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말한 대로 구약성경 여러 곳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라고 복수로 기록하게 하셨는데 신약성경에도 하나님의 삼위일체이심을 나타내는 대목들이 수없이 많다.(여러분이 성경을 놓고 직접 찾아보시기 바란다.)

요한복음은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곧 말씀이시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나님이신 분이 누구신가?
요한복음은 ‘그 하나님이 생명을 가지고 빛으로 자기 백성에게로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빌립보서 2장 6-8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본체, 곧 본질(nature)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람의 모습, 종의 형상으로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에게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하나님은 그 아들에게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만물이 그 발아래 무릎 꿇게 하셨다. 심판을 맡기셨다. 만일 예수님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높여주신다고, 권세를 준다고, 심판을 맡긴다고 그게 되겠는가?

로마서 9장 5절을 보라.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사도바울은 그리스도가 세세에 찬양 받으실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아멘”으로 강조하면서 밝히고 있다.

디모데전서 3장 15-16절을 보라. “......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요.......그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되고.....”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디도서 2장 13절을 보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라고 부르고 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 자신이 직접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 많다.
예수님은 사람의 죄를 사하여 주셨다. 유대인들이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인데 네가 뭔데 감히 죄를 사해주느냐고 하자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심판을 맡기셨다고 말씀하시고 자신에게 죄를 사할 권세가 있다고 말씀하였다.
예수님은 또 자신과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셨다. 자신과 하나님을 동일하다고 하신 것이다.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에고 에이미, I am'이라고 하나님만이 사용하실 수 있는 1인칭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셨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고 아브라함이 자기를 보기 원하였고 보고 기뻐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이 노하여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부활하신 다음 도마가 손가락으로 예수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 창자국을 확인하고 나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했을 때 그 고백을 받으시고 보지 못 하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무슨 망령된 소리냐?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도마를 크게 꾸짖으셨어야 옳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요한계시록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사도요한의 앞에 엄위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고.... 그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였음에도 그 엄위하신 모습과 감당할 수 없이 찬란한 영광 앞에 엎드려 죽은 자 같이 된다.

그런 사도요한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처음이요 나중”, “알파와 오메가”는 하나님의 다른 표현, 곧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계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었다가 산 자, 곧 예수요 하나님이시라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을 일곱 뿔과 일곱 눈, 곧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지신 어린양으로 나타낸다.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이럴 수가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누가 감히 하나님 아닌 자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
만일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일을 허락하시겠는가?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하나님께 돌려져야 할 영광을 자기가 받을 수 있겠는가?
“아무에게도 영광과 찬송을 주지(빼앗기지) 아니 하시겠다” 하신 하나님 아니신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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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라고 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렇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세 분이시다. 맞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세 분으로 계시고, 이 세 분 하나님은 같은 한 분 하나님이시다.
한 분이 세분이고 세 분이 한 분이라니,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이 삼위일체는 인간이 절대로 알 수 없는 인간의 이해범위 밖의 신비이다.
사람들은 삼위일체를 클로버 잎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삼각형 안에다 동그라미를 그려서 설명하기도 하고, 전구, 빛, 에너지 식으로, 혹은 물, 얼음, 수증기 식이나, 아버지, 남편, 회사원 식으로, 또 다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런 설명들로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삼위일체를 도저히 이해 못 하니까 심지어는 구약시대에는 성부로 계시다가 복음서에서 예수님으로 오셨고 승천하신 다음 다시 성령님으로 오셨다는 일인삼역 양태론(樣態論)이 등장하기도 하고, "하나님은 삼위일체가 아니고 예수님은 미가엘 천사장이다."라는 여호와의 증인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성경 첫머리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이고 이 ‘엘로힘’은 단수명사가 아닌 복수명사(複數名辭, Plural)이다. 그러니까 ‘하나님들’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좀 내려가서 1장 26절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고 하시고는 바로 뒷절에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자기’라는 단수명사를 쓰고 있다.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고 했다가 '나, 자기'라고 했다가 하시는 것이다.

창세기 11장에 가면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사람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환상 중에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뵈옵는데 그 때 하나님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꼬?”라고 자신을 ‘우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히브리어로 성경을 적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째서 ‘우리’라고 하시나? 말도 안 돼.” 하고 ‘나’로, ‘엘로힘’을 단수명사'엘'로 고쳐 쓸 수도 있었겠지만 성경을 일점일획도 고치지 못 하고 그대로 기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첫머리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심을 이렇게 나타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다.
삼위일체 아닌 하나님은 세상잡신도 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세상신이 흉내조차 낼 수 없다.
삼위일체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고 가지실 수 있는 하나님만의 존재방식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삼위일체가 아니시라면 우리의 구원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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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한 종류 뿐이다. 죄인. 모두가 죄인....
그런데 그 죄인이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어주심을 믿음으로 용서 받은 죄인,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아니함으로 진노 아래 있는 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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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하나님이 다 이루시고 인간은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100% 구원을 다 이루시고 인간은 그것을 믿음으로 거저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세상 다른 종교와 기독교가 확연히 다른 것입니다.
세상 다른 모든 종교는 (구원도 없으면서) 인간의 노력과 정성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행하심에는 다른 어떠한 존재의 도움이나 보충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합니다. 하나님의 이루어 놓으신 구원 앞에 우리의 행위나 공로는 거치는 돌이요 오물일 뿐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구원에 다른 존재, 심지어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의 역할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공동작품 내지 합작품, 혹은 미완성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 그 구원을 완성시킨 자는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요 아무도 자랑하지 못 하게 하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래서 복음(福音, Good News)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이루셨다. 죽어가는 너희는 누구든지 와서 돈 없이 값없이 받아먹고 살라.”인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말 성경은 “믿음에서 믿음으로”라고 되어 있는데 NIV 영어성경은 “by faith from first to last”, 즉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에 의하여”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100% 믿음으로 받는 구원,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세 분으로 계신다는 이 삼위일체는 우리 인간의 이해범위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절대로 삼위일체를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 아들이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 아들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하나님 자신이,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여기에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여기에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이 놀라운 사랑 앞에 우리가 어찌 두렵고 떨림으로 엎드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으로 받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감사와 찬송과 경배 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영원히, 영원히 감사와 찬송과 경배를 드린다 해도 다 갚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를 위해 피와 물을 쏟으신 그 손과 발 못자국과 그 옆구리 창자국을 어루만지며 주님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나의 모든 눈물과 마음을 다 쏟아 붓는다 해도 결코 그 은혜를 채울 수 없을 것입니다.

태양계에는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아홉 개의 혹성이 있습니다(이 중 명왕성은 혹성이 아닌 소행성으로 지위가 격하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혹성들은 태양에 빨려 들어가지 않기 위하여 맹렬히 달리고 있습니다. 태양에서 먼 혹성들은 좀 느긋하게 달리고 태양에 가까울수록 빠른 속도로 달려야 합니다.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약 1억 5천만 km거리에서 초속 약 30km, 음속의 88배 속도로 열심히 달리는 중입니다.

태양계의 가장 안쪽에 있는 혹성인 수성은 태양에서 6천만 킬로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어 초속 47 킬로미터의 미친 속도로 뱅글뱅글 태양을 88일마다 한 바퀴씩 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전속도는 매우 느려서 낮이 29일, 밤이 29일씩이나 계속됩니다. 태양이 가깝기 때문에 수성이 받는 태양열은 지구보다 일곱 배나 강렬합니다. 낮에는 섭씨 350도까지 올라가는 구이숯불이 되고 밤에는 섭씨 영하 170도까지 떨어지는 냉동고가 됩니다.

태양계 맨 바깥쪽의 명왕성은 태양으로부터 60억 킬로미터, 지구-태양간 거리(1억 5천만 킬로미터)의 40배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공전속도도 매우 느려 초속 약 4.5 km, 그러니까 수성이 달리는 속도의 10분의 1밖에 안 되는 느릿한 속도로 248년마다 태양을 한 바퀴 돕니다.(아니, 느리다고요? 초속 4.5 km면 음속의 13배라고요.) 하도 멀어서 태양빛이 명왕성에 도달하는 시간도 5시간 반이나 되며 명왕성에서 태양을 바라본다면 깜빡이는 작은 호롱불같이 작게 보일 것입니다. 매우 추워 영하 250도나 됩니다.

지구와 가까운 금성은 어떨까요? 90 기압에 달하는 엄청난 두께의 탄산가스로 덮인 금성표면은 납이 녹아내리는 섭씨 450도의 지옥이랍니다. 화성은요? 화성의 대기는 95%가 탄산가스이며 기압은 지구의 100분의 1밖에 안 되니 대기가 있으나마나 수준입니다. 그래서 대기의 보온효과가 별로 없어 밤기온은 영하 140도 정도로 떨어진답니다. 목성은요? 목성은 영하 200도의 차가운 별이지요. 수소와 헬륨이 엄청난 압력으로 소용돌이치는, 지구의 1,320 배나 되는 거대한 냉동 가스덩어리 별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특별히 만들어지고 고도로 정밀하게 계산된 궤도에 공전속도와 자전속도가 세팅되고 적당한 양의 태양빛을 받으며 온도조절이 되는 별입니다. 희한하게도 기막힌 비율의 산소와 질소로 구성된 공기, 그리고 흙과 물이 있는 별입니다. 우리는 이 기막히게 따뜻한 지구에 살면서 기온이 몇 도만 올라가고 내려가도 덥다, 춥다 합니다. 만일 태양과의 거리가 조금만 틀렸어도, 태양의 크기나 세기가 조금만 달랐어도 지구는 전혀 다른 환경의 별이 되었을 것입니다. 달처럼 자전을 하지 않거나 수성처럼 자전속도가 느렸다면 한 쪽은 지글거리는 연옥, 한 쪽은 모든 것이 얼어붙는 지옥이 되었을 것입니다. 금성이나 천왕성처럼 자전축이 누운 채 돌고 있었다면 반년은 남극이, 반년은 북극이 지글거렸다가 꽁꽁 얼었다가를 반복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구의 크기나 인력이 조금만 달랐어도 기압이 틀려지고 물이 끓는 온도와 어는 온도가 달라지고, 구성성분이 달랐어도, 공기나 물의 양이나 바다의 면적이 달랐어도, 바다의 소금의 양이 조금만 달랐어도, 대기권에 오존층이 없었어도 지구의 환경은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신비요 기적이요 경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별에도 생명체가 있겠거니, 우주공간 어딘가에 지구와 똑같은 별도 있을 수 있겠거니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우주과학자들은 우주공간 어디에도 지구와 같은 별은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지 아니하고서는 지구와 같은 별이 절대로 생겨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강가에 조약돌이 수없이 많아도 똑같은 조약돌은 단 한 개도 없듯이 말입니다.

지구의 종말이라는 2012년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가고 나니 거대한 소혹성이 2029년이니, 2040년에 지구를 때릴 것이라는 새로운 종말론이 등장하였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존재, 우주를 창조하시고 주재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부정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이러한 지구종말론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욱 극성을 부릴 것입니다.

물론 언젠가 지구는 마지막을 맞이할 것입니다. 수십억 년 지나면 태양도 소멸될 것이고 은하계도 안드로메다 성운과 충돌할 것입니다. 우주만유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종말은 소행성이 지구를 때리고 태양이 소멸되는 식으로 오지 않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아니 우주와 시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얄론 골짜기에 태양을 멈추시고 히스기야의 해시계를 물러가게 하신 하나님, 처음이요 나중이시며,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 하나님,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모든 족속이 애곡하겠고 그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 하신 말씀대로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말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말이 없으면 새로운 시작이 없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도 종말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종말은 모든 원수, 죄와 사망이 사라지고 고통과 슬픔이 끝나고 기쁨과 안식이 시작되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새로운 시작은 영원한 하나님의 승리요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과 안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종말과 새로운 시작은 평온한 가운데 오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무서운 환란과 심판을 통하여 마지막 날과 새 하늘, 새 땅이 도래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에스더서, 또한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려움 가운데 몰려온 대적의 궤술과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 아무도 생각지 못 한 재앙이 닥쳐온 그 때에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뒤집어서 새로운 시작이 되게 하셨습니다. 새로운 시작은 환난을 거쳐서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의 역사를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대역전극이 펼쳐집니다. 유다인들을 진멸하고자 한 대적, 하만의 계략이 거꾸로 저희 머리로 돌아갑니다. 오히려 유다인들이 대적들을 죽이고 그들을 진멸하게 됩니다. 유다인들은 도성 수산에서 500명을 도륙하고 하만의 열 아들을 죽이고 왕에게 이를 보고합니다. 그런데 왕이 에스더에게 묻습니다.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내가 시행하겠노라.” 이상하지요? “이제 됐지?”가 아니었습니다. 에스더의 소청 또한 그렇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만족합니다.”가 아니었습니다. “내일도 계속하게 하소서. 그리고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를 나무에 달게 하소서.” 사랑스러운 왕후 에스더의 잔혹하고 끔찍해 보이는 철저한 원수진멸의 의지표명이었습니다.

에스더의 요청이 너무 심한 것 같습니까? 하나님은 왜 이렇게 잔혹해보이고 철두철미한 대적진멸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건드리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되고 자녀 된 자에게 악한 자가 손도 대지 못 하게 하십니다. 감히 해칠 마음도 못 먹게 하십니다.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십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시작될 때 악은 단 한 점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그 날에 완전히 소멸될 것입니다. 대적과 원수들은 찾아봐도 둘러봐도 자세히 살필지라도 하나도 남지 아니하고 진멸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광야길 같이 고달프더라도, 고난과 환난이 닥치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영원한 나라의 소망을 바라보십시오. 그 날에 모든 원수는 사라지고 승리의 함성이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영원한 나라를 약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승리는 우리 것입니다. 

아, 한 말씀 더. 유대인들이여. 주 예수를 믿으세요. 당신들이 읽는 성경이 예언한 구원자가,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란 말입니다.

[에스더 8:3-8] 에스더가 다시 왕의 앞에서 말씀하며 왕의 발아래 엎드려 아각 사람 하만이 유다인을 해하려 한 악한 꾀를 제하기를 울며 구하니
왕이 에스더를 향하여 금홀을 내어미는지라 에스더가 일어나 왕의 앞에 서서
가로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며 내가 왕의 목전에 은혜를 입었고 또 왕이 이 일을 선히 여기시며 나를 기쁘게 보실찐대 조서를 내리사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이 왕의 각 도에 있는 유다인을 멸하려고 꾀하고 쓴 조서를 취소하소서 
내가 어찌 내 민족의 화 당함을 참아 보며 내 친척의 멸망함을 참아 보리이까
아하수에로왕이 왕후 에스더와 유다인 모르드개에게 이르되 하만이 유다인을 살해하려 하므로 나무에 달렸고 내가 그 집으로 에스더에게 주었으니
너희는 왕의 명의로 유다인에게 조서를 뜻대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칠찌어다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취소할 수 없음이니라

오늘은 성경 본문을 적어 보았습니다.
민족이 진멸당할 위기에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로 왕의 앞에 나갔던 에스더로 인하여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유대민족을 진멸하려고 획책하였던 하만이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준비하였던 오십 규빗 나무에 거꾸로 자기가 매달리고, 그 하만의 집은 에스더에게 임의로 처분하도록 주어집니다. 모르드개는 하만이 가졌던 왕의 반지를 받아 국가통치의 전권을 위임받은 총리가 됩니다. 정말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에스더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에스더는 다시 왕의 발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간구합니다. “내 민족을 구하소서. 왕이 내리신 그 죽음의 조서를 취소하소서.” 그렇습니다. 주님 혼자서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이기시고 사단을 물리치고 부활승리하시면 무엇합니까? 죄인들이 여전히 죽게 되어 있다면 말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그 참혹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어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눈물로 간구하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을 사랑스러운 에스더의 눈물의 간구를 왕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왕은 금홀을 다시 에스더에게 내어밀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들어주겠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왕의 명의로 유다인에게 조서를 뜻대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칠지어다!” ‘네 맘대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쓰고 거기에 내 도장을 찍어라.’는 것입니다. 백지수표입니다.

하나님도 그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스러운 그의 아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주님의 요청은 무엇이든지 들어주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으신 것입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조서를 써서 바사제국 127도에 역졸을 보내 왕의 조서를 하달합니다. “너희 유다인들은 스스로의 생명을 보호하고, 대적을 죽이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라.” 온 나라가 기뻐하는 유다인들의 승리의 함성으로 들썩입니다. 천군천사가 소리치고 하늘이 요동하는 요한계시록 5장의 함성과도 같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쓰고 거기에 내 도장을 찍어라.’ 만일 우리에게 이런 허락이 떨어진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쓰고 하나님의 반지로 인을 칠지어다.’ 하시면 무엇이라고 쓰고 인을 치고 싶으십니까? 당신은 무엇을 이루고 싶으십니까?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내 이름으로 내게 무엇이든지 구하라, 내가 시행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구하지 않는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심판은 속히 이루어지며 신속하게 임할 것입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할 때에 도적같이 임할 것이며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재앙이 이를 것이며 그 심판을 벗어날 길은 전혀 없습니다. 하만에게 임하는 심판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왕이 자신의 목숨을 구한 모르드개에게 어떻게 해 주어야 할까를 생각할 때 하필이면 하만이 높은 장대에 모르드개를 매다는 것을 허락 받으려고 왕의 뜰에 나와 섰습니다. 왕이 하만에게 묻습니다. “왕이 존귀하게 여기는 자에게 어떻게 해 주는 것이 좋겠느냐?” 하만은 ‘왕이 존귀하게 여기는 자가 자기 말고 누구겠느냐,’ 생각하고 “그 사람에게 왕복과 왕관을 씌우고 왕의 말에 태워 가장 높은 신하가 고삐를 쥐고 성중에 다니며 ‘이 사람이 가장 존귀한 분이다,’라고 외치게 하소서” 하고 건의합니다. 그랬더니 왕은 당장 그대로 시행하여 모르드개에게 왕복을 입히고 왕관을 씌우고 왕의 말에 태워서 하만이 고삐를 잡고 성중을 한 바퀴 돌라고 명령합니다. 졸지에 하만은 모르드개를 모시고 “이 분이 가장 존귀한 분입니다.” 외치며 성중을 돌았습니다.

하만이 머리를 싸매고 집으로 돌아가 아내 세레스에게 이 기막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자 아내 세레스가 하만에게 말합니다, “모르드개가 당신이 진멸하려는 유대인이라면 큰일입니다.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거꾸로 그 앞에 엎드러질 것입니다.” 그 말이 채 마치기도 전에 왕의 내시들이 들이닥쳐 하만을 데리고 에스더의 베푼 잔치자리에 갑니다. 하만이 내시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은 악인에게 심판이 느닷없이 임하여 미끄러운 웅덩이에 신속하게 빠져드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 심판의 웅덩이는 실상 하만 자신이 스스로 판 무덤이요 함정이요 올무입니다. 그 잔해가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이 자기 정수리에 내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며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리고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자신이 스스로 얽히는 것입니다(시5:10, 시7:15, 잠26:27).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 그 손을 벗어날 자는 없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10:31)” 하나님은 악한 자와 선한 자를 다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하며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에 위로를 받습니다. (시9:18)

왕은 사랑스러운 에스더 왕후에게 무엇이든지 해 줄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에스더가 베푼 두 번째 잔치자리에서 술을 마시며 왕은 다시 묻습니다. 세 번째 묻는 것입니다.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 할찌라도 시행하겠노라.” 왕의 마음이 에스더의 소원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하고 애탔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시행”이라는 단어에 눈길이 갑니다. 이 ‘시행’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에스더서에 가장 많이 등장합니다(네 번). 그리고 요한복음 14장에 두 번 연이어 나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한복음 14:13-14).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에서 다시금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에게 구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내게 구하라. 내가 시행하리라.” 하신 주님의 이 말씀은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지요.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모든 권세를 넘겨주신 것입니다. 

에스더는 드디어 그 소원을 왕에게 아룁니다. “왕이시어, 내 목숨을 내게 주시고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노비로 팔렸더면 내가 오히려 잠잠하였으리이다.” 에스더는 '내 목숨, 내 민족이 하나요, 나와 내 민족이 함께 죽임을 당하게 되었으니 돌아보소서.' 하고 왕에게 아룁니다. 자신과 유대민족을 같은 목숨, 공동운명체로 묶은 것입니다. 그 에스더의 얼굴과 음성이 어떠했겠습니까? 그 고운 얼굴에는 슬픔과 애절함이 가득하고, 그 아름다운 눈에는 애통의 눈물이 가득 고이고, 그 음성은 간장이 끊어지듯 간절하였을 것입니다. 에스더의 간청을 듣는 왕은 마음이 녹아내려 견딜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도 우리와 하나로 묶으셨습니다. 우리의 형제가 되셨고 우리와 한 생명이 되셨고 우리와 공동운명체가 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주님과 우리 죄인들이 영원히 죽게 되었으니 죄인들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영생을 허락해 달라고 청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독생자의 간청에 하나님의 마음은 녹아내렸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주님의 속죄제사와 이 요청을 거부하셨다면, 만일 하나님께서 그런 청을 감히 드리는 주님께 노하셨더라면, 우리 죄인들이 죽는 것은 물론 주님도 부활하지 못 하셨을 것입니다. 왕이 대경실색하여 묻습니다.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냐?” 왕이 어떤 표정이며 어떤 음성이었을까요? ‘감히 어느 놈이 나의 사랑하는 왕후 에스더를 이렇게 했단 말이냐?’ 아마 왕의 눈에는 뵈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에스더가 대답합니다.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너무나도 놀라고 기가 막히고 분노한 왕은 자리를 박차고 잔치자리를 떠납니다. 그의 마음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배신감과 수치심으로 걷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잔치자리를 박차고 왕궁 후원으로 나갔던 왕이 다시 돌아왔을 때 왕의 눈앞에는 하만이 왕후의 앉은 의자에 엎드려 있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하만은 목숨을 살려달라고 에스더를 붙잡고 의자에 엎드린 것이지만 눈이 뒤집힌 왕의 눈에는 그것이 왕후를 강간 하려고 하는 모습으로 비치었던 모양입니다. “저놈이 궁중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하려는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리가 하만의 얼굴을 쌉니다. 얼굴을 싸는 것은 ‘보기도 싫다, 듣기도 싫다’는 뜻이며 사형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왕후를 죽이려고 한 원수, 내 왕후의 민족까지 진멸하려고 획책한 악한 놈, 저놈이 내 왕후까지 겁탈하려고 해? 내가 여태 저놈에게 속았구나. 저놈을 어떻게 갈아 마셔야 속이 시원할까?’ 왕의 심중은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 왕에게 내시가 말합니다. “저가 모르드개를 달려고 집에다 오십 규빗이나 되는 나무를 세웠나이다.” 왕의 눈은 다시 뒤집힙니다. “뭐라고? 저놈이 내 목숨을 구해준 충신 모르드개를 달려고 나무를 세웠다고? 저놈을 거기에다 매달아라!” 그리고 그 날에 하만의 집을 왕후 에스더에게 붙이고 모르드개에게 하만에게서 거둔 반지를 빼어 줍니다. 실로 통쾌하고 극적인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이 통쾌한 이야기를 읽으며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승리하신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이같이 시행하사 우리가 우리의 대적을 무찌르시고 승리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 모든 일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책, 유대인들이나 부림절로 지키면서 읽는 책, 정경으로 채택되지 못 할 뻔 했던 구약성경 에스더서에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승리의 모습이 여자인 에스더를 통하여 이처럼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삼일간의 금식을 마친 후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으로 왕의 앞에 나아가는 에스더의 모습에는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드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주님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왕은 에스더를 보고 심히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홀을 에스더에게 내밉니다. 왕이 금홀을 내밀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만일 왕이 에스더를 보고 “심히 사랑스럽지” 아니하였더라면 어찌 되었을까요? 만일 왕이 에스더를 보고 “이 당돌한 것이 감히?”라고 생각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요? 아, 만일 하나님께서 주님을 기뻐하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어찌 되었을까요?

왕은 “심히 사랑스러운” 에스더에게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고 말합니다. 자기 앞에서 춤을 춘 살로메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하던 미친 왕 헤롯이 생각납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사랑에 눈 먼’ 왕의 모습에서 또한 우리는 ‘사랑스러운 아들’이 자기 몸으로 드린 화목제물을 받으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신 ‘사랑에 눈 먼’ 하나님의 모습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죄인들이 무엇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까? 무엇으로 하늘나라의 영생을 얻었습니까? 오직 주님의 ‘심히 사랑스러움’으로 인하여서입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그 자리에서 바로 왕에게 하만을 고자질하고 유대인의 사면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왕에게 자신의 베푸는 잔치에 하만과 함께 참석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잔치는 즐거움을 주는 자리입니다. 에스더는 왕에게 잔치를 베풀어줌으로써 왕이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청을 받아들여주기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 동시에 왕으로 하여금 에스더의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게 하면서 그 청을 거절할 수 없도록 하려는 치밀한 계획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빈손으로 나아가 은혜를 베풀어주기만을 바라지 아니하고 왕의 기뻐하는 것을 먼저 해드리는 에스더의 모습은 지혜로운 여인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드리는 주님의 모습의 예표라 할 것입니다.

에스더는 첫 번째 잔치자리에서 왕에게 청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다음날 잔치에 재차 초청을 합니다. 아마도 처음 베푼 잔치의 기쁨을 더욱 큰 즐거움으로 이어가게 하려고 그랬는지, 왕에게 드리는 잔치와 자신과 유대인을 위한 청을 드릴 잔치를 구분하는 현명함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잔치는 단순히 기쁨과 즐거움만의 자리만이 아니라 심판과 연결된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라든지, 임금의 잔치자리 초청(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라든지, 바깥 추운 곳에 내어던지라든지 하는 성경의 여러 잔치,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국혼인잔치 같은 모든 잔치는 오직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만이 참예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웃기는 것은 그 잔치자리에 참석할 자격이 없는 원수 하만이 왕과 함께 초청받았다고 으쓱대며 기고만장하는 모습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착각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이러한 전개과정에서 하나님의 한 치도 틀림없는 섭리하심이 진행됩니다. 에스더 왕후의 잔치에 왕과 함께 단 둘이 초청 받았다고 기고만장하여 퇴궐하던 하만은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모르드개를 보고 기분을 잡치고 머리끝까지 화가 나게 됩니다. 하만이 집으로 돌아와 아내 세레스에게 이것을 이야기하고, 세레스는 하만에게 높이 오십 규빗의 나무를 세운 다음 왕에게 청하여 모르드개를 매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날 밤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왕은 잠을 이루지 못 하고 내사들에게 역대일기를 읽도록 하였고 그 역대일기에서 모르드개가 왕의 암살모의를 밝혀내어 자신의 목숨을 구하였다는 사실, 그러나 모르드개가 아무런 포상도 받지 못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한편 이를 알 길 없는 하만은 그 다음날 모르드개를 나무에 매달아 죽이기를 청하기 위하여 왕의 앞에 나아옵니다. 그리고 자기 꾀에 빠져 욕을 당하게 되는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어쩌면 이렇게도 오묘한지요. 하나님의 지혜를 누가 당하리요.

페미니스트(여권운동가)들이 보기에 성경은 남자위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남성으로 지칭하고 아버지라고 부르고, 출애굽 때도 20세 이상의 남자만 숫자를 세고, 오병이어의 이적기사도 ‘여자와 어린아이’를 빼고 오천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거의 모든 기록이 남자위주로 되어 있어 남녀차별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남성명사 ‘He'를 여성명사 ’She'로 고치고 ‘하나님 어머니’로 고쳐 쓴 성경을 읽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또 다윗부터 요셉까지 순수혈통을 이어 내려왔는데 주님은 요셉을 통하여가 아니라 마리아를 통하여 오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누가복음을 보면 마리아로부터 시작하여 위로 거꾸로 계보를 죽 따라 올라가 다윗에 이르면 요셉과 마리아의 족보가 만나게 됩니다. 즉 요셉이나 마리아는 다 다윗의 혈통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약속이 모두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 때 같은 지파 안에서 결혼하도록 하여 열 두 지파에게 분배된 토지가 다른 지파로 넘어가지 않도록 하셨는데 이는 바로 이를 이루려고 계획하신 것입니다. 이름과 명분은 남자에게 주시고 실속과 알맹이는 여자에게 주신 셈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이여, 긍지를 가지십시오. 

성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자 영웅, 에스더라는 이름은 하닷사, “별”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에스더는 룻기와 함께 여성의 이름으로 제목이 붙은 두 권의 성경 중 하나입니다. 룻기는 이방여인의 이야기인 반면 에스더는 이방에 사로잡혀가서 이방인과 피를 섞는 유대인 여자이기 때문에 어쩌면 룻기, 에스더, 모두 스스로를 유일한 선민, 택하신 백성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치욕적이고 숨기고 싶은 부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유대인들만의 구원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통하여 온 인류를 구하는 구원이요 온 세상에 흘러나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일 것입니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경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논란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심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성경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보이지 아니하신다 해도 역사를 주관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하만이라는 사람이 사단마귀의 역할을 맡아서 등장합니다. 그 한 사람 악랄한 실력자의 계략에 의하여 민족이 진멸당할 위기에 처한 유대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옷을 찢고 애통하여 금식하며 곡읍하며 부르짖고 굵은 베를 입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뿐이었습니다. 마치 죄인들이 죄악 가운데 죽음의 고통 가운데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모르드개는 하닥을 통하여 자세한 연유를 전하며 에스더에게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 구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누구든지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왕의 안뜰에 나아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홀을 내어 밀어야 살 것인데, 자신은 이미 30일 동안 왕의 부름을 받지 못 하였다.” 하면서 왕에게 나아가기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모르드개는 “네가 왕궁에 있다 하여 모든 유다인 중에서 홀로 화를 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네가 잠잠하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지만 너와 네 아비집은 멸망할 것이라. 네가 왕후가 된 것이 이때를 위함인지 누가 아느냐?”고 에스더를 질책합니다. 그러자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모든 유다인들로 삼일간 금식하게 해 달라 하고 자신도 시녀들과 함께 삼일 동안 금식한 다음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고 목숨을 건 결심을 합니다.

우리는 에스더의 망설임과 또 목숨을 건 결단을 보면서 에스더의 용기와 믿음을 본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에스더의 이 모습에 나타나는 주님의 모습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 같이 되도록 기도하신 겟세마네를 기억합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주님의 그 처절한 몸부림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만 매질과 조롱과 극심한 십자가의 고통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버림당함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죄인들을 용서하소서.” 하는 부탁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더러운 죄인들을 위하여 부탁을 한다는 것은 더욱 맹렬한 진노를 부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부름 받지 않고 왕의 앞으로 나아가는 것부터 목숨을 건 일이지만 아무리 총애를 받는 왕후라 해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무슨 부탁을 한다는 것은 더욱 위험스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삼십일 동안 자신을 부른 적이 없는 왕 앞에 나갔다가 말 한 마디 잘못 해서 왕이 혹시라도 에스더의 정체를 의심하거나 당돌하고 괘씸하다고 생각하는 날이면 그대로 죽임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내가 왕이다. 내가 나의 백성을 심판하는데 네가 감히 밤 놔라, 대추 놔라 하는 거냐.'고 받아들인다면 그 자리에서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에스더는 온 유대인들의 삼일 금식기도를 요청하고 스스로도 삼일동안 금식하고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하고 왕의 앞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유대인들을 위하여 왕에게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왕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중보자, “죽으면 죽으리라.” 목숨을 내어놓고 왕의 앞에 나아가는 에스더의 그 모습은 하나님께서 미리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 말씀과 신앙을 무겁고 힘 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은 힘들고 두렵고 어렵고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힘들게 듣고 하나님을 어렵게 섬기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은 “항상 기뻐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꿀송이 같습니다. 하나님은 재미있고 유머러스하신 분입니다. 율법 가운데에도 하나님께서는 금방 혼인한 남자는 군대도 빼주고 집에서 아내를 즐겁게(♥) 해 주라고 말씀하시고, 성경 한 가운데에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노골적인의 언어로 쓰인 아가서도 넣어놓으시고, 또 신나고 흥미진진한 드라마 같은 에스더도 넣어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신나게 읽는 책이 에스더가 아닐까 합니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300년 무렵부터 에스더에 나오는 부림절을 가장 신나는 명절로 삼고  있다고 합니다. 아달월,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이른 봄인 2-3월의 음력 14일이 되면 유대인들은 회당에 모여 두루마리로 된 에스더를 읽으며 유대민족을 위기에서 구한 영웅인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기리고 다채롭고 즐거운 행사들을 즐깁니다. 에스더서를 낭독할 때 ‘하만’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사람들은 도구들을 이용해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발을 구르면서 야유를 보낸답니다. 에스더 이야기를 통하여 어린이들에게 목숨을 걸고 자기 민족을 구해낸 에스더의 애국 애족심을 가르치고, 또 만두 같은 크기로 사람 귀 모양의 떡을 만들어 ‘하만의 귀’라는 뜻의 ‘오젠 하만’을 만들어 먹는답니다. 예쁜 공주의상, 카우보이 차림, 옛 로마 호민관의 관복, 색색의 가면 등을 차려 입은 어린 아이들이 온 거리를 누비며 퍼레이드를 벌일 때면 축제는 절정에 이릅니다. '벤 예후다'라는 예루살렘의 중심거리는 울긋불긋한 옷, 머리에 쓴 마스크 등으로 뒤덮이고, 사람마다 플라스틱 망치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머리를 '삑' 소리가 나게 때리고 때린 사람이나 맞은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웃고 즐긴답니다. 그렇게 부림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신나고 즐거운 명절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을 믿는 유대인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고 거부하는지, 자신들이 읽는 그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이라는 것을 왜 인정하지 않는지, 이사야서 53장이 묘사하는 고난 받는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왜 애써 부인하는지,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에스더조차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데도 왜 믿지 않는지 참으로 안타깝지만 아무튼 유대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에스더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지만 에스더서의 줄거리 앞부분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페르시아의 황제 아하수에로는 연회를 베풀고 만조백관 앞에서 황후 와스디(Vashti)의 미모를 자랑하기 위하여 그녀에게 연회장으로 나올 것을 명령하였으나 황후는 왕의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진노하여 황후를 폐위하고 전국에 영을 내려 후임 황후를 간택하게 되는데 유대인 처녀 에스더가 황후로 간택 받게 됩니다. 그 에스더는 부모를 여읜 후 그녀의 사촌오빠 모르드개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 후 모르드개는 대궐 문 앞에 앉아 있다가 황제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우연히 알게 되어 에스더를 통하여 황제에게 보고토록 하였고 황제는 화를 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르드개의 이 공로는 잊혀지게 됩니다.

아각의 후손 하만이란 자가 왕의 총애를 받아 하늘을 찌르는 세도를 휘두르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고 절을 합니다. 그러나 유독 모르드개만 그에게 무릎도 꿇지 않고 절도 하지 않습니다. 하만은 화가 나서 모르드개만 아니라 유대인 전체를 죽여서 말살할 흉계를 꾸밉니다. 진멸할 대상이 유대민족이라는 것을 숨긴 채 ‘악한 족속’이라고 써서 그 악한 족속을 일시에 진멸하겠다는 계획을 세워 왕의 재가를 받아냅니다. 각 도에 유대민족을 진멸하라고 명령하는 조서가 내려가고 이에 유대민족은 통곡하며 부르짖습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연락하여 왕의 앞에 나가서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거절합니다.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함부로 왕의 앞에 나가면 죽임을 당할 수 있는데 에스더가 한 달 넘게 왕의 부름을 받지 못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인지 어찌 아느냐?’고 에스더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이에 에스더는 왕에게 나아가기로 결단하고 유대인들에게 금식을 요청하고 자신도 삼일 동안 금식을 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에스더를 읽으면서 주인공인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비장한 각오에 가장 큰 관심을 갖게 됩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오늘 화를 불러온 모르드개의 뻣뻣한 자세에 대하여도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어찌 보면 모르드개는 지나치게 꼿꼿한 태도로 불필요한 박해를 불러일으킨 사람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모르드개는 대궐문에 앉아서 천하를 호령하는 하만에게 허리를 굽히지 않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대궐문에는 왜 나와 앉는단 말입니까? 대궐문에 앉았으면 적당하게 하만에게 허리 굽히는 시늉이라도 하든지, 그게 정 싫으면 대궐문에 나오지 말든지, 꼴보기 싫으면 하만이 올 때는 화장실에 가는 척 피해버리든지 했더라면 쓸데없이 그렇게 엄청난 위기와 화를 불러오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모르드개는 대궐문 앞에 나와 앉아서 하만을 피하지도 비굴하게 허리를 굽히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이 일로 유대인들이 굵은 베를 입고 애통하며 금식할 때 에스더가 다른 옷을 보내면서 굵은 베를 잠깐 벗어놓고 대궐로 들어오라고 권하였을 때도 굵은 베를 벗을 수 없다면서 좋은 옷 입기를 거부합니다. 참으로 골치 아픈 사람입니다. 깐깐한 고집불통, 대쪽 같은 딸각발이 선비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르드개의 이 같은 고집과 기개와 지조를 사용하셔서 기이한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오늘날 모르드개 같이 신앙과 절개를 지키는 그리스도인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눈을 뒤집고 찾아도 없습니다. 웬만하면 티나지 않게 적당히 타협하고 모나지 않게 처신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요 슬기요 요령인 시대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기이하고 놀라운 일을 행하고 싶으셔도 모르드개 같은 사람이 없어서 도무지 그럴 기회가 없으신 것 같습니다.
이 시대에 어디 모르드개 같은 사람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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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탄절에 생각해보는 말씀>
이 성탄절에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족보에 관하여 말입니다.

1. 요셉과 마리아

우리 한글성경 마태복음 1장 첫머리는 아래와 같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마 1:1-3 =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잘 아시는 대로 “낳고”, “낳고”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남자가 어떻게 낳습니까? 이는 명심보감과 또 조선시대의 학자 주세붕 선생의 시조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실 제.....”의 영향을 받은 번역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경의 원본, 즉 헬라어 원어성경도 '낳고'로 되어 있을까요? 아닙니다.
헬라어 성경 원전에는 “아브라함 에겐네덴 톤 이삭, 이삭 데 에겐네덴 톤 야곱....”,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버지가 되었고, 이삭은 야곱의 아버지가 되었고....”로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를 비교적 정확히 번역하고 있는 NIV 영어성경을 볼까요?
“A record of the genealogy of Jesus Christ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Abraham was the father of Isaac, Isaac the father of Jacob, Jacob the father of Judah and his brothers......“
역시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버지였고, 이삭은 야곱의 아버지,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의 아버지.....“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성령님의 역사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습니다(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육신으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생물학적으로 예수님과 아버지 요셉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관습과 율법에 따라 요셉은 예수님의 아버지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예언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을 통하여 오셨다는 말씀이 과연 옳으냐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마리아의 계보를 거꾸로 위로 올라가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 3: 23-25 =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아모스요 그 이상은 나훔이요 그 이상은 에슬리요 그 이상은 낙개요.....
누가복음 우리말 성경번역도 좀 이상합니다. 왜 “이상은, 이상은...”으로 번역하고 있느냐 말입니다.
헬라어 원어성경을 볼까요? 헬라어 성경은 “온 휘오스, 호스 에노믹섹토, 요셉, 투 헬리, 투 맛닷, 투 레위, 투 멜치.....” 즉 예수님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로, 요셉의 아들이요, (그는) 헬리(의 아들), (그는 맛닷(의 아들), (그는) 레위(의 아들이요).......로 주욱 올라가서 다윗에 이르러 아버지 요셉의 족보와 만나게 되고, 계속 올라가서 아브라함으로 이어지고, 아담으로 이어지고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NIV 영어성경도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Now Jesus himself was about thirty years old when he began his ministry. He was the son, so it was thought, of Joseph, the son of Heli, the son of Matthat, the son of Levi, the son of Melki, the son of Jannai, the son of Joseph.........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된 대로, 요셉의 아들이었고, (요셉은) 헬리의 아들, (헬리는) 맛닷의 아들, (맛닷은) 레위의 아들..........
그러므로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은 마리아에게서 나신 예수님은 족보로는 요셉을 통하여, 혈통으로는 마리아를 통하여 약속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아들”로, 그리고 “여자의 후손(창세기 3:15)”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내신 다음 가나안 땅(두 지파 반은 요단강 동편)을 열두 지파에 분배하게 하시고 그 땅이 혼인으로 인하여 이리저리 섞이지 않도록 같은 지파끼리만 혼인하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유다지파의 혈통이 온전히 이어져 내려오고 같은 유다지파에 속한 요셉과 마리아가 혼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아, 조상과 후손 말인데요. 우리말 성경에는 있지만 원어성경에는 조상이나 후손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여자의 후손(창 3:15)”이라고 되어 있으나 원어성경은 “여자의 씨”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말 성경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도 원어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아들“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할아버지도 없고 조상도 없으며 아버지와 아들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금도 자신들을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셨을 때 자신들은 아버지 아브라함 속에 들어있었다고 믿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므로 그들은 그 때 아브라함(의 허리) 속에서 아브라함과 함께 택함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것은  또 성경의 중요한 핵심사상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아버지와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빌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사실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2. 아버지가 되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자가 시집을 가도 성(姓)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하여 서양에서는 여자가 결혼하면 남편의 성(姓), 아니 Family Name, 가족이름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성(姓)의 의미와 서양의 Family Name의 의미 또한 같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 하면 내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여자는 시집가서 그 집의 가족이 아니라 아들(씨)을 낳아 대를 이어주는 일종의 생산도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죽어서도 자신의 이름조차 없이 처녀 때의 성씨로 묘비에 기록됩니다.
이스라엘 풍습, 성경의 역사에 의하면 여자가 결혼하면 남자와 한 몸이 되었습니다. 율법, 곧 하나님의 법(Law)에 따라 그 집의 가족이 되고 아버지의 딸(Daughter in Law)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맺어주셨으니 아무도 나눌 수 없고 아들을 못 낳아도 내쫓거나 돌려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 하면 어떻게 했을까요? 아내가 어떻게 해서든 아들을 만들든지 주워오든지 남편에게 주어서 아버지가 되게 하였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아브람은 75세였고 사라는 65세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약속하셨지만 사라는 이미 폐경을 지난 할머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하인이던 다메섹 엘리에셀을 후사로 생각하기도 하였으며(창15:2), 사라는 자신의 몸종인 하갈을 남편의 품에 안겨서 이스마엘을 낳게도 하였습니다.
몸종은 소유물이었기 때문에 사라가 자신의 몸 대신 몸종의 몸을 사용하여 씨(아들)를 얻는 것은 정당한 권리행사였습니다. 아내가 자신이 강구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후사를 만들어서 남편에게 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이것이요, 이 아이의 아버지가 되시오.” 하면 남편은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낳고”가 아니라 “아버지가 되었고”인 것입니다.

아들과 후사에 관한 한 모든 권한이 여자에게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라가 두 번이나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요구하였고 아브라함이 이로 인하여 번민할 때 하나님은 사라의 말대로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레아와 라헬은 아들 낳기 경쟁을 하면서 자신의 몸종들인 빌하와 실바를 남편 야곱에게 안겨서 아들을 낳게 하였으며 그렇게 열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첩의 자식이니 서자(庶子)니 하며 차별하였겠지만 성경 어디를 봐도 열 두 지파가 차별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다 똑같은 아들들이요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되었습니다. 아들과 후사에 관한 전적인 여자의 권한은 또한 다윗에게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도록 한 밧세바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후사를 정하는 권한이 아내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사람들이 다 아는 대로, 사람들이 다 인정하는 대로”, 즉 성경과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요셉과 마리아의 맏아들이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과학적으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알다시피 구세주는 절대로 남자의 씨로 잉태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원죄가 이어져 내려온 남자의 씨를 통하여 잉태되면 모든 인류의 죄를 지고 죽으실 메시아가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성령으로 잉태되게 하여 여자의 몸을 통하여 보낼 수 없다면 어찌 죄의 대속이 가능하고 구원이 가능하겠습니까? 과학에 묶여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실 수 없다면 그게 무슨 창조주 하나님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여자의 후손”과 “처녀가 낳을 것”을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바와 같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너에게서 나리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가 5:2)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오신 날을 기뻐합니다.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약속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아들로, 또 여자의 씨로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구원의 역사를 인하여 찬양합니다.
이 성탄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이 모두에게 임하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의 죄를 대속하신 구세주이십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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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3-4)

앞서 우리는 로마서 말씀 중 첫 사람 아담을 통하여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된 것과, 하나님께서 둘째 아담인 예수님을 통하여 죄인들을 구원하시려 그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사람으로 보내셨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자마자 성령님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게 됩니다. 이 시험은 과연 예수님이 죄 없는 사람으로 죄인들을 대신할 대속물이 될 수 있느냐 하는 자격시험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대표선수 사람이 되셔서 골리앗 앞에 선 작은 다윗과 같이 되신 예수님이 마귀의 엄청난 시험을 이길 수 있느냐 하는 사생결단의 대결이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십일을 금식하고 주리신 인간이신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함으로써 대속자와 구세주의 자격을 상실하게 만들려는 마귀의 모략과 유혹은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마귀의 무시무시한 시험을 이겨내지 못 하면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실패로 끝나는 것입니다.

마귀의 첫 번째 시험은 주리신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유혹한 것이었습니다. 주리신 주님께 이 유혹은 견디기 힘 드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사흘 굶어 도적질 안 하는 사람 없다는 말이 있듯이 사십일을 굶주리지 않았다 해도 인간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유혹과 시험은 아마도 먹는 문제, 돈 문제일 것입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사는 문제가 먼저지 하나님이나 믿음은 다음이 아닙니까?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믿음을 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믿는 자들 중에도 먹고사는 문제나 눈앞의 이익 때문에 양심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자들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향하여 광야를 행진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을 것과 마실 물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였고 ‘애굽 땅에서 고기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를 그리워하였습니다(출16:3).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지 못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보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16:4).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면서도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온전히 믿지 못 함으로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실상 먹는 문제는 핑계일 뿐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하나님을 믿겠다거나 교회에 나가겠다는 사람은 정작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아쉬울 일이 없으므로 하나님을 더욱 멀리 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먹고사는 문제와 관계가 없어야 합니다. 풍성할 때나 궁핍할 때나 주리고 목마를 때나 배부르고 평안할 때나 믿음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순탄하고 형통할 때나 어렵고 환난이 닥칠 때나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먹는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도와주시면 하나님이 계시고 궁핍하고 시련이 닥칠 때면 하나님이 아니 계시는 그런 믿음을 어찌 믿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잘 먹고 평안하게 산다 해도 결국은 죽어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 세상의 풍요는 결코 우리의 생명을 연장해 주지 못 합니다.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는 것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믿음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 져서 믿음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잃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맙시다. 연약한 인간이 되어 그 어려운 시험을 당하셨으나 능히 승리하신 주님을 우리 모두 용감하게 뒤따릅시다. 주님이 능히 이기셨으니 또 우리를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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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목 법궤 (2)

성경에 나오는 조각목이 무슨 나무인지 아십니까? 저는 ‘조각목’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무슨 예술가들이 조각(彫刻)하는 데 쓰는 나무인줄 알았습니다. 한자(漢字)로 풀어보면 조각목(棗角木)은 ‘대추나무 조, 뿔 각, 나무 목’, 그러니까 대추나무처럼 가시가 돋아나고 뿔처럼 단단한 나무라는 뜻입니다. 중동지방 광야, 사막에 자생하는 나무입니다. 메마른 광야에서 갈증에 시달리고 더위와 추위, 바람에 뒤틀려 있습니다. 단단하게 굳어 깎고 다듬기도 어렵습니다. 세상의 거치른 먼지바람 속에 시달려 강퍅해진 악한 인간들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버려진 가시떨기나무 가운데로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에 나왔을 때 하나님은 광야에 흩어진 이 뒤틀린 가시나무들을 깎아 법궤, 분향단, 번제단, 널판 등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불러 모아 성도를 만드시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게 하심 같다 싶습니다.

법궤는 길이가 2규빗 반, 너비가 1규빗 반, 높이가 1규빗 반입니다. 1 규빗이 45 센티미터 정도니까 길이가 2규빗 반이면 불과 110 센티미터 남짓입니다. 어린아이가 들어가 누우면 딱 맞을 작은 사이즈입니다. 조각목을 깎고 다듬어서 정금으로 싸되 안팎으로 싸고, 윗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금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달되 이편에 두 고리, 저편에 두 고리를 달고,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 금으로 싸고, 그 채를 빼내지 말고 꿰어서 두고 증거판을 그 속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조각나무에다 너무 안 어울리는 과분한 황금장식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속죄소를 두라고 하셨습니다. 속죄소는 조각목이 아닌 정금으로만 만들었습니다. 그 크기는 길이 2규빗 반, 너비 1규빗 반으로 법궤의 크기와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정금으로 만든 두 그룹천사가 날개를 연하여 마주 보며 속죄소 위를 덮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법궤는 성막 안 가장 깊은 지성소에 모셔졌습니다. 누구든지 함부로 들어가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성소 분향단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죽임 당했습니다. 지성소에는 1년 1차 대제사장이 속죄제사를 드릴 때만 들어갔습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먼저 제사장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고 정결케 한 다음 온 이스라엘의 죄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제사장의 옷자락에 달린 방울소리로 지성소에 들어간 제사장이 살아있음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와 성막을 옮겨가며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다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강에 들어서자 범람하던 물이 멈추어 쌓였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와 성막을 실로에 두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터에 법궤를 모시고 나갔다가 블레셋에 죽임 당하고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우상의 전에 법궤를 두었더니 다곤 신상이 동강나고 목이 잘라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두려움에 빠진 블레셋 사람들은 금독종 다섯 개를 만들어 제를 올리고 법궤를 수레에 실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돌려보냈습니다. 그 법궤를 벧세메스 사람들이 들여다보다가 (오만)7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후일에 다윗이 법궤를 모셔오려고 할 때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끄는 소가 뛰는 바람에 법궤를 붙잡았다가 웃사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랫동안 법궤는 두려우신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믿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과연 법궤는 정말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몇 가지 의문점을 갖습니다. 우선 하나님을 의미하기엔 법궤 싸이즈가 너무 작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하늘과 땅, 물속 무엇이든 어떤 형상도 만들어 섬기지 말라 하신 하나님이 법궤를 만들어서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모시고 섬기라고 명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또 속죄소를 그 위에 두게 하신 것도 이상합니다. 법궤가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하나님 위를 속죄소로 덮으라는 것도 이상하고 거기에다 피를 뿌리라고 하는 것은 정말 너무너무 더 이상한 일입니다. 또 그룹천사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룹들의 보호를 받다니요. 그룹들, 네 생물과 천사들은 법궤 아래에 들어가서 법궤를 떠받드는 모양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법궤는 쓸데없는 조각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광야에 버려진 것과 같은 우리 죄인들을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어린아이처럼 순전하고 작은 자를 위한 것일 것입니다. 조각목 법궤는 죄인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처소가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법궤 위에 놓인, 법궤와 싸이즈가 똑같은 속죄소는 조각목이 아닌 정금입니다. 죄가 전혀 없으신 천하인간 보다 더 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똑같은 크기의 인간의 모양으로 오셔서 우리를 덮고 피 흘려 대속하실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 참혹한 피흘림의 속죄소를 두 그룹천사가 날개를 펴고 눈물로 옹위하였을 것입니다.

그 속죄소 아래 조각목 법궤 안에는 증거판, 곧 말씀의 돌판을 넣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조각목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 안에 가져야 합니다. 그 약속과 증거의 말씀, 그 믿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품어 안고 속죄소의 피, 곧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될,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실 성도일 것입니다. 애굽에서 죽어 누워 소망 없이 썩어가던 관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로 인하여 생명의 법궤가 되는 것입니다. 광야에 버려진 악하고 쓸모없는 조각목이 이렇게 영화롭게 빛나는 법궤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택정하사 가시떨기나무 같은 죄인이던 우리를 불러 다듬어 법궤 되게 하시고, 모든 죄와 허물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 정결케 하시고, 모든 악함과 부족함과 흠을 정금으로 싸 온전하고 영광스럽게 하시며, 천군천사로 지켜 인도하시며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애굽에서 죽어, 죄악 가운데서 죽어 관에 넣어져 못질 당한 것 같던 당신, 가시떨기 조각목 같이 악과 독으로 가시 돋았던 당신, 이제 두려움과 떨림으로 나아와 하나님의 법궤가 되십시오.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전이 되십시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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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 교회들이 수련회 가서 관 속에 들어가는 이벤트를 한다고 하더군요. 관 속에 들어가 누우면 관 두껑이 닫히고 못을 꽝꽝 박는 망치질 소리가 울리고... 그렇게 한 동안 깜깜한 관 속에 누워서 죽음의 공포와 절망, 인생의 허무함, 생명과 구원의 은혜를 실감나게(?) 느낀다고 그러더군요. 그렇지만 좀 무서운 이벤트이니까 혹 폐쇄공포증이나 심장질환이 있으신 분은 조심해야겠다 싶네요. 창세기는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로 끝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100세에 이삭을 주시고, 이삭에게서 난 야곱에게 열 두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7년 기근을 당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 인도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 다음 관 속에 집어넣으시고 대못을 꽝꽝 박으신 것 같습니다. 무려 430년 동안 관 같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도록 놔두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잊어버리신 것도 아닌데 그렇게 430년 동안 고통과 슬픔 속에 말입니다.

모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바로공주의 아들, 왕자의 신분으로 40년, 그러나 자신의 동족을 박해하는 애굽 군사를 보고 격분하여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쳐 나와 미디안 광야에서 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게르솜을 낳고 40년 동안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구나.” 탄식하며 양을 치는 아무 희망도 없는 신세였습니다. 그런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산 호렙의 가시떨기나무 가운데로 찾아오셨습니다. 모세는 가시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신기한 광경을 보려고 다가섭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좋은 나무 놔두고 가시떨기나무 가운데로 오신 것일까요? 가시떨기나무는 소망도 없고 소용도 없고 메마른 광야에 버려진 볼품도 쓸모도 없고 불쏘시개로나 쓰이는 저주 받은 것 같은 나무입니다. 모세가 그런 가시떨기나무가 된 게 아닐까요? 가시떨기나무 같은 모세....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애굽왕자 시절을 그리며 살인자로 쫓기는 신세, 속절없이 늙어가는 몸을 이끌고 죽을 때까지 양이나 쳐야하는..... 그 마음은 40년 세월 속에 절망과 울분, 체념과 원망으로 돋아나고 자라나 가시떨기나무의 무수한 가시들이 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다 불모지에 버려진 가시나무들입니다. 날마다 아픔과 슬픔의 가시, 미움과 원망의 가시, 체념과 절망의 가시를 돋우고 메마른 광야에서 발악하듯 살아가는 가시떨기나무들.... 조그만 이파리 하나마다 그 이파리 하나도 새에게 먹히지 않겠다고 가시를 곧추세우고, 그 가시로 서로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삶. 그러면서도 애절한 한 편의 시와 같은 인생, 평생 노래 한 번 부르지 않다가 마지막 순간 가장 길고 뾰족한 가시에 자신의 가슴을 찔리우고 일생에서 가장 슬프게, 가장 아름답게 한 번 운다는 가시나무새 같은, 그러나 아무리 슬피 울고 아무리 목 놓아 운다 해도 아무도 들어주는 이,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이 사라져야 하는 허무한 인생들, 슬픈 존재들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가시떨기나무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불로 오셨습니다. 심판의 불로 오셨다면 가시떨기나무들은 불살라져 없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불타 없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불이 붙은 가시떨기나무들로 광야를, 온 세상을 불타게 하려고 오셨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 12:49)”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결코 잊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타는 아픔과 끊어지는 슬픔을 돌아보시는 하나님 앞에 모세는 순종함으로 신을 벗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가슴 속 응어리진 모든 가시들을 하나님의 불로 태워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찌르는 아픔과 슬픔과 죄악의 가시들을 하나님의 불로 태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불로 가시떨기나무 같은 우리의 가슴을 태우시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게 하실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관 속에 누워 430년 썩은 것 같은 우리들로 영화로운 법궤, 세상을 태우는 복음의 불덩어리로 다시 타오르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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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9: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

예루살렘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며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주님을 맞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몰랐고 마음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하였고 끝내 주님을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40여년 뒤....., 서기 70년....

여호와 유일신을 섬기는 유대인들은 다신교 우상숭배를 하는 로마에 길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갈등은 점점 커졌고 기원후 66년 무렵부터 시작되어 로마에 저항한 유대독립운동은 70년의 예루살렘 함락과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항전하던 960여명의 자결로 처절하게 막을 내립니다. 이스라엘 전역이 로마의 무자비한 진압의 칼날에 파괴되었고 예루살렘의 함락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참극이었습니다. 

유대항쟁 초기에 로마군에 항복하여 목숨을 건진 요세푸스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지형적으로, 또 인공적으로 난공불락에 가까운 천혜의 요새였습니다. 로마군 티투스 장군은 주후 70년 4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토성을 쌓아 둘러막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항복을 요구하였으나 예루살렘의 극렬 유대인들은 결사항전을 외치며 결의를 다지기 위하여 식량을 불태우고 온건파 유대인들을 살해하였습니다. 나중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벽을 둘러 1만 여개의 투항을 하려 했거나 탈출을 시도했던 유대인들을 처형한 십자가가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된 다음 유대인들 중 일부가 금화와 보석을 입에 넣거나 삼키고 예루살렘을 탈출하였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로마군들은 유대인들을 잡아 산 채로 배를 갈라 금은보화를 꺼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4개월이 넘는 동안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마침내 로마군의 성벽 파쇄기 공략으로 성전 뒤편 성벽의 일부가 무너지고 전투는 다시 성전에서 계속되고 성전이 함락되고 다시 예루살렘 시내가 로마군에게 함락되면서 무려 110만여 명이 사망한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으로 막을 내립니다. 포로로 잡힌 유대인은 9만 7천여명에 불과했고 로마군은 성전에서 약탈한 보물을 가지고 로마로 귀환하였으며 지금도 티투스 개선문에는 그 당시 모습을 그린 벽화 부조가 남아 있습니다. 제사장을 죽여 배를 가르자 금화가 나왔고 불에 탄 성전기둥에서 녹아내린 금이 벽돌과 바위틈으로 스며들자 성전은 로마군에 의하여 깡그리 “돌 하나도 남지 않고”  훼손되고 맙니다. 지금 그 자리에는 이슬람 황금사원이 버티고 서 있고 남아있는 통곡의 벽은 벽이 아니라 성전 뜰 한편의 축대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참혹한 앞날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보며 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아들을 그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맞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참혹한 예루살렘의 비극이 그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여 살리기 위하여 내 아들을 내어 주었다. 그런데 네가 거부하고 내치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내치고 짓밟아 죽인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예루살렘의 비극은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한 자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예수 믿으라는 협박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놓고 제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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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이지만 예수 믿고 나서 제게 두 가지 의문이 생겼더랬습니다.
그 한 가지는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다 지시고 대신 죽으셨다면 계속 죽어 계셔야지 어째서 부활하셨는가? 예수님이 도로 살아나셨다면 죄인들이 도로 죽어야 하는 거 아닌가?”였고,
다른 하나는 “어째서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하시는가? 예수님이 수 십 억 인구 중 하나일 뿐인 나를 위하여, 그것도 2천 년 전에 죽으셨다고 말씀하는 것은 도무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걸.”이었습니다.
이 의문들을 어떻게 해결했느냐고요?
사실 이 두 가지의 의문을 해결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참 많이 생각했지요, 아무도 안 가르쳐 주었으니까요.

오늘은 첫 번째 의문에 관하여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대신 예수님이 죽으셨다면, 그래서 우리가 살려면 예수님이 계속 죽어 계셔야 한다는 생각은 수학적 사고였습니다.
이를테면 “맞바꾸기, 가감셈법”인 셈이지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셨다면, 그런데 죽으셨던 예수님이 도로 사셨다면 우리가 도로 죽어야 맞다는 단순한 셈법 말입니다.
그 수학적 생각이 잘못 된 것이라는 것을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우선 예수님이 계속 죽어계셔야 우리가 그 대가로 안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죄와 사망, 저주의 권세가 계속되는 경우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죄와 사망, 저주를 근원적으로 깨부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박살이 난 죄와 사망의 권세가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 붙잡아둘 수가 없는 것이지요. 죄와 사망의 권세가 박살났으니 예수님의 부활은 당연한 것이지요.

또한 예수님의 화목제물을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과 저주를 무마하거나 사단에게 제공되는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사단에게 제공된 제물이라는 '사단배상설'을 가르치는 이단도 있다고 하더이다만....)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희생제물을 죽여 그 피를 들고 지성소로 들어갔습니다. 만일 그 희생제물에 흠이 있거나 대제사장 자신에게 부정이 있으면 그는 죽임당하고 살아나오지 못 합니다.
예수님은 죽으셔서 제물인 자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 제물에 흠이 있거나 하나님이 만족하지 못 하셨다면 우리의 죄도 해결될 수 없고 예수님도 살아나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 없고 흠 없는 예수님의 제물을 받으시고 아담 이래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제물을 기쁘게 받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모든 인류의 지를 사해 주시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실 수밖에 없고 예수님의 부활은 그 제사가 완전히 이루어졌고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단 한 번의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그것은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완전한 승리입니다.

하나님은 승리하신 예수님을 우편보좌에 앉히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 주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주님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부활절입니다. 주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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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9: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종려주일입니다.
누가복음 19장 41절부터를 보니까 가슴이 아픕니다. 왕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우셨습니다.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오셨는데, 사람들이 눈이 가리워서 알아보지 못 하여 비극을 당합니다.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NIV 영어성경을 보면 "because you did not recognize the time of God's coming to you." 하나님이 오시는 것을, 성자 하나님이 오시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을 네가 알지 못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원 후 70년,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피가 바다를 이루는 그 비극을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미래를 보시고 예수님이 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데 예루살렘을 그 당시의 예루살렘으로만 생각해야 할까요? 지금 우리 마음이 예루살렘이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도 눈이 가리워 알지 못 하면 예수님이 오셔도 우리의 영혼은 그 비극을 당할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이들은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기쁨으로 영접하는데, 어떤 이는 거부하고 비웃고 장난으로 여기고 조롱합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이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주지 않는다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고, 별 볼 일 없다고, 자기 맘에 안 든다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립니다.

우리는 죽어서 천국으로 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마음에 먼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 주님이 재림하실 때 천사들이 믿는 자들을 모은다고 합니다. 이 말은 성도들을 모아 천국으로 데리고 간다는 뜻도 되지만 이미 주님의 통치하심으로 천국이 된 성도들을 모은다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천국을 이루셨겠지요? 주님이 계시면 야러분의 마음은 천국입니다. 혹시 새끼 나귀를 타고 여러분의 마음 앞에 오신 주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보시면서 아, 이 사람은 나를 원하지 않는구나, 내가 들어갈 수가 없구나, 하고 슬피 우시지는 않겠지요?

이 종려주일, 우리에게 오신 주님을 향하여 노래하며 찬양하며,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나의 왕이여, 어서 오소서, 나를 다스려 주소서. 우리에게 목숨을 내어주시고 영원한 새 생명을 주신 우리의 왕, 우리의 구주, 예수님을 눈물과 감사와 사랑으로 영접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 원합니다.
이 봄날, 이 종려주일,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모셔 들여 봄날 꽃들처럼 기쁨과 향기로 가득한 천국, 하나님 나라를 여러분의 마음에 이루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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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이 가장 크다고 말씀하시고선 다시 천국에서는 세례요한이 가장 작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그헐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앞뒤가 안 맞는 말씀 같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성경은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입니다. 성경은 구원의 책입니다. 구약성경 전체가 여자의 후손, 메시아의 약속입니다. 양과 소를 잡아 태워드리는 구약시대의 제사는 속죄제물 주님을 예표하는 것이고,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도 오실 메시아에 관한 것입니다.
그 중 주님 오시기 700여 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광야의 소리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사40:3, 5)

그로부터 700여 년 뒤 세례요한은 약대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매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의 소리가 되어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세례요한은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다가 자기에게로 오시는 주님을 보고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 베풀 것을 요청하셨고 세례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성경이 예언한 구세주에게 세례를 베푼 엄청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헤롯왕이 동생 빌립의 아내를 취한 것을 비판하였다가 옥에 갇히게 되고 헤롯의 아내가 된 헤로디아의 딸이 연회에서 춤을 추어 헤롯왕을 기쁘게 하였고 헤롯왕이 상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주겠다 하자 헤로디아는 딸에게 세례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달라고 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목이 잘려 죽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례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참 이상하지요. 주님께서는 왜 세례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크다고 하시고서는 금방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 중 메시아를 직접 본 선지자는 세례요한뿐입니다.
신들메 풀기도 감당할 수 없다 한 요한은 황송하게도 그 분에게 세례까지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선지자, 모든 사람 중에서 세례요한이 가장 큰 자입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가장 큰 자일까요?
당연합니다. 천국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제일 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친구들을 집으로 초청했다 칩시다. 여러분은 가장 친하고 제일 잘 아는 가까운 친구를 옆에 앉힐 것입니다. 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서 얼마나 크냐는 그리스도와 얼마나 잘 아느냐, 예수님과 얼마나 가깝고 친밀하게 아느냐로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를 아는 지식에 자라가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선지자 중에서는 최후의 선지자로 메시아를 직접 만났으며 그 분에게 세례를 베푼 세례요한이 따라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이루시는 구원사역을 보지 못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시는지, 어떻게 온 세상 죄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는지 전혀 알지 못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잡혀서 옥에 있을 때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3) 하고 여쭈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어떻게 구원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것인지,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도대체 왜 광야의 소리로 외친 세례요한 자신이 옥에 갇혀 죽게 생겼는데도 구출해내지 못 하시는 건지, 도대체 구세주 그리스도가 맞긴 맞는지 이해가 안 되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생명의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구원사역이 이루어지는 것인지나 십자가의 죽으심에 관하여는 전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실 것인지 끝내 모른 채 그만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청구에 의하여 헤롯왕에게 목 잘려 죽임 당하고 말았습니다. 요한으로서는 참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례요한이 듣지 못 한 것, 보지 못 한 것을 듣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모든 인류를 구원하셨는지, 어떻게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는지 신약성경을 통하여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왜 그렇게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마음 가운데 모시고 살며 늘 기도하고 찬송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국에 가면 세례요한보다 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천국에 가면.......,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보다 작은 세례요한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약대털옷을 입고 가죽띠로 허리를 동이고 있을 테니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작은 세례요한이 우리에게 물을 것입니다.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말씀해 주세요. 도대체 우리 주님이 어떻게 구원을 하셨나요? 저는 그것이 너무 궁금했는데, 그놈 헤롯이 내 목을 잘라가는 바람에.....“

여러분은 그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세례요한님, 주님은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세례요한이 되물을 것입니다. “아니, 왜요? 주님이 왜 죽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세례요한은 왜 예수님이 로마군대를 단숨에 쳐부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지 않으셨는지, 왜 그렇게 맥없이 십자가에 죽으셨는지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세례요한에게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만 했는지, 예수님이 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셔야 했는지 설명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주님이 어떻게 죽으셨는지도 물을 것입니다.

“주님은 은 삼십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팔렸습니다.
가야바 대제사장 집에서 밤새 맞고 침뱉음 당하고 곤욕을 당하셨습니다.
유월절 아침에 빌라도 총독에게 끌려갔습니다.
채찍질을 당하여 피투성이가 되셨습니다.
로마군병들은 주님께 가시관을 씌우고 희롱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골고다 언덕으로 끌고 가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군병들은 그 아래에서 주님의 겉옷을 제비 뽑았습니다.
사람들은 머리를 비웃으며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신을 구원하여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 뜨거운 태양 아래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목이 마르다 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소리 지르시고 '다 이루었다.' 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하늘이 캄캄해지고 지진이 났습니다. 성전휘장이 둘로 나뉘어 찢어졌습니다.
로마군병은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고 주님은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그렇게 죽으셨고 그러나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고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죽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울면서 그 이야기를 들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묻고 또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세례요한과 같이 울면서 그 이야기를 또다시, 또다시 되풀이해야 할 것입니다.
자, 여러분, 준비 되셨습니까?
세례요한 만날 준비.

* 여러 해 전 미국교회에서 이 내용으로 짧게 영어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준비되었냐고 물었을 때 미국교회 성도님들이 일제히 대답했습니다, "Yes, we are!"
(똑같이 한 목소리로 외쳐서 깜짝 놀랐습니다. 점잖은 한국인 성도님들과는 다르더군요. ^^)

여기 앉아있는 저나 여러분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 끔찍한 박해의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고, 공산치하나 이슬람국가나,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오지나, 옛날 우리 선조시대, 복음이 전하여지지 않은 시대에 태어나지도 않았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린 덕분으로 예수 믿고,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자유로운 나라에서 마음 놓고 예수 믿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러나, 한 편 생각해보면 암만 생각해도 그 끔찍한 박해를 받았던 신앙인들과 순교자들이 받을 생명의 면류관이나 상 같은 건 우리에게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냥 이렇게 평온하게 예수 믿다가 조용히 천국에 가서‘아이고, 미안해라,’한 구석에 가만히 찌그러져 있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고난 받을 자신은 도저히 없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고전 10:13)”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이 연약한 것을 미리 아시고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하셨는가 싶어 감사하기도 합니다. 생명의 면류관이나 주님의 칭찬이나 상급이 없어도 편하게 예수 믿다가 천국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놓고 보니 또 공짜로 구원 받는 것이, 다른 이들은 고난을 받는데 혼자 편하게 구원 받는 것이, 또 나 위하여 십자가 지신 주님 뵙는다는 것이 너무 죄송합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로마시대와 같은 무서운 박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와 같은 위협, 공산당이 들이대는 총칼, 전기고문, 물고문, 손톱을 뽑고 눈을 뽑고, 기름가마에 튀기는 그런 박해를 당한다면 이길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려 목사인 저도 자신 없습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죽은 다음에야 어찌 되든지 지금 당하는 이 고통을 견딜 수 없다, 우선 살고 보자고, 그런 무서운 박해를 당한다면 저는 이길 자신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다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고문과 박해를 당한다 해도, 바로 눈앞에, 발 앞에 한 쪽은 유황불, 그 속에서 울부짖는 끔찍한 지옥이 있고, 한 쪽에는 아름다운 낙원, 주님이 바로 내 앞에서 두 팔을 벌리고 나를 향하여 오라 하시는 광경이 펼쳐진다면, 내가 만약 주님을 부인한다면 그 끔찍한 고문은 멈추겠지만 바로 그 보다 더 끔찍한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되고, 만일 내가 그 끔찍한 고통을 받으며 숨을 거둔다면 주님이 나를 안아 주시고 위로하시고 칭찬하시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며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 눈앞에 빤히 보인다면, 그렇다면 무슨 끔찍한 고통이라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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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별다른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적 비교, 즉 남과 비교하여 자신에게는 죄가 덜 하다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결단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저도 여기 계신 여러분도 다 죄인입니다. 찬란한 빛이 비추이면,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깨끗해 보이는 공기 중에 아침햇살이 비추이면 온갖 먼지들이 가득한 것을 보게 되듯 예수님 앞에 서면 모두가 부끄러운 죄인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기세등등하게 그 여인을 끌고 온 사람들이 하나 둘 다 물러갔습니다. 그들은 빛 되신 예수님 앞에서 먼지처럼 피어오르는 자신들의 죄를 본 것입니다. 끌고 온 사람들이나 끌려온 사람이나 예수님 앞에 서니까 모두가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 여자를 심판하셨다면, 거기에서 심판이 이루어졌다면, 그 여자 뿐 아니라 동시에 그 자리에 그 여자를 끌고 나온 사람들도, 구경꾼들도 다 한꺼번에 심판으로 죽어야 했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그 여자가 대답하였습니다. “없나이다.” 그렇습니다. 고소는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죄인들끼리 무슨 고소이겠습니까?

우리가 간음죄 안 짓는다고 구원 받는 것 아닙니다. 남보다 죄를 덜 지어서 구원 받는 것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 앞에 나오는 자가 구원 받는 것입니다. 제 발로 걸어 나왔든 억지로 끌려 나왔든 주님 앞에 나오는 자가 구원 받는 것입니다. 그 간음한 여자는 끌려나왔지만 주님 앞에 나왔기 때문에 산 것입니다. 자기 죄를 내어놓고 엎드려 주님을 바라보는 자가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무슨 죄를 지었든 간에 말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주이시면서 왜 심판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그 죄악을 예수님 자신이 담당하실 것을 예정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모든 죄악을 예수님 자신이 지시고 대신 죽으실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상 죄를 다 지고 가셨다고 모든 사람이 무조건 다 용서 받고 죄 사함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야만 합니다. 나오지 않는다면, 빛을 피하여 어둠 속에 엎드려 있다면, 죄를 자기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둔다면, 그 죄악은 자기가 책임지고 지고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대속자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도피성입니다.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간음한 여인도 사함 받았는데 왜 두려워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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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장 1-16절]
1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 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5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하고 
6 제 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 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

좀 길지만 본문을 모두 적었습니다. ^^
‘포도원 비유’로 잘 알려진, 신자라면 대부분 잘 아는, 유명한 성경내용입니다.
이 포도원 비유는 왜 포도원 주인이 아침 일찍부터 포도원에서 땀 흘려 수고한 품꾼과 해질녘에 와서 일도 안 한 품꾼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느냐 하는 문제의 논쟁거리이기도 하고,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이냐 하는 의문을 불러오는 성경내용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선 흔히 ‘포도원 비유’, 혹은 ‘포도원 품군의 비유’라고 부르는 것이 문제 있다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1절을 읽어 보십시오. “천국은.......집주인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천국이 무엇과 같다고요? 집주인과 같다고 되어 있습니다. 포도원도 아니고 포도원 품군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확하게 ’포도원 주인의 비유‘라고 해야 합니다. 천국이 포도원 주인이란 말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입니다. 주님입니다. 포도원(천국)을 소유하고 품삯(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분입니다. 포도원이 천국이 아니고 그 분이 바로 천국이란 말입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천국이 어디에서 가까이 오고 있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천국입니다. 천국이신 주님이 가까이 오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 천국 되신 분이 포도원을 열어놓고 이른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온 종일 돌아다녔습니다. 생명 없이 헤매는 자들에게 품삯 한 데나리온, 아니 생명을 나누어주려고 헤매고 찾아다녔습니다.
그 주인의 애타는 심정도 모르는 채 품군들은 온종일 포도원 안에서 땀 흘려 일하고 나서 더 받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해질녘에 아슬아슬 포도원에 들어온 품군부터 한 데나리온씩 품삯, 아니 생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일찍 와서 온종일 일한 품군들이 주인을 원망했습니다. 그것은 주인을 악한 자로 만들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의 품삯은 포도원에서 땀흘려 일한 수고의 대가가 아니라 부르심에, 애타게 찾으심에 응답한 대가였던 것입니다. 일찍 오든 늦게 오든 오는 자에게는 다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주인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라는 대목도 다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포도원에 들어온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주님께 귀한 믿음의 순서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먼저 온 자들이 수고한 대가를 기대하며 더 받기를 원한다면 이는 생명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수고한 대가로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구원을 자신의 노력과 수고로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해질녘에 아슬아슬 들어와 한 데나리온을 받은 품군은 황공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식량이 없어 꼼짝없이 굶어야(죽어야) 하는 자신을 그 늦은 시각에 불러 품삯을 주는 포도원 주인에게 그는 얼마나 감격해 하고 감사해 할까요? 그 감격과 감사가 포도원 주인에게 귀한 것입니다. 먼저 와 일했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품군 보다 나중 와 감격하고 감사하는 품군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그것이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자’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도록 신앙생활 했다고 주님께서 더 귀하게 여기실 거라고 생각했다면 착각입니다. 무익한 종이라 여기십시오. 오직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흘리신 피로 구원 받습니다. 그 감격과 감사를 잊지 마십시오. 그것이 먼저 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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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이 그 몸을 십자가에서 부수어 나누어주신 생명, 곧 하늘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주님은 그 밤 제자들에게 떡을 나누어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살이다.”
포도주를 나누어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피다.”
세상 끝날까지 이를 기념하며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살과 피를 믿음으로 받아먹는 자는 주님의 생명을 가졌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먹은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받은 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가졌으니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는 세상이 이기지 못 할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피, 그 생명을 받아들였으니 남편으로부터 생명의 씨를 받은 것이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자녀를 낳아야 합니다. 또 그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그 받은 생명의 씨앗, 곧 복음으로 전도하여 낳은 복음의 자녀를 말입니다.

-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은 자는 포도나무 되신 그리스도에 붙은 가지가 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는 자는 밖에 버리어 말라질 것이요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자는 풍성한 생명과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 교회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구원을 얻었다고 좋아라, 제 갈 길로 흩어지는 건 우스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먹은 자들은 당연히 다시 모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릿돌이 되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성도들은 그 안에서 영양을 보급 받으며 성장해야 합니다. 또 갓 태어난 자와 연약한 자를 양육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팔을 먹은 자는 팔이 되고 발을 먹은 자는 발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각자의 은사요 사명입니다. 교회를 떠난 신앙생활은 불타는 장작 하나를 꺼내놓으면 꺼지듯 곧 꺼질 것입니다.

-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렇습니다. 교회는 큰 비밀입니다. 

(마태복음 16:18-19)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요한복음 15:4-7)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에베소서 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에베소서 5: 31-32)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코로나를 이유로 교회에 나가지 않는 분들이 더러 계신 듯 합니다.
코로나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에 출석하라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코로나가 우리와 당신의 예배를 무너뜨리고 교회를 무너뜨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코로나를 이겨내고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 주님이 머리이신 교회, 주님의 신부가 되는 교회에 우리는 속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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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도 무서운 죄가 있습니까?
‘나 같은 사람은 절대 천국에 갈 수 없어. 하나님은 절대로 나를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나는 지옥에 가야 마땅해......’
그렇게 영원히 용서받지 못 할 것 같은 불안이 혹시 당신의 가슴 속에 있습니까?

인류최초의 살인사건은 동생 아벨을 쳐 죽인 가인에 의하여 저질러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을 죽이지 않으시고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떠는 가인에게 오히려 표를 주어 보호하십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창세기 4장 13-15절)

절대로 용서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죄인인 가인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최초의 살인자, 그것도 동생을 죽인 극악한 가인 같은 악인이 용서를 받는다면 이 세상에 용서받지 못 할 죄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이 용서는 먼 훗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 아담으로부터 세상 끝날까지의 모든 인간들의 죄를 한꺼번에 담당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담보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로 이미 작정하시고 그 피로 가인을 미리 용서하신 것입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해결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인을 용서하신 것은 어떠한 죄인도 용서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죄인이라도 그 죄를 들고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하고 하나님 앞에 울며 나오는 자는 다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용서 할 수 없는 죄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인을 용서하심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저 말고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십자가 아래 나아와 울며 엎드리십시오.
가인이 용서를 받았는데 당신이 왜 용서받지 못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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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 이걸로 횡설수설 좀 해볼까 합니다. ‘일천번제’ 바로 다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솔로몬의 지혜가 솔로몬이 원래 가졌던 지혜가 아니라 일천번제를 드린 다음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였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열왕기 저자의 의도일 것입니다.
창기 두 여자가 한 집에서 각각 아들을 낳았는데 한 여자가 잠자다가 자기 아들을 깔아서 죽이고 다른 여자의 아들과 바꿔치기 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다투다가 솔로몬 왕 앞에 나와 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으로 다스려지는 이스라엘에서 창기라면 가장 비천한 죄인의 신분인데 감히(?) 왕 앞에 나와 재판을 받습니다. 우리도 신분의 고하나 귀천과 관계없이 이와 같이 누구든지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요즘 세상 같으면 DNA검사로 간단히 판별할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게 있었을 리 만무하지요. 그런데 우리 잘 아는 바와 같이 솔로몬은 칼을 가져오게 한 다음 아기를 둘로 갈라서 두 여자에게 나누어주라는 판결로 진짜 어머니를 알아내는 재판을 합니다. 그리고 이 지혜로운 판결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솔로몬에게 있는 하나님의 지혜에 두려워 떨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다음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는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그리고 그가 누린 막강한 권세와 평화와 부귀영화가 부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솔로몬의 재판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메시지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1. 솔로몬을 통하여 전지하신 심판의 하나님을 보여 주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끔찍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주가 되려면 전지(全知)하셔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넓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다 아시고 판단하시지 못 한다면 하나님은 심판주가 될 수 없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악(惡)이 지배하고 악행(evil doing)과 범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매우 유용한 도구와 무기가 될 것입니다. 착한 자는 당하기만 할 것이고 나쁘고 교활하고 못 된 자들은 항상 도덕질하고 빼앗아서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억울한 일은 보상받지 못 하고 악한 자들은 처벌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합니다. 이사야서 40장 27절은 말씀합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하나님이 너의 사정을 모르시고 너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 하실 거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명철은 한이 없으시다.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신다.”

2. 심판은 칼로 나누어 하는 것이다.
솔로몬 왕은 칼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심판은 칼로 하는 것입니다. 칼로 쪼개고 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합니다(히 4:12). 주님의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옵니다(계1:16).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 그 터럭의 3분의 1은 성 안에서 불태우고 3분의 1은 성 밖에서 칼로 치고, 3분의 1은 공중에 뿌려 흩어라, 내가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마지막 날에는 악인과 선인이 나누어질 것입니다. 좌편과 우편으로 나뉘어질 것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와 그렇지 못 한 자들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은 피할 자가 없습니다.

3.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지혜와 다르다.
솔로몬이 칼로 아기를 나누라고 명령하였을 때 주변의 신하들이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였을까요? 혹시 왕이 미쳤다고,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요?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이 세상의 지혜로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우고 어린아이들에게는 열려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4. 사랑이 이긴다.
솔로몬의 재판에서 아기의 진짜 어머니는 사랑으로 이겼습니다(승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이깁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믿음, 소망, 사랑, 세 가지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 말씀합니다. 주님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 없는 자는 이기지 못 할 것이며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 할 것입니다.

5. 참된 사랑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자신의 좋아하는 감정과 착각합니다. 좋아해서 만나고 결혼했다가 싫어지면 갈라서고 병이 들거나 화상이라도 입어 모습이 달라지면 떠나갑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신의 필요에 따라 상대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자기를 위한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를 위한 사랑, 상대중심의 사랑입니다.
진짜 어머니인 여자는 칼로 아기를 쪼개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닌 여자에게는 자기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아기가 살든지 죽든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진짜 어머니의 사랑은 아기를 향한 사랑이었고, 거짓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 아니 이기심이었던 것입니다.

6. 하나님의 사랑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하여 인간을 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또 말씀하기를 우리는 사나 죽으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우리 인간을 지으셨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중심이거나 이기심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을 위한 사랑, 하나님 중심의 사랑이었다면 인간이 범죄하여 죄인이 되고 진노의 자녀가 된 순간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에게서 돌아섰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대로 죄인들을 싹 쓸어버리고 다시 지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이 된 인간을 포기하거나 내버리지 못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긍휼로 불타는 듯 하였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사랑입니다.

7. 진퇴양난, 절체절명의 갈림길,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
자, 오늘 말씀은 솔로몬왕이 칼로 아기를 자르라 하였지만, 좀 바꾸어서 그 창기 두 여자가 아들을 놓고 양쪽에서 잡아당기기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서로가 죽어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진짜 어머니는 압니다. 자기가 아들을 놓아버린다면 저 무지한 여자가 오늘밤에 그 아들을 깔아뭉개서 죽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어도 뺏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 여자는 아기가 찢어져도 안 놓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손을 놓는다면 아들은 저 여자에게 깔려죽을 것이고, 안 놓는다면 이 자리에서 찢겨서 죽을 것입니다. 아들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이라면 이 경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아들은 죽는 수밖에 아무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을 절망이라고 합니다.
우리 죄인들이 그랬습니다. 사단의 손아귀, 사망의 권세에 붙잡혀 끄집어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그 죽음의 자리에, 십자가에 대신 내어주셨습니다.
십자가, 그것은 솔로몬의 칼 보다도 더욱 기이한, 천사도 경악한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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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별처럼요? 말도 안 돼. 못 믿겠어요.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라고 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증거는 쪼갠 고기, 곧 십자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그 어린양은 쪼개어지고 그의 살과 피는 하나님이 가리키신 밤하늘별처럼 흩뿌려질 것입니다. 밤하늘 별은 독생자의 살과 피, 그리고 구원받은 모래알 보다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 아브람의 수많은 영적후손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리키신 밤하늘별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 원대한 우주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광활한 우주를 가리키신 것입니다. 우리 사는 이 지구, 우리 태양은 우주 한 구석 티끌일 뿐입니다. 우리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만 해도 지름이 10만 광년이나 되는 거대한 별무리이고 은하계에는 태양과 같은 별들이 2천억 개나 됩니다. 그런데 우주 안에는 은하계와 같은 갤럭시(Galaxy)들이 또 천억 개나 됩니다.

그럼 우주공간에 태양과 같은 항성만 해도 몇 개나 될까요? 1천억 곱하기 2천억 하면 얼마나 되지요? 어떤 우주과학자가 관측 가능한 우주의 별을 계산해 보았답니다. 700해. 지구상의 모든 해변, 강, 사막의 모래 알갱이 수 보다 많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끝 간 곳 없이 드넓은 우주를 티끌같이 작은 이 지구에 살면서 쳐다나 보라고 밤하늘 장식용으로 만드셨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그 후사들에게 상속재산으로 나눠주시려고 만드셨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열 므나를 남겼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라. 너는 다섯 므나를 남겼으니 다섯 고을을 다스리라.” 아니, 세상의 마지막 때 이 땅 위에 고을이 어디 남아있어 고을을 다스린단 말입니까?

그 고을들은 어쩌면 은하계, 안드로메다 성운 같은 거대한 갤럭시들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드넓은 우주공간의 1,000억 개, 2,000억 개 은하계, 성운 가운데 열 개, 다섯 개씩을 받아 다스리는 것이지도 모릅니다. 그 날이 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 우주를 상속받아 다스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스릴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날 그 날을 고통 가운데에서 탄식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로마서 8장). 그리하여 끝 간 데 없는 광활한 우주공간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나님의 찬송과 영광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가리키며 보여주신 밤하늘별은 하나님의 그 꿈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십자가 너머의 그 꿈, 하나님의 원대한 그 꿈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우주공간 가운데 티끌처럼 작은 이 지구별에서 100년도 못 살고 안개처럼 사라지는 허망한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할 영광의 자녀들입니다.
당신의 가슴 속에 그 꿈이 있습니까?
황당한 상상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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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셨으면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고 증거를 요구합니다. 참 당돌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도 믿지 못 하는 악하고 약한 존재인가 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도 눈에 보이는 증거, 예언, 계시 같은 것들을 구하고 찾아다닙니다. ‘나는 여호와로라.’ 하시면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신 하나님께는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믿음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화도 안 내시고 아브람에서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아브람이 그것들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갭니다. 비둘기는 쪼개지 않습니다. 솔개가 내릴 때 아브람이 쫓습니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들고 캄캄함이 임한 가운데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브람의 자손들이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하고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은 자빠져 자고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리고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납니다. 그리고 그 날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 후손이 애굽 강에서 유브라데 강까지의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증거를 요구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증거는 ‘쪼갠 고기’였던 것입니다.

우리 알다시피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의 이야기요 약속입니다. 예표입니다. 성경 전체가 예수님께 관한 책입니다. 그렇다면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삼년 간 공생애를 마치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하나님의 아들 아니겠습니까? 아브람이 그 손으로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을 쪼갠 것처럼 아브람의 후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쪼갤 것입니다. 횃불이 그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났습니다. 쪼갠 고기가 하나님이 횃불로 통과하신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쪼갠 고기’가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 오직 그 한 길이 될 것입니다.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John 14:6)
하나님은 그렇게 아들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복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그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밤하늘별을 가리키신 것처럼 십자가에서 쪼개진 아들의 몸, 그 살과 피, 그 생명은 온 땅에 밤하늘별처럼 산산이 부서져 흩뿌려질 것입니다. 그렇게 온 세상 모든 죄인들을 구원할 것입니다. 또한 밤하늘별은 그 살과 피, 생명을 받아먹고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 아브람의 후손일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밤하늘별을 보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내어주사 십자가 위에서 산산이 부서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입니다.

밤하늘별을 가리키실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브람은 밤하늘별처럼 오실 후손을 보고 기뻐하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가슴은 십자가의 고통과 산산이 부서져 흩뿌려질 아들의 살과 피로 찢어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그 고통 너머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구원받을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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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가리켜 보여주신 그 밤하늘 별은 아브람의 무수한 육신의 후손들이 아니었습니다. 밤하늘 별은 아브람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이를 정확히 지적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후손’이라고 말씀하신 그 ‘후손’은 복수명사 ‘후손들’이 아닌 단수명사 ‘한 후손’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실 때 아브람도 이상하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아니, 하나님, 왜 ‘후손들’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후손’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기초문법도 모르십니까?” 하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러니 아브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 곧 ‘오실 예수’를 믿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속으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믿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니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아, 내게서 날 후손들 가운데 언젠가 오실 메시아, 그 메시아가 저렇게 밤하늘 별처럼 되는 거로구나.” 그렇게 믿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의”로 여기실(인정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만일 아브람이 따져서 ‘후손’이 아닌 ‘후손들’의 약속을 받아내었더라면 절대로 의로 여기심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로 여기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브람이 ‘후손’의 약속, 곧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자 하나님께서는 “나는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냐?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여호와란 말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내실 때 아브람에게 하신 '가나안 땅을 주시고 후손이 번성하며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실' 이 약속은 하나님의 이름을 건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었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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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5장 1절) “너는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람이 왜, 무엇을 두려워했단 말입니까? 아브람이 얼마나 두려워했으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셔야 했을까요? 아브람이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자신에게 후사가 없다고 대답합니다. 아브람이 두려워한 것은 후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후사가 없는 것이 왜 그렇게 큰 두려움이 되는 것일까요?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인간 뿐 아니라 짐승도, 물고기도, 벌레도, 나무도, 꽃도, 모든 동식물...., 산 것들은 다 죽습니다. 그런데 씨를 퍼뜨리고 새끼를 낳습니다. 그렇게 자신은 죽지만 생명은 이어져 내려갑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때 모든 사람들은 사람도 그렇게 후손을 남기는 것이 생명을 이어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후사가 없는 것, 대가 끊어지는 것이 죽음 보다 더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아브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로부터 자신을 불러내셨고 함께 하시는데도, 그 하나님이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데도 후사 없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화를 내시지도 아니하시고 꾸지람도 아니하십니다. “아브람아, 다메섹 엘리에셀이 네 후사가 아니다. 네 몸에서 나는 자가 네 후사가 될 것이다.” 말씀하시고 아브람을 이끌어 밖으로 나가 밤하늘의 별을 보여주십니다. “저 별들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밤하늘의 별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의 가슴속엔 아직도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라면서 여름날 밤 쳐다보던 밤하늘, 모래알처럼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밤하늘 별들이 꿈처럼 남아 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믿으매 이를 그의 의로 여겨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좀 따져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네 후손이 저 별과 같을 것이다.”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이 어째서 의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따져봐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후손이 별처럼 많아지는 것이 복입니까?
물론 복이겠지요. 특히 아들 낳기 원하고 자손이 번성하기 원하는 한국인들에겐 정말 큰 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의 입장에서 본다면, 만일 그 자손들이 예수님을 모르는 육신의 자손이라면, 진노의 자녀, 멸망의 자식들이라면 번성한 자손은 외려 끔찍한 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라면, 구원받은 후손이 아니라면,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면 후손이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많아진다 해도 그것은 결코 복이 아닐 것입니다. 그 후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죽고 결국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참 된 복은 영원한 생명으로만 가능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불러내시면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신 그 복은 후손이 번성하는 그런 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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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영생해야 한다. 반드시 영생하는 존재여야 한다.
왜 인간은 영생하는 존재여야 하는가? 하나님 때문이다.
우주만유, 끝없이 광활한 우주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주만유를 인식하는 존재가 없다면 광활한 우주가 무슨 소용인가?
하나님을 인식하는 존재가 없다면 하나님 자신은 또 무슨 존재의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이 잠시 생겼다 사라진 다음 하나님 홀로 수백억년 수천억년..., 영원히 혼자 우주만유를 즐기시겠는가?

하나님에겐 하나님을 아는 존재가 필요하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으셨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이사야 43:21)”
그러므로 또한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과 함께 영생하는 존재여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으로’ 지으셨다. 그러나 인간은 뱀에게 속아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인이 되었으며 그 생명은 멸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할 수 없었고 원수 사단마귀에게 헌납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사랑을 버리지 아니하셨고 포기하지 아니하셨고 사랑하는 그의 피조물을 구원하고 회복시키기 위하여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엄청난 희생과 대가를 치르셨다.

이제 인간은 죄를 벗고 울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 사랑에 감사하며 영원히 찬양하는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울며 돌아오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고 면류관을 씌워 아름답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하나님의 나라가 온 우주에 펼쳐질 것이다.
하나님의 후사에게 어찌 상속재산이 없겠는가?
하나님은 우주만유를, 1천억 개의 항성을 가진 은하계, 2천억 개의 갤럭시, 끝없이 광활한 우주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나누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주셔서 우주를 다스리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우주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웅장한 찬양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사야서 43장 21절 말씀은 영원히 성취될 것이다.

해피 뉴이어! 할렐루야!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참 된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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