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철지난 이데올로기 타령이냐 생각하는 영적 지도자들을 위해 …


무슬림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두 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1) 복음과 성령의 역사에 의해 개종하는 경우. (2) 드물지만 코란과 하디스를 연구하다 경전의 모순과 거짓에 회의를 느껴 개종하는 경우.


사실 두 경우 모두 성령의 은혜입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분명한 신앙인이 됩니다. 확신하기 때문이지요.


저 역시 최근 좌파에 대한 비판의 글을 포스팅을 하는 이유가 후자의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제 지인들이 안 그러던 사람이 왜 정치적 언급들을 포스팅할까 궁금해할지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다수의 목회자들이 그렇듯 정치나 이념에 대해 중립적이었고 표현도 자제했습니다. 저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성애를 비롯하여 이슬람과 관련한 이해할 수 없는 비상식적 현상들에 의문이 들었습니다. 파멸이 분명한데 왜 저럴까?... 그래서 지난 1년 반 동성애의 배후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적지 않은 자료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다 깜짝 놀란 것은, 그 배후에 이념이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네오막시즘, 신좌파 등등 어떻게 불리든 결국 근본 맥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자본주의, 그리고 기존의 보편윤리와 체제를 붕괴하려는 무신론적 인본주의 즉, 마르크스의 변종 이념들이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간혹 ‘철 지난 이데올로기’, ‘실패한 공산주의’를 왜 이제 와서 들먹이느냐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요 환상입니다. 공산주의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버전이 다른 강력한 옷을 입고 은밀히 우리를 공격해 왔습니다.


진정 시대의 징조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좌,우파가 뭔지도 몰랐습니다. 사실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목회에만 마음을 두었고, 대다수의 목회자들처럼 대형교회들의 스캔들이 나면 비판하는 매체들에 동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체제를 붕괴하려는 무리들의 주밀한 전략이 깔려 있었습니다.


물론 교회의 부패는 회개하고 고쳐야 마땅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된 참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정말 좌파들이 체제전복을 원하는가? 동성애나 이슬람이 저들의 도구인가? 그래서 좌파의 자료들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정말 그렇게 주장하고 믿고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저런 것이 믿어지지? 또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영적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단에 빠진 이들의 경우, 피해자들이 이단의 파괴성에 대해 단 한번도 들어보지 않았을까요? 알면서도 당합니다.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빠져나와도 유사 이단을 전전합니다. 이유는 미혹되었기 때문이요, 중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의 영적 강도가 아니면 만족하지 못합니다. 좌파 사상도 그렇습니다. 전향하지 못합니다. 전향했어도 그들의 마음에는 언제든지 열리는 잠재적 좌파의 방이 하나 존재합니다. 그래서 피보다 이념이 진하다고 저들은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목회자들은 시대를 분별하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성장을 위해 열심을 내면 유토피아가 올 것처럼 열심을 내던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어떤 사상이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혈육이 서로를 고소하고 죽이는 시대가 온다했습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해하는 시대, 사람들에게서 사랑이 식어져 가는 현상에 주목해야 합니다. 파수꾼이 되어야 할 목회자들이 교인들만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젊잖은건지, 순진한건지 아니면 무지하고 나태한 것인지 안타깝습니다.


신학자들은 시대의 흐름은 관심 없고 저들만의 리그에서 논쟁에 열심입니다. 좌파들은 그것을 원합니다. 자신들의 정체와 전략을 알기를 원치 않고 끓는 물에 담긴 솥 안의 개구리처럼 서서히 죽어가길 원합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목표가 분명합니다. 그래서 잘 뭉치고 희생하고 헌신합니다. 그러나 우파나 기독교인은 뭉치지 못합니다. 목표가 제각각이요, 저마다 자기가 대장되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쉽게 와해되고 패배하게 됩니다.


좌파는 인권, 혐오, 성적 지향, 자유, 평등 등등 언어의 힘을 너무 잘 압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젠더라는 말을 썼나요? 제가 왜 이런 말을 합니까? 제대로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젠더 이데올로기가 한국에서는 성평등이라는 이름으로 헌법에 탑재시키려 발악을 합니다.


왜 철지난 이념 이야기 하냐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조금만 관심을 가져보세요. 앞으로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말입니다. 유럽교회와 사회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세요. 그러면 다시는 그런 소리하지 않을 겁니다.


복음은 모두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죄 값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런데 거짓복음은 혐오라는 옷을 입혀 한편만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을 죽이려 듭니다. 또 거짓복음은 창조질서를 왜곡시켜 사랑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혐오의 사악함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 파괴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념은 철지난 것이 아니고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더 강력한 버전과 업그레이드를 통해 이 사회와 교회를 허물려고 덤벼들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의 터키나 이집트처럼 되고 맙니다.


한국교회가 영원할 것이라 착각하지 마십시다. 과거 터키나 이집트는 기독교가 부흥했던 지역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슬람 국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적 분별력과 복음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우리도 저 지경이 될지 모릅니다.


지금은 비둘기 같은 순결함과 뱀 같은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사랑의 복음을 강조합니까? 그렇다면 정말로 그 복음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저들의 사악함도 이길 수 있습니다.



글: 박광서 목사님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도자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승만은 미군이 철수한 틈을 타 남침한 북한에 의해 짓밟히고 적화될 수 있었던 민족의 위기 가운데 외교를 통해 미국과 유엔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적화의 위험에서 건져냈다.


지금 이 민족의 위기는 전쟁의 가능성 이상이다. 지금 정부는 친북, 친중 노선을 걸으며 미국과의 외교단절로 치닫고 있다. 미국과 소통했다는 대통령의 거짓말은 지속되고 있다. 미군이 철수하게 될 경우 이 나라는 '연방제' 또는 북한의 기습 남침의 위험에 놓이게 된다.


지금 우리는 이 민족의 권력자들이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올바른 정책을 펴도록 기도해야 할 때이며, 그 일이 시행되지 않을 때..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지도자를 일으켜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지금 이 나라의 영적인 상황은 너무 암울하다. 한 때 신실한 것으로 알았던 한 자매의 페이스북 담벼락에는 현 정부가 원하는데로 판결을 내리지 못한 판사에 대해 '박피'로 죽이는 형벌을 가해야 한다는 어조의 끔찍한 포스팅이 올라와 있었다.


잠들어 있는 이 세대에 '연방제'가 이루어지고, 그 체제에 반대하는 목사들을 '박피'한다고 할지라도 옹호하는 자칭 기독교인들을 상상하는 일이 억지가 아닌 시대가 된 것 같아서 암울하다. 이 세대 교회들은 성령을 거부하고, 살인의 영을 받기 시작한 것일까?


교회여! 언제까지 '정의실현'이라는 이름으로 살인의 술, 거짓의 술, 음란의 술, 증오의 술을 들이키고 있을 것인가? 진노가 임하기 전에 당장 더러운 우상을 벗어버리라.


진정 가난한 자의 친구, 환난 당한 자의 친구는 주사파로 채운 이 나라의 정부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이심을 회복하라. 지금 우리는 이 민족의 참 된 리더십의 회복과 교회가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도록 엎드려 울지 않으면 안된다.



- 이환희 목사님 묵상단편 / 시편 72:1~11절

1. '신자들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부활' 中에서 영적 부활 / 머레이 J. 해리스



그리스도와 그의백성들의 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의 근저에 있는 한 가지 가정은 그의 부활과 그들의 과거와 미래의 부활 간에 완전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백성들의 부활을 함축하고 그의 백성들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함축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자들의 영적 부활과 몸의 부활보다 먼저 일어났다. 그러면, 신약성경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들의 부활을 연관시키고 있는가?


(1) 영적 부활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들의 영적 부활 간의 친밀한 관계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골 3:1) 또는 "그와 함께"(엡 2:6; 골 2:12) 살리심을 받았다고 하는 단순한 사실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전치사구는 기독교인들과 그리스도 간에 운명이 동일하다거나 일치한다는 것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또한 기독교인들의 새로운 생명에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입각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 위에 높이 오르신 다시 사신 그리스도가 없으면(엡 1:21-22), 신자들은 모든 악의 세력들에 대하여 승리한 부활 생명을 주기 전에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을 것이다(엡 2:1-6; 골 3:1, 5-8).


관계가 이렇게 가깝다는 것은 예수께서 단 한 번 살아나신 것같이, 신자들도 단 한 번 영적 생명으로 살아난다는 사실이 잘 예증한다. 바울로서는 "그리스도께서(한번) 살리심을 받으셨으므로, 너희도(계속해서) 살아나도록 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쉬웠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정은, 바울이 골로새인들에게 요컨대 "너희가 (한) 세례를 받았을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으므로(골 2:12), 부활한 사람들처럼 행동하라"(골 3:1 참조)고 말하는 것이다. 단 한 번의 세례에 반영된, 단 한 번의 신자들의 일으키심이 단 한 번의 그리스도의 부활에 상응한다. 비록 죄에 대하여는 끊임없이 죽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롬 6:11-12), 그리스도와 함께 반복하여 살아나는 일은 없으며, 오직 "새로운 생명의영역 가운데서(롬 6:4 MOFFAT) 계속하여 행하는 일만이 있다. 또 하나의 유사성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언급 및 기독교인들의 영적 부활에 대한 언급이 변함없이 과거 시상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코 다시 죽지 않으실 것이니, 그리스도는 결코 다시는 살아나지 않으실 것이다(롬 6:9-10). 또한 그래서 비록 신자들은 미래의 육체의 죽음 후에 미래의 몸의 부활을 경험하겠지만, 결코 두번째 영적 죽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두번째 ㅇ여적 부활을 경험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부활 사건 뒤에는 부활 상태가 따라온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다"(쉰에조오포이에센, 부정과거)는 것을 주목한 후에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이제 구원의 상태에 있는 것이라)" (에스테 세소스메노이, 완료)라는 삽입구를 덧붙인다(엡 2:5). 역시 이 상태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연합이 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대하여 사는 것 즉 부활 생명을 향유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인 것이다(롬 6:11). 그의 부활 후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대하여" 사시는 삶(롬 6:9-10)과 신자들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롬 6:13) 후에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롬 6:11)로 사는 삶 간에는 단순히 평행 현상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자들의 현재의 삶은 그의 부활에서 나오는(빌 3:10) 그리스도의 살으심과 능력에 근거한다(롬 5:10).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신 것같이(롬 6:10)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셨기 때문에 신자들은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난다(골 3:1-4 상반절).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에 뒤따라 오는 부활 생명은 내주하시는 다시 사신 그리스도에 의해 유지된다(갈 2:20 상반절).


요약하자면, 영적 부활 사건이 오로지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는 것과 같이, 뒤이어 일어나는 영적 부활 상태는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머레이 J. 해리스의 '신약에 나타난 부활'에서 발췌(241-243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이야기인데, 조금 의학적으로 접근해 보고자 합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눅 1:34-35)


아기가 태어나는 것은 남녀가 서로 육체의 관계를 맺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시는 과정은 좀 달라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육체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인간 사이에 태어난 아기는 육과 육의 결합이지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아기는 영과 육의 결합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약혼한 사이인 요셉과의 육체적 접촉이 없는 상태에서 잉태를 하게 된 것은 육적인 눈으로 볼 땐 기이한 일이지만, 영적인 시야에서 바라보면 전혀 이상한 논리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담의 원죄로 더럽혀진 인간의 육체 속에 거하시기 위한 전제조건은 아담의 원죄가 되물림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원죄를 되물림받은 남녀와의 관계 속에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위로부터 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죄인된 마리아의 피가 태중의 아이에게 전수되어 마리아가 품고 있는 뿌리깊은 죄성이 아기 예수께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너무나 신기하게도 산모와 태중의 아기는 피를 공유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기는 철저히 독립적인 피를 가지고 있으며 산모와 피가 섞이지 않기 때문에 혈액형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피를 공유한다면 엄마의 혈액형이 아기의 혈액형과 똑같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아기 예수께서는 아담으로부터 되물림받은 원죄와 인간의 죄성을 피하여 죄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게 되신 것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2)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3)

예수님은 참으로 연약하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었다고 한 이사야의 예언을 보면, 예수님은 잘 생기지도 않으셨고, 체격이 좋지도 않은 분이셨습니다. 우리의 보기에 매력을 느낄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의 모든 부족함과 약점을 동일시할 수 있으십니다.

그분은 또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가난을 많이 겪으셨으며,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시며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사람으로써 겪을 수 있는 모든 아픔들을 다 경험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2:18)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시며, 단지 이해하고 공감할 뿐만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모든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전부 다 끌어안고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품고 있는 연약함 중에 가장 속수무책인 것은, 바로 죄와 죽음의 문제입니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 죄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죄 때문에 죽음이 왔고 죽음 앞에서는 어떤 육체도 대항하거나 거부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죽음을 예외없이 모든 육체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2000년 전 이 죄와 사망권세를 철저히 깨뜨려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죄와 사망권세를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가 주어지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주인으로 모셔들이고 그분의 권세를 덧입은 자만이 죄와 사망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적용>
누가복음 묵상을 통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시야와 초점을 두고자 합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만 바라보며 내게 주어진 모든 일, 관계, 사역 속에서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기도>
사랑하는 주님,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죄로 물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마리아의 몸을 빌어 아기 예수로 태어나신 겸손하신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잘 생기고 좋은 체격에 매력넘치는 사람의 모습도 아닌,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는 모습으로 오신 주님... 

십자가라는 비참한 운명으로 끝나는 인생이셨음에도 기꺼이 그 길을 걸어가셨던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진정 제 영혼을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임을 믿습니다. 저에게 맡겨주신 사람들을 성육신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아낌없이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웃 블로그: 글/곰팅이 

“오직 십자가 신학만이 십자군 및 교회에 대한 승리주의적 이해와 연결된 사악한 관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는 서구의 소유적 개인주의와 정치적 정적주의 안에 집약된 형태로 은닉하고 있는 상태에서 뚫고 나와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삶의 토대로 삼고 있는 모든 우상숭배적 추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


남아공 케이프타운대학교 명예교수이자 공공신학자인 존 디 그루치 박사(Dr. John W. de Gruchy)는 지난 10월 20일 밤 8시 30분, 경기도 곤지암 소망수양관에서 가진 종교개혁500주년기념공동학술대회에서 ‘세상의 생명을 위한 말씀과 성령의 변혁운동으로서의 종교개혁’이라는 주제로 강연에서 한 말이다. 통역은 김선영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가 맡았다.


   
▲ 존 디 그루치 박사(Dr. John W. de Gruchy)가 번영신학과 번영복음을 미국에서 만들어진 이단신학이라고 질타했다. ⓒ<교회와신앙>

그루치 박사는 “한국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장로교 안에 너무 많은 분파들이 많다는 것에 놀랐다. 교파별로 너무나 찢겨져 있어서 놀랐다.”며, “한국의 대형교회들과 선교활동에 대해 들어왔다. 남아공에도 대형교회가 있다. 하지만 주류 교파가 아니라 오순절파와 독립교회들 중에 대형교회가 있다. 주류교회에는 대형교회가 없다. 번영신학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서두를 열었다.


그는 ‘번영신학의 문제점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고는 “전혀 그리스도적(기독교적)이지 않다.”고 단언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제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를 ‘번영하라’고 부르신 게 아니라 ‘십자가를 지라’고 부르셨기 때문”이라며, “그리스도인이 번영하려고 하는 의도를 갖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의도가 전혀 아니”라고 전했다.


심지어 “남아공에서는 오순절파나 독립교회를 제외하고는 목사나 신학자들은 번영신학을 믿지 않는다. 번영신학이나 번영복음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이단신학이라”고까지 말해 회중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특히 “복음은 세상을 섬기라고 말씀하셨는데 번영신학은 우리 자신의 상태를 더 좋게 하거나 더 높은 지위를 얻게 하는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 문제”라며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필요가 무엇인지, 그 필요를 채워주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런데 번영신학과 번영복음은 돈을 내게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마르틴 루터 당시 성직자들은 성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했다. 면죄부는 ‘돈을 내고 복을 받는다’는 개념의 번영신학과 일맥상통한다. 루터는 하이델베르그 논쟁에서 제시한 95개조의 논제를 통해 면죄부를 공격하면서 ‘영광의 신학’ 대신 ‘십자가 신학’을 강조한다.”고 밝혔다.


또한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의 교회 개혁운동이 교회 안의 잘못된 신학과 제도를 개선한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변혁운동으로 나아갔다.”며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루치 박사는 “루터는 맘몬(Mammon)을 ‘지상에서 가장 흔한 신’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종교개혁시대 이후 전 세계에 퍼진 자본주의가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그리고 북아메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럽의 착취와 식민지화의 집단 ? 종족학살에 나타났다.”며 “오늘날 경제 성장, 통화 팽창, 사유화의 힘은 지구를 위협하며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사회 제도에 어설프게 손을 대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만이 도움이 될 것이다. 교회로서 우리는 대안을 찾는 것을 도와야 한다.”며 “특히 ‘번영복음 ? 번영신학’이 너무나 많은 신자들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더욱 그래야 한다.”고 말했다.


그루치 박사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후계자들인 우리는 지난 500년 동안 파벌주의와 교판간의 신앙고백 논쟁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개혁가들이 확신을 갖고 결사적으로 저항했던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권주의, 성직 계급주의, 권위주의, 가부장주의, 그리고 호사스런 풍조를 개신교식을 탈바꿈하여 다시 만들어 냄으로써 위태롭게 되었다는 비통한 실상을 직시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러면서 “독일의 공공신학자이자 목회자였던 디크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1932년 종교개혁 주일, 독일국가의회 총선이 치러지던 날, 요한계시록 2장에 관한 설교를 하면서 회중들에게 ‘너는 너의 첫 사랑을 버리고 말았다’며 루터의 교회가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기억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했다.”며, “종교개혁500주년을 기념하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라고 밝혔다.


이어 “본회퍼는 종교개혁의 중심에 ‘말씀’ 뿐만 아니라 ‘성령’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말씀은 결코 하나님의 성령과 분리될 수 없고, 성령은 말씀과 분리될 수 없다. 개혁가들에게 말씀과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 안에 연합되어 있었다.”면서, “프로테스탄트 개혁은 변혁적 신앙고백이라는 이해의 특성을 규정하는 요소들인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간의 관계성 회복”임을 강조했다.


그렇기 때문에 “16세기 개혁가들은 성경을 읽을 때나, 성경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할 때나, 그리스도를 고백할 때나 성령이 그리스도에 대한 주된 증인이기에, 성경은 성령의 변혁하는 사역 없이는 죽은 문자로 남아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며 “성경은 독자를 과거로 연결시켜 준 이야기를 제공하지만 성령만이 확신시키고, 개종시키고, 변화시키면서 그 과거를 현재로 만들었다.”고 역설했다.


마지막으로 그루치 박사는 “16세기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변혁적 힘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에큐메니칼 전체와 힘을 합쳐야 한다. 루터와 동행하되 그를 넘어서고, 칼뱅과 동행하되 그를 넘어서고, 츠빙글리와 동행하되 그를 넘어서고, 재세례파와 웨슬리와 동행하되 그들을 넘어서야 한다.”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들이 우리에게 넘겨준 신앙고백들을 되새겨 보되, 오로지 오늘날 그리스도를 충실히 고백하고자 성령을 통해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하자.”고 갈무리했다.

한편 존 디 그루치 박사(Dr. John W. de Gruchy)는 Chicago Theological Seminary(Th.M, D.Lit., D.D)와 Rhodes University(D.Lit), University of Cape Town(D.S.S)에서 학업을 마쳤으며 현재 남아공 케이프타운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작물로는 The Church Struggle in South Africa(1979), Liberating Reformed Theology: A South African Contribution to an Ecumenical Debate(1991), Christianity, Art, and Transformation: A Study in Theological Aesthetics, Bonhoeffer(2001), John Calvin: Christian Humanist and Evangelical Reformer(2013) 등이 있다.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759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성경에서는

사단을 '이 세상 신'이라고 칭한다.


이 세상 신이란 말은, 다시 말해

이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고

미혹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단이 전지전능한 존재는 절대 아니다.


사단이 이 세상 신이 될 수 있는 것도,

그놈이 전지전능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에

가능한 부분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무엇보다 주님 오심이 아주 가까운 이 말세지말의 때에,

"다수"가 옳다고 외치는 진실이 

성경적으로 "진실"이 될 수 있고,

"평화"가 될 수 있고,

"인권"이 될 수 있고,

정말 성경적인 "정의"가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나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본다.


성경은, 마지막 때가 되면 될수록,

사단이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다고 말씀한다.


한번 생각해보자.


한사람 한사람씩

일일히 찾아다니며, 미혹시키는 것보다,

어떤 방대한 차원의 큰 문제 하나를 풀어놓고,

사람들을 집단으로 미혹시켜서 삼키는 것이

사단 입장에서도, 훨씬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왜 이런 효율적인 작업을 놔두고,

마귀들이 사람을 일일히 찾아다니며 미혹하는 

그냥 각개전투만 하도록 놔두겠는가!  


이런 사단이...

주님오심이 가까운 이 시대에,

세상 사람들을 포함한 다수의 사람이 목소리 높이는 게

'진실'이고 '정의'이고 '선'이 되도록

가만히 보고 있을거라 생각하는건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 아닐까?


우리가 판단하고 분별해야 할 문제가 

외적으로 볼 때,

어느 정도, 사안의 중대성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문제의 진실과 거짓에 대한 분별 문제는

그만큼 더 영적인 집중을 하지 않으면,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 분별이 필요한 문제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보자면,

개인적 차원, 집단적 차원, 국가적 차원

로 볼 수 있는데,


문제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보다는

집단적 차원의 문제가 더 분별이 어렵고,


집단적 차원의 문제보다는

국가적 차원의 문제가 더 분별이 어렵다는 데 있다.


왜일까?


개인적 차원의 분별 문제는

대개 객관적 진위여부의 문제보다,

주관적인 가치판단의 문제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즉 다시 말해,

내가 스스로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또 성령님께 묻고 의지하여

답을 찾으면 되는 문제가 대부분인 것이다.


하지만, 개인이 아닌 다수가 걸린 문제는

개인의 생각이나 판단만으로 되는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주장과 판단이 혼재되어 있기에 

그런 상황에서 문제의 객관적 진위여부를 판단하는데는,

그만큼 더 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서

A그룹과 B그룹이 나뉘어

서로 분쟁이 일어났는데,

서로 주장하는 바가 다르고, 진실공방이 치열하다면,

누구의 주장이 진실이고 거짓인지에 대해,

매우 차분하고 객관적이고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그 다수가 이렇게 단 몇사람이라 하더라도,

결코 쉽지 않은 게 바로 분별의 문제인데,

국가적 차원의 문제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런 분별의 문제 이전에,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섭리도

크게 나눠보면,


개인적 차원, 공동체적 차원(교회적 차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국가(민족)적 차원의 범주로 나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개인에게 역사하시어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가시는 것처럼

내가 속한 가정이나 교회 공동체에도

역사하시어 뜻을 이루어가시고,

국가와 민족에도 역사하시어 주님의 계획을 이루어가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인류 구속 역사를

크게 이런 범주에 의해 이루어가신다.


그런데, 문제는

사단도 하나님의 이런 구속 역사를 그대로 흉내내어,

개인적 차원, 공동체적 차원,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각기 다른 수준의 미혹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시대가 시대인만큼,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 있어서,

그 미혹의 정도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게 현실이다.


이런 혼란한 시대 속에서,

가장 분별이 힘든 범위인 국가적 차원의 사안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만큼 영적집중도를 높이지 않으면,

아주 그럴듯한 논리와 사상,

자기안에 심겨진 '종교적 틀'에 갇혀서,

그대로 휩쓸려 가버리게 될 수가 있다.   



여기서 조금만 내 얘기를 해보자면...


예수님을 만난 후,  2년이 지난 2008년,

그때만 해도, 나는 신앙심이 나름 뜨거워서,

재림과 십자가 복음에 대한

여러 신앙관련 자료들도 보고,

여러 목사님들의 말씀도 듣고,

기도 열심히 하면서, 믿음생활에 충실하던 때였다.


그러던 2008년의 어느날,

우연히 어떤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데,

갑자기 그 목사님이 정치(?) 관련 얘기를 하시면서,

반드시 한반도가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그 애기를 듣자마자,

속으로 막 비웃으며 판단을 했다.


"아니, 지금이 때가 어느 땐데, 통일이야,

예수님 재림하실 때가 얼마나 임박해 있는데...

그런건 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목사님이 너무 시대를 모르는 얘기를 하시네...

그리고 목사님이 균형을 잃고 저렇게 편향적으로

정치적 발언을 해도 돼? 저 교회 성도들은 어째..ㅉㅉ"


아주 또렷히 기억이 난다...

이런식의 생각들을 했던 당시를...


그리고 그 비슷한 시기에

TV뉴스만 틀면 연일 나오던 소식들...

바로 광우병 사태...  


나는 당시 세상적인 이슈에 거의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하나님, 예수님만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여겼는데,


뉴스에 그런 소식들이 연일 집중적으로 보도되고,

이런저런 정보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어줍짢은 지식들이 내안에 막 들어오고, 

괜한 정의감에 불타,

"나도 만약 서울에 있었다면... 저 시위에 참가했을텐데..."

라는 생각을 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내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보던 그 정보들이

실상은 사실이 아닌 거짓들이었지만,

그 당시는, 내가 눈으로 들어오던 대부분의

주류언론 미디어, 인터넷 포털 등이

그러한 정보들을 사실인 것처럼 쏟아내고 있었다... 




당시 조직적으로 뿌려지던 광우병 괴담들.

이런 황당한 거짓말을, 대다수 언론들은

사실관계 확인도 하지 않고

거짓 왜곡 선동 보도에 열을 올렸었다.

그로 인해, 너무나 터무니 없고 황당한 거짓말임에도,

당시 대다수 국민들이 분별력 없이 받아들이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그런 정보들이

거짓임을 증거하는 진실의 소리는,

내가 힘들게 검색하고 찾아야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모퉁이 구석진 어딘가에서 울려지고 있었지만,

나는 관심이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하나님, 예수님 찾고,

재림과 십자가 복음에 열성적이던 내가...


세상문제 관심없다고 자부하면서도,

정작 내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고,

세상이 강력하게 부르짖는 진실(?)에

내 마음이 서서히 움직여 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해보면 기막힌 일이다.


사실, 이 당시 광우병 사태는,

국가적 차원의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분별이 요구되는...


당시 나는 내 나름대로 세상을 멀리하고

'십자가와 재림 복음'에만 관심 갖겠다는

어떤 신앙적인 원칙(?)같은게

나도 모르게 내 안에 형성되어 있던 상태였다.


그 원칙은

내 스스로에 의해 규정되어진

그런 신앙적 원칙이었는데,


하지만 그 원칙이란 것도,

국가적 차원의 어떤 문제가 터지니,

다 사라져버리고,

그 문제에 자연스레 반응하며,

그 거대한 미혹의 흐름 속에 

조금씩 따라가고 있었다. 


결국...

주님도 아니고, 성령님도 아닌, 

내 스스로에 의한 신앙 원칙이

나도 모르게 내안에 세워진 상태에서,

실상은 내가 반응하고 싶은 것에 반응하고,

내안의 자아와 사단의 미혹에 의해

마음의 일부가 그렇게 움직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는, 그냥

그것이 선이었고,

그것이 정의라고,

아주 철썩같이 믿었었다...


내가 보고 듣는 것이

다 진실이라고 아무 의심없이 믿었다.


나름 신앙이 뜨거웠다고 자부하면서도

분별이 필요했던 이 문제에 대해

단 한번이라도, 주님께 여쭈어보고,

성령님의 도우심과 분별하심을

직접적으로 구한 적도 없었다.


그냥 으레

주님이 함께 해주시고 역사해주셔서

내가 그렇게 반응하고 있는 것이라

아주 당연하게 여겼었다.


그렇게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나도 모르게 세워진 신앙원칙이

애초부터 잘못된 방향이었기 때문에,

무너질 때도, 쉽게 무너져버리고

국가적 차원의 문제엔 분별마저 못하고,

사단이 주는 미혹에 별 저항없이

그렇게 조금씩 끌려갔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은, 마음 중심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곁가지적인 방향이 어긋난 부분들이었고,

내 마음의 중심은 그래도 

하나님 안에서 서 있던 상태였었기에,


여타의 신앙생활들,

기도도 꾸준히 잘 했었고,

기도하면서 눈물도 났었고,

삶 가운데 개인적 차원에서

주님의 마음을 깨닫기도 하고, 

말씀을 읽을 때도, 말씀이 잘 들어왔고,

주님의 은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 

내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기에,

시간이 지난 후, 자연스레 하나님께서는

나의 잘못됐던 방향의 틀을 바로잡아주시고,

하나둘씩 깨닫고, 분별할 수 있게 해주셨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한가지 아찔한 것은,

그때 만약, 이런 문제를 대함에 있어서, 

자칫 사단이 주는 그 미혹에 아주 깊게 빠져들어갔다면,

이건 곁가지적인 방향이 어긋나는 그런 수준이 아니라,

내 마음 중심이 송두리채 흔들리고,

결국 하나님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잘못된 사상과 이념"들이

내 마음 중심에 가득 채워졌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8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지금은 국가와 민족의 문제에 대해

내 일처럼 마음이 가고, 관심을 쏟고 있고,

누구보다 한반도 자유통일을 간절히 원한다.


(물론, 지금까지

내가 가장 바라고 소망하며 기다리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다. 이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또한 신앙적인 균형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하고 있고,

무엇보다, 분별이 쉽지 않은 차원의 문제들에 대해선,

내 생각과 내 판단이 아니라, 어떻게든

성령님을 의지하려고 하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스스로가 신앙이 투철하다며,

하나님께 기도 열심히 하고,

말씀 잘 읽고 듣고 하더라도,

높은 분별이 요구되는 문제에 있어서,

그 방향이 어긋나 있는 경우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상당히 많이 있음을 본다.


왜일까?


앞선 내 경우처럼,

스스로 자기도 모르게

어떤 신앙적 원칙을 마음안에 세우고 있거나,

아니면, 자신은 믿음이 온전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기 생각과 판단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거라 믿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 특정한 사상이나 관념이 

내 마음안에 박혀 있으면,


기도 많이 하고, 말씀 읽고, 예배드리고,

신앙생활 하고 있는 내 믿음이

아무리 훌륭하고 정상적으로 느껴진다 해도,

실제 세상 가운데 일어나는 문제를 분별하는데 있어선,

잘못된 방향으로 얼마든지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개인적 차원의 분별과

국가적 차원의 분별 문제는

그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이런 경우, 내가 아무리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고,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 해도,

그 문제를 분별함에 대해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직접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묻고 구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이미 내재되어 있는 내 사상과 관념에 의한

내 생각과 판단만 마구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다.



"매체의 힘이 만만치 않다...


 주위에도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있지만

주류 언론과 인터넷을 습관처럼 보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시대 속에서 주입되는 선동적 미혹을

간파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말해줘도..

그간 봐왔던 동료보다

매체의 말을 더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도 나름 말씀보고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말씀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이 나의 인식과 사고의 틀을 구축하도록 해서

이물질이 저절로 걸릴 정도가 되어야 한다.


'비교'와 '팩트체크'만 하려는 노력이 있었어도

그리 되기도 쉽지 않은데.. 안타깝다."


- 이환희 목사님 글 中



사실 이런 경우는 대부분이 자기 안에

크든작든, 특정한 사상과 관념이

들어차 있는 경우가 많다.


어떤 특정한 프레임안에 사로잡혀 있으니,

사실여부에 있어서,

언론들이 편향되고 왜곡된 보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더라도,

그것은 보이지 않고,

자기안에 있는 사상과 관념에 의해

내가 믿고싶은 것만이 진실이고,

내가 보고싶은 것만이 팩트가 되고 본질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균형잡힌 신앙인이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다고 착각하며 산다.


누구보다 편향되어진 사고의 틀속에 갇혀 살면서

자기 안에 내재된 그 종교적 틀에 맞지 않는 소리를 하면

교회에서 왜 정치적인 소리를 하느냐며 판단을 일삼는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성령님은 여러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시다.


그 한분이 이 사람에게는 이런 분별을

저 사람에게는 저런 분별을 허락하시지 않는다.


서로 상반된 곳을 보는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반드시 자기 생각과 자기 판단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마음 중심이 하나님 안에 바르게 서 있으면서도,

곁가지적인 방향이 조금 엇나가,

지금 당장은, 바른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는

예전의 나와 같은 그런 이들도 있을 것이고,


안타깝게도,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시어

그 내면에 들어차 있는 왜곡된 사상과 관념을

비춰 보여주시지 않는 이상,

자기가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싶은 것만 듣고, 

믿고싶은 것만을 믿는,

그런 관념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이들도

상당히 많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생각하고 사고하고 있는 것들이

정녕 하나님안에 합당한 것들인지 날마다 점검하는 노력없이,

그져 "내가 하는 생각은 옳은데, 왜 저들은 저런 잘못된 사고에 갇혀서

저런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거지??"

이런식으로 스스로에 대한 자각은 전혀 할 생각없이 

그져 남의 말과 행동만을 관찰하며 판단하는 이들에겐

결코 성령님의 터치하심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교회에서 무슨 정치문제에 관심을 갖나?

교회는 오직 복음에만 신경써야 한다..."


언뜻 보면 맞는 말처럼 보인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하게

중심에 두어야 할 점이 있다.


신앙생활에 있어선 균형이란.


"믿음과 행함"

"말씀과 은사"와 같은

교리적인 범위에 국한된 균형도 그렇지만,


삶 가운데서,

교리적인 부분과 실제적인 부분이

균형 있게 조합되는 것,


예를 들어,

"지금 이 마지막 때에 통일이 뭐가 중요하냐,

북한인권이든 종북이든 그런 정치문제엔 관심끄고

제발 복음에나 좀 신경쓰자"

이런식으로 자기 스스로가 세운 신앙공식이 아니라


"통일은 반드시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알려야 하고,

저 사악한 독재 체제는 무너져야 한다.

그리고 살기 위해 북한을 탈북하는

탈북자들의 생명도 살려야 한다.


그래서 북한땅에 복음이 들어가,

한반도가 복음통일이 되어서

남북한이 함께 찬양할 수 있는 날이 와야 한다.


나라가 없이는 교회도 없고 가정도 없다.

진리안에서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을 온전히 분별하고

세상이 주입하는 미디어들의 거대한 흐름속에서

주입되는 거짓을 분별하여 이 나라가

복음의 진리안에서 바르게 세워질 수 있도록

분별하고 기도하며 나아가자..." 등등

이런식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의 가치가

실제 삶에서 행동으로 나타날 때,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진짜 복음의 삶을 사는 것이고,

빛과 소금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회개'다.

교회가 회개치 않은 교만함, 강팍함으로

지금의 국가적 문제가 생겼다는 말은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가 그 마음으로 통회자복하는 것은

사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이 또한...

겉으로는 회개를 말하고 거룩함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분별이 필요한 여러 국가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모습으로, 관심갖지 않고 분별하지 못한 상태에서

회개를 강조하는 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로

어떤 '신앙적 원칙'을 자기안에 세워놓고,

정작 주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왜냐면...

문제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인식하고 분별을 해야지만,

'무엇을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지...

올바른 방향 안에서 진짜 회개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별하며 관심갖고 나아가야 할 그것이

외적인 모양으론 '정치'라는 껍데기에 가려져 있기도 하고,

세상적인 그 어떤 프레임으로 나타나는 것들도 있다.


지난 몇년간 계속해서 블로그 카테고리에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여러 국가적 문제에 대해

이것이 실상은 국가적 차원의 영적전쟁임을,

계속해서 분명하게 전하고 있고,

지금도 이 나라 안에 여러 거짓과 선동에 의한

분별이 필요한 여러 문제들을 다루고 전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런 껍데기에 가려진

본질을 보진 못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분별이 필요한 것들을 대할 때, 

종교적 틀에 갇혀 있으면,

그 프레임 안에 있는 본질은 보지 못하고,

스스로가 내세우는 종교 틀안에서

때론 말씀을 내세우고, 거룩한 어떤 모양을 내세워서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정작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 못하는 치명적인 우를 범하게 된다.


그래서...

단 한번이라도 다른 사람의 사고와 내 사고가 충돌할 때,

정녕 내 생각과 사고가 옳은지를 점검해보는 것이 우선이다.


앞서 고백한 바와 같이,

이미 뼈저리게 한번 경험해보았기 때문에,

과거의 나처럼 그런 종교적 틀, 신앙공식을

자기 안에 만들어놓고

그런 종교적 공식에 의해서만 사고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이 있음을 보고 있어서 심히 안타까운 마음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훗날 물으실 것이다.


너는 얼마나

내 생각과, 내 뜻과, 내 마음에 합한 자로써

나와 함께 살았느냐고...



글: 엘샤다이

 

 

나는 동성애와 동성결혼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논쟁거리가 된다는 것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고 안타깝고 분노까지 인다.


1). 성경에서는 부부관계 외의 모든 성관계는 육체 뿐만 아니라 눈과 마음으로 짓는 간음까지 죄로 여기고 정죄하고 있다. 혼전 성관계와 부부 외의 성관계는 육체만이 아니라 눈과 마음으로 짓는 죄까지 포함해 모두 죄다. 근친상간이나 수간같은 짐승 같은 성관계는 더 언급할 가치도 없다.


2) 내가 이렇게 말하면, 혼전성관계와 부부 외의 성관계는 죄니까 동성애자들이 부부가 된 후에 성관계를 맺으면 죄가 아니냐고 말하는 이가 있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도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해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다.


성경은 동성결혼을 결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또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도 인정하지 않는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것, 이것만이 성경이 인정하는 결혼이다. 성경이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런저런 미사여구 가져다 붙일 것 없다.


동성애도, 동성결혼도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아니오'라고 말한다. 동성애나 동성결혼 논쟁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성경을 성경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유일하고 절대적인 권위로 인정하지 않기에 일어나는 문제다.


기독교인들 중에, 소위 스스로 신학적 지식이 있고 잘 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이들 가운데 이런 이들이 유독 많은 것 같아서 안타깝다. 성경만 제대로 읽어도 명백해지는 문제다. 헛똑똑이들이 교회안에 늘어가는 것 같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하셨지, 죄와 함께 하셨는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죄를 지으시거나 죄가 죄가 아니라고 하신 적 있나?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들과 죄인들과 함께 하신 것이지, 세리짓, 창기짓을, 죄 짓는 것을 허용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더 이상 세리짓을 하면 안 됐고 창기짓 하면 안 됐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거룩하고 순결한 신부의 모습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고 주의 종이 되겠다는 신학생들이, 동성애자들을 인정해주고 더 나아가 그들이 신학교에 입학해 목사가 되는 것도 허용해주어야 한다며, 성경말씀을 자기 멋대로 호도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을 하면서 자신들의 행태가 의로운 일이라 여기며 배도의 일에 앞장서고 있다.



동성애 관련 총회 결정에 불복하고 선배목회자를 비난하는 장신대 학생들은 누구인가!


고만호 목사님의 위 영상 속 발언에 대해 장신대학생 180명이 반대 서명을 했다고 한다. 이게 지금 신학교의 현실인가? 참담하다.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을 뜨겁게 만난 후 정말 사명을 받고 신학교에 들어왔다면 도저히 그런 행태가 나올 수가 없다.


하나님 만난 체험(거듭남)도 없이 그져 자기 생각과 논리만 내세우고 성경을 지식쌓기용으로 보면서, 목사를 직업의 하나로 생각하면서, 그런 마인드로 신학교를 다니는 이들이 뒤섞여서 겉으론 멀쩡해 보이지만 실상은 거짓과 미혹이 뒤섞여 영적 간음을 일삼는 회칠한 무덤이 되버린 것 같다.


예수님은 죄를 싫어하셨고 미워하셨다. 교만과 시기질투, 거짓이 죄인 것처럼, 성적 타락도, 부부 관계 외 모든 성관계도 분명한 죄다. 그리고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죄 짓고 싶으셔서, 죄인들의 죄를 합리화 해주시려고 죄인들과 함께 하신 것이 아니다. 죄를 깨닫게 하시고, 죄를 회개시키고, 죄로부터 구원하려고 함께 하신 것이다.


'죄인'과 '죄'를 구별하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누가 옳고 틀린지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글 일부 출처: 노승현님 페이스북/ 엘샤다이

1부 아들 편(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겠습니다.. 김세진 군)

 

 

 

2부 엄마 편(양정숙 장애인 수영선수 김세진군을 길러낸 장한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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