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종교는 필요 없습니다.
안 그래도 짧은 인생, 종교라는 굴레를 쓰고 살 일 있습니까?
종교에 매여 즐기지도 못 하고 사는 것보다 불쌍한 인생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 진리요 사실입니다.
만일 그것이 진리요 사실이라면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습니다.
믿으면 살 것이요 믿지 않으면 죽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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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와 또 모든 혹성들이 수십 억 년 한결같이 태양을 돌고 있는 것은 변함없는 인력 때문입니다.
인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무슨 줄 같이 잡아매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끌어당깁니다.
아무리 먼 거리에 있는 천체에도 만유인력은 작용하며 어떠한 별이나 물체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인력은 사라지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고 변함도 없습니다.
전기자기력은 중간에 철판 같은 것을 집어 넣으면 차단됩니다.
그러나 인력은 어떠한 장애물이나 다른 별이 중간에 끼어도 차단되지 않습니다.
만일 인력이 가로 막히거나 차단될 수 있다면
지구와 태양 사이에 달이 끼어들어 개기일식이 일어날 때
그 순간 지구는 태양으로부터의 인력을 잠시 덜 받게 되어 흔들거려야 합니다.
반대로 지구가 태양과 달 사이를 가로막아 개기월식에 일어날 때는 달이 출렁, 태양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해야 합니다.
만일 인력이 차단될 수 있다면
우리는 인력차단판을 설치해놓고 그 위에서 하늘높이 뛰어 오르고 그 위에서 쉽게 로켓도 쏘아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습니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인력을 차단하거나 그 강도를 변화시키거나 그 방향을 굴절시킬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인력이 잠시라도 그 세기가 변하거나 방향이 휘거나 끊어졌었더라면
지구와 또 모든 혹성들은 이미 오래 전에 태양으로부터 튕겨져나가 흩어져 우주의 미아가 되어 제멋대로 가버렸을 것입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잡아매는 줄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 순간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서 끊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랑의 강도가 변한 적도 없습니다.
휜 적도 없고 방향이 바뀐 적도 없습니다.
만일 잠시라도 그랬더라면
우린 이미 옛날에 하나님으로부터 튕겨져 나가 뿔뿔이 먼지조각처럼 흩어지고 허무와 멸망으로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이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를 변함없이 붙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띠, 사랑의 매는 줄 안에서 우리는 왜 불안해 하고
그 사랑의 띠로 하나 되지 못 하고
서로 사랑하지 못 하고 다투는 것일까요?

새해는 우리 모두 사랑의 매는 줄로 더욱 견고히 서는
복 된 해 되기 원합니다.
해피 뉴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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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 11월 11일,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와 플리머스에 내린 102명의 청교도들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신대륙의 고난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 해 겨울을 넘기며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굶주림과 추위를 이기지 못 하고 죽었다. 

1903년 1월 13일, 상선 갤릭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호놀루루에 도착한 조선인 사탕수수 노동자도 102명이었다. 1902년 12월 23일 제물포항을 출항하여 요코하마를 거쳐 하와이에 오는 그 배 안에서 인천 내리교회 교인이었던 김이채, 안정수 두 사람이 전도를 하고 성경을 가르쳐 호놀루루에 도착할 때는 절반 넘는 사람들이 감리교인이 되어 있었고 그들은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로 고난의 사탕수수 노동자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들에게 지급되는 일당은 남자는 하루 65센트, 여자는 50센트였고 아침 해뜰 때부터 저녁 해질 때까지 그들은 '루나'라고 불리는 십장의 채찍질을 당하며 고된 일을 해야 했다. 
그 해부터 1905년까지 3년 동안 하와이로 온 사탕수수 노동자의 수는 7,200명이 넘었다. 
3년의 계약기간이 끝난 다음 그들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계속 일할 것인지,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고 수천 명의 조선인 사탕수수 노동자들이 다시 쿠바로, 멕시코 유카탄 반도로, 그리고 캘리포니아 철도노동자로 옮겨갔다. 
이것이 한국인의 최초 미국이민이다. 
하와이의 그 열악한 사탕수수 노동자의 삶 가운데서 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자금을 모아 상하이 임시정부로 보냈고 수십 개의 교회를 세웠다. 

밧데이의 사탕수수 노동자들은 대부분 아이티로부터 온 불법체류자들이다. 2010년 1월 13일에 발생한 아이티의 지진은 10만명인지 30만명인지 알 수 없는(공식발표는 16만명이라고 하지만 정확한 통계는 없다고 한다) 희생자를 내었고 아이티는 회생이 불가능한 피해를 입었다. 
그 때 국경을 넘어 도미니카로 온 아이티인들은 도미니카 국민도 아니고 자녀를 낳아도 출생증명도 신분도 없다. 끝이 안 보이는 드넓은 사탕수수 밭 군데군데 마을을 이루고 사는 그들의 숫자는 100만 명을 헤아린다는데 서류나 신분이 없으니 정확한 통계도 없다고 한다. 

그들은 하루 3~4 달러의 임금을 받는다고 한다. 사탕수수 재배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기계화 영농에 의하지만 도미니카 밧데이에서는 아직도 인력에 의존한다. 워낙 아이티 불법체류자들의 임금이 싸기 때문에 굳이 기계화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 기계화로 인력을 줄이면 아이티 불법체류자들의 처리가 골칫거리가 되기 때문이란다. 

사탕수수 대는 옥수수 대나 수숫대 보다 훨씬 껍질이 단단하다. 사탕수수를 베기 위하여는 꽤 길다란 칼을 휘둘러 사용한다. 그 칼을 온종일 휘둘러 사탕수수를 베었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밧데이의 사탕수수 노동자들은 그리 힘들게 일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 선교팀이 갔을 때 마을에는 노는 사람들이 많았고 나무그늘에 모여 한가로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기도 했다. 그들은 더러 오토바이도 타고 다녔고 더러는 말을 타고 다니기도 했고 핸드폰도 있고 더러는 자동차도 몰고 다녔다. 우리 선교팀이 온다고 교회로 모여 들어 함께 찬양도 하고 예배 드린 후 선교팀이 나누어주는 선물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다. 

밧데이의 드넓은 사탕수수밭을 바라보며 나는 116년 전의 조선인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 이민들을 생각했다. 만일 우리가 시간을 넘어 선교여행을 간다면 밧데이 보다 더 힘들고 열악했을 하와이 조선인 사탕수수 노동자 마을로 갔어야 하는 것 아닐까? 

왜 하필이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매사츄세츠로 온 청교도도 102명이고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로 온 조선인 이민자도 102명이었을까? 
왜 그들이 1903년 하와이에 도착한 날짜는 1월 13일이었고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발생일도 1월 13일이었을까? 
우린 어떻게 한국인으로써 미국에 와서 살면서 도미니카 밧데이의 아이티인들을 찾아가게 되었을까? 
과연 미국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해방이 되었을까? 6.25 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을까? 지금 이렇게 미국에 살면서 도미니카로 선교여행을 갈 수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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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부자가 실험을 했단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를 매일같이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돈 10달러씩을 나누어 주었단다. 
“아니, 이 돈을 왜 주십니까?” 
“그냥 드리는 겁니다. 받으세요.” 
시간이 흐르자 처음엔 돈을 받으며 어색해하고 쭈뼛거리던 사람들이 점점 자연스럽게 돈을 받게 되었고 나중엔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자는 돈 나누어주기를 중단하였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항의를 하였다. 
“왜 돈 안 주십니까?” 

생각할수록 빛은 얼마나 놀랍고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선물인가? 
몇 푼 돈 따위와 비기겠는가? 
이 세상에 빛이 있고 우리에게 그 빛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가? 
우리가 만일 볼 수 없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 빛이 있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감사할 줄을 모른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빛을 거두어 가신다면 어찌 될까? 

이 세상의 아름다운 빛을 모든 사람이 다 보는 것이 아니다. 
볼 수 없는 사람도 많다. 
빛을 보지 못 하는 사람은 불행이라 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빛을 보지 못 하는 사람이 불행이 아니라 빛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축복이다. 

소경이며 귀머거리였던 헬렌 켈러는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에서 하나님께서 사흘만 볼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인자한 설리번 선생님과 친구들의 모습, 들판과 숲, 나무와 풀과 꽃의 모습, 타오르는 저녁놀을 보아두고 기억 속에 담아두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본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 된 일인지. 

유명한 맹인가수 챨스 레이는 말년에 개안수술을 받더라도 빛에 노출된 시신경이 몇 분 안에 망가져서 도로 맹인이 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몇 분이라도 좋습니다. 도로 소경이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내 사랑하는 딸을 볼 수만 있다면, 몇 분이 아니라 몇 초만이라도 내 딸의 모습을 보고 내 기억 속에, 내 마음 속에 담을 수만 있다면 수술을 받겠습니다.” 

2004년 봄 강원도 험준한 산골짜기 6.25 전적지에서 52년 만에 발굴된 국군장병의 유골은 은박지에 꼭꼭 싼, 아마도 약혼녀이거나 아내였을 한 여인의 사진을 품에 안고 있어 보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 있었다.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격전지에서 틈틈이 그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그는 얼마나 그 여인을 그리워했을까? 

“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 모습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 모습을 내게 담아 둘 수 있다면.....” 
인간은 그렇게 서로의 모습을 보고,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빛이 있고 눈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만약에 빛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를 볼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고 존재로 나타날 수 없고 인생도 시간도 우주만유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빛이 있음으로 존재는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되고, 빛으로 존재를 인식하는 존재가 있음으로 비로소 만유는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렇다. 
우주는 우연히 생겨난 것이 절대로 아니다. 
우주는 우주를 보는 자에게 지음 받은 것이 분명하다. 
빛은 우주를 보기 위한 것이요 우주만유를 지으신 자와 우주만유를 인식할 수 있는 자를 위한 것이다. 
파동도 아니고 입자도 아닌, 과학으로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찬란한 빛은 하나님의 세계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우주만유가 그 인식해주는 자가 없다면 존재의 의미가 없다면 하나님 자신도 그렇지 않겠는가? 
하나님도 하나님을 인식해 주는 존재가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으로서의 존재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광활한 우주, 캄캄한 어둠 속에 알아주는 이 하나 없이 하나님 홀로 계신다면 하나님이신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빛이 있으라.", 
하나님은 가장 먼저 빛을 지으셨을 것이다. 
(창세기 1장을 보라. 하나님의 창조는 빛부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인식하고 기억하는 존재, 빛을 인식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만유를 함께 바라보면서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존재를 또한 지으셨을 것이다. 
거울처럼, 사진처럼 하나님을 인식 속에, 마음속에 담는 존재,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를 인식하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하나님은 그래서 만드셨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모습을 담은 존재가 얼마 살지 못 하고 죽기를 결코 원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어느 누가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금방 빛바래거나 삭아 없어지기를 바라겠는가? 
어느 누가 자신을 알아주고 교제 나누는 벗이 죽기를 바라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영원히 사는 존재로 지으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코에 직접 자신의 영원한 생기를 불어넣어 인간이 영원히 살도록 '생령'으로 만드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인간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였다. 
선악과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지워버리고 대신 하나님같이 된 자신을 담았다. 
자신의 심령 사진틀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모습이 담겨야 할 마음에 자신의 욕심과 죄악을 담음으로써 더럽혀지고 망가져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인간은 자신의 욕심과 물질, 명예와 쾌락을 담고 멸망길로 향하였고 결국 그런 것들을 조종하는 마귀의 모습을 담기까지 타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은 아들을 내어주셨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보내신 것이다. 
빛으로 보내신 것이다. 
(요한복음 1장을 읽어보라. 주님은 생명의 빛으로 오셨다.) 

그 목적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모습이 지워져버린 심령에 하나님의 모습을 다시 회복시키려는 것이었다. 
보이는 하나님,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 마음에 담으라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그 모습, 그 생명을 담은 자는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슬픈 일이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었으나 사람들은 깨닫지 못 하였고 그 빛 안에 생명이 있었으나 사람들은 그 생명을 얻지 못 하였다. 
사람들은 그 빛으로부터 얼굴을 돌렸고 그 빛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렸다. 

마지막 날 심판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빛, 그 모습이 담겨진, 그리스도의 빛에 다시 곱게 감광된 마음들을 거두시는 것일 것이다. 
보이는 하나님의 모습, 곧 우리를 살리시려 십자가에 죽으신 아들 하나님의 모습으로 다시금 심령을 회복한 자들은 거두시고 여전히 더러운 자신의 욕망과 마귀의 모습을 담은 타락한 영혼들은 소각로, 곧 영원히 타는 유황 불못에 던져 넣으시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아,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음 받은 인간의 영혼이 그 소각장에 던져졌는데 타 없어지지 않는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지금 그대의 눈은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가? 
지금 그대 가슴의 사진틀에는 누가 들어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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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게 있습니다. 지옥이 정말 있는가 의구심을 가지기도 하고 선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이 설마 지옥을 만들어 놓으셨겠는가, 진짜로 우리를 지옥에 던져 넣기야 하시겠는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또 지옥은 사단에게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단으로부터 뺏어내고 지옥으로부터, 사단의 권세로부터 건져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지옥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단으로부터 뺏어내고 지옥으로부터 건져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 무서운 심판을 면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피조물인 사단, 타락한 천사인 사단이 어디다 지옥을 만들 수 있을까요? 자기 맘대로 지옥권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천지만물, 우주만유가 하나님의 지으신 것인데 거기다 사단이 지 멋대로 지옥을 만들고 통치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지으신 거룩한 하나님의 세계 어느 한 구석도 하나님은 사단에게 허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또한 다른 종교의 신 역시 지옥을 만들거나 인간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심판은 있습니다. 지옥은 있습니다. 심판과 지옥은 있어야 하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지으신 거룩한 세계로부터 사단을 제거하고 악을 제하고 거룩하게 회복시키기 위하여 반드시 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원수, 사단의 무리를 영원히 가두고 징벌하기 위하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옥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거룩한 하나님의 세계를 사단이 영원히 더럽히고 누리도록 그냥 놔두실까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세계의 한 자락을 사단에게 제공하거나 할애하여 그 곳에 사단을 놔두거나 가두어 두실까요? 그렇게 되면 그곳은 사단의 악과 더러움으로 영원히 악하고 더러워질 것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거룩한 세계의 일부분을 포기하셔야 할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하나님의 세계 일부를 사단을 위하여 창조하여 제공하는 꼴이 될 것입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 지으신 거룩한 하나님의 세계의 단 한 조각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지옥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옥, 그곳은 모든 것을 정결케 하는 불(Fire)의 장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불이 아니면 그 장소가 더러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은 죄와 더러움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 타오를 것이고 그 불은 영원히 탈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죄를 허용하거나 인간만을 예외로 용서하실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하나님 자신이 죄로 더럽혀지고 악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는 반드시 징벌되어야 하고 그 대가는 지옥불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 죄를 지시고 대신 징벌을 받아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대신 형벌 받아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내어주신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그 방법 말고는 우리를 용서할 방법, 심판으로부터, 지옥으로부터 구원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구원의 방법입니다. 누구든지 이를 믿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삼으면 심판으로부터 죄로부터 면함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면 영원한 진노 아래 놓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속히 심판하지 않으시냐고요? 왜 진작 사단을 잡아 불지옥에 가두어버리고 우주만유, 하나님의 세계를 깨끗이 하지 않으시냐고요? 그렇지요. 당연히 그리 하셔야지요. 하나님도 속히 그리하고 싶으시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심판을 속히 행하셨다면 저나 당신은 존재하지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하나님의 세계를 보지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도 못 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당신을 위하여 오래 참으셨고, 지금도 많은 영혼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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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2:16-18)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성경의 오직 한 가지 주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입니다.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하나님의 약속이요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단 하나의 구원의 길, 생명의 길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 말고도 다른 구원의 길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독생자를 참혹한 십자가에 절대로 내어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면, 하나님께서 죄인인 당신을 지옥으로 던지려 하신다면(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이 죄인을 대신하여 예수님이 죽어 주셨습니다.”라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돌아보시며 물으실 것입니다. 
“얘야, 너 저 친구 아니? 저 친구 말이 네가 저 친구를 위하여 대신 죽었다는구나.” 
그 때 예수님이 대답하실 것입니다, “예, 아버지, 저 친구 제가 압니다. 제가 저 친구를 위하여 죽었지 않습니까?”라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그 분을 구세주로 믿고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대신 죽어주심 말고는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때 마귀가 쪼르르 달려 나와서 항의를 합니다. “하나님, 저놈이나 나나 죄인인 건 똑 같은데 왜 저놈만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그 때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그래, 네 말대로 둘 다 죄인이지. 그런데 저 친구는 내 아들이 대신 죽어주었단다. 널 위해서는 누가 죽어 주었니?” 

할 말이 없어진 마귀가 한참 생각하다가 또다시 이의를 제기합니다. 
“맞긴 한데, 그래도 이건 부당합니다. 왜 하나님은 저놈에게만 아들을 내어주신 겁니까? 특혜입니다. 우리 마귀를 위해서도.....” 
하나님께서 호통을 치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내게 자기의 하나 뿐인 아들을 번제로 바쳤다. 그래서 나도 나의 독생자를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어 주었다. 더 할 말 있니?”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합니다. 어느 누구도 시비 걸 수 없고 책잡을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75세에 광야로 불러내어 믿음의 연단을 하시고 마침내 백세에 얻은 하나 뿐인 아들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는 명에도 순종하는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실 이유를 만드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내게 독자를 내어주었으니 나도 내 독생자를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과 그 아들을 위하여 내어주는 것이다.” 아무도 시비할 수 없는 구원의 이유를 만드신 것입니다. 

성경의 중요한 원리의 하나는 “하나”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이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이신 것처럼(삼위일체) 아브라함과 이삭도 갈라놓을 수 없는 ‘아버지와 아들’,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풍습이나 히브리 사상, 히브리어(語)에는 조상이나 자손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모든 할아버지, 조상은 그냥 다 아버지(아브)입니다. 모든 자손은 그냥 다 아들(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요 우리는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은 그들이 아브라함과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유대인들만 아브라함의 아들로 구원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참 뜻은 믿음으로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의 아들들이 되게 하여 구원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중요한 이 원리에 따라 우리는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아들이 됨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조상이니 자손이니 하고 번역하고 있는데 히브리 원어성경은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까? 믿음으로 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아들로, 또 다윗의 아들로 오십니다.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을 담고서 말입니다. 즉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시고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를 흘려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버리고 예수님의 살과 피, 그 생명을 받아먹습니다. 울며 통회하며 자복하며 믿음으로 받아먹습니다. 죄인 되었던 나의 생명을 버리고 주님이 찢으시고 흘려주신 그 생명의 살과 피를 받아먹습니다. 육으로는 아브라함의 아들의 살과 피를 받아먹는 것이요 생명으로는 예수님의 가져오신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장 12-13절이 뜻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사람의 뜻으로 나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낳으시는 자들이니라.“ 

그렇게 우리는 다시 태어납니다. 하나님은 그 험난하고 머나먼 구원의 길을 통하여 마침내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우리가 다시 태어났으니 우리가 누구의 아들이겠습니까? 우리도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즉 육으로는 아브라함의 아들이요 영으로는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특혜시비를 못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은 수풀에 걸린 숫양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예비하신 것은 아무도 시비할 수 없는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로 드렸던 아브라함의 처절한 모리아산의 사건 보다 더욱 참혹하게 하나님은 독생자를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결박하여 나뭇단 위에 잠시 눕혔다가 끝났지만 하나님은 그 참혹한 십자가에서 아들을 저며 그 살과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구원을 누가 반대하며 누가 시비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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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2:1-2)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네 후손이 저 밤하늘별처럼 되리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100세에 낳은 하나 뿐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니요? 이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지시입니다. “하나님, 이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그렇게는 못 합니다. 차라리 저의 목숨을 거두어 가십시오.” 이래야 맞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 말 없이 하나님의 명을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지시하셨다는 사실을 아내 사라에게조차 말하지 않고 이른 아침, 나귀에 나뭇짐을 지우고 아들과 하인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을 향하여 사흘 길을 갑니다. 그리고 하인들을 산 아래 남겨놓고 아들 이삭에게 번제에 쓸 나무를 지워서 데리고 산을 오릅니다. 

아들 이삭이 묻습니다. “아버지, 나무와 칼은 여기 있는데 번제에 쓸 양은 어디 있어요?” 
아비의 가슴을 에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실 거야.”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은 함께 죽음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자신을 태울 나뭇짐을 지고 모리아산을 오르는 이삭의 모습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결박하여 나뭇단 위에 눕혔습니다. 
성경에는 이삭이 반항하거나 소리 지르거나 도망치려 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사흘 길을 걸어가서 나뭇짐을 지고 산을 오를 정도의 사내아이가 만일 저항하거나 도망쳤다면 100세를 훨씬 넘긴 아브라함이 감당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설마 진짜로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시겠어? 이러다 마시겠지.’ 하고 생각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말만 하다 마는 하나님, 쇼 하는 하나님”으로 여긴 것이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대로 아들을 번제로 드리려고 칼을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은 황급히 아브라함을 두 번이나 불러 제지하셨습니다. 그리고 수풀에 걸린 숫양을 잡아 대신 번제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다시금 하나님은 후손과 땅의 약속을 재확인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이 사건에 관하여 신약성경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 11:19) 
아브라함과 이삭은 이삭을 죽여 번제로 드리면 하나님이 이삭을 다시 살려주실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에 나눈 말씀에서는 밤하늘 가득한 별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었고 이를 믿었으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의로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에서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과연 하나님을 생명의 하나님,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으로 믿었는가, 곧 부활신앙을 가졌는가를 친히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으로 믿지 못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믿음이 없다면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에게 하나님 노릇 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곧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죽어도 다시 살릴 수 없는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맡기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두려워서, 죽음이 무서워서 도저히 죽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생명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우리의 영혼을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온전히 그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부활절이 지났습니다. 만물이 새 생명의 환희로 가득한 계절입니다. 
자신의 부활신앙을 점검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으니 당신도 시험하실 것입니다. 
당신에게 부활신앙이 있는지, 당신 안에 부활의 주님, 생명의 주님, 영생의 주님이 계신지 확인하십시오. 이것이 없이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을 것입니다. 
부활의 하나님, 부활의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는 죽어도 살 것이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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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5장)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신 밤하늘별꿈 

“너는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람이 왜, 무엇을 두려워했단 말입니까? 아브람이 얼마나 두려워했으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셔야 했을까요? 아브람이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자신에게 후사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아브람이 두려워한 것은 후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후사가 없는 것이 왜 그렇게 큰 두려움이 되는 것일까요?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인간 뿐 아니라 짐승도, 물고기도, 벌레도, 나무도, 꽃도, 모든 동식물...., 산 것들은 다 죽습니다. 그런데 씨를 퍼뜨리고 새끼를 낳습니다. 그렇게 생명이 이어져 내려갑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때 모든 사람들은 사람도 그렇게 후손을 남기는 것이 생명을 이어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후사가 없는 것, 대가 끊어지는 것을 죽음 보다 더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아브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불러내셨고 함께 하시는데도, 그 하나님이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데도 후사 없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화를 내시지도 아니하시고 꾸지람도 아니하십니다. “아브람아, 다메섹 엘리에셀이 네 후사가 아니다. 네 몸에서 나는 자가 네 후사가 될 것이다.” 말씀하시고 아브람을 이끌어 밖으로 나가 밤하늘의 별을 보여주십니다. “저 별들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밤하늘의 별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의 가슴속엔 아직도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라면서 여름날 밤 쳐다보던 밤하늘, 모래알처럼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밤하늘 별들이 꿈처럼 남아 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믿으매 이를 그의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좀 따져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네 후손이 저 별과 같을 것이다.”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이 어째서 의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따져봐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후손이 별처럼 많아지는 것이 복입니까? 복이겠지요. 특히 아들 낳기 원하고 자손이 번성하기 원하는 한국인들에겐 정말 큰 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의 입장에서 본다면, 만일 그 자손들이 예수님을 모르는 육신의 자손이라면, 진노의 자녀, 멸망의 자식들이라면 번성한 자손은 외려 끔찍한 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라면, 구원받은 후손이 아니라면 그것은 복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불러내시면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신 그 복도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리키며 보여주신 그 밤하늘 별은 아브람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은 이를 정확히 지적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후손’이라고 말씀하신 그 ‘후손’은 복수명사 ‘후손들’이 아닌 단수명사 ‘한 후손’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아니, 하나님, 왜 ‘후손들’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후손’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기초문법도 모르십니까?” 하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 곧 ‘오실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의”로 여기실(인정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만일 아브람이 따져서 ‘후손’이 아닌 ‘후손들’의 약속을 받아내었더라면 절대로 의로 여기심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로 여기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브람이 ‘후손’의 약속, 곧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자 하나님께서는 “나는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냐?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여호와란 말이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신 약속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었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람은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고 증거를 요구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도 믿지 못 하는 악하고 약한 존재인가 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도 눈에 보이는 증거, 예언, 계시 같은 것들을 찾아다니는가 봅니다. ‘나는 여호와로라.’ 하시면서 자신의 이름을 거신 하나님으로서는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믿음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화도 안 내시고 아브람에서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아브람이 그것들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갭니다. 비둘기는 쪼개지 않습니다. 솔개가 내릴 때 아브람이 쫓습니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들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브람의 자손들이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하고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은 자빠져 자고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리고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납니다. 그리고 그 날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 후손이 애굽 강에서 유브라데 강까지의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알다시피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의 이야기요 약속입니다. 예표입니다. 그렇다면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삼년 간 공생애를 마치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하나님의 아들 아니겠습니까? 비둘기는 성령이고요. 그래서 비둘기는 쪼개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이 그 손으로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을 쪼갠 것처럼 아브람의 후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쪼갤 것입니다. 횃불이 그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모든 죄인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 오직 그 한 길이 될 것입니다.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John 14:6) 
이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은 쪼개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그 아들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 몸이 쪼개진 아들의 살과 피는, 그 생명은 온 땅에 밤하늘별처럼 산산이 부서지고 뿌려질 것입니다. 그렇게 온 세상 모든 죄인들을 구할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밤하늘별을 보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내어주사 십자가 위에서 산산이 부서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브람은 밤하늘별처럼 많은 후손을 보고 기뻐하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십자가의 고통과 산산이 부서져 흩뿌려질 아들의 살과 피로 그 가슴이 찢어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그 고통 너머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구원받을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밤하늘이 아니라 우주를 가리키셨습니다. 우리 사는 이 지구, 우리 태양은 우주 한 구석 티끌입니다. 우리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만 해도 지름이 10만 광년이나 되는 거대한 별무리이고 은하계에는 태양과 같은 별들이 2천억 개나 된답니다. 그런데 우주 안에는 은하계와 같은 갤럭시(Galaxy)들이 또 천억 개나 된다고 합니다. 그럼 우주공간에 태양과 같은 항성만 해도 몇 개나 될까요? 1천억 곱하기 2천억 하면 얼마나 되지요? 어떤 우주과학자가 관측 가능한 우주의 별을 계산해 보았답니다. 700해. 지구상의 모든 해변, 강, 사막의 모래 알갱이 수 보다 많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끝 간 곳 없이 드넓은 그 우주를 괜히 밤하늘 장식용으로 만드셨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그 후사들에게 나눠주시려고 만드셨을 것입니다. 그 날이 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 우주를 상속받아 다스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찬송과 영광이 온 우주에 가득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가리키며 보여주신 밤하늘별은 하나님의 그 꿈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십자가 너머의 그 꿈, 하나님의 꿈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당신의 가슴 속에 그 하나님의 꿈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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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5: 9-14)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이스라엘에서 붙잡혀와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여종 소녀부터 선지자 엘리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문둥병을 고치려고 왕에게 허락을 받고 금은보화를 잔뜩 싣고 이스라엘로 와 선지자 엘리사의 집 문앞에 당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밖에 나와 보지도 않고 사환을 보내어 나아만 장군에게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하고 전갈을 합니다. 그야말로 나아만 장군에게 치욕적인 대접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크게 분노하여 아람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분노한 나아만 장군이 아람으로 돌아가면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이스라엘을 침공할지도 모릅니다. 그 때 나아만 장군의 종들이 나아만 장군에게 손해 볼 것 없으니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잠그라고 설득하였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마지 못 해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자 그의 문둥병이 나아 피부가 어린아이의 살 같이 깨끗하게 바뀌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라면 대단한 사람일 것이고 그가 대단한 능력으로 자신의 병을 고쳐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찾아온 아람 장군 나아만 장군은 사환을 시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라는 말을 전하는 선지자 엘리사의 태도에 실망하고 분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라면 굉장한 모습과 능력으로 임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던 유대인들은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님이 회당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한 줄을 읽고 자신을 가리키며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하자 실망하였습니다. 거기에다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하지 분노하여 예수님을 산 낭떠러지에 끌고 가 밀어뜨려 죽이려고 하였습니다(누가복음 4장). 마침내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놓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신을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하였습니다. 이미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사람들이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 하고 멸시하고 핍박하며 버릴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이사야 53장) 

  

나아만 장군이 일곱 번 몸을 잠근 요단강은 700년 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사례를 받을 그 강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마지 못 해 하나님의 사람의 말에 순종하여 일곱 번(일곱은 하나님의 숫자를 뜻한다지요.) 강물에 몸을 담그자 그 더럽고 지긋지긋한 문둥병이 깨끗하게 나아 피부가 새롭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님을 따라 세례를 받으면 문둥병 보다 더욱 끔찍한 죄악을 벗고 거듭 나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입니다. 문둥병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천국의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멸시받고 핍박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그 아들을 보내셨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도 아니하며, 실망하여 돌아가며, 분노하여 예수님을 버리고 밟아버리기까지 합니다. 광야의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살 텐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죄악을 벗고 구원을 받을 텐데,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세례를 받기만 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고 영원한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굉장한 일이 일어날 텐데 말입니다. 

  

우리는 잡혀 와서 종이 된 이스라엘 계집아이처럼, 실망하고 분노하여 돌아가려는 나아만 장군을 설득한 종들처럼 저 완고하고 이마가 금강석처럼 굳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 돌아서는 자를 설득하는 사명을 맡은 자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전하지도 아니하고 데려오지도 아니하고 설득하지도 아니하고 가만히 입을 막고 바라보고만 있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너무나 많은 나아만 장군들이 문둥병에, 아니 죄악에 시달리며 죽어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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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얼마 전 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사후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주장의 유력한 근거로 알려진 임사체험(臨死體驗·Near Death Experience)이 사실은 꿈의 일종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과학뉴스 사이트인 라이브 사이언스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유체이탈 체험 연구센터(Out-Of-Body Experience Research Center)’ 연구 결과를 인용, ‘임사체험은 자각몽(自覺夢·Lucid Dreaming)의 일종’이라고 지난 16일 보도했다. 영혼 비슷한 것이 육체를 벗어나(유체이탈) 터널을 통과한 뒤 밝은 빛을 향해 날아가는 자각몽은 스스로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꾸는 꿈으로,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꿈의 내용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으며 현실처럼 생생한 데다 나중에도 또렷이 기억할 수 있다. 이하생략” 

‘사람이 죽으면 사후세계가 있는가, 과연 천국과 지옥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인간의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작년엔가 신문에 딸 이민아 목사를 먼저 보낸 이어령 박사의 기사가 났지만 이어령 박사 또한 이 문제 앞에서 깊이 고뇌하였을 것입니다. 저도 양로원에서 일하면서 늙고 병들어 치매증세를 보이며 쇠약해져가는 노인들을 보면서 과연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참으로 인간에게만 사후세계와 영원의 약속이 주어졌다는 것인가, 우리의 믿음이 사실이요 진실인가 하는 생각이 다시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 곧 물질세계에 속하여 살아가는 영적존재입니다. 영적존재이면서 현실세계에 속하여 살아가기 때문에 현실세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죽음의 경계를 넘어 이 땅, 곧 물질세계의 영역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물질세계에서 죄악 가운데서 살아가는 죄인들에게 영적인 세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죄와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물질세계에 사는 인간들이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는 쉽게 믿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 하십니다. 우리가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고 묻는 도마의 질문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라고,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고 간단히 말씀하지 않으시고 ‘진리’를 넣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 그것이 진리요 사실인가입니다. 진리가 아니라면 길도 생명도 아버지의 집도 모두 허탕이요 거짓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신앙여정도 따지고 보면 진리의 문제요 사실의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 믿음이 사실과 진리가 아니라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요, 부활도 없고, 천국과 지옥도 없고, 일생을 속아 사는 우리가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진리가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진리 위에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싸움은 진리 싸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와 눈에 보이는 이 현실세계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세상적 판단의 손가락질과 과학과 지식의 안개 속에서 증거도 없고 지식도 없는 죽음의 너머를 믿고 나아가는 믿음의 씨름을 일평생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 하였는지요? 평생 예수 믿다가도 막상 죽음 앞에서는 “죽어봐야 알지”라는 불신앙으로 무너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리의 편에 서는 것은 그러나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오직 택한 자만이 진리의 편에 설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낳으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요1:13). 빌라도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재판과정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인도 위험인물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대인들이 민란을 일으킬까봐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들었으면서도, “진리가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물었으면서도,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진리 편에 서지 못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시고 천국과 지옥이 참으로 있다는 것을 믿었다면 빌라도는 민란이 일어나는 한이 있어도, 설사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진리 편에 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현실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이 기록을 보면서 이미 예정된 바에 따라 빌라도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과 진리에 속한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는 사실에 다시금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만세 전에 나를 택하시고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를 새롭게 할 뿐입니다. 내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를 믿을 수 있다는 것, 약속을 받아 영원한 생명, 구원을 얻었다는 것, 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서 내가 진리에 속하였다는 것,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이요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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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 코끼리를 집어넣는 법”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물리학과 학생은 냉장고의 부피가 코끼리의 부피보다 작기 때문에 냉장고에 코끼리를 집어넣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기계공학과 학생은 냉장고를 코끼리보다 큰 것으로 특별제작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식품가공학과 학생은 코끼리를 토막 내어서 조림가공을 해서 부피를 최소화한 다음 냉장고에 넣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육사생도는 냉장고 앞에 코끼리를 세워놓고 명령합니다. “들어 갓!” 

부자청년(또는 부자관원)이 영생을 얻고자 하나 재물 때문에 주님을 따르지 못 하고 근심하며 돌아가는 이야기는 마태복음 19장, 마가복음 10장, 그리고 누가복음 1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자청년이 돌아간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제자들이 놀라서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이 깜짝 놀랐던 것처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또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이 각박한 세상을 살면서 돈, 재물이 없이 사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돈 없는 것, 가난한 것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고 저주와도 같은 것입니다. 돈 때문에 도적질하고 빼앗고 다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돈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고 돈 가지고 안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돈은 말도 히죽 웃게 만들고 죽은 자도 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3세기 때 중동지역과 이집트에 복음이 전해지고 기독교가 흥왕할 때 (7세기에 이슬람이 생기기 전까지 중동지방은 기독교 지역이었습니다) 안토니인지 혹은 안토니우스(Anthony, Antonius)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엄청난 재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젊은 시절 바로 이 말씀을 듣고 나서 고민을 했습니다. 결국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옷 한 벌만 가지고 사막, 광야에서 수도하였습니다. 친구들이 1년에 두 차례씩 음식을 갖다 주었습니다. 음식을 소금과 함께 먹고 포도주도 안 마시고 물만 마셨으며 1년에 한 번 부활절을 제외하고는 머리를 깎거나 빗지도 않았고 물론 목욕을 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기둥에 올라가서 수도하여 ‘기둥성자’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버리고 수도를 하였습니다. 가난한 성자들, 맨발의 성자들... 이러한 신앙생활의 행태가 나중 유럽에서 베네딕트 수도원이라든지, 프란시스 수도원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모든 재산을 버리고 수도를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16절을 보면 이 사람이 주께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사람의 관심은 예수님이 아니라 영생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선생님이여.”라고 부르면서 영생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또 이렇게 묻습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아니 영생이 무슨 선한 일과 맞바꾸는 상품입니까? 선한 일을 해서 영생을 얻겠다는 것은 돈을 주고 사겠다는 것과 똑같은 것 아닙니까? 그리고 죄인은 선한 일을 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사과나무에서 무엇이 열립니까? 사과가 열립니다. 다른 것이 열릴 수 없습니다. 죄인에게서 무엇이 납니까? 죄가 납니다. 다른 것이 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청년에게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청년은 대답합니다. “이 모든 것을 제가 지켰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오해하기 쉽습니다. “아, 주님께서도 율법을,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라고 하셨구나.” 그러나 이것은 잘못 생각입니다. 지금 이 청년은 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묻습니까? 이 청년은 지금 가슴이 허전한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양심과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사람의 속을 다 아십니다. 이 청년이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온전한 것이 아님을,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기만 해도 살인”이라 한 것같이 악한 인간이 계명을 지킨다 해도 그것은 그 악한 본성을 덮는 가식적 행위일 뿐이라는 것을, 인간은 다 악하다는 것을, 계명으로 고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다시금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모든 소유를 버리고 나를 따르라.” 

그렇습니다. 영생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바로 생명입니다.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것입니다. 온전하려면, 영생을 원한다면 생명 되신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생명 되신 주님을 따르는 것이 곧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네가 가진 재물을,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부자청년의 비극은 그것이었습니다. 등에 진 재물을 내려놓지 못 해 낙타가 된 것입니다. 그 재물, 그 짐을 내려놓고 영생이신 주님을 따르면 될 것을...... 

그 부자청년에게 말씀하셨던 주님은 지금 우리를 향해서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생명의 주로 믿느냐? 내가 너에게 생명을 주려고 온 하나님인 것을 믿느냐?” 
이 물음에 당신은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주여, 믿습니다. 주님은 이 죄인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고백이라면 당신은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내려놓아야 한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결코 세상 것을 내려놓지 못 하는 낙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죄인이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 되신 주님을 따르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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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 발달하고 세상이 살기 좋아질수록 약삭빠르고 강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순박하던 인심은 사라지고, 정직하면 손해보고, 착하면 빼앗기는 살벌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남이 더 가져가면 내 몫이 줄어들거나 없어진다는 제로섬 경제논리 속에, 1등이 되어야만 살아남는다는 무한경쟁체제 속에, 인간사회는 날이 갈수록 약육강식과 생존경쟁의 살벌한 동물세계를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성경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거든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고 말씀하십니다. 속도 없고 배알도 없이 바보처럼 주고 빼앗기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라고까지 하시니, 누가 이 말씀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으시고 그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배알 없고 속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우리도 당연히 그런 속없고 배알 없이 다 베푸시고 다 빼어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그런 속없고 배알 없는 성품 그대로 아버지께 순종하여 죄인들을 위하여 그 참혹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보라서 십자가 지셨습니까? 태양이 멍청해서 누구에게나 비취고, 비가 속이 없어서 누구의 밭에나 고루 내립니까? 만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만 사랑하시고, 의인만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예수님이 사람 골라서 피 흘려주셨다면 우리 같은 죄인이 한 사람이라도 구원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속없이 배알 없이 무한히 나누어주셨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 완전한 사랑 때문에 나같은 죄인도 구원 받은 게 아니겠습니까? 

왼편 뺨도 돌려대며 겉옷도 벗어주며 원수를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대로 사십시다. 그렇게 해야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주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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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당신 아버지의 유골은 가져가 해. 그러나 이 신주는 그냥 못 줘 해. 당신 아부지 죽어 했을 때, 우리 쌀람 이 신주 모셔했어. 그러니 거저 못 줘 해. 돈 없으면 데리고 온 아들이라도 내 놓아 해.“
아버지의 유골을 찾으려고 재산을 다 팔아 마련한 돈을 가지고 아들과 함께 수 천 리 길을 찾아온 조선인은 할 수 없이 울부짖는 아들을 흉측한 중국인에게 넘겨주고 나무로 만든 신주를 받아 품에 안았습니다. 아들은 어디엔가 노예나 종으로 팔려가겠지요. 그러나 아버지의 신주라는데 아니 찾아갈 수가 있습니까? 목숨보다 더 소중한 신주를 모시고 돌아가지 못 한다면 죽어서도 조상을 뵐 낯이 없으며, 천추에 씻지 못 할 죄가 되는 것입니다.

고려말기 주자학, 성리학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온 유교는 아름다운 충효사상과 삼강오륜 도덕기준을 뿌리내리게 하였고,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성리학자 주희가 만들어낸 제사법이 들어와 처음엔 궁중이나 귀족들간에 행해지다가, 조선조가 시작되면서 온 나라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사실 고조선이나 삼한시대, 그리고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제사풍습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제사는 하늘과 천지신명에 대한 것이었고 우리민족의 시조라는 단군도 이러한 제사장이었다 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시작된 조상제사는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 이렇게 최소 여덟 분의 기제사와 설, 한식, 추석까지 합쳐서 일 년 내내 정신없이 돌아와 우리민족의 가난한 살림살이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펴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중하고,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 사는 참 희한한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은 못 먹어도 제사는 차려야 했습니다. 남자들의 일, 특히 사대부의 일이란 게 제삿법, 풍수지리 따지는 게 전부였습니다. 정작 중국인들은 안 하는데 우린 참 열심히 했습니다. 종묘 제삿상에 굴비대가리를 동편으로 놓느냐, 서편으로 놓느냐를 놓고 피를 부르는 당파싸움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베옷 입고 머리 풀고 삼 년 동안 곡하는 것이 또 효도였습니다. 집안 살림살이꼴, 사람꼴, 나라꼴이 말이 되었겠습니까?

동북아를 호령하던 기개의 민족, 중국인으로 하여금 만리장성을 쌓게 했던 무서운 동이족, 이천년전에 이미 인도와 아라비아까지 바닷길을 내었고,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가 가락국 왕에게 시집왔던 우리민족의 역사는 순식간에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대륙이나 바다로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제사에 참석하지 않으면 자손취급도 못 받는데 제까짓게 어딜 감히 갈 수 있겠습니까? 중국땅을 휘몰아치던 고선지 장군과 남지나해를 호령하며 인도양, 아라비아까지 세력을 뻗친 바다의 왕자 장보고가 어찌 다시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중국인들 잠자리가 갑자기 편안해졌습니다. 조선사람들 제사법 한 번 가르쳐 주니까 끝내주는 거 있지요.
그리하여 영국인, 스페인인, 포르투갈인들이 지구를 돌아 신대륙을 발견하고 호주, 뉴질랜드와 필리핀, 남양군도를 다 삼킬 때까지 우리민족은 제사 땜에, 죽은 조상 족쇄 땜에 옴짝달싹, 백리길도 갈 수 없었습니다. 당파싸움에 멸문지화를 당하고, 오랑캐에게 짓밟히고, 일본에 나라 뺏기고 징용, 정신대 끌려가 욕을 당하고 죽기까지 말입니다.

참말로 조상의 영혼이 제삿상머리에 오기라도 했다면 억울하지나 않았겠습니다.
도대체 어쩌다 우린 이렇게 600년 동안 제사를 지내고 있었단 말입니까?
제사가 아니었다면 우리 민족이 이렇게 한반도에 요 꼴로 묶여 있었겠습니까?
만주벌, 요동, 옛 고구려 땅의 회복이 왜 아니 되었겠습니까? 오스트레일리아나 미대륙을 우리가 발견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최소함 괌, 오끼나와, 대마도, 사할린 정도는 우리땅 아니었겠습니까?
아라비아까지 항해하던 장보고의 배, 최무선의 함포, 이순신의 거북선이 울고 있습니다. 만주벌판에 말달리던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의 할아버지들이 통곡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인 주희가 지하에서 깔깔 웃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 신도 섬기지 말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가장 고귀한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 아닌 자에게 경배하거나 속이는 거짓 영들에게 절하는 것을 금하신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귀신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아닙니다. 귀신은 다른 존재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는 것니 아닙니다.
세상을 떠돌다가 제삿날 오는 것도 아닙니다. 죽은 자의 영혼이 돌아와 제삿상을 받는다는 거짓말입니다.
제삿상머리에 달려와 좌정하고 절받는 것은 속이는 영들, 바로 그들입니다.
그래서 신주 앞에 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조상의 영혼이 온다면 누가 절하지 말라 하겠습니까?

조상제사 때문에 만주벌을 호령하던 우리민족, 일본을 신하 삼아 칠지도를 하사했던 민족, 세계최고의 철기문화로 동북아를 떨게 했던 민족이 한반도로 오그라들고 몰락하고 침략 받고 짓밟힌 것이 너무 억울하고 원통합니다. 
그래도 중국인 주희가 가르쳐준 조상제사를 21세기의 지구촌 문명세계에서 세계만방이 지켜보는 앞에서 계속해야 할까요?
이제 떨치고 일어나 세계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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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멋대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살다가도 죽기 전에만 회개하면 되겠지. 
언제라도 내가 회개하면 하나님이 받아 주시겠지. 
사랑의 하나님이시니까....” 
과연 그럴까요? 

엘리 제사장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패역한 망나니들이었습니다. 
제사 드리러 온 백성의 고기를 빼앗아 가로채어 먹고,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지기 전에 먼저 뺏어먹는 패악을 예사로 저질렀으며 
회막에서 수종하는 여인들을 범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한심스럽게도 아버지 엘리 제사장은 마음이 약하여 두 아들을 엄히 다스리지 못 하였으며 
너무 심하니까 겨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사무엘상 2:24-25) 
사람과 사람 사이는 사람이 나서서 화해시킬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는 누가 나서서 화해시킬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당신도 혹시 언제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아전인수(我田引水)격 제멋대로’ 생각입니다. 
낮고 더러운 죄인은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다다를 수조차 없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가 회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마치 
'다리 밑의 거지가 마음만 먹으면 자기 옷이 순식간에 깨끗하고 화려하게 바뀌고 
즉시 구중궁궐 임금님을 만나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 것' 과 같습니다. 

거지가 임금님을 만나려면 누군가가 중간에서 주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거지의 부탁을 들어줄 만큼 거지와 친한 사람이어야 하고 
아울러 임금님께는 무슨 부탁이든지 할 수 있을 만큼 절친한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또 거지도 임금님 앞에 나서기 전에 깨끗하게 씻고 더러운 옷도 갈아입고 언행의 품격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죄인이 하나님과 화해하려면 
오직 신(神)이요, 사람이신 예수님이 중보(中保)가 되어 주시는 길밖에 없습니다. 
죄인은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죄를 씻어야 하고, 
눈보다 흰 예수님의 의(義)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그 분의 발 앞에 엎드려 나의 구주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십시오. 
그 분만이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中保者)이시며, 
그의 피와 그의 의의 옷으로 우리 죄를 씻어 주고 가려주실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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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죄인을 절대로 용서하지 못 하십니다.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 나서지 못 합니다. 
“죄의 대가는 사망!”입니다. 

그런데 그 무서운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대신 내어 주셨습니다. 
죄로 영원히 죽어야 하는 죄인을 살리시려고 
죄 없는 자기 아들을 내어주어 대신 죽게 하셨으니 
참으로 기이한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시고 
만물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보좌 오른편에 높이 앉히셨습니다. 

이스라엘 풍습에 의하면 오른편은 귀한 손님이 앉는 자리입니다. 
오른편에 앉힌다는 것은 그 귀한 손님이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부탁을 하든지 다 들어주겠다는 의사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서면 하나님은 우리 죄를 인하여 우리를 여지없이 지옥에 던지려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내 주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돌아보시며 물으실 것입니다. 
“아들아, 이 친구 아니? 이 친구가 네가 자기 대신 죽었다는구나.” 

당신은 예수님을 알고 계십니까? 
“예, 아버지. 저 친구 제가 압니다. 용서해 주세요. 제가 저 친구 대신 죽었지 않습니까?” 
라고 대답해 주실 바로 그 분을 
당신은 알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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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유의 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목숨까지 주시려고 
이 낮은 땅에 죄인들을 찾아오셨으나 
사람들이 방을 다 차지해 버리고 
아기 예수님은 
누우실 자리조차 없어 구유에 누이셨는데... 
여전히 세상은 서로 차지하려는 싸움과 
빼앗고 빼앗기지 않으려는 싸움으로 가득하군요. 

이 성탄절에 
이 요란한 세상 속에서 
두려움과 불안, 근심걱정의 먹구름 속에서 
내 마음에는 
내 가슴에는 과연 
작은 한 구석 한 귀퉁이라도 
아기주님 누일 자리가 
남아 있는지 돌아보아집니다. 

이 때만이라도 
내 작은 가슴을 아늑하게 둘러치고 
요란한 세상먼지를 말끔히 털어내고 
예쁜 보료를 깔고 
따뜻하게 비치는 등불을 켜고 
난로불과 보글거리는 주전자와 젖병 
아기주님 눕혀 드릴 
포근한 요람을 준비하고 싶습니다. 

이 때만이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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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지는 쓸쓸한 가을이 우리에게 오히려 감사한 것은
풍성한 추수 때문일 것입니다.
황금빛 들판을 바라보는 농부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곳간을 채워 겨우살이 준비를 하는 손길에는 즐거움과 기쁨이 넘칩니다.
 
그런데 만일 애써 키워 한여름 무성하던 작물과 나무들이 아무 곡식과 열매 없이 잎이 떨어지고 시들어 버린다면 농부들은 얼마나 슬프고 허망할까요?
더욱 슬프고 허망한 것은 열매 없이 끝나는 인생일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왜 사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방황하다 빈 쭉정이로 세상을 떠나는 것일 것입니다.

그 슬픔과 허망함은 아무리 술을 부어넣고 노래를 불어넣고 춤을 추고 통곡의 눈물을 쏟아 넣어도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것일 것입니다.
돈도 재물도 지식도 명예도 가족 친지도 다 인생의 지는 이파리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아무리 무성하여도 다 시들고 지는 것들이요, 결국은 두고 떠나야 할 것들입니다.
인생을 마치고 떠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영원한 생명의 믿음, 예수님의 생명의 씨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농부라고 말씀합니다.
드넓은 우주공간 가운데 이 지구 위에다 아들의 씨, 아들의 피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시려는 농부 말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와 감람나무(올리브)라 하고,
세상은 밭이요, 거두어질 영혼들은 알곡이요, 천사들은 추숫군이요, 천국을 곳간이라고도 말씀합니다.
세상의 마지막 때에 이한 낫을 가진 추수꾼을 보내실 것이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천국복음이 뿌려지는 땅에 비유하셨고,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를 저주하셨으며, 아름다운 열매 맺지 못 하는 나무와 쭉정이는 불에 던지워질 것이라 하셨고,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많이 맺으리라 하셨습니다.

이 낙엽 지는 가을에 내가 과연 거두어질 열매인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가슴 안에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 그 영생의 씨앗, 열매가 맺어져 있는지요.
아들의 피를 뿌렸는데도 열매 없는 쭉정이들은 진노의 불에 던지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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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4:50-53]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한국의 자살율이 OECD 30개국 중 1위라고 합니다. 하루에만 35명, 1년에 13,000 여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합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현실로부터의 도피와평안을 얻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자살을 택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결코 평안과 안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의 얼굴이 평온한 것 같아 보이니까 죽으면 평안이요 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죽음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 죽음은 죄의 대가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결과요 죄의 대가인 죽음이 어찌 평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죽음이 평안한 것이라면 예수님은 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겠습니까? 주님께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것은 죄인이 당하여야 하는 죄의 대가인 죽음의 형벌의 실체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음은 무서운 것이요 혹독한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더욱 두려운 것은 죽음의 너머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에 의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인간들이 죽음의 벽을 넘어보려고 하지만 그러나 종교들은 자기기만과 착각과 오해만을 제공합니다.
힌두교는 브라만(사제계급), 크샤트리아(무사계급), 바이사(평민), 수드라(노예계급)의 윤회를 믿습니다. 그들은 시체를 화장한 다음 갠지스강에 뿌리며 다음의 생에는 보다 높은 신분으로 태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불교는 인간이 천상계, 인간, 아수라, 아귀, 축생, 지옥의 여섯 길을 윤회한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해탈하여 무(無, Nothing)로 들어가 부처가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생명과 죽음의 비밀을 캐고 싶어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우주의 생성기원과 생명의 기원을 알아내려고 노력을 합니다. 우주선을 쏘아올리고 물질을 쪼개고 생명체를 연구하지만 그러나 인간은 결코 창조주의 비밀에 접근하거나 생명과 죽음의 비밀을 알아낼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시간을 벗어날 수 없는 물질세계, 피조세계 안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인 사망에서, 시간과 공간의 틀에서 우리를 풀어내어 초월적 생명,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만물을 지으시고 생명의 근원이 되신 창조주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고통의 죽음에 갇힌 피조세계, 시공간의 벽속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창조주요 성자하나님이신 예수님은 피조물의 모습으로 피조세계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피조세계의 일원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죽음의 십자가의 고통을 지셨습니다. 죄 없으신 유일한 분, 죽음이 가두어 두고 붙잡아둘 수 없는 오직 한 분이신 그 분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그 끔찍한 고통의 죽음을 당하시고 죄와 죽음의 벽, 시간의 벽, 피조세계의 벽을 뚫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의 벽, 시간의 벽, 피조세계의 벽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주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연합하는 방법은 주님을 온전히 믿고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승객이 조종사와 선장을 믿고 비행기와 배를 타듯이 우리는 천국열차 되신 주님을 믿고 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을 믿는 행동의 표현이 세례의식입니다. 

기독교가 너무 세상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기독교가 너무나도 세상적 복락과 현세의 삶을 가르치는데 빠져 있습니다. 물론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바다를 걸으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은 쫓아내며 죽은 자를 살리신 주님의 기적이 우리의 현세의 삶에 나타나는 것, 크리스천으로서 상의 소금과 빛 된 삶을 사는 것, 주님의 성품을 닮은 착한 행실, 예배와 찬양과 기도, 주님과의 교제 등, 성도의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세상의 삶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고 영생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 아무리 거룩하고 아름답게 이루어진다 해도 죽음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결코 기쁨이 되지 못 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현실세계에 갇혀있었습니다. 영원을 바라보지 못 하고 주님을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나라를 회복시킬 왕으로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제자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주님은 변화산의 영광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신 주님과 영광중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너무나 황홀하여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였지만 주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한 것은 그 제자들 또한 모세와 엘리야처럼 영광의 몸을 입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죽음의 너머,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도 제자들의 생각은 현실세계를 벗어나지 못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활 후에도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찾아오셨고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여주시고 만져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끝부분을 보면 주님은 베다니 앞에서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시고 하늘로 올리우셨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주님을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수살렘에 돌아가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큰 기쁨은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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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 기록된 변화산은 어느 산일까요? 정확히는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오늘날 이스라엘로 성지순례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갈릴리 남쪽 다볼산을 변화산으로 알고 그리로 순례를 간다고 합니다. 다볼산은 높이가 1,843피트. 그러니까 600 미터 조금 넘는 그리 높은 산이 아닙니다. 위치도 갈릴리 호수 남쪽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그리 마옵소서" 만류하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마귀와 물렀거라.’ 꾸지람을 들은 그 일이 있은 엿새 후에(누가복음에 의하면 여드레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고 거기에서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화되셨고, 모세, 엘리야가 주님께 말씀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엿새 뒤에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고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엿새 사이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굳이 갈릴리 남쪽 멀리 있는 다볼산으로 가셨다고 보기 보다는 가이사랴 빌립보 북쪽 15마일 거리에 있는 헐몬산에 함께 올라가셨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헐몬산은 오늘날 시리아 땅에 있는 높이가 9,100 피트의 산으로 백두산과 높이가 엇비슷한 높은 산입니다. 가을, 겨울과 봄까지 흰 눈이 덮이고 오늘날에는 스키장도 개장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눈이 녹은 물은 가이사랴 빌립보를 지나 갈릴리 호수로 흘러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볼산이 아니라 그 헐몬산으로 올라가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산 정상까지 올라가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높은 곳으로 올라간 것을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높은 산’에서 변형되셔서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어지는 영광의 모습으로 바뀌어 지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가운데 나타나서 예수님께 말씀을 합니다. 이 황홀한 광경에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고, 빛난 구름이 뒤덮이고, 하늘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리고, 제자들이 두려워할 때 예수님이 두려워 말라 하시고, 그 때 눈을 들고 보니 오직 예수님만 보였다고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압니다. ‘초막 셋’도 알고 ‘내 사랑하는 아들.....’도 알고 ‘오직 예수’도 압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다른 측면에서 살펴봅시다.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된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 때 나타났던 모세와 엘리야는 도대체 예수님께 뭐라고 말하였을까요?

이 변화산 사건은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엘리야가 무슨 내용의 말씀을 예수님께 드렸는지는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실쌔”(눅 9:31)라고 간단하게 나옵니다.
NIV영어성경을 보면 '떠나심', ‘Departure’라고 나옵니다.
헬라어 원어성경을 찾아보면 ‘엑소더스’라고 나옵니다.
이 ‘엑소더스’는 단순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의 ‘엑소더스’, 곧 애굽장자들의 죽음과 어린양의 피의 유월절사건, ‘출애굽’과 같은 단어입니다.
즉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께 말씀드린 것은 이제 예수님이 곧 예루살렘에서 성취하실 ‘출애굽사건’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출애굽기 12장에는 유월절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르고 고기는 불에 구워 허리에 띠를 띠고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습니다. 그 밤에 죽음의 사자가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군대로 바로왕의 손아귀와 애굽을 벗어나게 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이 말씀을 예수님께 드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어린양 희생제물이 되실, 그리하여 인류를 죄와 사망권세에서 풀어내실 ‘엑소더스’ 말입니다. 그런데 엑소더스는 어린양 희생제물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께 예루살렘에서 어린양 희생제물로 십자가에 죽임 당하실 것을 말씀드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왜 빛난 모습으로 변화되셨을까요? 성경에는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늘로 올리운 두 사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데리고 가신 에녹과 불병거를 타고 올라간 엘리야입니다. 모세는 느보산에서 가나안땅을 바라보고 죽어 모압 땅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러나 매장지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다서를 보면 모세의 시체를 미가엘 천사가 사단과 다투며 거두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외경의 기록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변화산에 모세가 영광중에 나타난 것을 보면 모세의 시체를 미가엘 천사를 시켜 하나님이 거두신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이 왜 죽습니까? 왜 썩고 멸망합니까? 성경은 죄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도 없으시고 흠도 없으십니다. 죄의 삯인 사망을 당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에녹과 엘리야도 죽음을 거치지 아니하고 하늘에 올리웠는데 하물며 예수님이 하늘에 못 올리시울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이루셨으며 당연히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늘에 올리시울 수 있는 분입니다.

하늘로 올라갈 때 세상모습으로 올라갈까요? 아닙니다. 하늘에 올라갈 때는 영광의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영광의 모습으로 바뀐 것은 예수님의 “승천준비완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당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나타나서 하나님의 아들, 성자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엑소더스”를 말씀드렸습니다. 어떻게 말씀드렸는지, 간곡히 말씀드렸는지, 울면서 말씀드렸는지, 감사와 찬송의 말씀을 드렸는지는 기록이 안 되어 있으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에녹과 모세와 엘리야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아니라면 죽고 멸망되어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이 없다면, 예수님이 엑소더스의 희생제물이 되어주시지 않는다면 에녹, 모세, 엘리야 그들도 모두 하나님이 데려가실 수도 없고 영광의 몸도 될 수도 없는 죄인들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들이 하늘로 들리운 것은, 영광의 몸을 얻은 것은 모두 예수님의 대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 곧 하나님의 약속, “어린양 예수님의 죄를 대신 갚으심”을 전제로 미리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약속하시면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다만 시간의 문제일 뿐입니다.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는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독생자를 내어주실 것을 작정하시고 약속하신 다음 가인도 미리 용서하시고 에녹도 미리 하늘로 올리시고 아브라함도 미리 부르시고 엘리야도 미리 들어올리신 것입니다. 훗날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독생자, 어린양 예수님이 그들의 모든 죄를 대속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미리 하늘로 들어 올리시고 영광의 몸을 입혀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말 ‘마이가리’로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지 않으신다면 모든 것이 헛것이 될 것이고 그들의 영광의 몸도 썩어버릴 것입니다. 에녹도, 모세도, 엘리야도, 우리도 죄 속에서 함께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께 그 이야기를 말씀드리면서 격려와 아울러 감사와 찬양을 드렸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 이 광경을 보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증인이 되라고 보여주신 것일 것입니다. 또 그것은 바로 믿는 우리도 주님과 함께 에녹, 모세, 엘리야처럼 영광의 몸을 입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도 마지막 나팔에 홀연히 영광의 몸으로 바뀌어 부활하며 공중에 들리워 주님을 뵙게 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대속을 전제로 ‘마이가리’ 영광의 몸을 입었다면 우리는 더욱더 틀림없이 영광의 몸을 입을 것입니다. 이 믿음과 소망 가운데 이 세상을 이기며 사시기 바랍니다.
어린양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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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4장 후반부를 보면, 주님은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후 세례요한이 잡혔다는 것을 들으신 다음 갈릴리 나사렛으로 가셨다가 다시 바닷가 가버나움에 옮겨가서 사셨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를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한 이사야 9장에 기록된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려 함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9장으로 가 볼까요? 
마태복음 기자가 인용한 예언이 1,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6절은 우리가 성탄절 때마다 듣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메시아 탄생의 예언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3-5절을 읽어보면 미디안 족속이 ‘군인의 갑옷과 복장이 불에 지푸라기같이 타 없어져버리고 말 것’이라는 예언이 아울러 나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을 때 그들이 그물을 버려두고,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기이하게 생각한 적 없으십니까? 
왜 그들은 기다렸다는듯이 주님을 좇아갔을까요? 
그들에게 벌써 그런 큰 믿음이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남다른 풍모와 권위, 광채,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 무슨 최면술 같은 것 때문이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모습의 사람이셨으니까요. 또한 예수님이 그런 방법으로 제자들을 부르셨을 리도 없고요. 그렇다면 왜 베드로와 같은 제자들은 주님이 부르시자마자 달려갔을까요?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우고 미드라쉬를 가지고 외우고 교육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의 압제하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옮겨가서 사셨습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말한 대로 “흑암과 사망 가운데 앉은 백성들”에게 큰 빛이 비치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치며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자 귀신이 쫓겨나가고 병자가 일어나는 큰 역사가 함께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가버나움 사람들은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의 소문이 나고 예수의 이름이 알려지자 그들은 예수님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기드온 같은 해방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머지않아 이사야의 예언대로 미디안을 물리친 기드온처럼 로마군인의 갑옷과 옷을 항아리에 숨긴 횃불로 섶같이 사르고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고 왕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안드레는 주님이 부르자 주저 없이 배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 세베대 또한 아들들을 가지 말라고 붙잡지 않고 ‘아들들아, 어서 가거라, 가서 한 자리하고 출세해라’ 하고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복음서를 보십시오. 나중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아들들의 자리를 부탁하는 치맛바람을 일으켰고 다른 제자들은 그 인사청탁에 분해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셔서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왕이 되실 것이라는 기대를 끝까지 버리지 아니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승천을 앞둔 순간에도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고 물을 정도였습니다(사도행전 1:6). 

그런 기대를 하면서 주님을 열심히 따르던 제자들, 그 중에서 베드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주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주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고 반석 위에 세워질 교회와 천국열쇠를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임 당하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에게는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청천벽력(파란하늘에 날벼락) 같았을 것입니다. 
특히 수제자로서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영의정 자리는 자기 것이라고 내심 여겨온 베드로가 받은 충격은 더 컸을 것입니다. 
“주여, 그리 마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붙잡고 만류합니다. 
그 베드로를 주님은 ‘마귀야 물렀거라.’ 하고 꾸짖으십니다. 
영의정인지 국무총리인지가 되고 싶어 주님의 십자가사역을 만류하니 마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세계관, 가치관은 그렇게 이 세상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넘어,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는데 그들은 예수님이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나라’ 약속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들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우주만유의 주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서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 나라를 해방시킬 영웅으로, 자신들에게 한 자리씩 앉혀주실 주군(主君)으로 믿은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그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죽음의 너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음의 너머, 요단강 건너에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땅의 생명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믿음을 요구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자만이, 주님을 믿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만이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이 없고서는 누구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못 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예수 믿는다면서도 이 땅의 목숨, 이 땅의 삶에 매여 허덕이며 삽니다.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의 구주가 아닌 이 땅의 형통과 복락을 위한 구주로 만들려고 합니다. 
예수님께 매달렸던 제자들과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인생은 순간입니다. 
우리의 이 땅의 삶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는 들의 꽃과 같습니다. 
이 땅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이 땅의 생명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따르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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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광야의 외치는 소리에 사람들은 요단강으로 나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베푼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회개의 세례는 ‘죄를 씻는 세례’라고 불리었지만 사실 회개의 세례만으로 인간의 죄가 씻어질 리 없습니다. 
그 세례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산이 낮아지고 골짜기가 돋우어지고 길이 평탄케 되어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는, 즉 마음의 길을 닦는 것이요 엄밀히 말한다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세례‘입니다. 
하나님의 오시는 길, 구세주를 영접하는 마음의 세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도 없으시면서,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이신데 요한에게 오셔서 세례를 베풀어달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펄쩍 뛰면서 ‘제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텐데 어찌 당신이 제게 세례를 해 달라 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가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옳다’ 말씀하시고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고 하늘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주님은 죄인과 같이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들과 동일하게 되셨고 죄인들과 공동운명체가 되신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하심이었습니다.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낮은 죄인의 자리에 내려오신 순종, 죄인과 함께 세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시는 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하늘에서 기뻐하신 것이었습니다. 

죄인들은 죽음경기장에서 사망권세와 경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서운 사망권세를 죄인들이 죄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무슨 재주로 이길 수 있습니까? 
싸움조차 안 되는 일방적인 죽음의 패배일 뿐입니다. 
그 경기장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관중석 높은 곳에 앉아서 죄인들에게 지시를 내리거나 코치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직접 그라운드로 내려오셔서 죄인들과 한 팀이 되신 것입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 나사렛마을, ‘그런 곳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라고 나다나엘이 말한 척박한 시골구석에서 목수의 아들로, 또 목수로,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사시던 30년 동안 마귀와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을까요? 
귀신들은 ‘귀신같이’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히 덤비거나 손 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의 권세는 죄 있는 곳, 죄 있는 자에게만 해당이 되니까요.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그들이 어찌 다가올 수조차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예수님이 세례요한이 베푸는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죄를 회개하는 세례, 사람들이 받는 세례를 말입니다. 죄인도 아니면서 세례를 함께 받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래? 죄인들과 한 팀이라고?” 하고 마귀가 덤비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에서 받으신 마귀의 시험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죄인과 동일한 입장에서, 신성(神性)이 아닌 인성(人性)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이 시험을 이기기 위하여 광야에서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그 시험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을 넘어뜨리려는 마귀와의 필사적인 한판 승부였습니다. 
그 싸움에서 주님은 인간이 이겨내기 가장 어려운 세 가지 시험, 곧 주렸을 때 돌을 떡덩이로 만들어먹는 불의를 행하는 것,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눈 딱 감고 단 한 번 마귀에게 절함으로써 천하만국을 얻는 쉬운 길을 택하는 유혹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명으로 물리치고 이기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이 대결에서 승리하시자 마귀는 물러가고 천사들이 와서 수종 들었습니다. 

주님이 이 시험을 이기셨기 때문에 3년 공생애기간 동안 마귀와 귀신들은 주님을 감히 대적하지 못 한 것입니다. 
주님이 이 시험을 이기셨기 때문에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그 앞에서 모든 질병이 떠나가고 귀신들이 쫓겨나가고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이 시험을 이기셨기 때문에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한 예언을 이루실 수 있으셨고, 사망권세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도 빛이 되고 소망이 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이 시험을 이기셨기 때문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또 우리에게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누리십시오. 주님이 우리 편이 되셔서 이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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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출애굽기 34장 13-14절) 
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찌어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모세가 깎아 만든 돌판 두 개를 들고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은 구름을 타고 강림하셔서 은혜를 베푸실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또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서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돌 같은 우리 마음을 쪼개고 깎은 마음판을 끌어안고 올라갑시다. 
시내산이 아니라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갑시다. 
거기에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실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이 거기에서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하신 이적을 우리에게 베푸실 것입니다. 

깎은 돌판 두 개를 안고 올라간 모세에게 하나님은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 옛날(창세기 15장)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실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송아지와 염소를 쪼개라(브릿트) 하셨고 하나님은 그 사이를 지나시며 쪼개셨습니다. 언약, 곧 ‘브릿트’를 ‘브릿트’ 하셨습니다. 
(히브리어 “언약‘과 ‘쪼개다’라는 말은 발음이 비슷합니다.) 
언약은 원래 혼자서는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약속은 쌍방이 함께 해야 효력이 있습니다. 
하나님 혼자서 약속하시고 이루실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시면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는 쪼개는 브릿트를 하게 하시고 하나님은 언약의 브릿트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복을 주시면서 선악과 열매는 먹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쌍방계약의 형식을 갖춘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 하신 계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고, 친구가 될 수 있고, 신부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얼마나 연약하고 악한 존재인지요? 
그 간단한 선악과 먹지 말라는 약속도 못 지킨 죄인의 습성은 오늘날도 우리에게 남아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 하고 있습니다. 

돌판 두 개를 들고 올라간 모세 앞에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 어느 민족에게도 나타내지 않으셨던 놀라운 일들을 모세와 백성들에게 행하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모세와 백성들이 지켜야 할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의 가장 처음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낼 테니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고 그들의 우상을 헐고 깨뜨리고 쪼개며 거기에 절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질투”, 히브리어로는 ‘카나’입니다. 그리 어감이 좋은 단어가 아닙니다. 
남을 시기하거나 남녀간 사랑싸움에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침없이 이 ‘질투’라는 단어를 하나님의 이름이라 하시며 자신의 이름을 “질투의 하나님, 엘 카나”라고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질투라니요. 이 말씀을 듣는 모세가 얼마나 황공하고 민망했을까요? 

하나님은 이미 출애굽기 20장, 십계명을 주실 때에도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신 바 있습니다. 
이 뿐 아니라 성경을 읽어나가노라면 하나님의 질투를 나타내는 수많은 말씀을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투는 시기나 욕심, 혹은 심술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찬송과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전부를 걸고 사랑하시는 존재들인 우리를 향하신 엄위하시고 거룩하신 선언인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질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인간들은 금방 우상숭배로 돌아가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 희미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랑도 진노도 불같이 뜨거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 대한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는 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의 흐리멍덩한 할아버지 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절대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없는 사랑으로 지으셨고 불같이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측정이 불가능한 사랑입니다. 
요만큼만 사랑하자, 요기까지만 사랑하자, 하고 금을 긋고 한계를 정해놓은 사랑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스톱도 될 수 없고, 제한될 수도 없고, 조절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형제님, 자매님,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그 사랑을 받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사랑이기에 하나님의 질투 또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한량없이 사랑하는 우리가 다른 신이나 우상에게 절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실 수 없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체면불구하고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도 마음을 다 하여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뉴월에 서리가 내리는 그 새파란 질투처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깎고 쪼개어 양손에 들고 갈보리 언덕을 오릅시다. 
질투처럼 끓어오르는 우상숭배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피와 물로 다 쏟아놓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는 그곳에 말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이적을, 크고 두려운 이적을 우리에게 베푸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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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34: 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아침 전에 예비하고 아침에 시내산에 올라와 산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인적을 금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그 곳에 성지순례를 가보지 못 했지만 어느 글에서 시내산 꼭대기에서 아침 6시에 해 뜨는 광경을 보려면 새벽 3시에 호텔을 출발해야 한다고 써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시내산이 성경의 그 시내산인지 논란이 있기도 하지만 아무튼 시내산은 상당히 높아서 올라가는데 3시간 가까이 걸린다는 이야기지요. 지금은 길이 나 있지만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갈 때는 길이나 있었겠습니까? 그 산을 80세 넘은 모세가 무거운 돌판 두 개를 안고 넘어지고 자빠지며 기어 올라가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모세가 돌판을 깎아 만드는 것도 쉬운 작업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적당한 크기의 넓적한 돌을 골라 찾아야 했을 것이고 정과 망치로 두들기며 밤새도록 땀 흘리며 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 일찍 산꼭대기에 도착하기 위하여 아직 어두운 새벽에 나서서 험한 산길을 올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더러 그런 의문을 가져봅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주신 오리지널 돌판 두 개를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버린 것은 불경스럽고 지나친 행동이 아닌가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에 대하여 아무 말씀 않으시고 모세 자신도 이 문제에 대하여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것은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였을 때 하나님이 주신 돌판은 소용없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계약)도 무효가 되었다는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돌판 두 개를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어 아침 일찍 시내산에 올라오라고 명하십니다. 왜 처음처럼 하나님이 돌판을 직접 주시지 않고 모세더러 깎으라 하셨을까요? 처음엔 하나님이 주셨지만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다음엔 인간이 스스로 깎고 다듬어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자 해도 주실 수 없도록 타락한 것이 인간의 부패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두들기고 쪼개고 깎고 다듬어야 합니다. 죄인 스스로 겸비하여 마음을 쪼개고 깎고 울며 통회하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깎은 돌판을 들고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 그 앞에서 하나님은 반포하십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6절)
우리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이십니다.
배반하여 죄로 더러워지고 부패한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부르시고 그 피로 죄를 씻으라고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깎고 울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자기에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제 하나님께서 돌판이 아닌 우리 마음판에 말씀을 새기시기를 원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1)”
그 마음판에 말씀이신 주님을 새긴 자를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린도후서 3:3)”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고 십자가의 주님을 새겨야 할 곳은 돌판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 우리 가슴, 우리의 영혼입니다.

하나님은 조각목으로 법궤를 만들고 두 돌판을 그 법궤에 담도록 하셨습니다.
조각목 법궤를 황금으로 싸고 지성소에 두셨으며 그룹천사가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성소 안의 법궤와 그 안에 담긴 돌판을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의미만이 아닙니다.
조각목은 광야에 버려진 것 같은 보잘것없는 나무요 돌은 아무데나 굴러다니는 흔하디흔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듬은 조각목 법궤와 깎아서 말씀을 새긴 돌판은 하나님께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스스로를 깎고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새긴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황금으로 싸서 영화롭게 하시고 지성소 가장 깊은 곳에 간직하시고 그룹천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 그 자녀들을 이같이 귀하게 여기시고 지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을 깊이 새기려면 우리의 모나고 거친 마음을 두드리고 쪼개고 깎고 다듬어서 끌어안고서 하나님 앞에 올라가야 합니다.
이른 아침 거룩한 시간에 홀로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의 깎고 다듬은 돌판 마음판에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새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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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하나님의 절교선언입니다.
모세가 금송아지 우상을 불에 태우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 물에 타서 백성들에게 먹이고, 이스라엘 백성 3,000 명이 죽임 당했어도, 모세가 간절히 기도했어도 하나님의 진노는 풀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세는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나와 백성은 여기서 끝나는구나.’ 했을 것입니다.
생각하면 얼마나 억울하고 한심스럽겠습니까?
모세의 가슴은 얼마나 많은 생각과 회한이 소용돌이 하였겠습니까?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애굽에서 바로공주의 아들로 영화를 누리다가 이스라엘 백성 편을 들었다가 졸지에 살인자가 되어 도망하고,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며 40년 세월 죽은 것 같이 살다가 80세나 되어 뒤늦게 부름 받았는데,
아,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네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으라, 하고 부르신 하나님, 말을 잘 못 한다고 안 가겠다는 나를 지팡이 달랑 하나 쥐어주시고 보내시더니........

나는 바로에게 열 번이나 가서 말했지, 내 백성을 보내라,
나는 가고 가고, 또 가서 말했지,
하나님은 그 때마다 얼마나 놀랍게 역사하셨는지.
마지막 재앙, 장자를 죽이고 바로의 항복을 받아내던 그 유월절 사건은 정말 통쾌하고 엄청났었지. 뒤따라오는 애굽군대, 앞에는 홍해. 그 두려운 순간 하나님은 바다를 가르시고......,
그 말할 수 없는 놀라움이란!

그리고 그 뒤에 좀 힘들긴 했었지. 목마르던 사흘 길, 마라의 쓴물, 그러나 칠십 종려나무 오아시스의 그 기쁨,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 물을 내시고.......,
그리고 이곳 시내산에서 나를 불러 올리셔서 그 엄청난 말씀 돌판을 직접 새겨 주시고, 자, 이제 우리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는구나, 했는데, 희망에 부풀었는데.......
그런데 형 아론이 한심하게도 금송아지를 만들고 백성들은 절하며 노래하고 춤추고.......
이게 무슨 꼴인가?

하나님이 얼마나 진노하셨을까? 금송아지를 갈아 마시우고 3,000명을 죽였는데도. 차라리 저의 이름을 지워주십시오, 하고 간구했는데도 하나님의 진노는 풀리지 않는구나.
천사만 보내 가나안 족속 쫓아내면 무슨 소용인가?
하나님 없이 가나안 땅 차지하면 뭣 하나? 그 다음은 다시 이방민족들의 밥이 될 텐데.
하나님 없는 삶이라면 애굽 종살이보다 나을 게 무엇이란 말인가?
아, 어쩌나? 아, 나의 사명은 여기까지란 말인가? 나의 인생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인가?
모세의 심경은 막막하고 답답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을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사랑하시고 모세를 사랑하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호렙산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모세의 이름을 부르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단장품을 제하라 하시면서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진 밖 멀리 회막, ‘만남의 장막’을 만듭니다.
모든 백성들이 단장품을 제하고 장막에 서서 모세를 바라봅니다.
회막에서 하나님의 구름기둥이 선 것을 봅니다.
모세는 간구합니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저희는 올라가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저희는 죽습니다. 저를 이름으로도 아시고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 함께 하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천하만민 중에 구별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주의 백성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겠습니까?”
모세는 오직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의 함께 하심, 하나님의 동행을 간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시고 모세를 이름으로도 아시는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냅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이 말씀에 모세는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웠겠습니까?

하나님 없는 성공은 성공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는 부귀영화는 부귀영화가 아닙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는 결코 평안과 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없으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라는 간절함이 있습니까?
우리의 축복은 형통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축복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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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2:30-35]

금송아지를 빻아 가루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마시우고, 레위지파로 하여금 인정사정없이 형제들과 친척들 3,000명을 쳐 죽이게 한 다음날 모세는 다시 산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이 백성이 큰 죄를 범했습니다.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습니다. 간구하오니 용서하시옵소서. 그렇게 아니 하시려거든 차라리 저의 이름을 주의 기록한 책에서 지워주십시오.”
목숨을 건 결사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까?
레위인들이 형제들을 3,000명이나 쳐죽였으니 이만하면 진노를 푸시라고 말씀드렸다고 진노를 푸셨습니까?
아닙니다.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으로 섬긴 것은 단순한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짓밟는 것입니다.
인간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인간에게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독입니다.
누가 당신을 보고 개라 하거나 돼지라 하면 좋겠습니까?
서양이나 중동지방에서 상대를 모독하면 죽음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명예 때문에 결투를 했습니다.
아론은 각도로 금을 조각하여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놓고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그 앞에 제물을 드리고 먹고 마시고 춤추었습니다. 하나님을 한 마리 짐승으로 만들어버린 셈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도 오해든 무지든 고의든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 많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오해하여 예수님을 미가엘 천사라고 믿는 여호와의 증인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천사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짐승이라 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구세주, 예수라거나 하나님이라고 하는 정신병자도 있습니다.
무슨 증거장막성전인지를 군포에 세워놓고 자신이 보혜사라고 하면서 제멋대로 영생과 새하늘 새땅을 약속하는 사기꾼도 있습니다.
송아지 자리에 자기가 기어 올라가 하나님 행세를 하는 겁니다.
꼭 하나님만 믿어야 하나? 아무거나 믿으면 된다는 종교다원주의자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상 만드는 짓들입니다.
아예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더 많습니다.
이들은 다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들입니다.
그래도 아무 일 일어나지 않으니까 이 세상은 날이 갈수록 더 악해져 갑니다.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뛰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까지나 용서하고 참으실까요?
아닙니다. 마지막 날, 심판의 날, 하나님은 땅을 뒤집으시고 하늘을 찢으시며 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 그 날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무서운 진노로부터 산이 무너져 자신을 가려달라고 울부짖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범한 하나님 모욕죄는 해결방법이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다 말씀하였습니다(히 10:26-7).

지금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체험하였고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며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을 모욕한 것입니다. 어찌 용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모욕한 죄가 모세의 기도로 해결될 리가 없었습니다.
모세가 자기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애걸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3,000명을 쳐 죽였다고 진노를 풀 일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만 내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2장 35절을 보니 그 날 재앙으로 백성들을 또 치셨습니다.
되먹지 않는 모세의 기도가 오히려 더욱 화를 불러온 셈입니다.
하나님은 그토록 진노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의 죄를 사해 주시지 않으시려거든 자신의 이름을 지워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버리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으신다면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 달라고 기도하였는데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다 쏟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사해주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생명을 버리심이 헛되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던 하나님은 아들의 속죄제사를 받고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자기 몸을 드린 예수님의 속죄제사를 하나님께서 모세의 돼먹지 않은 기도처럼 여기셨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절대로 부활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기도와 죽으심은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으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 인류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그것이 하나님이 인류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 증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거부하고 계속 하나님을 모독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참 답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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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다음은 얼마 전 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사후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주장의 유력한 근거로 알려진 임사체험(臨死體驗·Near Death Experience)이 사실은 꿈의 일종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과학뉴스 사이트인 라이브 사이언스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유체이탈 체험 연구센터(Out-Of-Body Experience Research Center)’ 연구 결과를 인용, ‘임사체험은 자각몽(自覺夢·Lucid Dreaming)의 일종’이라고 지난 16일 보도했다. 영혼 비슷한 것이 육체를 벗어나(유체이탈) 터널을 통과한 뒤 밝은 빛을 향해 날아가는 자각몽은 스스로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꾸는 꿈으로,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꿈의 내용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으며 현실처럼 생생한 데다 나중에도 또렷이 기억할 수 있다. 이하생략”

‘사람이 죽으면 사후세계가 있는가, 과연 천국과 지옥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인간의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얼마 전 딸 이민아 목사를 먼저 보낸 이어령 박사의 기사가 났지만 이어령 박사 또한 이 문제 앞에서 깊이 고뇌하였을 것입니다. 저도 양로원에서 일하면서 늙고 병들어 치매증세를 보이며 쇠약해져가는 노인들을 보면서 과연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 곧 물질세계에 속하여 살아가는 영적존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죽음의 경계를 넘어 이 땅, 곧 물질세계의 영역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주님은 죄와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 하십니다. 우리가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고 묻는 도마의 질문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라고,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고 간단히 말씀하지 않으시고 ‘진리’를 가운데 넣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진리요 사실인가입니다. 진리가 아니라면 길도 생명도 아버지의 집도 모두 허탕이요 거짓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신앙여정도 따지고 보면 진리의 문제요 사실의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 믿음이 사실과 진리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라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바와 같이 믿음은 헛것이요, 부활도 없고, 천국과 지옥도 없고 우리가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진리가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진리 위에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싸움은 진리 싸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와 눈에 보이는 이 현실세계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세상적 판단의 손가락질과 과학과 지식의 안개 속에서 증거도 없고 지식도 없는 죽음의 너머를 믿고 나아가는 믿음의 씨름을 일평생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 하였는지요? 평생 예수 믿다가도 막상 죽음 앞에서는 “죽어봐야 알지”라는 불신앙으로 무너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리의 편에 서는 것은 그러나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택한 자만이 진리의 편에 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낳으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요1:13). 빌라도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재판과정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인도 위험인물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대인들이 민란을 일으킬까봐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들었으면서도, “진리가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물었으면서도,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진리 편에 서지는 못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시고 천국과 지옥이 참으로 있다는 것을 믿었다면 빌라도는 민란이 일어나는 한이 있어도, 설사 죽는 한이 있어도 진리 편에 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현실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이 기록을 보면서 이미 예정된 바에 따라 빌라도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과 진리에 속한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는 사실에 다시금 두려움과 아울러 만세 전에 나를 택하시고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를 새롭게 할 뿐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를 내가 믿을 수 있다는 것, 영원한 생명, 구원을 받았다는 것, 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서 내가 진리에 속하였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기적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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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2: 24-25]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돈과 재물이 풍족하고 명예와 즐거움이 있으면 만족스러운 인생인가요?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힘써 살고 나이 들면 은퇴해서 넉넉한 재산과 연금을 가지고 아름다운 휴양지에서 조개껍질 모으며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 같이 생각되는 세상입니다. 영적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중요하지 않고 삶만 풍요하고 평안하면 만족스러운 인생이라는 것 같습니다.

80년대, 9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이 좀 잘 살게 되자 효도관광 붐이 일어났습니다. 시골 아낙네들이 관광버스 안에서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이 익숙해졌습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인생이 끝나기 전에 하루라도 더 구경 가고 놀아야 한다고 그분들은 관광버스 안이 떠나가도록 소리치고 흐느끼며 노래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은 사실 하나도 즐겁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인생의 황혼길에서 진리를 알지 못 하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 는 채 구경 다니며 떠들고 논다고 해서 만족해지고 인생이 더 기뻐질 리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 하는 인생,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 하고 방황하는 인생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없는 사이에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노래하며 춤추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40일 동안 하나님도 아니 보이고 모세도 아니 보이자 불안해져서 아니 보이시는 하나님 대신 보이는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모세 대신 아론을 의지하여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마시고 춤추며 떠들어대고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슴 속에는 불안과 허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느끼는 공포와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자리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들은 더욱 마시고 더욱 소리 높여 큰 소리로 노래하며 춤추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허무와 슬픔을 이기지 못 하여 먹고 마시고 뛰어놀며 돈과 명예의 우상을 의지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직접 경험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들의 마음속 불안감과 죄책감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하나도 기쁘지도 즐겁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금송아지 앞에서 뛰놀며 즐겁게 노래하는 것은 가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들은 더욱 마시고 더욱 소리질러 노래하고 펄쩍펄쩍 뛰었을 것입니다.

정작 기쁘고 즐거운 것은 원수들이었을 것입니다. 원수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앞으로 돌아와 소리치며 웃고 떠들며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에 손뼉을 쳤을 것입니다. 그들이 멸망길로 빠져드는 것이 통쾌했을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기쁘고 즐거웠을 것입니다. 40일 후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동족이 우상 앞에서 뛰노는 모습을 보고 ‘방자하여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분노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앞에서 먹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는 것은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원수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조롱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하나님까지도 조롱하였는지 모릅니다. “헤헤, 하나님, 내가 따먹으라는 선악과 열매는 잘도 먹던데, 하나님은 아들을 내어주어도 안 먹네요.” 그래서 모세는 돌판을 던져 깨뜨렸고, 금송아지를 불살라 빻아 가루로 만들어 물에 뿌려 마시게 했고, 동족에게 칼을 겨누고 레위지파로 하여금 3,000 명이나 도륙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방자하여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된 것은 그 때의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닙니다. 오늘날 이처럼 풍족한 문명 속에서 부요함을 누리며 하나님을 떠나 사는 모든 사람들이 원수들의 조롱거리일 것입니다. 복음을 외면하고 하나님을 떠나 물질의 풍요와 삶의 즐거움을 성공한 인생이라 여기며 사는 모든 인생들이 원수들의 조롱거리일 것입니다.  인생의 허무와 죽음의 공포 앞에서 인간은 그럴수록 더욱 강렬한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단순한 오락과 즐거움을 넘어 더욱 강렬한 쾌락을 추구하고 인생의 허무와 불안을 이기기 위하여 마약까지 하는 인생들이 사방에 널려 있는 오늘날입니다. 
 
또한 우리 인생길에서 하나님이 아니 계시는 것 같고 시험이 닥칠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시험은 결코 물질의 시험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금도 내 것이요 은도 내 것이며 들의 생축도 내 것이라,’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시험은 믿음의 시험입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시험은 오직 포도나무 되신 주님께 붙어있어 끝내 이겨내어야 하는 믿음의 시험입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을 떠난다면 어떠한 부귀영화와 노래와 춤도 우리를 허망함과 두려움에서 건져내지 못 할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우리는 결코 원수의 조롱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평안하며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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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펌" 참고하세요)
"여호와의 증인, 인간사회를 ‘사탄 세상’ 규정… 국가 의무 거부"

헌법재판소가 지난 28일 이른바 ‘양심적 병역거부자’(종교적 병역기피자)에 대한 대체복무제 도입을 결정하면서 여호와의증인 교리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병역거부자의 99.2%가 여호와의증인 신도들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가르침이 병역을 거부토록 했을까. 이들은 헌재 결정 이후 “군 산하 대체복무는 안 된다”며 집총거부와 병역거부에 이어 대체복무 기관까지 입맛대로 요구하는 등 국가와 정부에 대한 정면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여호와의증인은 그들의 책자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에서 인간 사회를 ‘사탄의 세상’으로 해석한다. 사탄의 세상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로 ‘정부’와 ‘상업제도’를 말한다. 따라서 “사탄의 세상이 존재하는 한 그 악한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속 투쟁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탁지일 부산장신대 교수는 1일 “병역을 거부하고 반국가적 경향을 보이는 것은 여호와의증인 신도들이 교리적으로 정부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그들은 사탄의 권세를 상징하는 국가권력을 따르지도, 국가 의무에 복종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탁 교수는 “그들에게 참된 정부는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왕국’뿐”이라며 “이 왕국은 마지막 때에 세상 정부를 대체할 것이며 이는 모든 지상 국가들의 전복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고 덧붙였다.

국가(國歌)나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 수혈 거부 등도 여호와의증인이 갖고 있는 반국가적·반사회적 면모를 드러내는 대표적 특징들이다. 이들의 반국가적 태도는 헌재의 대체복무제 도입 결정 후에도 확인됐다. 여호와의증인 관계자는 29일 한 언론을 통해 “대체복무 기관을 어디에 두느냐가 문제”라며 “군 산하에 있어서는 안 되고 순수 민간 대체복무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태도는 여호와의증인이 홈페이지에서 공개한 ‘여호와의증인은 무엇을 믿습니까’와 정면 배치된다. 이들은 이 글에서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사는 나라를 다스리는 정부의 권위를 존중한다”며 “법을 준수하고 세금을 납부하며 공공복지를 위한 정부의 노력에 협조한다”고 명시했다.

여호와의증인은 병역거부 등 국가 체제와의 갈등으로 세계 곳곳에서 갈등을 겪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여호와의증인을 ‘급진적 활동과 연계된 단체’로 규정해 법인 해산과 활동 금지 조치가, 스위스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여호와의증인) 서적 전시대 설치 및 포교를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신 C T 러셀에 의해 시작된 여호와의증인은 1872년 창립된 ‘국제성서연구자협회’가 전신이다. 삼위일체를 거짓 가르침으로 규정하고 예수는 피조물에 불과하며 성령은 인격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 가르친다. 1914년 예수가 영으로 재림했다고 주장한다. 지옥의 존재를 부정하며 인간의 영혼은 사망하면 끝난다고 가르친다. 한국교회 주요 교단들이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이유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73841

*****여호와의 증인의 언어 오해, 그들의 잘못된 성경해석*****

<“아들”의 뜻>
성경에 기록된 “아들”의 뜻은 문자 그대로 “아들”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성경을 떠나서라도 아들은 아들이다.
아버지와 똑같은 아들 말이다.
사람의 아들이면 사람, 소의 아들이면 소, 돼지의 아들이면 당연히 돼지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아들은 하나님이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원래 뜻이다.

성경에 나타난 히브리사상도 마찬가지다.
“아들”이란 “아버지 안에서 나온 자”라는 뜻이다.
히브리어(語)에는 할아버지니 조상이니, 손자, 자손이란 단어가 없다.
히브리어로 ‘아들’은 “벤”이고 ‘아버지’는 “아브”이다.
히브리사상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다.
이 “하나”라는 의미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하다.

유대인들은 다 “아브라함의 벤(아들)”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인 자신들이 “하나”라고 믿는다.
자신들을 아브라함과 동일시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 옛날 아브라함의 허리 속에 들어 있었었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셨을 때 그들도 함께 택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민사상이다.

<아들임을 주장하시는 예수님>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주장하신다.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왔다.”고 주장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사상에 의하면 이것이 무슨 뜻인가?
히브리사상에 따라 자신들을 아브라함과 하나라고 믿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이것이 무슨 말씀이겠는가?
바로 자신이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뜻이요, 자신이 하나님과 같다는 뜻이요 자신이 곧 하나님, 아들 하나님이라는 뜻인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돌로 치려고 한 것이다.

복음서, 특히 요한복음을 읽어보라.
얼마나 여러 번 예수님은 자신이 아들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계시는가?
죄를 사하여 주시고,
자신이 심판주라고 말씀하시고.......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또 보여 달라 하느냐?”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을 보면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친다.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고 하신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돌로 쳐 죽일 일이다.
“이 사람아, 큰일 날 소리 말게. 나더러 하나님이라니!” 했어야 옳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을 맡기셨다고 말씀하신다.
심판을 할 능력(하나님과 동일한 전지전능, 초월성)이 없다면 맡긴다고 맡겨지겠는가?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하나님과 동일한 능력이 없으시다면 주신다고 주어지겠는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삼위일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부하신다.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왜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인가?
하나님의 이름이면 됐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족하단 말인가?
왜 건방지게(?) 아들의 이름을 끼워 넣느냐 말이다.

자세히 살펴보라.
영어성경을 봐도 좋다. 헬라어 원어성경이면 더 좋다.
“이름”이 단수로 써져 있는가, 복수로 써져 있는가?
왜 아버지의 이름, 아들의 이름, 성령의 이름으로 따로따로 말하지 않고
또는 “이름들”이라고 복수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단수인가?

그렇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합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지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한 주체로 지칭하고 계신 것이다.
세 분이면서 한 분이신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뜻인 것이다.
바로 삼위일체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성경의 증거, 사도들의 고백, 예수님은 하나님>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은 다름 아닌 아들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시다.

빌립보서 2장 6절을 보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은 본체, 곧 본질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고 사람의 모습, 종의 형상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는 아버지를 높이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들은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높이고 순종하고 복종하시는 성구들을 인용하여 “예수님은 하나님 보다 못 하다, 낮은 존재다,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바보라는 아이디를 쓰는 여호와의 증인 분은 좌측에 여호와, 우측에 예수라고 써넣고 여러 가지를 늘어놓고 비교를 하면서 예수님이 열등하신 분이라고 열심히 주장한다.)

로마서 9장 5절을 보라.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아멘”으로 강조하면서 밝히고 있다.

디모데전서 3장 15-16절을 보라.
“......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요.......그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되고.....”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디도서 2장 13절을 보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다.

<직접 자신을 하나님이라 말씀하신 예수님>
생각해보라.
누가 감히 하나님 아닌 자에게 영광을 돌리는가?
만일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일을 허락하시겠는가?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지 자기가 가로채서 받을 수 있겠는가?
“아무에게도 영광과 찬송을 주지(빼앗기지) 아니 하시겠다” 하신 하나님 아니신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사도요한의 앞에 엄위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고.... 그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였음에도 그 엄위하신 모습과 영광 앞에 엎드려 죽은 자 같이 된다.

그런 사도요한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처음이요 나중”, “알파와 오메가”는 하나님의 다른 표현, 곧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 계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직접 자신이 죽었다가 산 자, 곧 예수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일곱 뿔과 일곱 눈, 곧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지신 어린양으로 나오시기도 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의 하나님이심을 밝히 보여주는 말씀이신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주장>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 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이단이다.
도무지 삼위일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인 것이다.

그들의 주장대로 만일 삼위일체가 아니라면,
하나님이 문자 그대로 유일신, 한 분이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예수는 누구인가? 그 정체가 무엇인가?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 해답을 “미가엘 천사”에서 찾았다.
성경 이곳저곳을 끌어다 꿰어 맞추어 미가엘 천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천사에게는 신성이 없다.
신성이란 영어로 Divinity, 곧 “하나님성”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들은 신성을 확대해석하여 천사도, 마귀도 귀신도 신성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한자어의 귀신 신(神)자를 가지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신성(하나님성)과 인성을 모두 가지신 분은 에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말할 것이다.
미가엘 천사장을 하나님이 높이셔서 하나님으로 만들었다고.
그리고 그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었다고......
그럴까?
만일 그렇다면 미가엘 천사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알파요 오메가”,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설사 미가엘 천사가 하나님의 지위를 양위 받았다 쳐도 자신을 가리켜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될 것이다
어찌 만들어진 하나님이 하나님이 될 수 있겠는가?
어찌 미가엘 천사가 하나님의 자리를 이어받겠는가?
어찌 미가엘 천사가 하나님이 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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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증인들은 정신 차려라. 당신들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예수님을 천사로 만들어 모독하고 있다.
그러고도 구원이 있을 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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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케이시애틀에 올렸던 글입니다)

10. 여호와의 증이들이여, 당신의 아들은 개, 돼지인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님을 천사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
다시금 말하지만 여호와의 증인들은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그 뜻이 전혀 다르다.
그들이 말하는 “아들”은 만들어진 아들, 양자 삼은 아들이다.

그들은 예수는 최초의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 최초의 피조물은 미가엘 천사장이고 미가엘 천사장이 바로 예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천사를 만들어서 아들로 삼았다는 것이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다보니 필연적으로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물어보자.
당신은 당신과 다른 종류의 아들을 가지고 있는가?
당신은 사람인데 아들은 사람이 아닌 아들 말이다.
혹 당신들은 개나 돼지를 데려와서 뛰어난 이름을 주고 당신의 아들로 삼았는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들을 주셨을 것이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들.
왜 귀엽고 사랑스러운가?
당신과 똑같기 때문이다.
당신에게서 나온 당신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개나 돼지를 아들삼고 귀여워하고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당신들은 하나님이 천사 한 마리를 붙들어다 아들로 삼으셨다고 말하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과 다른 종류라고 말하는가?
당신에게는 당신과 똑같은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 정작 자신은 자신과 같은 아들이 없어서 천사 따위를 만들어서 아들로 삼고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며 후사로 삼으셔야 했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천사를 데려다가 아들 삼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을 능멸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이여, 어찌 이것을 모른단 말인가? 

여호와의 증인, 당신들은 욥기 1장을 들고 나와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욥기 1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늘의 하나님의 권속들을 폭넓게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만일 여호와의 증인의 주장이 옳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무수히 많아야 하고 “독생자, Only Begotten Son"이 수없이 많아지는 모순이 생길 것이다.
앞서 설명했지만 아들은 아들이어야 한다.
히브리어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한 아들을 뜻한다.

천사는 무엇인가?
히브리서 1장 14절을 보라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이 땅에서 우리가 부리는 것은 동물들이다.
가축들이다. 소, 말, 개, 돼지........
하늘에서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은 천사들이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네 생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네 생물,
독수리 같고, 소 같고, 사자 같고, 사람 같은 형상을 가진 천사들. 
그들은 날개를 갖고 있다.
날개를 갖고 있는 그룹, 스랍, 네 생물......
천사들은 하늘나라의 하나님의 부리는 동물들인 것이다.

666을 뭐라고 하는가? 짐승의 수라고 한다.
왜 짐승이라고 하는가? 왜 용이요 옛뱀이라 하는가?
하늘의 짐승인 천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땅에 내려온 것이다.
하늘짐승이 땅에서 하나님 노릇 하려는 게 사단이요 마귀들인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이여.
예수님을 미가엘 천사라고 믿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잘못인지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아들을 천사라니!
이것은 당신의 아들을 개, 돼지라 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능멸하는 것이다.
당신들이 이러고서 구원 받을 생각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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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케이시애틀에 올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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