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음부에 내려가셨으며” 라는 부분에 대한 이해
자료실 2015. 6. 28. 10:52한길교회(http://cafe.daum.net/hgpch) 주일 오후 사도신경 강해(10) “음부 강하에 대하여” 부분 중 발췌
Ⅱ. 음부에 내려가셨으며1)
“음부에 내려가셨으며” 라는 부분이 한국의 사도신경에 없는 이유
다음으로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 라는 부분인데, ‘음부 강하’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사도신경을 배우면서 가장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이 부분에 대해서 고백해 본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사도신경에는 이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굉장히 낯선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한길교회는 이 부분을 포함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왜 한국교회는 이 내용이 없을까요?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도신경의 라틴어 원문과 영어 번역에는 이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2) 라틴어 원문에 보면 descendit ad inferna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 번역에는 descended to hell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찬송가 앞면에 있는 사도신경의 새번역을 보시면 “장사된 지”라는 말 뒤에 난외주가 붙어 있는데, 그것을 보면 “‘장사 되시어 지옥에 내려가신 지’가 공인된 원문(Forma Recepta)에는 있으나, 대다수의 본문에는 없다.”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원래의 원문에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원래의 한글 사도신경에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빠지게 됩니다. 1894년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도신경 번역판이나, 1905년 장로교 선교사 협의회에서 번역한 사도신경에는 “그리스도가 지옥에 내려가셨다”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습니다. 반면 1897, 1902, 1905년에 각각 번역된 감리교의 사도신경에는 한결같이 음부강하 구절이 빠져있었습니다. 그것은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가 1784년 감리교 신조를 작성하면서 그리스도의 음부 강하가 전부 생략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후에 빠지게 되어 오늘날까지 여전히 한글 사도신경에서는 이러한 표현을 찾아볼 수 없는데, 그렇게 빠진 이유는 1908년 장로교와 감리교가 ‘합동 찬송가’를 발행하면서 이 부분에 대하여 장로교가 ‘양보’(?)를 했기 때문입니다. 장로교와 감리교가 같이 찬송가를 발행하려면 찬송가 앞뒤에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십계명을 포함시켜야 하는데, 주기도문과 십계명은 성경 본문에 근거한 것이니 상관없지만 사도신경의 경우는 ‘번역’이기에 서로의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데, 감리교는 ‘음부 강하’ 부분을 빼기를 원하고, 장로교는 넣기를 원하는데 장로교가 ‘양보’(?)를 한 것입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한글 사도신경에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이 빠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길교회는 사도신경의 원래 내용을 회복하기 위해서 이 부분을 넣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내용에 대한 오해
그렇다면,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우리는 잘못된 견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로마 가톨릭의 견해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우리와 같은 서방교회 전통에 있기 때문에 이 내용을 동일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회의 경우 사도신경을 번역하기를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라고 하고 있습니다.3) 이렇게 표면적으로만 볼 때에는 ‘음부 강하’의 내용을 담고 있어서 우리와 같은 입장에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이 번역을 할 때에 “저승에 가시어”라고 한 것을 볼 때에 분명해 집니다. 나중에 자세히 다루겠습니다만, 우리는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고백을 “예수님께서 저승(지옥)에 가신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은 그러한 관점에서 이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그들은 자신들의 비성경적인 교리인 ‘연옥(煉獄, purgatory)교리’와 연관시킵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연옥교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요, 천주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신자라 할지라도 ‘하늘’(heaven)에 갈 만한 완벽한 성인(聖人)은 극히 적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은 후 곧바로 하늘에 가지 못하는 ‘불완전한 신자’(?)들이 일정한 기간을 다른 곳에서 지낸다고 생각하는데 그 장소가 ‘연옥’입니다.4) 이렇게 연옥에서 영혼이 깨끗해 져야 비로소 ‘하늘(heaven)’에 가게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연옥 외에 또 다른 장소가 있습니다. ‘선조 림보’(Limbus Patrum)라는 것인데요,5) 이 림보라는 곳은 지옥의 양쪽 가장자리(limbus)에 있는 곳으로 구약시대의 신자들이 죽어서 그 영혼이 ‘구원계시의 완성’을 기다리는 장소라고 말합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 역시 믿음이 완전하지 않았다고 보고 그들이 바로 천국(하늘)에 가지 못하고 대신 ‘림보’로 갔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선조 림보’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가신 ‘음부’라고 생각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영이 ‘선조 림보’에 가셔서 그가 십자가에 이루신 구속의 공로로 구약의 성도들을 풀어 해방하셔서 그들을 데리고 ‘하늘’(heaven)로 가셨다고 해석한 것입니다.6) 그래서 그들의 번역에는 “저승에 가시어”라고 되어 있습니다.7) 그러나 성경은 ‘선조림보’라는 장소에 대한 어떠한 암시조차도 주지 않고, 오히려 구약시대에 죽은 성도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민23:10; 시16:10-11; 73:24-25).8) 구약시대에 죽었다고 해서 지금 죽는 것과 다르게 ‘림보’라고 하는 성경이 말하지도 않는 장소에 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 ‘림보’에 가셨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에 불과합니다.
둘째, 제2의 기회설(second probation)입니다. 이 견해는 천주교의 생각에 반대하면서 어떤 개신교도들이 주장하는 견해인데요, 이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부활하실 때까지 지옥에 내려가셔서 지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신 것이라고 봅니다.9) 앞서 살펴본 로마 가톨릭과 비슷한 경향이 있습니다. 차이라면, 로마 가톨릭은 지옥이 아닌 ‘림보’라는 중간 정도의 장소에 가신 것으로 보고, 모든 영혼이 아니라 구약 시대에 죽었던 영혼만을 본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런데 제2 기회설은 예수님이 지옥에 가셔서, 예수님이 죽기 이전에 죽었던 모든 지옥의 영혼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셨다는 식으로 해석한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 어디에서도 이런 가능성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10) 복음은 죽은 자가 아닌 오직 살아있는 자에게만 전파됩니다. 사람이 한번 죽으면 복음을 듣고 회개할 기회가 절대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히9:27).
셋째, 루터파의 견해입니다. 루터파는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뒤에 그 영으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부분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음부에 가셔서 하신 일이 구약의 성도들을 하늘로 데려가신다거나 혹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셔서 회개할 또 다른 기회를 주셨다고 보기보다는 그곳에 있는 사탄과 흑암의 세력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드러내셨다고 봅니다. 루터파들이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신 것은 맞다고 보지만, 로마 가톨릭의 주장처럼 지옥에 있는 영혼들이 회심해서 구원받을 리는 없기 때문에 취한 어중간한 입장입니다. 그래서 구원하지는 않으셨지만 자신의 승리를 주장하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에 따라 개혁파가 이 부분을 그리스도의 비하의 마지막 부분으로 보는 것과 달리, 루터파는 이 부분을 그리스도의 승귀의 첫 부분으로 봅니다.11)
오해의 근거가 되는 성경구절인 벧전3:18-22의 바른 해석
지금까지 살펴본 3가지 잘못된 견해의 공통점은 예수님이 직접 지옥에 가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직접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습니다.12) 그런데 대부분이 이러한 오해를 하는데, 그 이유는 “음부에 내려가셨다”라는 표현을 ‘지옥’에 가신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오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베드로전서 3장 18-22절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지옥에 가셨다고 가르친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러한지 베드로전서 3장 18절 이하를 찾아봅시다. 이 구절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본문 중에 하나입니다.13) 여기에 보면 19절에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라는 말이 나오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이 바로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의 근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의 의미가 예수님이 죽으신 뒤에 그의 영혼이 지옥에 가서 지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선포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루터파나 천주교회의 오해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본문이 아닙니다.14)
이 본문은 조금은 어려운 본문인데, 먼저 18절 하반부를 보아야 합니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는 말을 예수님이 죽으신 뒤에 육체는 죽으셨고 영혼은 살아나셨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본문을 피상적으로 읽으면 그렇게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예수님의 육체와 영혼을 비교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영역에서 발생했으나, 그의 부활은 영의 영역 안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대조하는 것입니다.15)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령에 의해 일어난 영적인 사건이라는 의미입니다(cf. 롬1:3,4; 6:10).
그리고 19절에 나오는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라는 말도 마치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에 그의 영혼이 지옥에 가셔서 영들에게 선포하신 것처럼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옥에 있는 영들’이라는 말이 그렇게 오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뒤에 나오는 베드로전서 4장 6절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6절을 보면 “....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본문이 말하는 시점에서의 죽은 자들에게 이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죽어 있는 자들이 과거에 살아있을 때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신 뒤에 그들에게 가셔서 복음을 전했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이미 그들에게도 복음이 증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있을 때에 복음을 들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19절을 읽어보면 이해가 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서 말하는 ‘옥에 있는 영들’은 예수님이 죽으신 뒤의 그 시점에 옥에 있었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영으로 가서 ~ 선포하시니라”라는 부분은 과거에 한 것입니다. 19절을 재구성해 보면 “영으로 지금 옥에 있는 영들에게 그때에 복음을 선포하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시기 이전의 사역을 말합니다. 19절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이미 노아시대에도 존재하셔서 자신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의를 전파하는 노아를 통하여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전파된 의의 선포를 들었으나 순종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 결과 홍수의 심판으로 죽임을 당했으니 그들의 지금 상태가 바로 옥에 있는 것입니다. 19절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전서 3장 19절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보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일단 베드로전서 3장 18-22절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나서 지옥에 가셨다는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게다가 베드로전서 3장 18-22절은 사도신경에 나오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의 근거구절이 아닙니다.
“음부에 내려가셨으며” 라는 말의 개혁주의적 이해
그렇다면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일단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구절의 근거가 되는 성경본문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20절과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문구를 연결시키다보니 계속해서 오해가 생기는데, 이 문구는 사도신경의 다른 문구와 달리 성경의 직접적인 진술에 기초하지 않습니다.16)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이 부분을 비유적으로 봅니다.17) 실제로 가셨다는 것이기보다는, 십자가의 죽으심에서 겪으신 ‘영적 고뇌’를 지옥과 같은 극심한 고난이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18) 예수님은 실제로 그 영이 지옥에 가신 적이 없지만, 얼마나 극심한 영혼의 고통을 당하셨는지 그가 지옥의 고통까지도 우리를 위해 당하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개혁파에서는 ‘음부’를 지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창37:35; 42:38; 삼상2:6; 왕상2:6), 나아가 상징적으로 ‘지옥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시18:5)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의 의미를 더 심화시키는 표현입니다(cf. 시18:5).19)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라고 표현한 것은 “실제 주님께서 지옥으로 걸어내려가셨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옥의 고통, 극한의 고통을 경험하시고 낮아지셨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기보다 영적 고통이라는 사실을 더욱 잘 보여주려는 사도신경의 강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음부에 내려가셨으며” 라는 고백이 주는 의미
그렇다면,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 고백은 우리가 당해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는 지옥의 고통과 같은데 그것을 친히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셔서 해결해 주셨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예수를 믿는 우리가 사망에 의해 장악될 수 없음을 확신시켜 줍니다.
이에 대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4문답이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20)
44문: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이
왜 덧붙여져 있습니까?
답: 내가 큰 고통과 중대한 시험을 당할 때에도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옥의 두려움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셨음을 확신하고
거기에서 풍성한 위로를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9)
그분은 그의 모든 고난을 통하여
특히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두려움anguish과 아픔pain과 공포terror와
지옥의 고통을 친히 당하심으로써
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10)
9) 사53:5 10) 시18:5-6; 116:3; 마26:38; 27:46; 히5:7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구절이 실제로 예수님이 어디에 가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당하신 고난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이해하고 위와 같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복한 무지
지금까지 보았는데, 사실 이 부분은 매우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 구절을 아예 빼버려서 천주교나 루터파, 그 외에 여러 사람들이 이 내용을 오해했던 것처럼 오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21) 일종의 ‘행복한 무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22)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그렇게 아예 모르기보다는 제대로 알고 제대로 고백하여 이 부분에 대한 오해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더욱 좋습니다.23)
한국교회에서는 주로 어려운 내용에 대해서 혹은 조금이라도 곤란한 내용은 아예 가르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을 우민화(愚民化)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예 교회가 성도들에게 성경을 잘 가르치지 않음으로 성경을 모르는 성도들을 양산해 내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절대로 바람직한 경향이 아닙니다. 교회는 끊임없어 성경과 신앙고백, 그리고 교회 역사를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다룬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에 대한 부분 역시도 잘 알고 잘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동일한 표현이라도 다른 고백일 수 있음
마지막으로,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을 통해서 다시 한번 더 확인하게 되는 것은 사도신경을 동일하게 고백해도 그 고백의 내용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이 내용을 천주교, 루터파 등이 함께 고백하지만 그들의 고백과 우리의 고백은 외형상 표현만 같을 뿐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외형이 같다고 해서 그 내면도 같다고 판단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고 해서 다 같은 교회라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부분을 고백한다고 할 때에 그 부분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고백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하게 됩니다.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을 아무리 한다 하더라도 그 의미를 모른채로 하게 될 때에 그 고백은 헛된 고백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1) 개혁파는 이 부분을 그리스도의 비하로 보고, 루터파는 그리스도의 승귀로 본다. 그 이유는 루터파가 ‘음부강하’를 해석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루터파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음부에 가셔서 지옥에 있는 사탄과 흑암의 세력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드러내셨다고 본다.
2) 사본마다 없는 경우도 있다.
3)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가톨릭 기도서』(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7), 11-12.
4) 2013년에 사임한 교황 베네딕트 16세(Joseph Alois Ratzinger)는 연옥 개념 자체는 중요하지만, 실제로 연옥은 없다고 본다. Nicholas Thomas Wright, Surprised by Hope (London: SPCK, 2007), 양혜원 옮김,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서울: IVP, 2009), 263-264. 교황 베네딕트 16세(=라칭거)는 고린도전서 3장을 석의하면서 연옥설을 새롭게 개정한다. 그는 그리스도 자신이 심판의 불이시며, 그 불이 사후의 인간들을 영광스런 부활체와 같이 변화시킨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기나긴 과정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 때에 일시에 이뤄지는 사건이다. 이렇게 연옥의 정화를 기독론화시킴으로써 베네딕트 16세는 기존의 연옥 교리를 중간 상태의 개념에서 분리시켰다. Pope Benedict XVI, Eschatology, Death, and Eternal Life, 2nd ed. (Washington, D.C.: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2007), 218-233.
5) 천주교의 원래 교리에는 ‘선조 림보’ 외에 ‘유아 림보’(Limbus Infantum)이 있다. 이곳은 영세를 받지 못하고 죽은 모든 영아들, 즉 원죄는 있으나 개인적 죄책은 없는 유아들이 있는 장소이다. 그런데 2008년 이후에는 이 교리를 믿지 않는다.
6) 이러한 해석은 일반적으로 1586년의 Robert Bellarmine이 명확히 제시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승구, 『사도신경』, 200.
7)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가톨릭 기도서』, 11-12.
8) 이승구, 『사도신경』, 200.
9) 이승구, 『사도신경』, 201.
10) 제2의 기회설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Berkhof, 『조직신학 (하)』, 962-963.
11) Berkhof, 『조직신학 (하)』, 576.
12) Ursinus, The Commentary of Zacharias Ursinus on the Heidelberg Catechism, 229.
13) Edwin A. Blum, “1 Peter,”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12 (Grand Rapids: Zondervan, 1981), 241.
14) 이승구, 『사도신경』, 208.
15) J. Ramsey Michaels, 1 Peter, WBC 49 (Waco: Word, 1988), 204.
16) Berkhof, 『조직신학 (하)』, 575.
17) 이승구, 『사도신경』, 197.
18) 이승구, 『사도신경』, 205; Ursinus, The Commentary of Zacharias Ursinus on the Heidelberg Catechism, 228.
19) 이승구, 『사도신경』, 198.
20) 이러한 것에 대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8장 4절)나 소요리문답은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다만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50문답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자신을 낮추신 일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자신을 낮추신 일은 장사되셔서 사흘만에 부활하시기까지 계속 죽은 자의 상태를 계속하시며 제 삼일까지 사망의 권세 아래 계신 것이다. 이 일을 가리켜 사도신경에서는 ‘지옥에 내려가시고’라고 표현해 왔다.”라고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없는 이유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이 사도신경 본문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21) 이승구, 『사도신경』, 197.
22) 이승구, 『사도신경』, 211.
23) 이승구, 『사도신경』,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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