하게 일종의 전자기파의 범주에 넣어버리면 될 듯 하기도 하다.

그러나 빛은 그렇게 간단하게 특정주파수를 가지는 전자기파로 정의될 수 없다.
설명할 수 없는 너무나 신비스러운 빛의 현상과 능력 때문이다.

다시 가시광선(可視光線)으로 돌아가 보자.
인간이 볼 수 있는 파장은 약 380에서 770 나노미터까지이다.
좁다면 매우 좁은 파장범위이다.
그런데 이 파장범위 안에서 인간은 빛의 현란한 색깔을 본다.
빨주노초파남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빛깔의 변화를 느끼는 것이다.

파장 700~730 nm 근방에서는 빨강색이 된다.
파장 640 nm 근방에서는 주황색이 되고
파장 600 nm 근방에서는 노랑색이 된다.
파장 550 nm 근방에서는 녹색이 되고
파장 500 nm 근방에서는 하늘색, 푸른색이 된다.
파장이 440 nm 근방이 되면 남색이 되고
400 nm 근방에서는 보라색이 된다.

우리는 이 약간의 주파수 변화를 어째서 빨강, 노랑, 파랑......, 현란한 색깔의 변화로 인식하게 되는 것일까?
물리학적으로는 약간의 파장의 변화일 뿐인데 그 빛들과 색깔들이 합쳐지고 나누어지며 만들어내는 무쌍한 변화는 우주만유 피조세계를 아름답고 현란하게 채색한다.

이것은 양성자 수, 전자의 수, 즉 원자번호의 변화에 의하여 모든 물질의 원소가 바뀌는 것처럼 신비한 일이다.
어째서 인간은 특정주파수의 전자기파를 누구나 똑같은 색깔로 인식한단 말인가?
인간들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전자기파의 주파수의 변화를 특정색깔들로 바꾸어 인식하기로 약속이라도 했단 말인가?

빛깔이 무엇인가?
색맹인 사람에게는 빨간색이 무엇이라고 설명해 줄 방법이 없다.
빛을 모르는 이에게 무지갯빛 아름다운 색깔의 변화가 주는 황홀함과 저녁노을이 주는 감동을 전해 줄 방법이 없다.
“빨강색이 뭔데? 파랑색이 어떤 색인데?”

빛의 놀라운 능력을 보라.
그 영원하신 신성과 영광을 보라.
이 찬란한 빛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말하지 말라.
원시생명체가 빛을 알았다고 말하지 말라.
생명체가 진화하면서 빛을 사모하고 빛을 보기를 소원하였다고 말하지 말라.
삼엽충 같은 원시생명체가 전자기파의 존재를 감지하고 색깔을 구분하는 방법을 알고 진화를 통하여 후대에 전했다고 말하지 말라.
그것들이 빛을 보려고 눈을 만들기 위하여 머리, 아니 두개골에다 두 개의 구멍을 내고 눈탱이가 밤탱이 같은 눈알을 박아 넣고 눈을 진화시키느라 수만년, 수억년 고생했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길랑 하지 말라.
그들이 빛의 주파수별로 특정색깔을 느끼도록 분류시스템을 고안해 내고 같은 파장에서 같은 색깔로 느끼기로 합의했다고 말하지 말라.
빨강색을 빨강색으로 느끼고 파란 색을 파란 색으로 느끼는 방법을 단세포 원생동물이, 벌레들이나, 원숭이나, 끄로마뇽인, 네안델타르인 같은 유원인들이 개발해 내었다고 말하지 말라.  

400~700 나노미터의 파장에 그 현란한 변화와 아름다운 색감을 부여하고 그 빛깔로 그 분의 광활한 피조세계를 눈부시게 채색하신 놀라우신 창조주 앞에서, 그 지으신 피조물들에게 빛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신 사랑의 하나님, 엄위하시고 거룩하신 영광의 하나님 앞에서!

28. 그대 가슴의 사진틀에는.......

어떤 부자가 실험을 했단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를 매일같이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돈 10달러씩을 나누어 주었단다.
“아니, 이 돈을 왜 주십니까?”
“그냥 드리는 겁니다. 받으세요.”
시간이 흐르자 처음엔 돈을 받으며 어색해하고 쭈뼛거리던 사람들이 점점 자연스럽게 돈을 받게 되었고 나중엔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자는 돈 나누어주기를 중단하였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항의를 하였다.
“왜 돈 안 주십니까?”

생각할수록 빛은 얼마나 놀랍고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선물인가?
몇 푼 돈 따위와 비기겠는가?
이 세상에 빛이 있고 우리에게 그 빛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가?
우리가 만일 볼 수 없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 빛이 있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감사할 줄을 모른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빛을 거두어 가신다면 어찌 될까?

이 세상의 아름다운 빛을 모든 사람이 다 보는 것이 아니다.
볼 수 없는 사람도 많다.
빛을 보지 못 하는 사람은 불행이라 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빛을 보지 못 하는 사람이 불행이 아니라 빛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축복이다.

소경이며 귀머거리였던 헬렌 켈러는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에서 하나님께서 사흘만 볼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인자한 설리번 선생님과 친구들의 모습, 들판과 숲, 나무와 풀과 꽃의 모습, 타오르는 저녁놀을 보아두고 기억 속에 담아두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본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 된 일인지.

유명한 맹인가수 챨스 레이는 말년에 개안수술을 받더라도 빛에 노출된 시신경이 몇 분 안에 망가져서 도로 맹인이 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몇 분이라도 좋습니다. 도로 소경이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내 사랑하는 딸을 볼 수만 있다면, 몇 분이 아니라 몇 초만이라도 내 딸의 모습을 보고 내 기억 속에, 내 마음 속에 담을 수만 있다면 수술을 받겠습니다.”  

2004년 봄 강원도 험준한 산골짜기 6.25 전적지에서 52년 만에 발굴된 국군장병의 유골은 은박지에 꼭꼭 싼, 아마도 약혼녀이거나 아내였을 한 여인의 사진을 품에 안고 있어 보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 있었다.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격전지에서 틈틈이 그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그는 얼마나 그 여인을 그리워했을까?

“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 모습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 모습을 내게 담아 둘 수 있다면.....”
인간은 그렇게 서로의 모습을 보고,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빛이 있고 눈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만약에 빛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를 볼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고 존재로 나타날 수 없고 인생도 시간도 우주만유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빛이 있음으로 존재는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되고, 빛으로 존재를 인식하는 존재가 있음으로 비로소 만유는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렇다.
우주는 우연히 생겨난 것이 절대로 아니다.
우주는 우주를 보는 자에게 지음 받은 것이 분명하다.
빛은 우주를 보기 위한 것이요 우주만유를 지으신 자와 우주만유를 인식할 수 있는 자를 위한 것이다.
파동도 아니고 입자도 아닌, 과학으로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찬란한 빛은 하나님의 세계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우주만유가 그 인식해주는 자가 없다면 존재의 의미가 없다면 하나님 자신도 그렇지 않겠는가?
하나님도 하나님을 인식해 주는 존재가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으로서의 존재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광활한 우주, 캄캄한 어둠 속에 알아주는 이 하나 없이 하나님 홀로 계신다면 하나님이신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빛이 있으라.",
하나님은 가장 먼저 빛을 지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인식하고 기억하는 존재, 빛을 인식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만유를 함께 바라보면서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존재를 또한 지으셨을 것이다.
거울처럼, 사진처럼 하나님을 인식 속에, 마음속에 담는 존재,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를 인식하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하나님은 그래서 만드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모습을 담은 존재가 얼마 살지 못 하고 죽기를 원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어느 누가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금방 빛바래거나 삭아 없어지기를 바라겠는가?
어느 누가 자신을 알아주고 교제 나누는 벗이 죽기를 바라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영원히 사는 존재로 지으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코에 직접 자신의 영원한 생기를 불어넣어 인간이 영원히 살도록 '생령'으로 만드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인간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였다.
선악과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지워버리고 대신 하나님같이 된 자신을 담았다.
자신의 심령 사진틀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모습이 담겨야 할 마음에 자신의 욕심과 죄악을 담음으로써 더럽혀지고 망가져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인간은 자신의 욕심과 물질, 명예와 쾌락을 담고 멸망길로 향하였고 결국 그런 것들을 조종하는 마귀의 모습을 담기까지 타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은 아들을 내어주셨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보내신 것이다.
빛으로 보내신 것이다.

그 목적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모습이 지워져버린 심령에 하나님의 모습을 다시 회복시키려는 것이었다.
보이는 하나님,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 마음에 담으라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그 모습, 그 생명을 담은 자는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슬픈 일이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었으나 사람들은 깨닫지 못 하였고 그 빛 안에 생명이 있었으나 사람들은 그 생명을 얻지 못 하였다.
사람들은 그 빛으로부터 얼굴을 돌렸고 그 빛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렸다.

마지막 날 심판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빛, 그 모습이 담겨진, 그리스도의 빛에 다시 곱게 감광된 마음들을 거두시는 것일 것이다.
보이는 하나님의 모습, 곧 우리를 살리시려 십자가에 죽으신 아들 하나님의 모습으로 다시금 심령을 회복한 자들은 거두시고 여전히 더러운 자신의 욕망과 마귀의 모습을 담은 타락한 영혼들은 소각로, 곧 영원히 타는 유황 불못에 던져 넣으시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아,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음 받은 인간의 영혼이 그 소각장에 던져졌는데 타 없어지지 않는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지금 그대의 눈은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가?
지금 그대 가슴의 사진틀에는 누가 들어있는가?

26. 삼위일체,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완전무결하시고,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영원히 존재하신다.”
“There is one God, who is infinitely perfect, existing eternally in three persons: Father, Son, and Holy Spirit.”

미국의 정통기독교 교단들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믿음의 고백”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세 분으로 영원히 계신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 세 분이라는 모순된 표현, 곧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기독교의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들의 홈페이지에는 이 중요한 삼위일체 신앙고백이 좀체 안 보이는지 알 수가 없다.
그거야 말 안 해도 다 알지, 굳이 써놔야 하느냐는 것인지.......

인간의 머리로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삼위일체를 제대로 알지 못 하여 이단들에게 이리 앞의 양처럼 노출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목회자나 신학자들 사이에도 삼위일체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맞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시다. 그것도 맞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세 분이시다. 맞다.
세 분이시며 한 분이시다. 그것도 맞다.
아니, 이것도 맞다, 저것도 맞다, 말이 되는 소린가? 황희정승도 아니고.......
그렇다. 달리 말할 방법이 없다.

인간에게는 삼위일체를 알아듣게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나 방법이 없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고 말한다면 단일신론(單一神論)이 되고 세 분이라고 말한다면 삼신론(三神論)이 되지만, 달리 설명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가 인간의 이해범위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는 신비로운 하나님의 비밀이다.
함부로 지성소에 들어가면 죽임 당하였던 것처럼, 법궤 뚜껑을 열고 들여다 본 벧세메스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던 것처럼, 삼위일체는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인간의 생각과 지식이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인 것이다.

만일 삼위일체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럴 듯하게 설명한다면 그 순간 그 설명은 틀리는 설명이 되어버린다.
클로버 잎으로 설명하거나, 삼각형을 그려놓고 설명하거나, 전기와 전구와 불빛으로 설명하거나, 그 속에 들어있고 또 그 속에 들어있다는 식으로, 혹은 계획자와 설계자와 시행자로 설명하는 것 등은 이해를 도울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삼위일체의 정확한 설명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분명히 한 분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성자 하나님이시고 성령님도 하나님이시다.
분명히 다른 분들, 세분이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세 분이시라는 말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세 분일 수가 없다. 이 세 분이 한 분이시다.
그렇다면 한 분이 세 분의 역할을 했다는 말인가?
아니다. 세 분이 따로 계신다. 그런데 이 세 분이 한 분이시다.
아니 그게 말이 되는가?
그렇다. 이렇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끝없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질문과 답이 삼위일체의 정답이다.

이 신비의 삼위일체는 기원후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격렬한 토론 끝에 내린 결론이며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재차 확인된 기독교의 교리이다.

어떻게 말도 안 되는 삼위일체가 가능하단 말인가?
가능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삼위일체가 가능하지 않은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다.
만일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하나님도 우상이나 세상신의 한 종류일 뿐이다.
삼위일체 아닌 신은 아무 신이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어떠한 다른 신도 따라 할 수 없고 흉내도 낼 수 없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삼위일체로 계실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삼위일체가 아니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일 수가 없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면 온 인류를 대신할 속죄제물의 자격이 없다.
하나님이 아닌 어떠한 존재도 인류의 모든 죄 값을 치를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때로는 시간이 멈추어 주기를 바란 적 없는가?
한없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나, 두려운 순간이나 고통의 순간, 시간이 멈추어버리기를 바란 적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멈추어 그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혹은 그 시간이 영원히 오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 말이다.

만일 시간이 멈춘다면 어떻게 될까?
공상과학소설이나 영화에는 시간이 멈추고 날아오던 핵미사일이 공중에서 멈추고 아우성하며 달리던 모든 인간들과 자동차들과 소란들이 일시에 정지한 가운데 주인공 혼자만 움직이는 장면도 나온다.

그러나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만일 시간이 멈춘다면, 그래서 모든 것이 정지한다면, 사람은 그 정지된 시간을 전혀 의식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시간이 아무리 많은 세월을 흘러도 아무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멈춘다면 공간도 존재도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아니 시간이 없으면 존재도 없어진다.
시간과 공간은 존재의 바탕조건인 것이다.  

그 시공(時空)이 모든 피조물의 존재영역이며 제한이다.
시공을 벗어나서는 어떠한 존재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시공이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시공의 제한을 받는 우리 인간에게 시공은 넘을 수 없는 무한의 세계이다.
백 수십억 년 전에 빅뱅으로 탄생한 우주의 끝없는 시간과 끝 간 데 없는 공간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티끌 같이 작고 찰나에 생겨났다가 사라져버리는 것 같은 한없이 미약하고 허망한 존재로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그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계신다.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속에 계신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계신다.
과거에도 계시고 현재에도 계시고 미래에도 계신다.
시공을 초월하여 항상 현재형(I am, 에고 에이미)으로 계신다.

우리는 우주의 까마득한 시간 동안 우리 인간이 출현할 때까지 하나님은 얼마나 지루하셨을까 생각해보는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에 갇혀서 시간이 흐르기를 지루하게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다. 수십억 년이든 수백억 년이든 하나님은 필요한 만큼 시간을 만들어 쓰시면 그만이다.

137억 년 전에 우주가 생겨나고, 100억 년 전에 태양이 생겨나고, 45억 년 전에 지구가 생겨나고, 수 억년 전에 고생대, 중생대가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그 시간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다.
아무리 긴 시간도 하나님이 지으시면 그만이요 시간이 하나님을 기다리게 하지는 못 하는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짧은 순간도 하나님의 손과 눈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동시에 여러 곳의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보시고, 기도를 들으시고, 대화하시고, 역사하시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을 정지시키실 수도 있고 흐르게 하실 수도 있으며, 수없이 나누실 수도 있으며, 아무리 짧은 시간이나 아무리 넓은 공간, 좁은 공간에도 전혀 구애받지 않으신다. 아무리 먼 곳도, 아무리 작은 공간도, 아무리 많은 숫자의 사람도 하나님께는 아무런 장애나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셨고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어디에나 언제나 현재형으로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어떤 이단 교리들은 하나님이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 하여 생겨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죄인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순간 의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때부터는 죄를 범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의인은 죄를 지어도 그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의인에게서는 죄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라는 괴상한 논리다.

그들은 성경의 한 비슷한 말씀을 가지고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우긴다. 하지만 그 성구는 그런 뜻이 아니다. 우리는 구원 받기 전에도 죄인이었고 구원 받은 후에도 죄인이다. 우리가 의인으로 변화되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가려서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간주되는 것이요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죽어주셨으므로 죽음을 면한 구원받은 죄인이다.

그들은 왜 이러한 ‘의인교리’를 주장하는 것일까? 그것은 “회개하고 믿는 순간 그 때까지의 죄는 모두 사함 받는데, 그 이후에 짓는 죄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시간이라는 벽(壁) 때문에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현재까지만 미치고 앞으로는 미치지 못 한다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어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이른 바 ‘염소속죄교리’도 그런 비슷한 의문에서 시작된 교리라고 생각된다. 그들은 “2,000 년 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때까지의 인류의 모든 죄는 해결되었는데 그 뒤의 죄악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그렇지, 그 뒤의 인류의 모든 죄는 바로 사단이 범인이다. 그래서 주님 오실 때 주님은 사단에게 그 죄를 다 얹어서 그 죄를 물으시고 처단하실 것이다.”라는 염소속죄교리를 창안해 내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보혈의 죄사함과 죄씻음에 초점을 맞추었으므로 오해한 것이다. 시간의 틀 안에 갇힌 생각이 만들어낸 오해인 것이다. 물론 주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러나 단순히 죄를 씻어서 해결하신 것이 아니라 ‘속죄’하신 것이다, 대신 죽으신 것이다. 죄인이 죽을 자리에 미리 죽어주심으로 죽음의 값을 치르신 것이다.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구원해 놓아도 여전히 죄인인 죄인들, 건져놓아도 여전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은 십자가의 보혈로 매일매일 순간순간 죄를 씻어서 자신을 온전히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평생을 깨끗이 씻다가도 죽기 직전 마음속으로 범죄 한다면 평생수고가 도루묵이 된다.
십자가의 보혈은 “죄 세척용 보혈”이 아니다. 십자가의 보혈은 “대신 피 흘려 죽으심의 보혈”이다. 대속의 피다. 주님은 우리 대신 죽어주심으로 우리를 “죽을 수 없게 된 죄인”으로 만드신 것이다.  

“의인교리”나 “염소속죄교리”는 결국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치 못 한 것으로 만들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저능한 하나님”으로 만드는 어리석음이요 죄라고 생각한다.

시간이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손 안에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시간, 곧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아무런 장벽이 되지 못 한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사랑을 베푸셨다. 가인에게 표를 주셨다. ‘여자의 후손’,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전제로 한 용서와 죄사함이다.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약속하시면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약속하시는 순간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같다. 다만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아니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모든 시간을 현재형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시기에 이루어진 것과 다름이 없다.

아니, 시간은 하나님께 절대적이지 않다. 우주공간, 하나님의 피조세계에서 시간은 절대적이 아니다. 실제로 우주공간의 시간이 절대적이 아니라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발견해낸 사실이다.  

얼마 전 130억 광년 거리에서 엄청난 빛과 에너지를 발하는 초신성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 초신성은 사실 130억 년 전에 폭발한 것인데 이제야 그 빛이 지구에 도달함으로 관측된 것이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그 빛과 함께 130억 년 동안 달려서 지구로 왔다면 그에게는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빛의 속도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빛이 우리 지구에 도달하였을 때 그 빛의 입장에서의 시간이 진짜 시간인가, 아니면 우리 입장에서의 시간이 진짜 시간인가? 둘 다 진짜 시간이다.  

무슨 뜻인가? 이 우주공간의 시간이 뒤범벅인 셈이다. 그 초신성 뿐인가? 탄생시기가 서로 다른 수많은 빛이 우주공간에 함께 흐르고 있지 아니한가? 결국 절대적인 시간은 없는 셈이다.

블랙홀에 이끌려 들어가는 별들은 점점 빨라지면서 질량이 늘어나고 드디어 광속에 이르게 되면 더 이상 시간이 흐르지 않게 된다. 결국 별들이 광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 블랙홀로 끌려들어가면서 시간이 정지되는 것이다. 실제로 블랙홀에서 주변의 별들이 빨려 들어가면서 시간이 정지되어 그 상태로 멈추어버린 것이 관측된다.
광속상태의 정지, 참 신기한 일이다. 같은 우주공간에 다른 시간들이 뒤섞여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웜홀이론(Worm Hole Theory)이 있다. 서로 시간이 다른 우주공간을 벌레구멍 같은 웜홀(Worm Hole)로 연결하면 과거와 미래를 오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는 상상이나 해보는 이론일 뿐이다. 어쨌든 우주공간의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빛이시라 하셨다.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것은 그 분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 편으로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튼 빛과 시간과 공간은 피조물로 피조세계에 거하는 우리 인간에게는 다가갈 수 없는 한계요 그 너머는 불가사의한 영역이다.
물리학적으로 볼 때 빛에 다가가면, 아니 빛의 속도에 가까워지면 질량은 무한대로 늘어난다. 따라서 빛의 속도를 넘어설 수 없다. 하나님은 빛으로 물질세계와 영적세계의 경계를 정하셨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우주공간의 시간과 공간과 질량이 절대적이 아니라면, 시간과 공간과 질량이 달라질 수 있다면, 시공을 넘나드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시간과 공간과 질량은 어떤 것이 될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쪼개거나 겹치시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렇다면 삼위일체도 가능하실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세 겹으로 겹치시면 말이다.
영원한 시간을 세 겹으로 겹치신다면 그 세 겹의 시간 속에 하나님은 세 분이면서 한 분으로 존재하실 수 있지 않겠는가?

시간을 세 겹으로 겹친다?
그렇게 해서 한 분이 세 분이 된다?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럴듯하긴 하지만 이것도 일종의 양태론이겠지?

삼위일체의 비밀,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비밀......,
나는 모른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시공의 신비와 함께 혼자 이리저리 상상해 보았을 뿐이다.
천국에 가면 알게 되겠지.

오늘도 괜한 헷소리 좀 장황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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