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회의 특징 (장점과 단점)
고명진 목사(수원중앙침례교회 담임), 한복협 발제문

고명진

1. 들어가는 말
오늘날 기독교는 최초의 성립 이래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어 왔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기 이전에 이미 서유럽에는 천주교가, 그리고 동유럽에는 동방정교회가 있어서 기독교 세력은 크게 양분되어 있었다. 루터의 교회개혁 후 기독교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그리고 개신교로 나뉘어 졌다. 개신교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에 비해서 다양한데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를 비롯해서 성결교, 침례교, 오순절교, 구세군, 그리고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등 이단을 포함한 개신교의 교파는 상당히 많다. 게다가 각 교파는 여러 교단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이 밖에도 여러 교파운동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무수히 존재했었고, 또한 현재에도 존재한다.

본 글에서는 침례교회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침례교는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으며, 교단 조직이 타 교단에 비해 개 교회 중심적이면서도 교회의 운영이 민주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개신교 교파들 가운데 비교적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2. 침례교의 특징
침례교는 루터의 교회개혁 이후 개신교의 여러 교파들에 비해 비교적 일찍이 출현한 교파이다. 많은 사람들은 침례교의 성향을 좌향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침례교는 신약의 본질적인 원리를 지키는 교회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원형적인 교회(Primitive Church)로서의 신약교회(New Testament Church)의 신앙을 전승하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침례교는 당시 교회개혁이 지향하였던 여러 가지 목표들을 극단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밀고 나갔던 교파이기도 하다. 침례교는 루터가 유아세례와 성찬식을 가톨릭의 방식대로 계승했다는 점에서 그의 개혁이 불충분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침례교는 무엇보다도 침례나 주의 만찬과 같은 교회 내 예식이나 조직 면에서 성경에 가장 근접하려고 노력하였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침례교가 성경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본 연구의 진행은 의식, 교리, 조직, 대사회적 면으로 나누어 타 교단의 특징을 살펴볼 것이다.

1) 교회 의식: 침례
침례교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침례를 통해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침례교의 첫 번째 특징은 침례의 방법에서 찾을 수 있다. 다른 교파들은 주로 물을 뿌리는 방법에 의해 세례를 주고 있는 것1)에 비해 침례교는 아예 물속에 담그는 방법을 통해 세례를 주고 있다. 침례교는 다른 교파들에 비해 이와 같이 세례를 주는 방법을 달리하고 그 방법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본래 세례라는 말 대신에 ‘뱁티스마(baptisma)’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원하였다. 캐나다인으로 우리나라에 온 침례교 최초의 선교사이며, 주한 외국선교사들로 구성된 성경번역위원회의 부회장으로 있던 말콤 C. 펜윅(Malcom C. Fenwick, 1863-1935)은 ‘baptism’을 세례 대신 ‘뱁티스마’로 번역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다가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부회장직을 사퇴하고 성경을 혼자 번역할 정도였다. 그러나 침례교는 ‘뱁티스마’라는 용어가 일반에 생소할 것을 우려하여 ‘뱁티스마’라는 용어는 포기하되, 세례라는 용어 대신 침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2)

이와 같이 침례교는 침수침례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믿는 자들만이 침례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신자의 침례’라고 부른다. 침례교에 의하면 신약교회는 믿는 자들만이 침례를 받았으며, 믿는 자들만이 구원을 받았다. 침례 때 물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물에 완전히 잠기는 것은 장사 지냄을, 그리고 물에서 나오는 것은 부활을 의미한다. 그런데 만약 믿지 않는 사람이 침례로 인해 몸이 물에 잠겼다면, 그것은 물에 젖지 않은 죄인이 물에 젖은 죄인으로 바뀐 사실 이외의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침례교는 모태교인을 인정하지 않으며,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는 자기의 믿음을 보여 줄 수 없음으로 유아세례는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좋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침례교는 침례가 곧 구원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침례교인에게 침례는 구원을 받기 위한 필수 조건이 결코 아니다. 침례는 죄를 씻지 못한다. 따라서 죄를 씻기 위해 침례를 받는 것은 의미가 없다. 침례교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침례를 못 받았다고 해서 구원을 못 받는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침례교는 침례를 상징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침례교인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침례교는 확실히 믿지 않고 철저히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 침례를 행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인위적인 기간이 지난 후가 아니라 확실히 믿고 있다는 증거만 있으면 침례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3)

2) 교회 의식: 주의 만찬
타 교단과 가톨릭이 말하는 성찬식에 대해 침례교는 ‘주의만찬‘ 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기독교 각 교파의 입장은 크게 화체설(transubstantiation), 공재설(consubstantiation), 그리고 상징설(symbolism)로 구분할 수 있다. 화체설은 로마 가톨릭의 입장으로 성찬식 때 사제에 의해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견해이다. 이 경우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에 임재하기 때문에 성찬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거나 없는 사람이거나 간에 똑같이 작용한다고 믿어진다. 공재설은 루터와 칼빈의 입장으로 다시 구분된다. 루터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방법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떡과 포도주 ‘안에, 함께 그리고 가운데’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 입장에 의하면 역시 성찬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나 믿음이 없는 사람도 성찬을 받을 수 있다고 믿어진다. 이에 비해 칼빈은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떡과 포도주에 임재한다고 믿고 성찬은 오직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만 작용한다고 믿었다. 화체설과 공재설은 비록 그리스도가 어떻게 임재하는지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에 임재한다는 점에서는 견해를 같이 한다. 상징설은 이와 달리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에 실제로 임재하는 것이 아니라 떡과 포도주는 단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할 뿐이라는 견해이다. 침례교는 츠빙글리에서 비롯된 이 상징설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다른 교파들과 대비된다. 침례교는 침례가 교인권의 시작이라면, 성찬식은 교인권의 점검이라고 생각한다. 침례교는 아무리 기도를 해도 떡은 떡 그대로, 포도주는 포도주 그대로 남아 있다고 믿으며, 성찬을 이와 같이 은유적 표현으로 보는 견해가 성경에 가장 가까운 견해라고 생각한다.

3) 교리
침례교는 교파신학이나 헌법 혹은 특별한 신조를 두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 침례교는 교리도 없고 신앙고백도 없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침례교 역시 하나의 교파로 존재하는 한 교리적인 측면의 특징이 없을 수 없다. 침례교는 무엇보다도 성경에 무한정의 권위를 부여하며 성경무오설을 지지한다. 침례교에 의하면 권위는 오직 살아있는 그리스도로부터 오며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신약성서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침례교 최초의 선교사였던 펜윅은 무엇보다도 성경의 한글 번역에 힘을 썼으며, 성경 읽기를 장려하였던 것이다.

침례교는 바이블에 대한 교단의 권위 있는 해석보다 개개인의 자유로운 해석을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펜윅은 신도들이 바이블의 어려운 구절에 부닥쳤을 때 남의 도움을 빌어 해석하기보다는 수차 그 구절을 읽으면 성령이 필요에 따라 알게 할 것이라고 가르쳤다. 침례교는 바이블에 무한정의 권위를 부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도 개개인이 누구나 자신의 양심에 따라 바이블을 해석할 수 있으며, 과학과 교육에 의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할 때에는 그에 따라 신앙을 수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아마도 이러한 입장은 침례교가 영적 개인주의와 양심의 자유, 그리고 영혼의 자유와 개인의 책임을 다른 어느 교파보다도 강조하여 모든 신자가 똑같이 제사장의 지위를 지닌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침례교에도 교파 나름의 신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침례교는 대체로 웨스트민스터문답서와 필라델피아신앙고백서를 지지하다가 1925년에 가서야 일반적으로 ‘뉴 햄프셔 신앙고백(New Hampshire Confession)’으로 알려져 있는 신앙고백을 채택하여 신앙의 표준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침례교는 1962년에 이르러 이 ‘뉴 햄프셔 신앙고백’을 수정, 보완하여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Baptist Faith and Message)’라는 신앙고백을 채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침례교는 이 신앙고백서가 최종적이라고 보지 않으며 오류가 전혀 없는 완벽한 것이라고 보지도 않는다. 만약 새로운 상황이 도래한다면 적절한 시기에 이 신앙고백서를 수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가 미국 남침례회라는 침례교의 대표적인 교단에서 채택된 신앙고백서라고 해서 이 신앙고백서를 모든 침례교 교단이 승인할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침례교의 다른 교단은 물론이고 미국 남침례회에 소속된 침례교 교회라고 할지라도 나름대로의 신앙고백서를 만들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고백서는 어디까지나 바이블 해석에 도움이 되는 지침일 뿐 이것이 모든 침례교인의 신앙을 좌지우지할 권위를 지닌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서 침례교는 개신교의 다른 교파와 달리 신조가 신도들의 양심을 구속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한편, 침례교는 신과의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소통과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집단적으로 신과 올바른 관계를 수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침례교 내부에는 다양한 신앙 양상을 보일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

4) 조직
침례교는 원칙적으로 철저한 개교회주의를 지향한다. 비록 개교회가 모인 지방연합회, 그리고 지방연합회가 모인 총회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 3자는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 협동의 관계이다. 따라서 침례교의 교단 조직은 한마디로 개교회주의에 입각한 협동적 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 침례교의 이러한 교단 조직은 로마 가톨릭은 물론이고 개신교의 다른 교파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침례교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치권과 자결권을 가지는 침례교의 개교회는 감독제도나 장로제도와 대비되는 회중제도라는 조직 형태를 취한다. 감독제도는 감독이나 주교에 의해 치리되는 교회 형태로 로마 가톨릭, 영국 국교회, 프로테스탄트 감독교회, 연합 감리교회, 루터교의 일부가 채택하고 있다. 장로제도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는 당회가 교회를 치리하는 교회 형태를 말하는데 장로교가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대표적인 교파이다. 감독제도와 장로제도가 모두 중앙집권적인 조직 형태라면 회중제도는 보다 민주적인 조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회중제도 아래에서는 교회의 모든 문제가 회중 자신에 의해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결정된다. 회중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교파는 회중교회,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 그리고 침례교를 열거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침례교는 중앙집권적 조직 형태가 아니라 회중제도라는 민주적인 조직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성직자와 평신도는 기본적으로 동등한 권한을 가진다. 비록 개교회 내에 목사와 집사라는 직분이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직분은 계급의 직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기능의 직분으로 이해된다. 이런 조직 형태 내에서 신도 개개인이 자신의 의사를 보다 민주적으로 표시할 수 있는 기회를 보다 많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침례교의 조직적인 측면에서의 특징은 한마디로 개교회의 자치와 회중의 권위를 강조한다는 점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5) 사회와의 관계
침례교는 대사회적 측면에서도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선 침례교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로마 가톨릭은 물론 여타 개신교 교파들과 대비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침례교는 회중의 권한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회중교회와 비슷한 측면을 지니고 있으나 침례교는 회중교회가 국가의 통제 아래 있으려는 것과 달리 국가가 교회에 대해 그 어떤 통제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한편으로는 교단유형론의 입장에서 볼 때 교회형이라기보다는 섹트형에 가까운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침례교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비교적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였으며, 영국, 유럽, 미국 등지에서 주로 서민들이나 노동자 계급에 더 많은 호소력을 지니고 파고들었다. 그리고 개신교 교파 가운데 최초로 해외 선교를 시도한 케리(William Carey, 1761-1834)는 1793년부터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는데 다른 교파들에 비해 일찍부터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침례교가 섹트형에 가까운 성향을 지녔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요약하면 침례교는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세례의 방법으로 침례를 행하며 성찬식을 상징적으로 이해한다는 점, 신도 개개인이 바이블을 해석할 권리를 인정하고 있으며 신조가 다른 교파들에 비해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 아울러 우리는 침례교가 개교회주의를 지향하며 회중의 권한을 강조한다는 점, 그리고 국가와 교회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 등을 알 수 있었다.

3. 침례교회의 신앙
1) 성서의 권위
침례교인들은 또한 오직 성경만을 그들의 믿음과 행습의 유일한 권위로 믿었다. 에릭 올만(Eric Ohlmann)은 이러한 침례교인들의 믿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종교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어떠한 안내를 받기 위한 자료들을 성경뿐만 아니라 전통이나 이성, 그리고 경험으로부터 의도적으로 가져오려는 다른 기독교 단체들과는 달리, 침례교인들은 철저하고 단호하게 오직 성경만을 그들의 신앙과 행습의 유일한 권위로 삼았다.” 즉 장로교회는 존 칼빈의 성경에 대한 해석을 따르고, 감리교인들은 존 웨슬리의 성경이해를 받아들여서 자신들의 신앙의 지표로 삼았다고 볼 수 있지만, 침례교회는 이러한 어떤 신학자의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믿고자 하는 입장을 지니고 있다.

2) 교회론
가. 신약 성경을 모델로 하는 순수한 교회 추구
침례교인들은 신약교회를 가장 순수하고 이상적인 교회로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교회의 체계와 직분을 성경에 있는 모범을 따라 조직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신약교회를 순수한 교회로 보고, 교회의 체계와 직분을 성경에 가르침에 근거하여 만들려는 시도는 전형적인 침례교회의 입장이다. 침례교인들은 신약성경에서 교회 구조의 모범을 발견하였고, 사도적인 교회를 실현하려고 하였던 사람들이었다. 침례교인들은 성경의 권위를 교회체제에도 적용하였던 것이다.

나. 믿는 자 침례와 중생자 교회회원
침례교인들은 유아세례는 성서적인 근거가 없다고 생각하여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은 신앙을 고백한 자에게만 침례를 베풀었던 것을 근거로 믿음을 고백한 신자에게만 침례를 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즉 신자의 침례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침례교인들은 침례를 중생 받음에 대한 외부적 표식으로 보았으며, 교회란 신자의 모임이므로 교회 회원은 오직 침례를 받은 중생자이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물론 침례교회는 교회의 구성원은 회원(member)뿐만 아니라 참여자(participants)도 함께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였다. 다만 정식회원은 중생을 얻은 자이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3) 가시적 교회와 교회 치리 강조
침례교회는 불가시적이고 우주적인 교회의 개념을 인정하지만, 주로 가시적 교회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다. 예를 들면, 1644년의 “제 1차 런던 신앙고백서”는 “교회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에게 가시적인 것으로서, 부름 받아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고, 말씀과 성령으로 복음에 대하여 가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며, 믿음으로 침례 받고 주님과 하나 된 성도들의 모임이다”라고 정의하였다. 가시적 교회에 대한 강조는 또한 유아세례 반대에 대한 이론적 근거 중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4) 정교분리
침례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추구하였고, 그것을 보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재침례교인들과는 달리 침례교인들은 맹세하는 것, 성도가 관료 되는 것, 무력을 사용하는 것 등을 인정하였다. 그들은 국가에 충성하는 것을 강조하였고, 극단적인 평화주의를 채택하지 않았다. 즉 침례교회의 정교분리는 물리적인 분리가 아니라 영적인 분리였던 것이다. 신앙의 자유는 침례교인들은 모든 성도가 어떠한 인간적인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었음을 보여준다.

5) 회중주의: 만인제사장 교리에 근거
침례교회는 만인제사장의 교리에 근거하여, 교회정치의 형태로 회중주의를 채택하였다. 침례교도들은 성직자를 계급으로 간주하지 않았으며, 기능적인 사역으로 여겼다. 즉 목사와 집사, 그리고 평신도는 계급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일의 차이로 생각하였다.

6) 민주적인 체제와 개교회주의
침례교회는 회중주의를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교회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는 일반적으로 민주주의이고 평등주의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침례교회는 또한 개교회주의 즉, 지역 교회의 자치를 믿었다. 개 교회 자치의 전통은 민주주의 체제와 긴밀한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7) 선교에 대한 강조
사실상 침례교회는 개신교회들 중에서 가장 선교를 강조한 교단으로 알려져 있다. (근대선교운동을 일으킨 윌리엄 캐리는 침례교 선교사였다). 침례교회는 선교에 열심 하는 교단으로 유명한데, 침례교회가 선교를 강조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교회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앙 고백을 해야 한다는 침례교 자원주의 교회론이 바탕에 있기 때문이었다.

5. 마치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개신교의 한 교파인 침례교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침례교의 여러 특징과 신앙을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본 글이 침례교의 특징과 역사를 침례교 내부에서 완벽하게 서술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1) 전통적으로 개혁주의를 따르는 교회는 유아세례를 인정한다. 이는 구약의 교회에서 시행 되던 예식인 할례와 유월절 만찬이 신약의 교회에서 세례와 성찬으로 대치되었다고 해석하는데 기인한다. 특히 할례나 세례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있는 공동체에 들어온다는 상징이 있다고 해석하며, 이미 공동체에 있던 가정에서 자녀가 출생하면 할례를 베푼다는 구약의 원리를 따라 신약의 교회에서도 언약 공동체 안에 있는 가정에 자녀가 출생하면 공동체 안에 있다는 의미로 세례를 베푸는 것이 성경적인 원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신교 특징상 구원의 수단으로 보지 않는다.

2) 침례교의 경우 신자의 침례를 주장하는데 이는 성경에서 침례요한이 회개 후 침례를 주장하였고, 예수도 제자를 삼은 뒤에 침례를 주라고 분부했다는 것에 기인한다.

 

출처: 복음뉴스 독자공간 게시판

주일성수에 철저하기로 소문난 구역장이 주일 예배에 빠졌습니다. 무슨 큰일이 생긴 줄 알고 예배를 마치자 마자 전화했더니 “오늘이 손(損) 없는 날이라 이사해야 한다며 빠졌다” 는 것입니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믿음 있는 구역장이 그러면 안 된다고 목사님이 야단을 쳤는데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들 그런다는 것입니다. 이사하는 것과 손(損) 없는 날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도대체 손(損) 없는 날이 뭐예요?
 
우리나라의 이사풍속에서 이사를 가려고 할 때 흔히 “손(損) 없는 날”을 골라야 한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그러므로 손(損) 없는 날이란 어떤 날을 뜻하는 것인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한국인의 이사풍속은 한 마디로 기복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좋은 곳으로 이사를 한다는 것은 복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이사를 해서 잘 살게 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에로부터 이사 갈 집의 방향에 따라 건강, 사업, 재물, 가정 등이 잘되거나 잘못된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래서 액운이 있거나 불길한 일이 생길 것으로 예측되는 방향으로는 이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사할 때 일진(日辰)과 방위(方位)를 보아 이사 날짜를 정했으며, 일진 나쁜 날(손(損) 있는 날)에 이사를 하게 되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방위와 일진을 보아 길일(吉日)을(손(損) 없는 날) 택일하여 이사했습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생활문화 중 이사풍속만큼 다양한 것도 드물 것입니다 이사풍속은 이사 전후 풍속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1. 손(損)의 의미

한국인의 “손(損)”이란 날짜에 따라 사람들이 가는 쪽을 따라 다니며 심술을 부리는 귀신(鬼神)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손(損)”이란 말은 궁핍한 시대의 부담스러운 손님을 고민했던 데서 유래해다는 설이 있는데 “두럽다”는 뜻으로 쓰여 멀리 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선시대 천문과 지리에 통달한 승려 영관(靈觀)의 저서 잡록(雜錄)을 살펴보면 “손(損)”의 해코지. 즉 태백살(太白煞)의 실례가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백제의 명장 계백(階伯)장군의 패전입니다. 신라군과 최후의 일전이 벌어진 황산벌 싸움에서 계백은 “적군의 방향에 ”손(損)“이 있으니 후면으로 우회해 역습하자는 부장의 말을 듣지 않고 정면으로 신라군을 맞았다가 대패 했다는 것입니다.

“손(損)”에 대한 근원은 불교의 한 파인 밀교의 천문 해석법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것이 우리민족에게 도입된 것은 삼국 시대 초기 불교가 전래된 즈음이었습니다. 거의 2000년 동안 이 한국의 생활을 지배해왔던 것입니다.

한국 전통문화 치유에 관심 있는 목사로서 한국전통 문화를 따르는 크리스챤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대해 깊은 우려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생활신앙은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권에 의해서 일진(日辰)과 방위(方位;동서남북)를 보아 이사 날짜를 정하고 길일을 택일해서 이사를 하는 것을 누구도 부인 할 수가 없다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손(損)이란 날수에 따라 동서남북(東西南北) 4방위로 다니면서 사람의 활동을 방해하고 사람에게 해코지한다는 귀신(鬼神)을 뜻하는 의미로서 “손님”을 줄여 부르는 것입니다.

방위 날짜 쪽에 귀신이 움직이지 않는 날을 “손(損) 없는 날”이라고 해서 귀신이 역사 않는 날로 각종 택일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유명 연예인 다섯 쌍이 같은 날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 날이 손(損) 없는 날인 길일(吉日)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기독교 연예인도 몇 명 있었다는 것이 가슴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 기독교 단체가 운영하는 결혼예식장 예약실 안에는 달력이 하나 준비돼 있습니다. 그 달에는 빼곡히 빨간 펜으로 표시해 놓은 것입니다. 바로 소위 “손(損) 없는 날에 결혼예식 치르기 좋은 날로서 액(厄)이 끼지 않는 날” 등으로 기록 되었습니다.

상담하는 직원은 아주 자연스럽게 상담을 받으러 오는 사람에게 이 달력을 보이면서 결혼예식장 대여 날짜를 잡으려고 합니다. 기독교 신문 기자임을 밝히고 기독교 단체가 운영하는 결혼예식장에서 이런 것을 참고해도 되느냐는 질문에 당황한 상담 직원은 황급히 “누가 그냥 갖다 준 것” 이라면서 달력을 치우는 모습을 보았다고 필자를 취재한 기자에게서 들었습니다. 상담직원은 솔직히 많은 사람들이 소위 결혼하기 좋은 길일(吉日)의 날을 찾는다고 밝힌다고 합니다. 결혼예식장을 운영하다 보니 많은 이들이 이와 관련된 손(損) 없는 날을 참고로 하고 있다는 설명 이였습니다. 얼마나 한국 전통문화가 기독교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의 반증입니다.

2, 손(損) 없는 날의 의미

손(損) 있는 날이란 손실, 손해를 본다는 날로서 예부터 악귀(惡鬼)와 악신(惡神)이 움직이는 날을 말합니다. 그래서 악귀와 악신이 움직이지 않는 날을 손 없는 날이라고 해서 각종 택일(擇日; 좋은 날을 보는 것이 아니고 나쁜 날을 따져서 나쁜 날을 피하는 것))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매일 한 쪽 방위에서 ‘손(損)’이 있어서 그 방위에선 악신이 활동하여 매사를 방해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손(損)은 음양오행 원리에 의하면 금기를 받아 우주의 숙살(肅殺)을 주관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숙살은 죽이는 기운이나 독하고 모진 기운을 뜻하며, 무서운 악귀(惡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손(損)은 날짜에 따라 동서남북 방위로 돌아다니며 인간 생활에 해(동티)를 주는 것으로 인식되어왔기 때문에 “손(損) 없는 날”을 택일해서 이사나 결혼이나 집수리를 하고 묘지를 이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특히 음력 그믐날은 “손(損) 없는 날” 이라고 해서 만사형통(萬事亨通)하는 날인 길일로 여겼습니다. 음력 그믐 외에도 9일과 10일, 19일과 20일, 29일과 30일은 악귀(惡鬼)가 하늘로 올라가서 땅에는 어느 쪽에도 “손(損)이 없는 날”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사를 하거나 사업장의 개업 등에 손(損) 없는 날을 택하여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손(損) 없는 길일(吉日)에 이사할려면 평일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하고 이사하는 것이 한국에서는 생활상식이 된지 오래입니다.

참고로 평일 “손(損) 있는 날”을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동(東)쪽 방위에 손(損)이 있는 날은 - {1,2. 11,12, 21,22} 일.
서(西)쪽 방위에 손(損)이 있는 날은 - {5.6. 15.16. 25.26] 일.
남(南)쪽 방위에 손(損)이 있는 날은 - {3,4. 13.14, 23,24} 일.
북(北)쪽 방위에 손(損)이 있는 날은 - {7.8 17.18, 27,28} 일에
사람들을 괴롭힌다고 합니다.

즉 음력으로 초하루/초이틀은 동쪽, 초사흘/초나흘은 남쪽, 초닷새/초엿새는 서쪽, 초이레/초여드레는 북쪽에 있다가 나머지 이틀간은 사라진 뒤 열하루에 다시 동쪽에 나타나는 등 열흘 간격으로 순환을 하는데, “손(損)”이 있는 방위에서 이사나 혼인 등 주요행사를 벌였다가는 큰 흉을 당한다고 선조들은 믿어왔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집에서도 손(損)이 있는 방위 쪽에는 못질도 못했습니다. 필자의 어머니께서는 예수님 믿고서는 무슨 일을 해도 탈(동티)날 일이 없으니까 좋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이 납니다. 믿음 있다는 구역장님이 손(損)이 없는 날을 택해서 이사 했다는 것은 한국교회 미래를 심각한 마음으로 고민 할 때라고 생각을 합니다.

3, 이사 전후 여러 풍속들

이사 전 여러 풍속에서는 택일 “손(損)이 있는 방위”에서 이사하면 큰 흉을 당한다고 믿어 왔고, 그리고 손(損)이 없는 날 이사를 했어도 불안함으로 이사 후 후속조치로 여러 가지 이사풍속들이 있습니다.

첫째, 이사 가서 붉은 팥을 고물로 한 시루떡을 해 먹는데. 그 이유는 붉은 팥(벽사)의 주력으로 귀신(鬼神)을 좇아내고, 이사한 뒤에 부적을 부착하여 나쁜 액운(厄運)이 닥치는 것을 예방 하기 위한 것입니다.

둘째, 부정을 억누르기 위한 풍속으로 이사 가는 날에는 머리를 부엌 쪽으로 향하여 잠을 잡니다. 한국 사람들이 잠자는 습관은 대개 머리를 부엌의 반대쪽으로 향하여 자는데 부엌 쪽으로 향하여 잠으로써 부정을 방지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재액(災厄)을 면하기 위해서 머리를 부엌의 반대쪽으로 향하여 자던 습관을 부엌 쪽으로 향하여 잠으로써 가택신앙 신(神)들에게 너그럽게 보아 달라는 의미입니다

셋째, 이사를 간 후 가택 신을 모십니다. 우리 조상들은 새 집에 입주하였을 때나 이사를 갔을 때는 아무런 재액(災厄) 없이 복을 누리며 살고자 가택 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성주 신는 한 가정의 최고의 신으로써 가내의 재복과 길흉을 주관하는 신으로 믿었으며. 터주 신은 지신을 말하는데. 특히 택지를 담당하는 신을 터주신이라고 합니다. 터주신은 자기가 관장하는 가내의 땅을 지키며 잡귀의 침범이나 재앙을 막아주기도 한다고 믿었고, 조왕신은 부엌신이기도 하고 때로는 아궁이를 관장하는 화{불}신이라고 믿었고, 업 신은 재산신의 한가지로 구렁이 두꺼비. 족제비 등을 업 신으로 여깁니다. 대개 종가에서는 이러한 업 신이 집으로 들어오는 것은 부자가 될 징조라 하여 해치거나 내쫓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업 신에 대해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있습니다.

넷째, 이사 후 악귀(惡鬼)를 물리치기 위한 풍속으로는 팥죽을 끓여서 집안의 여러 곳에 뿌립니다. 귀신은 붉은 색을 무서워하므로 붉은 팥의 주력을 이용하여 이사를 간 집에 붙어 있을지도 모르는 악귀를 몰아내고자 하는 행위로 팥죽의 주력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 문헌인“형초세사기”에 그 기록이 있습니다.

참으로 한국인의 무속신앙은 이사도 여행도 모든 생활들을 마음대로 못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논과 밭에서 일하면서 음식을 먹기 전에 부모님께서는 반드시 ‘고시래’(산과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나 이바지가 왔을 때 음식물을 조금 떼어 던지면서 외치는 소리, 또는 그렇게 하는 행위. 흔히 ‘고수래'라 하고, 강화도 지역에서는 '퇴기시레라 합니다.

이는 신에게 바치는 공희(供犧)의식인데, 잡신에게 제물을 떼어주고 달래어 쫓는 한편, 먼저 제물을 바쳐 감사의 뜻을 나타내는 것)하고 먹었습니다. 즉 주위에 있는 잡귀신에게 먼저 주지 않고 먹으면 잡귀신들이 해고지로 동티(탈) 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지요. 귀신은 섬기면 섬길수록 더 많은 귀신을 데리고 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조들은 귀신의 해코지 때문에 굿(㖌)하다 망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2010년 손 없는 날 한국 교회 전문 결혼예식장 달력사진

4, 손(損) 없는 날에 대한 기독교 적인 이해

앞서 필자의 어머님께서 예수님 믿으니 무슨 일을 해도 동티(動土;금기된 행위를 했을 때 귀신을 노하게 하여 받는 재앙의 하나. 구체적인 징후로는 질병으로 나타나고 심하면 죽게 됨)날 일이 없으니 마음 편안하니 좋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권능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에게는 손(損) 없는 날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주일까지 범하면서 손(損) 없는 날 이사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귀신(鬼神)을 더 무서워하는 불신앙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날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지 않으면 사람이 아무리 애쓰고 피해도 헛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시23;1-3)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사 날은 주일이 아니면 아무 날을 택해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신앙형태를 보면, 생각은 불교적(佛敎的)으로 하고, 생활은 유교적(儒敎的)으로 살고, 신앙은 무속(巫俗)적으로 믿는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필자는 무속신앙이 한국 기독교를 병들게 하고 혼탁하게 하는 부정적인 정서인 “한국교회와 무속신앙”이란 주제로 장기간 기독교 신문에 연재를 했습니다. 이것을 엮어서 “한국교회와 무속신앙” 1권, 2권, 3권, 4권” 씨리즈 책으로 출간을 했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다른 외래종교들과 같이 무속신앙화 되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필자는 승려생활에서 개종한 목사로서 많은 한국기독교인들이 무속신앙(巫俗信仰)과 기독교 신앙의 구분을 잘 알지 못하고 따르면서 무속적인 이사풍속인 날짜를 따져서“내일은 손(損) 없는 날이니 이사를 하자“, ”내일은 손(損) 있는 날이니 이사하지 말자“하고 무속적인 것을 지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손(損) 없는 길일(吉日)에 이사 하려면 평일 때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하고 이사하는 것이 한국에서는 생활상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의 이사풍속은 한 마디로 무속적인 영향에 있다고 말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사한 후에도 팥고물로 만든 시루떡을 해 먹는 것도 붉은 팥의 음양(陰陽)사상에서 양(陽)의 주력으로 음(陰)의 귀신을 쫓아내고 재앙을 몰아낸다는 일종의 무속신앙인 셈입니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성경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야겠습니다. 무속신앙과 융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생활 속에 녹아 있는 무속적인 신앙생활을 하나님 말씀으로 여과시켜 진실한 기독교 진리를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해야겠습니다. 이것이 미래의 한국교회를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요한 8;44-45)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 하는 도다 ”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처: 아멘넷, 서재생 목사님 칼럼 글

믿음은 선택입니다


찬송 : 212장 겸손히 주를 섬길 때 

성경 : 여호수아 2:15~21

요절 :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21)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하여 여호수아는 가나안의 길목 성읍인 여리고에 두 사람의 정탐꾼을 보냅니다.이들은

그곳을 정탐하다가 여리고 당국에 발각돼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렇게 쫓기다가 기생 라합의 집에 숨어 들어갑니다. 여기서 라합은 의외의 행동을 보입

니다. 라합의 입장에서는 두 정탐꾼을 당국에 고발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외부의 정

탐꾼을 신고해서 여리고 성을 보호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그것은 천대받는 신분을 바꿀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들을 신고한다면

그녀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또한 현상금으로 경제적인 어려

움도 해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포기한다 해도, 이 정탐꾼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이들은 '반드시 너와 네 가족을 구원해 줄 것'이라며, 창문에 붉은 줄을 매어 두라고 합니

다. 그런대도 라합은 그들의 말을 듣는,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


무엇이 라합으로 하여금 이런 행동을 하게 됐을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에

관한 말씀을 듣고서 '인생을 걸 수 있는 진정한 분'이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물론 정탐

꾼들을 숨겨 주었을 때 두럽고 불안했을 것입니다.


발각 된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믿음의 선택을 했습니다. 왜냐하

면 하나님을 믿은 신앙은 목숨을 걸 만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라합은 기생 노릇을

하면서 인간의 추악하고 거짓된 양태들을 다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허무한 인생에서 벗어날 신앙적 대상을 찾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과감

히 목숨을 걸고 믿음의 선택을 했습니다. 히브리서는 그녀가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

께 멸망당하지 않기 위해 믿음으로 결단했다(11:3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라합을 통하여 다윗 왕이 나오고 후에 메시아가 오셨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은 구속

역사의 중심에 그 여인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

다.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은 그가 누구든 끝까지 첵임져 주십니다.


* 오늘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기도

우리의 인도자 되시는 하나님, 우리 앞에 어떤 상활과 환경이 온다해도 늘 믿음을 선택하게

하옵소서. 끝까지 책임져 주시고 복의 복을 더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갈등 없이 주님

이 원하시는 길로 기도록 우리를 붙잡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정만 목사  효창교회

 


진노의 날에 남을 자의 생활 

( 합 3 : 1 - 2, 12 - 19 ) 

 

서 론 

가장 복 있는 자는 진노의 날에 남을 자이다. 하박국의 묵시는 진노의 날에 남을 자에 대하여 나타난 묵시이다. 이 진노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북방 세력을 들어서 세계를 어지럽히게 할 때에 심판의 위령이 북방의 침략자에게 있게 하여 남은 자로서 승리케 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이 묵시를 보여준 것이다. 1장은 북방 세력이 일어나는 일을 보여 주었고 2장은 북방 세력이 망할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진노의 날에 남을 자의 생활이 어떤가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1. 주의 일을 부흥케 하기 위하여 생활을 할 것 (1-2) 

누구든지 진노의 날에 남은 자가 되려면 각성을 받고 일어나서 주의 일을 부흥케 하기 위하여 전심 전력을 하는 자라야 진노의 날에 긍휼 함을 받게 되는 것이다. 북방으로부터 환난이 오는 것은 부패한 지도자를 없이하려는 목적이니 누구든지 자기의 사적인 생활을 버리고 주의 일만 부흥케 하기 위하여 전 생활을 바치는 자라야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진노의 날에 남은 자가 되려면 세 가지가 철저해야만 될 것이다.

첫째는 시기가 임박한 것을 철저히 깨달아야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수년 내에 부흥케 합소서 라고 한 것은 철저한 깨달음이 있는 종에 대하여 가르친 말이다. 여러 가지 징조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북방의 세력이 세계를 침투해 나오는 때에 조금도 사적인 생활에 얽매이지 말고 주님의 일만 부흥케 한다는 철저한 각오가 있어야만 진노의 날에 남은 종이 될 수 있다.

은혜 시대의 종들도 순교를 한 종들은 조금도 자기 사적인 생활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 사명 하나를 위하여 전력을 기울여서 순교를 하기까지 싸웠던 것이다. 하물며 진노의 날에 남은 자가 될 자들이 조금이라도 자기 사적인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 없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둘째는 주님의 긍휼을 기다리는 마음이 불타야 된다.

“주여, 나를 긍휼히 보시옵소서” 하는 마음에서 모든 일을 진행하여야만 된다. 사람이 아무리 인정한다 하여도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다면 진노의 날에 남을 자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의 긍휼을 기다리는 종은 무엇이나 주님을 위주로 해서 억울함을 참고 나가야만 되는 것이다. 

셋째는 주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한 것은 그만큼 주님을 갈망하는 뜻을 표시한 것이다. 주님의 재림을 갈망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마음은 주님과 멀어지는 증거이며 세상의 것을 괴로워하지 않는 증거이다. 주 재림시기에 되어지는 모든 일은 1장과 같이 성도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만 있기 때문이다. 주님이 재림할 때에는 죽고 싶으나 죽음이 피하리만큼 시련이 올 것을 계9:4 이하에도 가르쳤다. 괴롭다할 것을 괴로워하지 않는 것도 그 양심이 죽은 것이다. 오늘날 모든 일은 합1장과 같이 되는 시대이니 주여 나타내시옵소서 할 수밖에 없는 때가 이때인 것이다. 

 

2. 기름 준비가 있는 생활 (12-13) 

아무리 진노의 날이 와도 주께서는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오시는 것이다. 항상 임박한 시기를 만날 때에 각성을 해서 주의 일만 부흥케 하려는 자에게는 기름 같은 성신의 역사가 충만해지므로 진노의 날에 남을 자가 되는 것이다. 

 

3.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는 생활 (17-18) 

아무리 세상에 육적으로 낙심할 일이 온다 하여도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는 생활을 한다면 하나님의 역사가 같이 하는 증거이니 진노의 날에 남은 자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물질적으로는 생활이 풍부하다 하여도 중심에 여호와를 기뻐하는 일이 없다면 망할 것이지만 그와 반대로 아무리 궁핍한 환난에서 딱한 사정을 만났다하여도 여호와를 기뻐하는 자라면 남은 자가 될 수 있으며 또한 마음이 변치 않는 사람이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4. 사슴 같이 뛰는 생활이다 (19) 

아무리 앞길이 막막한 일이 있다 하여도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받고 사슴같이 뛰는 자라면 모든 일이 다 형통케 되므로 성산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진노의 날에 남을 자는, 자기 힘을 의지하는 자는 쓰러지지만 하나님의 힘을 받은 자만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결 론  

가장 복 있는 자는 진노의 남은 자로 재림의 주를 영접하는 자이니 우리 사명자는 이 시기가 하박국의 묵시에 의하여 어떠한 때이며 어떻게 생활을 하여 나가야만 진노의 날에 남을 자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출처: 목양연가/성령중만

불법을 자행하는 무서운 사람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시니" (마 7:22~23)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위의 성경구절은 많은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이 자주 사용하면서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종교라는 테두리 안에 자행되어지는 행위 속에서 볼 때는 위에 내용이 불법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그것을 '불법'이라고 천명하신 말씀이다. 


여기에 많은 분들이 그것이 왜 불법이냐? 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는 히브리어로 ‘포아레 하아벤’으로 “불법을 행하는 일꾼들”이라는 뜻이다. “불법”인 ‘하아벤’은 우상숭배, 거짓됨, 헛됨, 존재하지 않음이라는 뜻이다. 거짓되고 헛된 존재에게 우상처럼 여기며 숭배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생명이 없는 존재에게 자신의 물질을 바치며 목숨을 걸고 섬기는 행위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법을 인간의 생각과 판단으로 잣대를 만들어 존재하지도 않는 법을 참 하나님의 법으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범법 행위를 말한다. 


성경에서 언급된 법을 기초로 올바른 규정을 해야 되는데 사람의 생각과 판단으로 이해해 버리고 규정해 버리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을 거들먹거리면서 선지자 노릇, 성직자의 언행과 습관에 젖어 있는 모습을 의미한다. 


또 귀신을 쫓아내는 것인데 진짜 귀신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드러난 귀신만 쫓는다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귀신은 하나님의 사상과 생명을 잘못 받아들여진 상태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근본적인 생명과 본질을 찾아 먹지 않으면 이상한 괴물로 변하게 되어 있다. 


그 증상이 금방 나타나지 않고 있을 뿐, 모양새는 점점 이상하게 변형되어 가고 있는 심각함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처음은 미약하나 나중에 점점 걷잡을 수 없을 정도 흉악한 존재로 변한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경우) 


선진 국가뿐만 아니라 미개발 국가인 어느 나라에도 법은 존재한다. 이 법이 규정된 곳에 들어가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약속이다. 이 약속을 깨뜨리고 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을 하게 되면 불법 행위자로 처벌을 받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에도 법이 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이 십계명만 들먹거리는데 사실은 창세기 1장의 창조의 원리가 제일 먼저 규정된 법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혜의 법을 피조물인 사람에게 주신 것은 말씀을 배움으로 익히고 적용하며 삶속에서 실천해 나가므로 육의 속성을 깨뜨려 나가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법이다. 그런데 인간은 육의 속성에 안주하면서 그 육의 속성을 깨뜨려 나가기를 거부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우고 묵상하면 되는 줄 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혼의 세계에서 작동되어지는 지각을 동원하여 생각과 판단 속에 감정으로 받아들이며 자기 나름대로 행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이다. 


창조의 원리 속에 담겨진 내용을 통과하면서 본래적인 육의 속성을 깨뜨려 나가야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게 되고 통치를 받게 되는 것인데 이 깨뜨림의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고난이 없는 부활의 축복만을 받겠다는 헛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위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과하면서 본래적인 육의 속성을 깨뜨려 소멸시켜 나가지 않는 것이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익혀서 삶 속에 적용해서 육의 속성인 혼돈과 공허와 무지를 깨뜨려 나가는 것이 법을 지켜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법을 무시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고 불법을 행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 대신에 사람의 법을 만들어서 그 법을 우상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말씀도 전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치고 각종 권능을 하였다고 자랑하고 있다. 


누구 못지않게 예수를 믿고 예수의 이름으로 아멘하고 일을 하였다는 것이다. 신학을 나오고 목사 안수를 받고 천사가 흠모할 만큼 사역을 하여 신앙의 이력을 내놓을 것이다. 그런데 결론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무서운 심판 선언문 뿐이다. 


“내게서 떠나가라”는 히브리어로 ‘쑤루 밈메니’다. ‘쑤루’는 떠나다, 머리를 잘라내다, 제거하다, 쫓아버리다 는 뜻이다. ‘밈메니’는‘ 나의 나눔으로부터’ 라는 뜻인데 나의 기준으로 살아가던 법에서 나누어지고 떨어져 나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을 물려 받았다는 인간의 오만한 착각에서 벗어나기를 원 한다면 우상숭배하는 머리를 잘라 버리라는 의미로 인간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한 불법에서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규정하여 만들어진 신학, 목회철학, 신앙관들을 갖고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거짓 행위를 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아실 리도 없으신 것이고 인정해 주실 수 없는 준엄한 심판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과정에서 법으로 세우셨다. 이 법안에서 행하는 것만이 생명이고 진리고 길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본체다”라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다. 그리스도 예수의 본체이신 창조의 원리 과정 안에 있지 않고 벗어나서 행하는 일체의 모든 것을 불법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제시한 선지자 노릇이나 귀신을 쫓고 권능 행한 것이 진정 창조의 원리과정 안에서 행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 마음대로 한 것인지를 먼저 성찰해야 할 것이다. 불법을 행하는 자의 형식적인 믿음은 겉으로 실체처럼 있어 보이나 죽은 믿음이다. 믿음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 믿음이 없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을 우상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계명으로 바꾸는 외식하는 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불법을 행하는 존재들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으로 여기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혼적으로 생각,이성으로 판단하여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모두다 불법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기초가 세워져야 하는데 그러한 기초와 바탕이 없는 외형적으로 지어진 집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집을 지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인데 하나님의 법이 바탕으로 기초가 튼튼하게 세워져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다른 영,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다. 은사를 행해도 전혀 마귀 사탄과 싸워서 이기는 은사를 권장하지 않는다. 금이빨, 손바닥에 금싸라기가 떨어지는 것이 성령의 은사로 착각하게 만든다. 이런 유의 은사는 다른 종교에서 얼마든지 나타나고 있다. 


마귀 사단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은사가 나타나야 하며 세상과 나는 간데없고 구속한 주이신 생명의 본체만 드러나야 한다. 예수 이름을 사용했지만 전혀 나에 대해서는 도구로만 사용되어져야 한다. 


내가 새벽기도를 몇 시간을 했거나 밤을 세워 기도한 날이 얼마가 된다거나 금식을 얼마동안 했으며 성경을 몇 백, 몇 천 독을 했다는 것조차도 명함을 내밀지 말아야 한다. 내가 기도해서 병이 고침을 받았다거나 나를 통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마저도 자랑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만약에 그런 간증이나 고백을 했다면 이미 상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아직도 어둠에 머물러 있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 신광철 목사 (안성 대림교회)

좋은 마음으로 살아요


찬송 : 379장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성경 : 요한복음 11:45~53

요절 :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46)


오늘 본문은 모여서 예수님을 잡아 죽일 모의(謀議)를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이전에 예수

님은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리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현장에 있었던 사

람 대부분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은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일러 바쳤습니다. 그러자 대

제사장들은 야단법석을 떨며 공식 회의까지 열어 예수님을  붙잡아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

다. 이 회의에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 성전을

파괴하고 민족을 짓밟을 것이요," 예수님이 죽은 자도 살려 냈으니 구주로 믿으면 되는데,

오히려 예수를 믿으면 로마와 전잰을 하게 될것처럼 말합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이렇게 말하면서 결의를 유도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는 것

이 민족 전체가 망하는 것보다 유익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시오?" 공익과 공공의 안

전을 위해 예수를 희생양으로 삼자는 말입니다.


하지만 복음서 기자는 예수님게서 이스라엘을 위해 죽으실 것을 가야바 자신도 모르게 예

언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51) 결국 가야바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기보다 적으로 간

주해서 죽일 계획을 완성했습니다.


이성과 정의가 권력자에 의해 무시된 것입니다.이사야의 예언처럼 "정의가 뒤로 물리침이

되고 공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나타나지 못한 것 (사 59:14)

입니다. 공공의 안녕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은 일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자신이 가진 권세를 정의롭게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

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하는 정치인들을 우리는 그다지 신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타

까운 현실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법과 음모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큰사랑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

다. 권모술수(權謀術數)가 일시적으로 통할 수는 있어도 주님의 뜻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우리도 타인을 향한 중상(中傷)과 모략(謨略)은 접고. 무술년 새해에 좋은 마음만 담으며 살

것을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이 많은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 공익을 위한 일인 척 하면서 내 욕심을 채운 적은 없습니까


기도

우리를 악에서 구해 주신 하나님, 무술년 한 해를 사는 동안 선행하며 살게 하옵소서. 가족과

이웃들을 칭찬하는 일에도 인색하지 않게 하소서. 남을 해롭게 하는 일은 하지도 않을 뿐더

러 악한 일은 돕지도 않게 하소서. 빛이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손석동 목사  서울시흥교회

라은성 교수의 교회사 맥 잡기 (3-2)-최초의 변증가

▲ 라은성 교수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등에서 교회사를 가르쳤고 현재는 교회사아카데미의 대표로 후학들을 길러내고 있는 라은성 교수가 잠자고 있는 교회사의 면면들을 다시금 깨워냅니다. 크리스천투데이는 매주 목요일 라은성 교수의 교회사 맥잡기를 연재할 예정입니다. 힘차게 박동하는 맥을 타고 생명의 기운이 흐르듯, 라은성 교수와 함께 역동하는 교회사의 맥을 짚어봅시다. -편집자 주




두 번째와 세 번째에 대해 그는 영이 하나님과 유사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영은 불멸한 존재가 아니라 세상처럼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죽지 않을 것이고 더 나은 장소든지 더 나쁜 장소든지, 어디에든 살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설명을 듣던 유스티누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관에 대한 절망감을 갖게 됐습니다. 좌절 가운데 있는 그에게 나이 든 사람은 구약성경의 선지자들과 그리스도를 소개했습니다. 그분으로 인해 궁긍적인 진리, 즉 하나님에 대한 모든 궁금증이 풀려진다고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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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유스티누스는 진리의 종교인 기독교로 개종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당시에 유스티니누스는 자신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기독교인들의 흠잡을 데 없는 삶이며 다른 하나는 핍박에 대한 경멸이었습니다. 그의 직접적인 말을 들어보도록 합시다.


내가 플라톤의 가르침들을 기뻐했을 때, 기독교인들에 대한 중상모략을 들었을 때, 그리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것이나 심지어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을 보았을 때, 나도 역시 그들이 사악하게 살고 있다고 믿기 어려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호색적이거나 난폭한 자들 또는 육욕적인 축제를 즐거워하는 자들은 자신의 즐거움을 빼앗을 수 있는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현실에서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될 경우 또 지배자들의 권력으로부터 피하려고 했을 때 죽음을 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행위들은 사악한 자들이 사악한 귀신들의 조종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여 거짓된 고소들을 행하는 자들은 어린이들 또는 연약한 여인들을 고문하기 위해 끌어내었고, 공개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황당무계한 행위들을 인정하라고 강압적으로 위협했습니다. 이런 행위들에 대해 우리는 전혀 모르는 바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상들과 행위들에 대한 증언자이신, 태어나시지 않으시고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부끄러워하십시오. 부끄러움을 느끼십시오. 공개적으로 행한 그들의 범죄들이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고소하는 당신들의 행위에 대해 부끄러워 하십시오. 오히려 그들에 대해 조금의 동정심도 가지지 않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시기 바랍니다. 개종하십시오. 현명하시기 바랍니다.(유스티누스 변증서 212)


    

플라톤의 교훈에 심취하여 살았던 그는 기독교의 교훈 외에 다른 것들은 모두 귀신적 기원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참된 교훈, 즉 불변하는 진리를 기독교에서 찾은 것입니다.


진리를 찾고자 방황했던 유스티누스는 철학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어리석은 진리라도 깨달으면서 만족을 누렸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참된 진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그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진리는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었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만들어졌고 유지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진리는 인간의 노력, 즉 이성으로 결코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인간의 이성에게 깨닫도록 하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유스티누스는 진리에 대해 답답해 했는데 그것이 마치 안개가 걷히듯이 맑아지는 체험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개종의 체험입니다. 인간의 노력이 요구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 즉 진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유스티누스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진리를 찾은 유스티누스는 진리를 변증하기로 마음을 굳게 정합니다. 150년 그는 로마로 가서 철학학교를 세워 다른 철학자들과 다른 기독교 교사들과 논쟁을 활발하게 합니다. 그 가운데 로마제국은 자신들이 만든 우상들에게 헌주(獻酒, libation)를 드리라고 강요할 뿐만 아니라 경건한 기독교인들에게 사악한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것에 반대하거나 응하지 않는 자들은 여차 없이 로마 장관 루스티쿠스 앞에 소환되었습니다. 물론 유스티누스도 그의 명령에 불복종했기 때문에 끌려왔습니다. 제신들에게 복종하고 제왕들에게 굴복하라는 명을 듣자 유스티누스는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나 정죄를 받아야 할 일이 아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주의를 고백하고 있느냐고 묻는 질문에 유스티누스는 모든 주의들을 배우려고 노력했지만 기독교인들이 신봉하는 주의, 즉 교리를 마침내 가지게 되었고 그들은 거짓된 견해들을 고수하는 자들과는 다르다고 대답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교리가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 유스티누스는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신 분일뿐만 아니라 그분의 독생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선구자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그분에 대해서는 옛 선지자들이 인간으로 오실 것을 이미 예언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유스티누스에게 더 이상 질문이나 답변을 가지고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루스티쿠스는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집회 장소가 아디냐고 묻었습니다. 이에 대해 유스티누스는 기독교인들의 집회 장소는 정한 곳이 없다고 말한 후 다시 추궁을 받자 마티누스의 집 이층에서 모인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인이냐는 질문에 유스티누스는 담대하게 자신은 기독교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배운 자이며 참된 교리를 알고 있는 자로서 채찍질을 받거나 참수형을 당한다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느냐는 질문에 유스티누스는 이 모든 일들을 참는다면 그분의 선물을 받게 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경건한자들은 결코 제신들에게 희생제를 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 있게 말했습니다. 화가 난 루스티쿠스는 응하지 않으면 무시무시한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위협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스티누스는 어떤 기독교인이라도 우상들에게 희생제를 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루스티쿠스는 명을 내려 유스티누스를 참수형을 시키라고 했습니다.


결국 귀중한 그리스도의 증인 한 분 유스티누스는 그분 앞으로 갔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생명으로 대신할 만큼 고귀한 유스티누스야말로 진정한 순교자라 여깁니다. 진리를 찾기를 원했던 그는 그 진리를 위해 살아가는 경건한 기독교인들로 인해 이방 철학으로부터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고 기독교에 대한 진리를 가르치다가 그 진리를 위해 생명을 바쳤습니다. 진리를 위해 순교하는 자들을 통해 기독교인이 된 그는 자신도 기독교 신앙을 위해 순교하므로 더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데 큰 역할을 감당하게 이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를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됩니다. 진리를 찾다가 진리를 발견했고 진리에 따라 살다가 진리를 위해 순교한 유스티누스는 기독교 최초의 진정한 변증가였습니다. <>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207092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아이가 어릴 때 부화기를 사서 매추리알을 부화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같은 알이라고 해서 다 부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유정란을 사용해야만 합니다. 무정란은 아무리 오랜 시간을 부화기에 넣어 두어도 결코 부화되지가 않습니다.


처음에 열 몇개의 알을 구해서 넣었는데 다른 알들은 때가 차니 다 부화해서 나오는데 간혹 예정시간보다 하루 이틀이 길어지는 것들이 있어 알을 깨보면 아무런 변화가 없는 무정란이었던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중간에 혹시나 확인한다고 알을 깨어버렸다가 잘못하면 죽을수도 있기에 휴대전화에 있는 후레쉬를 켜서 알을 비춰보면 어렴풋하게나마 안에 생명이 자라고 있는지 아닌지 유무를 어림짐작해 볼 수도 있었습니다.


여튼 미물 하나가 알에서 깨어나고 생명으로 자라나는데도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데 하물며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받아 단단한 자아의 껍질을 스스로 깨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출현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정성을 필요로 합니다.


본문에 기록된 말씀은 마치 이렇게 어미닭이 유정란을 소중히 품고 있듯이 알을 품고 있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지구를 하나님의 성령께서 소중히 품으심으로써 각종 생명들이 창조된 것과 같이 오늘 이 시대에도 새창조의 생명을 부화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교회를 소중히 품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교회 안에는 유정란도 있고 무정란도 함께 섞여 있습니다. 무정란이라고 해서 교회 안에서 성령의 감동과 은혜를 받는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 다양한 은사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사울왕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고 특별한 은사를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버림받은 것과 같이 무정란과 같은 교인들은 교회 안에서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은혜도 받으면서 함께 섞여서 생활하지만 최종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오랜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도 듣고 은혜를 받아도 무정란과 같이 속에서 생명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니 십자가를 통해 단단한 자아가 깨어지고 부서짐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 속에 유정란과 같이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새겨지고 그 말씀이 계속해서 자라다 보면 지금 당장은 눈에 띄지 않고 변화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그 깊은 속에서는 엄청난 갈등과 몸부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과 몸부림을 통해 해산의 과정을 거치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사람이자 당당한 하나님의 아들들로써 나타나며 또한 점점 더 그 키와 지혜가 자라면서 위용과 진가를 드러내게 되는 법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있는 수 많은 신자들을 볼 때 초기에는 전혀 표가 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감별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이 떠지게 된다면 비록 아직은 단단한 자아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일지라도 어렴풋하게나 그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으며 더욱이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스스로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해서 단단한 자아의 껍질을 깨부수고 나올 수 있도록 격려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창세기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영께서 지구 위에서 알을 품듯이 운행하셨던 것과 같이 어둡고 죄악으로 관영한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생명으로 잉태되고 단단한 자아의 껍질을 십자가의 능력으로 깨부수고 나올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의 씨를 분명하게 받으셨습니까? 그리고 이 받은 말씀을 가지고 성령님의 감동감화를 통해 생명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습니까? 또한 이에 머물러 있지 않고 완악하고 단단하 자아의 껍데기를 십자가의 능력으로 께어 부수고 이 세상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지혜와 키가 자라나신것과 같이 점점 더 예수님을 닮고 하늘에 앉힌바 된 신앙인으로 나날이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똑같이 말씀을 듣고 은혜도 받기는 하는데 도무지 속 생명의 변화와 몸부림조차 느끼지 못하며 입으로는 십자가를 말하고 있지만 전혀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채 단단한 죄악의 자아에 갇혀 결국 심판날에는 속에 아무것도 없는 무정란과 같은 존재로 버림받을 존재로 방치되어 있습니까?



출처: 이웃 블로그 / 페드로우

작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목회자요 신학을 오랜동안 공부한 나의 예전 친한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충격을 받은 사실은, 그가 사회주의 내지는 공산주의를 옹호하면서 그게 성경적이라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몇 년만에 하게 된 통화는 결국 논쟁으로 끝이 났다.


바벨탑에서 시작하여 무신론, 유물론, 진화론, 공산주의, 사회주의, 주체사상, 인본주의, 적그리스도의 영으로 이어지는 사슬에서 빠져나오길 간절히 바란다!




한국사회에 역사하는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영에 대한 고찰 (1)


꼭 필요한 글이라는 생각이 있어서 글을 쓰지만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 없어서 시작하지 않았다. 그러나 잊어버리기 전에 정리만이라도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나는 거의 20년을 북한과 중국 선교를 하면서 사회주의에 대해서 조금은 깨닫게 되었지만 특별히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중국에서 만난 탈북한 북한 주민들과 중국인들에게는 사회주의가 죽어가고 있어서 그렇게 싸울 필요를 느끼지는 못했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와서 잠자고 있던 사회주의의 영이 강력하게 역사하는 것을 느낀다. 오히려 북한에 방문해서는 강력하게 세뇌교육을 시키고 겉으로는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처럼 보이는데 사회주의가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었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나는 성경적인 관점에서만 조금 다루어보기를 원한다.


사회주의(공산주의)는 누가 만들고 조종을 하는가?

우리는 사회주의가 들어가 있는 곳에 다음과 같은 4가지의 두드러진 열매가 맺혀지는 것을 보게 된다. 물론 처음에는 그 사상에 매료가 될 수 있다. 깨달음과 함께 오는 강력한 지적 쾌락에 즐거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선악과를 베어 먹는 것과 같고 결과로 나타나는 열매는 한결같이 좋지 않다.


1. 첫번째 열매는 비판과 정죄다.

중국에서는 마오쪄등 시절에 자아비판과 상호비판이 유행했다. 북한에서는 생활총화 때 대중앞에서 자아비판과 상호비판을 한다. 그러나 당과 수령과 체제에 대해서는 절대로 비판할 수 없다. 비판한다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2. 거짓:

중국에서는 철저하게 언론과 인터넷을 통제한다. 오히려 공산주의를 위해서 거짓으로 조작한다. 북한도 모든 것이 거짓의 기반 위에 세워졌고 거짓으로 통치하고 있다.


3. 적그리스도:

사회주의는 교회와 공존하기가 어렵다. 북한, 중국, 러시아에서 수 많은 교인들이 죽어나갔다. 중국이 잠시는 교회를 풀어준것 같았는데 시진핑이 들어와서 여러 기독교 지도자들을 가두고 심지어는 큰 지하교회를 폭파해 무너뜨렸다. 특별히 북한은 이 세상에서 기독교를 가장 강력하게 핍박하는 나라여서 선교단체인 오픈도어에서 매년 기독교인이 생존하기 가장 어려운 곳이라고 말한다.


4. 사망:

지금도 중국과 북한에서는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어떤 분은 북한은 이해를 하겠는데 중국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산채로 죽임을 당하고 있다. 신체 장기 이식수술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왜 자국에서는 안되는데 중국만 가면 오래 기다리지 않고 받을 수 있는가?"를 물어보면 알 수 있다.


죽어나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형수들인데 그중에는 파롱궁을 믿었던 사람들이 적지 않다. 또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곳에서는 쉽게 낙태가 이루어져서 수많은 어린 영혼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죽어간다.


사회주의는 체제를 반대하는 자들을 살려놓지 않고 반드시 죽인다. 그래서 허드슨연구소에서는 공산주의 100년 동안 1억명의 사람들이 학살당했다고 말한다.


스탈린: 국민의 10분의 1인 2000만명 학살,

모택동: 인국의 10분의 1인 7000만명 학살,

캄보디아 크메르루즈 정부: 인국의 4분의 1인 200만명 학살,

북한 김씨정권: 최소 300만명 이상 학살.


예수님께서는 열매로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나무 아래에 사과가 떨어져 있으면 우리는 나무가 사과나무인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열매를 통해서 사회주의(공산주의)의 본체를 알 수 있다.


성경 몇 곳을 살펴보고 싶다.


1. 참소하는 자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계 12:10)


2. 거짓말 하는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 8:44)


3. 대적자 사탄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계 13:5-6)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스가랴 3:1)


4. 살인하는 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요 8:44a)


사회주의의 열매와 사탄의 본질이 너무나 흡사하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사회주의는 사탄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사탄은 사회주의를 통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자신의 왕국을 건설했고 사람들을 죽였다.


우리나라도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이미 참소, 거짓,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만약 여기서 멈춰지지 않고 사단이 기회를 얻는다면 많은 사람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가 사회주의의 싸워야 하지만 혈과 육의 싸움을 하지는 말아야 한다. 오히려 왕이신 예수님께 순종하며 주님의 방법으로 싸워야 한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이다. 만약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가 이루어지면 개인의 소유는 다 국가의 것이 되어야 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의하면 사회주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공산당의 독재)와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 계획경제를 그 특징으로 한다. 사회주의 국가의 이론은 대체로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의 《국가와 혁명》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도구로서 국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또한 이러한 국가의 본질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있다고 한다.”


“그보다 마르크시즘에 입각해서 살펴본다면, 그들의 사상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근간으로 한다. 유물론은 아시다시피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 자체가 종교의 기능을 대체한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무신론자들이다.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유물론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종교를 갖겠다면 굳이 말리지 않지만, 사회주의 세상은 신이 지배하는 것보다 인간 스스로 인간을 지배하는 민중주의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종교를 부정한다."



출처: 김정환 목사님 페이스북

 

 

지옥의 사자들!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 음으로 이름은 아바돈이요 헬라 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이더라" (계시록 9:11)


오늘날 현실주의자들은 영생과 지옥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영생이 없다면 지옥도 없으며, 예수께서 오셔야 할 이유도 없었으며 십자가의 공로도 없을 것이며,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며 주께서 다시 사셔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옥과 대치되는 천국도 그 매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므로, 이 땅에서 낙원을 건설하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큰 모순이 될 것이다.


성경에는 지옥을 몇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보편적인 지옥인 ‘음부’는 ‘하데스’(Hades)로서 구약의 ‘스올’(Sheol)과 동일하다(사 14:15). 이곳은 구약의 백성들도 모두 들어갈 ‘영혼들의 임시거처’로서 고통의 공간과 위로의 공간으로 나뉘었다. (눅 16:23-31).


예수님은 ‘하데스’라는 단어를 4번 사용하셨는데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간 곳에서 두번 인용하셨고 또 가버나움을 향해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까지 낮아지리라’(마 11:23)고 하셨으며,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고 말씀하셨다.


또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음부의 열쇠를 갖고 계시다’(행 2:27)고 선언하였고 사도 요한도 ‘주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계 1:18) 기록하였으며 ‘바다와 사망과 음부가 그 가운데 죽은 자들을 심판대로 내어주며,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진다’고 기록되었다. (계 20장)


계시록에 7번이나 소개된 ‘무저갱(abusso/구덩이)’은 땅 속 중심부 깊은 곳에 있는 지옥으로 멸망받은 귀신들의 처소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제 내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지우리로다’ (사 14:13-15)고 기록하였으며, 유다서에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고 기록되였다.


누가복음 8장에는 거라사인 땅의 무덤에 있던 군대귀신 들린 사람 속에 있던 귀신이 주 앞에 무릎을 꿇고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또한 계시록 17장에서는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가 소개되었으며, 마귀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에게 결박되어 무저갱에 던져진다(계 20:1-3).


그러나 천년 후 사단은 잠시 풀려 나와 세상을 미혹한다. 성경에는 또 마지막 날에 적그리스도가 들어갈 ‘게헨나’(Gehenna/유황지옥)가 소개되어 있다. 이곳은 귀신들을 가둔 무저갱이나 죽은 자들의 영혼이 임시 거처인 하데스와 달리 적그리스도와 그 추종자들이 형벌을 받는 유황지옥으로 666 표를 받은 영혼들이 들어갈 곳이다(계 20:15).


또한 흥미로운 곳은 ‘타르타스’(Tartatus / 감옥)이다. 베드로는 주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던 일을 기록하여 ‘저가 또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고 기록하였으며 ‘그들은 노아의 날 방주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의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한 자들이라’ (벧전 3:20)고 증거하었다.


따라서 이곳은 창세기 6장에서 언급된 타락한 천사들을 가둔 곳으로 오늘 계시록 9장에서 소개된 여섯째 천사의 나팔과 함께 풀려날 유브라데스 강에 결박한 천사들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그 어떤 지옥도 두려워 할 것이 없다. 이미 예수께서 내가 너희의 처소를 준비하러 아바지께로 가니 준비하면 다시 데리러 오리라고 하셨다. 사단 권세를 이긴 예수님은 ‘내가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계 1:18)고 하였다.


그러므로 지옥의 사자들은 주를 믿는 자에게는 전혀 관계가 없다. 우리에게는 천국이 예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상실치 않기 위해서는 더욱 더 경건하고 굳건한 믿음 위에 서야 할 것이다. 아멘, 아멘!


- 이요나 목사님



출처: 동성애탈출 탈반시티 원문보기   글쓴이: 요나짱

“히스기야 때와 매우 유사한 현재 한국 상황”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순간 저버리고 교만하고 음란해져서 바벨론 사신들에게 궁과 내탕고를 열어 다 보여준 일이 있었다. (열왕기하 20:12-21)


절대 섞이지도 말고 화친하지도 말아야 할 바벨론에게 문을 열어주는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히스기야 왕에게 선지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무릇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러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히스기야는 어리석은 답을 한다.

"만일 나의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찐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하니라."


이번 동계 올림픽에서 북한 정권에 대해 문을 열어주고 그들의 주도하에 연합을 하려고 한다. 바벨론이 어떤 존재인지를 몰랐던 것처럼, 북한 정권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그들과 위장된 평화를 이끌어내고 화합하려 하고 있다.


이런 순간적인 평화(환란 전야와 같은)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히스기야의 오판으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문을 열어주었을 때, 머지 않아 바벨론이 다시 쳐들어와 나라가 처절하게 패망하고 모든 것을 빼앗기며, 자손들은 그들의 노예로 전락되었는데, 어쩌면 앞으로 한국에 있게 될 일들에 대한 예표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히스기야를 이어서 악명 높은 아들 므낫세가 집권하였고, 아버지 시대에 없앴던 우상을 다시 세우고, 자녀들을 불가운데 지나게 하고(낙태, 동성애)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하면서 가장 악한 일들을 행하였다.


바벨론의 영이 이스라엘을 점령한 것같이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영이 한국땅을 점령하려 하고 있다. 깨어 있는 성도들은 어느 때보다 나라와 다음 세대의 미래를 위해 애통하며 기도할 때, 이사야와 같은 주의 종들과 요시아와 같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일어날 것이라 믿는다.



출처: 김정환 목사님 페이스북




자유를 구걸하는 현실!



매일 집에 갈 때

골목에서 깡패를 만나는데

깡패가 위협하니까 무서워서

돈도 주고 잠바도 벗어줬다.


그래도 매일 위협한다.

돈 더 안내놓으면 더 혼난다고...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매번 돈을 쥐어준다.

싸우면 나도 다칠테니까 무서워서...


그런데 나와 친한 형이 등치가 크다.

그 형이 대신 혼내준다고

그 깡패한테 야단치니까 오히려

그형을 참견말라며 그 형과 절교를 하고

깡패를 집으로 초대해서 돈과 선물 한보따리를 쥐어준다.


그리고 매번 그 깡패형이

골목에서 돈을 뺏으려고 막대기를 가지고 와서

위협해도 친한 형에게 도움을 거절하고

깡패한테 상납하면서 살아간다.


이런 바보같은 사람이 어디있겠느냐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전쟁이 무서워서 북한에 자유를 구걸하고

우리를 도와주는 미국은 남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끼리 잘해보자면서

매번 북한의 천문학적인 자금을 쥐어줍니다.


북한의 인민들은 영문도 모른채

노예세대를 3대나 겪으면서

고통받고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무런 대가없이

자유와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북한 정권은 타일러서 될 집단이 아닙니다.

더 강한 힘으로 제압해야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외치지만

왜 미국에 쏘지 못하나요?


그만큼 미국의 힘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강한 안보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길입니다.


주여, 어느때까지니이까!

저 북한의 사악한 정권을 멸하여 주옵소서. 마라나타!


[펌글]

신앙과 직제일치 금지와 WCC를 탈퇴하지 않는 이유!


2018년 1월 18일, 서리집사인 필자와 한국교회진리사랑연합회 회원들은, 통합 교단의 본부인 서울 종로 100주년 기념관에 갔다.



(예장 통합의 본부가 있는 서울 종로의 100주년 기념관)


가톨릭과 기독교의 신앙-직제 일치에 반대하는 한국교회진리사랑연합회(목회자와 평신도들의 모임)를 만나지 않으려는 통합의 최기학 총회장이, 총회장실에서 다른 분과 대화 후, 우리 연합회 회원들이 그때 마침, 잠깐 서 있던 곳의 문을 우연히? 총회장이 여는 바람에,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갈까 하고, 망설이던 필자에게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그래서 총회장께 
'최기학 총회장님, 기독교와 가톨릭이 같은가요?
어찌 이단 정도도 아니고 완전 타종교인 가톨릭과 어떻게 일치를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두렵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니,
미안하다 아니면 기도회에 참석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등의 대답은 하지 않고, 먼저 필자가 누구인지 묻는다.


그래서 '서리집사요' 라고 말했더니,  
최 총회장은 총회장인 자신에게 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고 말하냐며, 대답은 커녕 도리어 언잖아 한다.   

(필자가 기독교와 가톨릭이 같은가?를 물어보면서 오른쪽 다섯쨰 손가락을 올렸다가 살짝 내리는 동작을 했는데, 이를 본인에게 손가락으로 가리켰다고 생각한 것임. 필자는 상대방을 모욕하기 위해 검지 손가락만 내민 것이 아님)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며, 이 땅에서 총회장으로서의 명예와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 같은 존재로 있는데, 감히 계급(?)으로 보면 보이지도 않는 50대 후반의 서리집사가 감히 손가락질하며 훈계를 하는 것 같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누구보다도 가톨릭은 타종교임을 알면서도 여전히 배도를 멈추지 않고 회개의 마음이 전혀 없는 총회장에게 분노가 일어나기에, 네 하나님 만날 준비를 하라고 외치고 나왔었다.



(통합의 총회장실 문이지만 만나려면 바로 옆의 사무총장에게 먼저 면담 요청을 해야 했다.)


통합은 사무총장인 변창배 목사가 일치 기도회에 총회장 대신 참석을 하였는데, 한국교회진리와사랑연합회와의 대화에서 사무총장 자신이 가톨릭과의 일치가 얼마나 허항되고 터무니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총회장을 대신하여 참석하는 것을 보고,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보다 세상의 명예와 직위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며 이들을 지도자로 모시고 신앙생활를 하는 WCC 회원교회 성도들과 목회자들을 생각하니 참으로 기가막힌다.



(한국교회진리사랑연합회 대표 김정한 목사(통합교단 소속,오른쪽 2번째)와 사무국장 안천일 목사(통합교단 소속, 오른쪽)가, 통합의 사무총장인 변창배 목사(왼쪽)를 만나, 통합이 가톨릭의 신앙 직제일치에 참여하지 말 것을 강력 항의하고 있다. wcc 한국지부 회원교회들 가운데 통합만이 유일하게, 이를 반대하는 참 목회자와 참 장로들이 있다.)


순진한 성도들은 같은 교단의 총회장 목사까지도 참석을 했으니, 기독교와 가톨릭과의 하나됨이 좋은 줄로 생각을 하는 성도들도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들이 말하는 믿음이 과연 무엇일까?

예수님을 시인한다고 말했으니, 교단 전체가 구원 없는 가톨릭에 흡수되어도 그 구원은 잃어버리지 않는단 말인가?



서울 종로 가회동 성당의 복도에 이 모임이 단순한 기도 모임이 아닌

가톨릭과 기독교의 일치를 위한 기도 모임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가톨릭과 기독교가 모인 가회동 성당에 가서 팜플렛을 보니, 2018년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회라고 적혀 있었고, 모든 순서가 천주교 미사 형태로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타종교인 가톨릭과의 신앙 직제 일치에 참여한, wcc 한국지부의 교단장 및 사무총장, 카톨릭 교인들

 

WCC 한국지부인 NCCK 교단의 대표로 통합, 감리교, 기장, 구세군, 성공회 등 WCC 한국지부 NCCK의 교단장들이나, 혹은 사무총장들이 타종교인 가톨릭과의 일치 모임에 교단을 대표하여 참석하였기에, 이는 교단 전체가 참여한 것이 되었고, WCC 회원교회 성도 개개인이 모두가 참여한 것이 된 것이다.

이들은 WCC가 한국교회 안에서 이단으로 판명이 되었고, 심지어 WCC 회원교회의 교회에서조차, WCC를 아직도 옹호?하는 간 큰 목회자들은 거의 없을 정도로 한국교회 안에서, WCC 자랑을 하는 교회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단적으로 WCC탈퇴하지 않고, WCC의 주 목표인 기독교를 없애고 가톨릭에 합치려는 배교를 지속하는 주된 이유는, 매년 교단 총회에 총대로 참석하는 장로나 목사들이,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 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사 56:10-11)



(저들이 아예 드러내고 가톨릭과 기독교의 배교 일치 기도회를 사탄에게 드릴때, 같은 시간대에 가톨릭의 가회동 성당 앞에서, WCC 한국지부의 회원교단들의 WCC 탈퇴 촉구와 NCCK 해체를 요구하며, 한국교회의 배도를 대신하여 회개하며, 기도회에 참가한 하늘의 성도들의 모습.)

 

특히나 1 년에 한번씩 여는 각 교단별 총회에서 장로들이 일어나고, 목회자들이 일어나서 성경의 사소한 해석도 잘못 해서  하면 이단으로 정죄하는 우리네 교단이, 어찌 오직 예수님의 구원을 부인하는 WCC를 왜 지금까지도 탈퇴하지 않는지를 묻고, 어찌 마리아를 하나님과 예수님처럼 숭배하는, 타종교인 가톨릭과의 일치행위를 멈추지 않는가를 물어서, 교단장들이 향후 가톨릭에 기독교를 넘기려는 신앙 직제일치 기도회에 계속 참석하게 되면, 그때는 그에 대한 책임을 엄하게 묻겠다고 경고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 했다면 신앙 양심상 잘못된 것임을 알고도, 타종교인 가톨릭과의 일치 기도회에 교단 대표로 참석하는 것이 교단 전체가 배교에 참여하게 되는, 이런 뻔뻔한 짓은 벌써 근절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는 WCC에서도 탈퇴했을 것이다.


한국교회가 WCC 부산 총회와 타종교인 가톨릭과의 일치에,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한 비느하스처럼 하나님의 분노로 일어나서, 교단 총회에서 적극 반대 했다면, 어찌 감히 타종교인 가톨릭과의 일치를 계속하는 이런 뻔뻔함이 지속될 수 있겠는가? 

 

교단의 총대들인 목사와 장로들이여!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오직 예수님만의 구원을 시인하지 못한 책임을 심판대에서, 반드시 벙어리 목사들과 장로들에게 묻지 않으시겠는가?

 

그저 경치 좋은 호텔이나 큰 교회에서 좋은 음식으로 대접받고, 지역교회들의 대표로 총회에 왔으니 점잖고 거룩한 체면?에 서로 언쟁이 되는 부분은 피하고, 대충 넘겨 버리며, 좋은 것이 좋은 것이야 라고 말하며 지내왔겠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점잔을 빼고 거룩한 척을 하지만, 정작 짖어야 할 때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들이 아니던가?

 

그러면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 바리새인 등 종교지도자들에게

(요즘으로 말하면 목회자, 신학자)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외친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은 점잔하지 못해서 그런 말씀을 하셨겠는가?
 


이 글을 읽으면서 혹여 신앙생활이 얼마되지 않은 분들은 서리집사가 어찌 목회자들의 대표인 총회장께 어찌 감히 저럴 수가 있는가? 라고 생각하는 성도들도 있을 것이다. 

성경에 보면 
갈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딤전 5:17 "잘 다스리는 장로(목사)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셨기에 참 좋은 목회자들에게 좋은 것을 함께하고, 배나 존경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한다.


그러나 목사 장로 권사 집사라는 직분은 군대처럼 계급이 아니다. 성도들을 섬기라고 주신 직분이다.

여기에서 필자가 말하고 싶은 부분은 교회의 존재 이유인 오직 예수님만의 구원을 부인하는 WCC나 가톨릭과의 일치는 잘못이라고 인지한지가 적어도 몇 년 이상 되었음에도 여전히 동조하거나 침묵으로 동의를 하는 목사 장로들에게 하는 것이니 오해 없기를 바란다.



(상단 왼쪽 위 부분에 희미하지만 2018년 한국그리스도인 일치기도회라고 안내문에 적혀 있다.)

 

다음은 이번 가회동 성당에서의 신앙-직제 일치 팜플렛을 보면서 느낀 것이다.

기독교는 들러리고 천주교가 주도적으로 모든 것을 진행하였다.
이것은 가톨릭에서 작성한 예배 순서지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이들이 작성한 안내문에 보면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표현하였고, 카톨릭과 기독교가 다르지 않은데 서로 양분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신앙과 직제 이 모임을 교황 프란치스교가 진심으로 격려하고 지지 한다고 말하며 합쳐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합치게 되면 기독교는 가톨릭에 흡수되어 없어지고 가톨릭만 남게 된다.



(2018년 가톨릭과의 신앙과 직제일치에 참여한 교단들)


가톨릭은 그러한 작업을 보수교단들의 모임인 합동, 성결, 침례교 등의 교단이 소속한 한기총까지 해 왔으며, 한기총은 WEA을 통하여 가톨릭과의 일치를 꾀하고 있다.

지금 한국교회 안에서, 가장 믿음이 좋을 것 같고, 본이 되며,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할 높고높은(?) 총회장 목회자들과 큰 교회 등의 목회자들과 장로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떠 오르면서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필자인 서리집사만의 생각일까?

눅 18:8. "그러나 인자(예수님)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출처: 한국교회 진리사랑연합회 / 전형구



연합감리교(UMC) 뉴욕연회 한인목사들의 모임인 한인코커스는 11월 28일 뉴욕그레잇넥교회에서 이종식 목사(베이사이드장로교회)를 강사로 초청하여 목회자 세미나를 열었다.  

 

[관련기사] 

이종식 목사 “왜 교인 40, 80, 150 명 고개를 넘기 힘든가?”

http://usaamen.net/bbs/board.php?bo_table=data&wr_id=7344

이종식 목사 “교회문을 닫아야 할 위기에서 전환점 2가지”.

http://usaamen.net/bbs/board.php?bo_table=data&wr_id=7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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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기사이다. 이종식 목사가 자신의 목회 전환점이라고 가장 먼저 소개한 내용은 자신이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전한다는 자세의 전환이었다. 그런 자세는 강도사로 목회를 시작한 30대 초반의 경험없는 목회자에게 큰 자신감을 가지게 했다. 더 나아가 이런 자세는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고 성경이 하지 말하는 것은 하지 않는 목회지침을 가지게 했다. 구체적으로 나오는 헌금과 바자회에 대한 목회지침 등은 도전을 준다.

 

목회 전환점은 아니지만 이종식 목사의 2세 목회에 대한 관점도 소개한다. 이 목사는 자신이 공부할 때 필라 지역에는 150여개의 중국교회가 있었는데 현재는 2개만 남았다며 그 이유를 설명하고, 한인교회의 미래를 위해 2세들에게 투자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그 내용들이다.

 

1.

 

처음에 교회를 개척할 때 걱정이 되는 것이 기라성 같은 목사들이 많은데 성도들이 말을 안듣고 권위도 안서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경험도 없는 32세 강도사로 개척하려고 했는데 누가 말을 들어줄까 하는 걱정이 되어서 산에 올라가서 금식기도를 했다.

 

“하나님, 사람들이 제가 말해도 안들어 주면 어떻게 하죠”라며 그것이 걱정된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3일째 되는 날 하나님께서 마음에 응답을 주셨다. “네가 말하면 안들을 것이다. 그런데 네가 내 말을 그대로 전하면 그들이 들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너무 심플한 것인데 큰 깨달음이 왔다. 제가 제 말을 안하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면 교인들이 다 말을 들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고민에 대한 자유함을 얻었다. 세상에서 이렇게 쉬운 일이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냥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이대로만 하자고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자고 했다.

 

그래서 바자회를 하지 않았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장사를 배워 굉장히 장사를 잘했다. 제가 만약 바자회를 한다면 누구보다 잘할 것이다. 재고품을 사다 가져다 놓고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라며 성도님들에게 원가에 사라고 하면 엄청나게 살 것이다. 쌓인 것이 재고품들인데 돈이 빤히 보이는데 못하는 것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셨다.

 

처음에는 여러가지 편리를 위해서 그렇게 했는데 나중에는 장사속이 생기고 예배와 기도보다 장사에 더 집중하다 보니 교회가 장사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못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결심한 것은 교회에서는 어떤 것이라도 팔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선교회에서 김치를 만들어 파는 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 아무것도 팔지 말라고 했다. (심지어 찬양사역자들이 교회에 와서 집회를 열어도 찬양 CD를 팔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성도는 성도답게 드려야 할 예물을 드리면 된다. 십일조하고 감사예물을 하면 된다. 그것만 다 하면 교회는 특별헌금을 할 필요가 없이 차고 넘친다. 그런데 그것은 하지 않고 김치를 팔겠다고 하면서 여러가지 문제도 생기니 그것은 교회가 할 일이 아니다. 교회는 장사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제 목회의 지론이었다. 그런데 어렵게 시작했지만 하나님께서 너무 채워 주셨다.

 

온전한 십일조, 온전한 감사헌금, 그리고 절기헌금을 드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강조하는 것이 있다. 건축을 한다고 성도들이 한 번에 헌금을 하는 것은 너무 힘들다. 우리 교회는 건축을 3-4번하고, 예배당도 2배 확장하고, 건물만 3만 스퀘어피트 되는 미션센터를 건축하는데 얼마나 돈이 많이 들어가겠는가? 하지만 특별헌금이나 작정헌금을 안하고 하루에 커피 한잔만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다. 하루에 1불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하나님께 한 잔의 커피만 드리면 된다.

 

1일에 1불이면 적을 것 같은가? 계산해 보라. 1년이면 365불이다. 4가족이면 1년에 1,460불이다. 건축헌금할 때 1400불 내는 가정이 그렇게 많지 않다. 100명이 드리면 36,500불, 5백명이 하면 182,000불이다. 지난해 그렇게 1일 1불 헌금으로 들어온 것이 32만불이었다. 1일 1불 헌금은 샘에서 물을 퍼는 것 같다. 샘에서 물을 퍼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또 채워진다. 드리기도 편하고 기억하기도 편하다. 어떤 성도들은 1년치 365불을 다 낸다. 어떤 분은 자신이 살 날짜를 계산해서 한 번에 다 드리는 경우도 있고, 교회를 등록한 후 지난 날을 계산하여 드리는 가족도 있다.

 

저는 단순히 하루에 커피 한 잔을 드리라고 했는데, 1불은 작은 것이지만 모아지면 파워가 있다. 그리고 기득권 세력이 없어진다. 한 사람이 큰 액수를 내서 문제를 일으킨 교회가 많다. 그런데 1일1불 헌금은 동시에 거의 다 드리니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모든 일을 성경적으로 하되 지혜롭게 하자는 것이다.

 

보통 건축을 한다고 하면 특별한 순서가 있다, 부흥회를 열어 교인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헌금을 하게 한다. 사정이 생겨 작정헌금을 하고 안내면 문제가 생기고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다. 건물을 다 지으면 교회 시설에 대한 헌금을 따로 해야 한다. 이것이 지금까지 해오던 패러다임이었다. 저는 나는 이러한 패러다임을 깨고 작정헌금은 없애고 1일1불만 하자고 했다. 그대신 모두가 참여하자고 부탁했다. 제가 권장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장사식으로 하지 말고 제대로 교인들을 훈련시켜서 헌금을 제대로 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주정헌금 그런 것 없다. 십일조를 못내는 분들이 마음에 위로를 받기위해 한 주에 온전한 십일조가 아니라 일부를 헌금하는 경우도 있다. 십일조를 안드리려면 하나님 앞에 쇼하지 말고 드릴려면 제대로 드리라고 한다. 십일조를 하지 못하면 기도하라고 주정헌금을 다 없애버렸다.

 

어떤 성도가 헌금채를 돌리는 것이 예수님 시대와 안맞는다고 지적했다. 성경에는 과부가 헌금하는 것을 예수님이 보셨다고 나온다. 헌금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헌금채를 안돌리고 헌금함에 헌금하게 했다. 처음에는 헌금채를 안돌리면 헌금을 안낼 것이라고 일부가 반대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날 헌금을 못가져와서 못내는 사람은 아무 때나 와서 헌금을 넣을 수 있다. 그래서 헌금함을 놓았는데 헌금이 안줄어 들고 오히려 더 늘어났다. 새벽예배에 와서도 헌금을 내는 성도들도 있고, 첫날 수입은 하나님께 헌금을 하는 성도들도 있다.

 

제일 먼저 저의 목회의 전환점은 네가 말하지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다. 아무리 하고 싶어도 성경적으로 해석이 안되는 것은 하지 않으려 했다. 누가 성경적으로 지적한다면 고쳐야 하고, 나의 유익을 위해 억지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이다. 돈이 아무리 들어와도 성경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면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성경적으로 해석이 안되는 것은 안하고 해석이 된다면 했다. 저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성경적으로 이상이 있으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분이 와서 말해도 내가 분명이 듣고 바꿀 것이다. 그런데 성경적이 아닌 것을 무더기로 와서 바꾸라도 해도 못 바꾼다. 힘으로 나를 누르려고 하지 말고 성경으로 증명하라. 협상은 절대 없다.” 그렇게 말한 후 단체로 오는 분은 없다. 그래서 교회분열이 없다. 성경적으로 하려고 하니 그렇다.

 

2. 

 

2세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 한국도 출산을 안해 인구가 준다고 한다. 이민은 안 오고 역이민이 더 많다. 미국 한인이민교회들은 성도들이 줄어들고 있으며, 고령화가 되고 있다. 다른 지역 한인교회를 보니 평균연령은 60~65세가 넘어간다. 곧 뉴욕이 이렇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교회가 빌텐데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아이들이 많이 들어와도 결국 소통의 문제가 생길텐데, 앞으로는 한국어 회중(KM)이 영어 회중(EM) 보다 작아지고 EM이 더 커질텐데 이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베장의 토요학교 비전은 1-2세가 소통되기 위해 한국어를 가르친다. 4분의 3은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인데 한국어를 잘해서 설교를 들을 정도는 된다.

 

소통이 되지만 그래도 영어가 편하다. 영어를 하는 아이들이 섬기는 부서마다 재작년부터 도전한 것이 있다. 아이들에게 목사와 선교사가 될 사람을 콜링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15사람이 모였다. 요한 웨슬리는 옥스포드대에서 홀리클럽을 만들었는데 사명자들 모임이었다. 15사람에게 도전했다. “여러분들은 목사와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들이다. 여러분 위해 교회에서 최선을 다하겠다. 신학교에 들어가 돈이 없다면 장학금을 대 주겠다. 선교사가 되기 위해 선교지에 가서 공부하고 싶으면 무조건 보내준다.” 그들에게 도전을 하고 기도하고 있다.

 

2세들이 성장하고 학교를 졸업하면 그들중에서 EM을 하는 사람도 나올 것이다. 이렇게 해서 2세들을 준비하지 않으면 미국의 한인교회들은 소아시아 7교회가 지금 없는 것처럼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필라에서 공부할 때 보니 중국교회가 150여개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중국교회가 2개 교회 밖에 없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나?

 

그들의 생각은 영어를 하는 사람들은 영어 목회하도록 독립시켜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다 없어졌다. 미국교회에 간 것도 아니고 교회자체가 없어졌다. 문제는 중국교회가 2개밖에 안 남았다는 것이다. 그때 느낀 것은 한인이민교회는 영어하는 자녀들을 교회에서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동거를 해야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인교회 안에서 그들의 언어를 인정해주고 그들의 모임을 가지게 함으로서 1세들의 신앙을 물려받게 하고 같이 소통하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후임자는 영어와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을 세워 브리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KM이 작아지고 EM이 커진다면 교회를 맡을 리더십이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은 다음 세대를 위해 후임자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것에 투자해야 한다. 그것에 투자를 않는다면 1세 목회자와 전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리더십이 되고 교회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여태까지 세워놓은 한인교회들이 흔들려서 안되니 최선을 다해 준비해야 한다.

 

(이종식 목사의 세미나에 대한 마지막 기사는 이 목사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제자훈련에 대한 내용입니다. 기도해주세요.)

 

ⓒ 아멘넷 뉴스(USAamen.net)

현대판 '미녀와 야수' (개신교회 말살)


카톨릭(천주교)와 개신교의 결혼.

마지막 때의 배도(배교) 완성.





요즘 일어나고 있는
카톨릭과의 연합이 배도인가 아닌가?


물론 워낙 유명한 사역자들과 단체들이

주도하고 있는 움직임이기 때문에

섣불리 배도라고 믿기 힘든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만약 정말 그들이 하는 일이 배도가 맞다면

이것을 읽는 본인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반드시 기도하면서 정말 그러한가 아닌가를 꼭 확인해야 한다.


그냥 주변 사람이 하는 주장만 듣고

쉽게 넘기고 넘어가면서 이 배도에 참여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여러분이 영원히 이를 갈며 후회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 무엇보다

'사람의 미혹'을 주의하라고 하셨다.


마치 유대인들이 랍비들을 말씀보다 더 신뢰하는

'사람의 미혹' 때문에 말씀이 명백히 증거하는

예수님을 못 믿고 못 보는 것처럼

이 카톨릭 배도 사건도 이미 '사람의 미혹'에 눈이 가려져서

이런 것을 진지하게 보려고 들으려고 하지 않는 분들이 있겠지만

본인의 영혼을 위해서 꼭 확인하도록 추천해줘야 한다.


아래의 자료들 중 편집된 것들은

본인이 직접 다 조작한 것들이고 음모론이라는 색안경,

"이 사람, 이 단체는 신뢰할 수밖에 없다"는 등의

'사람의 미혹'을 다 내려놓고 기도하면서

진지하게 아래 영상들을 확인해 보라.


보는 모든 이들에게 충격적이겠지만

부디 영적인 눈이 열리길 기도한다.




카톨릭과 언약 맺고 연합하는 배도에 대해서

순진하게 속는 분들이 있다.


요즘에는 카톨릭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가 하는 연합은 카톨릭 전부와 하는 것이 아니라

카톨릭 중 카리스마틱, 즉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과만 연합하는 거라고...

(실제 카톨릭 전체 및 교황과 언약 맺어 한몸 된 것이라 선포하고

그렇게 행동하면서도 말이다.)


혹은 카톨릭도 이제 '오직 예수'라고 고백하니 뭐가 문제가 되냐?

위와 같은 어리석은 논리로 카톨릭과의 언약 및 연합을

배교(배도)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사랑의 연합으로 여긴다.


자기의 인본적인 판단이 아니라

제발 하나님께서 답을 주실때 까지 한번만 겸손히 여쭙는다면

그런 소리 안할텐데...


아래영상은 소위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하는,

그리고 카톨릭의 전부가 아닌 연합맺는 일부라고 하는,

카톨릭 내 카리스마틱(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 천주교인 5만명이

2014년 6월3일 로마에 모여서 하는 집회이다.



영상 57초부터 보면

무대에 가증한 음녀 마리아가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이게 바로 카톨릭이 고백하는 '오직 예수'의 실체다.


2016년 4월 9일 LA에서

루잉글, 신디제이콥스, 스테이시켐벨, 마이크비클, 체안 등등

미국의 유명한 사역자들이 한데 모여

교황과(대리인을 통해) 한 몸이 되기로 언약을 맺었다.




위 영상만 보면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인간적으로 보면 얼마나 듣기 좋은 소리이고 아름다워 보이는가?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선언된 이 집회의 엄밀한 결론은

교황과 한 몸이 되기로 언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8:19에 보면, 교황과 대리인을 통한 언약.

9:40에 보면, 언약 안에서 연합.


아무리 광명한 천사의 얼굴로 다가오더라도

결국 나오게 되는 결론이 무엇인가를 보면

그 광명한 얼굴을 한 목적을 알 수 있다.


'연합'은 인본적인 기준에서 보면 그져 좋아 보인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의 자리에 '연합'이 앉는다면

그때부터는 미혹이 판을 친다.


이들은 '연합'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고

그것을 '절대선'으로 여기면서

그에 반대되는 '분열의 영'을 대적한다.


특히 이들이 대적하는 '분열의 영'은

사실 종개개혁을 이끈 성령이다.


Kairos 2017 홈페이지 - https://www.kairos2017.com



아래 영상을 확인해 보라.

(각각 영상에 함께 써 있는 소개글도 확인하길 바란다.)

이들이 대적하는 '분열의 영'은 바로 종교개혁을 주신 '성령'이다.



이런 배도의 집회에 장소를 빌려주고

그들과 함께 하고 있는 아이합(IHOP)의 마이크 비클은,

논란이 일자 해명 영상을 올렸지만 오히려 더 혼란스럽게 한다.


왜냐면 자기 입으로도

교황이 한 입으로 두말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자기가 누구기에 그 말을 판단할 수 있겠냐며

교황의 그 말을 믿겠다는 뉘양스로 흐지부지 끝내버린다.



위 영상에서 마이크 비클은

마치 바티칸 방문이나 교황을 처음 접한 듯이 말했지만

사실 연합을 가장한 이런 배도는 무려 20년 넘게

마이크 비클을 비롯한 미국의 유명 사역자들이

바티칸 교황과 준비해 온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함께 한다는 카리스마틱 카톨릭 교도들의 집회에는

'마리아 우상'이 버젓이 자리하고 있다.



이 미국 사역자들은

개개인이 예수님과의 관계 맺는 구원에 대해

교황이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실제 교황의 공식 선언은 전혀 다르다.



이들이 언약으로 한몸 된 카톨릭 종교의 실체는 아래와 같다.



이외에도 수많은 자료들이 있지만

일단 이것으로도 많은 분들이

기본적인 분별은 그래도 가능할거라 믿는다.


수년간 수많은 소위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한

표적과 기적과 예언들을 통로삼아서

우리에게 배도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을

계속 조금씩 받아들이게 함으로서 배도는 준비되었다.


이런 이교도 집단과 언약하여

한 몸이 되겠다는 것은 분명한 '배도'이다.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전세계적 배도는

바로 이것을 가르킨다.


정신차리라!

배도에서 돌이키라!

배도에 참여하지 말라!

자신의 영혼을 지키라!

주님이 곧 오신다!



출처: 박성업 선교사 블로그 (http://blog.naver.com/up0124/221136785544)

미남침례회 뉴욕한인지방회는 새해 들어 첫 월례회를 1월 16일(화) 오전 에벤에셀선교교회(최창섭, 이재홍 목사)에서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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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박진하 목사의 인도로 진행된 월례회 회무를 통해 지난 12월 12일 뉴욕마하나임선교교회에서 67명이 참가한 가운데 송년 및 성탄축하 모임이 열렸음이 보고됐으며, 지방회 시취위원회 규약을 ‘임기 3년’과 ‘연장자 순으로 3년조로 운영하되 윤번제’로 하기로 수정했다. 또 회원교회 목회자 자녀로 대학교에서 풀타임 재학중인 학생에게 1인당 5백불의 장학금을 2월에 지급하기로 했으며, 2월 월례회는 원로 방지각 목사를 초청하여 목회자 세미나로 새시대교회에서 열린다고 공지됐다.

 

교단의 모임은 주로 회무로 진행되어 삭막한 감을 주기 쉬운데 이날은 3가지 감동적인 순간이 있었다. 이를 소개한다.

 

1.

 

1부 예배에서 지방회의 원로급인 백창건 목사(새시대교회)가 출애굽기 4:1-7을 본문으로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백 목사는 하모니카로 찬양하며 감성적인 설교를 했다. 백창건 목사는 본문을 통해 △내 손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손에 있는 것을 던져라 △던진 다음에는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3가지 포인트를 가지고 목회의 단면을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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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목사는 먼저 “내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목회자 마다 각자 잘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갈고 닦아서 더 잘할 수 있도록 힘쓰라. 그러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은 힘써 배우면 된다. 남한테 배우지만 배우면 내 손에 있게 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내 것이 된다. 그렇게 하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회를 할 수 있겠는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개발하고 없으면 자꾸 배우라”고 부탁했다.

 

백 목사는 “둘째, 버려야 한다”라며 디모데후서 2:16의 말씀대로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고 부탁했다. 구체적으로 “합당하지 않는 말은 버려야 한다”며 나이든 성도들에게 반말하는 자세, 목회자로서의 헛된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 목사는 “저에게 어려운 것은 항상 버려도 또 들어오는 교만이다. 버릴 것을 많이 버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회를 할 수 있다”고 부탁했다. 그리고 “목회를 하다보면 분노도 많이 생기는데 범사에 감사하라고 설교를 많이 하는 목사가 먼저 감사를 실천해야 한다”고 부탁했다.

 

백창건 목사는 마지막으로 “셋째,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부탁했다. 백 목사는 “바울이 배를 타고 로마에 간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며, 요셉이 누명쓰고 감옥에 들어 간 것도 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목회하다보면 어렵고 힘든 일이 많은데 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말했다. 백 목사는 간증하며 “미국교회를 빌려 사용하다 부흥회를 했는데, 미국교회 목사가 시비를 걸어 성도들이 열을 받아 돈은 없지만 힘을 합쳐 예배당을 사자고 해서 산 것이 지금 건물이다. 미국목사가 그런 자세를 취한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2.

 

뉴욕지방회는 각 교회 목사들의 나눔을 통해 목회의 아픔을 공유하고 도전을 받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이번이 두 번째 시간이었다. 먼저 퀸즈침례교회 박진하 목사가 나누었는데 박 목사는 나눔 도중 눈물을 흘리는 진솔함이 있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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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에 와 처음 초심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다짐하고 개척했다. 열심히 하고 잘 성장해 나가는 기쁨이 있었다. 하지만 교인간의 불화로 교회가 어렵게 되고 목회의 어려움을 경험하게 되었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며, 끝까지 인내하려고도 했으나 결국 뉴욕으로 와 퀸즈침례교회를 개척했다. 개척하면서 무엇보다 무릎으로 목회해야겠구나 하고 기도원을 많이 찾았다. 그리고 아는 사람 중심으로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새생명에 모든 것을 투자했다. 고향을 떠나는 아브라함의 마음으로 개척했지만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이 예비하심을 믿고 믿음으로 목회를 해 나갔다. 더 좋은 환경으로 청빙하는 교화가 있었지만 하나님과 약속했는데 초심을 버리고 떠날 수 없었다. 그런 자세를 하나님이 기뻐 받아주셨다.

 

현재 교회상황은 자랑할 것이 없지만, 하나 있다면 감사하는 마음을 주셨다. 처음 목회를 하면서 사례를 안받고 주님만 바라보며 눈물로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필요를 채워주셨다. 아내의 헌신적인 봉사와 헌신이 있었다. 감사한 것은 교회에서 어릴때부터 성장한 차세대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계속 교회에 출석하여 요즘 교회에 애들이 많다. 목회자는 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종이기에 주님의 일을 한다. (눈물) 그래서 후회 할 일이 없다. 어려운 환경은 하나님이 시험해 보시는 것이고 시험에 통과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어렵다고 변하지 않고 인내하면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날 것이다. 뉴욕이 목회하기 참 어려운 곳이다. 하지만 인내하며 성도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며 끝까지 나아가자.

 

퀸즈침례교회

36-06 Prince St., Flushing, NY 11354

917-620-8964

 

3.

 

이어 뉴욕안디옥침례교회 한필상 목사가 나누었다. 한필상 목사는 전임 이선일 목사가 소천을 받고 2016년 12월 담임목사로 취임했기에 부임한지 1년이 되었다. 다음은 나눔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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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하고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교회의 5대 기능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첫째, 예배의 회복이었다. 부임시 주일예배 외에는 아무런 사역이 없는 상태였다. 공예배를 회복하자고 했다. 예배순서를 바꾸고 함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회복하자고 해서 금요기도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매일 저녁마다 교회를 열어 기도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아무도 안 나오는 때도 있지만 자리를 지키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주셨다.

 

둘째, 친교의 회복이다. 예배후 친교는 식사 공동체를 선언하고 잘 준비해 식탁을 나누었다. 수요일과 금요일에 교회에 올 때마다 음식을 준비해서 같이 식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절기 때는 풍성하게 준비했고, 특히 추수감사절 같은 경우 혼자 있는 성도님들을 위해 같이 모여 식사를 했다. 셋째, 교육의 회복이다. 말씀공부는 수요일 저녁에 예배대신 말씀을 공부한다.

 

넷째, 전도와 선교이다. 부임후 1년 동안 전도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성도들의 마음이 먼저 회복되어야 교인이 새로 와도 정착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제 많이 회복되었으니 올 초에 처음으로 전도하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동안 해외에 나가있는 선교사들이나 저희 교회보다 연약한 교회들을 저희가 가진 예산안에서 섬기고 도왔다. 그래서 그런지 1년이 지났는데 재정이 늘어나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경험했다. 그 열매를 보고 성도들이 기뻐했다. 다섯째, 봉사(섬김)은 화요일에는 전도사와 아내와 함께 양로원 사역을 나간다. 말씀을 전하고 선물도 전한다. 성도들이 많이 동참해서 한다.

 

그리고 주보에 목회자 나눔을 통해 일주일에 한번 글을 쓴다. 말하기 곤란한 부분을 글을 써서 올린다. 1월 14일 주보에는 “영적인 아비로 좋은 말씀으로 먹이고 싶은 것이 목회자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지체들이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회자 입니다. 잘난 자녀보다는 조금 부족한 자녀에게 관심과 사랑을 더 표현하는 것이 아비의 마음인 것 같이 우리 지체 가운데 목회자의 눈으로 부족함을 느끼는 성도에게 마음이 더 쓰이는 것이 목회자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부족함을 조금이라도 회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집회를 준비하고자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1년 전 부터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우리 교회에서 집회를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지체들 가운데 이렇게 작은 교회에 성도도 몇 명 안되는데 무슨 집회냐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집회를 통하여 한 영혼이라도 은혜 받고 인생이 변화 받는 다면 족할 것입니다. 이번 집회는 여러분 일평생에 경험해 보지 못한 집회가 될 것이며 인생의 이정표가 되는 집회가 될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나누어졌다.

 

주보에 특징 중 하나는 헌금란에 수입과 지출 등 재무 기록을 구체적으로 적는다. 그래서 교회의 재정보고를 따로 하지 않고 매주 하는 셈이다. 그렇게 하니 성도들에게 도전이 되고, 성도들도 투명하다고 생각하니 헌금이 훨씬 늘었다. 20여명이 출석하지만 재정적인 어려움은 별로 없다. 지난 1년간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허락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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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안디옥침례교회

35-70 160th st. Flushing NY11358

한필상목사(201-675-9591)

nyabc1988@gmail.com

주일예배 오전 11시, 말씀과 삶 공부 수요일 오후 8시, 금요기도회 오후 8시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대한민국의 상황은 '한국교회' 영적 상황의 사영이다. 여기서 '한국교회'는 대한민국 내의 모든 교회들을 총망라한 전교회적 차원의 범위이다. '한국교회'는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이다.


그 유기적 통일체 안에서 우상숭배에 동의한 교단와 교회, 선교단체들이 또 하나의 유기적 결합체로 모여 또 다른 '한국교회'의 이름과 자격으로 공식적인 우상숭배를 했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차원에서 두 유기체가 충돌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한국교회'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죄악의 벽 뒤쪽으로 소멸되어 사라진 것과 같은 상황인 것이다.


정체성의 붕괴는 곧 메타 코스모스의 붕괴다. 성령의 결합이 아닌 우상과 뒤섞인 몸으로의 변질 말이다. 통일 대한민국을 부르짖는 모든 깨어있는 이들은 이 구조 안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한국교회'의 일부 기관일 뿐 몸으로서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끼리 모인다 하여 우리가 '한국교회'의 몸을 초월한 주체적 자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속한 교회가 WCC에 귀속되어 당신이 그 죄를 막는 중보자로 섰다고 한번 생각해보자. 교회와 하나님과의 사이에 서서 죄에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내고 회중에게는 회개를 외쳐 돌을 맞는다. 대신 죄를 짊어져 금식으로 나아가고 부르짖는다.


그러나 교회가 끝내 회개를 이루지 않겠다고 결정한다면, 당신의 모든 중보가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게 되겠는가? 당신은 중보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해지고 영적으로 깊어지며 지경도 넓어질 수 있다. 그리고 교회의 죄악도 당신이 중보하는 동안만큼은 씻겨져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사 존재인 교회가 계속 그런 죄악에 머무르고 있다면, 중보는 사실상 별다른 소용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중보는 끼리끼리 모여 부르짖는 차원을 넘어서야만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국교회'로서 전교회적인 회중을 모이게 하여 유기적 통일체로써 회개의 주체적 존재로 세워서 또 다른 '한국교회'인 유기적 결합체, 즉 우상 세력을 반드시 교회안에서 내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중보가 이것을 할 수 있도록, 방향 전환을 할 수 있도록 조명해줘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의 현 상황은 그 존재 자체가 이미 없어진 것과 다름 없다. 이미 존재하는 '한국교회'가 모여서 그 안에 있는 죄를 씻자는 차원이 아니라 '한국교회'를 다시 만들도록 모이게 해야 한다.


회중이 만들 유기적 존재는 회중의 인식과 믿음 안에 있는 상정된 존재로 이뤄진다. 믿음을 두고 바라보는 포커스가 현 상황에 대한 어물쩡한 믿음으로부터 야기된 것이라면, 다시 말해 '한국교회'의 존재 자체가 박살난 현상황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한국교회'로서 모이자는 대주제 아래 만들어질 그 어떤 '한국교회'라는 존재도 어물쩡한 존재가 되버린다.


유기적 존재들의 충돌 현장에서 상반된 두 존재에 대한 인식이 회중에게 필요하다. 유기적 결합체의 정체성은 특정한 개별 존재를 초월한 곳에 있다. 그것은 존재들끼리의 결합을 형성하고 있는 연결고리, 사슬이다. 즉, 회중의 인식을 위해 유기적 결합을 이루는 사슬을 조명해야 한다.


유기적 존재를 나누는 잣대 역시 이 사슬을 드러내는 것이고 충돌시키는 것이다. 사슬의 충돌은 사슬끼리 이뤄진다. 유기적 차원의 문제는 유기적 잣대가 있어야만 드러난다. '한국교회'는 오직 예수, 그분을 알리는 성령의 결합체이다. 


그런데 예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이 교회안에 우상숭배자들의 사슬이다. 회중의 믿음 가운데 이 사슬의 충돌을 인식시키려면 '한국교회'의 깨져버린 사슬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어둠의 사슬을 덮고 있는 가증한 덮개가 걷혀져야 한다.


'한국교회'에 일어난 공식 우상숭배의 죄악으로 미혹의 역사가 대부분의 회중 가운데 계속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미혹의 영을 걷어내지 않으면, 회복해야 할 '한국교회'는 영영 회복하지 못할 수 없다.


가증한 덮개는 곧 그들이 '한국교회'인 척 하게 만드는 가증한 옷이다. 그것이 그들의 유기적 결합을 합당하게 여기게끔 하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유기적 차원을 이루는 각 존재들의 사슬에 대한 조명은 '한국교회'로서 분명한 잣대(오직 예수)를 세우는 것과 더불어 그들의 사슬을 덮은 가증한 옷을 치우는 것, 그리고 유기적 존재의 에토스와 페르소나를 박살내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그 가증한 옷이 무엇일까?

바로 WCC와 세월호 참사의 영적 인과를 덮은 가증한 의, 그것을 수놓은 노란 리본이다. 그것이 최초의 겉옷이다. 이 인과 관계를 밝혀 가증한 옷을 벗기는 것이 저들의 유기적 에토스를 박살내고 그 밑에 있는 사슬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WCC를 덮고 있는 가증한 옷을 드러내야 저들의 사슬이 드러난다. 어둠의 사슬이 드러나야 가증한 옷 가운데 함께 얽혀져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회중이 깨닫기 시작한다. 회중이 인식해야 '한국교회'를 이루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본래의 사슬에 대한 잣대로써 끊어버릴 수 있는 현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공식 우상 숭배에 대한 회개는, 회중이 이룰 유기적 존재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당사 차원의 존재가 아니다. 우리끼리 부르짖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매듭의 사영은 실제 매듭이 있는 차원에서 해결해야만 한다.


현 상황에서 방법이 없는 것 같아도 길은 있다. 아직 우리가 행하지 않아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 뿐이다.


대한민국과 연결된 것은 '한국교회'이지 그 일부인 우리가 아니다. '한국교회'의 존재 자체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과 그 차원의 범위에 맞는 대응과 중보가 필요하다. 전교회적 범위 차원의 존재에 포커스를 제대로 맞춰야 그에 따른 대응의 길이 보인다. 우리는 우리만의 중보를 넘어서서 회중 차원의 사슬과 부딪쳐야만 한다.



글 & 이미지 출처: InSung Koo님 페이스북






 

거짓선지자


이단 사이비 교주들의

하나같은 공통점은 바로 교만입니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모르신다는

세상 마지막 때와 시기를 자신들만 알고 있노라며

순진한 영혼들을 멸망의 길로 몰아갑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성경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예언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마 24:36-37)


이단들의 유형을 살펴보면

살기가 어려웠던 시절에는 복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곧 신앙촌 박태선 교주를 비롯하여

엘리야 선교단과 같은 단체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지식이 높아지고

생활이 윤택해지자 왜곡된 말씀으로 미혹하며

거짓 선지자들은 결국 '신.천.지의 출연으로'

그 정점을 찍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진리에 바로 서지 않으면

신앙을 지키기가 매우 어려운 시대이며,

주의 자녀들과 사단 마귀와의 첨예한 전쟁은

바로 말씀의 전쟁인 것입니다.


더불어 성경은

성도들의 구원을 빼앗아가는

악한 세력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 10:41-42)


이 좋은 편이란 과연 무엇인가요?

그것은 곧 주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오직 하나뿐인 내 영혼보다

더 귀한 것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마귀는

여전히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니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거짓 선지자들에게 시험을 당하는 것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마 24:24)


이처럼 이단들도

얼마든지 질병을 치유하며

기적을 행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가오는 세상 종말의 시기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먼저는 우리가 모든 사명을 마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다음은 성경의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임하시는 날입니다.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우리는

개인적인 종말의 신앙을 지향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영혼을 미혹하는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종말의 시기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루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날마다 깨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 세상의 종말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한분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주의 자녀들에게

그 무엇보다 영분별이 가장 필요한 시기요,

이 시대의 적그리스도는 성경을 가감하여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요일 4:1)



출처: 한국영성아카데미(성경열기.영성치유) 원문보기   글쓴이: 전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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