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만리장성(萬里長城) 이야기

 

  흔히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은' 만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깊은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어원은 전혀

  다른 뜻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중국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계획을 세우고

  기술자와 인부들을 모은 후에 대 역사를 시작했을 때이죠.


 

어느 젊은 남녀가 결혼하여 신혼생활 한달여 만에 남편이 만리장성을 쌓는 부역장에

징용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일단 징용이 되면 그 성 쌓는 일이 언제 끝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죠.




 

안부 정도는 인편을 통해서 알 수야 있었겠지만, 부역장에 한 번 들어가면 공사가 끝나기

전에는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신혼부부는 생이별을 하게 되었으며, 아름다운 부인은 아직

아이도 없는 터이라 혼자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을 부역장에 보낸 여인이 외롭게 살고있는 외딴 집에 어느날 지나가던 나그네가 찾아

들었었죠. 남편의 나이 쯤 되어 보이는 사내 한사람이 싸릿문을 들어서며 "갈 길은 먼데

날은 이미 저물었고 이 근처에 인가라고는 이 집밖에 없습니다.



 

헛간이라도 좋으니 하룻밤만 묵어가게 해 주십시오"하고 정중하게 간청을 했죠.

여인네가 혼자 살기 때문에 과객을 받을 수가 없다고 거절할 수가 없었던 이유는 주변에

산세가 험하고 인가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바느질을 하고 있는 여인에게 사내가 말을 걸었죠.

"보아하니 이 외딴집에 혼자 살고 있는듯 한데 사연이 있나요?" 라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숨길 것도 없고 해서 남편이 부역가게 된 그 동안의 사정을 말해 주었죠.



 

밤이 깊어가자 사내는 노골적인 수작을 걸었고,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 여인과 실랑이가 거듭되자 더욱 안달이 났었죠.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그대가 돌아올 수도 없는 남편을 생각해서 정조를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직 우리는 너무 젊지 않습니까? 내가 당신의 평생을 책임질 테니 나와 함께 멀리

도망가서 행복하게 같이 삽시다."

 

 

 

사내는 별별 수단으로 여인을 꼬드기 시작 했었죠. 하지만 여인은 냉랭했습니다.

사내는 그럴수록 열이나서 저돌적으로 달려들었고, 여인의 판단은 깊은 야밤에 인적이

없는 이 외딴 집에서 혼자서 절개를 지키겠다고 저항한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여인은 일단 사내의 뜻을 받아들여 몸을 허락하겠다고 말한 뒤,

한 가지 부탁을 들어달라고 조건을 걸었었죠. 귀가 번쩍 뜨인 사내는

어떤 부탁이라도 다 들어줄 테니 말해 보라고 했고.



 

 

여인은 "남편에게는 결혼식을 올리고 잠시라도 함께 산 부부간의 의리가 있으니

그냥 당신을 따라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새로 지은 남편의 옷을 한 벌

싸 드릴 테니 날이 밝는대로 제 남편을 찾아가서 갈아입을 수 있도록 전해 주시고

그 증표로 글 한 장만 받아 달라는 부탁입니다

 


 

어차피 살아서 만나기 힘든 남편에게 수의를 마련해주는 기분으로 옷이라도 한 벌

지어 입히고 나면 당신을 따라 나선다고 해도마음이 좀 홀가분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제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저는 평생을 당신을 의지하고 살 것입니다.

그 약속을 먼저 해 주신다면 제 몸을 허락하겠습니다."

 

 

 

여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마음씨 또한 가상 한지라 좋은 여인을

얻게 되었노라 쾌재 부리며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심정으로

덤벼들어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욕정을 채운 후 골아 떨어졌죠.

 

사내는 아침이 되어 흔드는 기척에 단잠을 깨었죠.

밝은 아침에 보니 젊고 절세의 미모에다 고운 얼굴에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니

양귀비와 같이 천하 미색이었죠 .

 


 

사내는 저런 미인과 평생을 같이 살 수 있다는 황홀감에 빠져서 간밤의 피로도 잊고

벌떡 일어나서 어제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길 떠날 차비를 했고.

여인은 사내가 보는 앞에서 장롱 속의 새 옷 한 벌을 꺼내 보자기에 싸더니

개나리봇짐에 챙겨 주는 것이었습니다.

 

사내 마음은 이제 잠시라도 떨어지기 싫었지만 하루라도 빨리 심부름을 마치고 와서

평생을 해로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걸었었죠. 드디어 부역장에 도착하여

감독관에게 면회를 신청하면서. 옷을 갈아입히고 글 한 장을 받아 가야 한다는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감독관이

 


 

"옷을 갈아 입히려면 공사장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한 사람이 작업장을 나오면

그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어야 하는 규정 때문에 옷을 갈아 입을 동안 당신이

잠시 교대를 해 줘야 가능하다" 고 말하자. 사내는 그렇게 하겠노라 하고

 

여인의 남편을 만난 사내는 관리 시킨대로 대신 들어가 그에게 옷 보따리를 건네주었죠

남편이 옷을 갈아 입으려고 보자기를 펼치자 옷 속에서 편지가 떨어졌습니다.

 


 


"당신의 아내 해옥입니다.

당신을 공사장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이 옷을 전한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이런 연유로 외간 남자와 하룻밤 같이 자게 된 것을 두고 평생 허물하지 않겠다.

각오가 서시면 이 옷을 갈아 입는 즉시 제가 있는 집으로 돌아오시고 혹시라도 그럴 마음
없거나 허물을 탓하려거든 그 남자와 교대해서 공사장 안으로 다시 들어가십시오."

 

자신을 부역장에서 빼내 주기 위해서 다른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다고 고백을 듣지만

그것을 용서하고 아내와 오손도손 사는 것이 낫지, 어느 바보가 평생 못나올지도 모르는

만리장성 공사장에 다시 들어가서 교대를 해주겠는가?

 


 

남편은 옷을 갈아 입고 그 길로 아내에게 달려와서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랍니다. 이거야말로 하룻밤을 자고 만리장성을 다 쌓은 것이 아닙니까? 하고 많은

인간사에서 이처럼 다른 사람이 나 대신 만리장성을 쌓아준다면 다행한 일이겠지만,

어리석은 그 사내 처럼 잠시의 영욕에 눈이 어두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남의 만리장성을

영원히 쌓아주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요!





 

자신을 부역장에서 빼내 주기 위해서 다른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다고 고백을 듣지만

그것을 용서하고 아내와 오손도손 사는 것이 낫지, 어느 바보가 평생 못나올지도 모르는

만리장성 공사장에 다시 들어가서 교대를 해주겠는가?

뱀같이 지혜로운 기지를 발휘해 다른 남자와 하루 밤 자 주고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남편을 구한 아내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어쩔수 없는 상황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아내에게

달려와서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중국인들에게도 상황신학이 있다면 아마도 시작이 이때쯤이 아니었나 짐작해 봅니다.

상황신학을 적용하여 파탄 직전의 가정을 구한 상황이 분명 잘못 되었다 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만

 

"주"께서는 무엇이라 하실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상황신학 입니다.

 

성령님이시여! 인간들의 역약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영어 성경을 읽어 내려가던 중이다.
창2 장을 읽던 중 21절-23절에 와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 갈수 없다.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22절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바로 “WOMAN”에 걸려 더 이상 앞으로 나아 갈수가 없는 것이다. 남자에게서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시고 WOMAN 이라 부르셨다?. 왜 여자, WOMAN? 이라 부르셨나 하는 궁금증이다. 그래서WOMAN 글자를 백지에 크게 써 놓고 째려 본다. 한없이 글짜를 째려보고 있노라니 보이는 글이 있다. 바로 MAN 이다. 내가MAN이니MAN 글자가 보일수 밖에요!  보이는 단어MAN을WOMAN 에서 떼어내니 남는건WO 뿐이다.

이렇게 걸러낸 글자WO 에서 여전히 궁금증이 가시지 않는다. 인터넷의 모든 서치 엔진을 다 뒤져도 의미를 알아낼 수 없다. 내가 억지춘향 풀이를 하고자 하는가? 3일 동안 동원 가능한 각종 사전을 다 뒤져 보아도 도무지 알아내지 못하던 중에 혹시하며 이민 가방에 가져온 영한사전이 눈에 들어 온다. 손때로 너덜너덜하게 표지가 달아난 영한concise 이다. 드디어 찾아 헤매던 의미를 발견! 숨을 조아리며WO의 정의를 확인한다.

“WO 란 논두렁으로 가던 어미 소가 뒤돌아 보며, 우우^ ^ ^ 새끼송아지를 부르는 소리”? 
아니 이게 모야! 맡기는 맡는 말인데? 송아지를 부르는 소리라니?

새끼를 향한 어미가 부르는 소리이다. 어미가 부르는 소리를MAN 에다 붙혀 의미를 유추해 내 보고자 한다. Sense에 빠른 별이 사모님과 교제님, 아니 여성 동무들이라면 이미 의미가 풀렸을 것이다.
WO – MAN 이다. 여야의 알량한 머리로 “우”부르는 소리를MAN에다 부쳐 본다. 

우^ ^ ^ 하며MAN을 부르는 소리? @#$%&, 
어미 소와 같이 “우”MAN 을 항상 부르는 소리? #%&*@, 
MAN을 염려로 부르는 어미와 같은 소리? *&^$%, 
도무지 &%#*! 이다.

성경을 계속 읽어 내려간다. 
3:16에 이르러 “너는 남편을 원하고”가 눈에 들어 온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Your desire will be for your husband)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으흐흐흐 그래서 남편들이 어디를 가면 그렇게도 불러대는구나?!^^ 궁금이로 막혔던 체증이 쑤으윽 내려가는 듯 하다. 98년도 일이었다. 
우스개 같은 중에도 진리가 들어있다. 

궁금이가 귀신에 걸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걸림이 얼마나 다행인가.

MAN 을 얼마나 못나게 지어 놓으셨기에 돕는 배필로 여자를 또 지으셨나 생각해 본다. 

  1. 자신이 방언으로 기도하실 때 무슨 말인지 알고 계십니까. 

 

고전14:2 방언(대신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고전14:15 -16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고전14:4 “방언(대인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통변)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고전14:13 “그러므로 방언(대인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통변의 은사 받기를 위하여)하기를 기도할찌니

 

: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히 말하는 대신방언은 본인이라도 천사라도 알아 듣지 못한다. 대신방언을 알아 듣는다느니? 귀신방언이라느니? 하는 은사자들이 있다는 소리가 있는데 극히 비 성서적이다. (고전14:2절)의 하나님의 말씀이 멀쩡히 살아 계신다. 하나님과 은밀히 교통하는 대신 방언을 알아 듣는다는 은사자들이 있느냐? 속지말라. 그의 영적상태를 의심해 보아야 한다.


은사자의 입술을 통하여 예언하시는 대인방언은 통변의 은사자만이 알아 들을 수가 있다.


2. 방언을 성령님이 주셨다는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까. 


사도행전 1:4-5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 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사도행전1:14-15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사도행전2:1-4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19:2,4-6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요한14장이 신약의 성령론의 시작 입니다.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승귀하신 우리들의 주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이 땅에 계시지 아니 하십니다. 하늘 보좌 우편에서 구원 받은 성도들을 위하여 중보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지금도 보좌에 좌정하고 계셔서 지구를 운행하시며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요14:16-18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14: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14:26-27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금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보혜사 성령님이 임하실 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의 참 사랑과 평안이 임하시며 비로소 이 세상이 주는 근심도 두려움도 사라지게 됩니다.

 

14: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3. 자신이 하는 방언이나 성도들의 방언을 통역할 수 있습니까. 

 

개인적인 대신방언은 하나님과 직통으로 교통하는 영언 기도이다. 내 영과 하나님간에 교통하는 영언이기에 본인이라도, 천사라도 하나님 외에는 알아 들을 수가 없다


고전14:2 방언(대신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대신방언을 알아 듣느냐 아니냐 하는 영적 무지를 더 이상 드러내지 말라"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말씀이 증거하신다. 마음의 소원을 영으로 하나님께 고하는 대신기도를 할 수 있다. 그러한 경우에 드린 간구를 스스로가 알 수가 있다.



대인방언은 통변의 은사자만이 알아 듣고 통변할 수가 있음이 성경적이다.

질문자가 한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한국교회에는 공중방언의 역사가 과거에 있었다거나 현재 나타나고 있다거나 있었다거나 하는 하는 보고가 전혀 없다. 그러나 미 하나님의 성회의 특별 집회에서는 자주 비일비재하게 나타나는 

대인방언을 통변하는 은사를 구하느냐?

간절히 구하라.

 

4. 자신이 하는 방언들 중에 한 단어라도 아는 것이 있습니까. 

 

개인적인 방언은 하나님과 직통으로 교통하는 영언으로 기도하는 대신기도이다하나님과 교통하는 영언이기에 본인이라도 알아 들을 수가 없다방언을 알아 듣느냐 아니냐 하는 영적 무지를 더 이상 드러내지 말라

나에게는 대신방언의 은사나 통변의 은사를 주시지 아니하셨으니 대신방언을 사용 할 기회를 누려 본 일이 전혀 없다. 오해 말라. 대신방언, 대인방언 은사를 따로 따로 허락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5. 교회 안에서 몇 가지의 방언이 사용되는지 알고 계십니까.

 

내가 이해하는 언어 2가지(나는 2개 국어만 이해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일어, 중국어 외에 다른 언어는 모두 랄랄라, 지브리 지브리로 들리니 지상의 언어 총 6가지, 알 수 없는 천사의 언어 수백, 수천으로 무한대의 언어, 가늠하기조차 불경스런 하나님의 무한의 언어 = 지상과 영계의 무한의 언어가 모두 포함.

 

노무호 목사님은 몇가지의 방언이 존재한다 믿습니까?


6. 자신의 방언과 성도들의 방언이 귀신의 방언이면 어찌됩니까. 

귀신의 자식은 귀신의 방언을 받을 것이고, 성도는 성령이 주시는 방언을 받을 것이다. 무엇을 걱정하느냐?


7. 방언으로 기도한 것이 모두 헛된 것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 진리의 영, 예수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의 은사를 헛된 것이라 하는 당신은 귀신의 자식인가 보오?

 

오직 믿음이냐, 오직 불신이냐하는 문제일 뿐이다.


8. 방언을 받을 때에 악령이 들어 온 것이라면 어떻게 됩니까.

별 걱정을 다 합니다. 당신은 모르는 것을 걱정하고 있고, 구원이 예지예정된 성령의 사람에게는 평화, 참 자유만이 있습니다.

 
9. 성도들 안에 악령이 들어와서 방언을 하고 있으면 어찌됩니까. 

 

당신이 진정으로 기독교 목사라면 성도들 안에 악령이 들 수도 있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증명 하십시요.


10. 목사님의 교회 안에 방언통역의 은사를 받은 자가 있습니까. 

 

하나님과 직통으로 교통하는 방언은 귀신이나 천사라도 알 수 없는 대신방언이다. 혼자 은밀히 기도할 때의 방언은 대신방언이기에 알아 듣는 자가 있을 수 없다.

예배중의 공중방언은 대신방언이기에 필히 은사자의 통변이 있어야 한다. 사람을 향한 대인방언을 통변하는 은사가 있음을 고전14장이 증거한다.

 


11.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서 방언을 하지 말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고전14: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없거든이란 말은 있거든교회에서 방언을 하라는 의미를 전제로 하고 있다.


12. 온 교회가 함께 방언으로 하는 것은 성경이 금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배를 받으시는 화평의 하나님 앞에서 다툼이 없이 하나씩 하나씩 사회자의 분변과 분별을 받으며 교회에 덕이 되게 공예배에서 예언과 통변을 하라는 말씀이시다. 결코 방언을 금하는 말씀이 아니다.

 

공예배에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않겠느냐,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찌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는 말씀절에 유의하라

 

노무호 목사여! 생각해 보라. 수십, 수백, 수천명의 사람들이 모여 다 방언으로 예언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까지도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않겠느냐 실제로 혼란하여 어찌 통변을 할 수는 있겠느냐, 하는 말씀이 아니시지 않느냐?


13.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왜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했다고 봅니까. 

 

말씀이 언제 고린도 교회의 모든 방언이 덕을 세우지 못했다고 했느냐? 말씀에 유식하라. 혼란하고 무 질서하게 한꺼번에 하지말고 차등을 두어 하나씩 하나씩 예언(방언)을 하라는 말씀이 아니요?


14.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왜 금방 그치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요계22:13-14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끝이라,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느니라

 

15. 고린도 교회 방언이 그친 후 1900년 동안 왜 방언이 중단되었습니까.

 

그대는 지난 1900년 동안 줄곧 살아 있어서 성령과 동행하며 모든 성령의 역사를 잘 알고 있다는 의미 입니까? 그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역사를 얼마나 아십니까?

 
16. 20세기 초에 시작되었던 방언이 성령의 은사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17. 방언을 미끼로 악령들이 사람 안에 들어왔다면 어찌되는 것입니까.
 

 

더러운 귀신(12:43), 악령이 들린 자라는 것은 구원이 없는 자라는 의미이다. 한 몸에 성령과 악령이 같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온전히 구원받은 성도에게 악령이 든다는 말은 비성서적이다. 네 구원의 하나님을 어찌 알고 하는 소리이냐?


18. 목회자가 이런 것도 분별하지 못했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까.

 

노무호 목사, 당신은 성령을 부정하는 성령이 없는 자임을 당신 스스로가 증거 합니다. 당신에게 보혜사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있습니까? 성도를 도우셔서 재판장 되시는 주 예수 앞에까지 인도하시는 보혜사가 없는 자라는 것은 애비 없는 고아와 같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고아라는 의미는 극히 성격적 입니다. 자신이 구원받고 성령이 함께 하시는 성령의 사람인 것을 성경적으로 증명하실 수 있으십니까? 당신이 성령의 사람임을 증명하지 못하다면 당신은 가짜 목사 입니다.

 

원하시면 저의 소속 교단과 직분 성명을 밝히고 공개 토론에 응할 수도 있습니다.

웹을 써치하면 저의 신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한번쯤은 대면한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ㅎ ㅎ


19. 많은 목회자가 방언을 하고 있으니까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목회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하라 하시면 괜찮은 것입니다.


20. 큰 교회 목사가 방언을 하니까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작은 교회 목사가 방언을 하면 문제가 있을 것으로 생각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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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쟁이 목사님!^^ "아바, 아버지!"  2014-10-10 () 09:45 IP: 50.xxx.114 과의 댓글로 나누었던 이야기를 수정하여 재 공개 합니다.

 

잠근동산! 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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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공! 늘 제 아이디에 특별히 관심을 가져주시는 목사님께 감사함으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

정치판도 아니고 아이디 "여야"가 좀 거시기 하다는 목사님의 조언을 받고 "잠긴동산"으로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흉내 낼 수 없는 아이디를 급 창조한지가 벌써 얼마만인지요.

아이디에 대한 질문을 가끔씩 받기는 하지만 영원한 저의 아이디로 고이 간직 하려고 합니다 ㅎ 질문이 들어올 때마다 이 이야기를 공개해야 할 형편 입니다요 ㅎ ㅎ

"잠긴동산"은 아가서 4:12 "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부터 영감을 받아서 제가 스스로 명한 아이디 입니다. 저를 향하여 신부라 부르시는 주께서도 기뻐하실 것 같아 제 신앙고백을 심어서 새로운 아이디를 창조하였지요^^

아가서 4장에는 우리 모두의 신랑이신 주님의 저희들을 향한 사랑의 단어들이 과감하게 노출되어 있지요! 세상사람들이 보면 좀 거시기할 수밖에 없는 x- rate 급 표현들 입니다 ㅎ ㅎ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 쌍태를 낳은 양,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나의 신부야,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그러함에도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신랑을 향하여 앙탈을 부리며 마음 문을 잠그고 있는 신부를 향하는 주님되시는 신랑의 애뜻한 사랑이 식어질 줄을 모릅니다.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아가서4:12의 말씀은 구원자 하나님 앞에서 11로 서 있는 성도들의 각자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는 오묘한 절 입니다. 어느 주석에서도 시원한 영적인 답변을 제시할 수 없는 다만 각자의 신앙고백, 믿음의 색깔에 따라 다르게 받아 들일 수도 있는 부분으로 저는 믿고 있습니다.

성숙한 여인과의 사랑의 고백이 저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나의 신부는 “잠긴 동산”이요],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은밀한 장소에 잠그어 놓으시고는, [북천마을에 고이 간직한 처자를 밤마다 찾아오시던 장차 신랑이 되시는 “어느나라 왕”과도 같이] 저를 밤마다 찾아 오셔서 새벽이면 돌아 가십니다요. ㅎ ㅎ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나의누이 신부를 아무에게도 보여주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길르앗산 기슭 비밀한 장소에 잠그어 놓으시고는 잠긴동산 안의 신부를 혼자만 들여다 보기를 기뻐하십니다원래 혼자 사랑 받기를 질투하는 잠긴동산ㅎ ㅎ”  “비아냥을 잘 합니다? 문제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ㅎ ㅎ 제가 생각해 보아도 문제가 있기는 있습니다요!^^ ㅎ ㅎ

 

잠근이 아니냐? 어째서 잠긴이냐. ㅎ ㅎ 다 부질없는 의문일 뿐 입니다.

저 같이 천한 “여야”가 하루 아침에 가장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의 신부라니요? 혼자만 보시며 기뻐서 어쩔줄을 모르시는 신랑의 그 사랑이 너무 너무 좋습니다. 영원토록 그 사랑에 잠겨있기를 기뻐합니다. 매일 밤이 신방 입니다. 오늘 밤에도 찾아오실 신랑을 생각을 하면 가슴이 뛰고, 숨이 가빠지고, 주님과만 만나는 "동산" "잠긴" 나의 상태가 너무 너무 좋기만 합니다. 주님 사랑 합니다. 고백할 때에 뒤에서 살포시 감싸 안아 주시는 주님이 너무 좋습니다. 양자의 영을 주셔서 ‘αββα’라 부르게 하시는 나의 하나님, 나의 사랑, 나의 주님! 나의 예수님을 사랑 합니다.

"동산 문이 자물통으로 단단히 잠기었다는 뜻인지?"
"동산이 문속에, 아니 은혜에 푹 잠기었다는 뜻인지?.. ^^ "

대장장이님께서는 단번에 알아 채셨는데요?

 

 “잠근동산! 둘 다 맡습니다요^^ ㅎ ㅎ

 

영원히 잠근동산하시겠습니까?

저는 영원한 “잠긴동산” 이기를 원 합니다 !^^

너무 적나라하다 하시지 마십시요! 모두 성경의 말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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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인생이 구원받기 위하여

무슨 과에 다니세요?

저는 광야대학 천로역정과에 
다니고 있어요. ^^

 

죄의 삯은 사망이라

 

죄의 삯인 무거운 죄 짐을 등에 지고

순례자는 천상의 도시를 찾아가기 위해

파멸의 도시를 떠났어요

 

천상의 구원자는 
하나님이신데 
대충 넘어가시는 
일이 절대로 없으신 분이시랍니다

 

구원은

돈이 많은 자로도 불가능하고 
공로가 많은 자로도 불가능하며

자격을 갖추며 구원받을 자가 없지요

 

구원은 예수를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에게

선물로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하늘 보좌에는 성부께서 좌정하고 계시되

부활승천,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성자는

이 땅에 더 이상 계시지 아니하시며

승천하신 이 후로

마지막 때의 인류 구원 사역은

보혜사 성령께서 책임 맡아 운행하고 계시지요

 

잡신 하느님을 믿으면

유일하신 성부하나님을 믿음이 아니요

독생예수 유일하신 구원자를 믿음이 아니요

보혜사 성령님을 놓치면 교과목이라는 것을

이수하더라도 구원을 놓칠 수가 있지요

 

학비가 비싸냐구요?

, 아주 비쌉니다

인생을 모두 걸어야 할 정도 이니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생명 모두를 내어 주셨기에

아주 비쌉니다

 

천하보다 귀한 나의 생명을 구하시기 위하여

존귀하신 독생자 아들 예수의 생명을 주셨기에

아주 비쌉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 비싼 대가를

거저 받기만 하면 됩니다

학비는 예수님이 내주셨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오직 예수를 놓치면

낙제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를 영접하는 자에게

영생의 약속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합격하리라 
결심을 하고 도전해 보고 십으십니까?

그러나

내 힘과 능력으로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15:12)

 

주를 영접하는 자에게 은총으로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을 근심시키는

일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주의 성령에 순복하며, 욕심, 탐심,

내 고집내 생각도
인간적인 모든 수단 방법도 
버려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주의 은혜를 끝까지 사모하는 자에게

2의 은총으로 보혜사 성령님이 임하시며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됩니다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비로소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복할 수 있으며 온전히

주의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에게 선물을 주시고마

약속을 하셨는데 바로 보혜사 성령입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던 12 제자와 120 문도에게

마가의 다락방에서 보혜사 성령이 임하셨음을

상기하세요

 

보혜사가 오시면 권세와 능력을 받게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가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되며 성령의 권능으로 비로소

복음을 전하게 되며

하나님의 사랑과 향기와 편지를 전하게 되며

비로소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끝날까지 살 수가 있지요

 

그런데 보혜사 성령님을 거부하며, 불순종하는 자

여전히 자기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는
매일 낙제를 하게 되며 
궁극적으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답니다.

 

성령의 열매가 없이는 아버지를 볼 자가 없습니다

행위로 구원받음이 아니라

행위가 구원의 열매이기 때문이지요

 

마지막에 믿음을 보겠느냐?

오직 성령의 권능에 의지하여

마지막 날에 심판에서 합격하는 자에게만
진정한 졸업 선물이 주어지게 되고

천국입성을 하게 됩니다.

 

주님 예수 한 분이면 충분한
삶으로 인도하소서!^^

    5.18이 대남공작임을 증명하는 영상들    

                              남한보다 엄청 성대하게 거행하는 5.18기념행사
북한이 발행한 두 개의 대남공작 역사책에는 5.18은 물론 남한에서 발생한 모든 소요사태가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이며, 남북한 역사는 북한이 주체적으로 주도한다는 판이 깔려 있다. 이러하기에 북한은 이제까지 종주국 행세를 해온 것이다. 
해마다 5월이 되면 남북한이 모두 5.18기념행사를 한다. 남한에서는 보훈처가 주최하여 광주에서 소규모의 행사를 하고 있지만, 북한에서는 통일부 ‘북한정세분석’ 자료들이 증명했듯이 북한 전역에서, 

당정 최고위 간부들이 참석하여 성대하게 거행한다. 아래 사진은 평양시에서 5.18보고대회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북한에서 최고인 것에는 모두 '5.18' 호칭 붙여

북한에서 최고인 것에는 5.18이라는 글자를 최고의 영예훈장으로 하사한다.

‘5.18영화연구소’(2001년 09월 28일 연합뉴스 보도), ‘5.18전진호’, ‘5.18누에고치반’, 영예의 5.18청년직장‘

’5.18땅크호‘. ’5.18청년제철소‘, ’5.18청년호‘, ’5.18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 . 등이다.  

아래 사진은 1만톤짜리 프레스, 한국에는 없는 장비이며 대륙간 탄도탄 미사일 제작에 사용된다. 

5.18청년호 제1호 및 제2호의 사진이 있다.



              아래 사진은 기차역 플랫홈에 쓰인 천리마 운동 '5.18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



 김일성이 직접 제작한 대남 모략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
1989~91년 김일성은 황석영과 윤이상을 평양으로 불러 대남 모략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제작했다. 

작품에 만족한 김일성은 황석영을 재간둥이라고 칭찬하고 25만 달러를 상금으로 주었고, 

윤이상에게는 15층짜리 ‘윤이상음악당’을 선사했다.

그런데 그 영화의 주인공은 광주 폭동 기간 내내 도망가 있던 박관현, 전남대총확생회장이었다. 

박관현은 이로 인해 좌파들에게 비겁자로 낙인찍혀 손가락질을 받았고,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감옥에서 단식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다. 

5.18을 일으킨 주도세력이, 황장엽과 김덕홍이 증언한 바와 같이 북한의 대남공작부였기에, 

광주인들 중에는 폭동을 지휘한 지도자가 없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환각제를 빼갈에 타서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아래 사진은

1980 5월 북한의 김일성과 남한의 김대중이 야합공모하여 전라도 광주에 북한특수군을 침투시켜

대한민국 국가전복을 위한 인민봉기를 유도하는 유언비어와 44개 무기고에서 총기를 탈취하여

양민을 학살하고 교도소를 6차례나 공격하는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특공 게릴라

군사작전을 전개한 북한특수군600명 중 살아 돌아간 일명/광수들을 현재(2016-02-04)314명 찾아내었다.

씨스템클럽에서는 광수들을 1번부터 시리즈로 엮어 국제사회와 대한민국 국민께 밝힌 바 있다.

제1광수 부터 제11광수 까지 아멘넷 성도 여러분께

공개하며 북괴의 침략만행을 세계만방에 500만야전군의 이름으로 고발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시고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서 앉아 계시며
성도를 위하여 중보 하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도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assembly to the LORD your God) (신16:8 Assembly of God)와 
성도가 보혜사 성령님 안에서 서로 교통하는 것과 

누구든지 믿는 자마다 독생자 아들의 보혈의 피의 공로로 죄 사하여 주시는 것과 
누구든지 믿는 자마다 성자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는 것과 
신랑되시는 주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아멘 



보수님!^^  늦은 나이에 신학교에 이유라는 연재 칼럼을 시작하신 김동욱님으로 인식하고 공개적으로 답변 합니다. 김동욱님 본인이 아니시라면 자신의 신분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

보수라는 아이디를 사용하시는 김동욱 !^^ 저를 아시지요. 저는 극보수 추구하는  잠긴동산 입니다. 또한 근본주의, 기독교에는 어울리지 않은 극진주의를 추구하는 사람 입니다!^^  자신을 어떻게 나타내고자 하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에 바탕을 두는 성향이라면 대화를 볼만한 상대로 여겨집니다. 김동욱님의 성향이 극진주의 가깝기에 오히려 친근감을 느끼며 어떤 방식이든지 대화를 해보고 싶습니다

 

김동욱님으로 부터는 예수님의 사랑에 기반을 두고, 믿고 따르는 성도의 무리에서 없는 극진주의가 보입니다. 예수의 사람의 성향이 아닌, 인간 칼빈 추앙하며 따르는 듯이 보여 참으로 유감 입니다.

 

성경을 믿습니까? 칼빈을 믿습니까? 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니라, “칼빈주의 시조인 칼빈 선조를 믿는 것입니다.

 

"칼빈은 사단의 종이다!"라는 21세기 기독교에 새로이 등장한 statement  "보수 " 오해에서 비롯되어 잘못 와전된 주장이라 여겨 집니다. 잠긴동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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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속한 교회의 신앙생활 수십년을 돌아 볼 때에 시기적으로 여름철이면 제직들이 까칠하게 변하던 모습들을 회상해 봅니다. 여름철 담임 목사님이 선교 여행으로 강단을 비울 때마다 전도사, 은퇴목사님이 계시지 않을 때면 다만 순종으로 감당해야만 하는 당연한 몫으로 제직들이 설교 준비하는 동안에는 까칠하게 마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감당하는 평신도의 주일예배 설교 내용을 자토장에 내려 놓음은 본인이나 교회 자랑 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선포 되어 진 말씀 중에 많은 내용들이 지난 수년 동안 이 공간으로부터 발췌된 것들로 아멘넷의 고정 논객이라면 누구나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내용들 입니다. 혹 내용이 각자의 신앙노선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용납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교리적으로 문제가 보이시면 바른 권면을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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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가 주일 대 예배 강단에 섰습니다. 심히 두렵고 떨리지만 다만 어쩔 수 없이 순종해야 함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잠긴동산에게 설교 담당이 됐다는 소식에 “이건 말도 안돼! 장로가 주일 설교를 하다니?” 라며 되들려 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비록 두려움으로 이 자리에 서기는 하지만, 받아 들이는 데는 마음에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만인 제사장설” 을 수용하여 가르치는 교단에 소속 합니다. 그러므로 장로가 주일 강단에 선다? . . . 말이 됩니다. 장로뿐이겠습니까? 안수 집사님도 1부 영어예배를 인도 하셨습니다. 주중 예배는 권사님 집사님들이 말씀을 인도 하였는데, 어느 권사님은 대지 10으로 나누어서 멋있게 설교를 합니다, 어느 집사님은 이중언어로 설교를 하시는데 얼마나 좋으신지요, 집사님 한 분은 “수요예배 close” 하시더니 그래도 신앙의 연륜이 깊으시니 얼마나 훌륭하게 감당 하셨는지요. 담임 목사님이 교회를 비울 때에 제직들이 강단에 설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특권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앙은 비약이 없어 구원 받고 20~ 30년은 믿어야 굳건한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계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살아남아 있는 마지막 사도 요한에게 성령께서 말씀을 주신 이 때가 사도 요한이 주님의 사역을 감당한지 20여 년이 흐른 때라고 합니다. 한 교회를 20년 정도는 섬기며 헌신해야 교회의 기둥이다 불림을 받을 수 있음이 성경적 입니다. 수십 년 간 주님의 몸 된 교회의 기둥을 하나씩 맡아서 감당하시는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의 그 수고와 눈물과 기도를 주님께서 아실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 분들은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OOOO 한인교회의 기둥이다.”
기도 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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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출애굽기12:3-10 “어린양 이신 예수 그리스도” 란 제목으로 허락하신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출12장은 유월절의 피비린내 나는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죄와 억압에서 해방할 뿐만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 하시는 하나님의 대 서사시의 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류 구원의 대 서사시의 이 역사에 동참하려는 자에게는 이스라엘 본토인이나 거류민이나 이방인이나 또는 타국 품꾼에게라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법이 있는데, 할례를 받은 후에야 유월절 만찬에 참석할 수 있는 하나님의 정하신 법 입니다. 할례를 받은 자로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좌우 문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집안에 있으면 죽음의 천사가 지나는 밤에 천사는 그 바른 피를 보고 그 집을 유월하여 넘어 가겠다, Pass Over 하겠다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 입니다. 구약에서의 유월절의 약속은 신약의 백성들을 구원 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사용하시어 보이시는 예표이며 그림자 입니다.

구약에서 보이신 예표 대로 신약에서 동일하게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의 피를 믿음으로 받아 들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시겠다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 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지라.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 이는 장차 메시야가 와서 죄와 죽음에 사로잡힌 인간을 구원할 비밀이 담겨있는 그림자이며 모형 입니다. [출 11:4-8] 인간사에서 장자를 죽인다는 것은 그 집의 대가 끊겨 멸망한다는 의미 입니다.

성도에게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서 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 공로로 인하여 멸망 당하지 않고 살아 남는 역사적인 사건이 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며 개인의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무엇 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 하셔서 죄로 물든, 모든 인간들을 구원 하시기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Message이며 Manual 입니다. 너희가 이 Manual대로 따라 오기만 하면 너희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을 주시겠다 하시는 Message요, 사랑의 편지요, 변치 않는 약속 입니다.

구약에서는 구원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보이며, 신약에서는 구원 받은 성도들의 신랑으로, 재판장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딤후3:16)으로.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기록한 책(벧후1:21) 입니다. 구약에서는 350회 신약에서는 1518회에 걸쳐 메시야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는 말은 곧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을 믿는다 하는 말과 동일한 것 입니다. 믿는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 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믿으라 하시지 않으시고 내 아들 예수를 믿으라. 하십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 임이라(사9:6).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 예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결여 되어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알지 못하는 하늘의 어떤 대상을 향해 믿는 샤마니즘이나 다를 바 없는 신앙 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구속하심을 전하는 기쁜 소식 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사건이 없이는 성경의 말씀을 받아 드릴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 카페트를 수십 년 밝고 다녔더라도 말씀을 깊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구원 받은 성도들을 도우시며 지키시고 재판장 되시는 예수님 앞에 서는 날까지 인도하십니다. 말씀을 잘 알아 깨닫도록 도우실 때에 비로소 영안이 열리고 귀가 열리게 되며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게 됩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 사함을 받고자 동물을 희생 시키는 제사 법이 있었습니다. 희생시킬 어린 양은 점도 없고 흠도 없어야만 합니다. 죄 사함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 끌고 온 희생양의 머리에 손을 언고 자기 죄를 전가하여 안수한 뒤, 배를 갈라 피를 흘리게 하고, 각을 뜨고, 불에 태워서, 화제로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립니다. 드려지는 화제의 연기를 하나님께서 흠향하시고 제사를 드리는 자의 죄를 사하시는 제사 법 입니다.

1995년도 우리교회에서 지금 예배 드리고 있는 이 성전을 봉헌을 하고 난 후 다음 해부터 매년 선교 여행이 시작 됩니다. 1997년 선교 여행에서 목사님과 같이 간 교인들이 선교 여행 중에 루마니아 어느 시골 집에서 민박을 하게 됩니다. 민박한 그 집의 주인이 평생을 양을 치는 목자 였다고 하는데 그 주인이 들려 준 이야기 입니다.

양들은 새끼를 낳은 후에 어미 양이 자기 새끼를 돌볼 줄을 모른다고 합니다. 무리 중에 그대로 놔 두면 짓발혀 죽을 수밖에 없기에 양을 치는 목자는 새끼들을 데려다가 숙식을 같이 하며 새끼 양마다 각각 이름을 지어주고 젖을 먹이며 키우는데 자라서 스스로 풀을 먹을 수 있을 때까지 키운다고 합니다. 자기 자식처럼 정성을 들여 키우게 되는데 이렇게 애지중지 키우다 보면 양은 목자 목소리를 알아 듣고 목자만 따라 다닙니다. 이렇게 자라 난 양들이 모여 수십 수백의 양 무리가 되는데 목자는 그 많은 양들을 이름으로 안다고 합니다. 그래서 “초롱아” 하고 목자가 부르면 풀을 뜯어 먹던 초롱이 양이 머리를 딱 들고는 자기 목자한테 매에헤 하고 온다고 합니다. 주인이 아닌 다른 목자가 이름을 부르면 머리만 들었다가 다시 숙입니다. 또한 양은 시력이 약하여 1미터 앞을 못 봅니다. 그러니 이 어린 양이 다 자랄 때까지 목자와 숙식을 같이 하며 지극한 정성을 받아가며 자랄 수 밖에 없는데 그 어린 양과 목자와의 친근감이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까지 형성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요10:27에서 예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우리 모두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어린 양 속죄 제물로 내어 준바 되고 단번에 십자가에 달려 모든 물과 보혈의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께서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고 사신 바 된 양이 되는 성도들을 목자가 양들을 이름으로 알고 있듯이 우리들을 각각 이름으로 기억하시며 지극히 아끼며 사랑 하십니다.

그런데 선교 팀이 머물던 그 집 주인이 후회스러운 일이 한가지 있는데 그 양들 중에서 어찌나 말을 안 듣는 녀석이 있었는지 평생 동안 양 두 마리를 죽였다고 합니다. 그리고서는 평생 후회하는 것 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 목자의 말을 듣지 안고 죽음을 당하는 염소 같은 양이 되고자 하는 그런 성도님은 안 계시겠지요. 그래서 목사님이 목자에게 양을 죽인 게 죄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소개하며 전도를 하였다는 이야기 스토리 입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몽골로 선교여행을 매년 가는데 선교여행 마지막 코스가 있다고 합니다. 양을 잡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이 정말로 사실인가를 확인하는 것 입니다. 양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순종을 하는데. 예수님을 양으로 많이 묘사 합니다. 양을 죽이는데 작은 칼로 손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배를 쨉니다. 고통이 있을텐데 양은 움직이지도 않고 빤히 주인만 쳐다봅니다. 양의 배에 찢어진 부분에 손을 집어넣고 숨 쉬는 부분을 막는데도. 양은 잠잠하여 주인만 쳐다봅니다. 숨통이 막히므로 창자가 풍선처럼 부풀어 밖으로 들어갔다 나갔다 하며 죽어가는 고통 중에서도 움직이지 않고 주인만 바라 봅니다. 주인의 뜻이라면 끝까지 순종하는 양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양은 눈을 조용히 감는데 죽은 것 입니다.

[찬송가141장]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성으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 당하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원 하시기 원 하십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이시되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신 아버지의 Standard에 미치지 못하기에 인간들을 그대로는 구원 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죄와 가까이 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의 속성 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되 공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인류를 위하여 구원 계획을 세우십니다. 무조건 적으로 사랑하시기 원하시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없는 인류를 구원 하시기 위하여 죄가 전혀 없으신 독생자 아들을 내어 주시기로 결정 하십니다. 인간 중에 어느 누가 친 자식을 남을 구하기 위하여 죽음으로 내어 줄 아버지가 있겠습니까?

하늘 보좌 높은 곳에 좌정하고 계셔야 할 본래 하나님의 본체이신 아버지 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손수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참 인간이신 아들의 모습으로 보이시며, 내가 그 어린 양의 피를 보면 그 집을 유월하여 넘어가리라 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하여 독생자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어린 양 제물이 되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 주게 하셨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받으신 고통과 수모와 부끄러움, 보혈의 피를 모두 흘리시며 죽으시기 까지 달리신 그 고난은 모든 인류를 영원한 죽음으로 부터 구원하시고자 스스로 당하신 고난 입니다.

본문 출12장 5절~7절 입니다.
5.너희 어린양은 흠 없고 일년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이 달 열흘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지금도 우리는 “어린양의 피”로 “피의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구약의 제사예식처럼 동물의 피로 제단에 뿌리며 예배 드리지는 않지만, 제단 앞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미 우리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하여 피를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피의 구속의 능력을 바라보며 믿는 것은 그 피를 우리들의 심령의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시는 밤에 좌우의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 안에 있어 죽음을 면할 수 있는 자격은 본토인이나 이방인에게 동일하여 넉넉하게, 누구든지, 얼마든지 지구의 70억 전체 인구에게라도 자격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해하고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성도들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이 새겨지게 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어린양의 피를 머리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는 자들만이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말씀 입니다

죄를 지으면 어떤 값을 치러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나요? 세상 법정에서는 여러 가지 형량이 있습니다. 집행유예로부터 사형에 이르기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정에는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곧 사형, 오직 지옥 행 입니다. 죽음으로만 죄의 값을 치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로마서 6장 23절에 분명히 기록된 말씀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러면 죄 중에 태어났고, 죄 가운데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예외 없이 다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피의 제사”입니다. 누군가 우리를 대신하여 피를 흘려 죽임을 당하면, 그것으로 우리들이 죄의 값을 치룬 것으로 여겨 주신다는 말입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의 울음소리는 애끓는 버들피리 소리인양 간장을 녹인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 목자를 찾아 헤매는 애끓는 어린 양의 심령과 같은 분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은 양 우리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떠나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원 하십니다. 잃어 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시면 기뻐하시며 어깨에 메고 돌아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양을 어깨에 메고 계신 성화를 보신 적이 있지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린 그림 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이 인간의 육신의 아버지의 심정과 같을 것입니다. 여기에 계신 대다수의 분이 부모님이신데 사랑하는 자녀의 얼굴을 한번 떠 올려 보시며 얼굴 모습을 그려 보십시요. 혹 자식의 모습이 떠 오르지 않으신 분이 있으신가요? 그런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있을까요? 젊은이 들은 혹 사랑하는 이가 있으면 그 사랑하는 님의 얼굴을 떠 올려 그림을 그려 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떠 오르지 않는가요. 그러한 사랑 관계도 있습니까?

우리 인간에게 자신의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이 되게 하시고 창조 하셨으며 자신의 피 값주고 사신 성도들을 기억하시며 사랑하시며, 머리카락 까지도 세시며, 성도들을 각각 이름으로 알고 계시는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이십니다.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믿음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합니다. 각자의 믿음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오늘 도전하는 말씀을 많이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10:10) 에서는 믿음이 형성되는 현상으로 구원에 이름을 말하고 있는데, 각자의 믿음이 자리하는 장소를 구분 할수 있습니다. 각자의 마음에 있고 또한 각자의 영혼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분명히 믿음이 마음에 자리 잡고 형성이 됩니다.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평강의 평강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런데요,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어찌 CONTROL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갈대 같아서 도대체 마음이 어찌 변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 자신이 내 마음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믿는다 하는 자는 자기 생명의 주인이 누구이신지 망각하고 다만 자기 주먹을 믿는 자와 같을 것 입니다.

성도가 믿어야 할 것은 오직 성령으로 인치시고 확증해 주신 믿음, 성령으로 심지가 굳어 각자의 영혼에 각인된 믿음만이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영혼을 능히 구원할 겨자씨와 같은 100%의 믿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도우시는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스스로가 구원을 이루어 나갈 수가 없습니다.

한 영혼이 주 안에서 구원받고 성도로 갓 태어나는 순간을 주께서 거룩하다, 의롭다 인정하시고 불러 주시는 것을 칭의 라 합니다. 의롭게 되는 칭의, 성결을 거쳐 성화을 지나, 하늘 나라에 입성하여 주와 연합 할 때에야 우리가 영화로운 신분이 됩니다.

한 사람이 성도로 갓 태어나 영화로운 천국백성이 되기까지의 여정에서 주로부터 받은 믿음을, 점도 흠도 없이 순결하고 정결한 신부의 정절로 지키며 성도의 옳은 행실로 믿음을 승화 시켜 나가는 것은 성도가 담당해야 할 몫 입니다

성도가 구원을 이루어 가는 길이 마치 천로역정 과도 같을 것입니다. 내 정과 열심으로 천국을 침노하고자 해도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 낼 수가 없습니다. [빌2:12]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사도바울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이 아니고는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님의 인도 하심과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임하셔서 성령으로 세례 주실 것을 구해야 합니다.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그 분의 뜻대로 나를 주관하실 수 있도록 나를 Avaiable하게 넘겨 드려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유월절을 지키려면 할례를 먼저 받아야 하는 율법이 있습니다. 히브리 인들에게는 죄를 회개할 때에 옷을 찢으며 회개하는 법이 있습니다. 구약이 거의 끝나가는 (요엘2:13)에서“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 올찌어다”말씀 하십니다. 율법은 장차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 입니다. 육체의 할례는 하나님께서 모형과 그림자의 뜻을 주신 것이고 신약에서의 할례는 마음에 하는 할례를 말합니다. 즉 회개의 뜻 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마음에 할례를 받고 회개하는 자만이 어린 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 올 자격이 있습니다. 그렇게 회개하는 자 만이 죽음의 천사가 지나가는 두렵고 떨리는 죽음의 밤에 대문의 좌우 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른 집 안에 있어 죽음을 면할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 입니다.

흠도 점도 없으신 예수님이 어린양이 되셔서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이 끌려가 당신과 나의 모든 죄를 지고 죽음을 당하셨음을 믿는 자마다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어린 양의 보혈의 피로 구속하시는 능력과 죄의 속박에서 해방하는 능력이 있음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류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며 영광 거두십니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으면 만나 주시리라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 앞으로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 가면 하나님도 한 발자국 다가 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로 나아 오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나아 오는 자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원 하십니다.

예수님 만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경 전체를 요약한 요3:16의 말씀 입니다

즉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정결케 하시는 보혈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어린양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십자가의 보혈의 피의 권세와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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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세례에 관한 12가지 포인트

 

1. 세례의 4가지 종류

1)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의 세례.

2)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세례.

3)       회개와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신자에게 받으라 명령하신 물세례.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의 세례가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자에게 회개의 물세례받을 것을 명령하셨음.

4)       이미 중생한 자에게 약속하신 성령세례.

 

2. 물 세례는 명령인데에 반해서 성령세례는 약속이다.

 

1)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2:38-39)

 

선물은 좋은 것이다. 그래서 사모하고 구해야 할 것이다.

약속은 명령이 아니라 약속이다. 약속의 가치를 알아야 하고 그 약속을 믿어야 한다.

얼마든지라 함은 받는 자의 차별이 없고 제한도 없고 부족함이 없이 모든 구원받은 신자들을 향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2) 성령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상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과 하나님의 맡기신 일을 이루어 드리려고 애써 본 사람만이 구하게 되어있다. 성령세례를 구해야 함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 나의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려지기 위하여 성령세례를 구해야 한다.

 

구약의 스룹바벨 처럼 하나님의 전을 세워 드리려 하면서 자신의 능력과 지혜만을 의지하여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철저한 실패를 통하여 이 사실을 배우게 될 수밖에 없다.

4:6절은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이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3) 성령을 구하는 자가 전심으로 구하며, 믿고 기다리되 의심하지 않고 약속을 붙잡고 받을 때까지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다른 어떤 것을 구할 때보다 성령을 구할 때 기뻐하신다. 11:13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4) 신자가 구할 수 있는 것 중에 최고이면서 동시에 그 외에 모든 것까지 다 받을 수 있는 것이 성령이시다. 성령을 받으면 그 분과 함께 권능이, 지혜가, 성결이, 담대함이, 또 사랑과 기쁨과 희락과 화평 등등의 수없이 많은 구하지 않은 것까지 다 신자의 열매로써 주렁주렁 매달리게 되는 것이고 결국은 그 열매가 하나님의 제단에 거룩하게 드려지는 것이다. (5:22/15:16-18)

 

3.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차이


1) 세례는 항상 시작을 나타낸다. 신자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제부터 예수를 구원자로 믿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섬기고 따르며 사랑하고 충성하는 삶을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목적도 바로 그 일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함이다.

2)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선물로 구하여서 받는 것에서 그쳐버리고 마는 우를 범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성령세례는 시작이라면 성령충만은 그 목적이 이루어지는 완성이다. 성령세례는 시작이라면 성령충만은 그 목적이 이루어지는 완성이다. 영어로는 “fill to overflowing”이란 말이다. 꽉 차고도 넘쳐서 흐르는 상태이다. 어느 신자의 삶에서나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고 유익하다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고 유익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사실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세례받은  수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다 같은 곳에서 끝나지 않는다.

 

성령충만한 삶이란? 1. 성령께서 나를 인도(lead)하신다는 상태이고 2. 성령께서 나를 통치하고 주관(governing and ruling)하신다는 상태를 동시에 의미한다.

 

3)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5:24) 말씀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상태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그 사실을 알며 동의하며 나아가 언젠가 그것이 사실이 되도록 노력해야 된다.

 

4) 충만이라는 말이 “fill”이라 할 때는 "내 자신을 채움"이라면 to overflowing이라고 할 때는 다른 이에게 흘러가 생수가 됨이란 뜻이다. 성령세례는 나를 세워주는 것인데, 성령충만은 남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도록 타인을 세워주는 것이다(7:38-39)

 

5) 물세례도 그 자체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베드로 사도는 벧전3:21에서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이것이 매일매일 계속해서 일어나야 할 반복되며 또 앞으로 전진해야 할(process and progress) 영적 순례 여정의 첫걸음인 것을 분명히 한 것처럼, 성령세례도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라 하였다. 여기서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단어는 진행형으로 씌어졌다. 즉 이것은 단회적 사건(성령세례는 한번 받는 것에 반해)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딛3:5절에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도 역시 진행형으로 씌어졌다. (NIVrenewal이라 했는데 좋은 번역은 KJB처럼 renewing이라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뜻과 일치함)

 

다시 말하면 성령세례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날마다 신자의 삶에서 그 능력과 역사가 계속 되어서 결국은 하나님의 역사가 완성되는 것을 사모하며 늘 그렇게 되도록 자신의 삶의 주권을 성령님께 넘겨드리며 자기 자신은 오히려 부인함으로 육체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성령충만의 삶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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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령세례는 누가 베푸시는 것이며 , 또한 누구에게 주시는 것인가?


1) 성령을 부르기를 마10:20 에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라"라고 함. 즉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성령이시니 원래는 성령을 부어주시는 분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시라 해야 옳다. 그런데 이 때는 예수께서 이 땅에 머물러 계시는 때이므로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께 성령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마12:18, 눅4:18, 요3:34" 등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그에게 부어 주셨음을 증거한다. 다시 말하며 그리스도로서 지상에서의 사역을 감당하실 때에는 우리 주님 예수께서도 성령을 보내시는 입장이 아니라 성령을 받으시는 입장임.


2) 그런데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즉 천상으로 승귀하신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성령을 받아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분이 되신다. 여기서 두가지 핵심이 있는데, a. 여전히 아버지께서 보내시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보내신다는 것이다 (요14:26). b. 예수께서 천상으로 승귀하시고는 그 승리와 또 받으신 영광의 표징이 아버지께서 예수께 성령을 이 땅에 보낼 수 잇는 권세를 허락하셨다는 것이다(행2:33).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시라 해도 맞다. 그러나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신다. 또 승리하신 예수께서 아버지께 받아 보내셨다해도 맞는 것이다.


3) 여기서 한가지 더 보탤것은 비록 구약성경에 직접적으로 성령을 보내셨다고는 하지는 않으나, 그것을 예언하고 약속하셨기에 참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성령의 오실 것을 겔36:26-27 같은 곳에 예언하고 계시며 특히 요엘서 2:28-29은 오순절날 일어난 사건의 의미를 묻는 자들에게 사도들이 직접 인용하면서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취한 것이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라 하면서 대답한다. 그래서 행2:33 에 계속해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즉 자신들이 받은 성령의 강림사건)"이라 했는데 바로 앞에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 . . . 부어 주셨다"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예언되었을뿐 아니라 약속되었던 것이었는데, 예수께서 반드시 먼저 해를 받으셔(십자가를 지시고 승리)야만 그 후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높이시는 일이 일어나고 그렇게 높임을 받으시는 상태에서야 비로소 성령을 아버지께 당당히 받아서 교회와 성도에게 부어 주실 수있게 된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를 요7:39에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더라" 라고 놀랍게 선언하신다. 우리 신자들이 성령을 받는 일 이전에는 반드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셔서 하나님께 높힘을 받는 일이 선결되었어야 하는 것이다.


4) 

방언의 은사

 

두 가지 방언

 

방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람에게 하는 대인(對人) 방언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게 하는대신(對神) 방언이다.

 

사도행전 2장 4-12절의 말씀을 보자.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빌리아,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외국에 나가 본 일도 없고 그래서 외국어라고는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여러 외국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할 줄 모르는 외국어를 성령의 능력으로 말하게 되는 것이 대인(對人)방언이다. “외국어 하나 마스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성령의 은사로 배우지도 않고 들어보지도 못한 외국어를 술술 말할 수 있다니 참으로 탐나는 은사구나”하고 생각한다면 그 오해이다. 대인 방언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원래 인간의 언어는 하나뿐이었다. 모든 민족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들이 교만해져서 한 곳에 모여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다

 

창세기 11장 1-9절의 말씀을 보자.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이때부터 인간들은 여러 나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를 여러 나라 말로나누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데 나라마다 인종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서 소위 언어의 장벽이 복음의 땅 끝 전파의 방해가 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이 언어의 장벽을 성령의 능력으로 무너뜨리는 것이 바로 이 대인 방언인 것이다.

사도행전 2장 11절에“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라고기록되어 있다.

 

대인 방언이란 흔히 오해되고 있듯 어떤 외국어를 배우지도 않고 그냥 술술 말하게 되는 그런 은사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꼭 전해야 하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갑자기 성령의 충만을 받아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나도 모르게 그들의 언어로 말을 하게 되는 것이 대인 방언인 것이다.

 

어느 목사님이 계셨다. 이 분이 남미를 방문했을 때의 일인데, 마침 주일이라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어디 교회가 없나 하고 주위를 살펴보았더니 호텔 근처에 작은 교회가 있어서 덮어놓고 들어갔는데, 들어가 보니 모두가손뼉을 치며 신나게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더니 한 성도가 앞으로 나와 간증을 하는 것이었다. 

 

아니, 간증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한국 목사님은 스페인어는 전혀 몰랐고 다만 눈치로 그렇게 추측했을 뿐이다. 그냥나가버릴까 생각도 했으나,  이런 교회에서는 어떻게 예배를 드리나 하는 호기심으로 그냥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간증이 끝나자 그곳 목사님이 단상에오르더니 한국 목사님보고 앞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당신은 처음 보는 동양 사람인데 보아 하니 믿음도 좋고 간증꺼리도 많은것 같은데 오늘 여기 온 것도 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이니까 여러 사람들 앞에서 간증을 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도 말을 알아들은 것은 아니고 눈치로 그렇게 이해한 것뿐이다.

 

한국 목사님은 말이 안 통해서 못하겠다고 손짓발짓으로 거절을 했으나 어떻게 된 것이 그곳 목사님은 막무가내 간증을 하라고 강권하는 것이었다.

할 수없이 한국 목사님은 단상으로 올라가서 간절한 기도를 올린 다음, 에라 모르겠다, 아무렇게나 지껄이자 하고 아무 소리나 나오는 대로 마구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앉아 있던 사람들이 조용해지더니 한국 목사님이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목사님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소리를 더욱 열심히 지껄였다. 이윽고 사람들은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하더니 여기저기서 엉엉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증이 끝나자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는 것이었다. 이 한국 목사님은 성령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전혀 알지 못하는 스페인어로 간증을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인 방언이다.

이런 대인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 중 극히 드물게는 필요할 때면 언제나그것도 여러 나라 말을 자유롭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책에서 보니 St.Francis Xavier 라는 사람은 인도, 한국, 일본, 등지에 파견된 전도사였는데, 이 은사를 받아 외국어를 전혀 배우지 않고도 그 나라 말로 전도  사명을 완수했다고 한다. 또 어떤 할머니는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는데도 교회에서 목사님이 영어로 하는 설교를 스페인어로 다 알아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 또 하나의 방언인 대신(對神) 방언은 어떤 것인가?

대인 방언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인에게 말을 하고또 그들의 말을 알아듣는 것이라고 한다면, 대신 방언은 나의 영이 성령의도우심으로, 또는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께 직접 기도를 드리는 하늘나라의 언어인 것이다. 대신 방언은 말하자면 신비한 영의 언어이며, 이런 뜻에서 대인 방언보다 훨씬 귀한 은사인 것이다. 

 

이 대신 방언은 신비한 영의 언어이기 때문에 나의 영과 하나님 외에는 알아듣는 사람이 없고, 사람들 중 특별히 방언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만이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있다.

대신 방언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우리가 보통 방언이라고 말할 때에는 이 대신 방언을 가리킨다. 그 이유는 대인 방언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시는 특수 은사이지만, 대신 방언은 많은 사람에게 주시는 흔한 은사이며, 그러면서도 대인 방언보다 훨씬 신령하고 유익하며 그래서 누구나 다 받아야 하는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 방언(대신 방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이제부터‘방언’하면 이 대신 방언을 말한다)

 

방언을 받아야 하는 이유

 

은사는 받겠다고 해서 다 받아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그 은사를 사모하고 오랫동안 기도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그 은사는 오지 않는다. 그러나 예외가 하나 있다. 방언의 은사는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주신다. 

 

방언의 은사는 누구나 받는 은사이고, 누구에게나 주시는 은사이고, 누구나 받아야 하는 은사인 것이다.

방언의 은사는 제일 작은 은사, 별로 귀한 은사가 아닌 것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방언의 은사는 성령의 모든 은사 중 가장 흔한 은사이다.

그러나 어느 면에서는 성령의 모든 은사 중 가장 귀한 은사가 방언의 은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희귀한 것이 귀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사는데 꼭 있어야 하는 귀한 것일수록 그것을 아주 흔하게 공급해 주신다. 그것 없이는 단 몇 분도 살지 못하고 죽고 마는 공기 같은 것은 하나님은 무한량으로 공급해 주신다.

방언의 은사는 매우 흔한 은사이고,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주시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아주 귀중한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럼 방언이 어째서 그토록 귀한 은사인가?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1) 방언은 나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수단이다.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나의 영 사이에 전용 무전기를 설치해 놓은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무전기를 통해 아침저녁으로 그리고 수시로 하나님과 나의 영이 비밀 통화를 하는 것이다.

 

2) 방언으로 기도를 하면 나의 영이 나도 모르는 것을 기도한다.

 

사람이 기도를 할 때, 곧 인간의 언어로 기도를 할 때, 그 기도의 내용은매우 제한적이다.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것, 생각할 수 있는 것 밖에는 기도할 수 없다. 그러나 영으로 기도를 할 때에는 곧 방언으로 기도를 할때에는 내 속에 있는 영이 직접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생각, 나의 육신의 욕망이나 세상적인 욕심을 떠난 순수한 영적 소원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3) 방언은 신령한 곳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방언을 받은 사람이라면 입술과 혀에 경련이 일어나면서 방언이 터져 나오던 그 첫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신령한 것을 몸으로 직접 느끼는 하나의 강렬한 체험이다. 그때 느꼈던 희열과 하나님께 바쳤던 뜨거운 감사를 잊지 못할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신령한 영계에 그 한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이다.

 

4) 방언은 다른 신령한 은사로 통하는 문이다.

 

성령의 신령한 은사, 예언, 병 고치는 능력, 능력 행함의 은사 등 은사를 받은 사람 중에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말하자면 방언은 신령한 은사로 들어가는 활짝 열린 문인 것이다. 방언을 받지 못하고는 다른 신령한 은사를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5) 방언 기도하는 것에 의해서 영이 자란다.

 

방언 기도를 통해 나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을 하게 되고, 이 하나님과의 계속적인 교통을 통해 나의 영이 성장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영이 성장하게 되면 그 만큼 하나님을 더 가까이 체험하게 된다.

 

방언을 받는 방법


방언을 받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간절히 사모하며 주야로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은사 중에는 그 은사가 이미 임해 있는데도 본인이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방언의 은사는 본인의 입으로 방언이 터져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은사가 임하는 즉시 본인이 그것을 알게 된다. 방언은 반드시 기도하는 중에 받게 된다.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방언이 터져 나오는 일은 절대로 없다. 

때문에, 평소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방언의 은사는 결코 임하지 않는다. 방언 그 자체가 기도하기 위한 은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오래 믿고도 방언도 받지 못한 사람은 대개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방언의 은사는 속으로 묵상 기도를 할 때에도 임하지 않는다. 크게 소리 내어 외치며 기도할 때에 방언의 은사가 임한다. 혼자서 기도할 때보다도 여러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큰 소리를 내며 열정적으로 기도할 때에 방언의 은사는 더 잘 온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를 받고자 하는 사람은 될 수 있는 대로 큰 소리로 기도를 해야 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도원에 가거나

금요 철야기도나 은사 집회 등에 자주 참석해서 모두들 큰 소리로 통성 기도를 할 때, 그 속에 끼어 힘을 다해 큰소리로 외치며 기도를 해야 한다.

방언의 은사를 달라고 외치며 기도할 때 방언이 갑자기 터져 나오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다른 것을 위한 기도를 정신없이 하고 있을 때 예기치 않게 방언이 터져 나오는 수가 많다.

 

처음 방언은 어떻게 터져 나오나?

입술이 비틀리거나 혀가 경련을 일으키거나, 혀가 굳어져 입천장에 올라붙거나 하여간 발성 기관인 입술이나 혀에 갑작스런 이상이 생겨서 이상하고 묘한 소리가 튀어나온다. 이게 방언이다. 방언의 은사가 임한 것이다.

이때 주의할 것이 있다. 방언의 은사가 왔구나! 하고 입술과 혀의 움직임을 멈추면 안 된다. 

 

계속 입술과 혀를 놀려야 한다. 계속 입술과 혀를 움직여 소리를 내야 한다. 있는 힘을 다해 큰 소리로 정신없이 땀을 흘리며 미친

사람처럼 뜻도 모르는 소리를 질러대야 한다. 이렇게 1분이고 2분이고 계속 하고 나면 이제 방언의 은사하는 내 것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다 끝난 것은 아니다. 다음은 연습을 해야 한다. 

시간 나는 대로 혼자 앉아서 소리를 내어 방언하는 연습을 하며, 또 여러 사람들이 모여 큰 소리로 통성 기도를 할 때, 특히 방언으로 기도를 할 때, 그 틈에 끼어 방언 기도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래서 아무 때고 마음만 먹으면 방언을 자연스럽게 술술 나오도록 연습을 쌓아 나가는 것이다.

어느 정도 소리 내는 연습이 되면 다음에는 그 소리에 내 마음의 간절함을 싣는 연습을 한다. 이상한 소리만 내는 것이 방언 기도는 아니다. 마음속의 간절함을 그 소리에 실어 드리는 것이 방언 기도인 것이다.

 

 

방언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방언을 받기 위해 열심히 기도를 하며 노력은 하는데 방언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방언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방언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데 있다. 아직 방언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방언이란 시동을 걸어 놓은 자동차 엔진처럼, 가만히 있어도 방언이 저 혼자 나오는 것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를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하고는 이제 입속에서 방언이 나오나 안 나오나 입 다물고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방언의 은사는 받지 못한다. 방언의 은사는 입술이나 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심령 속에 오는 것이다.

 

처음 방언이 터져 나올 때, 입술이나 혀가 경련을 일으키거나 마비되거나 하는 것은 하나님께 이제부터 너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노니 앞으로는 방언으로 기도를 해도 좋다, 하는 하나님의 신호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신호를통해 내가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내 힘으로,나의 의지로 내 혀와 입술을 움직여 방언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방언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입에서 술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식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그게 하나님의 은사냐? 하고 물으실 분도 계시겠지만, 방언이란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에 실려 올라가는 나의 영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에 한 중년의 신도가 있었다. 다른 교회에서 옮겨온 분인데, 꽤 오래 교회에 다녔으면서도 방언을 하지 못했다. 

 그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방언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방언 받기를 갈망했고 우리 교회로 옮겨 온 이유도 그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방언을 받게 하려고 매일 밤교회에 함께 나와 강대상 밑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기도를 드렸다. 그는 우리말로 기도를 드리고 나는 방언으로 기도를 드렸다.

다른 사람에게 방언을 받게 하기 위해 함께 기도를 할 때에는, 가능한 한 큰 소리로, 되도록 빠르게 그리고 열성을 다해 소리를 내야 한다. 이렇게

여러 날 동안을 했는데, 그래서 방언이 올 때가 되었는데, 안 오는 것이었다.

 

“성도님, 방언이 올 때가 되었는데, 이상한 거 느껴진 것이 없나요?” 그러자 그가 말했다.

“방언이 입에까지 왔다가 그냥 갔어요. 아직도 기도가 부족한가 보죠?”

“내? 방언이 입에까지 왔다가 그냥 가요?”

정신없이 기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입술이 비틀리는 것을 그는 느꼈다.

순간, 방언이 왔구나 하고 생각한 그는 이제 자기 입에서 방언이 구구절절 쏟아져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입술을 벌리고 가만히 있었는데,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방언은 가만히 있는데 저 혼자 줄줄 나오는 것은 아니다. 방언을 받고 싶어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바로 이것을 이해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 중에는 자기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지껄이면 그게 무슨 은사냐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방언은 바로 그런 은사인 것이다. 

방언은 뜻 모르는 소리를 지껄이는 은사가 아니라, 영으로 기도하는 은사인 것이다. 소리는 내가 내는 것이다. 소리는 내가 의도적으로 내지만,

성령께서 그 소리에 영들은 듣고 아는 “뜻”을 실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방언이다.

 

방언은 소리에 그 뜻이 있지 않다


아직 방언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방언을 이미 받아서 방언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방언할 때 내는 소리 그 자체에 뜻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마치 인간들의 언어처럼 소리나 소리의 순서에 어떤뜻을 가지고 있을 것이란 것이다.

 

명확하게 말하지만, 방언 기도를 할 때 내는 그 소리 자체에는 아무 뜻도없다. 랄랄랄 하든 룰룰룰 하든 또 뭐라고 하던 소리 그 자체에는 아무 뜻

도 없다는 말이다. 필자도 처음 방언을 받았을 때에는 소리 그 자체에 어떤뜻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후,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내가 방언으로 기도를 시작하면 나의 영이 하나님을 향해 영 자신의 의지로기도를 드리기 시작한다. 내가 방언 기도를 하며 내는 소리는 단지 나의 영이 지금 기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밖으로 들어내고 있을 뿐, 내 영이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기도의 내용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밤새도록 입으로는 랄랄랄랄 하고 한 가지 소리만 하고 있어도 기도하는 영은 하나님을 향해 온갖 내용의 기도를 다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언 소리를 듣고 어떻게 그것을 통역하는가 하는 문제가 나온다. 이 문제는 방언 통역의 은사를 말 할 때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하자.

방언 기도를 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저 입술만 놀리고 뭐라고 소리만 내고있으면 그것이 방언 기도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모든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진정과 간절함과 뜨거운 열정이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기도가 되는 것이다. 입술로만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혀와 입술만 움직여 이상한 소리만 낸다고 그것이 방언 기도는 아니다. 그 방언에 하나님을 향한 나의 진정과 간절함과 열정이 실려야 하는 것이다.

 

한 여자 집사님이 있었다. 남편에게 딴 여자가 생겨 남편이 집을 나갔다.

이 여자 집사님은 밤마다 교회에 나와 밤을 새며 방언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들어보니 소리만 요란했지 전혀 방언 기도가 아니었다.

남이 하니까 소리만 흉내 내어 하는 가짜 방언이었다. 사실은, 기도원 같은 곳에 가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방언 소리를 들어보면 방언 기도 아닌 소리뿐인 가짜 방언을 하는 사람들도 상당 있는 것이다.


귀신 방언이 있는가?

 

사람들 중에는 귀신 방언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몇 해 전, 어떤 사람이 간증하는 중에 들은 것인데, 그가 하루는 산에 가서 밤에 기도를하고 있는데, 새벽 무렵이 되어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큰 소리로 방언을 하며 산 길을 내려오는데 그 방언이 좀 이상해서 분별을 해 보았더니 귀신이 따라오면서 그들의 입을 빌어 하는 귀신 방언이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잘 못 안 것이다. 귀신 방언이란 없다. 방언은 성령의은사이기 때문에 귀신은 절대로 방언을 할 수 없다. 방언은 나의 영과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드리는 기도인 것이다. 따라서 귀신 방언이란 없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오직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귀신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실 리가 없는 것이다.

또 하나, 이것은 내가 잘 아는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교회에 나이 많으신 여자 집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이 집사님의 다 큰 자제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어서 이 여자 집사님은 매일 밤 교회에 나와 아들을 위해 기도를하고 있었다. 시간이 자정을 넘어 기도가 한창 무르익을 때면, 이 집사님은 강대상 밑에 엎드려 방언으로 기도를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하루는 스스로신령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어느 젊은 여자 집사님이  이 할머니 집사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집사님 방언은요, 모두 하나님을 원망하는 방언이에요.”
 

할머니 집사님은 이 말에 그만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매일 밤잠을 안자고자정을 훨씬 넘기면서까지 기도를 했는데, 그게 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기도였다니!

할머니 집사님은 그 후에도 매일 밤 교회에 나오기는 했으나 기도는 할 수가 없었다. 겁이 나서 방언 기도도 못하고 우리말로 기도를 하려고 해도 통기도가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매일 밤 멍하니 그냥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그 젊은 여자 집사님은 참으로 엄청난 잘못을 저질러 놓았다. 아들의 병을 위한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를 막아버린 것이었다.

 

방언에는 귀신 방언도 없지만, 하나님을 원망하는 방언도 없다. 방언 기도란 나의 영이, 나와 함께 하시는 성령과 더불어 교대로 혹은 이중창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귀신 방언에 대해 몇 마디만 더 하자.

 

<부르는 소리> 2부“기도와 응답”의 초판이 발간된 것은 1989년 11월 15일이었다. 지금 필자가 얼마간의 수정을 가하며 컴퓨터에 입력 작업을 하고 있는 지금은 2003년 10월이다. 그러니까 초판을 낸지 거의 14년 만에 수정판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그 14년 동안, 필자는 이 귀신 방언 때문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기도 하고 또 많은 항의 전화를 받았다. 분명히 귀신 방언은 있는데 어째서 없다고 하느냐? 하는 항의였다. 


그 중 어떤 여자 목회자께서는 상당히 흥분된 목소리로 필자를 비난하는 전화를 걸어 왔다. 그 분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부르는 소리>는 목회자들이 많이 읽고 있는데 그런 잘 못된 소리를 써서사람들을 잘 못 가르치고 있으니 죄가 크다. 빨리 귀신 방언이 있다고 수정해라.” 나는 대답했다.

“귀신 방언은 없습니다.”

그 분은 나를 설득할 기세로 말했다.

“왜 없어요. 내 귀로 듣고 있어요!”

나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귀신 방언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귀신들린 사람이 방언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을 가지고 귀신 방언이라고 말한다. 실은 나도 그런 방언 같은 소리는 많이 들었다.4-5년 전의 일이었다. 성지 순례를 떠난 일행 중에 귀신들린 젊은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버스 속에서 토하기 시작했다. 그날 밤 숙소에 들었을 때, 나는 그 여인을 내 방으로 불렀다. 그녀 등에 손을 얹고 방언으로 귀신을쫓기 시작했다. 나는 좀처럼 귀신 쫓는 일은 하지 않지만, 그 날은 나도 모르게 그것을 하게 되었다. 한 참 방언 기도를 하지 그녀는 다시 토하기 시작했다. 나는 열을 내서 방언을 하며 귀신에게 나가라고 소리를 쳤다. 여인은 더욱 심하게 토하고 나는 더욱 큰 소리로 방언을 하며 귀신을 쫓아내려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때,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쓱 쳐들더니 나를 행해 방언으로 대들기 시작했다. 워낙 큰 귀신같아서 나는 그만 쫓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 귀신이 그 여자의 입을 빌어 나에게 방언으로 대항했다고 지금 내가 썼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그 귀신은 그 여자의 입을 통해 방언을 말한 것이아니라, 내 방언 흉내를 낸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이것을 귀신 방언이라고 말한다. 귀신이 방언하는 소리를 내 귀로 똑똑히 들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귀신도 방언을 한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다.

 

 

방언은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 중 하나로 성령으로부터 받는 은사요, 은사는 오직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이다. 비록 귀신이 방언 같은 소리를 낸다고해서 그것이 어떻게 방언이 되는가?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이 남들방언하는 소리를 듣고 자기도 따라서 그런 소리를 낸다고 그게 방언인가?

아니다. 빙언 흉내다. 흉내는 알맹이 없는 빈껍데기 일 뿐이다. 귀신이 방언 같은 소리를 한다고 그게 방언이란 말인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단지방언같이 들리는 소리일 뿐이다. 귀신 방언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얼마간의 영 분별의 능력이 있거나, 약간의 방언 통역의 능력만 있었더라면 그 귀신이 남의 입을 빌어 지껄이는 그 소리가 방언 아닌 소리일 뿐이라는것을  알았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방언은 소리 내는 은사가 아니라 기도하는 은사인 것이다. 방언은 기도다. 방언이란 입으로는 뜻을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면서, 내 영은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있는 것이 바로 방언인 것이다. 그런데, 귀신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올려? 그럼, 그것은 귀신이 아니지. 따라서 귀신은 절대로 방언을 할 수 없다. 다만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방언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귀신 방언이 있다거나 귀신도 방언을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귀신들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이정도 말했는데도 아직도 귀신 방언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믿어도 좋다.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속은 못 보고 겉만 본다. 영은 못 보고 육만본다. 그래서 귀신들린 사람이 방언 같은 소리를 하면 그 귀에 울리는 소리만을 듣고 그게 귀신 방언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영의 소리는 못 듣고귀에 울리는 소리만 듣고 모든 것을 판단해버리는 것이다.

방언에는 귀신 방언도 없지만, 하나님을 원망하는 방언도 없다. 다시 말하거니와 방언은, 성령으로부터 받은 참 방언이라면,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올라가는 내 영의 간절하고 신령한 소망인 것이다.

방언에 대해 또 한 가지 잘 못 알려지고 있는 것이 있다. 방언을 일본 방언이니 중국 방언이니 혹은 독일 방언이니 하고 부르는 것이다. 대인 방언에는 물론 일본 방언도 있고, 중국 방언도 있다. 일본말을 모르는 사람이 일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에 갑자기 성령의 충만을 받아 자기도 모르는 일본말이 쏟아져 나왔다면 이것은 일본 방언이다.

 

그러나 대인 방언이 아닌, 우리가 하는 대신 방언에는 일본 방언이니 중국방언이니 하는 것은 없다. 아마도 방언을 하는데, 그 방언이 일본말 비슷하게 들린다고 해서 일본 방언이라고 이름을 붙였겠지만, 방언은 그것이 설사 어느 나라 말처럼 들릴지라도 방언은 그냥 방언인 것이다.

 

 

방언 배우는 법

 

어떤 교회에서는 방언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방언을 가르친다.반면, 방언을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 일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에 의하면 방언이란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인데 어떻게 그것을 가르치고 배우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주시는 것이므로 사람이 노력해서 그것을 배울 수도 없고 또 가르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예외가 하나 있다. 방언의 은사가 바로 그것이다.


방언의 은사만은 배워서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어째서 방언의 은사만은 배워서 할 수가 있는가? 사실은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방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방언의 은사가 이미 와 있는데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은사가 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느껴도 방언을 하는 방법을 몰라서 못하는 사람들에게 방언 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방언을 가르친다는 것은 방언의 은사 자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와 있는 은사를 입으로 내서 말할 수 있게 소리 내는 연습을 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방언 소리 내는 연습은 어떻게 하나?

 

1) 다른 사람이 방언하는 소리를 듣고 그 흉내를 내어 혼자서 소리를 여러 번 반복해서 해 본다. 이때, 소리 그 자체에는 아무 뜻도 없으니까 소리에 너무 신경 쓸 것 없이 그저 혀 돌아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소리만 내면 된다.

다섯 살짜리 어린이가 엉터리 영어 흉내 내듯 해도 되고, 하여튼 쉴 새 없 이 혀와 입술을 놀려서 아무 소리나 끊기지 않고 나오게 하면 된다.

 

2) 다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방언으로 기도하는 곳에 가서 그 속에 끼어 앉아 크게 소리를 내어 방언 기도를 해 본다. 모두들 열심히 소리 내어 기도를 하기 때문에 옆 사람이 뭐라고 기도를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옆 사람이 혹시나 내 엉터리 방언을 듣고 흉보지나 않을까 따위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마음껏 큰 소리를 내어 방언을 해 본다.

 

3) 이제는 정성을 다해 열심히 소리를 내면서 나의 영혼을 그 방언 소리에 싣도록 노력해 본다.

 

4) 좀 더 숙달된 방언을 하기 위해서는 자주 방언 기도를 해야 한다. 신령한 사람이 방언 기도를 하면 그 옆에 함께 앉아 그의 방언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그를 따라 방언기도를 한다. 이런 것을 자주하면 방언 기도의 영력이 자란다.

 

영적으로 깊은 방언을 하기 위해서는 방언을 하면서 나의 정성을 그 방언 기도 위에 다 쏟아 넣어야 한다.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도 연습을 해서 방언 흉내를 낼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방언은 아니다. 방언은 사람의 힘으로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셔야 하는 은사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고도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소리 내는 방법만 배우면 곧 방언을 할 수 있지만,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소리를 배워 방언 같은 소리를 낸다 해도 그것은 방언이 아니다. 사실은, 우리들 주위에 방언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성령을 받지 못하고 입으로 소리만 내는 방언 아닌 가짜 방언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방언 통역의 은사를 받아 이들 방언하는 것을 들어보면 가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방언 받고 조심해야 할 일

 

방언은 가장 귀한 은사이다. 방언은 나의 영이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수단이다. 방언은 이렇게 귀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믿는 사람 모두가 다

이 방언의 은사 받기를 원하신다. 그렇긴 하지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 은 방언은 모든 은사 중 가장 낮은 은사라는 사실이다. 가장 귀한 은사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낮은 수준의 은사이다.


방언의 은사는 모든 신령한 것으로통하는 문일 뿐이다.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것은 이제 내 앞에 신령한 영의 나라로 통하는 문이 막 열렸을 뿐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이 은사를 받고 조심해야 할 첫째는 교만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모든 은사가 다 그렇지만, 방언도 내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로 거저 주신 것이기 때문에 결코 그것을 남들 앞에 자랑할 것이 못되는 것이다. 

 

천사 루시퍼는 자기의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서 교만해졌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란 사실을 잊고 하나님처럼

뭇 천사들의 찬양을 받으려고 하다가 하늘에서 쫓겨 마귀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인하여 교만해지는 것은 그것이 바로 마귀의 마음인 것이다. 교만은 마귀의 특성이며, 교만하다는 것은 마귀를 닮았다는 것이다.


방언은 모든 신령한 것으로 통하는 문이다. 이 은사 받아 더욱 겸손해지고 경건한 생활을 하게 되면 차츰 하나님의 더욱 신령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한다. 방언이 귀한 은사라는 것은 그것이 신령한 하나님이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하는 점이다. 그러나 자칫 교만해져서 그것을 남에게 자랑을하거나 경박하게 사용하면 그 신령한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닫히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이 신령한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여럿이서 한 자리에 모여 방언으로 기도를 할 때에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남들이 조용조용 기도를 하면 나도 조용히 작은 소리로 기도를 하고, 모두들 큰 소리로 외치며 기도를 하면 나도 크게 외치며 기도를 한다. 사람들이모두 조용히 기도를 하는데 혼자서 큰 소리로 외쳐대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어느 작은 교회의 새벽기도 시간이었다. 모두들 조용히 소곤소곤기도를 하는데 근처에 사는 다른 교회 신도들이 몇 사람 와서 큰 소리로

방언을 외쳐대는 바람에 그만 그 교회의 경건하고 조용한 새벽기도 분위기가 엉망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자기만 생각하고 외쳐대는 방언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시지 않는다.  


필자가 자주 가는 서울에 있는 산에 있는 모 기도원에 가보면, 남이야 방해를 받건 말건 혼자서 큰 소리로 성난돼지 울음소리 같은 소리를 내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산에서야 아무리 큰 소리를 치고 악을 쓰며 기도를 해도 상관없지만, 성전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중에 혼자서 악을 쓰는 것은 좀 생각해볼 문제다.

 

방언을 잘 하는 사람들끼리 한 자리에 모여 방언 기도를 하면 처음에는 조용조용 시작하다가 차츰 기도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하면 모두들 힘을 다해 외쳐대다가 다시 낮아지기 시작해서 종용해지고 그러다가 또다시 고조되기 시작하면 모두들 있는 힘을 다해 외쳐댄다. 여럿이서 한 자리에 모여 기도할 때에는 이렇게 높게 낮게 피도를 타면서 때로는 결렬하게 때로는 잔잔하게 기도를 해 나간다. 이렇게 기도를 해 나가면 어느덧 서로의 마음이 하나가 되고 각자의 영이 하나로 융합이 되고 각기 외쳐대는 기도의 내용이 하나가 된다. 그리고 놀라운 기도의 응답이 나타난다.

 

거듭 말하거니와, 방언을 받았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체험하기 시작해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체험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귀로만 듣고 알던 하나님을 이제는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열려라 참깨! 하면 보물을 가득히 숨겨 둔 바위 문이 열리듯, 방언을 말하면 놀라운 보화가 가득 숨겨진 신비한 하늘나라의 문이 내 앞에 스르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방언은 언제 하는가

 

방언은 아무 때나 하고 싶을 때 하면 된다. 그러나 특히 방언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1) 나도 모르게 입에서 방언이 나올 때.

 

기도를 하려고 꿇어앉았는데 나도 모르게 입에서 방언이 튀어 나올 때가 있다. 또 말씀을 읽다가 감동이 왔을 때, 특히 묵상 중에, 또 우리말로 기도를 하는 중에 방언이 절로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 무엇인가 간절히 바라고 싶을 때, 혹은 어떤 일로 인하여 심령이 몹시 상했을 때에도 나도 모르게 입에서 방언이 나온다. 이럴 때에는 당연히 방언으로 기도를 한다.

 

2) 나의 기도 내용을 남에게 숨기고 싶을 때.

 

기도의 내용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이 들어서는 좀 거북한 것도 없지는 않다. 그럴 때에는 방언으로 가도를 하면 된다. 기도 전체를 방언으로만 해도 되고, 숨기고 싶은 그 부분만 방언으로 해도 된다. 이때에는 마음속으로는 우리말 기도를 하되 입으로는 방언을 하는 것이다.

필자는 안수 기도를 해 줄 때에는 방언으로 한다. 그 사람 앞에서 그 사람 을 위한 기도를 할 때에는 아무래도 그 사람 귀에 듣기 좋은 기도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때때로 이것은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되고 그 사람에게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하면 되는 것이다.

 

3)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를 모를 때.

 

기도를 하기 위해 꿇어앉기는 했으나 무엇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할지 금방 생각이 안 날 때가 더러 있다. 이럴 때에는 방언이 아주 유용하게 사용된다.또 기도를 하다가 갑자기 기도 말이 막히는 수가 더러 있다. 이럴 때에도 기도를 끊지 말고 방언으로 이어나가면 된다.

 

4)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하고 싶을 때.

 

방언 기도란 나의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그리고 나는 그 내 영이 드리는 기도의 내용을 모른다. 그러니까 기도의 내용도 모르면서 그것을 나의 기도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바로 방언 기도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방언 기도는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며, 모든 것을 하나님 뜻에 맡기는 기도이다. 내 생각으로, 나의 필요에 따라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모든것을  오로지 하나님 뜻에 맡기며 하나님 뜻에 따르겠다는 나의 영의 기도인것이다. 

 

그래서 이런 방언 기도를 할 때에는“지금 내 영이 드리는 이 기도가 그대로 다 이루어지게 해 주옵소서”하며 정말 그렇게 될 것을 마음속에

간절히 바라면서 방언을 해야 한다. 내가 방언으로 기도를 드릴 때, 나의 영이 드리는 기도의 내용을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 기도는 모두 나의 기도로 하나님 앞에 상달이 되는 것이다.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내 육신이 내가 아니라 내 영이 나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시인하는 것이다.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내 육의 소원이 아닌 내 영의 소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방언은 귀한 것이다.

방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고, 더러는 방언을 업신여기는 사람들도 있고, 방언을 금하는 교회도 있고, 또 더러는 방언은 옛날(초대교회시대)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방언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5) 귀신을 쫓을 때, 병을 고치기 위한 기도를 할 때.

 

귀신을 쫓거나 병을 고치기 위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방언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때에는 방언으로 기도를 한다. 귀신을 쫓거나 병을 고치기 위한 기도를 할 때에는 그 기도에 기도하는 사람의 모든 영력을 집중해야 하는데, 우리말로 기도를 이어나가기 보다는 방언으로 하는 것이 훨씬집중이 잘 된다.

병을 위한 기도를 할 때, 그 앓는 사람에 대해 또 그 병세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을 때에도 방언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 방언으로 기도를 하고 있으면 그 사람의 병세가 어느 정도인지 나을 수 있을 것인지, 그  환자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성령께서 알게 해 주신다.

어떤 사람은 귀신을 쫓을 때, 방언으로 하면 더 큰 능력이 나온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경험으로는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귀신이 무서워하는 것은 방언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그 능력을 의지해서 귀신을 쫓는 그 사람의 믿음과 능력의 크기이다.

 

6) 방언으로 찬송을 할 때.

 

찬송가의 가사 대신 방언으로 찬송을 부른다.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찬송가 가사를 몰라서 혹은 생각이 안 나서 방언으로 바꾸어 찬송가를 불렀다면 이건 방언으로 부르는 찬송이 아니다. 방언으로 부르는 찬송은 열심히기도를 하고 열심히 찬송가를 부르다가 자기도 모르게 가사 대신 방언이 나야 하는 것이다. 자신은 지금 우리말 가사로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있는데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는 방언 가사가 나와야 방언으로 부르는 찬송인 것이다.

 

방언 찬송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미 있는 찬송가 곡조에 방언 가사로 노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때의 감동에 의해서 방언과 더불어 곡조가 즉흥적으로 만들어져 나오는 경우이다.

 

두 가지 중 후자가 더 자연스럽다. 사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차츰 감정이 격해 오르면 그드리는 기도 말에 높낮이와 장단과 강약이 붙게 되고 그것이 조금씩 발전을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이 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음악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에서 비롯되었다.

 

7)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기도드려야 할 때 방언으로 기도한다.

 

우리말 기도를 드린다면 한 시간, 아니 두 시간도 더 걸릴 긴 기도도 방언으로 드린다면 단 10 분이나 5분 동안에 다 드릴 수 있게 된다. 아니, 단

10초 동안에도 다 드릴도 수 있다. 방언 기도는 나의 영이 영이신 하나님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이다. 육신을 입고 사는 인간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영은 시간을 초월한다. 따라서 나의 영이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시간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 모든 기도를 한데 묶어서 한 순간에 하나님께 올릴 수가 있는 것이다. 기도를 많이 하고 방언이 갖는이런 비밀을 알며 방언에 능숙한 사람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방언은 흔히 알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유익하고 귀한 은사인 것이다.

@ 성경은 그 어디에도 사도시대 일어난 표적,이적이 
사도시대로 중단되거나 또는 사도시대 이후로도
계속될 것이라 직접 교훈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나타날 표적들을
16장에 언급하셨고 그 표적과 관계된 은사들이
신자들에게 주어질 것을 성경이 약속하고 있기에
오늘날에도 성령은 그 뜻과 계획에 따라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신자들을 통해서 표적이나 이적을
나타내실 거라 믿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 사단의 역사를 따라 나오는 것은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 뿐 만 아니라 불의의 모든 속임도 
있으니 진리인 말씀으로 영적인 분별을 하라는 
것이 성경의 명령이지 치우쳐서 사도시대 이후로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 나오는 능력과 표적과 참 
이적은 더 이상 없다라는 사람에게서 나온 이론을 
설파하라는 것이 아님,

@ 견해차이로 가족과 아무리 치열한 변론을 
한다해도,때로 불편해지고 감정이 상한다해도
가족은 가족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고
헤어졌다해도 서로를 향한 마음은 미움이
아니라 염려와 사랑일 것이고 그렇게 인도하시는
이가 우리 한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이지요.
제가 여기서 대동소이할 수도 있고 대이소동할
수도 있는 은사관으로 여러 분들과 좀은
심각한 변론을 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 은사중단"이라는 말은 "개떡같이 얘기하면 찰떡같이 
알아들으라"는 소립니다. 은사중단이라는 말은 은사주의를 
경계하는 말로서, 은사주의는 은사중단보다 해악이 훨씬 
크구요 그 파국적 결과는 은사중단이 주는 부작용과 비교가 
안됩니다

@ 같은 논리가 은사지속론자들에게 나오지 않겠습니까?
은사지속이라는 말은 은사중단주의를 경계하는 말로서,
은사중단주의는 은사주의보다 해악이 훨씬 크다.
그 파국적 결과는 은사중단이 주는 부작용과 비교가
안된다 라는 식으로

@ 비성경적인 은사주의나 비 성경적인 은사중단주의나 교회에 
미치는 해악은 어느 것이 가시적으로 더 부각되어 보이느냐의 
차이일 뿐 , 관점과 입장 차이에 따라 상대적인 “보다 크고” 
“보다 작고”의 비교급으로 논하여 기울기를 선택할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에 기존의 은사주의와 은사중단주의를 성경적으로
검증,수정하여 보다 성경적인 이론과 주의로 개혁시켜 나가는 
것이 시대적으로 요구되는 바라 생각합니다.

아멘넷에서 [방언중단론--방언귀신론]을 주장하는 질문님 
준익님이나 넷상에서 [방언 필수론-방언구원론]을 주장하는 
분들이나 모두 방언을 말하는 것을 체함한 분들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때 같은 체험을 하고도 그렇게 견해가 극과
극으로 다른 것은 그 분들이 체험에서 나온 이론을 진리인 
성경말씀보다 더 집착하여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은사주의 잡는다고 성령의 은사 받아 잘 활용하는 성도들의 
은사까지 잡아야 할까요? 그릇된 신학이론으로 성령의 불을 
소멸시키는 시도를 해야 할까요? 
악을 원천적으로 궁극적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은 선이지 
다른 모양으로 나타난 악이 아니기에 잡는 방법도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 모든 성도에게 특별히 사모하라고
하고 금하지 말라고 계시한, 지체와 몸의 덕을 세우는 
은사들을 누가 어떻게든 사모하지 못하게 막고 금하게 
하려고 성경 말씀에 반하는 신학이론을 들이밀까요?
바로 그리스도의 지체의 덕과 몸 된 교회의 덕이 세워짐을 
훼방하고자 하는 사단 아니겠는지요?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 모든 성도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특별히 교훈한 지체와 몸의 덕을 세우는 은사를 누가 
어떻게든 그릇 되이 추구하고 활용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시험케 하고 거짓 것을 믿게 할까요 
바로 그리스도의 지체의 덕과 몸 된 교회의 덕을 허물기
위해 훼방하는 사단 아니겠는지요?

사단의 미혹은 어느 한 방향으로만 되어 지는 것이 아니니
신자들은 좌로 우로 치우치지 말고 오직 성도를 교훈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성경)에 주초를 두고서 바르고 건전한 
은사관을 정립하고 각자 받은 은사들을 성경의 교훈에 따라 
활용하여 이 시대에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나가시는 성령의 역사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이루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서만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사모님! 나 여기  <-- 윤기 입니다


정이철 목사의 김성로 목사 부활교 시비에 별 관심을 가지지 못하다가 '기자석'님의 "정이철 목사의 이단적 주장에 대하여"에 댓글을 달게되는 계기로 인하여 (과연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바른믿음'의 '김성로 부활교에 대해 각 교단에 보내는 호소문' 을 자세히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김성로 목사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살표 봅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여 왔건만, 목회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혹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하던 것을 내려 놓고 엎드려서 낮은 마음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한가지 발견하는 것이 있었다.


"십자가에 머물러 있는 신앙, 예수님이 죽었다는 신앙"에만 머물러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부활을 증거하기는 했으나 부활이 십자가 밑에 들어 가 있었고 그러니 목회에 아무 힘이 없던거예요. 그는 "십자가의 사랑에만 매여 있었다" "죽은 예수만 붙들었구나"는 등 얼핏 듣기에는 의아하여 시비를 당할만한 표현이 있기는 해도, 결국 김성로 목사가 전하고자 하는 말은 "십자가와 부활" 의 복음을 균형있게 바로 전하지를 못하였다. 부활을 잡을 때에야 교회가 살게 되었다는 말 입니다.


김성로 목사도 아마 입술이 윤기만큼은 어눌한 분인 것 같습니다. ㅎ ㅎ 


“아, 부활이구나! 그때 내가 딱 잡은 것이 ‘내가 십자가에 머물렀구나! 죽은 예수만 붙들었구나! 부활하신 이 분을 딱 붙드는 순간에 교회는 살아나기 시작했고,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멘!


(진정으로 시비거리)는 "십자가는 미완성 제사부활 후 하늘에서 ‘영원한 제사’ 하늘나라 성막이 있는데 거기 올라가서 제사를 드려주어야 영원한 제사가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그런데 김성로 목사가 깨닳았고 주장하는 말씀 구절을 성경이 제공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히8:2) "성소와 참장막 부리는 자라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것이 아니니라"

(히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히8: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12:22-23)"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 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 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니라"


(우선) 부활교 시비를 모두 돌아볼 때 ㅎ ㅎ 도토리 키재기로 보입니다. 

"끝없는 논쟁, 구속(救贖)  `은   구원이 아니다"(강만원) 를 지지하며 "십자가와 부활"은 따로 놓고 따질 수 없는 둘이 하나가 되어야 할 복음입니다.


(진정으로 시비거리)는 "한국교회"적으로 정리해야 할 신학적인 문제 입니다. 시비의 출발이 성경으로 부터이기 때문 입니다. 새로운 학설을, '정이철 목사와 그의 무리들'과 같이 이단화 시비로 죽이려 할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정리해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십자가는 미완성 제사부활 후 하늘에서 ‘영원한 제사’ 하늘나라 성막이 있는데 거기 올라가서 제사를 드려주어야 영원한 제사가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김성로 목사의 주장이 기존교회에게는 외설스럽게 들릴지라도 틀린 주장은 아닌 줄로 압니다. 먼저 이단으로 역으려는 정이철 목사쪽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모님과 목사님' 이 정리하셔서 발표를 하시면요 ^^ 저 개인적으로는 울교회 목사님과 의논해 보겠습니다.



(정작) 이 글을 쓰게된 동기는 정이철 목사가 이번에 인용하는 성령, 보혜사 성령에 있습니다.

정이철 목사의 "바른믿음"의 '김성로 부활교에 대해 각 교단에 보내는 호소문'라는 글에서 (요16:8,9)"그(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이신 "그" 를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행1:4,5) 즉 죄에 대하여, 의에 재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성령이 "보혜사 성령"이심을, 정이철 목사가 증거하고 있음을 봅니다. 마가다락방에 오신 보혜사 성령의 충만함으로 너희가 죽인 예수가 메시야이었다고 증거하는 베드로에게 "어찌할꼬"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었다. 

성령을 두리뭉실 아전인수격으로 편리하게 아무 성령장이나 갔다 붙이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재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성령은 (고전12:3)의 성령하나님이시고, 베드로의 설교로 "어찌할꼬"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게한 죄를 깨닫게 하신 성령은 "보혜사 성령"이심을 사역적으로 구분할 수있는 능력이 그에게 없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을 알고 난 후에도 실질적인 변화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21). 예수님의 제자들이 권능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된 것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오신 성령을 받고 난 후였습니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오신 성령을 받음으로 예수님과 영적으로 연합되었기 때문에 죽음도 불사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1:4,5). 성로 목사는 모든 중요한 것과 부활을 억지로 연관시키면서 괴상한 부활교를 만들어 냈습니다.”


우리의 죄의 본질은 언약을 파기하여 하나님께 반역한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죽음이 임했습니다. 이 죄를 깨닫게 해 주시는 분은 승천하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신자들에게 오신 성령이고( 16:8,9), 성령의 역사로 죄를 깨닫는 사람들이 ‘어찌할꼬’하는 충격을 받고( 2:37), 성령의 역사로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어 사죄와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김성로 목사는 죄를 깨닫게 되는 이 중요한 일이 성령의 역사라고 하지 않고 부활이, 즉 부활님이 그런 일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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