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없는 죄목 묵시적 청탁
         이국화(본명 이화국)


원고청탁 받아 시를 쓰려면
시는 간 데 없고
세월호처럼 붉은 물에 빠져
숨 못 쉬는 나라 생각

거짓 탄핵 파면이라는 도둑들의 족쇄에 걸려 떠내려간
목련송이 같은
외로운 대통령 생각

'묵시적 청탁'이라는
브리태니카 사전에도 없는
죄목으로 목에 큰 칼 씌워져
춘향이처럼 옥에 갇힌

아! 불쌍하다 그 질긴 목숨
35kg 체중으로 110년만의 더위에 손바닥 만한 창구멍으로 숨 쉬었을까

2018년 8월 24일 2심 재판
죄목이 없으니
눈 뒤집힌 도둑들이
만들어낸 죄목 묵시적청탁
25년 징역에 벌금 200억

차라리 총을 쏘거라
너희가 손에 피 안 묻혀
무고한 살인을 피해갔다 변명 삼으려는가

백성은 투명인간 아니다
백성은 개돼지 아니다
권력 명예 없고 무력하지만 깔보지 마라

달랑 태극기 하나 들고 길바닥 헤맨다 얕보지 마라
우리의 두 눈이 시퍼렇게
살아 죽어서도 저 하늘에
고할 것이다 정권탈취
도둑들의 악행을 일일이
보고할 것이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만고의 진리니라
심은대로 거두는 법칙
악한 자여 오늘 너희가 심은
악한 씨앗 너희 새끼가
다 거둘 것이다

나라는 망해도
진리는 망하지 않는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뿐이다. 🇰🇷🇰🇷🇰🇷


👸묵시적 청탁죄
     이국화( 본명 이화국)


공산화 되어가는 대한민국엔
묵시적 청탁죄란게 있다

이 죄에 걸리면 자그만치
징역 25년 벌금 200억

내 나이 팔십 넘고
재건축에 걸린 연립 한 채 뿐
징역 30년 벌금 500억
때려도 상관 없다만

유부남 쳐다봤다가
묵시적 간음죄라면 어쩐다?
미남 청년 바라보다가
묵시적 음란죄라면 어쩐다?

아들딸에 사위 며느리들
손주들이 다섯이나 있는데
늙은 할매가 간음죄 음란죄

미풍양속 어지럽힌
묵시적 죄가 있다고 덮씌우면
나 어쩐다?

나보다 백천 배 잘 난
대통령도 당하는데
명함이 가난한 시인
나 어쩐다?

버선목이라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화냥년 사촌 되어
망신살이 뻗쳐서
나 어쩐다?

늙어 할 일 없고 심심 하니
편의점 금고 쳐다본 사람
묵시적 도둑놈이라고
경찰에 고발이나
하러 다녀야겠다

나라가 망하려니
별 개법이 판치는 세상
하나님 저 좀 빨리 데려가세요 제발요.
     (2018. 8. 24. 금)

너희 목이 곧은 백성과는 함께 할 수 없다. 잠시라도 너희들과 함께 했다가는 내가 너희를 진멸할 것 같다. 그러니 너희들만 올라가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을 했으니 천사를 너희 앞서 보내서 가나안 백성을 쫓아내고 가나안 땅을 빼앗아 너희에게 주겠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절교선언입니다.
모세가 금송아지 우상을 불에 태우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 물에 타서 백성들에게 먹이고, 이스라엘 백성 3,000 명이 죽임 당했어도, 모세가 간절히 기도했어도 하나님의 진노는 풀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세는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나와 백성은 여기서 끝나는구나.’ 했을 것입니다.
생각하면 얼마나 억울하고 한심스럽겠습니까?
모세의 가슴은 얼마나 많은 생각과 회한이 소용돌이 하였겠습니까?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애굽에서 바로공주의 아들로 영화를 누리다가 이스라엘 백성 편을 들었다가 졸지에 살인자가 되어 도망하고,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며 40년 세월 죽은 것 같이 살다가 80세나 되어 뒤늦게 부름 받았는데,
아,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네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으라, 하고 부르신 하나님, 말을 잘 못 한다고 안 가겠다는 나를 지팡이 달랑 하나 쥐어주시고 보내시더니........

나는 바로에게 열 번이나 가서 말했지, 내 백성을 보내라,
나는 가고 가고, 또 가서 말했지,
하나님은 그 때마다 얼마나 놀랍게 역사하셨는지.
마지막 재앙, 장자를 죽이고 바로의 항복을 받아내던 그 유월절 사건은 정말 통쾌하고 엄청났었지. 뒤따라오는 애굽군대, 앞에는 홍해. 그 두려운 순간 하나님은 바다를 가르시고......,
그 말할 수 없는 놀라움이란!

그리고 그 뒤에 좀 힘들긴 했었지. 목마르던 사흘 길, 마라의 쓴물, 그러나 칠십 종려나무 오아시스의 그 기쁨,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 물을 내시고.......,
그리고 이곳 시내산에서 나를 불러 올리셔서 그 엄청난 말씀 돌판을 직접 새겨 주시고, 자, 이제 우리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는구나, 했는데, 희망에 부풀었는데.......
그런데 형 아론이 한심하게도 금송아지를 만들고 백성들은 절하며 노래하고 춤추고.......
이게 무슨 꼴인가?

하나님이 얼마나 진노하셨을까? 금송아지를 갈아 마시우고 3,000명을 죽였는데도. 차라리 저의 이름을 지워주십시오, 하고 간구했는데도 하나님의 진노는 풀리지 않는구나.
천사만 보내 가나안 족속 쫓아내면 무슨 소용인가?
하나님 없이 가나안 땅 차지하면 뭣 하나? 그 다음은 다시 이방민족들의 밥이 될 텐데.
하나님 없는 삶이라면 애굽 종살이보다 나을 게 무엇이란 말인가?
아, 어쩌나? 아, 나의 사명은 여기까지란 말인가? 나의 인생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인가?
모세의 심경은 막막하고 답답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을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사랑하시고 모세를 사랑하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호렙산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모세의 이름을 부르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단장품을 제하라 하시면서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진 밖 멀리 회막, ‘만남의 장막’을 만듭니다.
모든 백성들이 단장품을 제하고 장막에 서서 모세를 바라봅니다.
회막에서 하나님의 구름기둥이 선 것을 봅니다.
모세는 간구합니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저희는 올라가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저희는 죽습니다. 저를 이름으로도 아시고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 함께 하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천하만민 중에 구별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주의 백성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겠습니까?”
모세는 오직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의 함께 하심, 하나님의 동행을 간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시고 모세를 이름으로도 아시는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냅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이 말씀에 모세는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웠겠습니까?

하나님 없는 성공은 성공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는 부귀영화는 부귀영화가 아닙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는 결코 평안과 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없으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라는 간절함이 있습니까?
우리의 축복은 형통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축복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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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번째 예언: 예수님이 지상에 재림하여 천년(천년왕국)동안 세상을 통치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상에 내려 온 구원받은 백성들이 천년동안 왕과 제사장 같이 예수님과 더불어 왕노릇을 하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 20장6절 말씀)"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60번째 예언: 천년왕국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던 구원받은 백성들을 마지막 시험을 하십니다, 천년동안 왕과 제사장과 같은 최고의 지위를 누리던 백성들을 시험하기 위하여 옥(무저갱)에서 잠시 놓인 사단이로 성도들에게 불시험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0장7절 말씀)"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사단이의 마지막 발악을 능히 이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승리한 알곡과 같은 성도들은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 천국에 입성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비록 구원받고 왕 노릇하는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옥(무저갱)에서 잠시놓인 사단이의 불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예수를 배반하는 자들은 마지막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쭉정이로 분류되어 유황 지옥불에 던저져 영원히 불태움을 당할 것입니다. 모든 예언은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정하시는 하나님의 통치하심 속에 모든 예언이 속해 있습니다. 예언에 집중하지 마시고 세상(지구)을 두 손에 올려 놓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구원자이신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미리 구원받기로 예지예정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 스트레스에 명약이 있습니다. ♣

정신의학에서는
‘스트레스의 大家’하면
한스셀리(hans seyle,
내분비학자)라는 분을 듭니다.

이 분은
1958년 스트레스 연구로
노벨 의학상을 받았습니다.

캐나다 분인데, 이 분이
고별 강연을 하버드대학에서 했습니다.

제가 그때 마침 그 대학에 있어서
정말 아주 감동적인 강연을 들었습니다.

하버드 강당에는 백발의
노교수들이 빽빽이 들어섰습니다.

강연이 끝나자
기립 박수도 받았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내려가는데
웬 학생이 길을 막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스트레스 홍수
시대를 살고 있는데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비결을 딱 한 가지만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러자 이분은 딱 한
마디를 대답했습니다.

“Appreciation!”
감사하며 살라는 그 말 한 마디에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여러분, 감사만큼 강력한
스트레스 정화제가 없고,
감사만큼 강력한 치유제도 없습니다.

종교인이 장수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은 범사에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일이나 하찮은 일에도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이 자세가
종교인이 장수하는 비결로
의학에서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속에는
미움, 시기, 질투가 없습니다.

참으로 편안하고 마음이 그저 평온하면서
또 우리가 뇌 과학적으로 말하면 이러는 순간
세로토닌이 펑펑 쏟아진다고 합니다.

여러분, 세로토닌이 건강체를 만든다는
이야기는 제가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감사라는 것이 인간을 그저 편안하게
하고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감사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만 감사를
드리게 되겠습니까? 고생하는
아내일 수도 있고 남편일 수도 있고,
또 이른 봄부터 밭에서 땀 흘려 일하는
농부에게도 우리는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이웃에게도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요즘 가끔 길에서
저의 동년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힘든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동지 같은 생각이 듭니다.

“여보, 노형! 당신이 용케 살아남았구려.”
이렇게 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고 싶고,
​그렇게 고마운 것입니다.
동지애 같은 느낌이 듭니다.

힘든 세월을 우리는 참으로
땀 흘려 가며 죽어라 일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한국이 있게 된 것이지요.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저는 아침마다 프랑스 작가
'쥘 르나르'의 기도문을 꼭 외웁니다.
이분은 ‘홍당무’를 지은 작가입니다.

신체가 허약해서 아침마다
이렇게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눈이 보인다.
귀가 즐겁다.
몸이 움직인다.
기분도 괜찮다.
고맙다.
인생은 참 아름답다.”

저는 이 기도를 들을 때마다.
제 몸에 한없는 감사를 느끼게 됩니다.

오늘 아침에 눈을 뜨는
것만으로도 정말 고마운 것입니다.

내 발로 이렇게 대지를 버티고 서있는
것 만으로도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생활을 어느 한 순간도
​잊어버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발이 제일 고생하니까
저는 아침에 제 발을 주무르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수고했다. 고맙다. 조심할게. 잘 부탁해.”

저는 정말 진심을 담아서 발을 주무르면서
내 발에게 부탁을 드리고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여러분 몸에도
감사를 드려야 되겠지요?
이렇게 감사할 일을 찾아보십시오.
지천에 널린 것이 감사뿐입니다.

- 이시형 박사 -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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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의 힘 •••

언어학자들은 똑같은 말을
만 번 정도 반복하면 현실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말이 입안에 있을 때는
내가 말을 지배하지만
말이 밖으로 나오면
말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말은 우리의 생각을 꿰는
하나의 틀이 됩니다.

즐겁고 행복한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자주 접함으로써 부정적인 상황과
자신을 멀찌감치 떨어뜨려야 합니다

행복한 단어를 마음과 입에 꿰는 순간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 들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 해야 합니다

행복을 주는 단어를
입에서 내뱉는 순간
내 얼굴도 함께 웃게 됩니다.
행복한 단어가 바로 웃음이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말 자체만으로도 큰 위력을 가지며
사람의 인생을 바꿔주는 역활을 합니다.

감사는 마음 웃기의 시작이며
감사가 있지 않으면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는
진정한 웃음은 없습니다

웃기 전에 의식적으로 감사의 말을
되풀이 해보면 웃기가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감사 라는 말을 하면 실제로 얼굴은
가볍게 웃기 시작합니다.

감사를 말하면서 찡그린 채 세상을
절망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 감사를 보내다 보면
세상 모든 것이 고맙고 좋아집니다.

감사하고 고마운데 그 대상을 미워할 정도로
비정하고 무정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으면
만사가 형통해질 것입니다....

🌺평생감사🌺




물 위로 걷던 목사, 악어밥 돼?




기독교를 빙자한 가짜뉴스가 떠돌아 서구 언론계가 웅성대고 있다. 

"목사가 물 위로 걸으려다 악어밥이 됐다."는 충격적인(?) 뉴스를 국제 언론들이 앞다퉈 다뤘다가 뒤늦게 망신을 당하는 사태가 지난 5월 중순 벌어졌다. 내용인즉 짐바브웨의 한 목회자가 예수님처럼 물 위로 걸으려고 시도했다가 악어에게 잡아먹혔다는 것. 


한 예로, '지오비츠'(GB)라는 인터넷방송은 단신 속보(速報)에서 "알려진 대로(reportedly)"를 전제로 몰려드는 악어떼의 동영상까지 곁들여 진지하게 이렇게 보도했다. 즉, 짐바브웨 화이트리버 음푸말랑가에 있는 말기성도교회(SOLD)의 '조너턴 음테트와' 목사는 교우들에게 오늘날에도 가능한 성경적인 이적을 입증해 보여주려고 악어가 들끓는 '악어강'에서 실제로 약 30미터 정도 물 위로 전진하다 빠져서 허우적거리던 중 교인들 눈앞에서 세 마리의 악어에게 잡아먹혔다는 것. 


이 교회의 은코시 집사는 "악어들은 목사님을 불과 2분만에 끝냈다"며 "그 분의 샌들과 속옷만 달랑 남아 물 위에 떴다"고 말했단다. 30분 후 ER24 구급대의 응급차량이 현장에 도착했으나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고 이 기사는 끝맺었다. 은코시는 한 술 더 떠 "우리 교우들은 아직도 왜 이런 사태가 발생했는지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다"며 "목사님은 한 주 내내 금식하고 기도했기 때문이다"라고까지 말을 얹었단다. 


22일 현재도 인터넷에 버젓이 남아있는 데일리 포스트의 5월 13일자 기사는 핏물이 어린 강물 위로 왼손을 내밀며 허우적대는 사진을 곁들여 실감나게 보도했다. 여기서도 '은코시 집사'는 "목사님이 바로 지난 주일 믿음에 관한 설교를 하셨댔다"며 "그 분은 오늘 우리에게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불행하게도 물에 빠지셨고 우리들 앞에서 커다란 악어 세 마리에게 먹히셨다"고 진술한 것으로 인용돼 있다. 그럴 듯 하지만 말짱 꾸며낸 거짓이다. 


인디펜던트뉴스, 텔리그라프 등 영국의 일부 유명 언론들은 뒤늦게 진상을 알고 머쓱해졌다. 한국의 J, D일보 등 평소 센세이셔널한 뉴스거리를 찾는 주요 언론들도 이 '뉴스'를 확인 없이 섣불리 보도했다가 허위임이 드러나 상황이 "우습게" 됐다. 아울러 근래 급격히 떠돌며 증가하는 가짜 뉴스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국제적 논의가 언론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일부 유머 사이트는 조기 보도의 실수와 기독교의 이적 문제를 함께 농 삼아 다루기도 했다. 


어메리칸온라인(AOL) 뉴스는 '모두들 가짜뉴스에 홀라당 속아 넘어갔다'는 타이틀로 기사를 냈다. 이 가짜 뉴스를 앞다퉈 '사실'로 보도한 언론은 인디펜던트 외에도 데일리 메일, 유닐래드, 메트로, 익스프레스 등. 뿌리는 나이지리아의 '데일리 포스트'였고 원초는 '헤럴드 짐바브웨'로 밝혀졌다. 그러나 기자들이 원초 스토리를 찾으려니 헤럴드 짐바브웨의 아카이브엔 없었다. 물론 애당초 가짜 뉴스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해당 목회자가 예수님 흉내를 내려 한 문제 장소의 이름이 '악어강'이어서 "엉? 하필 구태여 악어가 들끓는 강물에서 목사가 왜..." 식의 의혹을 사게 된 데다 지난 2016년 2월 비슷한 (가짜)뉴스로 보도됐음이 재확인됐다. 내셔널뉴스 불러턴(NB) 등이 보도한 이 '기사'는 같은 장소에서 걸으려던 목사가 세 마리 악어에게 잡아먹혔다는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풍자 사이트에 올려진 것이었다. 


'구글링'해보면 해당 언론들의 보도 흔적은 분명 남아있지만, 접속해 보면 이미 입을 씻은 뒤거나 "해당 페이지는 없음"으로 나타난다. 영국의 주요 언론들이 이런 허위 뉴스를 앞다퉈 보도했다는 정황은 사실을 중시하는 현대에 또 다른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다. 원인은 평소 사실과 진상, 정론을 중시한다고 내세우는 주요 언론조차 깜빡 속아넘어갈 정도로 이 뉴스가 고도의 상상으로 교묘하게 위장됐다는 데 있다. 


더 큰 문제는, 내용물이 기독교와 성경의 이적과 신비 이슈를 빙자하고 더 나아가 목회자 등 기독교 지도층의 "있을 만한" 허점들을 겨냥한 허위라는 것. 가짜 뉴스 중엔 이른 바 '음모설'을 배경으로 한 것도 있어 과연 이번 허위뉴스도 단순히 뉴스판을 폭소나 헛웃음(LOL)을 유발하게 만들겠다는 '우스갯소리'가 목적인지, 기독교를 해칠 음모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곰곰히 생각케 한다. 


오래 전 한국의 K모 목사도 어느 해 여름 장마철 홍수가 난 강물 위를 "걸었다"는 주장을 하고 다닌 적이 있다. 물론 확인되지 않은 '썰'에 불과하다. 지금은 인터넷에서 사라졌지만 1980년대에 꽤 공공연히 떠돌던 것이었다. '음테타와 목사'가 "100 피트 정도" 걸었다는 주장은 믿음으로 갈릴리 물 위를 걸으려 했지만 두려움으로 물 속에 빠져 들어가다 주님께 간신히 건짐 받은 베드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만큼 성경과 기적을 이용한 스토리 위장술이 교묘하다는 얘기다. 


이처럼 웹을 누비는 가짜 뉴스들은 웬만한 사람들은 쉽게 넘어갈 정도로 점점 더 교묘해져가고 급증하고 있다. 또 그런 가짜 뉴스와 그 결과의 스릴을 맛보며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맨날 만우절' 현상이다. 얼핏 중대 뉴스로 보이는 어떤 스토리가 어디서 어디까지 진실이고 거짓인지, 궁극적으로는 과연 무엇이 참이고 허위인지 아리송해지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말이다. 다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최근 자신과 정권에 관한 '가짜 뉴스'가 판치지만 "필터링을 해야 한다"고 변명 비슷한 해명 및 비난 발언을 한 적이 있음을 폴리티팩트(=정치적 진실)이 전했다. 


사회에 가짜 뉴스가 판치다 보면 진실에 대한 '신뢰마비현상'까지 온다. 늑대가 온다는 거짓 경고를 하며 즐기다가 결국 자신이 늑대에 잡아먹혔다는 이솝 우화 속 목동처럼, 진실이 허황되게 들리고 거짓이 진실처럼 들리는 사회가 돼 간다는 얘기이니 위험하기 그지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김연철 교수(인제대)는 이 예화를 인용하면서 '신뢰가 사라지면 안보도 무너진다'는 경고를 한 바 있다.  


'악어밥이 된 목사'의 가짜 스토리는 성경의 이적들에 관한 현대적 의미성과 신뢰도에도 자칫 손상을 입힐 수 있다. 성경에 있는 이적들이 마치 현대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처럼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흔하다. 그렇다면 성경 속의 과거는 거짓 덩어리이고 현대 사회는 과학적이니 다 진실이라는 것인가? 그런 주장이나 개념은 세상의 헛 뉴스를 쉽게 믿는 언론들만 봐도 가당치 않다.  


이같은 가짜 뉴스들은 인공적 산물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인간을 통한 마귀의 장난이다. 성경에 따르면 마귀는 처음부터 모든 거짓의 아비요 허위의 앞잡이이다(요한복음 8:44). 사탄의 속에는 아예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자기 것으로 말하니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이다. 허구한 날 허구를 일삼는 자들은 그의 자녀들인 셈이다. 


구약 창세기 3장을 보면, 마귀는 첫 여자 하와에게 간교하고 그럴 듯한 거짓말로 접근하자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 대신 그것을 믿고 받아들여 남편까지 믿게 만들었다. 그것이 첫 불순종과 죄악의 발로였고, 그 결과는 오가는 세대의 모든 인류에게 미치는 엄청난 저주였다. 타락천사들도 옛 천사장이었을 당시의 마귀에게 속은 결과물이었다. 


갈수록 절대 진리가 소중히 여겨지고, 성경 진리를 있는 그대로 나누는 교회, 소박하고 투명한 진실을 말하는 사회가 마냥 그리워지는 시대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말할 것을 요구한다(마태복음 5:30). '중간쯤의 진리'라는 것은 없다. 


다른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기독교인들-특히 기독교 지도자-만은 성경의 명령대로 늘 바른 말을 해야겠다. 

그리고 기억해 두자: 성경 속의 모든 말씀은 다 진실되다. 



출처: http://truthnlove.tistory.com/1547 [진리와 사랑 (TLT)]/김삼 목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한없이 은혜로우신다
하지만 사탄은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왜곡시킨다

죄로인해 양심의 고통을 받을때
사탄은 그리스도를 정의만 내세우는 엄격한
재판관으로 생각한다
그리스도는 온유함 그자체이시며 그안에는
완전한 자비와 사랑이 공존한다
그리스도의 온유한 성품은 누구도 따라갈수 없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그분의 소유이다
우리는 흉하지만 그분의 형상을 하고있다
아버지가 자식을 볼때 결함이 아니라 자신의
닮은 부분을 보듯 주님도 우리에게서

자신의 형상을 바라보신다

우리가 의인이 아닌 죄인이었을 때 즉 온갖
연약함과 부패한 마음에 묶여있을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셨다

그러나 사탄은 온갖 의심을하게 만든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말로 성부와 성자를 이간질 시키려했고
첫사람 아담은 사단의 꼬임에 넘어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은

태초부터 시작된 사탄의 계략이다
사탄은 그동안 많은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전략을 즐겨 사용한다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ㅡ리처드십스

 

♧ 삶 ♧

좋다고 해서
금방 달려들지 말고
싫다고 해서
금방 달아나지 말고
멀리 있다해서
잊어버리지 말고
가까이 있다해서
소홀하지 말라.

'악'을 보거든
뱀을 본 듯 피하고
'선'을 보거든
꽃을 본 듯 반겨라.

부자는 빈자를
얕잡아보지 말고
빈자는 부자를
아니꼽게 생각치 말고
은혜를 베풀거든
보답을 바라지 말고
은혜를 받았거든
작게라도 보답하고
타인의 것을 받을 때
앞에서지 말고
내 것을 줄 때
뒤에 서지 말라.

타인의 허물을
덮어서 다독거리고
내 허물은 들춰서
다듬고 고치고
사소한 일로 해서
원수 맺지 말고
이미 맺었거든
맺은 자가 먼저 풀라.

모르는 사람
이용하지 말고
아는 사람에게
아부하지 말고
공적인 일에서
나를 생각치 말고
사적인 일에는
감투를 생각치 말라.

공짜는 주지도
받지도 말고
노력없는 대가는
바라지 말고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말고
세상을 헛되게
살았음을 한탄하라.

죽어서 천당
갈 마음이라면
살아서 원한 사지 말고
죄짓지 말라.

타인들의 인생 좇아
헐떡이며 살지 말고
내 인생 분수 지켜
여유있게 살자.

나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타인을 사랑하고
나를 다독거리는
마음으로
타인을 다독거려라.

보내는 사람
야박하게 하지 말고
떠나는 사람 뒤끝을 흐리지 말라.

 

펌글입니다!

오늘도 행복하고 즐거운 하루 되시고
힘차게 화~이~팅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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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우리 나이로 팔십 하고도 둘입니다. 젊은 사람들 눈에는 ‘꼬부랑 노인’이겠지만 막상 ‘100세 시대’를 살다 보니 아직 스스로 그렇게 늙었단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교회나 경로당 등 이런저런 모임에서 맺는 사회적 관계도 젊은이들 못지않지요.

그런데 딱 하나, 요즘 마음에 걸리는 자리가 있습니다. 바로 ‘상가(喪家) 조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그 자리에 내가 가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까운 지인이 돌아가셨다면 찾아뵙는 게 도리지만 팔십이 넘으니 막상 가도 유가족이나 다른 조문객들이 불편해하는 것 같습디다. 특히 천수를 누리다 보니 나보다 젊은 고인의 상가에 가는 게 영 곤혹스럽습니다.

동년배 고인의 문상도 껄끄럽긴 마찬가지예요. 가보면 대부분의 조문객이 ‘호상(好喪)’이라며 웃고 떠들어 대는데 내 마음은 당최 불편합니다. 내 친구, 내 또래 지인의 죽음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어요? 그런 자리에 다녀오면 몇날 며칠 우울해집니다.

나만 이런 고민을 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한 친구는 “칠십 넘어서는 아예 장례식장 다니는 걸 끊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그렇습니까. 슬픈 일 당하면 위로하는 게 사람 구실 하는 거 아닙니까. 고령화 시대의 조문 예법, 어찌해야 좋을까요.

예부터 한국문화에는 ‘지인의 경사(慶事)는 지나쳐도 애사(哀事)는 꼭 챙겨야 한다’는 말이 있다. 대표적인 게 ‘장례 조문’이다. 조문을 통해 고인을 추모하고 유족을 위로하는 것이야말로 인간관계의 기본예법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평생을 믿어 온 이 예법을 두고 노인이 되면 딜레마에 빠진다. 서울 송파구에 사는 김계순 씨(85·여)는 “장례식장에 가지 않은 지 벌써 10년이 됐다”고 말했다. “언젠가부터 친한 친구나 친지의 장례식도 참석하지 않게 됩디다. 나 같은 노인네가 남의 빈소에 가 있는 모습이 뭐 좋겠나 싶더라고요. 가는 게 예의가 아니라 안 가는 게 예의인 것 같기도 하고….”

문제는 안 가도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서울 양천구에 사는 김수종(가명·73) 씨는 “나이가 든다고 마음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며 “가까운 사람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고, 소중한 사람의 슬픔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고 싶은 마음은 노인이 돼도 매한가지”라고 말했다. 김 씨는 “아직까지 큰 고민 없이 문상을 가는데 언젠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아끼는 이의 문상조차 꺼리게 된다면 참 서글플 것 같다”고 말했다.

올해 한국 나이로 백수(白壽·99세)를 맞은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역시 노년기에 접어들며 비슷한 고민을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몇 가지 조문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나보다 어린 사람이 먼저 장례를 치르는 경우라면 아주 가까운 사이를 제외하고 가급적 문상을 가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남겨진 가족들이 날 보면 ‘이렇게 건강하신 분도 있는데…’ 하며 더 큰 상실감을 느끼지 않겠어요? 그럼에도 내가 아끼던 제자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면 가보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어요. 그럴 땐 다른 제자들이나 조문객들이 없을 늦은 밤에 갔죠. 밤에도 조문객이 있을 것 같으면 모두가 참석할 수 있게 공개된 장례 예배에 가서 마음을 전했어요.” 김 교수는 “그래도 90세가 넘고 나니 문상은 안 가는 게 낫다는 생각”이라며 “4, 5년 전부터는 아들을 대신 보내 조문한 뒤 나중에 내가 위로 전화를 한다”고 말했다.

고령화로 인해 상주도 노인인 경우가 많은 만큼 상주를 배려하는 예법을 새롭게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모친상을 치른 황병석 씨(71)는 “장남이라 쉬지도 못하고 3일장을 치르는데 체력적으로 정말 힘들었다”며 “60대에 아버님 상을 치를 때와는 또 다르더라”라고 말했다. 그는 “평소 무릎이 좋지 않다 보니 하루 종일 조문객과 맞절을 하는 우리 장례 예법이 큰 부담이었다”며 “고령화 시대엔 맞절보다 목례 정도가 서로에게 좋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말했다.

실제 최근 일부 장례식장은 고령의 상주와 조문객들을 감안해 식장 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다. 중앙대병원 장례식장은 분향소와 접객실을 좌식이 아닌 모두 입식으로 리모델링했다. 이 병원 장례식장 관계자는 “척추와 고관절이 불편한 노인 조문객을 위한 배려”라며 “신발을 벗지 않고 묵념으로 조문하고, 식사도 의자에 앉아 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도 지난해 말 입식 빈소를 도입했다. 이 병원 장례식장의 장무 운영팀장은 “입식 빈소의 선호도가 높아 계속 확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2008년 리모델링 당시 국내에서 처음으로 입식 빈소를 도입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노수경 사무장은 “고인이 80대 이상인 빈소 비율이 2008년 30.6%에서 지난해 47%로 빠르게 늘고 있다”며 “사망자가 고령이면 조문객도 고령이 많다 보니 갈수록 입식 빈소의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과거와 달리 분향소 안에 상주와 가족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를 두는 것이나 빈소의 밤샘 문화가 사라진 것도 고령화로 나타난 변화 중 하나다.

임우선기자 imsun@donga.com

이미지기자 image@donga.com

▼ 올해 백수(白壽)를 맞은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노년기 조문 예법

1. 아주 가까운 사람의 장례를 제외하고 나보다 젊은 사람의 장례에는 가지 않는다. 자칫 유족에게 더 큰 상실감을 줄 수 있다.

2. 그럼에도 꼭 마음을 전하고 싶다면 조문객이 적은 시간을 택해 간다. 그래야 조문객들이 덜 불편해 한다.

3. 꼭 가야할 자리가 아니라면 가급적 아들을 통해 조문하고 전화로 위로를 전한다.

4. ‘호상(好喪)’이라는 표현을 조심해서 쓴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이의 장례라도 가족과 친구들에겐 슬픈 일이다.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에 의해서만 돋보여집니다




사람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할 때, 문자 그대로 그들이 자신들의 삶이나 어떤 행위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만들어 드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소요리문답 1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부정적으로는’ 그에게 부가적인 영광을 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그리고 무한히 완전하시고 영광스런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본질적인 영광에 조금도 덧붙일 필요가 없다. ‘긍정적으로는’ 인생들이 그들의 삶과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다.”

자연만물도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지만(롬 1:20),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진 못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declare, 시 19:1)”라는 말씀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법정적으로 선포(선포는 법정적 용어, 요 6:35; 롬 1:4)할 뿐, 그것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돋보여내질 못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자연은 ‘자발성’과 ‘의도성’을 가진 인격이 아니기에, 인격자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돋보여낼 수가 없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반면 인간은 자발성을 가진 하나님 형상의 인격자이긴 하지만, 죄로 인한 불완전함으로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돋보여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무흠하시고 자발성을 가진 하나님 형상의 인격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돋보일 수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광을 아들의 영광과 결부시킨 것은 두 인격이 불가분리인 일체이며, 각 위의 영광의 돋보임이 서로에게 의존돼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은 각 위(位, personality)가 개별로서는 영광이 불완전하다는 뜻이 아니고 영광의 돋보임인 서로에게, 혹은 서로의 사역에 의존돼 있다는 뜻입니다.

다음은 성부의 영광의 돋보임이 성자에 의존돼 있음을 나타내는 구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4-5)”.

다음 구절은 ‘성자의 영광’의 돋보임이 ‘성부의 영광’과 불가분리임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성자 그리스도의 영광’을 말하면서 성부와 연결지어 ‘하나님 독생자의 영광’이라 했음은, 독생자의 영광의 발원지가 성부이시고 성자의 영광은 성부의 영광과 함께 돋보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위할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해 전적으로 무능해진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인간을 위할 뿐입니다. 이를 인정치 않고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려다 사달(事端)이 납니다.

특히 율법과 관련하여 그러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율법적 의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려다 율법의 정죄를 받은 것은, 교회사에서 흔히 발견되는 궤적(軌跡)들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자신의 의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려다가 저주에 떨어졌습니다.

이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하나님을 진노케 했으며 인간들을 얼마나 무능하게 했는지를 모르는 데서 기인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가 풀어질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죄가 컸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푸는데는 인간은 전혀 무능했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내실 때 염두에 두신 것은 성자 그리스도였습니다. 죄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아는 이도, 율법의 의를 이루어 자신의 진노를 풀어줄 이도 성자뿐이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율법의 의도는 그들로 하여금 죄로 절망하여 율법의 완성자 그리스도께 피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볼 때 인간은 자기가 하나님을 위하려 하기보다, 먼저 하나님이 그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전적 무능은 구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후의 삶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을 뿐더러, 구원 이후의 하나님 섬김 역시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참 그리스도인’의 표상을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함(빌 3:3)”이라고 한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봉사 동력이 오직 하나님이심을 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는 말씀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하나님 섬김은 그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일하심입니다. 곧 성도 안의 그리스도가 그를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구절들입니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선행)를 보고 만족해 하시는 모습들을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인간의 행위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들 행위의 원천인 그리스도의 공로를 보심으로서입니다.

그들의 봉사, 선행이 하나님께 기쁘게 열납되는 것은 선행 자체의 가치보다, 그것을 있게 한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가 없었다면, 그들의 봉사도 불가능했고, 하나님께 열납될 수도 없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골 3:17)”고 한 것도, 우리의 봉사 자체의 가치보다는 그 봉사를 있게 하는 예수의 이름을 가치롭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보다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여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라(벧전 4:11).”

하나님이 성도의 기도를 기뻐하시는 것도 그들의 기도를 열납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이름(공로)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라고 하신 것도(요 14:13-14) 이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이름이 하나님께 열납 돼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기도의 응답을 이끌어 냅니다.

이 점에서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공로)을 돋보여 내는 통로입니다. 인간의 봉사나 기도는 모두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통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위할 분은 그리스도 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에 의해서만 증거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나 자연 만물 같은 피조물들에 의해 증거 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은 웅큼으로 태평양 바닷물을 측량하고, 줄자로 오대양을 측량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에서도 확증됩니다.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요 2:25).” 하나님은 오직 삼위 하나님에 의해서만 자증(自證, one's own evidence)됩니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와 성령에 의해서만, 성부 하나님은 성자와 성령에 의해서만 증거됩니다.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 인줄 아노라(요 5:32)”,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그리고 이 삼위 하나님의 자증(自證)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이룬 복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곧 복음 안에서 역사하여 이루신 삼위 하나님의 자증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자증인 복음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증거됩니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습니다. 무한자 하나님을 유한자 인간이 증거할 수 없다는 전제와 인간의 복음전파 없이는 하나님이 증거될 수 없다는 두 전제의 충돌입니다.

이처럼 복음 전도에는 인간의 ‘역할’과 ‘한계’가 분명히 드러나며, 이 측면들이 다 충족돼야 합니다.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삼위 하나님의 자증인 복음을 ‘전파하는 자(proclaimer)’로 한정시킴으로서 충족됩니다. 복음에 인간의 지혜가 가미되면 삼위 하나님의 자증 능력이 훼손을 입기에,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도록 ‘전파자(proclaimer)’로서의 사명에 충실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바울이 복음서에서 누누이 강조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쉽게 말하면, 복음 전파자로서의 인간의 역할이란 삼위 하나님이 복음 안에서 스스로 자증(自證)하도록, 사도 요한이 말한 ‘외치는 자의 소리(the voice of one crying, 요 1:23)’의 역할로 만족해야 합니다.

이렇게 삼위 하나님의 자증으로 된 복음을 듣고 세운 신앙만이,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세워진 신앙이 됩니다(고전 2:5).


복음 설교자들이여! 여러분은 성도들의 믿음을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세우고 있습니까?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근간)> 등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5234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복음이 뭐야?

복음이 무엇인가? 대부분의 교인들은 예수 믿으면 내가 구원받는다는 기쁜 소식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주 틀린 대답은 아니지만 그것은 복음을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성경을 읽으니 성경에 펼쳐지는 거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서사와 계획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오순절에 베드로가 전한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살리시고 당신의 우편에 앉히사 만물을 주관하는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다는 내용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2:33)고 했다. 이 말씀이 베드로가 선포한 복음의 절정이다.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뿐 아니라 주님이 승천하심으로 성령의 선물을 보내심에서 그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이 구절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의 신학과 복음의 가장 중요한 골격을 형성하는 말씀이다. 사도행전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이라고 볼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 펼쳐지는 모든 성령의 역사와 사도들의 사역은 승천하신 주님이 성령을 부어주셨다는 말씀에 기초한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정점도 예수님이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만유를 주관하는 권세를 지금 집행하고 계신다는 선언이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1:20-22) 

승천하신 주님이 하늘에서도 온 세상을 다스리고 만유를 통치하시는 방편이 성령이다. 성령은 승천하신 주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직무를 이 땅에서 집행하는 능력이다. 성령은 또한 이 땅에서 주님이 임재하시는 방편이다. 성령을 통하여 승천하신 주님이 권능으로 신자와 교회 안에 임재하신다. 

누가는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주님이 부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가 되셨다는 복음을 믿으면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고 했다. 성령의 선물은 다름 아닌 영광을 받으신 주님이 만물을 주관하는 권능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 가운데 임재하심이다. 그래서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를 통해 구약에서부터 맥맥이 흐르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계획, 즉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온 세상을 축복하고 새롭게 하신다는 언약을 성취하신다. 교회가 세상의 축복이 되기 위해 이 성령의 권능에 사로잡혀야 한다.


출처: 개혁주의 마을/Grace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것이요

 

 

본문: 딤후 2:11-13

요절: 11

 

?미쁘다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것이요

 

 

11 미쁘다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노릇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없으시리라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복음을 위해 싸우고 고난받는 예수님의 증인들을 격려합니다. 증인으로서의 우리 삶은 전투에 임한 군인과 경기자와 농부와 같이 수고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거짓 교사들이 가르치는 것처럼 결코 무사히 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어렵게 투쟁하며 살아야 하는데, 이에 좋은 모범이 없이는 너무나 살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자기 예를 들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셨습니다. 사도도 죄인과 같이 사슬에 묶여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이제 처형을 기다립니다. 사도는 우리를 바로 이러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만약 사도가 이렇게 분명히 가르치지 않았더라면, 기독교는 이미 1-2세기에 완전히 변질하여 다른 종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인은 이러한 가르침에 순종하여 죽음 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피를 흘림으로써 신앙과 가르침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려면 먼저 주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자기가 죽지 않으면 결코 증인의 삶을 없습니다. 자기 목숨을 아까워하는 , 어찌하든 살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죽습니다. 죽되 영원히 죽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진리의 말씀에 대해 묵상하면서 우리가 주와 함께 영원히 사는 자가 되고자 합니다.

 

사도는 본론을 말하기 전에 먼저 미쁘다(피스토스) 말이여라고 합니다. 이것은 말은 믿을만하다!”라는 의미로서 뒤에 나오는 말을 강조합니다. 무엇이 강조되었습니까?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것이요 시작한 1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반드시 이해해야 하며, 이것이 마음에 꽂혀있어야 하며, 매일 살아나가는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이해와 실천에 따라 여러분의 영생이 달려있으므로 정말로 중요합니다!

 

우선 본문의 형식과 구조를 보겠습니다. 본문은 NA(원어) 판에 송가 형식으로 되어있습니다. 4 문장이 모두 조건절(“…한다면”) 시작하고, 뒤따라 나오는 주절은 “…하리라 되어 있습니다. 있으면 개역개정에 맞추어 다음과 같이 다시 번역을 합니다:

 

말은 믿을만하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것이요

우리가 끝까지 견디면                         함께 다스릴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미래)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요

우리가 신실하지 못하면(현재)             주는 계속 신실하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기를 부인하실 없기 때문이다.

 

 

1.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것이요

 

그리스도인은 주와 함께 죽었다라는 말은 바울 서신에 자주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이므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과거형

  • 6:2-8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가운데 살리요…그의 죽으심과 합하여…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우리의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죽은 죄에서 벗어나…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줄을 믿노니

  •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현재형

  • 고후 4:10-11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 죽을 육체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8:36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 고전 15:31 “나는 날마다 죽노라

  • 고후 7:3 “내가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이것을 통해서 분명히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죽은 라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죽었으므로( 6:2), 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사람이 죄에 대해 죽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입으로 낱낱이 하나님 앞에서 고백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이심전심이 통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죄를 짓는 자신을 미워해야 하고, 거룩함을 갈망하여 전심으로 사함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을 아무리 많이 듣고 감동할지라도, 안에 생명이 없습니다. 말씀이 항상 자기를 찔러야 합니다. 교회는 주로 말씀에 찔림을 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이것은 또한 저와 같은 설교자의 임무입니다.

사함이 없는 사람은, 문제가 생기면 항상 문제의 원인을 자기에게 찾지 않고 남에게 찾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런 일이 있으므로 교회가 어지러워집니다. 그들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영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정말로 그리스도를 위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실제로 자기 생명을 잃는다면, 우리 주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자기 영광에 영원토록 참여하게 하신다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있습니다. 그는 이생에서 자기를 좇는 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14:3).

 

여러분을 포함하여 대부분 교인이 자기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회심하지 않았음에도 강한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징그러운 죄를 지으면서도 이것을 인식조차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습관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에 무관심하거나 이것을 싫어하고 어기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죄를 생각하고 , 수십 년간 고통스러워한 경험이 없음에도 자기가 거듭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음에도 자기는 영적이라고 생각하므로 남을 전도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구원의 확신은 여러분을 지옥으로 이끄는 독약이 있음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 구원을 수없이 의심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죄가 살아있음을 발견하고, 자기도 놀라고 불안해서 그리스도를 찾지만, 문제가 그리 쉽게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만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원도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고후 4:10-11 다시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 죽을 육체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영적으로 살아있는 자의 특징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지고사는 입니다. 그는 항상 죽어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예수를 위하여 자기를 죽음에 넘겨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의 때문에 상처를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죽어있는 시체에 욕설을 퍼붓는다고 해서 시체가 화가 나서 다시 벌떡 일어나겠습니까? 옛사람 때문에 잠시 그럴 수는 있지만, 이것은 잠시여야 합니다. 상처를 받는 것은 자기가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함의 은혜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사실을 몰랐다면,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다는 말을 삼가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여러분에게 엄청난 경고가 됩니다. 오늘 설교가 무의미하게 끝나는 불상사가 없기를 바랍니다. 너무나 자기에게 기울여져서 이것이 이미 굳어졌으므로 하나님 말씀이 들리지 않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모두 자기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분이 다시 오실 때에 우리는 하늘로 들려 올라가 영원히 그분과 함께 살게 됩니다.

 

 

2. 우리가 끝까지 견디면 함께 다스릴 것이요

 

말씀은 누가 구원을 받으며 구원의 축복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칩니다. 단지 끝까지 견디는 자만 구원받습니다. “ 너희가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3:13). 곳에서 모두 휘포메노라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끝까지 견디어야 합니다. 전쟁터에 나간 군인이 끝까지 견디지 못하면 고된 행군에서 탈락하여 적진에서 죽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너무 힘들다고 달리기를 중단하면 상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성도의 견인이라는 말을 여러 들었을 것입니다. 성도는 끝까지 견디고 인내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안에서는 죄가 끊임없이 나를 죄로 부추기고, 외부에서는 나를 유혹하고, 핍박까지 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실존입니다. 그러므로 잠시라도 방심하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이란 이렇게 험한 것인데, 오늘날에는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자만 구원받는다 진지하고 경고하는 설교를 듣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십자가를 지며, 부담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기꺼이 따르는 자는( 16:24), 주님과 함께 그분의 보좌에 앉을 입니다. 그분은 교회에 보내는 순회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3:21). 우리 주님이 승리하신 능력으로 승리하고, 자신을 이기고 극복하는 자에게는, 그분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나누어주실 것입니다(참조: 22;3-5). 이렇게 우리의 보잘것없는 신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대답해주실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진지하게 설교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모두 목표에 도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고후 7:3).

 

 

3.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예수님도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 계신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10:33).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매우 엄하게 경고하십니다.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을 번만 부인할지라도 재생의 기회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부인하면, 예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계속 그분을 쉽게 부인하게 것이고, 이미 타락한 마음은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예수님을 한두 부인할지라도 회개하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우리가 자기 마음을 다스리거나 바꾼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부인하기 전에 부인하려는 마음을 바꿀 수는 있으나, 부인한 후에 이것의 심각성을 깨닫고 통회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우리 마음은 고무풍선처럼 쉽게 늘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6:4-6 에서 배교와 같은 무거운 죄에 대해 매우 엄중한 경고를 합니다: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그러므로 신사참배와 같은 배교는 결코 용서받을 없습니다. 당시 모든 한국 교회는 매주 예배 시에 일본 신에 대해 고백을 하고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이것을 동안 계속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마음은 아스팔트처럼 완전히 굳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사참배한 교회가 나중에 감옥에서 풀려난 성도를 오히려 핍박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과거를 청산하지 못했던 이유는 이미 양심이 더러워진 채로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회개하지 못하고 부흥과 성장운동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단순히 자비한 아버지상으로 변질시켰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양적으로 팽창했습니다. 이들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우리는 이들의 후손입니다. 우리는 우리 피속에 이들의 더러운 피가 조금씩은 흐르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것은 정말로 예외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과거 때문에 특히 한국인은 실수로라도 주님을 부인하는 일이 없도록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의식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하는, 돌이킬 없는 죄도 있지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언행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함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의식하지 못하고 짓는 죄일지라도, 그리스도를 부인한 것은 매우 죄이므로, 우리 생각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죄는 반드시 기억이 것이고, 이때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죄가 드러났음에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마음이 점차로 둔해지고 굳어져서 나중에는 회개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저는 50-60 전에 지은 죄도 갑자기 기억이 됩니다. 그간 번도 생각이 나지 않고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불현듯 생각이 납니다. 과거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하고 부끄러운 일이 한둘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함의 은혜에 더욱 감사를 드립니다. 만약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점차로 생각이 나지도 않을 것이고, 결국 마음이 돌처럼 굳어집니다. 그러면 쉽게 주님을 부인해도 자신은 깨닫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다시 듣습니다: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4. 우리가 신실하지 못하면(못할지라도) 주는 계속 신실하시다.

 

말씀은 바로 앞의 말씀과 거의 반대되는 것처럼 들리므로, 해석자에게 어려움을 줍니다. 바로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는 자는 주님도 그를 부인하신다고 했는데, 지금은 우리가 주님께 신실하지 못해도 주님은 우리에게 신실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앞뒤가 맞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장은 주님의 신실을 강조하는 것에 초점이 있다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신실하지 못한 것과 주님의 신실하심이 선명하게 대조가 되어 주님의 신실이 크게 돋보입니다. 진실로 가장 위대한 주님의 종일지라도 주님의 엄밀한 판단으로 본다면 신실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사함의 은혜를 근거로만 있습니다. 이것이 루터가 가르친 이신칭의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구절은 주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절은,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말씀을 듣고 불안해진 우리 양심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있습니다. 과연 내가 앞으로 주님을 번도 부인하지 않고 영적 싸움을 싸울 있으며, 모든 고통과 고난을 이겨낼 있을까? 이것은 불가능하지 않는가? 저도 앞으로 15년은 살아야 같은데, 저의 연약함을 생각하면 구원에 대한 자신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내가 믿음을 끝까지 지킬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어 이상하게 사람이나 침해에 걸린 사람을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사도는 대답합니다: 우리가 신실하지 못할지라도 주는 계속 신실하시다! 이것은 우리에게 정말로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도우십니다. 만약 우리가 실수로 죄를 지었을지라도 그분은 반드시 죄를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가 회개한다면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계속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자를 결코 내쫓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저의 위로가 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앞두고 병상에 누워있게 자신을 생각하며, 영원의 세계로 들어갈 것을 생각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사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다면, 내가 지금 죽어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왕처럼 다스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각자 정말로 내가 죽어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하시기를 바랍니다.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MvxA/96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사람 살린 한마디 인사*

사람을 만나면 항상 ‘샬롬(Shalom)’ 이라고 인사하던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한번은 길을 지나가다 얼굴이 시꺼먼 분이 지나가기에
‘샬롬’ 하며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그 주일부터 교회에 나와 주일 예배만 드리고 빨리 빠져나가시는 것이었습니다.

3개월이 지나자 찾아와 식사를 함께 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식사를 하러 갔더니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자신은 인생을 재미있게 살았답니다. 사업도 잘 되었고 돈도 벌었고 명예도 얻었습니다. 모든 것이 평안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인가 몸이 피곤하고 부어오르고
얼굴도 까맣게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보았더니
간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는데
손도 쓸 수 없는 말기상태라 합니다.

의사가 말하기를 '잘해야 3개월 밖에 못 삽니다’ 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가족도 걱정을 하고 친구들도 걱정하고 모두 이 사람이 죽게 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누구를 만나도 자신은 죽을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자기에게 ‘살 놈!’ 그러더라는 겁니다.

모두 ‘죽을 놈, 죽을 놈’ 하는데
목사님은 길에서 만나자마자
‘살 놈!’ 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그래 나는 죽을 놈이 아니고
살 놈이다.’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3개월 밖에 못산다 했지만 ‘살 놈’이라 생각하니 자신감이 생겼습니다.예배에 참석하고 돌아와 약을 먹고 몸을 추스렸습니다.

자신에게 “나는 살 놈이야,
목사님이 살 놈이라고 말씀하셨어” 라고 말합니다.

살 놈이라고 말하니까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고 운동을 조금씩하며 잘 먹고 잘 쉬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3개월 밖에 못산다고 한 몸이 3개월이 지났는데도 더 건강해지고 힘이 생겨 이렇게 살아있노라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샬롬’이라는 말을
‘살 놈’이라고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샬롬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샬롬의 소망으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의 축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죽어가는 자들에게 살롬의 기적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안의 소식을 전하는 우리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나고, 평안의 축복을 받게 되는 귀한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미래의 노후 (친구)*


대만의 한 시사 잡지에서
'미래의  노후'라는 주제로
웹 영화를 기획했다.

빠르게 증가하는
노령 인구로 인해 달라질
미래의 모습들을 다룬
웹 영화들은 사람들의
크나큰 호응을 얻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미래의 노후:친구편>은
많은 독신 네티즌의
공감을 샀다고 합니다.

영화는 산속에서
혼자 사는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네명의 자식들은 모두
장성해 교수가 되었거나
해외에 나가
장사를 하고 있고,

노인만 자식들이
모두 떠난 산골집에서
혼자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과 손자가 멀리서
찾아온다는 소식에
그는 정성껏 맛있는
음식들을 준비한다.

하지만 곧이어
오지 못한다는 전화를
받게되고,
준비했던 음식들은
주인을 잃고 만다.

이때 창밖의 하늘마저
우중충해지고 노인은
친구를 불러 함께 식사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누렇게 색이 바랜
낡은 수첩을 한참 동안
뒤적거려도
함께 식사할 만한 친구를
찾지 못한다.

이내 창밖에서는
비가 쏟아져 내리고,
결국
노인은 부엌 식탁에 앉아
가득 차려진 음식을
홀로 먹는다.

마지막 장면 위로
'인생의 마지막 20년을
함께할 친구가 있습니까?'
라는 자막이 흐른다.

오늘 새벽
대만 최고 베스트셀러 작가
우뤄취안 저,
"우리는 그렇게 혼자가 된다"
란 책을 덮으며

미래에 나의 자화상은
어떤 모습이 될지  잠시
명상에 잠겨 봅니다^^

노후의 친구는
첫째: 가까이 있어야 하고
두째: 자주 만나야 하며
셋째: 같은 취미면 더 좋다.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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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아주 명료했다. 그들이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지위, 특권, 가정의 안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 뿐인 자신의 목숨마저 기꺼이 바치겠다는 각오가 있었을 때만 고백할 수 있는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목숨까지 내어놓겠다는 각오와 진심어린 고백이 없다면 감히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때가 바로 초기 기독교 시대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번 물어보라. 그들의 대답은 그렇게 간단 명료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부모님 때부터 교회에 출석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자입니다.”, ”병 낫기 위해서 갑니다.”, "축복받고 잘되기 위해서 나갑니다.”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고백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물론, 한 개인의 의식 세계, 지식 수준, 환경이나 인격에 따라 모두 다른 대답을 할 것이지만, 대체로 “이 땅 위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리고 다행이 천국이 있다면 죽어 천국에 가는 것, 생명보험을 사두는 것 정도, 사행심리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보고 놀라게 될 것이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일까? 우리 모두 함께 고민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1. 초기 그리스도인은 그분의 충성스러운 노예였다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안디옥’에서 처음 불렸던 것 같다. 시리아 안디옥에서 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된 동기는, 당시 저주의 상징이었던 ‘십자가’위에서 처형된 죄수, 예수란 청년을 '그리스도'라 믿고 따르다가 목숨까지 빼앗기는 무모(?)한 자들이 많음을 비웃는 불신자들의 표현이었으며 조롱의 대상이었다. 원형극장의 사자 앞에서나 길거리에 세워둔 십자가 형틀 위에서 죽어가면서도  "나는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거침없이 대답하는 그들을 향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이렇게 초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노예’란 의미로서 상용됐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가이사 황제를 숭배의 대상으로 여기던 로마 사람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가이사의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그렇게 함으로써 로마 제국에 대한 깊은 충성을 들어내기를 기뻐했다.(행 11: 26) 이와 마찬가지, 그리스도인들은 주께 대한 자신의 궁극적인 충성을 들어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이었고, 순교자들이 “나는 그리스도인”이라 외치는 그 외침은 나는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노예다.”하는 것과 동일 語였던 것이다!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 성도들은 하나님의 노예, 그리스도의 노예로 언급된다. 사실, 바깥세상이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먼저 불렀지만, 신약 성경에서 초기의 성도들은 스스로도 반복해서 나는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불리기를 기뻐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성경이 강조한 “하나님의 노예”라는 개념은 현대 영어 번역본들 사이에서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하지만, 이 노예 개념은 사도들과 그 뒤를 이은 성도들에게는 핵심적인 진리였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는 변하지 않는 충성스러움, 진실한 주의 종(노예)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주의 종”이라고 하면, 목에 힘을 주는 권위적 대명사가 되었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축복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변질한 것이다. 성도라 이름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사행성 심리가 있음을 알고 있는 일부 약삭빠른 자들은 어떻게 하면 좀 더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을까 궁리하며, 사람의 영혼을 살리며 우리 영혼을 살찌울 수 있는 영의 양식인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잘 풀이하여 가르치기보다 성공했다는 목사들의 꽁무니를 좇아다니기도 하고, 그들이 사용한다는 갖가지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접목하기도 한다.
 
또 가짜 학위를 받고서라도 큰 교회를 맡으려고 꼼수를 부리다가 그것 때문에 자신과 가족이 온갖 고초를 다 겪고 자신뿐만 아니라 주님의 몸인 형제 교회들마저 돌팔매질 당하게 하기도 한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인지.... 여전히 가짜 박사 목사님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난다. 어느 날, 신문을 보고 있던 남편이 "어, 이 사람도 박사라고 하네, 학위 공부를 언제 했다는 것인지? 거 참, 이런 때는, 내가 박사 아닌 것이 정말 감사하다." 하면서 혀를 찼다. 그만큼 가짜 박사님들이 판을 치는 세상을 한탄하는 말일 게다. ㅋ

이런 현상은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말세가 가까워올수록 가짜가 판을 치는 시대다. 가짜 성령 운동은 반드시 분별해야 하는 영역이다. 그럼에도 분별하자고 하는 목사님들이나 다른 믿음의 사람들은 핍박을 받는 시대가 지금 이 시대인 것 같아 그 또한 마음이 착잡하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같은 성도라고 하는 사람이 무섭고 글쓰는 것도, 댓글 토론하는 것도 무섭다는 생각마저 든다. 긍정적인 토론 자세가 결여되고 자신의 뜻에 반하면 죽여보자고 모함도 마다치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그 마음이 정말 무섭다. 성경은 반드시 분별하라고 하셨는데 어째서 분별하면 안된다는 것인가? 
 
필자가 칼럼니스트로 섬기고 있는 아멘넷에도 김oo교수님이 정oo 목사님의 실명을 직접 거론하면서 "모든 성령운동은 신사도 운동인가?" 정oo 목사님은 모든 성령운동을 다 사단의 장난(신사도 극단적 신비주의)라고 한다."라는 뜻이 담긴 제목부터가 타당하지 않은 글, 정oo 목사님의 글이 비성경적이라고 신랄하게 비평하는 글이 헤드라인 칼럼에 올라와 있다. 필자가 정oo 목사님의 글을 모두 정독을 해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정목사님의 뜻은 영들을 다 믿지말고 반드시 분별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는데 말이다. 같은 목회자끼리도 바르게 분별하자고 하는 목소리를 싫어하는 세대이니 성도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싶다. 그러면, 가짜 성령의 장난질이란 전혀 없다는 말씀인지...

주님께서는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려고 하면, “내 음성(성경)을 들어야 하고 그 말씀에 죽기까지 복종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듣는다(listening)는 것은 경청하는 것, 곧 순종을 의미한다. 환청이나 헤롱거리는 음성이나 쪽집게식 예언이 아니란 것이다. 성도들은 사단의 장난질인지 성령의 음성인지 반드시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성령의 사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향한 애정과 충성 그분의 말씀(성경)에 전적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나타나는 어떤 기현상이 아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 14),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요 8: 31) 자신을 가리켜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거나 타인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 받으려고 하면 먼저,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의 말씀(성경)에 복종하고 그분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 1: 21)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2. 그리스도인은 삶에서 그분의 통치권을 인정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절 말씀).” 이 말씀은 이 땅 위에서 사는 동안에 이미 마음에 천국이 임해야 하며, 천국이 임한다는 것은, 그 나라의 통치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통치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씀은 성도가 간과해 버리기 쉬운 말씀이나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말씀이요,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론 다음으로 기억해야할 중요한 말씀이다. 구원론이 미래 천국을 이루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것은 현재 천국을 이루는 것이다. 현재 천국이 미래 천국으로 연결되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구원받은 백성들, 성도라고 칭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이, 이 세상에서 죄악과 더불어 짝하고 살면서 “나는 용서함을 받았다.”라고 뻔뻔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이 기막히고 어이없는 삶을 연출해 내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위성이 없다. 어느 독자님이 고백한 대로, 지금은 율법시대가 아니고 은혜시대라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그 다음에 회개하면 된다고 착각하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론, 구원과 의로운 행위와 상관관계 있는 것 아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통치권을 내 삶에서 먼저 인정해야 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분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거나 업신여기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억울한 일을 당한다. 그럴 때도 잠잠히 그분을 바라보며 침묵할 수 있는가? 또 내가 어떤 기념비적인 일, 선한 일, 혹은 용감한 일을 했는데 아무도 몰라 준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누군가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사람들에게 말해 주지 않아서 내가 받아야 할 칭찬과 상급을 나 대신 그 누군가가 찬탈했다면?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일을 만나면, 우리는 무척 화가 나거나 깊은 상처를 입을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도 입을 다물고 혀를 다스릴 수 있는가? 
 
많은 사람이 자기에게 유익할 때는 선한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한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그만 그 속에 감추어 두었던 칼을 끄집어 내어 죽여보자고 들이대는 것을 보게 된다. 마치, 잠시 조용하던 옹달샘 수면에 악동이 막대기를 넣고 한 번 휘젓기만 하면 그 속에 가라앉아 있던 더러운 흙탕물이 온갖 잡탕과 섞여 있다가 시커멓게 물 위로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처럼 온갖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 것을 볼 수 있다. 성도의 가슴 속에 어찌 그토록 포악한 언사가 감추어져 있었단 말인가? 그저 아연실색 할 때가 간혹 있다. 어떤 사람은, 음욕 앞에, 또 어떤 사람은 탐욕이나 명예 앞에서 여지없이 무릎을 꿇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런 사람도 진짜 '그리스도인'이랄 수가 있을 것인가? 글쎄다.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어도 내가 죽지 않는다는 사단의 말을 곧이 듣고 불법임을 알면서도 그 불법을 행동에 옮기려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정녕 죽으리라 하셨으니 그 말씀을 더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겠는가? 이 부분이 바로 그리스도가 내 삶에서 주인되심을 인정 하느냐 인정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을 나타내는 시금석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롬 8: 5, 13-14절 참조)

내가 생각할 때는 그렇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주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성령에 굴복하며 자신의 의지와 욕심을 죽이고 주님과 함께 청결하고 정직한 삶, 십자가의 길, 고통의 길을 걷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죽음의 강을 건널 때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하늘의 공급하시는 새 힘으로 채워주시고 그런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죽음의 고통을 느끼는 강도가 훨씬 다르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성경에 꼭 그런 단어는 없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는 말씀도 있다.

또 순교자도 주께서 힘을 주셔야 순교할 수 있는 것이지, 힘을 주시지 아니하시면 순교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적으로 입증된다. 스데반 집사가 돌무더기 속에서 죽어갈 때를 보라. 죽음 직전에, 그의 영안이 열리고 주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이 보인다고 소리쳤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행 7:56절 말씀).” 그렇다. 죽음 직전의 순간에 하늘이 열리고 평생을 두고 사랑하며 섬기던 그 주님, 평소에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자기의 사랑받는 종, 스데반이 오는 것을 환영하려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셨다. 그리고 스데반을 응원의 눈길로 바라보신다. 이쯤 되면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내가 평생을 사랑하며 그분을 위해 흘린 눈물을 기억해 주시고 내가 오는 것을 환영해 주시려고 벌떡 그 자리에서 일어나신 주님이 보인다면 말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러나 십자가 강도의 죽음은 상상만 해도 끔찍스럽다. 사단이 그의 영과 혼과 육을 갈기갈기 찢으며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 고통 중에서 주님께 구원을 요청하려면 글자 그대로 필사의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십자가상의 강도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구원받았다 하여, 나 또한 그런 특혜를 누릴 수 있다고 너무 기대하지 마라. 그것은 아주 특별한 케이스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백성 되기로 마음에 작정한 그날부터 성도는 그분의 통치권을 삶 속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훈련이 계속돼야 하고, 이런 훈련이 계속된 사람은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1 5:18절 말씀)

현대 기독교 안에서 많은 사역자들, 성도라 일컫는 자들이 죄를 물 마시듯 마시며, 기복신앙, 이 땅 위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신앙으로 복음을 변질시켜 가르치고 행한 결과로, 작금의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책임을 잘못 가고 있는 소수의 몇몇 대형교회 지도자들에게만 전가하려 하고 자신은 이에서 제외되고 의로운 자라 착각하는 태도를 일관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죄는 숨겨지기를 기뻐하면서 다른 사람의 약점은 끝까지 들추어내는 것이 義라고 한다.

과연 주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까?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된 한 형제. 자매, 신령한 의미로는 한 몸의 지체들이다. 각 지체가 힘을 합쳐 하나님의 지상교회를 세워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 연대적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말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거나 나만 의롭다고 생각하는 그런 바리새파 닮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를 정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켜 떠난 생활, 매일 매 순간을 그분 앞에서 살아나가는 사람들이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각자 개개인이 그분 앞에서 사는 것만이 문제 해결(solution)을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열쇠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내가 구원받는 것은 나의 행위나 내 의지와 상관관계 있는 것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주님을 입술만으로가 아닌 가슴과 행동으로 뜨겁게 사랑하는 자가 됨을 보여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서 그분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 그분을 십자가에 현저히 두 번 못박는 일을 계속하겠다 고집 할 수 없을 것이다. 입으로만 사랑하는 것은 부족한 인간인 우리도 싫어한다. 하물며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시는 그분 앞에서 내 사랑을 어찌 속일 수 있다는 것일까……그런고로 우리는 매일 매 순간을 그분 앞에서 그분의 뜻을 받들며 진심되게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 자신의 하나 뿐인 목숨까지 내어놓을 만한 마음자세로 준비된 사람만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 35-38) 



USA 아멘넷/ 별똥별/ 최송연의 신앙칼럼

[출애굽기 32:30-35]

금송아지를 빻아 가루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마시우고, 레위지파로 하여금 인정사정없이 형제들과 친척들 3,000명을 쳐 죽이게 한 다음날 모세는 다시 산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이 백성이 큰 죄를 범했습니다.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습니다. 간구하오니 용서하시옵소서. 그렇게 아니 하시려거든 차라리 저의 이름을 주의 기록한 책에서 지워주십시오.”
목숨을 건 결사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까?
레위인들이 형제들을 3,000명이나 쳐죽였으니 이만하면 진노를 푸시라고 말씀드렸다고 진노를 푸셨습니까?
아닙니다.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으로 섬긴 것은 단순한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짓밟는 것입니다.
인간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인간에게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독입니다.
누가 당신을 보고 개라 하거나 돼지라 하면 좋겠습니까?
서양이나 중동지방에서 상대를 모독하면 죽음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명예 때문에 결투를 했습니다.
아론은 각도로 금을 조각하여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놓고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그 앞에 제물을 드리고 먹고 마시고 춤추었습니다. 하나님을 한 마리 짐승으로 만들어버린 셈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도 오해든 무지든 고의든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 많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오해하여 예수님을 미가엘 천사라고 믿는 여호와의 증인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천사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짐승이라 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구세주, 예수라거나 하나님이라고 하는 정신병자도 있습니다.
무슨 증거장막성전인지를 군포에 세워놓고 자신이 보혜사라고 하면서 제멋대로 영생과 새하늘 새땅을 약속하는 사기꾼도 있습니다.
송아지 자리에 자기가 기어 올라가 하나님 행세를 하는 겁니다.
꼭 하나님만 믿어야 하나? 아무거나 믿으면 된다는 종교다원주의자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상 만드는 짓들입니다.
아예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더 많습니다.
이들은 다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들입니다.
그래도 아무 일 일어나지 않으니까 이 세상은 날이 갈수록 더 악해져 갑니다.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뛰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까지나 용서하고 참으실까요?
아닙니다. 마지막 날, 심판의 날, 하나님은 땅을 뒤집으시고 하늘을 찢으시며 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 그 날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무서운 진노로부터 산이 무너져 자신을 가려달라고 울부짖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범한 하나님 모욕죄는 해결방법이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다 말씀하였습니다(히 10:26-7).

지금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체험하였고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며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을 모욕한 것입니다. 어찌 용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모욕한 죄가 모세의 기도로 해결될 리가 없었습니다.
모세가 자기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애걸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3,000명을 쳐 죽였다고 진노를 풀 일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만 내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2장 35절을 보니 그 날 재앙으로 백성들을 또 치셨습니다.
되먹지 않는 모세의 기도가 오히려 더욱 화를 불러온 셈입니다.
하나님은 그토록 진노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의 죄를 사해 주시지 않으시려거든 자신의 이름을 지워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버리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으신다면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 달라고 기도하였는데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다 쏟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사해주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생명을 버리심이 헛되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던 하나님은 아들의 속죄제사를 받고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자기 몸을 드린 예수님의 속죄제사를 하나님께서 모세의 돼먹지 않은 기도처럼 여기셨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절대로 부활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기도와 죽으심은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으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 인류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그것이 하나님이 인류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 증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거부하고 계속 하나님을 모독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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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사랑과 포용의 종교다!"


이 명제 안에

진리적 기준에 의한 부연설명이 없으면,

이 명제만큼 사악한 명제도 없다.


특히나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

사단의 미혹이 극에 달한 이 시대라면 더더욱...


이 명제로 인해

이 시대에 맺어지는 열매는 무엇인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고,

그들과 연합해 평화를 이뤄야 한다는

주장이 난무하게 되고,

결국 WCC는 사랑과 평화의 연합체라는

미혹의 알을 깐다.


김정은도 사랑해야 하고,

그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는...

미혹의 알을 깐다.


동성애자를 사랑으로 품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성정체성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인정할 건 인정해줘야 한다는...

미혹의 알을 깐다.


미혹이 난무하는 이 때,

거짓이 거룩한 모양을 가장하고 있다면,


그 누구보다 

거룩한 모양으로 가장한 껍데기를 꿰뚫고

내면의 본질을 영적으로 

투시해 볼 수 있어야 하는게,

바로 목회자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이다.


하지만 지금 대다수의 교회들은, 

이런 영적 투시를 전혀 하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나 있는 그 모양에 혹해서

미혹된 흐름에 다 휩쓸려 가버린다.


마지막 때 교회들에 있어서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다고 본다.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채,

거짓된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으면서도,

전혀 자각이 되지 않으니,

아주 당연하게 스스로 선줄로 생각하며,

당당히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이름 부르며,

종교행위에 열심을 다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는 게,


구약은 하나님의 엄중한 모습,

즉 심판과 징계를 내리시는 

무서운 공의의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진다면,


신약은 은혜와 용서, 사랑과 긍휼이 

넘치는 그런 사랑의 하나님만 그려지는,


그런 관념속에 갇혀있는 경우를 본다.


하지만 구약 못지않게 신약 역시,

우리가 인지하지 않아서 그렇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표적으로,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그분의 뜻대로 행해야 천국에 들어가는데,

아무리 기적을 행하고, 외적으로

큰 일을 많이 해도

실상 주님과 상관없는 자들을

가차없이 내치는 엄중한 모습들...

(마 7:21-23)


또한 하나님의 두려움을 강조하면서,


눈이 너로 죄짓게 하면 눈을 빼버리고,

손과 발이 너로 죄짓게 하면 다 찍어내버리고,

지옥에 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시면서 

몸과 영혼까지 지옥에 보낼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살벌한 공의의 말씀들... 

(막 9:43-47)


또 열처녀 비유 가운데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서

결국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구절...

(마 25:1-13)


혼인잔치에 초대됐는데,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다가 

손발이 묶여 바깥으로 내던져지는 구절...

(마 22:11-14)


이 모두 다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구절들임에도,


나에겐 적용되지 않을거라 생각하며

터부시해버린다.


교회안에서는...

사랑과 은혜, 축복을 뒷받침하는

그런 말씀들만 요리조리 뽑아내서

한주한주 지나도 계속 메아리처럼

같은 패턴으로 울려진다.


목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편향적인 메시지만 전하게 되니,

메시지의 극단적 불균형으로 인해,

개인적 차원의 영적 영역에 있어서도

교인들이 죄에 대한 인식 자체를 못하는

회개 불감증에 빠지게 만든다.


또 교회밖을 나가

세상 가운데 살아갈 때에도,

세상의 거짓된 흐름을 전혀 분별하지 못하고,

거룩한 모양에 혹해 그 거짓에 동조하고

그런 흐름을 쉽게 따라가 버리게 된다.


말세에는 목자를 잘 만나야 하는데,

목자를 잘못 만나서 

잘못된 길로 나아가다가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면,

그 책임은 누가 지는가?


하나님께서 목자에게도

그 책임을 반드시 물으시지만,


본질적인 책임은

안타깝게도 그 목자를 믿고 따라간 

본인 스스로가 질 수밖에 없다.


마지막 때, 주님오심이 가까울수록,

우리에게는 다른 어떤 키워드보다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 회개, 심판 등

이런 영적 키워드를 내면의 중심에 두고 살아야 한다.


왜 계시록에서는 초반부터 

일곱교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 중 단 두곳을 제외하곤,

나머지 교회들에겐 

회개치 않으면 토하여 내친다는

엄중한 심판의 경고를 하셨을까?


잊지 말자.

구약보다 더 무서운 신약의 위 말씀들은

우리에게도 해당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글: 엘샤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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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다음은 얼마 전 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사후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주장의 유력한 근거로 알려진 임사체험(臨死體驗·Near Death Experience)이 사실은 꿈의 일종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과학뉴스 사이트인 라이브 사이언스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유체이탈 체험 연구센터(Out-Of-Body Experience Research Center)’ 연구 결과를 인용, ‘임사체험은 자각몽(自覺夢·Lucid Dreaming)의 일종’이라고 지난 16일 보도했다. 영혼 비슷한 것이 육체를 벗어나(유체이탈) 터널을 통과한 뒤 밝은 빛을 향해 날아가는 자각몽은 스스로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꾸는 꿈으로,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꿈의 내용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으며 현실처럼 생생한 데다 나중에도 또렷이 기억할 수 있다. 이하생략”

‘사람이 죽으면 사후세계가 있는가, 과연 천국과 지옥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인간의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얼마 전 딸 이민아 목사를 먼저 보낸 이어령 박사의 기사가 났지만 이어령 박사 또한 이 문제 앞에서 깊이 고뇌하였을 것입니다. 저도 양로원에서 일하면서 늙고 병들어 치매증세를 보이며 쇠약해져가는 노인들을 보면서 과연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 곧 물질세계에 속하여 살아가는 영적존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죽음의 경계를 넘어 이 땅, 곧 물질세계의 영역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주님은 죄와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 하십니다. 우리가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고 묻는 도마의 질문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라고,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고 간단히 말씀하지 않으시고 ‘진리’를 가운데 넣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진리요 사실인가입니다. 진리가 아니라면 길도 생명도 아버지의 집도 모두 허탕이요 거짓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신앙여정도 따지고 보면 진리의 문제요 사실의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 믿음이 사실과 진리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라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바와 같이 믿음은 헛것이요, 부활도 없고, 천국과 지옥도 없고 우리가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진리가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진리 위에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싸움은 진리 싸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와 눈에 보이는 이 현실세계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세상적 판단의 손가락질과 과학과 지식의 안개 속에서 증거도 없고 지식도 없는 죽음의 너머를 믿고 나아가는 믿음의 씨름을 일평생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 하였는지요? 평생 예수 믿다가도 막상 죽음 앞에서는 “죽어봐야 알지”라는 불신앙으로 무너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리의 편에 서는 것은 그러나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택한 자만이 진리의 편에 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낳으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요1:13). 빌라도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재판과정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인도 위험인물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대인들이 민란을 일으킬까봐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들었으면서도, “진리가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물었으면서도,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진리 편에 서지는 못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시고 천국과 지옥이 참으로 있다는 것을 믿었다면 빌라도는 민란이 일어나는 한이 있어도, 설사 죽는 한이 있어도 진리 편에 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현실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이 기록을 보면서 이미 예정된 바에 따라 빌라도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과 진리에 속한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는 사실에 다시금 두려움과 아울러 만세 전에 나를 택하시고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를 새롭게 할 뿐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를 내가 믿을 수 있다는 것, 영원한 생명, 구원을 받았다는 것, 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서 내가 진리에 속하였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기적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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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사5:4)”
 
우리는 신앙생활 가운데 종종 “신앙이 좋다, 나쁘다” “믿음이 좋다, 나쁘다”라는 표현을 큰 주의 없이 사용하기도 한다. 가량 ‘주일날 예배 참석을 빠지지 않고 한다’던가, ‘헌금을 잘 낸다’던가, ‘교회내 봉사 활동에도 열심히 있다’던가 하면, 흔히들 “신앙 좋고” “믿음이 좋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반대로 그렇지 않을 때는 “신앙이 나쁘다” “믿음이 없다”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또 자신에게는 관대하지만 상대의 신앙을 얘기할 땐 쉽게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는가? ‘좋다’ ‘나쁘다’를 말하기 이전에 무엇보다 성경을 대하는 자신의 중심이 어떠한지 살피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할 것이다.
 
우리는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와 현재의 신앙상태가 꼭 같을 수는 없다. 또한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수시로 자신의 신앙상태가 어떠한지, 신앙생활은 바르게 잘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진단해 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크리스천의 신앙상태를 다섯 가지 유형으로 정리한 것이다. 과연 현재 나의 신앙상태는 아래의 유형에 해당하는 것들은 없는지 스스로 반성하고 견책한다면 앞으로의 신앙생활에 큰 유익이 있지 않을까. <편집자주>
 
 바리새파적 신앙(눅18: 11-12)
"나는 떳떳한 의인…율법을 하나님보다 중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같은 부류가 오늘날에도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의외로 교회에서 이들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누구보다 신앙이 좋아 보인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어느 집사, 장로를 떠올리기 이전에 자신을 스스로 점검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율법을 생명처럼 여기지는 않는가. 율법을 지키면 살고, 지키지 않으면 죽는 것으로 착각하지는 않는가. 나는 율법을 잘 지키고 있으니 죄가 없고, 스스로 판단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의인이라고 여기지는 않는가. 한마디로 바리새파적 신앙은 율법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여긴다고 하겠다. 
 
 기복주의적 신앙(행8:18-19)
"외형적인 복 중시…복 받기 위해 예수믿어"


솔직히 지금까지의 한국교회는 좋은 신앙의 기준을 눈에 보여지는 ‘외형적인 복’에 초점을 둔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상품 가치가 없는 들포도와 같은 무늬만 성도인 크리스천들이 대량 양산되어진 것은 아닐까. 이 유형은 ‘복’에 대한 개념을 잘못 배운 것인지, 아니면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 하나님을 믿으면 복 받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물질의 복을 받지 못하면 신앙의 실패자로 보고, 물질이 없으면 예수를 잘못 믿어 그렇게 되었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결국 복 받기 위해 예수를 믿으며, 물질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우를 범한다.
 
■ 추상적 신앙(욥42:5)
"정말 하나님 계실까…안 믿자니 손해같고 믿자니 속는 느낌"

 
실재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하나님을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믿음이다. 즉 “하나님이 진짜로 계실까?” “천국과 지옥은 실재 존재하는 걸까?” “성경은 정말 정확무호한가?” 반신반의하며, 막연한 생각으로 믿는 신앙생활이라 하겠다. 이런 신앙은 성경도 확실히 믿지 못하고 “어떤 내용들은 교훈이 되라고 꾸며낸 이야기 일거야”하는 식으로 늘 미적지근할 수밖에 없다. 안 믿자니 손해 보는 것 같고, 믿자니 속는 것 같은 어정쩡한 유형으로 믿음이 자랄 리가 만무하다.  
 
 자기중심적 신앙(롬2:1)
"나는 부족함 없어"…영적상태는 '가뭄'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유형이라 하겠다. 자기만 옳고 완전하다고 하는 이기적인 신앙으로 영적상태가 메마르기 쉬울 수 있다. 내 의와 내 주장과 내 뜻이 강한 스타일이기 때문에 상대는 틀렸다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정도가 심하면 자신의 부족성을 절대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온전함을 주장하는 유형이랄까. 하나님이 계실 자리에 자신이 대신 주인이 되어있지는 않은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미신적 신앙(사1:11-12)
"한인에게 많은 유형…지성이면 감천일터"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인들에게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유형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으로 “이렇게 까지 하는데 하나님이 안 들어 주실까”하는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부류. 덮어놓고 오래하고 많이 하면 들어주시는 걸로 착각한다. 이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뒤로 하고 내 열심으로 잘 받들고 공을 들이면 복을 받는다는 신앙의 타입이다. 잘못하면 안 되니까 잘해야 된다는 자신의 의가 하나님 말씀보다 앞선다고 진단된다면,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먼저 중심을 바로 세우는 것이 순서이지 않을까.

 

출처: 크리스챤 투데이 

 

 

송금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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