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지체 사역

  하나님의 성회의 근본진리에 대한 성명의 첫 번째 조항은 성경의 중요성에 대 한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있는 성경은 하나님에 의하여 축자적으로 영감되었으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이며 무오하고 권위 있는 행위와 믿음의 규범이다.”(딤후3:15-17, 벧1:21, 살전2:13) 이러한 원리를 고수하는 교회나 개인은 안전한 기초 위에 있다.  이것으로부터 이탈될 때에는 언제든지 그 결과는 실패일 뿐이다.  모든 사람이 성경을 믿음과 행위의 권위있는 규범으로 여겨야 하지만 특히 부흥운동이 확고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고수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흥이 있을 때에 하나님은 자주 교회에게 무시되고 있는 진리에 대하여 상기 시켰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 극단적인 곳으로 나가기가 쉽다.  어떤 사람은 부 흥의 교리를 거부할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지나친 열심으로 성경의 가르침의 범 위를 넘어가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극단은 해로우며 그리스도의 대의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한다.  부흥의 결과로서 그 동안 강조 되어온 진리 중 “지체사역 ”(Body ministry)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불행이도 이러한 진리를 잘못 적용하거나,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극단으로 나가는 경우가 있었다. 

지체사역의 타당성 

  지체사역에 관한 진리는 원래 성경적이다.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교회는 사람 의 몸과 비교된다.  이러한 사실은 주님과 그리고 동료 신자들과 가지는 살아있으 며 친밀한 관계를 설명해준다.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엡5:30) 성경은 몸의 머리됨이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엡4:15, 5:23,32, 골1:18) 몸은 하나이며 그것이 분리되어서는 안된다.(고전12:26, 엡2:16, 4:4) 그러나 몸이 하나인 반면 그 몸은 여러 지체를 가지고 있다.(고전12:14) 그리고 이 지체 들은 서로를 돌본다(고전12:25,26) 지체들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사역하 며(엡4:15,16) 그것을 보전하며 섬기는 것을 추구한다.   비록 몸의 지체들이 다르며 직분, 사역, 기능에 있어서 다르다 할지라도(롬 (12:4) 여전히 몸의 일부이다.  지체들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 자리에 있 게 된 것이다.(고전12:18) 우리가 지체사역에 대하여 말 할 때는 이에 대한 교회 의 전 사역을 생각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돕기 위해서 교회에 주신 사람들의 사역을 포함하는데 이들의 사역의 실제이다.  즉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다.”(엡4:7-16참 조) 그것은 또한 모든 신자들을 포함하는데 각각의 신자는 성령의 은사나 혹은 영적 사역의 다른 모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어떤 구절에서는 지체 관 계에 대한 언급이 빈약하지만 지체사역이 다음과 같은 상호 인격적 기능을 포함 하는 것은 명확하다.  즉 위로와 격려하는 것(고후1:4, 살전4:18, 5:11), 권고하 는 것(히3:13, 10:25), 기도하는 것(엡6:18), 사랑하는 것(요일93:23), 대접하 는 것9벧전 4:9),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봉사하는 것(벧전4:10), 충고하는 것(롬 15:14, 골3:16)등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에 관하여 많은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지만 개념 의 양극화, 강조, 실시 등이 때때로 나타나는 것 같다.  한 극단은 몸의 지체들에 의한 표현과 참여를 제한하는 경향이 있고 반면에 다른 극단은 성령의 참된 움직 임보다는 인간의 개성과 지도에 의존하는 인위적인 참여를 개발하는 경향이 있 다. 

지체사역을 제한하는 것의 위험성 

  교회가 마땅히 조심해야 할 위험성들 가운데 하나는 신자들의 사역을 제한하려 고 노력하는 것이다.  몇몇 영역에서 그리스도 몸의 모든 지체들로 하여금 섬기고 표현하도록 격려하는 것을 방치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성령의 나타남을 믿는 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들은 공중 예배 때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  이것은 지체들이 유용한 기능을 완전히 거부당하는 데까지 이르는 극단으로 나갈 수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조직을 유지하는 데에만 너무나 많은 정력을 낭비한다.  목사들이 모든 사역을 감당하고 대부분의 지체들은 소극적이다.  장려하는 강조점은 지체들의 영적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너무나 많은 활동들이 세속적인 마음을 향하여 돌려졌다.  때때로 그냥 계속되는 것 자체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는 경향도 있다.  원대한 프로그램에 고정되는 것은 개인의 창조성을 대신하고, 정통은 현실을 대신하게 된다. 

지체사역을 남용하는 것의 위험성 

  지금은 성령의 바람이 자유롭게 부는 시대이다.  하나님은 그의 주권으로 놀라운 일을 행하고 계신다.  이것은 많은 교회들과 교회의 지체들에게 새 생명을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부흥 이전의 조건을 돌아보면서 영적인 생명력이 없는 것에 대하여 조직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교회 조직에 대한 환멸 때문에 조직된 교회나 교파적인 교회를 피하고 그러한 조직을 한쪽에 젖혀두는 경향이 있다.  가라지를 태우려는 열심 때문에 알곡가지 날리게 된다.  전통은 신성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주류에서 벗어난 소위 지 체사역의 접촉을 추구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것들은 이 나라의 이쪽에서 저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태이므로 이러한 변칙적인 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쉽지 않 은 일이다.   예를 들면 어느 지역에서는 조직적인 예배를 위하여 면밀하게 준비하는 것 대 신에 소위 지체사역이 기다리는 형태의 모임(waiting-type meeting)을 연습하 는 것으로부터 개발되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모든 예 배시에 언어적인 은사가 나타나야 한다고 믿는다.  아직도 어떤 사람은 모임이 있 을 때마다 비록 지도자가 그룹 중에서 개인들에게 요청해야 하지만, 성령의 모든 은사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때때로 사람들은 지도자에 의하여 개인들 에 관한 소위 예언을 하도록 지시를 받기도 한다.   이러한 지체사역의 다른 형태로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경험과 잘못을 고백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자기들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상호 간의 관계에 있어서 극단적으로 직접적인 것이다.  이것은 이 성경적인 민감도 훈 련 기술(sensitivity-training techniques)에 근사한 때가 여러번 있었다.  아마 성경에서 가장 유감스럽게 벗어난 것들 중 하나는 목사의 지도력과 조직 그리고 보다 조직화된 예배를 거부하는 것일 것이다.  하나님의 주신 목회의 은사(엡 4:11)를 거부함으로써 이러한 강조점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성경적인 가르침과 성경적인 경험을 유지하도록 도우려는 다른 신자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스스로 떨 어져 나가고 있다. 

지체사역에 있어서 균형의 필요 

  잘못된 것을 다루는 일 중에 어려운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진리를 떠났거나, 명 확히 부정하는 경우가 아니라 진리의 어느 관점을 부적당하게 혹은 지나치게 강 조함으로써 생기는 경우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우려고 시도하는 지도자들은 성령의 사역을 반대하는 것처럼 자칫 오해받기가 쉽다.   문제가 존재하는 곳에서 신자들은 이러한 자세를 보이는데 이러한 자세는 그리 스도의 몸의 참된 지체들에게 예상되는 것이다.  바울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과 사랑 안에서 관용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자의 가치 있는 특징이라고 지적하였다.(엡4:1-3).   하나님은 그의 목적에 따라서 교회 안에 목사의 은사를 두셨다.(엡4:11-16). 만일 양이 살아남으려고 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고루 전반적으로 공급 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양떼는 반항적이고 독립적으로 움직이 고 목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가운데 행동하는 제멋대로 구는 사람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목사-교사 직분에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만일에 소그룹 개념에서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까지 목회사역이 연장될 수 있다면 목사의 역할은 무엇이며, 교사의 역할은 무엇이겠는가? 신약성경은 이러 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지도자라고 명확히 가르친다.  그들은 독재자가 아니라 종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시되거나 제가 되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다.  성경은 신자들이 주 안에서 그들 위에 있는 자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친다.(살전 5:12,13, 딤전5:17-19, 히13:7,17)   우리는 교리적인 탈선을 피하기 위하여 도한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순수한 진리가 때때로 남용되어진다.  성경은 항상 모든 관계에서 믿음과 행위에 대한 권 위여야 한다.  우리는 몸의 각 지체가 교회성장에 있어서 채워야 할 역할을 가지 고 있음을 성경이 가르친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행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남용이 존재할 때 목사는 사람들이 수행하는 교회 봉사를 조사해 야 하며, 이러한 불법 행위를 조장하는 잘못이 있는지 살펴야 한다.  목사는 하나 님의 말씀으로부터 적절한 가르침을 제공해야 하며 그들의 봉사가 하나님의 말 씀의 가르침과 일치하도록 성경적인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의 몸의 지체들에 제기된 그리스도 몸 안에서의 목회의 정당성 여부를 받아들인 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지체들이 교회 안에 두어진, 하나님에 의해서 제정된 지도력의 한계를 넘어서 이러한 일을 수행하는 것이 조장되어서는 안된다고 생 각한다.   성경은 연합이 항상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친다.  “우리가 다 하나 님의 아들을 빋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를 때까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기”(엡4:3,13) 위하여 모든 부분에 대하여 성실한 노력이 있 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다라서 살며 기능을 발휘할 때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의 사역을 이루어 드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 운동(movement)으로서 그리스도의 지체 사역의 성경적 기능에 우 리 자신들을 새롭게 드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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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 복음의 필수 부분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처음부터 전인(The whole man)에 대한 신유는 중요한 부분으로 인정해 왔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선포하라 명령하신 복음의 한 부분이다.  하나님의 성회 근본진리의 선언에 있는 하나님의 성회 헌법 제12항은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신유는 복음의 필수부분이다.  질병에서 놓임 받는 것은 속죄 안에서 제공되는 것이며 모든 신자들이 누리는 특권이다.(사 53:4-5, 마8:16-17, 약5:14-16). 이 선언에 포함된 모든 사실과 양상을 여기에서 모두 다루는 것이나, 이에 관하여 제기되는 모든 문제에 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 성명이 성경적으로 건전한 것임을 보이고저 한다. 


복음의 필수부분 


  예수와 제자들의 사역을 관할해 볼 때 신유는 과외로 행하는 어떤 일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신유는 예수가 아버지를 나타내시는 자로, 약속된 메시야로 그리고 죄에서 구원하실 자로 오신 것을 증거하는 중요한 요소였다.(요10:37, 28). 성경은 예수의 신유의 사역과 그의 구원하며 용서하시는 사역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의 치유하시는 능력은 실제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그의 권 위에 대한 증거이다.(막2:5-12). 반복적으로 그의 치유의 기적은 그가 복음을 전하는 것과 병행하며 똑같은 동정을 보여준다.(마4:23, 9:35-36)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온 것은 그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병고침을 받기 위함이었다.(눅5:15, 6:17-18)  그는 아무도 거저 보내지 아니하시고(마12:15, 14:14) 그에게 나온 모든 사람들의 질병과 기형된 것과 불구된 것과 상처받은 것을 고쳐주셨다.(마15:30,31, 21:14) 그는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으셨으며 귀신이 일으키는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마4:24) 예수는 질병이 자주 죄의 결과 임을 인정하셨고(요5:14), 또는 사단의 활동에 의한 것임을 인정하셨다.(눅 13:16) 그러나 또한 예수는 질병이 항상 죄의 직접적인 결과만은 아님을 인정하셨다.(요9:2,3) 이것은 때때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기회가 되기도 하였 다.(막2:12)   


치유의 기적은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셔서 하게 하신 사역 중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요9:2,3) 이것은 치료하시는 주 혹은 위대한 의사로서 하나님의 계시한 구약과도 일치한다.(출15:26, 시103:3, 여기서 이 두 경우에 사용된 히브리 분사들은 그것이 치료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임을 가리킨다.) 예수는 신유가 여전히 하나님의 본질과 계획의 중요한 부분임을 보이셨다.   


치유는 또한 예수를 약속된 메시야와 구세주로서 확인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 위대한 의사로서 예수는 이사야 53:4의 예언은 성취하셨는데 이 구절은 히브리어를 보면 매우 강조적이다. 즉 “그는 진실로 우리의 아픔을 자신이 짊어지셨고 (들어서 가져 가셨고), 우리의 고통을(무거운 짐으로서) 옮기셨다.” (여기서 ‘질고 ’라는 말은 아픔이나 질병과 같은 단어이며 ‘슬픔’이라는 말은 욥 33:19 에서 사용 된 육체적 고통과 같은 단어이다.)   


마태는 이를 예수의 치유사역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아픔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마8:17 을 문자적으로 직역한 것임). 이사야는 이것을 예수의 구속사역과 연계시키고 있다.(사53:5) 그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이며 우리를 하나님과의 화평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즉 “그가 채 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의 문맥과 벧전 2:24,25 의 적용은 특히 치유 혹은 죄로부터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 53:4 의 육체적 아픔에 대한 강조점을 볼 때 이 문장은 우리의 죄나 제멋대로 행한 것에 대한 영적 및 육체적 결과로부터 치유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예수가 바로 약속된 메시야인지 아닌지 혹은 자신처럼 메시야 앞에 보냄을 받은 자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때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며 기적을 행하는 메시야적인 사역에 주의를 환기 시킴으로써 대답을 대신하셨다. 치유는 복음의 필수 부분이며 중요한 증거였다.(사 61:1,2, 눅4:18, 7:19-23). 신유는 계속해서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복음의 필수 부분이었다. 예수는 12제자와 70명의 제자들을 보내어 복음을 전파하며 아픈 사람을 고치게 하셨다.(눅9:2, 10:9) 오순절 이후 많은 기사와 이적이 사도들에 의해서 행해졌다.(행2:43) 누가는 사도행전을 예수께서 사도들과 성령이 충만한 교회를 통하여 행하시고 가르치신 것의 장으로 취급하였다.(행 1:1,8 2:4)   


그러나 기적은 사도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예수의 약속은 그의 이름으로 구하는(다시말하면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본질과 목적에 맞게 구하는) 모든 신자들에 대한 것이었다.(요14:12-14) 하나님은 빌립과 같은 집사를 사용 하셔서 복음을 전하며 치유하게 하였고(행8:5-7), 아나니아와 같은 무명의 제자를 통하여 사울(바울)을 치유하게 하셨다.(행9:12-18) 마가는 신자들의 사역에서 치유를 지지하고 있다.(막6:13, 9:38,39, 16:15-18) 신유의 은사는 교회를 세우고, 덕을 세우기 위한 성령의 나타남 중에 포함되며(고전12:7),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증거하는 것과도 관련된다.(고전12:3)   


율법 아래서는 제사장이 관심의 대상인데 그 사역은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을 가리킨다. 이 위대한 대제사장은 무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다.(히4:14,15) 제사장은 희생제물의 피를 뿌림으로써 사람들의 죄를 속한다. 히브리어 성경 안에 나타난 속죄에 대하여 조사한 결과 대부분의 경우에 그것은 구속과 회복을 위하여 지불하는 몸값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를 흘리셨는데 속죄는 바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문자적 으로 속죄소)로 세우셨다.(롬3:25)   


속죄소(Mercy seat)에 대한 말씀은 레위기 16장에 거슬러 올라가는데 대제사 장이 일년에 한번 속죄제물의 피를 속죄소에 뿌리기 위하여 들어갔다. 속죄소는 법궤의 꼭대기에 놓여 있는 금으로 입힌 부분이다. 법궤안에 십계명을 적은 돌판이 있는데 이 계명은 바로 사람들이 어긴 하나님의 법이었다. 율법을 어기면 심판을 초래하고 결국 죽음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죄없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보시고 자비와 축복을 주실 수 있다. 속죄의 원래 목적은 죄를 깨끗이 씻는 것이었다.(레 16:30, 롬5:11 여기서 “속죄”라는 말은 롬11:15 이나 고후15:18,19 에서 “화목 ”이란 단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축복과 호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죄의 결과와 벌에서 속죄를 통하여 면제되는 것이 자명한 일이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에 대한 심판을 사람들이 불평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염병을 보내셨다. 그때 모세는 아론을 회중 가운데로 보내여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더니 그 전염병이 그치게 되었다.(민16:47,48) 우리는 또 한 이스라엘의 수효를 계수할 때 그들의 구속과 그들에게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속전으로 반세겔을 내야 했음을 읽을 수 있다.(출30:12,15) 이 와같이 속죄를 아픈 것을 포함한 죄의 결과를 위하여 제공되었다.   


성경은 사람이 자신의 구속을 위하여 값을 지불할 수 없다고 명확히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속죄를 제공하셨다.(롬3:25, 시65:3, 78:38, 79:9, 롬3:21-28) 이 속죄는 죄뿐만 아니라 죄의 결과를 위하여 제공되었음이 호세아에 의하여 묘사되고 있는데 호세아는 그의 아내가 노예시장에 팔리게 되었을 때 상당한 값을 지불하고 그의 아내를 도로 샀다.(호3:1-5, 13:4, 14:4) 이것은 구리뱀 사건에 의하여 더욱 설명 되고 있다. 즉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살기 위하여 바라보는 것뿐이었다.(민 21:9) 이 모든 것은 갈보리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요3:14-16) 거기서 예수께서 전인(Whole man)을 위하여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다. 신약성경은 이것을 구속이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속죄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구속과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다.(롬3:24, 엡1:7, 골 1:14, 히9:15)   


다시 말하거니와 속죄는 죄의 결과를 위하여 드려진다. 질병이 죄의 직접적인 결과로 인한 것이 아닌 경우일지라도 역시 죄 때문에 세상에 질병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예수께서 오셔서 멸하고자 하시는 마귀의 일들 가운데 있으며(요일3:8), 이와 같이 속죄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오실때까지 우리 몸의 구속을 아직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신음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롬8:23)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새로운 몸을 받게 된다.(고전 15:42-44, 51-54) 그러므로 구속과 속죄 사이의 병행을 통하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몸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 롬 8:23에서 말씀하시는 구속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구속과 관련지어서 이제 죄의 용서를 받는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되어 그의 형상으로 변화할 때 우리 몸의 구속을 받게 될 것이다.(고전15:51-43, 고후5:1-4, 요일3:2) 신유는 이러한 것을 미리 맛보는 것이며 복음의 모든 축복과 같이 속죄로부터 흘러오는 것이다. 또 사53:4 은 구체적으로 육체적인 질병을 말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그의 속죄 안에서 죄뿐 아니라 속죄가 예수께 나오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수단으로서 신유를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신자들의 특권 


  구원이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처럼(엡2:8), 모든 하나님의 축복과 은사도 그의 은혜 혹은 공로없는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의 것이 되었다. 우리가 우리의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며 우리가 그것들을 받을 만한 존재도 아니다. 신약에서 어느 누구도 치유해 줄 것을 당연한 자세로 청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간구하기 위하여 예수께 나왔다. 그들은 그들의 권리로서 치유를 바라보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은혜스러운 특권으로서 그들에게 주어졌다. 신자의 특권으로서 치유의 약속은 복음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제외하지 않는다. 우리는 당연히 주님의 모범을 따르는 일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히5:8, 벧전2:19,21, 4:1214, 19)   


또한 우리는 신유를 육체적, 정신적 건강의 법칙에 순종하는 것에 대한 대용물 (substitute)로 보지 않는다. 예수는 제자들이 무리를 떠나 잠시동안 쉬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셨다.(막6:31) 이드로는 모세가 자기의 책임 중 일부를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하지 않으면 탈진하게 될 것을 보았다.(출18:18) 또한 신유는 노화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모세는 그가 죽을 때까지 힘이 쇠하여지지 아니하고 눈도 밝았었다.(신34:7) 그러나 이러한 특권이 다윗왕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왕상1:1-4) 전도서 12:1-7 에 잘 묘사된대로 점진적인 노화현상은 신자나 불신자에게 임하는 공통적인 경험이다. 치유는 여전히 노인에게도 가능하다. 그러나 치유된 부분이 몸의 다른 부분과 같이 노화되어 간다. 우리는 아직 몸의 구속을 갖지 못하고 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다른 피조물과 함께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질 날을 인내로 기다리면서 신음하며 고통중에  탄식하고 있다.(롬8:2125) 우리가 이 몸을 위하여 무엇을 하든지, 몇 번씩 치유를 받든지 상관없이 만일 예수께서 더디 오신다면 우리는 죽음을 맛 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낙심 시키기 위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성령 안에서 우리의 생명을 촉진시키고 진작시켜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며, 성령은 우리를 소생시키시므로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다.(롬8:11) 사실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진다.(고후4:16)   


실제로 신유의 특권을 보유하기 위하여 필요한 믿음을 갖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은 이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혈루증을 치료받은 여인에게 예수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말씀하셨다.(막5:34)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복음을 듣는 것이 앉은뱅이의 마음에 치유받을 만한 믿음을 불어 넣어준 것을 보고 그에게 일어서라고 명령하였다.(행14:9,10) 마음의 속사람이 새롭게 되는 것은 (롬12:2, 골3:10)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한 로마 백부장의 큰 믿음에서도 볼 수 있으며(마8:5-13) 부스러기라도 자기의 필요를 만족시킬 것이라고 믿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볼 수 있다.(막7:24-30, 마15:28)   


신유가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은 나사렛과 변화산 기슭에서 불신앙이 그 역사를 방해했던 사실을 통해서 증명된다.(막6:5,6, 막17:14-20) 거기서 예수께서는 기도와 금식으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 필요함을 지적하고 계신다.(막 9:29) 기도는 구약에서 중요한 치유의 수단 중 하나였다. 많은 시편이 치유를 위한 기도를 포함하고 있다. 많은 예언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치유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약 5:15 은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며, 주께서 그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큰 믿음은 주님의 단순한 말씀을 통하여 치유를 받게 한다.   


그러나 예수는 적은 믿음이나 약한 믿음을 가진 자로부터 등을 돌리시지 않으셨다. 병든 자들이 믿음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음을 종종 보게 되는데 예수께서는 그들을 도우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일을 행하셨다. 어떤 사람은 만져 주셨고(막 1:41, 8:22), 그들의 손을 잡아 주셨고(막1:31, 눅14:4) 혹은 그의 손을 그들에 게 얹으셨다.(막6:5, 8:25, 눅4:40, 13:13)   


그는 여러 가지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왔는데 그중의 어떤 것은 믿음을 요구하였으며, 어떤 것은 순종을 요구하였다.(막7:33, 8:23) 또 어떤 사람들은 그의 옷이나 그를 만지는 것이 믿음을 표현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막3:10, 5:28, 6:56, 눅6:19) 베드로의 그림자로 그 당시 같은 효과가 있었다. (행5:15) 또한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도 마찬가지였다.(행19:12) 그러나 믿음은 그들의 믿음을 표현하도록 돕는데 사용된 수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수많은 수단이 사용된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 이외에 어떤 수단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 것 같다.   


약5:14도 같은 내용을 담고있다. 여기서 아픈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라고 가르치고 있다. 치유하게 하는 것은 기름 (성령의 상징)이 아니라 믿음의 기도이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한 그 일을 저도 할 것”이라는 약속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 다.(요14:12-14, 16:23,24) 그러나 그의 이름은 그의 특성과 성격을 나타낸다.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만이 우리가 그것을 우리 안에 가지게 된다.(요15:7) 그리고 우리의 뜻은 그의 뜻과 일치하며, 우리는 우리의 의도하는 바를 구할 수 있고 그것을 이루어질 것이다. 


어떤 사람은 치료를 이스라엘 사람에게 한정시키려고 한다.(특히 출15:26 의 약속인 치료 혹은 건강의 언약) 그러나 백부장의 종이나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에 대한 치료는 치료가 이방인들에게도 해당되는 특권임을 보여준다. 사실 치료를 갈망하며 예수께 반응한 사람들의 경우에 그들의 죄를 아직 다루시기도 전에 치유가 이루어지기도 한다.(베데스다 연못의 38년된 병자의 경우, 요5:2-9, 14) 어떤 사람은 신유를 의학적인 치료와 충돌되거나 경쟁관계에 있는 것으로 간주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의사는 자기 기술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다.   


주님이 위대한 의사이심은 사실이다. 또한 아사왕이 병들었을 때에 저가 여호와 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기 때문에 성경이 아사왕을 정죄한 것도 사실이었다.(대하6:12) 그러나 아사는 이미 불신앙과 불순종의 행동으로 앗수르에 도움을 청하였는데 그때 그는 하나님 의지하기를 거부하였다.(대하:16:7) 강조점은 그가 의사를 찾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이 경우 의사는 이방인 의사였을 것이다.) 하나님께 구하기를 거부한데 있는 것이다.  의사는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음이 확실하다.(렘8:22) 예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기름과 포도주를 약용으로 사용한 것을 말씀하셨다.(눅10:34)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치유되었을 때 우리는 그녀가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아오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증하여졌 다는”(막5:26) 것을 듣는다.  만일에 그 여자가 의사에게 가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여기에서 예수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씀을 안하시고 그 여자가 표현한 그 믿음을 받으시고 그것에 대하여 그 여자를 칭찬하셨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의사들이 포기한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기적을 행하신다.  예수는 또한 열명의 문둥이를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보내셨다.(눅 17:4) 율법 하에서는 제사장이 진단, 격리, 건강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레 13:2 이하, 14:2이하, 마8:4) 이와같이 예수께서는 병을 진단하는 사람을 인정하셨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주님의 대리인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모든 치료는 즉각적이든, 점진적이든 하나님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막8:24) 이와는 달리 성경에서 치료된 사람들이 치료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기까지는 신유를 간증하지 않았다.   


오늘날 신유에 대한 남용이 있음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성경의 진리에 대한 적극적인 선포를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사도들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행3:6)라고 말할 수 있었다.  신유의 은사는 여러 가지 은사 가운데 하나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안에 두신 성령의 나타냄들 가운데 하나이다.(고전12:4-11, 28,29)  다른 은사와 마찬가지로 이 은사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덕을 위하여 몸의 지체들을 통하여 수행되어질 수 있다.(지혜의 말씀이 한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 것처럼 신유의 은사가 사람을 치료자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신선한 지혜의 말씀이 각각 필요에 따라 주어지듯이 신선한 신유의 은사가 성령에 의하여 각각 아픈 사람에 대하여 주어진다.)   


우리는 또한 예수와 사도들의 사역에서 새로운 지역과 새로운 환경에서 복음이 전파될 때 치유의 기적이 특히 현저하게 나타났던 것을 보게된다.  이것을 특별한 기적이 바울의 손에 의해서 행해졌던 경우인 것과 같다.(행19:11) 우리는 신유에 관하여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왜 어떤 사람은 치유를 받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그러지 못한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말씀을 전파하고 이어서 표적이 따르기를 기대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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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와 복종운동


최근에 성령의 부어주심은 예수가 신자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전세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 결과로 많은 옛날의 장애물들이 무너졌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함께 모이게 했다. 이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갈급함이 일어났다. 매일같이 기도와 성경공부란 목적으로 새로운 모임이 형성된다.


그러나 이런 모임들 중 어떤 모임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숙한 이해를 가진 지도자가 없다. 많은 경우에 이 사람들이 속해 있는 전통적인 교회의 목사들은 너무나 바쁘든지, 아니면 필요로 하는 사람을 상담하거나 도와주는데 유익한 오순절 경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훈련시키고 지도력을 개발하기 위한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공인된 목적을 갖고 유명한 성경교사들이 목양, 제자도 그리고 권위에 대한 복종에 대하여 새로운 개념을 조장하고 있다. 옛적 충성으로부터 이탈된 많은 사람들과 자신들을 인도해 줄 사람이 없는 새로운 개종자들에게는 이러한 가르침이 좋은 결과처럼 보이는 것으로 진공사태를 메꾸어주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 있어서는 심각한 부작용이 있어 왔다. 파괴적이고 분파적인 많은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이러한 사례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성경과 교회와 신자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과 연관해 이러한 운동의 주장을 조사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성경


이러한 교사들 모두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충성심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과 행위에 대한 영감된 오류가 없는 법칙으로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면 성경에 의하여 판단되어야 한다고 모두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현재 상황에 적용되어야 하며 우리의 매일의 필요와 문제에 대하여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현재 말해진 말 즉 레마에 보증되지 않은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그것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즉 로고스와 동등하다고까지 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이나 예언과 통역같은 성령의 은사가 신자들에게 구체적인 도움과 격려 그리고 안내를 제공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을 조사해 보거나 하나님의 말씀의 전체적인 의도에 의해서 그 말들을 판단하는 대신에 선택된 구절을 영해하거나 비유를 해석하여 자신들의 가르침을 합리화 할 때는 위험하게 된다.


그 한 예가 요한복음 10 장을 해석하는 방법이다. 요한복음 10:1-6 에서 예수께서는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목자와 다른 데로 넘어가는 도적을 대조시키고 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림을 바꾸시고 평이한 말로 말씀하셨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요 10:7,8) 또한 선한 목자와 같이 그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고자 하였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나는 문이다”라는 구절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가 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모든 사람이 문(door)인 목동(undershepherd)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러한 목동이 절도와 강도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와 축복을 빼앗고 신자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교사로부터 보호한다고 가르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목동이 그의 양을 평생동안 가르치고 훈련시키고 상당하고 안내하는 일에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많은 새로운 개종자가 누군가 자기를 잘못으로부터 보호하며, 진리로 인도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인이 자기를 잘못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전적으로 다른 사람을 의지할 경우 그는 성경을 찾아보기를 그칠 것이며 거짓 교사에 저항하기 위한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과 베드로는 거짓교사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은 그 해결책이 신자를 보호해 줄 인간 목자를 구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고 가르친다.(딤전 6:12)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믿음의 방패와 성경의 검을 사용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굳게 서야 한다.(엡6:10-18)


요한복음 10 장을 더욱 세밀하게 조사해 보면 예수께서 문이 되신 것 같은 의미로 어느 사람이 문이라고 하는 개념은 성립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는 모든 양의 문이시다. 참된양은 그리스도 외에 어느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양들이 그를 알고, 그 분만이 자기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분은 양들의 필요를 아신다. 그분은 그 양의 음성을 듣고 안다. 이와같이 요한복음 10 장을 취하여 개종자와 그리스도 사이에 인간 목자를 끼어 넣는 근거로 사용하거나 인간 교사를 문으로 만들기 위한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교리를 억지로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목자들)이 양무리를 쳐야 할 책임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늑대가 그 가운데로 들어가 양떼를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또한 그는 이 장로들이나 목동들 안에서도 사람들이 일어나 성경을 왜곡하고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즉 그들은 얼핏 좋은 선생처럼 보이지만 어느 시점에 가서는 자기를 좇는 자들을 늘리기 위하여 성경을 왜곡할 것이다. 이와같이 신자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인간 목자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그는 성령의 인도아래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 오직 성령만이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신다.(요 16:13)


교회

이 운동의 또 다른 모습은 교회에 대한 이 운동의 자세에서 볼 수 있다. 그 지도자들은 그들이 새로운 교단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현존하는 교회와 목자들을 존중한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성 교회와 목사들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행동을 설명하려고 어떻게 애쓴다 할지라도 이 운동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목자제도를 세움으로써 새로운 조직과 새로운 교단을 세우고 있다. 

이것과 일치하여 이들 중 어떤 교사들은 그들의 역할과 교회의 역할은 더 이상 복음적이지 못하지만 이 지상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함으로써 천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약은 우리가 이 시대에 순수한 질서를 세울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하지만 추구할 때까지 곡식 중에 가라지도 있게 마련이다. 다니엘서 2 장, 데살로니가후서 1 장, 그리고 요한계시록 19장에서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 지상에 이루어지기 전에 현재의 세상질서를 파괴하는 심판이 필요하다. 현 시대에 교회의 복음적 목적을 무시하는 이러한 후천년설의 주장을 피하여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 관계에서 새로운 제자도의 질서에 대한 모형을 찾지만 그들은 예수께서 그의 교회를 세우시기 전에 유대주의 배경 안에서 행한 것이었음을 잊고 있다. 그 대신에 그들은 사도행전과 서신서들 안에서 교회의 모형에 대한 안내를 구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모든 상황에 대한 필요를 채워 주는 다양한 모형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와 함께 교회안에서 권위에 대한 복종을 선호하여 민주주의적인 자세가 내리막길을 가는 경향이 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이 예루살렘 교회와 다른 교회들에 대하여 권위를 행사하는 것처럼 추측된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과부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일곱 집사를 뽑을 때 사도들은 단지 그 자격요건을 말해 주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일곱명을 선택하여 뽑아줄 것을 부탁하였다.(행 6:3,5) 행 14:23 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모든 교회에서 장로들을 안수하였는데(한글 성경에는 “택하여”라고 번역된:역자주) 안수에 대한 헬라어의 뜻은 “손을 들어 선택하다 혹은 뽑다”라는 의미가 있다. 고후 8:19 에서 “택함”이라고 한 것은 정확한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도들이 주어이므로 행 14:23 에서의 “뽑다”라는 말과는 같은 뜻일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동사가 바울과 바나바가 장로에 대한 자격을 설정한 후에(딤 3:1-7 에서와 같이) 선거를 행하였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지 않다고 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신약에서 한 가지 고정된 형태의 조직보다는 다양한 조직을 본다. 조직의 목적은 항상 필요를 충족시키고 사역을 이루기 위한 것이지 조직을 위한 조직이 아니었다.

예루살렘 교회가 다른 교회에 대하여 권위를 행사하였다는 근거는 없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에 보내었을 때 그것은 관심을 보여주고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내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바나바가 도움이 필요했을 때 조언을 듣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을 주의해보면 더욱 이해하기 쉽다. 그는 다소에 가서 사울을 데려와 함께 일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바나바의 권위 아래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둘 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권위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후에 바나바는 기쁜 마음으로 바울이 지도자의 위치에 있도록 허용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은 어떤 사건에 대하여 바나바와 다투었으며(행 15:36-41)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된 사람들과 베드로와 다른 일로 인하여 다투었다.(갈 2:11-14) 그의 권위는 말씀이었으며 성령과 말씀에 의하여 인도를 받았다. 예루살렘에서 결례를 행하라는 야고보의 요청에 바울이 응한 것은 진리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지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 아니었다.(행 21:17-26)

성경은 사랑 안에서 지도자에게 복종하며 피차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문제이다. 성경은 또한 지도력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예수계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경고하셨다.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의 기업 위에 군림할 수는 없다.(벧전 5:3) 바울과 그 일행은 다른 개종자들의 믿음에 대하여 주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그들은 다른 사람의 기쁨을 위해 돕는 자였으며 이 개종자들은 그들 자신의 믿음으로 서는 것이 기대 되었다.(고후 1:23,24) 베드로는 (벧전 5:5) 젊은이들이 순복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바로 이어서 모든 사람이 서로 복종하고 겸손으로 옷을 입으라고 덧붙이고 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 위에 함부로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각 사람이 사단에 대하여 승리하기 위하여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자

신자의 위치와 관련하여 이 목자운동(Shepherding movement)의 경향은 성경을 지나치게 우화적으로 해석하는 것 같으며 너무나 광범위하게 비유화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신자가 어리석은 양인 것처럼 말한다. 이것은 문맥이나 성경의 다른 부분에 의해서 입증되지 않는 극단적인 비유를 취한다. 성경에 신자는 양으로 비유되는데 그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리스도는 그를 인도하며 먹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다. 그는 다른 보혜사가 오셔서 각자와 함께 계시면서 주님께서 하시던 일들을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한 중보자이시다. 또한 성령을 통하여 다양한 은사와 사역들이 신자를 세우는 일에 사용된다.(롬 12:4-8, 고전 12 장, 엡 4:11-13)

이 목자운동의 강조점은 신자 자신이 목자를 발견하여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하여 그에게 복종하여야 한다는 것인데 엡 4:16 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관점의 지지자들은 이 구절의 의미를 우리가 마디 혹은 줄을 통하여 몸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또한 비유의 인간적인 측면을 너무강조한 것이다. 이 문맥은 모든 사람이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지식의 일치에 이를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아무도 여러 가지 교회의 풍조에 밀려 이리 저리 방황하는 어린 아이와 같아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함으로써 모든 일에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자라게 될 것이다. 인간의 몸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몸의 각 부분이 올바른 위치에 있게되면 각 부분은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아서 몸은 자라게 되고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게 된다. 

요한복음 15 장에서 예수는 포도나무이다. 모든 가지는(모든 신자) 직접 그와 연결되어 있으며 직접 그의 생명을 받는 것이지 다른 가지를 통해서 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체 몸에 대한 다양한 사역의 한 부분으로서 교회 안에 목사와 교사를 두셨다(엡 4:11) 이러한 사역을 거부하는 것은 이러한 은사를 주시는 교회의 머리되신 분의 지혜로운 공급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크리스챤이 인간 목자를 떠나서는 주님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든지 혹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없다고 한다면 신자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이며 성경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것이 된다.(히 4:14-16)

이와 관련하여 목사는 사람들의 모든 계획과 결정사항을 알아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목자는 그 사람을 덮어줄(cover) 수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 용어는 사람들을 오도한다. 성경은 “덮는다”(cover)는 말을 피의 대속이란 의미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단번에 이루신 것이며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디모데에 대한 바울의 관계를 비교함으로써 합리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 사역자에 대한 나이먹은 사역자의 관계였을 뿐이지 목자와 신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한 모형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의 비유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복종의 비유이지 한 사람에 대한 신자의 비유가 아니다. 이것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비유를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결론

아마도 현재의 목자-제자 복종운동은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서 성장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자유분방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권위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본적인 말씀의 권위를 그들에게 지적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우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우리를 다스리는 자들을 우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그들을 귀히 여기라는 바울의 충고를 그들에게 지적해 주어야 한다.(살전 5:12)

비인격적인 우리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작은 모임의 밀접한 교제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것은 개교회 안에서 목자의 지도를 받아 지도자 훈련을 통하여 제공될 수 있다.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법은 환경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안에 나타난 것 같이 인간 지도자를 따름으로 해서 생기는 분파작용은 피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가르치는 것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필요가 한 사람이나 한 교회가 공급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이 문제이다. 성경은 개 교회 안에서 사역과 은사의 다원화를 요구하고 있다. (고전 12 장) 또한 성경은 아볼로의 경우와 같이 다른 사람을 데려올 수 있음을 말해준다.(행 18:27,28) 또 다른 사람을 훈련받기 위해 성경 학교에 보낼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분파를 조장하는 죄는 가장 심각한 죄임을 깨달아야 한다.(롬 16:17,18, 딛 3:9-11) 오늘날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교회의 사명을 이루려고 한다면 보다 큰 몸으로서의 연합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성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일치된 노력은 많은 지역 교회 간의 협력의 효과에 대한 증언이다. 각각 개별적으로 일하는 소수 집단들이 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이 수행되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셔야 한다. 그분만이 양의 위대한 목자이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유일한 언약은 그의 피로 맺어진 것이다. 우리는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다.(히 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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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심판


영원한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입장을 하나님의 성회의 “근본진리 선언”에 나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제 15 항, 마지막 심판 : 악한 죽은 자들이 살아나서 그들의 행한 대로 심판받는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누구든지 마귀와 그 사자들 그리고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함께 영원한 심판으로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인데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마 25:46, 막 9:43-48, 계 19:20, 20:11-15, 21:8)


여기서 우리는 심판이 마귀와 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며, 둘째 사망이라 불리는 불못에 있는 것임을 주목한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점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정의하고 설명을 하고자 한다. 


악한 자는 사단과 운명을 같이 나눈다.


성경은 불못이 사람을 위해 예배된 것이 아니라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 되었다고 말씀한다.(마 25:41)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항상 선하셨다. 첫번째 하늘과 땅은 좋게 창조되었다.(창 1:31). 율법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기 위하여 주어졌다.(신 6:24) 하나님은 누구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벧후3:9) 사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선을 위하여 모든 일에서 역사하신다.(롬 8:28) 그렇지만 하나님은 사단이 앞으로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을 더럽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불못에 그를 가두어 놓으실 것이다. 사단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단의 운명을 같이 나눌 것이다.(요 16:8,11)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로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사단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요 8:44)


사단이 받는 벌을 함께 받는 사람들은 “악인”이라고 한다.(마13:49,50) 이것은 그 행동이 악하고 가치 없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그들은 두려워하는 자이며(믿음이 부족하여 비겁하게 행한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며, 흉악한 자들이며(혐오스럽고 진저리나는 사람), 살인자들이며, 행음자들이며, 술객들이며(마술을 사용하는 사람과 마약을 쓰는 사람), 우상 숭배자들이며,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이다.(계 21:8, 마 8:12, 13:41,42, 22:13, 23:15, 25:30,33, 눅 13:27, 계 21:27, 22:15 참조)


바울은 이것을 구원에 관한 개인적인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와 복음을 계속적으로 순종치 아니하는 모든 자라고 요약하고 있다.(살후 1:8)


악한 자의 심판은 끝이 없다.


“근본진리의 선언”에서 주어진 첫 번째 성경 인용문인 마25:46 에서 “영(헬라어, anonion)벌”이라는 구절을 사용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절대적으로 끝이 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영원하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러나 같은 구절에서 예수께서 똑같은 말을 “영생(헬라어, aionion)” 이라는 말에서 사용하는데 여기서 이것은 직접적이면서도 정확하게 전자와 병행을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생명이 영원한 것처럼 그 벌도 영원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후에 악인을 회복시켜 주겠다는 어떤 여지를 남겨놓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마 25:41 에서 그 벌은 “영원한(헬라어, anionion)불”로 정의하고 있다. 


예수께서 악인이 죽은 후에 가는 중간상태를 하나의 불로서 특정짓고 있다. (Hades, hell, 눅 16:23,24) 그러나 이것은 영원히 있을 불과 구분해야 한다. 눅16 장에서 예수의 말씀은 악인이 의식이 있는 상태이며,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으며,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놓쳤는지를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영원한 불은 예수께서 게헨나 혹은 “불의 게헨나”라고 부르셨던 것과 같은 것이다.(마 5:22,29,30, 10:28, 18:8,9, 23:15, 막 9:43,45,47, 눅 12:5) 이 불은 영원할 뿐만 아니라 또한 꺼지지 않는 특성을 가졌다. 이것은 그 불이나 벌이 끝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가르친다. 그 형벌은 불과 마찬가지로 영원하다. 만일에 불이 악인을 소멸시켜 버리는 것이라면 불이 영원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같은 불을 “풀무불”이라고 말씀하셨는데(마 13:42,50),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가는 비참한 후회는 “멸망의 자식”으로서 영원한 파멸에서 자신을 구하지 못하였다.(요 17:12, 행 1:16-20) 예수께서는 이렇게 울며 이를 가는 것을 “바깥 어두운데서” 일어나는 것으로 동일시하고 있다.(마8:12, 22:13, 25:30) 이 어두움은 최종적인 하나님과의 분리이며, 새 예루살렘의 빛이신 어린 양과의 분리를 가리키는 것이다.(계 21:23)


또 다른 신약성경 구절은 영원한 벌은 영원한 심판으로 언급한다. 즉 영원토록 유효한 심판이라는 뜻이다.(히 6:2) 여전히 다른 구절은 “침륜”(문자적으로 파괴, 사망, 분리를 의미함) 그리고 “멸망”(영원한 사망) 이라고 말한다.(딤전 6:9) 이러한 “영원한 멸망”(혹은 분리)은 “주님의 존전으로부터” 그리고 “그의 능력의 영광으로부터”의 분리이다.(살후 1:9) 이러한 구절들에서 “사망”이라는 단어는 영적 사망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죄인은 현재도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이며, 그리스도와 분리되었거나 그리스도가 없는 자이다. (엡 2:1,12) 영원한 심판은 최종적으로 영원히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를 가져오는 것이다. 


둘째사망


성경은 이렇게 최종적으로 분리되는 것을 “둘째사망”이라고 부른다. 요한계시록에서 불못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계 20:14) 예수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게헨나)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눅 12:4,5)고 경고하셨을 때 예수께서는 게헨나를 둘째 사망과 동일시하였다. 이것은 확실히 육체적인 죽음 후에 또 다른 죽음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 죽음은 상태나 종류에 있어서 판이하게 다르다. 육체적임 죽음 후에 또 다른 죽음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육체적인 죽음이 몸에서와 우리의 생활환경에서의 분리라고 한다면, 둘째 사망은 하나님으로부터와 새 창조에서 맛보게 될 생명으로부터 최종적이고 영원한 분리이다.

이 둘째 사망에 던져지는 사람 중에는 짐승의 표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있다. (계 14:9-11) 이 사람들은 천사들과 그리스도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을 것이다. 즉 봇물에 갇혀서 새로운 창조물과 격리되어 있지만 나사로가 음부(Hades)와 아브라함 몸 사이에 있는 깊은 구렁을 건너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들은 그들이 거부한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볼 수 있을 것이다.(눅 16:23) 그들은 결코 타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그 고난의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그들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로다.”(계 14:11)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영원히 성도들에게 약속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구절 중 어느 것도 최종적인 심판이 선언된 뒤에 복구시키거나 회복시키는 것을 약속하는 암시를 보여주고 있지 않다. 볼못이나 게헨나와 관련하여 신성한 기관은 나타나 있지 않다. 불은 막 9:44,48 의 구더기와 병행하고 있다. 그것은 깨끗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형벌로서의 붙인 것이다. 거기에는 또 다른 기회가 없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를 흔들어 깨워“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며 외치게 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고후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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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지체 사역


  하나님의 성회의 근본진리에 대한 성명의 첫번째 조항은 성경의 중요성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있는 성경은 하나님에 의하여 축자적으로 영감되었으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이며 무오하고 권위 있는 행위와 믿음의 규범이다.”(딤후3:15-17, 벧1:21, 살전2:13) 이러한 원리를 고수하는 교회나 개인은 안전한 기초 위에 있다.  이것으로부터 이탈될 때에는 언제든지 그 결과는 실패일 뿐이다.  모든 사람이 성경을 믿음과 행위의 권위있는 규범으로 여겨야 하지만 특히 부흥운동이 확고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고수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흥이 있을 때에 하나님은 자주 교회에게 무시되고 있는 진리에 대하여 상기 시켰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 극단적인 곳으로 나가기가 쉽다.  어떤 사람은 부흥의 교리를 거부할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지나친 열심으로 성경의 가르침의 범위를 넘어가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극단은 해로우며 그리스도의 대의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한다.  부흥의 결과로서 그 동안 강조 되어온 진리 중 “지체사역 ”(Body ministry)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불행이도 이러한 진리를 잘못 적용하거나,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극단으로 나가는 경우가 있었다. 


지체사역의 타당성 


  지체사역에 관한 진리는 원래 성경적이다.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교회는 사람의 몸과 비교된다.  이러한 사실은 주님과 그리고 동료 신자들과 가지는 살아있으며 친밀한 관계를 설명해준다.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엡5:30) 성경은 몸의 머리됨이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엡4:15, 5:23,32, 골1:18) 몸은 하나이며 그것이 분리되어서는 안된다.(고전12:26, 엡2:16, 4:4) 그러나 몸이 하나인 반면 그 몸은 여러 지체를 가지고 있다.(고전12:14) 그리고 이 지체들은 서로를 돌본다(고전12:25,26) 지체들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사역하며(엡4:15,16) 그것을 보전하며 섬기는 것을 추구한다.   


비록 몸의 지체들이 다르며 직분, 사역, 기능에 있어서 다르다 할지라도(롬 (12:4) 여전히 몸의 일부이다.  지체들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고전12:18) 우리가 지체사역에 대하여 말 할 때는 이에 대한 교회의 전 사역을 생각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돕기 위해서 교회에 주신 사람들의 사역을 포함하는데 이들의 사역의 실제이다.  즉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다.”(엡4:7-16참 조) 그것은 또한 모든 신자들을 포함하는데 각각의 신자는 성령의 은사나 혹은 영적 사역의 다른 모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어떤 구절에서는 지체 관계에 대한 언급이 빈약하지만 지체사역이 다음과 같은 상호 인격적 기능을 포함 하는 것은 명확하다.  즉 위로와 격려하는 것(고후1:4, 살전4:18, 5:11), 권고하는 것(히3:13, 10:25), 기도하는 것(엡6:18), 사랑하는 것(요일93:23), 대접하는 것9벧전 4:9),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봉사하는 것(벧전4:10), 충고하는 것(롬 15:14, 골3:16)등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에 관하여 많은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지만 개념의 양극화, 강조, 실시 등이 때때로 나타나는 것 같다.  한 극단은 몸의 지체들에 의한 표현과 참여를 제한하는 경향이 있고 반면에 다른 극단은 성령의 참된 움직임보다는 인간의 개성과 지도에 의존하는 인위적인 참여를 개발하는 경향이 있다. 


지체사역을 제한하는 것의 위험성 

  

교회가 마땅히 조심해야 할 위험성들 가운데 하나는 신자들의 사역을 제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몇몇 영역에서 그리스도 몸의 모든 지체들로 하여금 섬기고 표현하도록 격려하는 것을 방치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성령의 나타남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들은 공중 예배 때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  이것은 지체들이 유용한 기능을 완전히 거부당하는데까지 이르는 극단으로 나갈 수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조직을 유지하는 데에만 너무나 많은 정력을 낭비한다.  목사들이 모든 사역을 감당하고 대부분의 지체들은 소극적이다.  장려하는 강조점은 지체들의 영적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너무나 많은 활동들이 세속적인 마음을 향하여 돌려졌다.  때대로 그냥 계속되는 것 자체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는 경향도 있다.  원대한 프로그램에 고정되는 것은 개인의 창조성을 대신하고, 정통은 현실을 대신하게 된다.

 

지체사역을 남용하는 것의 위험성 


  지금은 성령의 바람이 자유롭게 부는 시대이다.  하나님은 그의 주권으로 놀라운 일을 행하고 계신다.  이것은 많은 교회들과 교회의 지체들에게 새 생명을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부흥 이전의 조건을 돌아보면서 영적인 생명력이 없는 것에 대하여 조직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교회 조직에 대한 환멸 때문에 조직된 교회나 교파적인 교회를 피하고 그러한 조직을 한쪽에 젖혀두는 경향이 있다.  가라지를 태우려는 열심 때문에 알곡까지 날리게 된다.  전통은 신성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주류에서 벗어난 소위 지체사역의 접촉을 추구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것들은 이 나라의 이쪽에서 저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태이므로 이러한 변칙적인 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쉽지 않 은 일이다.  


예를 들면 어느 지역에서는 조직적인 예배를 위하여 면밀하게 준비하는 것 대신에 소위 지체사역이 기다리는 형태의 모임(waiting-type meeting)을 연습하는 것으로부터 개발되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모든 예배시에 언어적인 은사가 나타나야 한다고 믿는다.  아직도 어떤 사람은 모임이 있을 때마다 비록 지도자가 그룹 중에서 개인들에게 요청해야 하지만, 성령의 모든 은사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때때로 사람들은 지도자에 의하여 개인들에 관한 소위 예언을 하도록 지시를 받기도 한다.   


이러한 지체사역의 다른 형태로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경험과 잘못을 고백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자기들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상호 간의 관계에 있어서 극단적으로 직접적인 것이다.  이것은 이 성경적인 민감도 훈련 기술(sensitivity-training techniques)에 근사한 때가 여러번 있었다.  아마 성경에서 가장 유감스럽게 벗어난 것들 중 하나는 목사의 지도력과 조직 그리고 보다 조직화된 예배를 거부하는 것일 것이다.  하나님의 주신 목회의 은사(엡 4:11)를 거부함으로써 이러한 강조점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성경적인 가르침과 성경적인 경험을 유지하도록 도우려는 다른 신자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스스로 떨어져 나가고 있다. 


지체사역에 있어서 균형의 필요 

  

잘못된 것을 다루는 일 중에 어려운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진리를 떠났거나, 명확히 부정하는 경우가 아니라 진리의 어느 관점을 부적당하게 혹은 지나치게 강 조함으로써 생기는 경우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우려고 시도하는 지도자들은 성령의 사역을 반대하는 것처럼 자칫 오해받기가 쉽다.   문제가 존재하는 곳에서 신자들은 이러한 자세를 보이는데 이러한 자세는 그리스도의 몸의 참된 지체들에게 예상되는 것이다.  바울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안에서 관용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자의 가치 있는 특징이라고 지적하였다.(엡4:1-3).   


하나님은 그의 목적에 따라서 교회 안에 목사의 은사를 두셨다.(엡4:11-16). 만일 양이 살아남으려고 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고루 전반적으로 공급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양떼는 반항적이고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목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가운데 행동하는 제멋대로 구는 사람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목사-교사 직분에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만일에 소그룹 개념에서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까지 목회사역이 연장될 수 있다면 목사의 역할은 무엇이며, 교사의 역할은 무엇이겠는가? 신약성경은 이러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지도자라고 명확히 가르친다.  그들은 독재자가 아니라 종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시되거나 제가 되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다.  성경은 신자들이 주 안에서 그들 위에 있는 자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친다.(살전 5:12,13, 딤전5:17-19, 히13:7,17)   


우리는 교리적인 탈선을 피하기 위하여 또한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순수한 진리가 때때로 남용되어진다.  성경은 항상 모든 관계에서 믿음과 행위에 대한 권위여야 한다.  우리는 몸의 각 지체가 교회성장에 있어서 채워야 할 역할을 가지고 있음을 성경이 가르친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행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남용이 존재할 때 목사는 사람들이 수행하는 교회 봉사를 조사해야 하며, 이러한 불법 행위를 조장하는 잘못이 있는지 살펴야 한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적절한 가르침을 제공해야 하며 그들의 봉사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과 일치하도록 성경적인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에 제기된 그리스도 몸 안에서의 목회의 정당성 여부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지체들이 교회 안에 두어진, 하나님에 의해서 제정된 지도력의 한계를 넘어서 이러한 일을 수행하는 것이 조장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연합이 항상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를 때까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기”(엡4:3,13) 위하여 모든 부분에 대하여 성실한 노력이 있 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며 기능을 발휘할 때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의 사역을 이루어 드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 운동(movement)으로서 그리스도의 지체 사역의 성경적 기능에 우리 자신들을 새롭게 드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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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2장 (글롯사와 디알렉토스)

(행 2:1-5) 오순절 날에 마가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는120문도들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는 대 사건이 발생합니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던(창11:1) 인류의 언어 체계가 바벨탑 사건으로 하나님께 범죄하며 구음의 언어가 하나였던 인류의 언어를 빼앗기고 흐트러지게 됩니다.(창11:7-8) 이렇게 빼앗기고 흐트러졌던 인류의 언어가 하늘의 언어로 회복되는 때라. 요엘2:28에서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일, 마지막 때에 이러한 일이 있겠다 예언하신 요엘2장의 말씀의 성취가 보혜사 성령이 이 땅에 임하시는 행2장의 말씀입니다.

어떤이들은 행2장의 방언을 영언이라 부름니다.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였던 (창11:1) 시점에서 창2:7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곧 (창11:1)의 언어가 하나님과 아담이 사용하시던 동일한 하늘언어였음이 확인됩니다. 이로써 곧 (행2:1-5)방언을 곧 영언(하늘언어)이라 추리해 낼 수있는 근거가 됩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잃어버렸던 인류의 하나였던 언어 체계가 행2장의 보혜사 성령이 이 땅에 임하시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늘언어, 영언이 회복되는 사건이라 주장한다면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겠는지요?

행2:4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방언의 원어는 글롯사 즉 ‘혀’ tongue, 언어 language라는 의미로 방언은 혀에서 나는 소리, 혀에서 발생하는 언어라는 의미 입니다.

6 절에는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여기에서 “듣고 소동하여” ‘듣다’의 원어의 의미는 디알렉토스, 들려 오는데로 들었다 하는 의미 입니다. 즉 혀에서 글랏사로 말한 방언이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인하여 듣는이의 귀에 각각 다른 언어 디알렉토스로 들렸다는 의미 입니다.

글롯사와 디알렉토스를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글롯사)
1. 방언을 본토 말로 할 수 있습니다.
2. 방언을 외국어 말로 할 수 있습니다.
3. 방언을 하나님과 아담이 사용하던 하늘 언어(영언)로 말할 수 있습니다.

(디알렉스토)
A. 혀에서 방언을 말하는 대로 들렸다.
B.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로 다른 언어, 또는 하늘 언어로 들렸다

다음과 같은 6가지 형태로 방언으로 말하고 들릴 수가 있다

1A: 본국어 방언으로 말을 하고 본국어로 들렸다
1B: 본국어 방언으로 말을 하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외국어, 또는 하늘언어로 들렸다

2A: 외국어 방언으로 말을 하고 외국어로 들렸다.
2B: 외국어 방언으로 말을 하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본국어 또는 하늘언어로 들렸다.

3A: 영언 방언을 말 한대로 영언으로 들렸다.
3B: 영언 방언을 하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외국어 또는 본국어로 들렸다.

120문도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외국어와 본국어 또는 하늘언어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자 오순절 날 여호와께 제사하기 위하여 모여 온 디아스포라와 현장에 있던 본토인들에게 각각 자기언어로 기도소리를 듣게 됩니다.

오순절에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던 현장에는 다른 나라에 이민 가서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 들이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일년에 세번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 와 얼굴을 보이라는 명령을 지키기 위하여 세계 각처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각 나라에서 올라 온 사람들을 나라별로 세어보니 대략 17개국의 사람들과 본토인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17개국에서 온 디아스포라 들에게 각각 자기나라 말로 방언이 들렸다.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온 각각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나라 외국어로 들렸으므로 오순절의 방언은 순전히 외국어 언어였다?.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순절의 방언이 다만 외국어로 말하고 외국어로 들리는 각 나라의 방언이었다면 디알렉토스의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오순절의 마가 다락방 주위에는 본토인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모든 방언이 외국어라면 오순절 날에 본토인들에게 유대인 언어로 들렸던 본토 방언은 영언이 아니었다는 말이 됩니다.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하는 방언 글롯사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방언, 다른 민족 다른 나라의 모든 언어일 수도, 하나님의 언어인 하늘언어 일 수도 있습니다. 이 땅의 언어이든지, 하늘의 언어가 디알렉토스로 들리는 방언소리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하여 이 땅과 천상의 어떠한 방언으로도 들릴 수가 있습니다.

강성 애국은 기독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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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4장은 성령장이다.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이러한 일이 일어 나리라 하나님은 말씀으로 먼저 약속 하셨고 먼저 주신 이 말씀을 붙잡고 믿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이 실현되도록 하신다. 요한복음의 말씀을 붙잡고 이해해야만 행2장의 역사가 일어나며 왜 그러한 일을 하시는지 알게 된다.

요14장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어라. 내가 떠나감은 너희에게 성령을 보내기 위하여 내가 가노라. 내가 성령을 보내줄 것을 너희는 믿으라. 성령을 오실 것을 약속 하셨다. 우리들은 성령이 오신 것을 알고 또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성령을 받은 나와 성령을 통하여 오신 예수님과 하나되어 연합 된다. 연합된다는 것은 마음이 하나되고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주님과 하나되는 일치가 이루어진다.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 멀리 계신 것 같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계시는 것이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므로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됨이 14장의 말씀이시다

그 다음에 15장에 포도나무의 비유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나를 떠나면 결국은 그 가지는 말라 비틀러지고 아무짝에 쓸모가 없어지게 되며 결국에는 잘리어 불에 던져 지게 된다.
예수를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보장하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시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실 때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이다 15장의 내용이다.

14장의 말씀을 15장에 풀어 주시는 것이다. 14장과 15장을 이해하고 말씀이 풀려야 행2장의 말씀이 이해가 된다. 그러므로 신약의 진정한 성령장은 요14장이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구하라(요15:7, 요14:14, 요1서3:22, 마21:22)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찿을 때니라(호10:12)
그때의 말씀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이나 구하라 그러나 계명을 지켜라. 나를 사랑하는 자는 계명이 쉬우니라. 나를 사랑하는 자는 목숨을 내어놓고 라도 지키게 되느니라. 나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말씀이 그 안에 성령이 그 안에 있으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시리라.

조건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성령이 거하신다. 그러한 사람들이 성령님께 구해야 할 것은 거룩이다. 요15:2~ 3 거룩을 구하는 것이 먼저이다. 거룩과 풍성한 가지는 뗄래야 뗄 수가 없는 관계이다. 거룩해야 가지를 맺으며 거룩하고 더욱 풍성한 가지를 맺게 하기 위하여 더욱 깨끗게 하신다
이 비밀이 풀릴 때, 이때부터 신앙생활이 풀리게 된다. 거룩을 먼저 구하는 자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게 하신다. 내가 우리가 거룩하게 되면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 과실을 맺는 일이다

과실을 맺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더 깊은 거룩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거룩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거룩에도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사람 이미 충분히 거룩한 사람 이사야의 입술을 제단 숯불로 지저서 그를 더욱 참 깊은 거룩으로 인도하십니다. (사6장) 이렇게 맺은 풍성함 열매가 주님께 기쁨이 된다. 이러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돌아가심이 놀랍고 귀한 일임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을 때에 우리가 십자가의 사건을 validated 으로 확인하며 유효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온 인류를 향한 복이었다. 이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하는 것을 세상에 알게 하는 사건이 된다. 어떻게 할 때, 저와 우리의 성도의 삶에서 거룩한 열매들이 풍성하게 맺어질 때에, 내가 구한 것 보다 더욱 풍성하게 열매를 맺게 되며 이렇게 풍성한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되는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것을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이 때에 세상에 선포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에 맡는 이들을 편애하시며 이러한 자들에게 복에 복을 더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십시요. 성령은 우리를 예수와 하나되게 하십니다. 그런 자가 포도나무에 붙어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이 풀리고 그 말씀을 기쁨으로 따르며 찬송으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복에 복을 더 하십니다. 은사를 더 하십니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아 그래서 예수를 믿는구나! 그럴 때에 십자가의 사건이 validated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에 맡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는대로 허락하십니다. 거룩하십시요. 거룩을 구하면 거룩을 더해 주십니다 거룩을 구하면 은사가 더해집니다. 그러한 자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셔서 손을 얹고 기도를 하면 귀신이 떠나가고 병이 낳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황당한 것을 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막연하게 믿는 것이 아닙니다. 확실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께는 제물이 됩니다(롬15:16)

나에게 풍성한 열매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라고 영혼구원에 쓰임 받으라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예언의 능력을 주시고 병자를 낳게하는 능력을 주시고 기적을 일으키게 하셨는데 처음에는 받은 능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하다가 언제부터 나중에는 자기의 만족을 위하여 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거룩하십시요. 거룩한 사람에게 열매를 맺게 하시며 열매를 맺은 자에게 더욱 큰 열매를 맺게 하시며 더 거룩하게 하시며 그렇게 더 거룩하게 하신 자에게 더 큰 은사를 나타나게 하셔서 더 강력한 은사가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세례는 내 만족을 위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기쁨이 되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다. 성령세례로 인하여 나타나는 권세와 능력과 은사와 모든 기적들은 예수님께 만족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한복음 15:11)

세상의 기쁨이 아닌 내 안에서 완전하게 될 때까지 넘치고 넘치는 기쁨 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내 안에서 차고 넘쳐서 성령이 내 안에서 기뻐하심으로 우리의 기쁨이 더욱 충만하게 되는 것이며 영원한 기쁨으로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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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맥아더의『다른 불』비판(2)-

“은사운동에 대한 건설적 비판도 아니고
기적중지론을 변호하는 대표적인 주장도 되지 못하는
맥아더의 『다른 불』 

글 : 조지 P. 우드 박사·목사 
(미국 '하나님의성회' 교단 사무총장, 총회장 역임) 
번역 : 구요한 목사

 

다음은 미국 ‘하나님의성회’ (한국의 순복음) 교단 소속 목사·박사인 조지 우드가 존 맥아더의 최근 저서인『다른 불』에 대해 비판하고 평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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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에 하나님의성회 교단은 사역 100주년을 맞이했다. 아칸사스 주 핫 스프링스에서 보잘 것 없이 시작된 이래 우리 교단은 전 세계적으로 6,600만 명의 회원 규모로 성장했다.(1) 이 기간 동안 충성스런 사역자들이 복음의 씨앗을 심었고 하나님이 자라게 하셨다(고전 3:6).

 

하나님의 성회 교단은 은사운동의 일부인데, 은사운동가들은 전 세계적으로 5억 명에 육박한다.(2) 이 운동의 결과 전 세계 기독교의 중심이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옮겨졌다. 이 운동의 성장은 현대에서 가장 중요한 인류 운동이자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흥임에 틀림 없다. 이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한다!

 

존 맥아더는 그의 저서인『다른 불』(Strange Fire)에서 은사운동에 대해 상당히 다른-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인-견해를 제시한다.

 

은사주의자들은 전 세계적으로 5억 명 이상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는 복음이 진정한 복음이 아니고 배경이 되는 영이 성령이 아니라고 그는 주장한다. 실제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가짜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며 은사운동은 기독교를 공격해 온 사교나 이단처럼 위험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은사운동은 처음부터 광대극이나 사기이며 좋은 것으로 변화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3)

 

맥아더도 은사운동 안에는 “조직적인 비리와 혼란”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필수적인 진리를 이해하는 성실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은사운동의 잘못된 가르침과 가짜 영성”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그들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영원한 위험”에 빠뜨린다고 주장한다.(4)

 

이것은 기독교 운동(들) 뿐만 아니라 특정 기독교인에 대한 심각한 비난이다. 오순절파이자 하나님의 성회의 안수 받은 목사로서 필자는 근거가 빈약하고(5), 과격하기 때문에(6) 그의 주장을 무시하려는 유혹을 받았다. 실제로 필자는 맥아더의 책을 은사운동에 대한 건설적인 비판이나 기적중지론자를 대표하는 건전한 서적으로 추천할 수 없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을 교정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연합을 증진시키기 위해 『다른 불』에 대해 오순절주의자의 입장에서 반론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동의하는 부분과 동의하지 않는 부분

 

기독교의 연합에 관해 오순절주의 지도자들이 맥아더와 동의하는 요소가 있다.

 

제1부에서, 맥아더는 조나선 에드워즈가 요한일서 4장 1절~8절을 바탕으로 설교한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의 독특한 표식들”을 바탕으로, 진정한 부흥의 5가지 요소를 조목조목 제시한다.

 

그 사역이 진정한 그리스도를 높이는가?
그것이 세상적인 것을 대적하는가?
그것이 사람들은 성경으로 이끄는가?
그것이 진리를 향상시키는가?
그것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야기시키는가?

 

오순절주의자인 우리도 이 시험(tests) 방법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는 은사운동이 전체적으로 이 시험들에 합격했다고 믿는데 맥아더는 불합격했다고 믿는다.

 

제2부에서, 맥아더는 오늘날의 성령의 은사는 성경 대로 역사하지 않으므로 진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순절주의자인 필자도 일부 은사운동가들 중에서 은사를 성경 대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성령의 은사 자체가 진짜가 아니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제3부에서 맥아더는 은사운동 비판에서 방향을 틀어서 구원, 성화 및 성경 기록의 감동과 조명의 관점에서 성령의 사역을 약술한다. 오순절주의자로서 우리는 맥아더가 말하는 성령론의 기본적인 주제를 인정한다. 그러나 맥아더는 성경적 성령론의 주요한 주제, 즉 신자에게 사역을 위한 능력을 부여하시는 성령을 소홀히 취급하고 있다.(9)

 

동의하는 점을 볼 때, 크리스천으로서의 우리-오순절파나 은사운동파-의 신앙이나 맥아더의 신앙은 중요하고 실질적인 면에서 동일하다. 불행하게도, 맥아더는 서로 동의하지 않는 훨씬 덜 중요한 요소들을 바탕으로 정통성 여부를 판가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맥아더는 은사운동을 기독교를 공격하는 “가짜 교회,” “이교도,” “이단”으로 묘사한다. 그래서 맥아더는 하나님의 성령의 만연한 악행에 대해 집단적으로 투쟁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10)

 

맥아더가 어떻게 해서 이처럼 무례하고 공격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가?

 

첫째, 맥아더는 은사운동은 이단과 부도덕성으로 가득 찬 운동으로 묘사한다. 제1부에서 그는 “가짜 부흥을 대적한다”로 다룬다.

 

둘째, 그는 자신의 성경 석의를 바탕으로 오늘날 나타나는 사도직, 예언, 방언 및 신유의 은사들은 성경적 기준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그것들은 진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 주제들을 제2부에서 “가짜 은사를 드러내다’는 제목으로 다룬다.

 

증거를 조심스럽게 검토해 보면, 맥아더의 두 가지 주장 모두가 틀렸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은사운동에 대한 서술

 

첫째, 맥아더는 은사운동은 이단과 부도덕성으로 가득 찬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어떠한 큰 운동이든-특히 5억 명의 추종자를 가진 운동이라면-문제점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맥아더는 은사운동의 교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긴다고 주장한다. 유명한 은사운동가들의 여러 가지 스캔들을 자세히 묘사한 후, 맥아더는 “이러한 스캔들이 은사운동의 역사(歷史)에 만연해 있다. 이런 스캔들의 뿌리는 잘못된 교리에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이 장에서 자세히 살펴 본 도덕적 영적 실패는 썩어빠진 성령론-성령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의 필연적인 결과물이다.”(13)

 

맥아더가 은사운동의 묘사에 대해 저지르는 기본적인 문제는 과학자들이 말하는 선택 바이어스(selection bias. 선택 편향)에 있다. 즉 “연구에 활용하는 개인이나 그룹을 선택할 때 저지르는 오류”를 말한다.(14) 맥아더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고 도덕적 흠이 있는 은사운동 지도자들의 오류들을 나열한 후, 그들이 마치 전체 은사운동가들을 대표하는 것처럼 오도한다.

 

이것은 아내 모르게 불륜을 저지른 몇몇 미국 대통령의 부도덕성을 파헤친 후 마치 미국 대통령 전체가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이라고 몰아붙이는 것과 같다. 맥아더가 만일 다른 그룹을 선택하여 분석해 본다면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것이다.

 

맥아더의『다른 불』에 묘사된 은사운동가들을 게리 B. 맥기가 지은 『성령의 사람들』(People of the Spirit)에 묘사된 성령운동가들과 비교해보면 필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것이다.(15) 맥아더가 묘사한 은사주의자들은 ‘선택 바이어스’로 인한 오류이기 때문에 은사운동가 전체를 대표하는 묘사로 받아들일 수 없다.

 

맥아더도 은사운동을 대표하는 신조와 실천사항들을 알고 있다. ‘종교와 공적 삶에 대한 퓨 포럼’(Pew Forum) 사(社)가 2006년에 출판한『성령과 능력』(Spirit and Power)이란 제목의 보고서를.(16) 맥아더는 그 보고서를 인용하고 그 보고서를 바탕으로 연구하여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은 은사운동의 한 가지 특징이라고 주장한다.(17) 불행하게도, 맥아더는『다른 불』독자들에게 그 보고서가 제시한 은사운동의 정통성, 도덕성, 경건, 전도에 대한 열정 및 사회적 참여에 대한 폭넓은 기여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퓨 보고서의 대표적인 글을 인용해 보자.

 

정통성. “갱신주의자들 즉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운동가들 또한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와 실천사항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견지하고 있다.”(18) 이것은 성경에 대한 그들의 견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갱신주의자들 대부분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데, 이러한 견해는 비갱신주의자들보다 오순절주의자들 사이에서 더 확고하다.”(19)

 

도덕성. “오순절주의자들은 동성애, 혼외 정사 및 음주와 같은 사회적, 도덕적 주제에 대해 전통적인 견해를 고수한다.”(20)

 

경건. “갱신주의자들은 또한 교회 출석, 개인 기도 및 성경 읽기와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 실천행위 참여율이 비갱신주의자들 보다 다소 높은 수준이다.”(21)

 

전도에 대한 열정. “10개국의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22) 재미있는 사실은 “복음을 전파하는 의무감에 있어서 갱신주의자들이 비갱신주의자들 보다 더 열심이란 사실이다.”(23) 왜? “오순절주의자들은 예수에 대한 믿음만이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오순절파의 믿음은 특별나다”(24)고 기록한다.

 

사회적 참여.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운동가들의 상당수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숫자가 충분하면 사회적 병폐들이 스스로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또한 갱신주의자들은 가난한 자를 위한 정의를 위해 일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여긴다.”(25)

 

퓨 보고서가 묘사한 이러한 운동이 당신에게 “가짜 교회”인 것처럼 생각되는가?

 

갱신주의 크리스천들의 “가짜 교회”가 어떻게 비갱신주의자들보다 더 정통 교리 수호, 보수적 도덕성, 따뜻한 경건, 전도의 열정 및 사회 참여에 열심일 수가 있는가? 물론 아니다.

 

그러므로, 은사주의자들의 신조나 실천사항은 맥아더가 말하는 썩은 성령론의 필연적인 부산물일 수가 없다. 어떤 운동이 정통 교리와 정통 삶으로 특징 지워진다면 그것은 성령님이 진짜로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인데 이는 맥아더가 제시한 진정한 부흥의 5가지 표식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은 어떠한가?

 

은사주의자들 사이에 만연한 번영신학은 “극단적인 것이 주류가 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가? 실제로, 번영신학이 은사운동의 성장을 선언적으로 설명 해주는 것이 아닌가? 맥아더에 의하면 대답은 ‘그렇다’이다. 맥아더는 “실제로, 은사신학의 급성장의 주된 이유는 번영신학이 유명해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회심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물질적 소유와 신체적 치유로 유인하기 때문이다”라고 썼다.(27)

 

맥아더의 마지막 문장에 포함된 거짓 선언은 제쳐두자. 교회가 성령의 죄를 책망하시는 역사는 물론 하나님의 치유 및 물질적 공급에 대한 소망을 통해 성장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가? 예수님은 치유를 받기 위해 몰려온 사람들을 비판하지 않으셨다(눅 4:38-44).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비판해야 하는가?

 

대신에, ‘번영복음’(prosperity gospel)이란 단어의 애매모호성에 초점을 맞추어 보라. 맥아더는 독자들이 ‘번영복음’이란 단어를 ‘믿음의 말씀운동’(Word of Faith Movements)과 연관시키기를 원한다. 번영복음이 은사운동 안에 만연해 있고, 믿음의 말씀운동과 동일시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그 신학이 이단이라면, 은사운동은 정말 이단성이 강한 운동이다.

 

필자는 믿음의 말씀운동을 변호하지 않으며, 맥아더가 지적한 그들의 여러 가지 신학적 오류에 동의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이단이라고 확신하지는 않는다).(28) 그럼에도 불구하고,『성령과 능력』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보고서는 맥아더 보다는 훨씬 더 우호적으로 번영복음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퓨 보고서는 인터뷰 대상자들에게 믿음의 말씀 신학에 대한 동의 여부를 묻지 않았다. 퓨 보고서의 조사자들은 인터뷰 대상자들에게 다음의 두 가지 진술에 대해 어떤 정도로 동의하는가를 질문했다.

• “하나님은 충분한 믿음이 있는 신자에게는 물질적 축복을 베푸실 것이다.”
• “하나님은 충분한 믿음이 있는 신자에게는 건강과 질병으로부터의 치유를 베푸실 것이다.”

 

믿음의 운동 지지자들은 당연히 이 진술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6:25-34 및 야고보서 5:13-16처럼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공급과 치유를 분명하게 약속하신 구절들을 읽고 마음에 깊이 새긴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위의 2가지 진술에 동의할 것이다.

 

한편, 만일 당신이 위에 인용된 성경 구절들을 바탕으로 위의 두 가지 진술에 동의하면 당신은 맥아더의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포함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위의 두 성경 구절에 어느 정도라도 동의하지 않으면 당신은 스스로가 “믿음이 작은 자”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필자는 믿음의 말씀운동을 변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번영신학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믿음의 말씀운동 지지자는 아니라는 말이다.

 

더군다나, 번영(prosperity. 한글 성경에는 주로 ‘형통’이란 뜻으로 번역되어 사용됨-번역자 주)이란 단어의 의미는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해석된다. 맥아더는 번영신학에 대한 공격의 빌미로 사용하는 ‘번영’의 의미를 폴 알렉산더가 『표적과 기사』(Signs and Wonders)에서 사용된 번영의 의미로 사용한다.(30)

 

그런데 맥아더는 『성령과 능력』이 은사운동을 변호하는 기록들을 간과하듯 『표적과 기사』가 은사운동을 변호하는 기록들도 간과했다.

 

하나님은 신자가 부자가 되기를 원하시는지의 여부에 대해 나이지리아의 오순절주의자인 로렌스 은왕코는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알렉산더는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알렉산더는 이렇게 썼다.

“나(알렉산더)는 분에 넘치는 풍요, 재산의 사장(死藏), 탐욕, 터무니 없음 및 소비주의를 반대했지만 ‘건강한 삶을 위해 충분히 갖는 것’에는 찬성했다. 나는 단순한 삶을 지지한다. 그(은왕코)는 기아, 가난, 질병 및 절망을 반대하고 ‘건강한 삶을 위해 충분히 갖는 것’에는 찬성했다. 나는 재물의 산을 바라보면서 부의 수준을 낮추려고 했고 그는 절망의 골짜기를 내려다 보면서 가난한 자들의 수준을 높이려고 했다.”(31)

 

‘번영’은 ‘건강한 삶을 위해 충분히 갖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한 알렉산더는 그 자신이 번영의 의미에 대해 은왕코와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신자들이 ‘그런 식’으로 번영하고 형통하기를 원하신다.

 

맥아더는 독자들이 ‘번영’이란 말을 들을 때 이미 필요 이상의 재물을 가진 북미 TV 전도자들의 탐욕과 연관시키기를 원한다. 왜 맥아더는 은왕코가 생각하는 번영의 의미에 동의하는 퓨 보고서의 인터뷰 대상자들이 생각하는 번영의 의미를 제시하지 않는가? 대부분이 빈곤층 출신인 인터뷰 대상자들이 생각하는 번영의 의미가 보다 더 상식적이고 덜 가혹한 것이 아닌가?

 

번영복음이 믿음의 말씀운동과 동일한 것이 아니고 번영(또는 형통)의 의미가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퓨 보고서가 지적하고 맥아더가 간과한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

 

번영복음은 비은사적 신자들에게도 널리 퍼져있다. “『성령과 능력』에 의하면, 모든 나라에서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믿음만 충분하면 하나님이 건강과 질병으로부터의 치유를 베푸신다고 믿고 있다….. 전 세계의 많은 크리스천들 또한 믿음만 충분히 있으면 하나님이 물질적 축복도 베푸신다고 믿고 있다. 하나님이 건강을 베푸신다는 사실 보다 덜 보편적이고 덜 강한 믿음이지만.”(32)

 

요약하면, 맥아더의 주장과는 반대로 은사운동은 이단과 부도덕성으로 가득 찬 운동이 아니다. 은사운동의 신조와 실천행동은 정통적이고, 도덕적이고, 경건하고, 전도에 열심이고, 사회적 참여도 활발하다. 믿음의 말씀 운동에는 다소 문제가 있지만 은사운동 내의 번영신학에 대한 이해는 맥아더가 비난하는 것보다 더 훌륭하고 동정적인 접근법이 있다.

 

 (그외의 주제에 관심 있는 분은 아래에 게재한 영어 원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Neither a Constructive Critique of Charismatics Nor a Good Representative of Cessationism, January 13, 2014

By George P. Wood

In 2014, the Assemblies of God completes its 100th year of ministry. From humble beginnings in Hot Springs, Ark., our Fellowship has grown to encompass over 66 million believers in 252 countries, territories, and provinces.[1] Faithful saints have planted and watered gospel seeds during these years, but God has made them grow (1 Corinthians 3:6).

The AG is part of the Charismatic Movement, which now numbers over 500 million persons worldwide.[2] That movement has shifted the center of Christianity from the global North to the global South, from the developed world to the majority world. Arguably, its growth makes it one of the greatest revivals in the history of Christianity, as well as one of the most significant people movements of the modern era. And for that, praise God!

John MacArthur offers a very different — and almost entirely negative — assessment of the Charismatic Movement in his new book, Strange Fire:

Charismatics now number more than half a billion worldwide. Yet the gospel that is driving those surging numbers is not the true gospel, and the spirit behind them is not the Holy Spirit. What we are seeing is in reality the explosive growth of a false church, as dangerous as any cult or heresy that has ever assaulted Christianity. The Charismatic Movement was a farce and a scam from the outset; it has not changed into something good.[3]

He concedes that there are “sincere people” within the movement who “understand the necessary truths of the gospel” despite its “systemic corruption and confusion.” Nevertheless, he contends that continued exposure to “the false teaching and counterfeit spirituality of the Charismatic Movement” places them and others in “eternal jeopardy.”[4]

These are serious charges to level against any Christian, let alone an entire movement of Christians. As a Pentecostal and an ordained Assemblies of God minister, I am tempted to ignore them because they are both ill-founded[5] and intemperately made.[6] Indeed, I cannot recommend MacArthur’s book either as a constructive critique of the Charismatic Movement or as a good representative of cessationist theology.[7] Nevertheless, the publication of Strange Fire requires a Pentecostal response, not merely to correct the record but also to advance the cause of Christian unity.

 

Where We Agree and Disagree

Regarding Christian unity, there are several points where Pentecostal readers can agree with MacArthur.

In Part 1, he articulates five tests of authentic revival from a reading of 1 John 4:1–8, informed by Jonathan Edwards’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8]:

1. Does the work exalt the true Christ?
2. Does it oppose worldliness?
3. Does it point people to the Scriptures?
4. Does it elevate the truth?
5. Does it produce love for God and others?

As Pentecostals, we wholeheartedly endorse these tests. However, whereas we believe that the Charismatic Movement, on the whole, passes them, MacArthur believes it fails them.

In Part 2, MacArthur argues that contemporary spiritual gifts do not operate the way the Bible says they should, so they are inauthentic. As Pentecostals, we agree that some individuals within the Charismatic Movement practice the gifts in violation of biblical order. However, we disagree that contemporary spiritual gifts, per se, are inauthentic.

In Part 3, MacArthur turns from critiquing the Charismatic Movement to outlining 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terms of salvation, sanctification, and the inspiration and illumination of Scripture. As Pentecostals, we affirm the basic thrust of his pneumatology. However, we note that he has downplayed a major theme of biblical pneumatology — namely, that the Holy Spirit empowers believers for service.[9]

These points of agreement demonstrate that our faith as Christians is significantly and substantially the same as John MacArthur’s. Unfortunately, he has chosen to interpret the much smaller points of disagreements as matters of orthodoxy. On the whole, then, he situates the Charismatic Movement outside the camp, describing it as a “false church,” “cult,” and “heresy” that is “assault[ing] Christianity.” Indeed, he calls for “a collective war against the pervasive abuses on the Spirit of God.”[10]

How does MacArthur arrive at this outrageous and offensive conclusion? First, he portrays the Charismatic Movement as rife with heresy and immorality. This is the burden of Part 1, subtitled, “Confronting a Counterfeit Revival.” Second, based on his exegesis of Scripture, he argues that contemporary manifestations of the spiritual gifts of apostleship, prophecy, tongues, and healing do not match biblical criteria. Consequently, he says they are inauthentic. This is the burden of Part 2, subtitled, “Exposing the Counterfeit Gifts.”

A careful examination of the evidence will demonstrate that MacArthur is wrong on both counts.

 

Portrait of the Charismatic Movement

First, MacArthur portrays the Charismatic Movement as rife with heresy and immorality. Consider these representative quotations:

Heresy: “What we are seeing is in reality the explosive growth of a false church, as dangerous as any cult or heresy that has ever assaulted Christianity.”[11]

Immorality: “The halls of Pentecostal and charismatic history are paved with scandal.”[12]

Any large movement — especially one with over 500 million adherents — will contain problematic elements. However, MacArthur argues that the Charismatic Movement consists of these problematic elements, arising from its “bad doctrine.” After describing a variety of scandals involving well-known charismatic leaders, MacArthur writes: “Scandals such as these permeate charismatic history. Trace them to their source and you will discover that they are rooted in bad doctrine. Put simply, moral and spiritual failures such as we have chronicled in this chapter are the inevitable consequence of rotten pneumatology — false teaching about the Holy Spirit.”[13]

The basic problem with MacArthur’s description of the Charismatic Movement is what scientists refer to as selection bias — that is, “[a]n error in choosing the individuals or groups to take part in a study.”[14] He has profiled charismatic leaders who teach aberrant doctrines or have committed moral failures and then puts them forward as representative of the Charismatic Movement as a whole. This is like describing the moral lives of American presidents by studying only the ones who cheated on their wives. Select a different group, and you’ll get a different picture. (Contrast the charismatics mentioned in Strange Fire with the Assemblies of God adherents profiled in Gary B. McGee’s People of the Spirit, and you’ll see what I mean.[15]) Because MacArthur’s description of charismatics suffers from selection bias, it cannot be taken seriously as a representative description.

MacArthur is aware of a report on charismatic beliefs and practices that is representative of the movement. Titled Spirit and Power, the Pew Forum on Religion and Public Life published the report in 2006.[16] MacArthur cites both it and studies based on it to prove that “prosperity theology” is a characteristic belief of the Charismatic Movement.[17] (More on that later.) Unfortunately, he fails to inform readers of Strange Fire about the report’s broader conclusions regarding the Charismatic Movement’s orthodoxy, morality, piety, evangelistic intensity, and social engagement.

Consider these representative quotations from the report:

Orthodoxy: “renewalists [i.e., Pentecostals and charismatics] also stand out for the intensity of their belief in traditional Christian doctrines and practices.”[18] This is evident, for example, in their view of the Bible. “[M]ajorities of non-renewalist Christians believe that the Bible is the word of God and is to be taken literally, word for word; but this view is even more common among pentecostals [sic] than among non-renewalist Christians.”[19]

Morality: “pentecostals [sic] often stand out for their traditional views on a wide range of social and moral issues, from homosexuality to extramarital sex to alcohol consumption.”[20]

Piety: “renewalists also tend to engage in more traditional Christian practices at somewhat higher rates than do non-renewalists” — i.e., practices such as church attendance, private prayer, and frequent Bible reading.[21]

Evangelistic intensity: “Majorities of pentecostals [sic] in all 10 countries believe that Christians have a duty to convert people to Christianity.”[22] Interestingly, “the duty to spread the gospel tends to be felt more strongly by renewalists than by non-renewalists.”[23] Why? Because of “the widespread belief among pentecostals [sic] that faith in Jesus Christ represents the exclusive path to eternal salvation”; even here, Pentecostals “stand out for the intensity of their belief.”[24]

Social engagement: “strong majorities of both pentecostals [sic] and charismatics believe that if enough people were brought to Christ, social ills would take care of themselves…. However, renewalists also see it as their duty to work for justice for the poor.”[25]

Does a movement that matches Pew’s description sound like a “false church” to you? Would a “false church” of “renewalist Christians” be “more intense” about their orthodox doctrine, conservative morality, warm piety, evangelistic intensity, and social engagement than “non-renewalist Christians”? Of course not! But if not, then charismatic belief and practice cannot be the “inevitable consequence” of “rotten pneumatology,” as MacArthur claims. If a movement is characterized by orthodoxy (right believing) and orthopraxy (right living), then the Holy Spirit is genuinely at work in its midst — and this according to MacArthur’s own five tests of authentic revival.

What about prosperity theology, however? Doesn’t its prevalence among charismatics prove that “the extreme has become mainstream”?[26] Indeed, doesn’t it offer an alternative explanation for the growth of the Charismatic Movement? According to MacArthur, yes. He writes: “In reality, the rapid expansion of charismatic theology is primarily due to the popularity of the prosperity gospel. It is not the convicting work of the Holy Spirit that is drawing converts, but the allure of material possessions and the hope of physical healing.”[27]

Set aside the false disjunction in MacArthur’s last sentence. After all, why can’t the church grow because of both the convicting work of the Holy Spirit and the hope for God’s healing and material provision? Jesus didn’t criticize the crowds who came to Him for healing (Luke 4:38–44), after all, so why should we today?

I hold no brief for the Word of Faith Movement, and I share many of MacArthur’s concerns with its theological errors. (I’m not sure they always rise to the level of heresy, however.)[28] Nonetheless, a careful reading of the evidence from Spirit and Power suggests a more sympathetic interpretation of the prosperity gospel than MacArthur allows.

Instead, focus on the ambiguity of the term prosperity gospel. MacArthur wants readers to associate that term with the Word of Faith Movement. If the prosperity gospel is prevalent among charismatics, if it is identical to Word of Faith theology, and if that theology is heretical, then the Charismatic Movement is shot through with heresy.

Pew did not ask interviewees whether they agreed with Word of Faith theology, after all. They asked interviewees to what extent they agreed with the following two statements:

“God will grant material prosperity to all believers who have enough faith.”
“God will grant health and relief from sickness to believers who have enough faith.”[29]

Obviously, Word of Faith adherents will agree with these statements. But so might people who have read and taken to heart the Bible’s robust promises of God’s provision for and healing of believers in passages such as Matthew 6:25–34 and James 5:13–16. If, on the basis of such passages, you agree to some extent with Pew’s statements, you wind up on John MacArthur’s naughty list. On the other hand, if you disagree to some extent with these biblical promises, don’t you show yourself to be a person of “little faith”? My point here is not to defend Word of Faith theology but simply to demonstrate that the route to prosperity theology does not necessarily pass through Word of Faith teaching.

Moreover, the meaning of the word prosperity varies depending on context. One of the authorities MacArthur cites against prosperity theology is Signs and Wonders by Paul Alexander.[30] Just as MacArthur passed over exculpatory information about charismatics in Spirit and Power, so also he passes over exculpatory information in Signs and Wonders.

Relating a disagreement he had with a Nigerian Pentecostal named Lawrence Nwankwo concerning whether God wants Christians to prosper — Alexander argued no, Nwankwo argued yes — Alexander writes: “I was arguing against overabundance, hoarding, greed, exorbitance, and consumerism — and for enough for a healthy life. I argued for a simple existence. He was arguing against starvation, poverty, sickness, and hopelessness — and for enough for a healthy life. He argued against subsistence and for a simple life. I was looking up at the mountain of money and trying to bring the wealthy down; he was looking down into the valley of despair and trying to bring the poor up.”[31]

Once he realized that the word prosperity meant having “enough for a healthy life,” Alexander realized that he agreed with Nwankwo. God wants people to prosper in that way. MacArthur wants readers to assume that prosperity means the greed of North American televangelists, who already have more than enough. Why not assume instead that Pew’s interviewees hold Nwankwo’s understanding of prosperity? Given that most of them come from poor countries, that would seem the more reasonable — and less uncharitable — assumption.

Indeed, when you consider that the prosperity gospel is not identical to Word of Faith theology and that the meaning of prosperity varies by context, it becomes easier to make sense of a point Pew raises but MacArthur ignores: Prosperity theology is prevalent among non-charismatic Christians too. “In all countries,” according to Spirit and Power, “majorities of all Christians believe that God will grant good health and relief from sickness to believers who have enough faith…. Many Christians around the world also believe that God will grant material prosperity to all believers who have enough faith, though this belief is somewhat less common, and held less intensely, than belief in God granting good health.”[32]

In summary, contrary to MacArthur’s description of it, the Charismatic Movement is not rife with heresy and immorality. A representative sample of charismatic belief and practice shows it to be orthodox, moral, pious, intensely evangelistic, and socially engaged. And while Word of Faith theology is indeed troublesome and demands a response, there is a better and more sympathetic way to understand the Charismatic Movement’s prosperity theology than MacArthur allows.

 

Exegesis of Scripture

Second, based on his exegesis of Scripture, MacArthur argues that contemporary manifestations of the spiritual gifts of apostleship, prophecy, tongues, and healing do not match biblical criteria. He says they are inauthentic, rising from some source other than the Holy Spirit. Based on those assumptions, he concludes continuationism is most likely false, and cessationism is likely true.

(Continuationism is “the claim that all the miracles and spiritual gifts described in Acts and 1 Corinthians are still available to Christians today, that prophetic gifts and signs and wonders were not unique to the apostolic era, and that there is no reason to believe one or more of these phenomena has ceased.”[33] Cessationism is the opposite claim.)

Pentecostals and charismatics may find themselves nodding in agreement with certain aspects of MacArthur’s argument. For example, I am sympathetic with MacArthur’s critiques of C. Peter Wagner’s views on apostleship, the notion of “fallible prophecy,” and Benny Hinn’s healing ministry. I don’t think these positions are representative of the Charismatic Movement. I also don’t believe arguments against them should count as arguments against the Movement as a whole.

Let’s take a closer look at MacArthur’s arguments regarding apostleship, prophecy, tongues, and healing.

 

Apostleship

MacArthur argues that, by definition, continuationists must believe that the spiritual gift of apostleship (1 Corinthians 12:28,29; Ephesians 4:11) is still available to Christians today.[34] As he reads it, the New Testament articulates three criteria of apostleship:

1. An apostle had to be a physical eyewitness of the resurrected Christ.
2. An apostle had to be personally appointed by the Lord Jesus Christ.
3. An apostle had to be able to authenticate his apostolic appointment with miraculous signs.[35]

MacArthur concludes: “These qualifications alone conclusively demonstrate that there are no apostles in the church today,” since no contemporary has seen Jesus personally, been commissioned for ministry by him personally, or has performed the number and variety of miracles that were performed by the New Testament apostles.[36]

Furthermore, he argues, Paul claimed to be the last apostle (1 Corinthians 15:8,9), so none came after him.[37] The apostles were “revelatory agents of God,” so unless we are willing to reopen the biblical canon, apostles do not continue to receive revelations today.[38] And Paul described the apostles as the “foundation” of the church (Ephesians 2:19,20) in a passage that “means nothing if it doesn’t decisively limit apostleship to the earliest stages of church history. After all, a foundation is not something that can be rebuilt during every phase of construction. The foundation is unique, and it is always laid first, with the rest of the structure firmly resting above it.”[39]

Taken individually and collectively, MacArthur thinks these lines of reasoning are fatal to contemporary manifestations of apostleship specifically and to continuationism generally. “To acknowledge [that apostleship has ceased] is to acknowledge the foundational premise on which cessationism is based. If apostleship ceased, it demonstrates that not everything that characterized the New Testament church still characterizes the church today.”[40]

Interestingly, in its position paper, “Apostles and Prophets,”[41] the Assemblies of God follows a similar line of argument to MacArthur’s and reaches a similar conclusion: “Since the New Testament does not provide guidance for the appointment of future apostles, such contemporary offices are not essential to the health and growth of the church, nor its apostolic nature.”[42]

Given that the Assemblies of God is the largest denomination within the Charismatic Movement — accounting for approximately one-eighth of the whole — the similarity of its reasoning and conclusion to MacArthur’s suggest that at least some charismatics adhere to a more qualified definition of continuationism than MacArthur lets on. Indeed, he admits that C. Peter Wagner’s New Apostolic Reformation “borrowed the apostolic emphasis of Latter Rain theology and incorporated it into his Third Wave teachings,” which means it’s not characteristic of either classical Pentecostalism or the charismatic revival in the mainline churches.[43] If that’s the case, however, then the cessation of the apostolic office is not fatal to continuationism, which some Pentecostals and charismatics define differently than MacArthur.[44]

Additionally, MacArthur’s criteria of apostleship need to be challenged. MacArthur seems to limit apostleship to “the Twelve and Paul.”[45] This overlooks crucial differences between the Twelve and Paul. The Twelve, but not Paul, were eyewitnesses of Christ “the whole time the Lord Jesus was living among us, beginning from John’s baptism to the time when Jesus was taken up from us” (Acts 1:21,22). The Twelve, but not Paul, are the foundations of the New Jerusalem (Revelation 21:14).

MacArthur’s concept of apostleship overlooks the fact that the New Testament applies the term apostolos (“apostle”) to a wider group of people than the Twelve and Paul, including Barnabas (Acts 14:4,14); James and others, distinct from the Twelve (1 Corinthians 15:7); Silas and Timothy (1 Thessalonians 2:6, cf. 1:1); and possibly Apollos (1 Corinthians 4:9, cf. v. 6). The New Testament does not say whether Barnabas, Silas, and Timothy were physical eyewitnesses of the resurrected Christ. It does say, however, that prophets (rather than Jesus personally) appointed Barnabas and Timothy for ministry (Acts 13:2,3; 1 Timothy 1:18; 4:14). In his conflict with the false apostles at Corinth (2 Corinthians 11–12), Paul didn’t make use of either criterion 1 or 2, even though these would have been probative. (Indeed, if apostleship were limited to the Twelve and Paul, why didn’t Paul simply point out that the false apostles were neither the Twelve nor Paul?)

Finally, MacArthur’s concept of apostleship excludes at least two things that Paul considered fundamental: to “preach the gospel where Christ was not known” (Romans 15:14–22; cf. Acts 9:15,16; 22:21; 25:15–23) and suffering (2 Corinthians 11:16–33; cf. 1 Corinthians 4:9–13), which seem to be conjoined in Paul’s mind. Recognizing the connection between apostleship and preaching the gospel, the Assemblies of God’s position paper concludes that while the apostolic office may have ceased, the apostolic function has not.[46]

One final point: Though MacArthur makes much of the “foundation” argument in Ephesians 2:20, I’m not sure it’s as conclusive as he thinks. For one thing, he is asking that passage a question that it was not designed to answer. His question is, “Has the gift of apostleship ceased?” The question that passage was designed to answer is, “How are Gentiles saved and incorporated into the people of God?”

The only passage in the New Testament that explicitly asks when the spiritual gifts will cease is 1 Corinthians 13:8–13, and its answer is “when completeness comes,” i.e., the Eschaton. For another thing, and this cannot be stressed enough, “foundation” is a metaphor, and metaphors should not be pressed too far. If pressed too far, we would have to conclude that Paul could not be part of the church’s apostolic foundation because he described himself as a “wise builder” who laid that foundation in 1 Corinthians 3:10. Obviously, the builder cannot also be the foundation. And doesn’t Revelation 21:14 describe the foundation of the New Jerusalem, which is the Church, in terms of “the twelve apostles of the Lamb”? Obviously, Paul was not a member of the Twelve.

Prophecy

Regarding contemporary manifestations of prophecy, MacArthur argues that the Bible lists three criteria for identifying false prophets:

1. Any self-proclaimed prophet who leads people into false doctrine and heresy is a false prophet.
2. Any self-proclaimed prophet who lives in unrestrained lust and unrepentant sin shows himself to be a false prophet.
3. If someone declaring himself a prophet proclaims any supposed “revelation from God” that turns out to be inaccurate or untrue, he must be summarily rejected as a spokesman for God.[47]

With these three criteria in mind, MacArthur argues that “charismatics have made presumptuous prophecy a hallmark of their movement.”[48] As proof of this, he cites “the various heresies that are tolerated and even promoted within charismatic ranks” (criterion 1), as well as “the numerous scandals that continually plague the lives of the most visible and recognized charismatic leaders” (criterion 2), that he describes in Part 1 of the book.[49]

I’ve already demonstrated that MacArthur’s description of the Charismatic Movement suffers from selection bias and is therefore unrepresentative, so we can agree with his critique of some charismatic leaders’ theological errors and moral failures without thinking that they are representative of the whole.

Unfortunately, this selection bias also plagues his discussion of “inaccurate predictions” (criterion 3). Why should we assume that the inaccurate predictions of Mike Bickle, Bob Jones, Benny Hinn, and Rick Joyner — the examples MacArthur cites by name — are representative of charismatic prophecy?[50] Why should we agree with his statement, “From its inception by Charles Fox Parham to its most ubiquitous modern representative in Benny Hinn, the entire movement is nothing more than a sham religion run by counterfeit ministers”?[51]

The entire movement? Nothing more? Overbroad statements like this betray MacArthur’s weak grasp of the history of the Charismatic Movement, even as they reveal a well-honed skill at libeling an entire class of Christians.

At the end of the day, however, inaccuracy isn’t MacArthur’s real concern. “Not all who believe God speaks to them make prophetic pronouncements as outlandish as those broadcast by charismatic televangelists or the Kansas City Prophets,” he writes. “But they still believe God gives them extrabiblical messages — either through an audible voice, a vision, a voice in their heads, or simply an internal impression. In most cases, their ‘prophecies’ are comparatively trivial. But the difference between them and Benny Hinn’s predictions is a difference only of scale, not of substance.”[52]

His real concern, then, is the very possibility of “extrabiblical revelation.” He writes: “modern evangelicalism’s infatuation with extrabiblical revelation is … a return to medieval superstition and a departure from our fundamental conviction that the Bible is our sole, supreme, and sufficient authority for all of life. It represents a wholesale abandonment of the Reformation principle of sola Scriptura.”[53]

Others will have to determine whether MacArthur has interpreted the Reformation correctly. What needs to be pointed out is the simple fact that the Bible itself, on a number of occasions, reports that people prophesied without reporting what they prophesied. Where are the extrabiblical revelations of Israel’s 72 elders (Numbers 11:22–30); Saul, the “procession of prophets” surrounding Samuel, and “Saul’s men” (1 Samuel 10:5–7,9–11; 19:18–24); “the company [or sons] of the prophets” (2 Kings 9:1–13); the prophets who went down from Jerusalem to Antioch (Acts 11:27–30); the Antioch prophets Simeon, Lucius, and Manaen (Acts 13:1–3); Philip’s “four unmarried daughters” (Acts 21:9); or the Roman and Corinthian congregational prophets (Romans 12:6; 1 Corinthians 12:28,29)?

Moreover, doesn’t the ministry of Jesus Christ itself point to the existence of extrabiblical revelation? Jesus Christ is “the Word [become] flesh” (John 1:14). Regarding His deeds, the Gospel says, “he can do only what he sees his Father doing, because whatever the Father does the Son does also” (5:19). Regarding words, Jesus said, “whatever I say is just what the Father has told me to say” (12:50). And yet, John tells us, Jesus “did many other things as well” that are not recorded in the Gospels. Indeed, they are too numerous to put into books: “I suppose that even the whole world would not have room for the books that would be written” (21:25). Isn’t this the very definition of extrabiblical revelation?

The point is this: MacArthur demonstrates an (ironically) extrabiblical wariness toward extrabiblical revelation. His argument seems to be at odds with the Bible itself. This problem flows from his misidentification of canon and prophecy. The entire canon is prophetic (2 Timothy 3:16,17; 2 Peter 1:20,21), but not every prophecy is canonical, as I just illustrated. Scripture is the kanon (literally, “measuring rod” or “rule”) against which all alleged prophecies must be evaluated, but it is not the sum total of all that God has said, is saying, or will say. Therefore, it is appropriate to “eagerly desire gifts of the Spirit, especially prophecy” (1 Corinthians 14:1).

 

Tongues

Regarding speaking in tongues, MacArthur argues that tongues-speech in the New Testament always involved speaking a human language, whereas tongues-speech today never involves speaking a human language. Therefore, contemporary tongues-speech is “gibberish” that has nothing to do with the New Testament spiritual gift. [54]

There are good reasons to doubt both prongs of MacArthur’s argument. Anecdotal evidence indicates that at least some contemporary tongues-speech involves human languages. For example, Global Witness to Pentecost by Jordan Daniel May compiles 88 testimonies from reputable sources where one person spoke in a tongue that a second person recognized as a human language.[55] Admittedly, such occurrences are rare. Nevertheless, if they happen, then what MacArthur himself considers biblical tongues-speech continues today.

More importantly, there are several reasons to question whether the New Testament teaches that tongues-speech is always a human language. According to MacArthur, “the only detailed description of the true gift of tongues in Scripture is found in Acts 2 on the day of Pentecost — a text that clearly identifies this gift as the supernatural ability to speak genuine, meaningful, translatable languages” (Acts 2:4,6–11).[56] This statement is false. Acts 2 is not “the only detailed description of the true gift of tongues.” If anything, 1 Corinthians 12–14 contains an even more detailed description of tongues. Acts 2 is simply the only description that contains the detail that the tongues-speech of Pentecost involved human languages. A different understanding of tongues-speech emerges through a close reading of 1 Corinthians 12–14.

First, whereas Acts 2:6–11 assumes that tongues-speech is naturally intelligible to hearers, 1 Corinthians 12–14 assumes that it is naturally unintelligible to them. Paul writes, “anyone who speaks in a tongue does not speak to people but to God. Indeed no one understands them; they utter mysteries by the Spirit” (14:2). And, “when you are praising God in the Spirit, how can someone else, who is now put in the position of an inquirer, say ‘Amen’ to your thanksgiving, since they do not know what you are saying?” (14:16). And, “if … everyone speaks in tongues, and inquirers or unbelievers come in, will they not say that you are out of your mind?” (14:23).

Second, whereas Acts 2:6–11 assumes that the interpretation of tongues is a natural process in which a native speaker understands his or her own language, 1 Corinthians 12–14 assumes that it is a supernatural gift. “Now to each one the manifestation of the Spirit is given for the common good … to still another the interpretation of tongues” (12:7–10). “For this reason the one who speaks in a tongue should pray that they may interpret what they say” (14:13).

Third, in 1 Corinthians 14:6,10–12, Paul analogizes uninterpreted tongues-speech (glossais) to an uninterpreted foreign language (phonon/phones). As Gordon Fee points out, Paul’s “use of earthly languages as a analogy in 14:10–12 implies that it is not a known earthly language, since a thing is not usually identical with that to which it is analogous.”[57] Unless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ongues-speech and human language here, Paul’s comparison is tautologous rather than analogous.

Fourth, Paul’s reference to “the tongues … of angels” (1 Corinthians 13:1) may indicate that he and/or the Corinthians believed that tongues-speech could be angelic, rather than human, in nature. The Testament of Job, a roughly contemporaneous Jewish document, similarly refers to humans speaking angelic languages through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This indicates that the notion of angelic languages was not unknown in Paul’s time.[58]

If these lines of reasoning are correct, then the fact that the majority of contemporary tongues-speech is not a human language does not count against its biblical authenticity.

One more point: MacArthur derides the use of a “private ‘prayer language’ ” as a form of “self-gratification.”[59] Given that tongues-speech is a gift of the Spirit, it would be more accurate to say that the Spirit is edifying the individual who speaks an uninterpreted tongue, rather than that the individual is edifying him- or herself. Granting that interpreted tongues-speech is more beneficial to the congregation as a whole, the question remains why individual edification is wrong. If it is right to edify others, how can it be wrong to be edified oneself?

MacArthur would answer that “Paul would never extol prayers that bypass the mind.”[60] But that is arguable. Paul states that uninterpreted tongues-speech “edifies” the speaker (1 Corinthians 14:4). Further, he states, “my spirit prays, but my mind is unfruitful” (14:14). Taken together, this seems to imply that Paul recognizes such a thing as a spiritual but nonrational form of edification.

MacArthur also cites Paul’s instruction that public tongues-speakers ask God to be able to interpret their tongues-speech (1 Corinthians 14:13,14).[61] But this is a rule for public tongues-speech. MacArthur wrongly applies this rule to private tongues-speech without noting Paul’s explicit, public-oriented reasoning. In 1 Corinthians 14, Paul gives no rule whatsoever about private tongues-speech.

 

Healing

In chapter 8, “Fake Healings and False Hopes,” MacArthur argues: “Faith healers like [Benny] Hinn claim to be able to replicate the healings of the apostolic age. In reality, their shenanigans have none of the characteristics of the actual New Testament gift of healing.”[62] While conceding that “the Lord still answers prayer and works in providential ways to heal people according to His will,” he nonetheless concludes, “there is no evidence that miraculous healings are occurring today as they did during the apostolic age.”[63] More bluntly: “The apostolic gift of healing has ceased.”[64]

Several points are in order by way of response. First, Pentecostal and charismatic readers can agree with elements of MacArthur’s critique of Hinn without thinking that Hinn’s ministry is characteristic of the broader Charismatic Movement. Once again, the problem of the representativeness of MacArthur’s argument rears its head.

Second, obviously, we agree with MacArthur that the Lord still heals people according to His will. The difference between us, I would venture, is that we believe this happens more often than does MacArthur.

Third, the statement that “the apostolic gift of healing has ceased” is ambiguous. If by that phrase MacArthur means the apostles’ gift of healing, then he may be correct, especially if the apostolic office — as opposed to apostolic function — has ceased. But Paul does not list the apostles’ gift of healing in his list of spiritual gifts. He talks more broadly about “gifts of healing,” where the focus moves from the one performing the healing to the one receiving the healing. In that sense, apostolic gifts of healing — i.e., the gifts of which the apostle Paul spoke — have not ceased at all.

 

Conclusion

In this review, I have made — and I hope sufficiently documented — three claims:

1. Pentecostal and charismatic readers of Strange Fire will agree with John MacArthur on numerous points of doctrine and several critiques of the Charismatic Movement.

2. MacArthur’s description of the Charismatic Movement suffers from selection bias, resulting in a portrait of the movement that is unrepresentative of the whole. A representative portrait shows that charismatics are orthodox, moral, pious, evangelistically intense, and socially engaged.

3. MacArthur’s critique of the contemporary spiritual gifts of apostleship, prophecy, tongues, and healing contains some valid points. But the figures he cites as representative of charismatic opinion are not. His definition of continuationism does not track with how many charismatics understand their own continuationist hermeneutic, and his biblical criteria for the gifts are not as definitive as he seems to think they are.

That being the case, I think a revision of MacArthur’s indictment of the Charismatic Movement, which I quoted at the outset of this essay, is warranted:

Charismatics now number more than half a billion worldwide. The gospel that is driving those surging numbers is the good news that Jesus Christ is the world’s Savior, Healer, Baptizer in the Holy Spirit, and soon-coming King. What we are seeing is in reality the explosive growth of a church that self-consciously patterns itself along New Testament lines, as vibrant as — if not more so than — any revival in the history of Christianity. The Charismatic Movement was an outpouring of the Spirit of Jesus Christ from the outset; it has not changed into something bad since.

This alternate description of the Charismatic Movement doesn’t mean that it is perfect or beyond criticism. Even the Church in the apostolic era had plenty of bad actors, theological errors, and moral failures. But it does mean that, on the whole, the Charismatic Movement is of God.

Rather than cutting down the Charismatic Movement, root and branch, John MacArthur should have written Strange Fire to help charismatic Christians prune the errant and spiritually unfruitful branches from their otherwise orthodox and moral root. Instead, he confused branch with root and consigned both to the flames.

“Love for the truth, without any lack of personal charity, is what motivates me to write a book like this,” MacArthur writes.[65]

What a strange “truth” that falsely describes Pentecostals and charismatics! What a strange “love” that fails to see one’s brothers and sisters in the faith as coworkers in gospel ministry!

P.S. If you found my review helpful, please vote “Yes” on my Amazon.com review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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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notes :

[1] Assemblies of God, “Statistics of the Assemblies of God (USA).” Accessed online at http://agchurches.org/Sitefiles/Default/RSS/AG.org TOP/AG Statistical Reports/2012/Online Stats 2012.pdf.

[2] I am using the terms charismatic and Charismatic Movement in this review as John MacArthur does, to refer to “the entirety of the classical Pentecostal, Charismatic Renewal, and Third Wave Movements”; John MacArthur, Strange Fire: The Danger of Offending the Holy Spirit with Counterfeit Worship (Nashville, TN: Nelson Books, 2013), 263n2.

[3] Ibid, xvii.

[4] Ibid, 81–82, passim. On pages 231–232, MacArthur sharply distinguishes between the Charismatic Movement and “reformed charismatics” or “evangelical continuationists.” The former is “teeming with false teachers and spiritual charlatans of the worst kind,” while the latter consist of “Christian leaders who have proven their commitment to Christ and His Word over the years.” He says he wrote chapter 12, “An Open Letter to My Continuationist Friends,” to warn them about charismatics, believing that “the continuationist position exposes the evangelical church to continuous danger from the charismatic mutation.” Given that MacArthur lumps classical Pentecostalism, the Charismatic Renewal Movement, and the Third Wave Movement together under the rubric of “Charismatic Movement” (263n2), the logical conclusion is that MacArthur does not consider charismatics to be his “brothers in Christ and friends in the ministry” (231). As a classical Pentecostal and Assemblies of God minister, I find this conclusion unsettling. The Assemblies of God is a founding member of th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and other classical Pentecostal denominations are also members in good standing. MacArthur’s remarks thus seem to betray sectarian tendencies. If, on the other hand, he believes that classical Pentecostals are Christian siblings and ministry partners, he should state that clearly and upfront, rather than making an ambiguous statement in the book’s final chapter.

[5] The major methodological problem with Strange Fire is that it paints an unrepresentative portrait of the Charismatic Movement. Other problems include ad hominem arguments, tendentious use of sources, the fallacy of composition (attributing errors of this or that charismatic to charismatics generally), and a reductionist historiography of the Charismatic Movement. Regarding the last point: MacArthur traces the entire history of the Charismatic Movement to Charles Parham. By discrediting him, MacArthur thinks he has discredited it: “The ‘new Pentecost’ of the Charismatic Movement could not have been more different [than the original Pentecost]. It grew out of the deficient soteriology of the Holiness Movement; it was marked by inconsistent eyewitness testimony; it produced counterfeit religious experience; and it was initiated by a disreputable spiritual leader. Such factors call its legitimacy into serious question” (28). MacArthur seems unaware that there are Pentecostal denominations, such as the Church of God, that trace their origins to events preceding Parham. Moreover, he ignores Allan Anderson’s warning about ignoring the multiple, multinational, and multicultural origins of Pentecostalism, outlined in An Introduction to Pentecostalism: Global Charismatic Christianit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166–183. Given that MacArthur cites Anderson’s book several times (41, 266n17, 267n32, 268n46, 269n51, 271n63, 276n60, 283n41, 284n57, 285n63), his refusal to heed Anderson’s warning is inexcusable.

[6] Consider these bombastic statements from the Introduction of Strange Fire: “To claim He is the one who empowers self-willed, whimsical, and unbiblical worship is to treat God with contempt. That’s why the many irreverent antics and twisted doctrines brought into the church by the contemporary Charismatic Movement are equal to (or even worse than) the strange fire of Nadab and Abihu. They are an affront to the Holy Spirit, and therefore to God Himself—grounds for severe judgment (cf. Heb. 10:31)” (xi). “The ‘Holy Spirit’ found in the vast majority of charismatic teaching and practice bears no resemblance to the true Spirit of God as revealed in Scripture” (xii). “By inventing a Holy Spirit of idolatrous imaginations, the modern Charismatic Movement offers strange fire that has done incalculable harm to the body of Christ” (xiii). “In Jesus’ day, the religious leaders of Israel blasphemously attributed the work of the Spirit to Satan (Matt. 12:24). The modern Charismatic Movement does the inverse, attributing the work of the devil to the Holy Spirit” (xiii). “They have become like the Israelites of Exodus 32” (xiv), that is, idol worshipers. “In spite of their gross theological error, charismatics demand acceptance within mainstream evangelicalism” (xiv). “The results of that charismatic takeover [of evangelicalism] have been devastating. In recent history, no other movement has done more to damage the cause of the gospel, to distort the truth, and to smother the articulation of sound doctrine. Charismatic theology has turned the evangelical church into a cesspool of error and a breeding ground for false teachers” (xv). “Like a deadly virus, it [i.e., charismatic theology] gains access into the church by maintaining a superficial connection to certain characteristics of biblical Christianity, but in the end it always corrupts and distorts sound teaching. The resulting degradation, like a doctrinal version of Frankenstein’s monster, is a hideous hybrid of heresy, ecstasy, and blasphemy awkwardly dressed in the tattered remnants of evangelical language. It calls itself ‘Christian,’ but in reality it is a sham—a counterfeit form of spirituality that continually morphs as it spirals erratically from one error to the next” (xvi).

[7] For a good example of how cessationists, Pentecostals, and charismatics can debate one another without calling into question the other’s Christianity, see Richard B. Gaffin, Robert L. Saucy, C. Samuel Storms, and Douglas A. Oss, Are Miraculous Gifts for Today: Four Views, ed. Wayne A. Grudem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6).

[8] MacArthur, Strange Fire, 39; cf. Jonathan Edwards, “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 in Jonathan Edwards on Revival (Carlisle, PA: Banner of Truth, 1965), 75–147.

[9] Downplayed, not denied. While a classical Pentecostal would emphasize the empowerment of the believer by the Holy Spirit, MacArthur emphasizes that—in the words of a subtitle in the chapter on Scripture—“The Spirit Empowers the Scriptures,” Strange Fire, 226–228. The shift in emphasis from the empowerment of a person to the empowerment of the Bible seems to me to betray MacArthur’s wariness toward extrabiblical revelation.

[10] Ibid, xvii.

[11] Ibid, xvii.

[12] Ibid, 60. One of MacArthur’s sources is a Wikipedia article, “List of Scandals Involving American Evangelical Christians” (6, cf. 264n4). MacArthur concedes: “A Wikipedia entry may not be authoritative in its use of doctrinal labels, but it serves as an accurate barometer of public perception” (6). He fails to ask whether the “public perception” is itself accurate, which renders his use of Wikipedia moot.

[13] Ibid, 65.

[14] National Cancer Institute, NCI Dictionary of Cancer Terms, s.v. “selection bias.” Accessed online at http://www.cancer.gov/dictionary?CdrID=44087.

[15] Gary B. McGee, People of the Spirit: The Assemblies of God (Springfield, MO: Gospel Publishing House, 2004).

[16] The Pew Forum on Religion and Public Life, Spirit and Power: A 10-Country Survey of Pentecostals (Washington DC: The Pew Forum on Religion and Public Life, 2006). Accessed online at http://www.pewforum.org/2006/10/05/spirit-and-power/.

[17] MacArthur, Strange Fire, 14, 52, 58–59, 268n44, 285n62. The additional studies cited are John L. Allen, The Future Church: How Ten Trends Are Revolutionizing the Catholic Church (New York: Doubleday, 2009), 382–383. and Paul Alexander, Signs and Wonders: Why Pentecostalism Is the World’s Fastest Growing Faith (San Francisco: Jossey-Bass, 2009), pp. 63–64.

[18] Pew Forum, Spirit and Power, 6.

[19] Ibid, 6.

[20] Ibid, 8.

[21] Ibid, 20.

[22] Ibid, 29.

[23] Ibid, 29.

[24] Ibid, 29

[25] Ibid, 31.

[26] MacArthur, Strange Fire, 13.

[27] Ibid, 14.

[28] See General Presbytery of the Assemblies of God, The Believer and Positive Confession (August 19, 1980). Accessed online at http://ag.org/top/Beliefs/Position_Papers/pp_downloads/pp_4183_confession.pdf.

[29] Pew Forum, Spirit and Power, 30.

[30] Paul Alexander, Signs and Wonders: Why Pentecostalism Is the World’s Fastest Growing Faith (San Francisco: Jossey-Bass, 2009).

[31] Ibid, 66.

[32] Pew Forum, Spirit and Power, 30,31.

[33] MacArthur, Strange Fire, 96.

[34] Ibid, 91.

[35] Ibid, 92.

[36] Ibid, 92.

[37] Ibid, 93–94.

[38] Ibid, 94–96.

[39] Ibid, 96.

[40] Ibid, 103.

[41] General Presbytery of the Assemblies of God, Apostles and Prophets (August 6, 2001). Accessed online at http://ag.org/top/Beliefs/Position_Papers/pp_downloads/pp_4195_apostles_prophets.pdf.

[42] Assemblies of God, Apostles and Prophets, 10.

[43] MacArthur, Strange Fire, 90.

[44] E.g., “Pentecostal churches believe they are apostolic because (1) they teach what the apostles taught, and (2) they share in the power of the apostles through the baptism in and fullness of the Holy Spirit, who empowers their lives and ministries. They believe what matters is not a contemporary apostolic office but apostolic doctrine and power.” Assemblies of God, Apostles and Prophets, 1–2.

[45] E.g., MacArthur, Strange Fire, 94,99.

[46] E.g., “The function of apostle occurs whenever the church of Jesus Christ is being established among theunevangelized”; also, “Thus, within the Assemblies of God, persons are not recognized by the title of apostle or prophet. However,many within the church exercise the ministry function of apostles and prophets. Apostolic functions usuallyoccur within the context of breaking new ground in unevangelized areas or among unreached people.” Assemblies of God, Apostles and Prophets, 10,11.

[47] MacArthur, Strange Fire, 106–108, passim. Emphasis in original.

[48] Ibid.

[49] Ibid, 109.

[50] Ibid, 109–113.

[51] Ibid, 113.

[52] Ibid, 113–114.

[53] Ibid, 116.

[54] “Today, nonlinguistic, irrational gibberish remains the de facto explanation for charismatic babble”; and “the glossolalia practiced by today’s charismatics is a counterfeit that by every measure falls short of the gift of tongues described in the New Testament.” Ibid, 136,137

[55] Jordan Daniel May, Witness to Pentecost: The Testimony of ‘Other Tongues’ (Cleveland, TN: Cherohala Press, 2013). For other examples, see Del Tarr, The Foolishness of God: A Linguist Looks at the Mystery of Tongues (Springfield, MO: The Access Group, 2010), 401–403; and Craig S. Keener, Acts: An Exegetical Commentary, Vol. 1, Introduction and 1:1–2:47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12), 829nn419–420.

[56] MacArthur, Strange Fire, 138.

[57] Gordon D.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7), 598.

[58] So Fee, First Corinthians, 630, building on R. P. Spittler, “Testament of Job: A New Translation and Introduction,” in James H. Charlesworth, ed., The Old Testament Pseudepigrapha, Volume 1, Apolcalyptic Literature and Testaments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1983), 835, 865–866.

[59] MacArthur, Strange Fire, 154.

[60] Ibid, 150.

[61] Ibid, 150.

[62] Ibid, 162.

[63] Ibid, 176.

[64] Ibid, 176.

[65] Ibid, 232.

Tags: Apostleship, Assemblies of God response, Healing, John MacArthur, Prophecy, prosperity gospel, Strange Fire, tong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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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5 기도문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임을 우리가 믿사옵니다. 

우리들에게 이것을 알게하신 이는 성령님이시오니 주께 모든 존귀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보혜사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들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며 주께서 허락하신바 기름 부음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시며 아무도 우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성령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심을 우리가 믿습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주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우리가 믿사옵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붉은 무리들을 주의 백성들의 손에 붙혀 주시옵소서.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이 시대의 지도자가 하나님의 지혜로 전쟁을 하게 하옵소서. 환난의 때와 교전과 전쟁을 위하여 이것을 남겨 두었노라 하시는 주님이시여 트럼프 대통령에게 지략을 베푸시옵소서. 

주는 영광의 왕이시요 전쟁에 강하고 능하신 하나님이시오니 전운이 감돌고 있는 한반도에서 주의 백성들을 들어 사용하시며 악한 자들의 궤계가 파해지게 하시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드러나는 전쟁이 되게 하옵소서.

저희들에게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되는 소망을 주시며.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주시며 감추었던 만나를 허락하시며 받은 자만이 알 수 있는 흰돌을 받게 될 벅찬 소망을 허락하심을 감사 드립니다 

새 하늘 새 예루살렘에서 주의 새 이름을 주시며 힌옷을 입고 주와 함께 다니게 하시며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흐려지지 않게 하시며 아버지 앞에서 우리들을 시인하시며 주와 함께 영생복락을 누릴 소망을 허락하시니 주께 모든 감사와 존귀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존귀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대니엘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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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톡방장 최창건 회장에게 개인적으로 전송한 내용을 share합니다

1. 밑쪽의 글은  "주권국가 대한민국(Sovereign Korea Corp.) 임시정부 법률대리인, 국제변호인포럼 대표변호사 올림"이라는 정체불명의 사람이 https://youtu.be/VNEY61qdqMk에 올린 영상에서 록취한 내용 중 일부입니다.

다음은 애국보수측에서 언뜻 받아 들일 수 없는 걸리는 내용입니다.
"그 활동은 그러나, 비 폭력적(Non-violent), 비 정파적(Non-partisan) 행위에 국한 됩니다. 법 앞에 허용할 수 없는 어떤 불법, 부당한 행위도, 그것이 누구의 것이든지,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자가 과연 누구이기에 비폭력을 앞세우며,  "그것이 누구의 것이든지, 용납"되니 안되니 공갈협박을 한답니까? 저들의 괘계를 알아 차려야 합니다.

2. 최창건 회장님도 아시다시피 KIC톡방은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포들을 장악하여, O한O통이라는 허울좋은 운동?을 내세우며, 애국세력들을 묶어놓아 무력하게 하고자 하는 저들의 계략에 이용 당하는 종북 무리들의 모임임이 자명 합니다.

3. 지난번에도 글을 드렸듯이 "미주 애국보수톡방"에서도 자한당 소속인듯한 자의 비 폭력적 행위를 독려하는 톡글이 있었습니다.

4. 한국의 애국 단체들이 운영하는 유튜부 영상에서 [비 폭력 운동]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나라가 절대절명의 위기에 있는데 무스기 거룩한 법적 도덕적 윤리적 비폭력주의 운동이랍니까?
이번 3.1절 애국태극기 단체의 움직임에서도 보이듯이 한풀이도 아니고, 거사도 아니고, 그야말로 죽도밥도 아닌 결과만 나았습니다. 우익보수의 손발이 다 묶여 있습니다? 피흘림이 없는 거사는 종북정부의 확실한 쒜기박기에 흥을 돋아 주는 놀이밖에 안됩니다. 이대로 좌익 쇄기가 단단히 박히도록 무력하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백성이라면 적화통일로 몇천만명이 한꺼번에 몰살을 당해도 싸다 하겠습니다.

우익보수측에서 아무 피흘림도 없이 북폭만을 애걸복걸하는 모습을 트럼프 대통령은 어찌 보겠는지요? 할 수없는 족속이다며 주한미군 철수를 결정하는데 오히려 도움만 주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입니다.

- - - - - - - - - - - - -

유튜브 녹취내용 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임시정부는 주권국가인 대한민국의 존속과 번영을 위해 해외에 거주하시는 애국 열사들을 새 정부의 구성원으로 모시고, 다른 여러 나라들이 미국 내에 다양한 형태로 임시정부를 추진한 선례를 바탕으로 하여, 미국 내에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합법적이고 정통성 있는 구국 활동을 수행할 것입니다.
그 활동은 그러나, 비 폭력적(Non-violent), 비 정파적(Non-partisan) 행위에 국한 됩니다. 법 앞에 허용할 수 없는 어떤 불법, 부당한 행위도, 그것이 누구의 것이든지,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따끈따끈한 글입니다^^

정은이가 핵포기하면 적화통일 입니다
정은이가 계속 핵공갈이면 북한체제 괴멸 대한민국 해방입니다

저들의 평화통일 현혹에 속지 맙시다^^

문죄인이여! 마지막 죽음의 생일잔치 거창하게 축하 하시라!^^

주사파는 천민 사회주의, 천민 공산주의 사상이다^^

아무리 같은 민족이라 하더라도, 자유 민주주의의 이념과 공산주의 이념은 공존할 수 없고, 서로 죽이고 죽여 상대방을 죽여 제거하고 힘으로 제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내 나라,  내 가족, 내 자신이 살고자 하면 주사파를 척살하라.

이념에는 동족, 그런 거 없습니다. 같은 가족이라도 이념이 다르면 적입니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하는 전쟁 중 입니다

저들은 대한민국에 당당하게 선전포고를 하며 대통령을 포로로 잡아 미완의 전쟁을 마무리 지으려 하고 있습니다. 겁쟁이 정치인들이여! 그대들이 나라를 살리겠느냐? 그대들은 이래나 저래나 양쪽으로 죽게 되어 있소이다?

반벙어리가 억울합니까? 차라리 반신불수가 되었더라면 저들이 살려둘지도 모릅니다?


 
지인이 나에게 질문 합니다:
왜 어찌하여 빨갱이에 그토록 극단적으로 반응하느냐?

대답합니다:
나의 친부가 1.4후퇴 때에 부역에 연루되어 경찰서에 끌려가 소식도 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나는 출생 3개월만에 아비없는 자식이 되었습니다.

나는 태생적으로 종북 빨갱이야만 하는 천민 소작인의 자식었습니다.

제가 장성하여 하나님을 알게되며 공산주의 사상과 주체사상이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유물론 사상, 인본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악한사상임을 알게 됩니다. 설마하는 우익으로부터 극단우익분자로 매도 당함을 기뻐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한분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으며 그 분만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유일하신 분으로 믿고 신앙으로 고백하는 기독교 장로 입니다

반 종북주의는 나의 신앙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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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Spirituality, Spiritual Formation)이란 무엇인가?

영성: 신령스러운 품성이나 성질, 또는 정신적 경향, ‘영혼의 품질’, ‘영혼의 성향’ 혹은 ‘영적 센스’라고도 한다.

영성이라는 단어에 속한 “영”이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로 퓨뉴마( Pneuma)이다, 그 의미는 창1-2장에 나타나는 "숨 • 호흡"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생기 즉 호흡을 받고 생령이 된 인간은 호흡이 끊어지면 육신은 썩어 흙으로 돌아가고 하나님께로 온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생기, 호흡, 생령”이라는 단어는 모두 “영”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중국 여행사 Guide인 어느 조선족 자매의 간증입니다. 남한에서 여행 온 목사라고 하는 group을 안내하는데 그들로 부터는 무시 당하거나 불손한 일이 전혀 없이 예절이 바르고 다른 남한에서 온 여행객들과는 다르더랍니다. 아!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은 틀리구나. 그렇게 느끼고 있던 중에 우리 교회의 선교팀을 만나게 되고 기독교 인에 대하여 자세히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만나서 참으로 기쁘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이 같고 있는 영성으로 공산당원의 마음을 녹이는 힘, 바로 우리가 같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성 입니다. 

90년대초 부터 인터넷이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영성이란 단어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2000년도에 [생명의 삶과 소금과 빛]이라는 온누리 교회에서 발간하는 신앙잡지에 영성이란 무엇인가? 로 소개되면서 기독교계에 영성이란 단어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으로 압니다.

신령스러운 품성이나 성질, 성향 또는 정신적 경향을 의미하는 단어로 한마디로 이것이다. 신앙인들이 한마디로 딱 짤라 말할 수 없는 단어가 영성이란 단어이다.  영성이란 단어와 함께 신령이라는 단어를 제시합니다. 신령이란? “하나님께 속한 모든 영적인 것” 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것이 구원받은 성도를 통해서 표면으로 나타날 때에 성도의 믿음과 영적인 성품에 따라, 또는 어떠한 교리의 가르침을 받느냐에 따라서, 각각 다른 영성으로 나타날 수 있다. 칼빈이냐 장로교회냐 성결교 감리교이냐 오순절이냐 하나님의 성회이냐에 따라 영성의 차이가 천차만별로 나타날 수가 있다. 같은 오순절 성령을 받은 한 몸에 붙어있는 한 영성임에도 기존세대들 하고 청년세대의 영성이 또 다릅니다. 또한 영성을 다른 말로 믿음의 색깔(Taste)로도 표현합니다. 믿음의 열심으로는 따라올 자들이 없는 은사가 넘치고 성령충만한 오순절파의 영성에도 각자에게 있는 개성에 따라 믿음의 색깔이 조금씩 다른 모습 입니다.

(살전5: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온 영과 혼과 몸의 상태가 주 앞에서 어떠하느냐에 따라 영성이 다르게 나타난다 볼 수가 있다.

성경적인 영성(靈性, spiritual formation)이란? 무엇인지를 바르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과학 문명과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 같지만 사람은 원래부터 영적인 존재이므로 영적인 목마름과 갈망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영을 넣어 주셨기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인다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1:19)”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성경적인 영성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도록 본래에 넣어주신 영의 성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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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보장 

하나님의 성회는 신자의 보장에 관하여 하나님의 성회 조례에 선언하였다(제 8조 1항)

신자의 보장은 그리스도와의 생생한 관계에 좌우한다는 성서적인 가르침의 견지에서(요15:6),
거룩한 삶으로의 성경의 부르심의 견지에서(히12:14, 벧전1:6),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책임이 사람에게 일부 있다고 하는 분명한 가르침의 견지에서(계22:19),
잠시 믿던 사람이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의 견지에서(눅8:13),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한번 구원받은 사람이 그 구원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고 하는 무조건적인 보장의 입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왜 이러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지 더욱 설명하고자 한다.

신자의 보장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의 극단적인 입장의 중간에 서있다. 우리는 양쪽의 가르침에서 성서적인 요소를 받아들인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특권을 올바르게강조하는 반면 알미니안주의자는 사람의 자유의지와 책임 또한 올바르게 강조한다. 그러나 이 두 입장을 적절하게 이해하려면 그것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임의에 의해서 때묻지 않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특권을 믿으며 또한 사람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믿는다.

하나님의 성회에 의해서 취해진 신자의 보장에 관한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4가지가 강조되어야 한다.

1.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요3:16, 롬10:11-13, 벧후3:9)
2. 구원은 믿음으로 받으며 유지된다.(롬3:28, 갈2:20-21, 엡2:8, 빌3:9, 히10:38, 벧전1:5)
3. 계속적인 죄는 신자의 믿음에 해롭게 영향을 준다. (롬3:5-8, 고전3:1-3, 히3:12-14, 12:1, 요일1:8, 3:8)
4. 신자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면 상실된다.(요17:12, 딤전4:1, 5:12,15, 히6:4-6, 10:26,27,38, 벧후2:20, 요일5:16)

1.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구원 받기로 예정되었으며, 또 다른 사람은 멸망 받도록 예정되었는가?” 그리고 “누가 택함을 받은 자인가?” 이 두가지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복음의 메시지가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을 향하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명확해진다. 신약성경을 읽는 사람은 이 위대한 진리를 놓칠 수 없다.

그러나 로마서 9-11장에서 신자의 구원에 있어서 사람의 자유의지가 배제되며 택함을 받은 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떠나서 완전히 그의 주권으로 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 있다. 예를 들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내가 긍휼히 여길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9:11,13,15,16,18)

그러나 이 구절을 선택에 관하여 가르치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볼때 사람의 의지가 선택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야곱은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선택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이 무엇을 할 것인지
하나님이 미리 알고 계시다는 것에 근거한다. 이 진리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쓴 베드로의 편지에 나타나있다. 이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었다.(벧전1:1,2)

이 진리를 또한 롬8:29에도 나타나 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기록했다. 하나님은 미리 자비를 보일 조건을 정하셨다. 그리고 그의 미리 아시는 지식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를 선택하신다.(엡1:4). 이와같이 하나님은 그의 주권 안에서 구원의 계획을 제공하셨으며 이에 따라서 모든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있다. 이 계획안에서 사람의 의지가 고려된다. 구원은 누구든지 원하는 자에게 열려 있다.

2.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 받으며 유지된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명백히 말씀한다.(엡2:8)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한다. (합10:38, 롬1:17, 갈3:11, 히2:4) 신자의 구원은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아 받
아들여짐과 같이 신자의 구원은 의로운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의 생활로 인하여 유지된다.
크리스찬이 되는 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 이것은 강조되어야 한다. 죄인이 자기가 행한 어떤 선한 일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경우는 없다. 그는 전적으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는다.

믿음으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대신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믿음으로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 앞에 맡기며, 그리스도를 본다. 자신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을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을 깨닫는다.(빌3:9) 그는 믿음을 통해서 자신이 받아들여진 것을 알고, 이러한 지식은 그에게 기쁨과 평안을 준다. 그러나 신자의 상태는 그의 신분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믿음 때문에 안전하게 서있다.
그의 신분은 그가 믿음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그는 의로운 위치에 서 있으며 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었다.

신자의 상태 혹은 신자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로 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성령과 협력하여 순종함으로써 얻어지는 점진적인 성화인 영적 성장과 관계가 있다.(롬6:12,13, 8:13, 골3:1-5, 벧후1:5-7) 성숙해 가는 과정 속에서 신자는 그의 승리 뿐만 아니라 실수를 통해서도 배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보장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견고할 동안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으로 지키심을 받기 때문이다.

그의 영적 성장은 그의 안에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께 대한 순종과 주의에 따라 달라진다. 완전을 향하여 성장하는 동안에 그는 여전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완전한 자로 간주된다. 자신을 적응시키는 과정 속에서도 그는 안전하며 그의 구원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신자의 보장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나 구원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 보증된다. 이 보장은 신자가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을 유지하는 한, 타락할 수도 있고 결점도 있는 신자에게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3. 계속되는 죄는 신자의 믿음에 악영향을 준다.

성경은 신자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를 지으며, 그가 죄를 지었을 때 그가 의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요일1:8,9, 2:1) 이와는 달리 크리스찬이 죄악의 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즉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그는 습관적으로 죄를 범할 수가 없다. (요일3;8,9 여기서 헬라어 시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죄를 짓는 것은 마귀의 일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누구든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며 습관적으로 죄 짓기를 계속하지 아니한다. 그는 마귀의 자녀가 하는 식으로 죄짓는 것을 계속할 수 없다. 그 대신에 크리스찬은 계속적인 자기의 믿음에 악영향을 주는 것을 인정하고, 죄를 내려놓고 영적으로 자라야 한다.

이것은 크리스찬이 죄를 범할 수 있고 여전히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많은 사람의 첫 번째 반응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염려, 교만, 시기, 쓴뿌리 등은 공통적으로 범하는 과오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죄를 범하는 신자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욱이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죄 없는 완전을 요구하신다고 주장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신분이 그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면 믿음에 의해서 그에게 씌워진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것인가? 만일에 사람이 흠 없는 생활을 유지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얻은 것이 된다!
그리고 또한 사람이 흠 없어야만 하나님이 받으신다면 크리스찬의 삶은 바울이 롬8:1에서 주장한 것처럼 정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계속적으로 철저한 자기 분석과 참회를 행하며, 두려움과 정죄로 가득 차 있으며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확신과 기쁨이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롬5:9-11을 보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비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우리는 위하여 영광에 이르는 모든 길을 제공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 이러한 확신은 그 안에서 우리로 기뻐하게 한다.)

관련된 질문으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순간에 죄를 범한 신자에게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할 수 없으며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신자는 구원을 잃게 될 것이며 영원한 파멸에 이를 것이라고 가르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낙심되는 일인가!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안과 밖을 들락날락하면서 회전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안전하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그러나 크리스찬이 범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강조되어 말해져야 한다. 옛날의 죄를 계속해서 범할 수는 없다.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신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며, 그에게는 이전 것은 지나갔으며 새것이 되었다.(고후5:17)

이와같이 이제 죄를 범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전의 삶은 과거의 것이며, 안에 잠재된 힘이며 다스려져야 하며, 새로운 신분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롬6:11) 이전의 삶은 과거의 것이며, 안에 잠재된 힘이며 다스려져야 하며, 새로운 신분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롬6:11) 이전의 습관과 행실이었던 것은 이제 부자연스러우며 우리의 새로운 마음에 반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죄짓기를 계속하지 아니한다)”고 사도 요한은 말했다. 즉, 죄는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낯선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된 새로운 피조물은 죄를 짓지 아니한다. 그러나 옛것이 잠시 우발적으로 우세하게 될 때 새 피조물은 이 부자연스러운 침입에 대항하여 싸우게 되는데 즉시 의지할 것은 그리스도이시다.

죄를 범한 신자가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면 그는 자신의 영혼이 멸망하게 되었다는 실망을 안고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미쁘시고,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보혜사를 모시고 있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확신을 가지고 돌아온다. 이와같이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특권을 사용하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자신의 신분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신자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강조하는 것도 필연적이다. 신자는 자유의지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계속해서 자유의지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 믿음을 계속 유지 하는 것은 신자의 책임이다.

또한 신자는 죄에 대하여 가벼운 자세를 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가로 사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롬6:1)하며 바울은 묻는다. 그 대답은 단호하게 부정적이다. 바울은 지속적인 죄가 신자의 믿음에 악한 영향을 준다는 것과 믿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알았으며 또한 가르쳤다.

지속적인 죄는 주제넘게 하며, 고자세가 되게 하며 또한 반역의 증거이다.(민15:30,31) 번역은 의지나 믿음의 순종에 반대되는 것이다. 신자는 반드시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히12:15) 항상 주의해야 한다. 성경의 권면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고후13:5)는 것이다.
왜 이러한 경고와 우려를 하고 있는가? 이렇게 반복되는 경고들은 믿음을 잃게 되면 영원한 영혼의 파멸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신자의 구원은 그의 의로운 행동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그의 의로운 행동으로 유지되는 것도 아닌 것이 사실인 반면 신자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처럼 또한 믿지 않음으로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것도 똑같이 사실이다.
죄와 불신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죄는 믿음을 위태롭게 하며, 믿음을 잃는 것은 자신의 신분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히3:12-14 은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형제들에게 불신에 대하여 경고하였는데 이 불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는 불신의 원인으로서 죄의 유혹을 언급하였으며,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만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할 자가 될 것이라고 상기시켰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믿음에 의해서이다. 믿음을 제거하면 거기에는 더 이상 서 있을 곳이 없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신자들에게 “삼가 혹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지 않도록”(히3:12) 훈계하는 이유이다.

4. 구원은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상실될 수 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쉽게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롬10:21을 보라. 여기서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나 적용할 수 있는 원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신자가 성령의 계속적인 점검을 무시하고 예수를 그의 구세주로 모시기를 거부하는 곳에까지 이르면 그는 구원을 상실하게 된다.

잠시동안 믿다가 유혹이 올 때 배반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눅8:13)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약한 형제가 실족하는 것은 가능하다. (고전8:11) 생명책에 기록되었던 이름이 그 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것은 가능하다.(계22:19)
한 사람이 그의 구세주이신 예수를 이미 배반하였는지 판단하는 것은 항상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에 관한 판단은 전지하신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사실은 확실할 수 있다. 즉 만일 하나님이 탕자를 돌아오게 하시는 그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직도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아니하셨는데도 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그 사람을 삭제해 버린다.

성경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성령의 탄식에 응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소망을 끊임없이 제의하고 있다. 예수의 초청은 자격을 따지지 않는다.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실 때 이것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다.

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10:13)고 성경이 말씀하실 때도 모든 사람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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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4장은 성령장이다.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이러한 일이 일어 나리라 하나님은 말씀으로 먼저 약속 하셨고 먼저 주신 이 말씀을 붙잡고 믿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이 실현되도록 하신다. 요한복음의 말씀을 붙잡고 이해해야만 행2장의 역사가 일어나며 왜 그러한 일을 하시는지 알게 된다. 

요14장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어라. 내가 떠나감은 너희에게 성령을 보내기 위하여 내가 가노라. 내가 성령을 보내줄 것을 너희는 믿으라. 성령을 오실 것을 약속 하셨다. 우리들은 성령이 오신 것을 알고 또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성령을 받은 나와 성령을 통하여 오신 예수님과 하나되어 연합 된다. 연합된다는 것은 마음이 하나되고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주님과 하나되는 일치가 이루어진다.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 멀리 계신 것 같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계시는 것이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므로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됨이 14장의 말씀이시다

그 다음에 15장에 포도나무의 비유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나를 떠나면 결국은 그 가지는 말라 비틀러지고 아무짝에 쓸모가 없어지게 되며 결국에는 잘리어 불에 던져 지게 된다. 
예수를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보장하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시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실 때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이다 15장의 내용이다. 

14장의 말씀을 15장에 풀어 주시는 것이다. 14장과 15장을 이해하고 말씀이 풀려야 행2장의 말씀이 이해가 된다. 그러므로 신약의 진정한 성령장은 요14장이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구하라(요15:7, 요14:14, 요1서3:22, 마21:22)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찿을 때니라(호10:12)
그때의 말씀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이나 구하라 그러나 계명을 지켜라. 나를 사랑하는 자는 계명이 쉬우니라. 나를 사랑하는 자는 목숨을 내어놓고 라도 지키게 되느니라. 나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말씀이 그 안에 성령이 그 안에 있으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시리라.

조건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성령이 거하신다. 그러한 사람들이 성령님께 구해야 할 것은 거룩이다. 요15:2~ 3 거룩을 구하는 것이 먼저이다. 거룩과 풍성한 가지는 뗄래야 뗄 수가 없는 관계이다. 거룩해야 가지를 맺으며 거룩하고 더욱 풍성한 가지를 맺게 하기 위하여 더욱 깨끗게 하신다
이 비밀이 풀릴 때, 이때부터 신앙생활이 풀리게 된다. 거룩을 먼저 구하는 자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게 하신다. 내가 우리가 거룩하게 되면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 과실을 맺는 일이다

과실을 맺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더 깊은 거룩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거룩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거룩에도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사람 이미 충분히 거룩한 사람 이사야의 입술을 제단 숯불로 지저서 그를 더욱 참 깊은 거룩으로 인도하십니다. (사6장) 이렇게 맺은 풍성함 열매가 주님께 기쁨이 된다. 이러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돌아가심이 놀랍고 귀한 일임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을 때에 우리가 십자가의 사건을 validated 으로 확인하며 유효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온 인류를 향한 복이었다. 이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하는 것을 세상에 알게 하는 사건이 된다. 어떻게 할 때, 저와 우리의 성도의 삶에서 거룩한 열매들이 풍성하게 맺어질 때에, 내가 구한 것 보다 더욱 풍성하게 열매를 맺게 되며 이렇게 풍성한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되는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것을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이 때에 세상에 선포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에 맡는 이들을 편애하시며 이러한 자들에게 복에 복을 더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십시요. 성령은 우리를 예수와 하나되게 하십니다. 그런 자가 포도나무에 붙어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이 풀리고 그 말씀을 기쁨으로 따르며 찬송으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복에 복을 더 하십니다. 은사를 더 하십니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아 그래서 예수를 믿는구나! 그럴 때에 십자가의 사건이 validated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에 맡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는대로 허락하십니다. 거룩하십시요. 거룩을 구하면 거룩을 더해 주십니다 거룩을 구하면 은사가 더해집니다. 그러한 자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셔서 손을 얹고 기도를 하면 귀신이 떠나가고 병이 낳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황당한 것을 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막연하게 믿는 것이 아닙니다. 확실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께는 제물이 됩니다(롬15:16) 

나에게 풍성한 열매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라고 영혼구원에 쓰임 받으라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예언의 능력을 주시고 병자를 낳게하는 능력을 주시고 기적을 일으키게 하셨는데 처음에는 받은 능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하다가 언제부터 나중에는 자기의 만족을 위하여 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거룩하십시요. 거룩한 사람에게 열매를 맺게 하시며 열매를 맺은 자에게 더욱 큰 열매를 맺게 하시며 더 거룩하게 하시며 그렇게 더 거룩하게 하신 자에게 더 큰 은사를 나타나게 하셔서 더 강력한 은사가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세례는 내 만족을 위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기쁨이 되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다. 성령세례로 인하여 나타나는 권세와 능력과 은사와 모든 기적들은 예수님께 만족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한복음 15:11)

세상의 기쁨이 아닌 내 안에서 완전하게 될 때까지 넘치고 넘치는 기쁨 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내 안에서 차고 넘쳐서 성령이 내 안에서 기뻐하심으로 우리의 기쁨이 더욱 충만하게 되는 것이며 영원한 기쁨으로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간증은 하나님께로 향한 당신의 순례 기록이며,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효과적인 도구의 하나이다.


간증이 효과적인 증거가 되는 이유

첫째는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경험한 바를 듣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고, 

둘째는 아무도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반박할 수 없으며, 

셋째는 개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쉽게 나눌 수 있고, 

넷째는 다른 사람도 자신의 삶을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도록 할 수 있고, 

다섯째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버리게 할 수 있다.


효과적인 간증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민감한 부분에 대해 먼저 파악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삶 가운데서 건드리거나 자극을 받으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영역이나 필요가 존재한다.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간증을 나눌 때 자신의 민감한 부분을 중심으로 간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이 자신의 문제를 솔직하게 인정할 때, 비로서 사람들은 당신을 진실하며 가까이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게 되어 자신의 민감한 부분도 당신에게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필요한 부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도와주셨는가에 대해 나누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간증을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삶, 믿게 된 경위, 믿음 후의 삶의 변화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전했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삶에서는 자신을 청중들과 동일시하면서 그들의 민감한 부분을 드러냈고, 믿게 된 경위에서는 왜 제자가 되었으며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해 밝히고 있다. 끝으로 믿음 후의 삶의 변화에서는 자신의 필요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해결되었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간증을 나눌 때 주의해야 할 점으로는 

첫째, 자신의 지난날을 다 이야기하지는 말 것(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 것)

둘째, 바울의 간증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눌 것, 

셋째, 민감한 부분을 상세히 설명할 것, 

넷째, 복음을 명확하게 소개할 것, 

다섯째, 민감한 부분의 해결책을 설명할 것, 

여섯째, 신중하게 나눌 것, 

일곱째, 1인칭을 사용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하되

           설교를 하려 들거나 자기 자랑을 늘어놓지 말 것, 

여덟째, 자신의 간증의 가치를 인식할 것(그리스도와 하신 사역을 높이고 있는가?)

아홉째, 사실을 말할 것, 

열번째, 기도하며 성령의 감동으로 준비 할 것 등이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당신의 간증에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삶 가운데 있었던 민감한 부분을 사실적, 구체적, 그리고 개인적으로 간결하게 써야 한다. 믿게 된 경위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영접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믿은 후 변화에서는 당신의 민감한 부분과 관련 지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를 설명하되, 설교로 발전되어서는 안 된다

성령세례에 관한 12가지 포인트

1. 세례의 4가지 종류

1)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의 세례.
2)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세례.
3) 회개와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신자에게 받으라 명령하신 물세례.
4) 이미 중생한 자에게 약속하신 성령세례.

2. 물 세례는 명령인데에 반해서 성령세례는 약속이다.

1)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2:38-39)

“선물”은 좋은 것이다. 그래서 사모하고 구해야 할 것이다.
“약속”은 명령이 아니라 약속이다. 약속의 가치를 알아야 하고 그 약속을 믿어야 한다.
“얼마든지”라 함은 받는 자의 차별이 없고 제한도 없고 부족함이 없이 모든 구원받은 신자들을 향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2) 성령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상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과 하나님의 맡기신 일을 이루어 드리려고 애써 본 사람만이 구하게 되어있다. 성령세례를 구해야 함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 나의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려지기 위하여 성령세례를 구해야 한다.

구약의 스룹바벨 처럼 하나님의 전을 세워 드리려 하면서 자신의 능력과 지혜만을 의지하여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철저한 실패를 통하여 이 사실을 배우게 될 수밖에 없다.
슥4:6절은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이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3) 성령을 구하는 자가 전심으로 구하며, 믿고 기다리되 의심하지 않고 약속을 붙잡고 받을 때까지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다른 어떤 것을 구할 때보다 성령을 구할 때 기뻐하신다.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눅11:13)

4) 신자가 구할 수 있는 것 중에 최고이면서 동시에 그 외에 모든 것까지 다 받을 수 있는 것이 성령이시다. 성령을 받으면 그 분과 함께 권능이, 지혜가, 성결이, 담대함이, 또 사랑과 기쁨과 희락과 화평 등등의 수없이 많은 구하지 않은 것까지 다 신자의 열매로써 주렁주렁 매달리게 되는 것이고 결국은 그 열매가 하나님의 제단에 거룩하게 드려지는 것이다. (갈5:22/롬15:16-18)

3.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차이

1) 세례는 항상 시작을 나타낸다. 신자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제부터 예수를 구원자로 믿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섬기고 따르며 사랑하고 충성하는 삶을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목적도 바로 그 일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함이다.

2)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선물로 구하여서 받는 것에서 그쳐버리고 마는 우를 범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성령세례는 시작이라면 성령충만은 그 목적이 이루어지는 완성이다. 성령세례는 시작이라면 성령충만은 그 목적이 이루어지는 완성이다. 영어로는 “fill to overflowing”이란 말이다. 꽉 차고도 넘쳐서 흐르는 상태이다. 어느 신자의 삶에서나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고 유익하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사실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세례받은 수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다 같은 곳에서 끝나지 않는다.

성령충만한 삶이란? 1. 성령께서 나를 인도(lead)하신다는 상태이고 2. 성령께서 나를 통치하고 주관(governing and ruling)하신다는 상태를 동시에 의미한다.

3)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갈5:24) 말씀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상태”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그 사실을 알며 동의하며 나아가 언젠가 그것이 사실이 되도록 노력해야 된다.

4) 충만이라는 말이 “fill”이라 할 때는 "내 자신을 채움"이라면 to overflowing이라고 할 때는 “다른 이에게 흘러가 생수가 됨”이란 뜻이다. 성령세례는 나를 세워주는 것인데, 성령충만은 남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도록 타인을 세워주는 것이다(요7:38-39)

5) 물세례도 그 자체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베드로 사도는 벧전3:21에서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이것이 매일매일 계속해서 일어나야 할 반복되며 또 앞으로 전진해야 할(process and progress) 영적 순례 여정의 첫걸음인 것을 분명히 한 것처럼, 성령세례도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하였다. 여기서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단어는 진행형으로 씌어졌다. 즉 이것은 단회적 사건(성령세례는 한번 받는 것에 반해)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딛3:5절에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도 역시 진행형으로 씌어졌다. (NIV는 renewal이라 했는데 좋은 번역은 KJB처럼 renewing이라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뜻과 일치함)

다시 말하면 성령세례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날마다 신자의 삶에서 그 능력과 역사가 계속 되어서 결국은 하나님의 역사가 완성되는 것을 사모하며 늘 그렇게 되도록 자신의 삶의 주권을 성령님께 넘겨드리며 자기 자신은 오히려 부인함으로 육체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성령충만의 삶이라는 것이다.

제17장
도박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

도박이 합법적이든 불법이든 전례없이 용인되고 있는 것이 한 현상이다. 도박이 널리 성행하고 있기 때문에 크리스찬은 이러한 활동에 대한 윤리적, 도덕적 의미를 결정하기 위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도박의 정의

도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활동을 모험이 따르는 다른 사업들과 같은 범주에 놓으려고 애쓴다. 그들은 농사, 보험 심지어 투자에 이르기까지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고 때로는 손해를 보기 때문에 도박이라고 설명한다. 이리하여 그들은 도박에 합법적인 사업과 같은 지위를 부여하기를 원한다.

스탈키(L. M. Starkey Jr.)는 다름과 같이 도움이 될만한 관찰을 하였다. “인생에서 사람이 믿음과 용기로 받아들어야 할 일상적인 모험이 있다. 이러한 일상적인 모험들은 운에 맡기는 게임에 있어서 모험과는 결코 같지 않다. 도박과 시간과 돈과 기술의 투자가 정당화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희망으로 된 인위적인 모험이다. 도박에 있어서 기회는 농부나, 증권투자가가 그의 정신과 돈과 육체적인 노력을 투자하는데 필요한 창조적인 노력과는 관계가 없다.”
도박을 합법적인 사업과 구분하기 위해서 도박에 필수적인 세가지 요소를 이해하려면 도움이 될 것이다.

①돈 혹은 상품으로 구성된 자극이 제공된다. ②그 상금은 주로 운에 따라서 얻어진다. ③주어진 운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돈이나 다른보수를 지불해야 한다.

도박은 주로 운과 도박자의 모험에 따라서 재물의 주인이 바뀌는 활동으로 이해된다. 창조적 노력, 유용한 기술 및 책임있는 투자는 필수요소가 아니다. 도박이 여러 형태로 존재하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도박의 유혹에 직면하기
때문에 책임있는 크리스찬은 그것의 적절한 모양에 관해서 여론을 형성해야 한다. 정부에 의한 도박의 합법화나 어느 종교단체에 의한 도박의 용납이 평가기준이 될 수는 없다. 크리스찬의 차세는 성경의 원리에 의해서 결정되어져야 한다.

도박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성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도박으로 크게 유혹받은 것 같지는 않다. 그 악습은 이스라엘이 이방국가에 의해서 통치 받았을 때만 나타났던 것 같다. 도박이 있었을 때 하나님은 그것에 대한 자신의 자세를 명백히 보여주셨다.
바벨론 포로시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박하는 사람들의 영향아래 있었다. 그 결과로 포로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연류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오직 나 여호와를 버리며 나의
성산을 잊고 갓에게 상을 베풀어 놓으며 므니에게 섞은 술을 가득히 붓는 너희여”(사64:11) 여기서 갓과 므니는 이상신들의 이름으로써 갓은 좋은 운수를 주는 신이고 므니는 나쁜 운수를 주는 신이었다. 제임스 모팻은 이사야 65:11을 다음
과 같이 번역하였다. “오직 영원하신 분을 버리며 그의 성산을 잊고 좋은 운수에게 상을 베풀어 놓으며 나쁜 운명에게 술을 붓는 너희여 내가 너희의 운명을 칼에 붙이리라.”

웰스(Wells)대학의 학장이었던 고 플럼트리(E. H. Plumptre)는 갓은 좋은 운수를 주는 큰 행운으로 예배 드려졌고, 므니는 보다 작은 행운으로서 예배드려졌다고 지적하였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대사 교수로 봉직했던 로우린슨(George
Rawlinson)은 므니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운명을 그들에게 나누어주는 지정된 신”이라고 지적하였다.

몇몇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죄받는 죄는 하나님보다 운수를 의지하는 것이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는 운수를 의지하는 것은 공존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말했다. 만일 사람들이 운수를 의지한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이사야는 도박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버린 자” 라고 묘사하였다.(사65:11)

성경적 원리

성경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도박은 피해야 할 악임을 지적하는 수많은 성경적인 원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할 때 그들은 도박이 악이라고 하는 원리를 존중할 것이다.

1. 도박은 책임있는 청지기직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되었다.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에게 맡겨진 모든 것에 대하여 적절하게 관리해야 하는 청지기 위치에 있다.

이러한 청지기직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 위한 첫 단계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신자는 자신이 자기의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고전6:19) 그는 은이나 금이 아니라 예수의 보배로운 피로 값을 주고 구속된 것이다.(벧전1:18,19) 마게도냐 교회는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을 때”(고후8:5) 개인적인 헌신의 귀중한 모범을 남겨 놓았다. 새명은 그것과 관련되는 모든 것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관리되어야 할 청지기직이다.

정직하게 자신을 하나님께 바친 사람들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청지기로써 관리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달란트의 비유는(마25:14-30) 착하고 충성된 종이 자기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주인이 기뻐하는대로 관리해야
함을 지적한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관리에 실패하였으며 그에 해당하는 결말을 겪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청지기직의 책임을 인정한다면 그들은 어떤 형태의 도박도 하나님이 주신 자원과 시간과 능력에 대한 적절한 관리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의 윤리조차도 자신에게 맡겨진 자원을 가지고 도박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찬의 책임은 모든 다른 책임을 능가하기 때문에 크리스찬에게 있어서 도박은 잘못된 것이다. 도박은 청지기직의 원리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왕국 확장을 위해 사용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자신에 대한 퇴폐행위이다.

2. 도박은 다른 사람의 손해와 고통을 담보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도박의 속성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보기 때문에 한 사람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인 이익은 극소수에게 돌아간다. 재정적인 손해는 보통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운 많은 사람이 입는다. 도박에 관련된 사람들은 보통 그 행정주들
(promotors)이 인격을 손상시키는 말로 부르는 것을 볼 때 그들의 격하된 신분을 알 수 있다. 재정적인 손해가 크든지 작든지 도박자는 기본적으로 잃은 자이며 도박장 경영자는 따는 사람이다.

도박으로 인하여 겪는 고통은 사랑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과 전격적으로 위배된다. 크리스찬은 사랑할 만한 사람분아니라 원수가지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이웃을 그들 자신들처럼 사랑해야 한다. 사랑의 원리는 크리스찬으로 하여금 주정부나 어느 단체가 인간의 약점에 근거하여 사회를 타락시키는 도박활동을 합법화하려는 노력에 대하여 반대하게 할 것이다.

켄터베리 대주교인 템플(William Temple)은 크리스찬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하고 있다.

“도박은 기독교 교회가 유지하고 확장하고자 하는 생명에 대한 견해에 도전한다. 도박이 단순한 운수를 추앙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질서를 부정하는 것이다. 돈을 되는대로 운수에 맡기는 것은 모든 소유물이 인간에게 위탁된 것이며 인간은 그것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산 믿음에 대한 교회의 주장을 무시하는 것이다. 탐욕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것은 근본적으로 예수와 신약 전체가 가르치는 이타주의에 반대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손해와 고통 가운데서 이득을 취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우리 주님이 주장하시는 이웃사랑과 정면으로 반되대는 것이다.

3. 도박은 성경의 노동윤리와 모순되기 때문에 잘못되었다.

전체 성경을 통하여 먹는 것에 관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구약은 우리에게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잠12:11)라고 상기시켜 준다.

신약성경에서도 같은 원리를 아주 힘있게 강조하고 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라고 썼다.(살후3:10) 성경은 생활의 필요를 위하여 사람이 일해야 할 것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불로소득과 일확천금의 사고방식에 대하여 경고한다.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잠28:20)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잠28:22) “망령되이 얻는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잠13:11) 하나님의 지혜로 사람은 타락하기 이전부터 에덴동산에서 일하게 되어있었다. (창2:15) 비록 죄의 결과로 노동의 성격이 변하기는 하였지만(창3:17,19), 일의
책임은 취소되지 않았다. 사람이 아무리 성경의 노동윤리를 회피하려고 노력하여도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급히 부를 축적하려고 하는지 혹은 상 위에 밥을 올려놓고자 하든지 간에 도박은 노동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과 모순된다.

4. 도박은 습관성이 되기 때문에 나쁘다.

도박은 다른 악과 같이 중독되는 경향이 있다. 술이나 마약 중독자의 경우처럼 도박에 중독된 자는 돈 뿐만이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의미있는 모든 것을 걸 정도로 도박의 지배를 받는다 그들은 자신을 절재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는 성경의 가르침에 반대된다. 하나님의 말슴은 크리스찬이 가한 것 일지라도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고전6:12) 성령께서 거하는 사람은 온유 혹은 절제라는 특징을 갖는다.(갈5:23) 도박중독에 대하여 연구한 사람들은 도박 중독자에게 특징적인 여섯가지 증상이 있다고 동의하는 것 같다.

①그 활동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②그것은 가정을 포함한 모든 다른 흥미들을 방해할 정도로 광적이 된다. ③이전에 잃었던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능력 대신에 병적인 낙관주의가 마음을 차지한다. ④이기고 있는(따고 있는) 상태에서 그만 두는 능력이 없다. ⑤어느정도까지만 도박 하겠다는 처음의 결심에도 불구하고 도박 중독자는 변함없이 너무 많이 도박을 한다. ⑥그 활동은 아픔과 기쁨으로 구성된 즐길 수 있는 긴장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습관적으로 도박하는 사람은 도박 충동의 지배 아래 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종이 되기보다는 스스로 다룰 수 없는 욕망의 종이 되어 버린다. 바울은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롬6:16)고 하면서 그 상태를 묘사하였다. 중독증상의 악화 가능성 때문에 도박은 악이라고 보아야 한다.

도박에 대한 크리스찬의 책임

여러 가지의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비추어 볼 때 크리스찬은 도박에 대하여 중립적인 입장을 가질 수가 없다. 신자가 지나쳐서는 안되는 책임이 있다.

성경이 신자들에게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가르칠 때 그것은 틀림없이 도박을 막는 말씀이다. 사람들이 주님께 의지하기 보다는 운수를 의지할 때 하나님은 영광 받으실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고 가르치실 때 그것은 도박을 막고 있다. 한 습관이 청지기, 타인에 대한 고려 및 정직한 노동의 품위에 관한 하나님 말씀의 원리를 위반할 때 그것은 악이 아닌 다른 것
으로 고려할 여지는 전혀 없다.

성경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도박이든지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의 소금으로서(마5:13) 그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 안에서 자선이나, 교회나, 주정부를 위한 모금일지라도 도박의 합법화를 저지하기 위하여 힘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 L. M. Starkey, Jr., Money, Mania, and Morals (Abingdon Press, 1964)
ⓑ Virgil W. Peterson, "Obstacles to Enforcement of Gambling Laws," The
Annals of the American Academy of Political and Social Science(May.
1950)
ⓒ William Temple, "Gambling and Ethics, "issued by The Churches"
Committee on Gambling, 215 Abbey House,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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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일곱 번째 질문 세속적 인본주의 및 뉴 에이지 운동 
성경은 세속적 인본주의와 뉴에이지 운동에 관하여 무엇이라 말하는가?

세속적 인본주의는 도덕적으로 건강한 사회를 먹어가는 교활한 그러면서도 극단적으 로 해(害)가되는 암입니다. 세속적 인본주의는 인간이 어떤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으며 또 한 자신의 운명을 조정하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높이는 점에서 교활합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러한 철학은 자신의 자부심을 높여주는 방법으로 훌륭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을 높이는 것은 더 높으시고 인간의 행위를 위해 기준을 전하신 창조주를 제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암은 기독교, 전통적인 공교육, 그리고 일반적 도덕의 원리들을 좀 먹어갑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통속적으로 반(反) 성경적인 철학의 기초가 됩니다. 치명적인 이러한 진화적 신념의 중심에는 하나님이나 인격적인 창조자가 존재하지 않으며 (무신론), 인간이 모든 현실의 정점에 있다는 것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러한 이념은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선하며(인간의 타락을 묵살하면서) 완전한 창조물로 진화 하는 무제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교활하게 호소합니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어떤 필요성도 완전히 부인하며, 오히려 인간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 존재임을 가르칩니다. 뉴 에이지 운동은 세속적 인본주의와 동일한 성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운동은 모든 개인이 지금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진화 해야만 하는 “뉴 에이지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인간이 서 있다고 주장합니다. 뉴 에이지 전도자는 모든 사람에게 내재하고 있는 선함은 실제로는 각 사람 안에 존재하고 있는 잠재하는 신성이라고 주장합니다. 뉴 dp이지의 목표는 인간 속 깊은 곳에 잠자고 있는 신을 깨우는 일입니다. 

이 거짓된 영적 상태의 인식 하에서는, 인간이 신이며 그러므로 신성하다고 간주하며, 개인과 사회의 세계적인 변화를 인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의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흥미 있게도, 서방 세계에서 “새로운” 이라고 불리는 것은 고대 동양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또 다른 뉴 에이지의 거짓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이 동일한 근원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힌두교에서 가져온, 일원론적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모든 것은 하나이다.” 라는 이념입니다. 이 범신론적 신앙은 “모든 것이 신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뉴 에이지 사람들은 영적 각성(깨달음)과 사람 속에 있는 신의 더 높은 의식을 얻음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과 세상을 파멸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뉴 에이지 사람들은 또한 힌두교의 환생의 개념을 빌려왔습니다. 뉴 에이지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주기적인 출생의 반복함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남으로서 죄와 나쁜 업(카르마)으로부터 깨끗하게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그들은 모든 것들과 신적 단일성을 함께 나누기 때문에, 그들 은 마음의 힘을 통하여 그들이 무엇이든지 구상하는 것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뉴 에이지 운동의 알려진 목적은 핵에 의한 대학살이나 세계 자원의 고갈로 인한 인류의 멸종을 예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환경을 보호하는 것이 뉴 에이지 운동의 최우선 순위입니다. 뉴 에이지 사람들은 지구의 치안을 유지하고 동양과 서양을 함께 조화시킬 새로운 세계 질서의 확립을 지원합니다. 슬프게도, 뉴 에이지 생각은 현대 생활의 거의 모든 양상에 침투했습니다. 

큰 기업은 그들의 정책 입안 매니저를 마음 증진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시킵니다. 치료 전문가들은 내적 반영과 의식의 탐사에 근거한 기술을 채택하여 사용합니다. 마케팅 전문가는 마케팅에 대한 동기의 능력에 대한 인간의 잠재력을 강조합니다. 연예인들은 그들에게 인기를 가져 다 줄 내적 힘을 발견하기 위해서 자신의 내부로 향합니다. 예전에는 하찮은 소문화권에 속했던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이 지금은 미국 생활의 주류로 바뀌었습니다. 

교회는 진실을 왜곡하는 이러한 모든 표현에 저항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교활하고 부정직한 이러한 속임수를 드러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 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 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로마서 3:10-12). 

뉴 에이지와는 다르게 성경은 내부로 자신을 바라봄으로서가 아니라 위를 바라봄으로서, 사람을 바라봄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서 진실을 발견한다고 선언합니다 (예레미야 17:5,9). 바울의 반문하는 질문은 그것을 가장 잘 밝혀줍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린도전서 1:20). 참으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12).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성회는 진실에 반대되는 세속적인 인본주의와 뉴 에이지 이단의 거짓을 배척합니다. 

관심사: 

오늘날 교회는 항상 우리 주위의 모든 곳으로 침투하여 영향을 행사하려고 노력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철학에 항상 경계하며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세속적 인본주의자와 뉴 에이지 사람들이 말하는 달콤한 선언은 공립학교, 대학, 대학교, 정치적 구조, 그리고 모든 사회적 구조를 접수하는 것을 허용하도록 의심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결백해 보이는 개념 뒤에 있는 총체적 철학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들은 모든 사람을 우리들이 믿는 것처럼 믿게 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진리를 위해 서며, 모든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의심치 않는 순진한 사람들을 유혹하고 끌어내는 사탄의 노력에 저항할 것을 기대합니다. 환경을 보호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뉴 에이지 사람들이 환경을 보호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투표하는 것은 파국적일 수 있습니다. 개인의 독창성과 선도권(이니셔티브)을 격려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인간의 독창성과 선도권 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않는 세속적 인본주의자를 위해 투표하 는 것은 재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정보에 밝으며, 기도하는 기독교인들은 사회에 커다란 공헌을 할 수 있습니다. 

역자주: 업 (카르마) - 불교 혹은 힌두교의 용어로서 중생이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을 말하며, 전생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현세에 받는 응보(應報)를 가리킨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제16장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

본문은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의 교리에 관하여 하나님의 성회 총회의 입장을 나타낸다. 여기서 명백하게 선언되고, 성경적으로 유효한 중대한 진리에 대한 설명이 오순절 운동에 의미 있는 것으로 증명될 것이다.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설립 당시부터 성령세례를 중생의 체험 후에 일어나며 중생과는 다른 경험으로 인정하였다. 그것은 또한 성령세례의 초기의 외적 증거는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임을 인정해 왔다. 하나님의 성회 근본진리에 대한 성명(제 8항)은 그 헌법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성명을 포함하고 있다.

신자의 성령세례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초기의 외적인 표적에 의해서 증거된다.(행2:4) 이때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방언의 은사와 같지만(고전12:4-10,28) 목적과 사용에 있어서는 다르다.
이 성명은 1916년 채택된 이래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시간과 경과와 함께 각 세대의 평가로서 하나님의 성회는 이것이 성경적으로 건전한 입장임을 보아 왔다. 다음과 같은 용어의 정의와 성경의 고찰은 우리가 왜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라고 믿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다.

용어설명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에 대한 교리를 생각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의 테두리 안에서 여러 가지 표현이 사용될 것이다. 성령세례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취한 것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직전에 세례 요한이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성령과 불로 우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11)라고 말하였다. 그의 지상사역을 마치실 때 예수께서 요한의 말을 언급하셨다.(행1:5)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사건을 보고하는 자리에서도 이 말을 반복하였다. (행11:16)

성령세례는 중생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며, 중생과는 구별된다. 성경은 성령께서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세례를 주는 경험이 있음과(고전12:13),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성령 안에서 세례를 주는 경험이 있음을(마3:11)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경우는 같은 경험을 언급하고 있다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례를 베푸는 집행자와 수세자가 세례로 들어가는 요소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 경험의 독특성은 여러 곳에서 설명되고 있다. 에베소 제자들의 경우가 한 예이다. 그들이 요한의 세례 밖에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한 후에(행19:3), 바울은 그들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 제자들은 물로 세례를 받았고 이어서 바울이 그들 위에 손을 얹었을 때 성령께서 임하셨다. 이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은 것과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 사이의 시간 경과는 짧은 것이었으나 그들이 물로 세례를 받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성령세례는 구원 후에 일어나며 구원과 구별되는 것이다.

성령세례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목적에 대한 수단이 된다. 신자에 대한 성경적인 이상은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다. 성령세례는 신자에게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경험하도록 인도하는 위기경험(crisis experience)이다.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라는 표현은 성령이 채우는 능력으로 임하는 최초의 외적 표시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을 연구한 결과 신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외적인 표시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증거는 항상 신자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외적인 표시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증거는 항상 신자가 성령으로 세례받을 때 일어나는 것이지 어떤 미래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행10:44-48)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그의 사역에 대하여 설명을 요구했을 때 베드로는 성령세례를 받은 신자들에게 눈에 보이게 나타났던 증거를 말하였다. 그는 왜 이방인 신자에게 물세례를 주도록 주선했는지에 대한 이유로 이것을 말하였다.(행11:15-17)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최초의 증거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으로서 과거 경험의 증거 이상의 가치가 있다. 그것은 각 신자가 개인적인 헌신의 시간을 가질 때와 방언 통역을 동반한 회중의 모임에서 계속적으로 풍성함을 더해준다.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성령이 신자들에게 그들이 배우지 못한 언어로 말하게 하는 능력을 말한다. 사도행전에서 방언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고린도전서에서 사용된 단어와 같은데 사람이나 천사의 실질적인 언어이다.(고전13:1) 이 단어를 생각하거나 도취도니 소리로 번역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우리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신약시대에 방언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대로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신자가 성령의 도움을 받아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발성”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빈센트(M.R. Vincent)가 관찰한 바와 같이 “특별한 단어이며 기적적인 충격 아래서 명백하고 큰 발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스트롱(James Strong)은 이 단어가 단순히 똑똑하게 발음하는 것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능력은 감정이 올라간 상태나 단어와 구절을 반복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하는 소리를 흉내낸 결과도 아니다. 이와 반대로 방언으로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성령이 주시려는 발성의 길을 막고 있을 뿐이다. 신자는 성령의 초자연적이며 자극을 주는 능력에 의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반응하며, 성령이 발성을 주시는 대로 말해야 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하기 위한 어떤 인위적인 기교도 성서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방언을 최초의 외적 증거로 믿는 이유 사도행전을 보면 사람들이 성령으로 세례받는 경우가 다섯 차례 기록되었다. 이중 세 경우는 상세히 다루고 있으나 다른 두 경우는 상세히 기술되지 않았다.

상세히 다룬 경우를 보면 바람의 소리나 불의 혀 같은 것이나 예언 혹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 등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상세히 묘사된 각각의 경우에 모두 나타나는 유일한 현상은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 10장, 19장의 사건에서 나타나고 있다. 구체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성경적인 경험이 묘사될 때마다 이 경험과 현상과의 관계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바람의 소리와 불의 혀가 선행되고 그리고 제자들의 경험이 나타났던 것을 또한 유의해야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처음의 성령이 부어주신 사건 후에도 반복되었다고 가리킬만한 것은 없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뒤따랐으며 이것은 성령으로 세례 받은 직접적인 결과였고 오순절날 이후에도 계속하여 나타났다.

상세한 것이 나타나지 않은 두 경우의 상황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신자들의 경험에 동반된 것 같이 보인다. 사마리아의 마술사였던 시몬은 신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가리키는 무엇인가를 보았다. (행8:18,19) 만일 그 경험이 동반하는 표적이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되었다면 사마리아 신자들이 성령을 받았는지 몰랐을 것이다. 이 사건을 상세히 묘사된 세 경우의 경험과 비교해 볼 때 시몬이 보고 들은 것은 사람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한 것이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가장 논리성이 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개한 후 사울이 그의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함 받도록 하기 위하여 아나니아라고 하는 제자를 주께서 보내셨다.(행9:17) 시력이 회복된 것은 묘사되고 있지만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함 받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9장에서 더 이상 언급이 없다. 그러나 고전14:18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한다.”고 증거하였다. 바울이 언젠가 방언을 시작했을 것이므로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방언을 시작하였다고 가정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이것은 성령세례를 상세히 다룬 그 사건들과 완전한 조화를 이룰 것이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과 동반할 뿐 아니라, 사도들과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성령세례의 초기 증거로 인정하였다. 베드로와 및 그와 함께 한 사람들도 고넬료의 집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연유는 “방언을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행10:45,46) 이 증거를 근거로 베드로는 편견을 버리고 이 회심자들에게 물세례를 주도록 하였다. 베드로에게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고넬료의 집에 성령의 부어주심에 대한 증거였다.

후에 베드로가 고넬료 사건에 대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 및 형제들과 토론하게 되었을 때 그는 다시 그가 본 현상을 언급하였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막겠느냐”(행11:17)고 하였다. 사도들과 형제들이 방언을 성령세례의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인 것을 다음 구절에서 볼 수 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행11:18)고 하였다.

고려할 질문들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의 교리에 관하여 여러 질문이 제기되었다.
다음은 그 중에 자주 제기되는 것들이다.

1. 사도행전은 역사를 위한 책인가 아니면 신학을 위한 책인가? 그리고 교리가 선언적인 서술 이하의 것을 근거로 이루어 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는 성경 자체가 대답하고 있다. 성경은 바울로 하여금 쓸 수 있도록 영감을 주셨는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된 것으로 교훈(교리)...에 유익하니(딤후3:16)”라고 했다. 또한 바울은 기록하기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롬15:4)라고 하였다.
교리는 성경에서 고립된 몇 구절을 근거로 하면 안된다. 오히려 내용이 풍부하게 함축된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선언적인 서울에 근거하고 있지 않고 하나님에 관계된 성경 구절을 비교한 것에 근거한다. 삼위일체 교리와 같이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의 교리는 이 주제에 관계되는 풍부한 성경말씀을 근거로 한다. 베드로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방언을 성령 충만함 받은 증거로 인정하였을 때 이 모형을 근거로 교리화한 것은 명확한 것이다.(행10,11장) 양적으로나 횟수에 있어서 이 주제의 무게는 교리화를 위한 견고한 근거를 제공한다.

2.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사도시대에만 속한 형상인가? 바울이 “방언이 그칠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하였는가(고전13:8)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사도시대나 혹은 신약의 정경이 완성될 때까지만 존재할 것이라는 암시는 성경 어느 곳에도 없다. 바울이 방언이 그칠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또한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도 암시하였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10) 그는 또한 방언이 그칠 때 지식과 예언 같은 것들도 동시에 현저하게 변할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때까지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새 방언으로 말하며”(막16:17)가 그대로 적용된다.

3. 바울이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고전12:30)고 했을 때 그것은 부정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수사의문(rhetorical question)이 아닌가?
바울의 질문을 이해하기 위하여 방언 말하는 것의 여러 가지 기능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성령세례에 대한 최초의 증거 역할을 한다. 
(행10:46, 11:15) 사적으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나 기도하는 것은 자기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고전14:2,4) 회중안에서 방언통역과 함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교회의 덕을 위함이다.(고전14:5) 모든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기를 원하는 바울의 마음과(고전14:5)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고 질문한 수사의문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성령세례 받을 때 모든 신자들은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고 개인 기도시에 혹은 자기의 덕을 위하여 계속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성령께서 회중 안에서 방언과 통역을 통하여 자기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쓰시는 도구는 아니다. 회중 안에서 성령은 그 뜻대로 성령의 나타남을 주신다.(고전12:11) 이러한 바울의 서술은 서로 모순된다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

4. 만일 증거 혹은 은사로서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면 왜 교회사에서 이러한 현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가 있는가?
어떤 성경적인 교리가 태만으로 인하여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사실 위대한 영적 개혁은 자주 교리의 부흥이었다. 예를 들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교리는 마틴 루터와 다른 사람들이 다시 강조할 때까지 거의 완전히 잊혀졌었다. 성화의 교리는 다시 교회의 주목을 받게 되는 웨슬리 부흥운동 때까지 무시를 당해왔다. 성령세례와 방언에 대한 진리는 교회 역사를 통하여 20번 이상의 부흥기에 나타났었으나, 최근의 부흥운동 안에서처럼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성화에 대한 교리의 부흥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최초의 증거로서 방언을 말하는 성령세례의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교리를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초기 사역시의 그의 가르침을 거부하였다. 모든 신자들을 위한 지침은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이다.(살전5:21) 시험의 근거는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행17:11)

5.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교리는 사람들이 실질적인 성령세례를 추구하기보다 방언을 추구할 위험성이 있는가?
불행히도 이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교리의 남용이 교리를 무효화시키지는 않는다. 남용과 가짜는 교리를 논박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순수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다른 방언이 성령세례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것인 반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의 명령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령으로 충만함 받기를 힘쓰는 것이 항상 강조되어야 한다. 방언은 자연스럽게 이 경험에 수반된다.

6. 만일 사람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하면 영적 교만의 유혹은 없겠는가?
사람들이 진정으로 성령세례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교만 대신에 겸손을 낳게 할 것이다. 신자들은 인격적 고귀함 때문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봉사와 보다 의미있는 사람을 위한 능력을 받기 위하여 받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자신의 공로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그것은 얻거나 살 수가 없다. 하나님의 모든 은사와 마찬가지로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7. 방언으로 말은 못하지만 주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어 놓은 진실로 거듭난 사람들은 어떤가?
방언을 못하는 헌신된 신자들 안에 성령이 거하시며, 이런 신자들 중에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어 놓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질문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사람들은 그 교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가장 헌신된 신자의 경험에 근거한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회중 안에 있는 경우가 아니면, 개인 경건의 시간에 방언으로 말할 것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결정해야 한다.

또한 사람들은 각각 다른 성질의 재능과 다양한 수준의 능력을 갖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무엇을 완수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모든 공급을 받아들였다면 얼마나 더 많이 성취했을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성경은 신자들이 인간 비교에 근거하여 크리스찬의 경험을 평가하지 말고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개인적인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명백히 가르친다. 바울은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여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10:12)하고 기록하였다. 교리는 항상 인간의 경험에 근거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결론
 

요약하면 성경의 기록은 성령세례에 관하여 상세히 다룰 때마다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언급되는 유일한 현상임을 말한다. 상세한 설명이 없는 경우에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수반되는 경험이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사도와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로 받아들였다. 성경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개인지도와 예배에 있어서 신자를 위한 특권이며 신자들이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성령의 주권적인 선택에 따라서 회중의 방언으로 말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배제하고자하는 성경적인 제한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일이 적당히 질서있게 행해져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또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14:39,40)고 말씀한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모든 신자를 위한 특권이다. 바울이 “나는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전14:5)고 기록했을 때 그는 비성경적인 소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었다.

열 여섯 번째 질문 비밀 결사 
기독교인은 왜 메이슨과 같은 비밀 결사의 회원이 되는 것을 피해야 하는가?  

비밀 결사의 성격은 기독교인의 신앙에 완전히 반대됩니다. 성경은 원하는 사람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지식에 오도록 초청하는 열린 책입니다 (요한계시록 22:17).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은 연구하고, 질문하고, 영감 된 책(성경)을 읽고, 그러한 행동에 대한 대가와 결과가 무엇인지를 잘 알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결정을 지을 수 있습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비밀 결사는 오직 제한된 숫자 만이 회원으로, 비밀 맹세와 의식으 로, 그리고 그 사회의 활동으로 환영을 합니다. 비밀 결사의 회원들은 흔히 그들의 조직을 지역 교회에 속해 있는 신자들의 모임과 비교합니다. 그러나 비밀 결사는 성격상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엘리뜨주의자들의 조직이라는 점에서 교회와는 아주 다릅니다. 

교회와는 다르게, 비밀 조직은 그 조직, 원리, 및 행사에 있어서 같은 회원이 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비밀 결사에 대한 회원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회 조례 9조 전체는 비밀 결사에 회원이 되는 것을 금하는 항목을 포함 하고 있습니다. 교역자가 비밀 결사에 속하는 것을 금하고 또 평신도들이 그러한 결사에 참가하는 것을 피하라고 권하는 것에 대한 이유에 대하여 기록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 할 수 있습니다. 

1. 비밀 결사의 활동은 지상 대 명령을 충족시키려는 노력으로부터 주님의 종의 시간과 에너지를 분산시키도록 강요합니다. 
2. 비밀 결사의 동료 회원들에 대해 충성을 서약하는 것은 --- 대부분의 회원들은 예 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역사를 믿는 동료 신자가 아닌 --- 신자가 비신자와 함께하는 가치 없는 결속입니다. 
3. 비밀 결사의 정신, 철학, 및 비밀 명령의 일반적인 영향은 영적인 인간의 마음을 바꾸는 대신에 오직 인간의 자연적 부분에 대한 발전만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활동을 이끌어갑니다. 
4. 비밀 결사와 그들의 가르침을 신뢰하면 선한 행위와 향상된 사회를 통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잘못된 희망을 갖게 합니다. 

비밀 결사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성회만이 아닙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독교 교회는 메이슨이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메이슨 조직에 참여하는 것이 죄라고 선언합니다. 이 입장은 메이슨과 교회 사이에 있었던 중요한 역사적 충돌에서 기인했습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모습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 메이슨은 흔히 그들 조직의 맹세나 의무가 하나님, 국가, 혹은 이웃에 대한 의무를 훼방하는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은 이와는 다른 모습을 입증해 줍니 다. 어떤 충성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충성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비밀 사회는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기독교인은 
(1)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거룩하지 못한 충성을 통해 결연하여 멍에를 함께 나누거나 (고린도후서 6:14-18), 
(2) 하나님의 이름을 부적절하거나 헛되게 사용하므로 비성서적인 맹세에 서약할 것을 요구하거 나 (출애굽기 20:7; 레위기 5:4-6; 마태복음 5:34-37; 야고보서 5:12), 
(3) 성경과 조화를 이루는 가르침을 제공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와 같지 않거나 (베드로후서 3:16), 
(4) 종교단체라고 주장하면서, 일을 통하여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거짓된 희망을 제공하고, 동시에 유일한 참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요 한복음 17:3; 디모데전서 2:3-6; 골로새서 2:8-10; 에베소서 2:8,9) 그 어떤 조직과도 연 계를 가져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도록" (로마서 12:17) 주의해야 합니 다. 동료 회원들의 유익을 위해서 흔히 경제적, 사회적, 혹은 정치적 유익을 위하여, 비밀 망토를 쓰고 모든 활동이 행해지는 “밀실”에서 문을 닫고 가지는 비밀스러운 회합은 모든 사람의 눈에 올바른 것을 행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고린도후서 6:17). 이것이 기독교인들에 대한 하나님 의 권면의 말씀이며, 또 비밀 결사에 관해 확실하게 적용이 가능한 말씀입니다. 

관심사: 
비밀 결사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조례의 선언이 어떤 조직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메이슨 조직에 관련하는 것이 이 선언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실과 너무나도 다른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처음에 작성한 선언문은 주로 프리 메이슨 조직에 대한 우려 때문에 쓰여 졌습니다. 그러나 이 공식 선언과 위에서 재확인한 사항은 한 조직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비밀과 맹세를 그들의 활동의 한 부분으로 만드는 모든 조직에 적용이 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이 위치에 대한 공식적인 기 술은 위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성회 조례, 9조, B, 4항에 기록되어 있다.



(Q15) 정규교회출석


정기적으로 교회에 참석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왜 기독교인은 집에서 그저 성경공부와 기도를 통하여서 영성을 개발할 수 없는가?


히브리서 10:25는 확실하게 명령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 지시의 말씀에 따르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회의 헌법은 교회가 “신약성경에 기록되어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을, 가능한 한 상세하게, 대표할”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교회는 매주 첫 날에 만났습니다. 교인들에게는 그날에 하나님께 드릴 헌금을 가져오도록 지시했습니 다 (고린도전서 16:2). 

교회에 가기를 원하는 사람의 이유는 흔히 하나님의 자녀에 대해 그들이 느끼는 감사 의 마음 때문에 영향을 받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보다 세상 친구들이 더 존경을 받는다면, 그때는 교회의 출석은 그 중요성과 매력적인 면에서 퇴색될 것입니다. 만일 세상의 죄악과 대조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성도들이 존경을 받고 아름답게 생각된다 면,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를 원할 것입니다. 

교회 예배는 그것이 인간의 것일 때 지루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실재적으로 임재하시는 예배는 진실한 신자에게는 결코 지루한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영적인 면을 추구하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름다움과 권능으로 임재하시는 곳에 참석하기를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것에 대한 우리들의 느낌을 떠나서, 우리들은 하나님이 다른 신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집에 참석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 중요성을 알아 보기 위하여 성경을 찾아보아야만 합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우리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중요성을 인정하기 위하여 매 주일마다 하루를 따로 남겨 두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출애굽기 20:8).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은 (마가복음 2:28) 안식일에 관한 율법에 충실하였으며, 그가 세상에 있을 동안에는 하나님의 집을 정기적으로 찾았습니다 (누가복 음 4:16).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 예배하는 처소에 정기적으로 참석할 필요를 느꼈다면, 그를 따르는 우리들은 그보다 덜 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성경의 전통으로 지켜오던 안식일은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한 주일의 첫날에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날로 변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이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함께 모이는 것이 필수적입니 다. 관계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들은 고립해서 살도록 지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역사적으로, 몇 사람의 은자(隱者)들은 명상하며, 또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서 세상을 멀리하고 떠났지만, 그러나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생활 양식으로 영원히 홀로 사는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친교의 중요성을 이해함으로, 친교를 위한 우리들의 선택은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친교를 가지려고 애를 쓰는 것보 다, 우리들은 교회에 갈 수 있으며, 심지어 다른 도시에 있을 때라도, 그곳에서 같은 신념과 믿음을 가진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역 교회에서 가지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의 친교는 정서 건강에도 좋을 뿐만 아니 라 기독교인의 헌신에도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서로 격려하고 (데살로니가전서 4:18), 위로하며 (고린도후서 1:3,4), 또한 서로의 짐을 져주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2). 동료 신자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교회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에서 실패할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정말로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개인적으로는 물론 다른 신자들과 함께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따르는 어떤 사람들은 일단 성경의 기본적인 교훈을 배우면 더 이상 교회에 참석할 필요가 없다고 합리화 시킵니다. 다른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위선자들”의 혼란 없이 혼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한 논리는 교회에 참석하지 않는 신자들의 영적 건강 상태에 대하여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교회에 가거나 혹은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집에서 경건의 시간을 가지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 두 가지 모두 건전한 기독교인의 생활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리고 집에서 성경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다른 신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덕을 세우며 또 교화를 받기 위해서 함께 나누지 않는 것은 이기적인 일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혼자서 그러한 권면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오순절 교회로서 하나님의 성회는 공중 예배에서 성령님의 은사가 역사하는 것을 믿습니다. 성령님은 여러 신자들을 통해서 그가 선택하는 대로 교회의 덕 세움을 위해서 그 은사들을 나타내십니다. 함께 만나는 것은 그러한 덕 세움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 다. “이 모든 일[은사]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 라” (고린도전서 12:11,12). 

믿는 사람들과 함께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지상 대 명령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필수 적입니다 (마태복음 28:19,20). 비록 교회에 참석하지 않고 그 주를 살면서 혼자서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러한 일은 일어 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잃어버린 자들에게 찾아가는 것은 서로를 격려하고, 도전 을 주고, 힘을 북돋아 주는 신자들 그룹의 원동력입니다. 우리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교회에 가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교회에 갑니다. 그 질문은 “신자가 교회에 참석하지 않고 기독교를 유지하고 영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질문은 “신자는 동료 신자들과 함께 만나는 것을 그치지 말라고 하는 성경의 영감된 명령에 순종함으로서 받게 되는 모든 유익과 상급을 잃도록 허락할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관심사: 

하나님께서 예배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나 타낼 수 있도록 예배를 계획하고 인도하는 것은 지역 교회 지도자의 책임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예배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완전히 헌신하도록 주님의 사랑하는 부르심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도록 해야만 합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예배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성령님의 임재하심과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몇 지역교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실망한 신자들은 그런 때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교회를 떠나거나 신자들과의 교제를 가지지 않는 대신에, 헌신적인 신자는 그러한 경우를 교회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영적인 도전의 시간으로 받아들일 것입 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지속적인 간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야고보서 5:16). 우리 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안에 주신 그룹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보내신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부분입니다. 교회의 출석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일에 신실함은 은혜스럽고 활력 있는 예배의 분위기를 만들어 줄 것입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제15장
신자와 적극적인 고백

하나님의 성회는 그의 초기부터 믿음생활의 중요성을 인정해 왔다. 성경이 그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믿음생활이 두드러지게 강조되어 왔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믿음은 두 가지를 믿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 것이다. (히11:6)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모든 하나님의 축복은 믿음을 통해서 받는다. 구원(행16:31), 성령세례(행11:15-17), 하나님의 보호(벧전1:5), 자유와 물질적인 공급을 포함한 약속들의 기업(히6:12) 및 증거의 동기(고후4:13) 등은 많은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 가운데 있는 것들이다.

모든 세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신자들이 강한 믿음을 보여주는 성경의 모범에 유의하는 것은 중요하다. (롬4:20-24) 그들은 믿음을 약화시키거나 파괴하는 것에 대하여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믿음을 더해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으며(눅17:50),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써 지속적으로 믿음을 키워야 한다. (롬10:17) 믿음의 생활은 곧 승리의 생활이다. (요일5:4)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때때로 사람들은 위대한 성경의 진리에 대하여 극단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가끔 교사들은 이러한 극단주의들을 옹호하였다. 어떤 때는 추종자들이 이러한 가르침들에서 더욱 벗어나 그리스도의 주장에 대하여 반대로 나타났다. 적극적 및 부정적 고백은 최근에 어떤 집단 내에서 극단적인 형태로 받아 들여진 표현들이다. 이에 관한 책이나 사용 형태에서 나타나는 정의는 이러한 용어의 의미에 대하여 어떤 통찰력을 제공한다. 이 극단들은 표면화 시킨다는 사실이 곧 고백의 교리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중요한 진리이다.

성경은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요일1:9) 그들은 그리스도를 고백해야 한다.(마10:32, 롬10:9,10) 그들은 선한 고백을 유지해야 한다. (히4:14, 10:23)

그러나 사람들이 교리를 강조함에 있어서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나거나 위배할 때는 그들은 그 교리를 존중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을 책망하고 그 교리를 존중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을 책망하고 주의 일을 말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이 극단들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키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어떻게 배치되는지 알리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적극적 고백의 가르침에 대한 입장들

적극적인 고백의 가르침은 “고백하다”라는 단어에 대한 영어사전의 정의에 근거하고 있다. 즉 “인정하다, 혹은 자인하다, 믿음을 인정하다” 등이다. 고백은 또한 믿게 된 어떤 것을 긍정하는 것이나 알려진 어떤 것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과 깨달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으로서 묘사된다. 이러한 관점은 한 단계 더 나아가서 고백을 적극적인 관점과 부정적인 관점으로 나눈다. 부정적인 것은 죄, 아픔, 가난 혹은 다른 원치 않는 상황을 인정하는 것이다. 적극적인 고백은 바람직한 상황을 인정하거나 자인하는 것이다.


이 가르침에 관하여 다양한 해석과 강조가 있겠으나 결론은 기분나쁜 일이 부정적인 고백을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피해질 수 있으며 좋은 일이 적극적인 고백을 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같다. 여러 책에 표현된 대로 이 견해에 따르면 신자가 부정적 자세를 인정하지 않고 적극적인 자세를 계속 긍정할 때 그는 자신을 위하여 좋은 환경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는 가난, 질병 그리고 아픔 따위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고백할 때만이 아프게 될것이다. 어떤 사람은 질병 자체와 질병의 증상을 인정하는 것의 차이를 구분하기도 한다.

이 견해는 하나님은 신자들이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좋은 차를 타고, 가장 좋은 것들을 갖기를 원하신다고 주장한다. 신자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당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은 사탄에게 그들의 돈에서 손을 떼라고 말하는 것이다. 신자는 그 필요가 영적이든, 육체적이든, 재정적이든 관계없이 그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다. 그것은 믿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행동하게 한다고 가르친다.

이 입장에 따르면 사람이 말하는 것은 그가 무엇을 받으며, 무엇이 될 것인지를 결정한다. 이와같이 이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도 못한 상태에서 고백하기를 시작하도록 가르침 받는다. 사람들은 그들이 말한 것을 가질수 있다고 가르침 받는다. 이러한 이유로 입 밖으로 나간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말을 충분히 반복하면 입 밖으로 나간 말은 궁극적으로 원하는 축복을 야기시키는 믿음을 낳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이 적극적 고백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문제가 없는 인생을 약속하고 있으며 이것의 옹호자들은 성경구절을 가지고 그것을 지지하는 것 같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문맥에서 떼어 생각하거나,그 주제에 관하여 성경의 다른 곳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무시할 때 문제가 생긴다. 극단주의는 진리를 왜곡시키며 궁극적으로 개인적으로는 신자들에게 상처주고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주장에 해를 끼친다. 신자들이 믿음의 생활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갖고 계신 승리에 대하여 연구할 때 모든 교리에서와 마찬가지로 균형잡힌 성경의 강조를 추구해야 한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과 동행함에 있어서 신자들을 돕기보다는 당황하게 하는 극단주의를 피하는데 도움을 준다.


신자들은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을 고려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성서해석에 대한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는데 그것은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라는 것이다. (고전2:13) 이 원리의 기본적인 적용은 확립된 교리 안에서 주어진 주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말해야 하는 모든 것을 고려하는 것이다. 성경의 전체적인 조명에 근거를 둔 교리만이 이 성경적인 해석법칙을 확인한다.

적극적인 고백의 가르침이 약함을 시인하는 것이 곧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재정적인 어려움을 시인하는 것이 가난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질병을 시인하는 것이 치료를 받지 못하게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면 그것을 성경의 조화와 반대되며, 이미 영역을 벗어난 것이다.

예를 들면 여호사밧은 적군에 대항할 힘이 없다고 시인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놀라운 승리를 안겨주었다.(역대하20장)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시인하였으며, 그가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완전하여져서 강하게 되었다.(고후12:9,10) 그리스도께서 필요한 것 이상으로 놀랍게 공급하신 것은 제자들이 무리를 먹일 만큼 충분히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인정하고 시인한 후에 있었던 일이다.(눅9:12,1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공적으로 수고할 수 있게 지도하신 것은 그들이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을 시인한 후의 일이었다.(요21:3-6)

이 사람들은 부정적인 고백을 사실과 반대되는 적극적인 고백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무엇이나 된 것처럼 가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처한 상황을 말하였다. 비록 그들이 부정적 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말했지만 하나님은 놀라웁게 간섭하셨다.

성경으로 성경을 비교해 보면 적극적인 말로 표현하는 것이 항상 행복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도 아님은 분명해진다. 바울, 스데반, 드로비모와 같은 초대교회ㅡ이 지도자들이 이러한 가르침을 몰랐기 때문에 풍부하고 건강한 상태로 살지 못했다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넘어간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다. 교리는 성서의 전체적인 테두리 안에서 개발될 때만이 건전하게 될 것이다.

“고백하다”에 대한 헬라어는 “같은 것을 말하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고백할 때 그리스도에 관하여 성경이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말해야 한다. 사람들이 죄를 고백할 때 죄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말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성경의 어떤 약속을 고백할 때 그 주제에 대한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과 일치하는 약속을 말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어거스틴은 이에 관하여 적절하게 말하였다. “당신이 복음 안에서 좋아하는 것을 믿고 싫어하는 것을 배척한다면 당신이 믿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적절하게 생각해야 한다.

적극적인 고백의 교리가 한 사람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다고 가르칠 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한다고 적절하게 강조하지 못한 것이 된다. 다윗은 주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소원을 비쳤을 때 그는 가장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대상17:4) 다윗은 재료를 모으도록 허락을 받았지만 성전건축은 솔로몬이 할 일이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였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가시를 제거하는 대신에 바울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다.(고후12:9)

하나님의 뜻은 알 수 있고 믿음으로 주장할 수 있지만 마음의 소원이 항상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결정하는 기준은 아니다. 즐길 수 있는 것이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경우가 종종 있다. 야고보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3)고 기록하였는데 여기서 이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정욕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타락한 욕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원하는 기쁨 혹은 즐거움을 의미한다. 이 단어에 대한 번역으로는 정욕이라는 말보다 기쁨이라고 번역한 곳이 여러 군데 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께서 그 잔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였다. 그것은 그의 소원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도에서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셨다. 그래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고 하셨다.(눅22:42)
성경은 신자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모를 것이다. 그는 바울이 가끔 그랬던 것처럼 당황하게 될 때도 있을 것이다.(고후4:8) 그때에 단순히 마음의 소원에 근거한 적극적인 고백을 하기 보다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롬8:26,27)
하나님의 뜻은 항상 신자의 계획이나 욕망보다 우선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야고보의 말은 항상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약4:15)

신자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적극적인 고백을 반복하는 것만큼 간단한 것이 아니다. 기분좋은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다. 반대로 기분 좋지 않은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있을 수도 있다. 신자들은 바울의 친구들이 했던 것처럼 “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행21:14)하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고난이 없는 삶을 요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신자는 강청하는 기도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한다.

적극적인 고백의 견해가 신자들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들에 대하여 기도하기 보다는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칠 때 그것은 강청하는 기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간과하게 만든다. 적극적인 고백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물질적, 육체적 및 영적인 축복의 영역 안에 있으므로 신자들은 이러한 축복들을 위하여 기도하기 보다는 그것들을 고백하고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약속된 축복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이다. 

양식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6:11)하며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지혜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이지만 성경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약1:5)고 말씀한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라고 하셨으나(눅24:49), 또한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가르치셨다.(눅11:13)

홍해에서 모세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기도하지 말라고 하시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출14:15) 신자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깨우쳐 주는 성경구절이 많이 있다.(롬12:12, 빌4:6, 살전5:17) 예수께서는 기도에 있어서 강청함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자기의 손님에게 줄 빵을 구하려고 밤중에 찾아온 강청하는 친구에 대한 묘사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기본원리가 되었다.(눅11:5-10)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주님이 기도에서 강청함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경우이다.(눅18:1-18) 이 사람들에게 기도없는 적극적인 고백이 아니라 강청함을 권유하셨다.

하나님은 길은 사람의 길보다 높아서 우리는 성경 안에 있는 모든 명령들에 대한 이유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지혜로서 필요를 채워주기 위한 과정의 일부로서 기도에 기름을 부으셨음을 안다. 강청하는 기도는 의심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순종의 표시일 수도 있다.

신자들은 이생에서 고난 받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적극적인 고백의 가르침은 이생에서 왕처럼 다스린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신자가 환경에서 지배당하기 보다는 환경을 지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가난과 질병은 신자들이 지배해야 한다고 자주 언급되는 환경들 가운데 들어있다.


만일 신자들이 이 세상의 임금들을 본으로 삼는다면 그들이 고난이 없는 인생을 추구하는 것은 맞는 말이다.(그러나 이 세상의 임금들조차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영적인 성장보다는 물질적 육체적 번영에 더욱 관심이 많다. 그러나 신자들이 그들의 본으로 왕중의 왕을 택한다면 그들의 욕망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과 모범에 의해서 변화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될 것에 대하여 기록한 롬8:17이 진리라고 인정할 것이다. 즉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바울은 자기의 약함을 감추기 보다는 그 약함 안에 있는 영광에 대하여 자랑하기까지 하였다.(고후12:5-10)


그리스도는 부요하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고후8:9) 그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마8:20)

하나님이 그의 예비하신 것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많은 재물을 축척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지만 만일에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필요할 때 육체적인 쾌락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중요한 것이 비극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심을 그만 두신 적이 없었고,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그는 고난 가운데 계셨다. 그는 장로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마16:21, 17:12) 그는 고난당하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 먹기를 원하셨다.(눅22:15)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제자들은 그의 고난이 예언의 성취였음을 인정했다.(눅24:25,26,32)

신자들이 이생에서 왕처럼 다스리는 것이 왕의 모델로서 그리스도를 취하는 것임을 깨달을 때, 그들은 고난당할 수 있음과 때로는 모든 환경을 기분좋은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기분 좋지않은 환경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보다 왕다운 것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그가 고난당할 것을 보았다.(행9:16). 후에 그는 골로새인들을 위하여 당한 고난을 기뻐하였다. 그는 그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그의 몸에 채우는 것”으로 보았다.(골1:24) 하나님은 신자들의 필요를 공급한다고 약속하시고, 경건한 자를 유혹에서 어떻게 건지는지 알고 계신다. 그러나 그리스도처럼 인생을 다스리는 것은 또한 고난을 포함을 하고 있다. 자신을 주님께 맡긴 신자는 이것을 받아 들어야 한다. 만일에 인생이 기준 좋은 경험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는 환멸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며, 그가 그 마음에 있는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냉소주의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눅9:23) 이것은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을 부인하는 것이며 우리의 문제들을 시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들은 항상 믿음의 부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들은 믿음에 대한 자랑거리일 수도 있다. 이것은 히11:32-40에서 크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레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자들은 실재적인 시험을 적용해야 한다.

이 적극적인 고백의 가르침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조사해 보면 풍족한 사회에 살고 있는 기존의 크리스찬들을 향하여 호소하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그들은 “우리는 당신들이 믿는 것과 똑같은 것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를 실천하는데 그것이 당신들과 다른 점이다.”라고 말하면서 영적인 엘리트 의식을 부추긴다.

믿음에 대한 실재적인 시험은 그것이 우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그 가르침이 풍족한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는가? 혹은 그것이 세상의 난민 가운데서도 역사하는가? 그 가르침이 믿음을 위하여 무신론자의 정권에 의해서 옥에 갇힌 신자들에게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 잔인하고 무자비한 독재자의 손에 순교를 당하거나 가혹한 육체적 상처를 입은 신자들은 자격미달의 신자란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는 우주적인 적용을 지닌다. 그것은 부유한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빈민굴에서도 효과가 있다. 그것은 도시에서 뿐만 아니라 정글에서도 효과가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외국에서도 효과가 있다. 그것은 부유한 나라에서나 가난한 나라에서 똑같이 효과가 있다. 그 열매를 시험하는 것은 여전히 교사 혹은 가르침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사람에게 속한 것인지 결정하는 한 방법이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

신자들은 레마라는 말을 정확하게 사용해야 한다.

적극적인 고백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사람들 가운데 헬라어 “레마”에 대한 문헌은 거의 없으므로 구두 전달(Oral communication)에서 사용된 그대로 그것을 상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짓는 것은 일반적으로 이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로고스는 기록된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고, 레마는 현재 믿음에 의해서 말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믿음에 의해서 말해진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영감을 받은 것이 되고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을 갖는다고 한다.

이 구분에는 두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첫째로 이 구분은 헬라어 신약에서나 혹은 70인역에서 정당화되지 않는다. 두 단어는 헬라어 신약이나 70인역에서 동의어로 사용된다. 70인역의 경우에 레마와 로고스는 둘다 대화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사용되는 히브리어 “다바르”를 번역하는데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다바르”라는 단어(번역하면 하나님의 말씀)는 예레미야 1:1과 2절에서 사용되었다. 그런데 1절에서는 레마로 2절에서는 로고스로 번역되었다.

신약성경에서 레마와 로고스는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베드로전서 1:23과 25 절 같은 구절에서 볼 수 있다. 23절에서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로고스”라고 썼고, 25절에서는 “주의 레마는 세세토록 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엡5:26에서 신자들은 “물로 씻어 레마로” 깨끗이 되었다고 했다. 요15:3 에서 신자들이 “내가 일러준 로고스로 이미 깨끗하여졌다.”고 한다.

로고스와 레마 사이의 차이는 성경적 증거에 의해서 뒷받침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로고스로 말해졌든지 레마로 표현되었든지 상관없이 그것은 영감된 것이며, 영원하고 힘이 있는 기적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었든지 말해졌든지 그 기본적인 특성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둘째로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하는 사람들 가운데 문제가 있다. 성경구절은 믿음의 유추나 문맥에 관계없이 선택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레마 원리라고 하는 이런 작용에서 사람들은 말씀이 그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대로 따르는 것보다 그 말씀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의미하도록 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다. 몇가지 예에서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기 때문보다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해 진다. 신자들이 성경의 구절을 문맥에서 따로 떼어 놓거나, 어떤 구절은 영원하고, 다른 구절은 현재의 것으로 하는 크리스찬 실존주의의 형태를 피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결론

어느 교리에 대하여 생각할 때 그것이 전체적인 성경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는지 질문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진리의 전체적인 견해 이하에 근거한 교리는 그리스도의 목적에 해를 끼칠 뿐이다. 그것은 때로 성경을 송두리째 거부하는 견해보다 더 해롭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언급되어 있다면 그 가르침이 성경의 다른 원리와 모순되거나 극단적인 강조를 하고 있어도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치료, 필요에 대한 공급, 믿음 및 신자의 권위 등과 같은 위대한 진리를 가르친다. 성경은 절제된 마음이 승리하는 생활에서 중요한 요소임을 가르친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들은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의 테두리 안에서 항상 생각해야 한다.

잘못 사용되는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의 이러한 위대한 진리에서 물러서려고 하는 유혹을 받게 된다. 어떤 경우는 사람들이 과장된 강조가 그들의 기대를 항상 만족시키지도 못하며 문제에서 해방시켜 주지도 못한다는 것을 발견할 때하나님까지도 등질 수 있다.

그러나 교리적인 탈선들이 발전되어 가는 사실이 그것들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거부하는 이유가 아니다. 의견차이의 존재가 신자들이 성경을 더욱 열심히 연구해야만 되는 이유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종들이 충실히 전체적인 하나님의 지혜를 선포하는 이유이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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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네 번째 
질문 기독교인의 소송

기독교인은 소송에 연관되어야 하는가? 
이 문제에 관해서 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되는 성경의 원칙이 있는가? 
기독교인들이 그들을 해치는 다른 사람들을 고소하는 것이 허용되는가? 

다른 신자들을 소송하는 것에 대하여 신자들에게 권면(고린도전서 6:1-8)하면서 바울이 가진 주요한 관심사는 그러한 행위가 교회의 평판과 그리스도에 미치는 불명예에 관한 것입니다. 이 점을 마음에 두고 이해하면서, 언제 법적 행동이 적절하고 언제 적절하지 않은가를 질문하는 것은 적합합니다. 성경이 우리들의 행위에 대한 권위있는 법칙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만일 그것이 그러한 행동을 허락하는지 아니면 금지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성경을 공부해야만 합니다. 

구약성경은 상해나 손실에 대해서 보상이나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 니다. 복수에 관한 모세의 율법(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생명은 생명으로 --- 출애굽기 21:23,24)은, 오늘날의 공의에 대한 서구세계의 표준으로는 잔인하고 미개해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복수하는 일을 제한하고 가족의 불화를 없애는 일을 하였습니다. 아무도 생명 은 생명으로 혹은 눈에는 눈으로 형벌을 가하는 것보다 더 정확한 형벌은 없습니다. 덜 심각한 경우에는 유죄 당사자가 가해자가 받은 손해를 보상하기 위하여 금전을 지불할 수 있 었습니다 (비고. 출애굽기 22:12 - 23:9). 사울과 그의 후계자의 왕정시대 전에는 재판은 흔히 그 도시의 장로들이 행했습니다 (룻기 4:1-12). 왕정시대에는 시민 사이의 잘못과 범죄에 대한 징벌은 왕과 그의 행정관들에게 맡겨졌습니다 (열왕기상 3:16-28).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구약성경의 율법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높은 표준의 행위를 가르쳤습니다. 해를 끼친 사람에게 복수를 하는 대신에 예수님은 상처를 받거나 피해를 당한 사람에게 다른 뺨을 돌려 대며, 겉옷까지 내어주고, 그리고 십리를 동행하라고 지시했 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38-48, 6:14,15). 그러한 행위는 악을 선으로 극복하게 만들었으며, 잘못한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어서 그를 개심(改心)하게 만드는 의도된 효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로마서 12:17-21). 이러한 “새로운 의로움”은 상해를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상해한 것 에 대해 벌을 주며, 혹은 손해에 대해서 배상하는 것 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속 마음 가짐과 그의 “원수”의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더욱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가해 한 사람이 어떤 실제적인 보상을 하지 않아도 그냥 내버려두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처음 하 는 행위가 개인의 화해를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제 삼자인 기독교인에게 그들 사이를 중재하도록 요구할 수도 있었습 니다. 만일 그것이 실패했을 때에는 그 문제를 전체 교회 앞으로 가져왔습니다. 그 죄를 범한 사람이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기를 거절할 때에는 그를 이교도인과 같이 여겼습니다 (마태복음 18:15-20). 

고린도전서 6:1-8에는 사도 바울이 신자가 다른 신자에 대해 세상의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신자들은 대부분 가난하였으며 (고린 도전서 1:26-31), 그 소송은 재정적으로 다른 사람을 속인 사람에 대한 것을 취급했었기 때문에, 그 소송은 고린도 교회에 속해 있는 이름있는 부자 두 사람이 포함되었을 것 같습 니다. 그 소송에 대한 원고(原告)는 예수님의 훈계를 따르거나 (마태복음 5:38-48) 마태복음에 기록된 것처럼 교회를 포함시키는 대신에 (마태복음 18:15-20), 소송을 제기한 것처 럼 보입니다. 불행하게도 고린도 교회는 세상 법원 앞에서 두 신자들이 투쟁하는 것이 알려짐으로서 기독교 지역 사회가 추문을 빚어내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혜” 로 소문났던 교회(고린도후서 11:19)에 그러한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고린도전서 6:5)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교회에 치욕을 안겨주는 것보다 고통을 당하는 것이 더 나을 뻔하였다고 (고린도전서 6:1-7) 그 원고를 꾸짖었습니다. 그는 피고가 불의를 행하고 속였다고 (고린도전서 6:8)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교회가 그러한 일을 취급하지 않았다고 꾸짖었습니다 (고린도전서 6:2-6). 바울은 만일 죄를 범한 사람이 “이방인과 세리”라고 교회가 선언하면 그 소송이 적당 한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8:17). 아마도 그러한 소송은 세상의 정부가 정의를 구현하고, 무법을 방지하며, 죄인을 벌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고 하는 로마서 13:1-5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허락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신자가 다른 신자에게 해를 끼쳤을 때, 그 피해를 입은 신자는 그 문제 를 하나님의 판단에만 맡기고 단순히 잊어버려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만일 그 신자가 기도하고 또 주의 깊게 고려한 후에 그 문제를 계속 다루어야겠다고 결심한다면, 그때에는 먼저 당사자와 직접 만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만일 그것 을 통해 해결하지 못할 경우에는 믿는 사람인 중재인을 찾아야만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해서도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으면, 그 문제는 교회 앞으로 (담임 목사, 인정받는 장로나 집사, 그리고 필요하다면 회중에게) 가져와야 합니다. 때때로 법적 충돌은 신자와 신자 사이에서가 아니라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그러한 때에 기독교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바울 자신은 로마 법 아래서 자신을 방어하는 권리를 행사했습니다 (사도행전 16:37-40. 18:12-17, 22:15-29, 25:10- 22). 

명백히 바울은 “다른 뺨을 돌려 대[라]”는 말씀을 시민에게 관계된 모든 법적 권리의 상실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하지는 않았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정부의 기능이 정의를 구현하고 잘못할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라는 것을 성령님께서 주신 총명함으로 이해하면서, 그러한 권리를 행사했습니다 (로마서 13장). 해를 끼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또한 죄 없는 사람을 보호한다는 의미도 됩니다. 따라서 신자에 대한 질문은 절대로 “어떻게 내가 개인적인 복수를 할것인가?” 가 아닙니다. 대신에, 적절한 질문은 “내가 어떤 행동을 (소송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해야 사회의 정의를 가장 잘 구현하며, 해를 끼친 사람을 처벌하고, 죄 없는 사람을 보호하며, 그리스도에 대하여 부정적인 반향을 가장 적게 가져올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신자들 사이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소진되고, 피해를 입힌 사람이 잘못된 일을 고치기를 거절한다면, 그 때에는 피해를 입은 사람은 마태복음 5:38-48, 6:14,15의 말씀과 로마서 13:1-5의 말씀의 균형을 맞추어야만 합니다. 개인의 동기부여를 검토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만 합니다. 

1. 상해의 배상에 대한 나의 욕망은 단순히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정의를 구현하고 무법을 방지하기 위하여 세속 법원의 힘에 호소하려는 것인가? 
2. 고린도 사회가 아닌 미국 사회의 상황에서, 만일 내가 세상 법원에 소송한다면, 교회와 그리스도에게 해를 끼치게 될 것인가? 
3. 나는 나의 청구(혹은 방어)에 완전히 정직한가? 아니면 자기기만을 통하여 상해금 액보다 더 많은 (혹은 더 적은) 보상을 받기 위하여 (혹은 피하기 위하여) 노력하 고 있는가? 
4. 성령님은 절대로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말씀에 반하는 권면을 하지 않으시기 때 문에, 그 문제에 대해서 철저하게 기도한 후에, 어떻게 하는 행동이 “성령님에게 좋게 보이는가?” 
5. 추가적인 보호의 일환으로, 교회의 지도자나 장로 직분의 위치에 있는 다른 신자들의 권면은 무엇인가? 

관심사: 
미국 사회에서는 또 하나의 문제가 고려되어야만 합니다. 배상 책임 보험 (liability)과 다른 형태의 보험이 그것입니다. 공중을 위한 정책은 여러 가지 상해에 대한 개인 보상의 방법으로 보험을 제정했습니다. 여러 경우에 소송 관계자는 법적으로 피고일 지는 모르지만 그 상해에 대한 실제적인 지불인은 보험 회사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만일 기독교인이 다른 신자의 나쁜 운전 때문에 심하게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십시다. 두 당사자 사이의 법적 소송은 개인적인 악한 감정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상해를 입은 사람이 그 사고로 인한 경제적 손실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한 것이며, 그것은 보험자의 자동차 배상 책임 보험이 보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에 그 신자는 (고린도의 경우와 같이) 세상의 법정으로 그 문제를 가지고 가기 전에 교회로 그 문제를 가지고 가지는 않으며, 공중의 정책에 의해서, 피해자가 단지 법적 체계를 이용하도록 함으로서 그 상해에 대한 “모든 것을 완전히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미국 지역 사회의 여러 곳에서는 신자인 변호사들이 해를 끼친 사람을 위한 조정 혹은 중재 그룹을 형성했습니다. 

그러한 그룹으로부터 중재를 받는 것에 대한 법적인 이점은, 당사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적절한 합의서를 통하여, 기독교 중재 그룹이 내린 결정이 세상 법정에서의 결정을 대신하는 것으로 인식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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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교회의 휴거

하나님의 성회의 근본진리에 대한 성명은 “복스러운 소망”이라는 제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께서 오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부활하고 살아남은 자들과 함께 변화할 것은 간절하고 복스러운 교회의 소망이다.” (살전4:16, 롬8:23, 딛2:13, 고전15:51,52) 

예수는 그가 다시 오실 것을 가르치셨다.

예수는 그가 다시 지상에 오실 것을 가르치셨다. 그는 이 사실에 대하여 그의 제자들이 항상 준비되어 있도록 주의 깊게 경고하였다.(마24:42-51, 25:1-13, 막13L37, 눅12:37) 그들은 현재의 시대가 예수의 오심과 더불어 끝이 날 것이라고 이해하였다.(마24:3) 그의 재림에 대한 확증은 그가 죽으시기 전에 그의 추종자들을 위로한 진리들 중 하나이다.(요14:2,3)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에 하늘을 쳐다보는 무리들에게 두 천사가 나타나서 그가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되풀이 하였다. 그들은 그가 가신 그대로 오실 것이라고 선포하였다.(행1:11) 이것은 그의 재림이 문자적으로 육체적으로 볼 수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서신서가 예수의 재림을 가르친다.

신약의 서신서들은 예수의 재림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며, 재림의 절박성은 이 주제를 다루는 모든 성경구절을 통하여 나타난다. 비록 초림과 재림에 관한 가르침의 전체 대의는 재림이 경고 없이 갑자기 일어날 것임을 강조하며, 신자는 끊임 없이 준비된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빌4:5, 히10:37, 약5:8,9, 계22:10)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이러한 기대의 상태에서 살았다.(고정1:7, 살전1:9,10) 고전15:51과 살전4:17에서 바울이 “우리”라고 한 것은 그가 예수께서 오실 때에 살아 있으리라는 소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상으로부터 신자들의 휴거

재림에 관한 성경구절을 비교해 보면 어떤 것은 죄인들의 심판을 수반하고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가시적인 사건으로 말하며, 또 다른 경우는 재림이 신자들에게만 알려지며 지상으로부터 그들의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후자의 경우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휴거라고 불리운다. 이 단어는 우리말 성경에는 없으나, 널리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웹스터 사건”(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Unabridged)에서 휴거에 대한 정의를 “그리스도가 참된 교회와 그에 속한 자들을 그들이 그 주와 함께 하늘의 기쁨을 즐길 수 있는 지구 위의 왕국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라고 내린다. “휴거된다.”는 단어는 살전4:17의 “끌어 올려”라는 표현대로 번역해도 무방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가 오실 때에 한 장소에서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을 신자들이 지구에서 갑자기 없어지고, 불신자들은 남아서 환난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마24:26-42) 예수께서 그의 재림에 대하여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를 보고 통곡할 때라고 말씀하셨다.(마24:30) 사도바울은 주의 재림을 악인에 대한 심판과 진노의 때라고 말하였다.(살후1:7-10)

살전 4:13-18에서 바울은 재림의 다른 양상을 생각하였다. 이 간단한 구절은 신약에서 휴거에 대한 가장 직접적이고 명백한 가르침이며 이것은 오직 살아있는 신자와 주 안에서 죽은 신자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있다. 이때에 재림하는 그리스도를 보는 악한 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바울은 예수께서 공중에 오시는 것을 묘사했으나 슥14:4 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재림시에 그의 발이 땅에 닿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요일3:2 말씀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며, 우리는 주님과 같이 될 것이다.

살전4:17에서 사용된 “끌어올려”에 대한 헬라어는 행8:39에서 빌립이 에디오피아 사람에게 세례를 준 후에 사용된 “이끌리어”라는 단어와 똑같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단어는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 것을 말하고 있는데 휴거시에 지구에서 신자들을 끌어올릴 능력의 근원을 밝히는 것이다.

살후2:1에서 바울은 휴거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이라고 불렀다. 이 “모임”에 대한 헬라어는 히10;25에서 예배를 위한 크리스찬의 모임에 대하여 사용된 “모이기”와 똑같은 단어이다. 그것은 성도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의 주변에 모이는 성도들에 대한 한폭의 그림이다.

경건한 사람들이 지구에서 초자연적으로 휴거되는 것은 성경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에녹의 생애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은 하나님과 동행한 후에 지구에서 기적적으로 없어진 것이다.(창5:21-24) 히브리어 기자는 이 경험을 “죽음을 보지 않고 이 세상에서 돌연히 없어진 것을 보여준다.(왕하2:1-13) 고전15:51은 살전4:14-18과 똑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바울은 휴거시에 살아있는 신자와 죽은 신자에게 일어날 변화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는 이것을 비밀이라고 불렀으며(고전15:51), 전에는 숨겨졌으나 성령에 의해서 알려진 진리라고 하였다. 빌3:21에서 바울은 주님의 오심과 “우리의 낮은 몸”이 변하게 되는 때와 연결 시키고 있는데 이것 역시 휴거에 대한 또 다른 언급이다.

휴거에 관한 구절은 그의 백성을 위해서 주님이 오시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한 구절은 그의 성도와 함께 오시는 주님을 묘사하고 있다. 골3:4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와 함께 나타나는 신자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유다서 14절 역시 그의 공적인 나타남과 관련된 많은 다른 구절들에서 말하고 있는 심판을 행하시려고 주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재림하시는 것을 미리 보고 있다.


성경은 스스로 모순되지 않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위하여 오시는 것과 성도들과 함께 오시는 것은 그의 오심에 대한 두가지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이다. 이 두가지 상태 사이의 중간 시기는 적그리스도가 통치하고 악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는 대환란 시기라고 가정하는 것은 성서적으로 정확하다고 믿는다. (단12:1, 10-13, 마24:15-31, 살후2:1-12)

크리스찬과 대환란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께서 오시기 전에 심각한 환란을 견뎌야 하지만 교회는 대환란이라고 불리우는 시기 이전에 휴거될 것이다. 살후 2장에서 바울은 주의 날이(대환란은 주의 날의 일부이다.) 시작되기 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야만 한다고 가리키고 있다. 불법의 사람(적그리스도)이라 하는 한 사람이 나타나야 한다. 바울의 시대부터 불법의 비밀이 활동하였으나 참된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는 영이 막고 있다. 오직 교회가 휴거에 의해서 지구에 없어질 때 이 사람은 공적으로 앞으로 나올 수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있는 휴거에 대한 구절에 이어서, 살전 5장에서 바울은 주의 날에 대하여 경고하였다.(살전5:2,3) 그리고 그는 즉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이 임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시키고 있다.(살전5:4) 바울이 여전히 주의 날에 대하여 말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살전5:9) 바울이 대환란을 포함하여 주의 날의 심판에서 신자들이 구원받을 것을 의미했다는 것은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찬은 주님의 나타나심에 대하여 주의해야 한다고 신약성경은 여러차례 말한다. 그러나 대환란이나 적그리스도의 출현에 대비하라고 가르치고 있지는 않다. 그러한 일들이 휴거 이전에 일어나야 한다고 기대하는 것은 신약에 충만하게들어있는 임박성에 대한 가르침(the teaching of imminence) 시대의 마지막 징조가 나타날 때 그들은 위를 보며, 대환란이 아니라 그들의 구속을 기대하면서 고개를 들어야 한다.(눅21:28) 주님의 오심에 대한 징조들은 그가 공적으로 나타나기 전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징조들이 휴거 이전에 이루어져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건들이 휴거 이전에 일어나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임박성의 교리(the doctrine of imminence)와 조화되지 않는다.

교회가 대환란 전에 세상에서 들려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다루시는 것과도 부합된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 안에 안전하게 들어갈 때까지 홍수를 보내지 않았다. 그는 소돔에서 롯을 구출할 때까지 소돔을 멸망시키지 않았다. 성경의 무게는 환란 전 휴거를 지지하는 편에 실려 있다. 신약에서 재림에 대한 가르침이 있는 곳마다 절박성이 강조된다. 휴거 이전에 다른 사건을 개입시키는 것은 이러한 가르침에 위배된다.


크리스찬들이 주님의 오심을 바라보는 동안 디도에서 한 바울의 말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즉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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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춤
기독교인은 사교춤을 추거나 혹은 심지어 춤추는 것에 참가해도 괜찮는가?
성경은 이 주제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하는가?
춤에 대한 관심사는 무엇이며 그것이 영적 서약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열 세 번째 질문
춤을 출 것인가 추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은 오랜 세대를 걸쳐서 기독교인들을 난처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최근에 교회 지도자들이 언급하기를 무시했었던 문제점이다. 춤을 추는 것이 아무런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서 몇 가지 주장을 합니다.

(1) 춤은 자세를 바르게 만들어 주며 사회적 품위를 얻도록 도와준다.
(2) 성경은 춤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3) 몇몇 비 오순절적 교회들은 젊은 사람들을 위해서 춤을 주선하고 후원한다.
(4) 춤은 친교를 위한 즐거운 활동이다.
(5) 거의 모든 사람들이 춤을 추며,

그러기 때문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것에 동참해야 한다. 교회는 정신적, 육체적, 그리고 영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면에서도 교인 들이 발전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 네 가지 분야에서 개인이 발전하기 위해 ‘춤’이 제일 최고의 방법인가요? 개인이 춤을 추는 것을 허락함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어떤 사람이 비극적으로 뒷걸음질치며 결국에는 구원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그의 영적 복지에 위험한 기회를 주는 것일까요? 

사교춤을 추는 것을 받아들이는 교회는 파괴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진 세상의 모양을 받아들임으로서 영적 쇠퇴의 위기를 맞게 될까 요? 춤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들은 매번 그 말이 사용될 때의 문맥을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24번 정도 춤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들 중에서 성경은 그 어느 하나도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교춤을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긍정적으로 사용되었을 때, 그 말은 (예배로서) 하나님께 대하여, 혹은 (다윗과 같이) 승리하고 돌아오는 영웅에 대하여 즐겁고 넘쳐흐르는 축하를 표현하였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가지고 시내 산으로부터 내려왔을 때 무슨 종류의 춤이 추어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모세가 그 부적절한 축하와 술 마시고 떠드는 것에 대해서 노(怒)를 발하였었다는 것을 압니다 (출애굽기 32:19). 우리는 또한 마가복음 6:22-29의 내용으로부터 헤로디아의 딸 이 헤롯과 그와 함께 한 술에 취한 사람들 앞에서 추었던 춤이 매우 강한 흥미를 돋우게 하거나 감각적인 것이어서 왕이 적절한 판단을 못하고 세례요한의 머리를 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었는데 --- 그 명령은 그가 내리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사교춤을 지지해주는 성경말씀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기독교인들이 삼가해야 하는 악과 죄악스러운 행위의 목록에 춤이 특별히 명시되어 있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춤이 초대 신약 교회가 세속적인 사회로부터의 구별됨을 표시하기 위해서 애를 써야 했던 그 무엇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은 이성 사이에 어떤 육체적 접촉으로 인한 감정과 정욕에 대한 주의로 채워져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유혹, 특별히 정욕과 성적 유혹을 피할 것 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18; 디모데전서 6:9-11; 디모데후서 2:22). 비록 사교춤을 추는 많은 부부들이 부도덕적인 행위를 결코 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데살로니가전서 5:22은 우리들이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릴 것을 권합니다" 

악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쉽게 악에 이를 수 있는 그러한 유혹을 피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중에서 가지는 사교춤이 외딴 곳에서 애무와 다른 육체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갖는 부부들보다는 훨씬 더 낳은 대안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교춤은 육체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을 단념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육체적 친밀함을 더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의 성회는 사교춤이 순진한 사람을 유혹과 죄악의 길로 이끌어갈 수 있는 잠재력이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사교춤을 추는 것을 반대해 왔습니다. 그러나 춤을 사절하는 것 그 자체가 비도덕적인 행동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는 것 은 아닙니다. 만일 마음이 어떤 잘못된 것에 머문다면 어떠한 주의나 법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젊은이들은 남녀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위에 기술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해당 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자신들은 개인적으로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 단순히 춤이 제공하는 우정과 교제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춤을 추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모험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분명히 우리의 사회 --- 우리들이 부름을 받은 세상 --- 의 상태는 중요한 다른 무엇이 더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도덕적 표준과 순결과 거룩함에 대한 확신이 구식이 되어버렸고, 사람들이 율법주의로부터 해방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을 우리들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들어왔습니다. 

사회는 음행, 단절된 관계, 이혼, 혼외 임신, 성병, 그리고 가까운 친구나 가족들에 대한 감정적인 폭력, 등의 형태로 나타나 는 도덕적 표준에 대한 이러한 방탕한 태도에 대하여 지금 무거운 값을 치루고 있습니다. 낮아진 도덕적 표준때문에 일어나는 이러한 비극적인 결과는 우리들의 교회에서 그 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덕적 타락에 직면하여서, 교회는 그들의 백성이 구별되고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원하심에 비추어, 자신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사교춤을 추는 것을 절제할 것을 모든 기독교 성인과 부모들에게 요구합니다 (고린도후서 6:16-18; 디도서 2:11-14; 디모데전서 2:21-22). 


관심사: 우리나라 어떤 지역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의 기독교 청년들이 고등학교의 댄스 파티와 무도회에 참가하고 있다고 추정됩니다. 청년들을 “진실된 사랑은 기다린다”는 운동에 참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러한 부모들의 일부는 또한 사교춤이 그들 자녀들의 발달에 똑같이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것은 모순되는 일입니다. 춤에 참가함을 통하여 유혹을 받게 될 때에 성적 순결에 대해 주의를 주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적 도덕성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 때문에 단 한 생명이라도 영원히 상실 된다면 그것은 결코 어떤 개인, 부모, 혹은 교회라도 허락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멸망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교회도 그러한 일이 일어나게 만들지도 모르 는 그러한 행위에 대해서 경고하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또한 춤을 추는 곳 대부분의 환경이 유혹적이고 꾀는 분위기 인 것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음악, 불륜한 가사, 희미한 불빛, 그곳에 참석하는 어떤 사 람들의 정숙하지 못한 옷차림 --- 모든 것들이 더 큰 유혹으로 이끄는 육체의 접촉의 밀도를 증가시켜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립학교의 춤에 대해서는 이러한 묘사가 적합한 것이 아니라고 옹호하지만, 춤을 통하여 이루어진 사귐은, 나중에는 기독교인의 생활 형태에 전적으로 위협을 주는,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한 행동이 허용되는, 그러한 환경에서 춤에 휩쓸 려들도록 발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여러 곳에서 어떤 기독교인들은, 흔히 건전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죄악 된 환경에서 춤을 춘다는 이유 때문에 춤추는 것을 반대하는 의견을 없애기 위한 방법으로서 기독교 현대 음악을 이용하여 “기독교인 춤 클럽”을 조직합니다. 춤이 흔히 다른 악과 연 결된다는 바로 그러한 생각만으로도 아무리 좋게 생각한다 할지라도 도덕적으로 커다란 위험을 주는 그러한 활동을 위험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이 되어야만 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제13장 동성연애

남자이건여자이건 간에 동성연애 행위는 국가적인 도덕기준의 심각한 침식을 반영하는 영역이다. 동성연애자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전례없는 대담성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탈선에 연루된 것을 부인하는 다른 사람들이 이제는 이러한 사람들의 옹호자가 되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크리스찬들이 깊이 관심을 가지는 한 가지 이유는 동성연애를 국가적으로 용인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그 국가의 영적 상태의 한 표시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표류하였을 때, 그 민족은 남색(sodomy)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악을 용납하였다.(왕상14:24)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 동성연애는 용인되지 아니하였다.(왕상15:12)

하나님의 성회는 모든 믿음과 행위는 성서에 근거하여 평가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성경은 동성연애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권위있는 법에 의하여 그 입장이 확립되도록 고려해야 한다.

동성연애는 죄이다.


때때로 인간적인 이유는 동성연애를 심리학적인 문제이거나, 육체적인 상태 혹은 생활방식의 신중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죄라고 한다. 이 문제에 관한 교회의 관심은 소수 그룹에 대한 차별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문제이다. 성경은 이것에 대하여 명확하게 말씀한다.


1. 동성연애는 하나님이 태초에 제정하신 성의 원리에 반대되기 때문에 죄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1:27) 하나님이 남자를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셨다(창2:18)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남자에게 적합한 배필을 창조하셨다.(창2:18) 남자의 외로움은 다른 남자를 창조함으로써 제거된 것이 아니라 여자를 창조함으로써 제거되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이 여자를 그에게 데려왔을 때 아담음 “이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칭하리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3,24)라고 하였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성의원리를 제정하셨는데 이 원리에 의하여 인간이 번식하게 되었다. 심리학적으로 이러한 관계는 건전하였다. 육체적으로 이 관계는 자연스러웠다. 사회학적으로 이상적인 가정 단위를 세웠다. 성경적인 개념은 인간의 성이란 이성적으로 일부일처적 관계가 이상적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동성연애를 택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성의 원리를 거부하는 것이다.그들의 탈선한 성행위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성의 특성에 대한 죄를 유발하는 것이다.(롬1:27) 그리고 그들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
라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사회적 단위를 구성하는 것이다.(창2:24) 바리새인들과의 토론에서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이 제정하신 성의 원리를 반복하셨다(마19:4-9) 그는 이성 간에 결혼을 제외한 유일한 생활방식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독신생활임을 지적하셨다.


2. 동성연애는 성경이 악하다고 하기 때문에 죄이다.


하나님이 독특한 의미로 이스라엘을 그의 나라로 부르셨을 때 하나님은 애굽의 압제로부터 기적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이상의 일을 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행동을 안내하며 지시하는 한 율법을 주셨다. 도덕에
관계되는 율법 가운데 동성연애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 있다.


레18:22에서 하나님은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 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레20:13에서는 이것을 위반한 사람에 대한 가혹한 형벌을 명령함으로써 이 하나님의 명령을 보강하고 있다. 즉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금지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롬1:21-27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창조주보다 창조물을 섬기며 경배하는 사람들의 생활에서 따라오는 결과들을 기록하였다. 그들은 그들 사이에서 자기들의 몸을 부끄럽게 하였다. 그들은 성을 순리대로 쓸 것은 바꾸어 역리로 썼다. 그들은 불의, 음행, 악의, 탐욕, 악독이 가득하였다. 그들은 부정한 자요, 원통함을 풀지 않은 자요, 무자비한 자였다.


바울의 시대에 고린도는 부도덕으로 유명하였다. 이 도시는 상업 뿐만 아니라. 악폐와 부도덕의 중심지였다. 교회가 이 도시에 세워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모든 종류의 부도덕을 어떻게 보시는지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였다.
그 기록은 매우 뚜렷하다. 바울은 기록하기를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리고 계속하기를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하리라”(고전6:9,10)고 하였다. 바레트(C. K. Barrett)는 그의 주석 “고린도전서”(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에서 탐색은 미동을 상대로 하는 남색을 의미한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탐색과 남색은 남자 동성애 관계에서 하나는 소극적이고, 하나는 적극적인 상대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기록하기를 법은 “불법한 자와 순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를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하였다.(딤전1:9,10) 이 사람들은 의롭다고 묘사되는 사람과는 대조적으로 경건치 않은 자들이라고 하였다.


3. 동성연애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죄이다.


고대 소돔이라는 도시는 동성연애에 대한 동이어가 되었다.(영어로 sodom 사람은 남자 동서연애자를 의미한다:역자주) 다른 악한 것들이 이 사회에 존재하는 동안 동성연애도 현저하게 되었다. 소돔의 동성연애자들은 매우 타락하여 자기들의 동네에 찾아온 손님들을 욕보이려고 위협하였다. 역사적인 기록은 그들이 난폭해져서 롯이 손님들을 맞아들인 그 집의 문을 부수려고 하였던 것을 보여준다. 오직 하나님의 간섭으로 롯과 그의 가족은 악한 의도에서 건짐을 받았다.
이 사람들은 너무 타락하여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창19:4-11,24,25) 이 도시들에 대한 심판의 가혹한 정도는 너무 강렬하여 베드로와(벧후2:6) 유다(유7)가 하나님의 심판을 설명하는데 사용하였다.


동성연애자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


성경이 동성연애는 죄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지만 또한 동성연애자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가르친다. 동성연애는 도덕적인 문제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그 죄인을 도우실 수 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
이 없다.


고린도에 있는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권세에서 구원받는 이전의 동성연애자들이 있었다. 고전6:9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수 없는 자 중에 동성연애자를 포함시켰다. 그리고 11절에서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과거시제이다. 그들은 동성연애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죄로부터 구원받았다.


성경은 속죄의 효력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제한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제거할 수 없을 만큼 어두운 죄의 자국은 없다. 세례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보라”(요1:29)고 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 ”(고후5:21)고 기록했다. 요한도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요일1:9)고 기록했다.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능력을 통해 사람들은 그들의 죄의 본질과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고후5:17)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죄의 심판과 권세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는 동성연애자들도 다른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와야 한다.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행위는 회개와 믿음 두 가지를 다 포함한다.


예수를 주시요, 구세주로서 영접해야만 한다. 이러한 회심의 개념들은 순서적이기보다는 동시적이요(회개가 먼저 오고 그 다음에 믿음이 오는 순서적인 것 보다는 회개와 믿음이 동시에 있을 때 회심의 역사가 있다는 의미이다.:역자주),이 둘이 다 포함된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한다. 예수는 그의 승천에 앞서 제자들에게 주었던 교훈 속에서 회개와 죄사함이 반드시 전파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눅24:47) 회개는 죄로부터 돌아서는 시점에서 마음이 변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에 반하는 다른 자세들과 행위들도 포함된다.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던 빌립보 감옥의 간수처럼 구원을 소원하는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행16:30,31) 곧 그가 죄의 심판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로부터도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회개와 마찬가지로 순종하는 믿음도 구원의 조건이다.


동성연애자에 대한 크리스찬의 자세

크리스찬은 동성연애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습관에 관계된 사람들에 대해 크리스찬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떤 죄들은 타락한 자와 초신자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다른 죄보다 더 책망 받아야 한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크리스찬은 동성연애자들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는 자세를 갖도록 확인해야 한다.

그들은 이러한 행위를 용인하게 하는 감상주의적인 경솔함을 피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기를 원하는 자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간과해서도 안된다. 증언을 위한 기회가 전개될 때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정직하게 원하는 사람들과 하나의 또 다른 생활방식으로서 동성연애에 대한 동정심을 구하는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기 위해 성령의 인도를 따르도록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5절에 언급된 부도덕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엡5:6)라고 성경은 신자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계속해서 성경은 신자들이 열매없는 어두움의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엡5:11) 하나님께서 정죄하는 것을 교회가 너그럽게 봐줄 수 없다. 만일 동성연애자들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제안을 거부한다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영역 밖에 놓아 둘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교회의 교제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성연애 도착증에 빠진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기는 구한다면 크리스찬은 도울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신자의 마음에 널리 뿌려진 것처럼 이 사랑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처럼 신자들도 죄를 미워하면서 죄인을 사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신자들은 동성연애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행하는 길이 죄의 길임을 깨닫도록 돕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해 신실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 누리는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능력과 풍성한 생명에 대해 증거해야 한다. 그들은 동성연애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축복을 원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모든 것을 해야 한다. 그럴때 그들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을 아는 만족을 누리게 될 것이다.(약5:20)



       

헬라어 한글사전 5624.hwp


히브리어 한글사전 8674.hwp










 http://www.eliyah.com/lexicon.html 

 http://www.biblestudytools.com/concordances/strongs-exhaustive-concordance/



아래의 한글 홈피에서 확인하고자 하는 스트롱 코드를 치거나 위에서 다운로드 할 수 있는 헬라어, 히브리어 한글사전으로 원어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사전

http://kcm.kr/dic_list.php?page=1&key=21&jamo=&kword 

헬라어 사전

http://kcm.kr/dic_list.php?page=1&key=21&jamo=&kword







6. 방언으로 말함과 그 후에 따르는 방언 통역은 누구에게 유익함이 있으며, 무슨 목적이 있습니까?

 

방언과 방언통역의 목적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 목적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믿게 하는 표적을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또 다른 목적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방언 통역과 함께 하는 방언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일들을 선포하고, 그의 이름을 높이며, 그리고 신자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주님을 경배하도록 촉구합니다. 그것은 또한 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헌신하기를 요구합니다.

고린도전서 14:22와 계속되는 말씀에서 바울은 공중 예배에서 말했을 때 방언은 주로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한 것이 이해가 되는데, 왜냐하면 적절하게 통역이 된 방언은 하나님의 장엄함과 영광에 대해서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이러한 능력에 힘입은 표현에 끌리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예언의 은사를 혼동합니다. 바울은 이 두 가지를 구별했습니다. 그는 예언의 은사의 목적은 굳건하게 하고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3, 31). 그러므로 예언은 주로 믿는 자들의 유익함을 위함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언의 말씀을 들은 믿지 않는 자들도 또한 책망을 들으며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24, 25).



중생한 신자가 귀신들릴 수 있는가?

동양종교와 미국내의 사교의 보급으로 전에 외국에서 선교사 들이 보고한 것과
유사한 귀신들린 역사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런 일은 너무나 자주 발생하는 반면
이러한 영역에 있어서의 가르침은 너무나 미미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신약성경
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라는 명령 이상의 것을 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영혼의 원
수에 대하여 확고하게 경고하고 있으며, 귀신은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손길”, 성령의 권능, 그리고 예수의 이름
을 통하여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다.

극단주의의 위험

어느 무시된 교리를 강조할 때 성경의 의도를 넘어서 극단주의로 나갈 위험이
있다. 또한 무시된 교리를 전체의 사역으로 삼음으로써 목회의 궤도를 벗어날 가능성도 있다. 이것은 귀신론의 주제에 매혹된 어떤 사람들의 경우와 같다. 그들
은 자기들의 모든 관심을 귀신론에 집중함으로써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들이 귀
신을 많이 쫓아내면 낼수록 쫓아내야 할 귀신의 수도 많아지기 때문에 귀신 쫓는
이외의 사역은 실제적으로 무시된다.

그리스도를 높이기보다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빠지게 되는 이러한 경향은 성
경의 균형에 모순된다. 또한 귀신을 좇아낼 때 여러 가지 토해내는 등 외적인 현
상에 대한 부수적인 선입관은 성경에서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귀신이 영적인
존재임을 잊었다.) 거품을 일으켰던 경우에 있어서도 성경은 귀신이 쫓겨가기 전
에도 지속적으로 있었던 일이었으며 귀신이 쫓겨날 때만 있었던 현상이 아님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귀신론에 대하여 비성경적으로 지나치게 강조한 경우 유감스러운 부작용이 있는데 그것은 때때로 성경적인 가르침까지도 악평을 듣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16세기와 17세기의 영국 그리고 17세기 미국의 소위 마법의 결과였다. 영국에서
사례들이 보고된 것이 있는데 그 중에는 아이들이 그들의 몸속에 들어갔다고 추정되는 악령을 토해냈다는 것이다.

1962년 커튼 마더(Cotton Mather)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바드를 우수한 성
적으로 졸업한 유능한 설교가였다. 이 사람이 마녀들에 대하여 메사추세츠주의
살렘에 사는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귀신들린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들의 증언 때
문에(이 아이들은 다른 설명이 더욱 필요하겠지만 거짓말하는 귀신에 의하여 움직였던 것 같다.) 19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150명이 감옥에 들어갔다.

고발당한 사람들 앞에서 이 아이들은 발작을 일으키다가 혼수상태처럼 보이는 상태
에 들어갔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당한 고통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
의 이름을 대었다. 고발당한 사람 중 상당수는 기독교 순교자에 해당하는 믿음과
정신을 보였지만 인격적으로 고상한 판사는 이 사람들을 유죄로 판결하였다. 이
재판이 공개된 결과로 이때 당시의 미국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하여 외면
하게 되었으며 사탄과 악령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미신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
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탄이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귀신이나 악령들에 대하여 잘못된 관
심을 갖게 하여 성경이 제시하는 명확한 가르침의 도에서 떠나도록 하는데, 우리
는 이것을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귀신이나 악
령에 대하여 잘못된 태도를 갖게 될 때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외면하게 되고
하나님의 일은 방해를 받게 된다. 그러나 조심한다고 해서 귀신론을 가볍게 취급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귀신의 활동과 그들의 수가 많은 것을 명확히
가르쳐 주고 있다. 영어 성경에서 마귀(devils)라는 단어는 실상 귀신(demons)
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더욱 자명한 일이다.

실지로 마귀라는 단어는 (헬라어, Diabolos는 “참소자”이다) 사탄에게만 적용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가 귀신들을 통해서 역사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사탄은 피조물이며 제한 받는 영이며, 편재하지도 않는다. 사탄은 세계의 곳곳에 흩어져 있는 귀신들을 통해서 대부분 그의 일을 수행한다. 귀신들을 쫓아내던 예수의 사역은 적어도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치유하는 사역의 일부였다. (행10:38)-여기서 사용된 “눌린”의 뜻은 오늘날 사용되는 의미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제기되는 질문은 오늘날도 귀신이 활동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한 신자도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 있는가 혹은 누군가가 중생한 신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성령과 귀신이 한 집에 같이 거할 수 있는가?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 아닌가?

저자들이 말한 것

대부분의 옛날 저자들은 참된 기독교인들 안에 귀신이 거할 수 없으며 귀신이
참된 신자들을 사로잡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한 예로서 존 네비어스(John L.
Nevius)라는 장로교 선교사는 거의 40년간 중국에서 살았는데 귀신들린 사례를
많이 보았지만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볼수 없었다고 한다. 빅톨 플리마이어
(Victor Plymire)라는 오순절 계통의 개척 선교사는 티베트에서 유사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더욱이 최근 여러 교단의 저자들은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넬슨(M.
H. Nelson)이라는 의사는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고통 당하는 듯이 보이는 기독교
인들에 관한 많은 보고서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들 중 몇몇은 하나님
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불순종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외견상 이 의사는
영원한 보장을 믿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을 기독교인이
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귀신이 신자의 몸과 마음에 영향
을 줄 수는 있어도 신자의 몸이 귀신에 의하여 사로잡히는 것은 매우 의심스럽다
고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귀신이 기독교인의 속 사람을 사로잡지 않은 채 기독교인의 몸속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하는 성경의 관점에 배치되는 것 같다. 또한 책임이 관계되는 한에 있어서 한 사람을 여러 모양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이방인의 사고방식이다. 만일에 귀신이 몸이나 마음(혹은 자세)중 어느 영역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들어간 것이 된다.

성경이 말하는 것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문제들로부터 구원하고 계시며, 귀신들리는 것
으로 부터도 구원 하신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일어난 사건에 대한 그들의 해석과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는지 우리는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어
떤 사람들은 성경이 비겁하게 두려워하는 영(spirit of cowardly fear)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으로부터 구원받으려면 두렵게 하는 귀신과 근신
혹은 절제의 영(한글판에는 spirit이 마음으로 번역되었음:역자주)으로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두려움을 쫓아낼 필요가 있는 악한 영이라고 해
석한다면 동일한 논리로 선한 영들이 들어오기를 간청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
리의 잘못은 명확한 것이다. 사랑이나 절제는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들이다. 사랑이나 절제의 영은(a spirit of love and of self-control) 우리
가 성령을 따를 때 결과로서 나타나는 자세를 의미한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영(spirit)이라는 단어는 자세 혹은 기질을 나타낸다
다윗은 상한 영(broken spirit:상한 심령, 시51:17)이라고 말했으며 솔로몬은
겸손한 영(humble spirit: 마음을 낮추는 것, 잠16:19)이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고린도에 갈 때에 매대신 사랑과 온유한 영(love and meek or gentle spirit:사
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하였다.(고전4:21) 베드로는 온유하고
조용한 영의(meek and quiet spirit: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
로 단장하라고 말하였는데 (벧전3:4) 실제로는 조용한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이라는 단어는 자기 자신의 심령이나 그것의 표현으로 자주 사용한 것
을 알 수 있다.(학개1:14), 행17:16, 고전2:11 등. 그러나 학1:14, 행17:16에
서 spirit 을 한글 성경에서는 마음으로 번역했다 : 역자주)

이와같이 문맥상 독립된 영적 존재라는 뜻이 나타나 있지 않다면 거만한 영, 성
급한 영, 졸리운 영, 시기의 영 등과 같은 말은 귀신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갈6장)
이나 죄의 기질로 취급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이러한 죄의 기질을 귀
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개 개인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지 않게 되며, 회개할 필요성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은 이러한 죄들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세를 버
리라고 한다. 우리 안에서 싸우는 싸움은 성령과 귀신 사이에 싸움이 아니라 내
주하는 성령과 육신과의 싸움인 것이다.(육신은 죄의 경향을 띤 모든 감각기관을
의미한다.)

“영”이라는 단어가 귀신에 대하여 사용될 때는 성경은 악령 혹은 더러운 영이
라고 말한다. 때로는 이 단어는 같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더러운 마귀
의 영(a spirit of an unclean devil, 한글 성경에는 더러운 귀신으로 번역되었음:
역자주. 눅4:33)같은 것이 있다. 많은 경우 이 귀신들은 질병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모든 질병을 귀신이나 악령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실재
로 많은 구절들이 귀신에 의한 질병과 그렇지 않은 질병 사이에 분명한 구분을
보여준다.(마4:24, 8:16, 9:32,33, 10:1, 막1:32, 3:15, 눅6:17,18, 9:1 등) 이
들 중 어느 구절에도 귀신에 의한 질병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있었다는 단서를 보여주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모든 예가 오순절 이전에
사건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이모니조마이”라는 헬라어에
는 귀신에게 사로잡히다, 혹은 귀신들리다라는
뜻인데 많이 나타나지 않는 단어이다. 이것은 오직 한번 동사로 사용되었는데 심
하게 귀신들린 가나안 여인의 딸의 경우이다. 그 외에는 “귀신들린”이라고 번역
되는 분사로써 사용되고 있다. (마8:28,32, 9;32, 12:22, 막5:15-18, 눅8:35)
다시 말하거니와 이 귀신들린 사람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
고 할 수 있는 단서는 없다. 이들 중 대부분은 심한 괴로움을 겪거나 급격한 인격
의 변화를 경험하였다.

신자도 귀신들릴 수 있다는 사상은 또 다른 큰 문제를 야기시키는데 그것은 믿
음을 잠식하며, 하나님과 하나님이 제공하는 구원에 대한 개념을 약화시킨다. 하
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골1:13) 지난 시대에는 우리가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
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다
(엡2:2)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였으며 우리를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으로 삼으셨다(엡2:19)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되었는데 우리의 몸 안에 귀신이 거한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린다. 우리가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롬6:17)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도록 자유인이 되었다. 지금도 신자는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 만일 신자가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그렇게 하고자 하는 자기의 의지 때문이지 귀신에 의해서 침입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로마서는 귀신을 좇아낼 것을 요구하지 않고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데 사람이 믿음으로 자기의 신분이 결정된다.

만일 신자에게 귀신이 있다면 예수님도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분쟁사태를 초래
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
낸다고 말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사탄의 왕국이 서로 대적하며 분쟁하고 있다고
가정하였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거부하였다. 눅11:21,22은 사탄이 신자를 사로 잡으려고 할 때에 예수께서 사탄을 이기시고 무장해제 시킨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귀신이 돌아와서 그 집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만 귀신이 다시 들어갈 수 있다.(눅11:24-26, 마12:43-45) 진실한 신자에게 귀신이 있다는 사상은 또한 구원과 평강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잠식한다. 이것은 신자가 다음 어떤 귀신이 자신을 침입할지 전전긍긍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엄청난 두려움을 자아내게 한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가 소유했다고 확신시켜주는 자유와 배치되는 것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이나 2세기 교회의 신자들은 이런 종류의 두려움을 갖지 아니했다. 주후 139년경에 목자(The Shepherd)라는 매우 영향력 있는 기독교 책을 쓴 헤마스(Hermas)는 부패를 책망하며 기독교의 덕목을 격려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사람 안에서 악령이 거하면서 주관할 수 있다고 말하였지만 이러한 악령을 지니고 있는 사람 안에 성령이 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였다. 성경은 신자를 위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4:4). 신자는 귀신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이다. 이것은 기본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외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지적한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사탄이 그 안에 가득하여 성령께 거짓말하기 전에 이미 타락하였던지, 아니면 스스로 교회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다.(행5:13,14참조) 적어도 그 당시에 자칭 그리스도인 이상은 아니었다.

악령을 대적할 것

귀신들린다는 말을 진실할 신자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하게 보인
다.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사탄과 그의 무리들은 외부적인 원수라는 것이다. 우
리는 사탄의 세력에 대하여 전쟁 중에 있으며 그들은 우리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
고 있다.(엡6:12 참조) 성경적인 강조점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에서 무엇을 대면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 요구는 우리가 누군가를 시켜서 우리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은 밖에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으며 시험하고 있지만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요구는 깨어 있어 전신갑주를 입고 굳게 서라는 것이다. (고후10:3-6, 엡6:10-18, 벧전5:8,9)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사탄을 물리쳤다.(마 4장)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사탄과 그의 귀신들을 믿음으로 대적해야 한다.(약4:7,벧전 5:8,9) 그리고 믿음의 방패는 원수의 불화살을 꺼버릴 것이다.(엡6:16,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대대로 천사를 통해서 오듯이 사탄의 공격도 대대로 귀신이나 귀신들린 사람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사탄의 공격이 외부적이라는 사실은 욥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의 육체에 있는 가시의 경우인데 바울은 이것을 자기를 치기 위하여 사탄이 보낸 사자라고 불렀다.(고후12:7 참조) 바울은 이것을 떠나게 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간구하였으나 하나님은 거절하시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하셨다. 그 결과 바울은 그의 연약함과 수치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여기서 사탄의 사자가 귀신인지, 질병인지, 혹은 사람인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치고 공격하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내쫓아 달라고(cast out) 간구하지 않고, 떠나게 해달라고(to be kept away) 간구하였다. 또한 우리는 바울이 그 자신과 우리 안에서 유일한 소망으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보고 있음을 유의하여야 한다.(골1:2,29) 우리는 또한 영들 분별의 은사가 성령의 내주함이 없는 사람들을 주관하는 영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지 신자들 안에 있다고 여겨지는 귀신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만일 진리가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다.(요일2:24) 오직 우리가 포도나무에서 잘려져 죽은 가지로 버려졌을 때만이 사탄이나 혹은 그의 귀신들이 우리를 주장할 수 있다.

우리의 구속은 전인적인 구속이다. 모든 대가는 이미 지불되었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그리스도가 귀신들렸다고 공격하였다. 그것은 마귀의 교묘한 수작으로서 오늘날 성실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이 귀신들렸다고 공격하게 만드는 것이다. 확실히 여러 가지 구원들이 있다. 그러나 귀신들림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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