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부터 현재까지, 인류의 기록에 남아있는 최악의 재난들 리스트.



흥미로운 것은 역사상 가장 많은 인류의 목숨을 앗아간 재난은 바로 기아라는 점. (그 다음은 전염병)

지진, 화산 폭발, 해일, 질병 등에 의해 목숨을 잃은 희생자 수를 모두 합치더라도 굶어 죽은 사람들의 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인류의 가장 큰 적은 예나 지금이나 식량 부족이다.

실례로, 1990년대 북한에서는 기아로 350만명이 목숨을 잃어 20세기 최악의 재앙으로 꼽혔다. (미국에서 집계한 수치로 정확한지는 확실하지 않음.)

이번 리스트에서 전쟁은 제외했다.




Athens, 430 B.C.: Typhus epidemic
아테네에서 발생한 기원전 최악의 질병. 어떤 질병이었는지, 어디서 유입됐는지, 얼마나 죽었는지, 현재까지도 역사상 최악의 의학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대재앙. 폴리스 도시 국가 사이에 벌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이던 그리스 반도에는 항구를 중심으로 강력한 질병이 번져 나갔다. 이 질병은 현대의 애볼라 바이러스와 비슷한 증상을 보였는데, 고열과 구토, 눈과 피부가 붉어짐, 각혈 등의 증상을 보이다 일주일만에 사망했다고.

이 질병은 3년간 그리스 반도 전체를 휩쓸었으며, 아테나의 패망을, 스파르타의 승리를, 그리고 찬란한 그리스 문명의 쇠퇴를 가져오고 말았다.



Pompei, 79: Volcanic eruption
폼페이 화산 폭발. 로마 제국의 가장 융성한 도시였던 폼페이, 당시 세계에서 가장 멋진 자연 경관과 위락시설이 발달한 관광 도시였으며 농업과 상업이 크게 발달한 경제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베수비오 화산의 갑작스러운 폭발로 순식간에 도시 전체가 화산재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인명 피해가 얼마나 됐는지는 정확히 기록돼 있지 않다.)

이후 1500년간 폼페이는 잡초와 덩굴이 무성한 폐허였다가 17세기 중반부터 발굴 작업이 시작돼 폼페이의 장대했던 문화 유산들이 세상에 공개됐다.

Antioch, Syria, 526: Earthquake
오늘날의 터키와 시리아 경계선에 있는 안티오크에서 엄청난 규모의 대지진이 일어나 25만명이 사망.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경계선에 있는 이 도시는 종교로 인한 전쟁들, 그리고 이 시기 지속적으로 일어난 크고 작은 지진 때문에 오랜 세월 끔찍한 고통을 겪었다.


Holland, 1228: sea flood
네덜란드의 프리슬랜드에 바다가 범람, 10만명이 넘는 사람이 바닷물에 빠져 죽었다. 이후로 네덜란드는 바다 연안 지방에 제방을 쌓는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Europe and Asia, 1346-52: Bubonic plague or "black death"
1346년에서 1352년까지 약 6년간 유럽을 휩쓴 흑사병(Balck plague). 유럽의 인구 1/3을 앗아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은 사망률 80%에 이르는 임파선 페스트와 사망률 100%의 폐 페스트 두 가지 형태로 기승을 부렸다. 임파선이 심하게 붇고 피고름이 쏟아져 나오거나, 피부 조직이 까맣게 괴사하는 것이 특징. 흑사병은 당시 유럽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서도 발병해 총 7500만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냈다. 당시 흑사병은 아시아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인구 밀도가 높고 위생상태 등이 열악했던 유럽에서 피해가 가장 극심했다.

유럽에선 흑사병으로 인해 인구가 격감하여 노동력의 가치가 크게 높아져 농민들의 지위가 향상되기도 했다.



Shensi, China, 1556: earthquake
중국에서 일어난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지진 피해. 센시 지방에서 발발한 이 지진은 반경 800km에 달하는 유래없이 넓은 지역을 강타했으며, 지진의 피해를 받은 지역의 주민의 60%가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다. 당시 진도는 리히터 규모 8.0에서 8.3 정도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대략적인 지진으로 인한 희생자 수는 83만명에 달했다.


Hokkaido, 1730: Earthquake
일본 훗카이도 지방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14만명 사망.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 피해 중 가장 거대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Bengal, India, 1769: famine
인도의 벵갈 지역에서 발생한 기근으로 100만명 사망.





North America, 1775-82: Smallpox
북미 지역에서 발행한 천연두로 13만명 사망. 현재는 백신 개발로 박멸됐지만(1980년) 당시 천연두는 흑사병 이래 가장 치명적인 질병이었다. 북미 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15세기엔 스페인 군의 침입으로 남미의 원주민들이 천연두로 수백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Iran, 1780: earthquake

이란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20만명이 사망.




Ireland, 1845: famine
아일랜드의 기근으로 100만명 이상이 사망. 19세기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가장 거대했던 기근으로 기록되고 있다. 영국은 이웃나라 아일랜드에서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어 갔는데도 아무런 구호 활동을 펼치지 않은 것으로 유명. 이후 아일랜드의 영국에 대한 증오는 더욱 심해졌다.


France, 1870-71: Smallpox
프랑스에서 천연두로 50만명 사망. 


Bangladesh, 1876: Cyclone
방글라데시에서 폭풍으로 20만명 사망. 


China, 1876-78: Drought
중국에서 일어난 2년간 계속된 지독한 가뭄으로 900만명이 굶어 죽음. 


Huayan Kou, China, 1887: Yang-tse Kiang flooding
중국 양쯔강 유역의 홍수 피해로 100만명이 사망. 

 

San Francisco, 1906: earthquake and fire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생한 지진과 화재로 3,000여명이 사망. 사망자 숫자는 많지 않으나 엄청나게 짧은 시간 동안 도시 전체가 폐허로 변하는 기록적인 재난이었다. 지진은 1분도 지속되지 않았으나, 지진으로 인해 도시 전체에 대화재가 발생하면서 엄청난 재산 피해를 입었다.


China, 1907: famine

중국에서 기근으로 2000만명이 사망.

 

Worldwide, 1918: Influenza pandemic
전세계에 변종 감기 바이러스로 2500만명에서 1억명 정도의 사망자 수 기록. 


Gansu, China, 1920: 8.6 earthquake
중국의 리히터 규모 8.6의 강진으로 20만명 사망. 


Ukraine, 1921: Famine

우크라이나의 기근으로 500만명 사망.


Yokohama, Japan, 1923: 8.3 earthquake

일본 요코하마 대지진으로 14만 3000명이라는 기록적인 사상자 발생.


Nanshan, China, 1927: 8.3 earthquake

중국의 난샨 지방에 리히터 규모 8.3의 강진 발생, 20만명 사망. 


China, 1928: Famine

중국에 기근 발생, 300만명 사망.


China, 1931: Flooding

중국에 이번엔 홍수로 370만명 사망. 


Ukraine and Russia, 1932: Famine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기근으로 500만명 사망.


China, 1936: Famine

중국에 기근으로 다시 500만명 사망. 


China, 1941: Famine

또다시 닥친 중국에 기근, 300만명 사망.


Bengal, India, 1943: famine

인도의 벵갈 지방에 기근으로 350만명 사망. 


Worldwide, 1957: Influenza pandemic

전세계에 또다시 변종 감기 바이러스로 400만명 가량 사망. 


China, 1958-61: Famine
중국에 기근으로 3800만명 사망. 모택동의 농업 경제 정책의 실패로 이후에도 중국에선 엄청난 인구가 굶어죽고 만다.


India, 1965: Famine

인도에 기근으로 150만명 사망.


Worldwide, 1968: Influenza pandemic

다시 찾아온 변종 감기 바이러스, 전세계에 75만 명의 사망자를 낸다. 


China, 1969: Famine

중국에 기근으로 2000만명 사망. 


Bangladesh, 1970: Sea flood

방글라데시에 바닷물 범람으로 50만명 사망. 


Ethiopia, 1974: famine

이디오피아 20만명이 기근으로 사망. 이디오피아는 이후로도 1980년대까지 수십만명이 지속적으로 굶어죽는 참사가 계속됐고, 수백만명의 난민이 발생한다.


Nuclear. Chernobyl, (1986)

소련 체르노빌 원자력 폭발 사고. 폭발 당시 30명이 죽고, 이후 방사능 오염 후유증으로 19명이 사망. 사고 지역인 우크라이나 당국은 9만 3000명이 방사능 오염 후유증으로 죽었다고 발표.


North Korea, 1995-98: Famine and floods
북한에 기근과 홍수 등으로 350만명이 사망. 이후 북한 공산당 정권의 위기설이 지속적으로 흘러 나온다.


Asia, 2003: SARS

SARS, 일명 조류 독감으로 744명 사망. 대부분은 중국인. 사망자 수는 많지 않았지만, 치료법을 알아내지 못해 아직도 엄청난 잠재적 위험을 갖고 있음.  


Southeast Asia, 2004: tsunamis caused by 9.0 earthquake

동남아시아에 강도 9.0의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해일) 사태 발생. 인도네시아에서만 11만명이 사망. 스리랑카, 인도, 태국, 말레이지아, 몰디브, 소말리아 등지에서 수백 수천 수만 명의 희생자,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수의 난민을 발생시킴.


Louisiana and Mississippi, USA, 2005: "Katrina" hurricane

미국 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에 카트리나 허리케인. 1417명 사망. 사망자 수보다도 주 전체가 무정부 상태로 빠져들어 엄청난 재산 손실을 입음.

출처:마지막나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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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CGNTV
 

주님은 곧 오십니다. 깨어야 할 때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 :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라  (마태복음24장 7절) 

 

                                                         

                                       [ 2008년 3월 4일 필리핀에서 리히터 규모 7.0 강진이 발생하였습니다. ]



     

[ 2007년 4월 26일 인도의 뉴델리에서 리히터 규모 4.3 강진이 발생하였습니다. ]

                                    

                 

  [ 2008년 3월 30일 인도네시아에서 리히터 규모 6.2 강진이 발생하였습니다. ]

  


 
[ 2008년 3월 30일 페루에서 리히터 규모 5.4 강진이 발생하였습니다. ]

 

 [ 2007년 7월 16일 일본의 니카타에서 지진이 발생하였습니다. ]



우리 나라는 어떨까요

                                       [ 2007년 3월 평창에서 리히터 규모 4.8 지진이 발생하였습니다. ]

                                       [ 2007년 6월 15일 강원도에서 리히터 규모 3.0 지진이 발생하였습니다. ]

                                       [ 2008년 3월 22일 전남바다에서 리히터 규모 2.7 지진이 발생하였습니다. ]

                                       [ 2008년 3월 27일 강화도에서 리히터 규모 2.8 지진이 발생하였습니다. ]





    주님의 말씀 :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라  (마태복음24장 7절) 



 

[연합뉴스 2006년 10월 18일 전주천 - 강물이 말라 바닥을 보이다]


 

[SBS뉴스 2005년 10월 12일 - 40년만의 최악가뭄 아마존]



 

[연합뉴스 2006년 10월 17일 가뭄으로 밑둥드러낸 교각 - 전북]



 [조선일보 2006년 06월 05일 아프리카 - 6년째 비한물도 내리지 않고]



 

[국민일보 2006년 10월 13일 호주 - 100년만의 최악가뭄]



 

[동아닷컴 2007년 12월 11일 중국 장시성 - 심각한 가뭄]






주님의 말씀 :  난리와 난리 소문 을 듣겠으나   (마태복음24장 6절) 




 [ 2008년 - 네 모녀 살인사건 발생 ]

 

 

 [ 2008년 - 일산 초등학생 납치미수사건 ]

 


 

 [ 2008년 - 안양어린이 살인사건 ]



 

[ 2008년 - 일본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동기없는 무차별적 살인사건 ]

- 전철역에서 무관한 사람을 철로로 떠밀고, 거리에서 이유없이 흉기를 휘두르고...



[ 2008년 - 미국 아이오와주 한인입양어린이 4명 살인사건]

 

 

 [2008년 - 중국 티벳트 독립운동 과잉전압]


수없이 많은 사건들, 너무나 잔인한 사건들의 소문들...

인터넷이 발달한 지금 이런 사건을 찾기란 그리 어럽지 않습니다.

너무나

잔인하고 무섭습니다. 아무리 때가 말세라고 하지만 힘이없는 어린이와 여자를

무차별적으로 학대하고 죽이는 세상이 너무나 너무나 싫습니다.





주님의 말씀 :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마태복음24장 7절) 


[ 2003~현재 이라크전쟁 5년이 넘도록...]

 


 [ 이스라엘-레바론 전쟁 (중동)]

 

 

[ 소말리아 내전 ]



[ 스리랑카 내전 ]

 

 

[ 파키스탄 내전 ]

 


[ 앙골라 내전 ]

 

 

[수단 내전]





주님의 말씀 :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문앞에 이른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마태복음 24장 32~34절)


이스라엘은 지금으로부터 약 1900년전에 멸망해서 전세계 곳곳으로 흩어졌으나

1948년 1900년 전의 자기들의 영토에 들어와서 나라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영토로 들어간 지도 약 60년 되었습니다.

그만큼 주님의 발자국소리 가 주변에서 가까이에서 들리고 있습니다.



맺는말              


  우리 교회도 그렇지만, 많은 교회들은 주님의 오심을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큰 교회일수록 주님의 오심을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큰 교회 목사님들은 주님이 오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세상에서 복받는 목소리만 전하고 계십니다.

물론 그렇지 않는 분도 계십니다.

저는 신학도 배우지 못했지만, 계시도 받지 못했고, 은사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의 발자국소리, 오시는 소리가 들리고 보입니다.


주님이 바로 바로 우리들의 문앞에 계십니다.

곧 오십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출처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원문보기 글쓴이 : 주님만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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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행복한 예수님의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 문지기

대체의학을 전공한 에모토 마사루가 쓴 <물은 답을 알고 있다>가 출간됐을 때,

언론은 이 책을 거의 소개하지 않았고 학계의 반응 또한 냉담했다.

그러나 책 속에 실린 물 결정 사진들이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지금까지 큰 화제가 되고 있다.


몇 달 전 한 대학신문의 학생기자는 내게 ‘이런 사이비 과학 책이 독자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데

왜 과학자들은 침묵만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주변의 과학자들에게 물어보니 ‘언급할 가치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 걸 보면,

주류 과학계의 침묵은 ‘냉담의 한 표현’인 것 같다.


인터넷서점 독자서평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극단적으로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엉터리 사진들과 논리적 비약으로 가득 찬 과학책’이라는 혹평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도 아름답고 감동적인 에세이’라는 평이다.

이 책에 열광하는 독자들은 이 책을 과학책이 아니라

‘물의 생명력을 깨닫게 해준 사진 에세이’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러나 어쩌면 그래서 더 위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논리구조를 따져보자면, 이 책에 등장하는 과학은 과학이 아니다.

우선 책에 등장하는 물 결정 사진들이 믿을 만한 데이터인지 의심스럽다.

저자 에모토는 샬레에 물을 떨어뜨려 영하 20도의 냉장고에 3시간쯤 넣어둔 후 결정 구조를 관찰했다.

그는 클래식음악이나 ‘사랑, 감사’라는 단어를 보여준 물은 결정 구조가 아름답고,

‘망할 놈’이란 단어나 헤비메탈 같은 음악을 들려준 물의 결정은 흉측하더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비물질적인 것이 물질구조를 변화시킨다’는 주장으로,

무슨 에너지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결정 구조를 바꾼다는 것인지 기존 과학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실험 결과에 대한 해석은 더욱 위험하다.

저자는 물 입자가 사랑과 감사를 느낄 수 있는 ‘의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고맙습니다’라는 단어는 감사의 주파수를 물에게 보내 아름다운 결정을 만들고,

‘망할 놈’이라는 단어는 비난의 주파수를 내보내 결정 구조를 깨뜨린다는 것이다.

물질마다 고유의 진동 주파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종이에 쓴 글씨가 단어의 의미에 따라 서로 다른 주파수를 낸다는 주장은 실소를 자아낸다.

물이 세계 각국의 언어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의식’이 있다는 과격한 주장을 하려면 꼼꼼히 그 근거를 대야 할 것이다.


어는 점 이하에서 물 입자들이 조건에 따라 다양한 결정 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얘기는

고체물리학자나 화학자들의 오랜 연구 주제였으니 새로울 것도 없다.

<네이처>의 물리화학 분야 편집자였던 필립 볼이 쓴 (양문·2003)에는

에모토의 주장을 포함해 물에 관한 온갖 사이비과학들의 허구성이 잘 소개돼 있으니

저자 에모토가 참고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랑과 감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이 책의 메시지는 좋다.

그러나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근거가 조작된 것이고 해석 또한 엉터리라면,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만약 이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저자는 각 국의 신과학 지지 모임에만 참석하지 말고

연구 결과를 저명한 과학저널에 제출해 심사 받기를 권한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이 책은 근래에 나온 최악의 ‘과학’ 도서가 될 것이다.

출처: 정재승(고려대 물리학과 연구교수) /http://www.hani.co.kr/section/2003.7.18


<보탬 1>

정면으로 과학을 부정하면서도 돌아서서는 애써 과학적 수단과 논리를 앞세우는 것이

일반적인 신비주의의 특징이다.

이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애써 보여주었듯이 얼음의 표면은 규칙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1분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그 모양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

물론 얼음이 녹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작가가 무엇을 원하는가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음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물이 어떤 말을 들었는가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어떤 모습을 찍고 싶은가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뿐이었다.
이 책은 "파동"과 "결정"이라는 단 두 개의 과학 용어를 이용해서 만들어낸 엉터리 신비주의의 결정판인 셈이다.
출처: 이덕환 교수(서강대, 화학과 교수)/"과학과 기술" 논단 /2004.02


<보탬 1>

우선 책의 저자를 비롯해서 이 책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가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의식이 파장의 형태로 물질계에 직접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 혹은 상념이 물질계를 조종할 수 있다는 생각은

힌두교 등의 사상에서 흔히 등장하는 주제이다.

이것은 또한 초능력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전제이기도 한데,

범신론적 신비주의에서는 초능력 현상은 흔히 동반되는 것이다.

초능력 가운데서 소위 염력이라는 것은

인간의 의식, 혹은 정신의 힘으로 물질계를 조종할 수 있다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출처: 안점식 목사 /http://www.gmtc.or.kr/bbs/view.php?id / 2003.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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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링컨

링컨 어머니의 유언


이미지 전체보기 

 

미국 신문 편집인 협회가 1970년말 실시한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사람 뽑기 투표에서

최고 득점자는 예수님이셨고  차점자는 링컨이었습니다.

링컨은 학교 교육 1년을 받았으며 22세까지 농사 일과 상점 점원으로 일했습니다.

 링컨은 그의 어머니 낸시와 계모 사라로 부터 믿음과 사랑을 배웠습니다.

 링컨은 호롱불 밑에서사랑하는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 성경말씀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링컨의 어머니는 링컨에게 두가지 유언을 했습니다.


 

    " 내 아들아! 

    이 책은 나의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성경이다. 

    내가 여러번 읽어 낡았지만  그러나 우리 집의 큰 가보다. 

    내가 많은 땅을 너에게 물려주는 것보다 

    이 한 권의 성경을 너에게 물려주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네가 이 진리의 말씀을 읽고 이 책대로 살면 

    나는 네가 많은 땅의 주인이 되는 것보다  더 기쁘겠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성경을 읽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되어 다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무슬림 남성, 한국 기독여성 노린다
결혼 구실 접근, 개종 강요하고 폭력 휘둘러

양봉식 sunyang@amennews.com


무슬림의 한국교회 침투에 경계경보가 내려졌다. 최근 무슬림의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여성, 특히 기독교 여성과 결혼하면서 개종 강요는 물론 폭력 등을 사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가운데 중동선교 전문가들이 이같이 경고했다. 무슬림과
결혼 서약을 할 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믿느냐" 등의 종교적
서약이 있음에도 한국 기독여성들에게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은 채 외국어로
질문해 배교의 고백을 하게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파키스탄 출신 이슬람교도와 결혼했다가 최근 심각한 폭력과 개종 압력에 시달린
익명을 요구한 K씨는 "결혼 서약을 할 때 파키스탄 언어로 해서 못 알아들었을
뿐만 아니라 서약 내용을 잘 몰라 주의해서 물어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K씨는 "무슬림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원해 국적 취득을 목적으로
한국기독인 여성에게 접근하고 일단 결혼하면 폭력까지 불사하며 개종을 강요하고
있다"며 "이들의 경우 이슬람의 선교적 차원에서 기독 여성들에게 접근하는 경우도
있어 이슬람 국가 출신 외국인과의 결혼은 매우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선교전략연구소에 따르면 "코란에 따르면 무슬림 여성은 타종교인과 결혼이 아예
금지됐고 남성은 가능하되 기독교인과 유대교 여인과 우선적으로 결혼하라고
규정됐다"면서 "무슬림 남성들은 한국여성, 특히 기독교인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인생의 중요한 목적으로 생각하고 집요하게 접근하고 있다"고 주위를 환기시켰다.
또 "이슬람 남성들이 한국여성을 만나는 방법의 70%의 경우는 한글교육을 부탁하는
방법"이라면서 교회의 선교프로그램을 이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선교전략연구소 최헵시바 소장은 “무슬림 선교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결혼 문제만큼은 성도의 신앙과 그 자녀들의 신앙이 걸린 문제니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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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국선교전략연구소에서 지난 7월 19일 기독교회관에서 개최된
투아이즈네트워크  세미나에서 최헵시바 소장이 '무슬림 남성과의 결혼 전에 반드시
고려해야 할 10가지'를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혼인신고를 하려면 모스크에 가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이슬람국가의 혼인제도는 일부다처제이다 △한국에서 무슬림들은 기독교 여성을
그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사랑이라고 속아서는 안된다 △이슬람 결혼정책은 이슬람을
포교화하기 위한 전략이다 △결혼 후 당신의 자녀는 무조건 무슬림이 되며 무슬림식
교육을 받게 된다 △1부4처제 국가이므로 본국에 부인이 있어도 독신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으니 본국에서 꼭 확인해야 한다 △교회에서의 선교방법은 무슬림
남성은 남성이, 무슬림 여성은 여성이 감당해야 한다 △샤리아 법은 여성의 인권을
유린하는 구절들이 아주 많다 △출입국관리소와 교회 내에 국제결혼 상담소를
설치해야 한다 등이다.

교제중이거나 무슬림 남성을 접촉하고 있는 기독교인 여성들과 해당 교회
지도자들에게 주의를 당부한 최 소장은 “불의의 사태를 미연에 예방하기 위해
기독교인 여성들은 무슬림 남성과 결혼을 가급적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이런 피해 사건 가해자의 대부분은 파키스탄인과 방글라데시아인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연구소측은 "남성들은 체류비자와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접근했으며 결혼 후 또 다른 한국여성들을 유혹해 성적쾌락을 즐기거나 폭력을
동반한 이슬람교로의 개종을 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무슬림과의 교제 또는 결혼 중 갈등이 늘어나는 것은 한국여성들이 이슬람과
기독교의 여성관 및 결혼관에 현저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근 무슬림
국가들이 오일달러로 서구는 물론 아시아 국가에 적극적인 선교지원을 하고 학교와
문화단체들을 통해 공격적인 포교활동을 하고 있어 한국교회의 주의가 필요하다.


2008년 08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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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자들아 주께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 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 : 8 - 9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주제: 비평 학자들은 민수기가 모세의 사후 수세기 동안에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어떻게 모세가 기록했을 수 있는가?

본문: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제 이년 이월 일일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민 1:1)

성경 비평 학자들은 민수기만 아니라 소위 우리가 모세의 오경으로 부르고 있는 구약의 첫 다섯 책들을 모두 모세가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모세 오경이 J. E. D 그리고 P와 같은 다양한 자료들로부터 모세 사후 오랜 기간에 편집된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J는 주전 10세기, E는 주전 9세기, P는 주전 6세기 그리고 Ps는 더 후대로 본다.  JE는 아마도 모세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옛 전통을 담고 있다고 보나 P는 크게 과거에 대한 이상화의 기록으로서 믿을만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법이나 제도들도 모세 시대가 아니라 아주 후시대에 기록된 것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특별히 민수기는 상대적으로 초기 J와 E의 혼합체로 보며 또 아주 후대의 P와 Ps자료의 혼합이라는 것이다.  이런 다양한 자료들은 그 마지막 작업이 주전 5세기경이었을 후대 편집자들에 의해 합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민수기의 후대 저작설이나 오경의 후대 저작설은 하나의 가설에 근거한 것이다.  더구나 민수기의 내용이 초기 저작이라는 여러 가지 증거가 있다.
 
민수기 1장과 26장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목록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마리 본문(Mari)과 옛 에집트 왕국의 문서들 그리고 고전적 자료들에서 발견된다.  지파의 지도자들에 대한 이름들은(1:5-15)  그 형식에서 주전 2000년대의 특성이 있다.  이스라엘이 진을 친 것은 주전 13세기 람세스 II(Rameses) 때에 것과 유사하다. 등대에 대한 설계(민 8:)는 그것이 후기 청동 시대에 온 것을 보여준다(15-13세기).  나팔들은 애굽에서 전쟁이나 제사를 위해 사람들을 소집하는데 쓰였다. 장식이 달린 옷들(민 15장)은 중기 2천년 대에서부터 이스라엘의 이웃 나라들에서 사용되었다.  에돔에 대한 편지의 문체와 형식은 2천년 대의 외교문서와 유사하다(민 20장).  

구리뱀(민 21장)과 장막 제단은 12세기에 미디안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음이 팀나(Timma)에서 발견되었다.  민수기에 있는 발람에 대한 내용이나 언어 그리고 다른 시들은 초기 저작을 시사해 주고 있으며 매매 계약은 초기 왕조시대보다 늦지 않다.  민 28-29장에 제물에 대한 규례들은 우가릿(Ugarit)에서 온 14세기 의식적 달력을 닮았다. 그리고 민수기 34장에 규정된 가나안의 경계들은 주전 15-13세기의 문서들에 있는 가나안에 대한 애굽 지방의 것들에 일치된다⑴.   따라서 이상의 증거들은 민수기가 모세의 저작이라는 정통적인 견해를 부인할 수 없게 한다.
그밖에 민수기가 모세의 저작이라는 사실로는 다음과 같은 증거들이 있다.

  1. 모든 기록된 증거들이-시간, 장소 또는 그 시대의 관습들-목격자 모세의 기록임을 반영해 준다.
  2. 민수기 자체가 모세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1:1; 33:2).
  3. 민수기에서 인용한 신약의 구절들이 모세의 글로 말씀하고 있다(행 7장, 13장, 고전 10:2-8; 히 3:7-10).
     만일 모세가 민수기를 쓰지 않았다면 영감된 신약의 책들은 오류가 있는 것이 된다.
  4. 주님께서 민수기에서 인용하셨고 광야에서 뱀을 든 자가 실로 모세였음을 증명하시었다(요 3:14;
     참고, 민 21:9)⑵.

  그러므로 우리는 민수기가 모세의 저작이라고 확신한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다르게 쓴 것이 문서상 자료의 차이에서 온다는 비평 학자들의 주장은 하나의 가설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다른 이름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다른 품성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주
   1. Gordon J. Wenham, Numbers(Downers Grove: IVP.1981), pp.21-24
   2. Norman Geisler and Thomas Howe, When Critics Ask(Victor Books, 1992), p.95



글/서춘웅 목사님

예언, 꿈, 환상, 입신, 방언, 현상, 기적과 표적에 대한 단상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 행 2:17-19)


신사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사도적 권위를 부여 받아, 사도 시대의 기적과 표적, 예언, 환상, 방언을 그대로 실천하고자 한다. 그들은 선지자 양성소를 만들어 사도적 권능을 부여 받은 선지자들을 임명하고, 그들에게 기적 표적 예언 방언에 의한 성령운동의 사역 방법을 훈련시켜 전세계에 파송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의 사역에 관하여 많은 비평이 쏟아지고 있는데 그 비평의 요점은,


첫째, 거짓 기적 표적의 사례들이 드러난다.

둘째, 기사와 표적의 많은 부분들이 비성경적이며, 하나님의 온전성과 합리성에 배치되며 하나님을 기괴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모습을 보인다.

셋째, 성령님을 감정적이며 기이한 현상들을 일으키는 존재로 오해하여 집회시 이들을 도출하려는 의도성이 엿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은 이교적이며 무속적인 범주의 것들과 유사성을 보인다.

넷째, 감성주의적 예배와 집회를 추구한다.

다섯째,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바른 교리(말씀)를 초월하려는 입장을 보인다. 천주교등 모든 교파를 초월하며, 복음에 대한 투철성이 없다.

여섯째, 번영신학을 추구하고, 성도들의 감정적 심리적 만족, 카타르시스, 치유에 사역의 포인트를 둔다.

일곱째, 번영신학과 은사주의에 입각하여 사역을 하는 많은 지도자들이 도덕적 재정적으로 부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기적과 표적을 이야기 하지만 반면에 거짓 기적과 표적을 분별하라고 한다. 예언을 말하고 있지만 거짓 예언을 매우 증오하고 있다. 방언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방언에 대한 유의를 당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과 표적, 예언, 방언, 환상들에 대하여 매우 조심스러워해야 하며, 성경의 말씀에 벗어나지 않는가를 분별하여야 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님의 전권에 맡기는 자세일 것이다.


요엘 선지가는 모든 육체에게 예언, 환상, 꿈을 주리라고 하였고 하늘과 땅에 기적과 표적을 베푼다고 하였다. 사도들은 이 말씀을 실현한 장본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이 예언에 따라 무엇을 하였는가 요약을 해보자.


1) 각나라 방언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2) 병고침, 죽은자 살리기, 앉은뱅이 일으키기등의 표적을 보임으로서 복음을 증명하였다.

3) 모진 고난과 핍박을 당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대부분 순교하였다.

4) 복음(정경)을 확정하였다.


사도 행전에서 예언, 환상, 꿈, 기적표적의 권능을 받은 사도들이 행한 것이 무엇인가 ?  고난과 핍박을 당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것, 이것이 전부이다. 오늘날 집회 현장을 가보면, 예언을 한다, 기적과 표적을 행한다, 방언을 한다, 환상을 이야기 한다는 모든 것들이 과연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지 의아심을 일으키게 한다. 예언은 마치 무당이나 주술사들처럼 앞날에 어떤 일이 일어날 일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성경에는 때로 앞날의 일을 예언하는 기록들이 있기는 하다. 사도행전에서도 한 선지자가 어느 지역의 가뭄을 예언하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 예언은 특수한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한 것이었다. 사도 시대에 사도들이 미래의 일을 점치는 예언들을 보편화하여 실행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예언은 다 천국 복음임을 알아야 한다. 요한이 쓴 요한 계시록도 바로 이 예언으로서 이루어진 것인데, 이 예언은 즉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언의 목적은 무엇인가 ?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임을 왜 깨닫지 못하는가 ? 환상과 꿈은 무엇인가 ? 우리가 밤에 날마다 꾸는 꿈이 아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꿈으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기도 하여, 꿈꾸는 자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성도의 구원과 복음의 전파라는 목적이 아닌 것이라면 다 개꿈에 불과하다. 젊은이 들에게 부어지는 환상이라는 것은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뜻한다. 늙은이들에게 주는 꿈이라는 것은 어떻게 복음을 전파할 것인가에 관한 지략과 비젼을 의미한다.


신사도 운동가들은 이렇게 성경을 잘못 해석하여, 예언, 기적 표적, 환상, 입신, 방언을 집중적이며 보편화 원리화하여 시행함으로서 많은 오류를 낳고 있다. 예수님은 이땅에 오셔서 많은 것을 개혁하셨다. 예수님의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의 목적은 무엇인가 ?  죄로 죽어가는 인간의 구원이다. 이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복음을 남기시고 “ 내가 분부한 것(복음)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라는 유언을 남기시고 부활 승천하셨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적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는 너무 자명하다. 예언, 환상, 꿈, 기적 표적, 입신, 방언 이러한 것들은 모두 복음의 전파를 향한 목적성을 가져야 하고, 성경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이들이 다른 목적성을 가지거나, 성경의 모본을 따르지 않을 때는 바로 배도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은사주의 및 신사도 운동가들이 사역의 키로 생각하는 은사적 요소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본다.


1)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증거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미래를 예언(예측)하는 경우는 매우 특수한 복음적 상황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일반화 원리화해서는 안된다.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나의 백성은 이것을 좋아하니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렘 5:31)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분명히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지금 너희 가운데 있는 예언자들에게도 속지 말고, 점쟁이들에게도 속지 말고, 꿈쟁이들의 꿈 이야기도 곧이듣지 말아라. 그들은 단지 나의 이름을 팔아서 너희에게 거짓 예언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내가 보낸 자들이 아니다. 나 주의 말이다. (렘 29:8-9)


이 예언자들이 언제까지 거짓으로 예언을 하겠으며, 언제까지 자기들의 마음 속에서 꾸며낸 환상으로 거짓 예언을 하겠느냐? (렘 23:26)


2) 방언은 성경의 말씀대로 유의하며, 개인의 신앙적 덕을 위한 은사로서 누려야 한다. 방언을 공중예배의 사역 방법으로 채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의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 고전 14:14 )

방언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 고전 14: 4)


3) 기적과 표적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법칙을 하나님 자신이 어겨가면서 특수한 시대적 필요성과 상황에서 베푸는 것이다. 또한 기적과 표적의 목적은 하나님의 증명과 하나님 말씀을 증명하는 것이다그 외의 다른 목적은 전혀 없다. 오늘날 사도 시대 이후는 예수님과 사도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확정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에 있을 수 있는 기적과 표적은 사도 시대나 예수님 공생애 시대, 예수님 초림전 시대와 전혀 다른 양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육체적 부활로서 표적을 완성하시며, 이것 밖에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셨다. 이 시대에 표적을 보이시지 않겠다라고 까지 하시며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계신다. 이 시대는 병고침이라든지 귀신을 쫓는 일에 있어서도 기적과 표적의 개념이 아니라 치유의 개념이며, 은사의 개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병고침과 귀신 쫓음을 기적 표적의 형태로 생각하여 드러내어 보이며 전시적인 효과를 일으키면서 사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경은 병든자가 있으면, 장로(목사님)들을 청하여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는 모본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기름을 바르라는 이야기는 당시의 치료적 상황에서 기름바르는 것이 치료 행위의 하나로 간주하는 것이라고 볼 때 정상적인 의사의 치료 행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수많은 기적과 표적을 기록하고 있지만, 반면에 말세에는 거짓 기적과 표적을 분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예수님의 속마음은 우리가 표적과 기적을 보고 비로서 믿거나 믿음을 굳게하기 보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원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기적과 표적을 사역의 한방편으로 삼아, 이것을 집중화하고 원리화하는 것은 거짓 기적을 양산하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이다.


기적은 오히려 이러한 것이다. 가을에 되면 온산이 빨갛고 누렇게 변화하는 것, 아프던 내 몸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 치유력으로 건강하게 되는 것, 달이 한달을 주기로 이지러짐과 둥그러지는 것을 반복하는 것, 우주에는 셀수 없는 수많은 별들이 있음에도 지구가 다른 별들과 충돌하지 않고 그 궤도를 철저히 지키며 공전과 자전을 하는 것, 내가 지금 존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고 있다는 것 그 자체...... 하나님의 창조하신 우주만물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칙과 질서에 따라 운행된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다. 그런데 죄에 물든 인간은 이러한 기적을 당연한 것이라 여기고, 하나님의 법칙과 질서를 역행하는 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질서와 법칙을 자주 남발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질서와 법칙을 존중하며 이것을 기적이라고 하며 감탄하는 인간을 원하실까, 역행적 기적들을 보며 놀라워하며 그것을 좇는 모습을 원하실까 ? 잠간이라도 하나님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자.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하나님과 더불어 창조 사역에 참가하신 분이다. 성자하나님인 예수님의 생각이 우리가 역행적 표적을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원하시는데, 성령 하나님은 역행적 표적을 즐겨 베푸시는 분일까 ? 이와 같이 성령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생각은 불일치할 수 있는가 ?


<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 (마 16: 3-4)


< 예수께서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 (막 8:12)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 ( 요 20:29 )


4) 꿈과 환상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과 비젼을 의미한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 벧전 1:12 )


5) 입신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 앞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사도바울이 다메섹 석상세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 앞에서 쓰러졌다. 이러한 입신 현상은 성경에 여러차례 기록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 앞에서의 부복이라고 보아야 하며 이것이 일어난 특수한 상황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집회 현장에서 임파테이션( 성령 전이 )라는 사역 원리를 가지고 성도들을 쓰러트리는지 쓰러짐인지를 집중화 원리화하여 실시하는 것은 전혀 성경이 허용하지 않는다. 더욱이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이러한 쓰러트림을 행한 모본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성도와 치유 대상자들을 일으키기만 했다는 기록을 간과할 수 없다.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있어 가라사대 ( 행 9: 4)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 계 1:17)


6) 성령 집회들에 보이는 각종 감정적 현상들( 진동, 낄낄거림, 통곡, 짐승소리, 뒹굼, 몸부림 등등)이 성령의 임재할 시 일어는가에 대한 성경적 고찰이 필요하다. 이러한 현상들은 궂이 예수의 이름으로 하지 않는 다른 집회들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교적 집단에서 흔히 볼수가 있으며, 심리 치료 현장에서도 나타난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정서적 카타르시스라고 부르며, 치유의 도구로 사용한다. 왜 이런 현상들이 하나님(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집회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사역하실 때 과연 이런 현상들을 도출하는 집회를 하셨는가 ? 답은 아니다이다. 그러면 성령님은 이러한 현상을 긍정하실까 ? 여기에 대해서도 아니다이다. 성령님은 지와 정과 의를 고루 갖춘 신격이시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신 분이 아니다. 특별히 감정적인 성품이거나, 기이한 것을 좋아하시는 그런분이 아니다. 온전하시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신다. 은사주의자들의 맹점은 성령님이 감정적이며 어떤 특이한 현상을 불러 일으키는 자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와 같이 감성이 풍부하시기도 하지만, 지적으로 칼같이 냉철하신 분이기도 하다. 성령의 열매의 하나로서 절제와 인내라는 것이 있다. 은사주의적 집회의 특징은 첫째 지나친 감성주의로 흐른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감성을 절제하고 인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집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자리이다. 이 자리에서는 사역자와 성도들이 오직 하나님만 드런내고 하나님께 마음을 온전히 드리는 모습을 보이며, 거룩한 교회의 모습이 보여야한다. 소위 성령 운동이라하며 벌이는 이 집회에는 이러한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이 임재하면 새술에 취한 상태가 된다고 한다. 이 말은 사도행전에 “ 저희가 새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 ( 행 2:13) 말을 인용하는 것이다. 새술에 취하게 되면 감정이 흥기되고 약간 분별력을 잃은 듯한 기분 좋은 상태가 된다. 성령의 새술에 취하게 된다고 그들이 언급하는 것은 이렇게 감정적인 상태, 어떤 황홀한 상태가 되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을 보다 섬세하게 보지않으면, “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라는 말씀을 놓칠 수 있다. 사도들이 각 나라 방언으로 열심히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악한 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하여” “새술에 취하였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어떤 사람을 “성령의 새술에 취하였다”고 말한다면 그를 조롱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사도들이 새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각나라 방언으로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하는 기적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행 2:13)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 신 5:32)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 신 28 : 14)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갈 5:22-23)



나가는 말

성령의 현상은 온전함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은 온전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에는 온전함과 거룩함이 있으며, 이 거룩하고 온전한 하나님앞에 인간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경배할 뿐이다. 거룩함 가운데 있는 화평이요 기쁨을 누려야 한다. 지금 신사도 운동가들이 집회에서 보이고 있는 빈야드 현상들은 결코 성령의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신사도 운동가들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은사와 기적 표적에 대하여 바른 성경적 관점을 가지지 않고 그것을 집중화하고 원리화하여 성령운동이라는 것을 펼치고 있다. 은사의 남용과 오용이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성령에 집중하면서 성경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고 유의하지 않는다. 거짓 기적과 심리적 현상들을 성령의 운동이라고 부르며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자기딴에는 진실과 충정으로 이 성령 운동에 임한다 하지만, 성경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대로 사역하지 않는 곳에는 성령께서 임하지 않을 것이다.


<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 마 7: 22-23)


<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게 하리라 > (마 24:24>


<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 ( 고후 11: 13-15)









출처 :알파코스 원문보기 /양무리마을/ 글쓴이 : 푸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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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가슴 아픈 사진들....

Picture by x_Boo_x
제 친구가 이 사진들을 보내줬는데, 정말..... 이사진들 보고 울뻔 했어요...
제가 이 아이들에게 해줄수 있는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 죄책감을 느꼈어요...
우린 정말 행복한거예요
Picture by x_Boo_x
오늘 우연히 학교 에서 구로야나기테츠코의 '토토의 눈물'을 읽게 됬는데,
이 책 꼭 읽어 보세요. 음식은 물론, 마실 물도 없어 그나마 귀한 흙탕물이라도 매우 고맙게 마시는 아이들...영양실조에 걸려 말을 하나도 못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보니 정말, 정말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어요....
Picture by x_Boo_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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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 Kevin Carter이 저 사진을 찍고 플레처 상을 받았다네요. 근데 저 사진.... 저 사진 속의 저 아이..... UN에서 나눠주는 음식을 얻으러 가려고 저 몸으로 1km 이나 떨어져 있는 곧으로 가고있는데.... 저 아이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저 새. 죽으면 쪼아먹으려고..... 그 후론 저 아이가 어떻게 됬는지 아무도 모른데요...정말 충격적인것은, Kevin Carter이 저 사진을 찍고 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는 것이에요.... 제발 저 아이좀 도와주지..... 많이 화가 나네요. 저 사진을 찍고 우울증으로 Kevin Carter은 3일 후에 자살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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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2007년 2월호 추천 해외 아티클


<위대한 교사가 되는 법> - 마틴 엉거


- 예수님의 교육 원리 -

 

1. 준비의 원리

 

위대한 교사는 주제 연구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3년 동안 집중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셨는데, 이 시간을 위해 그 분은 그 이전부터 계속해서 연구하고 준비하셨다.

위대한 교사는 부단히 자신을 준비한다.

우리는 홀로 기도하시며 자신을 준비하셨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마태복음 14: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마태복음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 겸손한 권위의 원리

 

위대한 교사는 권위를 휘두르지 않고도 권위를 드러내 학생을 섬긴다.

 

(마태복음 7:28~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당시 교사들은 엄격한 권위주의자들이었고, 율법의 본질보다 전통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권위가 있으셨지만 권위주의에 빠지지 않으셨다. 그것이 그들과 다른 점이었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가르친다'는 것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것은 섬세한 노력을 요하는 숭고한 사명이다. 참된 가르침에는 권위주의가 들어설 여지가 없고 그것은 결코 제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권위주의자와 권위있게 가르치는 사람은 다르다.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만일 위대한 교사가 되고 싶고 그리스도를 닮기 원한다면, 자신을 낮추고 학생들을 섬기라.

 

 

3. 긍휼의 원리

 

위대한 교사는 학생들을 긍휼히 여긴다.

 

오스왈드 샌더스는 이렇게 말했다.

"의에 대한 열정은 있지만 긍휼은 없는 경우가 있다. 의는 차갑고 딱딱하고 무감각할 수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으려고 배 밖으로 나왔다가 물에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꾸짖으실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가 가라앉게 내버려 두어 물을 좀 먹게 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4:31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을 돌보시고 도우셨다.

 

 

4. 인식의 원리

 

훌륭한 교사는 좋은 안테나를 가지고 가르침의 상황 속에 있는 3요소 - 교사/주제/학생 간에 펼쳐지는 미묘하고 역동적인 상호교류를 흡수한다.

교사는 각 개인에게 다가가서 가르쳐야 할 뿐 아니라 그 사람의 뉘앙스, 무관심이나 의심의 기미, 동의를 표시하는 작은 끄덕임, 저항하는 몸짓 등에도 주시해야 한다. 예수님의 안테나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민감하게 잡아냈다.

 

교육 컨설턴트인 조지 레오나드는 "배운다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다. 교육은 학습자를 변화시키는 과정이다"라고 말했다.

 

교사는 변화의 매개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변화를 두려워한다.

예수님 이전과 이후의 모든 교사는 학생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도전에 직면해 왔다. 동시에 그들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학생들의 상태와도 직면해야 했다.

예수님은 이 딜레마에 대해 잘 알고 계셨다. 그분은 단 12명의 제자들을 통해 진리를 온 세계에 전달하셔야 했다. 뿐만 아니라 12명의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방법까지 가르치셔야 했다. 예수님이 이 딜레마를 푸신 방법은 자신의 삶으로 모범을 보이시는 것이었따.

 

예수님은 교사로 오셨고, 교사로 사셨고, 교사로서 떠나셨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처음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가복음 1:17)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3년을 보내시면서 어떻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는지 가르치셨다. 또 지상에서 제자들을 마지막으로 보실 때, 그 특별한 낚시를 계속하라고 그들에게 도전하셨다.

 

(마태복음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9.11테러 이전에 미국에서는 이슬람의 확산이 두드러졌었다.  특별히 도시에 사는 흑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9.11 테러가 이슬람에 의해 자행되면서 그 확산의 속도가 주춤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슬람의 9.11 테러에 직접적인 공격목표가 아니었던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에서는 그 세력이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다만 이슬람에 대한 선호의 성향이 변했을 뿐이다. 9.11 테러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신비주의적이며 비교적 관대한 이슬람의 수피교(Sufism)에 심취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9.11 테러 이후에 이슬람 개종자들은 오히려 이슬람교의 엄격하고 금욕적인 면을 선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상식적인 예측을 불허하는 정반대의 현상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성공회가 국교인 영국에서 많은 여성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데 그 이유가 특이하다. 영국 남자들이 여성을 바라보는 추잡하고 속물적인 눈빛이 싫어서 이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슬람이 되면 이슬람의 베일은 그런 남자들의 눈빛으로부터 자신들을 피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또 흑인계 남성들을 포함한 많은 남자들은 이슬람 가정에서 남성들을 위엄있는 가족의 부양자이자 수호자로 이상화하는 것에 많은 호감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보편적인 이슬람 선호의 이유로서는 이슬람교가 마약과 알콜중독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래저래 유럽의 대다수의 기독교 국가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영향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 셈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이런 개종의 확산에 대한 신속한 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영국의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새 이슬람 개종자들을 돕는 프로젝트(New Muslim Project)가 생겼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많은 모슬렘 결혼상담소들이 있어서 미혼 개종자들에게 모슬렘 배우자를 찾을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또 새 개종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개종을 친지들에게 알리도록 격려할 뿐 아니라 실제 이슬람 신앙에 도움을 주는 복장과 목욕의식, 머리를 자르는 것 결혼과 장례에 대한 지침과 조언을 제공해 주고 있다.
   유럽의 국가들은 이슬람의 성지점령으로 성지순례가 어려워지자 성지를 이슬람의 손에서 구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독일, 영국, 불란서가 힘을 모아 이슬람과 싸웠던 11세기의 십자군전쟁을 지나간 추억정도로 기억되고 있는 것 같다. 19세기에 독일에서 시작된 신학의 자유주의는 유럽 전체의 신앙을 약화시켰고 종교다원주의의 영향으로 전도와 선교에 무기력해지고 말았다. 이런 경향은 우리가 살고 잇는 미국에서도 예외가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소금의 역할을 못한다면 세상에 밟히고 모슬렘에 패배하고 말 것이다.
   지금이야 말로 성적인 순결, 성경적인 가정과 자녀교육으로 세속화와 타락의 세상에서 기독교의 신앙이 빛이요 소금임을 밝히 드러내야 무엇보다도 잃어버린 복음의 능력을 회복함으로 더 이상 이슬람의 확산을 막고 세계선교의 목표를 향해 전진해야 할 때다. ▣


글/서춘웅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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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장경동 목사의 관련발언 전문이다.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계속 올라가면 어디까지 갈까? 아담이다. 그위에는 하나님. 첫번째 사람이 아담이라는 것은 인간이 알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누가 알겠는가? 하나님이 가르쳐 주니까 아는 것이다. 기독교 아니면 아무도 모른다.

불교는 모른다. 스님에게 첫번째 사람을 물으면 "어떻게 압니까" 그런다. 우리는 하나님이 가르쳐 주어서 안다. 그러니 기독교가 참 좋은 종교이다. 우월성이 드러난다. 하나님이 6일을 거쳐 세상을 지었다. 사람은 6일날 나왔다. 그런데 6일째 나온 사람이 5일동안 무슨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아는가? 그것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모세와 아담은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나님이 가르쳐 주니까 안다. 간단하다.

뭔말인지 모르는가? 세상을 보면 3개 인종이 있다. 황인 백인 흑인. 왜그런가? 그이유를 세상사람은 모른다. 노아의 세아들들로 인해 인종이 퍼져서이다. 간단하다. 그것을 누가 아냐? 아무도 모른다. 노아의 세아들이 글씨를 알았나? 모른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어서 안다. 이런것을 모르는 종교는 다 가짜이다. 이런것을 아는 것이 진짜 종교이다.

무식하게 이야기 해 볼께. 내가 비범하다고 "경동교"를 만들면 되는가? 안된다. 큰일난다. 그래도 만들면 되는가? 경동교가 된다. 안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옳은 이야기이지만 왜 되는가?

안믿고 사는 사람들이 "경동교라도 믿고 살지" 하니까 된다. 모르는 사람때문에 된다. 둘째 되는 이유는 경동교 때문에 먹고 사는 사람때문이다. 우리교회에 65명의 유급직원이 있다. 만약 내가 교주라고 선언하고 나를 믿으려면 교회에 있고 아니면 나가하면 갈등을 느낀다. 일부는 나가고, 그냥 월급타고 있는 사람도 있다.

죄송하다. 이렇게 말하면 죄송한 것이 아니라 맞는 이야기인데, 그쪽에게 예를 갖추기 위해서 이다. 내가 "경동교"를 만들면 안되는 것 처럼 2500년전 석가모니 선생이 불교를 만들면 안되는 것 이었다.

원불교, 통일교를 만들면 안된다.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는 자신이 훌륭해도 교를 자신을 믿는 교를 만들지 않았다. 오직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만이 참 신이시다. 이것이 ABC이다. 상식이다. 상식도 안되니 문제이다.

내말이 틀리면 이야기 해 봐라. 이렇게 간단한 이야기를 목사님과 여러분들은 모르는지 이해가 안된다. 들으니 간단하죠. 간단하다. 하나님이 가르쳐 준 지식이 아니면 알수 없다. 하나님의 지식을 가진 그것이 참된 교이다. 나머지는 솔직히 명함을 접어야 된다. 그래서 나는 스님들은 빨리 예수를 믿어야 된다는 이야기이다. 쓸데없는 것을 하지말고.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 해 보겠다. 불교는 신이 없는 무신론이다. 석가모니를 믿는다는 것은 무식한 이야기이다. 석가모니가 자신을 믿으라고 그렇게 이야기 한적이 없다. 깨달아서 너도 성불하여 부처가 되라는 이야기이다. 자기들이 만들어 놓고 믿는 것이다. 불교는 신이라는 말을 쓰면 안된다. 불교는 스스로가 성불하는 것, 자기가 부처가 되는 것이다.

스님이 하는 일은 앉아서 염불하는 것이다. 염불의 참된 의미는 인간이 고뇌와 고통을 겪는 욕심인 108 번뇌를 없애는 것이다. 108 번뇌를 없애면 성불하는 것이다. 욕심을 없애고 자유로워 질때 성불이 되는 것이다. 염불을 하면서 백팔번뇌를 없애려고 하는데 안타까운 것은 백팔번뇌를 없애겠다고 하는 것도 109 번째 번뇌이다. 안되는 것이다.

백팔번뇌를 없애 해탈하여 성불이 되었다고 치자. 그래 봤자 시주를 하여 얻어먹고 살아야 한다. 번뇌를 없애고 어떻게 살것인가를 잘 생각해 보라? 그러니 아무리 훌륭해도 얻어 먹고 산다. 그러나 성경은 간단하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한다. 그런 가르침으로 나가는 기독교는 가는데 마다 잘된다. 앉아서 백팔번뇌를 없애는 나라는 가는데 마다 안된다. 그래서 불교가 들어간 나라는 못산다.

한국사람이 한국종교인 불교를 믿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석가가 한국사람인가? 진짜 무식하다. 석가는 인도사람이다. 인도에 가면 60%가 길에서 태어나 60%가 길에서 죽는 60%가 길표 인생이다. 지독하게 못산다. 지금도 그사람들은 소를 섬기고 있다. 뭐하는 것인가? 잡아서 푹 고아서 먹으면 영양실조도 안걸린다.

안타까운 것은 조그만 훌륭한 사람이면 앉아 있다. 창의적인 일을 해야 나라가 잘되는 것이다. 일을 해서 연구를 하고 개발을 해야 나라가 잘되는데 머리기르고 그냥 앉아있다. 자체로 보면 훌륭한것 같은데, 그렇게 해서 그 다음에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무슨 노동력이 있고 연구 발전 생산력이 있겠는가? 안타깝다. 성경은 "일하기 싫으면 먹지마라"고 가르치니 간단하다. 가르침 자체가 벌써 잘될수 박에 없으며, 가르침 자체가 안될수 박에 없다. 내가 불교를 깐 것인가? 나보고 깠다고 하는데 바른말 해주는 것이다.

ⓒ 아멘넷 뉴스




귀신 쫓고 표적이 나타나는데도 이단인가? (교회와 신앙)


최삼경 <a href=mailto:sam5566@amennews.com>sam5566@amennews.com</a>



Q: 성경에 보면 수많은 기적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우리 주변에도 기적을 행한다는 유명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보면 귀신을 쫓아내고 표적이 나타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단이 될 수 있습니까?

A: 이 문제는 넓게 보면 신비주의 문제입니다. 신비와 신앙은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신비를 부정하면 이성주의에 빠지게 되고, 신비만 좋아하면 신비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신비주의는 이단의 온상이 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명확한 답을 주고 있기 때문에, 성경으로부터 그 답을 찾으면 됩니다.

유대인들은 표적과 기사를 좋아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이들은 표적과 기사를 구하고, 그 표적과 기사만 나타나면 무조건 진리로 인정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마 12:38)라고 했고, 표적을 행하시는 것 때문에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요 12:18). 예수께서도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 4:48)고 말씀하신 일도 있고, 바울도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고(고전 1:22)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도 유대인처럼 신비주의성이 강한 민족입니다. 그 신비주의성이 지난 1세기 동안 한국교회를 부흥시킨 원인이기도 하였지만, 이제 사이비 이단이 발생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 증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즉 한국교회에 가장 미혹성이 큰 사이비 이단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신비주의 계열의 이단들입니다. 예컨대 재미 교포들의 경우, 미국 문화권 속에 살면서도 그 문화권에서 발생한 크리스챤 사이언스나 몰몬교 같은 이단들에게 빠지는 확률은 낮습니다. 타 문화권에 살면서도 오히려 한국에서 발생한 신비주의자들인 김기동, 이초석, 이명범, 이재록, 김계화, 박무수, 박철수 등의 이단에 빠지는 확률이 훨씬 더 높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민족에 신비주의성이 많은 것이 사이비 이단들이 발생하는 사상적 원인 중에 가장 대표적 원인입니다. 베뢰아 아카데미의 김기동 씨(성락교회 담임목사)의 경우 한국의 유수한 교단들로부터(예장 통합, 합동, 고신, 개혁합신, 기성, 기침, 기감) 이단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가장 객관성 있게 내려진 규정인데도, 그를 추종하는 자들에게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 주된 이유는 김기동 씨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할렐루야 기도원의 김계화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표적과 기사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먼저 결론부터 내리자면,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친다는 것과 이단이 되는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반대로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한다고 하는 사람이나 집단은 오히려 의심해 보아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먼저, 표적을 가장 많이 행하신 주님께서는 표적 중심의 신앙인을 책망하시고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첫번째로 기적을 행하신 가나의 혼인 집 사건 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난 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는데 그 이유는 저들을 아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요 2:23-24). 그리고 예수님은 표적을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극단적으로 비판하기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마 12:39, 마 16:4)고 하였습니다.

왜 늘 기적을 쫓고 구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이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저들은 이 말씀 앞에서 깨달음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 중에 기적만 좋아하고 기적을 구하는 사람들을 만나시면 같은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다음으로, 기적을 체험했다고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적을 보았다고 해서, 그리고 기적을 자신이 직접 체험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믿음이 아니며 또 그것이 믿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실례를 각각 구약에서 하나 신약에서 하나를 들어보겠습니다.

구약에서 구속사적 측면에서 계속 언급되는 사건이 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넌 기적일 것입니다. 430년의 한많은 종살이의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원수까지 자동적으로 갚는 순간입니다. 장정만 60만 명, 추산하여 200만 명의 아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바다를 육지처럼 건넜습니다. 그런데도 믿지 못할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있었다면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이렇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출 14:31). 분명히 믿었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진짜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15장의 사건에서도 알 수 있지만 시간이 명시되어 있지 않으니까 생략하고 16장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렇게 큰 기적을 체험하고 출애굽한 지 고작 2개월 15일만에 이들은 인간적으로도 할 수 없는 불신앙적 원망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2-3).

무엇을 말해 줍니까? 기적이 바로 참 믿음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조금의 의리라도 있다면 2개월 15일만에 이렇게 불신앙적인 원망을 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신약에서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주님이 공생에 중에 행하신 기적 중에 그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가장 많았던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정만 5천 명, 모두 2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보리떡과 물고기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의미가 크기 때문에 이 기적에 대하여 4복음서 모두 기록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그 기적의 떡을 먹고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예수님을 찾아나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다음날 가버나움에 계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기적의 빵을 먹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시며(요 6:27-34),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기적의 빵을 먹고 찾아온 그들인데 기적의 빵이신 주님 자신을 먹으라고 하니까 아무도 먹지 않겠다고 가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는 쓸쓸한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적을 체험한 것과 믿음은 이렇게 다른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기적 때문에 자신을 쫓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말세에 적그리스도가 많은 기적을 행하여 택한 자까지 미혹한다는 주님의 예언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질문을 해 보면 좀 쉬워질 것입니다. "성경에 '말세에 누가 적그리스도인지 아닌지 알려면, 그가 기적과 표적을 행하는지 행하지 못하는지 살펴보고, 기적을 행하지 못하면 적그리스도요 이단이며 기적을 행하면 내 제자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런 곳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말세에 적그리스도가 이적을 행하지 못한다'고 한 것이 아니라 '이적과 기사를 행할 것이고 그래서 택한 자들도 미혹하리라'고 했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고 했습니다. 여기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는 말씀을 볼 때,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할 때 그 미혹성이 크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타종교에도 얼마든지 기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사이비 이단에게도 얼마든지 기적과 표적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적과 기사를 본질적으로 부정하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성주의자가 되어 이단에 빠질 위험성이 더 커집니다.

결론적으로 믿음과 기적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마태복음 7장에서 말세의 심판대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주님에게 심판을 받을 사람들이 한 말과 주님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여기에서 생각하게 하는 것은 이들이 정말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까지 쫓아내고도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귀신을 쫓아내고도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대표적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오늘날 신비주의 계열의 이단들은 항상 자신들만이 기적을 행하고 병을 고치는 것처럼 선전하고 그것으로 이단이 아닌 것처럼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성경을 수단적으로 이용은 하고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기적과 표적을 부정하지도 않고, 기적과 표적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지도 않는 믿음이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출처:아멘넷 댓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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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하는 복은 무엇인가?

우선 ‘복’의 어의(語義)부터 알아보자. 히브리어 베라카는 ‘좋은 것’(good)을 뜻하는데, 주로 물질적 은택(material good)을 의미한다. 희랍어 율로기아(eujlogiva)는 주로 복음이 가져다주는 영적 선/유익을 의미하지만, 때로 물질적 유익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에 비해 마카리오스(makavrio)는 복된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복은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선의(善意, good will)로서 영적·물질적 은택을 통하여 나타나고 또 그로 인해 향유하는 행복한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배경으로 하여 복과 연관한 성경의 흐름을 살펴보도록 하자. 복은 성경에 가장 빈번히 언급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로서 구약의 초두부터 등장한다. 그러나 복이라는 개념이 전면에 부각되는 가장 획기적인 계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 12:1~3)

이러한 복의 향유는 아브람뿐만이 아니고 그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창 26:12~14)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창 28:3~4)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된 복의 내용은 물질적·현실적·가시적인 것으로서 △자녀의 생산 △소유물의 증식 △민족의 번성 △영토의 획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정점은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는 것”에 있었다. 그런데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실현되었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행 3:25~26)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갈 3:8~9, 13~14)

상기 구절을 통해 우리는 복과 관련해 다섯 가지 중요한 사항을 발견한다.
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절정은 땅의 모든 백성이 복을 얻는 것이었다. (창 12:3; 갈 3:8)
② 땅의 모든 족속은 아브라함의 자손(씨)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된다. (창 22:18; 행 3:25; 갈 3:14)
③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대신 저주를 받음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 (갈 3:13)
④ 우리는 믿음과 회개를 통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 (행 3:26; 갈 3:9)
⑤ 이러한 구원의 은택이 곧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의 내용이다. (행 3:26; 갈 3:12, 14)

이러한 내용을 전제로 할 때 우리는 왜 바울이 구원의 은택을 설명하면서 그토록 ‘복’이란 단어를 강세적으로 사용했는지 납득이 간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3~5)

바울은 예수를 믿는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확대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엄청난 복을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복과 관련해 네 가지를 가르쳐 준다. 첫째, “하늘에 속한”이라는 표현이 말하듯, 이 복은 근본적으로 땅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니다. 둘째, 복을 묘사하는 형용사로서 “신령한”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이 복이 “자연적 복들”과 구별됨을 말하고 있다. 셋째, “모든” 복들이라고 함으로써 복의 포괄성과 총체성이 강조되고 있다. 넷째, 문장 구조를 보면 “복 주다”라는 동사에 다시금 “복으로써”라는 부대(附帶) 성격의 부사구가 따라붙어 있는데, 이는 우리가 복 받은 사실은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복'이라는 표현과 개념이 이 구절만큼 심층적으로 등장하는 곳은 아마 성경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엄청난 복의 핵심적 내용은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실현(“거룩함,” “흠이 없음,” “아들들이 됨” (엡 1:4~5) 등)에 있다. 이렇듯 신약 시대의 복은 구약과 달리 철두철미하게 초자연적·영적·내면적 성격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3. 구약의 복 vs 신약의 복

그렇다면 복의 특징에 있어서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왜 이런 차이가 두드러지는 것일까? 왜 구약의 복이 주로 물질적·현실적·가시적인 것인 반면, 신약에서는 복의 초자연적·영적·내면적 성격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근본적 답변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를 특징지운 종교의 특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구약의 종교가 주로 인간의 표면에 치중하는바 형식적이고 외양적인 것이었다면, 신약에 와서는 종교의 핵심이 인간의 중심에 초점을 맞춘 신령하고 내면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이 물론 구약은 표면적·형식적일 뿐이고 신약은 내면적·영적이기만 하다는 식으로 대조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이 두 면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공히 나타나는 바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은 전자에 신약은 후자에 착념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내면적 차원, 곧 '마음'에 대한 강조는 이미 구약 시절부터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인간 내면의 심층적 변화를 미래의 어느 시점, 곧 새 언약의 시대에서 찾고 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을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 31:31~33)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율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 36:26~27)

이런 맥락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제사 제도가 갖는 근본적 제약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 9:9~10)

바울 사도 역시 복음 사역의 차이점을 구약 시대와 대조시켜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고후 3:3)

바로 이 시점에서 필자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의미 구조의 문제를 도입하고자 한다. 구약에 등장하는 모든 신앙적 주제는 그 의미의 발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내용과 형식이라는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내용'은 어떤 주제가 속에 담고 있는 영적·내면적 알맹이 혹은 정수(精髓)이고, '형식'은 그러한 주제의 의미를 실제로 발현시키는 가시적·외형적 얼개나 틀을 말한다. 그리하여 구약 시대에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두 요소가 본질적으로 연접되어 있었고, 또 내용은 반드시 형식을 통해 그 의미가 살아나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을 '복'의 의미에 적용시키면 다음과 같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선의'[내용]와 '물질적 은택'[형식]이 본질적으로 연접되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의[내용]는 반드시 물질적 은택[형식]을 통해 그 의미가 살아나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물질적 은택(자녀의 생산, 소유물의 증식, 민족의 번성, 영토의 획득)을 한껏 누렸고, 그렇게 향유하는 물질적 은택은 그가 하나님의 선의를 누리고 있다는 표시가 되었다. 이것은 아브라함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해당되는 신적 작동 원리였다.

그러나 신약으로 오면서 하나님의 선의[내용]와 물질적 은택[형식] 사이의 이와 같은 긴밀한 연접 현상은 종지부를 찍는다. 오히려 신약 시대에는 내용(하나님의 선의)만이 극명히 드러나고, 형식(물질적 은택)은 별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신약은 신앙의 자태에 있어 내면과 영적 실상을 현저히 드러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제 형식은 한 가지로 고정되어 있지도 않고, 내용의 노정을 유도하는 긴밀한 수단이 되지도 않는다. 심지어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선의를 충만히 누리면서도 물질적 은택은 전혀 향유하지 못하는 수가 있는가 하면, 물질적 은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향유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선의와는 거리가 한 없이 먼 삶의 모습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먼저, 하나님의 선의를 심령으로 충만히 누리면서도 외적 번영 조건이 결여된 경우부터 살펴보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 5:10~12)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 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벧전 3: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벧전 4:14)

또 물질적 은택은 상당한 정도로 누리면서도 하나님의 선의(곧 구원의 은택 및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와는 거리가 먼 경우도 있다.

“자기를 위해 재물을 많이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 12:21)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약 5:5)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노라.” (계 3:17)

4. 기복신앙을 부추기는 구절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복 개념의 그리스도 중심적 발전에 무지하고 무관심할 뿐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꿈을 이루거나 성공과 번영을 기약해 주는 것 같은 성구 내용에 대해서는 엄청난 매력을 느낀다. 그런 경우 인용되거나 회자되는 구절들은 성경의 문맥이나 정당한 해석의 과정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여기저기에서 뽑혀 나와 우리의 욕망을 한껏 부추기는 데 사용되고 있다.

이런 구절들은 대개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적극적 사고방식과 연관된 구절들이요, 둘째는 번영의 욕구와 성공 심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절들이다. 엄밀히 말해서 첫 부류의 구절들은 기복신앙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욕망 성취를 지향하도록 자극하는 데 있어서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함께 다루고자 한다.

적극적 사고방식과 연관된 구절들

자, 그러면 먼저 적극적 사고방식과 연관된 구절들부터 하나씩 고찰하도록 하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이 구절은 우리가 욕망의 성취를 희구한다면 적극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할 때 감초처럼 인용되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명의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이 구절은 결코 적극적 사고방식을 정당화할 수 없음이 명백히 드러난다. 본문에 의하면 어떤 아버지가 벙어리 귀신 들린 자기 아들을 예수께 데리고 나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막 9:17), 이는 제자들이 못 고쳤기 때문이었다 (18절). 그 아버지는 예수께 “…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22절) 라고 외쳤다. 이 말 속에는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에 대한 평가 절하의 멘탈리티가 깔려 있다.

사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 (막 1:24) 혹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막 5:7)로서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었고, (마 12:28) 심지어 그 권능을 사도들에게 부여하기까지 하셨다. (마 10:1) 그런데도 이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께 무엇을 “할 수 있거든”이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의 귀신 쫓는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불신과 의문의 마음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런 정황에서 마가복음 9장 23절의 언명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마가복음 9장 23절에 언급된 믿음은 “예수께서 자기 아들을 괴롭히고 있는 귀신을 내쫓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이든 큰 꿈을 가지고 기도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그런 식의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이 구절도, 우리가 가진 꿈과 욕망을 이루어 주십사 하며 끈질기게 매달리면 성취된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데 자주 사용된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오직 그의 뜻대로 구할 때만 그렇다 (요일 5:14).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으면 응답이란 기대할 수 없다. 이것은 심지어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러난 예수님 자신의 기도(마 26:39)나 육체의 가시가 제거되지 않은 바울의 간구 경험(고후 12:8~9)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하물며 우리의 모든 욕망과 꿈에 있어서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아마 적극적 사고방식을 정당화하는 데 이보다 더 많이 제시된 구절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주창자들은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신념만 있으면 못 이룰 바가 무엇이겠느냐고 도전한다. 그러나 바울은 빌 4:10~13 사이에서 자신의 사도적 임무 수행과 재정 형편 사이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이 어떠한 재정 형편에 처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은 무엇 하나 하지 못할 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결코 자기가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의 모든 것이 아니다.

번영의 욕구를 정당화하는 구절들

이제 둘째 부류(번영의 욕구과 성공 심리를 정당화하는 구절들)로 넘어가도록 하자. 먼저, ‘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구절들부터 살펴 볼 것이다.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삼하 7:29)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의 장식패를 채우는 단골 성구로서, 그리스도인 개인보다도 자신이 속한 가족 전체를 염두에 두고 복을 희구할 때 안성맞춤인 것으로 인용되곤 했다. 그러나 상기 절에 나타난 바처럼 다윗의 가문에 약속된 복은 소위 다윗 언약-“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삼하 7:16)-을 언급하는 것으로써,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구속 사역을 통해 현시된다. (눅 1:32~33) 따라서 자신의 가정에 물질적 복이 내리기를 고대하며 삼하 7:29을 간직하는 것은 빗나간 처사요, 무의미한 종교 행위이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를 허락하셨더라.” (대상 4:10)

상기 내용은 “야베스의 기도”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구절이다. 야베스의 간구를 보면 ‘복’이 언급되어 있고 그 구체적인 사항으로서 “땅의 확장,” “환난에서 벗어남” “근심이 없음” 등으로 되어 있다. 이 구절에는 구약적 의미 구조의 패턴(하나님의 선의[내용]가 물질적 은택[형식]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문제인즉 신약 시대에는 이 두 가지 사이의 연결 고리가 끊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야베스와 달리 구원의 사실과 은택에 초점을 맞추어 복 얻기를 구해야 할 것이다.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히 6:14)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창 22:17)을 인용한 것에 불과하므로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 각 개인에게 물질적 복을 약속하는 내용으로 해석할 수 없다.

기복신앙을 자극하는 또 다른 구절들

이제 ‘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기복신앙을 자극하는 데 기여해 온, 몇 가지 다른 구절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여호와께서는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신 28:13)

위 성구는 필자가 우스개로 ‘머리-꼬리 콤플렉스’라 명칭을 붙이게 된 근거 구절이다. 많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구절을 자녀들의 입학, 취직, 결혼 등과 연관하여 인용하곤 한다. 그러나 이런 적용은 두 가지 면에서 그릇되었다. 첫째, ‘머리’와 ‘꼬리’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나 민족을 가리킨다. 신 28:1에 보면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라고 되어 있고 11절에도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로 되어 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성실한 관계가 외적 은택을 발현시킨다는 것은 구약 시대의 가르침이다. 누차 말하거니와 복에 있어 ‘내용’과 ‘형식’ 사이의 긴밀한 연접은 구약 시대로 끝났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욥 8:7)

이 구절도 장식패의 단골 내용인데 주로 사업장에 많이 걸려 있다. 보통 가게나 업소가 새로 생겨 출발을 할 때, 처음 시작 단계에서는 보잘 것 없더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크게 번성하기를 바란다는 희망의 메시지로 사용되곤 한다. 이 내용은 원래 욥의 친구인 빌닷이 욥에게 하는 충고(욥 8:1~8) 가운데 들어 있다. 그런데 욥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은 자녀들의 범죄 때문이므로(4절) 그런 영적 문제를 해결하면 머지않아 물질적 은택이 도래할 것(5~6절)이라고 설명한다.

빌닷의 처방은, 복에 있어 내용과 형식의 연접이라는 구약적 공식에 입각해 볼 때, 구구절절이 타당하다. 단지 자녀들의 신앙이 욥에게 문제를 초래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성경은 그의 자녀들이 범죄했다고 명확히 말하고 있지 않고, 혹시 범죄했다 할지라도 욥으로서는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리곤 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혹시 욥과 자녀들에 대한 빌닷의 판정이 정확했다고 해도, 그것은 앞에서 몇 번이나 언급한 복 개념의 그리스도 중심적 변화 때문에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는 해당될 수가 없는 것이다.

5. 성경적 근거 없는 ‘삼박자 구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

상기 성구는 형통 신학을 토착화한 신토불이 용어 ‘삼박자 구원’의 근거 구절이다.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의 경우 '영혼이 잘 되는 것'(영적 성숙)은 필연적으로 '범사에 잘 되는 것'(경제적·사업상 번영) 그리고 '강건한 것'(신체적 건강)과 함께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세 가지 항목으로 비판을 시도하고자 한다.

첫째, 요삼 1:2의 내용을 잘못 나누었다. 이 구절은 흔히 생각하듯 세 부분이 아니고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즉 “영혼이 잘 됨”이 한 부분이고,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함”이 또 한 부분이다. 또 삼박자 구원에서는 후반부의 내용과 관련해 “범사에 잘 되고”와 “강건함”을 별도의 사항으로 간주했는데, 이는 정당한 처사가 아니다. 오히려 “잘 되고”와 “강건함”은 함께 “범사”에 걸려 있다.

둘째, 본문에 대해 무리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조금 전에 설명했듯 “잘 되고”와 “강건함”이 함께 범사에 걸려 있다면, 이 부분으로부터 경제적·사업상 번영과 신체적 건강이라는 별도의 두 내용을 도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먼저 “범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전반을 지칭하는 단어이지, 꼭 경제적이거나 사업상 번영에 국한된 것으로 해석할 수가 없다. 또 “잘 되고”와 “강건함” 역시 각각 물질적 번영과 신체적 건강으로 대별해서 이해하기보다는 풍성하고 건전한 상태를 의미하는 중복적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함”은 마땅히 “신앙생활의 전반적 면모가 풍성하고 건전한 상태에 있음”으로 해석해야 한다.

셋째, 삼박자 구원은 불합리한 추론(non sequitur)의 전형적 예이다. 만의 하나 이 내용들이 삼박자 구원의 주창자가 주장하는 대로라고(즉 필자의 첫째와 둘째 비판이 틀렸다고)해도, 이 구절에서 “삼박자 구원”의 교리를 도출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아다시피 이 구절은 가이오라는 개인(요삼 1:1)에 대한 간원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게 되기를 바란다”[간원]와 “~해야 한다”[당위]나 “반드시 ~하게 된다”[필연]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논리적 간극이 존재한다. 이처럼 요한삼서 1장 2절은 그저 '바람'의 차원이기 때문에 삼박자 구원이 요구하는 당위나 필연의 차원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따라서 이상의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오늘날 유행하는 '삼박자 구원'은 실상 성경적 근거가 결여된 가르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6. 기복신앙을 극복하는 길

기복신앙은 생각보다 훨씬 깊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 침투해 들어와 있다. 이러한 신앙의 경향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그 폐해는 우리 각 개인과 공동체에 치명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삼위 하나님께서 그리도 중요시하시는 구원의 복(특히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이 복을 주시고자 하셨는데)을 값싸게 여기고 하찮은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구원의 복을 등한시하면 이와 긴밀히 연관된 여타의 신앙적 면모들(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짐, 고난 중 즐거워함,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감)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현저히 약화되고 급기야 자취를 감추게 된다.

본질적인 복은 '구원의 복'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구원의 복을 마다하면 곧 이어 별로 중요하지 않은 항목들(주로 경제적 번영, 세상에서의 성공, 사업의 번창, 안락한 삶 등의 물질적 은택)을 복의 핵심으로 간주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물질적 은택들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선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cf. 약 1:17) 그러나 이것들은 복의 핵심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결코 이런 것에 마음 뺏기기를 원치 않으신다. 이처럼 물질적 은택을 복의 핵심으로 간주하고 또 우리가 지속적으로 그런 신앙의 패턴에 노출될 때, 우리는 탐심의 노예가 되며 이 세상 신이 군림하는 신전에서 제사장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보다 자기 왕국의 건설에 분주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이용하기에 바쁠 것이다.

기복신앙 극복을 위한 세 가지 방법

이 비극적이고 비참한 개인적·공동체적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성경적 개혁의 기치를 들 수 있을 것인가? 첫째, 복과 관련하여 올바른 성경 해석과 적용이 있도록 줄기차게 가르치고 순종의 마음으로 배우는 일이 있어야 한다. 둘째, 배우고 이해한 참된 복의 내용이 실제로 우리의 심령에 내면화되도록 힘써야 한다. 구원의 복이 의미하는 신앙 내용(하나님의 자녀됨, 영생, 하나님을 앎, 성령님의 내주,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받음, 주님과 친밀히 사귐 등)으로 인해 우리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에 변화가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복의 문제와 관련하여 넘어지고 쓰러질 때마다 회개하고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연약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참된 복의 내용을 배우고 내면화했다 할지라도 실제 삶의 상황에 들어가서는 시험을 받고 유혹에 빠지는 수가 빈번하다. 그때마다 그 속에 질펀히 앉아 있지 말고 즉각 회개하고 분연히 일어나야 한다.

이러한 세 가지 방침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다 해당되지만, 특히 신앙의 공동체 내에서 지도력을 행사하도록 부름 받은 이들에게는 더욱 중요하다. 그들의 가르침과 모범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복신앙, 그 내력과 연조가 워낙 깊어진 바람에 극복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좌시만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또 그 극복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요는 우리 각 개인(특히 지도자)과 공동체에 수시로 각성의 계기가 마련되느냐 하는 것과 이 거대한 내면의 적에 대해 지속적으로 투쟁의 의지를 발휘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송인규 목사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학과 조직신학전공 부교수, 새시대교회 목회

출처:아멘넷 댓글 중

1장 물 없는 구름 (CLOUDS WITHOUT WATER) / 프랭클린 홀 기름부음? 배교?

2008/08/13 05:31

복사 http://blog.naver.com/yoochinw/130034198745

1-1       물 없는 구름 (1부)

CHAPTER 1    CLOUDS WITHOUT WATER (PART 1)


그들은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유다서 1:12)


1940년대 후반 늦은 비 운동의 탄생에 기여한 중요한 영향력이 몇 있었다. 첫째는 오순절 교단 내에서의 영적 수위에 대한 일반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상태었다. 많은 평신도뿐 아니라 지도자급 인사들도 오순절교회가 이전의 교파들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 가운데 계신 원래의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기에는 그들이 조직적 절차적 기능에 너무 몰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광이 떠나고 있다! 빌 해몬(Bill Hamon)에 의하면:

1930년대와 1940년대 초반 오순절 기관들은 끝없는 토론과 논란이 되는 교리에 대해서 컨퍼런스를 열곤 했다. 앞서의 영광을 모르는 2세대, 3세대의 오순절 교인들이 생겨 났다. 평범한 모임에서는 원래 나타났던 초자연적 나타남들이 사라졌다. 초자연적 은사가 적용되고 초자연적 예배가 나타나는 것은 더 이상 '법칙'이라기보다 '예외'에 해당되었다. 오랜 교회 멤버들은 좋았던 시절에 대해 간증하곤 했다. 새 교역자들과 젊은 세대 성도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방문에 대해 배고파 했다. 요엘 2:15-17, 호세아 6:3, 호세아 10:1 구절이 많은 오순절 성도들의 설교제목이 되었다.

"금식을 선포하라, 제사장들은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라.. 휴경지를 부수라.. 늦은 비 때에 비를 구하라..그러면 너희가 주를 아는 것에 따르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비로 오실 것이다. 땅 위에 늦은 비로."

리차드 리스(Richard Riss)는 쓰기를:

1930년대 중반부터 오순절 교인들 사이에는 깊은 영적 배고픔이 있었다. 칼 브럼백(Carl Brumback)에 의하면, "지난 십년간 너무나 분명했던 예배의 깊이와 성령의 은사의 작용이 30년대 40년대에는 더 이상 두드러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새로운 움직임에 대한 영적인 배고픔과, 그리고 프랭클린 홀과 윌리엄 브래넘이라는 두 사람의 영향으로부터 늦은 비 운동이 탄생되었다. 늦은 비 운동과 그의 독특한 교리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첫번째 사람은 프랭클린 홀(Franklin Hall)과 그의 저서 "금식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원자력(Atomic Power With God Through Fasting And Prayer)"이었다.



             프랭클린 홀 (FRANKLIN HALL)



1946년, 프랭클린 홀이라는 사람이 캘리포니아 샌디에고에 대형 금식기도 매일부흥센터를 설립했다.
교회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부흥과 회복을 가져오는 방법으로써의 금식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이 부흥센터의 중심 목적이었다. 홀은 전형적인 은사주의자였음은 센터에서 터져 나온 거친 주장과 과장된 표현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홀은 뉴스레터에서 주장하기를:

한두번 윗층 창문에서 나온 거룩한 연기와 불꽃 때문에 소방서에 신고가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들은 불을 끄려고 호스를 가지고 계단을 뛰어 올라 갔다. 소방대원 중에는 이것이 자연적인 불이 아님을 보고 부흥센터의 커다란 홀에 앉아서 하나님께 경배드리며 구원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메리 소머빌(sister Mary Sommerville)'이란 나이 든 자매가 음식 없이 83일을 금식했다고 홀은 주장한다. 그녀가 "이 뛰어난 금식으로 인해 너무 튼튼해져서, 고귀한 성령의 내외적 충만함에 취해서 여기저기를 달리고 춤췄다"고 주장한다. 예수께서 사탄에 유혹을 받기 위해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금식하신 기간의 두 배가 넘는 기간이다. 이런 식의 주장과 함께 수백 명이 구원을 받고 그 중 많은 이들이 여러 병으로부터 나음을 받았다는 일상적인 주장들이 있다.


홀을 유명하게 만들어 준 '금식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원자력'이란 책이 쓰여진 것이 이 즈음이다.
이 책은 하나님의 방문을 바라며 찾던 오순절 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제목이 제안하는 것 같이, 이 책은 금식과 기도로 영적 능력을 바라며 하나님을 충성되게 찾는 이들에게 폭발적인 영적 능력을 약속한다. 홀의 뉴스레터에 따르면:

캐나다 성회 감독이었던 월터 프레드릭 목사는 캐나다에 있는 모든 오순절 목사들에게 홀의 자료를 보냈으며, 우리의 글을 보고 40-50년 대에 금식을 한 후 유명해진 사역자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윌리엄 프리만, 고든 린제이, A.A. 알렌, O.L. 재거스, 게일 잭슨, 오랄 로버츠, 데이빗 논, 윌리엄 브래넘, W.V. 그랜트, 윌리엄 하겐, 데일 헨슨, 토미 힉스

홀은 책에서 "금식 없이는 기도의 효과가 없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이교도들도 금식과 함께 기도를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응답 받는다고 주장한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많은 아메리칸 인디언 부족들이 기도와 금식을 통해 위대한 영혼이 나타나기를 구했다. 기근과 식량부족이나 비가 부족할 때, 그들은 기도와 금식을 통해 위대한 영혼을 찾았으며, 그들의 기도는 응답받았다.

배너 미니스트리의 트리샤 틸린(Tricia Tillin)은 홀의 책 '금식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원자력'에 대해 쓰기를:

이 책을 읽다 보면 그 시대 그리스천들의 성경지식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 여기에는 매우 이상하고 이단적인 문장들이 가득하며 기독교 서적이라기 보다 오컬트 책자 같아 보인다. 홀은 크리스천들이 오랫동안 금식을 하면 강력한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영적 변환(transformation) 과정을 거쳐 죄없는 온전함과 죽지 않는 상태를 이루게 된다고 믿었다. 이밖에도 그의 가르침 몇가지는:


. 완전하게 된 신자는 중력을 이기는 힘을 경험하게 된다.
. 그들은 원하는 곳으로 순간이동을 하게 된다.
. 그들의 옷은 낡지 아니하며, 몸냄새가 나지 않아서, 결코 씻을 필요가 없게 된다.
. 그들은 결코 아프지 않게 된다.
. 예수로부터 받은 불멸의 물질, 모두가 볼 수 있는 금색 물질이 그들 몸에 나타나서, 그들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들은 성령의 불을 보고 느끼게 된다.
. 모든 사람은 눈을 뜨고 기도해야 한다.
. 체험되는 구원-하나님의 불, 영광-이 몸에 30일 동안 적용돼야 하며, 이는 육체의 질병, 피로, 연약함을 제거할 것이다.
. 책의 초판에는 '남자아이회군(corporate manchild)' 교리가 있었었다.

홀의 가르침은 그가 틀림없이 모종의 오컬트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Jewel van der Merwe는 쓰기를:

그의 나중 저서 '불멸로의 회귀'는 크리스천들이 UFO, UHO(비상천상물체), IHO(불멸천상물체)와의 경험을 통해 죽지 않게 되며, 중력제어와 부상제어가 가능하게 되어 불멸에 이른다고 시사한다. 홀은 또한 '뜬눈' 기도를 만들었다. 그는 눈을 감으면 믿음이 파괴되므로 (눈을 떠야) '불멸의 축복'이 더 잘 오게된다고 말했다.

로저 오클랜드(Roger Oakland)는 쓰기를:

홀은 점성술에 기초한 12궁도(별자리, Zodiac)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설명하는 타당한 방법이라고 믿었으며, 이런 그의 믿음을 보여주는 몇가지 아이디어를 그의 가르침을 통해 제시한다. 그는 책에서 말하기를: "궁도의 8번째 싸인(sign)인 전갈자리에서 우리는 쏘려고 침을 세우고 있는 전갈의 모습을 본다. 이것은 죽음의 싸인이며, 이것은 성(sex)의 영역을 다스도록 되어 있다. 하늘(들)의 싸인 바로 앞에 심판자의 싸인이 있다. 생명을 주는 예수가 죽음을 향해 다가 가서 '사망의 쏘는 것'을 뽑았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홀의 가르침에 대한 또 다른 주된 포인트는 그가 말하는 불멸설에 있다: ""잠자는, 기초 없이 지어진 교회"를 "참 뜻과 부르심으로 속으로" 깨워야 하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지켜질 때 뒤늦게 쏟아지는 억수같은 의의 비를 내리게 할 것이다". "수 많은 선지자들이 예언 속에서 말해 왔던 땅에 내리는 영생불사(Immortality)의 비."

크리스천들이 이 세상의 삶에서 불멸을 얻을 수 있다는 홀의 가르침은 늦은 비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어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이라는 이단적 교리를 세우게 된다. 홀의 시대의 '거듭난', '성령세례를 받은' 오순절 크리스천들이 프랭클린 홀의 가르침의 비성경성과 오컬트를
분별하지 못했다는 당황스러운 사실에 대해 우리는 트리샤 틸린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프랭클린 홀과 그의 가르침이 노스 배틀포드(North Battleford, Saskatchewan)에 일어났던 늦은 비 '부흥'에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다. 그 '부흥'의 주된 리더 중 한 명이었던 언 호틴(Ern Hawtin)은 쓰기를:

금식에 대한 진리는 부흥에 기여한 큰 요인이었다. 부흥이 있기 일년 전 우리는 프랭클린 홀의 '금식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원자력'을 읽었다. 우리는 바로 금식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오랜 기간 금식하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알지 못했다. 우리의 선한 형제 홀을 통한 큰 진리의 회복이 없었다면 이 부흥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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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를 하되 구약의 세가지를 다하는지 궁금합니다, 문자 그대로 적용한다고 할때 말라기서의 복을 받을려면 이 세가지를 다해야하는것이 아닌지요?

구약에 나타난 십일조의 세 가지 유형

모세 오경에는 세 가지 유형의 십일조가 등장한다. 첫 유형으로서 기업(基業) 해당용 십일조가 있는데, 이는 레위 지파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한 것이었다. 레위 자손은 제사와 성막에 관련한 봉사에만 전념해야 했던 까닭에 다른 지파처럼 기업(땅)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치는 십일조(땅의 곡식과 각종 짐승)를 레위 자손에게 할당시켰다. 이로써 레위 자손은 생계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들에게 부과된 종교적 사명에 진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레위인들은 자기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받은 십일조 가운데 다시 10분의 1을 제사장에게 바치도록 되어있었다(민 18:26~28).

십일조의 둘째 유형은 절기 충당용 십일조라 부를 수 있겠는데, 각종 절기 시에 필요한 예물을 위한 것이었다. 두 번째 유형의 십일조는 온 가족이 (레위인과 더불어) 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함께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일에 충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만일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예루살렘까지 여행하기가 힘들 때에는 그 십일조의 내용물을 돈으로 바꾸었다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는 다시금 우양이나 포도주 등 자신이 원하는 품목으로 바꿀 수 있었다(신 14:24~26).

마지막 유형은 빈자(貧者) 지원용 십일조로써 매 3년마다 한 번씩 헌납하도록 되어 있었다(신 14:28~29). 세 번째 십일조는 3년마다 한 번씩 바치는 것이므로 매년 단위로 계산하면 3
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이 십일조는 공동체 내 경제적으로 빈핍한 계층의 유익을 위해 설정된 것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이 거하는 성읍에 비축하여 두었다가 필요시에 그 성내에서 사용하도록 했다(신 14:28; 26:12).

그리고 세상복을 구하는것이 잘못이라는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구하지만 세상복을 누린다고 해서 자신이 십일조를 잘하고 신앙생활을 잘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것은 문제라는 것입니다,
특히 물질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교만한 이유가 바로 그 착각 때문입니다,

저도 십일조 하는 사람입니다, 물질도 지금까지 주님께서 자족할수 있도록 허락하시고 있습니다,
십일조 처음 시작할때에는 율법적으로 했고 아깝기도 했지만 말라기서말씀에 근거하여 기대도 했지요ㅡ
하지만 십일조 드렸다고 물질이 특별히 더 부자가 된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식투기나 부동산투기같은것을 한 친구들은 엄청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영적으로는 더 부자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주인이라는 고백을 하니까요,,
그리고 크게 쓸데없이 나가는 돈이 없게 해주신 것이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십일조를 하면 물질을 주님이 지켜주심도 분명히 체험합니다,
...

그런데 십일조=물질복의 통로는 아니다고 봅니다
십일조를 하면서 물질복을 받을수도 있지만 그복때문에 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십일조를 십일조정신으로 이해해야합니다,
놀부처럼 제비다리 고치면 복받는것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복받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을까요
하지만 그리스도안의 진정한 복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복주시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마치 세상복을 많이 받을수록 하나님의 사랑이나 복을 더 받은것처럼 착각하는것은 정말 문제입니다,
구원받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것이 복입니다,
그 여정에 주님께서 합당한 세상의 복도 주시고 연단도 주시면서 다듬어 가십니다,
십일조를 통하여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물질이 많아지는것보다 더 귀한 것들이 그리스도안에 있음에 감사할수가 있는것입니다,

복을 구하는것은 당연하지만 주님보시기에 합당하게 각자에게 복을 주신다는것입니다,
그래서 자랑할것도 없고 오직 은혜임을 깨닫고 겸손해야 합니다,



글/ 아이린(어느 댓글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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